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080314고후7장‘인간 선악과 예수님 선악의 차이’ / 이근호 목사
고린도전서 11장32절을 먼저 한번 봅시다. 오늘 고린도후서 7장합니다만, 고린도후서 7장 들어가기 전에 고린도전서 11장32절부터 한번 보겠습니다.『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라고 돼있는데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며는,「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래 돼있죠?
제가 그림으로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11장32절 말씀을 그림으로 한번 그리면, ‘동그라미=세상’입니다. 세상인데 고린도전서11장32절에 의하면 「우리가 세상과 더불어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하심이라.」그러니까, 이미 이 세상은 죄 정죄함을 받아서 끝장이 났다는 얘기죠. 고린도전서11장 이야기가. 사도바울이 얘기했는데 제가 대신하면 이렇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주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과 더불어 죄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기위해서 특별히 너희에게만 징계를 주신다 이 말이거든요.
이 말은 그러면 뭐냐면, 이 세상은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죄 정죄함을 이미 ‘죄 정죄’ 받는 것은 기정사실화된 거예요. 이건. 마치 침몰하는 배와 같아가지고 세상은 이미 죄 정죄함을 받습니다. 받는데 우리는 세상과 더불어서 침몰되지 않게 하기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한다? 따로 관리한다. 관리를 따로 하시는 겁니다. 이걸 범위를 조금 더 넓혀서 보면, 성경에 보면 전 세상은 누구 손에 있다했습니까? 전 세상은 예수님 손에 있죠. 「모든 만물은 예수님을 위하여 골1:16」만들어졌다 했으니까.
세상 모든 만물을 만들었으면, -제가 질문해보겠습니다.- 사람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죠? 그런데 하나님이 만든 사람을 왜 지옥 보내십니까? 하나님이 사람 만들었으면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 맞잖아요.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인간은 신의 소생’ 아닙니까? 인간은 신의 소생이라고요. 신의 소생인데 자기가 만들어 놓은 인간을 왜 지옥 보내는 거죠? 내가 만든 인간을 왜 지옥 보냅니까? 그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자식 낳고 자식을 죽입니까? 안 그렇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어놓고, 지옥을 만들어 영원토록, 그것도 한 십 년 이십 년 고생하는 게 아니라 한번 들어갔다 하면 영원히 못 빠져나오는 영원한 지옥에다 보내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만들었다고 해서 만든 사람 편에서 생각을 안 해요. 만들어놓은 예수님 자신의 속성. 속성을 증거하기 위해서 두 개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속성 하나는 뭐냐 하며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정의로움)’ 또 하나는 ‘자비로움’ 예수님의 속성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 이렇게 무섭다는 걸 보여주고, 하나는 자비롭다는 걸 보여줘요. 하나님의 공의로움, 이거는 진노하심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자비로움,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심. 두 가지 속성이죠. 두 가지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는 진노를 보여주기 위해서 진노를 받을 사람을 따로 만들고, 한쪽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위해서 따로 만든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11장9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 말들을 나눈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사람 위주가 아니라 예수님은 이러이러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온 우주에 펼치기 위해서 사람을 만들어놓은 겁니다. ‘나는 이런 성질이 있다’는 것.… 그런데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안 믿는 사람은 이렇게 반박을 하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어놨으면 다 자비롭고, 다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놓으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좋은데 왜 하나님께서는 얄궂게도 공의를 따로 만들어놨는가? 참 기분 나쁜 이야기다. 하나님이 깡패도 아니고 말이죠. 조폭도 아니고…아무리 창조자지만 이렇게 만들었는가? 하는 불만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걸 좀 더 자세히 보면, 로마서 1장에 나오는데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있습니다. A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B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A에 속한 사람이나 B에 속한 사람이나 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햇빛도 주시고 공기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잠잘 때도 심장 뛰게 해주시고, 대자연 모든 것을 다 만드셨지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얘기해요. 사람이 글씨를 써도 내가 쓴다고 건방진 소리 하지 마라, 이 말이죠. 왜? 글씨를 쓸 때 근육이 들어가잖아요. 근육이라는 힘은 지방질과 단백질로 돼있어요. 그러면 세포에 에너지는 누가 준 겁니까? 하나님이 주신 거잖아요. 내가 글씨를 써도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글씨를 못 쓰는 거예요. 몸이 배탈나보세요. 아무것도 못합니다. 화장실 왔다 갔다 해야 되요.
그래서 그 철학자는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지만, 우리의 몸통 전체에 온 우주가 다 들어있다 했습니다. 온 우주가 다 관여하고 있어요. 숨 쉬는 이 폐에도 우주가 들어갔다 나갔다가.… 우주가 들어왔다 탄산가스 되어 나갔다가 … 우주가 교합하고 있고 우주와 다 관련되어 있다 말이죠. 내가 생각하면 안 돼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건강과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선인이나 악인이나 관계없이, -이 말씀 참 좋아하는데 - 하나님은 나쁜 일 했다고 벌주고 좋은 일 했다고 상주는 게 아니고 나쁜 일 하는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전부 다 관계없이 하나님 은총을 입고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해도. 교도소의 콩밥 먹으면 몸에 좋대요. -드라마에도 그런 이야기 나오죠?- 교도소 콩밥은 몸에 좋답니다. ‘누구세요?’ 라는 드라마에…
죄 짓고 교도소에 가도 그 콩밥을 줘도 감사기도 하고 먹어야 된다 말이죠.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이 나쁜 짓을 해도 이웃이 있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는 겁니다. 사람이 혼자 살면 아무리 돈 많고 기타치고 노래해도 들어주는 사람 없으면요, 기분 대게 나빠요. 선생님들 가운데 색소폰 잘 부는 사람 있죠? 그분이 만약에 색소폰 부는 그 가치를 알아준다면 여기 근무 않고 많은 군중들 앞에 설 거예요. 자신을 계속 불러주면. 왜? ‘나 여기 있다’고 자기의미와 가지의 가치를 마음껏 알아주는 사람이 있잖아요.
여기 있는 우리 학생들, 보람이 뭐겠어요? “학생들! 보람이 뭐여요?” 세상에 나가서 딴 보람이 아니고 나는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남들이 알아주는 것. 남들이 알아주는 게 가치 아닙니까. 잘했다, 훌륭하다, 대단하다, 무슨 재주가 그런 재주가 다 있냐, 똑똑도 해라, 착하기도 해라, 이 모임에서 너 빠지면 일이 안 되더라, 우리 모두가 널 필요로 해, 하나님께서 널 가치 있게 만들었어, 지금 그걸 목적으로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그 이웃을 누가 붙여줬습니까? 또 하나님이 붙여줬다고요!
사람이 부부싸움을 해도 살아 있기 때문에 싸우지 한 쪽이 죽어버리면 싸울 대상도 없습니다. 그렇잖습니까? 있을 때 많이 싸워라.(좌중폭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즐거운 나의 장기를 발휘할 때 박수쳐줄 사람이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은총이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인데… 한참 사랑을 받아놨는데 A라는 사람은 이걸 가지고 뭐냐, 전부 다 자기 공로로 돌린다 말입니다.
‘내가 애썼다’ ‘내가 훌륭했다’ ‘내가 힘들었다’ ‘내가 공부 열심히 했다’ 전부 다 하나님께 영화롭게 하지 않고, 전부 다 누구 공로로 돌립니까? 자기 잘나서. 내가 잘나서. 내가 훌륭해서. 전부 다 자기가 뛰어나서 그렇다고 자기 공로로 가져와버립니다. 주는 건 하나님이 다 주셨는데 그 영광은 누가 몽땅 가져가고요? 본인이 몽땅 가져가는 거예요. 이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들이 죄를 짓고 난 뒤에 첫 번째 나온, 죄 지은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 거론하지만 사실은 그건 핑계고, 하나님 거론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을 거론하니깐 나에게 이런 보너스를 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마지막 종착점에서는 누굴 사랑해요? 하나님 사랑한 척하지만 역시, 나는 마지막으로 나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장25-27에서 예수님께서 이랬습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해도 내가 보기엔 너희 영광밖에 모른다」교회도 마찬가지고. 옆에 교회 교인 숫자 많고 우리교회 교인 적으면 화나죠. 왜 화납니까? 옆의 교회는 내가 소속돼 있지 않으니까! 이쪽 교회는 내가 소속돼 있으니까.
이유 없이 내가 소속된 교회에 교인 숫자가 많아야 기분 좋아요. 그러니 결국 이것은 뭐냐, 말은 않지만 결국 가만히 따지고 보면, 세상 모두가 ‘나 좋으라고 있어야 되’ 라는 식으로 하나님께 대드는 자세로 교회도 다니고 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거는 주기도문과 달라요. 주기도문 할 때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내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서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자기 공로로 돌리니까 여기선 뭐가 성립됩니까? 예수님께서는 뭐가 발동되죠? 하나님의 진노죠. 하나님이 주신 것을 예수님께 돌리지 아니하고 자기 것으로 삼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쪽에 있는 A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께 갈 은총을 가로채 가지고 자기 공로로 돌아오게 하는 이런 현상을 보여줄 때, 이것은 너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을 본때를 보여줍니다. 너의 주인은 네가 아니고, 너의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너의 주인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는데 하나님의 진노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자, 그런 반면에 B라는 사람은 -이건 문제가 좀 어렵죠.-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것으로 돌립니까 아니면 주님께로 돌립니까? 그러니까 지옥 갈 사람이나 천국 갈 사람이나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보통 상식으로는 어떻게 됩니까? 상식으로는 지옥 갈 사람은 지옥 갈 짓을 했기 때문에 가고,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전부 다 자기 이익을 위해 채웠기 때문에 이건 매 맞아도 싸다 하고, 천당 가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대로 천당 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거 오산입니다.
어떤 누구도 최종적으로 자기 것을 놓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이 두 가지, A, B 두 가지 타입의 모든 사람은 전부 다 아담의 반복입니다. 아담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물려받은 게 아담의 속성을 물려받았어요. 천당 가거나 지옥 가는 사람의 차이는? ‘없습니다!’ 전부 다 자기만 챙기면서. 죽을 때까지 자기만 챙기면서, 나이 90되어도 자기밖에 몰라요.
어떤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자기는 지금까지 얘기하면서 성화론 얘기 해본적도 없고 성화론 믿지도 않는대요. 왜냐면, 목사들끼리 축구를 해도 그냥 축구할 때는 몰라도 돈 걸었다 하면 부정은 연발이고, 태클에다가 돈 걸었다 하면 죽을판 살판 한답니다. 그러니 아무리 대단한 목사라도 ‘돈’ 돈이 결국 누구됩니까? 나에게 돈 없다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예수가아니라 십 년 이십 년 믿어도 소용없고 사람은 돈에 꺼뻑 엎어지더라. 그런데 무슨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예수 사십 년 오십 년 믿어도 그게 어떻게 인간 됐다고 할 수 있느냐. 어느 인간이라도 나이 구십 백 살 되어도 인간 되는 사람 없어요.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차이가 없으면 어떻게 천국 가느냐! 이게 바로 복음이 얘기해줍니다. 복음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거예요. 자신의 죄를, 우리의 죄를 우리의 죄로 돌리지 아니하시고, 자기가 친히 감당하셔서 예수님의 죽으심, 그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 보시기에 이쪽 B 타입을 몽땅 가져가시는 그 방식에 의해서, 그러한 반복에 의해서 이 사람은 예수님의 피로 천국을 가는 겁니다.
이 B라는 사람이 천국 갈 때, 이 사람이 천국 가면서 누구를 인정하느냐 하면, ‘나는 죄인입니다’를 언제 알아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내 죄 때문에 돌아가신 분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인 걸 알잖아요. B라는 타입은. 그런데 A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죄라는 것을 알 수가 없죠. 왜냐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모든 예수 잘 믿는 사람이나 목사나 장로나 전부 다 자기와 똑같이 살아가니까.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데 어떻게 자기만의 죄가 될 수 있어요?
길에 사람들 많잖아요. 보세요. 살아가는 게 뭡니까. 돈 때문에 살아가는 거 아닙니까! 돈 벌 수 있는 기술 배우려고 공부하는 것 아니에요?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살아가는데 어떻게 나만 죄인이다? 이거는 성립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 죄를 몰라요. 그런데 이 사람은 죄를 몰랐을 뻔 했었는데, 성령이 오고난 뒤에 보니까 이 죄를 대신 가져가시는 분 앞에 볼 때에, 그리고 그분이 그냥 가져가시는 것이 아니고 내 대신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죽었다 이 말이죠. 죽은 걸 통해서 나는 사람 앞에서는 죄인 아니지만 누구 앞에서는 죄인이다? 나는 예수님 앞에서는 죄인 맞구나! 내가 저렇게 늘어져서 흘려야 할 피를 주께서 대신 피를 흘려 그 피만 보면 자기가 죄를느끼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 보세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뭐가 들어가야 되냐 하면, 반드시 죄가 들어가야 되고 그 다음에 용서가 들어갈 때 구원이 되는 겁니다. 구원= 죄 +용서예요. 그런데 오다보니까 어떤 불교신자가 기차 안에서 경전을 보고 있어요. 불교 경전을. 보세요, 불교 경전을 보면 불교신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불교 구원은 뭐냐 하면, 내가 경전 봐가지고 결국 공로는 누구한테 갑니까. 나를 돋보이게 하죠.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죄를 통해서 모든 공로가 용서하신 분에게 돌아가죠? 나에게 안 돌아오잖아요. 왜? 자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뭘 챙깁니까. 죄인이. 90까지 죄밖에 안 짓는데. 개과천선한다고 인간되는 거 아니에요. 2008년도나 2009년도나 예수님의 용서 때문에 구원되잖아요. 그런데 불교 신자는 열심히 경전 읽고 절에 가서 빌어도 ‘천상천하유아독존’ 내가 더욱 더 훌륭한 뭐가 되기 위해서? 더욱 더 훌륭한 의인되기 위해서. 전에는 죄인이었는데 도 닦고 난 뒤에는 아주 훌륭한,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완벽에 가까운 개미도 안 밟고 돌아서 가는 그 정도로 생명을 사랑하는 완전한 자아를 자랑한다고요. 그것 때문에 경전 본다고요.
우리가 성경 보는 건 뭡니까, 우리가 돈 번다고 바쁘다 보니까 누구를 잊어버렸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자기 살려고 희생도 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보고 말씀을 보면서 내가 열심히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고 내 배후에 예수님께서 팍팍 도와주시니까 살아가는구나, 예수님께 공로 돌리기 위해서 보잖아요. 기독교 신자는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리고, 불교신자나 세상 사람들은 ‘경전을 보니까 역시 내가 전에는 나쁜 짓 했는데 지금은 인간 됐구나’ 라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한번 봅시다. 강의 첨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여기까지는 여러분 다 아시는 건데, 여기서 좀 어려운 게 있어요. 햄버거에도 특대 햄버거가 있고 보통 햄버거가 있지요? 지옥 가는 사람은 몇 층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이 있고, 은총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았으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오는 이층이죠? 그러면 B라는 사람은 몇 층입니까? 삼층, 특대햄버거. 이거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아, 한 층이 더 있구나.’ 제가 다시 한 번 당부합니다. 결코 우리가 예수 믿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에요. 죄인으로 계속 남아야 되요. 구원=죄+용서죠? 이걸 빠뜨리면 안 되요, 인간이 갑자기 의인되면 곤란합니다.
갑자기 의인돼가지고 자기 잘났다 해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예수 귀로 안 들어와요. 계속 죄인이에요. 그런데 그 죄인은 뭐냐, 세상 사람들과 나쁜 일 해서 죄인이 아니고 아담의 속성을 물려받아가지고 항상 내 위주로 살아간다는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같잖은 짓이냐,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뭘 해도 나밖에 모르는.… 그런데 이미 그걸 주께서 용서하셨다 그 말입니다. 이 공식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거는 안다 하시고, 그 다음부터 어려운 게 있어요. 오늘의 강의 고린도후서 7장 한법 봅시다.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반발하는 사람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교회에서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구제하고 다른 사람 돕고, 성실하게 심방하고, 착해 보이는 이 모든 주님의 뜻으로 보이는 그런 일들은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이래 생각할 수 있거든요? 고린도후서 7장을 봅시다. 제가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우리가 평생토록 죄인 된다면 교회에서 하는 예배 찬송 헌금 이런 게 할 필요도 없고 하지 말라는 말이고 해도 소용없다는 말인가,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있거든요? 성경공부도 하지 말고 전도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하는 수가 있거든요?
그 점에 대해서 7장1절: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이래 돼있거든요. 여기 이 대목에 있어서 몇 가지 우리가 알아야 될 게 뭐가 있느냐 면, 현재 우리 몸이 누구 것이냐가 정립해야 되요. 내 몸이 내 것이라면 내가 정립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이미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주어서 예수님이 만드신 거죠. 우리 것이 아니다 말이죠.
제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학생이 자기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와가지고 “얘야, 청소해라!” “옷 잘 걸어놓고 책 치우고 청소해!” 평소엔 안 그랬는데 갑자기 엄마가 잔소리하니까 기분 대게 나쁜 거예요. “엄마! 이건 내 방이야, 내 방인데 엄마가 왜 잔소리해?” 엄마가 하는 말이 “곧 손님이 온다. 내 친구, 동창회 해” 친구들 오기 때문에 빨리 치우라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소리 들은 아들은 굉장히 기분이 나쁜 거예요. 자기 방에 가구배치라든가 옷 걸어놓은 이런 거는 어디까지나 내꺼, 나의 것이라 여겼다 말이죠. 나의 것인데, 엄마 방은 따로 있어요. 그런데 내 방에 들어와서 엄마가 그런 소리 하니까 “이건 내 방이야 엄마” 할 수밖에 없는 거죠.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어이, 방 청소해라” 하니까 이 소리 듣고 우리가 기분이 나빠지는 거예요. 왜냐면, 지금까지 나라는 인간은 누가 관리했냐면 내가 관리했다고. 나는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면 주께서 복 주실 거야, 항상 관리는 내가 했는데 난데없이 주님께서 “어이, 방 청소해!” 라고 한다면 그때 후다닥 어떤 생각이 들었냐 하면, 나의 몸이 내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여기서부터 어려워요.
너무 어렵기 때문에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제 방이 있고 책상이 있어요. 옷걸이를 남쪽에 두고 싶었다 합시다. 남쪽에 두고 싶었는데 액자는 여기 걸고. 이것이 나 보기에는 아름다운 거예요. 아름답다 말이죠. ‘야~ 내 방은 내가 꾸며야 돼, 벽지도 내가 하고 아름다우면 되,’ 엄마가 와서 하는 말이 “여기 벽걸이 북쪽으로 치우고 액자는 동쪽으로 걸고 벽지도 뜯고 새로 해!” 라고 한다면 무엇이 바뀌어져야 해요? 무엇이.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그 선과 악의 개념이 주님의 것이 될 때는, 이 선과 악의 개념이 어떻게 되요? 박살나야 되겠죠. 이게 어려워요. 이게 어렵다고요. 보통 이 말씀보고 하는 말이 ‘예, 이 몸은 주님의 성전이니까 착하게 산다.’ 이러거든요. 착하게 산다는 그것! 그것 뜯어고쳐야 됩니다! 내(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에서의 착한 것과 주님께서 보시기에 착한 것의 착한 게 달라요! 완전히 다르다고요! 어떻게 다르냐를 설명을 해야 본문이 풀립니다.
예수님 보실 때의 선과 악과 내가 생각한 선과 악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고 뭐라 했냐면,「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했거든요. 그러면 바리새인 천국 갔습니까? 마태복음23장에 보면 바리새인보고 뭐라 하냐면 너희는 ‘뱀의 자식’이라는 소리도 안 했습니다. 뱀이 새끼라 했습니다. 이 뱀의 새끼들아(마23:33) -애들 있어서 말조심을…-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지옥을 갈 수밖에 없다 그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최고의 경지가 윤리도덕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뭐라 한 줄 알아요? 「나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율법에 의해서 흠이 없다」했습니다. 흠이 없다했는데 디모데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뭐라 합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딤전1:15」도대체! 사도바울이 뭐가 부족해서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죄인 중에 괴수 됐냐 말이죠.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내 집은, 내 몸은, 내 몸뚱아리도 내가 알아서 천국 보낸다는 나로 성립된 선과 악은 정작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과 악이 정반대였어요. 정반대로 되어 있어요. 그걸 배우셔야 되요. 아셔야 되요.
바리새인들이 이랬습니다. 간음하지 말랬으니까 간음 안해야지,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은 것도 뭐라? 마음속에 음욕을 왜 품느냐 말이죠! 품고 싶어서 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고, 속에서 기어 올라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게 한다고 그랬죠. 밑바닥이 없어요! 인간은 바닥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생각하기를, 자기가 밑바닥을 그어가지고 선한 것은 집어넣고 악한 것은 뺀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밑바닥이 없어가지고, 음욕과 탐욕과 시기와 질투와 모든 것이 솟구쳐 올라와요!! 화산처럼! 마그마처럼! 올라온다고요! 목사는 안 그러는 줄 압니까? 같은 목회하는데, 저쪽은 그랜저 타고 다니는데 -요즘엔 그랜저 차도 아니지만- 이쪽, 자기는 티코타고 다니면요 부끄러워서 오래 못갑니다. 부끄러워서. 그게 뭡니까! 왜 하나님께서 개척교회 목사 앞에 그랜저 타는 동료목사를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 저 티코 탑니다. 예수님처럼 낮게 삽니다. 주님 저 착하죠?” 라고 자기는 착하다고 여기는데 갑자기 그랜저 타는 사람이 등장하니까 갑자기 속에서, 구멍에서 뭐가 올라옵니까!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올라오죠! 저 인간은 신학교 다닐 때 공부도 못했는데 그랜저 타고, 나는 공부도 일등 했는데 티코를 타다니… 시기와 질투와 미움은 무슨 열매다? 갈라디아서 보면 육신의 열매죠. 이런 자는 하늘나라 유업을 받을 수 없다했는데 이게 구멍이요, 구멍이 뻥 뚫려가지고 여기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끌어 올라옵니다. 이걸 누가 막습니까! 못 막습니다! 못 막아요! 알뜰하게 산다고 애썼지만 백화점에 봄 신상품 걸려있는 거 보면요, 그거 보고는 못 참습니다. “참, 팔자가 더러워가지고 내가 남편 잘 만나서 저것 하나도 못 사입고! 이 나이에 만 날 잠바입고 …(좌중폭소대박울트라캡숑-녹취자) 내가 큐티를 얼마나 했으며, 내가 전도를 얼마나 했으며, 얼마나 봉사를 했는데! 봉사 값을 줘야지! 하나님 살아계시냐 말이죠. 나쁜 놈은 잘도 사는데… 나는 이렇게 반듯하게 사는데… 식탁도 하나 못 살 형편이라면 도대체 나는… 점점 더 하나님 없는 것 같아. 그런 생각 안 들겠습니까?
아까 구원은 뭐라고요? 구원=죄+용서 아직 멀었어요. 더 살아야 되요, 더 살아서 죄가 뭔지, 죄가 어디까지 죄인지 구경이 나 해봅시다. 떠올라온 죄까지. 예수님 말씀이 사람의 밖이 더러운 게 아니고 속에서 나오는 이것은 막을 재간이 없어요. 사람은 자기가 자꾸 칸막이 쳤다고 하는데 칸막이 없어요.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옵니다. 십계명 마지막 계명이 무슨 죄죠? 「탐내지 마라」에 탐내 지 않을 인간 누가 있어요? 어떤 부자 집 청년이 “저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잘 지켰나이다” 주님께서 기가차서, 자기가 돈을 탐내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모든 재산을 다 팔고 빈 털털이로 나 따라 오너라 하니까 안 가잖아요.
이 지의 칸막이를 우리가 만들지 마세요.-이거 중요합니다.- 만들지 마세요. 또 만들어도 소용없어요. 어차피 이거 죽을 때까지 같이 갑니다. 처음 회사 입사하면 “시킨 대로 하겠습니다! 예! 밤늦게까지 일 하겠습니다! 예!” “월급 적어도 좋습니다!” 3년만 지나면 이마에 띠 두르고 대모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선과 악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생겼냐, 그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살잖아요? 처음에 인간이, 처음부터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떠나고 난 뒤에 대지, 토지죠? 토지로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이 뭘 뿜어내죠? 저주를 뿜어내죠. 저주를 뿜어내니까 그때부터 사람들의 관심사는 뭐냐, 생존이었습니다. 살아남으면 선이고 굶어죽으면 악이라, 머릿속에 이것이 꽉 들어있어요. 살기 위해서는 뭐가 되냐 하면, 혼자서는 못사니까 단합을 해야 되죠. 그래서 이 공동체, 협동을 하게 되었어요. 협동을 하게 될 때, 처음에 ‘살기 힘들다’ 그 다음에 ‘협동’ 하죠. 가인이 받은 벌이 뭐죠? 아, 재밌죠.
가인이 동생을 죽였죠. 그러면 가인은 사형 받았습니까? 아니죠! 가인이 받은 벌이 있었는데 뭐죠? 손목사님, 가인이 받은 벌이 뭡니까? 그러니까, 벌이 뭐냐면, ‘왕따’ 그게 벌 아닙니까? 넌 이제 어디를 가도 혼자다. ‘혼자다’ 그 소리 듣고 사정사정해서 하나님께서 왕따가 안 되게 하고 해코지 못하게 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은 뭘 겁냅니까? 혼자서는 못 사니까 협동해서 살아야 되는데, 여기서부터 죄가 어떻게 되냐면, 죄가 전염되잖아요. 전염.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이 계시는데 아이 셋 있는데 너무나 착실하고, 진짜 내가 보기에는 흠이 없어요. 우리교회 교인들 다 그렇습니다.(부끄 부끄) 다 그런데 특히 그 집사님은 보기에 흠이 없어요. 그런데 그 딸이 학교 가더니만 “엄마, 나는 휴대폰이 없어” 그 소리 듣고 충격 받았습니다.(ㅋ) 그래서 직장 때려치워버리고 치킨 집합니다. 왜냐면 돈 없으니 주의 말씀으로 소박하게 살려고 생각했었는데 애가 밖에 나가 “왜 나에겐 휴대폰이 없는 거야?” 휴대폰 없다고 짜증낼 때 하나님이고 예수고 간에 부모는 누구 말 듣습니까? 부모는...
예수 말 하나님 말 안 듣고 누구 말 듣습니까? 자식 말 듣습니다. 자식한테 이길 부모가 없어요. 다시 합니다. 휴대폰 사달라니 휴대폰 값을 벌기 위해서 직업까지 바꿔야 됐어요. 이제는 고상하게 살고 바르게 사는 그거 때려치우고, 그저 남들보다 뛰어나게 사는 건 욕심이지만 남들만큼 살기 위해서는 이제는 뭐, 주일성수고 나발이고 주일날도 문 열고 해야 되요. 이 죄라 하는 것은, 혼자 머리 깎고 도 닦는 게 죄가 아닙니다. 외부에서 날아오게 돼있어요.
우리나라 노숙자 평균 수입이 아프리카의 중류층보다 낫습니다.(ㅋㅋ-솔직하게 폭소하는 좌중) 그래도 자기는 가난하다는 거죠. 아프리카 가면 중산층인데. 죄라는 것은 아담의 속성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생존만 하도록 그렇게 부추기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천국과 지옥 설명하지 않고 뭘 설명합니까? 천국 가는 길을 설명하고 지옥 가는 길을 설명하죠. 사람들은 천국은 대게 좋아하지만 뭘 싫어합니까? 천국과 연결돼있는 길을 싫어해요. 사람들은 지옥은 싫어하는데 지옥으로 가는 길은 대게 좋아해요. 왜? 「지옥 가는 길은 넓고 편하여 찾는 이가 많으니라」.
‘집단범죄’죠? 집단범죄입니다. 이 집단범죄에 대해 설명하면 사람이 힘드니까 협동했죠? 협동하니까 질서가 생기잖아요. 질서가 생기기 위해서 법이 있잖아요. 법에 의해서 법을 체험한 사람. 그가 영웅이죠? 이 영웅을 뭐라 하냐면 이걸 ‘왕’이라 합니다. 우리 중에서 누가 젤 잘사느냐…교회에서 장로 뽑을 때 가난뱅이 뽑습니까? 아니죠. 누가 헌금을 많이 내느냐에 따라서 장로 뽑잖아요. 왜! 나도 저 사람처럼 잘 하면 뭐가 될 수 있다? 부자 될 수 있다! 부자 되면 죽음에서 멀어지고, 죽음에서 점점 멀어져요. 왜? 돈이 많으니까.
돈 많은 것이, 힘을 가진 것이 그 교회에 모범이 되는 거예요. 교회의 법이라 하는 것은, 그 교회 돈 가진 사람이 결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너희도 나처럼 하면 돈 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아이구~ 우리가 저 사람처럼 못했기 때문에 가난하게 되었구나,’ ‘저 사람 기도 몇 시간 하지? 한 시간 하는구나, 그럼 나도 한 시간 해야쥐’ ‘한 시간하면 부자될 수 있다’ ‘저 사람은 그럼 예배참석은 몇 시에 하지? ’ ‘열한시 예배인데 아침 열 시 반에 온다’ ‘나도 열시 반에 와야징~’ 그게 전부 다 뭐하냐 하면, 나도 저 사람처럼 생존에 유리하도록 행동하는 것, 그걸 선으로 본 겁니다.
아, 어려워요. 정리해 봅시다. 어려우면 정리하면 됩니다.(ㅋ) 자아가 생각했던 선은 무엇이냐, 내 생존에 유리한 것. 자아에게 선이 무엇이냐면 내 생존에 유리한 것이 선이 되는 겁니다. 자식들보고 ‘나쁜 친구 사귀지 마라,’ 나쁜 친구 사귀면 영어 한 단어 덜 보잖아요. 영어를 못 배우면 돈을 못 번다고. 돈을 못 벌면 생존에 불리하게 되니까 나쁜 친구 사귀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 엄마(?)는 아직도 꿈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어요. ‘얘야, 꿈자리 이상하다 조심하래이,’ 꿈자리 이상하니 조심하라가 뭡니까! 빨리 뒈진다 이 말입니다.(ㅋ) 조심하지 않으면 오늘 일진이 안 좋으니까 빨리 뒈진다 이 말입니다.
자기 생존에 유리한 것은 무조건 소원을 말하는 거예요. 자기 생존에 유리한 조건이 뭐냐면 예배와 기도와 헌금과 찬송이잖아요. 이게 어디 쌓입니까? 인간의 기억에 쌓이죠. 쌓이니까, 어떤 목사가 어떤 집사한테 욕하면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기도 열심히 참석해서 지금 내가 하나님 뜻에 의해서 생존했다. 내가 그렇게 생존했는데 목사 네가 뭔데 왜 나쁘다하냐, 지금 내가 생존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날 의롭게 봐가지고 생존했다는 거예요.
아까 공식이 뭐랬어요? 죄+용서가 구원인데, 갑자기 죄인이 뭐가 됐어요? 나는 예배 참석 헌금 이런 거 하기 때문에,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어서 살았다는 거예요. 이호순 있잖아요. 이호순한테 야구방망이 맞은 사람 있죠? 그 사람 왜 죽었습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께 죽을 죄가 있기 때문에 죽었다는 거예요. 죄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교도소에 간 사람은 나보다 죄가 더 있어서 죽었습니까? 망대가 넘어져서 18명 죽었습니다. 「주님, 저 사람들 무슨 죄로 죽었습니까?」그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죄가 있어서 죽은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죄가 있어서.
그 사람들 죽은 것은 하나님이 얼마든지 죽은 것이 하나님께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사람들 난데없이 죽었다 그랬습니다. 「너도 회개치 아니하면 그와 같이 망하리라」제발 이 공식 잊으면 안 됩니다. 갑자기 교회 다니니까 갑자기 죄인이 뭘로 변했습니까! 나는 착하다, 전도 두 명이나 했다, 나는 헌금도 많이 했다, 그러니까 나는 의인이니까 하나님 복 줘가지고 잘 먹고 잘 산다,(ㅋㅋ)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거는 사기입니다! 이거는 사기예요!
그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돈 많은 장로가 기름 부은 종이 되었구나, 왜 하나님께 착하게 했기 때문에 돈 주었을 것이고, 돈 주었으니까 교회서 높은 자리에 앉는구나! 그렇다면 나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뭘 벌어야 되요? 돈을 벌어야 사회에서 의인이다, 복 받았다, 영웅이란 소리 듣잖아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이 뭐란 줄 알아요? 「창기와 세리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 간다.」 이 사고방식 바뀌어야 되요. 바뀌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가 없기 때문에 살려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신 이유는 너보다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 하기 위해 살려둔 거예요. 용서의 출처를 증거 하라고 살려둔 겁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너희를 살려둔 것은 너희 형편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너 볼 거 없다는 거예요. ‘착해야 되는데…’ ‘착하지도 마라,’ 착하고 착하지 않고 신경 쓸 그런 대상이 안 됩니다. 우리 자체가. 사람의 모든 고민은 어디서 생기는지 알아요? 나를 들여다볼 때 생기는 거예요. 나를 쳐다보면 마귀의 시험에 빠진 거예요! 마귀의 시험에.
안 쳐다봐도 죄인이고 쳐다봐도 죄인인데 왜 쳐다봅니까, 그래! 제가 그랬잖아요. 이혼해도 교회 나오라했잖아요! 이혼해도 교회 나오라고… 남들 뒤에서 보니까 얼마나 수군수군 거리는지…‘성질 보니까 이혼할만해~’ 이런 소리 하더라도 ‘원래 그래, 원래 난 그런 인간이다’ 그런 생각해야 되지, 내가 그렇게 교회 충성을 했는데 나를 저렇게 모독하다니…나의 의인되는 자존심 상하잖아. 그러면 나도 삐져서 교회 안 나가, 그렇게 돼버리면 그 사람은 지금 자기는 예수님 용서로 구원 받았다고 해놓고 어디까지 갔냐면, 용서까지 안 받았어요. 자기는 구원이 뭐 되는 거라? 내가 완벽하게 의인이 되는 거라. 여기까지 멈췄기 때문에 의인 됐는데 라는 사고가 일어나가지고, 이혼한다든지 파산하면 이게 부끄러워서 교회 안 나옵니다. 이게 부끄러워서.
어떤 사람은 쌍카풀 수술했다고 부끄럽다고 교회 안 나옵니다. 다시합니다. 교회 나오는 것은, 헌금하는 것은, 구제하는 것은, 봉사하는 것은 왜 하느냐면 예수님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다고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돈 얼마나 귀합니까! 그 돈 내는 것은 돈 보다도 누가 더 귀하다? 돈 보다도, 내가 돈을 얼마나 가졌는가 보다도, 예수님 죽으심을 생각하며 헌금 내는 겁니다. 예수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이게 하나님 약속이에요. 왜 그러냐면, 우리 몸은 주님의 속성이 담겨있어야 되요. 나의 잘남이 담겨있는 동네가 아닙니다. 내 것이면 탁자 여기 놓고 옷걸이 여기 놓고 우리 맘대로 하겠어요. 그게 나의 명예심과 나의 자존심과 나의 우수함을 남한테 과시하기 때문에. 그러나 나의 삶을 과시해봐야 나의 증인밖에 안돼요. 예수의 증인이 아니다 말이죠.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뭐라고 돼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잘난 사람 누가 있으며, 부한 자가 누가 있으며, 훌륭한 사람 누가 있느냐 못나고 천하고 이런 사람을 주께서 택하사 하나님께서 거룩케 하셨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예수그리스도만 사랑하자」그렇게 돼있습니다. 자 좀 더 진도 나가 봅시다.
정리해봅니다. 자아가 생각하는 선이라는 것은 생존에 유리한 것. 자아가 생각하는 악은 뭡니까? 생존에 불리한 것. 꿈자리가 사납다든지 아침에 설거지할 때 접시를 탁 깼다든지 이런 것. 생존에 불리한 것, 생존에 유리한 것. 이런 것을 악이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전체가 악읻 되는 거예요. 왜 악이 되느냐 하며는, 하나님은 선악과를 왜 따먹었냐 이걸 따지는 거죠. 선악과 따먹은 속성은, 원래 우리 인간은 빈병입니다. 빈병 안에 뭐가 담겨야 되요.
생명나무는 먹되 선악과는 먹지 마라는 것이 담겨있을 때 인간입니다. 제가 지어낸 게 아니고 창세기 2장에 나와요.(ㅋㅋ) 빈 병에 뭐가 담겼습니까? 악마의 속성이 담겼죠. 뭐냐! “선악과 따먹어도 돼,” “왜?” “너는 신처럼 되는 거야,” 이 빈병에 갑자기 악마의 속성이 담겨있으니까 주님께서 그 빈병을 툭툭 털어내야 된다 말이죠. 줄줄줄 부어버려야 되요. 생존에 유리하면 선이고 생존에 불리하면 악이라는 선과 악이 담겨있는 이 자체가 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원래 자체로 되돌려야 되기 위해서 이 전체를 어떻게 합니까. 이 전체를. 죽여 버려야 되요. 이 전체를 죽여 버려요. 그렇다면 뭡니까? 하나님이 나를 죽여 버리면 나는 못살잖아요! 라는 노래가 나오죠. 내가 살아야 이게 선이다 이래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시는데 우리를 죽이시는 그 힘이 무슨 힘이냐면 우리를 살려내는 힘입니다. -아, 이 말도 어렵죠? -
예수님께서 우리를 죽이려고 찾아오지 않으면 우리가 살 수가 없어요. 쉽게 예를 들면, 어부가 낚시를 걸 때, 어부 말고 실험실의 생물학자들이 그물 가지고 바다 고기를 건질 때 고기는 ‘이제 나 죽었구나, 나 회쳐먹겠구나’ 이래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건져가지고 나쁜 물에 사는 고기를 좋은 물에 살리기 위해서 건질 때, 건지는 게 필요할 때는 이걸 몽땅 건져요. 몽땅 건질 때 이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는 선하기 때문에 사는 것도 아니고 악하기 때문에 죽는 것도 아니고, 선과 악 상관없이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위해서 아직도 살아있다고. 이걸 믿게 하려고. 이걸 알게 하려고. 예수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는 개판인데 이 개판도 예수님 때문에 산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그러니 더 이상, “ 아, 똥 됐네, 그렇게 말 하는 게 아닌데…말을 조심해야 하는 건데…” “행동 그렇게 하는 게 아닌데…” 자꾸만 자기 조심에 나서지 않게 되요. 만약에 자기 조심에 나서게 되면 그럴 때는 뭐라 하냐면 마귀에 씌었다고 그럽니다. ‘아, 전에 말 잘못해가지고 돈 십만 원 날라 갔네, 승진에 불리하겠네,’ ‘다음에 말 똑바로 하면 이십만 원 보태줄게’ 자꾸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생각이 든다고요. ‘저번에 헌금 만 원 빼가지고 이번엔 십만 원에 만 원 채워주면 열배나 갚아 줄 거야,’ 자꾸 교회 헌금시간에 그게 생각나는 거예요. 목사 건축헌금 하라는데 저거 안 하면 벌 받지, 세상에 벌 받는 게 어디 있어요. 우리한테 벌 받는 건 없습니다! 왜! 첨부터 사는 게 벌이예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게 벌이라고요.(아멘)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 했습니까. 빨리 죽고 싶다 안 했습니까. 왜에? 벌 좀 그만 받으려고. 사는 게 벌인데 뭘 또 벌을 받습니까. 마귀는요,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가져갔다는 것 이것만 차단해버리면 마귀는 대성공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었다는 것, 영생을 주었다는 것을 차단해버린 거예요. 영생이란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로서 주어진다는 이것은 안 들리고, 내가 사는 규율에 따라서 잘 먹고 부자 되고, 내가 행동 개판이면 못 산다, 이런 선악 논리를 유지하게 할 때, 마귀는 박수를 칩니다. 특히 부흥사들.
여러분! 안산이 왜 못사는지 알아요? 신양생활 제대로 못해서 그런다고, 믿어보라고, 믿으면 잘 산다고, 이명박이 어떻고 나오죠. 그게 왜 먹혀드느냐 하면, 우리 마음속에 이런 악마적인 생각이 아직 가득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 하거든요.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 법이라는 것은, 율법의 정죄가 들어오면 안돼요. 주님의 사랑이 들어와야 되요. 그래야 오늘 본문의 영과 영의, 육과 영의 더러운 것은 다 벗어내도 -거룩은 예수님밖에 없거든요.- 거룩이 쌓이는 빈병. 빈병 속에 예수님의 사랑만 가득 찬 이것이 바로 주님의 성전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것도 어려워요. 지금까지 쉽게 했는데 조금 더 어렵게 해봅시다. 뭐가 어렵냐 하며는, 인간은 뭘 따먹었다? 선악과 따먹었죠? 이 자체가 악이니까. 원래 먹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교회 늦게 오면 헌금 더 해가지고 뭔가 보속하려하고. 자식을 심하게 나무랐으면 ‘내가 나쁜 짓 했지만 예배참석 했으니 봐주소!’ 이런다고요. 하나님께 뇌물 주고 아부해가지고. 그게 여전히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누굴 사랑한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생존에 유리할까 싶어서.
여기 선악이 있는데, 선악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몰라요.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일부러 쑤십니다. 뭐라고 쑤시느냐, 율법으로 쑤셔요. “너 십계명 지켰어 안 지켰어?” 쑤시잖아요. 그러면 우린 뭐랍니까? “지키려고 최선을 다 합니다” 이래되거든요. 야고보서 4장에 보면 뭐라 돼있어요? 네가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득을 보려 하더라, 그건 악한 일로 돼있다고요. 그러면 우린 뭐라 합니까? “도시에 가서 이득을 보는 게 뭐가 악합니까?” 악하다하니까 악한 줄 알겠지만. 그래도 믿음이 없기 때문에 봐주소. 이러거든요.
주의 말씀: 「네가 해가 지도록 분내지마라.」나온다 이 말이죠. 「아내사랑하기를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한 것같이 아내를 사랑하라.」아내를 그렇게 사랑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처럼 목숨 바치십니까? 택도 없는 소리 아닙니까!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쑤셔버리면 우리 안에 저런 선악이 있는 줄 몰랐는데, 갑자기 뭐가 나오죠? 변며잉 나오죠 변명. ‘열심히 하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아내를 위해서 목숨 바치려했다고 너무 탓하지 마세요, 나만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도 다 그런데,’ ‘이근호 목사님 말씀 들어보니까 말씀 지키는 인간 없다는데 왜 제게 닦달내십니까?’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에게서 뭐가 나와요? 갑자기 변명이 나오죠. 변명이라는 것은 누구 중심이다? 누구 체면이라? 항시 나 위주로, ‘선악과 따먹었다, 어쩔래!’ ‘아내 사랑 안했습니다. 그래 어쩔 건데?’ 「돈을 사랑하는 게 일만악의 뿌리다」‘묵고 살라고 돈 사랑했다 어쩔래!’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미쳤나, 먹는 걸로 족한 줄로 알게 우리도 아파트도 사고 좀 살란다 왜!’ 성경을 갖다 대면요, 스데반집사는 순교했잖아! ‘내가 미쳤다고 순교하나?’ 모든 게 우리는 평소에 우리가 주의 말씀이 근처에 오기만 하면 얼마나 밉고, 주님이 얼마나 싫고,
그리고 우리는 이럽니다. ‘하나님, 좀 내버려 두소!’ 우리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도 잔소리 하지 말고, 돈 많이 있을 때 예배참석 할 테니까,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식으로 놔두소, 간섭하지 말고! 어떻게 살든지 날 천당이나 보내주소! 나 하는 식에 협조나 해주고 자비나 베풀어주소! 더 이상 간섭 딱 끊어버리고. 이게 주의 말씀 들어올 때 압니다.
하나님의 작전은 이거예요. 하나님은 머리가 대게 좋아요. 쑤십니다. 쑤셔놓고 그 다음엔 자기를 얘기한 게 아니고, 뭐냐면요, 쑤셨는데 우리가 벌컥 화를 내잖아요? 화를 딱 내보니까 그분의 이마에는 피가 흐르고 그분의 손에 피가 흐릅니다. 그리고 뭐라 묻냐 하면, 너는 너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스물네 시간 다 투자하고 있는데, 너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얼마나, 몇 시간 투자했냐. 너는 사는 것만 생각했지 널 위해 죽은, 널 살리기 우해서 죽은 나는 생각 않네.
우리는요, 옆 사람 죽은 건 생각 안해요. -이거는 너무 어려워서 하지 않겠습니다만,- 아무튼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남이 죽든 말든 이건 남의 일이야. 내가 살면 그만이고 끝난 거예요. 나만 살면 그만인 못된 인간을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날 살리기 위해서 미리 죽었잖아요. 그런데 그 죽으심을 우리는 내 삶이 바빠서 종종 잊어버리는 거예요. 성경을 하나도 모른다. 교회 간 적도 없다. 헌금 한 푼도 안낸다. 아무것도 모른다 할 때, 하나님이 딱 들이대는 계시는 뭐냐 하면, □죽었다□ 메시아가 죽었다는 겁니다. 더 이상 이 세상의 계시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 □대신 죽었다□ 이거만 남는 겁니다.
여러분들 가정 어렵습니까? 애들이 말 안 들어 힘듭니까? 뭘 놓쳤습니까. 왜 힘든 줄 알아요? 그거와 아무런 상관없이 대신 죽으심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다른 게 더 골머리가 아픈 거예요. ‘애가 공부만 잘하면 우리 집은 완벽한데…’ ‘돈만 한 이백만 원 주면 우리 집은 완벽한데’ 예배참석 잘하지, 다 잘하는데 돈이 없어서 문제야, ‘다른 건 다 좋은데 저양반이 차사고 내갖고 …’ 자꾸 자기 결핍과 보충을 바라는. ‘신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그것만 채워주시면 더욱 더 헌신하겠습니다.’ 자꾸 자기 완벽만 사랑하는데 실제로는 예수님의 죽으심만 우리 앞에 들이댑니다.
다시 정리하면, 말씀으로 우리 앞에 지적하고, 여기서 우리는 변명과 더 나아가서는 성질내고 분노 내죠. ‘예배 참석했는데 왜 돈 안줬어?’ ‘저 사람은 예배참석 안 해도 돈 잘 버는데 난 예배참석해도 왜 돈 안줬어’ 평생을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고 사는데 그 순간순간마다 뭘 깨닫게 하십니까? ‘이런 성질나는 나를 위해서 죽었구나!’ 「예수님 죽으심을 십자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사도바울이 십자가 복음 때문에. 예수님은 다른 복음은 없다했습니다. 진짜 기쁜 소식은 예수님 죽었다는 그것이 내가 살았다는 그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말씀을 통해서 지적해주시고 평소에 우리의 내부가 어떻게 짜여져 있는가를 알게 해 주셨사오니, 이제는 변명하지 말고 핑계대지 말고, 주님 앞에 미안합니다, 죄송한 마음가지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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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안산080314고후7장‘인간 선악과 예수님 선악의 차이’.hwp (69.5K), Down: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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