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기대의 횡포 1805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5. 17. 21:20
2018-05-15 23:00:55조회 : 28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4 - 기대의 횡포이름 : 구득영 (IP:203.223.97.17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4 - 기대의 횡포

08,05,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87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인간 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고 구성하는 사회입니다. 

모방사회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 사회는 천국이 아닙니다" 라는 말인데, 인간 사회가 서로 서로 비슷하게 모방을 하다가보니, 모든 신경을 거기에 다 쓴다는 겁니다. 천국이 아니고 말이죠. 천국에 간다고 하면서도, 정작 천국은 뒷구석이고 하루종일 이 세상에 몰두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이게 현대에 들어오면서 더욱 심해지는데, 그래도 구약 때는 이스라엘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한 빌리지에 모여서 폐쇄적으로 살다가보니, 물론 매일같이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고 말이죠. 그러니 매일같이 천국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이 거기에 주도권으로 쥐고 작용한다는 겁니다. 

그들의 그러한 생활이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그야말로 입술을 깨물면서 참으면서 살았는데, 특히 사두개인들의 경우에는 철저하게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살았다는 겁니다. 즉 "성전이 있는 여기 이곳에 메시야가 온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저 곳에 온다 !!

어떻게 보면 유대인들의 이러한 신앙이 매우 깔끔한데, 즉 "눈에 보이는 저곳에 메시야가 온다" 라는 것인데, 모호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과거 성전의 유일한 흔적인 통곡에 벽에 붙어서 목을 흔들면서 기도를 한다는 말이죠. 아주 단순하기까지 한데, 즉 "저곳에 온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스가랴서에 예언이 되어있으니, 물론 성경을 무시하려고 하면 믿지 말고, 하지만 성경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 인정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곳에 메시야가 와서 과거 다윗시대를 회복하고, 이것은 에스겔서 34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겔 34: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유대인들은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성경말씀을 보면서, 그것을 실제로 보았고 또한 현실로 보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나라의 기독교가 뭐라고 하든, 천주교가 뭐라고 하든, 그런 것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말이죠. 여기는 약속의 땅이라는 겁니다. 

신앙이 아닌, 역사로 !!

그리고 약속의 땅에 메시야가 온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고 하니까, 그것이 창세기 7장의 할례인데, 즉 할례를 행하고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유월절에 죽음의 사자가 와서 모든 집안의 장자를 다 죽여버렸는데, 그것이 실제상황이라고 하면,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도 역시나 실효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말이죠. 

(창 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 17: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 17: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에게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데, 그래서 우리는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보고 의심을 하면서 "저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일을 했지?"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에게는 "양을 잡아라, 피를 발라라, 넘어갔다" 라는 것이 믿음의 신앙차원이 아니라, 엄연히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또한 그것이 역사라는 말이죠. 마치 우리가 이순신 장군의 일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역사라고 하듯이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역사가 유발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된 것이지, 살다보니 역사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살다보니 역사가 되었지만 말이죠.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모든 역사 하나 하나가 다 사건으로서 떨어져있고, 그리고 그것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일어났다는 말이죠. 

그러면 저 예루살렘 성전에 메시야가 두 다리를 딛고 온다는 것은 그 다음 사건으로서, 전혀 변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의 신앙은 아주 단출하고 간결한데, 즉 "저 곳에 온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신약성경의 복음서에서 말하는 것은 "그래, 왔잖아"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더욱 더 단출하다는 겁니다. 즉 "두 다리를 딛고 인간의 모습으로 메시야가 왔잖아" 라는 겁니다. 

메시야닉 유대인 !!

'메시야닉 유대인' 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엇인고 하니까, 유대인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이미 메시야로 왔음을 인정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특히 2,000대에 들어서 그 세력이 많이 늘었다고 하는데, 이런 신학이 유투브에 보면 많이 올라와 있다는 말이죠. 기존의 기독교나 천주교를 거부하고, 이것으로 대체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들의 신앙이 아주 간결한데, 즉 "약속대로 왔으니 그것을 끝났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제3의 성전을 짓는 문제만 남았다는 것이죠. 제1성전이 솔로몬 성전이고, 제2성전은 헤롯성전이고, 현재 예루살렘은 이 헤롯성전인데, 물론 지금은 다시 복구한 것이지만 말이죠. 

제1성전인 솔로몬 성전 위에 제2성전은 만들어졌고, 그러면 이제 제2성전 위에 제3성전이 만들어지게 되면, 그러면 역사는 드디어 끝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성전의 터로 가는 길목에 보면, 7개의 가지가 있는 금촛대를 만들어놓았다는 말이죠. 

통곡의 벽으로 가기 전에 보면 검문소가 있는데, 그것을 지나면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의 20미터 정도 위에 보면 금촛대를 아주 크게 만들어 놓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3의 성전을 짓게 되면 그 안에 이 금촛대를 넣겠다는 것이데, 물론 진짜 촛대는 금으로 된 것인데, 그 모형으로서 만들어 놓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유대인들의 신앙은 아주 단순하고 간결해서, 예수님이 오셨으니, 그러면 이제는 제3의 성전을 짓기까지의 그 스케줄을 간파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3의 성전을 짓는데 있어서 방해요소가 있는데, 에스겔서나 요한계시록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죠. 그래서 전쟁을 해야하는데, 전쟁을 하는 주체자가 바로 현재의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가 오신 메시야라고 믿는 메시야닉 유대인들은, 그들은 현재 이스라엘이 잘 되기를 철저하게 바란다는 겁니다. 그래서 현재 이스라엘은 핵폭탄을 더욱 더 많이 만들어서 주변에 있는 이란이나 시리아를 완전히 쳐부수어 주기를 간곡히 기다린다는 말이죠. 

그들은 성경말씀보다는 현재 중동지역의 정치적 상황이 더욱 더 확실한데, 왜냐하면 문자는 모호하니 말이죠. 그래서 미국이나 러시아가 개입하는 것도 일일이 다 챙겨서, 그런 것들을 모두 다 성경말씀과 비교를 해본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마곡과 같은 것을 그런 차원에서 일일이 다 살펴본다는 말이죠. 

성령이 필요가 없어 !!

그러면 무엇이 필요가 없습니까? 성령이 필요가 없는데, 현재의 정치상황을 성경말씀과 비교해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구태여 성령이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눈이 목격하고 있는데 굳이 무슨 성령이 필요하냐는 겁니다. 

하지만 로마서 8장에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라고 하는데,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구원을 받습니까? 수 천 명이 모이든, 수 백 명이 모이든, 수 십 명이 모이든, 그런 것과 구원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받게 되면, 그게 두 명이 되든 세 명이 되든, 아니면 삼천 명이 되든, 그런 것과 상관이 없이 오직 성령을 받은 자만 구원이 된다는 말이죠. 너무 냉정한 이야기같이 들릴지 몰라도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성령을 받으면 오늘밤이라도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아바 아버지 !!

하지만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은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인데, 즉 인간의 행함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을 성령이 오심으로서 다 이루게 되는데, 그래서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되면, 그 아버지는 책임을 지고 아들을 관리하는데, 왜냐하면 한 가족이니 말이죠.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교인들이 모여서 '집합'을 이루었다고 하면, 즉 어떤 집단을 만들었다고 하면, 그러면 그 집단이 오래 가겠습니까?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교회도 나오지 않고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도 역시 문제인데, 자체적으로 폐쇄성이 되니까 말이죠. 혼자서 도를 닦게 되면, 남들이 다 귀찮고 싫어진다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영역을 구축하게 되면, 누가 그것을 건드리면 싫어진다는 말이죠. 즉 자발적인 외톨이가 되고 마는데, 그러면 계속해서 도피를 시도하게 된다는 겁니다. 혼자 있는 시간과 혼자 있는 자리를 계속해서 찾아다니게 된다는 말이죠. 

한 '가족' !!

그러면 모이면 됩니까? 그것도 문제가 있다고 했는데, 또한 혼자 있어도 문제가 되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가족' 이라는 겁니다. 물론 가족끼리 일주일 내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라고 하신 적이 있었는데, 가족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내 몰라라" 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가족의 구성요건은 무엇입니까? 성령을 받는 자인데, 즉 하나님이 관리해주는 자라는 말이죠. 그러니 무관심하게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마 12:47)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마 12: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마 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그러니 가족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결심해서 모은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즉 자기가 선택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붙여주셨다는 것인데, 그래서 자기 자식을 남의 집 아이처럼 대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 몸에서 태어났는데, 제 아무리 말썽을 피우고 해도 "내 몰라라" 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이제 너도 독립해라" 라고 해놓고도, 언제나 마음이 쓰인다는 말이죠. 어디서 밥은 잘 먹고 있는지, 길거리에서 구타를 당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사회적으로 어떤 사건이 터지게 되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 자식이 택시운전을 하고 있으면, 무슨 교통사고 사건이라도 TV에 나오게 되면 저절로 눈이 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처음에는 성도가 와도 자기 핏줄의 가족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데, 하지만 정말로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그런 사람들끼리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성령을 받지 않는 자기 핏줄의 가족보다도, 오히려 같은 성령을 받은 가족이 더 마음이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가족은 모방이 아닌데,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운명인데, 주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오늘 교재에 나오듯이 이 인간사회는 어떠합니까?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 내내 어디에 신경을 쓰면서 살아갑니까? 당연히 이 인간사회에 신경을 쓰게 되는데, 그래서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가 원하지 않았는데 성령에 의해서, 즉 하나님께서 붙여준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새로운 가족의 등장 !!

그것이 바로 복음으로 소통이 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새로운 가족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이 땅에서 사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살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한 가족, 즉 성경에서 말하는 '한 몸' 이라는 것인데, 머리가 하나고 지체가 여럿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라기보다는 가족이라고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롬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물론 선교단체에서 "자매님, 형제님!" 이라고 부르는데, 하지만 그것은 방금 제가 말씀을 드린 가족의 의미라기보다는, 이 사회에서 부르는 "오빠, 형!" 이라는 것의 변형이라는 겁니다. 사회에서 그렇게 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 되는 것을 강제적으로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살아가는 것이 외로우니 강제적으로 친밀함을 가지기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교회는 그런 강제가 아니라, 복음의 인도함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기대하는 바 !!

하지만 우리는 이 사회를 모방하고 답습하고 따라붙어야만 살아갈 수가 있는데, 하지만 그럴 경우에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죠. 성도는 그렇게 살아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회를 모방하면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먼저 그것부터 이야기를 해보자는 말이죠. 

사회를 모방하게 되면 여기서 기대하는 바가 생기게 되는데, 그것을 목표, 혹은 목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희망하고 소망하는 것이 기대로서 장착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 나쁩니까? 그렇게 되면,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모든 것에 대한 은혜로움을 잊게 된다는 겁니다. 

기대를 하면 모든 생각이 하나로 집중이 되는데, 즉 "저것은 반드시 달성해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 몸과 마음과 목숨을 다해서, 그것을 어디에 바치는고 하니까, 자기가 목표로 한 것에 다 쏟아 붓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기대하는 바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우리가 떠나야하는 이 사회에서 나왔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그저 주신 은혜들을 다 잊게 된다는 것이죠. 그 은혜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게 되는데, 평소에 감사가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긴장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러니 기대하는 바 때문에 마음상태가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전투적 의식으로 무장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말만 하면 싸우려고 하는데, 내부적으로 긴장의 연속이라는 겁니다. 

순박한 봉화 아가씨 !!

예를 들어서, 시골 아가씨와 도시 아가씨가 만났다고 한다면, 한 쪽은 시간에 그렇게 쫓기지도 않고, 파마도 일년에 두 번 정도만 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다른 쪽은 어떻습니까? 제가 봉화에 좀 살아봐서 아는데(ㅋㅋ), 그런데 대구에 와서 살아보니, 봉화 사람들이 얼마나 촌스럽게 느껴지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봉화를 매도하는 셈이 되고 마는데, 물론 서울에서 보면 대구가 그렇겠지만 말이죠. 

그런 느긋한 사람들과 하루 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도시 사람들은 긴장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항상 전투적인데, 그러면 그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분노가 누적된다는 말이죠. 그게 말씨나 태도를 통해서 확연하게 분출이 되는데, 그래서 짜증을 부리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런 분노를 감추기 위해서 예의바르게 행동을 하기 하지만, 그러면 내부적으로 분열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러나 내부는 전투적이고 긴장상태에 있으면서도, 바깥은 그런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공손하게 말을 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공손한 말은 결코 순박하지 않고 딱딱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기대한 바를 싸워서 쟁취해야하니 말이죠. 반면에 시골에 사는 아가씨는 특별히 쟁취할 것도 없는데, 아닌가요? 

긴장의 연속 !!

어버이날에 먼저 친정에 가면 일단 긴장을 하는데, 왜냐하면 얼른 시댁으로 가야하니 말이죠. 그래도 엄마 품이라서 좋기는 한데, 그러다가 용돈을 봉투에 넣어드리고 아이들을 보고 잔소리를 몇 번 하면 금방 떠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친정 엄마는 배웅을 하면서 "이제 오지 마라" 라고 하고 말이죠. 그렇게 어디로 가도 마음 편안히 있을 수가 없는데, 항상 긴장의 연속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자식이 명절에 부모 집에 와서 안방에서 코를 골면서 자는 것을 보면 부모는 마음이 참 안쓰러운데, "그동안 서울에서 산다고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까?"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불이라도 하나 더 덮어준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바쁘게 긴장하지 않으면서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사회에서 그만 도태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압니까?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를 압니까?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기가 힘든다는 겁니다. 며느리는 아이들을 챙겨서 학원에 보내고 몇 등을 하는지, 그런 경쟁에 정신이 없고 말이죠.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인데, 즉 모방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공부를 왜 합니까? 왜 이렇게 모입니까? 그런 생각을 자주 해봐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천국사회가 무엇인지, 우리가 죽기 전에 알아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였다는 말이죠. 그리고 천국을 알려고 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충분히 알아야 하는데, 즉 긴장상태, 경쟁관계, 그런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주님이 내신 길이 있어 !!

그러면 천국만 알면 되지 왜 이 세상을 알아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다녀가신 경로가 바로 그 경로라는 겁니다. 천국을 안다고 해서 폴짝 뛰어올라갈 수는 없는데, 그 길이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트랙터로 내신 길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게 좁은 길이지만 말이죠.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 길을 천국에서 닦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이어지는 길을 닦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길을 우리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제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즉 자기들이 그 길의 한 요소로서 끼여들었다는 것도 모르고, 그냥 예수님에게 붙어있으면 천국에 들어갈 줄로 알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붙어있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전혀 아닌데, 뭔가 달라지고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물론 그것을 주님은 수시로 알려주셨는데, 그렇다면 달라지고 변화가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게 무슨 의미이냐는 말이죠. 

그게 이미 구약 때부터 나왔는데, 예수님은 구약을 무시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완성시키려고 오셨다는 겁니다. 옛 언약을 구약이라고 하고, 그것을 완성한 것을 신약, 즉 '새 언약'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옛 언약을 제대로 알아서 완성을 시켜야 하는데,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실패를 했다는 겁니다. 

어제 오후시간에 "이 세상에서 옷을 입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 라고 했는데, 아직은 기억이 나지요? 유리로 만든 제품은 참 아름다운데, 하지만 아름답다고 해서 톱을 유리로 만들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데, 아름다운 것과는 상관이 없이 톱은 쇠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적절성' 이라고 하는데, 즉 용도에 적절하다는 겁니다. 짐승 중에서 인간보다 힘이 센 것들이 한 두 개가 아닌데, 소도 있고 코끼리도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독수리는 인간보다 높이 날고, 치타는 인간보다 빠르다는 겁니다. 모두 다 6일째 만들었는데 말이죠. 

짐승의 등장 !!

인간이 그것들보다 뛰어나다고 하면, 코끼리보다 힘이 세야 하고, 독수리보다 높이 날아야 하고, 치타보다 빨아야 하는데, 하지만 인간에게는 그런 요소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 모습을 띠면서 코끼리보다 힘이 세고, 독수리보다 높이 날고, 치타보다도 빠른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다니엘서에 나오데, 그것을 두 글자로 '짐승'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단 7: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단 7: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단 7: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
(단 7: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단 7:7)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짐승, 즉 기괴한 존재라는 것인데, 인간이면 인간이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을 요즘 하이브리드라고 합니까? 이질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다니엘서는 그 짐승이 4개가 나오는데, 그게 바로 바벨론, 메데-바사, 헬라-마게도냐, 로마, 그렇다는 말이죠. 

이 짐승이 인간세상으로 넘어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인간세상으로 넘어온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로 넘어온다고, 그렇게 해석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약속의 땅에 바다에서 나온 짐승들이 올라오는데, 그런데 그들은 인간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공격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왜 코끼리보다 힘이 세지 못하고, 독수리보다 높이 날지 못하고, 치타보다도 빠르지 못합니까? 그것은 인간의 용도는 따로 있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언약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언약의 상대자는 인간밖에 없다는 말이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뱀에게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독수리에게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오직 사람에게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길을 가는 사람을 붙잡고 "당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한, '인자(人子)' !!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함인데, 그게 바로 '인자(人子)' 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인자로 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자로 오셨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이유인데, 이 세상을 모방해서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언약인데, 그러니 천국은 그 언약이 완성된 나라라는 말이죠. 그런데 언약도 모르면서 천국에 간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언약도 모르면서 아무리 교회에 와서 천국에 보내달라고 기도를 해도, 그것은 불교인데, 조금 전에 이야기한 진정한 가족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성령을 받게 되면, 아버지가 원했던 바가 무엇인지, 거기에 집중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구태여 몸이 건강할 필요가 없고, 부자가 될 필요가 없고, 하늘도 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굳이 한 달 수입이 5천만원이 될 이유도 없는데, 그리고 교인수가 수천 명이 될 필요도 없는데, 물론 되면 좋기는 좋겠지만 말이죠. 그럴 필요가 없이 강도나 세리가 되면 되는데, 언약을 알면 오늘밤이라도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다는 겁니다. 오직 언약을 드러내면 된다는 것이죠. 

종과 아들의 차이점 !!

종과 아들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종은 율법을 추구하는데, 즉 "나는 법을 지켰다" 라고 말이죠. 이게 구원받지 못한 자들, 즉 종의 특징인데, 이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하갈은 율법에 속한 여자인데, 그래서 내놓을 것이 법밖에 없다는 말이죠. 선악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은 선이다. 나는 선을 행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만 계급이 생기고 마는데, 즉 "저 사람이 나보다 착하구나. 나는 못났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아들은 그게 아니라 십자가를 보여주는데, 다 이루었음을 말이죠. 성령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체로서 자기를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을 증거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아들이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다시 !!

처음부터 다시 하겠는데, 인간은 온 종일 사회에 살면서 어디를 모방한다고 했습니까? 사회를 모방하는데, 즉 "저 사람처럼 살기, 저 사람 따라잡기, 저 사람보다 출세하기", 그렇게 말이죠. 그런데 그런 사회에서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게 되면, 예수님처럼 구별된 삶을 살게 되는데, 이 구별이 거룩인데 말이죠. 구별이란 무엇인고 하니, 같이 세상을 살면서 뭔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바가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한 가족이니 말이죠. 그래서 거할 곳이 많은 아버지 집에 가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은 거기에 가시는데, 그런데 12제자들은 가지 못한다는 말이죠. 

아아, 처소가 마련되었어요 !!

그래서 예수님이 먼저 가셔서 처소를 마련해놓게 되면, 성령께서 확성기를 가지고 "처소가 마련되었어요" 라고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이게 성령의 역할인데, 즉 성령은 자기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는 말이죠.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는 몸을 가진 이상 이 세상에서 모방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래야 돈이 벌리고 먹고 살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내부에서 성령께서 확성기를 가지고 계속해서 뭐라고 하십니까? 하늘나라에 처소가 마련될 것이 아니라 이미 마련되었음을, 즉 "너희가 있을 곳에 하늘나라에 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경우에 !! 

그것을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3장에 보면 편지로 썼는데, 그가 뭐라고 합니까?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라고 하는데, 바로 이러한 자들만이 사도바울의 편지가 납득이 된다는 겁니다.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러니 사람으로서 사도바울만큼 귀한 일을 한 사람은 없지 싶은데, 이 땅에 수많은 책이 있고 편지가 있겠지만,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라고 이야기하는 책은 없다는 겁니다. 그게 삼국지에 나옵니까? 아니면 일리아스에 나옵니까? 

이 세상이 많은 신학과 철학이 있지만, 그것은 이 사도바울의 편지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알아서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쓴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자기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

어제 낮에 설교를 하면서,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죠. 엘리야가 승천을 할 무렵에 엘리사가 옆에 바짝 붙어있었는데, 그러면서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뭐라고 합니까? "당신 능력의 갑절을 저에게 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니가 참으로 어려운 요구를 하는구나"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왕하 2:7) 선지자의 생도 오십 인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가에 섰더니
(왕하 2:8)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왕하 2: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왕하 2:10)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왕하 2: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그런데 엘리야가 승천을 하고 나서 그의 제자들은 그가 죽었다고 여겼는데, 그래서 그의 시체를 사흘동안이나 찾아다녔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오늘날의 메시야닉 유대인들처럼 단출하게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메시야닉 유대인들은 도저히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가 없는데, 너무나 역사적이고 정치적이고 시사적인 것에 집착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어제 오전에 설교를 하면서, 엘리야의 능력이 어떻게 엘리사에게 전수가 되는지, 그것을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월남치마를 가지고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중세시대의 귀부인들의 옷을 보면, 얼굴과 몸집은 자그마한데, 그런데 치마는 얼마나 큰지 모른다는 말이죠. 거의 방 하나를 다 차지하는 사이즈라는 겁니다(ㅋㅋ). 

오늘날의 성도가 곧 엘리사 !!

무슨 말인고 하니, 엘리야는 하늘에 올라갔는데, 하지만 그가 입은 드레스는 엘리사를 통해서 이 지상에 퍼진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갑절의 능력이 되는데, 즉 승천이라는 구조와 체제를 그대로 유지를 하면서, 그렇게 엘리야에게 있던 능력이 단절이나 중지됨이 없이 엘리사를 통해서 갑절의 능력으로 이 땅에 퍼진다는 말이죠.

어제 그것을 설명하면서, 물론 월남치마 이야기는 하지를 않았지만, 예수님이 지금 승천해 계시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능력이 지금 어디에 있는고 하니, 오늘날 성도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성도가 바로 엘리사라고 했다는 말이죠.

여기서 교재 86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그러면 저쪽에서 하는 말이, '언약이 뭔데?' 라고 나오면, '언약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것을 살리는 능력이다' 라는 답변이 준비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믿음을 확정짓는 능력이라는 것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정도가 아니라는 말이죠. 정말로 어려운 것은 무엇인고 하니, 없는 데서 있게 하고, 그리고 그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는 것인데, 그게 매일 모여서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서,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경주 이씨 집안의 산수공파인데, 그런데 이것은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을 믿게 된 '나' 라는 것은, 있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없는 것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결코 부모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게 바로 엘리사가 앞으로 보여줄 능력인데, 그리고 이 엘리야는 예수님의 위치라는 겁니다. 그러니 엘리샤와 엘리사 사이는 신약의 표현대로 하면 성령이 임한 것인데, 마치 월남치마처럼 쫙 펼쳐져 있다는 말이죠. 죽어서 천국에 가봐야 천국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는 죽기 전부터 예수님을 믿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흘만에 다시 살려내셨다는 겁니다. 물론 누이동생들은 그것을 모르는데, 그러니까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연속적으로 계속해서 믿어져야 한다는 것이죠. 눈으로 확인하고, 또 눈으로 확인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요 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요 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계속해서 믿음으로, 고고고 !!

한 번 성령이 오게 되면 그냥 가게 되는데, 계속해서 믿음, 믿음, 믿음, 그렇게 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믿을 만하니 챙기고, 저것은 아니니 내버려두자"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제대로 성령에게 붙잡히게 되면, 그 어떤 것도 다 믿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없는 데서 있는 것인데, 산수공파라서 있는 게 아니고 말이죠. 즉 주님에 의해서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죽어도,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죽어도 그 생명이 하늘에 있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현실이란 무엇인고 하니까, 눈에 보인다고 해서 현실이 아니라, 아까 본 골로새서 3장 3절의 말씀이 제대로 된 현실이라는 겁니다.

메시야가 이미 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유대인들, 즉 '메시야닉 유대인들' 인데, 그들은 무엇을 단출하게 믿는다고 했습니까? 통곡의 벽 위에 있는 그 황금돔에 제3의 성전이 세워진다고 하면서, 거기에 사용될 금촛대를 이미 만들어 놓았다는 말이죠. 

그들이 보기에 그것이 굉장히 믿기 쉽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니 말이죠. 황금돔과 금촛대가 눈에 훤하게 보인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란과 시리아 놈들을 핵폭탄으로 때려부수고 나면 메시야가 다시 오신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믿기 쉬우냐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믿기 쉬운 것이 있기 때문에, 성령이 하시는 일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즉 그들은 성경말씀을 믿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믿는 것은 눈에 너무 드러나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조용한 가운데서 예수님과 한 가족이라는 것이 결코 실감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천국은 어떤 나라인가?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구약 때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다시 살린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천국은 어떤 나라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였다는 말이죠. 

천국은 없는 것에서 있게 된 자들만 가는 나라이고, 죽은 것에서 다시 살아난 자들만 가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러면 실험적으로 우리가 그것을 해봐야 합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렇게 이미 우리의 모델이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사건이 우리 자신의 사건이 된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죽었다가 살아나게 되고, 이 세상에는 없는 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가 사라진 것처럼, 우리의 일상도 역시 그렇게 전개가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보았는데, 어떻게 말인가요? 원래 아브라함의 눈에 띤 것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었는데, 그런데 이 이스마엘이 없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눈으로 보니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자식에는 약속을 싣지 않겠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마치 마차에 짐을 싣듯이 말이죠. 그러니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약속의 자녀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데, 그런데 천사가 와서 이야기할 때 아브라함은 믿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존의 있는 것을 차버리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차이지는 말고 말이죠(ㅋㅋ). 그러니 있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있는 것으로는 천국에 갈 수가 없는데, 있는 것은 오히려 천국에 가는 것을 훼방하는 요소로서 작용한다는 말이죠. 

욥의 경우에 !!

욥의 자식이 10명이었는데, 그런데 하루아침에 다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가진 재산도 모두 다 날아가고 말이죠. 그래서 마귀는 자신만만했는데, 인간은 보는 것으로 살고 가진 것으로 기뻐하기 때문에, 그래서 자식이 죽고 재산이 다 날아가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믿음을 철회할 것이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런데 욥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라고 하면서 엄청난 신앙고백을 해댄다는 겁니다. 이것은 미쳤거나, 아니면 진짜 믿음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말이죠. 무려 10명의 자식이 하루아침에 그만 다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혀 의도적이라는 말이죠. 

(욥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우리 자신의 인생을 손을 대고 관여하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이 과연 기쁠까요? 괴로울까요? 여러분의 솔직한 답변을 듣고 싶은데 말이죠. 당연히 괴로운데, 자기의 포부와 기대가 불안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해봤자 깨질 것이 뻔하니 말이죠. 

그러니 마음 같으면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죽여주었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그게 바로 요나 선지자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의 뜻대로 되지 않도록 하신다면, 그렇다면 저를 차리리 죽여주세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은 그래도 나름대로 낙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하는 것마다 모두 다 좌절이 되면 살아갈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너는 내가 준 은혜를 놓쳤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긴장하고 긴장한 요나 !!

요나가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니느웨 성도 망하지 않고 자기는 완전 망신을 당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또 요나에게 개입해서 초막을 짓게 해서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되는지 보라고 하시는데, 햇빛을 막아 주는 박넝쿨까지 준비해서 말이죠. 그런데 그 박넝쿨이 시들자 요나는 다시 "하나님, 박넝쿨도 이제 없고, 도대체 이게 뭡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니가 그 박넝쿨도 그렇게 아꼈는데, 내가 니느웨 성 사람들을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라고 하시는데, 즉 "내가 준 은혜를 잊어버리고 지금 무슨 고집인가?"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욘 4: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욘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그러니 요나는 내부적으로 긴장이 되어있고, 뭔가 분노하고 있고, 전투적 의지가 강렬하다는 겁니다. 독단적인 자기 의지가 너무나 강하고 세다보니 하나님과 싸우려고 한다는 말이죠. 즉 "이것을 해주지 않으면 삐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봉화가 아닌 서울 아가씨인데, 겉으로는 예의가 바르고 굉장히 공손한데, 하지만 그게 더욱 더 자기 자신을 짜증나게 만든다는 말이죠. 그래서 뭔가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는데, 그것은 "맡기면 무엇이 되겠지" 라고 하는 노림수로 인해서 어설프게 맡긴다는 겁니다. 꼼수를 쓰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맡길 때는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제대로 맡겨야 하는데, 그냥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임을 인식하면서 맡기자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 너는 맡기지 않았지?" 라고 하면서, 그게 자기 잘남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하지만 죄인의 입장에서 맡기게 되면 무슨 보너스가 주어지는고 하니, 죄인에게 죄사함을 주시는 보너스가 넉넉하다는 겁니다. 

여수룬 !!

어제 오후시간에 '여수룬'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사랑' 이라는 의미라는 것이죠. 여씨 집안에서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그렇게 지으면 좋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제가 그 사랑을 언급하면서 율법의 완성이 곧 사랑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열심히 모방하면서 죄밖에 짓지 않았는데, 그런데 천국에 가니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죄를 낳게 했던 원천적인 원인을 말소시켰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원인차제가 그만 다 날아가 버렸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체가 되었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다 이루심, 즉 예수님의 피와 살로 교체가 되니 죄가 아닌 의가 나와서, 우리는 졸지에 의인에 되어서 천국까지 무사통과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놀랍니까? 구원을 받는 당사자가 놀라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는 말이죠. 예수님이 뿌리가 되어서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인데, 이것은 위로 삼아서 하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과 12제자의 관계가 바로 이러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 사랑이 곧 시작점 !!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라고 하셨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의 대상이었다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을 묻는 것이 아닌데, "너희들은 율법을 다 지켜야한다" 라는 것이 아닌데,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요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아브라함 이후 430년 만에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처음부터 율법의 주어짐이 시작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라는 것이 시작점이라는 겁니다. 그 시작점이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데,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말이죠. 그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라는 소리가 들렸는데,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겁니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지만 그 사랑하는 아들이 이 땅에 살면서 엄청난 고생을 하였는데, 심지어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아서 죽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그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자를 버려서 다시 회수한다는 말이죠. 왜 그렇게 하십니까? 사랑을 위해서, 즉 사랑으로 버리고, 사랑으로 되찾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그 가운데서 그 중에 제일을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누가 그런 노래를 불렀는데, "사랑밖에 난 몰라" 라고 말이죠(ㅋㅋ). 사랑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너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라는 것인데, "니가 창녀로 살았던, 세리로 살았던, 강도로 살았던, 내가 너를 사랑했기에, 그 사랑이 너를 의롭게 만들었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로마서 13장을 보겠는데, 8절입니다.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밖에 난 몰라 !!

아까 교회를 가족이라고 했는데, 사실 우리는 육신의 가족이라고 해도,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도 결코 미워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새끼이기 때문에, 결국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여기에 보면 먼저 '피차' 라고 하는데, 즉 혼자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뒤에 보면,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한 가족 안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지적질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정말로 나쁜 짓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니가 잘못했기에 나에게 당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자기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을 티내는 것인데, 물론 야단을 치고 나무랄 수 있지만, 그 나무람을 처음도 사랑이고 마지막도 사랑으로 회수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오직 사랑만이 남아야 하는데, 그게 영적인 가족의 특징이라는 말이죠. 

주님이 자기 백성을 용납하셨는데, 그래서 "피차 사랑하라"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주님이 용납을 하셨는데, 그런데 니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한다는 말이죠. 가족 간에는 서로가 사랑밖에는 받은 것이 없는데, 그러니 정말로 "사랑밖에 난 몰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같은 교인들끼리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북한의 김정은 이야기는 이제 좀 그만 하고 말이죠. 우리의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그 이야기를 해야한다는 겁니다. 교회는 단체가 아닌데, 사랑의 가족이라는 말이죠. 얼굴만 맞대면 서로 알아서 용납할 마음가짐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김 집사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

그런데 그게 아니라, "김 집사님은 기도할 때 보면 너무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합니다. 그래도 저는 김 집사님을 용납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뭔가 좀 이상하다는 말이죠. 그것이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인지, 아니면 지적질을 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인지 헷갈린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교회에는 김 집사님이 없어서 하는 이야기지만 말이죠(ㅋㅋ). 

사랑한다고 하면서 마치 그 사람을 용서할 자격이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것은 뭔가 수상하다는 말이죠. 일종의 갑질인데, 그때는 어떻게 하면 되는고 하니, 여기에 '피차' 라고 했으니까, 자기 그 사람 앞에 설 때는 "나는 지적질을 받을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라고 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면 경쟁이 그만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신앙경쟁이, 즉 "나는 당신보다 낫다" 라는 생각이 말이죠. 

이렇게 그냥 살아요 !!

아까 이야기한 긴장을 하고 전투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리고 내부적으로 분노를 품는 것,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 자기가 마음을 낮추지 못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서울 사람이 봉화 사람이 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죠. 서울 사람이 마음을 낮추는 것은 낮추는 것이 아닌데, 그것을 눌리고 있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언젠가는 튀어 올라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음을 낮춘다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고, 봉화 아가씨는 그냥 살아가는 게 마음을 낮춘 것이라는 말이죠. "나는 마음을 낮추었어" 라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일년에 두 번씩 파마를 하면서 살아가는, 그게 마음을 낮춘 것이란 말이죠. 물론 자기는 마음을 낮춘 것도 모르는데, 왜냐하면 비교대상이 없으니 말이죠. 죄인으로 살게 되면 이 세상의 것으로 지적을 당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로마서 13장을 보겠는데, 9절입니다.

(롬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이 구절을 다시 번역을 하면, 자기부터 죄인임을 깨닫고 자연스럽게 마음을 낮춘 사람은 구태여 남을 사랑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그 자체가 이웃사랑이 마구 발산되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남과 경쟁할 필요가 없고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성령을 받았으면 그것을 자랑해도 괜찮은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이고, 그 아버지가 계속해서 자기 인생을 개입하신다는 겁니다. 건성으로 낮추지 말고 진짜로 낮추라고 말이죠. 그렇게 마음을 낮추면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게 되는데, 이게 바로 살아있으나 실은 죽은 자라는 겁니다. 즉 땅에서는 죽었고, 하늘에서는 살았다는 말이죠. 

그게 골로새서 3장 3절의 말씀인데, 그것이 성경책에만 박혀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말씀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예수님은 엘리야이고 우리는 그 능력대로 살아가는 엘리사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는 길은 예수님이 가셨던 좁은 길이라는 말이죠.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좁은 길은, 길이 아냐 !!

그 좁은 길을 형상화를 시켜보면, 만약에 사람들을 보고 넓은 길과 좁은 길을 그려보라고 하면, 넓은 길은 고속도로를 그릴 것이고, 좁은 길은 오솔길을 그리지 싶은데 말이죠. 그런데 사실은 좁은 길은 길이 아니고 벽이라는 겁니다. 길이 없는데, 아무리 좁아도 길이 있다고 하면 억지로라도 가면 되는데, 그런데 길이 아예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앞에 서게 되면, 비로소 설 때마다 길이 열리는데, 참으로 신기하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좁은 길이 주님이 가신 길인데, 즉 십자가의 길이라는 말이죠. 그 길은 자기를 부인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길인데, 그런데 자기가 그 길 앞에 섰다는 것은 그 길을 통해서 천국에 가겠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러니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공해보겠다는 노림수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길이 좁아도 자기는 반드시 비집고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것인데, 그게 아까 이야기한 기대감, 경쟁심, 그런 것이란 말이죠. 

어느 목사의 악몽 !!

제가 가끔 악몽을 꾸는데, 그게 어떤 내용인고 하니, 제가 설교를 하는데, 그 예배당이 200평이 넘고 교인들 수는 500명이 넘는다는 겁니다. 그게 저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욕심이지 싶은데, 참 소박한데 말이죠(ㅋㅋ).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어떤 꿈을 꾸었는고 하니, 설교를 하고 있는데 그만 정전이 되고 마이크가 꺼지고 해서 성질을 부리면서 강단에서 내려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이 그만 엉망이 되고 말았는데, 그러자 제가 알고 있는 목사님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는데, 서경석 목사님과 정석훈 목사님도 있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근호 목사를 제명하기로 했는데, 그게 오늘 아침에 꾼 꿈의 내용이었다는 겁니다(ㅋㅋ). 

그런데 보세요. 이게 무엇인고 하니, 자기 부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긍정인데, 왜냐하면 강단에서는 설교를 제대로 해야한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주의 일이 아닌데, 왜냐하면 누가 제대로 한다는 겁니까? 자기가 제대로 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자기 스스로 자기에 대해서 자랑스러워지는데, 과연 그런 마음가짐으로 좁은 길을 갈 수 있습니까? 그게 과연 주님이 자신 길입니까? 

자기가 잘 되는 길로 가는데, 우리가 육이 있는 이상 이런 내용이 꿈속에서 늘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간증인데 말이죠. 그러니 길이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천국을 생각할 때마다 자기를 그 천국에 넣어야만, 그래야 자기 기대감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본능이 작용하고 있는데, 성령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성령은 서울 아가씨를 봉화 아가씨로 바꾸는데, 즉 "니가 이 자리에 서서 오기를 부리지 말고, 뒤를 돌아다봐라. 니가 니 마음대로 이 세상을 쫓아서 살아갈 때, 그 은혜를 누가 주셨는가?" 라는 겁니다. 죄는 죄대로 지으면서 살아가는데,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누가 주셨느냐는 말이죠. 

첫 사랑을 잊지 말아야 !!

그것이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인데, 바로 그 첫 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요한게시록 2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에베소서 교회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첫 사랑을 그만 잊어버렸다고 하는데, 바닥을 말이죠. 바닥에 서서 바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눈 높이에 맞추고 있는데, 지금 자기가 얼마나 은혜의 카페트에 서있는지, 그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1
(계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저는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을 좀 없앴으면 좋겠다고 여기는데, 평소에 전혀 어른 값도 전혀 하지 못하면서 폼을 잡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어린이날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어떤 통계를 보니까 어린이날에는 30만원, 어버이날에는 40만원, 그렇게 해서 그 주간에는 70만원이 그냥 날아간다는 말이죠. 

인간은 자기를 부인해야 좁은 길을 갈 수 있는데, 그게 바로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보다 십자가가 더 좋아져야하고, 자기가 노력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희생이 더, 그야말로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월등하게 좋아져야 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말이죠.

이제 교재 88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하나님의 언약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데서 있게 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는 이삭과 같은 경우라는 말이죠. 야곱도 요셉이 죽었는데, 아예 죽은 자식이라는 겁니다. 

야곱이 배제된 야곱언약 !!

야곱에 있어서 요셉은 죽은 자식인데, 그런데 나중에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서 돌아오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을 주시면서 그 수행과정에 있어서 야곱을 배제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언약은 야곱에게 주시면서 "너는 죄인이야" 라고 하시면서 팽개치고 요셉을 통해서 야곱의 언약을 이루셨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과정에 있어서 야곱은 편안히 있었습니까? 고통스러웠습니까? 당연히 고통스러웠는데, 자기 아들이 죽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그 요셉이 어떤 아들인고 하니,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었다는 겁니다. 그 아들에게만 최고급 옷을 입혔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제일 사랑했던 라헬의 자식이고, 그 자식의 엄마는 베들레헴에서 일찍 죽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의 인생에 개입하시는 것이 너무 너무 가혹한데, 별로 좋아하지 않는 레아를 죽이면 되는데, 왜 하필이면 가장 사랑하는 라헬을 죽이시느냐는 겁니다. 라헬도 슬퍼했는데,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 라고 했고, 그가 베냐민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이 개입해서 남들 보기에도 번듯하게 해주면 참 좋았을 텐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야곱의 인생 자체가 곧 십자가의 인생인데, 그래서 야곱은 빨리 죽고 싶어했다는 말이죠. 그냥 막벨라 굴로 들어가고 싶어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막벨라 굴이 바로 십자가로 이어지는 집합소인데, 부활로 이어지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두 다 막벨라 굴로 집어넣어 버리시는데,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언약이 동참하고 동승하는 것인데, 즉 노아방주와도 같다는 겁니다. 그 안에 들어가야만 살 수 있는데, 즉 언약 안에 들어가야 산다는 말이죠.

그것이 이 땅에 온 천국의 원리인데, 천국은 이 땅에서 언약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언약이 없다고 하면, 옛 언약과 새 언약, 그 언약이 없다고 하면 천국은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죠. 들어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언약만 나타나야 하고, 그 언약에는 인간의 행함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이죠. 공짜라는 겁니다.

여기서 전도서 7장 14절을 보겠습니다.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

여기에 보면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선택한 인생은 없다" 라는 것인데, 즉 봉화 아가씨라는 겁니다. 땅은 있고, 그리고 하늘은 도와줘야 채소를 키울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는 비를 기다리면서 잡초나 제거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채소뿐만이 아니라, '나' 라는 인생도 친히 주님이 농부가 되어서 키워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두 팔을 벌리고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식으로, 그렇게 자기 인생을 맡겨버린다는 것이죠. 그래서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하고,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고민하면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이 땅에서 왜 살아가야 하는지, 그것을 다시 생각해본다는 말이죠. 

우리의 기대치를 뭉개버리는 주님 !!

그런데 그렇게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는 이유가 뭐라는 겁니까?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장래 일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게 하는데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기대하는 바, 즉 목적과 목표가 다 허무하고 무상하다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기대치를 다 밀어서 뭉개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의 목적과 목표는 이미 다 하늘나라에 있는데, 누가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가 사다리를 타고 그런 것을 세우기 이전에, 이미 주님께서 이미 다 "여기가 너의 처소다" 라고 하면서, 이미 전입신고를 다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손을 털고 떠날 일만 남아있는데, 그게 주님의 농사라는 말이죠. 

우리가 자기 자신의 기대와 목적만을 가지고 있으면 인생을 긴장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반드시 성공을 다 해야하니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자기의 기대한 바에 미치지 못하면 자책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도 남자로 태어나서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잘라야 하는데, 도대체 이게 뭐냐는 말이죠. 그런데 성도에게는 아예 칼도 없다는 겁니다.

불꽃 인생 !!

'나의 아저씨' 라는 케이블에서 하는 드라마가 있는데, 거기에 보면 남자들이 모였다하면 술만 마신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술인데, 그런데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하는 이야기는 모두, 그게 다 '허세' 라는 말이죠. 물론 그 드라마가 과장된 면도 있지만, 그 드라마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에 술말고 달리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라는 겁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홧김에 자기의 사진을 다 불태웠다고 하는데, 저는 그 말을 듣고서 "당신 몸을 왜 불태우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말이죠. 윤씨네는 자기 몸을 불태웠는데, "불꽃을 피우리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ㅋㅋ). 

번제는 사진이 아니고 자기 몸을 바치는 것인데, 물론 우리는 태우기 싫은데, 그런데 주님께서 태워주신다는 말이죠. 그게 성도의 인생이라는 겁니다. 소모용인데, 향초라는 말이죠. 어차피 우리는 주님께서 제물로 삼아서 제단에 올려놓았는데, 그게 로마서 12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산 제사로 드려라 !!

여기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라" 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이해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닌데, 이것은 언약 안에서 가동이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이 세상은 그냥 두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언약의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새 언약이 발산되는데, 물론 옛 언약도 발산이 되고 말이죠. 그러니 자기 몸을 너무 닦달을 낼 필요가 없는데, 그리고 지나간 일에 대해서도 너무 미련을 가지지 말라는 겁니다. "그때 내가 사기만 당하지 않았어도 지금 이렇게 않았을 텐데"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냥 제단 위에서 성령의 불로 태우도록 주님께 맡기면 되는데, 그러니 이제 소모하는 것만 남았다는 말이죠. 우리는 한 줌으로 재로 돌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동안은 없는 데서 있게 되었는데, 이제 그 '나'는 없어지고 새로운 '나'가 기다리는, 그 천국으로 가면 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은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에 실려서 가는 줄 압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다 이루심으로 가는 곳에 천국이기에, 그러니 우리의 남은 인생을 우리 스스로 너무 힘들게 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로 긴장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5,15 오후 8시에 마침.
꿈속에서 봉화 아가씨를 만나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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