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37강-성령의 전(고전6;19-20) 1504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4. 25. 08:34

성령의 전(고린도전서 6: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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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5-04-19 13:34 
성령의 전 

2015년 4월 19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6:19-20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령이라는 무형체(無形體)가 몸이라는 유형체(有形體)와 같이 결합되어서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결합된다는 것이 참 신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몸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발휘할 것인가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성령 안의 세계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허무한 몸까지 활동하게 되느냐에 초점에 있습니다. 

원래 성전은 신체 이전에 사물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는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의 자필체가 새겨진 돌판을 받아 내려옵니다. 그러다가 산 밑에서 들려오는 우상의 축제 소리를 듣고 화가 나서 그 돌판을 깨어버립니다. 이는 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 그릇이 되지 못함을 알고 사전에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즉 말씀에 위배되면 다 죽습니다. 잠시나마 그들을 살리고자 내린 모세의 침착한 대응이었습니다. 성전이란 이처럼 하나님의 돌판을 모실 가마꾼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 뒤에 새로 만들어진 돌판이 이스라엘 내부에 무사히 진입하는데 성공하는데 이 와중에서 새로운 요소가 가미됩니다. 

그것은 희생제물의 피입니다. 즉 피와 돌판의 만남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돌판, 곧 말씀을 지고 나르는 가마꾼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피란 곧 죽음을 의미하고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돌판을 죽음과 심판을 이 지상에서 유발시킨다는 뜻입니다. 왜 이 세상은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죽음과 저주의 상대자로 굳어지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의 몸이 자아내는 나름대로 세계가 엄연히 인간 세계 안에서 구성되어 인간들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펀지가 물 속에서 물만 흠뻑 머금은 것처럼 인간의 몸은 인간을 둘러싼 인간 세상의 사고방식을 흠뻑 머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관, 인생관, 우주관, 윤리, 도덕, 상식 이 모든 것이 다 기준의 인간 세계에서 온 것입니다. 

이런 인간세계에서 인간들이 기대하는 미래란 실은 과거에 자신들이 경험한 것의 편집이요 내용들 뿐입니다. 그것만 재탕하거나 보완해서 다시 재상연되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이는 곧 자기 몸의 세계에 갇혀 있는 꼴입니다. 벗어날래야 벗어날 근거가 없습니다. 서로 의논하고 서로 마음을 합쳐봐야 모두 과거의 재탕입니다. 

누가복음 22:51에서 예수님께서 ‘말고’라는 종의 귀를 낫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자신을 체포하려 온 종 말고의 귀를 칼을 들고서 베어버렸습니다. 귀바퀴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것으로 끝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귀바퀴를 집어서 원래도 말고 귀에 붙여주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은 인간이 과거적으로 아무리 살펴봐도 없었던 일입니다. 인간의 모든 상상을 능가하시는 행위이십니다. 바로 이 세계에서 예수님은 오셨고 그리고 그 세계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는 막상 예수님의 행위가 인간들에게는 이해불능의 행위로 비치겠지만 이로 인하여 인간들이 장차 죽어서 들어가고자 하는 세계가 결코 실제하는 세계가 아님이 밝혀진 것입니다. 

즉 인간들은 그저 과거를 참조로 해서 과거보다 형편이 더 나은 세계를 ‘천국’이라고 간주하면서 그 세계에 진입하려고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들어간 세계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바로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신 겁니다. 베드로가 목숨을 걸어도 들어갈 수 없는 세계입니다. 

바로 그 세계의 존재성은 성령을 통해서 왔던 때 비로소 밝혀집니다. 즉 인간들이 상상한 천국으로 인하여 피해를 보았던 바로 그 분의 세계가 진정한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그 ‘예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자신들이 몸답고 있었던 그 세계 자체가 새로운 이 예수님의 나라에 의해서 철저하게 전면적으로 부정당해야 하는 처지인 것입니다. 

로마서 14:17에 보면,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이 인간 나라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보람을 먹고 마시는 것에서 찾게 됩니다. 육신 자체는 그런 쾌락 달성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자기 몸의 본성을 이겨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바로 그 본성 자체를 부정하는 힘이 들어닥치면 곧 그 세계가 하나님 나라라는 겁니다. 인간이 몸으로 즐길 수 있는 세계를 거부하고 밀어붙이면서 다가오는 그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란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육신을 지녔지만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게 됩니다. 이로서 최초로 성령+몸의 사람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생각과 행위는, 인간과 인간으로 맺어진 이 인간 세계와는 확연하게 다른 세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인간의 모든 세계를 저주로 처분하려는 세계입니다. 모든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으시는 이유를 만들어내는 세계입니다. 돌판이 담겨 있었던 법궤의 이동 경로를 통해서 이점을 알 수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은 시내산을 거쳐 돌판을 운반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압평지를 지나 요단강가에 이르렀고 거기서 그들은 돌판의 취지만 허용하는 세계로서의 ‘약속의 땅’에 돌판 운반꾼의 자격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여리고성 전투를 거쳐 길갈에 법궤가 있었고 그 이후로는 

실로→에벤에셀→아벡→아스돗→가드→에그론→벧세메스→기럇여아림→아비나답→오벧에돔집→예루살렘까지 이어집니다. 이 경로에서 법궤로 인하여 숱한 인명들이 저주를 받아 죽게됩니다. 이 무서운 언약궤를 어떻게 인간들이 감당하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겨라’고 했습니다. (히 12:22,28-29)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값을 주고 샀다’고 하셨습니다. 즉 죄된 몸을 예수님의 자기 피를 값으로 하여 소유권 취득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따라서 더 이상 성도는 자신의 몸이 기존의 인간 세계에서 스며든 그런 사고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언약을 펼치기 위해 사용당해야 하는 몸이 되었다는 겁니다. 

강도는 필히 강도로 사는 식으로 성전이 되어야했습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 나라, 곧 예수님의 나라를 위해서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는 과거를 회상하는 식이 아니라 항상 성도 안에서 낯설게 느껴지듯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간은 결국 자기만을 위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존재자를 주님께서 자신의 세계에 구성요소로 벌써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났고, 되어질 일이 된 것인데 이 모든 일들은 나를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언약완성을 증거하기 위한 일’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로서 예수님의 일은 너무나도 구체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세계가 애초부터 주님의 세계였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5-04-21 06:32 
37강-고전 6장 19-20절(성령의 전)1504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입니다. 신약성경 269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본문에서 이해하기 힘든 것이 성령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체, 그리고 몸이라는 이 눈에 보이는 유형체가 어떻게 결합이 가능하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 성령이 어떻게 보이는 몸과 하나가 될 수가 있는가?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 사물, 또는 물체와 결합이 가능한 것은 성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성령, 상당히 난해한 이야기입니다. 몸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요. 그 알고 있다는 그것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이 결합된다는 것이 난해하고 거기에다 성전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개입이 되니 삼파전이 되고 말았어요. 



어떻게 이걸 조립해서 이해를 해야 할지 상당히 난해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충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시작부터 이렇게 해야 돼요. ‘우리 몸이 이렇게 귀하기에 성령이 오셨구나.’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도대체 성령 안이라는 세계가 어떤 세계이기에 이 허접스럽고 죄 많은 몸도 받아주는가, 그렇게 이해를 해주셔야 돼요. 내 몸이 잘 되기 위해서, 내 몸이 천국가기 위해서, 내 몸이 나중에 영생 얻기 위해서 성령을 이용해보겠다는 것은 반대로 생각하는 겁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로마서 14장 17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어디와 관련되어 있느냐? 우리 몸과 관련되어 있지요. 몸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 산다는 것이 먹는 재미 외에는 없잖아요. 맛을 찾아서 온 세계를 다 돌아다니잖아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한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그 앞에 것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가 빠지고, 그걸 우리가 못 들은 척 하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면 그 의와 평강과 희락도 챙기고 먹고 마시는 쪽으로도 만족이 될 수가 있는 거예요. 일단 살아보고, 일단 생존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서 주시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보면 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하늘나라는 그것이 아니고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라고 배제를 해버렸다는 말이지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라고 배제를 해버리면 몸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먹고 싶다. 잘 살고 싶다. 누리고 싶다.’ 하는 이런 본성, 이 몸이 남의 몸이 아니고 내 몸인데 내 몸의 요구조건을 내가 안 들어주면 누가 들어줍니까? 



들어주나 안 들어주나 관계없이 내 몸이 그걸 먹고 싶다는데 그걸 누가 말려요? 내 몸인데, 내 몸인데 누가 말립니까? ‘아니야, 아니야. 이 마시는 것은 아니야. 먹는 것도 아니야.’ 그러면 이 몸이 삐진다니까요? 몸이 삐져요. 인간의 몸은 점차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으로 돌아갈 때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몸이 흙으로 돌아갈 때 인간에서 동물로 변하고 동물에서 식물로 변하고 식물로 변해서 흙이 되는데 그래서 어떤 학자가 말하기를 “식물은 동물의 본질이다.”라고 했습니다. 동물은 움직이고 식물은 움직이지 않는데 동물이 아무리 까불어대도 나중에 죽을 때 되면 동물인지 식물인지도 구분이 안 되도록 쓰러진다는 말이지요. 쓰러져서 나중에 썩어버리고 흙으로 돌아가지요. 



이러한 본성을 어느 누가 거스릅니까? 옛날에 젊을 때 행세깨나 했다고 해서 안 죽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라는 이 말의 취지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네 몸이 요구하는 위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네 몸을 만드신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네 만들어진 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를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그 만들어진 것에서 너의 역할이 뭐냐 하면, ‘내 몸이 요구하는 것은 일단 하늘나라는 아니야.’라는 것을 마음껏 드러내라고 하나님께서 이 몸을 주신 거예요. 



돈 있거든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 드세요. 마실 것 마시세요. 늘 먹고 마시면서 하는 생각이 뭐냐?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마음껏 드세요. 상어지느러미를 먹든지 썰든지 마음대로 잡수시라는 말이지요. 이것 썰려고 내가 살아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프랑스 보르도산 포도주 ‘이거 마시려고 내가 살아온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마시……술 마시라고 하면 안 되지요. 그냥 사시면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성령 안에서 뭐가 있어야 되는데 이게 아니라면 나는 사는 재미가 없잖아.’ 이러면 그 사람은 성령과는 전혀 관계없는, 성령과 무관한 사람인 것을 들통 나게 되는 겁니다. 사람 사는 것이 다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사는 거잖아요. 그게 보편화 되어 있어요. 잘 먹고 잘 살겠다 하는 그것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하면, 그동안 우리 몸이라는 것이 우리 몸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속해 있는 이 영역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같이 물들어서 그런 거예요. 언젠가 제가 그걸 두고 스펀지 같다고 했지요. 스펀지를 물속에 잠그면 스펀지에 물이 가득 스미듯이 우리의 몸은 이 세대가 주는 것에서 방어가 되지 않아요. 매일 보고 듣는 것으로 세상 것에 흠뻑 젖습니다. 우리 몸 짜면 나오는 것이 세속적인 것밖에 나오지를 않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그 출신이고 정신적으로 어릴 때부터 교육을 거기서 받고 양육을 거기서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성령의 전으로 사용하겠다고 할 때 이 이야기가 구약에 나오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 나오거든요. 신약에 나온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난 이후에 비로소 밝혀진 사실이다, 거기에 저촉 받는 말씀이 오늘 신약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이 땅에 오시고 난 뒤에 비로소 밝혀진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가 미처 가보지 않았던 그 미래의 모습이 앞당겨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할 때 최초의 성령의 전, 최초의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몸은 예수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없었어요. 예수님께서 가득 성령을 받은 몸으로 이 땅에서 출몰하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이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같이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몸이, 눈에 보이는 유형체인 이 몸이, 우리 눈에 물체로 보이는 이 몸이 무형체인 성령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준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생각지도 못한 이상한 몸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가……, 잘 들어야 합니다.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렇게 오셨다가 어디로 가셨느냐 하면, 어디론가 가셨어요. 어디로 가셨는데 그 가신 곳을 몰라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로 갔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 받지 않은 몸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는 것은 백 프로 가짜입니다. 백 프로 인간의 상상력의 발상이고 신화적 개념에 불과한 겁니다. ‘죽어서 좋은 나라 갔겠지.’ 하는 그곳에 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곳 아니거든요. 주님이 간 곳은 죽어서 인간들이 가는 그곳 아닙니다. 인간들이 하늘나라를 생각했다면 그곳은 일단 아니에요. 왜? 인간의 몸은 성령의 몸이 아니기 때문에 가짜만 내 뱉어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의 몸이라는 것은 먹고 마시기 위한 목적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 먹고 마시기 위한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 몸도 그렇지만 그 몸과 몸들이 모여서 구성한 인간들만의 영역이 있어요. 그 영역은 우리 몸의 외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우리의 정신세계를 장악한 겁니다. 



인간들이 모인 영역에 무엇도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종교라는 것이 있어요. 유대교도 있고 기독교도 있고 다 있어요. 그 있는 세계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잘 살게 되면 죽어서 천국 간다는 그 내용이 이미 형성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이미 그것을 구약성경에서 다 보여줬다고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말씀을 듣고 택한 백성인줄 알았고 율법 지키면 복 받는다고 해서 율법 지켜서 복 받아내려고 애를 썼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전 지어놓고 그 성전에서 기도하면 모든 환란, 기근, 전쟁에서 패하는 것이 다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한 성전이 있었어요. 



따라서 그 성전을 소지하고 그 성전을 붙들고 있으면 붙들고 있는 이 나라는 결코 영원히 이 땅에서 망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사두개인들이었어요. 자기가 스스로 사독제사장계열이라고 해서 사두개인이라 일컬은 거예요. 그들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성전만 있어서 안 되고 율법이 있어서 그 율법은 그냥 형식이 아니라 말씀으로 생활화해야 된다고 나서는 계파도 있었습니다. 그 계파가 바리새인, 자칭 거룩하고 분류되었다는 뜻에서 일컬은 바리새인들이 있었어요.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주모에 의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끄집어냈어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다 끄집어냈습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고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인간을 만들었다. 따라서 만들어진 인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위해서 성심성의껏 주신 말씀대로 살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다.라는 아이디어가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이미 포진되어 있고 그 안에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주님께서 안 가셨다는 그 말입니다. 주님께서 그곳에는 안 갔다는 말이지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멋진 하늘나라인 그곳에, 이사야가 말한 그 이리와 양떼가 함께 누워 있는 그곳에는 안간 거예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곳이든 그 곳에는 주님이 안 가신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 가려고 “예수님, 제 목숨도 내 놓겠습니다.” 할 때 오지 말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에 가셨는데 다시 오시기 까지는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몰랐지요. 그냥 인간들은 오해할 뿐입니다. ‘아마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나라에 갔을 거야.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삼위일체도 계신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다시 성령을 통해서, 물론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그 예수님의 영이 다시 이 땅에 오기 전까지는 그들은 그들이 생각한 하늘나라에 예수님이 간 줄 알았지요. 그러나 성령이 다시 왔을 때 비로소 기존의 전부 다가 구라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모두가 다 환영, 환상에 불과하고 먹고 마시는 것의 즐거움, 그 즐거움이 확대되어서 하늘나라까지 조장했고 구성했고, 그 구성은 너나없이 한 마음이 되어서 구성한 것이고 그것이 하늘나라라고 상상하면서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거기서 천당 가겠다고 나온 사람들이에요. 



천사가 다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다시 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 손에서 죽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주모에 의해서 사람 손에, 창에 찍혔던, 살해당했던 그 분의 영이 다시 오는 거예요. 제가 표현력이 없어서 이 마음을 어떻게 전할지가 난감한데 제가 기껏 할 수 있는 표현은 “내 다리 내놔라.”라는 이정도 밖에 못하겠습니다. 전설의 고향, 비가 부슬부슬 오는 공동묘지에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효도하겠다고 시체 궁둥이 살 뜯어 가는데, 뒤에서 누가 쫒아오는데, 쫒아오면서 하는 소리가 “내 다리 내놔라.”에요. 



효자의 딜레마입니다. 죽어가는 아비 살리겠다고 죽은 그 몸이 자기 것인 양 맘대로 살점을 도려냈던 오류, 부모에게 효도하는 그것이 인간이 기껏 생각한 하나님의 나라, 내가 잘되고 잘 먹고 잘 사는 그것을 하늘나라라고 생각했는데 그 하늘나라가 하늘나라를 망쳤다는 사실을 성령이 뒤따라오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요? 아무도 알지를 못하는 거예요. 하늘나라 가겠다는 내가 하늘나라를, 내 자신의 구원을 내가 가로막고 있다는 겁니다. 구원받겠다는 그 욕심과 탐욕이 구원을 가로막고 있었던 거예요. 



주셔야 갈 수 있는 나라를 인간이 빼앗겠다는 겁니다. 넣어줘야 되는데 못 기다리겠다고, 내가 발 벗고 나서야 되겠다는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주께서 어디로 갔는지를 몰라요. 어디로 가셨는지 몰랐는데 어디로 가셨는지 알게 된 사항은 가셨던 분이 성령을 통해서 다시 올 때 비로소 밝혀지는 사항입니다. ‘아, 주님 가신 곳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나라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나라를 반대하는, 그것과 정반대되는 나라에 가셨는데 그 나라는 예수의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나라,
우리가 합류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못 들어가는 나라에만 예수님 가셔서
베드로가 목숨 걸고 따라가겠다고 했는데 올 수 없다고 단정을 한 거예요.
베드로보고 올 수 없다고 한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아무도 갈 수 없는 나라, 오직 예수님만 갈 수 있는 나라,
다른 말로 하면 오직 예수님만 만들 수 있고 그 만들어진 분이 허락에 의해서만 거기에 참여될 수 있는 나라,
예수의 나라입니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그 천국 아니에요.
그 모든 인간이 만든 천국에서는 자기 자신도 주인공으로서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나라에서는 예수님만 빛이 나지 우리는 빛나지 않아요. 우리는 빛날 필요도 없고.




그 이유가 뭐냐? 왜 그렇게 된 것인가?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오해해서 죽여 버리고 죽었던 그분이 자신의 나라 따로 만들어서 “날 죽였지?” 하고 찾아오시는 과정이 바로 성령이거든요. 들어오시는 그 현상이 성령이라는 말이지요. 교회 오는 것은 자유에요. 그러나 천국 가는 것은 백날 출석도장 찍는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는 어디가 막혀 있어요. 우리는 현재라는 이름의 과거에 막혀 있어요. 우리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현재는 돌아보면 과거가 되니까 과거라는 것이 계속 칸막이를 만들어냅니다. 



하늘나라를 생각해내지 못하고 기껏 하늘나라를 생각한다는 것은 과거에 이미 우리가 경험한 것 가운데 편집을 해서, 좋은 것을 골라서 그것으로 ‘미래가 아마 이럴걸?’ 하고 드라마를 쓰듯이 조작해내고 있는 거예요. 과거를 근거로 해서 미래상을 계속 조작해 내는 이 한계에 우리는 부딪히고 마는 거지요. 한 15년 전에 기도원에서 은혜를 받은 적이 있다. 내일 은혜 받을 것을 상상해 봐야 그 상상의 내용은 뭐냐? 15년 전에 은혜 받은 그것을 재편집해서 재탕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22장 50절에 보면, 말고를 예수님과 베드로가 만나는 장면이 나와요. 말고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체포하는 사람들의 종으로 따라 왔지요. 베드로가 자기 스승 지켜보겠다고 정말 장한 짓을 했지요. 칼을 빼서 “어디 우리 선생님을 건드려?” 하면서. 요새는 이런 충실한 보디가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칼 가지고 말고의 귀를 베었잖아요. 베드로가 칼로 말고의 귀를 치는 것은 말고의 귀를 떼 내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죽이려고 얼굴을 향해 칼을 휘둘렀는데 빗맞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칼을 쥐고 말고의 귀를 내려치게 되면 칼을 내리치는 압력에 의해서 섬유질이 끊어지면서 귀가 떨어진다.’ 이것은 과거부터 익히 우리가 아는 거란 말이지요. 



그래서 베드로의 행동은 어디서 나왔는가? 과거에 경험한 것은 집대성한 것에 의해서 행동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귀를 가지고 도로 붙여놨습니다. 이게 문제에요. 떨어진 귀를 도로 붙인다는 것은 인간들이 아무리 과거의 사전을 백날 들춰도 그런 게 없다는 말이지요. 귀가 떨어졌는데 귀를 다시 붙였다는 사실이 없다는 그 말은 이것이 과거에 속한 것이 아니고 저는 편하게 미래에 속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정확하게 말씀드려서 이것이 미래에 속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에 속한 거예요. 



예수님의 나라에 예수님이 가셨고 우리가 가고자 하는 것은 미래의 천국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 예수의 나라에 보내기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베드로가 ‘내가 저 귀 떼 내면 예수님이 도로 갖다 붙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사전에 한 적이 없어요. 인간이 예상을 못한 거예요. 인간의 상상을 비켜가는 겁니다. 말고의 귀를 도로 붙임으로 말미암아 지금 예수님이 체포되는 일, 예수님이 잡혀가는 일, 베드로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흩어지는 이 모든 일, 그 모든 일이 예수님의 나라를 위해서 다 필요해서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만 하는 일로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만든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몸은 그냥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몸과 몸들이 만나는 영역 속에 있는 그들의 성질을 그대로 우리가 스펀지처럼 품고 있게 되어 있어요. 부모가 자식 교육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친구들 만나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 들었던 것이고 아는 것이고 납득이 되는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고의 떨어진 귀를 도로 붙였다는 이것은 기존의 인간의 영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인간의 영역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왜 벌어졌는가? 



그것은 너희들 몸을 위해서가 아니고 예수님의 몸을 위해서 그 말고의 귀는 떨어져야 되고 도로 붙어야 된다는 사태가 일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그야말로 자기 자신의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그것만 늘 생각하고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이것조차도 죄라고 생각하고 그 책임을 우리가 지려고 하는데 그런 생각조차 인간세계에 속한 생각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그런 죄를 짓는 것조차도 주님의 영역에서는 꼭 필요해서 일어나야만 하는 일들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이 와서야 비로소 그걸 알려주는 거예요. “내 일을 왜 네가 책임지려고 하느냐?” 그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하지요. “저도 기본 양심이 있는데 예수님에게 이렇게 잘못했으니까 그래도 미안스러워서 이렇게 바르게 살려고 하잖아요.”라고 하면 주님께서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네가 기껏 아는 것은 너의 살아온 과거 경험상, ‘이것은 내 스승에게 할 도리가 아니지.’ 기껏 그 정도인데 그 정도라면 가룟유다처럼 차라리 자살하는 게 낫겠다.” 



인간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를 몰라요. 죽을 때까지 모른다니까요? 알아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몰라요. 아니 몰라야 돼요. 몰라도 괜찮아요. 지금 ‘몰라’가 세 번 나왔어요. 성령께서 오셔서 하는 말이 “네가 6년 전에 도둑질 했지? 15년 전에 사람 죽였지?” 그게 필요했던 일이라는 겁니다. “강도야! 너 강도질 했지?” “예” 필요했던 일이에요. 주의 일에. 강도질을 했는데. 강도질 당해서 어떤 사람은 죽기도 하고 가정이 파산했는데 그게 필요했던 일이라니까요. 누굴 위해서? 주님의 몸을 위해서 꼭 일어나야만 했던 일이라는 말이지요. 



도대체 인간이 걱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건방진 생각인지 몰라요. 인간이 왜, 지가 뭔데 걱정을 합니까? 지 몸도 아닌 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 보세요. 값을 주고 산 내(주) 몸인데 남의 몸 가지고 걱정을 지가 하고 있고, 이것은 남의 아버지 죽은 장례식에 가서 자기 아버지 죽은 줄 알고 울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일이에요. 쉽게 말해서 미래에 될 일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성령은 예수님만 알고 있는 일을 위하여 이 일이 벌어졌다고 우리에게 회고하듯이 소급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사후적으로 알려주시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가 놓치고 모르게 되면 우리는 ‘이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런데 거룩한 분이 성령님이다. 거룩한 분이 왔기에 이 몸을 가지고 거룩하게 하려면 이제부터 담배부터 끊어야 한다. 담배 연기 들어가면, 이 몸이 냄새로 찌들게 되면 성령께서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그래, 이런 것은 하지 말아야 해.’ 이렇게 돼요.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바로 망했던 이스라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늘 상 했던 그 사고방식의 연장이에요. 흔히 교회에서들 성령의 전이라고 하면서 그렇게들 가르치잖아요. 



성령의 전이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설계, 계획과 인간의 몸의 만남인데 인간의 몸은 항상 피동적으로,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우선이고 인간의 몸은 그 계획을 위해서 만들어져야 될 몸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 많은 몸을 오히려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찾아오는 작업이 일어났던 거예요. 제가 이 말씀 드리는 것은 우리 몸의 능력으로서는 이 성령의 전이 안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모양을 갖출 수가 없어요. 



우리가 못해요. 못하기 때문에 주께서 알아서 실시를 하신 겁니다. 제일 먼저 성전이 시작된 곳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돌판 들고 내려올 때입니다. 우리 몸을 돌판을 움직이는 가마역할을 하게 하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모세가 돌판을 들고 내려오다가 아주 침착한 자제력을 발휘했습니다. 그게 돌판을 깨는 거였어요. 돌판을 깨는 겁니다. 성질나서 깨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고 자제력을 발휘해서 깨는 겁니다.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우상 섬기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자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먼저 알아서 깨지 아니하면 그 때는 다 죽어요. 그냥 다 죽어요. 잠시라도 살리기 위해서는 아예 산에서 내려오지 않은 것처럼 ‘나는 누구 만난 적도 없지.’ 하는 식으로 임시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마치 주님께서 하늘나라에 안 계셨던 것처럼 이 땅에 사셨던 그 모양새와도 같이.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시면서 하늘나라에서 오신 분이 아닌 것처럼 행세하면서 결국은 그 모습, 위상을 드러내잖아요. 



인간은 주님의 돌판을 모실 위상이 못 된다는 겁니다. 될 수가 없어요.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모셔야 될 것은 돌판이 아니고 깨어진 돌판을 다시 만드시면서 거기에 추가적으로 어떤 정보가 끼어들어요. 그 끼어드는 틈새가 아니면 인간은 그 돌판을 짊어지고 이동할 수 있는 그릇이 못됩니다. 그 깨어진 돌판과 무엇의 만남이냐 하면, 바로 속죄의 피의 만남이에요. 그 피와 돌판의 만남이 그룹, 천사들 사이에 계시는 하나님의 언약궤로 자리 잡습니다. 그 언약궤가 드디어 이스라엘 지역 내에서 이동을 하게 되는데 이동을 하면서 무엇을 유발하는가? 인간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한 죽음과 심판과 저주를 유발시켜 가면서 언약궤는 이동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에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무슨 용도인 줄을 몰라요. 이스라엘을 지키는 용도인줄 알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들고 나가다가 전쟁도 패하고 언약궤도 빼앗겼습니다. 에벤에셀이라는 곳에서 빼앗기거든요. 시내산에서 돌판을 받았는데 돌판이 깨지지요. 모세가 시내산에 총 네 번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다시 깎아 만든 돌판에 말씀을 새겨 받고 성막 만들어서 언약궤를 안치하는데 피와 그룹들과 함께 그 언약궤가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그저 가마꾼이에요. 요단강 들어갈 때 “물이 많아서 못 들어가겠네.” 하잖아요. 



인간은 자기 혼자 있으면 천국에 못가요. 예수의 나라 못갑니다. 반드시 무엇이 있어야 되느냐? 천국은 그들을 들어가게 하는 나라가 아니고 ……, 고함지른다고 이해될 문제는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가 사는 곳이 아니고 언약궤를 언약궤답게 영원히 모시는 곳이 천국이에요. 우리는 거기에 끼어들어가는 겁니다. 언약궤를 앞장세워서 제사장이 요단강 복판에 들어가니까 물이 멈춘 겁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에요. 제가 지어내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 들어가서 살라고, 우리에게 영생주려고 있는 나라가 아니에요. 그것은 종교에서, 인간세계에서 인간들이 상상하고 싶고 그런 마음을 갖고 싶어서 지어낸 이야기에요. 그거 다 거짓말입니다. 



진짜 천국은 언약궤만 영원히 안치하는 곳이에요. 요한계시록 보세요.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곳이 천국이고 거기에 언약궤가 완성된 채 있습니다(계 11:19). 지금 있는 이야기를 제가 해드리는 거예요. 믿든 안 믿든 망해도 할 수 없어요. 이게 사실이니까. 천국은 하나님의 언약을 모시는 곳이에요. 언약을 모시는 곳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그런 인간은 갈 수가 없어요.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곳이 아닙니다. 성령이 계신 곳인데 성령은 뭐냐? 성령은 모든 언약이 마무리 될 때 마무리 되었다는 통보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거예요. 



그 언약궤가 요단강 건넜고 여리고성 침략했고 길갈, 길갈 다음에 실로, 그 다음에 에벤에셀에서 전쟁하다가 언약궤를 빼앗겼고 아스돗, 가드, 에그론,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완전히 작살나는 거예요.(삼상 5:6,8,9) 사람들을 그대로 죽여 버린 거예요. 감당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낯선 폭탄이에요. 그냥 괴물이에요. 그런 책도 있지요. ‘예수는 괴물’이라고. 맞아요. 괴물이에요. 예수 만나면 누구라도 죽이고 싶어요. 왜? 그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내가 사람 가치가 없어지니까. 사람이 왜 복음을 안 듣는지 알아요? 복음 듣는 그 시작부터 나라는 가치는 완전히 박살이 나니까 참을 수가 없는 겁니다. “에이 씨!” 하고 집어 던져버려요. 꼭 ‘C’가 들어가야 돼요. 



“누가 믿으리오.”(사 53:1) 아무도 못 믿어요. 믿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믿어서 들어갈 나라가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지식으로 안다는 뜻인데 아무도 못 믿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벨 때 ‘주님께서 다시 붙여주겠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 말고의 귀를 붙인다는 것은 그게 끝이에요. 인간의 한계를 미리 보여준 겁니다. “이거 몰랐지롱?” 하고 붙여준 거예요. “베드로야.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알고 말고의 귀를 베었느냐? 네가 이럴 줄 몰랐지? 내가 이렇게 떨어진 귀를 도로 붙일 정도 같으면 예수님이 하늘로 순순히 올라가면 될 것을 왜 그냥 잡히지? 네 생각에 논리가 안 맞지? 남을 살릴 수 있는 분이 왜 스스로 죽는지 너는 모르겠지? 그렇지? 그것이 너의 한계야.” 그것이 너의 한계라는 거예요. “너 살기 위해서 하나님 믿고 너 살기 위해서 예수 믿는 그게 너의 한계야.” 그런 인간들은 천국에 못 간다는 그 말입니다. 



몸을 깨끗하게 하고 성령 모시면 천국에 간다고요?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거짓말입니다. 그런 것 성경에 없어요. 내가 어디에 사느냐가 중요치 않습니다. 성령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알려주는 거예요. 성령의 세계를 알려줘 버리면 내가 내 몸을 스스로 챙겨서 하늘나라에서 호강하려는 이러한 죄까지 죄라는 것을 비로소 알고, 그런 죄를 지어야 될 이유도 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천국 가는 사람이에요. ‘내가 예수 믿고 천당 가려는 죄를 지었구나. 예수 믿고 죽어서 좋은데 가려는 이 죄를 어떻게 넘어서지?’ 넘어설 방법이 없어요. 나는 나를 못 넘어요. 나는 나만 위한다는 그 사실을 스스로 포기할 위인은 아무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끝까지 하나님 믿고 끝까지 예수 믿어도 그 끝의 뒤에 보면 내가 있어요. 나를 위하지 않는 노동은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 가봐야 예수의 세계 아닙니다. 내 세계지요. 나의 잘남을, 나에게 영광 돌리는 그런 세계에요. 그게 다 거짓말이고 전부 가짜가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 가지고 하늘나라 가려고 하다가 멸망당해요. 하늘나라 가려다가 멸망당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우리의 선배들이에요. 성전 짓고 하나님 모시고 다 했어요. 그래서 망한 거예요. 블레셋의 에그론에서 작은 상자인 언약궤 하나 감당을 못해서 그것 때문에 재앙이 생기니까 다시 이스라엘에게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유명한 벧세메스 소가 등장하지요.(삼상 6:12) “장로가 되면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부흥회 할 때마다 등장하는 메뉴 아닙니까? 장로가 되었으면 목사가 하는 일을 팍팍 도와줘야 교회가 된다고. 



울면서 갔더니 기럇여아림이라는 곳에 도착합니다.(삼상 7:1) 기럇여아림의 아미나답의 집으로 갔는데 나중에 그 궤를 다윗 성으로 모시는 중인데 아미나답의 아들인 웃사가 궤가 흔들릴 때 무심결에 붙잡으려고 하다가 그대로 죽었어요.(삼하 6:6,7) 도저히 감당이 안 됩니다. 그래서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있었습니다.(삼하 7:11) 그것을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모셔옵니다.(삼하 6:15) 지금까지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살아남지를 못해요. 다 죽여 버렸어요. 만지든지 보든지 하면 다 죽였습니다. 정말 위험한 물건이에요. 이 하나님의 언약궤는. 



이 말은 뭐냐? 장차 올 그 미래의 나라, 예수의 나라가 미리 당겨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무나 위험한 일을 하신 거예요.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는 일을 하신 거예요. 그 두렵고 떨리는 그것이 우리의 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감당 못할 그 나라가 우리 몸 안에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그걸 감당 못하고 우리는 값을 주고 인수인계를 해줘야 돼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것’이라고. 성전이 된다는 것은 낯선 요소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요소를 항상 지적질 하시면서 우리 안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상을 보일 때 그 사람이 바로 성전 된 성도입니다. 낯선 요소, 예상 못한 요소, 그리고 그 일어난 일들은 항상 우리 기대 이상으로 우리의 한계를 훌쩍 넘어버려요. 



마포경찰서 용강지구대의 김치열 순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야, 어떻게 이렇게 복음과 합치되는가.’ 싶어서 기억을 했는데요. 그 경찰관이 하는 일이 뭐냐? 마포에서 자살을 방지하는 일을 해요. 나이가 서른여섯이니 늦게 경찰에 입문했지요. 그분이 1년에 50명을 건졌답니다. 자살하는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심지어 한 달음에 800미터를 질주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5차선을 가로질러서 달려가서 다리 난간에서 떨어지려는 사람 발목을 잡아당긴 적도 있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그 일을 하다 보니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안목이 생겼어요. 



어떤 사람이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으냐? 앞을 보지 않고 땅만 보고 걷는 사람. 두 번째는 다리 위에 있으면서도 다리를 건널 목적을 잃은 사람. 그걸 우리한테 적용시키면 코앞에 있는 땅만 보고 사는 사람, 지옥 갈 사람이죠. 그리고 이 땅에 왜 사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 지옥 갈 사람입니다. 자살충동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 자포자기하고 사는 사람. 자포자기가 요새 대세에요. 젊은이고 뭐고 세대를 아울러서 전부 다, 나이 80이나 90이 되어도 자포자기로 다 살아가요. 사는 이유도 모르고 목적도 모르고 그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내 몸을 위해서, 그것뿐이에요. 혹시 천국 넣어줄까 싶어서 교회는 가끔 나오고. 



그러나 히브리서 12장 28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라는 이야기에요. 두렵고 떨리는 마음. 왜? 이것은 행함으로 못 받아요. 은혜로 받자. ‘은혜’ 빼버리면 그냥 받자. 주거든 고맙다는 이야기나 해라. 그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주시거든 고마운 줄 알아라. 감당 못할 몸 가지고 주께서는 하나님의 성전, 예수의 나라를 만드시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예수의 나라가 기껏 이 면적밖에 안됩니까?” 하는데 예수의 나라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 망했던 이스라엘을 다 집어넣어도 괜찮아요. 예수님의 그 세계가 우리 보기에는 좁지만 일단 들어가게 되면 온 우주가 그 안에 들어 있어요.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는 것이 도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펼쳐지게 되면 온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것이 다 예수의 나라와 관련성이 있어요. 그게 보입니다. 



어느 것 하나, 머리카락 자라는 것, 발걸음을 세는 것, 참새가 떨어지는 것, 어느 것 하나, 화산 터지는 것까지도 주의 나라와 무관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돼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다 ‘예스’가 되고 ‘노’가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심지어 마귀의 활동과 우리가 죄를 저지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하나도 없어요. 다 하나님이 새언약, 십자가 새 언약의 완성을 드러내기 위한 가마꾼으로서의 노릇을 성실히 다 하게 하시는 겁니다. 



어떤 이는 지옥 가는데 지옥을 가도 주를 위해서 지옥가게 되어 있어요. 시편에 보면 지옥 가는 사람은 지옥 가서 주의 공로를 찬양할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놀라운 일입니다. 자기는 영원토록 불심판 받으면서 “주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 합당한 조치입니다.” 하면서 벌 받고 있어요. 천국 간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아무 한 것도 없이 죄만 지었는데 죄 지은 우리를 이렇게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하늘나라 넣어주시니까 이것도 주의 합당한 조치입니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내가 천국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하시고자 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는 고백을 천국에서 하게 되는 겁니다. 



이 사실이 너무나 엄청난 사실이고 너무나 규모가 큰 이야기에요. 그렇게 큰 이야기지만 막상 나사렛 예수의 몸으로 우리 앞에 등장했을 때는 예수님의 몸을 보통 만나는 이웃집 아저씨 중의 한 사람, 평범한 이웃 주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저 많은 인구 중의 한 사람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익히 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보통 사람 중의 하나라고 하는 그것이 뭐냐? 그것이 바로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해 만들어낸 이 세상 가운데에 천국은 반짝반짝 반짝이는 점처럼 끼어든 거예요. 이 넓은 인간들 세계에서 예수는 보잘 것 없고, 인기 없고, 알아주지도 않고, 그냥 과거사의 한 인물에 불과하지요. 그냥 무심하게 지나가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서 반짝반짝 거리면서 그것이 천국으로 박혀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 인간들의 세계에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뭐냐? “목사님! 오늘 본문의 뜻이 무엇입니까?” 물으신다면 딱 한마디로 하겠습니다.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세계에 절실하게 몸 담그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원래부터 잘하지요. 태어날 때부터 했던 것이 그거니까.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 그 가운데서 이러한 인간세계 자체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정죄하는 어떤 깜박이는 점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전폭적으로 다 뒤집어지는. 



‘인간세계를 보고 욕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욕하는 그 정도가 아니고 인간의 손에 의해서 살해당하신 그 지점을 찾으세요. 바로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살해당하고 난 뒤에 다시 찾아오신 분을 찾으세요. 그 분이 바로 부활하고 난 뒤에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입니다. 그걸로 인하여 이 넓은 인간의 세계를 전부 다 주의 나라에 꾸역꾸역 집어넣으세요. 집어넣으시면 예수님이 우주의 머리가 되시고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깜박거리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점은 지옥가기 위해서 푸른빛을 낸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천국가기 위해서 붉은 빛을 내지요. 저쪽에서는 “세상 모든 것은 다 인간하기 나름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주여! 왜 이렇게 낯설게 저를 이끄십니까?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 저를 난처하게 만들고 당황스럽게 만드는 일이 왜 자꾸 일어나고 있습니까?”라고 주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고백하시면 그 깜박이가 바로 주님이 이미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당했던 대우를 똑같이 받으면서 예수의 백성으로서 이미 이 세상에 꽂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 사는 것?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야. 사람 사는 것? 예수님에 의해서 살아가는 거야.”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몸은 주께 영광이 되는 몸입니다. 새언약이 결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법궤가 가는 곳마다 온통 인간세계가 다 파괴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법궤가 우리 마음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완성되었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파괴되고 죽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살려주시는 것은 주님의 값으로 주신 공로가 작용하기에 그런 줄 압니다. 저희들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인간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으로 산다는 것이 괴롭기도 하고 또 얼마나 행복한지를 날마다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