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거짓과 진실,새로움과 옛 것 18032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3. 22. 06:51
2018-03-21 00:04:06조회 : 27         
유튜브 강의 (226강, 227강) 거짓과 진실, 새로움과 옛것 180320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226강       음성            동영상


227강       음성            동영상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8tt2LGb2vBk" frameborder="0" allow="autoplay; encrypted-media"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I4CiZj2uLE" frameborder="0" allow="autoplay; encrypted-media" allowfullscreen></iframe>

 이미아 (IP:122.♡.178.64)18-03-22 00:24 
226강-YouTube강의(거짓과 진실)180320-이 근호 목사 

  

226강, 제목은 ‘거짓과 진실’입니다. ‘진실과 거짓’이라고 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이 거짓이기 때문에, 거짓부터 먼저 시작을 해야 됩니다. 거짓 밖에 없기 때문에 진실은 나올 리가 없죠. 근데 이 거짓이 자꾸 진실을 만들어내요. 자기 스스로 자기를 거짓이 아닌 것처럼 위장을 하고 싶어서 진리와 진실을 추구합니다.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는 네 가지의 시도를 이 세상 사람들이 보이게 되는데, 그 네 가지의 첫 번째는 종교라는 거예요. 두 번째는 과학이라는 것, 세 번째는 정치, 네 번째는 예술. 종교, 과학, 정치, 예술. 이 네 가지의 방향으로 각각 진리와 진실에 대해서 주장들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본격적으로 성령으로서 하시면서 제일 먼저 누구를 만나느냐 하면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고, 악마를 만났죠. 예수님이 원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님을 악마와 만나게 했습니다. 그냥 뭐 인사나누기 위해서 만난 게 아니에요. 악마로부터 테스트 받기 위해서 만난 겁니다. 악마의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인가를,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몰아세우신 거예요. 

  

동시에 예수님이 악마를 만난다는 것은, 악마가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의 모든 현실을, 권리를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그렇다면 예수님이 악마를 만나기 전에 사람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악마를 상정하고 있었고 지어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악마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짓이라고 이야기해요. 

  

악마를 거짓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누가? 인간들이? 그 인간들이 어떤 인간들이죠? 악마의 유혹에서 이겨내지 못하는 인간들이 악마를 거짓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악마는 거짓말하는 영이라고 이야기해요. 네 가지의 분야에서 이야기를 해요. 종교에서도 악마가 거짓말하는 거고, 과학에서도 악마가 거짓말하는 거고, 정치에서도 악마는 거짓말하는 것이고, 예술에서도 악마는 거짓말하는 겁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종교에서는 거짓을 말하는 것을 악마라고 이야기하고, 정치에서는 거짓말하는 것을 악마라고 이야기하고, 악마적인 정치가라고 하고, 과학에서는 과학자들이 기술이 아닌, 증거 될 수 없는 것을 내세울 때 마귀적인 과학자라고 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창조하지 못한 것을 거짓된 예술가라고 이야기하죠. 천박스러운 예술가, 사이비, 이렇게 이야기해요. 

  

바로 그렇게 거짓과 진실을 인간위주로 이렇게 분류하는 그 동네, 그 동네에 우리가 태어났고, 지금껏 살아오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악마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의 모든 주장이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본인 위주로, 본인 나름대로의 납득이 되는 식의 거짓과 진실을 따로 구분 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교분야가 아닌 세상분야에서는 정치인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가 되어야 된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 주장 거짓이고, 그 주장 악마적인 것입니다. 그게 마귀적이에요. 

  

종교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이야기해요. 그 주장이 바로 악마의 소리입니다. 거짓이에요. 그건 인간들이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었으면 좋겠다는, 자기의 악마성을 유감없이 표현하는 겁니다. 

  

이 과학과 종교를 같이 연결시켜보면 어떨까요? 보통 과학에서는 종교와 연결시키는 것을 굉장히 탐탁지 않게 여기고 거부합니다마는. 사람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서. 내가 믿는 신이 진짜로 참된 신이고, 성경말씀이 진짜로 사실인가를 과학적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속성을 갖고 있어요. 고고학적으로 여리고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고 싶고, 과학적으로 이 우주가 신의 창조물이듯이, 인간이 진화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해요. 

  

그래서 창세기 6장에 나오는 그 네피림, 이런 것을 고고학적으로, 역사학적인 인물로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외계인을 궁금해 하고 크로마뇽인, 인간이 있기 전에 원숭이와 인간 사이에서 나왔던 그 괴물 같이 생긴 사람들을 찾고 싶어 해요. 물리학에서는 처음 천지창조를 블랙홀로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종교도 살리고, 과학도 살리고, 둘 다 살리고 싶어 해요. 둘 다 거짓이 아니고 진실이라고 위장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자, 이 모든 거짓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자기 체험의 재구성입니다. 사람은 체험한대로 인간성이 마련돼요. 자기가 체험한대로. 4개의 나라를 여행한 사람과 40개의 나를 여행한 사람과 생각이 같아질 수가 없겠죠. 그러나 4개의 나라를 여행하든, 아예 제주도도 안 가 본 사람도 있어요. 비행기 타보지도 못한 사람이나 50개국 여행한 사람이나, 둘 다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거짓의 유포자라는 점에서는 뭐 한결같습니다. 일반적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한 시험이 뭐냐 하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40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금식했죠. 보통 사람이 몸이 허해지면 눈에 뵈는 것이 없다고 하잖아요. 배가 고프면 눈에 뵈는 것이 없고, 거의 반 미친 자가 되는 이유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은 몸의 컨디션이 괜찮을 때 빛을 발하기 때문이에요. 

  

성령께서는 일부러 예수님을 40일 굶게 했어요. 이 말은 인간이 아무리 근사하게 신사처럼 숙녀처럼 행세해도, 뭐 40일까지 갈 것 없이 이틀만 굶어도 정신병자 수준이 돼버립니다. 신사고 숙녀고 없습니다. 건빵 하나 가지고 싸우고 난리도 아니에요. 인간의 그런 육적인 모습에서, 거의 짐승 수준의 모습에서 인간이 진실과 거짓을 논한다면, 이건 악마고 천사라고 논한다면, 그것은 바로 나한테 배고픔을 해결하고, 나로 하여금 남한테 인정을 받고, 세상이 주는 그 어떤 부귀영화에 인간은 다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노출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그럴싸하게 뭐 신사고, 이성이 어떻고, 과학이 어떠니, 예술이 어떠니 해도, 굶게 된다면, 눈에 뵈는 게 없다면 빵에 굴복하고 자기 욕망에 굴복하고 세상의 아름다움과 여유 있음에 누구나 인간이 굴복하고, 그 굴복은 바로 거짓된, 이 거짓 앞에 복종되어 있는 상황인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진리요, 길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 빼놓고,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거짓임을, 기쁨으로 그대로 노출되어야 합니다.

 이미아 (IP:122.♡.178.64)18-03-22 00:25 
227강-YouTube강의(새로움과 옛것)180320-이 근호 목사 

  

227강, 제목은 ‘새로움과 옛것’입니다. 오늘 날짜로 새롭다는 것은 내일 날짜가 되면 새로움이 아니겠죠. 그러면 시간이 새롭죠. 그렇게 본다면. 오늘 아무리 새로운 것도 내일이 되면 헌 것이 되기 때문에, 다가오는 미래의 하루하루가 다 새로운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새롭다는 것을 만나도 하루만 지나면 새롭지 않아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시간이 흘러가는 한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시간 자체가 모든 것이 새롭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전도서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전1:9)라고 되어 있습니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그건 뭐냐 하면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태양 없이는 못 살잖아요. 그러면 태양 자체가 새롭지 않다면, 태양 아래서 태양의 혜택을 입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태양 때문에 살아가는 모든 것은 새로운 것이 없겠죠. 

  

그러면 새로운 것은 어디에 있느냐, 태양 바깥에 있겠죠. 태양을 지으신 분의 세계, 태양을 만드신 분의 세계, 그것만이 새로울 것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지상에 새로운 것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은 그냥 제자리 뛰기 하는 거거든요. 계속해서 제자리 반복하는 것 밖에는 안 되는데, 그러면 인생을 반복하기 위해서 산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만듦으로써, 그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그게 뭐냐 이 말입니다. 

  

똑같은 것을 반복함으로써, 똑같은 것을 반복하면 우리는 재미 하나도 없어요. 새로운 것이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속이고 싶어 해요. 내일 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근데 내일이 아니고 한 일주일 후가 지나면, 지금 내일이라고 했던 그것은 벌써 식상하고 지루한 것이 돼버리죠. 뭐 그렇게 신선함을 주지 못하죠. 

  

히브리서 4장 2절에 보면,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복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기쁜 소식이잖아요. 자, 어째서 복음이 기쁘냐 하면은, 해 아래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서 기뻐요. 해 아래서 만들어지지 않아서 기쁘다고 할 때에, 이걸 좀 생각을 해봐야 돼요. 

  

우리는 늘 친숙한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복음은 우리한테 친숙한 것이 아니죠. 친숙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뻐한다는 것이, 과연 이게 성립이 될 수가 있습니까? 오히려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기피할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말씀하시면서, 요한복음 6장에서 내 피를 마시고 내 살을 먹으라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아! 무지무지하게 기쁩니까? 그게 즐거워요? ‘아! 이제는 되었어. 나는 살았어.’라는 이런 생각이 듭니까? 평소에 몰라, 사람 피 먹고 살을 먹는 이것을, 평소에 그걸 먹고 싶어서 환장한 식인종 같으면 좋아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거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니까요. 

  

복음이 우리에게 올 때에, 우리에게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전달되는 겁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 “믿으려면 한번 믿어봐라.” 이런 식이에요. 너희들이 내 말을 믿을 수 있는 재주와 능력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믿을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단호하게 거부하고 싶죠. 그리고 밀치고 싶고 대들고 싶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저주하고 싶습니다. 미워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과 모든 것이 우리를 통해서 미움의 내용들이 되죠. 

  

그런데 성경은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쁜 소식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마가복음이 특히 그렇죠. 마태복음도 마찬가지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언제 쓰여 졌느냐 하면 십자가 전에 쓰여 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후에 쓰여 져요.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기쁜 소식이 되려면, 사람들 마음속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이 기쁜 소식이 되려면, 어떤 경우의 사람이냐 하면 바로 예수님을 죽이자고 선동했고 앞장섰던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죽은 것이 대성공이 돼요. 왜? 자기 소원대로 되었으니까. 

  

만약에 그 현장에 우리가 있었다면 예수님이 죽는 것이 기쁠까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기쁠까요? 예수님이 제거되는 것이 기쁠 거예요. 납득이 되지 못한 말을 했기 때문에. 이거는 제자들과 예수님과 마지막 헤어짐도 마찬가지죠. 나는 저 분을 모른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었고,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안다고 했던 그들이, 예수님을 밀치고 기존에 친숙했던 권력 속으로 자기 몸을 돌렸다는 말은, 그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쁜 소식은 그 누구에게도, 아무에게도 기쁘지 않은 소식이었다는 이야기죠. 

  

인간은 새로움을 원하지만, 그 새로움이 나타났을 때는, 해 바깥의 그 당사자가 나타났을 때는, 사람들은 낯설다는 이유 때문에 밀어냈습니다. 그래서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고, 그 새로운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 새로움에 우리는 옛것과 함께 저주받아도 마땅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4장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새로운 것이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 안에서 실습을 보였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3절에 보면 광야에서 나온 사람들 가운데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평하고 있습니다. “내가 (분)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이렇게 평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믿음이 없어서, 믿음이 화합하지 못해서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그냥 못 들어간 정도가 아니고 주님의 분노를 유발하는 태도를 보였다, 라고 정리해요. 분노를 유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기 전에, 인간들끼리 살 때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라는 생각을 그 누구도 하지 못했어요. 

  

착하게 살면 이쁨 받고, 나쁘게 살 경우에는 뭐, 하나님의 화를 돋우겠죠. 하지만 반성하고 회개하게 되면 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서 “그래. 내가 봐줄게.”하고 또 복주시고. 또 생활여건 잘 인도해주시고. 비 안 온다, 비 안 온다, 라고 하면 또 3월에 가서 비를 좀 주시고. “아이고,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이 맞구나!” 이래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처음부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것조차도 이게 분노를 유발할 짓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아무도 예수님을 못 알아봤기 때문에 그 근거가 돼요. 못 알아봤다는 말은 그 안에 하나님의 분노 살만한 요소가 매일같이 그들의 행동과 태도로써 발휘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십자가를 아는, 십자가가 참으로 복음이요, 기쁜 소식인 것을 아는 사람의 눈에만 띄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새로운가? 내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옛것이고, 분노유발자라 하는 것을 깨닫는 사람만이 이미 새로운 것에 접했고 그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