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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3-03-03 13: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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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사도의 말을 지시와 명령으로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우리보고 이것을 지키고 행하라는 뜻이 아니고 사도의 말은 이것이 예언입니다. 공자 맹자는 지시하고 명령하잖아요. 잔소리를 하는데 하나님은 잔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예언이기에 ‘네가 펼쳐놓은 네 세상 관, 역사하고 내가 사도와 선지자를 통해서 펼쳐가는 역사하고 얼마나 차이나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인간들의 역사라는 것은 인간들이 애쓴 것, 지혜들이 뭉쳐져서 발전을 거듭해서 오늘날 70억 인구가 먹고 살 수 있는 대단한 체제를 이룬 거예요.
칼 포퍼라는 유명한 철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의 모든 지혜라 하는 것은 반드시 오류를 수정하면서 발전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과학이든 행정이든 기업이든 공장이든 심지어 애들 숙제하는 것도 해보면서 또 수정되고 또 수정되는 거예요. 생중계도 마찬가지지요. 해보고 또 고치고 해보고 고치고 그래서 오류가 적은 쪽으로 줄여나가면서 진리에 접근하는 것, 그래서 인간의 역사라 하는 것은 함부로 낮춰서 폄하하거나 부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과 희생이 들어 있는 겁니까?
우리는 바로 이 역사를 신봉합니다. 우리는 그 역사를 사랑합니다. 가문의 역사와 개인의 인생사도 다 사랑해요. 그런데 그것은 익히 알고 있는 겁니다. 국가의 역사랄지, 한 가정의 역사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나와요.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인간들의 수정과 보완을 거쳐서 완성되는 식으로 하늘나라가 완성되는가, 라고 묻는 겁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자를 통해서 이야기해 보면 손톱만큼도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지혜, 지식, 이성이 하늘나라 이루는데 보탬이 되지를 못했다는 거예요.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말씀만 하옵소서. 나쁜 것은 들어내고 옳은 것은 열심히 지켜서 업적과 결과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합니다.’ 이런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어요. 심지어 교인들이 기도를 해도 목사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제가 기도가 제대로 된 기도입니까?” 무슨 뜻입니까? “혹시 잘못된 기도가 있거든 수정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진짜 기도에 접근할 있도록, 합치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식이 우리의 마음가짐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예언자들은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예언한 거예요. 반드시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해버리는 거예요. 뭐냐, 우리가 어떠한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예언한 대로만 이루어질 뿐이지 우리의 노력이 개입된다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도중에 수정되거나 변경되는 일은 없다는 거예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들락날락 하지만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그 이유에 대해서 로마서 9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인간들의 들락날락 거리는 것으로 인해서 수정되거나 변경되지 않는 이유가 뭐냐하면 인간보다 예언이 먼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어떤 인간은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사라져야 돼, 라는 것이 계획 잡혀서 그 계획 잡힌 대로 등장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계획이 잡힌 대로 등장한 인간들은 내가 있기 전부터 있던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기 때문에 나름대로 노력을 합니다. 칼 포퍼의 말대로 잘못을 자기가 알아서 수정하고 노력하고 보다 더 옳은 것은 뭘까, 보다 더 정의로운 것은 뭘까, 애쓰고 노력하는 과정이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예언을 모르니까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인간들이 그렇게 나름대로 애쓰는 것을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네가 그렇게 애썼지?” “애 썼습니다.” “고생했나?” “고생했습니다.” “눈물 흘렸나?” “눈물 흘렸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는 네 애씀과 노력과 수고와 아무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느니라.”라고 마주치면서 등장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러면 그것을 미리 알려줘야지 괜히 헛수고를 하게 만듭니까? 그 동안 내가 하늘나라 가기 위해서 이렇게 애를 썼는데 애쓴 그것이 하늘나라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한다면 차라리 막 놀라고 힌트를, 우리교회처럼 아무것도 하지 말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으니 막 놀아라, 이렇게 미리 이야기를 해줘야지 이제 와서 그렇게 이야기하면 됩니까?”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하면 “예수님과 너와 비교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하는 거예요.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라 했습니다. 아담이 두 사람 등장해요. 처음에 아담이 등장하고 나중에 아담이 등장해요. 그리고 둘 사이는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고 처음 아담은 뭘 해도 헛방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처음 아담을 등장시킨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담은 첫 번째 아담이 헛짓을 하면 할수록 두 번째 아담에 의해서 하늘나라가 완성된다는 것이 부각이 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인간을 갖고 논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었을 때 아담은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바로 사람이다, 라고 오해한 거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누가 등장할 때까지 그것이 오해가 아니고 진짜인줄 알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등장할 때까지입니다. 나는 코와 눈이 있으니 이것은 사람이다, 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사람인데 누가 나를 하나님이 친히 만들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라고 우리는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것이 전부다 오해였고 오류였고 잘못된 생각이었고 마귀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기껏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도가 그 안인데 그것은 누가 봐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마땅한 신앙적 상식이고 옳은 생각이라고 여겨졌는데 그것이 잘못이라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에 잘못이 아니고 처음부터 잘못이었어요. 내가 인간이라는 규정, 내가 인간이라고 정의내린 그 자체가 잘못이었던 것입니다. 오실 아담을 고려하지 못하고 그저 손에 만져지니 뭐와 비교하느냐하면 개와 고양이와 비교한 거예요. ‘저게 뭐지? 소. 저건? 고양이. 나는 뭐지? 인간.’ 그러니 자기하고 비교해볼 때 가장 인간다운 것은 자기밖에 없으니까 인간이라고 확정하는 거예요. 소는 말을 할 수 없는데 우리는 말을 하고 코끼리는 불을 다룰 수 없는데 우리는 불을 다루고 코스모스는 도구를 만들 수 없는데 우리는 어떤 도구를 만들고, 언어, 불과 도구와 직립보행, 이게 바로 크로마뇽인의 특징이잖아요.
15만 년 전에 처음 나왔다는 가장 인간답다는 현세인간의 특징이 이거예요. 불, 언어사용, 도구사용, 직립보행, 그래서 우리끼리는 인간이라고 자부했는데 예수님이 등장하면서 하는 말이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에 나는 인간이라고 상정한 그 자체를 전부 다 버려라.” 하는 거예요. 사람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만 사람이에요. 예수님만 참 인간이지 그 외에는 인간이 아닌 겁니다. 우리가 만약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만든 기독교, 불교 이 모든 종교는 다 엉터리에요. 인간이 만든 거예요. 인간이 인간이라고 우기면서 나온 것이 뭐냐,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이런 종교인 겁니다.
자기가 인간이라고 해서 다 파헤쳐 보면 보자기 안에 담겨 있는 것이 뭐냐, ‘그래도 우리는 인간이야.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야. 신을 찾아야 돼.’라는 그것이 담겨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19절에 봅시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 뭐가 나오는가, 죽음이 나옵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겪지 아니하면……, 그러니까 죽음을 겪고 그 다음에 17절에 보면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제가 처음에 사도는 지시나 명령하는 것이 아니고 예언을 한다 했습니다. 예언이란 인간이 지키든 아니든 관계없이 그냥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에 보게 되면 죽은자를 살린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생각했던 참 인간은 반드시 뭘 거쳐야 하느냐, 죽은자를 살리고 없는 것을 있게 한 그 경과, 과정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천주교든 기독교든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인간의 역사라 하는 것은 계속 현재 있는 것을 잇고 또 이어서 계속 이어가는 거예요.
이어갈 때 한 가지 유지되는 것이 있어요. 동질성이라는 겁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닮고 손자는 할아버지를 닮고, DNA라 해서 유전물질이라고 하지요, 계속해서 같은 유로 이어가는 거예요. 옛날에는 백인들이 흑인들은 사람 아니라고 봤습니다. 그냥 짐승이라고 봤어요. 그런데 결혼해 보니 애가 나오니 저것도 인간이구나, 한 거예요. 개하고 부부생활해도 인간은 나오지 않잖아요. 그래서 개와 흑인은 다르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같은 인간들끼리 끊어짐이 없이 이어진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생각한 유일한 인간,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라는 것은 끊어져야 돼요. 죽음이란 것을 경과해야 됩니다.
죽어서 자기가 알아서 기어 나오면 안돼요. 반드시 살려주는 것이 있어야 돼요. 반드시 죽고 살려주고, 그리고 이 땅에 없는데 없는 인간이 새로 생기고, 이런 정보가 장착된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이라고 간주되는 겁니다. 그 외에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외에는 사람이 아니고 뭐냐, 아담이라는 뜻은 사람이라는 뜻이 이게 나중에 흙으로 바뀝니다.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흙 같은 존재죠. 제일 쉬운 예로서 해변가에 있는 모래성 같은 거예요. 모래로 인어공주를 만들어 놓았는데 파도치니 인어공주가 다시 모래로 섞여버리지 않습니까?
그처럼 인간이란 잠시 있다가 모래처럼 허물어지고 주저앉아서 자기 이름 그래도 아담, 먼지로 되돌아가야 돼요. 김광석의 유명한 노래 있잖아요. “먼지가 되어.” 모든 것이 그냥 먼지로 돌아가는 겁니다. 제가 어릴 때 달성공원 근처에서 살아서 항상 눈에 비치는 것이 달성공원에 있던 사람들의 모습들이 굉장히 기억에 남아요. 그런데 제 눈에 항상 어른들이 안타까워 보였던 이유는 왜 그렇게 다 늙었느냐 하는 겁니다. 어른들이 다 늙어 있어요. 야바위꾼부터 상이용사, 달성공원에는 상이용사들도 왜 그렇게 많았는지, 노점상들이나 경찰같이 한결같이 늙었어요.
지금은 아마 우리 애들 보기에 우리가 그렇게 보일 겁니다.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왜 그렇게 늙은 사람으로 보이는가? 인간에게는 죽음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사람이라고 우기면서 악을 써가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만드신 이유는 우리가 지시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이것이 예언입니다. 우리가 착하다고 해서 안 늙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산다고 해서 사고 안 당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은 그냥 예언 속에서 출렁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말씀에 의해서 출렁이기에 거기서 우리가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예언,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획을 제쳐두고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기에 마치 독자적으로 내가 인간이다, 이렇게 살아가고 내가 만든 계획으로 내가 하나님을 섬기리라,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종교일 것이다, 이렇게 오해들을 하고 계신 거예요. 아브라함 당시에도 사람들은 신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어떤 특별한 일을 맡겼어요. 그 일이 뭐냐, “네 아들을 내게 바치라.” 하는 겁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잖아요. 그러면 되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그걸로 충분한 거예요.
아브라함 입장에서 ‘나는 인간이다. 그래서 신을 섬기는 것이 마땅한 도리다. 교회 나가서 예배드리자.’ 그러면 되었는데 “네 아들을 모리아 산에 갖다 바쳐라.” 모리아 산에 가서 아들을 죽이라는 왜 이런 지시를 하느냐 그 말입니다. 이것은 내가 생각했던 아브라함의 역사, ‘나의 역사는 나의 동질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나는 그동안 인생 살면서 이런 고생하면서도 그것들 하나 버릴 것 없이 누적이 되어서 지금의 나라는 찬란한 역사를 이루었다.’라고 하면서 나는 나다, 라고 여겼는데 왜 그 역사에 하나님께서 내가 예상 못한 엉뚱한 일을 시키느냐 그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노선을 이탈시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대전에서 틀어버리면 호남선, 광주로 가게 되지요. 우리의 노선을 이탈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인간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내가 인간이 아니었고 인간은 따로 상정되어 있었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님이 참된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과 연결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인간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없고 영원한 저주의 나라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연결 짓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장차오실 예수님에게 일어날 상황을 미리 앞당겨서 아브라함의 인생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언약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언약입니다. 언약은 개입하게 되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 나의 역사만 고수하고 나의 찬란한 역사만 자랑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에게 그 어쩔 줄 모르는 그 모든 것이 다 쓸데없는 자랑거리인 것을 폭로시키는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 제가 어떻게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요?’라는 그 ‘살아서’라는 것, 그 ‘살아서’자체를 무산시켜 버립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은 없는데서 있는 분이고 죽은데서 사신 분이기에 그 속성을 우리 인생 속에, 역사 속에 집어넣어 버리면 우리는 내 자체로 있다고 이야기할 수 없고 예수님 때문에 있어야 할 있음만 있을 뿐이에요.
예수님 때문에 살아야 될 인생만 있을 뿐이고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기 위해서만 나는 죽어줘야 될 그 죽음만 있을 뿐이라는 말이지요. 왜냐, 예수님은 예언된 분이고 평소에 나라는 것은 앞뒤 엣 것 다 끊어버리고 그저 나 여기 있다는 그것부터 계속 동질성을, 어제나 오늘이나 나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동질성만 이어나가는 나만의 역사, 나만을 위한 역사만 쥐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다 쓸데없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집어넣는 방법을 사용하시는데 그 방법이 뭐냐하면,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데서 살리는 방법입니다.
해변 가에 인어공주를 모래로 만들어 놓았는데 파도가 한 번 덮치니까 분명히 있던 인어공주가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파도가 한 번 치니 인어공주는 사라지고 엉뚱하게 오징어가 등장한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나, 라는 것은 하나의 바탕에 지나지 않아요.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뭔가 쓸고 지나가고 쓸고 지나가고, 매일같이 파도가 왔다 갔다 하는 그러한 공간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교회 다닌다, 교회가 쓸려가 버리고 기독교 신자라면 기독교로 날라 가 버리고 예배도 날라 가고 헌금도 날라 가고 전도도 날라 가고.
내가 무엇을 만들어서 간직하고 무엇을 드리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와서 내 인생을 쓸고 가느냐, 그것이 주가 된다는 거예요. 그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언약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작용하고 있는 사람의 특징이 바로 그거예요. 우리가 교회 다닌다고 해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어깨 죽지에 천사의 날개가 돋는다든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똑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등장하게 되면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가 뭐냐 하면, 그 언약 속에 모든 진리의 핵심이 다 들어있고 언약을 몰랐던 그 모든 것은 다 조작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내가 만든 조작된 환상이에요.
이 환상이라는 것, 내 중심의 역사로 만든 환상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왔는가? 이것이 결국 나의 육체가 안고 있는 욕망에서 나온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육체의 욕망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육체의 욕망이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살아 있어요. 살아 있어서 외부의 모든 것들이 네 육체를 위해서 도움이 된다는 쪽으로 육체의 욕망이 외부로 물체화되고 사물화되는 거예요.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유럽에 이런 동화가 있어요. 전설인지 동화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가난한 농부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났어요.
나한테도 천사 좀 나타났으면 좋겠는데 요 근래에 천사가 통 안 보이네요. 천사가 하는 말이 남자보고 “나한테 세 가지 소원만 이야기해라. 다 들어주마.” 하니까 꿈에 나타난 그 천사를 보고 농부가 “소시지 하나 주세요.” 했어요. 그 소리를 농부 마누라가 듣고 화가 얼마나 났는지 “바보같은 영감탱이야, 찾아온 그 좋은 복을 두고 소시지가 다 뭔가, 소시지! 에이 영감탱이 코가 소시지가 되어라.”라고 했어요. 소시지 하나 이미 소비했지요. 마누라가 뭐라고 했습니까? 소시지가 코가 되어라, 하고 두 번이나 소원을 써먹었어요. 이제 마지막 남은 소원은 하나밖에 없어요. 할 수 없이 마지막 소원은 이거였습니다. 소시지가 다시 코가 되게 해달라고 했어요. 결국 남는 것은 달랑 소시지 하나밖에 없어요.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인간이 소시지를 달라고 한 것은 평소에 자기 육체가 소시지를 먹고 싶었다는 자기 욕망이에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소원들, 모든 기도는 자아에 담겨 있는 욕망의 현실화, 구체화로 연결되어 있어요. 이것은 뭐냐, 안 죽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환상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내 욕망이 만들어내는데 안 죽겠다는 이야기에요. 지금 죽어가는 육체를 받아놓고는 우리는 그것을 역으로 억지를 부리면서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어떻게 하면 더 살 수 있습니까, 하는 쪽으로 우리의 소원들을 다 허비하고 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육체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미 인간자체가 고장난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가지고는 천국에 못가는 거예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내 육체가 품고 있는 내 욕망이 좋아하는 쪽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쪽으로 우리의 소망과 소원들을 하게 되고 그것을 건졌다는 것들만 뽑아서 따로 내 역사를 구축한 겁니다. 그저 한국이 네덜란드를 이겨줬으면 참 좋겠는데 5대 빵으로 져버렸어요. 튤립의 나라 네덜란드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은 내 육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 줘야 기분이 좋고 그렇게 안 돌아가면 심하면 우리가 죽겠다는 거예요. 자살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참된 인간은 죽음을 이겨낼 수 있는 인간만이 참된 인간이라고 영생나무가 있는 하늘나라에서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죽음을 이겨야 될 텐데 우리 인간은 자살을 해도 죽음을 못 이겨요. 그러니 우리는 인간이 아니에요. 그냥 소모품이고 흙이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은 “모든 인간들아! 너희들은 사람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종교가 문제가 아니에요. 헌금, 기도, 전도, 예배, 이게 문제가 아니고 기본적으로 처음부터 사람이 아니었어요. 흙이 흙을 산후조리원에서 낳아서 키운 거예요. 그동안 너도 늙고 나도 늙어가고 있고. 애들이 울고 있는 것, 자기욕망에 만족하지 않아서 우는 거예요. 제가 울산에 가서 그런 강의를 했는데요, 어린애든 어른이든 주위에서 무슨 이야기를 듣게 되면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이 뭐냐 하면, “안 해!” 꼭 돌아서 할지라도 일단 안 해, 라는 말부터 먼저 해요. 어떻게 하느냐, 무조건 안한대요.
공부하라고 하면 안 해, 라고 해놓고 자기가 알아서 공부해요. 참된 사람이 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예언을 해 놓아서 예언한대로 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인간이며 그 예수 그리스도에 소속된 지체만이 참된 인간에 소속된다는 것을 이미 예언한 거예요. 그 예언을 위해서 인간이 아닌 흙들을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아담의 이름으로 만들어놓은 거예요. 우리는 주님의 작전에 말려든 겁니다. 똑똑해서 신학이니 철학이니 공학박사가 아무리 되어도 당신 작년보다 많이 늙었네, 이 말에 다 기분 나빠해요.
아무리 능력이 많고 아는 것이 많아도 “너, 작년보다 더 주름살이 늘었네.” 하면 기분 나빠해요. 왜, 내가 늙어죽는다는 것은 나의 역사 속에는 없는 이야기잖아요. 죽는다는 이야기를 칼로 잘라서 내 버리기 위해서는 내 욕망이 원하는 것, 나는 안 죽어, 나는 죽을 이유가 없어, 라는 것을 기초로 해서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내야 되는데 그 환상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뭐냐 하면, 바로 외부의 모든 변화들을 내가 살아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긁어모은 거예요. 그런데 그것마저 안 될 때는 자살해 버리고.
그런데 인간이 자살을 해도 죽으면 천만다행이에요. 문제는 사람이 자살을 해도 안 죽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5장 28절에 보면……, 정말 무서운 말인데, 내가 너 죽인다는 말보다 너 절대로 안 죽인다, 이 말이 더 무서워요. 27절부터 보면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인자를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지근지근 밟아서, 내 맘에 안 드는 내 인생을 지근지근 밟아서 독극물을 먹든 뭘 하든 죽이고 싶은데 이게 죽어야 말이지요. 내가 나를 죽여도 주님이 도로 살려냅니다. 죽여도 또 살려내요. 죽여도 또 살려내요. “네가 누구 맘대로 죽어? 너는 못 죽어.” 우리가 못 죽고 안 죽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것이 영원한 저주입니다. 짜증나십니까? 칵 죽으면 그만이지요. 우리 집안의 어른이 맨 날 하는 소리가 “소주 먹고 칵 죽어버리면 되지. 의료보험 하지 마라. 내가 그냥 늙어 죽을게.” 맨 날 그런 소리 하셨거든요. 그냥 늙어죽는다고.
제가 속으로 ‘아버지는 안 돌아가십니다.’ 무덤에 가도 예수의 손아귀에서 못 빠져나와요. 왜, 예수님은 예언이고 우리는 역사거든요. 우린 역사에서 사라지면 나도 사라진다고 여기지만 주님의 예언은 우리를 못 사라지게 만들어요. 종교, 기독교, 교회, 아무 의미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언이에요, 말씀, 복음입니다. 교회 몇 년 다녔다, 기적 체험했다는 이것은 전부 다 자기 역사 속에 포함되어 있는데 해보니 뭐합니까? 그것을 안고 지금 늙어 죽어가고 있는데. “그래, 우리도 죽어서 부활하면 되잖아.”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뿐이에요. 왜 그런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거든요. 하나님이 개입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라서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말이지요. 아버지가 살려줄 때 그게 사람이 되고 그게 영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살려주기는커녕 우리는 뭐든지 독자적으로 내 미래는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나의 죽음이 나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백날 천번 만번 죽어도 우리 운명은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예언에 의하면, 언약에 의하면 따로 결정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제가 신학교 가고 난 뒤에 많은 신학책이나 철학책들을 보고 지금도 보고 있지만 사람들, 신학자들, 목사들이 크게 오해하는 것이 있어요. 율법으로 실패하거든 그 다음에 예수 믿어라,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율법으로 안 되거든 ‘안 되니까 예수나 믿어서 천당이나 가야지.’ 이런 소리를 하는데 그것은 오해이십니다. 로마서 4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이야기를 해요. 믿음에 실패하거든 율법 속에 있는 줄 알아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율법으로 바르게 살아보자, 라는 것 자체가 믿음에 실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알기 쉽게 말해서 ‘내가 주님의 지시에 따르고 명령에 따라야지.’라고 하는 자체가 이미 그것은 믿음에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은혜에 속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살려줌으로 개입한 사람이 바로 믿는 자에요. 예수님의 정보를 우리 속에 칩으로 집어넣는 것은 우리가 알아서 수술해서 우리가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집어넣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거든요.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쳤습니다. 바친 이유,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인 이유가 뭐냐, 진짜 하나님의 아들은, 이삭이 아들이 아니고 이삭을 죽이는 현장에 나타난 숲속에 있는 겁니다. 누구냐, 수양이 있어요.
진짜 아들은 숲속에 있는 수양에 있는 거예요. 그 양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에 속한 아들을, 아브라함에 속한 아들을 죽어야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죽어가고 있음을 알 때 비로소 우리 자리에서 내가 이길 수 없는 죽음을 이기신, 세상 죄를 지신 어린양이 출발한 그 현장이에요. 내가 스스로 죽을 때가 아니라 나를 하나님이 죽이시는 약속 앞에 데려가게 하는 그 힘이 우리에게 뭔가 보여주려는 힘이에요. 뭘 보여주는가? 진짜 예수님 때문에 오늘날, 2013년 3월 3일 날, 오늘도 숨어 있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 속에 살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의 약속 속에, 예언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려주는 거예요. 이것은 지키고 안 지키고, 가 문제가 아니고 창세전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원래 그런 거예요. 그냥 막 사세요. 원래 그게 그런 거예요. 막살아도 죽고 안 막살아도 죽어요. 이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예배, 헌금, 기도, 전도,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 없어요. 알바니아인가 어느 도시에서 연극을 하는데 연극 시작했는데 어떤 부자가 늦게야 들어왔어요. 실내가 어두워서 여기 저기 부딪히기도 하면서 들어가는데 무대 위에 있는 배우가 하는 말이, “누가 나의 침묵을 깨느냐?” 했어요.
그 부자가 하는 말이 “실은 제가 일찍 오려고 했는데 바이어도 만나고 차도 막히고 해서 제가 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있어요. 누가 나의 침묵을 깨느냐, 하는 것은 오는 손님과 관계없이 그냥 연극 대사였어요. 배우가 대사를 했을 뿐인데 자기보고 하는 소리인줄 알고 변명을 하다 보니 극장을 시끄럽게 만들어버렸어요. 예수님은 지금 연극배우입니다. 예수님이 멘트를 날려요. “없는 자를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린다.” 원래 사라의 태가 죽은 거거든요. 죽은 이삭을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언이거든요.
하나님의 예언을 이야기하니까 관객 속에 있는 우리가 하는 말이 “하나님, 잘 믿으려고 애를 썼는데 요새 왜 그리 바쁜지요. 교회 몇 주 못 나왔습니다.” 이렇게 구시렁거리고 있더란 말이지요. “헌금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경제가 어려워져서 갑자기 다른 데로 돈이 들어가 버렸습니다. 다음에 할게요.” 이렇게 구시렁거리고 있더란 말이지요. 예수님은 지금 예수님 자기 자신보고 자기 대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주님이 벌려놓은 그 영원한 나라에 이미 들어와 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는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겁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이 뭔지를 몰라요. 젊었거나 늙었거나 다 마찬가지지만. 나이 한 70된 분보고 “이제 나이도 들고 교회나 나오시면 되겠네요.” “교회 나오려고 하니 뭐가 잘 안되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당신이 교회 나와서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니고 지금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그 잃어버린 것을 성경말씀이 이야기해준다는 거예요. 뭘 잃어버렸는가? 생명나무를 잃어버린 거예요. 그것을 잃었으니 환상뿐인 자기역사만 남은 거예요.
그 잃어버린 것이 내가 소유하지 않았기에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 속에 그것이 장착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이 평소부터 내속에 있었음을 우리는 잃어버린 거예요. 그 사실을 인식을 못하고 인지를 못한 거예요.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된 사람한테는 이미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죽는 이유는 우리가 십자가 앞에 두고, ‘내가 죽어 마땅하구나.’ 그런데 부활을 보고 ‘우리는 살아 마땅하구나.’ 그게 잃어버린바 된 그 내용이라는 말이지요.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하는 그 사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새롭게 뭘 하라는 말입니까? 아무것도 할 것도 없지요. 사실은 세상적으로 보게 되면 할 게 많아요. 지금 형광등 좀 다 갈아야 돼요. 형광등도 그렇고 생중계도 되나 안 되나 골치 아프고 청소도 해야 되고 할 것이 많아요. 그런데 그 할 것을 안 하겠다는 것은 자기 환상이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것을 한다고 해서 교회가 영원한가, 교회조차도 또 환상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뭘 하든지 간에 이것을 하게 된 것을 감사하시면 되는 겁니다. 결국 마지막 나오는 것은 감사에요, 감사!
군에 갔다, ‘하나님, 후방으로 좀 빼주세요.’ 이러지 말고 ‘군에 갔는데 주께서 가게 하셨구나. 교회 왔는데 주께서 오게 하셨구나.’ 내가 군에 가려고 노력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구나, 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게 하신 이유는 그것만이 우리가 환상이 아니고 예수님이 무대 위에서 날리는 멘트가 여전히 우리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겁니다. “누가 이 진실을 가로막는가?” 하면 속으로 ‘제가요. 제가 제 인생의 주인공이 아닙니다.’하면서 우리는 그 연극에 몰입하지요.
하루는 대구반월당 지하도에 내려가 본적이 있어요. 그 며칠 전에 뉴스에서 울산 태화강 근교 전봇대에 까마귀가 새까맣게 앉아있는 것을 비춰주면서 심각하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울산 사람들 참 애먹겠다, 했지요. 그런데 반월당 지하상가에 가니까 웬 까마귀들이 죽 앉아있어요. 보니까 전부다 노인네들이에요. 한 번 가보세요. 노인들이 죽 앉아 있어요. 저게 인생이라는 말이지요. 그 사람들이 20년 전이나 30년 전만 해도 잘나갔던 사람들이거든요. 다들 한자리씩은 했을 것인데 전부 다 까마귀처럼 앉아 있더라는 말이지요. 나중에 나도 거기 끼어있을 수도 있고 거기서 짬뽕 한 그릇 먹을 수도 있는 문제고요.
우리는 소모품입니다. 우리가 소모품이라는 것은 잃어버린 말씀을 봐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나를 환상으로 만드는, 나를 멋있게 만드는 그런 내가 지어낸 말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지 마시고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이게 진짜 지시도 아니고 명령도 아닙니다. 그냥 예언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 일만 악의 뿌리다, 그것도 예언이에요. 반드시 그렇게 하게 하실 겁니다. 내가 명령을 따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하게 하실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주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미 창세전부터 예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것이 체험화되어야 될 텐데 우리는 깡그리 무시하고 살아갔습니다. 바라기는 항상 성경말씀이 우리 속에 살아 역사해 주옵소서. 그래서 이미 우리가 예수님과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된 그리스도사람인 것을 아는 감사와 기쁨과 믿음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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