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강-YouTube강의(거짓과 진실)180320-이 근호 목사
226강, 제목은 ‘거짓과 진실’입니다. ‘진실과 거짓’이라고 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이 거짓이기 때문에, 거짓부터 먼저 시작을 해야 됩니다. 거짓 밖에 없기 때문에 진실은 나올 리가 없죠. 근데 이 거짓이 자꾸 진실을 만들어내요. 자기 스스로 자기를 거짓이 아닌 것처럼 위장을 하고 싶어서 진리와 진실을 추구합니다.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는 네 가지의 시도를 이 세상 사람들이 보이게 되는데, 그 네 가지의 첫 번째는 종교라는 거예요. 두 번째는 과학이라는 것, 세 번째는 정치, 네 번째는 예술. 종교, 과학, 정치, 예술. 이 네 가지의 방향으로 각각 진리와 진실에 대해서 주장들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본격적으로 성령으로서 하시면서 제일 먼저 누구를 만나느냐 하면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고, 악마를 만났죠. 예수님이 원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님을 악마와 만나게 했습니다. 그냥 뭐 인사나누기 위해서 만난 게 아니에요. 악마로부터 테스트 받기 위해서 만난 겁니다. 악마의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인가를,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몰아세우신 거예요.
동시에 예수님이 악마를 만난다는 것은, 악마가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의 모든 현실을, 권리를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그렇다면 예수님이 악마를 만나기 전에 사람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악마를 상정하고 있었고 지어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악마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짓이라고 이야기해요.
악마를 거짓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누가? 인간들이? 그 인간들이 어떤 인간들이죠? 악마의 유혹에서 이겨내지 못하는 인간들이 악마를 거짓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악마는 거짓말하는 영이라고 이야기해요. 네 가지의 분야에서 이야기를 해요. 종교에서도 악마가 거짓말하는 거고, 과학에서도 악마가 거짓말하는 거고, 정치에서도 악마는 거짓말하는 것이고, 예술에서도 악마는 거짓말하는 겁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종교에서는 거짓을 말하는 것을 악마라고 이야기하고, 정치에서는 거짓말하는 것을 악마라고 이야기하고, 악마적인 정치가라고 하고, 과학에서는 과학자들이 기술이 아닌, 증거 될 수 없는 것을 내세울 때 마귀적인 과학자라고 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창조하지 못한 것을 거짓된 예술가라고 이야기하죠. 천박스러운 예술가, 사이비, 이렇게 이야기해요.
바로 그렇게 거짓과 진실을 인간위주로 이렇게 분류하는 그 동네, 그 동네에 우리가 태어났고, 지금껏 살아오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악마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의 모든 주장이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본인 위주로, 본인 나름대로의 납득이 되는 식의 거짓과 진실을 따로 구분 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교분야가 아닌 세상분야에서는 정치인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가 되어야 된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 주장 거짓이고, 그 주장 악마적인 것입니다. 그게 마귀적이에요.
종교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이야기해요. 그 주장이 바로 악마의 소리입니다. 거짓이에요. 그건 인간들이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었으면 좋겠다는, 자기의 악마성을 유감없이 표현하는 겁니다.
이 과학과 종교를 같이 연결시켜보면 어떨까요? 보통 과학에서는 종교와 연결시키는 것을 굉장히 탐탁지 않게 여기고 거부합니다마는. 사람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서. 내가 믿는 신이 진짜로 참된 신이고, 성경말씀이 진짜로 사실인가를 과학적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속성을 갖고 있어요. 고고학적으로 여리고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고 싶고, 과학적으로 이 우주가 신의 창조물이듯이, 인간이 진화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해요.
그래서 창세기 6장에 나오는 그 네피림, 이런 것을 고고학적으로, 역사학적인 인물로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외계인을 궁금해 하고 크로마뇽인, 인간이 있기 전에 원숭이와 인간 사이에서 나왔던 그 괴물 같이 생긴 사람들을 찾고 싶어 해요. 물리학에서는 처음 천지창조를 블랙홀로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종교도 살리고, 과학도 살리고, 둘 다 살리고 싶어 해요. 둘 다 거짓이 아니고 진실이라고 위장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자, 이 모든 거짓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자기 체험의 재구성입니다. 사람은 체험한대로 인간성이 마련돼요. 자기가 체험한대로. 4개의 나라를 여행한 사람과 40개의 나를 여행한 사람과 생각이 같아질 수가 없겠죠. 그러나 4개의 나라를 여행하든, 아예 제주도도 안 가 본 사람도 있어요. 비행기 타보지도 못한 사람이나 50개국 여행한 사람이나, 둘 다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거짓의 유포자라는 점에서는 뭐 한결같습니다. 일반적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한 시험이 뭐냐 하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40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금식했죠. 보통 사람이 몸이 허해지면 눈에 뵈는 것이 없다고 하잖아요. 배가 고프면 눈에 뵈는 것이 없고, 거의 반 미친 자가 되는 이유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은 몸의 컨디션이 괜찮을 때 빛을 발하기 때문이에요.
성령께서는 일부러 예수님을 40일 굶게 했어요. 이 말은 인간이 아무리 근사하게 신사처럼 숙녀처럼 행세해도, 뭐 40일까지 갈 것 없이 이틀만 굶어도 정신병자 수준이 돼버립니다. 신사고 숙녀고 없습니다. 건빵 하나 가지고 싸우고 난리도 아니에요. 인간의 그런 육적인 모습에서, 거의 짐승 수준의 모습에서 인간이 진실과 거짓을 논한다면, 이건 악마고 천사라고 논한다면, 그것은 바로 나한테 배고픔을 해결하고, 나로 하여금 남한테 인정을 받고, 세상이 주는 그 어떤 부귀영화에 인간은 다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노출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그럴싸하게 뭐 신사고, 이성이 어떻고, 과학이 어떠니, 예술이 어떠니 해도, 굶게 된다면, 눈에 뵈는 게 없다면 빵에 굴복하고 자기 욕망에 굴복하고 세상의 아름다움과 여유 있음에 누구나 인간이 굴복하고, 그 굴복은 바로 거짓된, 이 거짓 앞에 복종되어 있는 상황인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진리요, 길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 빼놓고,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거짓임을, 기쁨으로 그대로 노출되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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