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34강-죄(고전6;8-11) 15032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3. 31. 08:05
2015-03-29 12:43:19 조회 : 119         
   죄 150329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죄(고린도전서 6: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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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3-29 13:32 
죄     

2015년 3월 29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6:8-11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6: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구원받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유업’, 즉 ‘상속’ 받듯이 받는 것이지 구원받은 자의 행위에 대한 보상차원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상속이 주어지는 근거는 더 이상 ‘자기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 속한 자에게만 해당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죄에 대한 항목을 여러 가지로 제시한 것은, 그것을 지켜서 기어이 상속받으라는 말이 아니라, 구원받게 되는 사람들 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는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에 있다는 겁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구원에 두 가지 과정이 따로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죄 항목에 해당되지 아니하는 사람은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고 죄 항목에 저촉이 되는 사람은 예수님의 죄 씻음으로 구원받는 식으로 두 과정을 언급하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참으로 구원된 자는 필히 죄 항목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없는 자’로 확정난 사람에 국한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진해서 죄를 지어야할까요? 멀리 구원을 내다보면서 스스로 죄인되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씻음 받게 되는 다음 단계에 참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죄인 부류에 참여하는 절차에 합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의 항목이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충분히 확장지어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과 6장에 나오는 산상설교를 보게 되면, 형제를 보고 욕하는 자는 살인자요, 마음 속으로 음란한 마음을 품어도 이미 간음자이며, 특히 아침에 일어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도 이방인들이나 짓는 죄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방향에 있어 하나님의 작업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자리로부터 출발합니다. 즉 “누가 나의 이름의 능력과 죄씻음의 혜택을 받을 자인지를 세상에 대고 알려주어야지”라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말씀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들이 애초에 놓친 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놓친 것으로 인하여 세상 현실이 엉뚱하게 환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놓친 것’은 바로 ‘선악과 사건’에 관한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주신 취지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었습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취지에 충실했다면 따먹는 그날로 둘이 껴안고 자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둘은 숨기에 바빴습니다. 즉 최초의 인간들은 선악과와 생명나무 안에 무슨 취지가 담겨있는지를 몰랐습니다. 이 무지로 인하여 그후에 인간들은 항상 자기를 위한 의미로서 세상을 색칠하게 됩니다. 

죄라는 것은 결국 숨겨진 하나님의 취지로 세상을 읽지 못하고 자기 의미를 그 말씀에 집어넣은 것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진짜 말씀의 의미와 취지를 살려내기 위해 말씀을 살려내게 됩니다. 로마서 7:9에 보면,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법이 없으면 나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온통 세상이 자기 잘난 맛으로 삽니다. 이것이 자신이 세상을 향해 의미부여하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법이 살아나게 하십니다. 법이 살아나면 죄가 살아나고, 그렇게 되면 그 법과 죄의 숲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살리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선악과 따먹은 그 현장으로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그곳에서 아담과 하와도 미처 몰랐던 것, 즉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 나무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하신 그 의미를 알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서 예수님이 이미 이루어놓으신 그 성과 속으로 들어오게 하시려는 겁니다. 

그 와중에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행하심입니다. 즉 죄에 대해 죽고 의를 위해 살아나셔야 하는 그 일 말입니다.(로마서 4:25) 이 의미에 입각해서 성경 전체가 쓰여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행위를 위하여 성도가 사용되어지는 겁니다. 

이 현실은 인간을 살리는 현실이 아니고 도리어 인간을 죽이는 현실입니다. 법으로 죽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죽이는 그 법을 통해서 자신에 의해서 자신을 살리고자 시도하는 것은 마치 우주선으로 태양 속으로 돌진하여 자폭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자기는 천국간다고 자부하지만 마지막은 태양의 폭발에 합세된 폭발이 끝납니다. 

이것이 일반인들의 세상살이입니다. 이미 죽은 자가 자진해서 자폭하는 광경이 세상이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유업’을 기억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나봇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 당시 임금은 아합왕이 ‘돈 줄테니 팔아라’고 했지만 거절한 사람입니다. 

거절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임금님, 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유업으로 주신 겁니다” 그러자 아합의 부인인 악녀 이세벨은 나봇을 모함해서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봇은 살아 있지 않고 죽었느니라”(왕상 21:15) 바로 이게 정답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입니다. 이제 살고 죽고는 이미 예수님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과연 구원이 성사될까요? 예레미야 13:23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와있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흑인이 백인되고 표범 피부에서 반점이 변하는 것이 도저히 있을 수 없듯이, 우리의 죄로 도저히 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죄 때문에 우리 인간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은 능력은 죽은 우리를 살려내시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고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구원에 늘 실패하는 자리를 허락하셔서 오직 예수님의 능력만 인정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3-31 07:00 
34강-고전 6장 8-11절(죄)1503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6장 8-11절입니다. 신약성경 268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6:8-11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하나님의 유업을 받지 못할 자들이 있었는데, 그런 자들이 너희 중에 있었는데 그런 자들이 그리스도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뻔 했는데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당황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려면 ‘받지 못했는데 받았다’는 그러한 절차가 필수적으로 개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굉장히 당황스러운 겁니다. “너희들 중에 하나님 유업 받을 사람은 없어. 천국 못가. 영생 끝났어. 그런데 그 사람들이 받았거든!” 그렇게 된다면 만약에 “저도 천국가고 영생 얻었네요.”라고 한다면 “네가 못 받을 자에게 속했느냐?”고 묻는 거예요. “네가 하나님을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들 속에 포함이 되었었느냐?” “안되었는데요.” 안되었다면 네가 받았다는 그것은 가짜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 속에 들어가 있어 줘야 뭐가 부각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이름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의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이 부각이 돼요. 이게 표출이 된다고요. 그게 나와 줘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합시다. 하나님의 유업을 받지 못할 자로 결정지읍시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못 받을 사람으로 확정지읍시다. 그게 사는 길이에요. 그 외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기 나오는 항목들 있잖아요. 음란하는 자, 이건 카사노바지요. 우상 숭배하는 자, 갓바위에 가서 비는 사람이거나 사주팔자 보는 사람들, 그 다음에 간음하는 자, 다음에 탐색하는 자, 그 다음에 남색하는 자, 동성연애 하는 사람입니다. 도적, 도덕이란 도둑놈이지요. 탐람하는 자, 탐람하는 것은 욕심 많은 자고요. 술 취하는 자, 이거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다 아는 것이고 그 다음에 후욕하는 자, 모함하는 사람들입니다. 토색하는 자, 약탈하는 사람입니다. 전쟁터에서 약탈하든지 아니면 권력을 행사해서 약탈을 하든지 남을 뒤에서 모함하는 사람입니다. 드라마의 주테마가 모함이잖아요. 


여기 나오는 이 항목이 우리가 아는 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죄의 항목의 다가 아니에요.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유명한 것들만 모아서 제시한 거예요. 이 항목 말고 다른 항목을 제시하라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항목이 더 범위가 넓어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고 형제보고 욕하는 것도 살인죄에 해당되고 심지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아침에 눈만 뜨면 생각하는 자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입니다. 사도바울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명시를 한 것은 천국 간다는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이미 알고 있어요. 어떻게 알고 있느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하는 자들만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 확정된 입장, 그렇게 간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렇게 간 사람들의 입장에서 추려내는 겁니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고 곁들여서 같이 오려는 사람들은 제발 좀 꺼져라, 나가라는 말입니다. “너는 불합격이야. 어딜 여기에 같이 기어 붙으려고 해? 너는 좀 나가줘.” 하고 미는 방법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유업을 받지 못할 자의 항목에 속했느뇨?”라고 묻는 겁니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에 해당되느냐?” “해당됩니다.” “그러면 와! 들어와, 들어와! 그냥 들어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에 해당된다면.” 그런데 “저는요, 동성연애 한 적이 없고 간음한 적도 없고 토색도 후욕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저리가! 그러니까 너는 탈락이야.” 그러면 탈락이라는 거예요. 


이 문제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교회 다녔다. 교회 중에 일부만 탈락되고 일부만 건진다. 일부만 건지는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주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따라서 ‘나는 교회 와서 주 예수 믿음으로 성령 안에서 씻음 받고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지.’라고 하는 사람 같으면 이 사람은 잘못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에게 인간의 방법으로 구원된다는 것이 일체 없거든요. 방향성을 어떻게 하느냐? 반대로 해야 돼요. 


어떤 사람이 동성애의 죄를 지었는데, 어떤 사람이 간음을 했는데, 그래서 본인이 ‘내가 이런 식으로 산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자에 해당된다.’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았는데 그 아는 지점에서 예수의 이름과 성령의 씻음을 받고 난 뒤에, ‘아,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구나.’ 하는 것을 아는 그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것부터 시작해서 방향을 반대로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보니까 교회가 다 나 같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만 의지하는데 왜 저 사람들은 자기가 ‘나는 이만큼 착합니다. 나는 시키는 대로 이만큼 했습니다. 나는 목사님을 섬겼습니다.’라는 이런 조의 이야기를 자꾸 하지? 아, 그게 가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구나.” 하나님께서 가짜교회를 만드신 거예요. 


방향성이 이쪽에서 확정되고 난 뒤에 거꾸로 가게 되면 나는 내 구원에 실패자인데 저쪽의 가짜들은 자기가 구원의 성공자라고 행세하고 있으니까 저게 바로 가짜라는 거예요. 가짜를 구경하고 가짜를 목격하게 함으로써 주 예수의 능력을 다시 한 번 모시게 되는 겁니다. 확인하게 되는 거예요. 들어보니 정말 어렵지 않지요. 구원이라는 것이 이렇게 쉬울 수가 없어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방금 오신 분이 계시기에. 다수를 모아놓고 다수를 탈락시킨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교회에 다수가 모여서 하는 말이 “그래. 나는 저 사람 같지 않게 구원을 받아야 되겠어.”라고 시도한다면 이것은 이미 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다수를 모아놓고 그 다음에 그 모든 다수 속에서 ‘저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서 저토록 애를 쓰는데 나는 안 돼. 나는 실패하도록 되어 있어. 나는 안 돼.’라고 아는 사람, 알게 한 그런 것을 두고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그것이 믿어지는 사람, 그 사람이 그 다수에서 구원되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한 시도 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출애굽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어요. 출애굽에 나오는 단어 하나, 거기서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가 탈출과 무관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아주 충격을 받아요. 하나님이 일을 하는데 하나도 허비되는 일이 없고 쓸데없는 일이 하나도 없이 다 필요한 일이에요. 출애굽기 1장 1절부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탈출, 주님의 나라로 탈출하는데 다 필요한 겁니다. 


우리교회 여 성도님들 보면서 아침부터 칭찬을 해 드리고 싶은데요. 전부 다 굉장히 가정에 성실하세요. 각 가정에 다 가본 것은 아니지만요. 착실한 가정주부의 특징이 뭐냐 하면, 어떤 자리, 어떤 말, 행동하나도 전부 다 가정에 보탬이 되는 소리와 행동을 하더라는 말이지요. 제가 많이 느껴요. 어떤 행동을 해도 어떻게 하면 이 가정을 잘 꾸릴까와 관련되어 있지 그것과 무관한 일은 없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게 한 모든 일들, 욕심내고, 돈 좋아하고, 허튼짓을 하는 이 모든 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어요. 다 우리 구원에 필요한 거예요.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드는데 다 필요한 일들만 발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느긋해요. ‘아주 착실한 가정주부 덕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구나.’ 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늘 기쁨으로 살고 있습니다. “내가 한 게 뭐 있어야지요.” 이런 느낌이에요. “저는 죄 짓는 것 밖에 없어요.” 그런 거지요. 그걸 하나님께서 하나의 겸손이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는 그것을 로마서 7장 9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걸 누구한테 이야기했더니 어렵다고 못 알아듣는다고 해요. 성경말씀 그대로 했는데 어려워서 못 알아듣는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법이 살아나면 나는 죽는다는 그 말입니다. 그 말을 달리 하면, 법이 없는 곳에는 나는 펄펄 살아있다는 그 말이지요. 이 말이 왜 어렵게 느껴질까요? 보통 살았다, 죽었다, 할 때는 목숨과 관련해서 생각하거든요. 숨이 끊어지면 죽은 것이고 생생하게 살아서 노래 부르면 산 것이고.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을 우리는 평소에 목숨 걸린 생명체에 연결시켜서 이해를 하는데 성경은 살았다거나 죽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목숨과 연관 짓는 것이 아니고 법에다가 집어넣어요. 


법이 살아지면 나는 죽었고 법에서 눈 돌려버리면 나는 팔팔하게 살아 있다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법을 살려내려고 하는 거예요. 법을 살려내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법이 살아나게 되면 죄가 같이 살아나요. 죄가 살아나면 죄 값은 사망으로 우리는 죽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은 착각이고 환상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이래요. 내가 살아 있는 그 현실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환상이고 가짜고 법이 살아 있는 현실만을 현실로 간주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를 가지고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오랜만에 30대에 동창회로 모였습니다. 40 넘으면 잘 안모이지만 30대에 동창회 하면 많이 모인다고요. 모여서 수다들 떨잖아요. “그 때 그 애가 누구 사귀다가 헤어지더니 죽었대.” “아니 여자 때문에 죽나?” “글쎄 말이야.” 모여서 풍문에 도는 뒷담화를 하는 거예요. 그 뒷담화는 본문의 후욕하는 자에 해당됩니다. 후욕하는 자.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을 알려면 고린도전서 6장 9절, 10절, 이게 두산백과사전, 여기에 다 들어 있어요. 여기에 없다고요? 그러면 산상설교에 보면 다 들어 있어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가. 법이 살아나고 죄가 수풀이 되어서 살아날 때 나는 거기서 버러지만도 못하다는 그것을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비로소 윤곽을 드러내는 겁니다. 윤곽이 드러나면서 내가 살아 있다는 그것은 환상으로서 교체되는 거예요. 


그렇게 회식 중에 술잔이 돌아가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죽었다는 그 친구가 “어이, 친구야! 잘들 있었나?” 하고 나타나버리니까 사람들은 깜놀, 깜짝 놀라버렸어요. “너 안 죽었나?” “누가 나보고 죽었대? 네가 그랬어?” “아니, 난 그냥 들은 주워들은 소리인데. 네가 죽었다는 풍문이 있었어. 풍문에 네가 죽었단다.” 깜짝 놀라게 만들지요.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거든요. 이건 일종의 죽은 거예요. 자살한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동창회에 나타나서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함을 얻음으로 나는 구원받았다.” 깜짝 놀랄 일이에요. “네가?” “내가!” “네가 구원을 받아?” “그래 내가!” “어떻게 그렇게?” “방금 이야기했잖아. 주님의 이름과 성령의 씻음으로.” “너 같은 망나니가 어떻게 천국을 사모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어?” 하게 되면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남들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로마서 7장 9절, “내가 법이 없을 는 팔팔하게 살았고 잘난 체를 했는데 법이 살아나고, 주께서 법을 살려내고 죄를 살려낼 때 나는 이미 죽은 자”였어요. 그래서 나는 로마서 7장의 말씀처럼 “오호라, 나는 죽은 사람, 곤고한 사람이다.” 그렇게 했는데 로마서 7장 마지막 대목에서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이미 죽었다고 풍문으로 들었소, 죽은 자로 이미 결정되고 확정된 자인 사망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공로가 발현되고 방출되고 튀어나올 때 내가 봐도 나를 놀랄 정도에요. 


참교회가 바로 그겁니다. 가짜 교회가 있어줘야 되고 거기서 탈락자가 생겨줘야 거기서 참 교회가 있는 겁니다. 그 가짜교회는 그 방향성이 자기 쪽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어쨌든 간에 구원받아야지.’라는 가짜들을 보세요. 자기가 이미 죽었다고 판정이 나야 되는데 그들에게는 법이 살아나지 않고 죄가 살아나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고 나는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법을 지키려고 해요. 성경에 나오는 대로 지키려고 하고 믿으려고 해요. 믿으려고 하고 지키려고 하고, 그러니까 그것은 탈락이 되는 겁니다. 


저는 그걸 재앙이라고 하는데 ‘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것을 재앙, 또는 광기라고 합니다. 광기, 또는 오기, 저는 그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얼마 전에 독일의 모항공사 부조종사가 혼자 있는 틈을 타서 조종실 문을 닫아걸고 비행기를 알프스 산에 꼴아 박았잖아요. 광기입니다. 다시 설명해드릴게요. 율법이라는 것은 우리를 사망케 하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를 죽은 자라고 확인하는 차원에서 제공되는 겁니다.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법을 지키겠다는 것이 마치 무엇과 같으냐하면, 우주선을 타고 태양 속에 들어가서 자멸하겠다는 소리와 똑같은 거예요. 어딘데 거길 들어가요? 법속에 어떻게 들어가요? 법속에 들어가면 죽어요. 왜 하나님께서 법을 살리느냐? 처음 아담과 하와 때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이 있었잖아요. 따먹으면 정녕 죽는다 했잖아요. 아담과 하와는 주님의 이런 말씀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동의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그 하나님의 의미에 충분히 동의를 한다면 그들이 악마의 유혹을 받아서 따먹었을 때 둘 다 자살해야 돼요. 


“주여, 저 때문에 주님이 얼마나 가슴 아프십니까? 제가 이렇게 살면 뭐합니까?” 그리고는 여자에게 “여자여, 우리가 그만 죽자. 우리 실수로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었으니 이제 우리가 그만 죽자.” 이렇게 나와야 할 것인데 그들은 숨기 바빴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선악과 따먹지 말라. 따 먹으면 정녕 죽는다.” 하는 그 취지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고 아는 바가 없었다는 거예요. 그 아는 바가 없었다는 그 사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따먹지 말라고 했던 그 이유를 마지막 때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터뜨리는 겁니다. 전달하는 거예요. 그 전달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율법을 줘서 율법이 살아나고 죄가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현실은 모르고 환상 속에서 살아왔다.”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진짜 현실은 따로 있고 너희들은 꿈속에서 살아온 거예요. 잘못되게 살아온 겁니다. 그 잘못된 것이 뭐냐? 고린도전서 6장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음란, 우상 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질, 탐람, 술 취하는 것, 후욕, 토색,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뭐냐? 그것은 자기 행동에 자기의미를 연결시킨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자기 행동에 자기를 살리고자 하는 의미를 여기에 집어넣어서 이 법을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아는 의미 말고 다른 의미를 집어넣으면 우리는 의가 될 수 있는데 문제는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다른 의미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이에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그 행동에 대해서 항상 나의 의미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지 나한테 의미가 오지 않는 행동을 우리는 해석자체도 못하게 되어 있어요. 그 어떤 것도 해석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만큼 우리는 진짜 해석에 무지몽매한 거예요. 


‘내가 왜 살아야 되지? 아,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자기가 막 의미를 집어넣고 만든다니까요. 노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진리 주변을 맴돌면서 맨날 법을 만들어요. 그 법을 누가 만드는가? 내가 나의 의미, 남은 죽더라도 나만은 꼭 살아야 되고 나는 성공해야 되고 나는 실패가 없어야 되고……, 그런 자신의 욕망이 담긴 의미로 진리 주변을 맴돌면서 계속 법을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주일 11시 예배에 10분전에 꼭 온다.’ 이게 법이거든요. ‘나는 하루에 기도 30분하고 성경 다섯 장 읽는다.’ 이것도 자기가 만든 법이에요. ‘나는 식전에 양치한다.’ 이것도 법이고 ‘나는 화장실에 갈 때 꼭 신문을 들고 간다.’ 이것도 자기가 만든 법이라니까요.


그 법은 나를 죽이는 법이 아니에요. 나를 정당화하고 나를 살리는 법이라니까요. 얼마나 이게 잘못됐어요? 한두 가지가 아니고 모든 게 잘못되어 있어요, 모든 게. 며칠 전에 뉴스를 봤는데 저로서는 상당히 의미 있고 재미있는 뉴스였어요. 어떤 새댁에 애를 안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는데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어요. 남긴 유언이 “시어머니와 남편은 내 장례에 못 오게 하라.” 그걸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요. 


여자가 성인이 되고 결혼을 했으면서도 아직까지 자기 인생이 왜 그리 없느냐?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휘둘리는, 그들을 싫어하면서도 그들과 안 끊어지고 있으면서 나만의 인생이 없는 거예요.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합니까? 나만의 인생? 없어요. 그러면 그동안 살아온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가 제공한 것, 그것과 밀고 당기면서 그것이 마치 자기 인생인양 착오를 일으킨 겁니다. 그래서 죽는 것도 저 사람들 약 올리기 위해서 죽는 거예요. 그것은 죽으면서도 정신적으로 그 사람들의 종이에요. 내 인생이 없다니까요, 내 인생이. 


“내 장례식에 남편과 시어머니는 오지 못하게 하라.” 광기입니다. 남보란 듯이. “하나님! 보세요. 제가 이 법을 지킵니다.” 그거 광기입니다. 사람이 법을 지키겠다는 그것은 스스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또 드는 이유는 하나님의 법을 알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을 집어넣어서 자기 자신이 ‘나는 왜 정당하고 나는 왜 구원받아야 되며 남은 지옥가도 나는 왜 천국에 가야 하는지, 나는 그만큼 가치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법을 자기가 당겨서 지키는 겁니다. 교회 와주는 거예요. 모든 것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유사법이에요. 가짜 법이에요. 쉽게 말해서 기도하면서 기도를 안 하고 있는 겁니다. 전도를 하면서 전도를 안 하고 있고 헌금을 하면서 헌금을 안 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 못해요. 할 수가 없지요.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게 전부 다 자기 잘남의 의미로 되돌아오는데요. 


그러나 그것은 제가 분명히 광기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가는 곳은 천국이 아니고 알프스 산기슭이에요. 그 알프스 산기슭에 비행기가 추락해서 산산조각 난 그 장면을 보신 분들이 있을 거예요. 거기 보면 뭐가 남아 있는가? 다 조각들뿐이에요. 그게 실상입니다. 그게 현실이에요. 인간이요? 인생? 조각조각, 하나의 어설픈 덩어리고 뭉치에 불과한 거예요. 그 자살한 새댁, 떨어져 죽은 그 시체 보면 시어머니 것 이만큼 있고, 남편 것 이만 큼 있고, 자식 것도 있고, 자기 것은 없어요. 자기 인생은 없어요. 주워들은 거예요. 남들이 요구하는 것을 내가 강제로 맞춰줌으로써 나라는 것이 어설프게 구체화되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그 작품이 나를 응시하는 사람에게 별로 좋은 평가를 못 받을 때는 나를 폭파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 사람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다 미친것 같아요. 왜 미쳤는가? 미치라고 하나님께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남이 날 안 알아준다고 미칠 때, 남이 내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식으로 내 신앙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 우리는 감사합시다. 고마워할 줄 알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몰아세우신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우리가 다가서고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게 아니고 주께서 이미 지정된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끌어당길 때 이전에는 몰랐던 법이 살아나고 한 발씩 끌어당길 때 그 전까지는 안 살아났던 죄가 살아나면서 주 앞에 점차점차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먼저 활주로를 깔아놓았어요. 힘든 활주로, 좁은 길, 공생애라는 이름의 활주로를 깔아놓았어요. 그 활주로에 자진해서 참여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활주로는 법이 살아나고 죄가 살아나는 곳이기 때문에 그 활주로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산자가 아니고 죽은 자가 되어버립니다. 죽은 자가 되었다는 말은 나의 의미도 조각조각 날라 가버린 거예요. 그 조각난 비행기가 햇빛에 반짝여요. 모든 것이 모조품이라는 거예요.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나라는 것을 만들기 위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내 의미라는 것이 장식품이에요. 크리스마스 시즌 지나면 장식한 트리는 철거해버리잖아요. 


한평생 살고 나서 죽게 되면 자식들이 애고, 애고, 애곡하지요. 30분도 안되어서 철거해버립니다. 두 달쯤 지나면 사진도 치워버립니다. “귀신 나온다. 치워버려라.” 왜 우리는 아담이 몰랐던, 아담마저 몰랐던 그 죄지었던 현실, 현장을 왜 우리는 보존하지 않고, 왜 그곳이 가지 않고 딴 살림을 차리려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딴 살림 챙겨서 죄 지은 주제에 마치 천국갈 수 있는 것처럼 하는 마귀의 미혹된 그 심보, 주께서 우리를 강제로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현장을 죄의 법의 수풀을 이루는 현장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렇게 만들어버려서 그 속에서 우리가 누구한테 놀림 받고 누구에게 속임 당하고 있다는, 우리를 장악하는 보이지 않는 실체의 작용을 느낄 수 있도록 조치하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이야기하면 방향성이에요, 방향성. 이미 주 예수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했거든요. 그냥 눈사태가 일어난 그 안에, 폭설 안에 푹 싸여버린 거예요. 싸이고 난 뒤에 그 때부터 출발하는데 이건 누구의 성공이냐 하면 예수님의 성공이거든요. 예수님의 성공 안에서 우리는 왜 내가 하는 내 구원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를 즐거운 마음으로 확인해야 됩니다. 


왜 확인해야 되는가?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계속 나오기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단도직입적으로 간단한 답변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길게 하지 말고 간단하게 합시다. 복음이 뭡니까? 거기에 대해서 로마서 4장에서는 간편한 해답을 준비해주고 있습니다. 4장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은 죄 때문에 죽었고 의 때문에 살았다. 이게 복음입니다. 죄 때문에 죽었고 의 때문에 산다는 것이 주님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주신 모든 말씀, 모든 법, 오늘 본문에 나온 간음, 우상숭배, 토색, 이런 말씀에 담긴 속 의미는 뭐냐? 그래서 주님은 이런 죄 때문에 죽었고 주님은 죄 때문에 죽은 너희를 살리기 위해서, 의롭게 하기 위해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이 성경말씀을 주신 거예요. 여러분이 이제 이걸 듣고 알았으니까 이 말씀 보면서 모든 성경 가운데서 죄 때문에 나는 이미 죽었고 의 때문에 살아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시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주신 의미입니다. 


열왕기상 21장 15절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나봇의 포도원이야기입니다. 거기에 이세벨이라는 악한 여인, 악녀가 하는 말이 얼마나 복음적인지요. 왕의 포도원 옆에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던 거예요. 아합 왕이 그 나봇의 포도원이 탐이 났어요. “그 포도원을 내게 달라. 내가 나물밭을 만들겠다.” 할 때 나봇이 하는 말이 “이것은 제 것 같으면 드릴 텐데 이건 하나님이 유업으로 주신 겁니다. 그래서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한 거예요. 그것과 오늘 본문의 10절을 다시 봅시다.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성과급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네 행함에 대한 보상으로 받는 게 아니에요.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 왜? 이런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것은 자기 의미 안에서 자기 잘남을 변명할 수 있기 때문에 따라서 자리를 바꿔야 돼요. 어떤 행동을 하는 자리를 예수 안, 예수 이름의 자리로 바뀌어져야 돼요. 


자리가 바뀌게 되면 그 자리에서 우리는 아무 예상도 못한 천국, 영생을 유업이라는 이름으로, 공짜라는 이름으로 수용하게 되어 있어요. 천국은 그렇게 해서 가는 곳입니다. 공짜로 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있는 자리는 그리스도안의 자리로 이동이 돼야 되는 겁니다. 나봇이라는 이 사람은 이미 이동을 한 사람이에요. 이동을 이미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발현돼요. “포도원 값을 치를 테니 나에게 팔아라.” “못 팝니다.” “왜 못 파느냐? 나는 왕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유업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못 팝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저, 김 집사님! 받은 영생 있지요? 그 영생 좀 저에게 나눠주세요. 팔라는 말이 아니고 좀 나눠주세요.” “내가 나눠줄 수가 없습니다.” “같은 식구인데 왜 못합니까?” “이에 유업으로 받은 것이라 못 팝니다. 제 것이 아니고 유업으로 받은 것이라 못 팝니다. 이게 내 자리가 아니고 주님의 자리입니다.” 누가 좀 팔라고 이야기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실험 좀 하게. 


이렇게 되니 왕이 고민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그 왕비인 악녀가 하는 말이 “왕이여, 그것은 고민거리도 안 됩니다. 내가 해결할게요. 남자가, 그것도 왕이 되어서 그거 하나 해결 못하나.” 그래서 해결했습니다. 어떻게 하는가? 모함을 하는 거예요. 모함이니까 오늘 고린도전서 6장 10절의 백과사전을 보게 되면 거기에 모함이 나오네요. 후욕하는 자, 모함에 해당되지요. 이세벨이 모략을 꾸면서 “저 나봇이 왕에게 험담했다.”는 구실을 삼아서 사람들 매수해서 “나도 들었습니다.” 해서 그만 죽이고 말았어요.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복음적이라고 한 그 말을 이세벨이 한 거예요. 왕에게 하는 말이 “여보! 내가 처리했어.” 하면서 한 말이 이겁니다.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포도원을 취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왕상 21:15) 이게 주님이 우리보고 주는 의미입니다. “너는 살아 있지 않고 죽었느니라. 너의 안경과 옷과 그 모든 것은 주의 유업이니라.” 여러분, 신앙생활 대단히 평범합니다. 신앙생활 무지무지 지루해요. 너무나 평범하고 별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너무 평범하니까, 너무 속물적이니까 어떻게 하느냐? 교회 와서 고상한 것들을 창안하기 시작합니다. 멋있는 것, 필리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것, 저 멀리 선교하는 것, 기도 열심히 하는 것, 새벽기도……, 우리 교회는 새벽기도 없어서 천만 다행이다. 뭔가 별난 것을 만들어서 평범한 지루함을 해소해보려고 하는 겁니다. 신앙은 딴 게 아니에요. 법이 살아나야 돼요. 법이 살아나서 주님의 쟁쟁한 음성을 들어야 돼요. “너는 지금 죽었느니라. 그리고 네가 하고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니라.”라는 소리가 들려와야 돼요. 


그럴 때 우리가 그냥 밥 먹고 살아도, 그냥 살아도 이것은 다 주님의 유업이에요. 주께서 상속으로 주신 겁니다. 우리가 그 속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게 하심과 성령의 씻음과 거룩함이 비로소 발생되고 생산되고 발휘가 되는 겁니다. 결정적인 것은 예레미야 13장 23절에 나옵니다. 제가 이 결정적인 것을 설교 제일 마지막에 말씀드리는 이유는 초반에 이야기하면 이게 무슨 소리인지를 도무지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끝부분에 말씀드립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이야기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흑인의 피부가 변하겠는가? 마이클 잭슨같이 약 쓰고 수술하고 그런 경우 말고요. 흑인의 피부가 하얗게 변하겠는가? 표범의 얼룩무늬가 없어지겠느냐고 예레미야가 묻는 거예요. “미쳤습니까, 그게 변하게? 세상이 두 쪽 나도 그럴 일은 없습니다.”라고 우리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네가 안 되는 것을 표범이 안 되는 것을, 흑인이 안 되는 것, “안 되지?” “안됩니다.” 그 안 되는 것을 내가 행했다는 거예요. 씻을 수 없는 그 죄 씻음을 나는 행했다는 겁니다. 


구원은 알프스 산기슭에서 시작해야 돼요. 나라고 여기는 그것이 산산조각 나야 됩니다. 헬리콥터가 떠서 산산조각 난 독일항공사비행기를 촬영해야 돼요.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가? 얼마 전까지 비행기 탈 때 있었던 수학여행 갔던 고등학생들도 있었고 어떤 가수도 있었는데 그 비행기 떨어진 산기슭에는 조각조각들의 집합체, 더미만 있을 뿐 누가 누구인지는 다 없어집니다. 바로 거기서 새로운 피조물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설교할 때 주기도문 했거든요. “제가 주의 이름으로 삽니다. 제가 사는 이것은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물론 그 흔적이 우리를 괴롭게 하지만 주의 이름으로 삽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 여러분이 아시지요? 그 주기도문을 늘 반복하는데 그 내용에 이런 것이 있어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옵시고. 천국이 다른 게 아닙니다.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임하옵시고, 그 임하는 천국의 내용이 뭔지 알아요? 너무나 평범해요. 너무나 고요합니다. 떠벌이지 않아요. 티도 잘 나지 않습니다. 다만 본인은 알아요. 


주여! 저의 죄를 이미 용서했기에 저의 죄를 알게 하옵소서. 이미 용서했기에 저의 죄를 이제는 알아가는 즐거움으로 살게 하옵소서. 제가 바로 모함하는 사람이고 제가 3차, 4차, 5차 간접적으로, 마치 가담하지 않은 양 남을 토색하는 사람의 일원이었습니다. 나는 공직에 있으면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을 억울하게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없는 자리라고 이 법이 살아나서 나에게 통보해주시니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없는 자리에서 이제는 예수 이름으로 살기에 나는 공짜로 받는 그런 자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주님은 나를 위해 죽었고 내 의를 위해서 살아났기 때문에 내가 인정하는 유일한 현실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밖에 없습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기와 광기로 똘똘 뭉쳐져서 자기가 무슨 대단한 존재인양 남에게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경쟁에 뛰어든 저희들, 마치 지옥불 속에 뛰어든 양상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나의 의미가 환상에 불과하고 그것마저 주님의 의미로서 다루어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감사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