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38강-혼인(고전7;1-7) 15042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5. 9. 08:20

2015-04-26 12:43:43 조회 : 274         
   혼인 150426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혼인(고린도전서 7:1-7)

음성 동영상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a_mjvqUbX6M, Hit:30
 이근호 15-04-26 13:34 
혼인

2015년 4월 26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7:1-7

(7:1)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7:2)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7:3)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7:4)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7: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7: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중보자를 사람들은 배제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행복이 처음이요 끝이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혼인이 되었던 사업이 되었던 그 내부 속에서 필히 ‘행복되어야 한다’는 목표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복추구가 예수님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 자체를 철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불행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이 일의 목표로 설정될 수 없다는 겁니다. 아니,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자격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행복 위주로 모든 것이 자리잡은 것은 본디 하나님이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행복과 무관하다면 왜 성도들은 구태어 혼인을 하게 되는 겁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은사’라고 표현합니다. 은사란 곧 ‘하늘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혼인해야 하는 선물이 있는 반면에, 혼인 하지 말고 혼사 살아야 하는 선물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은사’= 선물이란 우리가 원했던 바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 인간쪽에서 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결혼은 누구나 다 하는 것이라고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결혼을 은사로 생각하는 자들에게만 놀라운 불가능한 ‘하나님의 은총’이 수립되었음을 압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행복와 무관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결혼을 통해서 성도는 중보자이신 예수님과의 관련성을 갖게 됩니다. 모든 은사가 다 예수님과의 연관성을 보여주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아닌 자들이 하는 결혼은 평소대로 자신의 행복을 증강시키기 위해서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사랑하기에 결혼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되었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사랑을 언급하는 것은 적용될 수 없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를 죽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내 사랑’은 소실됩니다. 이는 곧 은사없이 혼인하는 것은 중보자되시는 예수님에 대한 무가치하여 여기는 태도입니다.

반드시 예수님과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식으로 혼인되는 것이 바로 ‘은사로서의 결혼’입니다. 은사없는 혼인시도는 밀고 당기는 식입니다. 인간들은 일어나는 모든 일과 현재 눈에 띄는 모든 것에 ‘자신의 행복’을 담는 의미짓기로 일관합니다. 즉 인간은 있는 사실과 일어난 사실대로 살아가지 않고 자기 행복 위주로 의미를 덧씌우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의미 씌우기’가 궁극적으로 그 어떤 해답을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왜 결혼합니까”라고 물으면 “행복 때문입니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왜 자신이 행복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는 겁니다. 즉 인간은 사실 위에다 일방적으로 자기를 위한 의미들로 층층히 쌓으면서 살아갑니다.

이 말은 이미 인간들이 영적인 체제 속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초월적 영적 세계는 악마에 의해서 조정 받게 되면서 기어이 예수님이라는 중보자는 배척하고 그분에게 저항하고 밀어내는 식으로 의미를 덧입히게 됩니다. “당신 필요없어요. 나의 의미는 내가 붙이면서 나의 행복을 추구할 거예요”라고 설치게 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중보자적 의미로 교체되기를 원한다면 인간은 자기 행복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바로 이 작업을 예수님에 의해서 실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은사를 주셔서 혼인하게 하시는 이유는, 그 작업을 통해 “왜 인간은 단일 성(性)을 갖지 않고 남자 아니면 여자, 옂 아니면 남자로 둘로 나뉘어졌는가?”를 묻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둔 사람에게는 이런 질문을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저 행복이 사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동시에 남녀로 만들지 않고 남자부터 먼저 만들고 여자를 만드신 이유는, 사람을 누가 만들었는지를 여성을 개입시켜 밝혀주기 위함입니다.

즉 ‘여자의 후손’에 의해서 성도는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의미로 가득 찬 세계, 곧 천국에 입성하게 됩니다. 왜 ‘남자의 후손’은 안 될까요? 남자는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피조물과 창조자의 만남이 어떻게 성사되느냐는 겁니다. 그곳에 뱀, 곧 사단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절제‘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혼인해야만 이유와 혼인의 지속되는 환경에 사단이 개입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인간은 그 누구도 절제를 제대로 관리할 수는 없습니다. 즉 죄라는 것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지을 때에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 세상에 가득 찬 ‘날아다니는 죄’와 연결되면서 죄를 짓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살아가는 영역은 졸지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다툼의 현장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단은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줍니다. 그 대신 중보자는 잊어라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도 속에서, 기존의 의미들을 다 교체시켜주십니다. 예를 들면, ‘죽음’이라는 것은 주님의 의미 체제에서는 ‘잠 잔다’에 해당됩니다.

인간들이 죽은 자 앞에서 통곡하는 것은 실은 자신의 가치 체제와 의미 체제에 펑크가 나서 분노 하에 우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잠자는 것’에 불과하다면? 예수님에게 있어 성도는 예수님이 몸체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씨앗이 되어 자라난 것이 바로 성도는 결실물입니다.

성도는 자체적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가정을 통해서 성도는 자신이 가정에게 자신이 원하는 행복추구를 포기해야 하고 부정당해야 합니다. 상대 배우자를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익혀야 합니다. 즉 법이 살아나면 인간은 죽은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혼인법은 곧 예수님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님에 의해서 혼인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말입니다. 혼인해야 하는 은사를 받지 않는 사람들 나처럼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십니다. 이 모든 발언이 곧 자신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보자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성도 속에서 이런 우리로서 불가능한 지점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나서서 올바른 가정을 꾸며보겠다는 것도 욕심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4-28 00:16 
38강-고전 7장 1-7절(혼인)1504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7장 1-7절입니다. 신약성경 270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7:1-7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결혼에 대해서, 혼인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 같지만 이것조차도 중보자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발생된 교훈이라는 거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빼놓고 하는 일반인들의 결혼은 뭐냐? 그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결혼하고자 하는 겁니다. 행복을 위해서 결혼하는 것, 결혼하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 안 하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 자기 행복의 종이 된 채 그렇게 살아가지요. 그러면 세상의 불신자들은 결혼뿐만 아니고 모든 것을 자기 행복과 결부된 채 하지요. 결혼도 자기 행복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합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결혼이 무엇인지를 추적해 보게 되면, 결혼을 위한 결혼이 아니고 마지막에는 자기 행복이라는 것이 박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나타난 성령을 받은 성도에 있어서의 결혼을 추적해 보게 되면 행복을 위한 결혼을 했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중보자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죄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계기로서 하나님께서 결혼을 시키는 거예요.



결혼을 안 하게 되면 죄를 덜 지을 것 같은데 결혼을 시켜서 죄를 더 많이 끄집어내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중보자라는 것, 구원자라는 것이 일대일로 막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 품안에서, 중보자 품안에서, 그걸 예수 안이라고 하는데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데리고 가는 식으로 영생의 나라에 가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서 뭔가 잘해보려고 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그것에 대해서 꿀밤을 주십니다.



톡! 톡! 꿀밤을 때려서 “이게 어딜 감히 나를 상대해? 네가 나를 상대할 잽이 되느냐? 너는 내 품에서 살아야지 네가 나를 가지고 ‘이걸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제 솜씨 어떻습니까?’ 하는 그런 짓은 중보자가 없는 일반인들이 하는 행세”라고 하는 거지요. 정말 예수니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아예 장악해서, 집어 삼켜서 데려가는 식으로 합니다. 캥거루가 새끼 키우는 그 양상을 우리는 항상 생각해야 돼요. 주님은 몸체가 되어서 포켓 안에 있는 우리를 데려가는 식입니다. 데려가는 그 방식 중에 하나가 결혼, 혼인입니다.





혼인 속에서 주님은 창세전부터 나를 어떤 식으로 다루기를 원했던가를 결혼을 하면서 파악하도록 하기 위해서 결혼을 시킨 것이고 결혼을 안 하는 것은 결혼을 안 하는 방식으로 예수님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 말은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결혼을 안했다는 겁니다. 안 했는데 나처럼 결혼 안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결혼 다 안 해버리면 자식은 누가 낳을 것인가? 말이 많잖아요. 결혼을 안 해서 인구가 줄고 앞으로 한국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가? 결혼이 축복이니 가나안 혼인잔치가 어쩌고저쩌고 핑계가 많다는 말이지요. “그러나……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각자 받은 은사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은사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배정해준 지정된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라고 우리에게 추가적으로 낯설게 주어진 새로운 장소를 의미하는 겁니다.



불신자, 신자가 아닌 사람,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 결혼을 추적하고 분석해보면 모든 것이 자기 행복과 결부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왜 행복해야 되는데? 거기에 대한 답변이 없어요. “왜 행복해야 되는데?” “행복해야 돼.” “왜? 왜 행복해야 되는데?” 그것은 답변할 수가 없지요. “그냥 그래. 그러고 싶은데 어떡해?” 이유가 없다는 말은 결국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기한테 전부 의미를 회수하는 식으로 살아가는데 왜 행복해야 되는지에 대한 답변이 없다는 말은 자기가 자기중심의 의미로 구성된 자기만의 현실관에 구멍이 뚫렸다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초월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내 몸은 있다. 나는 남자고 너는 여자다. 우리 결혼하자.’ 이것은 하나의 사실이거든요. 사실인데 남자라고 해서 모든 여자하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왜 하필이면 난데? 결혼하게 되면 묻잖아요. “그 많고 많은 여자 중에 왜 하필 나를 사랑하는데?”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하나?” 그걸 말로 설명하는 것을 가지고 초월적이라고 하고 쉽게 하면 그게 뭐냐? 그게 의미 붙이기예요. 손가락과 발가락이 있는 이 몸체에 의미를 갖다 붙이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운동회 할 때 자기애하고 남의 애하고 일 이등을 다투다가 앞서가는 애가 엎어졌을 때, 뒤따라가던 내 아들이 그 애를 추월해서 일등을 했을 때, 그걸 보는 학부형이 하나님을 향해서 키스를 하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 내 아이가 2등을 하는 것보다 1등을 하는 것이 좋은데요? 그게 왜 좋지요? 그게 왜 좋아야 됩니까? 우리애도 아니고 지나가는 노인네나 아줌마가 보기에 그 운동회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 운동회가 열린 것은 분명히 있었던 사실이고 그것은 맞아요. 애들이 뛰고, 먼지도 나고, 도시락도 먹고, 다 맞는데 그 학교 옆에서 농사짓는 할머니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다니까요. 안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고 일어났어요. 광주사태가 광주에서 일어났지만 경상도 사람들한테는 관계가 없어요. 아무 의미가 없다니까요? 세월호가 바다에 빠진 것이 맞아요. 하지만 우리 애는 멀쩡하다면 그게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의미라 하는 것은 초월적인데 이것은 단순히 갖다 붙인 것이 아니고 그 의미에 의해서 놀아나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겁니다. 애가 태어났다, 밥을 먹는다, 잠을 잔다, 그게 인생이 아니에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덕지덕지 살아가면서 붙이고 또 붙이고, 붙인데다 또 붙이고 또 붙이고, 고고학 퇴적물처럼 쌓이고 쌓여서 청동기와 철기시대가 누적된 것처럼 의미의 층이 누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의미가 자기 뜻대로 누적이 안 되게 되면 세끼 먹던 것을 두 끼로 줄이고 그러다 한 끼만 먹다가 ‘나 죽어버릴래.’ 이렇게 끝나버리는 거예요. 그게 뭔데? 의미라는 그것이 뭔데? 내 뜻대로 안되어도 손톱은 자리고 세상만사 내 소원대로 안 되어도 머리카락은 자라잖아요. 그러면 되었지요. 그 의미라는 것이 뭔데? 사람들은 살아가는 게 귀신에게 홀리듯이 살아가요. 교회 나오나 안 나오나 영적 세계를 모른다, 아니, 모르나 아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태어난 몸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뭔가 초월적인 것이 있는데 그 초월적인 것이 뭐냐? 자꾸 나에게 행복을 요구하는 거예요. “너는 행복해야 돼.” “왜요?” “묻지 마. 무조건 행복해야 돼.”



그런데 그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멀쩡한 몸까지 다 버려버리는데? 납득도 안 되고 연결고리가 다 깨어진 그것이 오히려 나한테 어떤 세력으로 나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행복해야 돼.’ ‘안하면?’ ‘행복 안하면 나는 죽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남북통일, 세계평화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 관계가 없어요. 일방적으로 귀신한테 씌운 것이 신자나 불신자나 다 마찬가지에요. 전부 다 내가 행복해야 되고 잘나야 된다는 그 귀신에 씌운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말은 똑바로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어요. 내가 만든 의미에 놀아나고 있어요, 지금.



주께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 전 6:8) 하잖아요. 우리가 지금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없어서 통곡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없이 사는 사람이 담배 피우는 것 보면 희한해요. 담배 값 오르는데 돈도 없다면서 그 담배는 왜 사는데? 돈 없으면서도 노숙자들이 술은 왜 그렇게 먹는데? 돈도 없다면서 술 먹는 돈은 어디서 나왔는데? 사람들은 자기의 행복과 존재의미 때문에 살아요. 그런데 그 나의 존재의미와 행복이라는 게 귀신이라는 말이에요. 귀신. 그게 초월적 의미고 그게 귀신이 되는 거예요.



주께서 신약에서 혼인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인간을 휘두르고 있는 그 알 수 없는, 인간을 시달리게 하는 알 수 없는 귀신, ‘너는 행복해야 돼. 너는 잘나야 해. 너는 훌륭해야 해.’ 일방적으로 그렇게 당하는 그것의 실체를 주께서 성도에게는 보여줍니다. “너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 네가 너에게 혼인이라는 것을 시켰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너에게 혼인을 시켜서 혼인관계 속에서 뭘 끄집어내는가?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날 혼인시킨 그 분이 나를 구원해주신 그 분이라는 겁니다.



혼인이 중요한 게 아니고 혼인이라는 그것을 매개로 해서, 그런 상황을 매개로 해서 너의 혼인이라는 목적은 주님을 주님답게 알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절차로서 결혼에 임하게 했다는 겁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냥 사람과 사람이었어요. 또는 남자와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게 되면 이제 남자와 여자는 사라지고 남편과 아내로 만나요. “당신은 남자고 나는 여자이기에 우리 결혼하자.” 불신자들은 그렇게 무심코 생각하는데 일단 예수님에 의해서 성령을 받아서 성도가 되고 난 뒤에는 더 깊은 바탕, 심연이라 하는데 더 깊은 바다까지 내려갑니다.



“주님, 사람 대 사람이 아니고 왜 어떤 사람은 남자고 어떤 사람은 여자이어야 합니까?” 이렇게 묻는 겁니다. 이렇게 물음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것은 어느 학자도, 아무도 물어본 적이 없는 질문이에요. 모든 학자들은 대충 있는 그대로 살아가자는 그걸로 끝나는 거지요. 있는데서 있는 것으로 살아가는데 무조건 내가 잘난 쪽으로 의미를 붙여요. 그것은 귀신한테 시달리다 보니 일방적으로 갖다 붙이는 것이고. 왜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됩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만, 똑같이 중성적인 사람만 복사해서 만들면 되는데 왜 남자 따로 있고 여자 따로 있고 둘로 구분 지었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거지요.



그 질문과 더불어서 우리는 창세기의 계시에 자신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바로 거기에 여자의 후손이 등장해요. 메시아입니다. 하나님께서 혼인하든 안 하든 간에 이미 성도라는 자체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 말고 새로운, 하늘나라에 적합한, 하늘나라에 영원히 사는데 필요한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데 그 부여받는 것을 가지고 7절에서 ‘은사’라고 합니다. ‘은사’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미리 배정받은 새로운 자리, 장소를 은사라고 합니다. 지난 대전수련회에서 저는 그것을 쟁반, 초밥 집에서 쓰는 쟁반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주님 주신 쟁반위에 놓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기존의 나 중심에서 그 뿌리 자체가 교체되면서, 내 뿌리가 모르는 뿌리에서 이미 알기로 결정나버린 확정적인 뿌리위에서 나라는 인간이 하나의 식물처럼 키워지는 겁니다. 하나의 포도나무 가지처럼 자라나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씨앗은 주님이고, 나는 주님이 씨앗이 되어서 만들어낸 하나의 결실물 곡물이 되고, 열매가 되고 과실이 되는 겁니다. 선악과 열매를 따먹은 우리 속에서 생명나무의 결실, 영생이라는 결실이 맺히는 살아 있는 나무가 되는 거지요.



그렇게 되도록 배정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그 은사는 특징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주님과 관련짓는 그 방식에 대해서 은사가 계속 우리를 변화시켜 줍니다. 그 은사 때문에 우리 자신이 갖고 있던 고유의 내 중심이 부정당하고 거절당하게 되어 있어요.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가 태어나면서 자기가 잘났고 자기가 존재의 의미가 있다, 무조건 나는 살아야 된다, 그것을 꽃다발처럼 꽂아서 나의 인생을 구축합니다. 여기에 성령의 은사가 와버려요.



은사가 와버리면 내가 그동안 수집했던 모든 단어가 다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바뀔 때 우리는 굉장히 발악을 하는 거예요. 그 발악의 한 대목이 요한복음 11장 12절에 나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여기에 잠이 나와요.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이 들었다고.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아침 식사 후 30분 약 먹고 잠들었으면 낫겠네요?” 그런 뜻입니다.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왜 처음부터 우리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왜 안하지요? 죽음이라는 단어를 왜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았지요? 왜 잠잤다는 단어를 사용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헷갈리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거예요. 왜 제자들은 헷갈려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람에게 주어진 특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잠자는 것을 보고 통곡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러나 죽은 자식이나 가족보고는 통곡하잖아요. 죽은 사람보고 통곡하려면 잠자는 것을 보고도 통곡해야 된다는 것이 주의 취지입니다. 너의 개념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네가 죽었을 때 통곡하는 것은 죽은 사람이 안타까워서 통곡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네 모습, 내가 죽으며 안 된다는 자기걱정 때문에 통곡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죽은 사람이 잠자는 상태라면 더 이상 죽은 사람 앞에서 통곡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그게 지금 요한복음 11장인데 죽은 사람 앞에서 통곡하시는 그것 때문에 주께서 통곡하시는 대목이 나와요. 죽은 것을 가지고 잠자는 것으로 변화시키려면, 지금까지 내가 죽는 것이 죽는 것이라고 뭔가 압박을 받고 협박을 받는 그 선과의 관계를 이제는 잘라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것이 잘리고 주님한테 속해버리면 인간의 모든 사는 것은 호텔에서 잠자는 것, 잠자러 가는 것이에요.



사람들은 매일 죽습니다. 주님 쓰는 용어를 제가 썼어요. 밤이 되면 매일 죽어요. 사랑하는 배우자가 평소에 움직일 때도 사랑스럽지만 때로 잠자는 모습이 사랑스러울 때가 있거든요. 잠자는 그것이 사랑스러운데 하루 자고, 또 자고, 잠꾸러기처럼 계속 잠만 잔다면 그 다음에는 짜증나요. 왜? 살아 있어서 나하고 말 상대, 서로 예쁘다고 해 줄때 비로소 보람이 있는데 잠자고 있는 것은 실상 죽은 것과 마찬가지고 죽은 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에 “그만 자고 나와 이야기하자.” 해서 깨워야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네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개념이 교체가 안돼서 그래요. 개념교체가 왜 안 되는가 하면 예수님을 위하여 내가 살아간다는 생각을 모르고 내 욕망의 씨앗을 뿌려서 그 욕망의 씨앗을 내 손으로 거두고 싶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자기에게 되돌리다 보니 마귀한테 계속 시달려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신념, 바탕, 뿌리, 근거를 예수님 때문에 내가 여기서 결혼하게 된 것이라고 보자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결혼이라 하는 것은 나의 행복을 위해서 결혼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보통 결혼하기 전에 남녀 간에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 사랑이라는 개념도 바뀌어야 돼요. <투란도트>라는 오페라에 이런 것이 나옵니다. 그 내용이 뭐냐? 잘난 체 하는 중국의 공주가 있었어요. 망해버린 타타르왕국의 칼라프왕자가 신분을 속인채로 중국에 갔다가 그 공주에게 반해서 결혼하고 싶어 하는 내용이거든요. 그런데 공주가 얼마나 잘난 체를 하는지 세 가지 수수께끼를 풀지 않으면 어떤 후보도 신랑이 될 수 없을 뿐더러 후보가 되었다는 그것으로 인해서 죽임을 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목숨 걸고 후보를 하되 만약 문제를 다 못 풀면 목숨을 내놓으라는 식의 도도한 공주에요.



첫 번째 수수께끼. “‘그것’은 어두운 밤을 가르며 무지개빛으로 날아다니는 환상. 모두가 갈망하는 환상. 밤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아침이 되면 죽는다. 그것이 무엇이오?” 그 왕자가 문제를 풉니다. “희망!” 공주가 도도해서 “흥! 좀 하는구나.” 두 번째 수수께끼. “‘이것’은 불꽃을 닮았으나 불꽃은 아니요. 생명을 잃으면 차가워지고 정복을 꿈꾸면 타오르고 그 색은 석양처럼 빨갛고 소리도 들을 수 있소. 심장이 멎으면 차가워지는 것, 이것은 무엇이오?” 왕자의 하는 말, “피!” 공주가 ‘어? 세 번째 문제는 모를 거다.’ 세 번째 수수께끼를 냅니다. “이것은 불을 주는 얼음. 이것은 불을 얼게 하는 얼음. 혹은 희고 검은 백합. 이것이 그대에게 자유를 허락하면 이것은 그대를 노예로 만들고 이것이 그대를 노예로 인정하면 왕이 된다. 이것이 무엇이오?” 그걸 왕자가 풀어버려요. “투란도트, 당신이다.”



그 왕자가 세 가지 문제를 다 풀어버리니까 자존심이 되게 상했어요.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그 남자를 죽이려고 해요. 왕자가 화가 나서 이제는 주도권을 쥐겠다고 “내가 너에게 문제를 낼 테니까 잘 들어라 공주! 오늘 밤이 가기까지 내 이름을 알아맞추면 네 소원대로 내가 죽어주마.” 결혼은 이제 물 건너 간 것이고 공주의 자존심을 건드린 거예요. “네가 그렇게 사람들 가지고 놀았으니 이제는 내가 널 가지고 놀겠다. 수수께끼를 내겠다. 네가 낼 동이 트기 전까지 내 이름을 알아내라.” 공주가 질문을 하는 쪽에 있다가 질문을 받는 동시에 자존심이 상했는데 그 문제를 풀어야 자신의 도도함이 유지되니 전 국민에게 공표했어요. “오늘 밤에 아무도 잠들지 말라.” 그 노래가 ‘네순 도르마(Nessun Dorma)’에요. 우리말로 그 노래 제목이 “공주는 잠 못 이루고”라는 거예요. 그 이름을 아무도 알 수가 없었지요.



그 이름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이 말은 사랑은 이름을 삭제하는 힘이 있다는 거예요. 결혼해서도 여전히 아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는데 한쪽은 이름을 부르고 또 한쪽은 그 호명을 받는 존재가 아니고 우리는 사랑이라는 제 삼의 초월적 의미 속에서 사라지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 앞에서 더 이상 내가 나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 사랑은 지금까지 모든 개념에 내 의미를 갖다 붙이면서 나를 위한 인생, 내 행복을 위한 결혼, 내 행복을 위한 모든 것, 전부 다 나를 위한 그 무엇이었던 것을 사랑의 이름으로 그 개념을 바꿔 버립니다.



“죽는 것도 내 안에서는, 남편 안에서는 잠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잠자는 것을 내가 그냥 두지 않고 반드시 깨우게 되면 그 깨우는 장소가 바로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천국이라는 것은 그 가는 길을 주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겨넣어줬습니다. 그것은 뭐냐? 우리의 기초, 우리의 뿌리에 대해서 주께서 터치를 하는 거예요. 그 뿌리가 뭐냐? 처음부터 우리는 심판에서 살아오고 있다, 저주와 심판과 죄 속에서 살아오고 있었던 거예요. 인간은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날아다니는 죄에 얽히면서 죄인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인간은 죄 지을 수도 없고, 죄 짓는 방법도 모르고, 죄 지을 줄도 몰라요.



그런데 온 천지가 시커먼 잉크 같은 죄 덩어리기 때문에 뭘 해도 그게 다 죄가 되는 겁니다. 결혼해도 죄가 되고, 설교해도 죄가 되고, 교회 나와도 죄가 되고, 죄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어요. 왜 그렇게 하는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었어요. 이것은 제가 지난번에 이 이야기했어요. 둘이 부부가 되었지요. 한 몸이지요. 그러나 그 한 몸은 언제까지 한 몸이냐 하면 법을 손대지 않을 때, 법을 그냥 두었을 때 그들은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나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는 동시에 법이 살아나면서 그들은 죽었습니다. 로마서 7장의 말씀입니다. “법이 살아나면서 우리 모두는 죽은 것이다.”



멀쩡한 인간들도 주의 법 앞에 다 이미 죽어 마땅한 존재로 나타난 겁니다. 처음부터 그랬었습니다. 모든 것이 죽어야 될 이유를 보여주는 것들이었어요. 모든 행동들이. 그래서 죽어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과 관련성 있는 사람만 알아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중보자는 그런 것이 관심이 없고 자신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다면 십자가라든지 예수님 이야기를 취사선택을 하지 않아요. 왜? 자기 행복과 관련 없이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교회 나와서 설교 듣고 성경 보더라도 자기 행복과 관련된 것만 뽑아서 자기에게 의미로 주어지는 겁니다.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그런 것을 뽑는 거예요. 내게 능력 주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런 것을 뽑는 겁니다. 뽑다 보니 나중에는 엉뚱한 것, 마귀가 한 말까지 뽑습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런 것까지 막 뽑는 거예요.



그 말씀을 따라서 예수를 믿습니다. 그 예수 믿는 그것이 사탄의 짓이에요. 그렇게 믿는 것이 사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사탄이에요. 삼위일체라는 이름의 사탄이고 악마에요. 교회 나와도 죄짓는 것이고, 안 나와도 죄짓는 것이고, 점점 더 자기가 자기를 아주 망쳐버리는 겁니다. 끝까지. 어떻게 하면 내가 살 수 있을까 그 산다는 개념 자체를 바꾸면 되는데 그걸 바꿀 줄을 모르는 거예요. 인간은 산다는 것이 없습니다. 밤이 되면 사람은 자야 돼요. 그것은 죽은 겁니다. 죽은 것을 아침이 되면 주께서 깨워주십니다.



그런데 누가 나를 깨우는지를 몰라요. ‘그냥 어제처럼 오늘도 살았구나.’ 하고 가버립니다. 누가 깨우는지를 몰라요. 그러나 중보자와 관련이 되고 부터는 이제 주님께서 나를 죽이시고 늘 깨워주신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모든 의인은 나를 위해서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만들어서 다 퍼붓는 식으로 주는 거예요. 그 기능적 작업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나 중심의 이 모든 것을 전부다 흩어 버립니다.



그것을 저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기름이라고 합니다. 바다위에 기름을 뿌리면 처음에는 모여 있는 듯이 보이지요. 그러나 바닷물이 울렁일 때마다 그 떠 있는 기름은 갈기갈기 다 찢어져 버립니다. 바다가 찢어지니 기름은 “아이고! 내 것이 찢어지네.” 하고 두렵고 겁이 나서 그걸 대처하려고 또 다른 것을 하는 거예요.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쉬운 이야기를 계속 할 수밖에 없는데 쉬운 이야기 좀 더 하고 더 중요한 이야기에 들어갑시다.



본문에 결혼하라고 하는 이유가 5절에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는데 절제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절제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절제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간주를 해요. 절제하지 못한다는 것과 무엇과 만나는가? 옛날 아담에게는 사탄과 선악과 열매와 결부시켰습니다. 선악과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사탄이 유혹해서 따먹게 됐잖아요. 그 상황이 그대로 이어져서 지금은 절제할 수 없는 것과 사탄을 연계시킵니다. 절제할 수 없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우리는 절제하기가 불가능한 존재로서 이미 시작을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한테 보내주신 것은 바로 너는 절제 못하는 존재임을 분명히 알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어디서 아는가? 결혼한 사람은 결혼하는 은사를 통해서 절제하지 못함을 알아야 되고 결혼을 안 한 사람은 결혼 안함을 통해서 절제하지 못함을 또 알아야 되는 거예요.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죄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자에 의하면 남성의 성에 관련한 면적이 여자의 6.5배랍니다. 정맥 속에 있는 남성 호르몬이 여성호르몬의 20배랍니다.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남성호르몬은 남성의 두뇌의 제어기능을 약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거예요. 그만큼 남성이 여성보다 더 충동적이라는 말입니다. 성에 관해서. 그래서 여성은 익숙한 남성에서 매력을 느끼는 반면 남성은 지금까지 보지도 못한 새로운 여성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겁니다. 가을되어 보세요. 모르는 여자에게 편지하는 것이 그토록 낭만인 거예요. ‘모르는 여자에게 편지하는 것.’ 이동원의 노래에 나옵니다.



그것도 모르고 어떤 노래에는 부부가 사슴처럼 기대어 산다고?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노래에 나와요. 사슴처럼 기대어 살자고요? 기대면 엎어지는데? 기댈 걸 기대야지. 한쪽은 익숙한 남자에게 기대는데 남자는 익숙하지 않은 여자에게 기대려고 하니 일이 안되지요. 인간은 남녀로 만들어진 그 이유에 대해서 모릅니다. 왜 남자와 여자 그 둘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가 없지요. 여자는 남자만 있고 없을 때가 있었어요. 그렇지요. 아담이 순서상 먼저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여자가 만들어졌으니까



그러면 여자를 왜 만들어놓았는가? 남자가 보여줄 중보성, 중보자의 관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관계가 돌출된 것이 여자에요. 아담으로 하여금 예수님과 관계를 맺을 때 그 관계를 더 뚜렷하게 잇게 하기 위해서 투입된 요소가 여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자로 태어날 때 그 여자는 하나의 몸체인 여자이거든요. 여자는 자기가 나왔던 그 원천지를 고대하게 되어 있어요. 여자는 항상 누군가 나를 데려갈 것이라는 대기상태에 있고 여자가 막상 결혼을 하게 도면 ‘저 남자는 나를 책임 질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한 여자의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하고 결혼을 하고 ‘저 여자는 내가 책임져야 되고 저 여자를 살려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거 잘못된 생각이에요. 둘 다 잘못된 생각인데 하나님은 그 잘못된 생각을 저주라는 이름으로 제공했습니다. 그게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제가 어려운 이야기 한다고 했지요.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시겠지요? 16절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자식을 낳는데 아픈 고통이 오고 여성에게 고통이 옴으로 말미암아 남성에게 책임을 요구하게 됩니다. 여성은 고통이 없던 시절로 다시 원상복구 하라고 요구하게 되고, 남성은 그 여자가 보여준 고통에 대해서 힘으로 다스리면서 고통을 해소시키고, ‘그것은 네 책임’이라고 책임을 미루려고 하고, 결국 혼인이라는 것은 개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혼인을 법으로 승격시킴으로 말미암아 법은 살아나고 우리는 그 법 앞에서 누구도 완전하지 못하고 완벽하지 못한 엉망진창 죄인으로 노출시키는 방법을 중보자께서 실시를 하신 겁니다.



“누가 날 만들었습니까?” “모르지?” “모릅니다.” “내가 너에게 새로운 일을 만들어줄게.” 아담의 속에서 일부를 끄집어내요. 그게 여자입니다. 아담이 잠 들었을 때지요. 잠자는 것은 죽은 거예요. 아무것도 못하면 그게 죽은 거예요. 잠들어 있으면 아무것도 못하니까. 그 죽은 그것에서 인간이 불가능한 그것을, 인간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그 몸체 속에서 불가능한 요소를 끄집어내서 그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여자거든요. 보여주고, 그 불가능성을 통해서 아담으로 하여금 중보자 예수님과 아담을 이어지게 하는 요소로서 작용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자의 후손이에요.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지혜로운 여인은 네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로서 왔다.’(잠 19:14)고 합니다. 중보자를 위해서 파견 근무하라고 가정에 침투한 거예요. 아내가. 그래서 아내가 부엌에서 라면을 끓이고 뭘 하거든, 뭔가 썰고 있거든, 여호와께서 썰고 있다고 보면 돼요. 여호와께서 밥 해주려고 썰고 있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아내가 옆에서 자고 있거든 여호와께서 옆에서 잠자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여자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왜냐하면 여자 또한 아담에 속했기에 항상 여자는 바깥 세상에 나가기 전에 반드시 누굴 경유하느냐 하면, 남자를 경유해서 나가게 되어 있어요.



“저 남자 봐라. 자기 아내한테 얼마나 잘해주나? 저 드라마 봐라. 잘해주잖아. 너는 나한테 지금까지 뭐하고 있는데? 이렇게 고생시키려고 날 사랑한다고 했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여자나 남자나 이미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자기의 행복, 모든 의미가 자기 밖에 모르는 의미로 출발하는 겁니다. 따라서 그 혼인 속에 중보자를 주께서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3절에,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이 자체가 하나의 불가능한 법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옴을 느낄 때 그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런 혼인 이 세상에 없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없는 거예요. 불가능성입니다. 우리가 하지 못해요. 따라서 여기에 해당되는 아내와 남편을 찾겠다고 나서는 것은 하나님 쪽으로 스스로 다가서겠다는 것밖에 안되는데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가로막아서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본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는 그 자리에서 그냥 너의 행복만을 추구하면서 그런 남자를 기대하든지 또는 여호와 같은 아내를 기대하든지 해라. 하지만 기대하면서 평생 살아도 그 꿈은 아침 되면 다 날라 가듯이, 그야말로 투란도트가 낸 문제처럼 허망한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이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은사로 주신 것인데 그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우리에게 법으로 이미 주셨다는 겁니다. 그 법을 주게 되면 우리가 이 말씀에 의해서 뭔가 얻고자 하는 행복, 이걸 통해서 얻고자 하는 이익 같은 것이 전부다 죄 된 속성에 불과한 겁니다. 이것은 중보자 없이 나 홀로 살아가겠다는 그 본성이 까발려진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우리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여기는 이 몸속에 불가능한 요소가 장착이 된 셈이 됩니다. 그 불가능한 요소를 통해서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는 이렇게 해주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의 남편이 되시고 주님이 우리의 아내가 되셔서, 이 말씀 그대로 되어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천국에서 산다는 것을, 그것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결혼하기도 하고 결혼 안하기도 하는 선물을 주신 거예요. 선물 치고는 희한한 선물이지만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선물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바라기는 이런 선물 가운데 좀 더 좋은 선물은 아예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삶이 좋은데 그 절제는 어떻게 하려고? 사탄에게 시달리는 것은 어떻게 하려고? 차라리 결혼해서 주님의 말씀에 더 깊이 있게 들어가는 것도 그런 은사 받은 사람한테는 해당되고, 결혼 안 해도 주의 말씀에 깊이 들어갈 수 있다면 구태여 나처럼 살지 결혼해서 고생을 자처할 필요는 없다. 실망과 실패를 자처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중보자에 관한 이야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그것이 우리의 뿌리고 쟁반이고 예수님의 의미가 이제는 우리의 전부의 의미로 살아가는 것이 성령 받은 성도의 본 모습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꿈인데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고 일방적인 내 행복의 의미를 굳혀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앞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위도 모르고 아래도 모르고, 그저 나만 잘되면, 나만 행복하면 그것이 사랑이고 주의 선물인줄 알았던 저희들, 예수님 속에, 우리 속에 집어넣은 고통과 우리의 죄성을 통해서 드디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