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16장 16절(기시감)180313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6장 16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 상대해서 제자들 인간이잖아요. 인간을 상대해서 이해가 되는 이야기를 해야 서로 의사소통이 되잖아요. 이해가 되는 이야기를.
그런데 16절 같은 경우에는 보면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이렇게 함으로서 누가 이 말을 이해를 하겠어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이해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너희는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구원받는게 아니고, 주님의 하신일에 휘말렸기 때문에 어!어! 구원이 되었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라고 된게 아니고 그냥 있어봐 내가 회오리 바람 쳐 가지고 너희로 하여금 허리케인 안에 내가 만든 허리케인 안에 너희들이 포함되있음을 그때사 너희가 알게 될것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뭐를 이해한다는 것은 기껏해야 과거에 갖고 있던 과거에 알고 있던 그 범주 가지고 그냥 긁어 보는 거예요. 자기가 아는 수준내에서. 그러면 뭐가 안되느냐 하면은 좀 어렵게 이야기 해서 죄송합니다만은 이런 용어를 쓸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자기 충족성. 예수님의 자기 충족성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은 그 충족성을 다 파악을 하지를 못합니다. 그냥 충족이 아니고 자기 충족성이예요. 자기 충족성.
보통 음식 먹을 때 음식 맛이 왜 이래 저래 이렇게 하는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와~ 되게 맛있다 하거든요. 그럼 다른 사람이 시비 걸어요. 이게 뭐가 맛있느냐 하면은 "내가 만족해" 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의 못하잖아요. 내가. 자기.
예수님은 자기 충족성이예요. 누구 의견듣고 그러지 않습니다. 누구 눈치보고 그러지 않아요. 본인만 만족하면 끝이예요. 그리고 자기 충족성을 향햐여 달려가는데 그 자기 충족성에 대해서 사람들이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를 않는겁니다.
왜그러냐 하면은 인간들은 어느 수준이냐 하면은 보는게 전부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16절에 보게 되면 이렇게 되어 있죠.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겠다고 이야기를 함으로서 예수님의 자기 충족성에 인간은 거기에 발을 들여놓을수가 없다는 겁니다. 보는게 전부이기 때문에.
인간은 보는게 전부인데,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제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식으로 일을 진행시켜 버리면 제자들은 따라올려다가 스톱이 되버리는 거예요. 꼭 닭 쫓던 개처럼. 가다가 제자들이 계속 예수님을 보면서 뭐를 챙기느냐 하면은 나 예수님으로 참 만족해.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만족, 제자들 나름대로의 자기만족을 취하다가 그 예수님이 안보이고 사라진다는 말은 제자들을 놔두고 가버리거든요. 제자들을 놔두고 가버린다는 말은 제자들이 따라올래야 따라올수 없는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믿음의 한계는 거기까지. 인간의 믿음의 한계도 거기까지. 거기까지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요? 말도 안되는 소리 하고 있어요. 말 안되지요. 인간이 쏘아대는 레이저빔. 쏘아대는 빔은 인간이 볼수 있는, 납득이 되는 거기까지. 거기까지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된다? 인간들이 그 도달될 수 있는 믿음의 범주를 놔두고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버리니까 무엇이 와르르 다 무너집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와르르 다 무너져버리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따라다니면서 구원받는다는 이 이야기가 전혀 이거는 실효성 없는 거예요. 그저 오기였고 해질러 보는 거예요. 그냥 해봤던 거예요. 열심 내봤고 따라다녀 봤고 예수님과 함께 3년동안 함께 동거동락 해봤지만 거기까지. 거기까지예요.
아! 더 이상 주님은 붙잡고 싶어도 주님께서는 붙잡히지 않는 영역까지 넘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입장에서는 어떻해~ 어찌. 어떡하지.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가버리면 더 이상 추적이 안되는데 어떡하지요?
우리 놔두고 간 사람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나 나버려라. 끝까지 따라가겠다 했는데 그 끝이 인간이 생각하는 끝이 아니고 그 너머로 넘어가버리죠. 자, 그러면 어떻하면 좋아 제자들. 그동안 헛수고 했는데.
자기들 만큼은 천국간다고 천국에서 누가 높으냐 미리 사전에 자리다툼까지 했는데. 너희들이 보지 못하는 곳으로 넘어가버릴 경우에 인간쪽에서 내민 인간쪽에서 내민 그 믿음의 능력도 거기서 꺽여 버립니다.
누가 거짓말합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어디 세상에 어디 그런 거짓말이 있어요. 절대로 믿음으로 구원 못 받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무슨짓을 해도 구원 못 받아요. 소망 사랑도 구원 못 받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인간은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서 비로서 들통난거예요. 제자들이 아니라 누구라도 주님 가신 길에 주님 가신 나라에 따라 잡을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음이 예수님쪽에서 증명해버린거예요. 예수님쪽에서.
논리는 사탄쪽에서 증명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그걸 증명해 버린겁니다. 약을 올려도 보통 약을 올린게 아니죠. 예수님이 지금 남의 이야기 한게 아니예요. 충실하게 따라왔던 자기 제자들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닭 쫓던 개 신세 개 꼴이 된거죠 제자들이.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걱정말아요 그대. 13절 나옵니다. 다 지난날도 의미가 있지요. 노래합시다. 동영상 노래 실었다가 동영상 노래 실었다고 이야기 들어가지고 다 지워 버렸어요. 나는 좋던데. 저보다 싫은 사람들 있잖아요. 노래를 안 실은니까 나름대로 일리가 있긴 있어요. 그 현장감이.
요한복음 16장 13절에 보게 되면 너희가 감당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너희가 감당못한다. 너희들이 나의 말을 감당했기 때문에 나와 더불어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마라. 그런 일은 내가 용납안한다.
내가 주님을 알아서 나는 주와 함께 산다는 그러한 망발은 하지마라. 너희는 나를 모르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모르는 사이가 같이 동거할 수는 없잖습니까.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 했는가?
하늘나라는 열려있지만 아들 나라는 닫혀있다 이야기 했지요. 인간이 만든 상상한 하늘나라는 활짝 열려있어요. 그 뭐 사랑의 하나님 하면서. 하지만 실제 아들의 나라는 닫혀있어요. 누구 말이 맞는 거예요?
어디 갈려고? 하늘나라 갈려고? 아들의 나라 안가고? 아들나라는 닫혀 있는데? 그럼 닫혀 있는 나라 대신 다른 나라 가면 되겠네. 천국 가면 되겠네요. 그건 상상의 나라고 그건 거짓의 나라 있지도 않은 나라예요.
그래서 13절에 보면 지금은 감당 못하지만 13절에 보면 누가 온다고 했어요? 진리의 성령이 어디서 옵니까? 인간이 따라갈수 없는 저쪽 영역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공식하나 적어볼께요.
성령 안받고 구원 되는 법은 없다 지요. 성령 안 받고 구원되는 법은 없지요? 그렇지요?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인간이 따라올수 없는 영역 저 쪽에 가서 저 쪽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제자들은 감당이 안되요.
그만큼 따라왔는데 이제는 그야말로 이거는 헛수고 한거예요. 그런데 저쪽에서 뭐가 온다고요? 성령이 오게되죠. 성령이 오면 비로소 그때는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가르칠 필요 없다 정도가 아니라 그때는 말없이 기뻐해요. 성령오게되면. 말없이 기뻐하게 되있어요. 뭐 한것도 없는데 기뻐요. 이렇게 기뻐도 되나 할 정도로 기뻐요. 성령오게 되게되면.
자, 성령오게 되면 기쁘다는 이야기를 지금까지 강의 들었으면 여러분들 감 잡을거예요. 왜 기쁘지요? 성령오게되면. 갈수 없는 곳에서 소식이 왔으니까. 따라갈수는 없었는데 저쪽에서 초청장처럼 초청장이 날라왔으니까.
그렇다면 다시한번 복습해봅시다. 성령 안받고 구원되는 법은 없지요? 그러면 이것가지고 한국교회 모든 사람에게 한번 다 적용시켜 봅시다. 지난 지난 낮설교에 제가 이런 이야기 했거든요.
사도바울이 자꾸 묻는다고 이야기 했지요. 설교 초반에. 사도가 자꾸 묻습니다. 알거 같으면 안물어요. 왜 묻느냐 하면은 뒤에 나오죠. 너 가짜지? 묻는 이유는 가짜가 가짜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꾸 묻는거예요.
그러면 그거 알아? 그거 안다고? 그럼 이건 알아? 자꾸 묻는 이유는 면접시험에서 자꾸 묻는 이유는 진짜 우리 회사 들어올 사람인지 아닌지 점검하기 위해서 물을 수밖에 없어요. 아이고 인상 좋습니다 들어오세요 이럴수는 없는거 아닙니까.
자꾸 묻고 캐묻고 캐묻는 이유는 합당한지 합당 안한지를 묻는 이유는 캐내기 위해서 하는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모든 질문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은 성령 받았냐 라는 점을 계속 묻는 겁니다. 성령 받았냐라는 점을 묻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받았냐를 물을때에 우리가 답변하기를 저 기도 좀 하는데요. 했다 하면 두시간입니다. 그게 답변이 되겠습니까? 왜 답변이 안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영역안에 넘어가기 전에도 이미 베드로 열두제자는 한기도씩 했던 사람들이죠. 기도한사람들이죠.
주님 성령은 모르겠는데 헌금은 합니다. 그런 것이 소용이 없어요. 왜냐하면은 그들은 이미 인간이 할수 있는 근사한거 있잖아요. 괜찮아 보이는 것 그거 한가닥씩 다 한사람들이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놔두고 그 사람들이 따라올수 없는 다른 영역으로 점프해서 가버렸어요.
그렇다면 인간이 할수 있는 모든 것은 구원이 된다? 안된다? 구원이 안되지요. 하는건 자유인데 하고 싶으면 하세요. 소용없는줄 아시고 하시기 바랍니다. 소용없는줄. 제자들이 모든걸 버리고 주를 따랐잖아요. 이걸 두자로 뭐라하느냐 헌신이라고 합니다.
그럼 헌신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베드로는 나는 죄인입니다 했지요? 나를 떠나소서. 회개지요? 회개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어떤수를 해도 소용없어요. 어떤수를. 은둔생활하고 어떤 자기를 쳐서 복종하고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구원은 안됩니다.
구원되는 수는 하나 밖에 없어요. 뭐냐하면은 성령이 오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질문 나오겠지요. 성령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어떻게 압니까?
성령이 온게 뭐냐 하면은 성령이 와서 주님을 안다는 경우가 어떤 상황이냐 하면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놔둬 버리고 혼자 저쪽 세계에 넘어갔을 경우에 성령이 온다고 이야기 했잖아요.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고백을 성령이 진짜 온 사람은 뭐라고 이야기 하겠습니까? 내가 어떤짓을 해도 구원되지 못합니다를 고백이 절로 툭 치면 저절로 나오듯이 이게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거예요.
교회다닌다고 구원받는것도 아니고 예배드린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열심낸다고 구원받는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런 것은 내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존재인 것을 내쪽에서 확인하는 요소들밖에 안됩니다 라고 툭 치면 절로 나와요.
목사됬다고 구원받는것도 아니고 집사라고 지옥가는것도 아니고 그냥 나온다고요. 10년 다녔다고 구원에 유리하고 이틀 교회 두 번 나왔다고 지옥가고 그런거 없어요. 인간의 어떤것도 주님으로 하여금 너 혼자 놀아라 하는 그런 조건밖에 안되요.
왜? 제자들 놔둬버리고 저쪽으로 제자들이 붙잡을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가버리고 난뒤에 성령왔기 때문에 우리가 갈수 없는 곳에서부터 온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는 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니까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밖에 없겠습니까. 얼마나 기쁘겠어요 이게.
초청장 있는데 주신분이 줬는데 내 손으로 찢을수도 없어요. 찢으면 또 옵니다. 찢어도 또 오고 그걸 군화발로 밟아도 또 와요. 한번 줬기 때문에. 준 것을 취소할수 있는 방안이 없어요 방안이. 그런 방안이 없어요.
오신 성령을 가라! 가란 말이야! 니가 와서 되는 일이 없어!! 막 낙엽 던지면서 가란 말이야 백날해도 성령은 안가요. 얼마면 되! 백날해도 소용 없어. 그냥 주신거예요. 그래서 성령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선물이라고 해요 선물.
선물을 흔히 하는 말로 은사라고 하거든요. 이게 선물이라는 뜻이예요 선물. 차라리 그냥 영어로 선물했으면 좋았을걸.
선물은 선물 준 사람의 소유권이 그대로 살아 있어요. 선물 받았다고 소유권이 내 소유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선물이 아니고 은사가 되어 버리면 마치 자기가 은사를 키운것처럼 자기가 이 은사를 자기가 기도원에 가서 생산해낸것처럼 착각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은사 몇 개 받았니? 두 개. 이런거 있잖아요.
초등학교 아들 너 크레파스 몇 개있어? 두 개? 이런거랑 비슷합니다. 너희집에 TV 있나? 이런것처럼 자기 소유인것처럼 착각하고 있어요. 선물은 받는 사람을 모독하는 겁니다. 받는 사람의 재주와 우수함과 능력을 모독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선물이예요.
모독당할수록 기뻐요. 좀 자학적인가? 모독 당할수록 밟힐수록 고맙기 그지 없어요. 이렇게 주일 낮에 했잖아요. 이순재 얘기 못난놈. 이렇게 못난놈인 것을 깨우치면 깨우칠수록 그만큼 기쁨은 계속해서 더 폭팔하지요. 못난놈 한다고 또 보험넣지말고.
못난놈 할수록 이 못난놈인 주제에도 이 선물이 왔다는 사실은 이 기쁨은 남산위에 케이블카 타면서 자랑해야하나. 이 자랑을 소를 잡아서 자랑해야 됩니까? 어떻게 자랑해야 됩니까? 영원히 평생 자랑해도 계속 자랑할만한 요소입니다. 아무리 비난받고 해도 자랑해요.
“너 22살 때 너 옆집 아가씨 성폭행했지.” “했다! 와! 했어 기분좋아. 나 성폭행 했어. 그냥 개예요 개. 인간 말종이거든. 나 이중인격자야. 나 말하고 행동 달라.” “왜 그렇게 좋아하는데?” “성령받았거든!” 성령 받았거든요. 개인데 이 개 같은 인간인데 성령받았어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너 전에 미쳤잖아. 그래 귀신들려 미쳤어. 미쳤지? 이번에 거라사 지방도 가고 거라사 지방 근처에 갔어요. 고라신 지방도 가고 거라사가 뭐냐하면은 미친 광인이 병 나은 곳이예요. 그 거라사 광인은 오늘날 모든 인류를 대표합니다. 귀신이 조장하고 있는 인간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돈도 필요없고 학력도 필요없고 남의 칭찬도 필요 없어요. 오직 필요한 것은 성령이 와서 악령을 쫓아 내는 것. 주님이 와서 악령 쫓아내는 것. 그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있습니까? 뭐 취직 시켜줍니까? 뭐 결혼시켜줘요? 그런거 필요 없어요.
중요한 것은 성령을 선물로 줬으면 주님이 주실수 있는 것 다 줬고 만약에 성령주고 또 딴것까지 에이~ 성령말고 다른거 줘야지 이래 버리면 기쁨이 두동강나요.
성령 준 것으로 기쁨이 다되요. 그걸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뭡니까? 자기 충족성이예요.
뭐냐하면 내가 충족한게 아니고 나를 보는 주님이 자기 충족성이예요. 나같은 인간을 구원한 그것이 주님한테는 무한한 기쁨이고 그 무한한 기쁨이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그대로 퍼부어 지는 겁니다.
이번에 그 베들레헴에 갔는데 그 베들레헴에 제가 궁금했던 것은 바로 목자들의 들판입니다. 왜 목자들의 들판을 내가 보고싶어했냐 하면은 다른 모든 유적지는요 성당으로 다 덮어졌어요. 성당으로.
그 성당 꼴보기 싫어가지고 사진도 안찍고 그 성당사진 뭐 어쩔수 없이 찍었지 정말 찍기 싫어했어요. 겟세마네 동산은 아예 성당이 얼마나 큰지 일부러 안찍었어요. 밑에 그 감람나무 그것만 찍었어요. 꼴보기 싫어서.
그런데 벌판을 무슨 성당으로 다 덮습니까? 물론 성당 있어요. 있는데 그 성당 찍었지만 그건 안 올렸지요. 목자들의 들판만 있어요. 그 목자들의 들판에서 목자들이 그 들판에 있을때에 거기에 뭐가 있었느냐 바로 주님의 현존이 나타났죠. 천사의 현존.
그 천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는 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중에 그 다음에 평화로다. 하늘에서는 기쁨이요. 땅에서는 맞습니까?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자들중의 평화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작업의 진척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원없이 영광을 받는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자기 충족성이예요. 예수님의 자기충족성.
예수님의 자기 충족성의 요소 하나가 뭐냐 하면은 놔두고 가버리는 겁니다.
제자들을 끌고 가는게 아니고 제자들이 따라올수 없는 곳으로 홀로 가는 것이 예수님의 자기 충족성에 부합되는 조건인데 왜냐하면은 너희들이 알아서 마음 단단히 먹고 따라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기뻐하는게 아니라 모든 곳에 멈추고 스탑 스탑되고
그 다음에 성령을 보내서 그들을 나 있는곳에 데려오는 그것이 예수님의 자기 충족성의 요건에 합당한거예요. 합당한겁니다.
우리 하찮은 우리가 주님의 자기 충족성에 기여하는 요소로써 개입됬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로서 기쁨이고 영광스럽니까? 참 영광스럽거든요. 뭐 별로 영광스러운 얼굴이 아닌데 성령 안받았어요? 가짜입니까?
사도바울이 쿡쿡 쑤시는 거예요. 너 가짜지? 가짜지? 막 딴소리 열심히 다녔습니다. 3대째 믿음이고 뭐 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순교자고 그러니까 가짜잖아. 그러니까 가짜잖아 가짜.
가슴팍 밀면서 계속 궁지에 몰으면서 너 가짜지? 가짜? 사도바울이 계속 그렇게 묻는 것은
바로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가짜임을 드러내는 그것이 주께서는 성령받은 사람만 챙기라는 예수님의 지시에 따른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만.
그래서 그 저 교회가 숫자가 점점 줄든 늘어나든 그것에 신경쓰면 안되요. 올사람만 왔는지 그게 중요한겁니다. 그렇다면 이 계속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충족성을 위해서 성령 오셨는데 성령오게 되게되면 예수님 입장에서는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 입장에서는 연속성이되요. 예수님은 여기 계시다 저기 가셨기 때문에 연속성인데 제자들 입장에서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게 연속이 아니고 불연속성이 되요. 다른말로 하면 이게 뭐냐 하면은 단절입니다. 단절.
단절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렇게해서 이 단절을 불연속성이 연속성될 때 이미 우리는 이 제자들은 뭐냐 하면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려요.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자기 일이 날라 가버리는거예요.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인생에서 자기 일이 없어지고 모든 내가 밥 먹고 목욕가고 운동하는게 누구 일이 되느냐 하면은 사나 죽으나 주의 일이 되요.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일이 된다 말이죠. 주의 일이라 하는 것은 불연속성이 있다? 없다? 없고 뭐해야된다? 아까 예수님한테는 뭐가 된다? 연속성이죠. 연속성인데 예수님의 연속성이 지상에 일을 시킬때는 항상 내 입장에서는 뭐가 되야 된다? 항상 불연속성으로만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불연속성으로.
예를 들면 내가 이명직 목사님하고 아는 사이다. 아는 사이다. 그런데 어제 알았기 때문에 오늘도 아는 사이일까요? 아닙니다. 어제 안다고 해서 오늘도 아는 사이 아니예요. 왜? 방금 이 공식에 의하면 우리 인간대 인간의 모든 만남은 뭐여야되요? 연속이 되지 못하고 불연속적으로 되야되요.
또 하나 예를 들면 어제 내가 예수 믿었습니다. 오늘도 믿을까요? 아닙니다. 내쪽에서 시작하는 모든 것은 전부 다 단절되져야되요. 5년전에 성령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 안필요하고 그런거 없어요.
다시 이야기할께요. 예수님의 일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이니까.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일은 이 보이는 세계에서는 어떻게 된다? 나의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주의 일이 진행되고 있어요.
예수님은 왜 안보입니까? 하는데 오늘 16절에 그 이야기예요.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곳으로 갔기 때문에 예수님은 안보여야 맞아요. 지금은 보지만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자기 충족성을 이루기 때문에. 그부분 이해되시죠?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성령이 왔다는 것은 보는 것으로 연속성을 이어가려는 모든 시도를 전부다 거짓된 것으로 가짜로 완전히 하늘나라 상관없는 것으로 끊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그래도 우리는 자꾸 보고싶어 하죠. 보고싶어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뭐냐 하면은 보이는 것과 보이는 것을 자꾸 연결시킬려 한단말이죠. 연결시키는데 그 연결이 되어 버리면 불신자고 연결된 것을 다 토막토막 끊어놓게 하신다면 그것은 그 사람은 이미 보이지 않는 예수님에 의해서 주님의 연속안에 놓여있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어제의 믿음이 오늘까지 연장안되요. 오늘 믿음이 내일까지 연장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그럼 오늘 믿었지만 내일 치매걸려서 못믿으면 나는 어떻하지? 이렇게 하지요?
그걸 어떻하지 걱정한다는 자체가 뭐를 생각하느냐 하면은 나는 예수님처럼 나도 연속성이 되야되라고 자기 연속성을 아직도 주장하고 싶어 한다는 그런 자기의도가 노출되고 만거죠.
한가지 예를 들면 굉장히 예를 들면 쉬워요. 어떤 두 사람이 있는데 쉽게해서 한 남자가 있고 한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남자가 여자를 되게 좋아해요. 뭐 사랑까지 할 정도로 사랑이 뭐겠어? 그리워하는 거겠죠. 굉장히 좋아해요.
좋아하고 좋아하기 위해서 온갖, 둘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칩시다. 둘다 성령받은 사람이라고 칩시다. 둘다 성령 받았다 칩시다. 성령 받았지만 사람 눈으로는 보이거든요. 사람 눈이 뭐 괜히 있는게 아니고 보라고 있는거 아닙니까.
그 남자 있고 그 여자 보여요. 둘다 보여요. 성령 받았다. 그러면 아는 공식은 성령 받았으면 우리는 성령안에서 어떻게 되? 한 형제가 되지요. 한 형제가 되가지고 한 형제란 말은 성령안에 있기 때문에 맘도 통하고 뭐도 통하고 전부 다 연속성을 계속 갖다 붙일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남자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정말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다. 주의 뜻이란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온갖 알고 있는 모든 지식들을 다 동원해가지고,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니까 받아주세요 라고 계속 대시하고 시도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 상상은 여러분 아주 편하게 할수 있지요. 뭐 한두번 했겠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성령안에서 한 마음으로 다 오케이 그 여자도 오케이 했는데 관심이 없어. 관심이 없어. 관심이 없다는 말은 싫어한다는 말이 아니예요. 말 잘들어야되요.
나는 니가 그렇게 끈질기게 하니까 그 자체가 싫어. 이게 아니고 뭘 하든간에 관심 뚝이예요. 싫다 좋다도 아니라니까요. 그러면 남자는 묻지요? 나는 왜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고 좋아하는데 왜 당신은 관심이 없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성령이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성령이. 그게 진심이예요.
자, 여러분 한번 따져 봅시다. 같은 성령이예요. 같은 성령인데 하나님께서는 이쪽에서는 남자는 여자를 무지 진짜 잠 못들게 만들 정도로 무지 좋아하게 성령께서 일했고, 그러면 같은 성령같으면 남자쪽은 남자쪽의 생각이예요.
같은 성령같으면 이게 내뜻이 아니고 성령의 일이라면 같이 좋아져가지고 우리 결혼합시다 이렇게 되야될텐데 저 여자쪽에서 같은 성령을 받았는데 싫어하는것도 아니고, 관심없다는 말을 여러분 잘 이해해야해요, 싫어하는게 아니고 관심이 없다니까.
저 왜저래? 왜저래 하는것도 관심이다. 왜저래 하는 것 조차 생각이 안나. 그정도로 관심이 없어요. 진짜로? 그정도로 관심이 없어요. 남자쪽에서 몸이 닳는거예요. 그러면 남자쪽에서 이런생각하는거예요.
정말 저 사람이 나한테 아무런 감각이 없다면 내가 괴로우니까 차라리 성령께서 나에게도 아이 정말 짜증나게 정말 여자 없나? 뭐 너 아니면 여자 없어?! 이렇게 그래 나도 끊어줄게. 제발 이런 맘을 주시옵소서 할수 있잖아요. 그게 또 안되네.
자, 이게 지금 무슨 말이냐 하면은 이런 규칙들이요 성경에 굉장히 많아요. 성경에 굉장히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은 그 어린 사무엘과 엘리예요. 어린 사무엘과 엘리라고. 사무엘이 사무엘 부르니까 쫒아 가잖아요. 누구한테 쫓아 갑니까? 엘리한테 쫓아가요.
불렀습니까? 안불렀다는거예요. 세 번이나 그랬어요. 세 번이나. 불렀습니까? 안 불렀다. 불렀습니까? 안불렀다. 세 번째 엘리가 알아요. 우리 집안 엘리집안은 망했구나. 하나님이 노선을 바꿨구나.
저 사무엘 노선을 장차 올 메시아 다윗입니다. 사무엘 노선과 메시아가 연결되지 엘리 자기 제사장 가문과 오히려 기름부은자 메시아 하고는 다윗하고는 연결이 끊어지죠. 이게 뭐냐하면은 오늘 강의 중에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단선이예요 단선. 선이 하나예요. 하나를 뽑아내는 거예요.
성령이란 하나만 인정했어요 주께서. 주께서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넘어가면서 단 하나만 인정했어요. 복선이 아니고 단 한선이예요. 그 성령은 어떻게 되야 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어야 오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는 뭘 확정짓느냐 하면은 단절을 확정짓죠.
그러면 아까 이야기 계속해보겠어요 남자 이야기.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같은 성령께서 오셨는데
우리 인간들의 상식은 뭐냐하면은 불연속성을 뭐로 자꾸 바꾸고 싶어요? 나 위주의 연속성이고 싶어해요. 이게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그 빌립의 딸들이 사도바울 나오니까 뭐라고 합니까? 허리띠 풀어가지고 당신 가면 지금 허리띠 묶여서 잡아 죽습니다. 이게 그들이 지어낸 이야기예요? 성령이 주신 이야기 입니까? 성령이 주신 이야기죠.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이야기 했으면 아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말리는구나 라고 생각할텐데 사도행전에서 어떻게 됩니까? 그렇다 할지라고 나는 가겠다 한거예요.
그러면 인간대 인간에서 인간들이 무슨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느냐? 무슨 실수를 유발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은 나 성령 받았기 때문에 진짜 성령 받았기 때문에 성령이 나한테 준 일은 내가 상대방도 성령받은 일에 동조를 해야된다는 오류를 인간들이 할 수밖에 없어요. 왜? 그게 우리의 옛사람인데. 우리 옛사람은 자아는 인간들은 뭘 주장한다? 불연속성을 벗어나서 후딱 뭐 되고 싶어요? 자꾸 연속성되고 싶어해요. 지금 한번 성령 받고 난뒤에는 그걸 우려먹어서 평생까지 가고 싶어해요. 그게 연속성이거든요.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잖아요. 복음 이야기 많이 들었죠. 고린도후서 1장하면서 성령이 내주하고 성령의 보증이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틀린말은 아닌데, 틀린말은 아닌데 뭘 놓친거예요? 성령을 소유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 괜찮은 성령을 내가 소유할 가능성이 있어요. 지금 이런 이야기 하면 우리가 소유가 됩니까? 안됩니까? 우리가 성령을 소유할수 있어요? 없어요? 반대가 되야되죠.
누가 누구를 소유해요? 성령이 우리를 소유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성령을 소유해서 이제는 종 부리듯이 개 부리듯이 내가 부릴수 있는 다룰수 있는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그게 왜그러느냐 하면은 옛사람의 본성이 연속성이 나름 연속성을 주장하는 겁니다.
연속성에서 이어나가면 연속성을 왜 주장하느냐 하면은 연속성은 통합이 되요. 통합적 사고방식 사고체계가 성립됩니다. 통합적 사고체계라 하는 것은 내가 전부를 아는 것을 의미해요.
여러분 통합이라는 말뜻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통합 어렵습니까? 그럼 통일, 통합, 통일. 최종적인것까지 마무리 전부 전체를 다 아는 것 이게 통합이거든요. 전통 종합영어. 출제 해봐야 이 안에서 나온다 전통 종합영어. 옛날 공부 좀 했지요? 공부 안 한 모양이네.
종합이라는 것은 빠짐이 없이 누락됨이 없이 전부다를 아는 것이 종합 아닙니까? 그 종합으로 갈려면 우리는 불연속 되야되요 안되야 되요? 연속이 되고싶어해요 왜? 예수님이 아는것처럼 나도 다 알고 싶어 하니까.
모든 것을 안다는 말은 이거는 선악과 따먹은 사고방식의 연장이예요. 분명히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끊어졌어요? 이어졌어요? 끊어졌잖아요. 끊어졌지요. 선악과 따먹고 죽은거예요 인간은.
죽었다는 것은 끊어짐을 의미하는겁니다. 알기는 알고 신처럼 됬는데 지옥가요. 왜? 천국에서 끊어졌으니까. 생명하고 끊어졌으니까. 신학 많이 하라 하세요. 신학하는게 나쁜건 아닌데 신학하고 지옥가세요 그래.
신학하면 신학은 무슨 체계를 제공하느냐 하면은 통합적 사고방식을 제공합니다. 조직신학 이런 것. 진리의 전부는 어떻게 구조 되어 있을까? 매력적이 아닙니까? 그럼 나 저거 알게 되면 나는 전부를 안다. 이런식으로요.
박용기 집단에서 박용기라는 이단이 있어요. 박용기. 말씀운동. 그 집단 이단 집단에서 뭘 가르치는 줄 알아요? 성경을 통체로 알려준다고요. 통체로 알기. 그거 왜 시도합니까? 인포메이션 정보지요.
그걸 왜 알고 싶어해요? 인간의 육적인 것은 통합을 원하고 있거든요. 인간이 자기 이런걸 다 알게 되면 인간 나름대로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 충족성이 되요. 자기 충족성. 선악과 따먹은 티를 막 내고 있어요. 자기가 신 도 아닌게 신 노릇하고 싶은 거예요. 모르는게 없어야 덜 불안하다 이렇게 되는 거죠. 남한테 기도 안죽고.
사도바울은 그렇게 성령께서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갔습니까? 그 위험한 곳에 갔어요? 안갔어요? 적색분쟁지역에 갔어요? 안갔어요? 붙잡히러 갔지요. 왜?
니가 일러준 것이 성령의 일이 맞는데 그 일은 내 목숨을 안위 그걸 이용해서 안위 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하늘나라 가기에는 고난 받아야 마땅하고 죽어야 마땅함을 새삼 깨우치기 위해서 성령께서 네비게이션으로 인도한거예요.
위험하니까 가지마라 이야기가 아니라 위험하니까 갈만하잖아 라는 뜻이예요. 그렇게 이해한거예요 사도바울은. 그걸 빌립딸들은 몰라요. 자기들은 성령받은데로 했을 뿐이지 전달했지요.
사람이라면 지금 죽을려고 누가 하겠어요 다 살려고 하지 라고 이야기 했는데 그거는 니 생각이고 그건 성령 안받은 사람이 그런 소리 하라고요. 성령 안 받은 사람에게. 사람이 사는게 남는거지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성령 안 받은 사람끼리 이야기하라 말이죠.
사람이 죽어서 천당가는게 목적이잖아. 그거는 성령 안 받은 사람끼리 이야기하라고요. 천국가는 것이 인간이 자기를 천국 가기위해서는 연속 연속 연속의 연속 연속해서 통합적인 그런 고리를 해서 천국간다고 주장하는 이것은 바로 닭 쫒던 개 꼴이 되는 거예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했겠어요? 안했겠어요? 안할 리가 있어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는데 모든걸 버리고.
모든걸 버리고 주를 따르면 어디갑니까? 지옥가지요. 아휴! 이 쉬운 문제를. 모든 걸 버리고 헌신하면 지옥갑니다. 왜? 제자들이 그 코스를 밟았잖아요. 그러니까 모든걸 버리지 마세요. 주님 따라 가지 마세요. 안해도 되요. 뭐만 오면? 성령오면. 왜? 성령이 단선이예요. 성령이 단선이라고.
이제 이쯤에서 다시 물어야되겠죠. 여러분, 그럼 성령 온것과 안온것의 차이점은 뭘까요? 눈에 보이는 차이점은? 아까 질문했는데 답변은 또 마찬가지입니다. 뭡니까? 내쪽에서 어떤 시도를 해도 그것은 안 먹히더라.
그러면 너 뭐 받았구나 귀신받았어. 뭐 귀신받든 뭘 받았어. 뭘 추가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내쪽에 준비한 단선은 선은 거부당하고 주님께서 내민 단선이라니까 두선이 아니예요. 성령받고 이거하고 이런거 없어요 그냥.
성령도 받아야 되고 예수도 믿어야 되고 그런거 없어요. 그냥 성령받으면 그 자체가 예수님자기 충족성이되요. 성령만 받게되게되면 내가 어떤짓을 해도 뭐가 생긴다?
어떤 짓을 해도 구원과 상관없다는 그 사실이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을 그리고 주께 영광 돌림을 알고 기쁨이 터져나오게 되어 있어요. 터져 나온다니까요. 아니 나만 터져나오나? 이게 터져 나온다니까요.
아까 그 남자 이야기 마무리 지어야되겠죠. 안하면 찝찝하죠. 자, 남자는 성령받아서 좋아한다고 하는데 여자는 남자를 싫어하고 그런건 아니고 관심조차도 없는것도 성령의 일입니다.
그러면 그 둘 사이는 원수입니까? 원수예요? 그러면 인상쓰고 이렇게 만날까요?
만약에 그 두사람이 서로 만났을 때 둘 다 동일하게 느끼는게 있어야되요. 그게 뭐냐하면 성령의 허락입니다. 성령의 허락하에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만나게 된거예요.
둘이 교제한것도 아니고 성령하에. 이 허락, 허락이라는 것은 한번 허락한다고 되는게 아니고 계속 단절케 하시고 허락을 집어넣고 단절케 하시고 허락을 집어넣음으로 말이암아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인간을 구원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현존, 예수님이 지금 살아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지금 어떻게 살아있다? 하늘에 살아있다? 아니! 인간대 인간의 만남속에 주님이 살아 있어요. 이것을 성막의 해설가는 이걸 놓친겁니다. 성막의 해설가는 성막 실제 모형에 여러분 제가 보라고 했는데 보라고 해도 안봐요 안봐.
속죄소 있고 천사 날개 이렇게 마주쳤다고요. 그 해설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속죄소 뚜껑이거든요. 이것과 이 천사 사이에 공간이 있어요. 이 공간에서 주께서는 만난다고 이야기 했어요. 그렇게 되어 있지요? 말씀을 이 안에서 말씀하시고 만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말이 일리가 있더라도 왜 그렇게 하느냐에 대해서 그 사람은 모르고 있어요. 성막을 만들었다는말이 만나게 해주는게 아니고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해서 성막을 만든거예요. 만날거 같으면 성막 필요없어요.
나 여기있다 해가지고 100마일 200마일 이스라엘 백성 귀있는 사람은 다 들을지어다. 보청기 빼도 다 듣고 보청기 끼어도 다 들을수 있는데 이렇게 해서 들어가도 기어들어갈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이 말은 이 만나는 것이 뭐냐 하면은 허락되야 되요 허락되야되요.
그래서 요한복음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버지가 네게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나 예수께 올수 없다 되어 있어요. 이게 허락이예요. 아버지가 오게하지 아니하면 왜 예수님이 부정적으로 아버지가 보내서 왔구나 이렇게 긍정적 문장으로 만들수도 있는데,
왜 긍정적 문장이 아니고 부정적으로 단어를 썼느냐하면 이게 단 너희들은 단절되 있음을 늘 유지를 해야된다는 겁니다. 단절되 있다는것. 주님은 심판을 끝까지 밀어부쳐요. 심판이 없는 곳에는 사랑도 없어요. 여기까지는 심판의 하나님이고 그다음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이런 거짓말 그건 이단입니다 이단.
제가 그 두 번째 시간에는 더 어려운게 나오는데요 지금 그걸 감당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이 첫째시간에 기초한 것을 잘 아셔야되요. 지금 부부가 계시잖아요. 부부 계시는데 우리는 결혼했다 그래서 한집에 산다 이러면 안되요.
주께서 결혼 허락했잖아요. 결혼허락한뒤로는 함께 사는게 자동적으로 되는게 아닙니다. 그럼 연속이 되어 버려요. 매일같이 집에가서 아내가 집에 있고 만약에 남편이 바깥에 일하다가 집에 간다면 놀라야되요.
어! 왠 여자가?! 그것도 매일같이 놀래야 되고. 왠 여자가! 누구세요? 아 성령께서 허락하셨구나. 나의 연속성이 용납안되요. 항상 주께서 허락이 있어줘야 같이 사는거예요. 허락이 있어줘야.
그래서 내일을 보장하면 안되요. 그렇게 하다가 내일 3월 14일 없어. 없으면 없는거지. 어디갔지? 고등어 굽다가 어디갔지? 뭐 이런거. 어디갔기는 주께서 허락을 안해서 그런거지.
너무 쉽게 주님은 비로서 그 사람 그 가정에 계십니다. 주께서 계신다는 말은 매일 허락하고 안하고 결정권이 나한테 있다는 식으로 스스로 그 자리에 등장해요.
주님은 어디 계시냐? 스스로 나타내는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이 말도 안되는 소리한다 하지 마세요.
이게 진심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나타내시는 곳에 불연속 밖에 없는 세상에 스스로 나타내서 불연속과 불연속을 스스로 주님의 자기 충족성으로 연속시키는 그런 방식 외에는 안나타납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십자가 복음이 불연속성을 이겼음을 자기 충족성 증거하는 용도 외에는 주님께서 나타나거나 기여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걸 위해서만 나타나요. 왜? 새 언약이기 때문에. 새 언약을 완성했기 때문에.
성지순례 가면서 보는 것은 성지순례는 쓰레기통이다 쓰레기다. 백날 봐도 거기에 주님이 안나타나요. 그런데 성지순례하면서 주님을 체험한 것은 바로 성지순례 그 장소가 아니라 같이 동행했던 이상현 목사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느낀거예요.
주님은 인간의 만남을 통해서 주님이 자신을 드러내지 인간없는 곳에는 주님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