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5 - 정의란
08,05,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내 이름은 가위표 !!
오늘은 교재 89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여기에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이 나오는데 말이죠. 13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라고 되어있는데, 즉 누구의 이름입니까? 자기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 이름' 이라는 겁니다.
(요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여기에 '이름'이 나오는데, 이름이라는 것은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이름에 해당하는 실체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실체가 있으면 이름을 붙인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 이름이 두 개가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즉 예수님의 이름이 있고 자기 이름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따로 있고 자기도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 이름으로 기도하지 말고 내 이름으로 기도해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별로 어렵지가 않은데, 간단한 문제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구원하시겠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이름이 바뀌어서 천국에 가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천국은 '내' 이름으로는 갈 수 없는 나라인데, 그 나라가 곧 천국이라는 겁니다. '나' 라는 실체로는 가위표가 천국인데, 그게 요한복음 14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요한복음 13장 후반부에 보면,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니 주님께서 말리시는데, 왜 그렇습니까? 천국은 베드로가 목숨을 바쳐서 갈 수 있는 나라가 전혀 아니란 겁니다. 달리 말하면, '나' 라는 실체가 여기에 있는데, 그 실체가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해도 받아주지 않는 나라가 곧 천국이라는 말이죠.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요 13: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 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게 요한복음 14장에 분명히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성경말씀이 하지 말라는 것을 버젓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라는 것을 다 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려고 작정을 했다는 말이죠.
자기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분명히 안 된다고 하는데, 물론 헌금도 그렇고 말이죠. 그러면 헌금봉투에 자기 이름을 쓰지 않으면 됩니까? 그게 아닌데, 헌금을 누가 봉투에 넣습니까? 자기 손이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기도를 할 때, 그게 누구의 무릎이고 누구의 손입니까? 자기 무릎이고 자기 손이라는 겁니다. 또한 자기 정신으로 기도하고 말이죠. 하지만 그런 것을 주님께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천국에 내가 있을 처소는 없다 !!
그래서 "천국에 내가 있을 처소는 없다" 라는 것이죠. 매우 간단하죠? "내가 가야되는 권리는 없다" 라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즉 "천국에 내가 가야될 이유를, 그것을 나에게서는 찾을 수가 없다" 라는 말이죠. 그러니 천국은 어떤 나라라는 겁니까? "내가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 '나'를 교체하시는데,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가 숨어있는 그 마지막 장소까지 찾아오셔서, 우리가 있는 자리를 주님이 계시는 자리로 바꾸어 버리시는데, 그러면 더 이상 자기 인생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는 말이죠.
빨간색 튜브를 밟으면 빨간색이 나오고 파란색 튜브를 밟으면 파란색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우리를 눕혀놓고 밟으면 무엇이 나올까요? 당연히 우리 이야기가, 즉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우리를 눕혀놓고 밟았는데, 거기에서 예수님 이야기 나온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천국에 가는 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준비하신 처소가 있어야 !!
그런데 예수님의 12제자들의 경우에는 밟으니 모두 자기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천국에는 예수님께서 준비해놓으신 처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즉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도, 그들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그래서 보혜사 성령을, 여기서 보혜사는 '도우미' 라는 의미인데, 우리의 힘으로 갈 수 없어서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겠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보혜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확실한데, 우리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밟아버리고, 주님의 이야기가 나오게 하신다는 말이죠.
천하를 움켜진 '20대' !!
그렇다면 주님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자기 이야기밖에 나오는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지만 말이죠. 특히 20대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자기 이야기밖에 나오지 않는데, 천하를 다 얻겠다고 하면서 설친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30대가 되어서 결혼을 하게 되면, 이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기 때문에 그때는 설치는 것을 약간 주저하게 되는데, 그래서 괜찮은 직장이라도 있으면 착실하게 다니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갑자기 자기 범주가 줄어드는 순간이란 말이죠.
하지만 20대는 선택의 여지가 많은데, 그래서 무엇이든지 다 자신이 있고 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취직도 어디든지 다 자신이 있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대기업이든 공기업이든 말이죠. 그래서 큰소리를 친다는 겁니다. 아닌가요?
그런데 여성의 경우에는 30대가 되면 자기 범위가 옴팍 줄어드는데, 어떻게 말인가요? 예쁜 아기를 낳아서 잘 키우기, 영재로 만들기, 그런 식으로 말이죠. 세상을 자기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붙잡고 버티고 있으면, 그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내 뜻이 꺾였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 뜻이 꺾이게 되면 자기 이름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자신만만함이 사라지고 만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기도해라" 라고 하셨을 때, 그 의미는 굉장히 풍부해진다는 말이죠. 물론 그 이전에 인간들은 자기 포부 펼치기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즉 자기 이야기로서 평생을 채우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 이름이 주님의 이름으로 바뀐다고 하면, 자기가 아니라 주님이 펄펄 살게 된다는 말이죠.
결국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복음 !!
요즘 하와이가 화산폭발로 인해서 난리인데, 저는 그것을 보면서 3가지를 느꼈는데, 첫째는 그동안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는 겁니다. 용암이 말이죠. 둘째는 터질 때는 터진다는 겁니다. 용출을 하는데, 왜 바다에 보면 용오름이라고 있지요? 그렇게 올라온다는 것이죠. 마치 하수도관이 터져서 물이 솟아오르듯이 말이죠. 그리고 셋째는 저지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용암이라고 보지 말고 주님이라고 본다면, 우리 주님은 우리 안에서 그동안 조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가 설치다가보니,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에 대해서는 감을 잡지 못하고, 이 세상은 자기 뜻대로 다 되는 줄로 알고,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에는 그 진리가 언젠가는 터져 나오게 되는데, 과거에는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사용되었던 육체가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바뀌게 되면, 그러면 예수님의 활동을 위해서 빌려준 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활동이 조용히 움직이다가도 일단 터져 나오게 되면, 그야말로 용출을 하게 되는데, 걷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복음을 아는 사람은 참다가 참다가 안면을 몰수하고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다는 말이죠. 전혀 참을 수가 없는데, 그렇게 복음이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빨간 튜브를 밟으면 빨간색이 나온다고 했는데, 즉 주님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이죠. 결국 용암이 분출하게 되는데,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어느 말기 암 환자의 용출 !!
어떤 분이 그만 암에 걸려서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병원에서 의사가 "이제 집에 가서 평안히 쉬세요" 라고 하니, 평소에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그러자 자기 인생의 남은 기간에 거침없이 복음이 마구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평소에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죽는다고 하니 거침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니 누가 거북스러운고 하니, 복음을 모르는 자식들이 엄마의 그런 이야기를 듣기가 좀 그렇다는 겁니다. 엄마가 "나는 이제 예수님을 만날 것이니 너무나 좋아. 빨리 주님을 만나고 싶어" 라고 하는데, 그게 엄마의 진심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자식들은 그것을 어떻게 듣습니까? 엄마가 몸이 너무 아프니 스스로 위로하는 차원에서 객기를 부리는 것으로 오해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엄마의 얼굴은 너무나 평안한데, 진통제도 먹지 않는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잠도 잘 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복음이 마구 쏟아진다는 말이죠.
반면에 자식들은 자기들이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못해서 암에 걸렸다고 여기는데, 그래서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그러지 몰라도 술만 퍼마신다는 겁니다. 물론 재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는데, 아무튼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자기 아내와 함께 병원을 열심히 출입한다는 말이죠.
용출과 순교 !!
그리고 세 번째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가 없다고 했는데,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순교'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순교는 죽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어떤 말을 하고 있느냐는 말이죠. 평소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그냥 죽는 것은 순교가 아닌데, 평소에 용출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예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인데, 그분이 조용하게 우리의 몸을 우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사용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한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우리 안에 주님께서 용암처럼 소리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주님이 살아있다고 하면 암에 걸리지 않고 더 살게 해주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정작 복음을 외치는 말기 암 환자는 뭐라고 외칩니까? "내가 더 살았으면 어떻게 되었겠노?"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날이 이 세상의 천 날보다 더 귀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더 빨리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발을 뗄 수 있다고 하는 것, 그게 곧 주님의 능력인데, 주님의 능력이 아니라면 발을 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너무 많은데, 그놈의 정 때문에 이 세상에서 발을 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어서 오너라"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 그야말로 매일같이 싱글벙글인데, 그래서 우리는 미리 천국의 삶을 살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내부에서 바꿔치기 작업이 일어난 것인데, 그러니 처음부터 우리 자신의 인생은 없었고, 주님께서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다루어왔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겠지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뜻대로 사용되게 하옵소서" 라는 것인데, 그러니 당연히 그 기도의 내용 속에는 자기 희망사항이 아닌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것들이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사용하시던 저렇게 사용하시던 제가 거기에 대해서는 이의를 걸지 않겠습니다. 암에 걸리게 하던 부도가 나게 하던 주님께서 알아서 하옵소서. 그러니 나의 이야기는 모두 다 찢어버리시고, 그 찢어진 틈 사이로 오로지 주님의 이야기만이 터져 나오게 하옵소서"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성도는, 붕 떠서 살아가는 인생을 !!
이게 얼마나 가벼운지 모르는데, 노아방주의 경우에 어떻게 그 방주가 뜨게 되었습니까? 밑에서 물의 힘이 작용하니까, 그것을 부력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방주에 타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뜬 것이 아니라 가라앉고 말았는데, 하지만 성도에게는 부력과 같이 것이 안에 장착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노아시대에는 노아언약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새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제공이 되었는데, 그래서 성도는 노아처럼 뜬다는 말이죠. 성도는 이 땅에서 떠서 살아가는데, 가라앉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변화가 생긴다고 해도, 그런 것으로 인해서 좌절하고 낙담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붕 떠서 살아가니 말이죠.
선지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떠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마찬가지인데,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세상에 깊숙이 섞여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서문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던 무엇을 하던 간에,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세상에서 붕 떠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떠서 살아가는데 색깔이 빨갛던 파랗던 그런 것을 구태여 밝힐 이유가 없는데, 그 어떤 직업을 가지고 그 어떤 옷을 입어도 뜬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동창생이 죽던 가족이 죽던,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뜬다는 것을 가라앉힐 수는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짝퉁이 있는데, 주님의 이름이 오지도 않았는데 성경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니, 그것을 흉내를 내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천국에 가는 줄로 알고 말이죠. 하지만 그런 자들은 바닷물이 들어오게 되면 뜨기는커녕 그대로 바닷속으로 가라앉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그만 자살이 되고 마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복음을 알아도 소용이 없더라" 라고, 즉 "예수님에게 나에게 해준 것이 도대체 뭐가 있는가?" 라는 식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것이 주님의 이름이 오지 않은 자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주의 이름과 나의 이름 !!
오늘강의는 "주의 이름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내시는가?" 라는 것을 하겠는데, '주의 이름'이 누구를 찾아오는고 하면, '나의 이름'을 찾아온다는 겁니다. '이름' 이라는 것은 그 이름을 부르는 진짜 내용물, 즉 실체가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이름이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는 것은 분명히 '주님' 이라는 실체가 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시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절단, 즉 끊어버리는 일을 하신다는 말이죠. 물론 '나'를 끊어낸다는 말도 되지만, 인류집단을 잘라내서 그 중에서 자기 백성만 따로 구분을 짓는, 그런 칼질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이란 말이죠.
그러니 주의 이름은 어떤 경향이 있는고 하니, '전투적' 경향이 있는데, 즉 싸우는 기능을 하신다는 겁니다. 시편도 그러하고,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야말로 극적으로 홍해를 건너고 나서, 하나님에게 찬양의 노래를 부르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는 말이죠.
출애굽기 15장 1절에서 3절입니다.
(출 15: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출 15: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출 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여기 3절에 이름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신명기 제일 마지막인 34장을 보면, 어제 신명기를 모두 마쳤데, 무려 4년이나 걸렸는데 말이죠. 11절과 12절입니다.
(신 34: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신 34: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모세가 애굽에 있던 자기 백성들을 이끌어내었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때 하나님이 보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모세와 아론과 같은 자들만 보였는데, 그러면 이런 모든 일들을 눈에 보이는 모세와 아론이 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했다는 겁니다.
모세의 입장에서 !!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즉 모세와 아론이 시키는 데로 했는데, 그러면 모세와 아론은 누가 시키는 데로 했습니까? 백성들의 눈치를 보면서 했습니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목사의 눈에는 교인들이 보이는데, 그러면 목사는 교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목회를 해야합니까? 전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모세와 아론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을 성경에서 뭐라고 합니까? '주의 이름'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분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였다는 말이죠. 여기 신명기 34장에 나오는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은, 그것은 모세와 함께 계시는 보이지 않는 분에게서 나왔는데, 그것을 모세는 "주의 이름으로 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데, 즉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사 우리로 하여금 애굽에서 빠져나오게 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이 말이죠. 이 미리암은 모세가 어릴 때에 나일 강에 띄워서 바로 왕의 공주가 건져낼 때까지를 다 지켜본 자인데, 그러한 누나가 볼 때 이것은 결코 모세나 아론의 능력이 아니라는 겁니다.
(출 15:20)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출 15:21)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그렇다면 누구의 능력입니까? 모세와 아론과 함께 있는 분이 인간의 방해를 초월해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때가 되어서 용암이 분출하듯이, 이것이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주께서 자기 백성을 건지겠다고 하는데, 건질 자를 건지고 찾을 자를 찾겠다고 하는데, 감히 그것을 누가 저지한다는 겁니까?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이죠.
우리도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착실하게 교회에 잘 나와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러면 그것은 종교인이고 친목단체인데, 교회에서 한 바탕 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참을 수 없는 주님께서 기어이 터져 나오고 말았는데, 그 결과가 곧 구원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말인가요? 모세의 입장에 서게 하는데, 모세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야말로 허수아비인데, 하지만 모세를 움직인 것은 보이지 않는 주체, 즉 주님의 이름이 모세를 움직였다는 겁니다. 이러한 모세의 입장이 오늘날 성도의 입장인데, 그래서 성도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의 지시를 받고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당연히 이 세상의 눈치를 볼 것이 없는데, 20대 초반에는 국가정의를 외치면서 데모를 하다가, 20대 후반에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면 윗사람이 시키는 데로 움직이는데, 그러니 자기 이름이, 자기 실체가 얼마나 초라해지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이나 명분은 없는데, 그저 자기 몸 하나 살려내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복음인가? 밥벌이의 수단인가?
여러분은 신학교는 믿음이 있는 자들이 가는 것으로 여기는데, 그들이 신학교를 다닐 때는 그야말로 멋도 모르고 주님을 위해서 아골 골짝이라도 가겠다고 나서는데, 그런데 일단 교회에 부교역자로 취직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당회장의 눈치를 보면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방금 자기 아내가 임신을 했다는 말이죠.
그런 입장에서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아기 분유값은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 계획대로 미래를 설계하게 되는데, 그러면 복음과 신학은 무엇이 됩니까? 그것은 자기 밥벌이의 수단이 된다는 말이죠.
이런 것이 인간의 힘으로 절단이 되겠습니까? 눈이 보이는 것이 말이죠. 그동안 그쪽의 가락이 몸에 완전히 익혀져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쪽 애굽세계, 즉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인간의 이름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그래야 주의 이름으로 왜 이런 세계와 단절을 시키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17세기말 영국의 금융혁명 !!
그래서 지금부터는 인간 이름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한 번 이야기를 해보자는 말이죠. 17세기말 영국에서 금융혁명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물론 세계 최초로 증권거래소와 은행은 네덜란드에서 생기게 되는데,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네덜란드에서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는 말이죠.
제가 왜 이 세상을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영국의 금융혁명부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지금이 2018년인데, 지금 우리가 한국에서 2018년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게 애초부터 인간들은 이렇게 살도록 되어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왜 착각인지를 제가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는데, 은행이 없는 시절에 영국에서는 국가가 중요했는데, 즉 왕이 중요하고 그 왕에서 법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때는 국민이 아니고 백성인데, 우리나라의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를 생각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때는 백성들이 왕에게서 나오는 법에 의해서 안정된 국가를 이루는 것, 이것이 전부라는 말이죠. 즉 인간은 개인이 아니고 왕의 백성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신민(臣民)'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아무리 왕이 나쁜 짓을 하더라도 백성들이 왕을 손댈 수가 없는데, 왕이 죽으면 그 아들 중에서 왕이 되어야 하는데, 만약에 다른 사람이 되면 백성들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라가 먼저고 그 다음이 백성이라는 말이죠.
영국에서 17세기까지 이런 식으로 살았는데, 물론 다른 나라들도 그러했고 말이죠. 이런 사람들에게 '시민정신' 이라고 하면, 이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시민정신은 개인주의인데, 그러니 왕이 살아있는데 왜 자기 것을 챙기느냐는 말이죠. 그 당시 백성들의 소망은 좋은 것이 있으면 왕에게 바치는 것인데, 자기는 죽더라도 왕만 오래 살면 소원이 없는, 그런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왜 옛날에 '고려장' 제도라고, 부모가 나이가 들면 산 속에 버렸다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실제로 우리나라에 그런 제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는데, 아무튼 그때 그 당시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그것은 오늘날의 개인주의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 겨울에 부모가 수박을 먹고 싶어하면 사드려야, 그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나라에는 임금이 어른이고 집안에는 부모가 어른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대대로 이어져오는 것인데, 군신유의, 부자유친 등등의 삼강오륜이 바로 그러하다는 말이죠.
조상제사 !!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않으면 자식은 근거도 없이 무조건 저주를 받는데, 그래서 나온 것이 '귀신론'이고, 거기서 나온 것이 '조상제사' 라는 겁니다. 조상에서 제사를 왜 드립니까? 드리지 않으면 조상귀신이 노해서 자기가 하는 일들이 다 작살이 난다는 말이죠.
이것은 동양만이 아니고 모든 민족에게 다 있는데, 눈에 보이는 사람이 늙어서 죽으면 어디에 집합을 합니까? 영혼이 모이는 장소가 어디냐는 겁니다. 음부, 즉 죽음의 세계인데, 거기에 귀신들이 다 모여있다는 말이죠. 생생하게 귀신으로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무 억울해서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자들은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해꼬질을 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억울한 일이 많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지 못하는데, 자기에게 맺힌 한을 풀고 가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 일이 꼬이게 되고, 그렇게 꼬이면 귀신의 한을 풀어주어야만 하는데, 그것을 '천도제'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제사를 왜 드리는고 하니까,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나쁜 짓을 하면 귀신이 해꼬질을 한다는 말이죠. 귀신은 귀신들이 모여서 사는 동네에 보내야 한다는 겁니다.
김기동과 성락교회 !!
그런 천도제와 기독교를 섞어서 만든 것이 김기동의 성락교회인데 말이죠. 탈북자를 많이 모아서 큰 교회를 만들었는데 말이죠. 그가 주장하는 것이 소위 '귀신론' 이라는 것인데 말이죠. 이재록 목사말고 그런 비슷한 사람이 또 있는데, 둘 다 '미투'에 걸려서 난리라는 겁니다.
거기서 무엇을 가르치는고 하니까, 물론 사람들에게 납득을 시키려는 것인데 말이죠.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데, 그 귀신을 이기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않으면 자기가 하는 일에 귀신이 방해를 하는데, 그러면 사업도 안 되고 몸도 아프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병을 고쳐주는데, 왜냐하면 귀신이 붙어서 병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귀신을 쫓아내려면 굿을 하는 대신에 예수 이름으로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예수님이 초기에 이 땅에서 하신 사역인데, 그것을 김기동 목사만이 제대로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락교회만이 진짜 복음을 전하는 교회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예수 믿고 귀신 쫓고 !!
그렇게 유혹을 하니까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 수가 없는데, 예수를 믿어서 천국에 가고, 그리고 병도 고치고 사업도 잘 되고, 완전히 일거삼득이라는 겁니다. 기존 교회에서는 제공해주지 않는, 즉 예수를 믿고 얻어 챙기는 몫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오늘 공부한 것을 염두에 두면, 그런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비판을 할 수 있습니까? 자기 몸은 자기 몸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인데, 즉 주님을 위해서 쓰여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락교회처럼 되면 주님이 아닌 자기를 위해서 쓰는 것이 되고 마는데, 즉 자기 자존심 때문에 계속해서 쥐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락교회의 김기동을 욕할 이유가 없는데, 오늘날 한국교회가 모두들 같은 동네라는 겁니다. 다만 방법이 그렇게 노골적이 아니라는 것뿐이지, 다를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모두가 자기 인생을 자랑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겁니다.
믿지 않는 친구들이 묻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니가 교회에 나가서 얻는 이득이 뭐꼬?" 라는 것인데, 즉 "그것을 알면 나도 교회에 가겠다" 라는 겁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믿으면 인간이 할 수 없는 추가적인 것을 더 준다는 것 정도는 아는데, 그게 그들의 상식이라는 말이죠.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 자기에게 아쉬운 것을 보충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 !!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가서 하는 것을 보고, 그게 괜찮다고 여겨지면 그 교회에 간다는 말이죠. 물론 이왕이면 크고 가까운 교회가 좋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생겼는데, 주의 이름이 아니라는 말이죠. 꾸준히 연속된 것인데, 즉 20대는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데, 30대는 그것을 물려받고, 그게 40대, 50대, 60대, 70대까지 계속해서 가는데, 자기 연속성, 즉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누가 끊어주지 않으면, 마치 베드로와 같은데 말이죠. 그것을 주의 이름이 와서 끊어주어야 비로소 "아하, 이것이 누가 와서 끊어주어야 하는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자기 몸은 자기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몸이라는 것을, 그것을 뭔가 기존의 노선이 끊어지면서 다른 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갈아타는데 있어서 주의 이름은 전투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즉 주의 이름은 전쟁을 하는 이름인데, 조용하다고 해도 늘 조용한 것은 아니고 싸운다는 겁니다. 싸우는 대상이 있는데, 즉 집단이 있다는 말이죠. 출애굽기에서는 그게 애굽인데, 그래서 주의 이름이 와서 모세를 통해서 칼로, 즉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로 구분을 짓는다는 겁니다.
왜 생일이 맞이해서 케이크을 사면 플라스틱 칼이 따라오는데,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먹을 만큼 도려내는데, 잘라낸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두 다 구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칼로 잘라서 갈라진 결과물이 곧 성도라는 말이죠.
그것이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데, 거기서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서 뭐라고 하십니까?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나중에 천사들이 와서 알아서 다 추수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대지 말라는 겁니다.
(마 13: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 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어제 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가만히 있어라" 라고, 참 하기 힘든 설교인데 말이죠.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자기 이야기만 나오는 튜브가 있고 예수님 이야기가 나오는 튜브가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평소에 내뱉는 말이 그 사람 속에서 작동하는 말이라는 것이죠.
여자는 결혼이 아닌, 시집살이 !!
이제 영국 이야기를 해보겠는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개인주의가 아닌데, 조상이 우선이고 나라가 우선이고 민족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나' 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부분적으로 이바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자는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시집을 가는데, 즉 여자는 독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댁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따로 독립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렇게 들어가면 '나' 라는 것은 없는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처럼, 즉 고조 할머니가 한 것처럼, 증조 할머니가 한 것처럼, 그 바톤을 이어받아서 자기가 그 집의 귀신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집살이가 힘들다고 하면서 친정으로 돌아와도 받아주지 않는데, "이제 너는 우리 집 귀신이 아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친정에서는 제사를 드려주지 않는데, 모두 시댁에서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사라는 것이 얼마나 큰 족쇄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추도예배도 말이 안 되는데, 형식이 바뀌었다고 해서 제사가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집단적인데, 여자가 여자의 힘으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인데, 조선시대에 보면 충신인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서 귀향을 간다는 겁니다. 그것이 금강산이나 전라도의 해남과 같은 곳으로, 그들이 그곳에서 시를 짓고 하는데,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한양의 임금님, 오늘도 잘 계십니까?" 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자기는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임금님을 걱정하고 있다는 말이죠. 이순신이 누구를 위해서 싸웠습니까? 그 당시에는 나라라는 것은 없고, 임금님을 위해서 몸을 바쳐서 싸웠다는 겁니다. 오직 임금이라는 말이죠.
자기 이름으로 살아도 그게 임금의 이름인데, 즉 임금이 자기를 덮치고 만다는 겁니다. 여자가 시집을 오면 이제 시댁의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그래서 자기 이름은 없어지고 누구누구의 아내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자는 직접적으로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누구 옆에 있는 여자,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주 단단한 민족적이고 혈육적인 법 체계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은행과 개인주의 !!
17세기말에 영국에서 은행이 등장하고 금융업이 생겨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때 영국은 프랑스와 전쟁을 하고 있었는데, 전쟁을 하는 것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특히 군사들을 용병으로 데리고 와야하니 말이죠. 그때는 네덜란드는 영국보다도 잘 살았는데, 그들은 은행이 있어서 돈을 마구 빌려주는데, 그래서 영국에서 이것을 본 따서 금융혁명이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은행에 있어서 돈이란 무엇입니까? "나중에 이자를 쳐서 줄게" 라고 되는데, 즉 "500원을 맡기면 내년에 550원을 주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은행이 돈이 모이는데, 그러면 왕은 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전쟁을 치르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은행은 왕이 발행한 채권을 담보로 빌려주는데, 국가는 망하지 않으니 말이죠. 그러면 돈이 돈을 벌게 되고, 계속해서 은행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 이전에는 "나는 누구누구의 백성이었다" 라는 것이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앞으로 나는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질 것인가?" 라는 것으로, 여기서 개인주의가 발생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왕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산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게 오늘날 2018년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니냐는 겁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
그래서 자기가 하는 회사, 식당, 자식, 그런 것을 제대로 해주지 않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대통령을 갈아치우겠다고 하는데, 즉 왕의 모가지를 치겠다는 겁니다. 그러한 권한이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생겨나게 되는데, 그때 단두대에서 왕인 루이 16세의 모가지를 쳤다는 말이죠. 왕을 쳤다는 것은 이제 자기가 주인이라는 것인데, 각자 각자가 다 주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왜 바짝 마른 모래를 손으로 쥐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모래가 쥐어지지를 않고 손에서 그만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되면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엉망이 되고 마는데, 각자가 자기 팔을 흔들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민주주의 !!
그렇게 개인 플레이를 하게 되면 나라의 힘이 약해져서 다른 나라에게 잡아먹히게 되니, 각자의 이해관계를 계약직으로 해서, 그렇게 법으로 서로의 이해관계를 제정하자고 나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 라는 것인데, 보통 우리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던 그 민주주의를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왕이 자리에 그만 돈이 들어갔는데, '나' 라는 것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나'는 옛날부터 있었는데, 왕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왕이 있어야 내가 있다" 라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시집이 잘 되어야 내가 잘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시집이고 뭐고 없데, 돈이 있는 시집과 돈이 없는 시집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죠. 돈이 없으면 시집도 시집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가 세 명이나 있어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도망을 가고 마는데, '인간극장'에 보면 그런 것이 많이 나온다는 말이죠. 촌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힘이 든다고 하면서 가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할머니와 남편이 자식을 키우는, 그런 가정이 많다는 말이죠. 물론 나이가 든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세상말세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런 말을 하는 자기는 정작 어떻게 인생을 살았느냐는 겁니다.
"집안이 중요하지 돈이 전부가 아니야" 라고 하면서 살았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는데, 옛날에는 시어머니를 건드리면 난리가 났지만 지금은 며느리를 건드리면 난리가 난다는 말이죠. 며느리를 눈치를 봐야 하는데, 그래서 "당신 아들을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예, 그렇게 하옵소서"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ㅋㅋ). 이제는 딸이 없어서 서럽지, 아들이 없어서 서러운 것이 아니란 말이죠.
돈과 정의 !!
거기에서 나온 개념이 '정의' 라는 것인데, 그러니 정의란 무엇인고 하니, 옛날에는 왕의 자리를 확보해서, 그런 왕의 자리에서 만든 법,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움직였고, 그러면서 그 법에 위반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을 두고 정의라고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정의는 그게 아닌데, 돈을 모을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 그게 정의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정의가 긍정적 의미인데,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죠. 새로운 제도를 만들면 되는데, 그 새로운 제도가 무엇인고 하니까, "나의 것을 나에게 오게 하고, 너의 것을 너에게 가게 하는 것", 그것이 곧 정의라는 말이죠.
얼마면 되겠어?
그러니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는 것이 정의인데, 그렇다면 "나의 것, 너의 것"에서 이 '것'은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돈으로 측정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아이가 남의 집 아이를 때렸다고 하면,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 "얼마면 되겠어?" 라고, 그렇게 모든 것은 돈으로 다 해결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각자에게 돌아갈 돈을 준다고 하면, 그렇게 곧 정의사회라는 겁니다.
만약에 이 '나' 라는 것이 대한항공이고, '너' 라는 것이 소액주주라고 하면, 즉 대한항공에 주식투자를 했다는 말이죠. 자기 것을 대한항공에 주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한항공의 주식이 오르면 자기가 이익을 보는데, 그런데 대한항공 직원들이 광화문에서 데모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올라갈 수도 있지만, 보통은 내려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투자자들이 어떻게 나옵니까? "너희들이 무엇이간데 가면을 쓰고 데모를 해서 내 돈을 까먹게 하는가?" 라고 나오는데, 이게 정의라는 말이죠. 그야말로 돈 놓고 돈 먹기인데, 즉 돈이 많은 사람이 계속해서 돈을 버는 것이 정의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물려있기 때문에, 그러니 오늘날에 감히 누가 자기가 의롭다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자기는 지금까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하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을 측량해보면 "나는 남의 돈을 떼먹지 않았다"라는 것인데,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 돈을 유지한다고 자기 돈은 빠졌다는 말이죠.
정의가 이렇게 돈과 연결되는 순간, 한 쪽에서 돈이 빠지면 다른 쪽은 돈을 벌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부자라는 것은 자기가 열심히 노력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누군가가 손해를 봐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동네를 상가들을 제가 유심히 보는데, 얼마나 버티는지를 말이죠. 6개월을 가지 못하는데, 그런데 시작할 때 얼마나 투자를 합니까? 간판하고 인테리어 비용만 해도 천만원이 훌쩍 넘어간다는 겁니다. 물론 시장조사를 철저히 하지 않아서 그러한데, 즉 동네 사람들의 연령층은 어떠하고, 어떤 것을 좋아하며, 그리고 그 위치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다니는지를 말이죠.
하지만 부동산 업자는 거기에 대해서 입을 다무는데, 왜냐하면 한 건이라도 더 해야 돈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건물주는 부동산에서 사기를 치든 말든 임대료만 올려주면 좋다는 말이죠. 바르게 산다고 하는데, 웃기지 말라는 겁니다. 이런 시대에 바르게 산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죠.
오늘날은 누가 사고뭉치인가?
그러니 예수님의 피말고 달리 의는 없는데, 주님의 희생만이 의롭다는 겁니다. 이 땅에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남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요소가 된다는 말이죠. 자식들이 여러 명이 되면 그 중에서 사고뭉치가 반드시 있는데, 그런 자식이 오면 다른 형제들이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술을 한 만 마시고 "야, 너 때문에 엄마가 암에 걸렸다" 라고 하면, "그래, 내가 죽을 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러한 이야기가 명절에 오고 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남의 행복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인데, 형제라는 이유 때문에 어떻게 밀어낼 수도 없고 말이죠.
그러면 사고뭉치가 아니면 어떻게 됩니까? 사고뭉치라서 다른 형제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역시 그러했고, 그런데 오늘날에는 가난한 것이 피해를 준다는 겁니다. "남들은 다 열심히 일해서 잘사는데, 너는 무엇을 했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가난한 것이 오늘날에는 죄에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프면 안 되는데, 카프카의 '변신' 이라는 단편소설을 보면, 가장이 매우 훌륭했는데,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되고 난 다음부터는 집안 사람들이 외면을 해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니 가난하거나 아프든지 하면, 그것은 정의를 훼손하는 범죄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굉장히 삭막한데, 그런데 오늘날의 이런 이야기를 조선시대에 하게 되면 사람들이 납득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이상하다. 임금님이 무사히 살아있으면 되었지, 내가 왜 되어야 하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잘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임금님이 잘 되고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자기가 단독적으로 잘 되고 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양반이 아닌 쌍놈이라고 하면, 그것을 자기의 운명이고 팔자로 돌리는데, 그것을 '봉건사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유럽에서는 농노제도이고 말이죠. 이미 신분적으로 체제가 확립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이 그게 과연 불행하다고 여겼을까요?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는 겁니다. 미래에 주어질 조건을 미리 앞당겨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인정하게 되면, 그게 나름대로의 행복이 된다는 말이죠.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나라가 어디인고 하니까, 물론 미국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국민소득이 제일 높은 핀란드나 노르웨이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부탄' 이라는 나라인데, 아직도 공식명칭이 '부탄왕국' 인데 말이죠. 온 국민이 대부분이 불교신자인데, 75%가 티벳불교인 라마교이고, 25%가 힌두교라는 말이죠. 그들의 사고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라는 것인데, 그리고 죽으면 화장하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일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녹취 '구' - 실제로는 2015년을 기준으로 해서 2,884달러임. ㅋㅋ)
북한은, 유교적 사회주의 국가 !!
그 다음으로 행복한 나라가 북한인데, 북한을 '유교적 사회주의 국가' 라고 하는데 말이죠. 유교는 조선시대의 이데올로기인데, 조선시대는 임금님만 잘 되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1945년 해방 때부터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는 겁니다. 무려 70년 이상을 우려먹고 있는데, 그래서 김정은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 수령, 즉 김일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게 조선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딱 맞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힘이 들면 허리끈을 좀 더 쪼이고, 다만 욕은 얻어먹지 말고 살자. 그러니 미군들은 다 철수하고, 우리 한 민족끼리 연방제로 해서 같아 살자" 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조선시대라는 겁니다. 중국도 그러했는데, 그런데 미국의 닉슨이 모택동과 핑퐁외교를 시도하면서 바뀌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제는 자기 개인의 소유재산인데, 즉 돈이라는 겁니다.
옛날이 행복했다 !!
그런데 중국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옛날이 행복했다" 라고 하는데,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모택동 이전에는 다들 가난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가난한 것인 줄도 몰랐는데, 하루에 두 끼를 먹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줄로 알았다는 말이죠.
사람은 환경을 따라가게 되어있는데, 그러니 누가 옆에서 하면 그것을 따라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하품을 하면 따라서 하고, 기침을 하면 따라서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따라서 하는 것을 '거울 시냅스(미러 현상?)' 라고 하는데, 두뇌세포가 환경에 따라서 보조는 맞춘다는 겁니다. 두뇌 과학자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데, 그렇게 남들을 따라가면 남들에게 지지 않게 되고, 그러면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교회는 복음이 아닙니다. 얼른 나오세요" 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나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교회의 분위기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오려고 하면 주의 이름이 칼질을 해야만 한다는 말이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지금도 행복한데 왜 나가야 하는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행복한데, 그 행복을 굳이 바꿀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주의 이름은 단절인데, 그야말로 마그마가 폭발을 해서 모두 다 날려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놓는데, 그렇게 끊을 때 무엇으로 끊는고 하니까, 그것만 더하고 오늘 강의는 마치겠는데 말이죠.
여기서 빌립보서 3장 18절을 보겠습니다.
(빌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십자가의 원수 !!
여기에 보면 원수가 나오는데,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원수' 라고 하지 않고 '십자가의 원수'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아까 주의 이름은 전투적 성향을 지닌다고 했는데, 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적을 어떻게 구분하는고 하니, 십자가를 가지고 적인지 아군인지 가려내는 칼질을 하겠다는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 곧 자체가 칼이라는 것인데, 그래서 교회에서 십자가를 증거하면 주님의 아군의 되고, 반면에 십자가를 제대로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자체가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의 원수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됩니까?
먼저 십자가는 주의 이름으로 하는 기능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 주의 이름이 우리 이름을 대체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우리 이름은 어디에 기대서 사는고 하니, 특히 현대에 들어오면서 돈으로 산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이렇게 돈을 벌어서 잘 산다" 라는 것이 20대, 30대, 40대, 50대, 그렇게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끊는고 하니, 주의 이름이 개입해서 끊게 되면, 그러면 더 이상 자기 인생을 자랑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주의 이름이 '나' 라는 실체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처음에 요한복음 14장을 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주의 이름이 아니면 천국에 가지를 못한다고 했는데, 천국은 주의 이름으로 간다는 말이죠.
베드로의 자리는 없는데, 성령께서 오셔서 베드로로 하여금 주의 이름으로 교체가 되도록 해주어야 베드로의 처소가 마련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주의 이름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과거에는 왕을 보고 살았지만 현대에 와서는 돈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데, 그래서 돈만 있다고 하면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하면서 살아갈 용의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무엇의 원수인고 하니, 바로 십자가의 원수라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던 인생이 끊어짐이 없었는데, 그래서 십자가가 와서 "왜 끊어지지 않았는가?" 라고 묻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십자가의 원수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게 19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빌 3: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
그러니 십자가의 원수는 어디의 일을 생각한다는 겁니까? 땅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인데, 하지만 우리 인간이 땅에서 태어나서 땅에서 자라나고 땅의 일을 하다가 땅에 묻혀죽고 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이 아니라면 자기 이야기를 할 때가 어디에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땅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십자가의 원수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히려 이상한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게 20절과 21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죽은 자는 산 채로 이 땅에서 지옥을 말한다 !!
여기에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라고 하는데, 이게 참으로 특이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이 나중에 예수님의 몸과 같이 변화가 된다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제가 글을 하나 적어보겠는데, 즉 "죽은 자는 산 채로 지옥을 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있다" 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이미 죽은 자인데, 그런데 그렇게 죽어있으면서도 운전도 하고 또한 쇼핑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죽었으면서도 산 채로 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 땅이 바로 가서는 안 될 지옥을 말하기 위해서 산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즉 "내가 이만큼 성공했다" 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튜브를 밟으면 주님의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자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겁니다.
제가 처음 화산폭발 이야기를 했는데, 용암은 땅 밑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때는 조용하게 여겨진다는 말이죠. 하지만 땅에 도저히 참지를 못하고 폭발하게 되면, 지면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한 순간에 날아가고 만다는 겁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세상에 멸망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미련을 두지 말라는 겁니다. 즉 "너희는 그쪽이 아니라 하늘에 속했기 때문에, 그쪽이 망하더라도 너희는 박수를 쳐야한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 때문에 애통해하거나 절망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쪽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성도는, 이미 주님의 전의 뜰에 !!
그래서 어제오후 시간에 "이미 성도는 주님의 전의 뜰에 있습니다" 라고 했는데, 이미 도착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진이 나고 용암이 분출하는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만약 주의 이름이 아니라면 나도 그렇게 될 뻔했다" 라고 하면서, 매일 감사와 고마움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라고 하면 "주님, 감사합니다. 정말로 주님이 아니라면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오직 십자가의 피라는 겁니다. 그러니 돈이 아니고 십자가의 피만이 저와 여러분의 결정적인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갈 곳이 이미 정해졌으니, 그 느긋함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암에 걸리던 부도가 나던,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고, 또한 주님께서 합당하게 사용하시는 줄로 알고, 언제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5,28 오후 5시에 마침. 남북통일도 이 땅의 일임을 깨닫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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