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39강-그냥 지내라(고전7;8-14) 1505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5. 9. 08:22

2015-05-03 12:28:21 조회 : 156         
   그냥 지내라 150503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그냥 지내라(고린도전서 7: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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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5-03 13:23 
그냥 지내라

2015년 5월 3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7:8-14

(7:8)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7: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7:10)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7:11)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7: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7: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7: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결혼을 정욕절제용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결혼 제도 자체가 그만큼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는 증거가 됩니다. 따라서 결혼을 사적인 행복 추구의 수단으로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정욕이라는 부정적 성질이 작용하는 자에게 있어 행복이란 여유는 어울리지 않는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결혼제도는 소극적입니다. 사활을 걸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다듬기 위해 사도 바울은 ‘주의 명령’과 ‘주의 명령이 아닌 권면’과 구분 짓습니다. ‘주의 명령’이란 결론의 적극적면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만 해야 될 관계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부부가 모두 자기 처지 말고 주님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주의 명령이 아닌 권면’ 수준의 말씀은, 불신자에 대해서 소극적 배려 차원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즉 “당신과 살기를 너무 원해”라고 간곡히 불신자들이 매달릴 때는 너무 야박하게 억지로 떼 낼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만약 이 둘 사이에 자식이 나오게 된다면? 이 때는 자식에게 거룩됨을 보여서 자식으로 하여금 복음을 이전받을 기회를 제공하라는 겁니다.

어차피 부모는 한시적으로 이 땅에 살다가 사라질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이러한 초연함은 바로 이때가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이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다루시는 상황입니다. 이 근원에 대해서 인간들은 미처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자기에게 의미가 돌아오는 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원할치 않기에 인간의 모든 행위는 신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 됩니다. 인간은 매사에 하나님에 대해서 화를 내며 삽니다. 그것은 속에 귀신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이 생각해놓으신 그 원천을 감추려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강력하게 자기 의미를 고수하기를 부축입니다.

자기 의미 고수로 인하여 인간들은 지속적으로 자기 욕망으로부터 지시와 명령을 받고 시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만!”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주체 못하고 욕망이 시키는 대로 계속 달려야 합니다. 나름대로 고생과 수고로 휩싸여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실은 본인보다 주위 사람들이 더 고생과 수고를 합니다. 본인의 탐욕을 받아내고 수발한다고 말입니다. 신에 대한 화풀이가 주위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게 됩니다. 처음 아담과 하와는 뭐가 죄인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수치를 느끼면서 뭔가 낯선 변화를 접합니다. 하지만 정작 본격으로 죄의 실체가 일상 속에서 구체적 드러나는 것은 창세기 4장부터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그것은 죄가 가인을 덮쳤기에 발생된 사건입니다. 이 일로 통해서 죄는 이 땅에, 하나님쪽에서 가미하신 의미 있는 죽음을 통해서 발각됩니다. 가인은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게 되는데 이 주어진 벌로서 죄의 본질에 부합되는 정도가 나타납니다.

죄에 대한 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저주스러운 고립’입니다. 그냥 숨 끊어지고 만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저주받기 위해 고립되는 상황의 등장이 마무리입니다. 그곳이 곧 지옥입니다. 이 땅에서 이미 이 지옥은 출발했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자기에게 의미 붙이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의미 앞에서 무의미가 전락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죄가 생산되는 공장입니다. 인간들은 죄를 낳는 기계들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의미붙임을 강조하기 위해 피해자를 양산시키는 제각기 노릇을 하는 중입니다. “네 죽이고 내 살자”입니다.

젊은이들은 누구를 만나도 “이로서 내 인생은 이런 스토리를 앞으로 쓰게 되겠구나”라고 짐작하게 됩니다. 즉 잠복되어 있는 귀신이 본인 위주의 의미들의 세계를 풀어내게 됩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바로 이런 현상이 죄된 현상임을 알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의미체제 속에 본인들이 이미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 숨을 거두는 식으로 일을 마감하시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형국을 영원히 고정시키십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는, 지상 생활에서 이미 물의 시원함을 경험했기에 지옥에서 그 결핍에서 오는 고통을 영원히 지속적으로 겪여야 합니다. 죽고 싶어도 못 죽습니다.

사라지고 싶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의미와 더불어 늘 생생합니다. 죽어서도 생생합니다. 이로 인해서 고통스럽습니다. 성도에게는 이런 차에 근원에서 들이닥친 의미가 주어집니다. 근원의 의미는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의 효과에서 파급된 의미입니다. 곧 사랑이요 용서요 불쌍히 여겨주심입니다.

사람은 욕망의 명령과 지시를 따르면서 자신만의 자유와 선택성을 마음껏 발휘하고 싶지만 하늘에게 보면 그저 ‘제자리 뛰기’에 불과합니다. 멀리 못갑니다. 왜냐하면 갇혀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이러한 죄의 갇힘을 이해토록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본인의 의미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즉 처음부터 ‘나의 것’이란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즐겁습니다. 죄를 짓는 것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용서 안에 이미 녹아져 있는 죄가 발굴당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바로 그런 것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피 흘리셨고, 그리고 그것으로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모든 게 자기 의미체제로 생각하기에 스스로 고립을 자초합니다. 바로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유도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자기 힘으로 아무리 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토대가 됩니다. 구원은 바로 이런 ‘능력 없음’에서 출발합니다. 마태복음 11:12에 보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흔히 인간들이 상상하는 그 천국은 자기를 위한 의미로 밀집된 가짜 천국입니다. 그곳을 세례 요한은 와서 폭격합니다. 그것이 깨어지면서 비로소 어린아이라도 천국에서 큰 자로 들어선다는 의미입니다.

즉 모든 의미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내려온 것입니다. 수몰지역이 물이 차이듯이, 죄가 있는 곳에 용서와 은혜의 물이 덮쳐서 천국이 됩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한 번 알고 지나쳐가도 되는 사건이 아니라 그 안에서만 반복적으로 지내면서 확인되어야 될 최종적 사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주제 파악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5-04 12:52 
39강-고전 7장 8-14절(그냥 지내라)1505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7장 8-14절입니다. 신약성경 271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7:8-14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찌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결혼이라는 것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절제하기 위해서,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절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결혼하라는 겁니다. 결혼하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뭐냐? 절제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결혼은 정욕을 참을 수 없었다는 표징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결혼조차도 하나님께서 지배하는 이 세상의 하나의 흔적이 되는 겁니다. 결혼이 절제 못해서 해야 한다면 결혼해도 절대 안 되는 것은 어떻게 하지요? 결혼했는데 절제 안 되는 것은 결혼을 두 번 해야 합니까? 세 번 해야 할까요 일곱 번 해야 할까요? 일흔 번의 일곱 번 할까요?



결혼 자체에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자식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기능으로 끝난다는 겁니다. 그리고 너는 결혼 했든지 안 했든지 간에 사라져라. 없어져라.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아내도 거룩하고 남편도 거룩한데 그 거룩을 소지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혼했다는 말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개인은 절대로 절제할수 없고 정욕을 이길 수 없음이 이미 판정이 나버린 상태에요. 10절에 보면,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라고 해서 예수님이 명령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거든 남자보지 말고 여자도 보지 말고 주만 바라보라는 뜻이에요. 극 주의 명령이에요.



그런데 12절에 보면,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라고 이야기하는 차원이 뭐냐 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그냥 붙어살기를 원하거든 그냥 봐주라는 그 말입니다. 봐줘라. 그 사람을 꼭 버릴 필요는 없다. 혹시 나에게 붙어서 구원 받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 말이에요. 구원 차표 한 장 가지고 천국 가는데 누가 정욕을 절제 못해서 나에게 붙어 사는 거예요. 발길로 차서 꼭 내 보낼 필요는 없다는 말이거든요. 이상한 사고방식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결혼이라는 것은 나의 행복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서 결혼하거든요.



보통 모든 드라마의 끝은 결혼입니다. 결혼만 하면 행복시작 불행 끝이에요. 그러나 주의 명령은 그게 아니고 결혼이라는 것이 임시적이고 한시적인 취직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혹시 너의 정욕으로 인하여 복음이 가리워질까봐 그게 더 걱정된다는 겁니다. 일단 결혼했거든 자식 생겼을 거니까 그 자식한테 복음 전파하면서 아빠 엄마는 소리 없이 사라진다. 너는 아빠 엄마가 전하는 복음 듣고 너나 구원 받으세요. 떠나는 역할을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11절에 보면, “만일 갈릴찌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지금 결혼 자체에 의미를 두지 말라는 거예요. 언젠가 제가 그런 이야기 했지요. 한 청년이 너무나 수치스럽다고 비밀글로 한 질문 가운데 “목사님, 자꾸 자위행위를 하는데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할때 저의 답변은 간단했어요. 거기에 의미 둔다는 것이 잘못입니다. 의미를 둔다는 것은 자위행위를 하지 않는 나 자신을 멋지게 보겠다는 그 자체가 시선이 주님한테 떠나버린 거예요.



죄가 뭐고 악이 뭐냐 하면 주님한테서 눈 돌리는 것이 악이고 주님이 상관없다고 하는데 심각한 의미를 두는 것 자체가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결혼에 의미를 두지 않는데 자기가 거기에 의미를 둔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결혼이 필요 없습니까? 필요하지요. 왜 필요합니까? “네가 정욕을 절제 못해서 여기 저기 바람이나 피우고 다니면 남한테 민폐를 끼치니까 결혼하게 되면 아예 없어지지는 않지만 좀 줄어들 것이 아니겠는가? 바가지를 긁어대고 그렇게 되면……, 간통죄는 폐지되었습니다만, 나중에 재산 거덜 나게 된다면 자기한테 손해가 될 것 뻔히 아니 그것이 하나의 제어수단이 되어서 남에게 폐를 좀 덜 끼칠 것이 아닌가?



어쨌든 저쨌든 간에 너 자체가 골칫거리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절차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네가 골칫거리라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왜 골칫거리인가 하면,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의미를 자기로부터 끌어내기에 이것이 골칫거리에요. 의미 없는데 억지를 부려요. 의미가 있다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 복음을 통해서 우리 속에 있는,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것, 내 사업, 직장, 가정, 자식공부, 내 앞길, 내 출세, 내 결혼, 거기에 의미를 두는 그 귀신, “잠시 만요, 귀신 떼고 가실게요.” 그래서 찾아오는 거예요. 그걸 떼고자 하는 겁니다.



그게 교회 나온다고 해결 될까요? 성경공부 한다고 해결 될까요? 어느 구석, 어느 현장, 어느 자리에도 하나님이 없는 곳이 없는데 교회 나온다고, 신앙생활 하는 척 한다고 그게 복음생활일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에는 결혼문제에 깊숙이, 우리의 의미가 소복이 담겨 있는 그 중심을 향하여 가차 없이 주의 명령이 쳐들어오는 겁니다. 주의 명령이 쳐들어오는 거예요. 마태복음 11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흔히들 신학자들은 이걸 난해구절이라고 하는데 글쎄 난해한지 아닌지 봅시다.



11절에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라고 되어 있고 12절에 보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천국 개념을 두 개로 나누었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 그리고 실제로 그 천국에 의해서 감추어진 진짜 천국, 이제는 세례요한부터 그 감춰진 천국이 인간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그 천국이라는 것을 공격하고, 침투하고, 파괴시켜서 그렇게 파괴된 자는 진짜 천국에 접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지요. 세례요한 때부터. 세례요한은 입만 떼면 공격했어요. 입을 떼기만 하면. 도끼이야기 했고 심판이야기 했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했지요.



그런데 인간이 만드는 천국은 뭐냐? 인간이 만드는 천국은 자기한테 꼬깃꼬깃 담아놓은 의미를 확장시켜 놓고 그것을 천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평소에 내 중심으로 즐거워하던 그런 세상을 강제로 확장 확대시켜서 ‘아마 천국도 이처럼 나 중심으로 돌아갈 걸?’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는 이걸 천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천국에는 맨션아파트가 있다는 등의. 장례식장에 가면 목사들이 하는 이야기가 다 그거거든요. “죽어서 천국가면 맨션아파트가 있습니다.” 맨션아파트에 못 살아서 환장을 했나? 그런 이야기한다는 말은, “이 땅에서 네가 너 밖에 모르지요 천국 가서도 너 밖에 모르는 세상에서 삽니다.”라고 하는 식으로 엉터리천국을 소개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결혼이란 왜 있는가? 절제 못함을 티를 내기 위해서, “얼마나 못났으면 오죽 못나서 절제를 못하고 그렇게 욕심 많아서 절제를 못할까?”라고 언급을 해주시는 것은 ‘지금 하나님이 만드시는 그 천국에는 네가 절제 못하는 그 욕정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욕구와 욕정은 어디서 나오는가? 자기가 최종적으로 의미를 갖고 있으니까 생겨나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어머니와 일찌감치 교회에 왔는데 어머니가 찬송가 289장을 펴셨어요. 그 찬송가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고생과 수고는 다 지나가고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 저 들으라고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고생과 수고는 누가 합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해요. 세상에 편한 팔자에요. 다 도와주지 먹을 것 해주고 그냥 지내시기만 하는데 무슨 고생과 수고? 어머니는 자기의미로 생각하는 거예요. 모르겠어요, 그렇게 생각을 하는지 어쩐지 그것조차 모르는데. 우리는 여기에 존재하는 자체가 남한테 민폐 끼치는 겁니다. 왜요? 나에게서 의미를 끄집어내기 때문에, 전부 다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나만 최고기 때문에,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되면 되는 거지요. 나만 정당화하게 되면.



사람들이 정욕을 끊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의 세계를 원하고 나만의 세계, 나만의 의미 있는 세계를 원하는 거예요. 프로야구 열 팀이 있어요. 그 중에 자기가 좋아하는 팀은 따로 있어요. 그래서 천국 가면 프로야구가 없어요. 자기 팀만 응원하면 천국이 개판되어 버려요. 우리는 이제 그 개판 같은 생활을 그만해야 되지 않습니까? 왜 자기편, 자기가 좋아하는 팀, 자기가 좋아하는 손자, 자기가족, 왜 그것만 챙기는가? 그것이 나의 자유, 나의 선택, 그것을 절대화하기에, 거기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이러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자기를 미워하는 인간으로 바꾸어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내가 나한테 좋은데 그 좋은 나를 내가 바꿀 수가 있겠어요? 이 교회에 예배당 짓는다고 헌금을 바쳐놓고 그 다음 주일에 다른 교회에 가겠습니까? 못가지요. 내가 손대고 내가 디디고 내가 접촉했던 모든 것은 마치 마이더스의 손 같아서 전부 다 더러워져버려요. 왜 나의 의미가 거기에 묻혀 있으니까 동화에 그런 것이 나오지요. 손만 대면 전부 다 황금으로 변하는 그런 것이 있지요. 배고파서 음식 먹으려고 손을 가져다 대면 황금으로 변해버려요. 금을 어떻게 먹습니까? 금 좋아하다가 완전히 굶어죽게 된 서양의 동화가 있잖아요.



우리는 내 의미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누굴 만나든 친구를 만나든, 동창을 만나든, 교인들을 만나든 대화를 하면 전부 다 나 때문에 저쪽은 피해를 입게 되어 있어요. 서로는 서로를 찌르는 긴 창을 가지고 있고 서로를 찌르는 가시를 갖고 있어요. 이거 해결 안 됩니다. 이거 해결 안 되면 구원 못 받거든요. 영생의 나라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기쁜 소식이라고 시작을 한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곡해해서 좋아들 했습니다. “야, 기쁜 소식이래. 우리가 죽어서 좋은 나라 간데.” “어떤 나라?” “내가 잘 되는 나라.” “나는?” “너는?” “너는 너대로 ‘내가 잘되는 나라 내가 신나게 영생의 욕조에서 헤엄치는 나라 내 가 잘되는 그 나라’에 간대.”



그러면 내가 평소에 이 땅에서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게 할 거예요? 천국 가서 멱살 잡고 다툴 판이에요. “네 까짓 게 어딜 여기 와? 내 자식 유괴해서 죽인 네가 천국을 가? 그러면 나는 천국 안가!” 이게 유명한 영화 <밀양> 아닙니까? 김 추자 노래 나오면서. “거짓말이야~” 다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인간은 평소에 모든 의미가 자기 뜻대로 되어야 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은 한마디로 신에 대한 분노의 분출, 화의 분출이에요. 그 누군가에 대한 분풀이 식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행동이. 젊은 애들이 “엄마, 나 교회 안가.” 이게 무슨 뜻입니까? 화가 난다는 것, 이 세상 모든 것이 화난다는 뜻이에요.



교회 나와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나와서 본격적으로 화 낼 수도 있으니까요. 철야기도나 금식 같은 것으로. 금식한다는 게 뭐예요? 지금 시위하는 거예요. 불교식으로 하면 삼보일배, 세발 걷고 한 번 절하는 식으로. “이렇게 내가 열심 내는데도 내 뜻대로 안 이뤄줄 겁니까? 신이시여!” 이렇게 나와요. 신에게 한번 해보겠다는 거예요. 난데없이 헌금을 많이 한다? 이것은 신에게 한번 해보겠다는 거예요. 내 돈 먹었으니 내가 잘되는지 한번 보겠다는 거예요. 삽십 배, 육십 배, 백배가 되는지 내가 시험해 보겠다는 거예요. 누가 누굴 시험합니까?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이 아침에 눈만 뜨면 해질 때까지 심지어 꿈속에서 까지 인간은 신에 대한 분노의 분출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성경공부를 하든 안하든 마찬가지이비다. 앵그리맘이에요. 화내고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구원을 해내십니다. 기가 막혀요. 그래서 차후로 봐서 기쁜 소식이에요.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십니다. 제가 울산공부에서 그 방식을 수몰이라고 했는데 수몰지역을 말합니다. 소양댐이나 안동댐에 가보면 거기에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에 물을 채워서 댐이 되었잖아요. 주님께서는 죄를 그냥 없애는 것이 아니라 수몰시켜요. 용서로 수몰시켜버리는 겁니다. 따라서 죄는 그대로 있어야 돼요.



그런데 이 말이 인간에게는 짜증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내가 훌륭해서 복 받기를 원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수몰시켜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고 아예 죄가 없기를 바라는 겁니다. 얼마나 못 됐어요, 인간이. “십자가 믿고 이제는 죄 없지요? 이젠 내 맘대로 삽니다.” 이러고 가요.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가 용서의 댐으로, 용서의 새로운 저수지로 만들었어요. 십자가 바깥은 주의 피 흘림이고 그 피 흘림 안을 잠수해서 내려가게 되면 우리 죄가 거기에 그대로 살아 있어요. 이것은 천국가도 변하지 않아요. 면류관? 어딜 머리에 그걸 써요. 후딱 벗어서 반납해야지요.



우리는 이 세상 끝 날까지 수고와 고생이고 뭐고 끝까지 죄를 지어야 해요. 끝까지 죄지어야 됩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죄가 실타래처럼 어디까지 뻗은 줄은 몰라요. 우리가 왜 죄를 모르냐 하면 모든 의미가 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선과 악도 내가 결정하기 때문에 죄가 있는 곳에 나의 양심도 아직도 남아 있다고 변명들 비겁한 핑계들을 하고 있어요. 주님의 기쁜 소식은 왜 기쁜 소식이냐 하면 그런 변명이나 핑계조차도 나의 사랑이 거뜬히 이겨낸다는 겁니다. 심지어 지옥가도 건져내는 것이 주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언젠가는 아가서를 다시 설교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몇 년 전에 오후설교에서 아가서를 했어요. 뒤에 보이는 이 커튼 해놓으신 분 계실 때 아가서를 했어요. 아가서가 좋다고 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에스겔 끝나고 아가서를 할까 하는데 아가서에 보면 그런 것이 있습니다. 남자가 추근대요. 계속해서 추근대는데 심지어 겨우 내내 기다렸다가 봄 되니까 찾아와서 추근대는 거예요. 겨우 내내 기다렸어요. 여자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면서 “이제 겨울 지났으니 좀 만나주시오.” 여자가 얼마나 게으름뱅이인지. 남자가 여자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사실 중에 하나가 여자가 게으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은 분도 있습니다만 상대적으로.



여자가 얼마나 게으른지 “나 지금 옷 벗고 누워 있는데 옷 입기 싫어요.” 남자는 겨우 내내 보고 싶어서 기다렸는데 여자는 옷 입기 귀찮아서 “그냥 돌아가. 나 지금 옷 입기 귀찮아.” “아니야. 지금 봄날이 왔어. 지금 비도 그치고 날도 좋아. 같이 꽃구경 가자고. ‘봄바람이 날리며’ 벚꽃놀이 갑시다.” 이렇게 해도 “귀찮아.” 아가서의 내용입니다. 남자가 이야기합니다. “네가 죽어도 나의 사랑은 그 죽음에서 건져낼 거야. 사랑은 죽음보다 세다.” 죽음이 세다고요? 아닙니다. 죽었다고 울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떤 분이 질문했어요. “목사님이 말하는 죄는 너무 무겁습니다.” 해서 제가 답변하기를 “용서가 죄보다 더 무겁습니다.” 무게가 더 나가요. 그래서 기쁜 소식이에요. 이 기쁜 소식이 접수가 되었으면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이혼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즐거운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나의 신상에 일어나는 어떤 사태도 즐겁게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내 의미를 아주 망쳐버리기 위해서, 내 의미를 조지기 위해서 특별조치를 가했다고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뭐냐? 하나님의 방법은 근원을 경유한다. 근원, 원천, 이 세상이 모르는. 왜 이 세상이 있으며 세상은 왜 이런 식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근원을 경유해서 그 경유한 근원자체를 하나님께서 약속이라는 선물로 포장을 해서 우리에게 준 겁니다.



우리교회 어떤 분이 지난 수요일에 근원적인 것을 선물했어요. 본인은 케이크 전문가로 자처를 하는데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아요. 방부제가 없는 케이크를 선물했습니다. 누구라고 말은 하고 싶은데 지금 안하고 있습니다. 그 방부제 없는 케이크의 특징이 뭐냐? 거기에 ‘없음’이 들어가지요. 없음이라 하는 것은 주님께서 구원하는 사람에 한에서 전부 다 방부제를 없애버려요. 방부제 그 자체를 없애버리지요. 방부제가 왜 있는가? 우리 자체가 썩어 있다는 것을 뜻하거든요. 썩어있는 것을 없음으로 바꿔버립니다. 그 썩은 게 누구인가, 바로 우리 자신이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없는 존재로 바꾸어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겁니다. 없는 존재. 뭐가 없다? 구원이 없어요. 교회 다녀도? 교회 다녀도 없어요. 목사 해도? 목사 해도 영생 없습니다. 십일조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해도? 없어요, 없습니다. 목사 대접해도? 없어요, 구원 없어요. 교회? 교회 있어도 구원은 없어요. 예배당이 있어도 구원은 없어요. 삼위일체 있어도 구원은 안돼요. 그것은 철학이니까 구원이 안돼요. 우리한테는 구원이 없음을 분명히 일러줍니다. 구원이 없음을 일러줌으로 말미암아, 영생이 없음을 일러줌으로 말미암아 영생 없는 현실을 우리로 하여금 생생하게 절감하도록 조치를 해주지요. 이것이 근원이 우리에게 찾아온 증거입니다. 이런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의미를 둡니다. 하지만 복음 앞에서는 이것이 제자리 뛰기에요. 서울 살다가, 필리핀 갔다가, 인도네시아 살다가, 독일 갔다가, 오스트리아 갔다가, 온 천지를 다 돌아다니고, 호주 갔다가, 뉴질랜드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왔다가, 다시 갔다가, 또 왔다가……, 백날해도 주님 보시기에는 제자리 뛰기였습니다. 아무것도 간 데가 없어요. 갈 곳도 없고. 우리가 의미 있다는 것, “하나님, 이것을 위해 애썼습니다.” 하는 것을 아예 없애 버립니다. 없애버리는 그 방법이 뭐냐? 종말이 우리에게 덮치는 거예요. 마지막 때가 덮치는 겁니다.



마지막 때가 덮쳐버리면 우리는 그 앞에서 우왕좌왕 합니다. 마치 시험 쥐 네 마리쯤 놓고 사냥개나 멧돼지를 거기 두게 되면 이것들이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모르지요. 당황스럽지요. 하나님이 구원할 자에게 그런 조치를 해버려요. 어떤 강력한 종말, 모든 의미가 소멸되는 종말이 오게 되면 인간은 응축이 돼요.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떻게 구원받아? 나는 어떤 식으로 구원받지?’ 내놓는 어떤 대책도 다 절망적으로 끝나버립니다. 정신세계에 혼돈이 와요. 어쩔 줄을 모릅니다.



울산에서 부산가는 데 복전철화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온곡터널공사를 하는 중인데 그 근처에 개를 사육하고 훈련하는 곳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공사한다는 것을 잘 못 느끼지요. 공사장 나름대로 주변에 피해 덜 주려고 하지만 개는 민감하잖아요. 개들이 밤중에 자지 않고 서로 물어뜯고 난리를 피워서 무려 5십 몇 마리가 죽어버렸어요. 이제는 다 죽을 판이에요. 왜냐하면 개들이 터널 공사에 민감해져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개 취급해서 이 말씀을 가지고 종말의 공사를 벌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우리도 같이 한 번 시험해 볼까요? 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벌써 발발 떨리지 않습니까? 혼자 지내면 나의 행복은 어떻게 하지요? 갑자기 민감해지지요? 나만 그런가? 옛날 과거의 잘나갔던 자존심은 어떻게 회복하고? 남은 인생 어떻게 보상하고? 보란듯이 재벌 2세와 결혼해서 잘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드라마 보면 애 있는 유부녀를 재벌 2세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그게 신데렐라 꿈이잖아요. 그게 여자의 로망 같아요. 삼세판이라는 식으로, 첫 번째는 실패했지만 결국 세 번째는 성공했다는 식으로 복수하고. 그런데 막상 고린도전서 7장 8절에 보니까 “그냥 사세요. 결혼 의미 없어요. 의미주지 마세요.” 이렇게 하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나에게 의미를 막 뿌려대듯이, 피자위에 치즈 뿌려서 마구 늘어지듯이, 나의 의미의 치자를 막 늘여서 나밖에 모르는 이것에 대해서 이 말씀 자체가 “그냥 지내세요. 의미 없습니다.” 하게 되면, 우리는 그 때부터 불안 증세를 보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그럽니다. “성경 덮어라. 교회 안가면 돼. 왜 네가 그런 말에 시달리나? 성경 안보면 되지. 바보 같네. 안 들으면 돼지.” 그런데 적혀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게 적혀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게 택한 백성이에요. 이게 뭐냐? 하나님께서 “네 건 없어.” 영구 없다, 하는 것처럼 “네 것은 없어. 원천부터 네 것은 없어. 전부 다 예수님의 것이고 예수님의 의미가 너를 낳게 했지 너의 필요에 따라서 생일 챙겨가면서 이 땅에 네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를 원천으로 몰아세우려고 하는 거예요. 그 본래의 모습, 아무것도 없는 식으로.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또 대비가 있어요. 종교행위라는 대비가 뭐냐? “주여,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제가 수용은 하겠습니다만 앞으로 교회 열심히 충성봉사하고 목사 섬기고 선교비 내고 헌금 꼬박꼬박 다 하고 어서 내가 좋았던 그 시절로 빨리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심지어 교회 이름도 회복교회도 한 두 개가 아니거든요. 회복교회라는 말 자체가 뭡니까? 나의 잃었던 의미를 되찾겠다는 그 의미가 강렬해요. 그 욕구, 욕망의 강렬함을 긍정해버리는 겁니다. 이름 자체가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뭘 회복해? 그냥 망하지 뭘 회복합니까?



이게 뭐냐? 기도하고 뭘 열심히 하고 뭘 어떻게 하고.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주의 복음을 더 훼손하고 방해하는 짓이 되는 겁니다. 그런 짓 하면 안돼요. “열심히 봉사하고 예배 꼬박꼬박 참석해서…….” “해서 뭐? 노리는 게 뭔데? 뭘 원하는데?” 개인적이고 사적인 명예회복이잖아요. 젊은 사람들을 보게 되면 특징이 있어요. 다 젊을 때가 있습니다만. 누굴 만나서부터 자기스토리를 만들기 시작해요. ‘어떤 도시에 가서 누굴 만났는데 그 때부터 내 인생은 이렇게 풀릴 것이다.’ 하고 드디어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사람을 만나면서부터.



그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 ‘내가 이 사람을 만나서……?’ 또 어떤 여자를 만나면 ‘내가 이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해서……?’ 스토리를 만들어요. 만든다는 그 말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가 정말 보잘 것 없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도 잠재능력 속에 나만의 세계, 나만의 세상의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하다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고린도전서 7장 8절에 보게 되면, 주님께서는 교회를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일상생활, 실생활 속에 침투해 버려요. “그냥 지내라. 의미 없다. 자식 생겼나? 복음이나 잘 전해줘라. 안 믿는 남자가 너보고 갈라서자고 한다고? 갈라서세요. 잘 됐어요. 그냥 붙어 있겠다고 한다고? 그러면 굳이 내칠 필요까지는 없어.”



이게 뭐냐? 모든 게 의미 없다는 거예요. 의미 없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결혼을 시켰다는 겁니다. 주께서. 결혼하세요. 왜? 의미 없음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그 의미 없는 것 속에서 마치 우리가 의미 있는 것처럼 얼마나 우왕좌왕하는지. “주여, 이것 손대면 안 됩니다. 이것 깨면 나는 진짜 죽습니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철딱서니 없이 구는지. 주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결혼을 만들어내는 공장으로 삼았습니다. 우리한테 압박을 가해요.



제가 옛날에 재미있게 봤던 <언더시즈 2>라는 영화에 보면 주인공이 기관차에 타고 있었는데 테러범들이 그 기관차를 탈취했어요. 기관차의 승객들은 인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인공은 한 때 잘나가던 특수부대요원이었어요. 그 주인공이 테러범 진압하고 승객들 구출하는 내용입니다. 그 방법은 간단해요. 기관차에서 지붕을 뚫고 올라와서 헬리콥터를 만나서 작업을 하는 겁니다.



지금 기껏 나의 의미라는 것이 좀 못되면 이 의미를 위해서 종교적으로 기도하고 열심내서 성경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행동들을 해서, 그렇게 해서, 해서, 해서, 해서, 내가 갖고싶었던 의미를 가지고 오는 그런데 의미를 두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기관차에서 벗어날 줄을 몰라요. 이 세상 의미에서 한 번도 벗어난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게 안 되니까 교회 다니면서, 헌금도 하면서, ‘내 인생 스토리가 원치 않게 끊어졌으니까 어떻게 아주 멋들어진 해피엔딩으로 다시 이어볼까?’ 아주 애를 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기관차에서 지붕 뚫고 빠져나오라는 거예요. 빠져나오면 거기에 헬기가 준비되어 있어요. 그 방법을 먼저 우리 예수님께서 시범조로 보여줬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실패자에요. 패배자입니다. 사형수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싫어해요. 그 싫어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기관차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고 그 기관차 바깥이 무슨 세계냐 하면, 바로 주님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난 뒤에 다시 보게 되면 내가 이겨보려고, 살아보려고, 의미를 회복해보려고, 남에게 안 지려고, 인생 살아보려고 애썼던 그것이 안동 댐 수몰지역의 옛 생활, 옛 의미, 옛 자아, 그것이 제자리 뛰기 한 것에 불과한 거였어요.



오늘 본문 죽 보면서 사람들은 ‘그래, 결혼생활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하면 복 주겠지.’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기관차에서 빠져나올 생각, 안동댐에서 빠져나올 생각은 안하고 그냥 그 안에서 이렇게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주의 말씀대로 하게 되면, 나는 정작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 놓고 “그러니까 복 주세요.”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의미 없는데 너희들이 자꾸 의미 있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그 의미 있다는 그곳에 내가 복음 가지고 가겠다는 겁니다. 가서 너희들을 그 의미 없는 곳에서 진짜 의미 있는 곳으로 빼내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 과정이 창세기 3장 4장에 보면 나옵니다. 처음에 인간이 죄라는 것을 몰랐지요. 아담과 하와는 죄를 몰랐습니다. 다만 죄지었다는 그 낌새는 있어요. 그걸 수치심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 죄가 뭔지 모르고 그냥 수치스럽다, 기분 좀 찜찜하네, 그 정도로 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창세기 4장에 보면 죄가 본격적으로 나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애매하게 죽임으로 말미암아 피해자가 발생되었습니다. 나로 인한 피해자가 발생될 때 그게 바로 죄였어요. 그게 바로 죄였습니다. 아까 제가 했지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누구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의 분출이라고요. 나의 의미를 가로막는 것은 다 죽여 버립니다. ‘나의 의미를 훼손하는 것은 반드시 내 손에서 복수당할 거야.’ 이게 가인이거든요. 이게 가인의 의미라는 말이지요. 왜 그래야 되는데? 그것은 본인도 몰라요.



인간은 자기가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생각되어져요.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본인도 몰라요. 잠시만요, 귀신 좀 떼고 가실게요. 귀신이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으니까. 그걸 창세기 4장에서는 죄가 엎드려 있다가 너를 덮치니까 주께서는 그것을 떼놓고 가시는 거예요. 그 죄라는 것이 내 손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는 그것이 본성이에요. 죄는 본성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나밖에 모르는 그것이 본성이에요.



근본적인 문제는 생존문제에요. 힘든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뭐냐? 생존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벌을 내리는데 죽이는 게 아니에요. 죽이는 것은 그 죄의 벌에 합치하지 않아요. 그 지은 죄답게 합치되려면 가인은 고립되는 벌을 받습니다. 갇혀 있는 벌을 받아요. 그 벌을 온 아담이 다 받고 있습니다. 진짜 죄에 대한 벌이 뭐냐? 지옥에서 못 빠져나오는 것이 바로 벌입니다. “그 안에서 너의 의미를 찾다가 영원토록 의미충족이 되지 못한 결핍된 부분 가지고 영원토록 괴로워해봐라.” 그게 지옥이에요.



지옥에 간 부자는 평소에 이 땅에서 물을 먹던 습관 때문에 지옥 가도 물 한 방울 달라고 요청합니다. 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지옥에 간 부자한테는 물이 없다는 그것이 영원토록, 영원토록, 10년, 아니 20년, 영원토록 물 없는 결핍에 시달리게 될 거예요. 갇혀 있습니다. 주께서 주신 벌에서 못 빠져나와요. 아담이 벌 받았고 가인이 벌 받았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왜 이렇게 욕심이 많습니까?” 벌 받고 있는 중입니다. “왜 나만 챙깁니까?” 왜 나만 챙기지요? 고립되었습니다. 그게 벌입니다.



사람은 밥 없이는 살아도 내 말 들어주고 내 이야기 들어주는 사람이 없이는 사람은 살 수가 없어요. 왜 가족이 죽으면 아픕니까? 같이 이야기했던 사람이 날라 가버리니 내 의미도 같이 날라 가버려서 못 사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을 지옥으로 만들어서 들어도 못 알아듣고 보아도 못 알아보는 단어와 개념을 복음을 통해서 쏟아내기 시작한 거예요. 사람들은 우왕좌왕합니다. “죽여라. 예수 죽여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그것은 예수 복음을 믿는 사람의 오늘날의 똑같은 팔자입니다.



교회 내에서 복음 전해도 교회가 못 알아듣고 옆 사람도 못 알아먹고. “목사님, 그럴 때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말 안하면 돼요. 간단해요. 사서 고생하지 마세요. 못 알아듣는 사람에게 복음 전하지 마세요. 때가 주어지면 그 때 복음 전하면 됩니다. 줘 봐야 못 알아듣습니다. 왜? 갇혀 있으니까. 자기의미에 갇혀 있어요. “엄마, 그 말씀 들으면 내 취직이 잘 되나?” 이렇게 나온다니까? “아빠, 그 말씀 들으면 좋은 남편 만나서 결혼하나?” 그렇게 나온다니까요? 자기스토리, 자기의미밖에 몰라요. 우리도 그랬으니까. 그 아비의 그 자식이니까.



가정 자체가 갇혀 있는 거예요. 서로의 의미가 모여서 가정이 되고 가정 내에서 서로 갇혀 있는 겁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산다고요? 주께서는 그런 것에 얽매이지 말라는 거예요. 그냥 임시직이에요 임시직, 계약직이에요. 한 몸 되는 것은 주님과 우리 몸 밖에 없어요. 인간은 한 몸 안 됩니다. 한 몸 아닌 상황을 통해서 한 몸 되는 영원한 결혼, 그 혼인자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결혼시킨 거예요.



결혼하고 난 뒤에 절제해야 된다고요? 절제가 안 되는데? 정욕이 죽는다고요? 야동 더 보는데? 말씀이 올 때 우리는 뭔가 이 세계가 나의 세계이거나 나의 의미라는 것은 하나의 조작에 불과하다는 것, 내 몸이 지어낸 조작에 불과하고 그렇게 지어낸 환상조차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기에 주님께서 우리 속에서 귀신을 분리시켜서 “네 속에 있는 귀신 봐라.” 하고 보게 하는 거예요.



욕망은 내가 절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제는 결혼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절제는 따로 놉니다. 절제가 나한테 명령하고 욕망이 나에게 명령을 하는 거예요. 새로운 욕구가, 새로운 탐심이 보는 순간 나에게 명령을 합니다. ‘백화점 옷 사라. 신상품이다.’ 홈 쇼핑에 나오는 그거 ‘백수오 사라. 갱년기 여성에게 좋다.’ 가짜인지도 모르고 샀는데 나중에 무르지도 못하고. 우리는 새로운 환경을 주님에게 부여받아서 없는 죄, 수몰된 죄, “주여, 이것까지 수몰되었던가요?” “그래, 그것마저 용서했다. 그것이 주의 사랑이다.”



여러분, 주의 사랑 앞에서 즐기세요. 참 위험한 것입니다만 죄를 즐기라는 말이 아니고 죄가 발굴되는 것에 대해서 즐기세요. 그거 다 주께서 하신 조치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의 넉넉함이고 여유에요. 이미 구원받은 자는 자기가 지은 죄에 민감하지만 그 민감함이 주님이 몰랐던 주님의 사랑의 풍요함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가지고 주님 스스로 자기 영광 받기 위해서 우리를, 되도 않는 어설픈 인생이지만 주께서 귀하게 사용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 행복하면 그것으로 우리 소망 들어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가는 것,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수고를 했는데 우리는 내 수고밖에 모르는 사적인 인간, 이것마저 죄라는 그 죄마저 용서 안에서 다시 밝혀지게 하는 즐거움을 하나님이 허락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