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47강-우상 제물(고전8;1-4) 15062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6. 30. 07:47

2015-06-28 12:39:29 조회 : 125         
   우상 제물 150628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우상 제물(고린도전서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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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6-28 13:28 
우상  제물

2015년 6월 28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8:1-4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오늘 본문에 ‘우상’이라는 단어와 ‘제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현대사회에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단어입니다. 우선 ‘우상’이라는 단어 자체가 교만을 표현하는 단어처럼 간주되기 십상입니다. “너만 참된 신 믿냐? 네 빼놓고 남들이 믿는 신은 다 엉터리는 그런 뜻이냐?”고 항의 들어 올게 뻔합니다.

즉 사회 통합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 용어가 바로 ‘우상’이라는 용어입니다. 또다른 단어는 ‘제물’입니다. 신에게 뭘 바쳐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전(前)-근대적 사고방식에 해당됩니다. 이 과학시대의 미래 대처는 신에게 뇌물 바쳐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합리적 대비책으로 극복되리라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신에게 바쳐서 미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종교계급이 정치계급으로 군림해서 타인들 위에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는 적합지 않는 발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구약 때,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만큼은 참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했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도리어 멸망당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예수 믿는다는 교회가 자기네들이 믿는 예수님에게 멸망당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왜 그들은 멸망당해야 합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 이스라엘 그들도 최종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고대한 메시아가 그들 본인들에게 미움받아 살해당했습니다. 이는 ‘참 하나님 믿기’가 결국에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원수’로 행세하게 하는 힘의 결집체 된다는 겁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곧 우상이다’는 것부터 출발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지 않았고, ‘내가 곧 이단이다’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이라는 말을 낯설어 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보고 내려주신 말씀입니다.

인간들의 온갖 정당해보이는 논리에도 실은 자기 자신의 절대성이 담겨있습니다. 인간이 이단일 수밖에 없는 증거는 이 세상에 대해서 ‘근심’하는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즉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곧 현실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매일같이 느끼고 살아갑니다. 이는 자신이 이 현실에 대해서 감당못할 처지에 있다는 말이 됩니다.

감당 못하면 ‘못난 자’로 살면 되는데, 실은 그게 아니라 ‘아닌 척’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시서 도출된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곧 헛 것이요 거짓된 것이라고 하나님으로부터 평가받는 그 신입니다. 아무리 신을 우대해서 ‘전능하시고 자비하시다’고 추겨세워도 그렇게 추겨세우는 본인을 이단성과 우상성을 지적해내지 못하는 신이라면 우상이요 인간들이 지어낸 신입니다.

참된 중보자는 세 가지의 증거를 나타내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셨다고 성경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고 요한일서 5:5-8에 나와 있습니다.

물과 피와 성령이란 마태복음 3장에 나오는 세례요한의 계시에 의하면,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의 활동하시는 기능을 두고 말합니다. 곧 물세례와 불세례와 성령세례를 두고 말합니다. 물세례란, 죄인 아니신 분이 죄가 지배하는 세례 속에 연합(=세례)해서 들어오시는 것이고, 불세례란, 저주가 주어지는 그 심판의 저주에 합류하신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말하고, 성령세계란, 성령에 의해서 본인이 메시야로서의 증거활동을 성사시키는 힘에 휩싸이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연합, 곧 세례 기능이란, 인간들끼리의 개체들이 결코 그 속성과 성질을 타인에게 내어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게 하십니다. 곧 인간이란 처음부터 휩싸여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단독적인 행위가 하나님께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러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로 인하여 인간은 제대로 ‘하나님의 원수된 ’노릇을 하게 됩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켜보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노력 이전에 벌써 인간들은 우상이 되어있고 이단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곧 헛것이요 아무 것도 아닌 쓰레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쓰레기를 가지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화 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제물의 여성화’입니다. 창세기 35:16-18에 보면,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신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교회는 ‘라헬식 교회’입니다. 곧 남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을 드러내는 교회입니다. 여성성이란 은혜 의존성을 두고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뭘해드릴까요?” 아니라 “주여, 누구십니까?” 즉 “그냥 내버려두어도 상관없는 저를 왜 구원해내셨습니까?”입니다.

은혜를 주신 분을 안다고 것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욥이 하나님께서 원망하면서 자력으로 불가능한 형편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직접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정작 욥이 기대하는 바를 언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욥이 전혀 관심두지 않는 것을 언급하십니다.

그것은 욥이 바라보는 그 시선 따라 하나님께서 해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욥이 생각지도 못한 다른 응시선을 따라 하나님께서 그동안 이끌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별과 바람과 비와 바다와 소나 타조나 하마나 악어나 독수리, 산염소 같은 것으로 질문하시는 욥을 압박합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무 소리 못하는 욥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화시키시는 겁니다. 정말 은혜주신 분을 알게 되었다면 은혜대로 무지(無知)하고 죄짓고 죽으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만이 그분인 것을 증거되는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요구하지도 않은 은혜의 풍성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6-30 06:37 
45강-고전 8장 1-4(우상제물)1506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8장 1-4절입니다. 신약성경 272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8:1-4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본문에 보면 ‘우상’이라는 말이 나오고 ‘제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상이라는 말, 제물이라는 말은 인간사회를 통합하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못하는 용어지요. 이런 단어선택이 인간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는데 적절한가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우상이라는 것이 사실 인간사회에 없는 거예요. “각자 믿고 싶은 대로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데 네가 뭔데 자기가 믿는 것은 참 신이고 남이 믿는 것은 우상이냐?”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식인가요? 남의 신에 대해서 우상이라고 표현한다는 자체가 사회통합에 전혀 기여가 안 되는 용어가 되는 겁니다.



우상, 이런 단어자체가 수상하고요, 사회 통합에 전혀 보탬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방금 했고 또 제물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 제물이라는 말이 오늘날 현대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를 않아요. 제물이라 하는 것은 언제 쓰던 용어냐 하면, 옛날 비가 안 올 때, 나라에 큰 우환이 있을 때 동네 어귀의 큰 느티나무에 새끼줄 매놓고 거기에 절하면서 귀한 제물을 바치는 거지요. 제물이라 하는 것은 언제 쓰는 용어냐 하면, 내 뜻대로 안 될 때, 신에게 뭔가 바칠 때입니다. 그리고 큰일을 치를 때, 기후조건이 살기에 좋지 않을 때, 그럴 때의 제물입니다.



제물이라는 말, 우상이라는 말, 이 두 단어만 해도 오늘날 우리한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요. 제물이라는 것 대신에 기상관측이 있잖아요. 기상관측용 인공위성이 지금 공중에 떠 있잖아요. 기우제를 왜 드립니까? 기상관측을 통해서 구름의 이동상황을 파악하게 되면 언제 비 올지를 다 아는데. 오늘 본문에서 제물이라는 용어를 쓴 것, 이것은 비과학적이고 또 우상이라는 말을 쓴 것은 남의 종교에 대한 폄하, 자기 종교만 옳고 자기가 믿는 신만 참된 신이고 남들이 믿는 신은 신도 아니라는 식입니다. 이렇게 사회통합, 사회의식의 통합에 전혀 보탬이 되지 못하는 용어를 두개로 나눴어요. 우상이라는 것과 제물이라는 것.



제물이라는 말을 쓴 것은 현대적이 아니고, 비과학적이고, 근대이전의 상황이고, 우상이라는 말은 독단적인 종교관을 표현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두개의 단어가 섞여 있는 이 말씀을 우리가 보고 있어요. 보면서 우리는 어떤 마음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면, “믿습니다! 믿습니다!”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 본문, 우상이라는 말과 제물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 이 문장을 보면서 “믿습니다!” 할 마음 준비를 한다는 말은 결국 ‘우리는 비과학적으로 살겠다.’는 사고방식이고 또 ‘내 종교 빼놓고는 남의 종교 다 죽으라.’는 독단적 사고방식을 수용하겠다는 그 말밖에 더 돼요? 이래가지고 대한민국 선진조국 이룰 수 있습니까? 사회평화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 종교라는 것이?



왜 여기에 우상이라는 말을 써서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느냐는 말이지요. 하나의 예를 들면 온 집안 식구가 모였다고 합시다. 설이든 추석이든 모였다 합시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8장의 본문을 봤습니다. 그걸 보고 난 그 뒤에 곧 바로 온 집안이 모인 겁니다. 집안 할머니가 하는 말이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 이름 절에다 다 넣었다.” 할 때 “이모할머니! 그거 우상입니다.” 우상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전날에 고린도전서 8장을 봤잖아요. 그래서 “그거 우상입니다.” 그러면 그 할머니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건 네 생각이고! 그것은 네 종교고 내 종교는 불교잖아. 오늘 가족모임 분위기 네가 다 깼다.”



고린도전서 8장 괜히 봤어요. 안 봤으면 가족 간에 아무 문제없는 것을 가지고 우상이 나오는 본문을 봐가지고, ‘내가 믿는 하나님 빼놓고는 다 우상이구나.’ 그렇게 될 때 앞으로 참 남은 인생 살기가 괴롭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요령을 부릴까요? ‘그래, 나 혼자 입 꾹 다물고 있자.’ 나 혼자 입 꾹 다물고 있으면 촌에서 온 이모할머니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얘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상 좀 펴라. 보기 안 좋다.” 대번에 표 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성도는 남의 영혼을 걱정하거든요. 자기 영혼도 걱정하지만 남의 영혼도 걱정하다 보니까 같은 친척이지만 하는 행세 보면 지옥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뻔히 보면서 마음이 편할 수가 없지요. 우리의 마음이 심난 합니다. ‘괜히 봤어.’ 성경의 우상이야기가 나오는 본문을 괜히 본 거예요. 사도바울의 취지는 이렇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전부 다 거짓말이고, 우상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이단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는 거지요.



“복음을 아십니까?” 이렇게 물으시면 안 돼요. 이렇게 물어야 돼요. “어떤 것을 이단이라고 하지요?” 질문을 그렇게 시작해야 됩니다. “목사님, 어떤 것을 이단이라고 합니까? 장로님, 어떤 것을 이단이라고 합니까? 집사님, 어떤 것이 이단이지요?” 어떤 것이 이단이냐에 대한 답변을 하려면 자기 믿는 것 빼놓고는 전부 다 이단 되어야 되거든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뭐가 들통 나느냐 하면, ‘나는 전에는 이런 이단을 믿었는데 지금은 이단이 아닌 참된 신을 믿는다.’라는 그것만 이야기해서는 안 되지요. 이단에서 참된 신으로 넘어온 그 과정과 절차까지 설명을 내놓아야 돼요.



또 예를 들면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면 구약성경에 우상이 나오는데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점이 뭡니까?” 이렇게 묻게 되면,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점? 우상은 남이 믿는 신이고 내가 믿는 신이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믿는 것은 여호와고 이스라엘외의 다른 신이 믿는 것을 우상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십계명의 제 1계명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다른 민족은 인간 아닙니까? 그 사람은 감정도 없고 의지도 없고 아이큐도 뚝 떨어지는 거예요?



다른 민족은 뭘 믿는가 하면, 신을 믿는다고요. 다른 민족은 신을 믿고 이스라엘도 신을 믿고. 그러면 신이라는 용어를 딱 떼어내 보자는 말이지요. 신이라는 용어를 딱 떼어 내서, 신이 뭐냐? 신은 절대자다. 어떻게 해서 신이 절대자인가? 전지전능,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지배하시고, 미래까지 꿰뚫어 보는 것이 신이다. 나온 결론은 뭐냐? 똑 같네. 똑 같아요. 알라신이나 여호와나 똑같은 거예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 아니 계신 곳이 없는 분이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미래에 상벌을 주시고, 태어나는 것도 주의 손에 의해서 태어나고……, 똑같네요. 무슨 우상이 있습니까? 똑같은데.



내가 보기에 그들이 우상이라면 그들 보기에 우리는 우상이 되지요. 똑같습니다. 그래서 집안 모일 때는 정치이야기와 종교이야기, 이 두 주제는 빼야 돼요. 이거 이야기하면 난리 납니다. 안돼요. 인간이 볼 때에 우상을 분간 못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지금 사도바울은 우상이라는 말을 8장 1절에서 제일먼저 사용했어요.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상이라는 말을 이미 시작한 것은 무슨 뜻인가? “옛날에 다른 민족은 우상 믿고 우리 민족은 여호와 믿는다던 그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이 믿는 여호와가 우상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서 아시지요?”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예수 믿는다는 교회가 예수님한테 저주받아서 지옥 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십니까?” 이것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용어가 문제가 아니에요. ‘여호와’ 혹은 ‘야훼.’ 세자냐, 두자냐,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복음이 어쩌고, 예수가 어쩌고, 십자가가 어쩌고, 백날 이야기해도 ‘이단이 뭐냐’가 규정되지 아니하면 ‘내가 믿는 예수가 이단들이 믿는 예수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냐는 그 말이지요. 내가 믿는 예수, 내가 믿는 하나님이 헛된 신이 아니고 내가 조작해 낸, 내가 상상해 낸, 나 좋으라고 일방적으로 믿는, 내가 원하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갓 바위에서 비는 그런 신과 차이가 난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똑 같다는 말이지요.



자기들끼리 모이면 이단 아니고 자기 빼놓고 다른 데서 모이면 다 이단입니까? 그런 기준을 우리가 스스로 적용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모든 것이 내 위주인데 나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그런 기준을 내가 스스로 내 세울 인간은 일단 없잖아요. 전부 다 나는 빼놓고 남 공격하는 기준을 내세우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사도바울이 우상과 제물, 제물은 더 깊은 이야기인데요, 일단 우상부터 이야기할 때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라고 이야기 한다는 말은 “너희들이 과연 우상과 하나님을 나눌 수 있는 안목을 갖추었느냐?”라고 먼저 묻고 있는 겁니다. 구약에 우상이 나오니까. 제가 우상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아니고 “구약에 이미 ‘우상,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할 때, 다른 신하고 내가 믿는 신하고 차이점에 대해서 내가 명확한 내용을 갖고 있느냐?”고 사도바울이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상과 진짜 하나님과의 차이점부터 먼저 생각을 해 봐야 되겠지요.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단정을 짓겠습니다. 우상이라 하는 것은 ‘뭐가 있다’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신이 우상이라는 겁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에서부터. 내가 여기 있잖아요. 내가 여기 있어서 나중에 죽어서 천국가고, 내가 이 땅에서 복 받기 위해서, 내가 기도응답 받기 위해서 나부터 출발하는 신, 내게 필요한 신, 그게 전부 다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게 우상이에요.



아까 언급했는데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우상을 믿을 때 그게 우상이 된 겁니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하나님은 없어요. 그런데 이미 이스라엘에 속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그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복 받고, 잘 되기를 원할 때 그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요즘 말로 고치면 우리교회가 있으니까 그 교회 잘 되기 위해서 하나님 믿고 예수 믿는 것,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그게 이단이에요. 왜? 그 교회에 내가 속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한 겁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근거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진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학수고대했던 그 메시아가……, 초점은 이거예요, 그 하늘에서 오신 진짜 하나님이 누구한테 살해당했는지를 조사해봐야 돼요. 누구에게 살해당했나? 알라신을 믿는, 아니 그 때는 알라신은 있지도 않았지만, 다른 민족에게 살해당했습니까? 예수님이 살해당한 것은 자기 백성들이라는 여호와 믿는 그들에게 살해당했어요. 이 말은 오늘날 예수님이 누구한테 살해당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머리 되신다고 하는 교회의 그 교인들에게 살해당하는 그 식이라 그 말이지요. 예수 믿는 자들에 의해서 진짜 예수님이 살해당하신 거예요.



그동안 뭘 믿은 거예요, 도대체? 예배당 꼭대기에 십자가 걸어놓았거든요. 십자가가 뭐냐 하면, “우리가 살해하신 분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살해한,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믿었던 그런 신앙심, 그런 종교심에 의해서 오해받아서 돌아가신 분을 저는 믿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진정한 적이 되고, 가해자가 되고, 진짜 피해자, 오직 나에게 피해를 받은 그분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교회 온 것은 왜 우리가 가해자 될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를 들춰주기 위해서 말씀을 준 거예요.



복 받기 위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왔다는 그 자체가 예수님을 살해하는 동기가 된다 그 말이지요. 교회부흥과, 성장과,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것이 예수님을 죽이는 동기가 돼요. 원인이 된다고요. “목사님은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으시면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것이 뭐냐? 제물이 나와요. 오늘 본문에 우상과 제물, 두 가지로 나온다고 했지요. 이것은 현대인들을 통합하는데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 적절치 않은 용어라는 그 말입니다. 우상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관심 없어요. 그리고 제물은 더더욱 관심 없고요. 과학시대에 무슨 제물이 필요합니까? 그것은 무책임한 짓이지요. 과학적으로 따져야지요. 제물을 바쳐서 하나님을 달래서 복 받는 것, 그런 것은 우스운 기복신앙밖에 안되잖아요.



그래서 현대인들은 똑똑해서 제물 같은데 신경 안 써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현대인들인 우리를 거기에 집어넣어버립니다. 그게 바로 우상이고 그게 바로 제물을 죽게 만드는 동기가 된다는 겁니다. “네가 하나님이 일을 하는 것을 아느냐?” 그 말이지요. 여러분이 욥기를 읽어 보셨습니까? 욥기에 보면, 욥이 굉장히 부자였고 자식들도 다 잘났는데 하루아침에 다 죽었다는 그것부터 욥기가 시작해요. 욥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 하고 버티니까 마귀가 “쟤가 아직 몸이 성하니까 저런 헛소리를 하지요.” 하니까 하나님이 욥의 건강마저 빼앗아보라고 허락해서 그 때부터 마귀가 장난을 해서 욥이 아프기 시작합니다.



욥은 이유도 모르는 채 계속 아픕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잠도 못잡니다. 버티다버티다 드디어 욥의 입에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이제는 욥이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선을 넘었어요. 욥의 고민과 근심은 이런 뜻이에요. 인간이 근심한다는 것은 이미 이 세상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 인간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인생을 감당을 못해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우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억지를 부리지 마세요.



세상은 하나님의 법대로 움직이고, 인간은 법을 모르는 채 그 속에 있으니 이게 일치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분통과, 울분과, 화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교회 새벽기도 나와서 내뱉는 것도 전부 다 분통이고, 울분이고, 원망이고, 화풀이고, 따지고 데모하는 거예요.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데모하는 거예요. “제가 더 이상 어쩌란 말입니까?” 데모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구원의 절차라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구원의 절차라면? 그렇게 해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에게 따지고, 하나님이 지금이라도 눈앞에 보인다면 하나님이라도 죽여 버리겠다는 욕망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그것이 내 구원의 과정에 포함이 되어 있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 과정 받아들여야 돼요. 감수해야 됩니다.



주님한테 욕하는 자만이 주님한테 구원을 받아요. 점잖은 체 하지마세요. 우수한 존재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신앙 좋은 척 하지마세요. 신앙 좋은 사람 없습니다. 화를 내는 자만이 본인의 본색이 드러나고 그 본색의 자리에서 고난 받는 주님도 새롭게 각인 되는 거예요. 새롭게 느껴지는 겁니다. “주님이 누구시죠? 이렇게 나에게 욕설을 들어도 오늘도 은혜를 주시고,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내가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준 당신은 성질도 없으십니까?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 나에게, 나만 생각하고, 나만 위해서 살아가는 나를 은혜로, 은혜로 매일같이 살려내십니까?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도바울이 만났던 하나님이 그 분이에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너는 대체 누굴 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너는 몰라도 돼.” 이단이란 뭐냐? 이단이란, 자기의 존재를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서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신은 전부 다 이단입니다. 이단이 아닌 신자는 뭐냐 하면, “은혜 안줘도 되는데 왜 은혜를 주십니까? 저를 구원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렇게 성질머리 더러운 저를 왜 구원하십니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것이 인간세상인데, 주지도 않았는데, 왜 일방적으로 은혜 주시고, 영생주시고, 천국주시고, 생명주십니까?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누구시기에 저를 언제 봤다고 저에게 은혜를 그냥 주시는 겁니까?” 이것만이 이단이 아니에요.



그래서 은혜주시는 분, 은혜주시는 분을 여러분이 만일에 알게 되었다면 앞으로 여러분 인생에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여러분은 그것과 상관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기죽을 일이 없어요. 이미 은혜 주신 분을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 내 인생이 망가져도 기분 좋아요. 감사합니다. 욥의 경우에 욥은 스스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요. 그저 화만 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직접 욥에게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찾아와서 인간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서 나자빠질 때, 원망만이 나올 때, 그 때 주님께서 욥에게 행한 해결책이 뭐냐?



그 해결책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해결책이 뭐냐? 불가능한데,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해결책이 뭐냐? 그 해결책이 욥기 38장부터 죽 나오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찾아와서 하시는 말씀이, 제일먼저 별 이야기부터 했습니다. 그 다음에 바다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바다이야기를 했어요. 그 다음에 바람 이야기했고, 폭우 이야기했고, 우박 이야기했고, 비 내리는 것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암사자 이야기했고, 산에 있는 염소 이야기했고, 들 나귀 이야기했고, 들 소 이야기했고, 타조 이야기했고, 타조 새끼 낳는 것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말 이야기했고, 매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독수리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하마 이야기했고, 악어 이야기했습니다. 욥기 38장부터 41장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욥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요? 지금 욥은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거든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데 하나님이 욥에게 찾아와서 행한 해결책이 뭐냐? 욥이 전혀 관심두지 않는 쪽 이야기를 해요. “북두칠성을 네가 아느냐?” 지금 몸이 아픈 사람이 북두칠성을 왜 봅니까?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욥 39:1) 지금 내 몸이 아픈데 염소새끼 낳는 것을 왜 관찰해야 됩니까? 생물학자입니까? 하마 이야기하고, 소 이야기 하고, 타조 이야기하고.



도대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식으로 욥에게 찾아오느냐는 그 말이지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우상의 자리 없이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음으로 자기는 우상 섬김이 아니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 찾고, 예수 찾고, 교회 찾아 나오는 이것이 우상행위에요, 우상행위. 태어날 때부터 이단으로 태어나서 우상 되는 교회, 우상 되는 예수 찾고, 삼위일체 찾아서 온 거예요. “왜 목사님은 자꾸 인간을 이단이라 합니까?”



왜 이단이냐 하면,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감당을 못하기 때문에 이단이 되는 거예요. 우리 인생문제에 있어서 감당 못해요. 내일 일을 알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우상이지요, 뭐. 그러면 이단 되는 거예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니까 내일 일을 자꾸 조작을 해요. ‘아마 내일 되면 좋은 일 생길 거야, 아마 일 년 후에는 잘 될 거야.’ 이렇게 조작이 되니까 그게 주님의 현실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애써서 빼내는 현실로 잘못 조작을 한 거예요.



유-튜브에 자매인 꼬마들이 격렬하게 논쟁을 하는 장면이 있어요. 경상도 애들인데 세 살 먹은 애가 다섯 살 먹은 언니한테 막 대들어요. (자매 둘이 바짝 마주보고 서서 노려본다. 둘 다 팔을 허리에 바짝 올려붙이고는 카랑카랑한 경상도 말투로) “내가 니보다 조금 작그든~! 그니까 양보해 줘야지.” “니가 내보다 두 살 작은데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러니까 양보해 주라구.” “뭘 양보해?” “언니가 때리니까 양보해 주라구 하지.” “야! 그게 양보해 줄 일이가.” “그래, 양보해 줄 일이다.” “그래서 머하게?” “어~엉?” “그래서 머하게~?” “양보해라!” “양보해조서 머하게!” “양보해 주믄 아이들이 좋아할 거 아이가” “아이? 나도 아이다.” “언니는 크고 난 아이고 언니는 언니고!” “그래! 니가 나보다 두 살 작은데 그거가 머할낀데?” “언니는 집에 오면 성질내고 그런다” “네가 그러니까 내가 성질을 내지.” (그러다가 갑자기 동생이 카메라를 쳐다보더니 신경질적으로) “찍지 마라! 와 찍고 있는데!”



“찍지 마라.” 제가 인간에 대해서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이 이거예요. 둘이 논쟁을 하다가 제 3의 시선을 발견한 거예요. 아버지가 캠코더로 어린 자녀들이 티격태격 하고 있으니까 귀여워서 찍은 거예요. 갑자기 애가 “찍지 마라.”고 고함치니까 아빠가 기죽어서 슬그머니 카메라 샷을 옮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간이 그냥 논쟁할 때는 마치 진리에 대해서 논쟁하듯이 해요. 복음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있지요. 전부가 거짓말입니다. 남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찍지 마라.” 그거예요. 날 위한 천국, 날 위한 영생, 날 위한 예수, 날 위한 하나님, 결국 이게 이단이에요. 이게 이단이고 이게 우상숭배입니다. 나 자신이.



“찍지 마라!” 얼마 전에는 우리 집에 그런 일이 있었지요. “어머니! 이 좀 닦읍시다.” “닦을 이빨이나 뭐 있겠노. 몇 개 안 남았다.” “몇 개 안 남아도 그걸 닦아야 안 아픕니다. 그래야 병원에 안 갑니다.” “그러면 빼뿌라.” 이래요. 어떤 놀라운 논리도 그 끝에는 뭐냐 하면, 날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날 건드리지 말라.” 그래서 예레미야 10장 14절, 이사야 45장에 보면, 우상이 뭐냐? 우상은 거짓이고, 놀라운 것은 우상은 거짓보다 더한 위선이라고 합니다. “나는 나를 감추고 있는데 하나님 네가 뭔데 내가 감춘 것을 드러내는가? 하나님, 찍지 마라.”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면 되지 내 본색에까지 기어들어올 필요가 뭐가 있느냐? 내가 기도할 때 응답하고 예배드릴 때 복 주면 되지 그런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나 자체의 정체를 꼭 밝혀내야 속이 시원하냐? ‘니는 언니고 나는 아이 아이가!’ 너는 하나님이고 나는 부족한 인간인데 복 줘야지. 영생 줘야지. 불쌍치도 않나?” 그 말이에요. 쥐어박았으면 좋겠어요.



교회 자체가 이단입니다. 기독교 자체가 이단이에요. 교회란 게 인간 모임이고 그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이단으로 태어났으면 그 인간들 모여 봐야 이단이지요. 이런 식입니다. 어떤 사람이 위대한 미술작가인데 너무 위대해요.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가다 쓰레기를 보니까 차곡차곡 채워진 쓰레기의 모양이 아름답게 보인 거예요. 우연히 모여서 쓰레기가 되었는데 그 쓰레기가 쌓인 모양이 예쁘거든요. 작가가 전시회를 앞두고 고민을 하던 중이었어요. ‘기발한 작품을 내야 하는데 아이디어가 뭐가 있을까? 변기통 거꾸로 해놓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이미 다 해버렸고 창조적인 것이 없을까?’ 했는데 불현듯 쓰레기에서 아름다움을 본 거예요. 그 쓰레기를 전시장에 그대로 전시해놓고 ‘26-무제’ 이런 식으로 제목을 붙여놓은 거예요.



평론가들이 사진을 막 찍어대면서 “21세기를 선도할 새로운 작품이 나왔다.” 했는데 쓰레기 줍는 할아버지가 ‘어디 쓰레기가 또 있나?’ 하고 돌아다니다가 쓰레기로 된 전시된 작품을 보고 홀랑 가져간 거예요. 그거 작품 절도죄입니까, 아니면 쓰레기수집이에요? 어떻게 됩니까? 인간 자체가 쓰레기거든요. 쓰레기가 종교를 만들고, 기독교를 만들고, 멋지게 학문을 연구하고, 과학을 발달시켰는데 주님께서는 “무슨 쓰레기가 이런 쓰레기가 있나.” 하고 가져가버리면 우리가 평생 노력한 것이 뭐가 돼요?



본래의 모습으로 주께서는 다루십니다. 본래의 모습으로. 이게 바로 제물이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제물은 쓰레기를 바쳐서 그 쓰레기 바친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방식을 채택했는데 “하나님이 만든 제물을 주면 내가 복을 주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든 제물이라 하는 것은 특별한 제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제물을 바치는 우리가 쓰레기입니다.” 하는 고백과 더불어 바칠 때 그것이 바로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이 세상을 본받지 않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인데요, 하나님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남자 다섯 사귀고 여섯 번째 남자를 사귀고 있던 어떤 아줌마, 그래도 이 아줌마가 양심은 있어서 양다리는 안 걸쳤는데, 그 아줌마를 가지고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제물로 변경시켰습니다. 물론 그 아줌마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일곱 번째 사나이를 더 이상 안 사귀었다는 보장은 없어요. 그런 것은 상관없어요. 왜 하나님께서 제물을 이렇게 아무 쓸모 짝도 없게 만들어서 가져가시느냐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셨을 때 두 사람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인 바리새인이 하는 말이 뭐냐? “내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구제하고, 십일조, (그 유명한 십일조, 그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했거든요. 그런데 한쪽에 있는 세리는 감히 얼굴도 못 들고 엎드려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저는 죄인입니다.” 했을 때, 마침 그곳을 방문한 주님께서 죄인이라 하는 그 자가 천국 간다고 하고 자기가 의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지옥에 간다고 선언하고 말았어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게 제물의 효과에요.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그런 식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의 귀한 것을 드려도 반드시 반대급부를 계산하면서 주게 되어 있어요. 우리교회는 꽃꽂이 없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꽃꽂이를 한다, 무슨 봉사를 한다, 성가대를 한다, 주일학교 교사를 한다, 헌금을 한다, 어떤 것을 해도 반드시 내 놓게 되면 내 놓은 만큼의 30배, 60배, 100배의 보상을 기대하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본인이 순수하고 싶어도 순수가 안돼요.



예를 들면, 옆에 있는 집사는 농땡이고 나는 착실한데, 나는 헌금도 꼬박꼬박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데, 그 집사는 기도한 적도 없고 헌금한 적도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집안 애가 대학도 쑥쑥 들어가고 사놓은 땅값도 30배, 60배로 올려주고 내가 땅 사놓은 것은 사기를 당해서 다 날리게 하셨네요. 그렇게 될 때 옆의 사람이 없었으면 고난의 길을 간다고 이야기하겠는데 옆의 사람이 딱 붙어 있으니까, 아무것도 안했는데 불구하고 복을 받으니까 은근히 화가 나지요. 이게 인간입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내 것을 냈으면 내 것을 남의 것으로 끝까지 주지를 못해요. 반드시 내 것 낼 때 뒤에 고무줄이 달렸어요. 고무줄이 달려 있어서 줬다 싶지만 다시 잡아당기면 다시 내 것이 되게 되어 있어요. 모든 신들은 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위해서 신이 존재하는 거예요. 신에게 뭔가 뇌물을 바치면 신이 그것을 받았을 때, 그 신이 갖고 있는 것을 잡아당기면 신이 받고 기분 좋아서 30배, 60배, 100배로 되갚아 주는 것을 계산해서 뭔가 뇌물을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개체는 그 개체의 속성을 다른 개체에서 넘겨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같이 잠을 자도 내 꿈이 이쪽 꿈과 같은 꿈이 아니에요. 내 것은 어디까지나 내 밖으로 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내 생각의 확장일 뿐 내 생각을 줄 수는 없어요. 사랑? 믿음? 그거 백날 해봐야 주님을 소유하겠다는 하나의 소유욕에 지나지 않아요. 내가 하나님께 바친 사랑과 소망과 믿음은 다 나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숨길 필요도 없어요. 뻔한 거예요, 이것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다 그래요. 안 그런 게 없이 다 그래요. 날 때부터 그랬어요. 이것은 맴매 할 일도 아닙니다. 속성 자체가 그런데 어떡하란 말입니까? 그것은 말로 해서는 고쳐지지도 않고. 신앙생활 오래했다고, 목사나 장로 된다고 고쳐지는 것도 아니거든요.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우상이라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에요.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모든 신은 다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여기에 우상제물이 아닌 다른 제물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한 1서 5장 6절에서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내가 가진 재주와 속성은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는 없어요. 인간은 누구에게 자기 것을 내준다는 자체가 근원적으로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돼요. 하나님의 것, 예수님의 것은 우리에게 넘어올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그게 가능해요? 물과 피와 성령으로 가능하다는 거예요. 물과 피와 성령으로. 물과 피와 성령이라면 예수님의 물 한 트럭, 피 한 트럭, 성령 이 만큼, 이렇게 내서 자기 택한 백성에게 골고루 나눠줘야 됩니까?



물과 피와 성령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순차적으로 했던 예수님이 일한 행위, 기능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의인이신 분이 죄 속에 의도적으로 들어왔어요. 따라서 물세례 받는다는 것은, 나는 의인이고 너는 죄인이지만 너 같은 죄 속에 내가 이미 들어온 거예요. 주님의 속성이 죄 속에 이미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게 물로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물로 들어왔지요? 그 다음에 피라는 것은 뭐냐?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피가 효과가 있어요. 그게 세례이기 때문에 연합이 되는 겁니다. 세례란 연합이라는 말인데 연합이 되는 거예요.



성령께서 오셨는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있었던 그 관계입니다. 그 관계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관계로 확장시켜 버렸어요. 마태복음 3장 7절에서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하는 말이 뭐냐? 바리새인들이 오니까 그들을 향해서,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했습니다. “대기하고 있어. 너희들은 이제 죽었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까,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까 회개하지 않는 자마다 물과 불과 성령으로 마지막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연합하러 왔는데 뭘 연합하는가? 물과 피와 성령으로 세상을 덮어버리려고 온 거예요. 그 속성, 심판의 속성, 누가 살아남습니까? 아무도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당신이 정말 메시아가 맞느냐?” 하는 증거가 셋이에요. 물세례, 의인이면서 자진해서 죄인 되신 분. 그리고 아무도 올라갈 수 없는 저주의 자리, 아무도 대신 받을 수 없는 저주를 대신 받은 것, 그리고 아무도 줄 수 없는 성령을 주신 것, 이 세 가지가 증거라는 거예요. 이름이 예수라서 구원주가 아니라 그 세 가지의 기능을 하신 분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 쪽에서 건너갈 수 없는 불가능을 주님께서는 가능케 했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야기 끝나는 겁니까? 아닙니다. 물과 불과 성령으로 우리를 구원했다, 라고 했을 때 그걸 우리가 어떻게 믿느냐는 문제에요. 왜냐하면, 내가 믿는 믿음은 결국은 내 영광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내가 믿는 믿음은 전부 다 가짜거든요. 나 좋으라고 믿는 거거든요. 내 사랑, 내 소망, 내 믿음 전부 다 가짜거든요. 가짜 믿음, “나는 예수님이 물과 피와 성령으로 오신 것을 믿습니다. 자 됐지요? 이제 저에게 구원주세요. 이제 믿으니까 구원 주셔야지요.” 이래버리면 예수님은 날 위해서 존재하는 예수가 돼버려요. 그러면 천국은 뭐냐? 내 세계지 주님 세계가 아닌 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건너갈 수 없어요. 주님께서 건너와야 되는데 자꾸 내 믿음, 소망, 사랑가지고 건너가려고 시도하게 되면 그것도 이단이고 그것도 가짜입니다. 마지막 이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것은 치매 걸리면 다 끝나는 거예요. 젊을 때 “믿습니다!” 해 놓고 나이 들어서 “예수님이 누구지요?” 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어요?” 이게 구원 파들이 묻는 거거든요.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질문을 그렇게 하는데 저 같으면 질문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당신 믿음은 언제 끝날 거예요?” 저는 그렇게 물을 거예요. “당신 정신 상태는 언제까지 멀쩡할 겁니까?” 그거 물을 거예요. 그 이후는 정신이 안 멀쩡하니까.



아, 지금 기독교가 장난치고 있는 거라니까요! 인간을 상대로 장난치고 있는 거예요. 뻔한 것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겁니다. “믿으세요.” “너나 믿어라.” 믿어봐야 너 잘되기 위해서 믿는 것밖에 더 돼요? 그게 사기지 뭐. 설교 막바지에 큰일 났습니다, 지금. 해결책 안나요, 지금 큰일 났어요. 어떻게 할 거예요?



이렇게 하십니다. 창세기 35장 18절에 보면, 야곱이 진짜 사랑했던 아내는 라헬입니다. 라헬이 열두 번째 아들, 마지막 아들을 낳다가 죽습니다. 너무 슬픈 나머지 죽어가면서 태어나는 아들의 이름을 자기가 지어요. “베노니, 그 이름을 슬픔의 아들로 지어라.” 그럴 때 야곱이 보고 “여자여, 네가 오해했다. 슬픔의 아들로 보이지? 그래, 그렇게 보인다. 그게 바로 메시아야.” ‘슬픔의 아들’이 메시아라는 말이지요. 라헬은 참으로 야곱이 사랑했던 진짜 본처입니다. 언니 그거는 1+1 행사한다고 끼어든 거고요. 진짜 사랑하는 것은 본처 라헬이에요.



그런데 라헬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애기를 낳으면서 죽어버려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그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죽을 때,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도 다 죽어버려요. 그래야 돼요. 그래야 된다니까요. 지금 우상의 문제가 뭐냐 하면,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거든요. 누가 이 살아 있는 나를 죽여줘야 돼요. 어떻게 죽이든지 누가 좀 죽여줘야 돼요. 죽여주지 않으면 자꾸 사탄이 나와요. 마귀가 자꾸 나온다니까요.



어떻게 죽이는가? 우리가 열심히 사는 이것이 지금 죽이고 있는 과정입니다. 살려고 애쓰는 이것이 죽는 하나의 양태에요. 한 모습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인간의 철학에서는 보통 다섯 가지를 철학의 주제로 보는 겁니다. 철학은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질문을 만드는 건데요, 어떤 질문인가? ‘무엇이 존재하느냐?’ 존재론, 형이상학이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그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인식론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 그 인식론을 알 수 있는 그 논증, 그 방법이 뭐냐? 논리학이지요. 네 번째는, ‘우리는 그 진리대로 어떻게 살 것인가?’ 윤리학 문제입니다. 다섯 번째, ‘선배 철학자들은 어떤 생각을 해 왔는가?’ 철학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철학의 밑바닥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는, 나는 내 관리를 어떻게 하면 괜찮은 존재가 되는가?” 이것과 관계되어 있어요. “신이 있다면 신이 나를 보고 감탄하고 놀라면서 ‘아, 착하구나.’ 이렇게 기뻐하시면 나는 죽어도 천국갈 수 있다.”는 그런 가능성을 내다보고 하는 거예요. 이 철학이라는 게. 그러면 철학만 그래요? 교회 오는 사람들 봅시다. 첫 번째, 무엇이 존재하느냐? 그거야 성경에 나오지요. 성경은 해답이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지요. 두 번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성령을 통해서 은혜로 알 수 있지요. 세 번째, 좋은 논증은 뭐냐? 말씀을 보면, “말씀은 우리에게 교훈하기에 유익하다.”고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있고요. 네 번째,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은 성령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용서하신 것같이 서로 용서하면서 바르게 살면 되고, 말씀대로 살면 되고, 사도바울의 권면대로 살면 되고요. 다섯 번째, 신학은 무엇이 있는가? 기독교교리, 삼위일체교리, 조직신학, 이런 교리를 배우면 되지요.



이게 이단이라니까요, 이게 이단. 방금 한 이게 이단이에요. 이게 교회 이단이에요. 성경을 보고 참조해서 나를 우수한 존재로 탈바꿈해서 그걸 거듭남, 중생이라고 착각하는 것, 이게 이단이라니까요. 왜 그렇게 자기가 살고 싶으냐? 힘을 갖기 위해서. 힘이라 하는 것은 남성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라헬로 제물을 여성화시켜 버려요. 여성이란 뭐냐? 힘없는 자, 약한 자에요. “제발 좀 약한 자 되어라.” 무슨 수로? 사람은 약한 자 될 수가 없어요. 약한 자로 위장해서 약하다는 것 때문에, 약함을 근거로 강자로 튀어나오려는 본성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때려죽어도 약한 자 안 돼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약한 자, 여성으로 만들어요. 여성의 특징은 ‘의존적이다.’ “주여, 왜 저를 살려내는 겁니까? 왜 저를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제가 십자가 피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왜 일찍 내 죄를 없애기 위해서 십자가 피를 흘렸습니까? 그리고 왜 저로 하여금 그것을 알게 하십니까?”



괴테의 <파우스트>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의 마지막 구절이 이거예요. “여성이 우리를 구원한다.” 이 말은 뭡니까? “남자나 여자나 개나 소나 전부 다 남자처럼 힘센 척하고, 가진 척 하고, 소유하고 싶어서 환장한 세상에서 모든 것을 빼앗긴 허약한 여성이 우리를 구원한다.” 이것이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정신이고 예수님의 영,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를 제물 화시키는데 “너는 처음부터 쓰레기였다.” 처음부터 쓰레기인데 그 쓰레기가 예수님의 손에 잡히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제물’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사세요. 그냥 모르면 되고요. 그냥 죄지으면 되고요. 그냥 죽으면 돼요. 오늘 본문에 나오잖아요.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해도 괜찮아요. 죄 지어도 괜찮아요. 그리고 죽어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주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은 다시 살기 때문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저희를 주님의 제물로 삼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제물 되려고, 그것을 빙자해서 천국 따내려고, 복 따내려고,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 그런 집단 속에서 우리가 어느새 하나님의 원수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저희들이 깨닫게 해 주옵소서. 날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본심이오니 그대로 십자가 앞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네가 의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