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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겨울수련회 1강-패턴 1801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 16. 16:06
2018-01-13 10:56:45조회 : 79         
2018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강–열왕기하 강해 : 패턴이름 : 한윤범 (IP:14.39.134.25)

2018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강–열왕기하 강해 : 패턴

(강의:이근호 목사)

 

 

우리가 알아야 될 사항을 외면하지 않게 하옵소서. 여러 가지 복잡하고 힘들다 할지라도 주님의 희생으로 쓰여진 말씀을 받아들이는 귀한 시간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열왕기하, 그전에 열왕기상이 있었겠지요. 왕들의 기록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왕이 있다는 자체가 그만큼 이 세상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왕이 필요 없거든요. 필요 없는데 왜 왕이 있어야하지? 왕은 하나님 한분으로 충분합니다. 다른 왕들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왕이 등장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거하기 위해서 왕을 주신 거예요.

 

옛날에는 왕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대통령으로 보면 되지요. 대통령이 왜 필요하냐? 이 세상을 떠나기 싫어서 대통령이 필요한 겁니다. 살고 싶어서, 죽기 싫어서 대통령이 필요합니다. 이 땅을 떠나고 싶어도 대통령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대통령이 이 땅을 떠나고 천국 가는데 무슨 보탬이 됩니까? 아무 보탬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대통령이 이 땅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천국 가기 싫어한다는 증거물로 우리 눈앞에 얼쩡거립니다.

 

구원시키지도 못할 인물이 지도자라고 행세할 때 “당신은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요?”라고 언급해야 되는데 그때는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돼요. 그 근거가 우리가 보고자 하는 열왕기하의 주된 내용이 있습니다. 대통령 당신은 또는 왕 당신은 내게 영원한 영생을 주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가 될 뿐입니다, 라는 고백을 우리가 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하도록 이 땅에 왕을 등장시킨 거예요.

 

군인들이 사격 연습할 때 가상으로 인민군 표적들이 나오지요. 한 방 쏘고 맞으면 넘어지고, 다른 쪽에서 난데없이 등장하면 또 총 쏘고 넘어뜨리고 그렇지요. 왜 그렇게 인민군 가짜 그림들의 벌떡벌떡 일어나는 겁니까? 제대로 총 쏠 수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서지요. 그래서 이 땅의 지도자들은 총 쏘라고 있는 거예요. 너는 우리의 행복을 보장 못해. 너는 영생을 주지 못해. 김영삼도 마찬가지, 박근혜도 마찬가지, 문재인도 마찬가지. 구원도 못하는 게 왜 자꾸 껄떡대고 세금 달라고 하는지. 이런 식으로. 그것 하라고 벌떡 일어나서 4년마다, 5년마다 바꾸고 하는 겁니다. 그게 열왕기상하에요.

 

그래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립보에 나오는 말씀처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하늘에 있다는 그러한 결론을 이 세상에 하늘에 있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빼앗고 우리에게 행복을 줄 것 같은 가짜 왕들을 우리 앞에 자꾸 얼쩡거리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왕이 교체되고 이 땅이 영원한 세상이 아닌 것을 확인해주지요. 그렇게 해서 열왕기하에서 왕들을 바꿔치고 바꿔치는 겁니다.

 

왕이 있음 자체가 바로 죄입니다. 그러면 죄라는 것은 우리 생각엔 없어야 되는데 왕이 있다는 것은 죄가 있다는 것이고, 죄가 왜 개입돼야 되는가? 죄의 개입, 이들이 인도하고 안내해줘요. 죄의 원천까지 그들이 아주 고맙게도 인도해주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왕이 정치를 잘했다 싶을 때 백성들 본인이 수월하게 살아도 넉넉하게 살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찾기보다 정치 잘하는 임금님을 추앙하게 돼있어요. 임금님 때문에 잘 됐다고 할 때 그게 바로 숨겨있는 죄가 죄의 원천으로 우리를 미끄러져 내려가게 하는 겁니다.

 

차라리 왕이 있음으로 우리가 망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도 있는데 왕이 너무 훌륭해. 왕이 훌륭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을 기회조차 박탈당할 경우가 있어요. 가정에서 남편이 문제를 일으키고 말썽을 일으키면 좋겠는데(^^) 따박따박 월급 갖다 주고 6시 땡 하면 집에 들어오고, 와서는 팔 걷어붙이고 애들 숙제 봐주고 청소 다해주고 손에 물도 못 만지게 하고 티비 드라마나 보라하고 끝까지 봉사를 게을리 하지 않을 때 아내가,

 

“주여 어서 이 세상을 떠나기 하옵소서” 그런 기회가 되던가요? 공주도 한두 번이지 이런 대접 받기 싫다고 하던가요? 그만큼 괜찮은 남편 때문에 푹 죄에 젖어드는 겁니다. 바로 죄라는 것은 이 세상을 살만한 세상으로 왜곡되게 해석하게 만드는 모든 요인들, 그게 죄가 되지요. 떠나야 할 곳을 머뭇거리게 만드는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왕이 있어야 우리 자신의 죄를 안다고 했는데 만약에 왕이 없었다는 말은 순수하게 하나님만 쳐다보고 왕 필요 없어. 우리는 하나님만 있으면 돼! 이렇게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방금 제 말이 맞는 말이라면, 왕이 필요 없이 깔끔하게 투명하게 하나님 바라보면서 살아가면 되지 않겠느냐, 이게 정상이 아니냐고 할 때 이 하나님이 바로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 생각할 때 떠오르는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진짜 하나님은 하나님을 뜯어낼 때 뜯겨져 나가야 비로소 처음으로 얼굴을 내미는 공개하는 그 하나님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뒤에 진짜 하나님이 숨어있고 인간들은 진짜 하나님은 생전 생각도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 충성하고 사랑하겠다는 그 하나님을 순수하게 관계 맺음으로 자기 백성들이 순결하고 거룩하다는 이러한 오인, 착각을 자꾸 유발하게 만들어요.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이제부터 어려워요. 선지자가 백성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왕 때문에 문제가 일어났을 때 가만있다가 튀어나와서, “왕이시여,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언약에 어긋납니다.”라고 지적 질하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백성들 입장에서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어요. “선지자, 네가 해라.” 간섭하는 게 얼마나 재밌어요. 두 번째, “왕 나서기 전에 네가 사전에 예방하지.” 꼭 뭔가 일이 벌어지면 와서 뒷북치듯이 지적 질하는 것.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하면, 왕과 백성이 결탁돼있기 때문에 그래요. 왕이 등장할 때 눈에 안 보이는 추상적인 하나님보다 차라리 가까이 있는 왕이 우리 아쉬운 것, 필요한 것, 우리의 소망을 영웅적인 희생정신으로 다 획득해서 우리에게 제공했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면 이상적인 왕이 솔로몬인데 다윗이나 솔로몬 때 백성들이 별로 한 게 없어요. 초반기 솔로몬과 하나님이 계약해서 잘했다는 것 때문에 넘치도록 축복을 받으니까 백성들은 제2의 솔로몬, 제2의 다윗만 고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왕들이 등장하면, 북쪽에선 여로보암 다음에 나답, 바아사 나오고 이쪽은 르호보암 다음에 아비암, 아사, 여호사밧으로 나오는데 나올 때마다 백성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선대에 잘 나갔던 것, 하나님의 기적으로 전쟁에 승리하게 되고 승리하게 되면 보너스가 주어지게 돼있어요.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데 성전이 풍성하다는 말은,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이 직접 전쟁을 해서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이 갖고 있는 그들의 노동의 결실물을 하나님이 빼앗아 와서 아무 노동도 하지 않은 백성들을 풍요로운 삶으로 보장해줬다는 축복의 결실에 대해서 백성들이 계속 기대하는 겁니다. 그런 왕이 좋았는데 그 왕이 또 나타나지 않을까? 다윗 같은 사람 어디 있느냐?

 

실제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생활비도 올리지 않고 비천한 가운데서도 어려운 사람 돌보는 그런 목사님 와서 그 동네에서 이런 목사 못 봤다고 해서 다른 교회 교인들까지 그 교회로 오고. 가만있어도 교인들이 오니까 처음에 교회 지을 때 목돈 냈던 장로들은 이젠 안 내도 되거든요. 십일조 안 해도 교회는 돌아간단 말이죠.

 

교회란 시설물 관리하는 것과 거기에 필요한 사람들 인건비 충당하는 것 아닙니까. 가만있어도 돈 안 내도 돌아가니까 교회가 잘 돌아가고 헌금이 나오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목사님이 바르게 목회하니까 주님이 축복해서 교회가 잘 돌아간다는 거예요. 솔직하게 이야기해야지요. 자기 돈 안 내도 된다는 생각은 감추고 엉뚱하게 딴 소리하는 겁니다.

 

제가 오늘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인생 살면서 거짓말 안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입만 떼면 거짓말해대는 관계가 부부관계거든요. 누가누가 거짓말하느냐. 기술이 늘었어, 이제는.

 

하나님께서 왕을 주신 이유를 알지요? 남을 희생을 이용할 요량만 하지 가만있어도 축복이란 이름으로 공짜 심보의 구체화가 하나님이에요. 내 공짜를 정당화시켜주는 하나님. 지가 뭘 잘했다고 이런 하나님을 찾습니까? 그런데 찾고 싶어요. 왜?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의 후손들이 살기가 너무 빡빡하고 힘드니까 고생 덜 하고 살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왕을 보내서 왕을 찾는 너희들이 왕이 주어질 때 왕 고생해서 우리가 덕 보자. 왕이 하나님과 좋은 관계 맺어서 백성은 덤으로 많은 혜택을 누리자는 사고방식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복을 원한다면 나는 복 받아 당연하고 마땅하다는 근거가 있어야 돼요.

 

이 땅에서 힘들지 않고 살아야 될 자는 바로 나다. 나 같은 인간은 고생 덜해야 되고 마땅히 행복해야 돼, 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터무니없는 망발이 성경에 그런 근거가 다 있어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 당신을 왜 그런 생각을 합니까? 몰라. 결국 무지죠. 남은 힘들어도 나는 행복해야 된다는 왜 그렇게 일방적인 주장을 하느냐? 몰라. 알 수도 없어.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 계속 추가적으로 왕을 줍니다. 왕을 주면서 왕이라는 죄를 악을 실어 나르는 그러한 지위, 위상을 이스라엘과 유다에 허락함으로 말미암아 죄의 개입이 어디로 찾아간다고 했습니까? 벌써 몇 분 지났다고 다 잊어버리고. 죄의 원천을 가게 만들지요. 왕을 찾을 때 뒤에 괜찮은 왕을 주실 것이라고 하나님, 그래서 백성들 왕을 찾고, 하나님, 다윗 같은 왕, 셋이 한 세트가 되어서 진짜 오신 왕과 하나님을 죽여 버린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왕과 백성, 인간은 떨어질 수가 없어요.

 

나는 무조건 행복해야 되고 나는 영생 얻고 천국 가야 된다는 그 욕망이 왕을 찾았고 나는 못하지만 나보다 능력 많으신 왕이 해낼 것이고, 그 능력이 어디서 오느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능력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왕 덕분에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 이게 유대교 아닙니까? 낮에도 그 이야기했습니다만 유대교가 모든 종교의 종합선물이에요. 모든 게 그 안에 다 들어있어요.

 

유대교의 기본 바탕은 바로 우리가 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뭘? 하나님의 축복을. 그런데 네가 뭔데 왜 복 받아야 돼?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몰라. 뭘 한 적 있어? 글쎄? 내가 왜 원할까? 이 사실을 인간이 왜 행복을 추구하고 원하느냐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기반성, 자기 분석을 계속해서 해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정신분석학이나 철학에서 계속에서 시도하고 있어요.

 

신학에서는 이걸 왜 안 하느냐 하면, 신학은 교회에 숫자 모으기 위해서 만든 게 신학이에요. 신학 역사가 그래요. 믿음 없는 사람 몇 문장 외우면 하나님의 성도로 봐주기 위해서 만든 게 삼위일체라는 거예요. 삼위일체 문장을 외우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게 전부 다 교회라는 그것을 정신적 통합체로 구성해서 사람들을 모아서 교회가 힘, 자체적인 권력을 얻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신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교회를 키울 것이냐 기여할 때 신학이 가치 있는 거예요.

 

미국의 어떤 신학자들은 동성애를 용납하라. 그런 신학을 펼쳤단 말이죠. 제가 그 사람의 신학을 십자가마을에 써놨습니다. [데리다를 읽는다, 바울을 생각한다]는 그 내용이에요. 로마서를 다시 해석해서 동성애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왜 캐나다의 신학자가 그렇게 주장하느냐 하면, 교회가 사회에서 자꾸 관심 밖에 있으니까 돈이 안 들어오는 거예요.

 

교회 할 일을 복지정책에서 다 하니까 교회도 한 소리해서 교회도 여러분한테 필요한 기관입니다. 사회단체입니다. 우리가 교회가 책임지고 사회를 위해서 빛과 소금이 될 테니까 협조해주시고 애들 좀 보내주세요. 우리는 언제든지 개방돼있고 열려있습니다. 기존신학은 너무 고리타분한데 우리는 깨쳤습니다. 그것으론 모르니까 종교는 살아야 된다고 자본주의사회에서 불교, 천주교가 손잡고 노래 부르면서 권력층, 틈새시장 노리면서 나라가 못하는 걸 교회가 담당해서 교회는 부동산 제공하고 나라에서 복지자금 타내서 목사도 생계 보장되고. 그렇게 하는 모든 것이 결국 교회는 진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교회는 무조건 살아남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그럼 제가 묻지요. 왜 살아남아야 되는 데요? 교회는 예수님의 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이 앞뒤가 바뀌었어요. 그리스도의 몸은 주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몸을 만드는 데 그걸 왜 인간이 만들어야 되느냐.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돼요. 고객이 원하니까 만든다고 하면 될 걸 뭐 유형교회도 있어야 되고 되도 않는 신학 이야기하지만 교회라 하는 것은 인간이 붙든다고 교회가 되는 게 아니고 그게 교회를 망쳐요.

 

예수님이 머리 되는데 머리도 아닌 게 왜 간섭해요. 그래서 신학은 탈락이에요. 진리와 아무 관계없어요. 교회 작아지면 진리 아니고 복음 아닌 줄 알고 있어요. 진리를 알기 위해서 기껏 노력하는 것이, 인간은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내가 왜 행복해야 되지? 행복 안 해도 되는데 왜 행복을 추구하지? 도대체 무슨 괴물이 들어서 나로 하여금 이렇게 더 살아야 되고 행복해야 되고 죽으면 안 되고, 어디서 나왔는지 연구하고 있어요.

 

그 연구하는 과학과 인공지능, 모든 철학들이 집결해서 제가 여기서 끝날 때까지 그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여기에 무작위로 01101100 이렇게 했습니다. 이건 내 마음대로에요. 자연 세계 자체가 무작위에요. 이건 제멋대로에요. 인간은 제멋대로 속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패턴을 끄집어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고양이 키우는 사람 0, 개 키우는 사람 1, 아무 것도 안 키우는 사람은 뛰어넘고 이렇게 보면 011, 역시 개 키우는 사람이 많으니까 이렇게 되겠지요. 001110110. 11 다음에 0이 나올 확률이 많아진다. 그래서 개 키우는 사람이 두 번 나올 때 고양이는 하나라고 패턴화 시킵니다. 질서화. 이런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지요. 이겁니다. 무작위한 가운데서 인간은 거기서 의미를 끄집어내는 데 나름대로 질서를 본인이 부여하는 거예요. 11 다음에 0이 나온다고 패턴화 시키고, 질서화 시킨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골프채 있는 사람 1, 없는 사람 0으로 하면 이것만 보는 게 아니고 좀 길게 보는 거예요. 골프채가 이런 패턴 하에 있는 사람이 하나씩 나온다면, 이 전체가 골프채가 나오기 위해서 이러한 절차, 여기선 골프채를 1로 했지만, 고양이 키우는 사람, 개 키우는 사람 합쳐서 좀 더 나가보니까 이 사람이 골프채를 갖고 있다면, 이 전체를 1로 간주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를 0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단순화에서 점점 더 복잡화로 층이 높아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직도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요.

 

세 번째 이야기는, 현재 전쟁 중에 있는 국가 1, 전쟁이 끝난 국가를 0이라 했을 때 이 패턴은 고양이 같이 단순하지 않고 골프채의 경우가 아니고 10011001 전체적인 상황 속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패턴화를 찾아내요.

 

그러면 집에 고양이 키운다고 자랑질하는 16세 소녀가 세상 보는 눈과 골프채가 우리나라 경제에 기여하는 바는, 라고 생각하는 40대 아저씨와 세상을 보는 범위가 누가 넓겠느냐? 40대 아저씨가 높겠지요. 어느 동네에 열네 살 애가 짬뽕이 좋아, 짜장면이 좋아, 비교하다가 16세에는 고양이 좋아, 개 좋아, 하다가 그들이 40대에는 골프채 있다, 없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지금 나이 60에 가까이 되어 이러다가 전쟁해야 돼. 우리도 핵 준비해야 돼. 홍준표. 언제까지 미국에 기대해선 안 돼. 북한도 했으니 우리도 사이좋게 준비해야 된다, 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 보기에 60된 홍준표란 사람의 시건머리가 14세의 짬뽕 좋아. 짜장면 싫어. 그것보단 더 깊어졌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럴 때 이 사람을 지도자로 뽑는 거예요. 세상의 추상화, 정신화 구조는 이렇습니다. 단순화에서 복잡화로 넘어가면서 추상화 되는 거예요.

 

마지막 네 번째 사례. 복음 있다 1, 복음 없다 0. 그러면 어떤 패턴을 해도 이 패턴은 부질없는 것이다 1, 그래도 살만큼은 살아야 되지 않는가 0. 이 패턴화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60대 은퇴한 사람들, 맨날 tv조선, jtbc 썰전. 40대는 맨날 요리, 윤식당, 알쓸신잡, 드라마 <황금빛 인생>나 보고 제발 좀 생각을 높이라고 하는데 나이 들면 다 똑같아. 인간이 지혜가 있다, 정신적으로 깊이가 있다, 혜안이 있다. 그것 다 부질없는 거예요. 왜? 이 세상은 무작위, 무의미하기 때문에.

 

과학자가 연구를 했어요. 인공지능을 새로 개발했다. 딥러닝(Deep Learning)이라 해서 병렬로 연산해서 학습을 반복하게 되면 스스로 깨우치는 게 있어요. 알파고 다음에 알파고제로가 나와서 인간 빼고 저희들끼리 바둑 두고 약점을 스스로 보완하면서 그런 식으로 인공지능이 발달하는데, 인공지능을 발명해봤자 이 패턴은 011 식으로 다른 것보다 좀 긴 것뿐이지 이게 뭐예요? 이게 복음입니까?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들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환경이 자기 전공분야가 있고 자기 일에 전문가라고 우기면 그 다음부터 그 선에서 패턴이 중지가 돼버려요. “목사님, 복음 필요 없습니다. 농사, 소 키우는 데 전문가입니다.” 소가 천국보다 ……. 나는 복음에 대해서 죄인인 것을 받아들이겠는 데 소 키우는 것까지 죄인이라면 못 참습니다. 소 키우는 게 어디서 나왔는데?

 

지난 수요일에 야곱이 양 키우고 염소 키우는 이야기했지요. 야곱이 멘델의 법칙을 이용했습니까? 야곱이 양 키우는 전문가라고 우기는 순간, 그 야곱은 떨어져 나가야 돼요. 우리가 인생이 뭐냐? 성경이 뭐냐? 해도 우리는 이 패턴, 질서 이 범위 안에서 못 빠져 나왔습니다. 결국 이걸 통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내가 정당하다는 거예요. 내가 하는 일까지 죄라고 몰아세우지 마세요.

 

여기에 목회까지 포함시키면 아파트 단지 몇 바퀴 돌아서 교인 몇 명이 오느냐? 자기가 목회자니까 자기 질서화를 유지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하늘나라를 확장시키고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 그런 짓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하는 그 일, 그 패턴화는 죄 아닙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가 40명 있는데 옆에는 5천 명 교회가 있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객기 부리면서 나는 하나도 안 부럽다. 40명 유지될 때는 안 부러워요. 소박하게 보내면 됩니다. 그런데 열 명이 옆 교회로 갔거든요. 그래도 안 부러워요? 이 사람에겐 큰 교회 목사가 왕이에요. 그리고 그 목사 되에는 하나님이 실재한다고 보는 겁니다. 나-백성-하나님, 셋이 한 세트로 돼있어요. 왜 나는 5천 명 못 됐느냐? 저는 묻습니다. 네가 뭔데 돼야 되는데? 백날 해도 할 말 없습니다.

 

열왕기를 보게 되면 내가 추상화나 패턴의 다양성, 남보다 시건있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을 점점 늘어봤자 복음 앞에선 이게 죄의 개입은 죄의 원천을 찾아가요. 죄의 원천이 뭐냐 하면, 죄라는 것은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께 왜 버림받아야 되는 것을 인간이 죽어도 몰라요. 오직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버림받는 그 현장이 유일하게 죄가 죄답게, 저주가 저주답게 드러나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아니 구원이 되려면 본인이 누군지 알아야 구원되지.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구원만 외치고 있어요. 고기 잡는 사람이 고기가 잘 안 잡히니까 교회 가서 기도했다. “고기 잡히게 해주시옵소서. 베드로는 봐주면서 저한테는 왜 안 해줍니까?” 베드로한테 오른편에 그물 던지게 해서 고기 잡게 한 결과가 뭐였습니까? 자기한테 고기 잡게 해주신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잖아요. 고기 잡는 혜택 없이도 얼마든지 그게 가능한 거예요. 복잡하게 고기까지 주면서 할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베드로가 그 정도 아닙니다. 물 위를 걸었어요. 장모의 병이 나았습니다. 혜택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귀신을 쫓아냈고 오병이어 기적에 동참했고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그렇게 해줘도 결국은 뭐냐 하면, 단절. 패턴화 시키는 이쪽 세계와 복음의 세계는 건너갈 수 없습니다. 도저히 뛰어가려야 뛰어갈 수가 없게 돼있어요.

 

그러면 패턴화하면 할수록 자신의 지식이 점점 늘어나고 그만큼 세상에 대해서 보다 정밀해졌고 정확하게 안다고 우기는 이 모든 것은 죄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주님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네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인간 세계에서는 무수한 변화는 변수를 많이 모집해서 변수를 보다 더 확률 높게 유지하려고 해요. 그래야 실수가 없을 거니까. 그런데 이 변수를 어느 세월에 다 끌어 모습니까? 몇 살 살아야 변수가 다 나옵니까? 철저에 철저를 기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변수를 다 고려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변수로 보다 진리에 가깝게 하겠다는 이 말은 무슨 심보를 드러내느냐 하면, 단절돼있는 복음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본인이 확보한 정보와 지식으로 뛰어넘으려고 하는 거예요. 여기가 자기가 다리를 놓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기도해서 병 나았다. 어떤 종류의 병이냐? 류마티스 정도? 감기? 독감은 손 못 댈 거예요. 그냥 미열 정도. 그것은 기도해서 낫겠다는 거예요. 그것은 나도 판콜 한 병 먹으면 다 나아. 계속해서 병이 생기는데 그 병을 낫기 위해서 감기는 성경 두 장 읽고 기도 30분했는데 독감은 두 장으로 안 돼요. 일곱 장으로 늘여야 되고 기도는 한 시간해야 된다고 처방전을 내립니다.

 

처방전을 신부나 목사가 내리도록 환자가 그 입만 쳐다보고 있다니까요. 서로 협상이 돼있다니까요. 무당이 그냥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거든요. 고객들이 무당 짓하기를 부추겨요. 무당질 못하겠다면 내가 알아서 지킬 테니까 머리 위에 손 얹어주세요. 그래야 기분이 좋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다음에 병이 나았잖아요. 그러면 목사님 안수 때문에 병이 나았다고 하면 그 다음에 그것이 홍보의 재료가 되는 겁니다. 한 마디로 전부 다 개판입니다.

 

이제 슬슬 본론에 접근해갑니다. 열왕기상, 열왕기하란 옛날 기록이 왜 있느냐? 열왕기상하를 다 읽어보면 왕들의 특징이 나와요. 거기에 대해서 선지자의 특징이 뭐냐? 여기 앞에 붙여야 되지요. (참)선지자. 엘리야 시대에는 선지 생도가 많아졌어요. 그래서 뒤에 엘리사 시대 때는 선지자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것이 나라가 망하니까 예레미야 때는 가짜 선지자가 되는 겁니다. 월급쟁이 선지자 되는 거죠.

 

참선지자는 점선인데 죽으면 죽으리라. 만약에 살고자 한 선지자라면, 길 가는 짐승이 물어 죽였어요. 여로보암이 벧엘에서 금송아지를 섬겼는데 어떤 하나님이 선지자가 남쪽에서 올라가서 여로보암 앞에 가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당신은 거짓 제단을 만들었기 때문에 나중에 남쪽에 요시야란 왕이 나오는데 삼백 년 후입니다. 그 왕이 이 제단에서 이미 죽었던 사람의 재는 다 뒤집어지고 이런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죽여 버린다고 할 때 네가 건방지구나 하고 저 놈 잡아라 손 내미는 순간 석고상처럼 굳어졌어요. 다시 오므려들지 않는 거예요. 기도해 달라 해서 기도해주니까 풀렸어요.

 

풀리니까 여로보암이, 당신은 참선지자다. 당신을 위해서 우리가 많은 재산을 주겠다고 했어요. 여로보암이 왕인데 하나님을 찾아요. 왜 찾습니까? 자기의 왕 지위를 내려놓기 위해서 찾습니까? 아니면 왕의 지위가 계속해서 강화되고 사람들의 존경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아요? 존경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지요. 이게 바로 죄인 거예요. 왕이 됨으로써 비로소 새롭게 등장한 죄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확보된 내 권력 자리는 나는 포기 못한다. 신이시여, 내 자리를 내 것을 지켜주시고 확장시켜주시옵소서. 좋은 선지자 만났으니까 내가 드릴 것 드리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선지자가 이름도 안 나왔어요. 절대로 오던 길로 가지 말고 다른 길로 빠지라고 지시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왕과 대비되는 것은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은 유다, 남쪽에 있어요. 남쪽에 있는 성전은 북쪽의 어떤 나라도 이걸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성전은 그냥 건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북쪽은 성전을 대체해서 인간 권력자가 성전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벧엘과 단에 세운 성전은 남쪽 성전을 모방해서 여로보암이 만들었는데 만든 이유가 남쪽 성전을 찾아가지 말라고 한 거예요. 북쪽의 모든 왕의 속성은 남쪽 성전의 취지를 거부하는 속성으로 그들은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북쪽 나라를 떼어 준 겁니다. 그리고 일반 백성은 그 취지를 전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까지 왕의 혜택을 입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열왕기상에 있는 이야기거든요. 성전 중심에서 남쪽에서 하나님 사람, 선지자를 지적하기 위해서 왕에게 보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가 왕은 피했지만 북쪽의 늙은 선지자가 거짓말로 “나도 선지자인데 천사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한테 대접을 받으세요.” 북쪽에서 어떤 대접도 받지 말란 말이죠. 이건 성전 유지에 어떤 타협의 여지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대접을 받았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자가 와서 물어 죽였어요. 잡아먹지는 않았어요.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단 말이죠. 그냥 죽여 버린 겁니다. 그럼 이 선지자는 성전의 위치에서 죽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선지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야기한 성전이 없는 이쪽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세상이다. 이것을 열왕기에서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선지자는 어떠한 자기 권력을 얻고자 하지 않아요. 그리고 나라에 대해서 기여하지도 않아요. 그냥 백성들과 왕과 한 통속이 되어 잘 되고자 할 때 하나님이 숨겨놓은 언약의 법칙을 들이대서 이러니까 죄지, 이러니까 저주받아 마땅하지 그 말만 하고 사라져요. 그래서 죽어도 살려주세요, 없어요. 왜냐하면 성전 안에 있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지시를 받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아요.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죽자, 에요. 살고자 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육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약에 여러분이 죽었다고 친다면 여러분들은 제2, 제3의 선지자로서 유유자적하며 여러분 하는 일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10분 쉬어야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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