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기시감 1803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3. 18. 12:23


HOME > 지역강의 > 가락강의
2018-03-13 23:59:16조회 : 200         

기시감기시감 [旣視感, Dejavu] ] 180313

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olw2j33nVoc" frameborder="0" allow="autoplay; encrypted-media"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8iRtWZ_yxVs" frameborder="0" allow="autoplay; encrypted-media" allowfullscreen></iframe>

 홍민희 (IP:59.♡.64.246)18-03-17 22:59 

강남-요한복음 16장 16절(기시감)180313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6장 16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 상대해서 제자들 인간이잖아요. 인간을 상대해서 이해가 되는 이야기를 해야 서로 의사소통이 되잖아요. 이해가 되는 이야기를. 


그런데 16절 같은 경우에는 보면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이렇게 함으로서 누가 이 말을 이해를 하겠어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이해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너희는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구원받는게 아니고, 주님의 하신일에 휘말렸기 때문에 어!어! 구원이 되었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라고 된게 아니고 그냥 있어봐 내가 회오리 바람 쳐 가지고 너희로 하여금 허리케인 안에 내가 만든 허리케인 안에 너희들이 포함되있음을 그때사 너희가 알게 될것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뭐를 이해한다는 것은 기껏해야 과거에 갖고 있던 과거에 알고 있던 그 범주 가지고 그냥 긁어 보는 거예요. 자기가 아는 수준내에서. 그러면 뭐가 안되느냐 하면은 좀 어렵게 이야기 해서 죄송합니다만은 이런 용어를 쓸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자기 충족성. 예수님의 자기 충족성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은 그 충족성을 다 파악을 하지를 못합니다. 그냥 충족이 아니고 자기 충족성이예요. 자기 충족성. 


보통 음식 먹을 때 음식 맛이 왜 이래 저래 이렇게 하는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와~ 되게 맛있다 하거든요. 그럼 다른 사람이 시비 걸어요. 이게 뭐가 맛있느냐 하면은 "내가 만족해" 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의 못하잖아요. 내가. 자기. 


예수님은 자기 충족성이예요. 누구 의견듣고 그러지 않습니다. 누구 눈치보고 그러지 않아요. 본인만 만족하면 끝이예요. 그리고 자기 충족성을 향햐여 달려가는데 그 자기 충족성에 대해서 사람들이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를 않는겁니다. 


왜그러냐 하면은 인간들은 어느 수준이냐 하면은 보는게 전부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16절에 보게 되면 이렇게 되어 있죠.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겠다고 이야기를 함으로서 예수님의 자기 충족성에 인간은 거기에 발을 들여놓을수가 없다는 겁니다. 보는게 전부이기 때문에. 


인간은 보는게 전부인데,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제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식으로 일을 진행시켜 버리면 제자들은 따라올려다가 스톱이 되버리는 거예요. 꼭 닭 쫓던 개처럼. 가다가 제자들이 계속 예수님을 보면서 뭐를 챙기느냐 하면은 나 예수님으로 참 만족해.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만족, 제자들 나름대로의 자기만족을 취하다가 그 예수님이 안보이고 사라진다는 말은 제자들을 놔두고 가버리거든요. 제자들을 놔두고 가버린다는 말은 제자들이 따라올래야 따라올수 없는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믿음의 한계는 거기까지. 인간의 믿음의 한계도 거기까지. 거기까지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요? 말도 안되는 소리 하고 있어요. 말 안되지요. 인간이 쏘아대는 레이저빔. 쏘아대는 빔은 인간이 볼수 있는, 납득이 되는 거기까지. 거기까지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된다? 인간들이 그 도달될 수 있는 믿음의 범주를 놔두고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버리니까 무엇이 와르르 다 무너집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와르르 다 무너져버리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따라다니면서 구원받는다는 이 이야기가 전혀 이거는 실효성 없는 거예요. 그저 오기였고 해질러 보는 거예요. 그냥 해봤던 거예요. 열심 내봤고 따라다녀 봤고 예수님과 함께 3년동안 함께 동거동락 해봤지만 거기까지. 거기까지예요. 


아! 더 이상 주님은 붙잡고 싶어도 주님께서는 붙잡히지 않는 영역까지 넘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입장에서는 어떻해~ 어찌. 어떡하지.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가버리면 더 이상 추적이 안되는데 어떡하지요? 


우리 놔두고 간 사람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나 나버려라. 끝까지 따라가겠다 했는데 그 끝이 인간이 생각하는 끝이 아니고 그 너머로 넘어가버리죠. 자, 그러면 어떻하면 좋아 제자들. 그동안 헛수고 했는데. 


자기들 만큼은 천국간다고 천국에서 누가 높으냐 미리 사전에 자리다툼까지 했는데. 너희들이 보지 못하는 곳으로 넘어가버릴 경우에 인간쪽에서 내민 인간쪽에서 내민 그 믿음의 능력도 거기서 꺽여 버립니다. 


누가 거짓말합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어디 세상에 어디 그런 거짓말이 있어요. 절대로 믿음으로 구원 못 받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무슨짓을 해도 구원 못 받아요. 소망 사랑도 구원 못 받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인간은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서 비로서 들통난거예요. 제자들이 아니라 누구라도 주님 가신 길에 주님 가신 나라에 따라 잡을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음이 예수님쪽에서 증명해버린거예요. 예수님쪽에서. 


논리는 사탄쪽에서 증명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그걸 증명해 버린겁니다. 약을 올려도 보통 약을 올린게 아니죠. 예수님이 지금 남의 이야기 한게 아니예요. 충실하게 따라왔던 자기 제자들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닭 쫓던 개 신세 개 꼴이 된거죠 제자들이.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걱정말아요 그대. 13절 나옵니다. 다 지난날도 의미가 있지요. 노래합시다. 동영상 노래 실었다가 동영상 노래 실었다고 이야기 들어가지고 다 지워 버렸어요. 나는 좋던데. 저보다 싫은 사람들 있잖아요. 노래를 안 실은니까 나름대로 일리가 있긴 있어요. 그 현장감이. 


요한복음 16장 13절에 보게 되면 너희가 감당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너희가 감당못한다. 너희들이 나의 말을 감당했기 때문에 나와 더불어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마라. 그런 일은 내가 용납안한다. 


내가 주님을 알아서 나는 주와 함께 산다는 그러한 망발은 하지마라. 너희는 나를 모르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모르는 사이가 같이 동거할 수는 없잖습니까.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 했는가? 


하늘나라는 열려있지만 아들 나라는 닫혀있다 이야기 했지요. 인간이 만든 상상한 하늘나라는 활짝 열려있어요. 그 뭐 사랑의 하나님 하면서. 하지만 실제 아들의 나라는 닫혀있어요. 누구 말이 맞는 거예요? 


어디 갈려고? 하늘나라 갈려고? 아들의 나라 안가고? 아들나라는 닫혀 있는데? 그럼 닫혀 있는 나라 대신 다른 나라 가면 되겠네. 천국 가면 되겠네요. 그건 상상의 나라고 그건 거짓의 나라 있지도 않은 나라예요. 


그래서 13절에 보면 지금은 감당 못하지만 13절에 보면 누가 온다고 했어요? 진리의 성령이 어디서 옵니까? 인간이 따라갈수 없는 저쪽 영역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공식하나 적어볼께요. 


성령 안받고 구원 되는 법은 없다 지요. 성령 안 받고 구원되는 법은 없지요? 그렇지요?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인간이 따라올수 없는 영역 저 쪽에 가서 저 쪽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제자들은 감당이 안되요. 


그만큼 따라왔는데 이제는 그야말로 이거는 헛수고 한거예요. 그런데 저쪽에서 뭐가 온다고요? 성령이 오게되죠. 성령이 오면 비로소 그때는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가르칠 필요 없다 정도가 아니라 그때는 말없이 기뻐해요. 성령오게되면. 말없이 기뻐하게 되있어요. 뭐 한것도 없는데 기뻐요. 이렇게 기뻐도 되나 할 정도로 기뻐요. 성령오게 되게되면. 


자, 성령오게 되면 기쁘다는 이야기를 지금까지 강의 들었으면 여러분들 감 잡을거예요. 왜 기쁘지요? 성령오게되면. 갈수 없는 곳에서 소식이 왔으니까. 따라갈수는 없었는데 저쪽에서 초청장처럼 초청장이 날라왔으니까. 


그렇다면 다시한번 복습해봅시다. 성령 안받고 구원되는 법은 없지요? 그러면 이것가지고 한국교회 모든 사람에게 한번 다 적용시켜 봅시다. 지난 지난 낮설교에 제가 이런 이야기 했거든요. 


사도바울이 자꾸 묻는다고 이야기 했지요. 설교 초반에. 사도가 자꾸 묻습니다. 알거 같으면 안물어요. 왜 묻느냐 하면은 뒤에 나오죠. 너 가짜지? 묻는 이유는 가짜가 가짜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꾸 묻는거예요. 


그러면 그거 알아? 그거 안다고? 그럼 이건 알아? 자꾸 묻는 이유는 면접시험에서 자꾸 묻는 이유는 진짜 우리 회사 들어올 사람인지 아닌지 점검하기 위해서 물을 수밖에 없어요. 아이고 인상 좋습니다 들어오세요 이럴수는 없는거 아닙니까. 


자꾸 묻고 캐묻고 캐묻는 이유는 합당한지 합당 안한지를 묻는 이유는 캐내기 위해서 하는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모든 질문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은 성령 받았냐 라는 점을 계속 묻는 겁니다. 성령 받았냐라는 점을 묻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받았냐를 물을때에 우리가 답변하기를 저 기도 좀 하는데요. 했다 하면 두시간입니다. 그게 답변이 되겠습니까? 왜 답변이 안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영역안에 넘어가기 전에도 이미 베드로 열두제자는 한기도씩 했던 사람들이죠. 기도한사람들이죠. 


주님 성령은 모르겠는데 헌금은 합니다. 그런 것이 소용이 없어요. 왜냐하면은 그들은 이미 인간이 할수 있는 근사한거 있잖아요. 괜찮아 보이는 것 그거 한가닥씩 다 한사람들이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놔두고 그 사람들이 따라올수 없는 다른 영역으로 점프해서 가버렸어요. 


그렇다면 인간이 할수 있는 모든 것은 구원이 된다? 안된다? 구원이 안되지요. 하는건 자유인데 하고 싶으면 하세요. 소용없는줄 아시고 하시기 바랍니다. 소용없는줄. 제자들이 모든걸 버리고 주를 따랐잖아요. 이걸 두자로 뭐라하느냐 헌신이라고 합니다. 


그럼 헌신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베드로는 나는 죄인입니다 했지요? 나를 떠나소서. 회개지요? 회개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어떤수를 해도 소용없어요. 어떤수를. 은둔생활하고 어떤 자기를 쳐서 복종하고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구원은 안됩니다. 


구원되는 수는 하나 밖에 없어요. 뭐냐하면은 성령이 오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질문 나오겠지요. 성령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어떻게 압니까? 


성령이 온게 뭐냐 하면은 성령이 와서 주님을 안다는 경우가 어떤 상황이냐 하면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놔둬 버리고 혼자 저쪽 세계에 넘어갔을 경우에 성령이 온다고 이야기 했잖아요.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고백을 성령이 진짜 온 사람은 뭐라고 이야기 하겠습니까? 내가 어떤짓을 해도 구원되지 못합니다를 고백이 절로 툭 치면 저절로 나오듯이 이게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거예요. 


교회다닌다고 구원받는것도 아니고 예배드린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열심낸다고 구원받는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런 것은 내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존재인 것을 내쪽에서 확인하는 요소들밖에 안됩니다 라고 툭 치면 절로 나와요. 


목사됬다고 구원받는것도 아니고 집사라고 지옥가는것도 아니고 그냥 나온다고요. 10년 다녔다고 구원에 유리하고 이틀 교회 두 번 나왔다고 지옥가고 그런거 없어요. 인간의 어떤것도 주님으로 하여금 너 혼자 놀아라 하는 그런 조건밖에 안되요. 


왜? 제자들 놔둬버리고 저쪽으로 제자들이 붙잡을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가버리고 난뒤에 성령왔기 때문에 우리가 갈수 없는 곳에서부터 온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는 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니까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밖에 없겠습니까. 얼마나 기쁘겠어요 이게. 


초청장 있는데 주신분이 줬는데 내 손으로 찢을수도 없어요. 찢으면 또 옵니다. 찢어도 또 오고 그걸 군화발로 밟아도 또 와요. 한번 줬기 때문에. 준 것을 취소할수 있는 방안이 없어요 방안이. 그런 방안이 없어요. 


오신 성령을 가라! 가란 말이야! 니가 와서 되는 일이 없어!! 막 낙엽 던지면서 가란 말이야 백날해도 성령은 안가요. 얼마면 되! 백날해도 소용 없어. 그냥 주신거예요. 그래서 성령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선물이라고 해요 선물. 


선물을 흔히 하는 말로 은사라고 하거든요. 이게 선물이라는 뜻이예요 선물. 차라리 그냥 영어로 선물했으면 좋았을걸. 


선물은 선물 준 사람의 소유권이 그대로 살아 있어요. 

선물 받았다고 소유권이 내 소유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선물이 아니고 은사가 되어 버리면 마치 자기가 은사를 키운것처럼 자기가 이 은사를 자기가 기도원에 가서 생산해낸것처럼 착각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은사 몇 개 받았니? 두 개. 이런거 있잖아요. 


초등학교 아들 너 크레파스 몇 개있어? 두 개? 이런거랑 비슷합니다. 너희집에 TV 있나? 이런것처럼 자기 소유인것처럼 착각하고 있어요. 선물은 받는 사람을 모독하는 겁니다. 받는 사람의 재주와 우수함과 능력을 모독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선물이예요. 


모독당할수록 기뻐요. 좀 자학적인가? 모독 당할수록 밟힐수록 고맙기 그지 없어요. 이렇게 주일 낮에 했잖아요. 이순재 얘기 못난놈. 이렇게 못난놈인 것을 깨우치면 깨우칠수록 그만큼 기쁨은 계속해서 더 폭팔하지요. 못난놈 한다고 또 보험넣지말고. 


못난놈 할수록 이 못난놈인 주제에도 이 선물이 왔다는 사실은 이 기쁨은 남산위에 케이블카 타면서 자랑해야하나. 이 자랑을 소를 잡아서 자랑해야 됩니까? 어떻게 자랑해야 됩니까? 영원히 평생 자랑해도 계속 자랑할만한 요소입니다. 아무리 비난받고 해도 자랑해요. 


“너 22살 때 너 옆집 아가씨 성폭행했지.” “했다! 와! 했어 기분좋아. 나 성폭행 했어. 그냥 개예요 개. 인간 말종이거든. 나 이중인격자야. 나 말하고 행동 달라.” “왜 그렇게 좋아하는데?” “성령받았거든!” 성령 받았거든요. 개인데 이 개 같은 인간인데 성령받았어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너 전에 미쳤잖아. 그래 귀신들려 미쳤어. 미쳤지? 이번에 거라사 지방도 가고 거라사 지방 근처에 갔어요. 고라신 지방도 가고 거라사가 뭐냐하면은 미친 광인이 병 나은 곳이예요. 그 거라사 광인은 오늘날 모든 인류를 대표합니다. 귀신이 조장하고 있는 인간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돈도 필요없고 학력도 필요없고 남의 칭찬도 필요 없어요. 오직 필요한 것은 성령이 와서 악령을 쫓아 내는 것. 주님이 와서 악령 쫓아내는 것. 그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있습니까? 뭐 취직 시켜줍니까? 뭐 결혼시켜줘요? 그런거 필요 없어요. 


중요한 것은 성령을 선물로 줬으면 주님이 주실수 있는 것 다 줬고 만약에 성령주고 또 딴것까지 에이~ 성령말고 다른거 줘야지 이래 버리면 기쁨이 두동강나요. 


성령 준 것으로 기쁨이 다되요. 

그걸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뭡니까? 자기 충족성이예요. 

뭐냐하면 내가 충족한게 아니고 나를 보는 주님이 자기 충족성이예요. 

나같은 인간을 구원한 그것이 

주님한테는 무한한 기쁨이고 그 무한한 기쁨이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그대로 퍼부어 지는 겁니다. 



이번에 그 베들레헴에 갔는데 그 베들레헴에 제가 궁금했던 것은 바로 목자들의 들판입니다. 왜 목자들의 들판을 내가 보고싶어했냐 하면은 다른 모든 유적지는요 성당으로 다 덮어졌어요. 성당으로. 


그 성당 꼴보기 싫어가지고 사진도 안찍고 그 성당사진 뭐 어쩔수 없이 찍었지 정말 찍기 싫어했어요. 겟세마네 동산은 아예 성당이 얼마나 큰지 일부러 안찍었어요. 밑에 그 감람나무 그것만 찍었어요. 꼴보기 싫어서. 


그런데 벌판을 무슨 성당으로 다 덮습니까? 물론 성당 있어요. 있는데 그 성당 찍었지만 그건 안 올렸지요. 목자들의 들판만 있어요. 그 목자들의 들판에서 목자들이 그 들판에 있을때에 거기에 뭐가 있었느냐 바로 주님의 현존이 나타났죠. 천사의 현존. 


그 천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는 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중에 그 다음에 평화로다. 하늘에서는 기쁨이요. 땅에서는 맞습니까?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자들중의 평화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작업의 진척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원없이 영광을 받는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자기 충족성이예요. 예수님의 자기충족성. 


예수님의 자기 충족성의 요소 하나가 뭐냐 하면은 

놔두고 가버리는 겁니다. 


제자들을 끌고 가는게 아니고 제자들이 따라올수 없는 곳으로 홀로 가는 것이 예수님의 자기 충족성에 부합되는 조건인데 왜냐하면은 너희들이 알아서 마음 단단히 먹고 따라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기뻐하는게 아니라 모든 곳에 멈추고 스탑 스탑되고 


그 다음에 성령을 보내서 그들을 나 있는곳에 데려오는 그것이 예수님의 자기 충족성의 요건에 합당한거예요. 합당한겁니다. 


우리 하찮은 우리가 주님의 자기 충족성에 기여하는 요소로써 개입됬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로서 기쁨이고 영광스럽니까? 참 영광스럽거든요. 뭐 별로 영광스러운 얼굴이 아닌데 성령 안받았어요? 가짜입니까? 


사도바울이 쿡쿡 쑤시는 거예요. 너 가짜지? 가짜지? 막 딴소리 열심히 다녔습니다. 3대째 믿음이고 뭐 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순교자고 그러니까 가짜잖아. 그러니까 가짜잖아 가짜. 


가슴팍 밀면서 계속 궁지에 몰으면서 너 가짜지? 가짜? 사도바울이 계속 그렇게 묻는 것은 


바로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가짜임을 드러내는 그것이 

주께서는 성령받은 사람만 챙기라는 예수님의 지시에 따른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만. 


그래서 그 저 교회가 숫자가 점점 줄든 늘어나든 그것에 신경쓰면 안되요. 올사람만 왔는지 그게 중요한겁니다. 그렇다면 이 계속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충족성을 위해서 성령 오셨는데 

성령오게 되게되면 예수님 입장에서는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 입장에서는 연속성이되요. 
예수님은 여기 계시다 저기 가셨기 때문에 연속성인데 

제자들 입장에서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게 연속이 아니고 불연속성이 되요. 

다른말로 하면 이게 뭐냐 하면은 단절입니다. 단절. 

단절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렇게해서 이 단절을 불연속성이 연속성될 때 

이미 우리는 이 제자들은 뭐냐 하면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려요.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자기 일이 날라 가버리는거예요.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인생에서 자기 일이 없어지고 

모든 내가 밥 먹고 목욕가고 운동하는게 누구 일이 되느냐 하면은 사나 죽으나 주의 일이 되요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일이 된다 말이죠. 주의 일이라 하는 것은 불연속성이 있다? 없다? 

없고 뭐해야된다? 아까 예수님한테는 뭐가 된다? 연속성이죠. 
연속성인데 예수님의 연속성이 지상에 일을 시킬때는 항상 내 입장에서는 뭐가 되야 된다? 

항상 불연속성으로만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불연속성으로. 


예를 들면 내가 이명직 목사님하고 아는 사이다. 아는 사이다. 
그런데 어제 알았기 때문에 오늘도 아는 사이일까요? 아닙니다. 

어제 안다고 해서 오늘도 아는 사이 아니예요. 

왜? 방금 이 공식에 의하면 우리 인간대 인간의 모든 만남은 뭐여야되요? 

연속이 되지 못하고 불연속적으로 되야되요. 


또 하나 예를 들면 어제 내가 예수 믿었습니다. 오늘도 믿을까요? 아닙니다. 내쪽에서 시작하는 모든 것은 전부 다 단절되져야되요. 5년전에 성령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 안필요하고 그런거 없어요. 


다시 이야기할께요. 예수님의 일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이니까.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일은 이 보이는 세계에서는 어떻게 된다? 나의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주의 일이 진행되고 있어요. 


예수님은 왜 안보입니까? 하는데 오늘 16절에 그 이야기예요.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곳으로 갔기 때문에 예수님은 안보여야 맞아요. 지금은 보지만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자기 충족성을 이루기 때문에. 그부분 이해되시죠?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성령이 왔다는 것은 보는 것으로 연속성을 이어가려는 모든 시도를 전부다 거짓된 것으로 가짜로 

완전히 하늘나라 상관없는 것으로 끊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그래도 우리는 자꾸 보고싶어 하죠. 
보고싶어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뭐냐 하면은 보이는 것과 보이는 것을 자꾸 연결시킬려 한단말이죠. 

연결시키는데 그 연결이 되어 버리면 불신자고 

연결된 것을 다 토막토막 끊어놓게 하신다면 그것은 그 사람은 

이미 보이지 않는 예수님에 의해서 주님의 연속안에 놓여있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어제의 믿음이 오늘까지 연장안되요. 오늘 믿음이 내일까지 연장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그럼 오늘 믿었지만 내일 치매걸려서 못믿으면 나는 어떻하지? 이렇게 하지요? 


그걸 어떻하지 걱정한다는 자체가 뭐를 생각하느냐 하면은 나는 예수님처럼 나도 연속성이 되야되라고 자기 연속성을 아직도 주장하고 싶어 한다는 그런 자기의도가 노출되고 만거죠. 


한가지 예를 들면 굉장히 예를 들면 쉬워요. 어떤 두 사람이 있는데 쉽게해서 한 남자가 있고 한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남자가 여자를 되게 좋아해요. 뭐 사랑까지 할 정도로 사랑이 뭐겠어? 그리워하는 거겠죠. 굉장히 좋아해요. 


좋아하고 좋아하기 위해서 온갖, 둘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칩시다. 둘다 성령받은 사람이라고 칩시다. 둘다 성령 받았다 칩시다. 성령 받았지만 사람 눈으로는 보이거든요. 사람 눈이 뭐 괜히 있는게 아니고 보라고 있는거 아닙니까. 


그 남자 있고 그 여자 보여요. 둘다 보여요. 성령 받았다. 그러면 아는 공식은 성령 받았으면 우리는 성령안에서 어떻게 되? 한 형제가 되지요. 한 형제가 되가지고 한 형제란 말은 성령안에 있기 때문에 맘도 통하고 뭐도 통하고 전부 다 연속성을 계속 갖다 붙일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남자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정말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다. 주의 뜻이란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온갖 알고 있는 모든 지식들을 다 동원해가지고,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니까 받아주세요 라고 계속 대시하고 시도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 상상은 여러분 아주 편하게 할수 있지요. 뭐 한두번 했겠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성령안에서 한 마음으로 다 오케이 그 여자도 오케이 했는데 관심이 없어. 관심이 없어. 관심이 없다는 말은 싫어한다는 말이 아니예요. 말 잘들어야되요. 


나는 니가 그렇게 끈질기게 하니까 그 자체가 싫어. 이게 아니고 뭘 하든간에 관심 뚝이예요. 싫다 좋다도 아니라니까요. 그러면 남자는 묻지요? 나는 왜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고 좋아하는데 왜 당신은 관심이 없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성령이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성령이. 그게 진심이예요. 


자, 여러분 한번 따져 봅시다. 같은 성령이예요. 같은 성령인데 하나님께서는 이쪽에서는 남자는 여자를 무지 진짜 잠 못들게 만들 정도로 무지 좋아하게 성령께서 일했고, 그러면 같은 성령같으면 남자쪽은 남자쪽의 생각이예요. 


같은 성령같으면 이게 내뜻이 아니고 성령의 일이라면 같이 좋아져가지고 우리 결혼합시다 이렇게 되야될텐데 저 여자쪽에서 같은 성령을 받았는데 싫어하는것도 아니고, 관심없다는 말을 여러분 잘 이해해야해요, 싫어하는게 아니고 관심이 없다니까. 


저 왜저래? 왜저래 하는것도 관심이다. 왜저래 하는 것 조차 생각이 안나. 그정도로 관심이 없어요. 진짜로? 그정도로 관심이 없어요. 남자쪽에서 몸이 닳는거예요. 그러면 남자쪽에서 이런생각하는거예요. 


정말 저 사람이 나한테 아무런 감각이 없다면 내가 괴로우니까 차라리 성령께서 나에게도 아이 정말 짜증나게 정말 여자 없나? 뭐 너 아니면 여자 없어?! 이렇게 그래 나도 끊어줄게. 제발 이런 맘을 주시옵소서 할수 있잖아요. 그게 또 안되네. 


자, 이게 지금 무슨 말이냐 하면은 이런 규칙들이요 성경에 굉장히 많아요. 성경에 굉장히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은 그 어린 사무엘과 엘리예요. 어린 사무엘과 엘리라고. 사무엘이 사무엘 부르니까 쫒아 가잖아요. 누구한테 쫓아 갑니까? 엘리한테 쫓아가요. 


불렀습니까? 안불렀다는거예요. 세 번이나 그랬어요. 세 번이나. 불렀습니까? 안 불렀다. 불렀습니까? 안불렀다. 세 번째 엘리가 알아요. 우리 집안 엘리집안은 망했구나. 하나님이 노선을 바꿨구나. 


저 사무엘 노선을 장차 올 메시아 다윗입니다. 사무엘 노선과 메시아가 연결되지 엘리 자기 제사장 가문과 오히려 기름부은자 메시아 하고는 다윗하고는 연결이 끊어지죠. 이게 뭐냐하면은 오늘 강의 중에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단선이예요 단선. 선이 하나예요. 하나를 뽑아내는 거예요. 


성령이란 하나만 인정했어요 주께서. 주께서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넘어가면서 단 하나만 인정했어요. 복선이 아니고 단 한선이예요

그 성령은 어떻게 되야 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어야 오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는 뭘 확정짓느냐 하면은 단절을 확정짓죠. 


그러면 아까 이야기 계속해보겠어요 남자 이야기.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같은 성령께서 오셨는데 


우리 인간들의 상식은 뭐냐하면은 불연속성을 뭐로 자꾸 바꾸고 싶어요? 나 위주의 연속성이고 싶어해요

이게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그 빌립의 딸들이 사도바울 나오니까 뭐라고 합니까? 

허리띠 풀어가지고 당신 가면 지금 허리띠 묶여서 잡아 죽습니다. 

이게 그들이 지어낸 이야기예요? 성령이 주신 이야기 입니까? 성령이 주신 이야기죠.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이야기 했으면 아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말리는구나 라고 생각할텐데 

사도행전에서 어떻게 됩니까? 그렇다 할지라고 나는 가겠다 한거예요. 


그러면 인간대 인간에서 인간들이 무슨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느냐? 
무슨 실수를 유발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은 나 성령 받았기 때문에 진짜 성령 받았기 때문에 

성령이 나한테 준 일은 내가 상대방도 성령받은 일에 동조를 해야된다는 오류를 인간들이 할 수밖에 없어요. 
왜? 그게 우리의 옛사람인데. 우리 옛사람은 자아는 인간들은 뭘 주장한다? 

불연속성을 벗어나서 후딱 뭐 되고 싶어요? 자꾸 연속성되고 싶어해요. 

지금 한번 성령 받고 난뒤에는 그걸 우려먹어서 평생까지 가고 싶어해요. 그게 연속성이거든요.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잖아요. 복음 이야기 많이 들었죠. 

고린도후서 1장하면서 성령이 내주하고 성령의 보증이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틀린말은 아닌데, 

틀린말은 아닌데 뭘 놓친거예요? 
성령을 소유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 괜찮은 성령을 내가 소유할 가능성이 있어요. 

지금 이런 이야기 하면 우리가 소유가 됩니까? 안됩니까? 우리가 성령을 소유할수 있어요? 없어요? 

반대가 되야되죠. 


누가 누구를 소유해요? 성령이 우리를 소유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성령을 소유해서 이제는 종 부리듯이 개 부리듯이 

내가 부릴수 있는 다룰수 있는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그게 왜그러느냐 하면은 옛사람의 본성이 연속성이 나름 연속성을 주장하는 겁니다. 

연속성에서 이어나가면 연속성을 왜 주장하느냐 하면은 연속성은 통합이 되요. 

통합적 사고방식 사고체계가 성립됩니다. 

통합적 사고체계라 하는 것은 내가 전부를 아는 것을 의미해요. 


여러분 통합이라는 말뜻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통합 어렵습니까? 그럼 통일, 통합, 통일. 최종적인것까지 마무리 전부 전체를 다 아는 것 이게 통합이거든요. 전통 종합영어. 출제 해봐야 이 안에서 나온다 전통 종합영어. 옛날 공부 좀 했지요? 공부 안 한 모양이네. 


종합이라는 것은 빠짐이 없이 누락됨이 없이 전부다를 아는 것이 종합 아닙니까? 그 종합으로 갈려면 우리는 불연속 되야되요 안되야 되요? 연속이 되고싶어해요 왜? 예수님이 아는것처럼 나도 다 알고 싶어 하니까. 


모든 것을 안다는 말은 이거는 선악과 따먹은 사고방식의 연장이예요. 

분명히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끊어졌어요? 이어졌어요? 끊어졌잖아요. 끊어졌지요. 

선악과 따먹고 죽은거예요 인간은. 


죽었다는 것은 끊어짐을 의미하는겁니다. 알기는 알고 신처럼 됬는데 지옥가요. 왜? 천국에서 끊어졌으니까. 생명하고 끊어졌으니까. 신학 많이 하라 하세요. 신학하는게 나쁜건 아닌데 신학하고 지옥가세요 그래. 


신학하면 신학은 무슨 체계를 제공하느냐 하면은 통합적 사고방식을 제공합니다. 조직신학 이런 것. 진리의 전부는 어떻게 구조 되어 있을까? 매력적이 아닙니까? 그럼 나 저거 알게 되면 나는 전부를 안다. 이런식으로요. 


박용기 집단에서 박용기라는 이단이 있어요. 박용기. 말씀운동. 그 집단 이단 집단에서 뭘 가르치는 줄 알아요? 성경을 통체로 알려준다고요. 통체로 알기. 그거 왜 시도합니까? 인포메이션 정보지요. 


그걸 왜 알고 싶어해요? 인간의 육적인 것은 통합을 원하고 있거든요. 인간이 자기 이런걸  다 알게 되면 인간 나름대로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 충족성이 되요. 자기 충족성. 선악과 따먹은 티를 막 내고 있어요. 자기가 신 도 아닌게 신 노릇하고 싶은 거예요. 모르는게 없어야 덜 불안하다 이렇게 되는 거죠. 남한테 기도 안죽고. 


사도바울은 그렇게 성령께서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갔습니까? 그 위험한 곳에 갔어요? 안갔어요? 적색분쟁지역에 갔어요? 안갔어요? 붙잡히러 갔지요. 왜? 


니가 일러준 것이 성령의 일이 맞는데 그 일은 내 목숨을 안위 그걸 이용해서 안위 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하늘나라 가기에는 고난 받아야 마땅하고 죽어야 마땅함을 새삼 깨우치기 위해서 성령께서 네비게이션으로 인도한거예요. 


위험하니까 가지마라 이야기가 아니라 위험하니까 갈만하잖아 라는 뜻이예요. 그렇게 이해한거예요 사도바울은. 그걸 빌립딸들은 몰라요. 자기들은 성령받은데로 했을 뿐이지 전달했지요. 


사람이라면 지금 죽을려고 누가 하겠어요 다 살려고 하지 라고 이야기 했는데 그거는 니 생각이고 그건 성령 안받은 사람이 그런 소리 하라고요. 성령 안 받은 사람에게. 사람이 사는게 남는거지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성령 안 받은 사람끼리 이야기하라 말이죠. 


사람이 죽어서 천당가는게 목적이잖아. 그거는 성령 안 받은 사람끼리 이야기하라고요. 천국가는 것이 인간이 자기를 천국 가기위해서는 연속 연속 연속의 연속 연속해서 통합적인 그런 고리를 해서 천국간다고 주장하는 이것은 바로 닭 쫒던 개 꼴이 되는 거예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했겠어요? 안했겠어요? 안할 리가 있어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는데 모든걸 버리고. 


모든걸 버리고 주를 따르면 어디갑니까? 지옥가지요. 
아휴! 이 쉬운 문제를. 모든 걸 버리고 헌신하면 지옥갑니다. 

왜? 제자들이 그 코스를 밟았잖아요. 

그러니까 모든걸 버리지 마세요. 

주님 따라 가지 마세요. 

안해도 되요. 뭐만 오면? 성령오면. 

왜? 성령이 단선이예요. 성령이 단선이라고. 


이제 이쯤에서 다시 물어야되겠죠. 여러분, 그럼 성령 온것과 안온것의 차이점은 뭘까요? 눈에 보이는 차이점은? 아까 질문했는데 답변은 또 마찬가지입니다. 뭡니까? 내쪽에서 어떤 시도를 해도 그것은 안 먹히더라. 


그러면 너 뭐 받았구나 귀신받았어. 뭐 귀신받든 뭘 받았어. 뭘 추가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내쪽에 준비한 단선은 선은 거부당하고 주님께서 내민 단선이라니까 두선이 아니예요. 성령받고 이거하고 이런거 없어요 그냥. 


성령도 받아야 되고 예수도 믿어야 되고 그런거 없어요. 그냥 성령받으면 그 자체가 예수님자기 충족성이되요. 성령만 받게되게되면 내가 어떤짓을 해도 뭐가 생긴다? 


어떤 짓을 해도 구원과 상관없다는 그 사실이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을 그리고 주께 영광 돌림을 알고 

기쁨이 터져나오게 되어 있어요

터져 나온다니까요. 아니 나만 터져나오나? 이게 터져 나온다니까요. 


아까 그 남자 이야기 마무리 지어야되겠죠. 안하면 찝찝하죠. 자, 남자는 성령받아서 좋아한다고 하는데 여자는 남자를 싫어하고 그런건 아니고 관심조차도 없는것도 성령의 일입니다. 


그러면 그 둘 사이는 원수입니까? 원수예요? 그러면 인상쓰고 이렇게 만날까요? 


만약에 그 두사람이 서로 만났을 때 둘 다 동일하게 느끼는게 있어야되요. 

그게 뭐냐하면 성령의 허락입니다. 성령의 허락하에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만나게 된거예요. 


둘이 교제한것도 아니고 성령하에. 이 허락, 허락이라는 것은 한번 허락한다고 되는게 아니고 계속 단절케 하시고 허락을 집어넣고 단절케 하시고 허락을 집어넣음으로 말이암아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인간을 구원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현존, 예수님이 지금 살아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지금 어떻게 살아있다? 하늘에 살아있다? 아니! 인간대 인간의 만남속에 주님이 살아 있어요. 이것을 성막의 해설가는 이걸 놓친겁니다. 성막의 해설가는 성막 실제 모형에 여러분 제가 보라고 했는데 보라고 해도 안봐요 안봐. 


속죄소 있고 천사 날개 이렇게 마주쳤다고요. 그 해설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속죄소 뚜껑이거든요. 이것과 이 천사 사이에 공간이 있어요. 이 공간에서 주께서는 만난다고 이야기 했어요. 그렇게 되어 있지요? 말씀을 이 안에서 말씀하시고 만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말이 일리가 있더라도 왜 그렇게 하느냐에 대해서 그 사람은 모르고 있어요. 성막을 만들었다는말이 만나게 해주는게 아니고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해서 성막을 만든거예요. 만날거 같으면 성막 필요없어요. 


나 여기있다 해가지고 100마일 200마일 이스라엘 백성 귀있는 사람은 다 들을지어다. 보청기 빼도 다 듣고 보청기 끼어도 다 들을수 있는데 이렇게 해서 들어가도 기어들어갈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이 말은 이 만나는 것이 뭐냐 하면은 허락되야 되요 허락되야되요. 


그래서 요한복음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버지가 네게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나 예수께 올수 없다 되어 있어요. 이게 허락이예요. 아버지가 오게하지 아니하면 왜 예수님이 부정적으로 아버지가 보내서 왔구나 이렇게 긍정적 문장으로 만들수도 있는데, 


왜 긍정적 문장이 아니고 부정적으로 단어를 썼느냐하면 이게 너희들은 단절되 있음을 늘 유지를 해야된다는 겁니다. 단절되 있다는것. 주님은 심판을 끝까지 밀어부쳐요. 심판이 없는 곳에는 사랑도 없어요. 여기까지는 심판의 하나님이고 그다음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이런 거짓말 그건 이단입니다 이단. 


제가 그 두 번째 시간에는 더 어려운게 나오는데요 지금 그걸 감당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이 첫째시간에 기초한 것을 잘 아셔야되요. 지금 부부가 계시잖아요. 부부 계시는데 우리는 결혼했다 그래서 한집에 산다 이러면 안되요. 


주께서 결혼 허락했잖아요. 결혼허락한뒤로는 함께 사는게 자동적으로 되는게 아닙니다. 그럼 연속이 되어 버려요. 매일같이 집에가서 아내가 집에 있고 만약에 남편이 바깥에 일하다가 집에 간다면 놀라야되요. 


어! 왠 여자가?! 그것도 매일같이 놀래야 되고. 왠 여자가! 누구세요? 아 성령께서 허락하셨구나. 나의 연속성이 용납안되요. 항상 주께서 허락이 있어줘야 같이 사는거예요. 허락이 있어줘야. 


그래서 내일을 보장하면 안되요. 그렇게 하다가 내일 3월 14일 없어. 없으면 없는거지. 어디갔지? 고등어 굽다가 어디갔지? 뭐 이런거. 어디갔기는 주께서 허락을 안해서 그런거지. 


너무 쉽게 주님은 비로서 그 사람 그 가정에 계십니다. 주께서 계신다는 말은 매일 허락하고 안하고 결정권이 나한테 있다는 식으로 스스로 그 자리에 등장해요. 


주님은 어디 계시냐? 

스스로 나타내는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이 말도 안되는 소리한다 하지 마세요. 

이게 진심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나타내시는 곳에 

불연속 밖에 없는 세상에 스스로 나타내서 

불연속과 불연속을 스스로 주님의 자기 충족성으로 연속시키는 그런 방식 외에는 안나타납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십자가 복음이 불연속성을 이겼음을 

자기 충족성 증거하는 용도 외에는 주님께서 나타나거나 기여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걸 위해서만 나타나요. 

왜? 새 언약이기 때문에. 새 언약을 완성했기 때문에. 


성지순례 가면서 보는 것은 성지순례는 쓰레기통이다 쓰레기다. 백날 봐도 거기에 주님이 안나타나요. 그런데 성지순례하면서 주님을 체험한 것은 바로 성지순례 그 장소가 아니라 같이 동행했던 이상현 목사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느낀거예요. 


주님은 인간의 만남을 통해서 주님이 자신을 드러내지 인간없는 곳에는 주님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홍민희 (IP:59.♡.64.246)18-03-17 22:59 
강남-요한복음 16장 16절(기시감)180313b-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목자들의 들판을 제가 봤다고 했지요. 했는데 그 목자들이 천사의 현존을 만났습니다. 자, 천사가 어디있느냐 하는 거예요 여기서. 저는 가서 천사 못봤습니다. 


천사가 못봤다는 말은 목자들은 천사를 봤는데 나는 천사를 못봤어요. 그러면 목자들이 자기들도 그 다음 들판에 가서 또 봤겠습니까? 또 안봤겠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이 세상에 갇혀있다는 뜻이예요. 이 세상에 갇혀있다는 뜻입니다. 


보고싶다고 해서 볼 수 나타났기는 했지만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한다는 말은 딱 한가지 경우 밖에 없어요.
나타나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보다 더 컷을 경우에만 국한됩니다.
그렇잖아요. 맞지요? 네?
 


보이는 세계는 볼수 있는 세계. 차타고 비행기타고 가면 볼수 있는 세계 있잖아요. 목자들 들판. 그런데 여기에 아무리 걸어가도 안보인다 했는데 그때 아기 예수 태어날 때 나타났다는 봤다는 말은 바깥세상에 더 큰 세상이 있다는 뜻이예요. 


그리고 이쪽 세계에서 보이는 세계에서 그쪽을 뚫으려 할때에 그냥 큰게 아니고 아까 그 연속되 있으면 그냥 보면 계속 보이겠지요. 그런데 이게 불연속되었기 때문에 봐봐야 이게 나타나지 않는 한 안보이게 되있다 이말이죠. 안보이게 된거예요. 


그래서 그러면 인간은 기다려야 하느냐? 마냥 나타나기를 기다려야만 하느냐? 이렇게 이런 질문이 나올수 있겠지요. 기다리면 언젠가 천사 나올 때 물론 천사 오기전에 그냥 기다리면 안되고 카메라를 250대 숨겨놔야되요. 나타나면 자동적으로 촬영 찰칵 찍히도록. 어떤 귀신 추방작전 비슷해가지고. 이렇게 하는데. 


이런 의도, 이런 의도 자체에서 만약에 천사가 나타난다면 이것은 이 의도와 천사 나타남과 이 불연속성이 아니고 연속이 되어 버려요. 그래서 그렇게 나타난 경우는 마귀만 나타나지 진짜는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사무엘 보고 싶다고 죽은 사무엘 보고싶다고 무당한테 찾아가지요. 이 무당이 불러내는 무당이라는 중간매체를 통해서 불러낸다는 말은 이건 뭐냐 하면은 사울 왕 자신과 이미 악한 이 무당이 한통속인 것을 하나님을 이용해서 사무엘을 통해서 지적한거거든요. 


어떤 의도에 충족된 것이 아니고 그 의도자체를 문제 삼는다니까 그 의도 자체를. 의도 자체를 문제 삼아요. 십자가 중심의 설교 아닌 특징은 뭐냐? 십자가가 빠져 버리면 우리의 하는 모든 의로운것이 경건해져버려요. 


그런데 십자가 포함된 설교는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고 예수 믿고자 하는 의도 자체도 뭐가 되요? 지적당해야 되요 십자가를 통해서. 그 의도 때문에 주께서 은혜를 주셨다면 내 의도와 내 기도와 주셨다면 이것은 불연속이 아니고 연속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 홀로 이루신 새 언약의 가치가 모독받아요. 


기도하면 어디 예수님이 어디 쫄따구도 아니고 바로 쫓아와 응답해야 됩니까? 그런 것은 없어요. 나중에 나옵니다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이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그럼 천사들의 이 현존에서 그러면 기다리지 말고 끝까지 가서 끝까지 세상 끝날 때 나타나겠네요 라고 한다면 이것은 누구의 오류냐 하면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르다 마리아의 오류예요. 


오빠 죽고 난뒤에 예수님 뒤늦게 가니까 마르다가 화가 단단히 난겁니다. 삐졌어요. 제발 돌아가기 전에 오라고 내가 전갈을 보냈잖아요. 왜 죽고 난뒤에 오십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죽고 난뒤에 온 이유가 있다.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가 될려면 반드시 전제가 뭐여야 되요? 죽을뻔 정도가 아니예요. 예수님의 약속은 죽어도 살겠고가 될려면 진짜 죽어야되요. 진짜 죽어야 되는데 오빠는 죽었는데 오빠를 사랑하는 그 두 남매의 오빠에 대한 기대는 안죽은 거예요. 


예수님한테 화를 내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한게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지금 관심있는게 아니예요. 우리 죽은 오빠 살려내라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시다바리가 되죠. 죽었으니까 주님이 책임지라고 하는거죠. 


그것은 뭐냐하면은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을 잘 대접했기 때문에 이만한 혜택을 우리에게 주셔도 되잖아요 라는 뜻이겠죠. 그러면 그 혜택을 부여받는 그 마르다 마리아 자아들은 불연속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은 연속이 되고 확장이 되요. 


나는 잘되야 된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잘 섬기니까 예수님 덕을 봐야된다. 이게 계속 확장이 되겠지요? 그러면 오빠는 죽었지만 누구의 고집은 안죽었어요? 마르다 마리아의 고집은 안죽은거예요. 


그럼 오빠를 왜 죽입니까? 뭐도 죽이는 거예요? 죽을 인간만 죽인게 아니고 살아 있으면서도 죽는다는게 뭐를 의미하느냐를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뭐가 죽는다? 살아있는 내가 이미 죽은자인채로 예수님을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예요. 


나는 살아 있어도 진작에 죽은놈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거라 이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용할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다시 이야기 합시다. 예수님은 어떻다? 죽은자를 살려야지요. 그럼 죽은자의 역할을 누가 해야될게 아닙니까? 누가 죽은자의 역할을 해야되지요? 바로 여러분. 우리가 죽은자의 역할을 해줘야 되요. 


살아있으면서 죽은자의 역할을 한다는 말은 평소에 우리의 모든 기대와 목적이 의미 없다는 사실을 물론 마리아는 오빠 죽은걸 통해서 하겠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한번 확인들어가야 되지요. 


아! 육이기에 인간이기에 살아도 산게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는 죽어 있는거구나. 그런데 죽어 있는거구나 라는 생각을 집어 넣은 것 조차도 죽은자도 살겠구나 라는 주님의 자기의 연속성, 자기의 활동에 연속성에 일환으로 우리가 거기에 가담되고 있는거예요. 포함되고 있는겁니다. 덮쳐지고 있는거예요. 


그런데 그 속에서 마리아의 그 화남과 분노 속에서 지금 마리아의 분노의 대상은 예수님이 되고 말았어요. 자기 자신이 아니고. 믿음이 없을때는 항상 자기 빼놓고 남을 분노의 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뭐라고 아이디어를 내느냐. 예, 마지막때에 우리가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때에. 여기서 오늘 두 번째 강의 어려운거예요. 마지막때가 되게 되면 과연 주님 오십니까? 우리 시대에는 주님 안오시지만 우리 후손들은 주님 오신다는 말이 이게 옳은 말이냐 말입니다. 이게 맞는 말이예요? 


이게 우리 선배들도 그런 이야기 했어요. 왜 마지막때를 후손한테 미룹니까? 후손이 무슨 죄가 있다고. 우리 후세대가 무슨 죄가 있다고 예수 오심을 우리 후세대에게 미뤄버려요. 그들은 우리 죽고 난뒤에 그들은 어떤 세계냐 하면 그들은 이런 세계에 종말이 아니고 현재예요. 


어떤 현재? 영원한 현재입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영원한 현재를 느끼듯이. 그것과 꼭 마찬가지예요. 인간은 자기의 세대를 자기의 영원한 현재로 봐요. 종말로 안봐요. 우리 후세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종말이란 우리 후세대에 올꺼라고. 우리가 지금 이야기 한것처럼 똑같은 이야기 한다고요. 그러면 그 후후세대들이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우리의 종말은 후후후후세대에 올거라고. 


자, 그렇게 된다면 시간이 마냥 기다린다고 해서 주님이 현존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마냥 기다린다고 해서. 목자의 들판에 카메라 한 200대 깔아놓고 온 매스컴 다 끌어놓고 백날 밤에, 별이 빛나는 밤에 카메라 열어놔봐야 천사 안 나타납니다. 


가다가 고라니 같은거 있데요 보니까. 들판에. 그 쥐하고 고양이 이스라엘도 고양이 많아요. 고양이하고 이런게 돌아다니지 카메라 포착되지 않습니다. 왜? 우리 의도가 이미 노출됬기 때문에 의도가. 아마 마귀가 보낸 귀신은 몇몇 포착될지도 모르지. 


우리의 의도가 이미 노출되었기 때문에 그런식으로 우리가 보는 것으로 믿음을 확장시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아요 보는 것으로. 왜? 주님의 성령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보는것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그래요. 


너희는 지금 보지만 나중에는 보지 못할것이라. 하지만 다시 내가 올때는 너희가 기뻐하리라 왜? 성령을 보내주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마지막때를 그러면 마냥 기다리면 안되. 지금도 안되. 그러면 마지막때를 우리가 어떻게 알수 있느냐. 이게 어려운거예요. 이게. 


마중나오는 거예요. 마중나온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제가 이제 수서역을 딱 내려서 가는데 가만있으면 움직이는거 있잖아요. 그거 걷는거 불편하다고 깔아 놓은거 있잖아요. 보도블럭이 움직이는거 있잖아요. 그거 타고 왔는데. 


맞은편에서 오는데 젊을 때 우리 처남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을 봤어요. 젊을 때 우리 처남. 우리 처남이 아마 그때 한 우리 처남이 30대 초반때 지금은 50대 초반 중반이니까. 30대 초반때 우리 처남하고 똑 닮았어요. 안경쓴거 까지 똑같이 닮았어요. 진짜 닮았어요. 어디서 본듯한 얼굴. 


자, 그걸가지고 오늘 제목이 기시감기시감 [旣視感, Dejavu] 이예요. 기시감. 기시감 어디서 본듯한 얼굴이예요. 낯익은 얼굴. 낯익었다. 이걸 프랑스말로 데자뷰라 하는데 어디서 본듯한 얼굴이다. 그러면 이걸 주님께서 어떻게 제자들을 보내요. 


제자들을 그 세월과 세월이 이렇게 과저 현재라고 하게되면 제자들은 성령오게되면

성령은 제자들로 하여금 세월을 거꾸로 가게 만들어요. 거꾸로 가게 만들면
제자들은 뭐를 느끼느냐 하면은 자기가 옛날 살았던 시절에 지옥생활을
마주치는 모든 상활들로부터 자기가 경험했던 지옥의 모습을 기시감있게 다 체험 하는 겁니다.
 

나도 저렇게 살았어 나도. 저렇게 살았는데 저것 때문에 울고 불고 했었어.
이미 성령이 왔다는 것은 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미래의 영이 왔다는 거예요. 미래의 영이.
미래의 영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온거예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성령이 와버렸잖아요. 그러면 제자들은 뭐냐하면 성령의 담지자.
아따 어렵지요? 담지자. 담지자라 하는 것은 뭔가 담아 있는 인간이예요. 뭔가 담겨 있는 인간.
이걸 철학적인 용어로 담지자라 하는데 일반적인 용어로는 잘 안나오는 용어예요.
 

 ‘용기’와 ‘지혜’를 모두 갖고 있는 것을 ‘담지자(膽智者)’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이버 국어사전)

하지만 『거대한 전환』에서 나온 ‘담지자’의 의미를 ‘용기와 지혜’로 해석하면 어딘가 어색합니다. 이에 대해 ‘국립국어원’은 “‘담지자’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낱말이지만, 일부 논문에서 한자어로 ‘담지자(擔持者)’라 표현하고 있다”면서 “‘어떤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라 판단된다”는 입장입니다. (국립국어원 온라인 국어생활종합상담 2011.11.10.)

그러면서 “‘담지자(擔持者)’라고 쓰는 것이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담당자’로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거대한 전환』에서 나온 ‘담지자’의 문맥과는 달라 보입니다. 번역자는 ‘담당자’ 그 이상의 의미로 표현한 것이라 판단됩니다. 

Daum 국어사전에서 담지자(擔持者)는 ‘생명이나 이념 따위를 맡아 지키는 사람이나 사물’ (다음 국어사전)라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뜻입니다.



뭔가 그릇에도 담아있다 예요. 담지자에요. 뭔가 포함하고 있는 거예요. 

성령을 성령이 포함된 사람같으면 이미 예수님의 영이거든요. 

예수님이 이땅을 이미 마무리지었잖아요. 이 땅이 어떤 세계인지 다 알지요. 

악마가 어떤 식으로 인간을 겁주고 살았다는 것을 다 알잖아요. 


그걸 이미 경유하고 그걸 거치고 가신분의 성령이 제자들속에 들어와버리면 

제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과거 인물이예요. 

저거저거 꼬라지는 내가 옛날 세상 주님몰라 철닥서니 없는 그 사고방식하고 똑같이 하고 있네. 

반갑다 친구야. 이 짓해서 나 지옥갈뻔한거야 이 짓해서. 

만난사람마다. 
옛날 젊을 때 처남 만난것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마주치는 거예요. 

저쪽에서는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가고 있고 

이쪽에서는 미래에서 현재에 그냥 파견근무하는겁니다. 


더 쉽게 말씀드려서 이번에 이스라엘 유적 답사를 했는데 성지순례 말도 하기 싫어. 

유적답사를 했는데 여리고에 갔단 말이죠. 


여리고에 딱 가니까 우리나라 60년대인거예요. 이스라엘이 완전히 철통 철망을 쳐버렸어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땅에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있다고 생각하고 팔레스타인은 자기들 살던 땅에 이스라엘이 야금야금 갉아 먹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동쪽에 요단강있고 여기 갈리리 바다 있고 요단강있고 여기 사해바다 있는데 사해바다는 10배정도 큽니다. 갈리리보다도. 갈리리는 이쪽이 21km 이쪽이 10km 둘레가 54km 정도 쯤 되요. 이거 외운다고 애먹었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이 지중해 가장 깔끔한데 지도가 깨끗한데 이렇게 깨끗하지가 않아요. 지저분해요. 군데 군데 갉아 먹은거 같애. 사실은 갉아 먹은게 아니고 누가 누구를 갉아 먹었느냐 하면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는 사람들을 갉아 먹었는데 마치 면적이 이쪽이 훨씬 넓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탄인이 이스라엘을 갉아 먹은것처럼 느끼죠. 


여기하고 세겜지역하고 베들레헴 이쪽에서는 뭐냐 하면은 철망을 쳐놨어요 철망을. 압사해라. 굶어 죽으라. 봉쇄를 해버렸어요. 나라가 한두개가 아니예요. 지금 다 뚝뚝 다 떨어져 있다니까요. 연락도 안되요. 동굴파다 걸려가지고 동굴 폐쇄당했어요. 


완전히 포위되서 꼼작도 못하는거예요. 그러니까 여기는 자치구가 팔레스타인 자치구가 있지만 세금을 자치구에 내지만 수도시설이 됩니까? 의료보험 혜택이 되요? 경제개발이 됩니까? 아무것도 안되요. 아무것도. 완전 60년대로 그냥 멈춰 있는거예요 멈춰 있는거. 


만약에 여기서 이스라엘로 탈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자기 옛날 그리워서 다시 여기 들어갔다고 생각한다면 그 기분이예요. 내가 이 동네에 이렇게 살았다. 여기 세겜 지역에 제가 들어갔습니다. 이 적색분쟁 지역이예요. 


들어갔다하면 돈 없다 생각해서 체포해가지고 죽여버리든지 해가지고 이스라엘은 이렇게 위험한 곳이니까 이스라엘 관광오지 마세요 하면 IS가 그런 조치 하면 관광수익 확 줄어든다는 그런 수법을 쓰는데 우리가 희생물이 될 수가 있어요. 될수 있다고요. 


그런데 같이 갔던 이상현 목사님은 그냥 차로 그냥 들어갔어요. 들어가자마자 외무부에서 메시지 한100통 들어왔어요. 빨리 도피하시오. 빨리 피하시오. 메시지가 위치추적해가지고 빨리 나오라고. 


우리는 완전 덜 봤는데 봐야될 야곱의 우물 보지도 않았어요. 세겜 이런거 뭐 보지도 않았는데 너무 아까워서 못가겠어요. 가는데 관광객 왔다고 반갑다고 희한하게 여기 아무도 안오는데 관광차가 하나도 없어요. 


아무도 없는데 들어왔다고 좋다고 하는데 좀비처럼 달려드는데 거기서 좀비 첨 봤어요. 빈민가 아이들 완전히 뭐 우유가 있겠어 할 일은 아이 놓는거 밖에 없어요. 아이들은 많이 낳았지 그 빈민가 동영상 보면 나와요. 빈민. 뒷골목. 


이거는 아이들 축구만 하고 아무것도 없어요. 경찰도 이상해해. 여기 왜 왔습니까? 동양인 이니까 봐주는거예요. 동양인 이니까. 동양인 이니까 봐주는 거예요. 서양인 같은면 미국편이라고 이거는 진짜 참. 동양인 이니까 그냥 봐주는 거예요. 제 아내는 빨리 나가자고. 저는 멋도 모르고 들어왔고 하여튼. 


이스라엘에서 인터넷 차단 시켜버렸어요. 구글이 안되요. 빠져나갈길도 안되요. 구글이 안되니까. 구글 안되니까. 차단 다 시켜놨어요. 그 동네에 이미 탈출한 사람이 그 동네에 다시 간다고 봅시다. 아이고 사는 꼬라지하고는 이렇게 되겠지요. 


그 일을 누가 하느냐? 너희가 이세상에 속하지 아니한거예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지만 내가 너희들을 데려가지 않고 남겨두는 것은 바로 이 세상이 진리가 아님을 이 세상이 멸망의 지옥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들을 보내는 거예요. 


미래가 현재에 덮치는 겁니다. 미래가. 묵시가. 이미 완성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했지요. 시민권을 하늘에 가진자가 하늘에서 오는게 아니고 지상에서 지상으로 가는겁니다. 


가가지고 교회하는 행세, 성지순례하는 그 모양 전부다 이런 짓거리가 지옥갈 짓거리였다라는 것을 고발하게 하지요. 아무짝도 쓸데없는 짓을 다 낱낱이 다하도록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운명은 누구 운명을 닮았느냐 하면은 예수그리스도의 가는 십자가의 길을 그대로 재현할 수밖에 없어요. 스데반집사가 가는길, 사도바울의 가는길, 사도바울이 이야기 했지요. 나는 모든 것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 


예수님은 더 어렵게 이야기 했어요. 없는자는 빼앗기겠고 있는자는 더 받을 것이다. 이게 두 개의 중첩현실이 아니면 도대체 설명이 안되요. 마태복음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없는 것은 빼앗길 것이고 없는데 뭘 빼앗겨. 없는 것은 빼앗길것이거 있는자는 더 받을 것이다. 있는데 왜 더 받아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이세상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없음이라는 말외에는 다른 말로 표현할길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소망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믿음이 아무것도 없는거예요. 


없기 때문에 소위 있다고 우기는 것은 있음에 의해서 다 강탈 당해야 되요. 그런데 그 세상에 누가 있느냐? 그 세상에 진짜 있음이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파견된 사람은 그 사람이 있는자가 되고 있는 사람은 하늘의 은사 선물을 받고 받고 무한대로 또 받을것이예요. 


그게 마태복음 13장에 이야기고 그걸 근거로해서 마태복음 13장에 비유들을 설명해줘야되요. 누가 해석할거예요? 그게 어떻게 해석이 불가능합니까? 예배당 부흥할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석되요? 교회 예배당 짓고 부흥할 그것이 지옥갈 행세인데. 그게 예수님 십자가를 가렸는데. 


그거 제자들이 구상 안했겠습니까? 이미 제자들이 옛날에 다 해봤던 거라니까요. 젊을 때 처남이라니까. 젊을 때 처남을 내가 다 경험했잖아요. 그런데 젊을 때 처남을 내가 만났단 말이죠. 그 처남 아닌걸 알지요. 지금 50이 같이 늙어가고 있으니까 아는데. 


어떻게 그걸 젊을 때 처남을 딱 봤을 때 바로 예수님의 분신으로서 다시 이 세상에 머물면서 예수님의 증인자라고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너희에게 오게되면 너희는 땅끝까지 뭐가 된다? 예수님의 증인되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데 갈필요 없어요. 그 자체가 이미 그 자체가 움직이는 천국입니다. 아들의 나라예요. 다른데 가기는 뭘가요. 죽으면 그만이지 죽는게 소원이지 다른나라 갈거 없어요. 움직이는 천국은 움직이는데 제자들은 움직이는게 성령과 함께 움직이는 거예요. 


시민권을 하늘에 있는자가 땅에서 움직인다 이말이죠. 그러니까 땅에는 시민권이 없어요. 루터는 오해해가지고 두가지 시민권이 있다고 하는데 주민등록 두 개도 아니고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 


주민등록증 하나밖에 없어요. 하늘 시민권 있으면 땅에는 죽은자예요. 무슨 시민권 두 개가 있어요. 주민등록있고 뭐 두 개 있는가요? 주민등록 두 개있다고 하니까 이게 소위 복음학교나 그런 선교단체에서 구라를 쳐 구라를 치는겁니다. 헌금도 하고 세금 내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 


우리 교회 어떤 사람이 아주 멋진 질문을 했어요. 유재훈씨인가? 아주 멋진 질문을 했어요. 이화여대 대학생들이 대모를 하는거예요. 동상을 부스라고 무슨 동상? 김활란동상 이화여대 설립자 동상 없애라고. 왜냐하면 이화여대 김활란 여사는 이화여대 세우면서 그때 일제에 협조해가지고 이화여대 세웠는데 


이제는 그 일제의 압잡이 되어서 조선사람을 강탈한 그 자를 부끄럽지도 않나! 동상 끌어내려라! 막 대모를 한단말이죠. 이런 점에서 목사님은 복음으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질문이예요. 질문 안보셨어요? 보셨지요? 답변을 그렇게 했지요. 


학생들이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나라 없던 시절에 얘기죠. 나라 없던 시절. 그러니까 나라 없던 시절에 나라 없는 것이 악한 것이고, 자기 나라 독립해 있으면 이게 선하다는 사고방식. 그게 누굴 위한 것이냐면 본인의 생존을 전제로 해서 그런 선악이 나오죠. 자기 나라, 자기생존을 전제로 해서. 


그래서 김활란 그 사람한테 욕할려면 김활란이 일제에 협조한 것은 나라가 있어야 학교도 있고 신앙도 있고 교회도 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신학이거든요 김활란 그 사람이. 기독교를 이용해서 장차 이 나라 청년들을 생각에 지식인을 만들기 위해서 더 여성 지식인을 만들기 위해서 이화여대를 만들었잖아요. 


그거 왜 했어요? 장차 나라가 잘되면 나라가 다시 회복되거나 나라가 잘되면 이 여성들을 키우는게 좋다 인재를 키우는게 좋다고 해서 했다 이말이죠. 지금은 협조하지만, 후대를 위해서 좋다고 해서 한거예요. 


그러면 김활란 사고방식이 뭡니까? 나라 없으면 우리의 뭐도 없다? 우리의 생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허락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잖아요. 그 생각이 복음적이예요? 복음적 아니예요? 복음적 아니죠. 


뭐가 선합니까? 나라가 있는 것이 선하다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복음에서는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다? 하늘에 있고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어디있다? 하늘에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나라는 없어요? 있어요? 있어요. 


세상 끝장나고 날 나라가 성령을 통해서 미리 이땅에 우리가 미리 성도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살아가는거 거든요. 그러면 이 나라는 누구나라입니까? 내 나라가 아니지요. 대모를 할려면 김활란 박사 동상 할려면 


그런 나는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살지 않는데 왜 김활란 박사는 생존을 위해 살았습니까? 라고 구호를 외치면서 대모를 하라 이말이죠 내말은. 우리 죽을라고 하는데 왜 김활란은 살라고 했습니까? 그러니까 잘못했으니까 끌어냅시다 이렇게 대모해야된다는 말입니다. 제말은 그런뜻이예요. 


그런데 대모하는 여학생들이 그렇게 대모합니까? 이 이화여대 살아야 우리가 잘산다 자기의 생존을 전제로 하잖아요. 이게 무슨 대모가 되요. 권력다툼이지. 권력다툼이잖아요. 수상한것들. 어떻게 살고자 합니까? 살고자하면 죽을것인데. 


같은 이론입니다. 트럼프하고 김정은하고 평화협정했다. 복음적으로 어떻게 해석합니까? 내가 오후때 했잖아요. 어떻게 해석합니까? 어떻게 해석하면 되요? 아 아깝다 죽을수 있었는데. 서울에 한 3개만 터뜨려도 대충 가잖아요.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왜? 파견근무도 자꾸 하게되면 고생이잖아요. 사도바울이 뭐 때문에 소원했습니까? 후딱 끝내고 파견근무 끝내고 좀 쉽시다. 이거 했잖아요. 사도바울이 스데반 집사를 얼마나 부러워했겠어요. 행님 좋겠습니다. 나는 뭐지? 나는 제대도 안하나? 이럴거 아니냐 이말이죠. 


그러면 김정은이 핵개발한 것이 얼마나 절호의 찬스 좋은 기회입니까? 쏴라 쏴라! 해야지요. 대모해야지요. 태극기 부대 대모해야됩니다. 제발 쏴주세요! 폭탄 터뜨려 주세요. 그런데 평화 협정을 좋아한다? 이것은 정신상태가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사람에게 주님의 이런 성령의 일을 방해하는게 뭐냐하면 인간의 기대와 인간의 나름대로의 목표. 기대와 목표가 매일같이 생산되기 때문에 이게 문제입니다. 사람이 기대하고 목표한다는 것은 이것은 자기 영광을 같이 섞게 되있습니다. 


목사가 설교하면서 지난해 우리 교인이 350명 올해는 기도 바짝해가지고 400명 목표 채웁시다. 그거 하는 순간 사도바울이 그 자리에 갔으면 이게 뭡니까? 그게 바로 적색구역. 그게 지옥이예요. 그 교회가 바로 지옥이예요. 


왜? 기쁨을 어디서 얻습니까? 350에서 400명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기뻐할만하다는 기존 생각을 계속 지속하고 있잖아요 연속성 지속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그거 누가 결정해야되요? 광야에 예수님이 시험받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하고 대결했습니까? 마귀하고 했지요. 마귀가 제시한 그 제시한 조건이 뭐였습니까? 세상 영광이잖아요. 세상 영광. 세상에서 부러움 받고 인기 얻고 잘되고 성공하고 그러면 그 교회는 대한 예수교 마귀교회가 되는 겁니다. 


온 유적지 마다 전부다 마귀교회 다 세워놨어요. 마귀교회. 온 유적지마다. 사진 안찍을려고 애썼는데 사진 막 찍혔어요. 갈리리라고 해가지고 언덕위에 나는 나무 십자가 3개 꽂혀 있는줄 알았지. 옛날에. 미리 동영상 보고 그게 아니란걸 알지만. 


낭만적으로 생각해가지고 갈리리 언덕에 능있고 보통 그 빈민골에 못사는 아이들 놀이터 있잖아요. 산 중앙에는 이렇게 능선처럼 아이들은 학원갈 돈 없는 애들 오후에 모여서 놀잖아요. 무덤한 열댓개 있고 무덤에 뒹굴고 그런 1970년대 영자의 전성시대에 나오는 그런 시대는 개발지역 있잖아요. 그렇게 생각했지. 


십자가 3개 강도 이렇게 있는줄 알았지요. 세상에 성당으로 막아놨어. 완전 성당 지어놨어. 성당 구경하는것이지. 거기 들어가보니까 뭐가 있느냐 돌이 있어요 돌. 예수님 뉘였던 돌. 그 돌에 뽀뽀하고 난리났어. 현존 현존. 그 돌있음이 현존이예요. 


돌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상상하는 겁니다. 연속성을 자기가 강하게 지금 부여하는거예요 연속성을. 자기가 생각할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해요. 그거 현존아니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뉘였던 그 돌에 누워있을 그 당시에 지나가던 참새 두 마리가 짹짹 거렸어요. 


그러면 그걸 현존할려면 뭐가 있어야되요? 성당 날아가고 참새 두 마리 날아가야되요. 참새 두 마리만 있으면 안되요. 저뒤에 산밑에 누가 노인네가 어~ 기침소리, 기침소리까지 있어야되요. 현장성 그래도 보존되야되요 현장성. 


그리고 그것만 있으면 안되요. 소리만 있어도 안되고 냄새도 있어야되요 냄새도. 저녁한다고 누가 수제비 끓이고 그 수제비 끓이는 냄새까지 나와야되요. 그러나 그게 가능합니까?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고 날라가 버리죠. 없지요. 현장은 보존되지만 현존은 보존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붙잡을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나타낼 그것만 스스로 나타낼 거기에만 하나님이 나타나기 때문에. 

스스로 나타날때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이기 때문에. 그게 바로 천사가 목자를 만난 이유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주님은 나타날 때 어떤 현상이 있습니까? 물으면 바로 우리를 불연속적으로 다시 돌려보내죠. 우리를 불연속적으로 보내요. 우리는 자아는 항상 인간은 불연속적이여야되요. 
연속성 인간은 기대와 목표가 있다는 것은 현재 내가 이렇게 있으면 내가 기대한 목표가 있잖아요. 

이걸 연속 있게 마련이예요.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나중에 내일되면 이렇게하자. 

적금 넣었으면 내일 적금 탈것이다. 항상 모든 것이 연속적입니다. 

밥솥에 쿠쿠밥솥에다가 쌀을 담아놨으니까 15분만 있으면 밥 될 거야. 삐! 하고 밥이 될거야. 

이게 연속성이예요 전부다 연속성. 삐 될려면 허락이 있어야되요. 그러면 

이거는 허락 없이도 잘만 삐 하던데요? 
그것은 평소에 주님의 연속성을 누가 가려버렸어요? 나의 기대성이 그걸 가려버린거예요. 

14분 50초 가가지고 쿠쿠 고장났어. 삐 안해. 밥통 열리지도 않아. 그게 마땅한 조치입니다. 

왜? 그동안 늘상 됬다고 해서 우리한테는 마치 밥이 되야될 어떤 권리라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어요. 

그게 아까 무슨 통합적 사고방식이거든요. 통합적 사고방식. 

나는 내가 아는 것이 반드시 되어야 마땅하다는 통합적 사고방식. 나는 그런 권리가 있다는 통합적 사고방식. 

이게 한번 잘되면 그 다음부터는 목표 목표를 높입니다. 

계속 목표를 높여가고 목적을 높여가고 다양하게 가게되요. 

그러면 이거는 주의 영광을 우리가 훼손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20절에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이것도 어려운게 우리가 아는 상식에서 제자들이 지금 세상과 함께 있잖아요. 


자,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구가 한 뭐 125만이라고 합시다. 이것보다 적겠지만 한 125만 합시다. 그럼 제자들 숫자가 몇 명이냐 하면은 한명 죽었으니까 11명이잖아요. 그렇지요? 그럼 11명은 어디에 속합니까? 125만에 일부로 속하지요. 11명이니까. 11명. 


11명 포함해서 125만이라 이말입니다. 이거는 분리가 안되요. 세상과 함께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안봐요. 너희들이 갑자기 여기서 울고 통곡함으로서 갑자기 뭐가 됩니까? 이쪽과 이쪽. 이 사람 빼놓고 나머지는 뭐한다? 


기뻐하는게 되요. 기뻐하는게. 같이 있어도 뭐가 다르냐 하면은 서식지가 달라요 서식지가. 사는곳 기거하는 곳이 다르다니까요. 이것은 외향과 외적인 모습으로 파악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 주일 오전에 그런 설교 했잖아요. 떨기나무가 불 붙었잖아요. 그 떨기나무 불 붙어서 감나무 됬습니까? 그래 주님 사라지고 난뒤에 만약에 모세가 다시 떨기나무 갔으면 그 떨기나무가 감나무 됬습니까? 포도나무 됬어요? 


맨 무슨나무 되요? 그냥 떨기나무 예요. 똑같아여. 외향적으로 파악이 안된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능력이란 전혀 같아 보이지만 전혀 질적으로 다른 요소가 있다. 주일 낮에. 


그게 왜그러냐? 주님의 신성, 창조성, 주님의 그 신적인 요소가 피조물 속에 섞여 버리면 피조물은 달라진거 없어요. 동일해도 다루시는 하나님이 그 피조물 다루게 하는거예요. 여기 20절에 보면 11명을 어떻게 다룹니까? 울게 만들고 나머지는 어떻게 합니까? 웃게하지요. 


많이 웃으라 하세요. 지옥갈 사람이 웃어본들 그 얼마나 웃겠어요. 지옥 문 앞에서 하하하 막 웃어줘야 지옥가서 엉엉 울지요. 그러니까 지옥가기전에 마음대로 승리! 승리! 승리를 외치고 브라보! 위하여! 뭐 Cheers! 맘대로 하라 하세요. 빰빠라 불고 이렇게 하란말이죠. 죽 넓은길로 가가지고 전부다 푹푹 빠지듯이 전부 지옥으로 빠집니다. 


그들이 웃는 것을 그들이 희극적이고 행복하고 웃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누가복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차라리 너희는 울으라 합니다. 우는자가 복이 있다. 웃는자는 그들의 웃을일을 다 했기 때문에 웃는자는 저주가 있을것이고 우는자는 복이 있다 했거든요. 


그래놓고 다른데 가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웃으라 이래요. 웃으라 한다는 말은 그들은 그들이 따라올수 없는 아무리 모방해도 기뻐할수 없는 기쁨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거기에 나오죠.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뭐가 된다?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언제 오실 때? 성령께서 오실 때.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오실때라고 하는데 주님 오셔봐야 뭐 얼마 보지도 못했어요. 


기껏 40일 있다 했는데 사실은 40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두 번 나타났는가 그렇죠? 그렇지요? 사도행전에 보면. 40일 계신건 맞는데요. 몇 번 나타나지도 않았어요. 그 저 예수님이 마지막 당부한 교회가 있어요. 교회. 


교회안에 들어가면 뭐가 있느냐 하면 바위만 있어요. 거기서 마지막 당부했어요.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 갈릴리 바다, 갈릴리 바다 곁에서 고기 잡아가지고 농어인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 갈릴리 바다 가면 그 고기가 맛있답니다. 예수님께서 먹으신 고기라고 해가지고 그 식당이 유명해요. 


그것도 뭐냐면 현존을 눈에 보이는 그것가지고 뽑아낼려고 하는거예요. 연속성을 또 시도하는 거예요. 성령 필요 없이. 그거 먹으면 갑자기 마음에 막 희열하고 그거는 자기의 감정의 연속성이예요. 그 기쁨은 그것은 몇분 안가는 그 기쁨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요. 


그 이야기하고 주께서 헤어질 때 내가 지금은 음악을 뺏습니다만 거기다 음악을 하나 깔았어요. 그대여 아무 걱정말아요 라는 노래를 깔았다가 깔았다고 해가지고 높으신 분이 뭐...다시 뺏지만 그대여 걱정하지 말아요. 지난간 것은 다 의미가 있고 찬송가는 아니지만 마지막 헤어진걸 생각할 때 그게 적당하다고 했는데 뭐 했지요 과거완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나타나실 때 사람들은 뭐가 궁금하냐 하면은 전에 예수님이 헤어질 때 베드로가 그렇게 반항했잖아요. 나 저사람 모른다 했잖아요. 그러면 두 번째 나타난다고 해가지고 베드로가 개과천선 했을까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지. 


이제는 뭐 사람은 보는 것으로 인간은 바뀌지 않습니다. 보는 것으로. 그러면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성령이 베드로에게 임하지요. 오순절 베드로에게 임하지요. 그 베드로에게 임한 장소가 뭐냐하면 마가의 다락방이예요. 


마가의 다락방에 보면 마가의 다락방이 최후의 만찬도 한곳이고 거기 성령이 임한곳이 되고 마가의 다락방에 동영상도 올려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 올라가다가 나는 잘못올라가가지고 남의 가정집 가가지고. 아이 미안합니다 하고 나오고. 


오순절 베드로 성령받고 난뒤에 그 사람이 베드로가 모양이 달라졌어요? 갑자기 뭐 훤한 향수를 새로 발랐는지 그런게 나타납니까? 향기가 나고 뭐 그런게 있어요? 없어요. 똑같아요. 똑같은데 뭐가 있다? 성령이 있는거예요.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가 똑같아요. 


성령 받으나 안받으나 회사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커피나 뽑아봐. 똑같아요. 복사나 해라. 똑같다니까. 다른거 없어요. 성령 받았다 해서 교회에서 목사들이 안알아 줍니다. 똑같다니까요. 본인이 똑같아요. 


늘 항상 성령은 뭐냐? 우리한테 지적해요. 의와 심판과 죄에 대해서 지적한다고요. 

죄가 뭡니까? 죄가 바로 주님을 제자들과 떠날 수 밖에 없게끔 요소 그게 죄잖아요. 

그게 뭐냐하면 바로 연속성 추구 아닙니까? 기대와 목표 갖는 거잖아요. 이게 죄다 이말이죠. 

오늘하고 내일하고 끊어져 있어요. 내일일은 내일 되야지. 

오늘도 오늘만 끊어진게 아니라 오후 2시와 3시가 끊어지고 두시반과 두시 31분이 다 끊어져 있어요. 

매일같이 모든게 끊어져 있다 이말이예요. 끊어지고 허락하셔서 목숨 연장시켜주시고.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이게 물인데요 이거 허락했고 이거 팔 꺽이는거 허락했고 허락했어요. 

이게 슬로우비디오 이어버리면 이렇게 부드럽게 되는거예요. 이거 끊기면 아~하고 못먹는거예요. 
모든 것이 주님은 항상 살아 있기 때문에 항상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의 공로만 드러내요. 성도한테 성령안에서는. 

니가 물먹는것도 나의 십자가 증거하라고 준거다 이말이죠. 

모든 것에 대해서 이미 다 이루었다. 새언약이죠. 

이 살과 이 피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하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갖고 있는 신성함, 성령이죠. 신적인 요소입니다. 


뭐 신적인 요소가 키가 그것밖에 안되고 그러냐. 장가도 못가고. 남들보기에 예수님이 그렇게 독특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사야 예언대로 심히 보기에 심히 아름다운것이 없다 했습니다. 그렇죠? 


끌린만한 챠밍포인트 매력포인트가 없다니까요. 평범하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거예요. 평범해도 너무 평범하니까. 뭐 키가 크다든지 안그러면 공중부양한다든지 내눈을 바라봐 이래가지고 뭐 사랑하는 사람이 이사랑이라는 가수가 된다든지 자기는 또 인정안하고 있지만 허경영이처럼. 


그렇게 뭔가 독특한, 독특한걸 뭐라고 하냐 하면은 이거예요. 기행. 기행. 예술가는 기행해야 예술가 답잖아요. 머리 막 기르고 좀 유별하게 보여야 야~ 뭐 받은 모양이다 그거 아니예요. 주님 얼굴할 때 아주 도사처럼 만들어놔요. 머리 이만큼 기르고 키크고. 


여러분 예수님은 마리아 닮았어요. DNA가 마리아 DNA라니까. 마리아 DNA예요. 미남이냐 아니야 하는것도 모호예요. 너무 평범해서 유별날게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보고는 믿지를 못하겠다는 거예요. 이거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말에는 힘이 있는데 뭐 얼굴보니 뭐 시원찮네. 이렇다 말이예요. 그래서 후대에 사도바울 그릴때 대머리로 그려놓고 그래요. 대머리라고 성경에 안나오는데 대머리로 그려놓고. 대머리가 대머리 세계에서는 또 자기들끼리 또 미남이 있다이말이죠. 일관성이 없어요. 


어쨌든간에 능력이란 전혀 달라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달라요. 하지만 다릅니다. 왜냐면 이땅에 살때는 마주쳐서 지옥을 이미 이세상이 지옥이라는 것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입장이기 때문에 다가서기 때문에 그 마음은 자유 그 자체입니다. 자유예요. 


그래서 제가 주일에 했지요. 구원은 탈출이 아니고 침몰이라고. 자유인이기 때문에 어디든지 갈수 있어요 어디든지. 구애받지 않아요. 어디든지. 왜냐하면 단선이기 때문에 성령이 단선이기 때문에. 


성령 받고 이거 하고 이게 아니고 복선이 아니고 3개 4개 5개 아니라 단선이예요. 성령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지옥인 것을 확신하고 예배당도 마찬가지 예배당은 더욱더 지옥이고 마지막에 마지막 심판은 마지막때에 하나님 집에 심판이 떨어질것이라고 베드로전서4장에 나오지요. 집부터 싹쓸이 하는거예요. 


그럴싸해 보이니까. 이 그럴싸해 보이는식으로 살지 마세요. 식당에서도 무한리필 되거든 칼국수 하나 더 시키고. 제발 평범하게 구애받음이 없이. 혹시 갈라설려고 하거든 그동안 붙어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런식으로. 


미워하는데 그러면 안되라고 하는 순간 그거는 뭐냐하면 옛날 지옥에 있을 때 지옥에서 탈출하지 못할 때 이게 안되가 되요. 왜? 어떤 기대와 목적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안가린다 하면서도 이미 뭔가 노림수 가지고 살아왔잖아요 노림수가지고.  


주님 덕분에 뭔가 어떤 예수믿는 티를 내볼려는 어떤 노림수 같은게 있어요. 그런것들이 불연속될 구원을 연속적으로 이어볼려는 시도같은거예요 시도.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가서 이상한 복음아닌 설교 하거든 그것도 주께서 허락하신거예요. 


허락하면서 아 저게 바로 사람들 지옥보내기 위해서 사탄이 사탄의 종들이 양의 탈을 쓰고 저런 설교 해가지고 사람들이 훅 가가지고 우르르 은혜 받았다고 난리도 아니구나. 라는 것을 이렇게 팔짱끼고 남의 구경 진짜 남입니다 남 구경하듯이. 


참 나도 옛날 어지간히 해가지고 돈 꼴아박았지 교회 한 몫돈 수천만원 이런짓 많이 했지. 라고 하면서 무한한 기쁨의 리필을 무한 기쁨 리필을 하라고 이 지옥같은 상황을 마딱뜨리게 한겁니다. 도피하지 마시고 기쁨을 위해서라도 세상속으로 그냥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기쁨을 주신 이 기쁨을 우리가 어디다가 날려보냈는지 백날 들어도 염려 초초 불안 여전한 이유는 주여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기 때문인줄로  압니다. 


제자들이 갔던길을 우리가 그대로 가고 있사오니 성령주실 때 제자들처럼 미래의 삶 하늘의 삶 살면서 시민권을 자랑할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강남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합된 고백 180417 이근호  (0) 2018.04.24
이면지 180403 이근호  (0) 2018.04.08
환원적 해석 180320 이근호  (0) 2018.03.27
죄의 꽃다발 180220 이근호  (0) 2018.02.27
지적질 160206 이근호  (0) 2018.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