인간론 2 05부천 강의 05.3.14일 이근호목사
지난 강의를 요약해 드리고 오늘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조직신학 가운데 인간론을 했습니다. 지난 강의를 1이라고 하면 오늘은 2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인간론을 시작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를 창세기 1장에서 나오는 인간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을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창세기 3장에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생각할 것인가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의 인간론과 창세기 3장에서의 인간론이 완전히 다르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으로 인간론을 정립하면 창세기 1장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의욕이 강한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그 때가 좋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하셨고 그래서 살기에도 좋았는데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가 그 상태로 돌아가야 할 텐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우리가 창세기 1장의 그 순수한 지고지순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하는 염원이 강하지요. 이것을 제가 회복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회복 신앙, 회복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회복에 중점을 두고 신학을 펼치는 대표적인 계파가 통일교, 지방교회 워치만니-위트니스와 조금 다릅니다만 워치만니에서 나왔다고 보고, 이런 지방교회, 이런 쪽은 회복하는데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중심의 개혁주의에서도 이런 경향을 많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회복신앙이 중심이 되고 있기에 지방교회나 개혁주의가 논쟁은 하고 있지만 그 끝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회복이 된다고 보기에 그렇습니다.
개혁주의에서 나오는 성경신학이 있는데, 신학은 대부분 둘로 나누는데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입니다. 특히 개혁주의에서 나오는 성경신학은 회복 주의적 사고방식이 굉장히 강렬하여서 성경신학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등장, 하나님 나라의 출현으로 봅니다. 그 중심은 임마누엘입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이 성전과 함께 계시다가 지금은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으니, 교회 안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이것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이 하나의 원형으로서 아르케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해야 한다는 원형으로서 에덴동산이 있었고 그 에덴동산에서부터 선악과를 따먹어 이탈하였기에, 이탈하였다는 것은 본래의 자리가 있다는 의미이고, 그 본래의 자리로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부터 내려주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고 보고 신학을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 신학을 전개한 것입니다.
도널드 거스리와 계약신학과 그리스도라는 책을 지은 팔머 로버슨이라는 사람이 대표적인 사람이고,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딱딱한 조직신학에서 벗어나서 성경신학적으로 성경 전체를 파노라마처럼 전체의 틀을 잡아보려고 하였습니다. 그 핵심사상으로 등장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조직신학은 하나의 틀이고 그 안에 알맹이는 하나님의 나라 신학으로 채우고자 한 것입니다.
조직신학의 선을 벗어나면 이단이 되니, 교회 역사를 통해서 이 선을 넘어서면 이단이 되니 이 경계선을 넘어가지 말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경계선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 하에서, 사람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다르지만 그러나 이정도의 선에서는 머물러야 한다는 교리와 규칙과 조례로서 주어진 것이 조직신학이라는 것입니다. 이 조직신학에서 신앙고백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교인이냐 아니냐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신앙고백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신앙고백서는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만 나중에는 이 고백서가 한 국가의 정체성이 되는 것입니다. 한 신앙 공동체만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가 한 신앙 공동체가 되어 국가가 교회가 되고 교회가 곧 국가가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복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회복신학의 제일 중추가 되는 창세기 1:28절의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언명에 이제는 제대로 수종들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이제는 마귀를 이기고 죄를 이겨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다스리고 정복하고 차지하는 것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교회로 정립하는 것이 이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이 있겠느냐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쭉 나왔습니다.
과거에서 인간론이 출발하여 모이면 일반 학문에서는 사회론이 되지만, 교회에서는 교회론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론에서 교회론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 인간은 괜찮다는 것에서 머무르면 안 되고 그 인간들도 괜찮다는 쪽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 사회에서 말하는 것은 개인 개인은 괜찮은데 둘 셋 모여 놓으면 왜 그 모양 그 꼴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신앙으로 극복해서 괜찮은 인간들이 모였는데, 괜찮은 인간들 모인데도 괜찮은 교회더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곳이 되기 위하여 신앙고백이나 조직신학이나 교리들이 받침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함께 하실만한 교회가 된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로 본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정말 본 받을 만한 섭리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론에서 교회론을 끄집어 낼 때에 주체문제가 등장합니다. 인간이라고 할 때에 내가 어떤 인간이냐고 묻는 것은, 흔히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말한다고 넓게 말하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은 신앙고백서에 거의 다 나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세상적인 철학이나 논리로 말하게 되면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정답을 밝혀줄 수 있는 유일한 바탕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인 말씀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상당히 미묘한 이야기가 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논할 때에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면서 먼저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그게 무어냐 하면 인간의 철학이나 이성이나 논리나 감정이나 의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안 되는가 하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파악한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인 성경이 무엇 때문에 주어 졌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답변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답변이 무어냐 하면, 왜 인간의 이성이나 철학이나 논리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모르느냐고 물을 때에 이러한 질문은 이러한 문제가 있다고 답변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 성경이 있으니 성경이 최고이지 이러한 것들이 무어냐는 것입니다. 옆에 큰 어른이신 계시가 있는데 이 성경을 제쳐두고 인간이 무엇이냐를 찾는다는 것은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모독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통하여서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인간이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에, 여기서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상대방이 단번에 말하는 것이 그러면 하늘에 출판사가 있어서 완전한 책을 만들어서 하늘에서 툭 떨어뜨려서 그것을 보고서 인간이 이렇구나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개혁주의 신학이나 보수적인 입장에서의 답변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물으면 그것은 유기적 영감설이라고 답변을 합니다. 유기적 영감설이 무언데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배타하시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정서 삶 역사 환경을 버리지 않고 그런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담기는 형식으로 성경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만히 있다가 욕을 얻어먹은 철학과 이성과 논리를 말하던 사람들은 따지고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행동들을 통해서 성경을 만드신다면 성경의 구성요소에는 인간의 요소가 포함이 된 것이 성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울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가 거울 앞에 섰다면 이것은 별 문제가 없습니다. 거울은 사물을 그대로 반사해 줄 뿐입니다. 그런데 거울을 치워버리고 성경에 내가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인간이 등장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가 등장하여 내 말이 성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보는 자가 말하기를 너는 무언데? 너는 별 인간이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울 같으면, 백설 공주에 나오는 거울 같으면 거울에게 물어보면 답을 하겠지만 성경은 그런 거울이 아니잖아요! 성경은 사람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보자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내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하면, 듣는 사람이 너는 인간 아닌가? 너나 나나 똑 같은 인간인데 너만 계시 받고 나는 받지 못하나? 너 무엇이 잘 났다고 너만 계시 받은 자가 되고 나는 너 앞에 꿇어앉아 계시를 받아야 될 입장이 되는가? 당신이 나보다 우월하다는 그 근거를 대어보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라는 인간을 통해서 말씀 하실 때에 그 당시 계시 받는 이사야라는 인간은 독특한 인간이 아니고 인간군, 인간이라는 집단, 인간이라는 무리 속에 속한 인간이라는 그 인간과 오늘 이사야의 말을 듣고 있는 우리가 같으냐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합 측에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통합 측하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과의 계시가 어떻게 다른가를 보세요. 통합측이나 감리교나 신 정통주의에서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지 않습니다. 무엇을 계시로 보는가 하면 예수님을 계시로 봅니다. 성경의 하나님의 계시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하는 논리에 의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신을 받았다면 이사야는 어디에 속한 것입니까? 이사야나 우리나 같은 인간군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시는 어디에서 성립되는가? 합동 측은 성경책이 계시입니다. 고신측이나 현재 전통적인 보수 개혁적인 곳에서는 성경책이 계시입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비디오로 찍어 놓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다 합하면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아닙니까? 합동 측에서는 그것은 계시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합 측이나 감리교에서는 그것은 계시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신 에서도, 왜 그렇게 밖에 주장할 수밖에 없는가? 합동 측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도 성경 자체에서 인증 받는가를 따져 봅시다.
이사야도 우리하고 동일한 죄인입니다. 죄인인 이사야 본인이-우리는 떨어지고, 이사야를 우리의 대표로 보면-하나님의 계시를 어디서 받습니까? 위에서 하나님의 신이 임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이사야가 하나님의 신이 전하여준 것을 계시로 보겠느냐? 그것을 받고 감동을 받는 나까지도 계시로 보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구분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였을 때에 이것을 포함한 전체가 계시냐? 아니면 이사야 빼놓고 이사야에게 새롭게 내려주신 것만 계시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사야 자기 빼놓고, 이사야에게 새롭게 내려주신 것만 계시라면 이것은 완전히 외부에서만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시 속에서는 인간 내부적인 것이 일체 포함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히 타력구원이지요! 계시란 인간의 내부에서 생성되거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외부에서 주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논조를 그대로 이어가면 계시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계시에 포함되면 안 됩니다. 마리아도 포함 되면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위에서 찾아오신 분이시기에 예수님이 계시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이 감정까지 포함해서 이것까지 계시라면, 오늘날 우리가 은혜 받고 감사하는 이것도 어디에 포함이 되어야 합니까? 이것도 계시에 포함 되어야 마땅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통합 측이나 신 정통주의나 자유주의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폴 틸리히입니다. 마르틴 부버라는 유대인 신학자도 그렇게 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하나님께서 인격적이라는 말은 어떤 다른 인격적인 인간과 관계가 성사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부르시고 아브라함은 나의 친구라는 것은 인격적이라는 것입니다. 인격 대 인격의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어보라는 식이 아니라 인격 대 인격의 관계가 성사되기에 하나님의 계시에는 반드시 인격적인 요소가 들어 있어야 되지 단지 책이라는, 종이라는 물질로 되어있는 이런 사물은 하나님의 계시의 전부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라는 범위가 성경책 보다 넓다는 것입니다. 성경책은 사물이고 그 성경책을 계시로 만들려면 인격화가 이루어 질 때 계시라는 것입니다. 제가 책을 썼다고 합시다. 이 책이 계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이 이렇다고 해서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이 되어야 계시이지 책을 던져놓고 나는 몰라 네가 알아서 성경을 보라고 하는 그런 계시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책인데, 네가 육적이기에 이해를 못하니 내가 영을 통해서 성경책을 알게 해줄게! 성경책이라는 것은 계시를 전달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책이 계시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칼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이 임할 때라야 만이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계시화가 되는 것입니다. 인격 대 인격의 만남으로,,,,,,,
지금 주제가 인간은 무엇이냐 할 때에, 내가 참 인간인줄 어떻게 아느냐고 할 때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이냐고 할 때 예수그리스도인가 성경책인가로 둘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계시가 성경책이라고 할 때에 그 쪽에서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성경이 계시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시의 주인공이고 다만 예수님이 자기들 앞에 등장할 때에 성경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전달하시지 않으시기에 예수님께서 사용하실 때만 계시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반교인들이 들어보면 이것이나 저것이나 그게 그건데 무엇이 그게 중요하고 차이가 나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의 차이냐 하면,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밭을 한 열 마지기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나는 농사꾼입니다. 그러면100% 정답입니다. 만약 우리 삼촌이 있다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너의 삼촌이지!
나는요?
당연히 너는 나의 조카이지 삼촌이나 조카는 명백하게 규정이 됩니다.
일반 목사님들이 성경책을 가지고 믿으면 성도라고 할 때에, 10명이면 10명, 100명이면 100명 전부다 믿는데 그 믿는 내용을 한번 발표해보세요라고 하면 세상에! 어떻게 다 다른지! 그런데 그런 다름이란 차이이지요! 그 차이 나는 것을 목사님들이 서열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그것이 가능하지요! 한 문제 5점씩 20문제의 수학시험을 치르면 분명히 100점이 있고 95점이 있고 50점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서열화가 가능합니다. 한개 틀리면 95점, 두개 틀리면 90점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고서 믿습니까? 하면 다 믿는다고 하는데 분명히 차이가 나니 어느 사람을 중심으로 세워서 이 사람이 모델이고 다른 사람은 엉터리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할 수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교회 들어 왔지만 이 사람이 교회 안에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 아닌지, 천국 가는지 지옥 가는지, 누가 정하는 것입니까? 그것이야 목사가 정하지요! 천만의 말씀, 일반 교인들이 볼 때에는 목사가 믿음이 더 없다고 보는데요! 누가 정하느냐? 놀랍게도 각자 각자가 따로 다 정하는 것입니다.
10명이 둘러앉았다면 각자 각자가 다 당회장입니다. 형식적으로 있든 말든, 우리교회 목사님 설교 잘해서 존경합니다. 입에 발린 그런 말 한다고 해서 내 신앙을 전적으로 당신에게 맡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존경한다는 말은 내 신앙과 목사님의 신앙 중 약간의 공통점을 발견했다는 그런 뜻입니다.
당신은 신앙이 좋고 나는 당신 밑에 있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에게 아부하는 것도 김정일이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난데 지금 권력을 김정일이 쥐고 있으니 아부를 하는 것이지, 집안에서 애가 엄마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가 아직도 자기에게 용돈주고 없으면 외롭고 하는 유용성에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습니다. 교인들이 목사를 존경한다는 것은 아직도 그 목사가 다른 목사보다 유용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목사는 집사에게 충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집사가 목사에게 충성한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사실은 다 주고받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잘해준다는 조건하에 보이지 않는 계약관계, 즉 묵계가 다 형성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신앙문제에 있어서는 객관적인 점수제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농부입니까?
예 농부입니다. 이것은 되는데
당신은 신앙인입니까?
예
믿습니까?
믿습니다.
내가 보니 당신은 안 믿는데요?
내가 믿는다면 믿는 것이지 무슨 말이 많으냐?
신앙은 이런 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신앙고백서가 나온 것입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믿어주어야 우리 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말이 안 되는가 하면, 어느 교회의 신앙고백서가 있다고 합시다. 아버지가 장로고 아들이 중 고등부 학생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철이야, 이것이 우리교회에서 정한 신앙고백서래 이것을 안 믿으면 교회에서 나가래
예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시고, 십자가 외에는 다른 것으로 구원받을 수가 없고, 구약의 모든 율법은 다 모형이기에 지킬 필요가 없고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야, 하면서 이것저것을 신앙고백서로 정하였는데 이것을 믿지 아니하면 이단으로 간주하기로 했어! 이것을 믿느냐?
예, 믿습니다.
이것은 아버지 자기 고백이지, 아이들은 지금 MP3로 서태지 노래듣는다고 바쁜 아이인데 아버지가 와 가지고 우리교회 신앙고백서라고 하면, 다 말하기도 전에 알겠다고 믿는다고 말 하는 것은 귀찮아서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물어보면 아버지가 장로라서 체면상 믿는다고 말하지 말고 진심으로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아들이 진심이라고 하지만 나중에 커서 사업하다가 부도나면 이런 것을 믿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도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게 하니 예수를 버리겠다는 그런 내색을 피울 것이 분명하기에, 어떤 인간을 찾아가서 당신은 거듭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평생토록 보장해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 불가능한가하면 언어의 한계입니다.
옛날의 성경해석은 교리적입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교인으로 간주해준다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쇄술이 발달하여 성경이 보급되면서, 각자 각자가 성경을 보는 순간부터 해석학이 교리를 위한 해석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정당화하는 해석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해석학이라는 말이 최초로 나온 것이 슐라이에르마허입니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성경 해석에 대하여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언어란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보았던 것이 슐라이에르마허에 와서는 언어가 단지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러한 객관성이 깨어지고 언어자체가 의미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교리에서 벗어나서, 지금 내가 나의 주관으로 성경책을 볼 때에 남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나만의 은혜, 나만이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가질 수 있는 깊은 의미가 성경책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습니까? 이것이 옳다 그러다가 아니라 이런 것을 공부를 해야 인간이라는 것이 그냥 신앙고백서나 교리서를 같이 동의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나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그러한 엄청난 착각을 쇠뭉치로 뒤통수를 때려가지고 그것은 착각일 뿐이라는 것을 깨우치는 놀라운 발견을 한 것입니다.
어떤 신앙고백서를 동의하고, 사도신경을 같이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다시 오신다고 같이 고백한다고 해서 그것을 같은 형제라고 간주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성경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슐라이에르마허는 인간의 핵심은 의지나 이성이 아니라 성서에 대한 감정, 느낌, 본인만의 독특한, 남들에게 배분할 수 없는 성스러운 느낌, 성령을 통하여 그 사람에게만 배정하는 독특한 느낌이 있기에 그것은 다른데서 침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해석은 그 사람만의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러므로 계시란 성경책이 아니라 성령님이 성경책을 하나의 수단으로 삼아서 남들이 모르는 새로운 은혜를 주실 때에 결과적으로 나온 그 결과물이 하나님의 계시로 구원하는 계시의 능력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아주 쇼킹하면서도 전혀 반박을 틈을 주지 않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후대신학자들이 객관과 주관의 차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객관 다시 말해서 교리문답 신앙고백서등이 주류였다면, 슐라이에르마허에 이후에는 객관에서 주관적으로 성경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의 주관적인 신앙을 가지고 남을 함부로 정죄할 수 있는 바탕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문장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구절을 두고서도 그때 그 간수가 고백한 것과 오늘날 어느 목사나 집사나 고백한 것이 전부다 똑같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르면 안 되지 성령은 하나 되어야 하는데, 에베소서 4장에서 하나 되기를 힘쓰라고 하였는데, 하나로 묶어야 교회이지라고 하지만, 그것이 말은 되는데 방법을 제시해보라고 하면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성립이 안 되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 슐라이에르마허입니다.
하나 되어야지는 누구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쥐들이 회의를 해서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아서 방울 소리가 나면 도망가고자 한 것은 다 동의를 하였는데 누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해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 슐라이에르마허
슐라이에르마허는 근대 해석학의 아버지로 불려진다. 해석학의 보편적인 범위를 파악했고 그 결과로 얻은 이해에 대한 철학적 이론을 체계화시켰다. 해석학을 로마 교회와 개신교의 정통주의 해석학에서 해방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슐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의 공헌을 말하자면, 해석학을 이해의 학문, 이해의 기술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저자와 해석자의 공통점이 존재함을 말함으로써 체험적인 면을 강조했다. 해석자가 자기 자신을 저자의 마음속에 놓음으로서 저서 구성의 내적 기원을 이해하게 하였고, 이해의 개념을 삶의 관계로부터 파악하였다. 19세기 그리스도교 사상을 대표할 수 있는 자유주의 신학에는 세 가지 유형의 흐름이 있었다. 그 중에 낭만주의 영향과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슐라이에르마허를 대표로 하여 발전한 '내재적 초월경험'의 신학운동이 있다. 독일 개신교 신학자인 슐라이에르마허는 철학의 냉랭한 합리주의에 반발하여 감정적 기초 위에서 기독교를 옹호하고자 하였다. -네이버 검색
슐라이에르마허라는 신학자 다음에 나온 사람이 딜타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언어의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언어란 표현이고 그것을 아는 것은 이해라고 보았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 사람이 무엇을 하나 첨가를 하였는데 이것이 특종감입니다. 이것을 첨가하고 나이 이런 해석에 대하여 더욱더 반발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어떤 사람이 자기감정과 느낌을 독선적으로 나의 신앙이 옳고 진리라고 해버리면 전부다 교주가 되는 것입니다. 교인 100명되면 100명 다 교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가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역사적으로 판결이 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역사적이란 조금 더 시간을 두고서 지켜보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비슷하게 하나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해의 폭을 개인적인 감정에 두지 말고, 그렇게 되면 너무 주관적이 되기에 그 범위를 넓히는데 역사로 넓히자는 것이 딜타이의 주장입니다. 신혼 초에 무엇이 잘 맞지 않다고 목사님 해어질까요? 라고 하면 좀더 살아보라고 합니다. 좀더 살아보면 처음 초기에 다 그렇게 싸우고 하지만 좀더 살다보면 공통점이 생기고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재미도 있어지고 내 남편이 최고다 하는 말도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좀더 산다는 것이 두 글자로 역사이지요!
만약 어떤 사람이 엉뚱한 소리를 하면 이단이라고 하지요! 이단인데 어떻게 할까요? 쳐들어갈까요? 아니야 그대로 놔두라 시간이 지나면 그 이단이 다 알아서 해체되고 정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난다는 것은, 역사가 흐르면 흐를수록 진리에 가깝게 역사가 흐를 것이라는 역사에 대한 낙관주의가 딜타이의 해석에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국회에서나 노회에서나 다툼이 있을 때에 모든 것이 사필귀정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역사가 흐르면 내가 얼마나 정의로웠는지 그때에 다 드러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지요!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행 5장)
이것이 바로 딜타이의 역사주의입니다. 개인의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법위를 폭을 넓혀서 보편적으로 넓혀보면 오히려 진리 값에 가까운 양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딜타이에 의하여 인류의 역사가 무엇이 됩니까? 역사가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교회사를 역사라 하지 않고 역사신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신학이라고 하니 어떤 뉘앙스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성경만으로 계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도 계시한다는 뉘앙스가 있지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제가 슐라이에르마허 딜타이까지 이야기 했습니다. 이 정도로 이야기 하였으면, 계시는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해석은 개인의 독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과 시간이 흘러가면서 검증된 역사까지 동원되니 진짜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뒤에 나오는 사람들에 의하면 이 두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다음에 등장한 사람이 하이데거입니다.
하이데거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해의 역사성은 딜타이가 주장하였지요! 그렇다면 이해할 때에 그 이해는 누가 하는 것입니까? 내가 이해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앞에 박태선이라는 이단이 있습니다. 내가 이해합니다. 저 박태선이란 자가 역사가 흘러가면 돈만 밝히고 교인들을 바보로 여기고 얼마나 나쁜 짓을 할 것인지 역사가 증명하리라고 기대하는 주체자가 누구입니까?
나잖아요! 나, 그러므로 역사라는 지평을 아무리 넓혀보아도 마지막 진리를 조개 줍듯이 채취하고 뽑아내는 당사자는 누구입니까? 나잖아요! 그러면 역사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나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역사를 이루어가지요! 이곳이 부천이지요! 부천 시민 수십만이 부천시를 이루는 것이지 부천시장이 부천시를 이루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부천시가 이렇게 발전되었다고 나는 보지만 그러나 부천시에서 쫄딱 망한 사람은 나를 보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같은 부천시민이지만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아무리 이해의 지평을 넓혀보아도 마지막 진리라고 판정을 내리는 당사자는 누구입니까? 결국 나라는 자아의식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가 자기 입맛에 맛게 고른 것이지 이것이 어떻게 보편적인 계시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자아가 아니라 자아 밑에 있는 존재입니다. 현존재라는 것입니다. 너 나가 아니라 있음 자체, 있음과 있음, 존재와 존재의 만남, 부딪힘으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만나서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시장에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만나는 사건에서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미라는 것은 나 혼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만나게 해준 또 다른 타인이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미라는 것은 내가 일방적으로 이것이 나의 의미라고 할 수가 없고, 더불어서 사건을 통하여 동조가 되어야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림을 하나 그려보겠습니다. 세상이 있는데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만나서 사건이 터지고, C라는 사람과 D라는 사람이 만나서 사건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의 만남과 뒤의 만남의 사건이 다 다릅니다. 그리고 A라는 사람이 D라는 사람을 만나면 또 다른 사건이고 다른 의미인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성경을 볼 때에 성경이란 사건의 집합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나름대로 내려오는 과거의 기억과 경험들이 있겠지요! 이런 것이 이사야의 역사성이 이지요! 이러한 역사들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모여서 성경이 되었잖아요! 그렇다면 이사야 6장을 읽을 때에 지금 내가 읽고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사건이지요! 그러면 이사야가 그 당시에 하나님을 만난 사건과 다른 의미가 되겠지요!
결국 이 세상에서의 구원의 진리라든지 의미라든지 가치라는 것은 있음과 있음의 부딪힘으로 인하여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앞자리에 앉으면 은혜 받는다는 말이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 중간에 앉아야 은혜 받는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끝에 앉아야 된다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의미란 드디어 다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완전히 다 날아가 버리고 진짜 나는 은혜 받았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건을 만나게 될 때 그 사건이 일어나는 그 사람과의 만나고 함께 어울려서 될 문제이지 누가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가르쳐서는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자아는, 자아라는 것 자체가 없습니다. 자아가 없는 이유는, 딜타이에 의하면 자아란 과거의 역사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나만의 고유한 과거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그 젊은 시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에 앞으로 어떤 사건을 만나면 내 자아상이 변합니다. 앞으로 길을 가다가 무슨 사건을 만나면 지금까지 내 자아상을 뭉개야 하는 것입니다.
자아라는 알맹이는 사건을 만날 때 마다 수시로 다른 것으로 채우기에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하는 내용이 내년에 믿습니다! 하는 내용과 그 다음에 믿습니다와 십년 전의 믿습니다와 다 다른 것입니다. 내부터가 그런데 다른 사람과 맞추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각자 각자가 자기 갈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그런 계시에 준해서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각자 자기 팔 자기가 흔드는 식의 질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이데거와 딜타이와 슐라이에르마허 세 사람을 합친 사람이 바로 가다머입니다. 가다머의 해석이 나오고 그것을 고정적인 텍스트와 연관시켜 말한 사람이 리꾀르라는 사람입니다. 가다머라는 사람은 인간은 지평만 만들지 자아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나의 지평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결이지요! 우물이 있는데 돌멩이를 던지면 퐁당하고 물결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른 돌멩이를 던지면 역시 물결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두 물결이 우연히 마주치는 순간에, 또 다른 물결과 마주치는 그 순간에, 나의 지평과 타인의 지평이 우연히 마주칠 때 여기서 비로서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이고 사건이고 전통이고 전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다머는 어떤 인간도 선 이해가 없는 해석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누구와 대화할 때에 선입감이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입감을 지금까지는 버리라고 해 왔지만 가다머는 그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선 이해가 있어야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 이해, 선입감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옹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선입감은 타인에 의하여 생겨진 것이기에, 이 선입감을 버리고 독자적으로 성경을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눈 감고 아무 곳이나 펼쳐서 읽어본다고 하여도 그 본문을 보는 나만의 지평을 따로 갔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지평이 있기에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혹시 다른 사람이 같이 해석한다고 동의하더라고 그것은 동의가 아닌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동일한 해석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다머의 주장입니다.
현대 모든 개혁주의 해석학은 가다머에서 멈추었습니다. 가다머보다 더 나은 신학자가 개혁주의에서 나온 적이 없습니다. 두 지평이라는 책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 모든 보수주의적인 신학자들이 전부 가다머로 끝나버립니다. 더 이상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지편과 인간의 주관성과 그리고 인간의 현 존재 그 세 가지가 합쳐서 의미가 생성된다는 이것에서 어떻게 다른 아이디어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개혁 주의적 성경신학적 해석학에서 내린 사도바울의 서신에 대한 해석의 결론이 무어냐 하면 사도바울에게는 일관된 해석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전기와 후기가 다 다른데 그때그때 마다 사도 바울이 느낀 개인의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하나의 지평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름대로의 지평과의 만남가운데서 본인만이 느끼는 무엇이 있을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으면 된다는 것이 오늘날의 해석학입니다. - 잠시 쉬겠습니다. 05. 6. 14일 녹취 이장우
인간론 2-2
05. 3월 14일 인간론2-2 이근호목사
첫 번째 시간에 역사로서 모든 것이 마감되면서, 하이데거에 와서는 역사가 아니라 우발적인 사건에 의하여 의미가 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을 이용한 성경학자가 있는데 에벨링 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숭실대학교 김영안씨가 마지막으로 제시한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해석학에서 이 사람이 최고라고 내세운 사람이 에벨링 이라는 사람입니다. 제가 강의한 것이 김영안씨 책에 다 있습니다.
결국 사건이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의 설교와 교인의 만남이 무엇이냐 하면 그 자체를 하나님이 주신 사건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건으로 본다는 것은 목사가 설교했다는 이유 때문에 교인의 영혼을 장악하겠다는 마음은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맡길 문제지 저 사람은 내 설교 잘 들으니 저 사람은 우리교인으로 등록시켜서 자기교인으로 삼고하는 권한은 목사에게 없다는 말입니다.
그 본인이 요청하기를 목사님의 말씀이 은혜로운데 제가 이 교회에 등록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저에게 물을 것이 없이 성도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라고 하면 그것은 성립되는 것이지만 몇 주 우리교회에 왔다고 해서 다른 교회가면 안 되고 우리 교인으로 등록시켜야한다는 그런 것은 하나님의 계시론에 의하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시간에 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론 으로부터 풀었습니다. 이번시간에는 계시론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보아서 그런 계시론이 허용되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계시론으로 볼 때에 결국은 우발적인 사건으로 계시가 생기고 그 사건에서 구원의 의미가 생기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시간에는 성경으로 보아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계시라는 것이 사람을 겨냥해서 하나님 쪽에서 계시하는 것이 계시가 아닙니다. 아까 한 계시론 에서는 그렇게 말합니다. 계시론에서는 신이 있고 그 신은 인격자이고 인간도 인격자이니 인격자끼리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의 계시는 인간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본인이 스스로 자기 일을 나타내시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보는 것입니다. 누구 의식해서 누구를 겨냥해서 누구 들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주니 자기들보고 지키라고 준 것 인줄 알았습니다. 하라는 명령이 있으니 그것은 그 명령을 따를 대상체가 있다는 것이니 하라는 것은 하면 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면 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39절에 보면 이 성경은 누구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입니까? 인간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속에서 일을 벌이시고 계시는 어떤 분, 마지막 때에 들어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고 요한복음 5:39절에서 증거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은 곧 나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을 쉽게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에 스피커가 있습니다. 지금 김 목사님은 스피커 앞에 있습니다. 김 목사님은 스피커가 앞에 있는 것을 몰랐지요? 그러자 김 목사님은 목사님 그것은 나보고 이야기 한 것이지요?
이처럼 누구보고 이야기 한다는 의식이, 신과 인간에게도 이러한 의식의 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 보고 한다는 그 대상의 강조점보다 여기 스피커가 있다는 그 있음에 대한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김 목사님은 여기 스피커가 있다고 내보고 이야기 했잖아! 자꾸만 내가 강조되는 것입니다. 내가 있으니 내보고 여기 스피커 있다고 말한 것이지 내가 없으면 스피커 있다고 말할 필요가 없잖아요! 하나님께서 계시를 받는 쪽이 있어야 계시를 할 맛이 나는 것이지 아무도 없는데 스피커 있다고 이야기 하지는 않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내보고 이야기 한 것이라고 자꾸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를 보고 이야기 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대하여, 누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이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증거입니다.
약속에 대하여 증거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범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 속에는 하나님 저보고 이야기 하였지요 하는 요소는 그 약속 속에 포함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보고 약속하셨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약속 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성자께서 아버지의 뜻을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가만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은 나에게 말씀하신다는 인간들의 세계에서 하나의 비밀인 것입니다. 이 비밀을 가지고 하이데거는 은폐성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의 언어도 은폐적이라서 어떤 말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하이데거가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 세계에서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 세계에서는 신도 있고 인간도 있고, 신도 인격자이고 인간도 인격자이니 말하면 알아듣는다는 이런 세상에서 주님은 은폐되어 하나의 비밀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비밀과 은폐성이 외부적으로 드러날 때에는-이것이 진짜 중요한 것인데-보편화 되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으로 드러납니다. 이 배타성이 언약 공동체,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제사장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배타성입니다. 배타성이란 저리가 너는 우리 편에 안 넣어줘 라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비밀, 은폐성이 들어있는 집단은 배타적으로 들어나면서 자기들끼리는 은혜라는 이야기를 하고, 그 바깥에 있는 이방나라는 저주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저주받기 위하여 있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왜 있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기 위하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방민족들이 들으면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뭐 저런 놈들이 다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은 보편적인 신이고, 모든 피조물을 피조물 되게 하는 공통된 신이지, 어떻게 너희만 구원받고 우리들은 저주받은 자되도록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신이 어디에 있느냐고 할 때에, 이스라엘이 하는 말은 너희가 우리 속에 있는 비밀을 모르고 은폐성을 모르니 너희들은 저주 받아 마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나온 것이고, 이스라엘이 태어나게 된 핵심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면 이스라엘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하고 사라하고 부부입니다. 사라의 태가 살아있을 때에 자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이 들어 사라의 태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태어나는 어떤 자식도 누구의 자식은 아닌 것입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의 자식은 아닌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일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기껏 해낸 일은 이스마엘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어떻든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누가 나오는가 하니 이삭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계통이 아니라 약속의 계통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확인하시기 위하여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는지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오케이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리아 산에서 바치지요!
이삭은 없는데서 생긴 것입니다. 없는데서 생긴 이 원리가 철저하게 이스라엘을 만들어버립니다. 이삭의 아들이 야곱이고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의 바뀌고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어떤 원리만 적용되어야 하고 다른 원리는 적용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죽은 태어서 오직 약속에 의하여서만 없는데서 발생됨으로 말미암아-이것이 중요합니다.-없는데서 발생됨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모든 있음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밀어붙이는 작용을 해야만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납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납득하면 안 됩니다. 납득 된다는 것은 태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태가 죽은 상태에서, 인간에게서 나올 것은 완전히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나오는 것은 약속 때문입니다. 약속에서 약속으로, 약속에서 약속으로, 약속에서 약속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은폐성에서 은폐성, 은폐성에서 은폐성, 은폐성에서 은폐성으로, 다른 말로 하면 배타성에서 배타성, 배타성에서 배타성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3절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이나 육적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아니하고, 즉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아니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구원받고 싶습니다. 무얼 믿을까요? 예수 믿을 까요? 라는 것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것마저 작살이 나야 합니다. 내가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은데 석가나 공자를 믿지 않고 예수 믿으면 됩니까? 라는 사고방식조차도 예수 믿음에 포함되면 안 됩니다.
내가 예수 믿겠다고 할 때에 그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과거에 나의 지평 속에서의 예수입니다. 아까 처음 강의 시간에 이야기 하였지요? 그런 지평이야기 어디에 써 먹겠느냐는 생각을 하셨겠지만 지금 써 먹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예수라는 말을 할 때 나의 지평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평이란 과거에 있었던 선 이해, 선입감인 것입니다.
내가 몸이 아팠을 때, 그냥 장난삼아 예수 이름 불렀더니 병원가지 않고도 병이 나았다면 그 사람 속에 무엇이 각인되겠습니까? 아하! 예수님은 자비가 넘쳐서 내 병을 고쳐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구축되어 있지요! 이것이 자기의 지평 속에 포함이 되지요! 이러한 지평속의 예수가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하면, 이 자체가 배타성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어이 집사님! 내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여 병 나았으니 당신도 해 보시오! 그러면 낫는다고 하면 이것은 배타성이 아니라 융합성입니다. 이것은 보편성입니다. 내가 되니 당신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은 인간군, 인간부류에 속하니, 같은 죄인이고 같은 인간이니 나에게 되는 것은 당신에게도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했더니 되더라는 그 방법만 제시하면 되지요! (여기서 손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림-아마 흥분한 듯) 그게 바로 이방인들의 비 언약적인 요소들입니다. 이것이 흔히 목회 상담학이 되고 목회학이 되고 교회론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시간에 계시론에 대하여 잠시 더 생각해봅니다. 계시론에 의하면 신이 인격자요 인간도 인격자다. 심지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기에 심심해서, 자기 창조의 파트너가 필요해서 그래서 창조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한 것은 심심하니 자기의 창조의 영광을 알아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돌이나 다른 피조물은 인격성이 없어서 자기의 영광을 알아주지 못하니, 하나님의 인격적인 면모를 인간에게 그대로 심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이란 신과 인간의 연결고리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로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면 하나님과의 교류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가능하고 모든 주고 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신학에 대하여, 가다머에 의하면 교회사는 역사라는 지평이지요! 이것을 영향사라는 것입니다. 돌발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신학의 영향들이 계속하여 쌓이고 거기에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쌓여서 나온 것이기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은혜롭게 좋은 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헤겔도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 신과의 교류가 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배타성도 없고, 이삭의 배타성도 없고, 아무 배타성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폴 틸리히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간을 너라고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너라고 부른다는 이 말은 너를 위하여 부른 것이 아니라 나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너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너와 구별될 때에 나 이지요! 너가 없으면 나라는 것이 의미가 없지요! 그러면 틸리히씨 왜 너라는 것이 생겨야 합니까? 너라는 것이 생겨야 너는 나에게서 나왔고 따라서 너의 임무는 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임무가 있다. 그러므로 너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려고 한다. 그것이 신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이다. 나는 너로 인하여 기쁘고, 너는 내가 준 사랑으로 인하여 구원받았으니 기쁘고, 이렇게 하여 온 천하는 너와 나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이 풍요하게 된다는 것이 폴 틸리히의 신학입니다.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대단히 은혜롭습니다. 그래서 나온 노래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아닙니까! 이것은 신자든 불신자든 불교신자든 그 노래만 나오면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교도소 가서 그 노래 부르면 눈물을 흘립니다. 사람들은 모두 당신은 나쁜 놈이야! 깡패야! 라는 소리만 들어왔는데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노래를 들을 때에 눈물을 흘리면서, 그래 나는 그동안 내 가치를 내 스스로 자학했어! 나는 신 앞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데 왜 이걸 몰랐을까!
그런데 그렇게 기타 치며 전도하던 사람은, 그동안 불교 신자라고 교회를 핍박한다고 마귀자식이라며 미워하였는데 이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니,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이구나! 하나님께서 너를 만드신 것은 믿든 안 믿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만드셨구나!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익명적 그리스도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든 인간은 익명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칼 라너의 카토릭 신학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당신은 미움 받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5:18-19절입니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는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미움 받기 위하여 태어났습니다. 세상은 나를 미워한 것처럼 너희를 미워하리라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인자를 부인하지 않는 자에게 나도 부인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시인한 자는 나도 시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까 스피커를 말하였는데, 스피커 여기 있음에 대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스피커 있음에 관심 없고 스피커가 나를 위해서 있지요! 라며 자꾸만 나를 내세우는 것은 인간이 타락하고 난 뒤에, 범죄 하고 난 뒤에 인간에게 붙여진 본심입니다. 성경에서 무슨 소리를 하여도, 십자가을 이야기 하고 복음을 이야기 하여도 다 인격적인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하신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이 빠졌는가 하면,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자식이 없다는 것, 태가 죽었다는 것은 사라가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있으나 마나한, 쓸모없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를 사용하셨다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귀해서가 아니고 그들 속에 담고 있을 장차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가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은 태에서 산 인간이 태어나도록 조치하시는 것입니다. 왜 죽은 태 여야 하는가 하면 죽은 태가 될 때에만 이삭이라는 존재는 나의 소망이나 나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약속에 의해서만 나온 것이 됩니다. 그러면 그 약속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논리를 담고 설교를 해보세요! 목사로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목회 실패는 물론이고 자기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지평-지평이라는 말을 씁시다. 전에는 경험에 의하면 이라는 말을 썼지만 경험이 지평에 포함되기에- 자기 지평에 의하면, 목회 경험에 의하면 교인들이 교회에 오는 것은 어떤 핑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어서 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목회자는 압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 사랑으로 끝입니다. 처음도 예수, 끝도 예수입니다. 당신이 아니고 당신의 가정도 아니고 망해도 예수님의 영광이라면 좋습니다. 라는 설교를 해 버리면, 인간적인 생각에서 남아 있을 교인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이것은 목회 상담학도 성립이 안 되고, 목회학도 성립이 안 되고, 목회도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교인이 있어야 목회를 하지요! 다 가버리고 자기만 남는데 무슨 목회가 되겠습니까?
이러한 무서운 결과가 뻔하게 다 보입니다. 목회한다고 가게차려 놓았는데 자기 가족만 남고 다 떠나버리는 그 무서운 결과를 생각하기조차 싫은, 차라리 그렇게 되느니 요즈음 유행하는 자살, 저는 그것을 사회적인 구조조정이라고 합니다만 직장에서 구조 조정되어 명퇴되듯이, 결국은 목사가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지경까지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염려하는 분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싶습니다. 제가 강의해서 이렇게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진작부터 목회자를 그렇게 쓰시는데, 목회자가 미리 겁을 먹고서 안돼! 나는 그것만은 안돼! 그것만은 막아야 돼, 목회자 본인이 극구 하나님의 뜻을 막아서는 것입니다. 그런 비참한 경우까지는 저는 감당 못하겠습니다. 아직 그만한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 제발 참으세요! 저를 그런 식으로 몰아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사 자신이 겁이 나서 도망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안 들은 것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죄 짓고 나서 누구를 만났습니까? 아담을 만났습니다. 아담의 새끼이거든요! 다윗이 아담의 새끼이지 않습니까? 창세기 3장 이후에 아담의 새끼 친 것이 바로 다윗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자기는 아담과 관계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아담을 만난 것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살해하고 나서는 반갑다 아담아라고 된 것입니다.
다윗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지어낸 개념입니다. 나는 다윗, 나는 이스라엘의 왕, 이런 것은 자기의 지평이고 자기가 지어낸 개념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백성 중에 어떤 부자가 수많은 자기의 양떼를 두고서 가난한 사람의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5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6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삼하 12)
그러자 나단이 바로 그 사람이 당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율법대로 네 배를 갚아주고 그런 자는 죽여야 한다고 판단할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를 다윗의 이름으로 계속 유지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 다윗의 이름이 깨어지고 아담의 이름으로 다시 복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자신의 구원은 내 이름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을 구원받는 다는 의미를, 성령께서 다윗을 아담의 자리에 곧추 세울 때에 그제야 자기 이름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주의 의로만 구원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맙게도 모든 성도에게, 목사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다윗의 자리라는 껍데기를 분쇄하여 버리고 처음에 범죄 한 아담의 자리로 사람들을 몰고 갑니다. 아담은 나와 관계없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아담이고,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아담인 동시에 바로 나라는 것으로 몰아가는 것이 성령께서 일하시는데, 인간은 자기의 조작된 자아상, 주위에서 만들어내는 조작된 자아상, 나는 집사다. 나는 목사다. 라는 자기의 고상한 자아상에 대하여 집착을 하고 있으면, 나는 이만한 목회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환상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집사나 장로나 목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우리교회 장로님과 개척을 시작하면서, 물론 우리 조 장로님이 그럴 분이 아니지만 혹시 또 압니까? 이 목사와 개척을 시작하였는데 이제 손님이 와야 할 텐데, 목사님은 복음만 전한다고, 자기는 천국 간다고 기분 좋아 까불고 있지만 막상 교회 경영하는 것은 누가 합니까? 헌금 받아서 목사 월급주고, 전기세 내고, 점심 해먹는 쌀사고 하는 것을 누가 담당합니까? 장로님이 담당하지요! 목사 자기는 예수님만 있으면 된다고 쉬운 말만 하지만 실제 재정을 담당하는 장로님은 땅 파먹고 장사합니까?
현실문제입니다. 목사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지만 자기는 현실문제입니다. 그 현실 문제가 와 닿을 때 아까 말한 비밀, 배타성, 은폐성, 하나님다운 진리성은 빠져버리고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분명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믿는다고 여겼는데 막상 재정이 적자가 나면 설교시간에 은혜 받는 것은 다 날아 가버리고 돈 문제가 귀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와서 은혜 받을 때는 맞아 나 같은 인간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죽어도 천당 가면 되지 하였는데 막상 집에 오니 딸이 피아노 학원 비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쌀독에 쌀이 떨어지고 하면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십자가 마을의 운영자 손무성 목사님이 기존의 용량으로는 다운이 되고 해서 새 컴퓨터를 마련하여 용량을 늘이고자 후원해달라고 게시판에 글을 올렸더니 3-4일 만에 140만원이 넘게 모아졌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를 이건 돌이 떡이 되었구나! 이제는 예수도 필요 없고 다음에 또 필요하다고 하면 이렇게 하면 하나의 방법론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회 하시는 분들이여 돈이 아쉬울 때는 손무성 목사님 방법대로 하시면 며칠 만에 돈 백만 원이 들어오는 방법론이 되지요! 방법론이 되어 버리면 복음의 은폐성 배타성이 다 날아 가버리고 요령만 잘 터득하면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는 식이 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140만원 정도의 돈으로야 아직 돌이 떡 된 것은 아니고, 적어도 한 6천만 원 정도 되어야 야 기적이다 하겠지요. 그러나 없는 살림에 그것도 기적이라고 하겠지만,,. 앞으로 더 두고 보겠습니다. 계속 이정도만 되면 모르겠지만 만약 더 나오게 되면 앞으로 주여! 가 아니고 회원들이여! 하고 나올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지 앞으로 지켜 볼 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는 우리보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약속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 자기 약속이 무엇인가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입니다. 그기에 동원되기 위하여 출몰해야 될 사람이 바로 인간입니다.
지난 강의부터 지금 강의까지 인간이 무엇인가를 물으신다면, 성경적으로 답변을 하자면 인간이란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구현하기 위하여 없는데서 등장하고 출몰해야할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런 질문이 아니고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 유리한가? 그 질문입니다.
그런 질문자체는 계시론 에서는 통하는데 성경론(약속론) 에서는 그 질문자체가 용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것은 약속 속에 포함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가가 궁금한데 왜 당신은 인간이란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위하여 출몰하는 피조물이라는 그런 식으로 답변을 합니까?
답은 배타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배타적으로 은폐된 채 육적인 사람들은 못 알아듣도록 일이 진행되게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못 알아듣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위하여 출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약속 자체가 배타성입니다. 약속은 약속 받은 자 외에는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차별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처음 강의에서 계시에서 나온 개념은 두 가지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론과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었지요!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까? 회복신학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서 죄 없는 상태에서 창세기 1:28절을 실현하라고 하는 것이 계시론에서 나왔지요.
물론 다른 것도 많지만 여기에 비교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하나님의 형상론이 따로 나와야 하고 약속에 의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이 따로 나와야 하겠지요? 그러면 약속론에서 나온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과 계시론에서 나온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다른가 하면, 아까 약속 속에 무엇이 들어있다? 배타성 은폐성 비밀성이 들어있지요! 이것을 그대로 옮겨서 전혀 희석되거나 묽어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담겨 있는 하나님의 형상론 개념과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 되어야겠지요! 그죠!
그러면 배타성이 유지되는 하나님의 형상론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게 되면 그 전파하는 목적이 알아듣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설득하기 위하여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예정된 자만 알아듣도록 전하는 하나님의 형상론과 예정된 자만 알아듣도록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예정되지 아니한 자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도록 전하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하나님의 형상론은 반드시 지옥 갈 사람은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론이 되어야 하고, 지옥 갈 사람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천국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당히 어려워요! 천국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무엇을 겨냥하여야 하는가 하면, 그러니 당신은 지옥에 꼭 들어가야 하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천국론이 전개되고 그것이 강단에서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서 지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라고 해야 천국이 제대로 증거 된 것이지요!
거기에 비해서 계시론에 의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만인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셔서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구원하시기 위하여 천국을 만들어 놓았는데, 인간이 교만하여 죄를 지어 가지고 아무리 팔을 벌리고 오라고 해도 안 오는 자는 할 수 없이 지옥에 갑니다. 그러나 아직도 지옥과 천국은 유보적이며 아직도 여러분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사전에 지옥가거나 천당 가거나 할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여러분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에 따라서 그 순간부터 천국 갈 거냐? 지옥 갈 거냐는 본인이 선택할 문제이기에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이 조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여러분의 고유권한이기에 손들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예정론을 사람들은 미워합니다. 조직신학에서 예정론은 구원론에 예정론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창세전에 예정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신학적으로 보면 예정론이 어디에 들었는가 하면 구원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쟁론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워서 그 부산물로, 그 전리품으로 나온 것이 예정론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예정 되었습니다라는 말은 당신은 전쟁 통에 불려나왔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무슨 전쟁입니까? 악마의 자손과 여자의 후손이 확연히 구분되는 그 전쟁 통에 불려 나온 것입니다. 전쟁 통에서 분류되어 튀어나온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론에서 배타성을 빼지 말고 유지하면서 형상론을 이야기 하여야 하고 그 형상론을 이야기 할 때 지옥 갈 사람이 반드시 등장되도록 조치하여야 한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의 형상론은 무엇이냐? 보편적인 인간론이 되면 안 되겠지요!
어려운 부분인데요. 아까 이사야 이야기 하였지요!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였을 때 우리는 이사야 너는 우리와 다른 통뼈냐? 너는 무엇인데 은혜 받고 나는 은혜 받지 못하는 하는 이것은 말이 안 된다. 한 쪽은 천사고 한 쪽은 인간이라면 모르겠지만 같은 아담의 속성을 이어받은 인간이라면 그렇게 되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론으로 제압되어 버리면 모든 하나님의 형상은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천주교 이론이지요.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다는 것인데 만약 하나님이 그 인간을 지옥에 보내버리면 인간이 지옥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인간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지옥 불에 들어가는 모순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이 만들어 졌잖아요? 그러니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 있지요! 그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비 공유적 속성도 있지만 공유적 속성도 있는 것입니다. 공유적 속성이란 의로움과 진실함과 이성들을 이야기 하면서 다른 피조물과 다른 인간만의 독특성을 공유적 속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공유적 속성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절에 다니는 사람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도덕심이 있습니다. 측은지심, 정의감등이 유교에도 있고 그것이 내려온 것이 우리의 도덕성 아닙니까?
따라서 믿지 않는 사람이 기독교에 대하여 화가 나는 것은 분명히 자기 속에는 신이 주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정의로운 마음, 착한 마음 이런 것이 있는데 만약 신이 나를 예수 믿지 않는다고, 교회 다니지 않는다고 나를 지옥 보내버리면 내가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와 함께 이 깨끗하고 거룩한 양심마저 지옥에서 멸하게 되니, 착함이 착함을 공격하게 되는 이런 세상에 말도 안 되는 모순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착함이 착함을 선함이 선함을 지옥 보내려면 그 사람 속에서 무엇을 빼내어야 합니까? 그동안 선한 것은 다 빼내고 이제는 악한 것만 있으니 지옥 보낸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착한 품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지옥 불에 다 넣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때 착한 사람이 있는데, 아직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죽어서 지옥 갔다고 하면, 세상에 무슨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책임이네! 교회도 없고 목사도 전도사도 없었는데, 자기가 알아서 하지, 자기가 어떻게 알아서 합니까? 우리는 알아서 천당 갑니까? 목사님이 계시고 복음을 전해서 복음 듣고 구원받았지 어떻게 우리가 알아서 천당 가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론에 집합시켜 버리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속성자체도 지옥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 하면 골로새서 1:15절의 말씀대로(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십니다. 악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분의 지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시간에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하여 묵시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신체적인 몸이 아닙니다.
그런데 창세기 9:6절에 보면(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피를 흘리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3:9절에 보면(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는데 어떻게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가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명백한 성경 말씀이 있는데 당신은 엉뚱하게도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당신은 이 명확한 성경구절을 무시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만 말하니, 그러면 당신 이름으로 성경을 하나 쓰고서 교주가 되면 되겠네! 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골로새서 1:15절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4:4절입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주님의 형상으로도 됩니다. 구약에서 주님의 형상이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불로서 나타납니다. 신명기 5장에 보면(신5: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불로써 나타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줄 알았는데 어떻게 신약에서 바울사도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1:16절(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창조되고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제가 인간이란 하나님약속을 위하여 출몰하여야 할 피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약속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위하여, 또는 하나님의 약속을 위하여 출현되어야 할 피조물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님이라고 하니 그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으니 동의 하겠는데, 그러나 창세기 1장에서는 아무리 보아도 인간이 예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안 나오는데 어떻게 당신은 창세기 1장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구약을 해석할 때에 십자가의 예수님의 입장에서 구약을 해석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구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 사람의 말이 맞습니다. 구약에는 아예 예수라는 말도 안 나옵니다. 여호수아라는 말은 나와도 예수라는 말은 안 나옵니다.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임마누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그 임마누엘을 예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21-23절입니다.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은 네 글자요 예수는 두 글자입니다. 이 것이 어떻게 동일한 인물인지를 논리적으로 찾아내어야 그 원리를 가지고 신약성경에서 모든 구약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원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태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한 해석은 사도 바울에게 맡겨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나 요한에게 맡겨야 합니다. 사도는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렇게 해석하여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있습니다. 사도들의 해석은 자기들의 해석이 아니라 주님의 해석입니다. 그래서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사도 떼어버리고 해석을 해봅시다. 낙타를 사서 바늘구멍에 집어넣어 봅시다.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 부자? 지옥, 반대로 말하면 당신 가난한 자? 천당,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집단은 예수님만 진리고 바울은 이단이라고 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자가 천국 간다는 것은 사도바울은 오직 영적으로 거듭나야 간다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나야 간다는 말이나 부자가 천국가기 힘들다는 말이나 같은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잠시 쉬고 하려다가 세 번째 시간을 바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머물지 않고 예수님께 이어지는가를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와 묵시입니다. 역사와 묵시라는 것은 구분이 됩니다. 처음에 강의를 시작할 때에 역사를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벌써 다 잊어버리셨지요! 딜타이가 역사를 주장하는 이유는 너무 개인적인 감정, 내가 은혜 받았다는 것들을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너 외에 다른 사람이나 후손들에게로 그 역사의 범위를 넓혀 보면 그것이 진리에 가깝다고 하였지요! 진짜 진리냐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가 안 되는가는 역사에 귀를 기울여서 나중에 말씀대로 되니까 그것은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판정할 수 있다는 것이 유대신학의 포인터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다 믿지 말라고 합니다. 그 선지자의 말이 효험이 있으면 선지자 이고, 없으면 선지자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뒤에 말씀을 보면 그 역사적 효험이 있든 없든 간에 선지자는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왜 자꾸만 뒤로 가면 바뀌는 것입니까? 앞의 신명기에서 이야기 한 것이 에스겔 예레미야에 오면 바뀌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바뀌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딜타이가 말한 대로, 사람들의 뜻은 유대인들처럼 기적을 원하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아야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역사라는 범위를 못 벗어납니다. 역사적으로 손에 잡힐만한 기적이 있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나오고 만나가 내린 것처럼, 예수여! 당신이 만나를 내려보시오! 요한복음 6장에 나오지요! 당신이 만나를 내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묵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내가 만나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런 떡 말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보라는 것입니다. 만나를 내려 주어야 모세가 말하기를 나 같은 선지자가 오리라는 그 예언이 실제적으로 성취가 되는 것이라고 인정 해줄게,
또 시편 91편 12절에 나오지요!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는 말씀을 가지고 악마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간 것입니다. 왜 성전 꼭대기로 올라갔는가? 성전이란 그 당시 모든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중심가입니다. 모든 대중들이 성전을 바라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곳에서 말씀이 성취되는 기적이 일어나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는데 갑자기 천사가 와서 1.5미터 상공에서 발을 붙들어 다치지 않게 하면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메시아가 왔다고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마가 요구하는 메시아 상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실제로 기적이 일어날 때 그것이 자기의 간증 목록에 삽입이 됩니다. 20살 때, 24살 때, 30세 목회 할 때 일어난 기적들을 모아서 역사적으로 편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주의 아닙니까?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일반교인들이나 장로님이나 이런 것이 아닙니까? 내가 40세 때에 땅 바쳤는데, 그 땅 바친 것으로 교회를 못 지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땅 값이 올라가지고 예배당을 지었고, 옆에 있는 땅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려고 팔라고 했는데 그 주인이 팔지 않다가 주인이 죽게 되고 그 아들은 교회 나와서 그 땅마저 바쳐서 교육관도 짓고 주차장고 지었다는 이런 것이 장로의 기도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젊은 놈들아 너희들이 이런 기적을 만나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주의고 유대주의입니다. 실제로 요단강을 건너고 홍해를 건넌 것을 모아서 계시로는 보는 것이 역사주의입니다. 그 역사주의 끝에 누가 있습니까? 악마가 있는 것입니다. 악마가 역사주의를 요청한 것입니다. 더 큰 기적, 더 큰 기적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기도 두 시간 해서 방언 터졌으니 이번에 세 시간 하면 더 크게 터질 거야! 계속해서 손에 잡히는 더 멋진 것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말한 것이 성취가 되는 것을 보고서 판정하라는 말이 왜 뒤에서 바뀌었는가 하면, 선지자가 한 말의 성취를 유대인들이 역사적인 눈을 가지고 이루어졌다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그런 선입관으로 보니 그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성경 말씀대로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역량을 총 동원해서 성경 말씀이 이러하니 참 하나님의 말씀이 맞구나 하면서 박수 치고 싶어 하는 그 정신 상태가 죄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성경에서 무엇을 하라고 하는 말씀이 나왔을 때 그 말씀은 인간이 스스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다고는 상상도 못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지키라고 주었고, 지키면 되는 것이지 무엇이 문제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든 성경의 말씀은 인간이 지킬 수 없다는 차원에서 준 것인데 그 사람은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온유했잖으냐! 화평하였잖아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온유가 어떤 온유입니까? 온유했다는 것은 내가 심방을 갔는데 불신자 남편이 핍박을 하는데 이상하게 그 순간 참아지더라. 나는 그 순간을 온유로 본다. 그러다 다른 목사가 놀고 있네! 그 상황이 아차하면 네가 얻어맞데 되어있다고 합니다. 자기의 개인적인 체험을 가지고 성경에서 온유라고 하는 것에 해당된다고 우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를 본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놀고 있네! 당신은 직장생활하지 않게 때문에 여유가 있어서 그렇다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확인되는 것을 따로 골라서 바구니에 담는 것입니다. 담다보니 자기가 담은 것과 다른 사람이 담은 것이 다 다른 것입니다. 끄집어내어 보라고 하니 자기는 온유의 열매라고 하였는데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성격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격에 불과한 것은 다 집어 넣어놓고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내가 마지막 때에 보여 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기적은 죽음입니다.
보편적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적은 중병이 나는 것입니다. 중병이 난다는 것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간에 우리가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확정된 기적을 위하여 우리를 어디에 집어넣습니까? 죽음에 집어넣습니다. 집어넣기 전에 죄를 알게 하십니다. 죄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성경을 집어넣습니다.
아까 다윗이 아담을 만난다고 하였지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였습니다. 남의 이야기로 들리십니까? 앞으로 내가 오십년을 더 살아 치매에 들린다고 합시다. 인천에 가면 유명한 은혜병원이 있는데 얼마 전에 불이 났습니다. 그 병원의 한달 치료비가 250만원입니다. 서울의 부자들 거기에 다 갑니다. 250만원 주고 부모를 맡기면 교대로 간병인들이 먹을 것 마실 것, 죽까지 다 갈아서 만들어 줍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역시 돈 없이는 못살아! 전에 내가 처음에 교회 나오고, 선교사 하고 할 때는 주여 내가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해놓고서는 쌀 떨어지고, 몸이 아프게 되니 그제 서야 자기가 돈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것을 통하여 새롭게 하나님께 돈을 받아내기 위한 하나의 연기요 연출이요 조작된 위선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돈에서 초월했습니다. 안 줍니까? 돈!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새롭게 사야 하겠습니다. 돈! 어떤 인간이,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 십자가로만 구원받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랄한지 자기에게 유리하다 싶으면, 자기 자존심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전부 성령의 열매로 다 집어넣는 것입니다. 자기 자존심에 불리하다 싶으면 다 빼버리고, 자기에게 유리하다 싶으면 성령의 역사이고 불리하다 싶으면 악마의 역사로 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돈에서 초월하셨다면 매직을 하나 사가지고 성경의 디모데전서 6:10절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아예 지워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굉장히 착한 사람이라면 성경의 3분의 2가 지워졌을 것입니다. 내가 잘 하는 것은 지워나가는 것입니다. 온유와 화평은 되니 지우고, 양선은 아직 조금 더 두고 그렇게 될 말씀이 과연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우리의 평생을 두고서 우리가 왜 죽는가를 지적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의 그 용서를 담는 그릇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야고보서나 창세기 9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노아 언약을 담는 그릇이기에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생긴 인간을, 인간이 건방지게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약속이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역사적으로 따지면 팔 다리가 있어야 몸입니다. 그러나 묵시적으로 보면 팔 다리와 상관이 없고 성령의 관계로 연결 되어있으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이 좀 어려운데! 지난 시간에 인간론 하면서 천주교에서는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성찬식을 하면서 이 떡이 예수의 살이고 이 잔은 예수의 피라고 하니 쯔빙글리가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 떡이 예수님의 살이라고 하였는데 그러면 그 떡이 지금 하늘에서 영광스럽게 되어있는 예수님의 살입니까? 지금 그것이 예수님의 살이라면 그 영광스럽게 되신 신체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쯔빙글 리가 그것은 상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칼빈은 반대하기를 상징이 아니야 떡이 살이 되는 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신체성을 갖는 것은, 성전이 물질화 된 성전 개념이 구약에서는 역사였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서 어디로 향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때는 성전이 물질로 되어 한곳에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향하여 기도하였더니 물고기 배속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디서 기도해야 합니까? 지금은 그런 공간성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묵시성입니다.
묵시성이란 역사를 정죄하고 공격합니다. 역사적인 인식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묵시성입니다. 하늘나라 있다는 것이 그냥 하늘나라 있고, 역사도 있다는 것이 아니라 묵시가 역사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고방식으로 까불지 말라고 자꾸만 나무라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교회가 하나 됨을 유지하라고 합니다. 무엇으로 묶어야 합니까? 띠로 묶습니까? 교회 나오면 묶어지고 아파서 집에 있으면 묶어지지 않습니까? 성령 안에서 묶으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데 만약 신체성이라면 머리는 하늘에 있고 몸은 땅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몸을 자꾸만 신체화 시키고 사물화 시키니 그런 되지도 아니하는 사고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머리는 하늘에 있고 몸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역사성 사물성 그 자체를 묵시는 공격하고 해체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머리 되시는 분도 함께 있고 지체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어떤 신체성을 가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론에서 배타성을 가진다고 하였습니다. 그 배타성을 가지려면, 여기서 십자가가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삼위일체론에서 말하는 것이고, 실제로 성경적으로 말하려면 예수님은 누구신가? 네가 핍박해서 죽은 자다! 이렇게 됩니다. 반드시 역사성과 묵시성은 서로 치고 받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냥 존재론적으로 묵시는 하늘에 있고 역사는 땅에 있는데 네가 위를 쳐다보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쳐다보고 구원받을 것입니다. 반드시 묵시성이 역사 속에서는 십자가의 고난 받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어떤 분이 묵시를 가지고 왔다. 어떤 모습으로 왔습니까? 십자가의 모습으로 왔다. 십자가는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 아닙니까? 이것은 바로 첫째 시간에 이야기 한 딜타이, 하이데거, 가다머, 슐라이마헤르 등이 전부 주장한 것입니다. 십자가가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묵시적인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실제로 일어났는가? 아니야 가상일거야 그렇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 자체가 역사 전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하이데거처럼 하나의 사건이라면 우리가 믿을 수가 있습니다. 너 십자가 믿느냐? 믿지!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오직 성령을 받아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그렇지 단지 십자가라는 그 사건만 알게 되는 묵시적인 사건은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하는 갈라디아서 3장의 십자가의 내용은 현재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붙들고 있는 우리 전체를 공격하고 정죄하는 일로서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우리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묵시적 사건은 성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통하여 지금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를 전하니 교회에서 나가라고 합니다. 장로가 목사에게 그 따위로 설교하면 교회가 부흥이 안 되니 나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현장이 묵시와 역사가 만나는 충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론인 예수님을 증거 하면 반드시 역사를 구축하고 있는 인간들은 묵시를 배척하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야 오늘날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미움 받기 위하여 태어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미워한 세상에 예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을 미워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미움 받기를 싫어한다는 자체가 우리는 아직도 자기의 역사성을 구축하고 있기에 미움을 안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미움을 받지 않고 저는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저를 사랑해 주세요라고 나오는 교인들에게 당신이 사랑받고자 하는 것이 욕심 아니요? 했다면 교인들이 당신이 목사 맞아요? 이것이 어떻게 덕스럽고 치유와 위로의 목회가 되겠습니까? 치료와 위로가 주님의 뜻이고 목회의 정신인데 우리 교회는 어떻게 된 것인지 위로와 치유는 없고 정죄와 배타성과 자기만 아는 은폐성 비밀성, 오직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를 끝나는 것, 몸이 아파서 나왔으면 몸이 낫는 다는 희망을 주어야 하는데 오직 예수 밖에 이야기 하지 않을 때, 당신 같은 목사는 필요 없습니다라는 비난을 받아야 그 사람이 성도입니다.
교인들은 금지를 원합니다. 금지는 무엇을 유발시키는가 하면 소망을 유발시킵니다. 금지를 시켜야 욕망이 발생됩니다. 왜? 금지 건너편에 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때 사람은 희망이 생깁니다. 사람은 희망이 없으면 못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유대인들이 다 해본 역사성입니다. 메시아가 온다는 희망 자체를 붙들고 살았습니다. 희망 자체가 종교였고 진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묵시가 왔을 때에, 자신의 희망이 무너졌을 때에, 내가 메시아를 기다려 왔다는 이 신앙의 값도 못하고, 신앙도 아니고, 이런 것은 육적인 소산이며 구원받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자비를 받는 사람이 구원받지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들은 가차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왜 내 희망을 꺾느냐는 것입니다. 왜 나로 하여금 절망케 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너는 나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할 줄 모르냐는 이 싸움입니다. 이것이 바로 배타성입니다.
끝으로 하나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천국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계시론에서 나온 천국론이고, 약속에서 나온 천국은 반드시 이 세상 모두가 악마, 세상 신에게 속하였기에 여호와 전쟁의 개념이지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지요! 그러므로 이 세상의 악마에 속한 자들이 말하는 천국은 천국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떻게 생깁니까? 악마보다 더 강한 분이 오셔서 그 강한 집주인을 묶어버리고 그 집의 세간을 가져가는 식으로서 발생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한 자는 저는 제 힘으로 구원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제가 종교를 가지거나, 성경 공부를 하거나, 목사다 되거나, 금식을 하거나 간에 그 어떤 몸부림을 쳐도 결코 내 힘으로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인간이 바로 자신이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주여 저를 구원하여 주소서라고 한 사람이 아니라, 주여 왜 저를 구원했습니까? 라고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하여 달라고 해서 구원하여 주는 것은 천국의 법칙에 어긋나기에 그렇습니다. 악마에 속한 인간이 구원하여 달라는 것은 다 거짓구원이기에 그렇습니다. 왜 저를 예수님을 믿게 하였습니까? 이미 성령이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을 것입니다. 성령이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만이 안다고 하는 것은 대충 맞는 것 같은데, 그런데 당신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예수님을 믿으라고 복음을 전할 기회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와서 복음과 예수님과 천국과 성경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어야 비로소 그것을 듣는 순간부터 아! 그렇구나! 하고서 주여 저를 왜 구원하였습니까? 하고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믿도록 하는 일에 인간이 무언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바울의 로마서 10장에 의하면, 그 사람에게 보낼 자냐 아니냐는 주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이 도성에 내 백성이 많으니라. 그 도시에 구원받기로 작정 된 자는 다 믿더라. 그러니까 구원받기로 작정 된 자가 있기 때문에 그기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을 파견하여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보통 목사가 목회를 하면서 설교를 하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저 김 집사는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오늘 박 집사 들으라고 설교 준비하였는데 오지도 않았구먼, 설교 준비하느라고 애 썼는데 지각이나 하고 결석이나 하고, 얼마나 속상하는지 오늘 기분 나빠서 설교 못하겠다는 이런 기분이 목사님은 들지 않습니까?
설교준비를 하고 기도까지 하면서 마무리를 해 놓았는데 들을 사람은 오지도 않고 온 사람은 십분도 되지 않아서 졸고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런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의 만남은 우연히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발걸음을 인도해서 만나게 되었고, 그 박 집사사가 오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박 집사의 발걸음을 억지로 막은 것입니다. 오다가 10미터 앞에서 자동차 펑크가 나서 정비소 넣느라고 못 왔고, 최 집사는 하나님의 의하여 억지로 끌려 왔는데 설교시간에 잠을 청하니 잠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억지로 그 설교를 듣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쟁에 동원된 피조물입니다. 내 힘으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을 세시는 분이십니다. 목회자가 되었으면 몇 명이 되었든지 이 모든 것 자체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폭설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진작 눈을 감았으면 이런 모임을 가지지 않아도 될 문제인데 아직도 눈이 감겨지지 않고 눈이 떠져서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간주해야 합니다.
그러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데살로니가 5:16-1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자에 관계없이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50명 교인에 눈이 와서 4명만 왔다면 보통 목사 같으면 화가 나서 설교할 마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 좋다는 인간이 눈에게 지나? 내 같으면 눈 위를 기어서라도 오겠다, 눈 온다고 오지 않은 것이 그들의 핑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눈을 내리셔서 나머지 46명이 듣지 못하도록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비록 네 명이 드리는 그 예배가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하나님께서 눈 오게 하신 것에 영광을 돌리는 그런 모임이 될 것입니다.
과연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눈에 보이는 역사를 역사로 보지 않고 묵시로 전환해서 볼 수 있는 그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은혜의 혜택입니다.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묵시로!
제가 오늘 준비한 것이 여기까지입니다. 천국이라는 것은 내가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천국입니다. 성령께서 은혜를 은혜로 느끼도록 조치하시는데 그것이 로마서에 보면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사교 모임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입니다.
얼마 전에 대구에 눈이 많이 왔습니다. 많이 빠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 예상은 과거의 역사적인 경험에 의해서이지요! 같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눈 온 것조차 잊어버리고 지금 이 현장에서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생각한 죄를 깨닫게 하는 이 은혜가 바로 성령의 역사로 보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예수 안에서 계속하여 현재화 된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들이 생각하는 계시론적인 관점과 성경이 말하는 약속에 대한 관점에 대하여 비교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자체가 이미 범죄 한 인간으로서 나올 수 있는 발상들은 다 끄집어내어 보았습니다. 그런 모든 것이 몽땅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피 흘리게 한 원인 제공자가 우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피의 은혜로만 구원받지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신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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