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 1 05,02,21
◈ 인간론 - 창세기 1장인가? 아니면 3장인가?
오늘은 인간론에 대해서 강의하겠습니다. 종말인 신약시대에 인간론을 정립할 때, 제일 되는 정점이 무엇인가 하면, "창세기 3장 이후로부터 인간론을 정립할 것인가? 아니면 창세기 1장에서부터 정립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 인간론이 첨예하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이것이 간단하지 않고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인간론을 정립하면, 죄 지은 것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실수는 있을 수 있지, 죄 지어도 하나님인 내가 회복시켜주마!" 하는 회복 쪽으로 강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 1장부터 인간론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좀 봐준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 너희들이 연약해서 죄 지은 것을, 내가 그 죄를 보상하고 대가를 치름으로 원래인간으로 만들어줄게" 하는 '회복' 쪽에 강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하는 문제점 - 지옥은 왜 만드셨는가?
그러니 1장부터 하게 되면 문제가 큽니다. 예수님께서 1장을 염두에 두고 활동을 하셨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만들면 안 되는가 하면, 지옥을 만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지옥이 있더라도 그곳에는 마귀만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그 때에도 지옥이 있다면, 그 지옥에는 인간은 들어가면 안 되고 악한 마귀, 그 마귀와 합세한 악한 천사들의 무리만 거기에 들어가야지,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난점이 있습니다. 지옥을 만들더라도 사람 편에서 보면, 그것이 남의 이야기이고 옆 동네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의 관점에서 회복을 시켜주시겠다고 하는데, 그런 지옥에는 못된 악마들만 들어가야지 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들어가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야고보서와 창세기에 나오잖아요.
(약 3: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진 인간들을 지옥 불에 보내서, 그렇게 목말라하는 모습을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보시고 계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즐겁고 신이 나겠습니까? 물론 인간이 악마의 형상을 입었다면 한번 당해보라고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그 지옥에서 1,2년도 아니고, 3,4년도 아니고, 영원토록 고생을 한다는 것은 자비로운 하나님의 형상과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3장부터, 즉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부터 인간론을 설정하게 되면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가장 거부하는 이유가, 창세기 3장은 1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책을 볼 때에 1장부터 2장 3장을 보아야지, 아니 생뚱맞게 3장부터 툭 튀어나와서 보게 되면, 이것은 반칙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 창세기 3장부터 시작 - 아니, 성경이 1장부터인데 ??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신학을 가지고 조작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1장과 2장은 때내어 버리고, 3장부터 인간론을 시작한다는 것은, "1장과 2장에서 나오는 인간의 이야기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입니까?" 라고 하는 의견이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3장부터 시작하면 또 무엇이 켕기는가 하면, 아니 구원받은 인간이 창세기 1장의 레벨로 올라가야지, 그것이 회복 아닙니까? 여호와의 증인도 그렇게 하고, 개혁주의 신학 한다는 쪽도 그렇게 하고, 기존 교단에서도 회복을 많이 이야기를 하지요.
특히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동산이 나오는데, 개혁주의 신학을 한다는 분들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창세기 2장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래 모습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인간과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데 마태복음 1:23절에 보시면 '임마누엘' 이라고 합니다. 이 임마누엘의 뜻은 이사야 7:14절의 예언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는 뜻이고, 요한 계시록에도 '새 하늘과 새 땅'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신학이 딱딱 아귀가 맞아 들어간다는 인상을 주는 것입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러니 신학생들에 조직신학은 머레이나 박형룡 쪽의 신학을 하고,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춘 웨스트민스터 신학 쪽으로 결합시키면 신학은 다 된 것이죠. 조직신학도 되고 성경신학도 되니 온전한 신학이 구축되었다는 희망을 보이는 것입니다.
◈ 인간론인가, 인죄론인가?
그런데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하면 박형룡 조직신학에서처럼 인죄론, 즉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이라는 입장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 인간론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부터 시작을 하면 '인죄론'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부터 시작하면 어떤 장점이 있는가하면, 예수님께서 영생을 주실 때 그냥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시듯이 우두둑 내려서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줍게 하시는, 그런 방식으로 영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받아가라고 영생을 주신다고 하시고는 막상 어떤 한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인물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인물을 가져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준 것처럼 마지막에는 자기 살을 먹고 자기 피를 마시는 자는 살 수 있다고, 그렇게 자기 몸을 영생이라고 하니, 사람들은 심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원하는 영생만 딱 챙겨서 가기를 바라지, 예수라는 덩치가 오는 것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아니 영생을 주시려면 영생만 주시면 되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따르라고 하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간에 자기보다 더욱 사랑하면 합당치 않다고 하시는 것은, 도대체 영생을 주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말겠다는 것입니까?
◈ 영생은 좋은데, 피 흘리신 분은 부담스러워 !!
이러한 모습은 영생을 주신다고 하고서는, "봐라, 인간의 능력으로는 영생을 가질 수 없지 않느냐?" 하면서 약 올리시는 식으로 엄청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영생 얻는다고 하면서, 슈퍼에 가서 물건 사듯이 그렇게 가져가면 그만인데, 영생을 가지려고 하니 그 뒤에 덩치가 큰 피 흘린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뒤 따라 오게 되니, 사람들은 예수는 싫고 영생은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영생을 칼로 자르듯이 자르고 싶은 것입니다. 자르는데 어떻게 자르는가 하면, 영생은 창세기 1장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회복시켜 주시려고 주신 것이고, 예수님은 심부름꾼이니 일단 영생을 주시고, 택배회사 사원처럼 심부름을 하였으니 "이제는 가세요" 라고 하면서 밀어 부쳐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영생을 얻었으니 고맙다고 인사는 하겠지만,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것이니 예수님은 이제 일을 그만하셔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율법을 못 지켰지만 이젠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셨으니, 성령 받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 나가면 되고, 십자가는 지나간 아득한 이야기로 돌리고 싶은 것입니다. 정말이지 이러고 싶은 것입니다.
30분 늦게 시작했으니 30분 늦게 마치겠습니다. 저에 대한 약속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미안하든지 나이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39분 차를 49분으로 착각을 해서 기차를 두 번이나 놓쳤습니다. 표 바꾼다고 줄서 있다고 놓쳐버리고 말입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것이고, 아무튼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택배회사의 사원처럼 영생을 전달해 주는 매개체로, 즉 '매개체=중보자' 개념으로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챙길 것을 챙기고 나면 예수님은 따로 하나님을 섬기고, 자기도 독자적인 노선에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동안 죄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였는데,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받았으니 자기도 따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겨나가면, 예수님과 한 형제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회복되어 거듭난 피조물로 살아간다는 자긍심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 성경해석은 사도에게 물어보아야 !!
그러나 성경이 과연 그렇게 이야기하는가 하는데는 문제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특히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볼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나름대로의 해석이 다가오면 설교할 때나 성경을 볼 때에 이 해석이 옳다고 보았는데, 그 뒤에 바울서신이나 베드로서와 같은 서신 서에서 사도들의 예수님에 대한 해석이 나왔을 때에,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해석권이 우리에게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해석권이 없는데 성경을 펼치고 눈이 있고 글자에 대한 이해력 있으니, 보고 직접 우리의 해석으로 받아들이면 좋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고, 예수님의 모든 해석은 그 해석조차 사도들이 해석한 그 범위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어떻게 해석을 했습니까? 영생을 챙겼으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이별해도 괜찮으니, 이제는 독자적으로 성령체가 되었으니 독자적으로 행동하면 된다는 식으로 가르친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의 중요한 신학 가운데 하나가, 그것이 중요하여서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박사학위 받은 사람도 있고 말입니다.
◈ 사도바울의 성경해석 - 예수 안 !!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안' 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 안' 이라는 이 개념을 놓쳐버리고 독자적으로 하나님과 교류가 성사된다고 여기고 나서면 누가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까? 복음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도바울이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점을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상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한 두 분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근호 목사, 당신은 왜 그렇게 논쟁적이냐?" 라는 것입니다. 그냥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말씀이 나오면, 있는 그대로 하라고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비판하지 말라' 라고 하면 비판하지 말라고 그대로 옮기면 되고, 마음속에 음란을 품으면 음란이니 그렇게 살지 말자고 하고, 형제를 보고 '라가' 라고 욕하면 안 되니 욕하지 말자고 하면, 듣는 사람들도 쉽게 납득이 되고, 호응이 되어서 고개를 끄덕일 텐데, 그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보훈처럼 좁은 길로 가자고 하면 녹음기처럼 옮기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좁은 길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가' 하시면 '예'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 하면 설교가 끝난 것 아닙니까? 이게 얼마나 쉬운 것입니까? "이제 우리 교회는 좁은 길로 갑니다. 좁은 길에 대한 노래 한번 부를까요?" 라고 하면 쉬운데, 왜 좁은 길로 가라는 그 말씀에 대하여 곁가지 해석을 같다 붙이느냐고 저에게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 말씀은 우리가 해석할 권한 없는데 !!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기를, 예수님께서 좁은 길에 대한 그 말씀의 개념과 해석은 우리가 해석할 권한이 없고, 사도바울이 그 좁은 길을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한번이라도 살펴보았느냐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도 베드로가, 사도 요한이 그 좁은 길을 어떻게 해석하였는지에 대하여 복종하고 존경하고, 그것이 진짜 복음인줄 알고 머리를 숙였느냐는 것입니다.
◈ '거룩하라' 라는 말 한 마디에도 !!
사람들은 거기까지 연관을 안 시키려고 합니다. 디모데전후서에도 있고 베드로전후서에도 있지요. '거룩하라' 라는 말씀입니다. 목사가 있고, 교인도 있고, 그 사이에 성경이 있습니다. 주님이 지금 보고 계시니, "주님이시여, 이 성경으로 교인들에게 어떤 말을 할까요? - 성경대로 하라. - 알겠습니다. - 여러분 거룩합시다" 라고, 그러면서 끝났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그 목사를 보고 "목사님, 거룩하세요"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가 화가 나는 것입니다. 목사인 자기가 그 사람을 보고 거룩하라고 했는데, 그것은 자기 말이 아니고 성경을 말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교인이 하는 말이 "그러니 성경에 나온 대로 제가 목사님을 보고 거룩하라고 했잖아요" 라는 겁니다. 목사가 말하기를, "당신이 말하는 거룩하라는 개념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니, 교인이 있다가 "목사님, 당신의 거룩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논쟁적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룩하다' 라는 개념을 목사는 자기의 인생경륜, 인생체험과 학력 등으로 구축된 나름대로의 개념을 '거룩하다'는 그 뒤에다 붙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 성경에 거룩 하라 말이 있는데요. 제가 보기에 사도가 이러한 내용들을 거룩하다고 한 것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하라'는 말 뒤에, 그 거룩이 어떤 거룩인지 어떤 레벨의 어떤 기준의 거룩인지를 목사 개인의 경험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붙이면 교인들이 말하기를, "목사님이 말하는 거룩이 겨우 그 정도입니까? 제가 아는 기도원의 원장의 거룩보다 못하네요. 또는 내 조카가 비록 청년이지만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목사님의 거룩이라고 말하는 그것보다 훨씬 더 거룩해 보이는데요! 바로 저 옆의 목사님보다 내신 성적이 훨씬 낮아 보이는데요!" 라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가 뭐라고 합니까? "당신이 신학 했소?" 라는 것입니다.
거룩의 논쟁이란, 베드로전서 후서에 또 바울의 서신 서에 낱낱이 다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남긴 말씀이나 사도들이 남긴 말씀이 논쟁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철학에서는 '개별성' 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개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개별성인데, 성경은 이 전체를 '아담 안'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인륜성' 이라고 했습니다. - '철학의 함정'을 참조
인륜성이라는 개념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결혼은 인륜지 대사라는 그 인륜성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륜성이란 사회라는 한 모퉁이에서 나온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회가 만든 인륜이 인간이지, 인륜이라는 전체적인 껍데기를 벗어나서 "나 혼자 인간이다. 나는 주체를 가지고 있다. 나는 자의식이 있다' 라는, 이런 식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맞아 죽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인륜성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하나의 부속품처럼, 신이 내린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을 할뿐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근대 16세기까지의 사고방식이었던 것입니다.
◈ 개신교 - 신앙도 개별성이다 !!
그런데 근대 이후에 과학이 발달되면서 신을 차버리고 난 뒤에, 이 우주보다도 이 우주를 해석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대견하고 똑똑하고 스마트하고 얼마나 뛰어나냐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개별성이 강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학만이 개별성인가요? 무엇도 개별성입니까? 신앙도 개별성이라는 말입니다. "목사나 신부는 저리가. 내 신앙은 내가 알아서 한다" 라고, 이렇게 나온 것이 개신교가 아닙니까? 이것이 개신교인 것입니다. 즉 개신교가 나오게 된 것은 개별성 때문에 과학이 발달되면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과학이 발달되면서 중세에 시민계급이 등장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 토지위주에서 금융과 상공위주로 되면서, 이 시민 계급은 자신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생계를 책임지게 되니까, 자기 신앙도 자기가 알아서 관리해야지, 목사나 신부나 교회가 관리하면 안 되고, 즉 자기가 직접 하나님과 상대하겠다는 주체의식이 발달되게 되는 것입니다.
◈ A.A.하지 - 모일 때만 총회이고 흩어지면 총회가 없다 !!
그러한 사람들을 호응하고 그런 사람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학이 개신교의 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개신교의 정치원리는 총회가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는 개별교회에 봉사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모일 때만 총회이고 흩어지면 총회가 없다는 것이, 19세기에 미국에서 장로교를 할 때 A.A.하지가 기본적으로 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은 천주교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하는 것은, 개신교에서는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적이 가능합니다. 직접 성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성령은 교회를 통해서 옵니다. 특히 무엇을 통해서 오는가하면 성만찬과 함께 일곱 가지의 성례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찬식을 '은혜의 수단' 이라고 합니다. 은혜가 내려오는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여기 계신 목사님들도 신학교에 다닐 때에 이런 것을 다 배웠는데, 수업 시간에 스포츠 신문을 보고, 리포트나 족구를 한다고, 그리고 수요일에 영화를 보러 간다고, 아마 이런 전체적인 내막들을 제대로 다 몰랐을 것입니다.
◈ 개신교와 천주교 !!
아무튼 개신교는 성령이 개별적으로 직접 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개별적인 것은 항상 집단 속에 개별입니다. 개별은 따로 인데, 그러니 이런 개별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집단이며 은사의 지체이지, 개별적으로 독단적으로 다른 지체 없이 혼자 "내가 성령 받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 없이 나 혼자 구원받는다" 라는 개념은 천주교에서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들이 교리들의 차이인데, 이러한 교리들의 차이가 무슨 소용 있느냐고 자꾸 말하며 싫어하시는데, 그러나 그런 교리가 사실 우리 속에 다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게을러서 교리를 하나하나 분석을 안 해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지금 세상이 나와 있는 숱한 교리가 우리 속에 접혀져서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 각양각색의 인간론 - 골라잡아 !!
우리가 '인간론'을 하면서 우리 속에 각양각색으로 접혀져 있는 교리들을 부채처럼 한번 펼쳐봅시다. 골치가 조금 아플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아이디어가 다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같은 성경을 펼쳐놓고 인간론을 이야기하면 각양각색의 인간론이 다 나오게 됩니다. 그 중에서 여러분들은 골라잡으면 되는 것입니다. "아, 저런 경우는 저렇고, 이런 것은 이렇구나! 나는 이것이 마음에 든다" 라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
조금 엇길로 갔습니다만, 특히 창세기 해석에서 1장 중심으로, 죄 지은 것은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안셀무스의 '보상론'처럼, 우리가 마귀 속에 있었는데 마귀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마귀에서 대가를 지불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삼았다는 보상설과 만족설을 해서, "보라, 너희들이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했지 않으냐. 그러니 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 예 알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회복' 쪽에 강조점을 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이란 것은 1장과 2장의 인간으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 시절은 끝났습니다. 에덴동산도 끝났다는 것입니다. 아니, 끝난 것을 무엇 하려고 되돌아보는가 하는 말입니다. 더 나은 게 있는데 끝난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것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치 않다는 말씀도 있는데. 이미 1,2장은 끝난 이야기입니다. 왜 그것을 돌아보고 그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청소년 시절에, 저는 절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만, 절대로 말입니다. 19세미만 출입금지가 되어있는 영화를 보려고 애를 썼지요? 그런데 지금 어른이 되어 가지고 허름하고 비 새는 영화관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영화를 보라고 하면 시간 주어도 가지 않습니다. 그곳을 왜 갑니까? 허름한 천막 같은 60년도 70년도 영화관에 왜 갑니까?
물론 여러분이 살던 다 떨어진 초가집에 가서 한번쯤은 낭만 삼아서 사진 찍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빠가 옛날에 이곳에 살며 고생했는데, 그러므로 너희들은 공부하란 말이야!" 라고 하면서 훈계조로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아이가 "아빠, 우리 여기서 살까?" 라고 하면, 그러면 "웬 미친 소리냐?"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속으로 "고생을 했으면 옛날 한 것으로 다 되었지"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 그때 죄 지은 것이 있지만, 다시 죄 없던 시절로 되돌아갈 이유는 없다 !!
그런데 창세기 1장과 2장을 왜 그렇게 미련을 두고 있는 것입니까? 기차는 앞을 보고서 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좍 좍 앞으로 보고 달리게 되어 있다면, 그때 죄 지은 것이 있지만 다시 죄 없던 시절로 되돌아갈 이유는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에서 본 인죄론의 강조점인 것입니다.
◈ 칼빈 - 창세기 1장이냐, 3장이냐 !!
"창세기 1장이냐 3장이냐"에서, 사실 그 유명한 칼빈도 이랬다 저랬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으로 오실 때 "그 몸이 죄지었던 몸이냐, 죄를 안 지었던 몸이냐?" 라는, 그런 문제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죄가 있어버리면 죄 값을 치를 자격이 안 되지요.
흠이 없는 어린양이라고 하였으니, 당연히 흠이 없이 오셔서 자체로서는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 흠 없이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주교와 개신교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마리아에게 원죄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처럼'이 아니라 진짜 인간이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마리아라면, 마리아에게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예수님이 마리아의 그 죄가 전가될 것인가 말 것이냐의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는 몸으로 오셨다고 해도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는 몸으로 오셨다면 우리의 죄를 대신할 자리, 어떤 그릇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의 죄를 내가 가져갔다" 라고 할 때에, 처음부터 죄 없는 상태에서 태어나서 자라면서 죄를 가져갔느냐, 아니면 처음부터 죄 있는 채로 태어났느냐는 것입니다. 죄 없는 채로 태어났다면, 일단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죄는 안 가져 간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 이후에 예수님의 동시대 사람들의 죄는 십자가로 대신 가져가는 것이 되지만, 죄 없이 태어났다면 마리아의 원죄를 인수하기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말을 바꾸어서 말한 것입니다. 어떤 책에선 로마서 8:6절의 말씀처럼,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왔다고 하다가, 막상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죄 없는 상태가 되어야 죄를 대속할 수 있다고 하는 헷갈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공격을 받았는데, 그런 공격을 받으면서도 상반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면 예수님의 어느 부분으로 대신 하셨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롬 8:6)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목사님의 죄를 예수님께서 가져가셨다고 하면 어디에 가지고 가셨을까? 예수님의 영혼 속에 가져갔다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그렇게 하면 큰일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혼은 죄 있는 영혼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죄를 대신 지셨는데 그 대신 지심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대신 지셨는데, 그런데 행동하시는 것은 전혀 죄 없는 행동이 나오잖아요. 이것은 지금 시비 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동에서는 죄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4:15절에도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분명히 나오잖아요.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의 행동에는 죄가 없어요. 그러나 그 속에는 죄가 있잖아요. 다시 말해서, 존재론적으로는 죄가 있고 행위로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행위란 어디에서 나옵니까? 다 그 존재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같은 존재에서 나왔는데 죄 없는 행위가 나왔으면, 그러면 그 존재도 죄가 없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죄를 대신 지셨다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붕' 떠버린 느낌이 아닙니까? 어느 대목에서 예수님이 죄와 함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을 머리 좋다는 루터나 칼빈이나 이야기 한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2000년 역사상 한 명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믿으라는 것입니다.
◈ 조선시대 사람은 다 죽으면 어디로?
그게 어저께든가요? 어제 우리 주일학교 학생이 우리 집사람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데 이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사모라서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집사람이 안심이 되었지요. 틀려도 괜찮으니까 말입니다. "조선시대 사람이 참 불쌍해요 그때는 목사도 없었고 복음도 없었으니까, 조선시대 사람은 다 죽으면 어디에 간 것입니까?" 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제 아내가 목사 딸인데, 제 아내가 어릴 때에 그런 질문을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제 장모님이 부흥회를 많이 다니셨기에 대답이 그들은 양심심판을 받는다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제 아내가 마침 그 말이 생각이 나서 대답을 해주었더니 아이가 미심쩍어서, 사모니까 말입니다. 설교를 마치자 말자 자기 엄마를 통해서 제게 물어왔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죽어서 어디로 갔습니까?" 라고 해서, "하나님 품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이 지옥이란다" 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 사람이란, 하나님이 만든 인형 !!
사람이란 하나님이 만든 인형입니다. 인형이 갈 곳이 어디입니까? 인형이 마땅히 갈 주인집이 있어야지요. 그런데 주인집은 방이 두개 있잖아요. 하나는 천국 방이 있고, 하나는 지옥 방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지옥 방의 인형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따로 인형을 제작하신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안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맨 날 하는 소리가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뭐가 불쌍합니까?
나중에 인간론을 마칠 때에 나오게 됩니다만,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하나님 형상 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제조하십니다. 그러니 그 아이는 무엇을 모르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왜 제조하시는가?" 하는 그 목적을 싹 빼버리고, "현재의 인간이 앞으로 어디에 갈 것인가?" 하는 것을 물은 것입니다.
왜 흔히들 복을 받아서 천당에 간다고 하면, 이럴 때에 자기는 꼭 천당에 가는 것으로 간주하고 말하지요.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가는 곳에 가지 못하는 것이 불쌍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처음부터 없었는데 왜 있게 되었는가?" 라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재 있는 것으로 말을 하니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 창세기 3장 이후 - 여자의 후손, 즉 하나님의 형상이 주도권을 쥐면서 싸움에 등장 !!
이미 창세기 3장 이후에 들어오면 인간에게 주도권이 없고, 하나님의 형상도 없습니다. 주도권이란, 여자의 후손, 즉 하나님의 형상이 주도권을 쥐면서 이제는 싸움에 나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마귀와의 싸움에 나서시기 위하여 제작에 나서시는 것입니다. 시나리오를 짜 나가는 것입니다. 그 싸움을 위하여 한 쪽에는 여자의 후손이라는 인간이 있고, 한 쪽에는 뱀의 후손이라는 인간들이 제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장보고를 그린 드라마 '해신'을 아시지요. 해신이라는 드라마를 위해서, 배도 만들고, 칼도 만들어야 되지 않습니까? 제작을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이후가 되면, 이제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낭만을 잊어버리세요. 잊어버리고 창세기 3장 이후는, 하나님이 내세우시는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그분을 인하여, 그분을 위하여, 그분을 목적으로, 그분을 바라보면서 세상은 진격 진격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14절부터 봅시다. 여기서 아들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아까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에 직접 하지 말라고 하였지요. 반드시 사도의 해석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라는, 그걸 꼭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왜냐하면, 사도가 해석하면서 예수님의 말씀만 해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속성, 위치, 본질,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 사도들이 신학을 꽉 쥐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자기 해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계시를 받아서 성령을 받아서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사도의 말을 거역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예수님에 대한 속성과 그에 대한 계획을 들어야 합니다. 듣는 정도가 아니라 복종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안에서' 라는 말이 너무 어려운 말이라서, 다음시간에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조금 전에 어떤 방이라고 했지요? 그 방 속에 들어가는 것이지, 죄 사함을 자기가 소유할 자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이후로는 우리에게 소유가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구원을 소유했다" 라는 것이 허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죄를 소유했다' 라는 것도 아닙니다. 죄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안에 있으면서 죄의 영향을 받고 죄에 굴복을 당하는 것이지, 우리가 공기를 소유할 수 있습니까? 공기 안에서 공기를 마시면서 살지, "너는 공기 몇 리터 가졌느냐, 너는 그만큼 소유하였으니 얼마나 더 살겠구나" 라고 하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산소호흡기 만들어서 공기를 가진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사람들이 죄를 짓고 나서는 독자적으로 계산하는 것입니다.
◈ 영역개념 - 내가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가?
이렇게 독자적으로 계산하면서 양적으로 계산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느 정도로 거룩하냐? 영생은 어느 정도며 성화는 어느 정도냐?" 라는 식으로, 자기의 존재와 존재권 사이에서 소유의식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영역개념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지금 사우나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그 뜨거운 열기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열기에 쌓여있고 열기에 놓여 있습니다. 사방에서 열기가 마구 쏟아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에 의하여 쏘임을 받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의(義)의 대상이 되고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요한일서 4장에 의하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 인간은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 !!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랑개념과 주님의 사랑개념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개념은 소유개념이고 주님의 사랑개념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사랑을 포기해야 하는데 어떤 경우에도 그것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을 찌르듯이 하나님의 의로 찔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악과에 속하였기에 "이것이 선일까, 악일까?" 하고 있는데, 그 선과 악을 마늘 찍듯이 찍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걸을 때마다 "내가 기차를 놓쳤는데, 이것이 옳았을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라고 있는 뒤통수에다가 마늘 찍듯이 윙하고 찍어버리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슨 의미냐는 말입니다. 차를 놓쳐도 하나님의 의안에 안 놓쳐도 하나님의 의안에 있는데, 우리는 그 의를 쳐다볼 생각은 하지 않고 항상 "이것은 내가 잘했을까? 이 행동은 못했을까?" 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사도가 보았던 예수님과, 우리가 보는 예수님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지금 골로새서 말씀 보다가 이렇게 나왔는데 15절부터 다시 봅니다. 15절에 보면, "예수님이 먼저 태어났다 - 그래 어쩌라고, 먼저 났겠지" 라고 하면 우리하고 관계가 없는데, 그런데 그 뒤에 16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만물이 주를 위하여 !!
무슨 뜻입니까? '만물이 주를 위하여' 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지옥에 갈 인간들도 주를 위하여 지옥가야 되고 지옥 가기 위하여 조선시대 사람들도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종대왕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필요해서 만드셨고 그리고 지옥으로 보내신 겁니다. 양심심판이 아닙니다. 즉 "너 잘못되었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율법은 저주 구덩이를 만들어낸다 !!
사실 양심 심판이란 것은 하나 마나 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2장에 보니, 이 양심이 이방인들에게 율법적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적 기능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율법적인 기능을 어떻게 말하는고 하니, "이것은 옳다, 저것은 나쁘다" 라는 것을 율법적 기능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율법적 기능은 없던 죄도 만들어내는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저주가 없으면 필요가 없습니다. 저주 구덩이를 유발시키는 것이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이 율법이 들어오면 저주가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죄가 있는데 율법이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이단소리 듣겠지만, 율법이 우리의 마음도 만들고 '나' 라는 자아도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바쁠 때는 자아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가할 때는 좀 다르지요. "내가 누구인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아도 만들고, 그 자아에다 죄도 만들어 내는 것이 율법적 기능인 겁니다. 율법이 그냥 노는 게 아니라, 율법적 기능은 없던 죄도 만들고 없던 마음도 만들고, 그 마음에다 죄도 집어넣는 그 일까지 몽땅 다 하는 것이 율법적 기능이라는 말입니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라는, 어디서 많이 듣던 가사이지요! 최백호가 노래한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시장바닥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고 채소를 팔고 있는 그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에게, "할머니, 지금 할머니 마음에 어디에 가있나요?" 라고 하면 할머니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이게 지금 바빠서 죽겠는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은 한가할 때, 그리고 어떤 심각한 위기가 닥쳤을 때, "내가 왜 사는가?" 싶을 때에, 그때 잠시 등장하는 것이지, 평소에는 자기 마음과 자기 자아에 대한 생각도 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하는데 옆에서 아이가 똥을 사보세요. 얼른 기저귀 치워야지, "내 마음은 어디에?" 라고, 그런 생각할 틈이 어디에 있습니까?
◈ 인간의 마음이란, 율법이 만들어낸 그때 그때의 그림책 !!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이란 율법이 만들어낸 그때 그때의 그림책입니다. 아침 마음 다르고 저녁 마음 다르고, 이렇게 그때 그때마다 다르게 만들어내고 영글어내는 하나의 꿈이고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있다고 간주하고, 거기에 착한 것만 고운 것만 "나는 이슬만 먹고살아야지' 라고 하면서 순수한 것만 지고지순한 것만 담으려고 해보세요. 그러면 그 마음자체가 자기 의(義)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원래의 마음을 만들 필요도 없는데, 괜히 만들어놓고 착한 마음이 되려고 그기에 하얀 마음이니 푸른 마음이니 하면서 그려 넣으려고 하니, 개념이 잘 안 잡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목사님을 닮을까? 한경직 목사님을 닮을까? 주기철 목사님을 닮을까? 저 사람을 모델로 삼을까?" 라는 방식으로 자기 마음에 담으면서, "하나님, 제가 이렇게 착하게 살아가는데 저를 팍팍 안 도와주십니까?" 하는 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안 도와주니 화나서 삐져 있고 말입니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 성경에서 인간은, 그냥 육이고 몸이고 그것이 전부 !!
성경에서 인간의 마음이란, 인간에서 나오는 하나의 표상에 불과하지, 성경에서는 마음자체라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은 그냥 육이고 몸이고 그것이 전부입니다. 거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 마음이고 영혼이라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안 보고 인간 쪽에서 다가서니까, 영혼도 있어야 되고, 육도 있어야 되고, 혼도 있어야 되고, 그리고 이것을 조립해서 '혼'과 '육'과 '영'의 세 부분으로 되어있는 것을, "예수여, 제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라고 하면서, 조직신학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싸우고 난리를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생각들을 하는 자체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다 율법이 만들어내는, 즉 법적으로 신학적 체제를 갖추어 보겠다는 욕심에서 나온 탐욕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나는 여기 있다. 어떻게 구원받을까? 예수 믿어야지!" 라고 하는, 이것 자체가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 죽어서 어디가지? 예수 믿어야지!" 라는,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 잘못되었는가하면, "'너'라는 '너'가 없었는데, 원래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있게 하심으로 생긴 몸이 있을 뿐인데, 즉 나는 없다" 라는 말입니다.
◈ 성경에 과연 '나' 라는 것이 있는가?
말이 너무 어려워서 죄송합니다. 현재 우리 몸이 이렇게 잡히잖아요. 그래서 꼬집으면 아프잖아요. 그런데 왜 없어요? 예수님께서 몸을 만드셨지요. 예수님이 몸을 만드셨는데 여기서 '나' 라고 끄집어낼 '나' 라는 것이 엉뚱하다는 겁니다. 성경을 보세요. 거기에 '나'가 어디에 나옵니까? 예수님과 예수님이 만드신 몸이 있지, '나'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근호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목사든 교인이든 일반이이든 모든 인간은 이미 죄를 지었기에 항상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어디서 왔는가는 생각하지 않고, 나는 구원받아야 해, 행복해야 해, 평안해야 하고, 그 평안이 강같이 흘러 차고 넘쳐야 하고, 비록 가정은 엉망진창이지만 내적인 기쁨을 맛보아야 돼! 나는 이렇게 되어야 돼! 나는 사랑 받아야 돼! 하나님으로부터" 라는 것입니다.
'나' '나' '나'가 있는 이런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서 접촉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없는 '나'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고 끄집어 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삽시다. 다윗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시면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는 인식자체가 이러하니 사실 손을 어디서 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인형처럼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제가 창세기 1장과 2장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으로 돌아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아가도 이미 하나님이 먼저고 그 다음에 생긴 것이 우리입니다. 우리가 왜 있습니까? 하나님의 창조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피조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 단독적으로 '나'를 규정짓지 말자 !!
이 말은 단독적으로 '나'를 규정짓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단독적인 '나'를 먼저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어 있는 '나'로 뒤에다 집어넣으라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나는 지옥 가야 돼!" 라고 하면서, 뒤에 집어넣으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디 그렇게 인간을 보았습니까? "나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옥에 가야해" 라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 그런가요? 그런 사람들은 지금까지 제가 말한 모든 것을 다 절단시키고, '나'부터 출발하였기에,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지옥에 간다는 말을 도저히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농담으로도 말입니다.
◈ 구원받은 자 -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나는 누구인가?' !!
그러므로 '나'부터 출발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출발한 사람들 중에 지옥 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을 생각하는 그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위한 나' 라고 '나'를 제일 뒤에 집어넣어야 하는데,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된다" 라고 하면서, '나'를 앞에 집어 넣어버리면 뒤에 숨으라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뒤따라오는 예수는 뭡니까? 자기의 똘마니(?)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내가 목사다" 라고 자신을 뒤에 집어넣어야 하는데, 그런데 "나는 교회를 세워놓았는데, 주님은 무엇으로 도와주렵니까?" 라고 나오면 곤란하지요. 정말 곤란하지요.
◈ 예수 안에 있으면 얻을 것 다 얻은 것이다 !!
여기에 대하여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호되게 다루실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뒤에 것이 앞에 오고 앞에 것이 뒤에 가도록 호되게 다루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개척교회를 몇 번 말아먹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말아먹더라도 구원을 받았으면 다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고생했냐는 것은 사실 사치인 것입니다. 그것을 따지는 자체가 사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론'으로 접근해 가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구원을 받았으면 얻을 것은 다 얻었다는 겁니다. 즉 예수 안에 있으면 얻을 것 다 얻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욕심내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반적인 조직신학에서는 허용이 안 되는데, "구원은 기본이고 보너스로 어떤 혜택을 받을 것인가?"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종교이지 성경에서 나온 복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힘들어서 한 5분 쉬겠습니다.
2005. 5. 12일 오전 10:55분 이장우 녹취.
인간론 2
◈ 예수님은 인간을 개별적으로 보지 않고, '아담 안'으로 !!
"사람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은 예수님 앞에서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입니까?" 라는 말은 성립이 되는데, 그런데 "사람은 무엇입니까?" 라고, 이렇게 묻게 되면, 처음부터 예수님은 인간을 개별적으로 보지 않고 '아담 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아담아, 내가 만든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라고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에서 물으시는데, 이것을 어떤 유명한 신학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간은 개별적으로 있지만 혼자 있지 못하고, 관계와 더불어 일어선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쉽게 말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릴 때에 이런 놀이 한 적이 있지요. 꼬마 때에 "철이야 어디 있지" 하고 물으면, 이불 속에 가만히 있다가 웃으며 일어나는데, 이불과 함께 벌떡 일어나지요. 즉 이불과 함께 인간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어릴 때 이런 놀이를 해보셨지요? 아니면 저만 했나요? 이 놀이처럼 이렇게 우리 주변에 있는 사건들과 정황들과 더불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것이 다 이렇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누구에게 질문을 던질 때, 질문을 한 그 의도가 모두 다 어떤 것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런 질문을 하면서 질문에 연결된 의도를 교묘하게 은폐합니다. 이것을 숨겨 버리고 단지 자기 관심이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물었다" 라고 하면서 자기를 연출하고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즉 주위에 있는 친구들과 가족들을 고려해서 함께 일어나는 의문들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고, 이 사건을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 인간은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행위도 뭔가 노리고 !!
말이 좀 어렵게 되는데 쉽게 하면, 사람이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행위도 그냥 마시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노림수를 가지고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게 되는데, 그 목적과 노림수 라는 것은 새롭게 지어낸 것이 아니라, 주변에 이미 자기가 알고 있던 것, 궁금했던 것, 그리고 기대하던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일어나는 행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인과 차를 마실 때도 기분이 좋은 때는 부드럽고 곱게 마시는데,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서 기분이 나쁘면 함부로 마시는 것입니다. 똑 같은 차를 마시는데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 하이데거 - 우발적인 사건 !!
'하이데거' 라는 유명한 철학자는 이것을 가지고서 '우발적인 사건' 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발적인 사건이란, 이 세상이 개체가 아니고 우발적인 사건과 더불어 모든 것과 연관지어서 더불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 복음서 - 예수님은 우리와 대화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가지고 우리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특징이 무언가 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대화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느꼈습니까? 다시 한번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오셨지 우리를 불러서 의논하고 대화해서 어떻게 해보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통보하려고 오신 것이지 말입니다.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미 땅에 대하여 훤히 꿰뚫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꿰뚫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입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즉 성경을 성취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예수님 등뒤에 당기고 오시는 것은, 모든 성경 말씀, 즉 전 우주의 목적을 다 성취하시려고 우리 면전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개별적으로 자기가 하는 일, 자기 코앞에 있는 일, 자기만의 일, 그것 밖에 모르는 우리와 엄청난 주님과의 마주침인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바로 이런 마주침이지, 우리가 그 앞에서 무언가 의논하고 협조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고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공격하셔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말씀을 펼치면서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 세상에 지혜가 무엇인가 배워볼까?" 라고, 이렇게 하지 마시고, "주여, 또 치시옵소서. 제가 당하겠나이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보는 바람직한 태도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모두 악하다고 전제하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요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그러니 그 속에서 우리의 선한 것을 내세우려고 하지를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공격하러 오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가 하면, 이번 두 번째 시간에는 예수 안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하는데,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가 하면, "구약-십자가-신약-계시록"이 있다면, 이미 구약 때에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는 것입니다.
성전도 짓고, 십일조도 하고, 기도도 해보고, 금식도 해보고, 바리새인들이 이레에 두 번식이나 금식도 하고, 구제도 하고, 십일조도 하고, 할 것 다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자기를 때리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 해보았는데 그것이 결국 실패라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 모든 것을 다 해보았지만 결국 실패라는 것입니다.
◈ 구약 - 인간 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어서 실패를 할 수밖에 없었던가 !!
그런데 이 실패한 그 실패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 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어서 인간이 실패를 할 수밖에 없었던가를, 사실 우리는 그것을 감추고 싶었는데, 주님은 그것을 폭로시키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아모스서 5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다윗처럼 기타를 치고 찬송해도 그것도 소용없고, 절기를 지켜도 아무런 소용없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를 다 동원해보았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 전체를 통해서 증거하는 바이고, 인간이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명확한 판정만을 받은 것입니다.
(암 5:5)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그러므로 "왜 인간이 안 되는가?" 라는 질문은, 다윗도 부활되지 못하고 무덤에 그대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다윗도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왜 인간이 안 되는가를 예수님과 부딪힘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이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즉 뚜껑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 인간의 내부 - 하나님이 미워요 !!
이렇게 뚜껑을 열어보니까, 라면이 끓듯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 이라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적개심, 적개심 하니 "공산당이 싫어요" 하는 적개심이 생각나는데, 신에 대한 미움, 반발심이 뚜껑을 닫아서 그렇게 뚜껑을 열면 항상 이것이 노출된다는 것입니다. 신 자체가 하나님이 미운 것이지요. 미운 감정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미운 감정이 섞인 체 말씀대로 기도하고, 말씀대로 전도하고, 말씀대로 찬양하고, 말씀대로 예배 참석하는 것을 백날을 해보았자, 그 미움이 함께 섞여서 도출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미움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늘 폭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산의 마그마처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가 인간인 것입니다.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
그러면 어째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폭발하는 말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서 끊어지고 그 다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흙, 흙의 형상, 아담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즉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다음부터 모든 인간의 삶은 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악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귀환의 생애를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씩씩거리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의료보험이나 생명보험을 해도 다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 가인 - 씩씩거리면서 돌아가는 인간의 대표 !!
그 대표자가 바로 '가인' 이지요. 씩씩거린다는 사실을 본인이 몰랐습니다. 이렇게 몰랐는데 언제 알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당장 드러난 것입니다. 그 여파가 누구에게 미친 것입니까? 가만히 있는 동생을 돌로 쳐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가인아, 죄가 너를 덮친다' 라고 하셨습니다. 즉 덮친다고 하신 대로 덮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데 자기 속성을 거부할 수 없게 작용하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죄를 즐기고 죄를 원하고 있습니다. 죄 짓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은 위선이고, 정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죄를 짓고 싶어서 환장한다는 것입니다.
◈ 목사의 설교 - 여러분은 죄를 짓고 싶어 환장하고 있습니다 !!
목사는 이걸 교인들에게 여러분들이 설교를 해주어야 합니다. 죄를 짓고 싶어 환장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걸음자국 자국마다, 자신의 속에 있는 죄가 휘발유가 되어 가지고 발동기를 돌리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교회도 가고, 그 교회 간발로 볼링장도 가도, 골프장에도 가면서 씩씩거리는 것입니다.
이러니 하나님의 처사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자기에게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이 저 사람에게 가야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와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것을 잘 모르지요. 내가 한 수 가르칠까요? 저 복은 나에게 와야 되고, 저 인간은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지금 잘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지요.
"하나님, 저 이단은 벌써 심판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 이것은 잘못되었습니다" 라는 식으로 따지고, "하나님, 김일성으로 끝내어야지 김정일로 물려주면 우리민족의 통일이 안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지금 일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늘 나오지만, 그것을 평소에는 감추고 있습니다. 행여나 그것이 들키면 성질이 안 좋은 하나님께서 벌주면 안 되니, 평소에 항상 감추면서 아닌 척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 들키는가 하면, 분명히 자기는 최선을 다했는데, 거기에 대한 마땅한 보상이 적당치 않을 때는 폭발해 버리는 것입니다.
언제 말입니까? 교통사고가 나서 장애인이 될 때, 가게가 무너질 때, 애가 학교에서 맞을 때 말입니다. 때릴 때는 괜찮은데, 성적이 떨어질 때, 시험에 떨어질 때, 운전면허 여섯 번 떨어질 때, 기차 놓칠 때, 이럴 때에 평소에 하나님에 대하여 싫었던 감정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 요나서 - 북쪽 이스라엘이 변질되어 있음을 대변 !!
그 대표적인 사람이 성경에서 나오는 '요나' 입니다. 요나 알지요? 구약의 요나 선지자 말입니다. 요나서 1장, 2장, 3장을 보고서 덮어버린 사람은 요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4장을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무엇이 나옵니까? 니느웨가 회개해서 심판이 면죄되니 누가 죽으려고 했습니까? 요나 선지자가 삐져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 제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어떤 암시도 주지 않았지 않습니까? 제가 무슨 재미로 선지자 노릇을 합니까? 점치는 놈이 점이 틀리면 점치는 노릇을 못하게 되는데, 선지자의 예언이 틀려 버리면 선지자 노릇을 못하게 되는데, 못하게 되면 그동안 선지자라고 우겼던 자신의 위신과 명예와 체면은 도대체 누가 보상해 주는 겁니까? 그동안 충성스런 개처럼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모든 일을 다 했는데, 지금 와서 하나님께서 나를 차버리면 나의 자존심과 위신은 어디에서 찾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요나서의 핵심입니다. 이만큼 북쪽 이스라엘이 변질되어 있다는 것을 요나를 통하여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의 핵심인데, 이 요나서를 가지고 선교신학이 어떠니 해외 선교를 하자면 요나를 본 받으라고, 이상한 소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선교라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자체에 선교란 성립이 안 됩니다. 이것은 또 무슨 이상한 소리하느냐고 하지만, 자기가 여기서 저쪽에 갈 때는 선교가 성립이 됩니다. 여기 있는 복음을 저기 옮기겠다는 것이 성립이 되는데, 그런데 저기 있는 복음이 여기로 오면 선교가 안 되지요?
◈ 선교의 주체는 언제나 주님 !!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자기가 지금 목사인데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하면 일반교회에서 이것을 중국에 선교한다고 하지요. 이런 선교란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한국에 있는 자기를 중국에서 훈련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선교가 아니지요. 같은 예수님의 장에서 이곳에서 훈련을 받다가 저곳에서 훈련받는 것입니다.
첫째 시간 마지막에 한 것 벌써 다 잊어버렸지요. 자기가 선교한다면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선교를 당하는 나'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중국에 보냅니까? 그러니 선교는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내가 하는 선교가 되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꾸 내가 선교한다고 생각하니 고국으로 돌아오려고 하잖아요. 자꾸 돈을 달라 하고, 이상한 사진 찍어 보내고, 본 교회 와서 헌신 예배하면서 돈 달라고 하고, 무슨 앵벌이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 놀고 와서는 말입니다.
주님의 선교라는 것은, "나는 예수 믿었으니 나는 빼놓고 저쪽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교와 전도는 택한 백성의 범위를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 택하신 자에 대한 전도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즉 "오늘은 네가 여기서 고생했으니 내일을 저기 가서 고생하라" 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만약에 여자 같으면, "지금까지 15년 동안 이 남자하고 결혼하여 선교하였는데, 이제는 이혼하고(?) 저 남자하고 선교하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찌 표현이 좀 이상합니까? 아무튼 주님은 이런 방식으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택한 자는 주님이 알아서 책임지고 선교하시는데, 이걸 가지고 자꾸 교인들보고 선교 안 한다고 닦달을 해대니 교인들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교인들이 바빠서 못하니 어떻게 합니까? "그냥 돈만 내라" 라는 것입니다. 돈 받아서 자기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선교사들이 그것으로 먹고살지 않습니까?
첫 시간에 한 것을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사고방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나를 여기에 있게 하신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시키시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자기가 주인이 아닙니다. 말로는 "주, 예수여!" 라고 잘도 하지요. 말로는 이렇게 하고서는, 항상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버리니, 그것이 무슨 주 예수냐는 말입니다.
◈ 예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시키시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시키시는가?" 라는 것이 항상 관심이 집중되어야 하는데, 이미 창세기 1장과 2장은 물 건너가고, 창세기 3장 이후에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이 되었는데,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의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창세기 1,2장을 찾으면 안 되고, 이제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지요? 사는 것만이 아니라 죽는 것도 주의 일인 것입니다. 죽는 것도 선교라면 스데반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감독이 엑스트라에게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지, 총을 14발이나 맞고도 죽지 않고 살아서 벌떡거리면 무슨 그런 영화가 다 있느냐는 것입니다. 실제 그런 영화도 있다구요? 아무튼 죽을 때는 빨리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나 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로 하나님께 섭섭할 때가 언제인가 하면, 아까 말한 그 '적개심' 이라는 것이 언제인가 하면, 아무도 모르게 조용하게 죽어간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 와서 꽃 한 송이 꽂아주는 사람도 없이 한 15년쯤 지나가 "그 사람은 죽었는가? - 죽었단다" 라고 하면, 동네 개죽은 것처럼 취급당할 때 가만히 생각해보면 분통터지는 것입니다.
◈ 이근호 목사가 죽었단다 !!
살아있을 때 좀 안 알아주더라도, 죽었을 때는 다음에 좀 뜨고, 크로스 빌리지에 이근호 목사가 죽었다는 소식도 뜨고 해서 찾아와서 부조도 좀 하면 딸내미에게 좀 주기도 하고, 그래야 할 텐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한 15년쯤 지나서, "그 사람 어떻게 되었노? - 벌써 죽었단다 - 아, 죽었구나" 라고 하고서, 15초만에 그 이야기 끝내어버리면, 이근호의 위신과 체면을 어디서 찾느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평소에 하나님 예수님 백날 부르짖어도 그 속에는 자기가 왕초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세세히 끄집어내시는데 우리 주님이 도사라는 것입니다. 이러 것을 어떻게 끄집어내시는가 하면, 똑 같은 기적을 두 번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기적은 일회용 !!
예수님은 어린이 도시락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린애의 그 도시락을 늘 가지고 다녀야 합니까? 물론 가지고 다닐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은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한 번 기적은 일회용입니다.
요즈음 환경문제로 일회용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데, 주님은 진짜 일회용을 무엇이나 다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수십 년 전에 감기가 들어서 기도해서 낳았다고 해서, 그런데 또 감기가 들어서 기도하였더니 나았다는 것은, 그것은 마귀가 한 짓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번 다시 같은 기적을 베풀지 않으니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인간이 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기적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하였는데 일어났을 경우에, 주님의 은혜로 일어난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상한 기적이 일어나면, 예상했다는 인간의 자기 공로가 섞여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주님의 공로가 아니라 마귀의 장난이고 말입니다.
◈ 지키는 것도 행함이지만, 안 지키는 것도 일종의 행함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성경은 우리가 지켜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사람들이 성경은 아예 지키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지키든 안 지키든 상관없이 구원된다고 하니, 그 사람들이 머리를 굴려서 "안 지켜도 구원을 받는데, 굳이 내가 무엇을 하려고 지키는가?" 라고 하면서 안 지키는 쪽으로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의 행함인 것입니다. 지키는 것도 행함이지만 안 지키는 것도 행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제 삼자가 주어서 구원받는 것이지,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살았느냐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믿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행동여하에 따라 구원이 된다고 여기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농땡이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열심히 말씀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여기는데, 그러나 둘 다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 목사님, 다 좋은데 그것만은 !!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오늘 아침에 목사님의 강의 녹취를 보았는데 참 산뜻하고 매끄럽고 복음적으로 잘 전하고 있습니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좀 삼가주셨으면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한국교회 90%가 썩었다고는 말은 좀 하지 말고 복음만 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엘리야가 자기만 남았다고 하는 것처럼 목사님도 교만을 떨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이야기 제가 수백 번도 더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지금 엘리야 같으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만 아니라 다른 괜찮은 목사가 있다고 엘리야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로마서 11장의 말씀그대로입니다. 사람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을 엘리야가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제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 하니, 이 이야기는 생각지 아니하고 "너만 목사냐, 너만 복음 아느냐" 라는 것으로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하시는 분이여, 제발 주님의 은혜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에 복음을 전하는 어느 목사가 있다면 그 목사와 함께 모여서 계모임 할까요? 그것도 또 하나의 집단이 되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모여서 우리는 복음 아는 목사라고 해서 노회를 만들었는데, 그 모인 목사를 누가 관리합니까? 자기가 스스로 관리합니까? 여러분이 관리합니까?
어떤 사람은 복음 안다고 하고서는 15년 뒤에 떠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누가 관리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관리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함께 모여서 "우리는 복음을 안다. 죽어서 천당 갈 때까지 우리는 함께 한다" 라고 하다가도, "나중에 복음이 무언데?" 라고, 그렇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확증하느냐는 것입니다.
◈ 지금도 주님이 전도하고 계신다는 그 사실을 기뻐하자 !!
그러므로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떠하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교회가 괜찮은 교회인가를 바라보는 그런 재미로 살지 말고, 지금 주님이 선교하고 계시고, 전도하고 계신다는 그 사실을 기뻐하면 그만 이라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끼리 모여서 한국교회를 개혁하자는 자체도 행함 !!
그러면 "부천에 어떻게 이런 교회가 다 있는가!" 라고 하면서 고마움과 감사와 기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울산에도 저런 교회가 다 있다니" 라고 하다가 한 5년 뒤에 다르게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끼리 모여서 한국교회를 개혁해보고자 하는 그 자체도 저는 행함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위의 주체가 주님이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환상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도하다가 그 일이 안 되면 속에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또 주님에 대한 적개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나는 주님의 일을 못합니다. 이렇게 해도 안 도와주시는데, 나는 주님의 일 때려치우고 장사나 하렵니다" 라고, 이렇게 나올 것이 뻔한데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구약에서 인간들이 다 해본 일입니다. 사실은 인간들이 해보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 시키신 것입니다. "성전을 지어라. - 예! - 거기서 제사를 지내라. 그러면 죄 용서해주겠다. - 예!" 라고 해서, 그들은 제사를 잘 지내겠습니다. 이렇게 이미 다 해보았다는 것입니다.
◈ 유대인들의 실패 -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에서 인간은 개입불가 !!
그러나 이러한 구약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성전을 짓고 제사를 지내면서 말씀을 지키겠다던 유대인들은 모두 다 실패를 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그것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에서 사람이 개입할 수 없는, 그 원칙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본문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읽습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여자의 후손 - 인간으로서는 배태가 되지 않는다 !!
여기서 '여자의 후손' 이란 것은, 인간으로서는 전혀 배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이란,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하나님에 의하여 태어날 자가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이란 예수님인데, 마지막 때에 여자의 후손을 노리고 악마가 달려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 유대인들은 - 그 여자를 알아야 후손을 알 것이 아닌가?
그런데 여자의 후손이 예수님이라고 할 때 우리의 사고방식이 무언가 하면, "그래, 여자의 후손이면, 그 여자가 누구냐?"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를 알아야 후손을 알 것이 아니냐?" 라는 질문이 형성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이란 역사상 나중에 마리아의 몸으로 태어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여자란 하와입니까, 마리아입니까? 둘 다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왜 하나님의 말씀을 못 지켰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으로 출발해서 나오는 말씀인데,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령을 받지 않아서 그렇게 볼 수 있는 아이디어가 없기에, 그냥 역사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 이라고 말하면, 누가 보아도, 즉 어린아이가 보아도 그 여자는 '하와'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당연히 그 하와의 후손으로서 연결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은 후손이 그 여자를 규정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여자가 먼저 있어야만 그의 배에서 후손이 나올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지금 분위기가 제 말을 아무도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
◈ 다윗이 메시아를 주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 되겠는가?
이 논쟁은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있었던 논쟁으로 제가 지어낸 논쟁이 아닙니다. 메시아가 누구의 후손으로 오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메시아를 주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 되겠느냐고 되물으시자, 바리새인들이 답변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장차 올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는 말은 다윗이 생각한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눅 20:41)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눅 20: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눅 20: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 유대인들의 한계 - 다윗의 틀까지만 !!
다윗까지 알았더라면 다윗의 틀에 맞는 후손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까지는 누가 알았습니까? 유대인들이 알았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누구 틀에 있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틀에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다윗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알고 있다면 장차 메시아가 어떤 식으로 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되어 있는데, 그러니 예수님은 베들레헴 사람이 아니기에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는지 꼼꼼히 생각해보세요.
(요 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사실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어요. 이미 아브라함이 약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면, 다윗이 약속한 그 사람이어야만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예수는 다윗이 약속한 그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니고데모의 방문 - 말씀의 경찰관 !!
요한복음 4장에서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 왔잖아요. 니고데모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말씀의 경찰관인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하는 일은, 민중들 속에서 말씀에 어긋나는 자들을 색출해서 법에 있는 대로 돌로 쳐죽이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때 강사가 성경책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이유는? ???
그런 사람이 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여, 당신은 스승입니다" 라고 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하면 천국을 볼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다" 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내용은, 그들이 배워온 아브라함으로부터 줄줄이 내려온 그 신학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신 "다윗의 후손이 어떻게 다윗의 주가 될 수 있는가?" 라고 하시는 질문은, 바리새인이 절대 담을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입장에서 거꾸로 구약을 봐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깨어지는가 하면, 착실하게 역사적으로 다지고 다져왔던 모든 신학이 다 무용지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자는 것도 엉터리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할례를 행하였고, 그 할례를 행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너희 아비는 마귀이다"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때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당신이 그렇게 주장하는 해석의 근거를 보여라" 라고 했습니다. 할례를 행하는 자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는 근거가 창세기 17장에 있는데,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고 하는 그 해석을 근거를 대보라는 것입니다.
(창 17: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창 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 17: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예수님의 해석은, 아브라함이 자기를 보고 기뻐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56절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라고, 정말로 엉뚱한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요 8: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7)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요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정말 아브라함보다 예수님께서 먼저 계셨다면 성경책에 무엇이 있어야 됩니까? 창세기 11장에 아브라함 이야기보다 먼저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차 마리아에게서 아기가 태어나 고생을 많이 하다가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인데, 그가 예수다 기억하라"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아브라함이 보았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창세기에 실제 있습니까? 11장에는 없고 창세기 3장에 있잖아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잖아요. 여기에 여자의 후손이란 인간이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누구입니까? 인간 아닙니까? 인간인데 건방지게 그 속에 해석을 통하여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 자신 !!
쉽게 합시다. 쉽게 한다고 하고서 어렵게 하곤 하는데, 하나님이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셨습니까? 아니면 아브람 자신이 아브라함 되게 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우상 만들고 있던 그 인간을 그냥 당겨서 만드셨는데, 즉 아브람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옮기신 것입니다.
그렇게 옮기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 자신으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추상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옮겼다고, 그렇게만 본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개입하였다는 사실을 다 빼먹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서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 아브람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빼 버리고, 그들은 여자의 후손들인 본인들이 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을 하라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구경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이것을 지켜서 마귀를 이기고, 이방민족을 이기고, 그래서 언약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준 것임을 그들이 믿었잖아요. 사실 우리도 그 현장에 있었다면 우리도 그렇게 믿지 아니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과 마귀와의 싸움에 있어서, 계속하여 택한 인간을 집어넣어 인간들이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지, 그 오해는 바로 악마의 지배로 인하여 일어나게 된 현상인가를 지적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자기 택한 백성들을 데리고 다니신 것입니다.
◈ 예수님은 자기 택한 백성들을 왜 데리고 다니시는가?
이렇게 택한 백성들을 데리고 다니셨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서 데리고 다녔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들이 평소에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가를 깨우치기 위해서, 그들을 대표서 선택하여 데리고 다니신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그들에게 들어있는 죄를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울 때 제일먼저 무엇을 합니까? 제사를 드리지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사무엘상에 나오지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이미 민수기에 나옵니다. 전쟁에 나갈 때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항상 언약궤를 들고 나가야 합니다. 언약궤만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적들이 물러가게 된다고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저와 여러분이 그 현장에 있다면 무엇을 할 것입니까? 그때에 생기지도 않은 예수님께 빌 것입니까? 무엇을 하겠습니까? 성경에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사를 드리고 나서 전쟁에서 패배하고 언약궤도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 왜 사무엘에 약속시간에 늦었는가?
사울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제사를 먼저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나타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데 사울을 순종하지 않았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그 순종이란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울은 기다렸습니다. 약속 시간은 이 사무엘이 어겼습니다. 사울 자신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패배는 사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아니, 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사울이 왜 나쁘냐고 물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착하지요?" 하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입니다. 사울이 왜 나쁘냐를 묻지 말고,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신 것은, "이러므로 인간은 안 된다" 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물론 사울이 나쁜 놈이지요. 결국 사울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 이런 것들이 들어 있는데, "너에게도 들어있지 않느냐?" 라고 알리시기 위하여 사울을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 사울은 사울대로, 다윗은 다윗대로 !!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하였지요. 다윗이 잘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런데 사울은 회개하여도 안 받아 주시고 다윗은 회개하니 받아 주시고,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하나님께서 우왕좌왕 하시고 이렇게 불공평한 하나님이십니까?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다윗을 사용하신 것은, 이런 인간도 용서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의 인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사울 나름대로, 아무리 제사를 지내도 해도 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나간 업적이 다 날아 가버리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작용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울을 또 하나의 인형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보면서, "다윗처럼 되어야지 사울처럼 되지 않아야지" 라고 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왜 안 됩니까? 사울은 사울이고 자기는 자기인 것입니다. 다윗은 다윗이고 자기는 자기인 것입니다. 사울을 다루었던 그 하나님이 우리를 다룬다고 생각을 해야지, "사울처럼 밀고 다윗처럼 살자"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를 따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렵습니까?
그래서 다윗처럼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면 구원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이 원래부터 죄인이기에, 제사도 받지 않으시고, 번제도 받지 않으시고, 오직 상한 심령만 받으시구나" 라고 하는 것을, 그래서 "이것이 구원이구나!" 라는 것을 알면 되는 것이지, "나도 다윗처럼 어떻게 해야겠다" 라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다윗처럼 사울에게 행동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에게도 똑같이 구원을 주실 것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이고 엉터리냐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언약을 주시는 분이고, 하나님의 이름은 언약을 이루시는 분 !!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이름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분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데, 이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인 것입니다. 그러면 축복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오는 것입니다.
사실 이름을 부르기야 쉽지요. '여호와여!' 라고, 그렇게 부르면 엄청 쉽지요. 그러나 그렇게 부르면 안 됩니다. 부르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 중에서 번제가 있고, 그 번제에 '하나님'의 이름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과는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내가 혀가 있고 입이 있으니, 하나님을 향하여 여호와든 야훼든 부르면 응답하시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주문이고 주술인 것입니다. 그런 것은 남묘호랑게교 하고 똑 같은 것입니다. 순복음 하고 똑 같은 것입니다. 주여 3창하면 응답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기분 푸는 것이지 하나님은 꿈쩍도 안 하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이 방식을 '언약' !!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절차가 있습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20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이 방식을 '언약'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인데, 이것을 모세 때에는 모세 언약이라고 하고 말입니다.
(출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으로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그러면 노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방주를 통해서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모세 때는 모세 언약을 통해서 구원하시는데, 모세 언약에는 제사법도 있고, 그 당시 여러 가지 사회법도 있고, 십계명도 포함되어 있고,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시는데, 이런 것은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데, 문제는 유대인들이 이 언약을 인간이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 언약은,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만 이루신다 !!
모세언약은 누가 이루십니까?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이루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시는데,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율법을 모르는 자라고 요한복음 7장에서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는, "너희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 라고 하시면서, "너희를 정죄하는 자는 너희가 바라는 모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며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지 않다고 자꾸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분은, 즉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 이 세상은 자기 의와 예수님 의와의 대 전쟁터 !!
사실 처음부터 인간을 율법을 언약을 못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뿐이고, 나머지는 다 뱀의 후손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의 신에 속하여 있기에, 이 세상 신에 속한 사람들이 법을 지키게 되면, 예수님이 지키는 법의 완성과 전쟁이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의와 예수님 의와의 대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컷 지켜보았자, 하나님의 화만 돋우는 그런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약속에 땅에 들어간 것은, 자기 자신의 실패를 인정할 때 !!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모세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 그들이 약속에 땅에 들어갔잖아요?" 라고 하신다면, 그들이 들어간 것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자기가 못 지킨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때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들어갈 수 있다고 여긴 사람들은 중간에 모두 탈락되어 버리고, 오직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아는 사람들만 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놋뱀을 드는 사건인 것입니다. "쳐다보아라!" 라는 것은, "네 지은 죄를 인정하고 쳐다봐" 라는 것입니다. 자기 지은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적개심을 품었지만, 그러나 그러면서 놋뱀을 쳐다 본 자는 나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원리원칙 그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요단강 사건인데, 요단강이 흐르는데, "요단강에 들어가라" 라고 하면, 못 들어간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들어가니 요단강이 멈추어버린 것입니다.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습니다. 홍해는 열리고 들어갔지요. 그러나 요단강은 미리 열리고 들어간 것이 아니고, 열리지 않았는데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어느 편이 어렵습니까? 사실 둘 다 어렵습니다. 둘 다 말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 여리고 성 사건입니다. 성을 그냥 도는 것이 어렵습니까? 아니면 칼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어렵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기생 라합이 자기 조국을 버리고서 정탐꾼 숨겨주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그리고 완전히 망해버린 시어머니 집에 따라 가겠다고 나선 룻이 나올 때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이 세상에 아무 공로도 없는 세리와 창기가 예수 믿음으로 천국 간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힘으로 언약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자인할 때 나오는 결과들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전쟁에 우리 힘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공로와 열심과 찬양과 기도와 헌신들이 하나님의 전쟁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인할 때 나온다는 것입니다.
◈ 성도, 예수 안 -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증거할 때 !!
그러면 "나는 뭐냐?" 라고 하고 싶지요? 그러면 "나는 뭐냐?" 라고 질문할 것이 아니라, "나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 라고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증거하라고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거될 때 이것을 신약에서 '성도' 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두고 '예수 안'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모세 언약 -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
모세 언약에서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이름을 담보로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담보로 저들을 용서하여 주세요. - 좋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모세 말 들으면 살고 듣지 않으면 죽는다" 라는, 이것이 모세 언약입니다.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모세 말을 들어야 산다는 것이 언약이 된다면, 이것을 신약에 그대로 한번 옮겨봅시다.
◈ 새 언약 - 구약에서 모세 안에서 구원되듯이, 지금은 예수님 안에서 구원 !!
신약에 가면 원래 우리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구약에서 모세 안에서 구원되듯, 지금은 예수님 안에서 구원되는 것입니다. 우리 공로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의 새 언약에 들어 있는 사람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착한 행동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의 죄를 없애주고 우리를 의인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언약' 이라는 개념을 모르면 완전히 모릅니다. 만약에 언약의 개념을 모르고 예수님을 믿어 버리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니 일단 예수 믿는 것은 기본이고, 그 다음에 내가 잘해서 복을 받자" 라는 식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 그 다음에 인내, 성화, 양자, 칭의...
◈ 행함 - 내가 해야 한다 !!
이렇게 모두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되었는데 성화 단계에 들어가지 않으면 탈락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도 자기가 하고, 성화도 자기가 해야 되고, 이렇게 자기가 해야 한다는 것, 그 전체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고 '행함'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행함 속에 믿음이 포함되지요. 그러나 행함 속에 포함되는 믿음은 구원되는 믿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의 일종입니다. 자기가 믿는다는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은, 계속 행함 속에 있는 사람이지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은 하나의 인형으로 있기에, 이렇게 저렇게 꼼지락거리는 것과 상관없이 어떤 공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기의 움직임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방귀를 뀔 수도 있고, 오줌을 눌 수도 있고, 트림 할 수도 있지,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의에 좀 늦을 수도 있고 그렇지, 이게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행함에 있는 사람은 잘 나가다가 실수 한번 했다고 낙담을 해 가지고, "나는 이제 죽었다. 십년공사 끝장났다' 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목사가 나타나서, 물론 그런 목사도 없겠지만, 뭐라고 합니까?
"기도해줄까요? 기도해줄 테니 헌금이나 좀 하시오. 교회도 어려운데 양심이 있지 받아먹기만 하고 돈도 안 내나? - 그러면 저 대신에 기도해주겠습니까? - 그래 내 기도 해줄게" 라고 하면, 그 목사도 나쁘지만 그렇게 하는 인간은 아직도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으니, 그 착각을 노리고 온갖 마귀가 뜯어먹으려고 다 달려드는 것입니다.
◈ 명저 - 지옥의 하나님 !!
이번에 나올 제가 쓴 책제목이 '지옥의 하나님' 입니다. 제목이 참 멋있지요. 그 책의 내용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의 오기를 유발시키는데 어떤 오기냐 하면, 주의 종인 목사가 하는 말이, "목돈을 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평생에 성전을 한번 지어야지 이 뺀질이들아"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인들의 오기가 무엇이냐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한번 내기 해보자. 이만한 목돈을 내었는데도 불구하고 앞으로 내 팔자가 펴야지 아니하면 하나님 당신 탓이오" 라고 하는 식으로 판돈 걸듯이 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곱빼기로 얹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좋아하는가 하면, 장로나 목사입니다. 왜 그런가요? 또 한 놈 속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무엇이냐 하면 '오기' 라는 것입니다. 이 판에 하나님 있는지 없는지 한번 실험해보겠다는 것입니다. "바쳐서 복 받는다고 하니, 나도 오기 있는데 나도 한번 목돈 바쳐서 팔자가 펴지면 내 행동 잘한 것이고, 팔자가 펴지지 않으면 하나님 자체가 잘못 된 것이기에 나에게는 과오가 없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 오기를 유발시키는 목사는 악마의 하수인 !!
그러한 오기를 유발시키는 장을 누가 만듭니까? 목사가 일종의 파티처럼 그런 장을 열어준다는 것입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적나라하게 다 나옵니다. 목사와 교인이 싸우는 것 하나 하나 다 들추어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미 예수님의 전도요, 예수님의 선교인데, 왜 자꾸만 그것을 인간의 전도와 선교로 바꾸느냐는 것입니다. 무슨 권리로 말입니다. 악마가 그런 짓을 할뿐이라는 것입니다. 5분만 쉽시다.
2005. 5. 25일 이장우 녹취.
인간론 3
예수님께서 죄를 담당하실 때에 어느 부분에서 죄를 담당하셨는가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담당하셔야 하고 또 죄는 없으셔야 하시기에 예수님의 어느 부분에서 죄를 담당하셨는가에 대하여 어느 신학자도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 없느냐 하면 사람들이 생각할 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영도 있고 육도 있고 혼도 있기에 내 육체가 있으니 육이고, 마음 있으니 마음은 영혼의 자리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은 인간만의 독특한 면, 혼은 동물과의 공통점, 식물이나 광물과 다르니 동물만이 가지고 있기에 혼이라는 이름으로 부쳐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이란 인간만의 독특한 부분이기에 이 부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간주하자는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을 루터나 칼빈이 다 받아들여서 사용합니다. 어거스틴도 받아들였는데 사실은 플로티누스라는 신 플라톤 주의자가 주장한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은 육과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영혼은 세계적이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개별자이지만 보편성속에 이데아 속에 같이 합류한다는 것이 플로티누스의 주장이었습니다.
인간을 옛날부터 볼 때에 자기가 자기를 관찰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볼 때는 영원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썩으니까 말입니다. 육체가 썩으니 영원하지 못하고 가변적이라는 것입니다. 흙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 속에 무언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불 가변적이고 불멸적인 요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예지나 판단력은 동물에게는 없으니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만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인간은 따로,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다른 움직이는 동물은 따로, 그런 혼조차도 없는 그냥 존재그대로 가만히 있는 광물질로 그렇게 구별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동물도 광물도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라고 고집해서 굳혀놓고 그런 인간론에다가 누구를 끄집어 넣는가 하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고 할 때에 그 사람을 어디에다가 집어넣어야 합니까? 이미 만들어놓은 인간의 틀에다가 예수여 당신도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지요. 그러니 당신도 우리와 같이 육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이러다 보니 당신의 신성은 영혼입니까? 아니면 신성은 따로 있습니까? 아니면 인성 속에 신성이 있습니까? 이런 문제로 대판 싸우는 것이 삼위일체 논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하는 말이, 그렇다면 죄를 대신 짊어지셨다는 말은 그런 사고방식, 그런 틀에서 인간인 예수님께서-신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신이시지만 신이 죄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서 예수님이 죄를 대신 할 때는 그 죄를 담당하는 부서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이냐 혼이냐는 것입니다. 두뇌냐 팔다리냐 어디냐는 것입니까? 그런 것에 대한 답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그런 곳에 들어 가버리면 또 안 됩니다. 그런 죄가 섞여 버리면 예수님이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이 의인 맞지요? 의인 맞잖아요! 의인이라고 하면 의를 가진 인간이지이요. 그러면 예수님의 의는 인간의 어느 부분에 있습니까? 이것이 밝혀져야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하실 때에 인간의 죄가 예수님의 어디에 들어가는가가 밝혀지겠지요? 예수님께서 가지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움이 예수님의 인간론 속에 어디에 포함됩니까? 라고 물을 때에 이것이 답변이 되어 버려도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대신 지실 때에 그 죄는 의에 섞여버리는가 아니면 의는 십자가 질 때까지는 잠간 빠지고 죄가 들어 있다가 부활 될 때에 죄는 빠지고 의는 들어가는가? 이런 문제가 또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어디에서 발생이 되는 것입니까? 앞에서 말한 인간이 이렇다고 이미 정의를 내려놓은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방금 의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관계라는 말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온전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언약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때 구약에서 의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의란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하게 성취가 될 때 그것을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의인이라고 할 때에,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 세례요한은 예수님은 죄도 없으신데 어떻게 저에게 세례를 받으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개념이냐 하면 너나 나나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출현한 존재지 사적으로 의를 어디에 보관하느냐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완전한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죄인이지요! 세례요한이 왜 죄인인가 하면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나쁜 점을 또 찾기 시작합니다.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 있을 때에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예수님 당신이 메시아 맞습니까? 하면서 의심을 한 것을 죄로 말합니다. 또 어떤 죄를 찾아냅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만 전하지 괜히 정치권력자의 불륜을 지적하다가 목이 잘려 쟁반에 담겨지는 꼴을 당했다고 봅니다.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사회 정의를 부르짖었으니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이니 잘못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온갖 것을 다 끄집어냅니다.
세례요한이 죄인 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자가 아니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동시에 언약의 완성자가 아니기에 언약의 완성자를 기다리겠지요! 아브라함이 죽는 것은 죄 값으로 죽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지옥 갔습니까? 아닙니다.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불 수레를 타고 승천하였지만 모세는 죽었지요!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자기 죄 값으로 죽었지요! 그러면 모세는 지옥 갑니까? 아니지요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 하고 있었지요!
그러면 모세가 구원받는 것은 무엇 때문에 구원받는 것입니까? 언약의 완성자 되신 예수님께서 이미 모세를 장악하고 있었고, 인도하고 있었고, 아예 없는 모세를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지요! 우리가 어디에서 나왔다고요? 예수님에게서 나와서 예수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 졌기에 주님이 주시는 언약의 혜택을 입는 것입니다. 죄 사함의 혜택을 미리 당겨서 입는 것입니다. 본인이 언약 완성자가 아님을 살아가면서 알았습니다. 나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는 구나 여기서 죽어야겠구나! 그러나 그 죽는 것이 쉬는 것이고, 언약 완성자는 따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의란 언약적 관계에서 바른 언약의 완성이기에 의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대신할 죄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언약 속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언약이 완성되어야 의가 나옵니다. 이것은 믿습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언약을 둘로 나누면 한 쪽은 은혜가 나오고 한 쪽은 죄가 나옵니다. 이 두 가지가 예수님 속에 있습니다.
제가 세 번째 강의를 하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영혼 육으로 설명을 했지요. 혼은 동물과 같은 공통점이고,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독특한 인지력이고 육은 질료 물질 썩으면 변하는 것으로 하였지요. 그런 관점에서 생각하며 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는데 지금 언약으로 보니 언약 속에 아예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죄가 들어있고 은혜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은혜란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들어있고 용서가 들어있고 그것이 완성될 때 이것이 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당신 그 말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라고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21절을 가지고 저는 책임진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우리는 가만히 있었는데 우리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지요! 성부와 성자의 두 분의 작업입니다. 물론 중간에 성령이 개입하셨지만,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일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부 하나님께서 누구를 죄로 만드신 것입니까? 성자 예수님을 죄로 알지도 못하시는 분을 죄인 만드셔서 그것으로 언약이 완성되고 언약이 완성되면 무엇이 나온다고 하였습니까? 의가 나오는 것이지요! 그 의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한 백성에게 집어넣으시는데, 그 집어넣으시는 숙제를 예수님께서 하실 때, 그 집어넣으시는 전권을 몽땅 합해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이상하다고 생각이 듭니까?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이 없잖아요? 없지요! 그러므로 행함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지요. 그러면 믿으면 됩니까? 그렇게 믿는 것은 행함이라고 하였지요! 그러면 믿는 행위도 필요 없네요? 없지요! 그러면 뭡니까?
예수님께서 이루신 의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 믿음을 만드셔서 성령께서 선물로 집어 넣어주시는 것까지 예수님께서 자기 숙제로 다 이루어 내셨을 때에(이 때 손을 탁탁 터는 소리가 들림)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할일이 십자가로 끝났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하실 일을 십자가로 다 이루셨는데 그 이루신 여파가 해일처럼, 지진이 일어났습니다하는 여파가 해일이 일어나 덮치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예수님의 의가 덮치는데 그 덮치는 여파로 없던 믿음이 발생이 되는 것입니다. 왜요? 성령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기다렸습니다. 누군가 언약을 완성하기를 기다렸고, 이 말은 좀 어폐가 있습니다. 사실은 성령님께서 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이 임하여 성령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부활하는 것도 성령의 힘으로 부활하였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가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주가 되시고 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일입니다. 주가 되지 못하면 성령으로 세례를 주지 못합니다. 주가 되었다는 말은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한 성령을 받아서 지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이 아니라 한 형제요 한 자매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것도 설명하려면 몇 날 며칠이 걸리는데 나중에 하기로 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언약의 완성인데 그 언약을 완성하시는 일에는 자기 백성의 마음을 강제로 열어젖혀서 그 속에 없는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라는 것을 믿는 그 작업까지 마무리 될 때 그때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린도후서 5:21절에 본대로 우리는 가만히 있었는데 하나님의 의가 된 것입니다. 지진은 어디서 일어난 것입니까? 지진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을 죄로 삼으신 것이 지진이고, 그 지진의 여파로 가만히 있던 우리가 졸지에 의가 되고,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는데 이것을 어느 놈이 믿습니까? 어느 놈이 믿습니까?(목쉰 소리로 고함이 나옴) 믿을 수가 없잖아요 자기 행함이 없는데, 그런데 이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내 노력에서나 내 사고에서는 내 영혼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사람들은 목사님 그 언약을 지켜야 합니까?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을 지키는 문제는 구약에서 이미 다 해 왔던 것입니다. 모세 언약 주시니 제사 드린다고 바쁘고, 다윗 언약에서 성전 지어놓고 거기에서 열심히 제사 드리고, 절기 지키고, 이사야 1에서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여 기도를 받지 않는다고 하니 유대인들은 손을 부지런히 씻었습니다. 예레미야 7장에서 고아와 과부를 학대 하였으니 이 성전이 아니라고 하자 그들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면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말씀은 우리가 못 지킵니다. 왜? 언약에서 우리는 어느 파트가 되기에 그렇습니까? 죄의 파트이기에 우리에게는 은혜로서 작용하는 은혜의 결과물, 은혜의 열매, 예수님의 공로로 주어지는 은혜의 결과물들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은혜와 언약의 공로는 의를 이루시는 예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 할꼬 할 때에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이란 하나의 장의 개념으로 영역으로 덮쳐온 것입니다. 이미 밀려온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무엇을 찾아 행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 편에서 덮쳐 왔기에 우리에게는 엉뚱하게 주님의 공로로 졸지에 의인이 된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의인 되었으니 의롭게 바르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잘 한번 들어보세요. 사람이 전에는 죄인이었는데 이제는 거듭나서 의인 되었으니 의에 걸 맞는 행동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의 행동 이 말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고 그때그때 달라요!
왜냐하면 의인이기에 의의 행동이 나온다고 보면 맞는데 아까 처음에 무어라고 했습니까? 또 다 잊으셨지요! 무엇 때문에 의인이 되었지요? 언약 때문에 의인이 되었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나와야 합니까? 언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라고 나올 때에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 의가 윤리적 도덕적 의는 아니잖아요! 윤리적 도덕적 의가 아니라고 하였는데도 그들은 왜 윤리적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나쁜 짓만 하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정말 예수님 앞에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가 예수님 믿고서 무엇을 했습니까?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의 발 앞에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향유를 부은 사람이 마리아이지요! 마리아의 언니가 마르다이지요! 오빠가 나사로이지요! 그렇다면 생각해보세요. 마리아가 은혜를 입었다면 착한 행동이 나옵니까? 마리아는 착한 행동 깨끗한 행동이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 오빠 죽고 나자 뚜껑 열리듯이 삐진 것입니다. 아플 때 오라고 했지 죽고 난 뒤에 오라고 했습니까? 죽고 난 뒤에 와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마르다와 마리아가 같은 반응을 나타냄 요11:21,3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어도 산다고 하시자 그것은 성경 공부할 때 잘 배웠지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줄을 믿는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그게 아니야! 내가 하나의 장이냐 내가 함께 있으매 그 자체가 생명이지 시간적으로 나중에 다시 산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임하여 함께 하시면 그 자체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나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누이동생들이 저러고 있으니 다시 인형놀이 하도록 나오라고 하시자 다시 살아나왔지요! 여기서 윤리적 도덕적 행동이 아니지요! 무엇이 의인에 대한 합당한 행동입니까? 저는 이래도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어떠한 상황에도 어떠한 경우에도 믿습니다. 이보다 더 월등한 의로운 행동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보다 더한 거룩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사회라는 것은, 여러분이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집단체이기에 어쩔 수 없이 집단적인 범죄에 동참하지 아니하면 직장에서 잘리게 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원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믿고 착하게 살아가는 어떤 사모가 있다고 합시다. 목사가 월급이 모자라서 직장생활을 한다고 합시다. 비록 직장 생활을 하지만 나는 목사의 사모가 우선이다. 주여 어디에 가더라도 착한 행실로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그것 때문에 저를 거듭나게 하신 줄 믿습니다. 하면서 직장에 다녔는데 그 직장에 노조가 형성되더라는 것입니다. 노조에 가입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것이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으로 여러분에게 상담을 의뢰해 왔다면 여러분은 어떤 식으로 답변을 해 주시겠습니까?
영적생활이라는 로이든 존스의 책에서 답변이 나옵니다. 거기에 나오는 답변은 잘 생각해 가지고 할만 하거든 하고 그렇지 않거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영적 생활은 그것이 아닙니다.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은 노조라는 것이 왔을 때에, 그것이 왜 왔는가 하면 주님께서 나에게 언약을 적용시키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언약이 절호의 기회로 나에게 왔을 때에 나는 은혜와 죄인의 자리 중에 어느 자리에 서야 합니까? 비록 의인이지만 어느 자리에 서야 합니까? 죄인의 자리에 서서 내 속에 들어있는 이 죄가 어떤 식으로 펼치시는가를 보는 좋은 기회가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은혜가 죄를 향하여 퍼붓지요!
그 죄가 어떻게 드러납니까? 이렇게 드러나지요! 하나님! 노조에 가입하느냐 마느냐의 최종 결단에 왔을 때에 저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가입할까 말까의 이 모든 번민은 마태복음에서 보면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심지어 자기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합당치 않다는 그 죄가 생각이 났습니다. 결국 내가 노조에 가입하느냐 마느냐는 갈등은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그 법칙에 제가 위배되었습니다.
다 살아보려고 통박 굴리는 짓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저의 모습인데 이런 자를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심으로 은혜 주셔서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하면서 노조 가입해 버리는 것이죠. ??? 뭘 해도 죄니까? 왜 다 살고자 하는 짓이니. 갑자기 제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입니다. 목 캔디 먹는 기분입니다.
목사로 안수 받으려고 하는데 노회가 두 조각이 나서 세력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한 쪽에서 말하기를 저쪽에서 안수 받으면 목사 인정하여주지 않는다. 이쪽에서는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주여! 3년 신학하고 강도사 시험까지 합격했는데 어느 쪽에 가야합니까? 기도해보세요 주님께서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너 왜 안수 받으려고 하는데? 밥 먹고 살려고 라는 말이 처음에는 나오지 않지요! 처음에는 제가 목사하려고 하는 것이 제가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정말이냐? 사실이냐? 따지고 물으시면 이것도 수십 번 기도 후에 사실은 이것도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합니다. 진작 그래야지
무엇을 해도, 순교를 해도, 한국교회 더럽다고 목사 치우고 도망쳐도, 목사 해도, 다 죄라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너에게 준 용서가 아직도 남아있느냐는 것입니다. 너라는 인형이 어떤 짓을 하여도 용서라는 장속에 들어와 있음을 마귀에게 아직도 지지 않고 인정하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누가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 하리요, 노조를 가입하든 아니하든, 목사를 하든 그만두든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누가 정죄합니까? 그런 것은 주위 사람들이, 식구들이 정죄하지요! 이근호 목사가 한국교회 섞었다고 정죄 하지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만 그 십자가만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두 시간 반 동안 강의를 했습니다만 결국 이러한 모든 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언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우리가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후손, 여자의 후손할 때 여자가 누구인지 묻지 마십시오. 여자의 후손이 예수님이시니, 뱀의 후손, 뱀이 누구인지 묻지 마십시오. 교황입니까? 어떤 나쁜 이단 목사가 뱀입니까? 라고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쪽 아니면 저쪽입니다. 예수님 아니면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인데, 그 둘의 싸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언약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없는데서 만들어진 인물들이 우리들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진노의 그릇이고, 또 한 쪽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담는 그릇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예정론이지요! 제 삼자가 아닌 토기장이에 의하여 만들어진 토기가 건방지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항의하는 적개심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항의를 하는 것은 악마가 우리 속에 집어넣은 적개심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생각한다고 하지만 24시간 대부분을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 것인가라고 나를 앞장세웁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고린도후서에서 보면 사도바울이 나의 연약함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 말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자립하려는 사람은 스스로 강자가 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내 스스로 서려니 힘이 있어야 하고 강해야 하는 것입니다. 힘이 없으면 쓰러지니까. 연세 많은 분들이 왜 자식을 찾습니까? 젊을 때는 찾지 않다가 늙어서는 위선적인 행동하면서 어린애처럼 귀여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혼자서 설 수 없으니 힘을 얻기 위해서 자식의 힘에 기대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이 접쳐져 있던 본성인데 젊었을 때는 잘나가는 자기 힘만 나오고 그런 모습이 나오지 않다가 늙고 힘이 없어지니 접쳐져 있던 본성, 즉 강자가 되어 자립하고 싶은 본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나의 자랑할 것은 나의 연약함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연약함이란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는 ,아무 실적도 업적도 낼 수 없는, 사회에서 쓸모없는, 있으나 마나 한 인간이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기가 연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연약하면 할수록 내 속에서 일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을 잘 하고 계십니다다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은 연약해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그런 인물로 그런 말솜씨로 그런 일을 했습니까? 제가 한 것이 아니고요 제 안에서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것은 자기믿음 좋다고 자랑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연약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가 날마다 죽음에 넘기 움은 나의 죽음 속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능력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4:11절입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날마다 죽은 자로 있으면서도 사는 것은 나를 살게 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너희도 좀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도 있는데 왜 너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살려는 너희들만 부각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점을 고린도 교회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간에 연약함을 테마로 말하고 싶습니다. 강자와 약자의 세상적인 기준이 무어냐 하면 얼마나 자립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자란 남에게 무시당하는 자, 장애자,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옥에 갇힌 자, 반면에 강자란 가진 자, 배운 자 아는 자입니다. 이런 기준이 예수님이 등장하시는 그 유대사회에 다 퍼져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강자가 된 자들이 어떤 핑계를 대는가 하면, 내가 약자가 되지 않고 강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지키고 그 말씀을 실천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이렇게 강자로 대두 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곱 단계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제일 강자가 사두개인 그 다음에 바리새인해서 일곱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약자가 강자의 말을 듣는 것도 마지막 남은 하나님의 배려라고 여겼기에 이마저 듣지 아니하면 너희는 죽는 거라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회에서 강자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서 그 노동의 대가와 보상으로 강자가 된다고 하였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집어넣어야 됩니까?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것,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기는 것들, 고상하고 거룩한 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일, 착한 일등을 집어넣어야겠지요! 그런 일을 누가 했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주 특기로 잘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까? 일반 민중들에게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는 그 강함, 그들의 강함의 바탕이 무엇이라고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하면 목사인 내가 말씀대로 잘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남들은 개판으로 살더라도 나는 말씀대로 복음대로 산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 것을 그 사회에 강자로서 사용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역전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의인이란 말씀대로 살아서 나오는 의를 소유하게 된 것을 의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아까 언약에서는 무엇이 의가 됩니까? 언약 앞에 우리는 죄인이 되고 의는 누가 이룬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의인이 아니라 우리도 의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 언약 이라는 공간 안에 들어있기에 그렇습니다. 영역개념, 장의 개념입니다. 그 혜택으로 의인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말씀대로 살아서 의가 나오고 그 보상으로 신명기 28장처럼 나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대심방할 때 이 말씀을 하지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있으니라. 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내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이런 말씀들을 하잖아요! 부교역자들이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부 교역자들이 볼 때 저건 말도 안 돼는 소리인데도 그런 것이 돈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왜? 교인들은 목사가 이단인지 삼단인지 묻지 않습니다. 나에게 환상과 꿈과 비전과 희망을 주면 돈을 갖다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보로 교회오니, 내가 너무 솔직하게 이야기 했나! 설교를 개떡같이 해도 희망만 다오, 안 된다고 하지 말고 하면 된다고 희망을 불어주고 그 법칙만 이야기 해주면 돈을 바치고 밀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신학을 좀 했다는 부교역자가 보면 저것은 완전히 이단인데 라고 하여도 이단이든 삼단이든 그렇게 하니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노하우를 배우는 것이고, 결국 큰 교회가 강자이잖아요!
같은 교회에서- 이 교회에 보니 부자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마는-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강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김 집사가 부자가 되었을 때 가난한 최 집사가 뭐라고 합니까? 세상에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 했으면 저렇게 부자가 되었는고? 이것을 목사들이 또 시간 시간 마다 보세요! 여러분, 저렇게 앞자리에 앉아서 복을 받았는데 왜 여러분들은 뒷자리에서 아이를 안고 그렇게 있는가 하면서 경쟁을 붙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말씀대로 산다고 하여 그것의 의가 되어 강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인, 자칭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실 때에 죄인이 무엇입니까? 본인이 생각해도, 남들이 보아도 지옥에 일번타자로 갈 수 밖에 없는 자 임을 자인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네 주제를 알았느냐?
예 알았습니다.
너는 무언데?
저는 창기고 세리입니다.
너는 너를 아는 구나 그래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너 같은 인간을 부르러 왔다 내가 씻어주마!
주여 내가 주를 믿나이다.
이게 바로 소경과 절름발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볼 때에 주의 할 점은 처음에 이야기 한 대로, 복음서를 그대로 볼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사도를 보지 않고 그대로 보게 되면 장애자가 천당 간다. 가난한자가 천당 간다. 창녀가 천당 간다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이 사회구원이고 자유주의 신학이 아닙니까?
바울사도는 어떻게 봅니까?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는 자가 약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장 약자이고 예수님과 함께 붙어 있는 자는 그 사람이 집이 세 채가 있든지 네 채가 있든지 그 사람이 약자라는 것입니다. 재산 때문에 천국 가고 못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난해도 예수님을 버리지 못하겠고 부자가 되어도 예수님을 버리지 못하겠다는 사람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이 사회에서 약자입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구원받습니다.
장애인도 은연중에 무슨 생각이 있는 줄 아십니까? 나도 언젠가는 강한 자가 되겠다는 강한 욕망이 성한 자나 장애자나 다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들에게 밥만 퍼준다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죄인이야! 당신이 겉으로는 약자이지만 속에는 강자가 들어있어! 그 죄로 인하여 주님의 죽으셨어! 그러니 주님처럼 하늘나라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남의 이목이나 위신이나 그런 것을 신경 쓰지 말고, 남들이 뭐라고 해도 주님 한분만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이 누구냐 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이제 바꾸어서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는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서, 주님이 우선이 되고 우리는 뒤로 돌릴 수 있는,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태어났음을 언제 어디서라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이런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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