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강-YouTube강의(본향)180313-이 근호 목사
225강, 제목은 ‘본향’입니다. 고향인데 고향이 아니고 본향이에요. 본향. 본향에서 본향으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고향은 태어난 곳, 본향은 한 번도 구경도 못한 곳이 본향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고향을 잊어버려라! 너는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본향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억 속에는 기껏해야 처음 기억이 고향의 기억이지 본향의 기억이 아니잖아요. 본향은 누구의 고향이냐 하면 예수님 고향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의 체험이, 예수님이 가졌던 기억이 우리 내부에 삽입이 될 경우에만 우리는 고향을 포기하고 본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게 된다는 말이 중요해요. 우리가 갈 수 있는 게 아니고. 우리는 구경도 못했어요. 이미 그 본향에 가신 주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성령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겁니다.
제가 능력이라는 말을 했는데, 능력이라는 말은 이번 주 주일 낮 설교에 잠깐 언급을 했는데,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별다르게 보이지 않지만 다른 것, 똑같지 보이지만 달리 보이는 것, 이게 안에 능력이 있어서 그래요. 능력은 다르게 보이기 위해서 꾸미는 것이 아니고, 똑같이 살아가도 괜찮아지는 것이 능력이에요. “괜찮다.”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능력을 발휘하려고 그렇게 어설픈 연기를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그대로 살아가도 내가 만든 능력이 아니기에, 주님이 우리를 고향에서 본향으로 돌려놓는 능력이기에, 우리는 본의 아니게 내가 만들지 않는 능력이 발휘가 되는데, 그 능력은 방향성을 갖고 있어요. 수학에서 그걸 벡터vector라고 해요. 물리학에서 스칼라하고 벡터로 둘을 나누고 있는데, ‘스칼라’라고 하는 것은 그냥 힘의 덩어리지만, ‘벡터’라고 하는 것은 힘은 있되, 특정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힘을 벡터라고 이야기합니다. 방향을 화살표로 표시하거든요. 물리학 수학에서 화살표로 표시하는데, 그런 벡터적인 힘을 갖고 있어요. 당연히 우리는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에게 소식이 들려왔어요. “니 이제 하꼬방(판잣집)같은 그 집에서 이사해야 된다. 아주 부잣집으로 간다. 부잣집으로 가는데, 그 집은 니가 구경도 못했지만 내가 이미 그 집을 니 이름으로 등기해놨으니까 이제 들어가자. 이삿짐 실어라. 가자!”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은 자기가 살던 정든 집을 버리고, 어떤 사람이 이야기한 새로운 자기 집, 내 집, 그러니까 본향 그 정도 쯤 되겠죠. 부잣집으로 간다고 해서 가는데, 가는 길이 이상해. 자꾸 길이 좁아요.
그리고 갈수록 뭔가 근사한 집이 나와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골목으로 들어가요. “길을 잘못 들었나? 운전사 양반 제대로 가는 겁니까?” “내비게이션 잘 되고 있습니다. 지금 정상적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 운전사가 천사에요. 천사가 운전을 하는데, 또는 성령께서 운전을 하는데, 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운전을 하는데, 갈수록 구약적으로 말하면 물이 없고 양식이 없어요. 트럭 뒤에 탄 사람들은 난리도 아니에요. 원망하고, 물 없다고 물 내놓아라, 양식 없다고 양식 내놓으라고 하는데, 지금 벡터, 하나님과 동승하고 있는 그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하고 내비가 찍힌 대로 가는 거예요. 구름기둥과 불기둥대로.
가는데, 이상해요. 양식이 없고 물이 없다 이 말이죠.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겠어요? 인간이 본향을 가려면, 본향을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영원히 거주해야 하거든요. 성도는 서식지가 달라야 돼요. 놀던 물하고 달라야 된다고요. 그래서 보통 이사는 자기 몸이 변하지 않고 그냥 짐만 들어가면 되지만, 하나님이 마련한 집에는, 그 집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 자신도 달라져야 해요. 돈으로 살던 인생, 떡으로 살던 인생, 인기로 살던 인생, 세계부귀영화가 그렇게 탐이 났던 그 인생이, 그게 시시한 드라마같이 느껴져야 해요. 재미도 없고 시시하고.
그런데 재미도 없고 시시한 가운데서 다시 드라마가 재미가 있고, 재미나고, 그렇게 재미가 있을 수가 없어야 돼요. 왜? 시시한 재미로 보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재미로 보는 거예요. 북한에서 핵을 준비했다던 김정은의 큰소리가 그렇게 우습고,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거예요. “아이고, 많이도 만들었다. 고마워라.” 이런 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이 하찮은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그 모습이 코미디로 느껴지는 겁니다. 하나의 개그로 느껴지는 겁니다. 농담이죠. 농담.
만약에 여러분 가운데서, 졸지마세요. 이거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20대 당시에 어떤 여자를 미투(#Me too)해가지고, 당신한테 성추행 당했다고 막 고발할 때, 지금 잠이 올 이야기가 아니죠. 그렇게 이야기할 때, 아휴! 그게 굉장히 재미있어야 돼요. ‘아마 내 기억으로는 그것보다 더 많을 걸!’ 이래 되어야 돼요. 이래 되어야 된다고요. 이게 본향 가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게 본향 가는 사람의 특징이에요. ‘아니, 더 많을 텐데.. 왜 그 여자만 고발을 하지?’ 이런 식으로.
세상 자체의 심각한 문제가 우리는 웃기는 문제에요. ‘아! 내가 이렇게 재미나게 살았구나!’ 십년 전에 돈 떼먹고 도망갔는데, 돈 빌려준 사람한테 걸렸어요. “니 돈 갚아라.” “아이고 간지러워라.” 이런 식으로. 멱살 쥐고 흔드는데도, “그래. 돈 빌려줬지? 내가 그때 그런 재미난 일을 했었나?” 돈 많은 사람이 재미 하나도 없어야 돼요.
이게 뭐냐 이 말이죠. 빌립보서 3장 20절에 나오죠.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 개념을 주께서 만들어내요. 이 개념은 절대로 우리가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우리 안에 있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너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이 말이죠. 이곳을 떠나야 되고 니가 살았던 고향은 잊어버려라.
니가 가졌던 능력은 그냥 가진 능력이 아니고, 능력이 뭔가 너를 일정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는데, 이 세상에 있었던 모든 것은 그냥 목욕탕에서 벗겼던 때 같은 것. 물론 그 때는 나의 땀에서 나왔겠죠. 나에게서 나왔지만 어쨌든 더러운 때 같은 것. 이제 그것을 말끔하게 씻어줄, 샤워해야 될, 진득진득하고 습기 찬 이 세상을 벗어나서 산뜻하고 깨끗한 몸이 허락된 그곳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본향을 생각하면서, 그 능력 속에서 자기 소원을 새삼 뽑아냈죠. “죽여주옵소서. 어서 속히 죽여주옵소서.” 속히 죽여 달라고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뭐 도피하겠습니까? 도피하면 오래 살 가능성이 있어요. 그냥 지금 하나님이 몰아세우신 그 장소가, 본향 가는 최후의 장소라고 여기고, 그 장소에 감사해야 돼요.
이 세상에 대해서 미련만 두지 마세요. 어떤 미련도, 아쉬움도, 회환도, 안타까움도, 그런 것은 다 내 몸의 때같이 여기고, 로켓 쏘아 올릴 때 껍데기 벗겨지잖아요. 알맹이만 간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속사람만 간다고 생각하고, 그런 것에 대해서 전혀 무게를 느끼지 마시기 바랍니다. 0그램이에요. 0g. 새털 같은.
그렇게 마음 불편하게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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