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강-고전 7장 15-17절(구속받지 말라)1505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7장 15-17절입니다. 신약성경 271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7:15-17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본문 15절에 보게 되면 ‘믿지 않는 자와 결혼생활을 계속 지속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이 대목에서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이렇게 윤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갈리게 하라’라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인간동네에서는 명령처럼 나타나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권면이나 신구약의 모든 율법이나 다 명령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살인하지 말라.’ 말라, 하라, 이렇게 나오니까. 그런데 17절에 보면 이것이 윤리가 아니고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냥 살면 된다는 뜻입니다. 하라고 명령 해놓고 “할 필요 없어. 그냥 살면 그게 ‘하라’에 해당 돼.”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하라’는 명령 없이 “그냥 살아.”라고 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내가 내 맘대로 사는 그것도 윤리적으로 정당하구나.’ 그렇게 돼버려요.
그런데 “하라”고 해놓고 “그냥 살아.”가 된다면 ‘하라’의 명령에 복종해서 윤리적으로 정당하게 사는 그것도 하나님이 원하는 ‘하라’에 해당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는 뭘 해도 그것은 죄가 된다는 이야기에요. 제가 생각해도 참 친절해요. 정말 친절합니다. 이렇게 친절한 경우는 별로 없거든요. 이렇게 친절해도 ‘이 근호 목사가 막 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들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윤리적으로 명령한 게 아니냐 하면, 윤리는 반드시 뒤에 뭐가 나오느냐? “하나님이여, 그러니까 저는 정당하지요? 시키는 대로 한 거니까 정당한 거 맞지요? 정당하면 내가 은밀하게 원하는 것 주세요.” 반드시 이게 나와요. “내가 주님이 시키는 대로 고생도 하고, 고난도 받고, 교회 충성 다 할 테니까, 다 할 테니까,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셔야 우리의 계약, 흥정이 되잖아요. 주세요.”라고 그 뒤에 노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복음대로 살게요. 복음 믿을게요. 그러니까 주세요.”
‘주세요.’ 한다는 것은 그만큼 정당하다는 뜻이거든요. 주님께서는 인간의 정당함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네가 내 말을 오해했구나. 네 윤리와 도덕이 괜찮다는 뜻이 아니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 하나님의 은사를 선물이라고 하거든요.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시고 부르신 그대로, 이게 은사, 선물입니다. 할당받은 자기 자리에요. 이 성령의 은사가 너의 윤리와 도덕의 정당함으로 가리지 않는 것을 주께서 원하십니다. 우리의 잘남으로 주님의 잘남 앞에서 얼쩡거리지 않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치워버려라. 내가 하는 말은 윤리 도덕에 관한 말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네가 윤리와 도덕을 쥐고 나의 정당함을 발휘하겠다는 것은 지금 형편보다 더 나은 형편이 나에 부합된다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신 대로’ 이 말이 엄청나게 무서운 말이에요. “인생 꼬였느냐? 그것도 주신 거야.”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주신 것은 우리가 뭘 해도 실패하도록 조장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세상입니다. 이 소리 했다고 또 멱살 쥐지 마세요. 창세기 3장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이미 본래의 인간이 아니에요. 범죄한 인간입니다. 범죄한 인간에게 주어진 합당한 조건은 저주밖에 없어요.
자기 죄도 모르니까 저주가 부당하게 보이지요. 자기 죄를 안다면 저주가 합당하게 보일 겁니다. “그 합당한 하나님의 조치는 나에게 저주가 합당합니다.” 하는 그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 안에서 이걸 윤리도덕적 차원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이유가, 이 말씀에는 두 개의 세계가 겹쳐서 중첩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여기에 자기가 있다는 그것을 사건으로 쳐요. 사건으로 간주해서 이 사건을 남에게 알리기 위해서 뭘 사용하는가? 기호, 또는 언어를 사용하는데 처음부터 글자부터 배우는 천재는 별로 없고요, 말부터 배워요.
그 말이 어디서 나온 말인가? 자기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자기 주변에 날아다니는 말이에요. 엄마가 나에게 호칭하는 그 말 중에서 뽑아서 자기 말로 만들어서 그걸 엄마한테 되돌려 주는 겁니다. “엄마! 젖 줘.”라고 어린애가 이야기 하는 것은 이미 엄마가 “젖 줄까?”라고 먼저 했기 때문에 ‘아하, 그 뜻이네.’ 하고 감 잡아서 젖 달라고 하는 거예요. “엄마, 냉장고 줘.” 이러면 젖 안 줍니다. ‘얘가 냉장고를 왜 찾지?’ 그렇게 하겠지요. 이미 애가 엄마와 어른들 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끄집어내서 사용하는 겁니다.
그 말을 왜 사용하는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본인에게 하나의 사건이고 그 사건을 남에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문자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 젖 달라는 이야기를 미국에서 하면 젖 안줘요. 미국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미국에는 다른 언어가 있다고요. 한국말로 하는 것은 미국에서는 실패하는 거예요. 내가 진짜 요구하는 것,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는데 있어서 언어가 자꾸 실패합니다. 그걸 미끄러진다고 하는데 정확한 언어가 없이 자꾸 실패해요.
언어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으니까 누가 답답하냐? 본인이 답답하거든요. 본인이 무엇에 답답한가 하면,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정립하는데 늘 실패해요. 쉽게 해서 인간은 늘 실패합니다. 내가 누군지를 표현 하는데서 늘 실패해요. 실패하는데서 어떻게 하느냐? 더 그럴싸한 것으로 자꾸 바꿔나가는 겁니다. 이것이 대체고 대신입니다. 흔히 통용되는 말로 하면 ‘팔자 한 번 고쳐볼까?’ 그겁니다. ‘내 인생 팔자한 번 고쳐볼까?’ 그걸 속물적으로 표현해서 뭐냐? “인생은 한 방이다.”
‘한 방 부르스’라는 말이 있거든요. 점잖은 사람은 무슨 소리인지 잘 모릅니다. 나이트클럽 다니는 사람이나 알지요. 부르스 한 번 당겼는데 좋은 남자 만나서 팔자 고쳤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방 부르스’ 라는 그 말이 있는데 그런 것은 몰라도 됩니다. 인간은 어린애든 어른이든 자꾸 자기 자신을 바꿔요. 이게 내 욕구에 맞을까, 이게 내 욕망을 만족시킬까, 계속 바꿔나갑니다. 직업도 바꿨다가, 이름도 바꿨다가, 철마다 옷도 바꿨다가, 넥타이도 바꿨다가……, 이게 어울릴까?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정말 나에게 합당한 자리인지 바꿔보는 거예요. 그 바꿔보는 게 뭐냐? 늘 실패한다는 말입니다. 오래 지속을 못해요. 집도 맨 날 바꿔요. 30평에서 40평, 40평에서 50평, 그런 능력이 있으면 기쁘지요. 계속 바꾸는 겁니다. 그러다가 잘못되면 또 10평으로 내려가고. 음식도 이 집 가서 먹어보고 ‘이제 단골이다.’ 했다가 단골한지 한 달도 안 돼서 ‘맛이 이상해.’ 하고 다른 곳으로 갔다가 또 조미료 쓴다는 소문 듣고 저쪽으로 갔다가 ……, 계속 대신하고 대체하는 겁니다. 실패지요.
이렇게 실패하면서, 그러면서도 인간이 노리는 게 있습니다. 내가 바꿔치기 하는 것, 내 자리 바꾸기, 이 모든 것, 이렇게 변덕 심한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는 안 그런 척 하기 위해서, ‘하나님, 저 원래부터 착해요.’라고 하기 위해서 교회 나와서 성경을 보는데 그 성경말씀 가운데서 자기를 정당화하고 의롭게 할 만한 것을 추려서 그것을 준수하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거룩한 성경말씀이 세속의 잘남을 증명하는 재료로 변질이 되고 말거든요.
결국 교회는 “성경 보세요.” “왜요?” “그래야 너의 잘남이 표가 나니까.” 그런 식으로 성경해석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성경말씀에 열심히 순종하고 굴복하세요. 왜?” 그럴 때 나는 정당하고 그래서 나는 내 욕망에 맞추기 위해서 “다오! 주세요! 주세요!” 하면서 자리바꿈에 있어서 그 자리바꿈조차도, 그 자리 바꾸는 요구조건 조차도 신 앞에 “나는 당당합니다. 정당합니다!”라고 큰 소리 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비록 지금은 실패하지만 내일은 실패하지 않으리.’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처음부터 실패자가 아니야.’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나는 처음부터 실패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것은 창세기 2장, 3장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말이에요. 그리고 지옥이 있는 것, 심판이 있는 것, 그것도 완전히 도외시하는 거예요. “난 잘났는데 뭐. 심판은 못 된 놈들에게나 하세요. 잘난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런 뜻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은 왜 있는가? 잘난 나를 더 잘났다고 치하하고 감축 드립니다, 하기 위해서 성경 있는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불경과 다를 바가 없지요. 똑같지요. 그런데 성경을 볼 때 왜 그런 식으로, 윤리 도덕적으로 골라잡아서 보느냐는 말이지요. 성경을 제대로 된 안목으로 본다면 이런 구절도 나와요. 요한복음 6장 63절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이 구절 어떻게 처리하려고 합니까?
윤리 도덕이라 하는 것은 육에서 시작한 것인데 성경은 완전히 잘라버려요. “윤리? 도덕? 육은 무익하니라. 네가 너를 살려서 너를 천국 보낸다고? 너의 윤리, 너의 도덕은 무익하니라. 아무 소용도 없어. 지금껏 너는 소용없는 짓을 한 거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이 말씀 가운데 “육은 무익하니라.”라는 대목을 말씀하지 않고 “살리는 것은 육이니”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 다음부터 철야에 들어갑니다. 왜? 현재 있는 것도 정당하지만 이것 가지고는 안 되니까 좀 더 보태겠다는 거예요. 어디 가서? 기도원에 가서 성령 받아서 있는 것도 근사하지만 거기에 보태서 더 근사하게.
교회 나와서 교인으로서, 신자로서 살게 되면 근사한 것 더하기 근사한 것, 1+1, 세일 기간이다, 하나 더하기 하나, 괜찮은 것에다가 더 괜찮은 것을 보태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하는 것도 정당하고, 거기에 남이 안한 더 정당한 것, 교회 나와서 예수 믿어주는 그 정당함을 추가해서 보태버리면, 나는 이 땅에서도 복 받고 천국도 가고, 꿩 먹고 알 먹고, 청소하고 돈도 줍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일거양득, 다 되네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육은 무익하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육은 무익하니라.”를 먼저 보시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를 보시기 바랍니다. 순서가 그래요. “육은 무익하니라.” 왜 목사님은 맘대로 순서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성경을 고치는가? 제가 제 맘대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육은 무익하니라.” 하고 “살리는 것은 영이다.”라고 주님께서 그런 취지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 뒤에 65절에 보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어렵다, 하고 다 가버렸어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먹고 ‘주님이 축복해서 주셨기에, 나는 이제 주님을 통해서 받았기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 맞다.’고 우겼던 사람들 다 가버렸습니다. 내가 먹던 떡과 고기는 내가 원했던 바를 줬을 뿐이지, ‘나는 훌륭하다. 나는 윤리 도덕적으로 정당하니까 나는 구원받아야 돼.’라는 우리의 욕구를 주께서 잠시 들어준 것뿐이지 정작 주님께서 그걸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요한복음 6장 53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어떤 분이 저를 다음 강의 장소로 운전해 주시는 가운데 이 질문을 했어요. “이 뜻이 무슨 뜻입니까?” 꼭 빌립집사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빌립 집사가 마차를 타고 가던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나서 성경 읽던 내시와 이야기하잖아요. 그 때는 마차였지만 지금은 자동차 안이었어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 분은 알아요. 이게 윤리나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왜냐하면 남의 살을 뜯어먹는 것은 윤리나 도덕으로 보면 가장 지저분한, 이것은 식인종이나 하는 짓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다 가버린 거예요. 갈 테면 가라는 그 말이에요. 순서를 못 바꿀 거면 가라는 그 말이지요. “육은 무익하니라.”를 수용하지 않으면 가라는 말이에요. 기도원에서 철야를 해서 성령 받든지 어디서 무슨 은혜를 받든지 그것도 무익하고, 그렇게 받고자 하는 것도 무익하고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것을 모르면 가라는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살과 피는 무익함에 우리가 붙어 있어야 살과 피가 형성이 되거든요. 주님이 자기를 스스로 찔러서 살과 피를 도려내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칼 들고 살 점 헤집어서 피를 쏟아내는 것이 아니고 누가 예수님을 공격을 해줘야 돼요. “공격자가 있어야 되고 공격받은 분이 예수님이고 그 공격했다는 증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네가 먹고 마셔라.” 그러면 네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그 말입니다.
교회 나와서 교회 나오는 것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 교회 나와야 되는 거예요. 교회 안 나오면 도 닦는 사람 되어버립니다. ‘시시한 교회 뭐 하러 가는데? 나는 이미 복음 알았는데.’ 그러면 주의 살과 피의 생산은 누가 하는데? 시시한 놈들이 해요? 본인이 해야지요, 본인이. 본인이 해야지요. 목사님들한테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주께서 목사하게 했으면 목사를 하세요. 왜? 목사를 해야 목사 하는 당신 손에, 목회 하는 당신 손에, 설교하는 당신 손에, 강의하는 당신 손에 예수님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강의하는 도중에 알도록 기회를 부여하신 거예요.
그게 주님의 구원 방법입니다. 성경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주와 함께 동행한다는 구절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나와 주가 동행하게 되면 문제가 뭐냐? 나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존재에요. 그러나 주님은 물질이 없습니다. 가현적 존재에요. 어떻게 가현적 존재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존재가 함께 있다는 것이 어떻게 윤리나 도덕으로 증명이 돼요? 이런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그걸 그냥 믿으라고 하니까 믿지도 않으면서 그냥 쑥 지나가 버려요.
내가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그 말입니다. 희한한 귀신같은 것이 있어서 붙어 다녀야 합니까? 그것을 알아채는 것을 인식이라고 하는데 그걸 언제 알아챕니까? “하나님이여, 지금 주무시는 시간이니 놔두겠습니다. 주무시고 나서 알아챌게요.” 그렇게 하는 겁니까? 우리가 잘 때는 주님도 주무시다가 우리가 잠에서 깨면 주님도 같이 잠에서 깨서 헤헤거리면서 그렇게 동행하는 거예요? 무슨 주님이 잠 모자라서 잠을 주무시고 그런 게 무슨 주님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잘 때 팔짱 끼고 내려다보십니까? 너무 코 골지 말라고 코 쥐어틀고, 그렇게 하십니까? 나사렛 예수님께서 실제로 눈에 보이는 육체를 가지고 오셨을 때에 예수님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그 방식대로 우리가 다루어집니다. 그 방식을 나중에 로마서에서 성령이라 하는데 그 앞서서 예수님 방식은 당황스럽고 절대로 자기를 위해서 살지 못하는 조치가 성령의 은사로 계속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제가 방금 당황스럽다고 이야기했지요? 당황스럽다. 다른 말로 하면 너무 뜻밖이라서 현기증 난다, 이런 표현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던 제자가 있었는데 마침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 사람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정당한 말을 했습니다. “제가 아버지 장례 치르고 가겠습니다.”라고 할 그 때 예수님이 이런 말을 했어요.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 어버이 주일에 최고의 말씀이거든요. 효도 가운데 그거보다 더 좋은 효도가 없습니다. 그 말 들을 때 그 제자는 현기증 날 정도로 당황스럽잖아요. 내가 주를 따라가겠다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해 보이는데 그 정당한 기표, 언어, 의미의 질서, 하나님께서 이 단어 하나에 두 개의 의미체제를 함축시킨 거예요.
이 단어를 인간의 윤리의 정당한 질서체제로 잡아당기는 것은 인간의 오류고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가지고 인간의 윤리를 공격하는 다른 질서, 다른 의미체제를 이 안에 숨겨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동행해야만 당황스러운 현상들이 우리 인생에 일어납니다. 남은 몰라요. 남한테 알릴 필요도 없습니다. 지난 주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죄 지은 거 남한테 알릴 필요 없다고요. “검찰에서 다 이야기할 겁니다.” 하면 끝나는 문제지 다 나팔 불듯이 할 것이 없어요.
이 땅은 윤리적 도덕적 세계에요. 그것은 육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까요? 육은 뭐하다? “육은 무익하니라.” 육은 무익해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에다 영을 결합시킬 수가 없어요. 내가 자꾸 나를 정당화시키는 것이 정당치 않고 무익함을 강요하고 동행하면서 그것을 지적질 하시는 보이지 않는 질서, 그분이 보이지 않는 주의 성령, 주의 영입니다. 남들은 몰라요. 본인은 알아요. “주님이여, 제 인생 왜 이렇게 당황스럽게 만드십니까? 왜 남들처럼 비스무리하게도 안됩니까? 왜 이렇게 몰아세우는 겁니까? 내가 뭘 해야 과거를 보상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17절 그대로입니다. “그냥 살아. 그것도 선물이야. 그것도 할당받은 네 자리야.”
마태복음 19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얼마나 여러분이 당황스러울지 제가 상상해 보겠습니다.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찌어다.” 당황하셨습니까? 천국을 위해서 고자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 있는 거예요. 이 말을 우리 잘남의 질서층, 의미의 영역에서는 천국을 위해서 고자 된 사람 보면서 ‘참 안됐다.’ 동정심이 유발됩니다.
그런데 천국을 위해서 고자된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지금 누굴 걱정하고 있나? 네가 이 고자의 맛을 알아?” 이렇게 나와요. “네가 지금 누굴 걱정해?” 예수님이 붙잡히니까 동네 아줌마들이 나와서 “안됐다. 어쩌나?” 하니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지금 누굴 걱정하고 있나? 날 위해 운다고? 날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집에 있는 딸들을 위해서 울어라.” 인간이 남을 동정한다는 것은 자기는 그런 처지가 안 되어서 기쁘다는 뜻이거든요. 자기는 살만 하다는 뜻이거든요.
아니에요. 아무도 살만한 인간은 없어요. 그것은 다음 되면 또 자리 바꿀 거예요. 또 넓은 아파트로 이사 갈 거예요. 자기의 허접스러움을 바꾸는, 자꾸 뭔가 변화를 유발시키는 것으로 그 때 그 때 땜빵으로 사는 재미와 만족과 자기 정당성을 챙기려고 하는데 그게 바로 무익한 거예요. 오늘 설교 제목이 아주 즐거워요. “구속 받지 말라.” 예속 당하지 말라는 그 말이거든요. 구속당할 일이 없다. 왜? 노는 세계, 영역이 다르니까. 영역이 달라요. 노는 세계, 속해 있는 질서, 의미체제가 달라요.
우리는 주님의 의미를 흠뻑 담아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주께서는 수거해서 주님의 영광 쪽으로 전부 재정립이 되게 되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자기 잘난 맛에, 신 앞에서 맨 날 기도하는 것이 “주세요. 주세요. 다고, 다고! 이 만큼 봉사했으면, 이만큼 헌금 했으면 이 정도 해줘야 우리사이의 거래가, 좋은 관계가 유지되지 않겠습니까?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응답 안하면 응답 되는 교회 갈 거야.’ 주세요!” 협박도 아니고 이건 뭐.
어떤 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말을 했어요. 달란트 비유라는 것이 있잖아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그 이야기. 교회 한 달만 다녀도 아는 그 이상한 구절. 그 구절의 내용이 이런 거예요. 달란트를 관리하는 입장이 아니고 우리가 달란트한테 예속되어 있는 겁니다. 달란트가 주가 되고 우리는 달란트 때문에 사는 거예요. 내가 달란트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왜 그런가? 악한 자는 달란트를 자기 맘대로 했어요. 본인이 주신 달란트를 자기 맘대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나는 정당하니까.
그게 아니고 달란트의 존재 이유가 네가 진짜 지 옥갈 사람인지 천국 갈 사람인지 가려내기 위해서 나보다 우선해서 있는 것이 주께서 주신 은사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윤리적이고 도덕적 차원에서 출애굽 시키기 위해서, 구출, 빼내기 위해서 어떻게 하시는가? 제가 쉽게 이해하도록 해 드릴게요.
어떤 주머니에 빨간 공과 녹색 공을 함께 넣어 놓았다 칩시다. 주머니 안에 있는 공의 입장에서는 너는 나하고 다르다, 차이가 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빨간 공이고 너는 녹색공이니까 차이가 나지요. 차이가 나는데 공통점이 있지요. 둘 다 같은 인간이라고, 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같은 말을 쓸 때 한 형제라고 하는 겁니다. 한 가족, 한 형제라고 하는 거예요. 거기서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하는가? 거기에다 노란 색 공을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니 먼저 들어가 있던 빨간색 공과 녹색 공이 하는 말이 “어? 같은 공 같은데 우리하고 다르구나. 공은 같은데 색은 다르네.”라고 이야기해요. 예수님 보고 뭐라고 하느냐? “어? 목수의 아들이네.”라고 하지요. “아, 요셉 집안의 아들이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동행하시니까 거기서 예수님을 죽게 하셨어요. 죽게 하시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 “요셉의 아들이 죽은 것이 맞네. 왜? 메시아니 뭐니 해도 결국 죽잖아. 죽으니까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 맞아.” 했는데 사흘 뒤에 그 죽은 가운데서 부활시켜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 어디 갔지?”라고 했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부활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어요.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되는 것을 압니다. 인간들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매기는 거예요. ‘나도 인간인데 한 번 예수님을 본받아 볼까?’ 이것은 윤리도덕 적이지 전혀 영적이 아니에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과 전혀 다른 인간인거예요.
다시 말해서 “그 분은 죽음에서 부활되었지만 우리는 죽어 마땅한 똑같은 인간들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더 이상 우리는 같은 인간들을 안 믿게 돼요. 믿음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안 믿는 것부터. 너를 안 믿고 아버지를 안 믿고 아들을 안 믿고, 그리고 그런 나를 안 믿는 거예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이것도 멋진 거예요.(마 10:37) 가정주일에 최고의 성경구절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뭐냐? 너 자신마저 미워하라는 겁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가정의 문제가 우리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 때문이잖아요. 로마서에서는 이 원리를 확장시켜 놓았어요. 확장시켜 놓으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맨 나중에 계신 분이 첫 사람보다 먼저라고 이야기해요. 제일 나중에 오신, 곧 마지막 아담이 첫 번째 아담보다 먼저 된 아담이 되는 겁니다. 아담에 속한, 아담항아리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몰랐지요. 누구도 몰랐지요.
인간들이 왜 예수님을 몰랐습니까? 나부터 출발한 차이점 때문에 그래요. 나부터 출발한 차이점. “내가 저 사람과 다르듯이 예수 당신도 나와 다르다. 당신 믿어줄까? 사랑해줄까? 당신을 기대하고 희망해줄까? 그러면 당신이 구원할래? 그러면 내가 믿어줄게.” 이것은 나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성령의 은사는 그게 아닙니다. “주여, 똑같은 죄인인데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이렇게 돼야 돼요. “창기나, 강도나, 자살해서 죽은 기업인이나, 그 기업인한테 돈 받았다는 도지사나, 다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은 공인데 왜 공이 아닌 분이 더러운 공을 집어서 자기가 만든 예수님의 차이나는 그 하늘나라에 강제로 집어넣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왜 저를 구원했어요?”
기존교회에서 이 말 하면요, 미쳤다고 합니다. 강의 다니다 보면 그런 소리를 많이 들어요. 복음 아는 형제들을 교회에서 많이 구박을 한답니다. 맨 날 그들은 이야기해요. “열심히 믿어야 해. 열심히 믿어야 해.” 이것만 계속 강요한답니다. 지난 번 안양강의에서 들었는데 그 교회를 나왔답니다. 나와도 맨 노랑공이나 빨간 공은 똑같지요. 나온다고 해서 다른 공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문신은 새겼다만 색깔 바꿔봐야 필요 없습니다.
교회 나오는 것, 그것이 또 하나의 윤리적 변신이 아닌지 되돌아봐야 됩니다. 정치 비판하고 교회 비판하는 것,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차이 남에서 오는 시기심의 발로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돼요. 재벌 욕하는 것, 시기심의 발로일 수가 있어요. ‘지가 뭔데 나와 차이가 나?’ 나로부터의 차이, 그것이 나에게 없다는 그 차이 때문에 화가 나서 분풀이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족이라 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분풀이하는 관계? 그것마저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다 분풀이를 합니까?
광주에 이런 신종 업이 있습니다. 스트레스 해소방이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노래방이나 소주방이 있듯이 스트레스 해소방인데 어떻게 하느냐? 마련된 방안에 고물컴퓨터, 고물라디오, 고물TV, 고물책상 같은 것을 놓아두고 야구방망이를 준비해 두었어요. 그러면 아줌마들이 가면 먼저 장비를 챙겨 입어야 됩니다. 보호안경을 쓰고 옷을 입고 장갑 끼고 돈은 십 분에 이만 원을 냅니다. 드디어 안에 들어가면 개 패듯이 야구방망이로 준비된 기물을 때려 부숩니다. 특히 잘 깨지는 질그릇 같은 것을 패는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내가 컴퓨터 게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 자식아!” 하면서 내려치는 거예요. 말이 나오지요, 말.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져놨잖아. 만족을 할 수 없잖아. 컴퓨터게임 그만 하라고 했는데 왜 계속 하는 거야?” 자식욕하고 남편 욕하면서 패는 거예요.
들어갈 때는 2만원이 아까웠는데 나올 때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서 나오면서 속이 다 시원한 겁니다. 약값 충분히 다 뺍니다. 그래서 주인이 놀래요. 예상 밖으로 엄청나게 깨놨어요. 화난 아줌마에게서 이런 놀라운 힘이 나올 줄이야. 하나님의 방법은 이겁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방법을 쓰는 거예요. 나중 되는 그 자리, 예수님께서 고난 받는 그 자리, 그 자리만 유일하게 처음 자리, 근원적인, 아담 이전의 처음 자리가 비로소 보이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를 만들어놓고 놀라운 사실은, 결국은 야곱이 장자자리에 앉습니다. 그런데 왜 야곱을 둘째로 태어나게 했습니까? 일을 왜 복잡하게 하지요? 어차피 야곱이 장자인데? 왜 한국교회가 설교할 때 “여러분, 잘났지요? 더 잘나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왜 이런 식으로 설교해요? 왜 반대로 설교 못합니까? “여러분들이 미처 모르는 근원적인, 여러분이 무슨 짓을 해도, 윤리고 도덕이고 다 치우고 진짜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자리를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왜 그 말을 못하느냐는 말이지요.
그래서 얼마나 죄인이기에, 뭔가 기도하고 헌금한다는 자체도 죄가 되는 것, 이거 해서 정당하니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 건강 달라, 자식 잘 되게 해 달라, 사업 잘되게 해 달라, 이런 요구자체가 더러운 짓이라는 것, 그걸 깨닫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주께서는 제일 나중 사람으로 오신 거예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하나님 됨을 포기하시고 아무도 가지 않는 제일 낮은 자리, 제일 뒷자리, 제일 나중자리에 가신 겁니다.
호칭이 이름보다 먼저거든요. 호칭이 이름보다 먼저에요. 호칭이란 말은 누굴 부를 때 누구의 아들,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부인, 이럴 때는 호칭이고, 남이 불러주는 게 호칭이고 이름은 본인이 갖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호칭을 이름보다 먼저 생각해놓으신 거예요. 예를 들면 <아라비안나이트>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열려라! 참깨!” 하면 문이 열린다는 거예요. 도둑들 이야기잖아요. 어릴 때 진짜 재미있었어요. 세상 살기 그렇게 편해요. 주문만 외우면 되니까. “열려라, 참깨!” 하면 다 열리거든요. 내 인생도 “열려라, 참깨!” 하면 내 뜻대로 다 되니까.
그런데 바보같이 “열려라, 들깨!” 하면 안 열려요. ‘참깨’를 해야 됩니다. ‘참깨’ ‘들깨’는 안돼요. 참깨는 ‘ㅊ’으로 시작하고 들깨는 ‘ㄷ’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기호, 언어가 달라요. 사람들이 자기 구원 받는데 있어서 ‘예수’라고 부르면 된다는 거예요.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이름 불러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은 인간 본인의 이름으로 사는 자에게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자기 이름을 잃어 버려야 돼요. 내가 있으나 마나 한 그 근원의 자리로 가야 됩니다. 그게 우리는 죽이는 방식의 이유입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는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태어났었나?’ 하는 그 자리로, ‘나는 없어도 괜찮지.’라는 그 자리로, ‘내가 사는 것이 그냥 소풍 온 것 뿐이지. 다시 갈 내 집이 어디지?’라는 그 자리로, 내 고향, 내 본향의 집, 근원의 집, 아담 이전의 그 집이 보이는 자리로 데려가기 위해서,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사람을 만났던 야곱이 결국 이스라엘로 바뀌게 합니다. 그 자리,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그 장소에서 브니엘, ‘나는 진짜 죽은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하는 그 자리, 그 자리가 오늘날 십자가라는 언약의 완성의 자리로서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네 아파트 없어도 되는데 내 이름으로 아파트 장만해줬어. 네 아들, 네 딸 없어도 되는데 내 이름으로 네 아들, 네 딸 준 거야.” 오늘 어버이주일 되어버렸네. 가족이라는 것은 나로부터 출발하면 안돼요. 내 자식, 내 새끼, 하면 안 됩니다. 재산 있거든 자식에게 퍼 주세요. 오랜만에 복음 전했다. 자식들 기분 좋아서……. 재산 뭐하려고? 죽을 때 갖고 가는 것도 아니고. 디모데전서 6장에 나오잖아요.
서울의 어느 집사님 댁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어요. 새벽 한 시까지 치킨 먹으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도 그 집사님 부부가 이 설교를 듣고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 댁 아내가 남편 타박을 하는 거예요. 남편이 스마트 폰만 쳐다보면서 자기하고는 이야기도 안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에 제가 그랬어요. “남편 하는 일에 왜 간섭합니까?” 그러니까 그 남편이 “좀 이 주옥같은 말씀을 들어라.” 주옥같은 말씀. 그래서 더 이야기했지요. “남편 일에 간섭하는 것 보니 지금 집사님이 직업이 없지요?” 별 할일이 없다보니 자꾸 가족들에게 신경 쓰는데, 나로 출발하지 말고 주님으로 출발해야 돼요.
내가 없어도 되는 자리로 주께서는 이끄시는 겁니다. 그 자리를 주께서 먼저 스스로 준비했어요. 그게 십자가 자리입니다. 십자가 자리에서 내가 이 땅에 안 태어나도 전혀 상관없는 그 세계,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 땅은 모든 것이 차이 때문에 힘들어요. 근심, 걱정, 두려움, 욕심, 탐욕, 시기, 질투, 이게 차이 때문에 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세계는 차이가 없어요. 차이나는 것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기준을 주님 혼자 독점해 버렸어요.
“너 싸우지 마. 노란 공, 빨간 공, 전부 다 날 죽였잖아. 이미 끝났잖아. 십자가 알지? 이미 죽은 자가 뭐가 잘났다고 서로 싸우나? 싸우지 마. 진짜 심판하는 것은 나지 너희가 서로 심판할게 아니다.” 이게 흔히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사랑이잖아요. 온유고 화평이고. 그 전에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분명히 갈라디아서 6장에 나와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받은 자만이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찾으면 자기 윤리와 도덕이 되어버립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게 되고 “이렇게 잘났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 내놓아라.” 이렇게 하나님 보고 윽박지를 수가 있어요.
에서와 야곱에서 야곱을 나중에 나오게 해놓고 원래의 그 자리가 찾아가는 자리에요. 그 자리는 야곱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야곱이 찾아갈 자리도 아닙니다. 야곱이 형의 장자자리를 탐내서 팥죽 끓이는 것, 그것은 야곱의 죄에요. 야곱이 결국 장자의 자리를 차지할 때 야곱의 이름으로 차지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차지합니다. 중간에 하나님께서 네 자리 말고 내 자리, 네 속에 있는 내 자리, 주와 동행하는 것은 우리를 주의 이름으로 새롭게 접수할 때,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식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이끄시는 목적은 하나에요. “너도 당해봐라. 이 땅에서. 윤리 도덕이라는 그 죄, 사탄이 지배하는 그 죄에 네가 당해봐라.” 그래서 우리가 세상 싫다고 기도원에 들어가는 그것도 사탄의 짓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한 부분으로, 직장이 있고 또 교회도 가고, 이런 식으로 결합하는 것도 사탄의 짓이에요. 그냥 사시되 계략을 꾸미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략. 나 잘남을 보이려고 하지 말고 주어진 환경, 그 환경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예배 전에 제대로 사시는 분의 이야기를 듣고 ‘이게 성령의 역사인가?’ 했는데 오늘 본문과 딱 맞아요. “집사님 따님이 오늘 왜 안 나왔습니까?” 하니까 “봉사시간 메우기 위해서 오늘 못나왔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바로 그거에요. 성령의 삶입니다. 나오고 싶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다른 환경을 마련해 줬습니다. “봉사시간 모자라잖아. 내신 모자라면 안 되지.” 그 환경을 주신 거예요. 과다한 신앙을 욕심내지 마세요. 신앙은 어차피 내 신앙 아닙니다. 있어봐야 다 주님에게 빼앗깁니다. 주님은 양아치에요. 내 것 다 빼앗아가요. 원래부터 우리의 자리는 없는 자리니까.
내가 없을 때 우리는 차이가 없어지는 천국이 되는 겁니다. 내가 있으면 그 순간 천국은 거울 깨지듯이 와장창 다 깨져버립니다. 나의 꿈도 깨져요. 깨진 것을 환경을 탓을 하지 마세요. 내 탓이에요. 나의 욕심이 또 새로운 욕심을 위해서 바꿔치기, 대치하고자 하는 머리를 굴리기 때문에 깨져버립니다. 본인이 화가 나고, 본인한테 분을 품고, 학대하고, 주께서 주신 인생인데 내 맘대로 감사를 삭제하고 미움으로 바꾸는 것.
그래서 주님께서 너를 미워하라는 말은 “기존의 상징세계에서 너 위주의 인간을 미워하라.” 미워하라, 하라, 안 됩니다. 그냥 살아. 내가, 내가 세운 약속대로 하게 만들 때 그 내가 안 되는 그 과정마저도 주께서 알아서 다 해줬어요. 보험회사에서 처리 다 하듯이 알아서 다 해줬습니다. 우리는 살기만 하면서 ‘내가 왜 근원적인 죄를 몰랐던가?’ 나는 기존의 죄를 죄로 알아서 착한 일로 메우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뭘 해도, 교회 나오고 뭘 해도 이게 죄로 볼 수밖에 없다는 그 기쁨,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는 인생이 아니고 누가, 다른 분이 알아서 하는 겁니다.
저를 차로 데려다 주신 그 분이 가면서 간증을 했어요. 이 간증을 위해서는 조건이 있어요. 반드시 개를 키워야 하고 또 두 마리 이상을 키워야 돼요. 두 마리 이상의 개를 키우면서 복음을 알았다는 겁니다. 첫 번째, 개를 일방적으로 씻길 때 개를 위해서 씻기는 게 아니고 냄새가 나기 때문에 씻겼다. 주인을 위해서 개를 목욕시키지 개를 위해서 목욕시키지 않는다는 것. 그게 첫 번째. 두 번째, 개를 씻길 때는 가만있을 때 잘 씻겨지더라. “내가 할 수 있는데!” 이러면 목욕시키는 사람이 힘들어요. 요양사가 노인들 씻길 때도 가만있을 때 제일 좋아요. 개도 가만있을 때. 그래서 우리도 가만있는 것을 주께서 기뻐한다.
세 번째, 목욕 끝나고 개 저희들끼리 하는 짓거리가 있는데 주인 보기에 같잖지도 않고 진짜 개판이더라. 자기들이 부끄러운지도 모르더라. 따라서 우리는 우리 인간들만 보면 주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서로 자기 잘났다고 하더라. 이 복음의 삼종세트. 첫 번째는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지 나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두 번째는 우리가 죄인인줄 알면 그것이 제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 세 번째, 잠시 눈 돌려 우리끼리 볼 때는 그냥 죄만 짓는 것. 너 잘났나, 나 잘났나, 빨간 공, 노란 공, 그것만 하는 것.
그래서 ‘아하, 복음도 개 두 마리 이상을 키워야 되는구나. 한 마리 가지고는 안 되는구나.’ 했습니다만 이것이 개를 키우든 뭘 하든 그 현장은 주님이 제공한 현장, 주님의 주 되심을 증거 하는 현장으로서 주어지는 겁니다. 시도하지 마세요. 확인하세요. 천국은 확인하는 곳이지 새롭게 시도하는 곳이 아닙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은혜로 교회 왔고 말씀 듣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내가 이렇게 했으니 주여,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세요.’ 하는 요구조건이 또 깔려 있습니다. 아직 우리 자리를 찾아가지 않았사오니 주께서, 성령께서 역사하사 십자가 자리가 우리의 자리고 그 자리가 바로 영생이 보이는, 영이 살리는 것이 보이는, 말씀이 보이는 자리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