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골로새서 3:17절을 보겠습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 구절은 평소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안 통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하는데 왜 예수 이름으로 한다고 합니까? 우리는 이미 구원 받았잖아요. 이제 주님 앞에 보란 듯이, ‘주님 덕분에 새사람 되었으니까 내 솜씨를 한 번 보여들이겠습니다. 이제 성령의 인도에 따라 맺게 된 성령의 열매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라고 해야 되는데, 본문은 끝까지 그것을 좌절시키고 저지하고 나섭니다.
‘네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난 뒤에 자립적인 존재로, 내 이름으로 아버지 앞에 당당하게 충성하고 싶었는데 내 이름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니 모든 일을 주 예수 이름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이게 왜 그런가 하면 구약의 언약 구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반드시 중보자를 거쳐서 만나게 되어 있어요. 그 중보자는 거룩한 자가 되는데, 출애굽 이후 거룩한 자는 대제사장입니다. 백성들은 제사장까지만 진출하고, 그 이후 자신의 죄를 씻는 문제에는 손을 떼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회개합니다.’라고 양을 몰고 왔으면 그 다음은 제사 전담반인 제사장에게 넘기고 본인은 빠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실을 굉장히 고마운 일입니다.
회개한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반성하고 회개하면 그 다음은 회개했다는 것이 새로운 의로 드러납니다. ‘너는 회개 안 했지? 나는 회개했다.’ 이것이 새로운 의로 장착됩니다. 그래서 중보자에게 넘어가면 그 사람은 죄 지은 것에 대한 죄가 사함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원천적인 죄가 사함 받습니다.
죄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구약 언약에 의하면 중보자의 존재를 잊어버렸기에 죄가 됩니다. 우리가 언제 죄를 짓는가? 자기의 죄를 의식할 때 죄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에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서신 마지막부분에 저주가 나오니까 수신자들이 얼마나 당황스럽겠어요? 그러면 당연히 대처 방법이 나와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몇 번 용납하고 저주하십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30분 정도 주를 잊고 사랑하지 않았다고 저주하지는 않겠지요?’ 뭐 이런 식입니다. 만약 3시부터 30시 30분까지 TV본다고 주를 잊고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 때 주님 재림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이게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척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포기 못하고 자기 이름에 대해서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주님 덕분에 내가 잘 됐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요. 그래서 연애는 뜨겁게 하는데 결혼까지 성공 못하는 커플을 종종 보는데 그 원인 중에 남자가 속이 좁아 결혼이 성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식사비는 내가 낼 게.’하고는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미는 손이 자꾸 주춤거리고 있어요. 사진 찍으라고 포즈 취하는 겁니까. 왜 머뭇거리지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이만큼 당신을 위해 돈을 쓰니까 기억해 두었다가 당신도 보답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해놓고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해요. 그러니까 최고의 사랑은 ‘나는 죄인입니다.’가 됩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죄인입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래놓고 더 놀라운 사실은 자기를 이스라엘의 보편성 속에 집어넣어요. ‘나처럼 훌륭한 사람이 있을까?’ 이게 아니고 “나는 많은 백성 중 하나입니다.”라고 함으로 “나를 위해 누가 갈꼬?” 할 때, 이사야는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러면 많은 백성 중 한 사람인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이야기할 때 백성들이 그 말을 듣겠습니까, 안 듣겠습니까? 듣지 않지요. 이사야는 문서 선지자인데, 문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지만 듣지 않고 멸망하고 난 뒤에 그 외쳤던 말만 문서만 달랑 남게 되어서 문서 선지자라고 합니다.
기적 선지자는 아직 여유를 줘요. 기적을 일으키면서 “앞으로 잘 해. 알겠어?” “예” 이런 기회가 있는데, 문서 선지자는 그것이 아닙니다. 문서로 남았다는 것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죠.
남자와 여자가 연애를 하는데 자꾸 쩨쩨하게 ‘나는 돈도 투자하고 희생도 하는데 상대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밥값을 내니까 주저하면서 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계속 사랑을 유지하란 말이 아니고, 원초적으로 너는 문제 있는 인간임을 말씀을 통해서 반복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앞에서 “예, 이제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 “제가 죄인입니다. 주님 말씀이 아니면 제가 어떻게 저만 사랑하는 죄인인줄 깨닫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하게 되지요. 물론 이것도 잠시 뿐 또 자기 사랑에 빠지겠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주님의 사랑을 반복해서 부어주시는 겁니다.
그럼 질문해 봅시다. 왜 우리 이름으로는 안 되고 주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까? 그것은 중보자와 하나님 사이에 체결된 약속에는 인간이 개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변화하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면, 내가 회개를 했다면, 회개하기 전의 나와 회개한 후의 나는 달라졌어요. 계속 변이가 일어납니다.
본인은 과거나 지금이나 동일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 번도 동일한 적이 없었습니다. 상황 과 시간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같은 말을 해도 5년 전과 지금의 말이 달라요. 이것은 특히 자식을 키워보면 압니다. 예전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사준다고 하면 부모의 요구에 순종했는데, 이제는 원하는 것 사준다고 해도 순종하지 않아요.
수련회 참석하기 싫다는 자식에서 용돈 많이 준다고 해서 수련회에 데리고 올 수 있었는데 내년에는 그것으로 통하지 않을 수 있어요. 아이가 어떻게 바뀔지 몰라요. 늘 변하거든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과 중보자는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회개했다고 해도 회개한 나를 믿어서는 안 돼요. 나는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반드시 ~하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이런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주일 설교에서도 강하게 말했지만 어떻게 교인을 믿습니까? 주님을 믿어야지 어떻게 인간을 믿어요? ‘나는 집사님이라고 해서 믿었습니다.’ 집사님을 왜 믿어요? 그 집사님이 얼마 전에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했잖아요. 그럼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우하면 되지 그 죄인을 왜 믿었어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은 ‘날 믿지 마세요.’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잖아요. 본인이 자신의 신상을 털어놓고 다 이야기했는데 ‘나는 집사님을 믿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생각을 잘 못 한 거지요. ‘저 사람이 죄인이라고 솔직히 인정했으니까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이고,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믿을 만하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이지요.
성령은 인간을 계속해서 죄인으로 만들기 때문에 사람을 믿으면 안 됩니다. ‘믿을 수 없으면 안 믿으면 되겠네?’라고 하는데, 안 믿는 게 핵심이 아니고 성도끼리 서로 감사하면 됩니다. 사랑하라고 무리하게 요구하면 안 됩니다. ‘당신을 보니까 내 모습이 보인다.’ 비꼬는 말 같은데, 상관없습니다. 하여튼 감사해요. 주께서 마주치게 하고 만나게 하셨기에 감사한 거예요.
알랭 바디우는 과학, 정치, 종교(사랑), 예술 이 네 가지로 진리를 설명했어요. 어떤 것으로 나가도 결국 일자(신)에 도달 된다고 했어요. 전위예술가들 보세요. 신인지 미친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런데 알랭 바디우가 히트 친 말이 있어요. ‘사랑은 1을 뚫을 수가 없다. 사랑은 반드시 만남에서 성사되기 때문에 숫자 2가 되어야 사랑이 성립된다.’고 했어요.’
이건 아이들도 다 아는 소리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잖아요. 알랭 바디우는 둘이 만나서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너와 나의 중간에서 사랑이 발생 된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복음적이에요. 교인들끼리 만나고 집사님끼리 만남으로써 내가 미처 예상 못한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요. 그것을 ‘종교(사랑)’로 이야기합니다.
중보자와 하나님 사이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중보자는 제사장이고, 제사장이 메시아입니까? 아니에요. 원리는 변하지 않지만 원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계속 교체됩니다. 제사장은 죽고, 다른 제사장이 일하고, 또 죽고. 마지막에 이것을 멈추는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을 중보자로 세웁니다.
아들이 중보자가 되면 이것으로 완전한 언약이 체결되면서 옛날 것은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골로새서 2:16-17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간(절기, 월삭, 안식일 등)을 지킬 때 사람들은 자기 몸으로 지키지요. 그러면 남는 기억은 뭡니까? 내가 지킨 것이지요. 이것은 자기 이름이 되는 거예요. 자기 이름으로 한 것은 탈락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셔서 제사를 드리라고 했는데 나중에 다윗 언약에 가서는 ‘나는 번제를 기뻐하지 않는다(시51:16)’고 하셨어요.
그럼 처음부터 제사를 거론하지 말지 제사를 드리라고 해서 드렸는데 나중에는 번제를 원치 않는다고 하시면 어쩌란 말입니까? 이유가 있어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짐승의 희생(번제) 대신 다른 몸(제물)을 준비하신 거예요. 그 다fms 몸이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율법대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모든 구약의 그림자 율법은 폐기되었습니다. 폐기되었다고 하면 ‘율법 폐기론자’라고 공격합니다. 구원론에서만 율법 폐기론이 성립되지 언약에서는 율법 폐기론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 지지대가 같이 올라가지요. 그러나 건물이 완성되면 지지대는 철거합니다.
구원론자들은 우리가 연약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했지만 성령 받은 후에는 율법을 온전히 지켜 구원 받겠다고 하는데 성경에는 구원론 자체가 없어요. 성경에는 기독론 밖에 없어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거예요. 우리는 할 게 없어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의 영(성령)으로 다루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 이름으로 구원해 주십니다. 이 말은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는 신경 끊으라는 것입니다. 너의 이름을 구원하겠다는 것은 예초부터 없었던 계획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목사님, 율법을 더 지켜야 합니까? 율법을 안 지킨다고 하니까 율법 폐기론자라고 욕하던데 어떻게 할까요?”
‘율법 폐기론이 맞다면 구약 성경을 다 찢어야 하는데 그것은 좀 불합리한 것 같고, 구약 성경이 있어야 한다면 예수 믿어 성령 받은 후에 구약도 지켜야 한다는 말인가?’ 이 사람은 아직도 자기 사랑에 빠져 있는 거예요. 자신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런 집착은 하늘나라에서 탈락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베드로전서 4:11절에 나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것은 말씀이 없으면 말하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이 없으면 봉사했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지요. 이와 동일한 말씀이 빌립보서 2:9-11절에 나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게 누구 소원이에요?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이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합니다. 찬양할 때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4부 합창을 하면 떼창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4부로 찬양하면 듣기는 좋아요. 찬양하면서 본인의 귀가 즐겁다는 것 때문에 거기에 빠집니다. 여기에 파이프 오르간 연주까지 나오면 은혜(?)가 넘칩니다.
찬양할 때 주님께서 음정, 박자 따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노래자랑 경연대회에서나 따지지 천국에서는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아요. 찬양할 때 기본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성령이 우리를 책망하시면 우리가 흥얼거려도 찬양이 됩니다. 정확한 음정과 박자에 맞춰 화음을 넣고 찬양한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귀는 즐겁게 할 수 있지만.
제사드릴 때 중보자, 제사장이 있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중보자와 하나님은 변함이 없고 사람은 변하기에 사람이 나아갈 수 있는 곳은 제사장까지라고 했지요. 하나님과 중보자의 관계가 시내산에서 정립이 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시내산에 있어요? 아니죠.
시내산 위에 계시던 여호와께서 어디에 합류했는가 하면,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해놓고 본인이 그 성막에 들어와 버렸어요. 옛날식 다중현실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 성전에 함부로 들어오면 죽어요. 말은 달리는데 탄 사람은 안 보이는 식이에요. 이 희한한 현상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됩니다.
언약궤가 블레셋 온 지역을 휘젓고 다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빼앗아 자신들이 섬기는 신 다곤 신당에 두었는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어요. 원래는 이스라엘이 공격해서 점령해야 할 블레셋 땅을 언약궤가 단독으로 그 지역을 섬멸해 버렸어요. 저는 이 상황을 대전강의에서 ‘언약궤의 독주’로 표현한 적이 있어요.
언약궤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처음에는 아스돗의 신당에 두었는데 모든 신상이 박살이 났고, 아스돗에 옮겨 놓았더니 그 지역에 재앙이 내려 망하고, 가드로 옮겨놓았더니 그 지역에 독종이 퍼졌고, 에그론으로 옮겼더니 그 지역에도 독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언약궤를 소가 끄는 수레 위에 실어 자율주행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 소가 벧세메스로 가면 그동안 하나님이 블레셋에 재앙을 내린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한 일로 간주하겠다고 했는데 그 소는 벧세메스로 갔습니다(삼상 6장).
이 언약궤가 왜 이스라엘로 돌아갔는지 나중에 알아요. 보이지 않는 주의 이름이 언약궤와 변하지 않는 원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블레셋이 겪은 낭패와 언약궤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고 하는 이 모든 일은 중심점 문제입니다. 이 세상은 언약궤가 중심이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1:19절 봤지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거기에 언약궤가 있지요.
하나님이 언약궤 중심인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유일하게 언약을 통해서 만나는 겁니다. 언약궤 안에 무엇이 들었는가 하면, 돌판과 피가 들어있어요. ‘너희들이 드린 제사는 안 받고 내가 너희를 위해 드린 제사는 받는다.’는 겁니다. 거기에 동참하면 더러운 인간도 거룩하게 되어 천국에 합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중현실이죠. 인간들이 있는 현실에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언약궤 혼자 설치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도 언약궤 근처에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너무 무서워서.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 짓고 난 뒤에 언약궤를 지성소에 모셨는데 그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했다고 나옵니다(왕상 8장).
이사야 6장에도 보면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갔는데 주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고 천사가 찬송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고 연기로 뒤덮었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사도바울은 삼층천까지 올라갔지요. 드론을 띄웠는데 주님이 계신 성전까지 띄우니까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세상에서 잘난 척하는 인간들이 같잖은 거예요.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어요. 지옥 가는 것도 모르고 큰소리치는 것을 보면 기가 차지요.
그렇게 싸움 잘 하는 언약궤가 혼자 다 모든 것을 해치우지 왜 예수님이 오셔야 하는 것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 왜 따로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주는 설친다고 주가 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의인으로 바꿀 수 있어야 주가 됩니다. 이렇게 되어야 지옥 보내는 주님의 공의가 정당성을 확보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죄인을 거쳐서 왔기 때문에 ‘주님은 자기편끼리는 잘 하지만 죄인에 대해서는 주의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겠지.’ 라는 것이 일체 없게 만들어요. 사도신경에 보면 음부에까지 내려가지요. 초기 판본에는 지옥까지 내려간 것으로 되어 있어요. 베드로후서에도 지옥까지 내려갔다고 되어 있지요.
지옥이든 천국이든 전부 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야 그게 온전한 주 되심입니다. 그래서 지옥 간 사람도 주님을 알아봐요. 요한복음 5:28절에 보면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 (인자 되시는 예수님)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했어요. 이 말씀을 보고 예수님 음성 들으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인자의 음성은 심판권을 행사하시는 겁니다. ‘너는 천국, 너는 지옥’ 이렇게 분류하시면 주님이 결정하신 일이기에 군소리하지 말고 영원히 분류된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피조물의 합당한 자리입니다. 에서는 미움 받기 위해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출생’이라 하지 않고 ‘출현’ 또는 ‘출몰’이라 표현합니다.
부모는 그냥 이용 기계가 될 뿐이고, 주님이 보내실 인간이 부모의 몸을 통해서 출현하는 거지요. 내 자식이 아니고 주께서 보내신 자식입니다. 한 인간이 출몰할 때 이것은 주의 이름이 관여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천국 가냐, 지옥 가냐와 상관없이 주의 이름이 관여한 거예요.
야곱은 주님의 자비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 출몰한 거예요. 그리고 형 에서는 예수님의 속성 가운데 공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옥 가야 되는 겁니다. 이건 토기장이 마음대로입니다. 진노의 그릇과 자비의 그릇을 만들 권한이 토기장이에게 있는 겁니다. 그래야 주가 주답거든요.
주님이 취하신 조치에 대해서 박수를 치면서 ‘참 잘 했습니다.’라고 해야 하는데 다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니죠. 사랑 받기로 작정된 자는 박수를 치지만 미움 받기로 작전된 자는 주님 조치에 대해 화를 내고 불만을 나타내겠지요. 그래서 천국 가는 자는 주님 하신 일에 찬동해서 천국 가고, 지옥 가는 자는 주님 하신 일에 불만 가졌기에 지옥 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내막을 들여다보니 그것이 아니에요. 모든 것을 주님이 일방적으로 처리하신 겁니다.
이 이야기가 즐겁습니까, 아닙니까? 아멘이라고요? 내 딸이 지옥 가도 괜찮습니까? 주님의 뜻에 찬동하고 싶은데 문제는 내가 평소에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 만약 지옥에 간다면 자식과의 끈끈한 정을 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차라리 저를 지옥 보내고 제 딸은 천국에 넣어주세요.”라고 간청하고 싶지요.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우리는 들러리가 되고 주의 주권을 인정하는 가운데 구원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결정을 우리가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거예요. 내 사랑하는 가족이 지옥 가도 주님 하신 일에 기쁨으로 찬동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럴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권력으로 눌러버려요. 어떻게 하는가?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하게 만들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주께서 모든 것을 해주셨건만 범사에 감사하지 못했습니다.”라는 소리가 나오도록 주님이 조치하십니다. 주님이 눌러서 파생된 결과물이 뭡니까? 내가 주를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 진정성 있게 다가옵니다.
내가 예수 믿는 행위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선교단체에서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라는 거짓말에 젊은 청년들이 얼마나 쉽게 동의합니까? 앞으로 나오라고 하면 손들고 앞에 나오고, 죄를 자백하라고 하면 온갖 일을 다 고백합니다.
마트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바구니에 담는 것처럼 천국 가기 위해 좋은 말, 좋은 행위를 담는데 그렇게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함으로 이스라엘 속에 있는 참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시고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셨지요.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백부장에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시면서 ‘너는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어요. 백부장이 뭐라고 고백했어요? “말씀만 하옵소서.”라고 했어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겠나이다.’ 주어 자리에 자기 이름이 없어요. ‘예수님이 사랑하신다면서 이런 힘든 일은 왜 시키지?’ 이런 것이 없어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보면, 대령이 7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가정교사 마리아 수녀가 오기 전에, 아이들을 어떻게 훈련시키는가 하면 호루라기를 불어요. 마리아가 중보자 역할을 합니다. 커튼을 뜯어서 옷을 만들어 입혔어요. 커튼이 뭐냐? 중보자 역할이에요. 이제는 더 이상 아버지 호루라기가 아니고 마리아 선생님의 사랑으로 새로운 보편성이 형성되는 겁니다.
예전에는 무엇을 해도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어떤 일을 해도 의의 종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의를 혹은 죄를 보여주는 관계지, 독자적으로 ‘내가 예수님 말씀을 성심 성의껏 지키겠습니다.’ 이런 것은 없어요.
사도행전 4: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만약 상자라며 상자 위에 주의 이름이 임해서 구원 받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사도행전 3장에 나와 있어요.
앉은뱅이가 등장하는데, 앉은뱅이는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자기의 현실관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을 요구했지요. 그 때 베드로가 야박하게 ‘은과 금은 없다.’고 했어요. 앉은뱅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돈에 종속되어 산다는 것 자체가 자기 이름으로 사는 저주 받은 모습이라는 겁니다.
사도가 앉은뱅이 앞에 선 것은, 앉은뱅이를 동정해서 그가 요구하는 돈 몇 푼 주려는 것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알려주려는 거예요. 그래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고 했는데 여기서 주의해야 됩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큰 소리로 말했습니까? 소리의 크기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3:16절에 보면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씀과 베드로를 연결시키면,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베드로 안에 있는 예수님께서 앉은뱅이 안에 계셔서 베드로가 그 이야기를 하게 되면 반응을 유발하도록 하신 거예요.
그렇게 하신 이유는 3:12절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능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를 대단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현장의 구경군일 뿐입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베드로가 한 일로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베드로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결론을 맺겠습니다. ‘이름’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보이거나 보이지 않으나 관계없이 실존입니다. 주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다중현실을 의미합니다. 다른 세계가 함께 있는 거예요.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지요. 이것을 베드로는 지금 고백하고 있습니다.
머리가 똑똑해서? 공부를 많이 해서? 아니요. 그 현장에 먼저 주의 이름이 베드로와 앉은뱅이에게 찾아왔고, 그것을 주님 이름이 했다고 믿는 사람은 주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가담되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 주님 앞에 늘 죄인입니다. 만약 주님이 당신 마음속에 들어오신다면 당신이나 나도 똑같이 구원 받은 사람이고, 전도는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이 당신을 전도했기에 당신은 내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교회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것도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 형제로 확인되는 겁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