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고속도로

[스크랩] 조직신학 12강 (영화)

아빠와 함께 2013. 1. 12. 14:34

12강. 조직신학

 

영화 1-1

 

06. 2. 13 강의 이근호목사

 

(몇 사람이 늦게 와서 강의와 다른 여담이 녹음이 되었습니다. 그대로 녹취하여 올립니다.)

 

베드로전서에서 개인적인 자기 덕을 추구하다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나의 덕을 챙기는데서 벗어나서 남까지 챙기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나와 남이라는 경계의 울타리가 허물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나만 챙기는 것에서 나보다 타인을 챙겨야 되는 과정은 제자의 선택과 그 제자가 나중에 사도로 바뀌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12제자로 있을 때는 이 자체가 이스라엘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12사도가 되어 버리면 이들이 이스라엘의 모체가 되면서 12제자와 동일한 과정이 확산이 됩니다. 그러면 12사도란 무어냐? 나라와 경계가 허물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는 나 어떻게 구원받습니까가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께서 챙겨놓은 제자들을 위해서 나 무엇을 포기해야 됩니까? 나라는 존재의 경계가 어떻게 허물어져야 합니까? 하는 그런 사람이 되러버린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스데반 집사 같은 사람입니다. 나와 타인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어제 집사 임직을 했잖아요! 집사 임직을 했으면 나만 교회 나왔다 이러면 안 되고, 지난주에 왔던 분이 오늘은 왜 안 왔지? 하면서 누구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이것은 아예 경쟁적으로 전화를 하든지 찾아가든지 해서 저 이번에 새로 된 집사인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면서 자발적으로 가서 묻는 것입니다.

 

나의 경계가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집사가 됨으로 새로운 도전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나만 챙기면 되는 것에서 왜 남까지 챙겨야 하는가 하는 새로운 반발심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그런 반발심을 느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집사 되어가지고 한 것 뭐있느냐고 시비 걸려고 티격태격 하는 가운데서 그것을 새삼 느낄 수도 있고 어쨌든 경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가 직분을 맡게 되면 안 챙겨도 될 사람까지 새롭게 챙겨야 될 임무가 성령으로 인하여 주어지게 됩니다. 전에는 나 때문에 울었던 내가 이제는 내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타인 때문에 속상하고 우는 그런 사랑의 범주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손해가 아니냐 하겠지만, 그러나 남들이 모르는 세계에 참예되었다는 것이 이익입니다. 남들은 알 수가 없지요! 자기 밖에 모르는 세계이지만 그러나 그 세계란 나까지 포기되는 그런 세계이기에 그 세계에 하나님께서 집어 넣어준 그 자체가 그 사람에게는 하나의 축복이라고 여겨집니다.

 

마치 아들이 하나만 있다면 모든 부모의 사랑이 자기에게 다 집중되어 쏟아집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태어납니다. 그러면 그동안 알지 못하였던 임무가 주어집니다. 내 직장 나갈 때에 너는 동생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임무가 주어지면서 나는 무엇이며 동생은 무엇이냐?

 

나는 동생 안에서 무엇이냐? 나의 울타리에 머물러 있던 나의 선에서 넘어서서 동생에게 나는 무엇이냐? 동생 입장에서 나를 비추어보는 범위가 새롭게 넓혀진 것입니다. 남이 나를 볼 때 나는 어떤 인간이냐 하는 범위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부모가 집에 와서 보고 너 동생 라면까지 끓여주었구나! 너 형답다! 만약 동생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너는 아들답다는 것은 되지만 너는 형답다는 말은 듣는 기회를 갖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태어나서, 엄마가 새롭게 임무를 부여해서, 어설픈 동생의 밥까지 챙겨주게 됨으로, 동생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자아의 범주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아! 형 노릇도 가능한 나, 새로운 나의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후서에서 말하는 믿음에 덕을 덕에 자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는 것입니다. 이까지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넓어지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담아두고 비축하여 주셨다는 것을 타인의 관계 속에서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능력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라기는 지금 시간이 되었는데 모이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객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집사님이 계셨으면, 안 나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 미리 전화를 하는 좋은 실습일 것입니다. 집사 되고나서 첫날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자 집사님들은 목사님의 사모님이 그동안 얼마나 심하게 마음고생을 하셨는가를 아마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집사다워야 그렇게 체험을 하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아니겠지만 우리가 몰랐던 그런 속 앓이를 했었구나! 우리는 어리광과 짜증만 내었는데 남 챙긴다는 것이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그래서 안 보이시는 분이 오면 이제 오십니까하면서 챙기시고 집사님들 아시겠지요! 그것이 본인에게 축복이라는 이야기를 드리고 이제 오늘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조직신학의 고속도로라는 긴긴 강의를 저와 함께 또 주님과 함께 이렇게 하였는데 핵심적인 것을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는지 건방지게 한번 측정을 해 보겠습니다. 다음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맞는지 알아맞히어 보시기 바랍니다. 둘 중에 하나가 정답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들도 한번 알아맞히어 보세요!

 

1. 내가 죄를 지으면 주님이 용서 해주신다.

2. 주님은 용서 해야만 한다.

 

내가 죄를 지으면 주님이 용서해 주시는 분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성경의 복음을 아는 진리이냐? 아니면 주님은 너를 용서 하셔야만 한다는 것인가? 3번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오늘 밤에 죽어도 천국에, 부활의 새 세계에 갈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건방지게 여러분이 예수님을 누구신지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측정해 보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은 용서 해주시는 분이다. 이런 주님인가 아니면 주님은 용서 해야만 한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정답은 2번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왜 1번이 정답이 아닌가 물으실 것입니다. 왜 1번이 정답이 아닌가 하면, 내가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용서 해주신다는 말은, 내가 죄를 짓는다는 어떤 조건이 먼저 있어야 비로소 주님은 용서해 주시는 주님으로 계실 수 있다는, 내가 죄 짓는 행위를 해 주어야 용서 해 주시는 주님이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 짓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내가 죄를 짓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 쪽에서 무엇을 시도하는 것이 먼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 너 죄를 지었느냐 내가 너를 용서할게 그러면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겠느냐는 이 말입니다.

 

그런 주님을 잘 못된 주님입니다. 그런 주님은 애초에 계시지 않는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고마운 것은 용서 하셔야만 되는 주님이 진짜 주님이시고 고마우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냥 용서 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제일 괴로울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실수 하였을 때, 잘못하였을 때에 제일 괴롭습니다. 내가 이런 죄를 지었는데 주님께서 용서 하실까? 하면서 그 다음에 차후 적으로 이런 죄를 주님께서 과연 용서 해주실까? 하면서 내 죄 뒤에다 주님을 같다 붙여버리면 그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인가 하면 나에게 예속되어 나에게 놀아나는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장난감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우리 주님은 어떤 주님인가 하면, 용서해야만 하는 주님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나의 어떤 행동과 상관없이, 내가 이런 죄를 지었으니 내가 어떻게 될까? 이제 나는 큰일 났다. 큰 저주를 받을 거야! 지옥에 가게 될 거야! 안절부절 하는 것과 상관없이, 내가 어떤 고민에 빠졌는가와 상관없이, 예수님은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를 용서하신다! 이렇게 되어버릴 때에 여기는 평안과 행복과 마음의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구나! 예수님이 나와 관계될 때만 나의 예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 되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용서 해주시는 분이신 것을 알 때 예수님은 안정감이 있고 너무나 든든한 것입니다. 나의 불안과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너무나도 든든한 것입니다.

 

이러면 우리는 모든 마귀의 시험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긴긴 시간 동안에 강의를 해오면서 이제 고속도로가 요금을 받는 지점까지 다 왔습니다. 아직 교회론과 성령론이 조금 남아있습니다만 이 긴긴 강의를 해오면 대부분 강의 끝나는 부분에 몽땅 같다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태복음 끝나면 마태복음 끝나는 순간부터 마태복음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 끝났습니다. 책거리 합시다. 박수 치는 순간부터 요한계시록 안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긴긴 고속도로를 어린천사들과 함께 멀리하지 않고 제 혼자 하면서 달려왔는데 이렇게 달려오면서 전에는 이랬는데 이제는 달라졌다는 무엇이 있습니까?

 

고속도로를 시작하기 전에는 내가 무슨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용서 해주시는 분이신줄 알았는데 이제는 바뀌었어!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용서는 주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일인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 그때 부랴부랴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고맙게도 주님은 처음부터 용서 해 주시는 분으로 오신 것이 하나님아버지로부터 받은 필수적인 그분의 임무라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비록 흔들리지만 주님은 흔들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까!

 

어째든 이 강의를 하면서 오늘 이런 정리가 됩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거래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하면 복을 주고 못 하면 벌주는 그런 분이 아니라 예수님은 꾸준히 자기 할일만 꾸준히 하실 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모라자고 부실한지 그것을 책하시지 않으시고 주님은 꾸준히 자기 할일만 꾸준히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꾸준히 하시는 일중에 무엇이 있느냐 하면 이 교제 308페이지를 보면 영화에 대하여 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화라고 하는 것은 영광스럽게 변한다. 변모된다는 것이 우리가 요청하여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같이 천사같이 영광스럽게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누구 몫이라고요? 누가 할일이라고요?

 

흔들리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그냥 우리에게 해 주시는 일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이런 행동을 했는데 영화롭게 해 주실 건지 아닌지 하는 그런 초조함도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초조 한다고 해서 해주고 초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 해주고 하는 그런 예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더한다고 해서 더 잘해주시고 소홀히 한다고 해서 소홀히 대하여주는 그런 주님을 믿어버리면 내 행동 따라서 작았다가 커졌다가 하는 요술쟁이 같은 예수님은 가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안라 우리가 어떻게 행동을 하든가 간에 예수님은 꾸준히 자기 할일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퍼부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믿어야지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그런 변덕쟁이 예수님을 믿어버리면 그것은 마귀의 시험에 홀딱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적용하기 위하여 아까 이야기 한 집사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그동안 교회에서 자기만 챙기다가 그동안 안 보이는 교인들을 챙기는 자기의 경계선을 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것까지는 좋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봉사를 하는데 그 봉사를 받는 분이 집사가 그것밖에 못 하는가 하면서 온갖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삐지는 것입니다. 에이 더러워서 안한다. 집사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보면 집사 포기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습니다. 저 집사 안하겠습니다. 특히 주일 오후에 기도시키면 저 자살합니다하는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아마 올해 몇 분 돌아가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시키면 죽겠다는 사람, 부담 되어서 못 나오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게 무어냐 하면, 바로 예수님은 기도 잘하나 못하나 그냥 예수님인데 예수님께 충실히 잘해야 예수님이 기뻐하지 않겠느냐는 자기 행동여하에 따라서 주님이 기뻐하고 아니 기뻐한다는 이상한 예수님을 상정하니까 그런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욕을 얻어먹어도 자기 일을 하셨는데 왜 우리는 욕을 얻어먹으면 자기 일을 중지하려고만 하는 것인가 하는 겁니다. 그런 자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주님께서 변덕쟁이가 아닌데 내가 평소에 변덕쟁이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집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내가 잘해주면 저쪽에서 잘해주겠지! 하면서 안일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잘해주는데 저쪽에서 악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있구나! 그런데 나는 참지 못하고 성질대로 하면서 에이 때려치우라! 집사 안한다. 내가 봉사 하고 싶어서 하나! 해 줘도 값을 못 받는데 왜 해! 이런 식으로 자기 본색을 드러내는 그런 일이 없기를 우리 의존교회 집사님들에 간곡히 부탁합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내 행동과 관계없이 예수님은 든든한 분으로서 그냥 자기의 일로 용서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변덕쟁이인 자기 자신을 믿지 마시고 변덕이 없으신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이 굉장히 쉽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변덕쟁이 나를 믿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항상 변덕쟁이일 뿐인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변덕이 없으시고 한결같이 자기 일에 충실하신 그 예수님의 충실하심을 믿는 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그 충실하게 이루시는 일 가운데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 글자로 영화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일에 충실하신 것입니다. 자기 일에 충실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없는 사람은 내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하였는데 나를 영광스럽게 해줄까 하면서 또 자기행동하고 주님의 일을 엮어서, 내 행동이 이렇기 때문에 영광이 안될꺼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잠시 또 믿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시간이 이정도 되었으면 저의 취지를 대강 아시겠습니까? 아하~ 그러니까 내 행동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일하신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구나!

 

여러분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일인데 그렇다면 현재 우리 인간이 영광스럽게 어느 정도까지 영광스럽게 되는가 하는 그것이 궁금하지요!

 

지금까지의 강의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우리의 행동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자기 몫이기에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그 다음에 어느 정도로 영광스럽게 하느냐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영광처럼 영광스럽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영광스러운 것처럼 우리를 영광스럽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제도 잠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마는 요한계시록 1장을 제가 잠시 읽어보겠습니다.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이것이 사람의 몰골입니까? 엄청나고 희한한 모습입니다. 사도요한이 전에 예수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전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기존에 있던 인간의 코 눈 입 이런 것들은 완전히 해체되어 버립니다.

 

완전히 어디 갔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의 그 초라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것입니다. 성형수술 해도 이정도로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변화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경우에는 얼마나 놀랐던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변하는 것을 보고서 놀라서 엎어진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로 모를 정도입니다.

 

지금 요한 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요한이 너무 놀라서 죽은 자 같이 엎드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영광의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와 족히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축복을 예수 믿는 자에게 주님께서 자기 몫으로 그냥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영광이 얼마나 좋았으면 주님께서 네 육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겠습니까? 이것은 껍데기입니다. 리콜 대상인 것입니다. 고장 난 것입니다. 수리 점에 가야하는 것입니다. 지금 육체 때문에 고민한다는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는 도대체가 나올 수가 없는 사고방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고난과 장차 올 영광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는 반드시 이 땅에서 고난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장차 올 영광은 지금 너희들이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비교할 수가 없는가 하면 이것은 베드로사도가 베드로 전서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도무지 말로 문자로 이 지구상의 어떤 글자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시로도 표현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감탄과 감탄 이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 초라한 사도바울이 삼층 천에 올라가서 보고 온 뒤에 내가 보고 온 것은 형언할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어린이에게 묻습니다. 태양이 밝습니까? 촛불 열개가 밝습니까? 그때 무어라고 대답을 합니까? 족히 비교가 안 됩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양천구 신월동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은 장차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부어줄 영광과 비교한 다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그 정도로 비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면서 찾아낼 수 있어야 됩니다. 성경보고 찾아내라고 하면 잠만 자다가 침을 흘려서 성경만 다 적시지 않습니까? 교회 간다고 시어머니에게 얻어맞은 멍 자국만 만지고 있지 성경에서 이런 것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바람이 무엇입니까? 교회 다니는 희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그 영광의 나라가 장차가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현재적으로 이루어주시고 지금 그 속에 포함 되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미 첫째 부활에 참예되어 있다면 왜 우리가 몸이 아프고 피곤하고 나의 영광이 이렇게 어설픕니까? 그러면 바울사도가 고린도후서 4: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여기 보면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한다고 합니다.

 

후패한다는 것은 너무 썩어서 훅 불기만 하면 날아가는 그런 상태입니다. 사람이 10대 20대면 피부가 팽팽하다가 40대 50대가 되어 보톡스 주사를 맞아도 결국은 만지기만 하여도 부스러지는 바삭 마른 종이처럼 부서져내려 앉는 것입니다.

 

어떤 공상과학 영화에 보면 주인공하고 나쁜 사람하고 싸움을 하는데 그 나쁜 놈들이 기계인간인데 너무 너무 싸움을 잘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인공이 기계 인간을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길 수가 없을까 하고 있는데 마침 그 싸움을 싸우는 현장에 액화질소 영하 200도 까지 내려가는 그런 물질이 있어서 그것에 기계인간을 넣어버리니 그 힘자랑 하던 기계인간이 꽁꽁 얼어붙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이단옆차기로 날려버리니 그 힘센 기계인간이 얼음조각처럼 부수어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때 생각한 것이 후패한 인간은 만지기만하면 와르르 무너져내려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피부를 가꾸고 어떻게 애를 써도 이 몸은 무너질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의 머리를 보십시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저의 머리 정수리 부분이 훤해집니다. 여러분들이 애를 먹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교체를 하기 위하여, 겉 사람과 속 사람을 일찍 교체하기위하여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주셔서 머리털이 뽑히게 하시는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지금 약을 발라서 후패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농담인줄 알아야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그 보조 행위, 병행되는 행위가 되는 후패케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지금도 날마다 우리를 해체시키고 부수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신자가 아닌 사람은 왜 이럴까? 왜 이렇게 피부는 쭈그려질까? 해답도 모르고 진리도 모르고 누가 내 인생을 이렇게 망치는지를 모르기에 왜 이럴까? 왜 이럴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학교에서 손들고 물어보세요! 선생님 왜 인생은 늙고 죽습니까? 예야 네가 어디서 그런 심각한 문제를 질문하느냐? 그런 것을 커서 알아라! 답변도 안 해주고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고린도후서 4장에 보니 이것을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겉 사람을 부수어 버리고 우리이 속 사람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주님께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도화지 삼아서 자기의 그림을 그리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가지고 자기의 조각품으로 쓰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몸은 왜 후패하여야 하는가?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니 우리의 몸이 처음 만들어질 때에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부수어져서 흙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무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일 잘하신다. 이 몸을 흙으로 돌리시구나!

 

그런데 왜 흙으로 돌아가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참 불쌍한 사람이고 지옥 갈 사람입니다. 그런데 같이 흙으로 돌아가면서도 흙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예수님의 다른 몸이 준비되어 있기에 내 이 몸은 철수되어야 하고 철거되어야 하는 것이구나! 그러니 이 몸은 흙으로 돌아가야 되고 흙으로 돌아가면 우리에게 새로운 몸이 주어진다. 그 몸이란 예수님의 영광의 몸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몸은 흙에서 만든 몸이 아니라 하늘에서 만든 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의인들은 하늘에서 해같이 빛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하늘나라에서 태양과 같이 눈부시도록 빛이 난다고 합니다. 그때에는 천사와 같아진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천사처럼 되면 어떻게 될까요? 천사는 늙지도 않지요! 천사는 빛이 나지요! 광채가 나지요! 천사는 아픈데도 없지요! 천사는 오래 살지요! 특히 하늘나라에서 살지요!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천사보다 더 멋진 모습으로 영원토록 죽지 않는 상태에서 마음껏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교회가 아니면 어디서 이런 있는 현실을 이야기 하겠습니까? 세상이 이야기 하는 것은 이 부서지는 흙을 가지고 아깝다고 서로 싸우고 하는 것이 세상 이야기라면, 교회에서는 그것이 무엇이 아까운가? 우리는 다른 몸이 있는데 하면서 당당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어린이 여러분의 집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빵이 산만큼 있다면 여러분의 손에 있는 맛없는 건빵하나 친구에게 줄 수도 있습니다. 건빵 그것 하나줘! 그래 가져가! 야 너는 마음씨가 곱구나! 마음씨가 고운 것이 아니라 우리 집에 가면 그것보다 훨씬 맛있는 것이 있다고 하면서 그런 건빵 하나 줄 수가 있겠지요!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그 약속을 믿게 되면 그 약속이 내 속에서 현실상황이 되고 실제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얻지 못하였다고 마음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 한 것을 정리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영광스럽게 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의 천사처럼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영광스러움은 예수님의 부활처럼 우리가 곧 그렇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두려워하거나 걱정을 하거나 근심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미래가 확정되어 있기에 장래가 확정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어떤 일과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내가 잘하면 영광스럽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못한다고 영광이 깎아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잘 하는가 못하는가에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자기가 아버지께 받을 일이기에 이루어내신다는 것이 믿어지는 사람에게는 그 영광이 그대로 자신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 우리는 하나의 도화지이고 예수님은 우리의 몸을 가지고 자신의 솜씨를 마음껏 발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 솜씨를 보고서 잘하십니다. 박수를 치면서 성경 말씀대로 잘 되어 갑니다. 역시 예수님은 든든하십니다. 그런 마음을 여러분이 가져 주셔야 됩니다. 여기 까지는 여러분이 잘 아시니 안심이 됩니다.

 

이제 그 다음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을 이야기 해 드리고자 합니다. 교회 행사가 있으면 온 교회가 다 피곤하여 다 축 처지는 것입니다. 후패하는 육신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방금 이야기하기를 예수님께서 우리를 해와 같이 빛나게 해 주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빛나게 하지 못하는가? 왜 예수님이 다 해주셔야 하는가 그기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해 주셔야 되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을 항상 자기 것이 되지 남의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이유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착하면 내가 착하지 착한 일도 하지 않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같이 착하여 지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는 없습니다.

 

내가 혼자 잘나서 구원받고 내가 혼자 잘나서 복 받는 것이지, 내 복이 남의 것이 되고 내 구원이 남의 구원이 되는 것인 우리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개별자라고 합니다. 어린이 여러분의 노트에 쓰면 어린이 여러분도 잘 모르고 어른들도 잘 모르는 말입니다.

 

자 여기에 떡이 있습니다. 이 떡을 내가 먹으면 누가 배부릅니까? 떡을 먹는 내가 배부르지 먹지 않은 내 친구가 배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것은 예수님 혼자만의 영광이 아니라 예수 믿는 우리 모두에게 영광스럽게 하는 솜씨가 예수님께만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만 믿습니다. 나는 못하니까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못하는 것을 알기에 예수님만 믿고 의지합니다. 목숨 걸고 의지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나쁜 사람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여러분들이 착하면 그것이 여러분의 착함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의롭게 행동하면 여러분들이 의롭게 됩니다. 자꾸 이런 식으로 가르칩니다. 아닙니다.

 

진짜 이것은 어려운데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신 그 착한 일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넘어갈 때에 그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가 있습니다. 내가 떡을 먹고 배부를 때에 옆 사람은 배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떡을 먹을 때에 옆 사람도 배가 불러지게 될 때에 그것을 착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실컷 떡을 먹었는데 옆 사람이 배부르지 않았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예수님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신 것이 남의 것이 되는데 너는 왜 네가 한 것이 너에게만 해당되고 남에게 못 넘어가는가? 그러니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면 다른 사람의 죄도 지고 가신다는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지, 저도 착한데요. 저도 훌륭한데요. 다른 사람을 몰라요! 이것은 하나님이 원래 원하시던 그런 착한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나는 착합니다. 하여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어려운 것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지요? 예수님과 우리를 비교해 볼 때에 예수님은 어떤 일까지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착한 일을 하신 것이 남에게까지 넘어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착한 일을 하여도 그것이 남에게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원하였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에 우리는 탈락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합격이고 우리가 하는 것은 불합격인 것입니다.

 

제가 강도이야기 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졌던 강도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는 아무것도 착한 일을 한 것이 없이 평생 나쁜 짓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어떤 마음이 들었는가 하면 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지만, 옆에 계신 예수님의 덕을 내가 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이 생겼습니다.

 

자기 옆에 계신 예수님의 착함이 바로 나의 착함이 될 수 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믿음이 있습니까? 보통 사경회하면 이런 때에 아멘하면서 메아리가 쳐야 하는데, 예수님이 하신 일이 나의 착한 일이 되어진다는 것을 강도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에 그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갔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예수님만 믿어야 됩니다. 어려운 말을 한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렵고 쉽고 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은 예수님의 착함이 나의 착함이 된다고 하였지만 오늘 이야기 한 예수님의 영광도 누구의 영광이 됩니까? 역시 우리의 영광이 되었다고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고마운 분인지, 이 세상의 어떤 무엇보다, 온 천하보다 예수님의 이런 고마움을 아는 여러분들이 바로 천국의 아들이요 딸인 것입니다. 조금만 떡 먹고 합시다.

 

녹취 060621 이장우

 

 

 

영화 1-2

 

06. 2. 13 강의 이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떡을 잡수시면서도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은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도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것을 첫 번째 시간에 이야기 하였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하나님이 왜 영광스러우냐 하는 난해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우며 왜 영광스러운가 하는 것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왜 영광스러우냐? 하는 것과 하나님의 그 영광이 이 죄 많은 세상에는 어떤 영광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점을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 시간의 진행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과 죄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작은가? 이것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시편 19편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 모든 만물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이 속에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모르는가 하면, 다른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을 다 아는데 누구만 모르는가 하면 바로 잘난 체 하는 우리 사람, 똑똑한 체 하는 우리 사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제일 훌륭하다는 인간들만 이 우주만물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을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 시편 19편 뒤에 읽어보면,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움, 영광스러움이란 하나님은 정말 대단해! 하는 이런 소리가 온 만물에서 소곤소곤 쏙닥쏙닥 다 전하여지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솜씨와 위대함을 코스모스도 자기들끼리 전하고 알고 있는데 사람은 아무리 마이크를 대고 귀를 쫑긋 세워서 들어도 이 코스모스가 옆의 코스모스가 무슨 소리를 하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아무른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으로 이렇게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아무른 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도 코스모스와 코스모스 사이에는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지! 얼마나 훌륭하신지! 대단하셔! 함께 찬양하세! 바로 옆에서 바람에 날리고 있는 코스모스가 코스모스에게 다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것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구나! 그러니 이 세상은 조용한 거야! 인간이 이렇게 된 것은 인간들 속에 마귀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마귀는 내가 최고야!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야! 사람이 최고야! 자꾸만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이 천문학의 책을 보니, 세계 최고의 천문학자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는 왜 생겼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세계의 최고의 천문학자들이 전부다 이야기하기를 우주가 발달하고 진화하고 성장한 것은 그 마지막에 우리 인간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주는 왜 있는가? 이 은하계는 왜 있는가? 수천억 광년 끝에 은하계 같은 은하계가 수천 억 개 있다고 하는데 그 방대한 우주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커지고 넓어졌는가? 그것은 이 우주에서 가장 훌륭한 우리 인간이 태어나기 위하여 우주는 그동안 그렇게 애썼나 보구나!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런 시기 있지요!

 

이렇게 광활한 우주가 왜 있는가? 사람 하나 태어나게 하기 위하여 우주가 있으니까 우리가 감상하라고 우주가 있다고 세계 최고의 똑똑한 사람들, 아이큐가 150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내린 결론이 그것입니다. 이 우주는 사람을 위해서 생긴 것이다. 여러분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틀린 것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선악과 따 먹을 때부터 너는 최고야! 이제부터 하나님 없어도 살 수 있어! 이제 하나님을 찾지 마! 너 혼자 살수 있는데 왜 하나님을 찾는 거야! 그러니 이제 하나님과 헤어져! 그까짓 하나님 대충 넘겨버려! 이제 네가 하나님 해! 네가 하나님이야! 그러니 그때부터 인간들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우기면서 위대한 문명이 어떠니, 발달이 어떠니, 우주는 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도 죽을 때는 내가 왜죽지? 나는 죽기 싫은데 왜 죽지? 누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지? 죽음 이후에는 무슨 세계가 있지? 아 정말 궁금하구나! 죽고 나서는 무엇이 있지? 설마 부자가 지옥가고 거지 나사로가 천국가고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을 거야! 사람들은 앞일을 내다보지 못하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중학교나 고등학교 가면 보게 될 책인데 괴에테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지은 파우스트라는 책이 있는데 혹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책에서 파우스트라는 박사가 악마하고 내기를 하였습니다. 파우스트가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을 악마가 다 해주는 조건으로 그 마지막의 영혼은 악마의 것이라고 하는 것에 내기를 걸었습니다.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즐기면 힘이 생겨서 악마를 물리칠 수 있겠지 하고서 내기를 하였는데 그때부터 파우스트박사는 하는 일마다 잘되고, 공부하면 박사 되고 천재되고, 돈도 막 굴러오고, 인기도 있고, 권력도 높아지고 안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안 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무엇이나 다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 악마가 찾아와서 이제 내가 있는 지옥으로 가야지! 그때 파우스트가 큰일 났다 싶어서 하나님 이제부터는 바르게 살겠습니다. 제가 가진 재산을 이웃을 위하여 나누어 주겠습니다. 이제는 착한 일을 많이 하겠습니다. 그래서 파우스트가 착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마귀나 내가졌구나! 그래 너는 착한 사람이니 너를 지옥으로 데려가지 못하겠구나! 하면서 마귀가 떨어져 나갔겠습니까? 안 나갔겠습니까? 네가 아무리 착한 일을 하고 네가 아무리 회개를 하여도 나는 원래 계약서대로 네 영혼을 지옥으로 데려간다. 네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여도 약속은 약속이라고 합니다.

 

그때 파우스트가 알았습니다. 내가 착하다고, 예수 잘 믿는다고, 남에게 훌륭하다는 소리 듣는다고 해서 내가 내 운명을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없구나! 하면서 실망에 실망을 하면서, 그래 마귀야! 네 영혼을 지옥으로 가져가라고 하면서 내 영혼은 도저히 내 손에서 못 벗어나겠다면서 자기 자신을 팽개치자 마귀가 그 영혼을 가져갈 찰나에 하늘의 천사가 나타나서 파우스트는 원래 내 것이었어! 하고 가져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에서와 야곱이 자기들 마음대로 계약하기를 팥죽 한 그릇 주고 장자권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아무리 사인하고 도장 찍고 손가락 걸고 백날 해도 하나님께서 야곱은 구원받기로 되어 있고 에서는 지옥가기로 결정되어 있는 이상 아무리 사람이 무슨 약속을 하여도 그것은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사람들은 자기 약속 자기 말에 신비로운 능력이 있다고 착각들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말과 내가 한 행동은 내가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책임 질 수도 없는 인간들이, 그런 오만함이 있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코스모스도 피어있고 코끼리도 사자도 뛰어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생물학 공부하고 물리학 공부하고 수학 공부하고 아까 이야기한 천문학 공부하고 이런저런 공부하면서 결국 내놓은 마지막 결론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우주는 다 누구를 위하여있다? 나, 사람을 위하여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말은 절대적이고 사람의 말은 분명하고 사람의 약속은 미래를 결정한다. 이렇게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제파악이 안 된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기 바깥의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식으로 움직인다는 것도 모르고 자기가 외치고 큰소리치면 그렇게 될 줄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어린이들에게 너무나 어렵겠지만 무조건 적어놓으세요!

 

쉽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이 우주만물이 사람 빼놓고서는 하나님 최고 이렇게 하고 있는데 유독 똑똑하다는 인간들은 무엇을 모릅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만 합니까? 하나님은 모든 세상 만물 들풀 하나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미친다는 것을 시편 19편에 나오지요!

 

궁창이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것을 드러내고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유독 인간 혼자 모르고 있으면서 혼자 똑똑한 채 하는 인간, 이런 교만은 무엇을 먹고 난 뒤에 그렇게 된 것입니까?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마귀의 종이 되어서 우리보고 신이라고 하니 진짜 신이 된 줄 알고 까불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하나 물어 봅시다.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까요? 모를까요? 모릅니다. 약을 너무 심하게 먹었습니다. 약을 너무 심하게 먹었는데 그것이 DNA로 유전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나는 최고다. 내가 위대하다는 그런 증세를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외대하지만 내가 더 최고라는 이런 정신병을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 죽는지를 모르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을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는 아는 것입니까? 바보 같은 코스모스나 바보 같은 원숭이나 사람들이 돼지 같다고 욕하는 돼지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것이 로마서 8장에 보면 나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19-20절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돼지가 죽고 꽃이 시들면서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들리지 않는 소리로 이야기 합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때는 우리가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새로운 세계가 될 것이라는 것을 학수고대 합니다. 그런데 그 피조물들이 21절에 보면 썩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후패한다고 하였지요! 부스러지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가 들어오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의해서 이 세상은 전부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 무엇이 가득 찼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찼지요! 하나님의 영광이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깨끗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깨끗하심이 있기에 죄가 들어오면 이 죄가 허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다 망하게 되어 있고 나중에 이 세상은 불로 태워서 없애버릴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 사실을 누가 압니까? 사람은 모르고 사람외의 모든 피조물은 다 알고 있습니다. 소곤소곤 거리면서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곤거리는 소리가 우리 사람의 귀에 들립니까? 안 들립니까? 안 들립니다. 안 들리니까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하면 저것들이 무슨 대화를 해! 저것들이 무슨 이야기를 해! 언어가 있어야 이야기를 하지!

 

그러나 저 쪽에서는 무어라고 합니까?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 우주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홀 안에 부탄가스가 가득 찼다면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성냥으로 장난치다가 불을 켜면 이 예배당이 어떻게 됩니까? 홀라당 폭발 해 버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죄가 가득 차기를 지금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부탄가스가 가득 차듯이 죄가 가득 차게 되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라이터로 불 지르시면 온 우주는 불로서 다 태워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죄라는 부탄가스가 가득합니다. 하면서 길길이 뛰는 사람은 복음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신입니다. 앞으로 더욱 발전 될 것입니다. 이러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한번 혼내주기 위하여 물로 심판을 하였지만 마지막 때는 불로 세상이 폭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폭발하는 이유는 다른 세상 피조물들은 다 알고 있는데 인간들은 자기가 신이 되어가지고 까불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마지막을 화려한 불꽃놀이로 장식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된 바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후서에서 말씀하기를 너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고 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죄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 부탄가스가 없는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장만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이해 되셨지요!

 

이해되었는지 한 번 더 정리합니다. 사람들만 모를 뿐이지 다른 모든 피조물은 무엇을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까? 이 온 우주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 끼리 서로 서로 전달을 합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리지를 않습니다. 보이지도 않습니다. 바람결에 코스모스가 흔들리는 것만 보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측정기를 가지고가도 들리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 혼자 바보입니다. 혼자 바보이면서 뭐라고 합니까? 혼자 똑똑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모르면서 무엇이 똑똑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잠언서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마치 코스모스처럼 못난 돼지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이 최고라는 것을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그런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까? 제가 방금 뭐라고 하였습니까? 사람은 아무리 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모른다고 해도 사람은 일단 이 소리를 들은 이상, 모르는데 그렇지만 제한테는 그 아는 방법을 이야기 해 주세요! 강도가 구원받는 것처럼 어떤 방법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그런 이야기를 해 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또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제 것이 아니니까! 그게 무어냐!

 

두 번째 이야기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 거룩이 이 땅에 왔습니다. 이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냐 하면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8절을 겸해서 보시면 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때에 가스라이터로 이 세상을 폭발시키기 직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나타나신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1:19절에서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 영광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면 독생자의 영광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영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자~ 이 아들의 영광이 화려할까요? 초라할까요? 둘 중에 하나입니다. 초라합니다. 볼품이 없습니다.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일까요? 싫어하는 모습일까요?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다 싫어하는 모습입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싫어해서 얼굴을 돌려버렸다는 것입니다. 다 싫어하였습니다. 제가 아까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까? 코스모스 돼지 수달도 다 온 우주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깨끗하심과 착하심이 가득 찼다고 하였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분이 이 땅에 왔습니다.

 

바닷물로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바닷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알까요? 모를까요? 알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바닷물을 보고 꾸짖으시니 바닷물이 까불다가 잠잠해졌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니 이것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배불리 먹고 남도록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멈추지 않으셨다면 이 땅에 가득 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이 우주보다 더 크기 때문에 이 우주 전체가 떡으로 가득 차라고 하였으면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났을 때에 멈추시고 나머지를 거두었더니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용서할 만반의 태세가 다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죄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주님의 생명은 우리의 죄보다 더 넘치고 넘치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를 흉용케 하고 모든 만물을 키우는 능력이 그 떡 안에 다 담겨 있고 그 고기 안에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코스모스를 키우고 계절이 바뀌는 그 능력이 그 떡을 먹은 오천 명에게 임하였습니다.

 

그 능력이 오천 명에게만 임하였습니까? 아니면 택한 백성에게도 임하였습니까? 택한 백성에게도 임하였기에 죽었던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도 죽은 지 나흘 만에 그 생명의 능력이 임하니까 살아서 끄떡 끄떡 나오는 것입니다. 붕대에 감겨 걷지도 못하니 풀어 주어라고 하여 풀어주니 걸어서나오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우리에게는 신기하지만 누구에게는 신기하지 않습니까? 코스모스나 돼지한테는 신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래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안 들리고 안 보이니 모르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 모든 만물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마지막에 불로 세상을 폭발시키면 그제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겠습니까? 꼭 죽어서 지옥 가봐야 하나님이 계시구나! 이렇게 알겠습니까?

 

우리는 그 전에 죽어서 지옥의 영광 천국의 영광을 보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영광스럽게 오셨습니다. 우리 불쌍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게 무슨 영광입니까?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독생자의 영광 강의하면서 따라하라고 한 것은 처음입니다. 무슨 영광? 독생자의 영광이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이 없는지!

 

이제부터는 왜 독생자의 영광이 볼품없고 초라한지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영화배우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도 영화배우 될 만큼 남에게 밑지지 않았는데 장동건이 보고 나는 인물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은 취하지 않고 자신이 신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자기의 영광을 극도로 극도로 높이는 것입니다. 파우스트 박사처럼 그러면 누가 이것을 도와줍니까? 마귀가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더 영광이 높아지도록 마귀가 도와줍니다. 마귀가 착해야지 훌륭해야지 예수 믿는 사람답게 착해야지 하면서 자꾸 격려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라고 해서 붉은 악마처럼 흉측하게 생긴 그런 것만 마귀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귀가 어떤 식으로 이 땅에서 일 하는가 하면, 인간에게 너는 신이야! 너는 훌륭할 수가 있어! 이렇게 격려해주는 마귀가 우리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 수백 년 전부터 내려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삼강오륜이라는 것입니다. 삼강오륜이라고 해서 아이스크림 이야기가 아닙니다. 삼강오륜이란 어쩌면 인간이 인간다운가 임금이 임금다운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보모에게 효도하고 부부가 달라야 하고 나이의 서열이 있어야 하고 친구끼리 친하게 지내야 되고 이런 것이 삼강오륜입니다. 보세요! 얼마나 훌륭합니까?

 

나라에 충성하고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입니까? 이순신 장군이지요! 그래서 이순신 장군이 교과서에 나옵니다. 그리고 부모에 효도하고,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요! 어떤 어머니가 병이 들어서 겨울에 수박을 먹고 싶다고 하여 겨울이 수박을 구하러 나가서 구하여 온 이야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여서 고기를 구하여 온 이야기 부모에게 효도하면 극락세계 가서 염라대왕에서 복을 받는 다는 이야기를 김영임씨가 창을 하면서 노래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하여 불교에서 천주교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사람들은 장래를 내다보지 못하지만 한번 죽은 조상들은 이미 죽어보았기에 미리 장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좋은 길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극정성으로 섬겨야 한다. 조상들이 좋아하였던 것 차려놓고 정성을 바치면 조상들이 후손들에게 좋은 길로 인도하여 부자도고 가정이 평안하고 건강하고 그렇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형이 동생을 생각해서 새 살림장만해서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여 밤중에 몰래 곡식 단을 동생에게 주고, 동생은 형님 댁이 식구가 많으므로 양식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곡식 단을 몰래 형에게 갖다 두고, 그런데 아침에 보니 적어야 할 자기의 곡식 단이 똑 같은 것입니다. 어느 날 똑 같은 시간에 둘이 마주치면서 형님 먼저 아우먼저 하면서 나온 것이 농심라면입니다.

 

바로 이것은 사람이 얼마든지 될 수 있다고 보는 훌륭함이고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누가나 되고 싶은 영광스러운 자태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문제 나갑니다. 착하면 복 받고 복 받으면 부자 되지요! 어느 중학교인가 고등학교의 급훈에 10분을 공부하면 남편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 여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해라 지금 공부 해놓으면 남편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남편 바꿔서 뭐할 건데?

 

그러면 만약 어떤 사람이 가난하다면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그 사람이 복을 받지 못한 것은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위쪽으로 오신 분입니까? 아래쪽으로 오신 분이십니까? 아래쪽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나쁜 사람입니까? 착한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착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배기 착한 분이십니다. 그 분이 하나님께 복을 받고 가난하게 되었고 억울하게 죽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죄인의 굴레를 써서, 그러면 예수님이 잘못 된 것입니까?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들이 잘못 된 것입니까?

 

현재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잘못되었겠지요! 그 배후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 배후에 악마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사람들이 싫어하는 영광으로,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영광으로, 착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못난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알아챘는가 하면 마귀가 알아챈 것입니다. 하여튼 마귀는 아이큐가 천인지 이천인지 너무 똑똑해, 얼마나 마귀가 똑똑했으면 성경에 보면 너희는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악마는 인간의 모든 것을 다 통달하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자 돌이 떡 되게 하라고 합니다. 무얼 먹어야 일이 되지!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의 사람들은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떡으로 사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는 돈이 있어야 사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죽고 돈 있으면 살고, 돈에 죽고 돈에 살고, 무엇이나 돈 돈 돈 돈이 있어야 사람 대우받는 세상, 아직 어린이 여러분들은 잘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크면 클수록 절실하게 느낄 것입니다.

 

착하면 부자 된다. 예수님은 이것을 다 아시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용돈 타는 애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나중에 커서 힘들게 돈을 벌게 되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나와 하나님과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여러분은 키와 지혜가 자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나를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시면 사람에게 높음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전부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예수님을 기준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보라! 내가 언제 높임을 받은 적이 있는가! 내가 부자 소리 들은 적이 있는가!

 

예수님은 이 죄 많은 세상을 외롭게 걸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여기에 올라오시는 목사님들은 정말 머리 둘 곳이 없으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찜질 방에서 주무셨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신 예수님을 누가 믿겠습니까? 아무도 안 믿지요!

 

심지어 베드로조차도 예수님을 시시한 시답잖은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날은 고기를 잡는데 근처에 누가 왔는지 나쁜 기운이 있는지 잘 잡히던 고기가 잡히지를 않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인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이 베드로양반!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려보시오! 그렇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는 전문가인데 누가 건방지게 그런 소리를 하는가하는 마음이었는데 그날따라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애라 모르겠다! 한번 던져보자며 던졌는데 고기가 가득 잡혔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뛰어 내려가 예수님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나쁜 놈입니다. 예수님을 시시하게 보았습니다. 내가 죄인인줄 모르고 나는 잘난 사람인줄 알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고기를 안 잡히게도 하시고 잡히게도 하시는 것을 보고서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곁에 오시니 알아보았으니 저는 죄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를 네가 이제부터 고기를 잡는 사람이 되지 말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너 같은 인간들이 뽑혀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제가 무조건 죄인입니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만 골라서 천국에 집합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 솜씨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두가 마귀 영광만 찾는 이런 판국에 마치 쏙아 내듯이, 하나하나 뽑아 내듯이, 마치 까만 머리 가운데 흰머리 하나씩 있는 것 뽑아내듯이 빈틈없이 자기 백성을 쏙쏙 뽑아내는 이 주님의 솜씨,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우리 능력이 아니라 독생자의 영광으로 구원하여 내는 솜씨인 것입니다.

 

또 마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네가 종교인인가? 메시아인가?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어야지! 많은 사람들이 네가 기적을 베풀기를 원하는데! 그런 능력을 보여 봐! 그래서 예수님을 높은 성전꼭대기에 올려서는 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고 하니 뛰어내려 보아라! 그러면 천사들이 너의 발을 다치지 않게 보호하면 너를 메시아로 추종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뛰어내렸습니까? 예수님의 솜씨를 보였습니까? 아닙니다.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은 가짜입니다. 내가 예상치도 않은 기적을 바라면서 그런 기적과 부합되는 메시아를 원한다면 백발백중 가짜 메시아입니다.

 

마지막 때에 악마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고 죽었다가 살아나게 하는 기적을 행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로 가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구원받겠다고 하는 그런 엉터리 같고 사기꾼 같은 자들을 기적을 통해서 교회를 부흥시켜서 지옥으로 빼돌리는 그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하는 진짜배기 말고 그냥 교회 다니면서 기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더욱더 기적을 많이 베풀어서 와! 놀랍다. 저게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신의 능력이라고 감격하게 만들어서 자기 사람 만드는 그런 자들을 숱하게 지뢰처럼 좍 깔아놓은 것입니다. 그게 바로 또 마귀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알고 하는 말이 기적, 기적 이야기 하지 말라 진짜 기적은 내가 약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구원받는 다는 것이 정말 기적이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심지어 내 구원도 내가 책임질 수 없는 그런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받는 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기적을 말하는 것은 바로 악마의 일꾼들이기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마귀가 세 번째 또 유혹을 합니다. 세 번째가 오늘 주제와 맞지요! 세상의 영광! 어떤 인간도 세상의 영광에 넘어가지 않는 인간이 없는데 예수라고 별거냐! 예수라고 세상 영광 싫어하겠어! 라고 장담하면서 예수님을 산위에 올리셔서 세상의 온 영광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서울 같으면 남산의 타워에서 밤에 반짝이는 호텔의 네온사인과 고급빌라와 아파트 수많은 것을 다 보여주면서, 파우스트 박사처럼 부럽지! 부럽지! 솔직하게 부럽다고 해! 다 줄게! 단 이 세상의 신에게 복종하라! 이 세상의 신에게 복종하면, 나 마귀에게 절하면 다 줄게! 이대로 문명을 발전시키고,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온 것처럼 영원토록 인간세상을 이어가보세!

 

그때 주님 하신 말씀이 내가 섬길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밖에 없다. 그때 마귀가 나중에 보세 하면서 가버린 것입니다. 그때에 천사가 와서 수종 들었습니다. 그 악마가 십자가 까지 따라와서 귀신같이 따라붙지요! 네가 메시아라면 지금 이라도 내려와 너는 그런 능력이 있어! 당장 내려와! 지금 잘못했다고 하면 너의 생명은 보존할 수가 있어!

 

그때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저들은 주제 파악이 안 됩니다. 제들은 돼지보다 더 못합니다. 코스모스 보다 더 못합니다. 이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코스모스도 돼지도 다 아는데 유독 잘난 체 하는 인간들만큼은 선악과를 따 먹어가지고, 독한 독약을 먹어서 정신을 잃어 마귀 질환자가 되어서 오직 자기가 신이 되는 것에 앞뒤 불문하고 돌진하면서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면 자살하겠다. 나는 신이라고 그렇게 우기는 세상의 교육과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여러분이 살아온 것입니다.

 

독생자의 영광은 오 분 쉬고 하겠습니다. 녹취 060701 이장우

 

 

 

영화 1-3

 

06. 2. 13 강의 이근호목사

 

세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독생자의 영광이란 것이 사람들이 기피할 수밖에 없는, 정말 싫어버린 바 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바와 전혀 상관없이 정말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누구도 내 능력으로 메시아를 알아보았다는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나는 내 능력으로 메시아를 알아보았다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도록, 자기 능력으로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도록, 그 능력과 일치되지 않도록 그렇게 활동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이냐를 이번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에, 예수님이 바깥에서 하시는 일을 듣고 세례요한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이 엄청난 벼락처럼 분노와 저주로 떨어질 줄 알았습니다. 이것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구약의 숱한 선지자들이 예언하기를 메시아가 오게 되면 세상이 불바다가 된다는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뒤집어 진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특히 다니엘서에 보면 인자가 올 때에 구름을 타고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구름타고 다니는 이야기를 알지요! 옛날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손오공,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구름을 타고 돌아다닌다는데 구름이란 수중기가 응축이 된 것입니다. 먼지와 더불어서 수중기가 약간 얼은 것이 구름인데 그 구름에 80킬로 나가는 사람이 탔다고 합시다. 그러면 꺼집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칭 믿음이 있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구름타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 인가 아닌가를 무엇으로 확인을 하는 것입니까? 구름을 타고 오시는지 아닌지를 보는 것입니다. 구름을 타고 오시면 메시아이고 구름을 타고오지 않으면 메시아가 아닌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내었기 때문에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100% 맞는 기다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구름만 타고 오너라! 구름만 타고 오면 할렐루야 노래 부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오실 때에 구름타고 오셨습니까?

 

또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보니 메시아가 하늘로 올라갈 때는 불 수레 타고 올라간다고 그래서 말라기라는 마지막 예언서를 보니 장차 엘리야가 온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올 때는 구름타고 오시고 가까이 와서는 불 수레 타고 오겠지요! 또 갈 때에는 불 수레 타고 가기도 하겠지요! 엘리야이니까! 불 수레만 타고 오면 메시아로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실 메시아는 엘리야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불 수레타고 왔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혼도 안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짐승이 태어날 더럽고 지저분한 자리에 태어났습니다. 그 지저분한 자리에어 태어난 아기 예수를 사람의 능력으로 찾아간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안경 낀 학생!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에 사람이 자산의 능력으로 찾아간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몰라요? 모르면서 왜 까부나? ?? 없었어요! 그러면 동방박사는 무엇을 보고 왔습니까? 박사니까 논문 써서 왔습니까? 박사니까 사전에 공부한 것이 많아서 찾아왔습니까?

 

동방박사는 별을 따라 왔습니다. 이것이 또 골칫거리입니다. 별이 지구로부터 몇 만 년 광년 떨어졌습니까? 별이 예루살렘 가까이 왔다가 예루살렘에서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날 때는 다시 별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별이 어디에 멈추었는가 하면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어느 구유가 있는 곳 위에 올라선 것입니다.

 

별이 도대체 직경 몇 미터가 되어야 올라서게 됩니까? 그것도 좁은 지역을 제한적으로 딱 찍어서 여기야 라고 할 정도라면 그것이 별인지 부킹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입니다. 아이들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요! 이 동네 복잡한 동네인데 어느 집을 정확하게 이야기 해 줄려면 별이 어느 정도의 크기여야 합니까? 조그마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야 헷갈리지 않을 것입니다.

 

딱 그 지붕에 표시가 날 정도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게 별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간에 동방박사는 신기하게 그 별 따라 왔습니다. 그리고 그 동방박사 보다 앞에 아기 예수를 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능력으로 보았겠습니까?

 

역시 아닙니다. 목동들이 밤에 양을 지키고 있을 때에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면서 천사들이 와서 찬송 부르면서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지금 베들레헴 어느 집의 구유에 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아기가 태어났을 것인데 그 아기가 너희를 구원할 약속된 메시아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아기예수에게 갔을 때에 아기예수에게 무슨 후광이라든가 빛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만약에 있었다면 자기 힘으로 찾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없었습니다. 보통 아기입니다. 목자가 정확하게 어느 집에 가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알았지 그냥 놔두었으면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산부인가에 아기가 백 명이 있으면 그 중에 누가 누구인지 찾아낼 수가 있겠습니까? 못 찾지요! 다시 말해서 아기 예수는 찾아 낼 수가 없습니다. 찾을 수 없는데 바로 저 분이 메시아라고 알려주는 것은 성령님이 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33살 먹은 청년이 이 땅에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남자들은 33살 먹은 청년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은 사람도 한 두 명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다가 죽었습니다. 수 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 세상이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죽었는데 그 중에 메시아가 섞여있습니다. 그 섞인 메시아를 찾아내기란 보물찾기보다 어렵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나라마다 메시아를 이야기 할 것입니다. 필리핀에서는 필리핀의 메시아를 이야기 할 것이고, 중국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의 메시아를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메시아는 중국 사람도 아니고 대한민국 사람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나사렛 예수 그분이 바로 메시아인 것입니다. 그분 외에 다른 사람이 메시아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 분외에 다른 사람이 흘린 피는 우리의 죄를 씻을 수가 없지만 그 분의 피만이 새 언약의 피로서 우리의 죄가 용서될 수 있는 피라고 꼭 찍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오셔야 믿을 수가 있지 사람의 능력으로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이야기 하는 것은,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당신이 오실 메시아가 맞습니까? 잠시 세례요한도 무언가 몰라서가 아니라 확인하는 차원에서 분명히 하기 위하여 질문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분은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세상이 뒤집어지고, 세상이 멸망당하고, 나쁜 사람은 다 지옥에 가고 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일은 없이 조용하니 진짜 당신이 오실 메시아가 맞습니까? 한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오늘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절름발이가 걷고 봉사가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을 내가 하고 있다면 바로 내가 메시아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어냐 하면, 이것이 나중에 어떻게 바뀌는가 하면 죄인이 의인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좀 어려운데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중풍병자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병자를 낫게 하여 준다고 하니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메고 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병들었다가 나았다는 것만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병자를 낫게 하면서 예수님은 병자를 낫게 하는 분이 아니라 진짜 목적은 따로 있는데 그것이 무어냐 하면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죄 용서하는 권세가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이 어떤 의도로 왔든지 간에 그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입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병이 낫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요구도 하지 않았던 네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너무 이상해서 사람들이 의아해 하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병 고침을 받는 것과 죄 사함 받는 것이 어느 것이 중요하느냐는 것입니다. 너는 너의 의도로 왔지만 나는 너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하여 너를 사용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잘난 체 하려고 금식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은 술집에 가셔서 소주나 맥주를 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늘 그러신 것이 아니니 따라하지 마세요! 그 당시 사람들은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금식하면서 신의 자비를 구하려고 마음을 낮추는 이 판국에 저 예수라는 작자는 분위기 파악도 되지 않은 채 못 된 인간들과 함께 술을 즐기고 있을 수가 있느냐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내가 술을 먹고 싶어 먹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 세상에 어떤 일 때문에 왔는지를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하신 것임을 알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의사는 누구에게 필요한 것입니까? 의사는 건강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병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들이 죄인들이기에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나는 아무른 대가없이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이 법칙은 어떤 법칙인가 하면, 이것이 내 시대, 새로운 시대의 적용되는 구원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 방식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옛날 방식은 내가 착하면 내가 구원받는다는 방식입니다. 그 방식을 예수님께 강요하거나 요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그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착하면 착한대로 구원한다는 그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방식이 아닙니다. 새로운 방식입니다. 자신의 공로로 상대방을 구원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정결치 아니한 자가 의롭다 함을 받으며, 불법을 행하는 자가 행한 일이 없이 용서 받은 행복을 네가 아느냐고 합니다. 불법을 행한 자,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가 나중에 보니 용서 받은 사람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달라진 놀라운 사실에 대하여 네가 행복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죄가 용서 받았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진다면 이것이 바로 행함이 아니고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독생자의 영광이 겉으로는 초라합니다. 비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면서 외면하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초라함과 비참함 속에 무엇이 들어있겠습니까? 그 안에 거저 구원하시는 능력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교회 집사님의 가정에 심방을 갔는데 제가 못 보든 요리가 나왔습니다. 그 사모님 요리가 대단하신데 어떤 요리가 나왔는가 하면 길쭉한 소고기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길쭉하게 되었는가 하니 우엉에다가 소고기를 외부에 감싸서 코팅한 요리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겉으로는 소고기인데 안에는 우엉인 것입니다.

 

맛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납니다만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작전이 바로 저 작전이다.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보고 좁은 길로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좁은 길로 가는 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망하는 길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좁은 길은 살짝 코팅되어 있는 것입니다. 안에는 생명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보 등신 같은 인간들은 멸망 길 인줄도 모르고 넓은 길로 넓은 길로만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넓은 길을 왜 좋아하는가 하면, 넓은 길은 아스팔트가 깔려져 있는 것입니다. 고속도로인 것입니다. 그런데 좁은 길은 미친놈이 아니면 못 가는 길, 정신병자가 아니면 못 가는 험하고 험한 길입니다. 아무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길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못 가는 길이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그 좁은 길에 생명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은 많은 사람들이 망하는 길입니다. 그러니 망하는 자는 많은 반면에 생명의 길은 소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설적인 행위를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제가 독생자의 영광을 두 번째 시간에 초라하다는데 초점을 둔 반면에 이 마지막 세 번째 시간에는 독생자의 영광을 초라한 껍데기 말고 알맹이에 대하여 제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알맹이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면 죄인도 거저 용서하시는 주님의 용서가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거저 주시는 용서가 얼마나 큰지를 알기 위해서 주님께서 바깥에 무엇을 깔아 두었는가 하면, 인간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율법보다 더 센 율법을 깔아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산상설교입니다. 율법보다 더 센 율법입니다.

 

오른 손이 범죄 하면 찍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옛날 초대교회 때에 바보 등신같이 자기 오른 손이 범죄 하였다고 오른 손을 찍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왼 손이 수상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맹세하기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의 어떤 맹세도 장래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장래의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미리 계획 잡으신 대로 갈 뿐이지 네가 맹세한다고 해서 어이구 착하구나! 너는 여기에 넣어줄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어려운데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하면, 맹세를 저는 안하겠습니다. 하는 차원에서 예 하고 아니요 하라는 것입니다. 맹세 하겠다고 해 놓고 예 하거나 아니요 하게 되면, 일단 맹세를 해 놓고서 내가 무엇을 해야 맹세가 이루어지지! 예 할 것은 예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제 아들만 서울 대에 합격을 하면 제가 무슨 일이든지 다 하겠습니다. 이것이 맹세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보니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나의 맹세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면 내 아들이 서울 대에 가겠지! 라는 것을 노리게 됩니다.

 

이것이 반칙이라는 것입니다.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는 말씀은 너는 맹세할 그런 자격도 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장래는 네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만드시는 장래가 너에게 덧붙여지고 덧붙여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입니까? 그냥 가는 것이지요! 어제 목사님과 밥 먹다가 한 이야기인데 사람은 원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떠밀려서 가는 것입니다. 떠밀려서가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어떤 할머니가 배가 기우뚱해서 물에 빠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뛰어들어서 할머니를 구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당신은 신사도가 대단하군요! 어떻게 그럴 마음이 있었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씨~ 누가 날 떠밀었어!

 

우리는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 조건들이 나를 떠밀어서 지금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도종환 이라는 시인의 시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집을 낸 유명한 시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은 이 길 말고 다른 길이 있었다. 이 길은 내가 원치 않는 길이었다. 하지만 원치 않는 길로 가고 있다는 이것이 나에게 중요하다.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고 있지만 이 길이 내 길이라고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선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원해서가 아니라 강요된 선택인 것입니다. 이 강요된 선택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맹세 해보았자 괜히 스트레스만 받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 경우의 이야기를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틈만 나면 책을 보고 공부를 합니다. 이제 슬슬 맛이 가지요! 조금 했다고 교만의 본성을 드러내지요! 그 뒤의 말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제가 틈만 나면 책을 보고 공부를 하는 이유가 나중에 책을 보고 싶고 공부하고 싶어도 남들 때문에 바빠서 책 못 볼 시간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참 도가 더 심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유 있다고 마냥 여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약간 빈틈이 있으면 그것이 찬스입니다.

 

그래서 그 찬스를 이용하여 공부를 하고 나면 이상하게 심방이라든지 음식쓰레기를 버리라든지 이상하게 어떤 지시가 날아오는 것입니다. 처갓집에 김 갖다 주라는 이런 것, 만약에 내가 여유 있다고 오랜만에 한가하구나! 이렇게 한다면 그날 책 한자도 못 보고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성경에 보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돈이 되든지 안 되든지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이 운명이 내가 닦아 놓은 것이 아니고 좁은 길로 주님께서 미시는 대로 밀리다 보면 결국 도착한 곳은 그 끝은 생명이요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괜히 스트레스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목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장담합니까? 예수님의 경우를 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밉상 받고 버림받고 억울하게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부활이었습니다. 어제부터 계속 부활이야기를 하는데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코스만 부활로 통하는 코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빌립보서 3장 10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부활의 코스가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코스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십자가의 코스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코스입니다. 나는 죄인이며 주님의 공로로만 구원받는다는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죄는 예수님이 다 가져간다는 것을, 얼마든지 죄를 지어도 그분이 다 가져간다는 것을 아는 코스가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코스로 가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루지 못하는 말씀만 성경 전체에 다 깔아놓으신 것입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도 우리 힘으로 못 지키고 더 나아가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달아서 스스로 의인이 되려는 부담감에서 해방시키시기 까지 하십니다.

 

제일 나쁜 놈이 어떤 놈인가 하면, 놈이라고 해서 그렇지만 제일 나쁜 놈은 자기가 착하게 되려고 하는 자입니다. 참 이런 말하기 위하여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나 보다! 착하게 되고자 하는 자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모독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의 대신에 자기의 착한 의를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하철 탔는데 병든 할머니가 탔는데 아무도 일어서니 않는데 자신이 일어서서 양보를 하였다. 그러면 갑자기 밀려오는 생각이 나는 왜 이래 대견해! 나는 교회 다니면서 인간 되었구나!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보다 더 착하겠구나! 아! 나는 왜 이리 착하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일어서면서 정신이 없는지 만 원짜리를 흘린 것입니다. 그때 얼른 주워서 할머니에게 드리면 오늘 곱빼기로 착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두리번거리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 세 번째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착한 일을 찾다가 자기 팔로 다른 사람의 옆구리를 치게 되면 착한 일에서 하나를 빼야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착하기 때문에 더 착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함께 그 사람이 죄인이라는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자기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감사가 멀어진 것입니다. 그때부터 감사가 아니라 초조감이 밀려옵니다. 더 착해야지, 어제는 세 번 밖에 못했는데 오늘은 네 번 착해져야지!

 

이렇게 되면 이제부터 감사가 아니라 만약 어떤 인간도 나의 착함을 건드리는 인간이 있으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주간 내내 455번 착한 일 해가지고 교회 왔는데, 목사님께서 설교하시기를 여러분들이여 우리 중에 아무도 의인이 없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다 용서하셨기에 의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쁘시지요!

 

그러자 그 교인이 화가 나서 착한 사람여기 있는데 왜 그래요!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를 하니 교인들이 착하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복음을 전하였는데 복음 전한 목사님은 그 사람으로부터 갑자기 나쁜 사람으로 배척을 받는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고 그 인간은 바로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악마의 화신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그 편안함과 가벼움은 돈 몇 십억을 주고도 바꾸지 않습니다. 정말 편합니다. 속청수 먹고 가스명수 먹어도 안 됩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그 순간보다 더 편한 것은 없습니다. 정말 편합니다.

 

아이들이 수학 시험을 쳤는데 0점을 맞았다. 집에 가면 어머니한데 매를 맞을 텐데 어떻게 말할까? 평소에 20점을 맞는데 문제가 잘못 나와서 0점을 맞았기에 다음 칠 때는 30점이 되겠다고 할까? 그러지 마시고 어머니 원래 제가 0점이었습니다. 지난번에 20점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아이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맞아 이제야 내 본 모습을 찾았구나! 왜 그동안 전에 20점 맞았을 때에 감사하지 못하였던가! 이제 범사에 감사해야지! 이제 더 낮아질 때도 없으니 한문제만 맞아도 감사해야지! 그러니 시험 치르기 전에 감사하지 마시고 시험 치르고 난 뒤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든 결과가 항상 나의 행위의 결과로 되는 것 인줄 알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코스 안에서 거저 주시는 은혜가 현재의 나의 인생의 길을 이런 식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소록소록 사건 사건을 통해서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 전체의 소유권을 주님께서 거저 가져가셔서 용서하신다는, 그것이 주님의 전문분야이며 할일이기에 우리가 스스로 용서를 받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그저 용서 받은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독생자의 영광을 빛내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독생자의 영광을 빛내어야 합니다. 독생자의 영광을 하늘나라에 신이 계신다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사기꾼들도 다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진정으로 자기가 죄인 됨을 안다면 세상의 영광이 가득함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영광이 이제는 죄인마저 십자가의 피로 용성하시는 그 영광으로 나타났다는 이것을 아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떠한 굴욕과 어떠한 비난과 어떠한 모욕 속에서도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껍데기는 후패하여 지지만 속에는 독생자의 영광이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독생자의 영광! 죄 많은 나를 대속하신 그 주님의 용서가 여러분의 본질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하늘에 그냥 계신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오시고 이 땅에 오셔서 그냥 계시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내 살과 떡을 먹으라는 이유를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한 것은 주님의 살과 피 이며 그것이 우리의 본질을 구성하여야 된다는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잘난 체 하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자랑하는 그러한 피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출처 : 울산목양교회 정낙원 목사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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