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35강-몸(고전6;12-14) 1504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4. 7. 08:22
2015-04-05 12:44:21조회 : 104         
   몸 150405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몸 (고린도전서 6:12-14)

음성 동영상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xE6OgjRU4E, Hit:8
 이근호15-04-05 13:23 
몸 

2015년 4월 5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6:12-14 

(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6: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6: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인간들은 자신 눈에 뜨이는 신체는 ‘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몸’은 엄연히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뿐만 아니라 대자연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말입니다. 이 대자연 속에 일부로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다음과 같이 해야 합니다. 

‘나는 왜 있는가’에서 ‘대자연은 왜 있는가’로 말입니다. 히브리서 1: 10-11에 보면,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대자연을 창조하시면서 그 안에 시한폭탄을 장착시켜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몸에서 시한폭탄이 가동됩니다. 없었던 대자연을 만들어놓으시고서는 그 있게 된 대자연을 도로 없애버리는 그 와중에서 창조의 본래 의미가 도출됩니다. 즉 창조란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시도된 것입니다. 창조물을 없애는 과정을 통해서 본디 있게 하신 이유가 드러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취지는 인간이 처음 살았던 에덴동산에서부터 적용이 되었습니다. 살기 좋다는 그 낙원의 동산에 ‘선악과나무’라는 시한폭탄이 장착되었습니다. 이로서 에덴동산에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가능성에 노출됩니다. 곧 죽음요소가 최고의 희락 공간 안에, 그것이 정중앙 지점에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을 위한 인간상이라는 애초부터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로서의 인간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죽음 요소가 에덴동산의 중앙에 자리잡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께서 ‘시작’과 더불어 있는 그 ‘끝’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처음부터 끝이 내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안목으로는 처음부터 최종적인 미래로서 시간이 출발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 인간이 기억할 것은 바로 이 끝, 이 미래입니다. 그러나 이 미래가 인간의 자기 중심지에서 출발하게 되면 항상 과거처럼 다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 내부에 장착되어 있는 끝을 부르는 요소를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덮어씌우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을 주시므로서 그 말씀 안에 끝이 담기에 하셨습니다. 즉 말씀의 진짜 내용은 끝에 가야 하는데 그 끝이라는 미래가 이미 인간이 기다려야 할 내용이 아니라 벌써 ‘일찍 온 미래’이라는 방식으로 인간 안에서 개시된 것입니다. 

끝은 심판의 날입니다. 만들어진 모든 것이 무너져야 하는 순간입니다. 이 끝 순간이 인간 내부에 말씀 형식으로 찾아들어옵니다. 곧 인간을 살리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어 죄를 묻고 파멸시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끝은 곧 심판을 시행하는 날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몸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몸이 몸입니다. 사람들은 그 몸은 자신이 관리해야 하는 몸이라고 오해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몸이 있는 이상, 인간은 자신을 긍정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편 46:10에 보면,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가만히 있어야 할 존재입니다. 만약에 그 몸으로 자아를 끄집어 내고, 몸을 그 자아 소유의 신체로 여기고 설치게 되면 ‘하나님’을 모르게 됩니다. 이는 곧 자기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식의 자리를 위한 십계명 같은 것들을 가기 주변에 깔아놓기 마련입니다. 마치 나무 주위에 둥글게 홈을 파고 거기에 거름 주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말씀의 최종 완성 상태를 증명하시는 몸으로 사용하십니다. 즉 왜 세상은 인간의 파멸과 더불어 같이 파멸되어야 하는 지를 알리려 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합당하게 영원한 유일한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구원이란 자기 몸에서 예수님의 몸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와중에서 성도는 신체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나 중요함이 상실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씀이 투입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명하는 말씀과, 인간이 스스로의 자기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제조한 계명과 말씀 사이에 극렬한 투쟁이 벌어집니다. 인간은 결코 자신을 추악함을 철거할 수가 없습니다. 

끝에 가봤자 왜 인간은 말씀을 지킬 수 없느냐가 드러납니다. 미리 알게 하시는 본문이 시편 110:1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최종적인 전투는 인간대 인간의 전투가 아니라 예수님과 마귀와의 전쟁입니다. 

인간이 이미 악마편에서 싸운다는 사실은 인간들이 최종적인 자기 가치만큼은 극복할 수가 없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열왕기상 27장에서 예수님께서 어느 가난한 과부집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 과부 집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마침 선지자가 들어선 순간이 마지막 남은 말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해먹고 함께 죽으려고 한 때입니다. 

이 양식을 홀라당 엘리야 선지자가 대신 먹습니다. 그리고 그 집의 밀가루 통이나 기름병이 늘 가뭄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채워져서 그 가난한 과부는 가뭄 기간 동안 여유있게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시름 놓았다고 여기는 순간, 그 아들이 갑자기 죽고 맙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아들이 엄마는 다짜고짜 선지자에게 아들 죽음의 책임을 따지고 덤벼듭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전부 필히 자기 사는 쪽으로 되돌아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죽고자, 망하고자 하는 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다 자신이 자기를 살리는 식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희생적으로 헌신해봤자 그 희생했다는 사실만큼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끝까지 예수님의 주되심의 훼방꾼 노릇을 합니다. 바로 이 점이 결국에서 ‘처음부터 인간은 끝장난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점을 미리 안 자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구원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끝이 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과연 주님 구원 훼방자인 것을 말랐지만 주님이 주신 끝을 내장한 말씀의 능력으로 성도는 자신이 쓰레기임을 압니다. 경건하고 고상하고 거룩하다고 자부하는 그런 쓰레기 말입니다. 바로 이런 멸망자마저 주님을 버리지 않고 회수하여 원천적으로 처음부터 성도의 몸이 성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임을 알려주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주되심이 기능이 곧 우리 몸이 존재하는 이유임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5-04-06 20:33 
35강-고전 6장 12-14절(몸)1504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6장 12-14절입니다. 신약성경 269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6:12-14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본문 내용은 우리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데요, 우리의 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네가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내 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그 바탕위에서 주께서 이 아무것도 아닌 몸을 살리신다는 그 주님의 행하심과 부합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 주께서 우리를 살린다는 이것이 이해하기 힘든 것이 아니고 내 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가 왜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어떤데? 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내가 뭐가 어때서? 주께서 폐하신다? 제 몸을 왜 폐하십니까? 왜 내 몸을 없애십니까?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도 잘못된 선입관이 문제가 돼요. 아까 불렀던 찬송가 490장(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3절의 가사를 보면 그런 오해가 또 있습니다. 



“간악한 마귀 날 꾀어도 

주 예수 앞으로 더 가까이 

이 세상 속한 그 허영심 

또 추한 생각을 다 버리니 

정결한 맘 내게 늘 주소서.” 



여기서 허영심과 추한 생각을 다 버릴 수가 있느냐는 그 말입니다. 허영심과 추한 생각을 다 버려버리면 주께서 우리를 살리는 이유가 없어요. 우리는 더욱더 허영심과 추악한 생각이 어떤가의 탐색작업에 나서야 됩니다. 인생 헛살면 안돼요. 80이면 80, 90이면 90, 86이면 86세, 끝까지 살면서 뭔가 허영심인가, 내가 아직 88세가 되지 못했기에 미진한 추악한 마음을 2년 더 살아서 찾아내고 경험을 해야 돼요. 교회에서는 모든 게 반대가 되고 말았어요. 깨끗하게 되면 주께서 천국 넣어준다는데 깨끗한 사람은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왜? 깨끗한 사람이 없는데 자기 혼자 깨끗하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사람이 없다고 이미 확정을 지어놓았는데 지가 뭔데 깨끗하대요? 깨끗할 것 같으면 주께서 이 몸을 살릴 이유가 없잖아요. “네가 알아서 오너라.” 이러면 끝날 문제지요. 제 말을 사람들이 상당히 듣기 힘들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가만있으라.” 하는 이것을 제일 힘들어해요. “가만있어라. 나대지 말라. 촐랑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냥 막 살아라.” 이런 말이 굉장히 힘든데 제가 그것 때문에 구박을 많이 받지요. 그런데 시편 46편 10절에 보면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우리가 나대고 설치니까 하나님이 사라지는 거예요. 나대면 자기만 부각이 되고 자기만 느껴지지 하나님이 내 곁에 있는 현존을 모르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돼요. 부활절 지키고 그런 것 하지 말고. 세상에, 산 사람보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어디 있어요? 부활절 같은 그런 것 하면 안 돼요. 무슨 제사를 드립니까? 가만히 살아 있어 보세요. 내가 얼마나 추악하고 허영심 많은 인간인지. 사도바울을 통해서 전하는 예수의 복음은 바로 그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지요. 



가만히 있게 되면 너는 반드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육신적인 몸이 들썩거릴 것이고 바로 그런 몸을 내가 살린다는 거예요. 거룩하지도 않고 까불대기만 하는 그런 너, 꼭 중학교 1학년이나 2학년 같아요. 천방지축이죠.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인간에 대해서 확정짓는 이유가 사도바울이 신구약 전체를 다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하니까 창세기를 놓치고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는 인간의 몸도 함께 창조했습니다. 간단한 공식이거든요. 그러면 인간의 몸은 창조 속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몸은 독자적으로 원리와 원칙을 본인이 끄집어내면 안돼요. 이것은 반칙이에요. 전체 창조의 원리에 부합되는 원리가 우리의 허락도 없이 우리 속에 삽입되고 만 겁니다. 내 몸은 내 자아에 의해서 관리되고 움직일 그런 권리가 우리한테 없습니다. “내 몸 내가 쓰겠다는데 네가 왜?” 그것 자체가 창조에 위반되는 거예요. 창조하신 분의 뜻이 있기에 창조하신 분의 원대로 쓰이면 그것은 제대로 쓰인 겁니다. 그런데 창조 중간에 인간이 삐딱하게 되어서 창조하신 분이 우리 몸을 다루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치고 들어온 것이 있었어요. 



뱀, 마귀인데 마귀가 치고 들어와서 “너부터 새로 시작해라. 누구 눈치 볼 것이 없다. 네 몸은 네 것이다. 네 몸인데 누구 눈치를 보나? 네 몸은 네 것이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선악과 따먹어버려. 너한테 잔소리하는 하나님? 그 잔소리 지키니 안 지키니 할 것도 없이 ‘그런 잔소리가 언제 있었나?’ 하는 식으로 없애버리라.” 하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잔소리를 아예 지워버리는 그 현장에 내가 하고 싶은 나의 원칙을 거기에 새겨 넣는 겁니다. 양각처럼 새겨 넣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각자 두 개의 돌 판을 갖고 있어요. 십계명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각자 자기가 쓴 거예요. 자기가 문제 출제 하고 자기가 해답을 다 갖고 있어요. 혼자 출제하고 혼자 답 달고. 주께서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데 우리는 거기다가 “제 1계명, 반드시 식사 후에는 담배를 한 대 피운다. 제 2계명, 술은 소주 반잔만 마신다.” 자기가 자기의 가치의 중요함을 일기장에 쓰듯이 돌 판에 새겨서 그것을 간직하고 사는 거예요. 나에 대한 나만의 약속,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몰라요. 술 담배 이야기해서 좀 거칠게 보이지만 그것을 고상하게 바꿔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1계명, 나는 주일날 예배시작 30분전에 교회 온다. 제 2계명, 앞 자리에 앉는다. 제 3계명, 헌금은 절대로 한 주에 만 원 이상 초과하지 않는다. 제 4계명, 마라톤 대회가 있어서 도로 막히고 차 밀리면 교회 안 간다. 제 5계명, 나는 음란 비디오를 보지 않는다. 6계명, 나는 하루에 기도 30분을 하고 성경은 석장을 읽는다.” 이것은 다 누가 정한 겁니까? 본인이 본인의 가치와 의미를 세우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나는 사촌까지 전도하고 5촌부터는 전도 안한다, 이런 거요. 



인간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가지고 자기 중요성을 발휘하는 관리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할 때는 그 안에 무엇을 장착했느냐 하면, 폭탄을 거기에 장착을 했어요. 히브리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 할 때부터 이미 이런 소리가 들려야 돼요. 째깍째깍, 째깍째깍……. 마지막 폭파시키는 그 시한폭탄을 창조 안에 담아 놓은 거예요. 만들어놓고 폭파시키는 겁니다. 히브리서 1장에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해요. 친히 만드신 그것을 친히 부숴버린다(10-11)는 겁니다. 



만들고 부숨으로서 거기서 짠, 하고 등장하는 게 뭐냐? 예수님의 주되심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물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주가 되는데 필요한 환경을 본인이 조성해 나간다는 식으로 세상 원리가 잡혀있어요. 그렇다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우리도, 우리의 몸도 우리 좋으라고 만든 것이 아니고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로 만들어진 것이 흙에서 우리 육신이 된 겁니다. 우리가 만든, 우리 몸에서 나온 자아 말고요, 우리 몸에 필요한 자아는 우리가 아니고 다른 자아, 주인이 따로 있어요. 



주인님이 따로 있어서 그 주인님이 우리 몸을 만드셨고 우리 만드실 때에 주의 주되심을 위해서 거기에 원리를 집어넣은 겁니다. 집어넣었는데, 그 원리가 완성이 될 때가 있는데 완성이 될 그 때가 이 세상이 폭파되고 멸망될 때고 마지막 끝이 되는 겁니다. 그 원리를 말씀이라고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잖아요. 말씀이 육신이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각한 그 육신이라는 개념 자체에서 말씀이 없다면 이것은 그 자체가 이미 죽은 거지요. 



밀가루를 늘려서 만두피를 동그랗게 찍어내서 여기에 만두 속을 넣어야 만두가 되잖아요. 육신은 있고 거기에 말씀이 담겨야 하나님께서 맛있게 드시는 만두가 되는데 안의 내용물이 썩었어요. 원래 하나님이 창조한, 예수님의 주되심에 의한 말씀이 아니고 주되심을 끌어내리는, 주되심에 대항하는, 반발하는, 대적하는 요소로서 만두를 빚으니 마귀가 그 짓을 했거든요. 이것은 사람이 아니지요. 괴물이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한 가운데 인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창조할 때 원리가 있습니다. 그 원리는 말씀이라고 하고 더 구체적으로 하면 말씀이 완성도를 더하게 되면 순간순간 완성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모습을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언약에는 창조의 원리와 완성이 함께 들어 있어요. 있다는 것은 창조고 그것이 끝이 난다는 것은 완성을 의미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노아 언약이 구체화된 것이 노아방주였어요. 방주는 왜 만들었는가? 끝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노아 당시에 노아가 방주를 뚝딱거리면서 만든 것은 노아가 뱃놀이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거든요. 뱃놀이를 하기는 방주는 너무 커요. 생김새도 희한해요. 잠수함도 아니고 물에 뜨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웬 지붕이 있어요. 배에 왜 지붕이 있지? 사람들은 끝을 몰라요. 왜 끝을 모르는가? 자기 안에다 끝을 집어넣을 줄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저는 끝장나야 될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은 없거든요. “하나님, 저는 잘 돼야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나름대로 계명을 쓴다면 우리는 이렇게 써야 돼요. 제 1계명, 나는 죽어야 된다. 제 2계명, 나는 맞아죽어야 된다. 제 3계명, 그것도 안 된다면 나는 강도에게 당해서 죽어야 한다. 제 4계명, 불에 타서 죽어야 한다. 죽 나가다가 제 10계명, 그래서 죽어야 한다. 



이런 계명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보고 쓰라고 하면 반드시 뒤에 뭐가 붙느냐 하면, 죽어야 된다가 아니라 다 뭘 로 바뀌는가 하면, 살아야 된다, 나는 기도 하루에 30분 했기에 살아야 된다, 나는 성경 읽었기에 살아야 되고, 교회 왔기에 살아야 되고, 전부 다 살아야 된다, 살아야 된다, 살아야 된다, 이렇게 죽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걸 괴물로 보지요. 우리 자신이 죄를 지어도 구원 못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 구원 못 받아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 내가 망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구원 못 받는 거예요. 



처음부터 안 망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지요. 처음부터 우리가 안 망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좋은 에덴동산에 선악과나무를 심지도 않았어요. 심어 놓았다 해도 관상용으로 심었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런 죽음이라는 부정적이고 험악한 말씀을 에덴동산의 중심에 꽂아놓지를 않았습니다. 인간은 언제 자기를 아느냐? 죽어야 안다는 거예요. 죽을 때 되어야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겁니다. 물론 죽을 때 되어도 모르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데 그 죽음이 그냥 나이 많아서, 늙어서, 힘이 빠져서, 몸이 약해서 죽는 그것 말고 무엇을 건드렸더니만, 나의 죽음의 원인이 기가 빠져 죽는 것이 아니고 어떤 다른 외부적인 원인과 연관되어서 죽는다, 이 죽음,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끝 지점에 왔고 모든 것을 다 안 거예요. 제가 설교 처음에 했지요.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요. 가만히 있으라고 한 이유가 나대더라도, 설치더라도, 가만히 있지 않더라도 뭔가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만있어라. 주께서 다 하신다.” 그 주께서 다 하시는 것이 뭐냐 하면, 주님이 자기의 주되심을 증거 하는 용도로서 너는 본래 창조했던 그 의미가 덧입혀 질것이라는 겁니다. 덧입혀질 것이다. 



네가 홀로 존재하면서 네가 너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고 우수한 존재로 변화되느냐, 이런 짓거리는 주님 보시기에 ……, 주님이 이렇게 합니다. “네가 너를 만들었느냐?” “아닙니다.” “네가 너를 만들지도 않았으면서 너를 위한 원리를 왜 네가 집어넣지? 내가 보기에 반칙으로 보이는데?” 우리는 말합니다. “어쩔 수가 없잖아요.” “어쩔 수가 없다? 분명히 언약, 약속의 말씀이 있잖아. 말씀을 줬잖아.” 그러면 우리는 또 이야기합니다. “그거야 나 좋으라고, 나 살려고 하는 거지요.” “아니야. 너를 위해서 준 게 아니고 나를 위해서 너에게 다가간 거지. 바로 나를 위해서.” 



이 두꺼운 성경말씀은 우리 위하라고 준 게 아니에요. 주님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은 그 사람 구원 받으라고 전한 것이 아니에요. 흘깃흘깃 주님 눈치보고 전하는 거예요. “저 사람이 택한 사람이 맞나요?” 주님께서는 “택하고 안택하고는 내가 알아서 한다. 너는 전하기만 해라. 네가 전할 때 택한 사람 같으면 기쁜 소식으로 받아줄 것이고 만약에 택하지 않은 백성이라면 향기가 아닌 악취로 느껴질 것이다.” 이게 고린도후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복음을 전해라.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악취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향기가 되는데 그것은 너의 전하는 솜씨나 설득력, 설교의 능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흘깃흘깃 눈치를 보는 거예요. “재는요?” “그냥 전하라니까. 그것은 네가 알바가 아니요.” 



사도바울은 자기 일이라는 것이 없어요. 사도바울은 가만히 있었어요. 복음 전하면서 가만히 있었어요. 아니, 반대로 해야 돼요. 가만히 있으면서 복음 전했어요. “네가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복음을 못 전해서 답답해 죽겠다.” 이런 주님이 아니십니다. “네가 전도를 안 하니 내가 전도를 할 수가 없잖아. 같이 동업하자.” 주님은 이런 것 없습니다. 괜히 우리가 전도한다고 나서면요 우리는 이런 죄가 또 나와요. “전도 했으니까 복 주세요.” 이렇게 나와요. “주께서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이젠 내가 원하는 것 주셔야지요. 이래야 우리가 흥정이 되지요.”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하나님께서 모든 몸을 폐하도록 만들어야 되고 그 쓸모없는 폐건전지 같은 것, 그런 몸을 내가 다시 살리시리라, 라고 하신 이유는 성도한테는 현재의 우리 몸을 끝 지점에서야 나타나는 몸으로 간주하시기 때문입니다. 끝 지점이죠. 그러면 어떤 것을 끝 지점이라고 하느냐?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희생적으로 그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써요. 나름 구원자의 권위를 존중하고 하나님을 배려하는 입장, 그리고 사랑한다는 그 하나님의 말을 순종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인간의 도리잖아요. 그래서 희생까지 하면서, 힘들어 하면서, 아까운 돈까지 내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희생하는 몸마저 희생하지는 않아요. 주 앞에 충성을 하면서 충성을 하는 이 몸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하는 그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이게 끝까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희생하는 그것마저 나의 구원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죄악된 것임을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고 구원해 내시는 겁니다. 마지막 구원지점은 “정말 평생토록 저는 가만히 있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은 아직 우리 보기에는 안 죽었지만 주님께서는 끝 지점으로 보는 거예요. 끝 지점으로 보면서 우리에게 뭘 주는가? 말씀을 줘버립니다. 어떤 말씀을 주는가? 13절에 보면, “식물(음식)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해서.”라는 말씀이 완성단계, 끝에 가서야 완성되거든요, 그 끝 단계에 오게 되면 어떤 몸도 음란하지 않는 몸이 없다고 확증이 된 그 몸이어야 그 다음에 주님이 개입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너는 평생 살아도 그 몸이 음란을 위해서 존재했던 몸이야. 따라서 그것이 말씀이 너에게 도착하는 목적이었어.” 말씀이 도착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아무리 음란 하지 않고 싶어도 음란해야만 하는 몸이라는 것을 파악케 하시고 그 다음에 “내가 뭐랬어? 말씀은 말씀대로 끝까지 간다고 했지? 끝까지 가보니 네가 바로 음란한 몸이지. 그 음란한 몸을 너는 네 선에서 포기했지만 너도 포기한 그 음란한 몸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날에 영생의 몸으로 다시 살린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들어보니 하나도 어렵지 않지요. 쉬워도 너무 쉽지요. 시험 치는데 이름도 안 쓰고 냈는데 나중에 보니까 합격했어요. 이름조차 안 써냈는데도. 이름 썼다고 합격되었다는 자가 있다면 주께서 천사를 보내서 그 이름 쓴 것 지워버립니다. “네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아무것도 없지 아니하냐?” 



이게 사도바울의 편지입니다. 로마서도 마찬가지고. 사도바울이 실제로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교했는가? 그 설교한 것이 사도행전에 보면 나와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 빼놓고 모든 사람의 육체는 다 썩어버린다는 것이 사도의 설교내용입니다. 다 썩는데 유일하게 그 육신이 썩도록 버려두지 않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행 2:31)라고 했거든요.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사도행전에서,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새언약이라고 하는 거예요. 새언약. 



이 말이 어렵게 느껴질까 걱정이 되는데 그냥 갑니다. 노아 때 방주 만들었지요. 노아언약에 의해서 방주를 만들었는데 그 방주가 뭐라고 했던가요? 끝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오늘날 사람이 ‘나도 방주 좀 구경하면 좋겠다.’ 방주 구경할 필요 없어요. 이웃집 노인이 돌아가시면 그것이 언약이에요. 왜? 모든 사람이 다 죽고 썩는다는 것이 언약이라니까요? 죽고 썩었다, 썩었다, 썩었다, 하다가 예수님에게 딱 와서는 “예수님만은 육신이 썩지 않고 다시 살림을 받았다.” 그것이 옛날 노아 때의 방주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기 참 쉽지요? 장례식장 가보면 지금도 모든 것이 언약대로 이루어집니다. 죽는 데는 주일도 없어요. 11시에 죽지 말고 12시 넘어서 죽으라는 그런 것이 없어요. 시도 때도 없이 막 돌아가세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이 모든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원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원리 중에 하나로 우리도 포함이 되어 있어요.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언약의 원리는 뭐냐? 죽어주면 돼요. 어떻게? 언약에 위반되어서 죽어주면 돼요. 그 언약에 위반해서 죽어주는 것이 뭐냐? 음란죄로 죽으면 된다 그 말이지요. 



음란죄로 죽으면 되는데 음란을 안 하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한 2년 더 살아서 그 2년 사는 동안 ‘음란한 것이 맞구나.’ 그렇게 돼야 돼요. ‘이제까지는 음란 아닌 줄 알았는데 2년 더 살다보니 음란한 것이 맞네.’ 이렇게 돼야 돼요. 그래서 자기 주제파악이 돼야 됩니다. 어렵지 않아요. 굉장히 쉽습니다. 방주는 눈에 보이니까 쉬울 것 같아요? 우리가 노아시대로 가서 살았다고 해 봅시다. 어떤 미친 할아버지가 방주라는 커다란 것을 만들고 있더라. “빨리 들어가야지. 방주 짓는 것을 보니 곧 홍수가 올 모양이다. 얘들아, 어서 들어가자.” 이런 아줌마가 있습니까? “얘들아! 미친 사람이다. 근처에도 가지 마.”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병원 장례식장에 가서 “오늘 죽은 이 사람은 주의 말씀에 위반해서 죽는 겁니다.” 하면 듣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구만. 저 사람 근처에도 가지 마.” “이것이 언약입니다.” 사람들은 안 믿습니다. 살다 보니 힘이 약해서, 힘이 약해서 죽는다고, 기가 약해서 죽는다고, 보약을 덜 먹어서 죽는다고 알고 있어요. 말씀에 입각해서 반드시 죽어야 하기에 죽는 것을 모르고. 우리는 항상 담 너머를 보고 싶어 해요. 끝 지점에 뭐가 있는지 그 끝을 보고 싶어 해요. 



끝이 궁금합니까? 궁금해요?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시편 110편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주님께서 끝에 마귀와 붙어서 마귀를 밟을 때가 끝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빠져요. 끝은 예수님과 마귀의 싸움에서 예수님의 승리로 끝나면서 그 때 주의 주되심이 증거가 되는 겁니다.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마귀는 꺾여야 되고 마귀에 속해서 죽기가 무서워서 평생 살기만을 원했던 우리도 함께 꺾여야 돼요. 



나의 자존심과 나의 중요함이 꺾여야 돼요. 나의 의미가 꺾이고 나의 의미에 가위표 쳐야 돼요. 내 잘난 재미로 살던 인생이 망가져야 되고 파멸돼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는 재산이 날라 가고 목숨도 잃어야 됩니까?”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우리의 재산이 날라 가고 병든다고 그 사람이 끝을 아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의가 꺾일 때 그 사람은 15만평 갖고 있어도 끝을 아는 사람입니다. 운동 열심히 해서 몸 튼튼하고 머리 새로 나고 그래도 그 사람은 끝을 아는 사람이에요. 애가 잘 돼도 그 사람은 끝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게 나의 의가 아니기 때문에.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두 사람을 언급했어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눅 4:25-27) 



왜 예수님께서 이 대목을 언급했는지는 열왕기상 17장과 열왕기하 4장을 통해서 간략하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열왕기상 17장은 엘리야시대인데 거기는 사렙다과부, 곧 사르밧과부가 나오고 열왕기하 4장에서는 엘리사시대인데 거기는 수넴 여인이 나와요. 수넴여인과 선지생도의 아내가 나옵니다. 나아만 장군은 열왕기하 5장에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이 대목을 왜 언급했느냐? 가뭄이 들었는데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에게 찾아갔어요. 그 집에 아들이 하나 있었고 그 과부는 마침 그 아들하고 마지막 남은 양식을 먹는 판인데 그 시점에 선지자가 갔습니다. 



가뭄은 들었지 과부집이 오죽했겠습니까? “남은 음식 마지막으로 먹고 죽자.” 하는 시점에 엘리야가 찾아와서는 얼마나 야박하게 이야기를 하는지. 도와줄 생각은 안하고 “뭐 먹을 거 좀 있나? 배고프다.” “이게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입니다.” “그거 나한테 제공해라.” 그렇게 나온 거예요. “너의 생명을 나한테 맡겨라. 내가 담보하마.” 그런 뜻이거든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지만 그 과부가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죽는 것도 맘대로 아름답게 못 죽고. 그래서 엘리야선지자에게 마지막 양식을 줬어요. 그러고 난 뒤에 모든 그릇에 기름이 차고 넘치도록 해서 가뭄이 끝날 때까지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게 되면 예수님께서 그 사르밧 과부를 언급할 이유가 없어져요. 그 아들을 누가 살렸느냐 하면 엘리야 선지자가 살린 거지요. 양식 떨어진 그 가정에 기적을 베풀어서 그 집을 살렸는데 그 아들이 갑자기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그 과부가 엘리야선지자에게 달려듭니다. “당신이 우리를 속이고 힘들게 했다. 차라리 양식 떨어졌을 때 모자간에 죽도록 내버려두지 참기름 줘서 살려놓고는 왜 갑자기 다시 죽이느냐? 당신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맞느냐? 왜 우리 가정을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아들 죽었다고 그렇게 대든 거예요. 살리려거든 제대로 살려내라는 말이지요. “처음에 양식 줄 때는 살려주는 것처럼 해놓고는 이제 와서 죽여 버리면 지금에 와서 어쩌란 말입니까?” 



그게 뭐냐 하면, 인간에게서 끄집어낼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자기 가치, 자기의 입니다. ‘선지자에게 대접함으로 말미암아 그 반대급부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서 살고자 한 내가 요령껏, 이제는 제대로 30배, 60배, 100배를 받아서 더 잘 살아보자.’라고 한 고정된 그것이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마지막, 어떤 종교, 어떤 기도, 금식, 선교, 전도, 목회, 목사, 장로, 어떤 직분도 넘어설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마지막 남은 마귀적인 모양새입니다. 그걸 누가 이깁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 찾아오는 이 노동, 이 힘든 노동에는 다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었던 거예요? 이렇게 해서 천당 가려고 하잖아요. 



그 천당 가려고 하는 그것, 그게 인간이 마지막 넘을 수 없는 구원의 장애라니까요. 구원의 훼방, 장애물이에요. 높이뛰기 선수도 그것 못 뛰어넘어요. 자기 집착, 그동안 자기가 투자했던 그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어떻게 폐기처분합니까? 선지자가 그 아들을 위해서 기도하니까 그 애가 살았어요. 열왕기하 4장에서 엘리사의 경우에는 아예 코에는 코, 입에는 입, 아예 자기 몸을 그 애 위에 샌드위치처럼 포개서 애를 살려요.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없는 아들을 생기게 해 놓고 생긴 그 아들을 죽여 버렸거든요. 바로 그 애를 살립니다. 



그 과정 자체가 진짜 우리 몸이 존재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우리 몸은 말씀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하심 그 양상, 그 동영상을 우리 몸을 통해서 재현시키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난 목적이에요. 깜짝깜짝 우리는 어쩔 줄을 몰라요. 놀란다니까요. 주님과 선지자가 하는 이야기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설교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그 말씀의 모든 것을 미래라고 기억을 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과거만 기억하잖아요. 그걸 과거라고 기억하지 말고 미래라고 기억하라는 말이지요. 



미래로 기억이 되어버리면 우리의 이 땅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바로 끝 지점, “내가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를 까발려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우리 인생을 통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미래에서 확정된 일이 앞당겨서 우리에게 쏟아진 거예요. 우리의 생일은 미래의 날짜에요. 미래를 봐서 그 날짜에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미래는 시작되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과거로 생각해서 이미 지나간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주님은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이미 일을 벌였어요.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이점이 중요합니다. 



우리보고 물어보지도 않고 우리구원의 일을 벌였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시편 46편 10절의 말씀, “가만히 있어라. 주께서 네 속의 마귀를 어떻게 발췌해내는지 가만히 있어봐라. 마음껏 보여줘라. 행동 하나하나가 기어이 내가 살기 위한 몸짓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이미 미래의 확정된 사실을 그냥 적용시켰다는 그것뿐인 것을.” 그 미래를 회수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실컷 낙서하게 만들고 실컷 망가지게 만들어놓고 그 망가진, 온통 내 자랑거리로 낙서질 된 우리 인생의 그 도포, 인생의 그 백지, 온통 자기 자랑밖에 없는 그것을, 그 마귀 짓을 주께서는 폐품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다 가져와서 “가져와! 다 가져와.” 다 가져와서 그것으로 영광된 그리스도 몸의 일부로 전환시켜버리는 겁니다. 



우리 몸은 내 몸이 아니고 주님의 몸이었습니다, 주님의 몸. 주님이 미싱 바늘로 자기 성공을, 자기 주되심을 축하하기 위해서 쓰인 말씀이 우리의 매일매일 에다가 새겨 넣은 거예요.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죄인 안 된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위반해서? 아니에요. 우리가 말씀을 위반해서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말씀을 제쳐두고 내 잘난 체를 하는 십계명을 그 자리에다 집어넣은 거예요. ‘세상에! 오늘도 나는 간음도 안했다. 나는 왜 이렇게 착한지 모르겠어.’ 이런 식으로 우리는 주님의 구원을 훼방한 거예요. ‘오늘도 성경 석장 읽기로 했는데 기분 좋아서 두 장 더해서 다섯 장을 읽었다.’ 또 ‘오늘 따라 기도는 왜 이렇게 잘되는지 몰라. 기도 두 시간째인데 왜 이렇게 기도가 재미있는지 모르겠어.’ 이런 것. 또 ‘오늘 전도가 잘돼서 다섯 명이나 했어.’ 이런 것. 



주님의 구원, 주님의 주되심을 훼방하고 어줍지 않게 나도 어떤 존재의 가치가 있는 양 드러내는 이 마귀 짓을 원 없이 마음껏 하도록 우리의 인생을 죽을 때까지 끌고 가시는 겁니다. 사렙다 과부가 양식을 받을 때 ‘그렇지, 그렇지.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날 그냥 죽도로 내버려두지 않으시지.’라고 좋아들 하면서 선지자를 섬겼던 그 과부가 예상 밖의, 살고자 하는 자기 자식을 하나님이 친히 쳐서 죽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아줌마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내 아들 왜 죽입니까?” 주께서는 박수 치면서 “드디어 나왔네. 너의 중심 되는 핵, 중심에 박혀 있는 핵이 드디어 나왔어.” 



소유가 재앙이었습니다. 소유가 재앙이었어요. 그리고 소유가 재앙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소유 될까요? 성철스님 될까요? 법정스님처럼 무소유할까요? 소유가 재앙인데 그 소유가 재앙인줄 아는 그것이 축복입니다. 오늘 이게 기쁜 소식인지 슬픈 소식인지 구분도 안 된다만. 마음껏 돈벌이 하세요. 마음껏 돈 벌이 하시고 마음껏 여러분 것만 챙기고 가지세요. 그리고 그게 재앙인 줄 아시면 축복 받은 겁니다. 



어떤 분이 전세 들어 있는 우리교회 사겠다고 나서서 집 주인이 좋아가지고 ……. “방 빼!” 할 날이 가까울 수도 있어요. 요새는 교회도 공격적 마케팅이에요. 우리교회가 간판이 이미 걸려 있거든요. 이걸 사겠다고 나선 거예요. 좋아 보이거든요. 집 주인이 저에게 “이미 교회가 있는데 그걸 왜 사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면서 본인도 분개하는데 제가 그랬어요. “그 사람이 이 교회를 사려고 하는 것은 보성 1차 아파트 영혼들이 불쌍해서 그걸 다 구원하기 위해서 그럽니다.” 우리는 못하니까. 



그래서? 다 구원했다 칩시다. 그래서 뭐? 그래서 뭐? 그게 구원의 방해인데. 자기 구원을 망치는 것인데. 내 것 남 주지 마세요. 악착같이 쥐고 더 벌어들이세요. 더 벌고 더욱더 돈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왜? 마지막 때 돈 없어보면 신앙? 목사? 장로? 다 필요 없어요. “주여! 이럴 수 있습니까?”라는 그 사렙다 과부의 고백이 우리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이 있을 거예요. 그게 바로 내가 미처 몰랐던 나의 육신의 본색입니다. 세상에, 그런 마귀의 몸 같은 몸을 주께서는 그 피를 주고 사서 영생 준다니까요. 



우리는 강도 아닌 줄 알았지요? 우리는 창기 아닌 줄 알았지요? 남의 이야기인줄 알았지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었을 때에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무너진 망대에 깔려 죽은 사람이 너보다 죄가 많은 게 아니야. 회개하라.” 하듯이 우리는 세월 호에 탔던 사람들 빠져죽었을 때에 ‘휴, 우리 애는 살았다.’ 하고 얼마나 좋아들 했습니까? 우리는 남의 이야기로 보잖아요. 왜? 내 몸은 내 소유니까. “내 몸은 주님한테도 안 빼앗길 거예요. 내 몸은 내 것이고 내 몸에서 난 자식도 내 것이고 난 나밖에 모릅니다.” 철저하게 우리는 단도리, 자기 관리하는 그것,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유발했다는 것을 믿으시면 구원받습니다. 



바로 그 몸이 필요했던 거예요. 훌륭한 성도가 필요한 게 아니고 추악한 것을 버리는 그 몸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바로 이 이야기, 바리새인 이야기가 다 저의 이야기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 그렇게 유발시킨 장본인인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주여! 보고 싶습니다. 어서 오시옵소서. 보고 싶어 죽겠습니다.” 하는 그것. 초대 교회는 그 이야기 했어요. 얼마나 자기한테 믿음이 없었으면 주님을 보고자 합니까? 



“예. 저는 이 정도로 내 것, 돈 밖에 모르는 인간인데 주님이 어서 오셔서 이 망나니를 어떻게 좀 해주세요.”라는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잘난 척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아닌 척 하면서 살았습니다. 우리의 과거가 우리의 미래인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주께서 이미 확정지은 끝 지점에 우리를 죄인 되게 하셨사오니 하신 그 작업의 끝에 영생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