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3 - 허무의 바다
08,04,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85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전도서를 지혜의 문서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지혜의 세계가 아닌 율법적 세계, 또는 언약세계에 있어서 허무라고 하는 것을 조사해보니, 그것은 우상숭배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지혜와 허무 !!
전도서를 지혜의 문서라고 하는데, 허무를 배경으로 해서 지혜가 나온다는 것인데, 허무가 없으면 지혜가 지혜답게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먼저 허무를 깔아놓고 지혜를 이야기하는데, 그러면 이 허무가 '없다' 라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전도서 1장 6절에 보면 바람이 나오는데, 7절에는 강물이 나오고 말이죠. 여기서 보면 이 '허무' 라는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백 날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 라는 겁니다. 바람은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종잡을 수가 없는데, 강물도 역시 그렇고 말이죠.
(전 1: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전 1: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허무는 무엇인고 하니, 계획도 없고 목적도 없는 것, 그것을 두고 허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유도 없는데, 그렇게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말이죠. 무엇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바람도 있고 강물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질서하다고 할까요? 아무튼 이 세상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겁니다.
허무로 채워진 이 세상 !!
그렇게 이 세상은 채워져 있는데, 즉 허무로 채워져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허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계획도 없고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다는 말이죠. 즉 계획없음, 목적없음, 이유없음으로 이 세상이 비어있는 것이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지혜를 언급하시는데, 즉 "계획도 없지? 목적도 없지? 이유도 없지? 그렇지?"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허무로 배경으로 하면, 여기에 인간은 과연 포함이 될까요? 되지 않을까요? 모든 것이 계획도 없고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다고 하면, 사람도 역시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계획이 있고 목적이 있고 이유가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지혜' 라는 말이죠. 그러니 지혜가 없이 살면 우리는 바람과 같은 존재이고, 또한 강물과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지혜가 끊어진 상태에서는 살아도 그게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지혜와 허무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가?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지혜와 인간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는 것인데, 즉 "지혜와 허무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가?" 라는 문제만 남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혜와 허무를 연결시킨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계획이 있고 목적이 있고 이유가 있는, 그런 의미가 있는 삶이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지혜가 없는 사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강의를 다시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허무를 배경으로 해서 지혜를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지혜와 결합된 사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지혜가 없는 사람을 생각해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서로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된다는 말이죠.
성령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러면 성경에서 "성령을 받았다" 라고 하면, 혹은 "성령세계를 받았다" 라고 하면,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성령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라는 것을 살펴보면 된다는 겁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 지혜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성경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방인'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특히 구약에서 그러한데, 그렇다면 이방인이 아니라고 하는 자기들은 무엇이 있다는 겁니까? 언약이 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인데, 그런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면 참된 신이고, 반면에 약속이 없으면 우상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신을 믿습니까? 우상을 믿습니까? 우상을 믿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없다는 말이죠. 그 언약은 모세가 받아온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생기자마자 모세를 시내산에 불렀는데, 그리고 내려갈 때 빈손으로 가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오실 때 빈손으로 왔습니까? 어떤 업무를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즉 자기 택한 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오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는 그러한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그분이 뭔가 가지고 온 것이 있다는 말이죠. 자식들이 오랜만이 오면서 빈속으로 오면 섭섭한데, 뭔가 들고 오는 맛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3장 36절을 보겠습니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하나님이 아닌, '아들' !!
저는 이 말씀을 너무 좋아하는데, 개인적인 욕심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말씀은 정말로 액자로 만들어서 현관에 걸어놓고 싶다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아들을 믿는 자는" 라고 하는데, 그러니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인데, 이것을 분명히 해야한다는 말이죠.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아들을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정치적인 문제를 이 성경말씀을 가지고 해결을 하려고 하는데, 특히 천주교에서 그런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죠. 제주도의 해군기지 문제, 그리고 세월호 문제도 역시 그렇다는 말이죠. 아무리 의구심이 들고 대통령이 무능했다고 하더라도, 성경말씀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정말로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반박을 해야하는고 하니, 이 요한복음 3장 36절이라는 말이죠. 성경말씀을 현실문제와 바로 연결을 시키면 안 되는데, 사회적 문제, 정치적 문제, 또한 북한 문제를 말이죠. 성경말씀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즉 "아들에게 순종치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겁니다.
성경말씀으로 이 세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저주가 본격화된다는 것인데, 그러면 아이들이 바다에 빠진 상황이 어떤 상황인고 하니, 아들에게 순종치 않은 이 세상이 당연히 받아야하는 저주의 상황인데, 그러니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면 안 되고, 주님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 더욱 더 화끈하게 다가와야 한다는 겁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닌데, 만약에 어떤 분이 "목사님, 우리 가정에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하면, 그때는 요한복음 3장 36절을 제시하면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영생을 얻었으면 되었지, 가정까지 왜 신경을 쓰느냐는 말이죠. 그리고 자기가 저주를 받았으면 그 가정이 아무리 화목해도 저주받은 가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가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요하고 말씀이 중요한데, 그 성경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아들에게 순종하면 영생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다" 라는 겁니다. 어린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고 해서, 그리고 그게 아무리 이상하고 억울하다고 해도,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성경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이 얼마나 저주스럽고 계획도 없고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는지 모르는데, 하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성경말씀은 전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 있지를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세월호 4주기는 관심을 끌지만, 성경말씀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요한복음 3장 36절의 말씀이 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지 못합니까? 그것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성경말씀은 분명하게 계획도 없고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계획과 목적과 이유에다가 온통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말이죠.
나는 허무하지 않다 !!
성경말씀은 "이 세상은 허무하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내가 있기에 허무하지가 않다" 라고 나오는데, 그렇게 애를 쓰고 있다는 말이죠. 정말로 허무하지 않으려고 하면 지혜와 관련되어야 하는데, 그리고 그 지혜는 하나님의 언약인데, 그 중에서도 '다윗언약' 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허무와 지혜를 관련시키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은 다 허무해도 나는 허무하지 않다" 라고 나오니, 그게 전혀 연결고리가 없다는 말이죠. 허무의 자리에 가야 하나님의 지혜와 연결되는데, 그런데 그 자리에 가지를 않고 '나' 라는 것이 거기에 버티고 있다는 겁니다. 즉 "나를 위한 하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하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고 이방인의 하나님인데, 즉 '우상' 이라는 겁니다. 남들은 몰라도 자기는 허무하지 않다는 것인데, 누가 가르쳐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예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버티고 있다는 말이죠. 전도서 1장에 나오는 "계획도 없고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다" 라는 것이 전혀 동의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전도서 7장 13절에 보면,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인간들은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이 굴곡이 많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누가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인생의 굴곡을 주셨다는 것이죠.
(전 7:13)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지금 다리에 굴곡이 생겨서 고생하는 분이 계시는데(ㅋㅋ), 그런 경우에는 무엇입니까? "나는 다치면 안 됩니다" 라는 것인데,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느냐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생은 허무하다는 말이죠. 즉 계획도 없고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는데, 있더라도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전도서의 내용은 무엇인고 하니, 인생은 허무한데 인간들이 허무하지 않으려고 온갖 애를 다 쓰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 예루살렘의 왕 전도자 솔로몬이라는 겁니다. 허무한 인생은 자기의 방식으로 그 허무에서 탈출해보려고 했는데, 모든 노력을 다 해보았다는 말이죠.
여기서 전도서 1장을 보겠는데, 14절에서 17절입니다.
(전 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 1:15)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전 1:16)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전 1: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
그래서 전도서 1장 14절에 보면,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라고 하는데,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가 지혜자로서 모든 것을 다 보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어떻다는 겁니까?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라고 하는데, 바람이 어디 잡힙니까? 바람은 고정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리고 15절에서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라고 하는데, 자기가 모든 것을 더 해보았지만, 그게 다 바람을 잡는 일이었다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여기에 대해서 얼른 동의가 되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전도자가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허무함과 허무하지 않음 사이의 연결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요구한다고 해서 성취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이 세상을 계획도 없고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이 만드신 분께서, 그렇게 하신 배경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쉽게 말해서 이 세상을 빈 그릇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일단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다 버리게 해놓고, 즉 허무하게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거기에 하나님의 지혜를 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빈 그릇이다 !!
자기 스스로 허무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그 허무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서 자기를 포기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를 포기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는데, 자기가 원하는 계획과 목적과 이유는 하나님에게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고, '나' 라는 빈 그릇에 담기는, 즉 하나님께서 담아주시는 그 안에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과 이유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빈 그릇이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것을 로마서 9장에서는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빈 그릇이라고 할 때는 여기에서 "나는요?" 라는 것이 빠져나와야 하는데, 그런 사고방식이 말이죠.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저는 어떻게 합니까? 이것을 무시하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는 것이 그만 확 빠져나가야 하는데, 즉 "내 생각은 하지 않기" 라고 하는, 그게 바로 '빈 그릇' 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서 "나는 무엇을 해도 빈 그릇이다" 라고 하는, 즉 "내가 무엇이 해도 하나님께서 다 버린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나는 무엇을 해도 빈 그릇이다. 무엇을 담아도 하나님께서 다 버린다" 라고 말이죠.
나는요?
김순권 박사라고, 옥수수 박사로 유명한데 분인데, 그렇게 고생고생을 해서 품질이 좋은 옥수수를 개발했다는 겁니다. 북한에도 지원할 목적으로 말이죠. 그런데 그게 판매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다 썩어서 버렸다고 하는데, 어제 뉴스에 나왔다는 말이죠. 물론 그런 식으로 버리는 것은 가슴이 아프지만, 아무튼 다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는 게 모두가 다 그런데, 물론 나름대로는 다 목적이 있는데, 하지만 빈 그릇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내가 세운 모든 계획은 다 수포로 돌아갑니까?" 라고 하면서 짜증을 내면 안 되는데, 즉 "나는요?" 라고 하는 것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장담하는데, 이게 몸에 박혀있으면 100% 암에 걸린다는 말이죠.
바로 이 "나는요?" 라는 것 때문에 일곱 귀신을 모두 데리고 사는데, 남편이 2박 3일로 놀러 가는데 "나는요?"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ㅋㅋ). 가도 빈 그릇이고 가지 않아도 빈 그릇이라는 말이죠. 주님의 말씀이 담겨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나는 무엇을 챙기지?" 라고 하면, 그러면 산다는 것이 너무 피곤하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아모스서 5장을 보겠는데, 5절과 6절입니다.
(암 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암 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여기 5절에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그때 괜찮은 지역에 다 우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 당시에 이방나라가 잘 사는 이유는 그들이 믿는 신 때문이라는 것이 확산되어 있었다는 말이죠.
자기가 잘 사는 것, 그게 사람의 자기 계획인데, 자기가 행복하고 편안하면, 그것이 전부라는 말이죠. "당신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어요?" 라고 하니까, "나는 이 신을 믿었는데, 그래서 부자가 되었지요" 라고 한다면, 그러면 확 퍼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시집을 가려고 사주팔자를 보았는데, "그 남자를 놓치지 말라" 라고 나오면, 그러면 결혼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찾아라. 그리하면 살리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어떤 특별한 지역에 가서 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모스가 내뱉은 지혜, 그 하나님의 계시를 너의 빈 그릇에 담아라" 라는 겁니다. 주님의 계시는 이동시키는, 그런 전달매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지옥과 같이 이 세상에서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말씀을 싣고 돛단배처럼 살아가라는 겁니다. 아모스의 예언을 아모스의 예언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예언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이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겁니다.
빈 그릇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허무를 배경으로 해서 지혜를 주시는데, 그런데 그 허무 속에는 우리도 포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나의 계획', '나의 목적', '나의 이유', 그것을 너무 붙들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즉 무엇을 자꾸만 채우려고 하지말고 빈 그릇으로 만들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빈 그릇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그 사람은 어디를 가더라도 말씀이 담긴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움직이는 전도서가 되는데, 이미 허무한 줄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지혜를 담아주셨기 때문에, 그런 사람의 눈으로 보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허무의 바다 !!
그렇게 이 세상이 헛된 것으로 보이게 되면 더 이상 남들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다 헛됨, 즉 허무의 바다이고 출렁이는 파도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면 사탄이 왔다가도 재미가 없어서 그냥 가고 만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제목을 '빈 그릇'에서 '허무의 바다'로 바꾸겠는데, 일단은 말이죠(ㅋㅋ). 그래서 성도는 허무의 바다에서 외로운 돛단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들을 이방인이라고 하고,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다는 말이죠. 즉 계획이 없는 신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계획이 없는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계획과 목적과 이유를 그대로 들고, 그것을 자기 믿는 신에게 그대로 퍼부어 버린다는 말이죠.
왜 수능시험을 치면, 그 시험을 치는 학교의 정문은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떡으로 갖다 발리게 되는데, 그렇게 자기의 소망을 발라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중에 그 학교의 수위들은 그것을 뗀다고 난리를 친다는 말이죠. 교회와 절에서 기도하다가, 그게 양에 차지 않아서 학교까지에 와서 그런 짓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에게 나올 때는 빈 그릇으로 나오는 게 아니데, 노림수가 있다는 말이죠. "이번 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앞으로 나오지 않을 거야" 라고 하는, 그런 협박과 같은 것을 품고 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는 빌 때 아무런 목적도 없이, 오직 말씀만 담기기를 소원하면서 빈다고 한다면,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성령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신에게 나올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는데, 사업이 어렵다든지, 아이가 성적이 떨어진다든지, 별 이유도 없이 몸이 아프다든지 말이죠. 그래서 자꾸만 신을 찾게 된다는 겁니다.
이사야서 41장 29절에 보면, "그들의 모든 행사는 공허하며 허무하며, 그들의 부어만든 우상은 바람이요 허탄한 것뿐이니라" 라고 하는데, 여기에도 바람이 나오는데, 그리고 허탄하다고 하는데, 즉 아무 것도 없는 공중에 대고 헛발질을 한다는 겁니다.
(사 41:29) 과연 그들의 모든 행사는 공허하며 허무하며 그들의 부어만든 우상은 바람이요 허탄한 것뿐이니라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데, 즉 "나 자신을 헛된 인간으로 확정해주옵소서" 라고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나는 허무하지 않게 하옵소서" 라고 말이죠. "저를 허무하게 하옵소서. 그래야 주의 말씀이 전혀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담게 됩니다" 라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여, 지금 저의 사정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교회를 지을 때 강대상을 제가 헌금한 것도 아시지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러니 어떻게 좀 해결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무슨 협박도 아니고 공갈도 아니고 말이죠. 그러면서 "전능하신 하나님, 만유의 주재시여!" 라고 하면서 온갖 형용사는 다 붙인다는 겁니다. 빈 그릇에 오직 주의 말씀만 담겨야 하는데, 그런데 정작 주의 말씀에는 관심도 없다는 말이죠.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처럼, 아들에게 순종하라 !!
자기의 욕망과 욕구, 즉 "나는 이렇게 가치가 있다" 라고 하는 자기 계획으로 고집을 부리면서 버티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36절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이 나온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비교해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섬기는 것은 언약대로 섬기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자기 욕망대로 섬긴다는 것이죠. 공갈과 협박까지 해대면서 말이죠. "아들을 공경하라" 라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처럼 아들에게 순종하라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아들처럼 되지 않으면 "이런 못난 놈아!" 라는 차원이 아니라, 저주가 주어진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이 땅에 심판주로 보냈다는 것인데, 그러니 심판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이 한다는 겁니다. 즉 아들이 그 기준이라는 말이죠.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인간은 그 누구라도 자기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데, 그래서 우리 인간은 자동적으로 저주를 받을 수밖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저주받은 모습을 예수님께서 하신 일 앞에 가지고 오게 되면, 그러면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섬긴 것과 비교가 되는데, 예수님은 아버지를 어떻게 섬겼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버릴 때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런 예수님을 믿고 순종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 예수님의 목숨 버림이 무엇과 관련이 있는고 하니, 우리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그 우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행하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행하지 못한 것을 말이죠.
구약에서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 누가 대신 기도를 했습니까?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서서 대신 기도를 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주시는데,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세의 말에 순종하면 살 수 있지만,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와 망하는 인간이니, 그때 저주를 받더라도 군소리를 하지 말라" 라는 겁니다.
예수님도 모세와 똑같은 경우인데,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이미 들통이 났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조건을 주는데, 그것이 바로 새언약이라는 말이죠. 즉 "예수님의 피를 믿게 되면 안 되는 '나'를 되게 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나'를 구원받게 하고, 천국에 가지 못하는 '나'를 천국에 가게 하는, 그게 하나님이 내미신 마지막 조건임을 인정한다면, 너에게는 영생이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제주도의 강정마을이나 북한의 핵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죠. 성당이나 교회에서 성경말씀을 가지고 이 세상의 정치문제나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벼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을 사람들을 꼬드겨서 자기의 회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 문제에 집중하니 말이죠.
나는 '나' 밖에 모르는데 !!
이번에 다큐영화를 하나 보았는데, 사드문제로 시끄러운 성주에 사시는 할머니가 나와서 하는 말이,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지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조용히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왜 이렇게 사드인지 뭔지 설치한다고 우리를 못살게 구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들어보면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좀 억울한 면도 있을 것이고 말이죠. 그런데 그 할머니의 말 중에서 고쳐야 하는 게 있는데,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라고 하면 안 되고, "나는 나밖에 모르는데" 라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사드가 아무리 필요해도, 자기가 사는 곳에는 절대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결국 그 어디에도 사드를 설치할 곳은 없다는 겁니다.
물론 서울이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산 속에 있는 그 성주가 아무리 적절하게 보여도, 하지만 성주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이기주의가 아닌 경우가 없는데, 굳이 지역 이기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말이죠.
자기에게 손해가 되기 전에는 천하의 애국자인데, 그런데 막상 그런 일이 닥치면 애국이고 나발이고, 그런 것은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여기 지묘동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면, 여기 사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결코 성주 사람들보다 덜하지 않다는 말이죠. 장애인 엄마들이 앉아서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를 하고, 도대체 그게 뭐냐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빈 그릇이 아닌데, 욕심이 들어있고 탐욕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허무하게 만든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세상이 허무하다는 것을 인간만 몰랐는데, 물론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고, 다른 피조물들도 다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바람과 강물이 모두 허무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뭐라고 합니까? 이 세상 전체가 바람이고 강물이라는 것인데, 목적도 이유도 없이 돌아가고 있는데, 그러니까 허무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만 유독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데, 그래서 가는 곳마다, 즉 길갈, 벧엘, 브엘세바 등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신을 심어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런 신들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행하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 영광을 위해 만든 땅인데, 그런데 여기에 엉뚱한 것이 들어오니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창세기 2장을 보겠는데, 1절과 2절입니다.
(창 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창 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여기 2절 마지막에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라고 하는데, 누가 안식을 합니까? 하나님께서 안식을 하시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만든 곳이니 말이죠.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웃음이 나오는데, 왜냐하면 이런 당연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보기가 너무나 힘들어서 말이죠.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성경말씀은 무엇을 전제로 합니까?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고,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이 만들어졌고, 그것은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이란 말이죠. 그런 믿음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든 것의 종착점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되고 말았는데, 즉 "나만 기쁘면 되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 이것이 나의 계획이다. 끝!",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는데,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말이죠.
여러분은 언제 기분이 좋고, 언제 감사가 나옵니까? 여기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차이가 나는데 말이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내가 잘 되면 기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오해는 말았으면 좋겠는데,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이 그렇다는 말이죠(ㅋㅋ).
뭔가 잘 된 것이 있으면, 마누라가 바가지를 좀 긁고 손님이 싫은 소리를 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수제비를 끓였는데 육수가 잘 우러나고 밀가루 반죽도 잘 되고 해서 맛이 있으면 아주 기쁜데, 왜 그렇습니까? 자기 입맛을 만족시켰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서 기뻐한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한 가족이니 말이죠. 결국 만나서 같이 살게 된다는 겁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게 되는데,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친정이 하늘이라는 것인데, 그러면 이 땅에 사는 자들도 같이 기뻐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한다는 것을 우리가 언제 어떻게 눈치를 챌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우리도 같이 기뻐해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언제 기뻐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자기 혼자서 기뻐하면 되겠느냐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방금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인간의 계획과 목적과 이유는 이미 확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게 피조물이 살아가는 이유이고 목적이라는 겁니다.
당황스럽게 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저는 믿습니다"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까? 사실은 같이 기뻐해야 하는데, 그래서 믿음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그게 일시적으로 근심이 되고 슬픔이 되고 당황스럽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허무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기 때문에, 즉 자기가 허무해지지 않기 위한 나름대로의 계획이 잡혀있다는 말이죠. 자기는 이번에 아파트에 당첨이 되고, 자식은 시험에 합격하고, 그런 계획들이 모두 다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는 기쁜데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연장시켜서 "제가 이렇게 기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면서 성의도 표할 의향도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일단은 자기 뜻대로 되어서 기쁘고, 그러면 헌금도 드리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같이 기뻐해 줄 것 같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나'에게서 나온 계획이란 말이죠. 그 '나'는 그냥 '나'가 아니라, '나'의 욕심이고 '나'의 욕망인데, 그 재료는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즉 이 세상 것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주여, 감사합니다 !!
어떤 사람이 보리밥을 먹고 다이어트를 했다고 하니, 자기도 욕심이 생겨서 저녁으로 보리밥을 먹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침 가까운 곳에 보리밥을 잘하는 곳이 있으면 "주여,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기뻐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 기쁨은 무슨 기쁨입니까? 자기에게는 없고 남에게 있는데, 그래서 그게 탐나게 되고, 바로 거기서 나온 기쁨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5절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래서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이죠. 허무한 세상에 있으면서, 그게 눈에 들어오고 욕망이 생겨서 계획을 잡는다고 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이 세상 것이란 말이죠.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기뻐하고, 거기서 일부를 떼 내어서 하나님에게 바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기뻐해 달라고 억지를 부리지만 말이죠.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상 밖의 일을 일으키는데, 그러면 우리는 엄청 당황하게 된다는 겁니다. 마치 보이스 피싱을 당한 것처럼 말이죠. 저녁에 밥을 먹고 재미있게 TV를 보고 있는데, 그런데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친구가 위암 4기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워있어도 잠이 오지 않는데, 물론 병 문안을 가서 치료비를 얼마나 보태주어야 할지도 걱정이 되지만 말이죠(ㅋㅋ).
그 다음날에도 또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이번에는 조카가 "아제요, 우리 아이가 누구를 때려서 경찰서에 가있어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기도를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합의금을 좀 보태달라는 소리라는 것이죠. 아무리 말을 돌려서 해도 말이죠. 그래서 "알았다. 기도해줄 게" 라고 하면 안 되고, "합의금이 얼마고?" 라고 나와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물망'처럼 형성된 세상 !!
그러니 자기만의 인생이 아닌데, 친척들을 비롯해서 주위의 모든 것이 다 연관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혼을 해도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우리 둘이 좋으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방이라도 하나 얻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엄마, 내가 어떻게 살던 신경을 쓰지 마세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나올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 라고 하는 이 자아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도움과 관심과 기도와, 그들이 세운 나름대로의 계획과 함께, 그것이 마치 '거물망'처럼 형성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목사의 경우에도 "나는 자유자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행동한다" 라도 해도,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목사에게 많은 관심을 둔 교인들이 있는데, 물론 교인들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내가 교회에 가지 않으면 그만이지"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목사가 그 교인들에게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습니까? 새벽마다 기도도 하고, 심방도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자기 자신이 우상이라는 겁니다.
흔히 부모들이 뭐라고 합니까? "자식은 다 키워놓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내가 자식에게 기대를 많이 했다" 라는 의미인데(ㅋㅋ), 그렇지요? 그러니 당황스럽고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굽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의 뜻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인데, 그런데 정작 차를 몰고 달려보니, 고속도로는 고사하고 길이 점점 더 굽어지더니, 나중에는 울퉁불퉁하고 굽어진 비포장도로가 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도대체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느냐는 말이죠.
10년 동안 연락이 없던 친척이 찾아와서 하루만 재워달라고 해서 재워주었더니만, 그게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도 졸지에 자기가 살던 집에서 쫓겨나서 친척집에 가서 그렇게 신세를 질 수 있다는 말이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하면서 몇 년을 놀면서 집안에서 눈총을 받던 놈이, 그런데 나중에 자기가 꼭 필요한 곳에 공무원으로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 자식이 그만 사고를 쳐서 경찰서에 갔는데, 거기서 근무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좀 도와달라고 하면서 손을 벌려야 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니 인간들은 자기 밖에 모르는데, 물론 도와줄 때는 고맙다고 하지만 그 뒤에는 입을 닦고 만다는 말이죠. 하지만 막상 또 무슨 일이 생기면 또 다시 찾게 되는데,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은 허무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알 수 없는 무질서와 무계획 속에 소용돌이처럼 휘말려 있다는 겁니다.
평소에는 "이 정도면 족하다" 라고 하면서 큰소리를 치지만, 막상 사건이 터지게 되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방팔방 전화를 하고 난리를 친다는 겁니다. 마치 타이어 펑크만 나도 보험회사를 찾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나만의 계획' 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모르는데, '나만의 목적', '나만의 이유', 그런 것이 다 말이죠. 그래서 성경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조금 전에 이야기한 '빈 그릇' 이라는 의미인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 어떤 도움도 필요가 없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 라고 하면서 고집을 부리는데, 그러다가 넘어져서 고관절이라도 부러지면 자식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빈 그릇이 되지 않은 것을 주님께서는 빈 그릇으로 만들어버리는데, 거기에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말씀을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이게 하나님의 지혜인데,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기쁨을 드려서 기쁨이 아니라, 본의 아니게 기쁨조가 되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을 조져서 변화가 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 자신의 계획을 완전히 무산시키고,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새로운 하나님의 계획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우리는 "그동안 내가 너무 시건방을 떨었구나. 이 세상의 쾌락에 너무 빠져있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러면 그 순간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겁니다.
그동안 자기는 자기의 존재함이 진리인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그게 얼마나 위선적이고 철딱서니가 없는 모습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야말로 역겨운 짓을 하면서 평생을 살아왔다는 말이죠. 이제는 더 이상 "나는요?" 라고 하면 안 되는데, '나' 라는 것이 빠지고 거기에 '감사'가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위주로 산다는 것이 더 자기를 힘들게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경말씀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실패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이스라엘의 징계 받음 위에서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이 당한 것을 오늘날 우리가 반복하고 있는데, 그러니 우리가 이스라엘을 욕할 입장이 되지 못하는데,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말이죠.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다" 라고 할 때, 우리는 마땅히 헛되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성도에게는 주어지는 기쁨이라는 겁니다. 마땅히 헛된데 오늘도 이렇게 살게 해주시고, 성경공부도 하게 해주고, 그러니 당연히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마음을 낮추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게 헛된 마음이니 말이죠. 그것을 제가 어느 강의에서, 마치 설사를 하듯이 빠져나와야 한다고 했는데(ㅋㅋ), 그렇게 되어서 우리는 빈 그릇으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범사에 감사하면서 말이죠.
이방제국의 패배 !!
그렇게 이 세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하는 세상인데, 그런데 이 세상에 무엇인가가 꽉 차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그렇게 집어넣었을까요? 그것을 구약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음이 구약성경을 마치면 나올 수 있는 결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말이죠.
첫째는 이방제국의 패배, 둘째는 이스라엘의 회복, 셋째는 순교자의 옹호와 보응, 즉 높임과 상급을 주는 것이란 말이죠. 것이게 바로 묵시문학의 주제라는 겁니다. 방금 제가 '묵시문학' 이라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했는데, 구약에 보면 다니엘서, 하바국서, 요엘서 등이 나오는데, 바로 그게 이러한 내용이라는 겁니다.
먼저 이방제국이 패배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살고 있는데, 그런데 주위의 나라들이 침략을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자기 영역으로 집어넣게 되는데, 그러면 그 나라는 드디어 '제국'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과 관여해서 등장하는 제국이 무엇인고 하니, 먼저 기원전 8세기에 '앗수르(앗시리아)'가 등장하는데, 그 다음이 '바벨론(신바빌로니아)', '메데-바사(메디아와 페르시아)', 헬라(마케도니아), 그리고 '로마' 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순서대로 첫째 짐승, 둘째 짐승, 셋째 짐승, 넷째 짐승,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보통 여기서 헬라는 생략하는데 말이죠.
원래 이스라엘이 살던 땅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인데, 그런데 그 땅에 이방민족들이 들어와서 살게 되면서 어떻게 됩니까? 이방민족은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데, 즉 우상을 섬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이방민족들이 들어와서,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때 하나님은 어디에 가 계시는 겁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은 이제 끊어졌습니까? 아니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겁니까? 그런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그것을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당황, 근심, 절망 !!
아까 제가 믿음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당황하게 되고 근심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는 상황이 일어나야 한다고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약속의 땅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혜택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 생각만 했는데, 즉 자기 계획, 자기 목적, 자기 이유라는 겁니다. 그래서 허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그들은 당황하게 되고 근심하게 되고 절망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인데, 그래서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요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요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요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근심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전초작업 !!
그러니 그 순서가 기쁨이 아닌 근심이 먼저인데, 즉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근심이 먼저 오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왜 근심을 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지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까, 즉 자기 계획이 굽어지니 근심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게 되고, 근심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전초작업이 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에게는 근심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말이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이 세상을 창조한 목적이라고 하면, 그 기쁨을 위해서 자기 백성을 일시적으로 근심하게 놓이게 하는 그 계획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 근심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살던 이스라엘 나라가 망한다는 것인데, 언약이 없는 이방나라에게 말이죠. 그게 앗수르, 바벨론, 메데바사, 그리고 로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망하도록 조치를 하셔서, 그러한 절망 가운데서 그들을 그 제국에서 건져주신다고 하면, 이 건져주심에 대한 기쁨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되고 예수님의 기쁨이 된다는 말이죠.
지금 과정이 그러한데, 만약에 자기가 할 수 있으면 자기가 장한데, 주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기쁨이 될 수 있는데, 즉 "주님이 개입하셔서 구원이 되었군요.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진노를 받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왜 짐승에게 포로가 되었는가?
이렇게 이방민족이 쳐들어온다고 했을 때, 그러면 앗수르는 왜 그런 짐승이 아닌고 하니, 그때까지는 아직 남쪽 유다나라가 약속의 땅에서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물론 자기들 위주이지만, 아무튼 살고 있었다는 것이죠.
앗수르는 북쪽 나라인 이스라엘만 멸망시키게 되는데, 남쪽은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벨론에 오게 되면 유다 나라까지도 망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약속의 땅은 이제 바벨론 제국에 편입이 되는데, 그러면 바벨론 제국 안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는 겁니다.
짐승이란, 악마가 구체화된 모습 !!
그러니 바벨론 제국이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자기 백성은 이스라엘이 되고, 바깥에 있는 이 바벨론은 제국이 아니라 그만 짐승이 된다는 겁니다. 짐승이란 악마가 구체화된 모습인데, 즉 '악마의 실제화' 라는 것이죠. 오늘날은 이 세상의 모든 국가가 다 짐승인데, 왜냐하면 마지막이면서 네 번째 짐승인 로마에서 파생되었기에 말이죠.
그러면 이 바벨론 제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입니까? 자기들 뜻대로 움직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개입이 있을 때 구원이 된다고 하는 희망을 제공하기 위해서, 그래서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역할을 바벨론이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포기하도록 하시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은 허무하니 말이죠. 허무한 것은 계속해서 허무해야한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인데, 그러니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승부를 걸고 하는, 그런 짓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감사가 아닌 짜증이 나게 하는 이방나라 !!
왜 기원에 가게 되면 만원을 놓고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참 돈 가치를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는데 말이죠. 그래서 거기에 돈을 만원 놓지 말고 그만큼 진라면을 놓는다는 겁니다. 그것도 마트에서 세일할 때 사면 5개짜리 4개는 살 수 있는데, 그러면 20개인데, 그것도 매운맛으로 말이죠(ㅋㅋ). 그러면 만원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를 알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이 세상의 햇빛과 공기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러면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데 돈을 쫓아서 살다보니 그런 것은 시시하게 여겨진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부자를 더욱 더 부자가 되게 부추기면서 돌아가게 되어있는데, 어지간한 부자는 부자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갈수록 감사가 줄어들게 되고 원망과 짜증만 늘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방나라고 제국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망하게 해서 이방나라에 편입이 되게 하심으로서, 그것을 아주 혹독하게 경험하게 하신다는 말이죠.
죽으면 죽으리이다 !!
그렇게 해서 진짜로 감사해야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고마워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평소에 그렇게 부러워하던 이방나라, 즉 제국에게 오히려 압박을 당함으로서 말이죠. 그래서 에스더의 경우에는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에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아니라 구원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더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인데,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짐승에게 포로로 잡히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고 오늘날 우리도 역시 짐승에게 포로로 잡혀있다는 말이죠.
로마의 짐승 짓 !!
여기서 바벨론과 메대바사는 그래도 그나마 괜찮은데, 왜냐하면 이들 나라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이스라엘에게 성전을 지어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로마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혜택이 전혀 없어지는데, 오히려 있는 성전마저도 불타버린다는 겁니다.
AD 70년에 로마의 디도(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그야말로 박살을 내어버리는데, 성전도 완전히 다 부수어 버린다는 것이죠. 성전에다가 돼지 피를 뿌리고 하는데, 그것이 다니엘서에 나온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 못된 짐승은 언젠가는 패배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을 하게 되고 말이죠. 그것이 두 번째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세 번째로 그 와중에 얼마나 순교자들이 생기겠습니까? 그렇지요?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목 베인 자들은 하늘나라에서 천년동안 왕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순교자의 옹호와 보응인데, 그런 자들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는 말이죠.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계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허무를 더욱 더 허무하게 만들어버리는, 묵시 !!
그래서 구약의 마지막에 나오는 묵시를 보면, 허무를 더욱 허무하게 만들어버리는데, 이런 묵시적인 내용은 오늘날 이 세상의 실정을 제대로 보여준다는 겁니다. 이런 성경말씀을 보게 않게 되면, 그저 자기 행복이 최고인데, 자기 계획이 기쁨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창조주의 기쁨이 무엇인지,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는데, 자기만 잘 살고 안식을 누리면 그만인데, 그러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우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이 세상은 짐승이 주는 미끼인데, 그런 유혹과 시험에 완전히 빠져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거기서 빠져나오라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미쳤나? 이 좋은 것을 두고 내가 왜 빠져나오노?" 라고 하는데, 봄이 되면 진해로 벚꽃 구경을 가고, 그것도 모자라면 서울 여의도까지도 가고 말이죠. 벚꽃이 피면 여의도 근처의 사무실 사람들이 벚꽃 구경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와서 차가 밀려서 난리라는 겁니다(ㅋㅋ).
봄이면 봄, 여름이면 여름, 가을이면 가을, 겨울이면 겨울,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인데, 왜 빠져나와야 하느냐는 겁니다. 물론 천국은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 세상이 좋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성경에서 "헛되고 헛되다" 라고 해도,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 헛된지 않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짐승과 한 통속이 되어서 그러하다는 말이죠.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도와달라고 해도 왜 도와주면 안 됩니까? 이 세상을 즐기고 싶은데, 그렇게 즐기려고 하니 돈이 모자라고, 그래서 도와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제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웃을 사랑하지 마세요 !!
그래서 저는 "이웃을 사랑하지 마세요" 라고 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도와달라고 하는 인간들이 전혀 순수하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마음도 전혀 없다는 말이죠. 도와주면 오히려 기가 살아서 더 도와달라고 하는데, 그것은 교회에 와서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은혜를 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진짜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당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게 피를 흘렸습니다" 라는 것으로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 십자가 복음 외에는 아무 것도 도와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다른 것으로 도와주게 되면, 그 사람이 속해 있는 짐승의 세계에 더욱 더 빠지게 한다는 겁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로 인해서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아제요, 이모요, 제발 도와주세요" 라고 해도, 냉정하게 거절하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짐승 속에 있는데, 그 짐승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이웃사랑은 결코 물질이나 돈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도와줄 돈도 없겠지만 말이죠.
그래서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들에게 순종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다는 말이죠.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 말씀을 가로막지는 않았습니까? 이 세상이 짐승에게 속해있는데, 거기서 잘 살아보겠다고 얼마나 몸부림을 쳤습니까? 거기서 아무리 사랑을 베풀어봐야, 더욱 더 짐승이 되어질 뿐인 줄 압니다. 그러니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더 이상의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그 십자가만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4,28 오후 10시에 마침. 남한과 북한도 짐승의 국가임에 틀림이 없는데, 왜 이리 온 종일 가슴이 먹먹한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