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22강-믿음의 조상(4;14-17)이근호130224

아빠와 함께 2013. 2. 24. 14:51

믿음의 조상(롬 4: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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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2-24 13:31 

믿음의 조상

2013년 2월 24일                            본문 말씀: 로마서 4:14-17


(롬 4:14, 개역)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롬 4:15, 개역)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롬 4:16, 개역)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인 동시에 인간의 선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내면화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존에 자신이 기대한 그 하나님의 명령과 너무나 판이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남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없고, 공유할 수도 없고 남들 앞에서 “이게 나의 신앙이다”고 해도 남들은 알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자폭용입니다. 아브라함은, 왜 메시아는 내가 기대한 대로 오지 않아야 하는 면을 보이는 용도로 활용되게 됩니다. 창세기 12:3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조상은 혈통적인 뿌리를 두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나 유대인들은 이점에 신앙의 토대를 두었습니다. 이방나라에서의 종교란 개인적인 도 닦음과 수행으로 자기 구원을 달성해 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교에서나 이스라엘에서는 신앙의 확실한 근거는 바로 자기 자신의 존재입니다.

즉 자신들이 여기 살고 있음에 하나님도 계시는 겁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빈틈없이 준수하기에 지금의 유대 혈통을 이어오고 있다는 겁니다. 상당히 객관적이고 하자없는 논리입니다. 주관적이고 모호한 신앙 기준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그들은 순수한 제사장 혈통을 고수합니다. 제사장은 모세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독대했던 인물이고 그의 손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을 문서화시켜 주셨다는 겁니다. 이 문서에 의해서 생겨난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고 이 이스라엘을 지탱해주는 케이블은 바로 ‘순수한 혈통’이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 계열이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전에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율법의 순수함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약속을 전수하는 방식인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신앙의 탄탄한 객관적 증거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신을 향하여, 혹은 신과 접촉하고 자기 세계로 끌어당기면 당길수록 그로 인하여 신은 여전히 죽은 자로서 강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사도는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쪽에서 하나님쪽으로 건너가려고 시도하면 할수록 그것이 더욱 더 하나님을 없는 존재로 혹은 죽여야 될 대상으로 사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일이 인간의 ‘체험 밖’에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경우를 알지 못합니다. 그로 인하여 창세기 3장부터 시작되는 자신들의 역사마저 진실되게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분명 창세기 2장에서 아직 인간이 범죄하기 이전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으로 넘어오면 인간은 벌써 딴 인간이 되어 있습니다. 뭘해도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시키신 그 하나님의 결정이 합법화하고 유효하게 만들 뿐입니다. 진정한 진노는 바로 인간들의 의도적인 생명나무 과실 먹기를 시도하는 그 현장에 떨어집니다. 그래도 인간은 자진해서 그 저주를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있어 ‘체험 밖’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들은,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혈통’으로 간주하려 합니다. 마치 옛날 출애굽 당시에 홍해를 사이에 두고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건너오려거든 건너와 바라”는 식의 허세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비난받아 죽는 죽음으로 인생을 끝내시고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가셨기에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는 ‘죽음’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인간들의 열심과 시도로 말미암아 발생된 죽음의 바다입니다. 따라서 어느 인간치고 스스로 “나, 구원 안받을래요 왜냐하면 저주받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요”라고 진정으로 나설 위인은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저주 안에서’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약속 노선에 인간은 다가설 수가 없는 겁니다. 스스로 자신을 바뀌려는 자는 아무 것도 바꿔지지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은 ‘조상’이라는 개념을 성사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나는 아브라함이다”는 자를 “아브라함은 나다”라고 여기시는 분과 연결시켜주기 위해서 찾아오신 겁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바다’라는 것은 끊임없이 제 신앙 자랑질 하는 자들이 없으면 성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혈통은 곧 계속해서 혈통 자체가 끊어져야 하고 저주받아야 함을 보여주어야 될 혈통입니다.

그래야지만 그 끝에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지 때문입니다. 약속이란, 신앙인의 달라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이 약속을 성사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파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안에 장차 오실 진짜 약속된 분을 심어놓으시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수시로 하나님에게 계속 시달려야 할 자입니다. 스스로 세상 사는 것을 후회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약속을 담아놓기 위해 육신의 죄를 파버리고 약속 아닌 것을 사용하셔서 ‘죽음의 바다성’을 새겨 넣으시는 겁니다. 계속 삭제 시키심은 결코 아브라함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늘 자신의 모든 것이 파괴당하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외부에서 “이게 바로 믿음의 조상이다”고 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육을 모두 파버리고 예수님을 그 안에 넣는 방법으로 믿음의 사람을 만든다-이것이 믿음의 사람을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이후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도 이같은 방법으로 만들것이다-즉 아브라함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다=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의미-제가 알아들은 의미 입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과의 접선을 시도합니다만 히브리서 7:16에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즉 육체가 본성으로 해보려는 모든 시도를 충분히 발휘하게 하시면서도 정작 구원은 인간의 육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궁한 생명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고귀함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아니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