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80126b 마가복음11장 15절(성전속의 죽음)-이 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인간은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서 추상적인 증거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증거, 그러니까 옛날에 성전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그들에게 구원받는데, 신앙생활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그들은 철석같이 믿었죠. 구체적인 증거가 있잖아요. 뭐 골치 아프게 성경을 공부해? 성전이 있는데. 성전 잘 돌아가고. 따박따박 거기다가 성전세부터 해서 십일조까지 내고, 돈만 내고 교회가 잘 돌아가면 그게 곧 자기가, 본인이 잘 되는 거잖아요. 아무 문제없죠. 그러니까 성전을 손댄다는 것은 이거는 용서가 안 돼요.
18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예수님이 죽게 된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 뭐냐 하면 성전을 건드려서 그래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지막 죽을 때 쯤 해서 성전을 건드려요. 죽을 때 쯤 되어가지고. 이제 성전 건드리면 다 건드리는 것이 되는 겁니다. 제일 중요한 부분, 그들의 모든 행동을 왜 그런 식으로 했는지, 행동이 그렇게 나오는 정신적인 핵심, 정신적인 중심사상이 어디냐, 전부 다 눈에 보이는 성전을 유지하는데, 거기에 다 집결되어 있었으니까.
거기서 성전이 왜 있어야 되는가를,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들의 행동 같은 것이 나왔던 겁니다. 요즘 같으면 뭡니까? 교회, 예배당, 부동산, 그걸 왜 지켜야 되느냐. 그리고 거기에 성전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들은 그게 자기의 직업이니까 성전을 지켜야 되겠죠. 이렇게 구체적인 증거를 찾고자 하는데, 첫째시간에 이야기한 대로 구체적인 중심부를 왜 이렇게 찾고자 하느냐 하면, 이게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사 간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지 않습니까? 확고한 게 없잖아요. 어디서 멈추어야 되고 어디서 계속 또 움직여야 되느냐.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평생 살면서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있으면 좀 어떠냐, 여기서 푹 눌러앉아가지고 안심 푹 놓고 앉아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좋겠는데, 또 무슨 경제적인 바람이 불고 어려움이 오게 되면 또 짐 싸고 가게 되요. 근데 가봤자 거기서 또 언제라도 움직여야 돼요.
진득하게 한 곳에 앉아있으면 그게 제일 정서적으로 마음이 안정이 되잖아요. 내 마음이 평안할 때까지, 평안으로 찰 때까지 끊임없이 내가 몸 바치고 몸 둘 그곳까지, 계속해서 사람들은 멈출 줄을 모르고 움직여나가는 겁니다. 중심을 향하여. 근데 그 중심이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곁눈질해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성전중심으로 모였다 이 말이죠. 성전중심으로 모이면 이거는 ‘이제 내 인생은 이미 확정되었구나.’하고 얼마나 안심을 놓겠어요. 굉장히 기쁘겠죠.
그래서 이 성전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이제 십자가 지기 전에 마지노선이라고 해서, 성전에 와서 말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행동을 과격하게 해버려요. 예수님께서 과격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너희들은 내 뜻과는 완전히 터무니없이 먼 곳에 있다는 것을, 말로가 아니라 그냥 행동으로 보여준 거예요. 폭력적이죠. 폭력이라고 하는 것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거예요. “나한테 입 떼지 마라. 나는 이렇게 폭력으로 나갈 테니까. 잡으려고 하면 잡고 죽이려고 하면 죽여라. 너희하고는 일말의 공통점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걸 행동으로 보면 폭력이 되는 겁니다.
부모가 애를 말로 달래줄 때는 자식에게 어떤 여지가 있어요. 엄마하고 좋은 관계의 여지가 있는데, 아무리 나쁜 짓 했더라도 엄마가 몸을, 신체를 때려버린다고 할 때, 그럴 때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결별을 의미하는 겁니다. 결별을. 결별이 되게 되면 요새 애는 이제부터 DNA조사하고 그럽니다. ‘진짜 우리 엄마가 맞나?’ 애 바꿔치기 해서, 남의 애로 키우다가 20년 만에 다시 돌려줬는데 잘못 돌려줘가지고.. 드라마 황금빛 인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드라마를 안 보니 뭐, 그런 내용이 나와요.
결국에 평생 인간은 안정된 자기 자리를 찾는 인생을 살아간다고 이래 보시면 됩니다. 근데 그게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것부터 추상적인 것으로 나가죠. 이렇게 나가는데, 구체적인 것에서 모든 추상을 다 끄집어내거든요. 이 구체적인 것을 누가 공격합니까? 예수님이 이걸 공격해버리죠. 공격할 때 뭐냐 하면 이 성전은 원래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곳이다. 아까 이야기한 호수 같은 거예요. 다 변두리에 있어야지, 여기에 누가 들어오면 안 돼요. 추상적이고 정신적이고 뭐든 간에 여기에 채워 넣으면 안 돼요. 텅텅 비어놓는 겁니다.
성전은 텅텅 비어있는 곳, 비어있다는 것은 경계선으로서의 성전이에요. 경계선으로서의 성전. 성전건물이 있다는 것은 텅텅 비어있다는 경계를 짓기 위해서 그냥 경계막, 테두리를 치는 겁니다. 테두리를 친 것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이 안으로, 언약궤 있는 안으로는 들어오면 안 돼요. 바깥에 나가있어야 돼요. 바깥에 나가있는데 바로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납니다. 인간을 만날 때,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줘서 성전을 바라보는 자에게만 복의 혜택을 줍니다. 복의 혜택.
지난 수련회 열왕기상에서 했죠. 솔로몬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게 되면 그들은 복을 받는다. 열왕기상 8장에 나오는 이야기. 복을 받고, 만약에 성전을 기피하게 되면 저주를 받는다. 이거는 이번 수련회 열왕기하에서 했죠. 왕의 임무는 뭡니까? 성전 경계밖에 나가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전지킴이에요. “성전에 들어오지 마! 들어오지 마!” 우리 이스라엘은 누가 알아서 한다? 주님이 알아서 한다는 그걸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이 주님의 할 일입니다.
만약에 저 이집트에서 백만 대군이 왔다. 백만 대군이 왔으면 왕이 해야 될 일은 뭡니까? 나가서 전쟁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백만 대군을 누구한테 맡기느냐, 성전의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백만 대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에요. 유다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에요. 유다나라에 뭐가 있어요? 성전이 있죠. 성전을 향해서 공격하는 것으로 여기고, 성전은 누가 지켜주죠? 하나님이 계신 곳이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지키잖아요. 거기서 그냥 손 떼면 되는 거예요.
손 뗄 때에 왕은 무슨 마음이 들어야 합니까? “성전은 내가 지킬 것이 아니고, 주님이 친히 지킵니다.”라는 마음가짐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는 텅텅 비어 있는 마음이 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에 적용시키면, “나 구원받았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돼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포기하고, 텅텅 비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면 되잖아요. “나 안 했어요.” 이러면 된다 이 말이죠.
참, 구원 받기가 쉽죠. 어떻게 보면 구원받은 사람한테는 구원받는 것이 너무 쉽죠. 참 쉽죠. 누구하고 게임 안 하면 되는 거예요.
게임을 안 하면 돼요. 테니스 할 때, 상대가 공을 치면 정현이는 그냥 ‘주께서 공을 치는구나. 막아야지.’ 그러면 된다고요. 참, 말은 쉬운데. 말만 쉬운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굉장히 쉬워요. “나의 중심은 어딥니까? 나는 어디로 이사 가야 됩니까?”라고 하지 말고. 중심에 이끌리도록, 중심은 나의 결심이나 나의 선택이나 나의 의지와 무관함을 나한테 알려주는, 그것이 중심이에요. 내가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것.
그러니까 진짜 복음을 알면 뭐가 없느냐 하면, 지킬 게 있다? 없다? 지킬 게 없어요. 이게 수련회 때 열왕기하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까? 왕은 자꾸 손을 떼라 이 말이죠. 다윗이 인구조사해가지고 사흘 만에 칠만 명 다 날아갔잖아요. 그걸 누가 부추겼습니까?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악마가 그렇게 한 거예요. “당신은 가치 있습니다. 훌륭합니다.” 그래서 악마라고 하는 것은 딱 그거에요.
뭐가 악마냐, 자기 의가 있으면, 자기 의를 가지고 자꾸 찾아오게 되면 이것은 악마가 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뭐냐, 피+증인이에요. 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피 증인이 되는 거예요. 불교는 뭐가 없어요? 증인이 없어요. 자기가 도도하게 모든 것을 비우고 자기가 포기한, 자기 자신을 증거 하기 때문에 이거는 불교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이근호 신학을 비판한 것을 보면 이거는 꼭 불교신자 같아요. 피 이야기하니까, “너는 네 증인해라. 나는 내증인할게.” 이거거든요.
지금 뭘 증언해야 되고 뭘 증거 해야 되느냐,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피만을 증거 하게 됩니다. “너만 잘났나?” 이게 안 된다니까요. 이게. 그거는 게임이 되죠. 그거는 내기가 되고 게임이 되는 겁니다. ‘누가 누가 잘하나’라는 것은 목요일에 KBS에서 4시에 하는 아이들 노래자랑이에요. 노래자랑. 손을 흔들면서 뽐내면서 하는 것 있죠. 그거는 노래자랑이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사도행전 1장 8절에 그 다음에 너희가 무엇이 되리라?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증인이 될 것을,복음도 모르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전부 다 뭐냐, 복음을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도 닦는 용도로 복음을 자꾸 사용해요.도 닦는 용도로. 안 되니까 그 다음에 뭐가 맺히고? 한 맺히고. “왜 우리교회는 복음대로 하는데 교회 안 커집니까?” 교회가 안 커지는데 한이 맺혔어요. “우리가정은 왜? 복음을 외치고 복음을 전하는데 집이 빨리 안 나갑니까? 이상한 사람들이 와서 전세이야기만 하고, 왜 집이 빨리 안 나갑니까? 복음 전하는데 좀 도와주시지.” 뭐 이런 것.
복음증거 하게 되면 지킬 게 없어요. 지킬 게. 자기과거사를 지키면 안 돼요. 자기 의를 지키면 안 된다니까요. 자기 의를 지키는 것은 마귀가 이렇게 시키는 거예요. 경계선으로서의 건물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것을 다 없애버리죠. 없애놓고, 뒤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막11:17).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성전은 죽음이 있는 곳인데, 무슨 죽음이냐 하면 아들의 죽음이에요.
여기서 제가 죽음과 아들의 죽음을 구분할게요.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죽음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죽은 게 아니에요. 사람이 아파봐야 안다고 하는데, 사람이 아파 봐도 아픈 걸 몰라요. 왜냐하면 왜 아픈지. 무엇 때문에 아픈지. 욥기에 그게 나오죠. 욥이 고난 받으면서 고난의 이유를 압니까? 고난 받는 인간이나 고난 안 받고 있는 친구들이나, 둘 다 뭘 모르느냐 하면 고난이 어디서 왔는지를 둘 다 몰라요. 고난 받는다고 해서 고난이 왜 오는지를 아는 게 아닙니다. 고난이 왜 오는지를 몰라요. 굉장히 욥은 억울한 느낌이 드는 겁니다. 상당히 억울한 거예요.
욥은 나중에 알죠. 고난이, 내가 과거에 한 행적 때문에 온 고난이 아니고, 내가 미처 모르는 다른 원인에 의해서 나에게 고난이 온 겁니다. 그 원인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그 시대에. 예수님의 증인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거에는 자기 자신이 지식을 습득하고 뭘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복음을 안다고 구원받습니까? 구원은 복음으로 구원되지, 내가 복음을 알아 챙기고 그 정보와 지식을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만 알면 그거는 도 닦는 불교신자지, 그건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복음을 아는 사람 말고, 복음에 의해서 구원받아요. 복음에 의해서.
내가 복음을 알아서 구원받겠다고 하는 것도, 이것도 일종의 마귀의 시험에 든 거예요. 왜냐하면 복음을 알게 되면 지식이 있을 것이고 그 지식이 나를 지킨다. 결국에는 뭡니까? 그 복음이 누굴 지킨다? 나를 지킨다. 이 ‘나’가 왜 들어가야 하는데? 나를 왜 지켜야 하는데? 지킬 게 있으면 안 돼요. 지킬 게 있으면. 우리는 자꾸 지킬 게 있으면,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 전에 뭔가 착한 일이나 바른 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문제는 나쁘게 행동할까요? 착하게 행동할까요? 지금 이 문제가 아니고, 뭘 증거 하느냐 하는 겁니다. 뭘 증거 하느냐. 이거 참, 30년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진짜 많아요. “성도로서 예수 믿고 바르게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바르게 사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나쁘게 살면 안 되잖아요?” 나쁘게 살면 안 된다는 그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해요. “그러면 나쁘게 살까요?” 나쁘게 살고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시키느냐? 누가? 그 일을 누가 시키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누가 시키느냐가.
모든 책임을 주님한테 미루세요. 모든 책임을. 주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이 책임을 미뤄야 돼요. 그거 못 미뤄서 지옥 간 사람이 가룟 유다 아닙니까? “주께서 밧줄 꼬아서 나무 위에다 매달게 하셨잖아요.”라고 했다면 구원받았을 거예요. 자기 양심에 가책이 되어가지고, ‘스승을 팔아먹고 내가 살아서 뭐하노?’ 자기가 알아서 자가기 죽었다니까요. 근데 그게 사탄이 들어있는 거예요. 자살할 때 아주 계획적으로 죽는다는 것은 자기계획, 자기포부가 있었던 거예요. 마귀가 최종적으로 아주 잘 보여준 거예요.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것이 뭐냐, 내가 끝까지 내 자신이 어떤 인간이라는 것을, 내 자신의 증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그것이 나의 유일한 존재의미고 그게 보람이라는 그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나 이렇게 살았노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의 <서시>에 나오죠. 하나님 보시기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노라.
제가 지난 오후 설교 마지막에 그랬잖아요. 수족관의 물은 누가 채웠느냐? 수족관의 물은 누가 채웠어요? 금붕어가 뻐끔뻐끔해가지고 자기가 채웠어요? 누가 채워줬어요? 이 찬 공기 누가 줬습니까? 북극에서 내려왔다고요. 북극을 누가 밀어냈는데요? 귀신입니까? 주님이 하셨잖아요. 왜 내려왔어요? 얼어 죽으라고. 얼어 죽으라고 내려온 거예요.
여름철 같으면 밀양 세종병원에 난로를 피웠겠어요? 안 피우잖아요. 뭐 난로 피워서 불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간에 간호사 탈의실 위층에서 지지직하면서 불이 났다는 거예요. 여름 같으면 그렇게 난로피우고 했겠습니까?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추우니까 불을 피웠죠. 왜 추워요? 북극성 찬 공기를 누가 밀어냈죠? 하나님이. 그럼 세종병원에서 37명이 죽었다면 누구 탓인데요? 하나님께서 하신 거죠. 그 정도도 못합니까? 물론 그걸 증거 할 때 기분 나쁘게 증거 하면 좀 수상하지만.
범사에 감사하면 됐잖아요. 하나님께서 그만 살라고 죽게 하신 거예요. 지지직~해가지고 갑자기 전기가 합선됐는지 어떻게 됐는지는 몰라도, 불이 나가지고 감기 걸린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죽었잖아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제때에 죽은 거예요. 왜냐하면 참새도 주의 뜻이 아니면 안 떨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죽더라도 왜 죽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이 빈자리에다가, 아들의 죽음을 여기다가 씌우는 겁니다. 이게 구약의 어린양의 피에요. 어린양의 피를 묻히는 그 행사, 이벤트 하는 곳이 어디냐 하면 성소고 그게 성전이 된 겁니다.
내가 죽는다고 죽음을 아는 것이 아니에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아드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죽을 때, 비로소 죽음의 의미도 그 분이 몰고 와서, “이게 바로 죽음이야,”라고 비로소 이야기해준 겁니다.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하다가 그냥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내가 이거 복음이라고 하지만 복음 믿는다고 진짜 구원받나? 피 믿는다고 진짜 오늘 밤에 천국 가겠나?’ 가보겠다고 노력은 하겠지만, 간다고 믿으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진짜로 가는 것하고 마음 편한 것하고는 다르거든요. 진짜로 가는 것하고, 가면 참 좋겠다는 것하고, 이거하고는 다르잖아요.
그러면 그 구체적인 어떤 증거를 뭐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바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거예요. 십자가가, 십자가 사건이 눈앞에 보인다 이 말이죠. 십자가 사건이 뭐예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사건이잖아요. 사도바울은 그거부터 풉니다. 역사와 묵시의 유일한 만남의 장소에서는 복음인데, 그 복음은 어디에 집대성되어 있어요? 십자가사건이에요. 십자가사건이 있는 것을 봐서 예수님의 피를 믿으면 구원받고 부활된다는 것은 명백하게 확실한 거예요.
문제는 십자가 피에다가 내가 모든 것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십자가 피가 그만큼 고귀하고 확실하다고 아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영,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이게 성립이 안 됩니다. 십자가 영을 안 받아버리면 도 닦는 사람이 돼요. 십자가도 믿고, 언약도 믿고, 좋은 것은 다 긁어모아다 놓고, 그것을 어떻게 한다? 지키려고 해요. 지키려고.
치매 걸리기 전에 정신 바짝 차려서 일기장에 막 써놓고, 치매 걸려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면 안 되니까, “치매 걸려서 예수님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거 생각하지 마세요. 정신 바짝 차려서 예수님 믿었습니다.” 이런 것을 막 써놓고 했는데, 치매 걸리면 그 써놓은 일기장이 어디에 있는지 다 잊어버려요. 소용없어요. 계속 자기 자신을 자꾸 사수하려고 하고 지켜내려고 하는 거예요. 지켜내려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부터는 자유가 아니고 항상 벌벌 떨면서 들어와요. 추워서 벌벌 떠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행동 똑바로 안하고 여기서 갑자기 탈선을 해버리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효가 되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해. 구원 못 받잖아.” 이렇게 돼버린다고요.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것을 여러분이 조금 지루하게 느끼셨겠지만, 다시 첫 번째로 돌아가 봅시다. 첫 번째, 인간들이 자꾸 성전을 외치고, 성전에 가까이 가려고 하고, 안정감을 얻으려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눈에 보이는 성전과 함께 있음으로서 이걸 고정화시키고 싶은 거예요. 중심, 구심점, 중심점으로 삼고 싶은 거예요. 왜? 누구 좋으라고? 자기들 좋아라고 한 거예요. 나한테 유리하면 받아들이고 나한테 싫으면 밀죠. 나를 안정하게 해주는데 왜 이것(성전)을 밀어 내요? 받아들여야죠. 나를 안정하게 해주는데.
그러니까 이 성전, 요새 말하면 교회죠. 이 교회를 안 다니면 불안해서 못 견디는 겁니다. 만약에 해외여행 갈 때 기도한다고 하면 그냥 기도합니까? 우리교회를 향하여 기도하죠. 불교신자, 천주교신자들이 하는 거죠. 심지어 이슬람에서는 자동적으로 나침반 들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하여 하잖아요. 그게 얼마나 마귀적이에요. 주님께서 그 메카를 완전히 폭탄 터트려서 없애버린 거예요. 그 없애버리는 행동이 오늘 본문의 이겁니다.
인간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구심점을 찾는다. 이걸 주님께서 모를 리가 있어요. 아시고, 그걸 완전히 공백으로 비워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비어있는 곳을 너희들의 정신으로 채우겠다는 말은, 너희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너희들이 너희들 자신을 스스로 지키겠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 자신을. 내가 나를 지켜서, 지킨 나를 천국에 보내겠다는 그 종교적인 심보를 그대로 노출시킨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으니까 뭐 의자만 있으면 되겠네. 기도하는 게 또 나옵니다. 그럼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다면, 주께서는 그 성전을 보존할 필요가 있겠어요? 안 그러면 로마군대가 와서 없앨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그러니까 성전을 불태워줄 필요가 있습니까? 지킬 필요가 있습니까? 만약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도하는 집이라면? 당연히 지켜줘야죠.
근데 로마를 통해서 뭘 없애버립니까? 완전히 성전 자체를 불태워서 없애잖아요. 로마가 뭐냐 하면 짐승이에요. 짐승. 바벨론의 변형체가 로마거든요. 바벨론, 메대 파사(페르시아), 헬라 마케토니아(그리스), 로마. 로마가 왜 네 번째 짐승이냐 하면 예수님이 마지막 만나는 시대가 로마시대거든요. 예수님을 재판한 자가 로마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아닙니까? 뭐든지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지 말고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모든 정답을 다 갖고 있는 거예요.
내가 죽는다고 죽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자살한다고 죽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안 죽어도 이미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뭐다? 죽음이라는 것은 바로 아버지께 버림받는 것. 저주죠. 다른 말로 하면 관계단절입니다. 관계단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이 말은, 인간이 사는 세상 자체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죽음이에요. 그 자체가 죽음이라고요.
에스겔 37장에 나오는데, 우리는 그 자체로 그냥 마른 뼈에요. 그냥 마른 뼈에요. 그냥 먼지고. 그냥 흙이고. 그런 거예요. 뭐 살아있는 것 같지만 나이 들어보세요. 뼈 되고, 흙 되고, 먼지 되고, 다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준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의미를 부여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돼요.
성령께서 십자가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죽은 자였는데, 죽은 자 속에다가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담으셨으니까, 죽은 우리에다가 예수님의 피를 집어넣으셔서 우리의 죄를 뭐로 바꾸셨습니까? 의로 바꾸시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거예요.
영화 <메이즈 러너>라는 영화가 있어요. 스무 살 미만의 애들이 계속 도망 다녀야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퍼져가지고 모든 인간이 좀비가 되는 그런 세상이 왔어요. 그런 세상이 왔을 때, 그쪽, 위키드 연구실의 어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아직 젊은 피에다가, 그러니까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는 젊은 피(면역능력자)의 수액을 뽑아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면역주사를 놓게 되면 죽을 사람은 죽고 좀비 될 자는 좀비가 되지만, 살아남은 자는 다시 한 번 인류를 회생시킬 수 있다는 그 테마 입니다. 그 테마가 메이즈 러너인데, 이게 4편까지 나와야 하는데 장사가 안 됐는지 1편, 2편, 3편까지 하고 끝났어요.
그 3편의 마지막을 보게 되면 오직 뭐로만 구원을 받느냐 하면 오직 피로만 구원을 받아요.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는 그 피, 오직 주인공 한 사람만 이길 수 있어요. 걔 피만 있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제가 외국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외국영화는 기독교적인 냄새가 있어요. 그런데 <신과 함께>라는 영화를 보게 되면, 이거는 부모한테 효도하고 착하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메이즈 러너는 오직 피를 보고 찾아가는 거예요. 왜? 자기가 죽은 자, 좀비니까. 자기가 죽은 존재니까.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는 그 피. 죄를 이길 수 있는 그 피.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그렇게 영화대로 한다면 피로만 구원받을 수 있는데, 그런데 그 영화에서 뭐가 빠졌느냐 하면, “너는 왜 좀비가 안 되어야 하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없어요. 남은 좀비가 되어도 나는 좀비가 왜 안 되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답변이 없어요. 성경에서는 메이즈 러너 같은 그런 게 없고, 구원받아야 하는 그 이유가 없어요. 다 죽었어요. 다 죽었는데, 성경은 인간구원중심이 아닙니다. 누구 중심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가 되게 하시기 위한 중심이기 때문에, 죽은 자에게 예수님의 피를 집어넣어서 인간 속에 언약 완성이 퍼지게 만들었어요.
모든 언약 완성이 퍼지게 되게 되면, 언약은 율법이거든요. 율법은 우리에게 뭐를 주느냐 하면 죄를 주거든요. 죄를 주는데, 죄 패를 뒤집어버리면, 죄가 있는 것에 뭐가 있느냐 하면 그 반대편에 의가 있다고요. 죄가 제대로 들어오게 되면 그거는 의가 제대로 들어온 게 돼요. 이미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죽었다는 말은 죄에 푹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죄에. 마치 알코올에 뱀이 품 담겨져 있으면 그게 무슨 술이 됩니까? 뱀술 되잖아요. 뱀술. 죽은 뱀술이 되죠. 우리는 죄 속에 푹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죄인이 돼요.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우리아 장군까지 죽였잖아요. 간음이나 살인하고 난 뒤에, 그것도 어떤 자격으로? 왕의 자격으로 하고 난 뒤에 나단선지자가 왔을 때에 그 다윗이 놀라운 것을 발견했죠. 한 번도 자기가 누군 줄 몰랐던 거예요. 한 번도. 왜냐하면 다윗도 마찬가지에요. 호숫가의 집처럼, 다윗은 어릴 때부터 누굴 자꾸 곁눈질해요? 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나, 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나, 같은 인간들끼리 곁눈질해서 거기서 어떤 이데올로기, 율법 지키면 구원받는다. 의롭게 된다는 뭐 이런 것을 습득한 거예요.
지금도 한국교회에 교인들이 많이 있는데 교인들끼리 곁눈질하잖아요. 저 사람처럼 기도하면 되고, 이 사람처럼 찬양하면 되고, 헌금은 저 사람처럼 하면 된다고 하잖아요. 복음 전하는 오목사님이 와가지고, “이거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상처 난 몸이 교회입니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어렵도다!” 어렵죠. 왜 어려우냐 하면 본인들이 평생을 내 것, 내 것 지키는 식으로 살아왔거든요. 잘 지키면 남한테 승리하는 거예요. 이기는 거예요. 이기면 결승에 올라가서 몇 등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게임에서 지기 싫은 겁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껏 바르게 살아왔다는 것을 계속 지켜줘야 해요. 함부로 살지 않았고, 탈선하지 않았고, 바리새인처럼 저 세리와 같지 아니했다는 말을 왜 합니까? 지금 게임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바리새인은 옆에 세리 붙들고 게임하고 있는 거예요. 랭킹 56위에게 나는 지지 않았는데 랭킹 2위가 되고 뭐 이런 것. 결국 인간은 서로 곁눈질 하고 서로 견제하면서 살아온 겁니다. 어릴 때부터 다 그래 와요. 어릴 때부터 부모가 맴매하면서 “아이고 뉘 집 애는 안 그러는데 너는 왜 이렇노?” 맨날 뉘 집 애는 어떻고 뭐 이러고.
남편은 아내보고 옆집 마누라 좀 본받으라고 뭐 이렇게 하고. 옆집은 아침마다 국에다가 따박따박 밥해서 바치는데, 우리 집은 콘프레이크 우유타서 먹으라고 내놓으니까 좀 본받으라고 하죠. 그러면 그 아내도 가만히 있지 않죠. “저 집 남편처럼 돈이나 벌어와 봐라. 내가 니하고 싶은 대로 다 해주지.” 그때는 니가 돼요. 니하고 싶은 대로. “으이그 니 땜에 내 인생 조진 것을 생각하면.. 지금 참고 있는 줄 알아라.” 뭐 이런 식으로. 모든 게 비교고, 지키기고, 경쟁이고. 여러분 힘들지도 않습니까? 힘들어도 우에 합니까? 다른 재주가 없는데. 다른 재주가 없어요. 그게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걸 대리만족한다고 드라마 보면서 같이 울고 같이 웃고.
아직까지 지금 아들의 죽음이 성전 속에 있다는 그 이야기는 안 했어요. 어쨌든 간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다가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것이, 이 성전에서 제물이 죽어서 피를 내는 그것을 보여주는 계기로서 성전이라는 것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보여주는 계기로서. 그래서 성전에 일반인들은 못 들어와요. 왜냐하면 들어오면 죽습니다. 일반인들은 아직까지 젊은 건강한 자라고 할지라도 이쪽 성소에 들어오면 죽습니다. 성소에 들어오면 죽는다는 말은 이미 이쪽 세계는 무슨 세계다? 이미 죽어있는 세계라는 말입니다. 죽어있는 세계.
죽어있는 세계인데, 나이 들어서 죽어요. 나이 들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나이 들기 이전부터 이미 죽어있어요. 그럼 죽어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야 됩니까? 여기에 들어오면 죽는 이 자리(성소)에 어린양이 매일같이 죽어나가고, 소가 죽고 염소가 죽을 때, 누가 죽입니까? 하나님이 죽이잖아요. 하나님이 이쪽을 이렇게 죽인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소 바깥에 있는 인간들을 하나님이 죽일 수도 있는데, 대신 이쪽 제물을 죽임으로서 유보시키는 거예요. 바깥 인간들을 살려주는데 영원히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유보시킨다니까요.
유보시킨 동안에 뭘 발견해야 합니까? 성소에서 죽어가는 제물, 소와 염소와 양의 죽음과 자기의 죽음이, 관련성이 있음을 그들은 발견해야죠.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다? 그냥 죽이시는 분이다. 왜 죽이느냐? 죽어있다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그걸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 나를 죽여야 하는데 내 대신 다른 양이나 염소나 소를 죽임으로서, 너는 내가 보기에 이미 죽어있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그 관계가 무슨 관계냐 하면, 이게 바로 언약관계에요. 언약관계. 하나님의 약속관계에요.
이걸 누가 알아봅니까? 아무도 못 알아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걸 알아보게 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까지 어느 자리에, 성소에 있을 분이 어디로 갑니까? 바깥으로 나가요. 성소 바깥에, 세상으로 나갑니다. 세상에 갔다가 다시 어디로 들어갑니까?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죽어버리죠. 치워라! 비워놓고 그 빈자리에 누가 끼어들어가요? 예수님 본인이, 본인이 들어가요. 본인이 들어갈 때 어떻게 들어가느냐 상처 입은 몸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시죠.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세례요한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어린양이죠. 어린양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도착지점, 마감되는 지점이 어느 지점이에요? 어린양은 어디에서 죽어야 합니까? 성소에서 죽어야죠. 성전에서 어린양이 죽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이 죽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진짜 성전, 예수님의 죽음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겁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뭐냐 성령의 전입니다. 성령의 전.
그러니까 성령의 전은 어디에나 있다가 아니라 아무 데도 없는 곳이에요. 오직 성령을 주신 그 자리에서만 이게 성전이 되고 성소가 되는 거예요. 처소가 되죠. 그걸 처소라고 하는데,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되고, 너희와 내가 하나가 되고, 성령이 우리와 하나가 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보면 이겁니다. 모든 인간은 정신적으로 안전처를 원한다. 쉘터shelter라고 하거든요. 피난처, 도피처. 내가 살 수 있는 영원한 곳. 그런데 그런 사고방식 자체는 뭐냐, 누굴 지키는 거예요? 나는 나를 끝까지 지켜야 된다. 나는 나를 끝까지 살려내야 된다는 책임감을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나를 지켜야 할 이유나 권리가 있습니까? 그걸 모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연구하고 나를 자꾸 분석하니까, 나는 나 잘되는 것만 생각하지 내가 못되는 것은 아예 그 분석 자체에서 빼버리는 거예요. 자꾸 이걸 제켜버리는 거예요. 내가 저주받는 것, 이런 것은 아예 안 들은 걸로 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영이 왔다. 십자가 사건이 터질 때, 딱 보니까 내가 아무리 나를 지켜도 부질없는 짓인 거예요. 결국은 나이 90넘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고, 힘없다고 해서 죽어버리면 내가 없어지잖아요. 근데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부활하셨죠. 영원히 안 없어지잖아요. 없어지지 않고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누구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죠.
이 아들의 영,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 땅에서 죽을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바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바아버지라고 부른다는 말은, 이미 성령 받은 이 사람은 영원히 뭐가 된다? 아들인고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지금부터 영원토록 절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뭐 와야 말이지.
제가 수요일에 뭐라고 했던가요? 갈라디아서 4장하면서.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더 이상 할 게 있다? 없다? 성령을 오라고 해서 왔습니까? 알아서 와놓고, 아바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나라를 상속받아요. 상속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상속? 아버지가 부자면 자식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아버지의 재산 몽땅 인수받는 것. 천국을 우리한테 인수해주는 거예요. 왜?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과 더불어, 주님과 더불어 인수인계 받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지금 관건이 성령이 오느냐, 안 오느냐가 관건이잖아요. 근데 이미 성령이 왔으면, 추가해서 우리가 할 게 있어요? 없어요? 할 게 없죠. 이걸 다른 말로 해봅시다. 이제부터 내가 나를 지킬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 윤리와 내 도덕성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착한 나를 지킬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착하게. 그 착하게 지키겠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수상해요. 내가 보기에는. 진짜 수상해요. 뭐지? 도 닦나. 도를 닦아? 사람이 도를 닦으면 그냥 닦는 게 아닙니다. 곁눈질을 하죠. 호숫가에 있는 집들. 옆집을 보죠. 오늘 제목을 호숫가에 집이라고 할까?
저 사람이 기도 두 시간 하면 나는 세 시간 하는 거예요. 도 닦을 때 그냥 하는 법이 없어요. 모델이 있어요. 저 사람이 어떻게 기도했길래 갈수록 부자가 되고, 나는 어떻게 기도했길래 집도 안 나가고. 기도도 안 했겠지만. 다른 집은 내놓자마자 웃돈 더 주고 팔았는데, 이거는 뭐 이천 만원 깎아도 안 나가고. 집 보러 와도 이상한 사람만 와서 보고 가고. 항상 우리는 모델이 있다니까요. 모델이. 모델이 없는 생각을 안 해요. 저 사람처럼 돼야겠다. 저 가정처럼 해야겠다. 모델이 있다는 말은 내 인생은 누가 지킨다? 내가 지키고 싶은 거예요. 내가.
그러면 그것은 자기 의가 되고, 자기 의가 되면 마귀한테 계속 시달려야 해요. 시달리게 되면 뭐가 없습니까? 감사가 없고 고마움이 없어요. 여러분 감사와 고마움이 없으면 이거는 성령의 일이 아닙니다. 억지가 돼요. 억지가. 아이고, 고맙습니다. 아이고, 황공무지로소이다. 다 예스고 아니요, 라는 게 없습니다. 이렇게 안 되면 그 일 하지 마세요. 인간이 착한 것이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해야 착한 일을 해요. 그러니 그 억지가 얼마나 자기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조금 더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은, 시편에 보게 되면 반드시 기도는 성소에서, 또는 성전에서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전은 뭐가 있느냐, 피가 있는 곳이거든요. 시편은 성전+다윗가문이 결합이 됩니다. 이게 시편이에요. 시편은. 시편은 대부분 무슨 노래냐 하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누가 짓습니까? 시편의 작사가가 누구에요? 뭐 박건호입니까? 박건호 라는 모닥불, 잊혀진 계절을 작사한 유명한 작사가가 있어요. 대부분의 작사가가 누굽니까? 다윗이잖아요. 다윗.
다윗이 성전에 올라갈 때 그냥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올라간 줄 알아요? 다윗언약에 의해서 올라간 거예요. 자기가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다윗 언약에 의해서 성전과 접근이 돼요. 다윗언약에 의해서. 그러면 다윗언약이 살아있으면 성전도 살아있는 셈이 돼요. 그래서 시편은 예언요소들이 많이 있어요. 그때는 시온, 시온성, 시편에 나오는 시온, 시온성이 뭐냐 하면 다윗 때 세운, 예루살렘을 말하거든요. 모든 시편은 성전을 높이기 위한 찬양이에요.
제가 지난 오후 설교 때 찬양에 대해서 했죠. 최진사댁 셋째 딸. 그때 녹취하신다고 참 쉬웠죠? 인터넷에서 가사만 베껴 쓰면 되니까. 또 담뱃가게 아가씨. 전부 다 이게 서사구조가 아닙니까? 서사구조는 승자입장에서 이미 느긋한 마음으로, 이제는 더 이상 변동되지 않는 운명, 내가 변동해도 절대로 변동이 안 되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바뀌지 않는, 다른 자리에 앉아서 찬양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시편이에요. 시편. 시편에서 성전이 나오는 거예요. 기도하는 집이라고.
그러면 이 시편대로 기도하는 집이 결국 누구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겁니다. “헐어버려라. 46년 된 것 헐어버려라.” “그러면 성전이 없잖아요?” “내가 사흘 만에 지을게.” 그러면 이 소리 듣고 제자들은 뭡니까? 자, 제자들은 그때 성령받기 전이거든요. 사흘 만에 짓는다고 하니까, 성령 받기 전에 제자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구심점을 또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그 성전만 붙들면 나는 구원받는다.’
근데 이 성전을 사흘 만에 지어야 한다면 알파고가 등장해야 해요. 알파고. 알파고에다가 십사만 사천 분의 작은 요정이 동원되어야 해요. 알파고가 설계하고 요정들이 노가다 해가지고, 하루 지나면 기초공사 끝. 이틀 지나면 건물 끝. 사흘째는 드디어 축하공연. 인간은 생각하는 게 그거밖에 안 돼요. 인간은 다시 태어나야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니고데모가 생각하는 게 뭡니까? 항상 출발점이, 계시가 자기 몸부터 시작해요. 자기 몸부터.
성전을 지을 때 옛날에는 어떻게 지었습니까? 인간의 몸이 일했죠. 목수를 동원해서, 벽돌 구워서, 턱턱 받치고 하는 일을 한 네 시간 하면 새참이 오죠. 컵라면 먹고 한 두 시간 자고 일어나서 다시 하고. 항상 그걸 생각하겠죠. 46년 동안 그렇게 착실하게 지었는데, 어떻게 쓸어버리고 사흘 만에 지을 수 있느냐? 이거 뭐 속도를 빨리 하면 되겠어요?
인간들은 출발점이 자기 몸이기 때문에, 자기 몸의 그런 아이디어가 죄에서 나왔고, 그게 오류라는 생각을 아무리 해도 그걸 몰라요.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령이 와야죠. 성령이 오게 되면 오류를 아는 것이 아니고 오류밖에 나올 게 없는 몸으로, 나를 지키는 식으로 구원받고자 쓸데없이 마귀한테 농락당했고, 앞으로 몸이 있는 이상은 계속 농락당할 것이라고 고백하는, 그것이 바로 성전을 향하여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세리의 기도라 이 말이죠.
그럼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주여, 제가 바로 죄인입니다. 망하게 된 죄인입니다. 나는 이미 죽은 인간입니다.”라고 그렇게 기도할 때, 그것이 바로 성령이 있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바로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나오는 성전입니다. 참 쉽죠. 참 쉬운 거예요. 십자가에서 온 영이 와버리면, 십자가가 꽂혀버리면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성전이 되는 겁니다.
이제는 내가 중심을 찾을 필요가 없이, 중심되라고 이미 나를 뽑아다가, 중심 되는 그 자리에다가 나를 섞어버렸어요. 그러니까 게임할 필요도 없고. 구태여 내 것을 지킬 필요도 없고. 내가 지켜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요, 우리는 치매 걸리면 실패해요. “예수가 누군데요?” 이러는데요. 지킬 필요 없어요. 성령주신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더 드러내게 하시고, 치매 걸리는 것도 죄 값으로 마땅히 치매 걸려야 하죠. 치매 걸리더라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늘 이렇게 감사해야 되고, 늘 고마워해야 되는데, 우리는 자꾸 어떤 모델을, 괜찮은 모델을 선정하는 이 죄악 된 본성이 또 발휘됩니다. 주여, 이것까지 이미 어린양의 피로 용서해주신 것에 대해서, 되풀이해서 늘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