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강-고전 6장 15-18절(지체)1504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6장 15-18절입니다. 신약성경 269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6:15-18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하늘의 구름 위에서 음성만 들려줄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변화 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변화된 몸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때 하나님 아버지가 구름 위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는 저(예수)의 말을 들으라.”(마 17:5)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름 위에서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고, “얘들아! 내가 하나님이다. 내 말만 들어라.”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계셔요. “그분이 예수님이니까 너희는 예수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신 겁니다.
이 말은 그렇게 어려운 말은 아니에요. “예수님을 주목하라. 예수님의 모든 행동을 주시해 봐라. 그 몸이 어떤 일을 하셨고 그 몸이 십자가에 어떻게 죽었으며 그 몸이 사흘 뒤에 어떤 몸으로 변했는지를 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을 보라는 말은 우리의 몸을 보라는 뜻은 아니에요. “얘들아! 너희들 몸으로 바르게 살아서 천국 오너라.”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네 몸은 보지 말고 예수의 몸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보라. 그것이 숨어계신 하나님의 진짜 뜻이다.” 라고 한 겁니다.
우리의 몸과 다른 몸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거예요. 그 몸이 죽었다가 다시 사흘 만에 살아났거든요. 죽었던 그 예수의 몸이, 예수님은 죽고 다른 몸이 살아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돌아가시고 이순신 장군이 살아난 것이 아니고, 죽었던 그 몸이 새롭게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몸은 처음부터 죽지 않아야 될 몸인데 죽으셨다는 뉘앙스를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죽지 않아야 될 몸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몸 빼놓고 너희들 몸은 다 죽어 마땅한 몸임이 강조가 되는 거예요.
“너희는 너희속의 양심을 따라라.” 그것은 부처나 공자나 맹자가 하는 것이지요. “너희는 너희 속의 양심을 따라 반듯하고 바르게 살아라.” 그런 말이 아니고 “너희는 예수의 몸을 봐라.” 숨어 계신 진짜 하나님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거든요. 예수의 몸을 따라가 봅시다. 따라가 보면 그 몸은 제자들 다 제쳐두고 홀로 가셨다는 말이지요. 따라가겠다고 한 베드로도 따라오지 못하도록 떼 놓으시고 혼자 십자가에 달리시죠.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인 어머니, 예수님을 잘 대접한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까지 다 떼놓으시고, 홀로 십자가 지시고, 그 다음에 죽으시고 그걸로 끝.
우리는 그것을 끝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죽으셨던 그 몸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도로 살리신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예수의 말을 들으라고 한 그 취지, 의미가 뭐냐 이 말이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몸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현재 네가 갖고 있는 그 몸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몸이 따로 계신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문제는 그 몸과 우리가 따로 놀게 되면 우리는 끝장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5절에,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렇게 돼 있어요. 우리는 몸이 따로 논다고 생각했는데 성도의 몸은 주님의 몸의 돌출부라는 겁니다. 주의 몸이 늘어졌다, 그렇게 보시면 돼요.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더 나아가서 “나는 너희에게 새로운 몸을 줬는데 그 몸은 창기의 지체가 되라고 만든 몸은 아니다. 내가 만든 몸은 하나님이 원하는 몸이기 때문에 창기의 지체가 되는 몸을 줬겠느냐?”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지체’라는 용어가 굉장히 낯설어요. 내 몸의 지체, 손가락과 발가락이라는 그 지체는 낯설지 않은데 이 몸 자체가 다른 몸의 돌출부라고 하는 개념은 우리에게 너무나 낯선 개념이에요. 참으로 낯선 개념입니다. 우리가 진짜 주의 지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짐을 잔뜩 실은 차가 빠르게 코너를 돌면 짐은 다 떨어져 나가고 차만 돌잖아요. 차가 굉장히 가벼워졌다는 느낌이 들지요. 보니까 짐이 다 쏟아졌어요. 그 짐은 그 차의 지체가 아닙니다.
그런데 짐을 얼마나 꽁꽁 묶어놓았던지 차가 코너를 확 도는데 짐이 끄떡 없이 붙어서 같이 돌았어요. 그거 지체입니다. 한 몸입니다. 우리 몸이 주의 지체라는 말은 더 이상 내 몸은 없다는 이야기에요. 한통속이라는 겁니다. 방금 언급한 것은 우리에게 더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무슨 무서운 이야기냐 하면, 신을 믿는 것이 가장 큰 범죄라는 이야기입니다. 신을 믿는 것이. 본문은 음란을 이야기하는데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나온 최초의 죄는 신을 믿는 죄고 그게 가장 큰 죄였습니다.
신을 믿었던 사람의 이름이 가인이었습니다. 가인은 제사를 자기한테 드린 것이 아니에요. 누구한테 드렸는가? 신에게 제사를 드린 겁니다. 신이 있다고 생각했고 신 덕분에 추수가 잘 되었다고 보이지 않는 신에게 자기고백을 한 겁니다. 얼마나 순수해보입니까? 여러분, 사탄이 신을 믿은 것을 아세요? 사탄이 신자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야고보 2장에 보면 나와요. 귀신들도 신이 한 분인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약 2 :19) 마귀도 신자입니다. 그래서 지옥 가는 거예요.
오늘 본문 내용이 길어도 그 결론은 이겁니다. “몸을 믿어야지 왜 신(하나님)을 믿나?” 하나님을 믿으면 우상숭배고 몸을 믿으면 진짜 하나님의 성도라는 거예요. 그 내용이에요. “네 몸을 믿어라. 하나님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귀신들도 하는 거예요. 가인도 믿었어요. 가인은 하나님을 믿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안 받았습니다. 제물을 드렸는데 그 제물에 어떤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즉시로 가인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나님 왜 제사를 받지 않았는지, 대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가인에게 가장 큰 고민이 있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먼저 말씀만 해 주시면 할 수 있는 마음은 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렇게 드리면 받겠다는 그 말씀만 주시면 그 표준에 맞춰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 있는데 문제는 아무 언질도 없는 상태에서 제사를 안 받았다는 거예요. 병든 시부모 모실 때 며느리가 제일 답답한 것이 뭐냐 하면, 정성 드려서 식사를 차렸는데 아무 이유 없이 시아버지가 밥상을 그냥 물릴 때입니다. “뭘 드시고 싶습니까? 입맛이 없으십니까?” 해도 아무 말 없이 그냥 물리는 거예요. 며느리가 생각다 못해 기껏 생각한 것은 ‘혹시 새 할머니 만나나?’ 저 어른이 무슨 이야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아무 말도 없이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신이시여! 대체 내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가인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가인으로 하여금 범죄자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 이십니다. 그게 창세기 4장 7절에 나옵니다. 성경구절 가운데 어려운 구절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은데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이 대목입니다. 아, 기절초풍할 정도로 어려운 대목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있다. 개처럼 웅크리고 있다는 거예요. 덮칠 태세가 되어 있어요. 그리고는 말합니다. “너는 죄가 덮치더라도 그것을 피해야 된다.”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 4:7)
이 본문 창세기 4장 7절,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죄가 너를 덮칠 기세다. 너는 그것을 물리쳐야 된다.”라는 이 말씀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이 이유를 말하면 더 어려워지겠지만 제가 그 상황까지 챙겨드리지는 못하고요, 다만 그 이유는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이게 왜 어려운가? 가인이 이것을 해내야 할 일 같으면 애초부터 이런 상황을 하나님께서 유발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그것이 우리들 생각이에요. 쉽게 말해서 선악과가 죽음을 유발하는 나무라면 애초부터 그런 나무를 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라니까요.
인간 입장에서 제일 난처한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하나님과 살고 싶은데 하나님 쪽에서 그걸 거부한다는 것이고 그 거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우리는 천국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왜 우리보고 천국에 오지 말라고 강력하게 저지하는지 그 저지하는 이유에 대해서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 이유를 모르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어떻게 변개시키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그 말씀 따라서 가게 되면 천국에서 살게 해주겠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반대로 다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게 뭐냐? 구원중심이에요. 구원론중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에요. 구원하고자 하는 그것은 우리네 뜻이에요. 왜? 생로병사, 사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죽고 난 뒤라도 편하게 살아보겠다는 것이 우리 심정이거든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창기와 합하면 창기와 한 몸이다.” 이렇게 하게 되면 단박 딱 떠오르는 것이 뭐냐? “내가 창녀촌에 안 갈 테니까 제발 구원시켜 주세요.” 백이면 백 이게 성경을 대하면 확 떠오르는 생각이 그거예요. “남들은 창녀촌에 드나들어도 나는 창녀촌에 가지 않고 음란한 짓을 안 할 테니까 제발 저를 구원해 주세요.” 이게 단박에 떠오르는 거예요.
주님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힘들게 교회 오고 성경을 펼칠 이유, 이런 힘든 노동을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구원시켜 줄래요, 말래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계약서에 도장 찍읍시다.” 방 뺄래, 안 뺄래, 그것과 똑같은 이야기에요. “구원시켜줄 겁니까,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구원에 관한 취지가 아니야.” 합니다. 우리는 “저는 구원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죽어서 천당 가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걸 어떤 식으로 주느냐를 제시라니까요?” 주께서는 계약서에 그런 내용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무슨 내용입니까? 하나님이 누군가를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러면 하나님이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 어떻게 했다? 가인의 제사를 안 받는 거예요. 가인은 하나님이 왜 안 받는지를 몰랐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슬슬 작업을 하면서 그 내용을 풀어 헤칩니다.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 죄가 너를 덮칠 것이다. 늑대처럼 왁, 하고 덮칠 때, 죄의 소원은 너를 지목하나 너는 죄를 이겨내야 된다.”라고 한 뒤에 그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불가능한가를 보여주십니다. 동생의 제사를 받아버렸어요. 지금 가인이 뭘 모르는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제사하면 받아줄게.”라는 메뉴얼을 먼저 준 적이 없어요. 표준계약서가 없었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드리면 제사를 받는다는 사전의 언질이 있었다면 그대로 드렸을 거예요.
그런데 아무 이유도 원인도 모른 체 그냥 제사는 안 받았어요. 제사하는 이유나 방법도 가르쳐준 적도 없으면서 무조건 안 받았어요. 안 받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아버렸습니다. 그 때 아벨의 제사를 받는 것과 병행해서 죄는 가인을 덮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사를 받아버리고 죄는 가인을 덮쳐버리고. 이것이 같은 타이밍에 이루어지면서 가인은 어쩔 수 없이 동생을 들에 가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한 몸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가인은 사전에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가인의 잘못은 신을 믿었다는데 있습니다. 신을 믿는 것이 우상숭배이고 그것이 가장 극단적인 죄입니다. 왜냐? 신에게 버림받은 자는 신을 믿을 자격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입니다. 버림받은 자가 감히 신을 믿어요? 버림받은 자가 신을 언급한 그 순간부터 자기는 신자처럼 행세하게끔 그렇게 사탄이 유도한 겁니다. 왜? 귀신도, 사탄도 신을 믿는 신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신자의 방식과 달리 이미 버림받은 자가 나름대로 하나님께 도로 찾아가기 위한 방식들이 악마의 방법으로 덮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식대로 신에게 제사를 드림으로서 신과 나는 이제 하나가 되었다고 자부하게 만드는 그 전략을 마귀 쪽에서 실시한 겁니다.
그렇게 실시한 그것이 평온했는데 언제 그것이 들통이 나느냐, 그 평온이 언제 발작을 일으키게 되느냐 하면, 내가 드린 정성과 모든 것이 거부당하고 동시에 나 외에 다른 몸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때, 사흘 만에 부활이 될 때 우리는 발작을 일으키지요. “나는 뭡니까?” 주의 뜻은 이겁니다. “네가 왜 신의 뜻에 주목하느냐? 너는 네 몸에 주목해야지.” “어떤 몸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나를 죄인 만들어가는 그 몸의 작업에 주목해야 돼요. 죄를 다스릴 수 없고 죄를 이길 수 없게 조장해주시는, 조성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진짜 숨어계시는 참 하나님의 작업이었던 겁니다. 내 몸을 가지고 죄인 되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자비요 사랑인 것을 왜 우리는 몰랐습니까?
다시 해 봅시다. 변화 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나타났습니다. 제가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한다고는 하지만 먼저 와도 돌아서면 다 잊고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변화 산에서 구름 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나타났습니다. “너희는 예수의 말을 들으라.”고 했어요. 왜 예수의 말인가? 양심껏 말씀 듣고 지키면 되는데 왜 예수의 말을 들으라고 했느냐는 말이지요. 네 몸 말고 다른 몸을 파견시켜 준 겁니다. 그 몸이 가는 길을 추적해 보라는 겁니다. 그 몸이 십자가에 죽었어요. 죽으면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부활했다는 것은 바로 그 몸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유일한 몸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우리 몸은 받으실 수 없는 가인의 제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그 몸을 가지고 반듯하게 살아서 구원받겠다고요? 율법만 주시면 다 지켜서 구원받겠다고요? 세상에 그런 사기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 믿고 반듯하게 살라고 하는 그 사기에 이제 그만 속으세요. 그것은 목사들에게 속는 것도 되지만 사실은 본인이 자기 반듯하게 사는 그것에 매료당한 겁니다. 본인이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면서 반듯하게 달라진 그 면면에 스스로 즐거워하고 쾌락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반듯하게 살았는지 스스로 측정에 나서고.
이것은 마귀 짓입니다. 이게 우상숭배 하는 짓이에요. 드라마 언뜻 보니까 어떤 아주머니가 손을 비비면서 막 소원을 비는 장면이 나와요. 비는 그 손바닥,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가 정월대보름날 새벽에 일어나서 종이를 태워서 중력에 반하는 모습으로 위로 올리면서 빌고 또 빌던 그 손바닥을 오래간만에 봤어요. 드라마의 그 할머니가 비는 내용이 뭐냐 하면, 절에 가서 비는데 “내 아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다 이 못난 어미 짓인데 날 대신 잡아가시고 내 아들은 살려주세요.” 하는 겁니다. <장미 빛 연인들>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나를 대신 죽여주시고 내 아들은 살려주세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가인의 속성입니다. 지성이면 감천. 그 비는 그 짓 그대로 가져와서 교회 와서 빌어요. 이 밑 지하실에서도 빌다가 지금은 그만 뒀지요. 2층에 와서 또 빌겠지요. 신을 믿는 게 잘못이었습니다. 신을 믿는 게 잘못이에요. 신을 믿고 신자 된 게 잘못이고 신을 믿고 교회 온 게 잘못이에요. 이게 죄였습니다. 몸을 믿어야 되는데.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믿어야 됩니다. 그 변화는 긍정적 변화가 아니고 갈수록 절망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행함이라 하는 것은 자기 증명입니다. 모든 인간의 행함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증명해주는 모습으로 행함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의 지체라고 했습니다. 지체라 하는 것은 몸 따로 지체 따로 노는 법이 없어요. 그러면 딴 몸이 되지 한 몸이 안 되거든요. 하나님께서 지체라 하는 것, 만약에 트럭에 짐을 싣고 코너 돌 때 짐이 따로 놀면 와르르 쏟아지겠지만 주님한테 실린 ‘너희’라는 이름의 짐은 주님과 같이 놀게 되어 있어요. 주님 가신 코스대로 가기 싫어도 기어이 가야만 하는 몸으로 너는 이미 달라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이 뭐냐?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가 뭐냐 하면, 죄를 용서하는, 죄를 대신 짊어지는 그 일이 십자가지신 일이거든요. 죄를 짊어지기 위해서, 대신 해야 될 짐들이 주님 앞에 필요한 거예요. 짐들이 필요하기에 그 짐들의 역할을 해야 될 자들이 주 앞에 구원 받을 지체들입니다. “너는 죄를 생산해라. 나는 그 죄를 가져가겠다. 생산한 족족 내가 다 가져가겠다.” 이것은 주의 몸과 우리 몸이 대비를 통해서 우리 몸이 지체인 것을 확인하는 작업에 나서시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레위기 4장 13절에 참 재미있는 말씀이 있어요.
제가 레위기 본다고 할 때 아주 골치 아프다는 인상을 갖는 사람들은 성경을 좀 본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아예 모르는 사람은 ‘레위기’라고 해도 창세기와 같은 급인지 알고 있는데 레위기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골치 아픈 제사법, 그 숲속, 나는 근처도 가기 싫다고 나오겠지요. 그런데 그 숲속에 뭐가 있어요. 보석이 있습니다. 레위기 4장 13절에 보면,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찌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이게 뭐냐 하면, 속죄제 이야기입니다.
낯선 문장이 되어서 한 번 더 읽고 싶은 충동이 생기네요.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 여기 잘 들어보세요.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데 그 행동에서 전혀 죄를 느끼지 못했는데 나중에 와서 하나님의 율법에 보니 그것이 범죄인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나중에 알게 되었거든 송아지를 끌어다가 제사장에게 드려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네 죄가 용서받는다는 속죄제규정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시점, 혹은 시간의 문제입니다. 처음에 무심코 한 행동이 나중에 죄악 된 행동으로 드러나는 시점까지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고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주의 몸의 지체 안에서는 그 시간적 간격이 없어져요. 나중에 깨닫게 되거든 속죄제 드리면 전에 지었던 죄도 용서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는 한통속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속죄제를 언급하시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범죄를 모르는 정도가 아니고 근본적으로 뭘 모르는가 하면, 우리가 주님과 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거예요.
우리는 지금 내가 한 행동이 범죄라는 것을 모르는 차원, 그런 수준이 아니고 이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는 그걸 몰랐던 수준이라는 말이지요. 범죄는 나중문제에요. 범죄가 있음으로서 우리가 뭘 아느냐? 범죄가 있고 속죄제가 개입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범죄 하거나 범죄 하지 않거나 범죄 하기 이전부터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회고적으로, 차후 적으로 깨닫게 하시는 작용, 그래서 그 머리되시는, 한 몸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온 그것, 그 사랑과 축복이 뭐냐? 속죄제라는 그 말입니다.
가인의 문제가 뭐냐 하면, 가인은 내 몸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그것이 문제였잖아요. 가인이 뭘 몰랐느냐 하면, 이 몸이 내 몸이라는 겁니다. 평생 동안 투자한 그 모든 것이 쏟아져서 지금의 내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가인의 몸에다가 죄를 붙여줬거든요. 그 죄에 대해서 이기라고 이야기했다는 그 말은 이길 수 없다는 말이에요. 왜? 이길 수 없도록 동생의 제사를 받았으니까 그래요. 설명하기 어려운데, 동생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안 받았으면 가인은 살인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살인 하게끔 조성을 하신다니까요? 누가요? 하나님께서. 왜요? 하나님 믿지 말라고요. 그러면 뭘 믿으라고? 네 몸이 원래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그것이 네가 지어낸 하나님 말고 진짜 계시는 하나님이 일을 그런 식으로 벌여나가신다는 겁니다. 제가 처음에 했잖아요. 하나님이 도대체 뭘 원하는지를 모르겠다, 한다고. 알아서 뭐하는데? 그걸 알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맞춰드리겠다는 겁니다. 그게 몸 따로 입니다. 주께서 지적하는 게 그거예요. “네가 제대로 드려라. 바르게 살아라. 반듯하게 살아야 해.” 그걸 원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반듯하게 살 권리가 없는 거예요. 독자적으로. 왜? 우리 몸은 주의 지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몸이 주의 지체인 것을 드러내는데 주께서는 주저할 일이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몸이 자기 것이라고 우기게 되었습니다. 그 더러운 버릇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우리가 아담의 지체이기에 그렇습니다. 이게 쉬운 말인지 어려운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그냥 말씀드릴게요. 아담의 지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버지의 이름으로’라고 언급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이 뭘 원하는지 쉬운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서울의존교회강의에서 들었던 예인데 다시 반복해보겠습니다. 서울 의존교회에 송 재원 성도가 계셔요. 그분이 간식배분담당입니다.
쟁반에 빵을 담아 왔어요. 빵 종류가 소보루, 크림빵, 단팥빵, 이 세 가지 종류였어요. 여기부터는 예를 들기 위해서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에요. 나는 케이크를 먹고 싶은데 케이크가 없는 거예요. 쟁반에 담긴 것은 세 종류밖에 없어요. 그래서 두개를 제가 집었습니다. 이처럼 ‘나’라는 이 자아는 강요된 거예요. 이미 제한 된 상황 속에서 골라잡아야 될 입장입니다. 어릴 때 우리는 “아버지, 제가 뭘 했으면 좋겠습니까?” 라고 아버지한테 묻도록, 아버지로부터 훈련받는 몸으로 자라났습니다.
제 말 끝까지 잘 들어야 돼요. 제가 뭐든지 “아빠, 뭐하면 돼? 엄마, 뭐 하면 될까?” 라고 묻는, 물을 수밖에 없는 환경, 그것이 의도적으로 부모로부터 조성된 환경인데 그 조성된 것이 뭐냐? 크림빵, 단팥빵, 소보루, 셋 중에 하나에요. 아버지가 “너는 의사가 돼야 돼.” 제가 듣기는 어떤 사람이 서울대 치대를 나왔는데 지금 김밥장사 하거든요. 치과보다 김밥 장사가 더 재미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들이 치과의사 되기를 소원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자 무덤에 가서 “아버지! 아버지는 제가 치과의사가 되기를 원했건만 제가 제 맘대로 김밥장사를 하는데 이제서 이 불효자는 웁니다.” 하고 돌아왔다 합시다.
그러면 죽은 아버지를 왜 찾아갑니까? 본인이 치과의사 한다는 것이 본인의 뜻이기 이전에 이미 아버지가 내민 소보루, 크림빵, 단팥빵 중에서 “너는 의사가 돼라.” 한 거예요. 그 아들은 선택할 때 ‘의사 될까, 의사하지 말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 거예요. 내가 의사가 되든지 아니면 의사가 안 되든지 이미 의사 되라는 명령이 주어졌기에 의사 되냐, 의사 안 되냐, 의 그 두 종류의 선택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설교가 제가 생각해도 참 어려워서 제가 미쳐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우리 속에 있는 것은 누가 주시하고 제시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반항하거나 순종하거나 두 종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모든 욕망은 우리 이전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세대에서 조성된 가운데서 우리가 골라잡아서 그 중에 하나 나의 자리를 배정받은 겁니다. 내가 선택했다고 하는데 그게 선택입니까? 강요받은 거지요. 아버지의 이름이 뭐라고 했어요? 그게 아담이에요, 아담. 아담의 조성된 그 세계 가운데서 ‘나도 나 답다.’하고 우기기 위해서 그 중에 하나를 골라잡은 거예요. 그렇게 된 결과가 뭐냐? “지체? 미쳤나? 내가 왜 지체야? 나 자체가 내가 주인인데.” 이렇게 주인노릇 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끄집어내 보면 다 아버지가 주시한 것이고 어머니가 요구한 것이고 형님이 원했던 것이고 또는 동생이 반발했던 것입니다.
그런 게 전부 다 들어 있으면서 마치 내가 선택한 것처럼 생각하더라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도대체 내가 뭘 원해야 되는가를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는 겁니다. 그게 아담의 세계에요. 이게 바로 저주받은 세계입니다. 이해가 잘 안될 줄 알았어요. 제가 좀 더 쉬운 예를 들게요. 프로야구 LG 팀하고 한화 팀하고 야구를 한다 합시다. 그런데 LG팀이 8:0으로 졌다고 합시다. 그냥 예를 드는 것인데 이 소리 듣고 화내도 할 수 없어요. 1회에 8:0, 2회에 15:0, 3회에 20:0, 8회에 45:0, 그럴 리가 없지만 예를 들어서 그렇다고 칩시다.
‘그래도 9회 말에 60점 내주겠지.’ 하고 있는데 결국 45:0으로 졌다고 해 봅시다. LG홈구장에서 홈팬들이 씩씩거리고 있으니까 구단에서 방송을 했어요. “여러분,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응원해 준분들에게 행운 상으로 냄비 하나씩 드리겠습니다.”라고 방송을 했습니다. 씩씩거리던 팬들이 야구장을 나갈 때 냄비 하나씩 받으면서 하는 소리가 “오늘 끝까지 응원한 것은 이 냄비 건지기 위함이었어. 나 잘했지?”라고 그 모든 행동을 자기정당화 하는 식으로, 자기 몸 쪽으로, “나는 역시 잘했어.”라는 쪽으로 일방적으로 의미를 주고 해석을 해버리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우리입니다.
우리가 천지창조를 압니까, 창조 전을 압니까? 우리가 강원도 촌구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북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아무도 몰라요. 모르지만 그러면서도 꾸역꾸역 살아가는 이유가 ‘하여튼 나의 선택은 실수가 없어. 역시 나는 살기를 잘했어.’라고 일방적인 자기선언을 하면서 자기를 꾸려나가는 그것,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궁색하나마 살아야 될 조그마한 보람이라도 찾겠다고 코앞에 있는 것만 보고 열심내고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정성을 다해서 빌면서. 나름대로의 사랑과 희생을 언급하면서. “내 아들은 살리시고 대신 이 늙은 나를 잡아가세요.”라고 비는 그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 아들을 검찰에서 잡아가지 않았으면 그러한 일은 없잖아요. 모든 것이 강요받은 사항이에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강요받은 사항인데 우리는 그것을 무엇으로 변경시키는가 하면, ‘역시 나는 잘했어.’로, 전부 다 자기 의로 변경시키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이동시킵니다. 율법의 말씀을 이동시키면서 말씀의 행동이 그 사람의 새로운 주체를 만들도록 그렇게 조성하시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너희 몸을 나는 창기의 지체가 되도록 만들지 않았다.”라고 하는 그 순간 우리는 “제가 간음하지 않도록 해서 구원 받겠습니다.” 하는 주장을 들추게 만들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 몸은 우리 이름을 유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우리 몸을 범죄 한 몸으로 바꿔줘요. 바꿔지도록 그렇게 환경을 조성해 냅니다. 조성해 내면서 우리 몸에서 내 이름을 빼버리고 주의 이름에 속한 몸으로 바꾸어서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지 못할 몸으로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규정해 버렸어요. 그 작업 중의 하나가 우리로 하여금 내가 참을 수 없는 욕망을 유발시키게 만드시는 겁니다. 오늘 설교가 세계에서 제일 어려운 설교다 싶어요. 지금 하나님 보지 말고 내 몸을 보세요. 내 몸은 아프면 못 견딥니다. 견딜 수 없는 몸을 지녔어요. 그리고 갖고 싶은 것은 가져야 돼요. 십계명이 다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마음속으로 음란해도 그것이 음란죄가 돼요. 마음속으로 욕해도 그것이 살인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몸은 그 법을 지킬 수가 없어요. 왜요? 그래야만 돼요. 그래야만 내 몸이 내 몸인 것을 포기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조성해주시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감사해요. 내가 만든 신을 못 믿도록 만드는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몸이 죽을 몸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것, 십자가 앞에서. 내 몸은 주의 몸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사실 을 깨닫게 하는 이 은혜가 보통 은혜가 아닌데 이것이 영생 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이게 공통점입니다.
사람이 자기 몸을 반듯하게 하고 싶어요. 하지만 남이 오게 되면 남이 갖고 있는 것이 더 월등해 보이는 순간 나는 내 몸을 미워하게 되는 겁니다. 내 몸을 미워하는 것은 곧 주님에 의하면 살인죄에 해당되는 겁니다. 제가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달아 강의가 있으면 기흥이라는 곳의 가정에서 하루 신세를 집니다.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서 제가 참 은혜를 받았어요. 그 분이 교회에 그렇게 열심내서 충성을 다 했답니다. 새벽기도는 물론이고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면서 개척교회에 몸을 다 바쳤어요. 그야말로 목사님의 오른팔로서 살았습니다. 교회 봉사라는 봉사, 특히 어려운 일은 도맡다시피 했는데 가만 보니까 자기만 일을 하고 나머지는 일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삐져서 1년 반을 교회 안 나갔답니다. 그런 사람들 우리 교회도 한 트럭입니다. 그분이 목사를 싫어한 것이 아니에요. 같은 교인들이 미웠던 거예요. 왜? 자기만 일하고 남들은 일을 안 하니까요. 남들은 시시덕거리면서 농땡이 치는데 혼자서 바보등신같이 군거예요. 그게 속이 상해서 1년 반 동안 교회 안 나갔답니다. 물론 그 뒤로 죽 안 나갔지만. 그 뒤의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어요. 그 목사가 앓아누웠답니다. 목사의 오른팔이니까. 저도 앓아누울까요?
왜 혼자 일하고 남들은 일을 못하게 조성하신 거예요? 내 이름으로 신에게 구원받고자 했던 겁니다. 내 몸을 가지고. 반듯하게 봉사하는 내 몸을 가지고 구원받으려고 했고 목사는 그걸 본받으라고 부추겼고 목사와 함께 둘 다 사기꾼이 된 겁니다. 그분이 이제는 말한다. 그것이 죄였다는 사실을. 자기 곁에 일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죄를 몰랐겠지요. 자기만 일하고 자기 곁에서 아무도 일 안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이제 알았다, 이제 복음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 전략을 우리교회에서 지금 10년째 사용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지금 감사인지 비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아벨의 피를 흘리게 하십니다. 예수님 죽은 것은 너 때문에 죽었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두고 “저는 손에 칼 든 적도 없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주님은 “잠깐만요. 이제부터 네가 나를 죽일 몸을 지녔다는 것을 내가 상황을 유발해서 보여주마.” 그리고 모든 율법은 너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해서 더 이상 너의 반듯함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모든 환경을 조성하시는 것은 네 몸은 내 몸이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네 몸은 내 몸, 다시 말해 십자가에 잠겨 있는 그 구원, 용서라는 것을 우리 몸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해서 반복해서 재현시키는 작업에 우리가 같은 한 몸으로, 한 통속으로 주께 붙잡혀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몸은 몸이 아니었습니다. 주의 몸만 몸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인정한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그 작업을 위해서 이렇게 합니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나의 몸이니까 네가 네 몸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마라. 내가 기어이 너의 죄를, 너의 몸을 나 같은 몸으로 바꿔서 용서한 몸으로, 깨끗한 몸으로 만드는데 그것은 내 담당이지 네 담당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해주겠다.”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16절에 보면,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주와 합하는 자는 몸이라고 하지 않고 ‘한 영’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부활의 의미를 가지고 우리의 몸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몸 가지고 사랑 받아서 그 사랑가지고 구원받고자 하는 헛된 짓을 했습니다. 주여, 주의 사랑이 우리 사랑보다 먼저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우리 몸에 손을 놓고 그런 더러운 죄까지 속죄제가 되셔서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이 진짜 나타나신 사랑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