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21강-믿음의 자취(4;9-13)이근호130217

아빠와 함께 2013. 2. 17. 19:13

믿음의 자취(롬 4: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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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2-17 13:21 
믿음의 자취

2013년 2월 1일                            본문 말씀: 로마서 4:9-13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롬 4:11, 개역)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4:12, 개역)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롬 4:13, 개역)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믿음에도 눈에 보이는 실체나 증거가 있으면 훨씬 수월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의 자부심도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과거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주신 ‘이스라엘 나라’는 실체가 있었습니다. 전 한 나라가 통으로 전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그런 실체를 하나님께서 실제로 만들어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이 그 나라의 후손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그리고 자기 나라가 이스라엘이라고 인정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점을 참으로 믿음의 증표로서 수월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백성이 되는 자격으로서 개인의 신체로 표시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할례를 받았는지 아니받았는지는 바지를 내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문신처럼 신체 자체에 믿는자 라는 표시를 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 얼마나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고 안심이 되겠습니까? 그런에 오늘 본문에서는 이 모든 것이 믿는 자가 구원받게 하는 표시는 아니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7:19에 보면,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대하면서 주의할 것은, 할례 없는 자들이 “나는 할례를 안 받아도 돼”라고 자랑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무할례자’도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할례 없는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십일조 안하는 것이 마치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인 것처럼 행세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할례의 진정한 의미가 뭐란 말입니까? 오늘 주보 뒤편에 제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언약은 율법으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아 난 것이다’에서 여기에 4개의 생소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언약’, ‘율법’, ‘믿음’, ‘의’ 같은 겁니다. 하나의 요소가 이탈된다면 나머지 요소가 갖고 있는 본래의 뜻을 위반될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 네 가지 단어는 뭉쳐져서 어느 하나를 그 자리에서 독립적으로 뺄 수가 없습니다. 이는 흔히들 “믿음, 하나만 알면 돼”라는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쉽게 생각하는 믿음의 증표들은 ‘병나음을 얻는 것’ ‘귀신이 나가사는 것’, ‘물 위를 걷는 것’ ‘산이 옮겨져서 바다에 빠지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언약, 율법, 믿음, 의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참 믿음을 설명하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7:22-23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믿음의 증표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언약, 그 자체를 위하여 우리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해서, 나의 구원을 위하여 내가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위하여 믿음이 생겨나게 되어 있는데 그 믿음의 생겨났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던 할례라는 율법입니다.

11절에 보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을 이렇게 읽으시면 아니됩니다.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니'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즉 '믿음의 표'란 표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에서 표를 동원시킨다는 뜻입니다.

즉 표가 있더라도 표를 부정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표가 없이는 믿음은 믿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표란 실체를 지시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졌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표가 바로 믿음의 표라는 겁니다. 할례 받은 자는 할례 받은 것을 부정하고, 할례 받지 아니하는 자는 할례 받지 않는 것을 고마워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표. 기호란 사라짐을 전제로 하는 흔적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란 아브라함 일생에서 최초로 '사라짐'을 드러내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사람이란 자신의 몰두한 일이 생기면 믿음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아시지요? 양치는 소년이 산 위에서 심심해서 마을 사람들을 속여보려고 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늑대가 오지도 않았는데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쳤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이 말하는 그 ‘늑대’라는 소리와 그 소리에 부합하는 실체, 곧 실제로 나타난 늑대를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늑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정말 그 소년에게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미 산 밑의 마을 사람에게는 소년의 늑대는 단지 ‘소리’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믿는 자는 바로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산 위에서는 늑대가 실제로 나타나서 양들을 잡아먹어도 산 밑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한다고 해도 세상 사람들에는 단지 소리로만 그러하고 십자가 사건도 옛날 한 때에 있었던 일에 불과합니다.

일종의 흔들리는 술잔에 담긴 술의 표면 현상에 불과합니다. 술잔을 잡고 흔들대면 그 순간만 “찰랑찰랑” 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술잔을 다시 테이블 위에 두면 다시 고요해집니다. 정말 술잔에서는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브라함 자체를 없애는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아브라함을 죽이고 단지 아브라함을 천국과 연결시키는 매개체, 곧 이삭만 부각되는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바로 이와같은 일의 취지와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이 곧 믿음현상이라는 겁니다. 여호수아 7장에서 아간은, 사람들이 전혀 보고 있지 않는 틈을 타서 여리고 전쟁의 전리품들을 자기 것으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는 전쟁이 아니라 아간 본인이 살아남겠다는 전쟁으로 전한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숨어있던 아간을 색출하여 죽여버리므로서 언약의 살아있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오늘날 바로 아간같은 존재가 우리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관여한 일이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채로 살아갑니다.

바로 이런 우리를 양치는 소년으로 바뀌어서 늑대에게 늘 물려죽게 하시는 바로 그 관계가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죽고, 중보자되시는 예수님만 늘 살아 점령하고 있음을 나타내보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언약의 살아있음을 보이는 재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