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강-YouTube강의(지옥의 증거)180417-이 근호 목사
231강, 제목은 ‘지옥의 증거’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지옥이라 하면, 지옥이라는 것은 살아있을 때는 지옥이 아니고 죽어서 가는 곳이 지옥이라고 합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 달랑 두 군데밖에 없어요. 지옥과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혼자 십자가를 지지 않고, 십자가 양편에 너무나 대조적이고 갈 길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예수님 달리고 두 사람이 달렸다.” 보통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예수님 달리고 양쪽에 예수님이 품고 있던 두 개의 속성이 예수님과 한 조를 이루어서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이래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은 그 가운데 계셨다 이 말이죠. 예수님을 기준해서 쫙 갈라진 거예요. 모든 세상은 사람의 개성보고 갈라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품고 있던 주님의 속성으로 인하여 그게 갈라지는 겁니다.
그러면 지옥이 뭐냐 할 때에, 나쁜 짓 하는 사람이 간다고 이래 생각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속성 가운데서 저주하시고, 영원히 심판을 행하시고, 분노하시는 그 속성의 대상자들이 모인 곳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는 대상이 지옥가고, 반대로 천국 가는 사람은 예수님의 속성가운데서 긍휼을 입은 사람, 긍휼이라는 것은 불쌍히 여김을 받은 거예요.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는 말은 본인의 개성이나 자질이나 행세가 따로 있지만, 일체 그것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책망하거나 그걸 책임추궁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사람이 살면서 제일 행복한 순간이 뭐냐, 책임 추궁을 안 당하는 것이 제일 행복하죠. 복되죠. 하는 짓이 자기가 봐도 이거는 맴매 맞아도 싸다고 하는데, 묻지도 않겠다는 거예요. 일체 그거에 대해서 묻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천국 가는 사람들이 착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지옥 가는 사람들이 나쁜 짓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양쪽 다 똑같은 존재인데, 이쪽은 하나님의 저주의 속성을 담았고, 이쪽은 하나님의 긍휼의 속성을 담은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면 이것을 그릇으로 비유해서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창세기에 봐도 야곱은 사랑받는 자요, 에서는 주님으로부터 미움 받는 자죠. 쉽게 이야기해서 밉상이다. 뭘 해도 밉상이에요. 착한 일 해도 밉상이고, 주께 기도해도 밉상이고, 십일조해도 밉상이고, 목숨 바쳐 순교해도 밉상이에요. 이리 봐도 밉상, 저리 봐도 밉상, 하는 행동 봐서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행동을 해도 밉상으로 결론지어지는 행위를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근데 그 밉상 짓 하는 특징이 있어요. 밉상 짓 하는 공통점이 뭐냐 하면, 꼭 자기가 주인공이에요. 옆에 있는 강도, 지옥 간 강도가 예수님한테 한 말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메시야이거든 지금이라도 우리들을 풀어주면 내가 당신을 믿겠다.”라는 거예요. 누구 위주죠? 자기 위주죠. 그걸 누가 타박하느냐 하면, 구원받은, 그 날 밤에 천국 간, 똑같은 강도가 타박을 해요. “이 사람아!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지.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이 분은 죄 없으신 분이 이렇게 달렸잖아!”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지금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자기만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만. 최종적으로. ‘내가 팔자 피자. 내가 잘 되자.’ 이거만 생각하는 반면에, 그 구원받은 강도는 자기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고, 모든 시작은 바로 죄 없으신 주님으로부터 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시작하니까, 주님으로부터 시작한 것이 긍휼로 주어지니까, 자기 시작을 포기하고 긍휼을 주신 분이 자신의 근원, 뿌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뿌리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먼저 뿌리가 되고, 원천이 되고, 주님 증거 하라고 내가 이 땅에 산다는 겁니다. 시작점이 서로 다르죠. 그야말로 사나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라는 고백을 강도는 강도 식으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이 땅은 뭐냐 하면 지옥을 꼭 가봐야 지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을 꼭 가봐야 천국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아주 희한하고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주님의 긍휼을 언급하고 고백하는 자들이 출몰한다는 겁니다. 아! 이거는 이상한 일이에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기위주로 태어나거든요. 자기위주로. 그게 모든 인간의 공통점인데, 그게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런데, 안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건 뭔가 주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자예요. 이 세상이 아주 엉망이고 개판이기 때문에 지옥이 아니라, 오늘 강의의 초점은 뭐냐 하면 그들과 달리 세상을 보고, 달리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이 출몰했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그거 빼고 나머지기 여집합(전체 집합에는 속하지만 부분집합에는 속하지 않는 것)이 다 지옥입니다.
그러니까 천국 가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으면, 지옥도 티가 안 나게 되어 있습니다. 표 안 나게 되어 있어요. 뭐, 그렇고 그런, 꽃 피고, 봄여름가을겨울, 그렇게 늘 평온하게 잔잔한 일상이 연속되는데, 뭐 이런 괜찮은 지옥이 다 있느냐, 이 말이죠. “점잖은 지옥인데, 이건 지옥이 아니야.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죽어보면 알겠지.”라고 생각을 하는데, 죽어보면 아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강도 같은 사람이 출몰했다는 말은, 이미 천국이 출몰했다는 말은 그 짝이 되는 지옥이 이미 벌써 여기에 상주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은 지옥이다!”라고 소리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과격하게 구태여 할 필요도 없이, “오늘도 하루하루 주님의 불쌍히 여김으로, 여김을 받고 저는 살아갑니다. 저를 뭘 보고 긍휼히 여기겠습니까? 주님의 자신의 행하심을 근거로 해서, 거기서 흘러나온 긍휼이 저를 덮쳤으니까, 저는 주님만이 저의 기본입니다. 사나죽으나 오늘밤 죽더라도 주님의 낙원에 있게 됩니다.” 그 고백을 하게 되면, 천국이 등장했으니까 지옥은 등장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짝을 이루어서 등장하니까. 왜? 둘 다 공히 한 분의 속성이니까요.
긍휼의 속성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에요. 긍휼의 속성 맞은편에 반드시 “긍휼 없음!” 아! 잔인한 거예요. “봐주는 것 없음!”만큼 잔인한 게 없어요. 행한 대로 갚아주겠다고 하는 이거는 아주 조지겠다는 거예요. “니가 행했으니까 내가 너에게 책임을 묻겠다는데 니가 무슨 할 말이 많아? 니가 그 짓 했잖아? 그러니까 니가 값을 당해야지.” 이거는 아주 치명적입니다. 결정타고. 그 사람의 운명이 지옥이에요.
근데 옆에 있는 강도가 “저도 똑같은 짓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니는 나의 긍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이 말이야.”라고 했을 때에, 어떤 여인처럼 그 비싼 향수까지 아낌없이 바치면서, 고맙다고 울면서 주의 발을 씻기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자기가 받은 게 있는데.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했잖아요(눅7:47).
우리가 그 사랑을 생각한다면, 제발 인생 살면서, 지옥인 세상에서 살면서, 큰 것 받아놨는데, 쓸데없는 것 가지고 구시렁구시렁(못마땅하여 잔소리나 군소리를 자꾸 되풀이하다)불평하지 맙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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