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33강-속아주어라(고전6;6-8) 15032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3. 24. 08:23
속아주어라(고린도전서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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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3-22 13:34 
속아 주어라

2015년 3월 22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6:6-8

(6: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6: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6: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속임’이란 자신을 고정적 존재로 인식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발생되는 겁니다. 즉 “나는 한결같기를 원하는데 네가 뭔데 감히 나를 흔들어 그동안 터 잡은 나의 정립을 혼란스럽게 하느냐”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교회 나온 이들은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러한 동의를 외면하시고 현실 속에서 참된 진실됨을 직접 심어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신앙에 흠집난다고 여깁니다. 바로 이것이 ‘속이는 행위’에 해당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존재에 어떤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에는 아무런 의미나 사는 이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 중심이 나 중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코페르니쿠스라는 사람은 중세 서양역사에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야지만 모든 데이터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즉 비록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한 의미와 목적을 가질 수 있는 존재는 예수님뿐입니다. 그 외는 아닙니다. 그 외는 모두 독자적으로 무의미합니다. 마치 유원지에 설치되어 있는 회전목마에 올라탄 사람들과 같습니다. 평생을 살아도 같은 풍경, 같은 모양새만 반복해서 보게 될 뿐입니다.

20년 산 사람은 20년 동안 제자리에 뺑뺑 돌고 인생을 80년을 산 사람은 자기 자리에서 80년간 반복되는 풍경만 봐왔습니다. 아무리 먼 여행을 다녀도 나사못처럼 회전축이 자기 자신으로 고정되어 이상 여전한 동일한 풍경만 상상할 뿐이고 확인할 뿐입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그런 겁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신약에 대한 설명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신약은 역사 끝에 나타난 일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끝이란 하나님 보시기에 더 이상 시간 끌 이유가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마무리 되었기에 내린 시간적 결정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성도가 출현합니다.

이 출현된 성도의 특징은, 본인에게 그 어떤 의미나 목적을 지칭하게 않아야 될 대상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즉 ‘나를 위하여’가 근원적으로 차단된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 성도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이미 끝을 넘어선 자들이요 그 끝 안에서 도로 튕겨져 나온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전에 자신이 살던 풍경 속으로 도로 들어온 자들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닫힌 문을 노크하는 자들이 아니라 이미 열려진 문을 노크하면서 자기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하늘에서 새로 파견된 자들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의 여유라고 할까요?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성취’가 내장되어 있습니다.

이 내장된 신적 요소로 인하여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이 인간이 아니라 괴물임을 자인하는 자들입니다. 즉 스스로 착함과 선함을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의 요소인 ‘십자가’라는 절대적 기준에 준해서 용납하지 않음을 알게 된 자들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평가를 기준을 자기에게 적용하게 되면, 성실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나름대로 의로운 요소가 전혀 없는 자가 아님을 자부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자기 존재에 희망과 기대를 갖게 되어 있고 나름대로 자기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유발하는데 이것이 바로 ‘속임수’의 시작입니다. 속임수란 바로, 자기 안에 남들이 원하고 있는 바가 들어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에게 꼭 필요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으면서 세상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쉬지 말고 타인을 속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자기를 속이려는 사람에게 큰 양보와 배려를 베풀어서 타인으로 하여금 더 이상 나는 상대를 속이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되어 이로서 형제로 다시 통합을 이루려는 원대한 양보를 실천에 옮기는 사람으로 비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태도로 인하여 상대는, ‘나는 늘 당신을 속이는 자’라는 것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는 전략이 성립합니다. 즉 “나는 당신이 기대하는 착한 사람, 늘 양보할 정도로 상대를 배려하는 그 귀한 품성을 이미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라는 기대를 유지하게 되는 그런 속임수를 발휘하게 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실천력으로 형제와 형제를 통합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담을 정신적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그 어떤 경우라도 그 모든 것이 자기 잘남으로 질적 변화가 일어나며 그 업적은 자아 정체성 창고에 보관이 됩니다.

그런데 바로 사람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로를 위하여 소중하게 쓰일 재료가 됩니다. 구약에 그런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창세기 27장에서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하여 형에게 돌아갈 축복을 자기 것으로 돌려놓는데 속임수를 사용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야곱의 속임수로 넘어갔고,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차라리 그런 야곱을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도리어 속임을 당하는 하나님’이 바로 자기 백성을 위해 대신 희생당해야 하는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마저 속이는 현장이 하나님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계속해서 관여하여 야곱으로 하여금 라반 삼촌에게 속임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 와중에서 야곱은 지지 않고 맞받아치면서 속임수와 속임수의 배틀이 이루어지는 야곱 인생을 하나님이 진행시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얍복강가에서 밤에 찾아갈 때, 야곱은 자신의 속임수 있는 인생 전체를 자신이 자기를 지키는 유일한 방식으로 확정된 티를 유감없이 발휘해서 낯선 방문지와 죽도록 밤새 싸우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야곱입니다. 즉 인생이란 바로 궁극적으로 본인이 아니라 아무도 지켜 줄 위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야곱이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옛적 살던 동네입니다. 이 동네에서 우리는 자신의 진면목을 되풀이하면 주님의 용서하심을 되풀이하면서 증거하게 됩니다. 우리의 위선적 가면이 환경과 더불어 원치 않고 무너져 내릴 때, 비로소 우리를 지켜보신 낯선 시선을 느끼게 됩니다.

마태복음 17:4에 나오는 변화산 기적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소감을 밝힙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더 이상 속고 속이는 것조차 의미없는 세계에서 성도는 죽기 전부터 이미 죽은 자의 삶을 고백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 위선없이 살지 못하고 남에게 자신이 마치 존재할 가치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기준인 십자가를 늘 새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고린도전서 6:6-8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속이는 문제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진실한 것을 따로 챙기고 있다는 이것을 분명히 해주는 겁니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그 진리라는 것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누구냐, 형제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진리를 믿기에 그 진리가 주님에게 있기 때문에 예수님 빼놓고 인간과 인간, 교인과 교인, 성도와 성도 사이에는 뭐가 교류되어야 하느냐하면, 진리만 교류되는 것이 합당하지요. 이 진리문제에 대해서 이미 정답이 나와 있는데 어떻게 마치 정답을 모르는 것처럼 진리를 거부하는 세상 재판관 앞에서 “진리를 우리에게 정해주세요.”라고 설 수 있느냐고 답답해하는 겁니다. “그러고서도 형제냐? 예수님의 형제고 너희들끼리 형제냐?” 묻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거기에 대해서 반발하기를, 재판과 송사에 대해서 반발하기를 “물론 주님이 진리지요. 하지만 저의 재산 손해 봤습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대꾸가 있을 것이 뻔합니다. 나는 바르게 했는데 저 형제가 나를 속였습니다. 내 것 손해 봤으니 받아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송사했습니다. 재판의 권력은 판사가 갖고 있으니까 제 권리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네가 진리를 아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반영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진리십니다.” 해놓고 실상에서는 전혀 진리가 먹히지를 않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뭔지 알아? 진리라는 것은 예수님의 진리가 너희 생활 속에 파급이 되어야 너희는 하나하나가 주님의 형제라고 인정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 진리가 뭐냐?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하는 겁니다. 차리라 속는 것이 낫다. 숫자 얼마 안 되는 우리 교인들 같으면 설교자가 심적인 부담이 안 되는데 서울의 사랑의 교회나 늘 소송이 일어나고 있는 그런 교회 가서 이런 설교 할라치면 사람들은 예수 믿는 변호사 찾고 예수 믿는 판사 찾는다고 바빠요. 그러나 재판에서 배정을 함부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옛날에 일어났는가?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형제라는 것은 성도 본인 나름대로의 자기의 가치나 의미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다 아시고 구원을 해줬는데 우리는 따로 나름대로의 나의 가치나 의미를 챙기려 하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왜 나에게 손해를 주느냐? 나도 가만있을 줄 아느냐? 같은 교인이지만 소송해야 되겠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것은 어디서부터 생각되느냐?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만 이 세상에 존재의 의미를 갖고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은 우리한테는 존재의 이유가 없고 목적도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목적이 있는 삶, 목적이 이끄는 삶은 없습니다. 속임수가 언제부터 시작되느냐 하면, 바로 나한테 어떤 존재의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오해하는 데서부터 남을 속이기 시작해야 되고 또 속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아무리 살아 보세요. 우리는 왜 사는지, 왜 오늘 이렇게 살아가는지의 이유를 우리에게서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발견할 수가 없고 가질 수가 없습니다. 깔끔하게 이야기해서 우리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는 이유나 의미가 없습니다. 아예 인생의 목적이나 존재의 의미 같은 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왜 그래야 되는가? 그걸 코페르니쿠스의 발상의 전환이라 하는데요. 옛날에는 태양이 지구주위를 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옛날 중세 때는. 그 당시 한국에서는 그런 것 신경 쓰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말하기를 태양이 있고 별이 중앙에 있고 주위를 지구가 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큰 발상의 전환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고 예수님이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중앙에 있고 우리가 그 주변을 돌고 있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 18절에 나와 있어요.



세상 모든 변화는 다 예수님을 위해서 있지 우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로마서 14장에 보면, 우리가 살아도 혹은 죽어도 주를 위해서 살기도 하고 주를 위해서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에스겔 24장 18절의 이런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에스겔의 아내가 졸지에 죽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악에 받쳐서 막 하나님께 대들었을 거예요.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는데 사랑하는 아내를 데려가게 되면 내가 무슨 의욕을 가지고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까?” 하고 악이란 악은 총동원시켜서 대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에스겔은 담담합니다. 왜? 자기가 태양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태양이 아니거든요. 나는 별이 아니고 나는 태양을 도는 행성에 불과합니다. 이 발상의 전환이 되는 사람을 가지고 성도라, 형제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본문 고린도전서가 신약이잖아요. 여러분은 그냥 보지만 이 본문이 신약에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구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 있어요. 성경 후반부에 있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신약이 너무 어려우니까 앞으로 신약 하지 말고 구약을 설교해 달라고 하는데……, 왜 그런가? 이 신약은 마무리, 끝 지점에 나오는 말씀들이에요. 끝 지점이라 하는 것은 더 이상 시간을 지연할 아무런 이유가 없이 모든 것이 마무리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끝 지점에 나올 예수님의 형제, 예수님의 몸, 지체라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미 죽음 속에 갔다가 튕겨져 나온 사람이에요. 그러니 죽기 전에 이미 죽음 이후의 삶을 사는 사람을 가지고 형제라,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신약이에요. 그런데 신약을 볼 때는 죽음에 의해서 튕겨져 나와야 하는데 아직 튕겨져 나온 일이 없이 아직 살려고 하는 사람이 그냥 신약을 보니까 성경을 봐도 전부 육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신천지의 요한계시록 해석이고 그게 육적인 해석이 되는 겁니다. 살아보려고 하는 것. 이미 죽어버렸는데 뭘 살아봐요? 이미 죽어버렸는데.



구약은 선언이고 신약은 성취에요. 구약에서 “네가 십계명을 어기고 범죄 하면 죽는다.” 했고 신약에서는 “너는 그래서 죽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죽음을 성취시킨 거예요. 우리가 무슨 목적이 있고, 무슨 목적이 이끄는 삶이 있고 무슨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까? 이미 죽은 자로서 튕겨져 나왔는데요.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게 되면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냥 돌아가는 회전목마에 불과합니다. 회전목마까지 갈 것도 없이 어린애들 놀이터에서 빙빙 도는 것 타고 돌아보세요. 아무리 돌아봐도 주변 환경이 그냥 반복해서 돌 뿐이에요.



어떤 사람은 20년 돈 사람이 있고 30년, 30년은 별로 없다만, 40년, 50년, 60년, 70년, 80년, 지금 80년 되신 분이 계시다고요. 백날 돌아봐도 풍경이 똑같아요. 사는 것이 거기서 거기고 똑같아요. 어떤 촌에 있는 할머니, 경상도 사는 할머니인데 90평생 동안 제주도 한 번 안 가봤답니다. 90년 동안 살았어도 누가 데려가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감자농사만 짓고 사는 거예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냥 뺑뺑이 도는 겁니다. 피겨선수가 그 자리에서 도는 것처럼. 대통령 바뀌어도 마찬가지고 국무총리 바뀌어도 마찬가지고. 국무총리 이름도 몰라요. 이 완구인지도 몰라요. 옛날 어릴 때는 장관 이름 다 외웠습니다. 지금은 외워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요. 맨날 바뀌니까. 보던 풍경 그대로에요.



인생이 이 땅에서 아무리 행복하니 불행하니 해도,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고 청룡열차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도 보던 풍경이 맨 거기서 거기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께서 마지막 때 일을 벌였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일은 네 체제 안에 담기지 않는다는 거예요. 네가 주님 주위를 도는 하나의 행성처럼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이미 죽은 자로서 다시 이 세상에서 파견근무 들어오는 겁니다. 보통 우리 상식에서는 화장실이나 문을 열 때 닫힌 문을 노크하잖아요. 신약에서의 성도는 닫힌 문을 노크하는 것이 아니에요. 열린 문을 노크하는 거예요. “실례합니다. 케이블에서 왔습니다.” 케이블 기사가 들어오듯이 이미 열린 문, 문을 열어놓고 열린 문에 들어가는 거예요.



거기 들어가 보면 옛날 자기가 구원 받기 전에 놀던 동네에요. 다 알아요. 왜 술 먹는지 알고 왜 담배 피우는지 알고 나이트클럽에 왜 가는지도 알고, 다 압니다, 다 알아요. 그래서 술 끊고 구원 못 받아요. 그걸 이미 알고 있어요. 담배 끊는다고 구원 못 받아요. 나쁜 짓을 끊는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어떤 인간이 어떤 노력을 다 해도, 교회 다니고 목사 장로가 되어도 구원 못 받는다는 것을 이미 안 사람이 다시 교회 다녀야 됩니다. “실례합니다. 아이고, 쓸데없는 짓 하고 있네.” 이런 식으로. 구원 받은 자의 여유? 구원받은 자의 여유로 가야 돼요.



이게 바로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 “속이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아니하냐.” 하는 이 대목을 육신으로 해석하지 말고 신약 때 성령 받은 영으로 해석돼야 돼요. 육신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형제가 속이더라도 이미 너는 가진 자니까 차라리 속아줘 버려라. 그러면 그 형제와 네가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 몸을 이룰 것이 아니냐? 참는 사람이 이긴 자다. 그렇게 생각해라.” 그게 바로 육신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나 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절대로 인간이 양보한다고 해서 그 사람과 통합되지 않습니다. 형제로 하나 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네가 차라리 속아줌으로 말미암아 저쪽 상대방이 나를 속일 때 ‘나는 저 사람을 속여도 저 사람은 나를 안 속이는구나.’ 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억울한 나는 너를 안 속여도 그동안 너는 나를 속여 왔어.’ 하고 안심 푹 놓게 해줘야 그 다음부터 내가 마음 놓고 저 사람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영적인 해석이에요. 무슨 말인지 나도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할 때 너라는 존재는 매일 같이 속지 아니하면 너는 살 수 없는 인간으로 이미 확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속이지 않는 분은 주님 한 분으로 족하지 너까지 속이지 않는 사람으로 행세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주님 앞에 나타나지 아니하면 너는 바르게 산다고 우길 사람이야. 하지만 네가 너를 보는 기준은 마치 네가 중심이고 주님이 태양 주위를 돈다는 발상인데 제대로 된 발상, 주님이 중심이고 우리가 돈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에 의해서 자기 자신은 늘 속이면서 살아야 된다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죽고 난 뒤에 감옥에 있으면서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그걸 저는 패러디해서 “우리는 매일 속이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습니다.”



사람이 왜 남을 속여야 되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불가능한, 우리가 할 수 없는 신적인 말씀, 율법이지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지요, 그 법을 우리 속에 집어넣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성취할 수 없는 요소가 우리한테 잠식되는 순간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고 그야말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괴물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 속이지 않아서 구원 될 이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그 말입니다.



신약에 와서 이미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있어요. 거기서부터 남을 속일 때 어떤 취지로 속이느냐 하면, 남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귀한 것이 마치 나에게 있는 듯이 행세하면서 남들을 속여 나갑니다. “너희들 나 무시하지 마라. 너희들이 찾고 있는 것이 나한테 있다.” 이런 식으로 속여 가는 거예요. 그게 남들에게 의미가 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마치 너희들이 원하는 그 귀한 것이 나한테 있는 것처럼, 따라서 너희들이 나에게 잘해주면 너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고 못해준다면 너희만 손해지, 라는 식으로 행세하는 그 보람으로 인생 살아갑니다.



그게 뭐냐? 그게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억지로 만들어낸 존재의 의미에요. ‘내가 사는 존재는 네가 있기 때문이다.’ 김 종환이가 이야기했어요. 존재의 의미란 뭐냐? “너희들이 원하는 것이 나한테 있기 때문에 나를 사람으로 대우해줘. 부탁이야.”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없어요. 없으면서 그런 식으로 자꾸 기어 붙어야 돼요. 그렇게 자기를 위선하고 위장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괴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래야만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는, 주님의 자기의 명예와 관련되어서 이 신약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해라. 왜? 너는 당해도 싸니까.” 그게 정답이에요. 오늘 본문의 정답. “참아라. 참으면 언젠가는 너에게 감동이 올 거다.” 그게 정답이 아니에요. “내가 양보할게. 그래, 네가 이겼다.” 이렇게 돼버리면 자기를 사기 처먹은 사람이 말하기를 “비록 네 돈은 처먹었지만 저 사람은 인간성 하나는 좋더라.” 이렇게 되고 그리되면 “내가 인간성 괜찮은 사람 아는데 나한테 사기당해 놓고 재판도 포기하고 ‘너나 잘 먹고 잘 살아라.’ 해서 나한테 없는 게 그 사람한테는 있어.”라고 내가 그 쪽을 속이는 셈이 되잖아요. 참 복잡합니다.



그렇게 해서 소설을 써가지고 “네가 아무리 이겼지만 나는 너보다 더 훌륭해. 우수한 존재라고.”라는 것으로 그 상황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유지하려고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본인이 태양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이 필요치 않아요. 자기가 잘났는데 자기가 구원하지 왜 예수님이 필요하지요? 그게 무슨 죄인의 괴수에요? 잘남의 총수지.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주께서 신약에서 선언합니다. 선언입니다. 선언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 성취는 주님이 하시고요. 잊지 마세요. 선언은 주님이 하시고 성취도 주님이 하시고.



선언한대로 하시는데 그 선언에서 성취로 바뀔 때에 내가 정하는 기준을 빼버리고 주님이 주신 기준을 집어넣습니다. 그 대표적 기준은 뭐냐? 우리가 창안한 게 아니에요. 그 기준은 선악과입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네가 죽으리라. 그 기준은 우리가 만들어낸 게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파고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일방적으로 죄인 돼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가 우리 죄를 용서하려고 죽은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우리로 죄 짓게 해서 십자가 죽으신 예수님만의 공로를 높이기 위해서, 곧 죄를 짓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그 말씀을 주신 겁니다. 왜? 주님이 태양이기에. 우리는 태양인 주님을 도는 하나의 지구에 불과해요. 그래서 내 중심으로 내 의미를 생각하면 안돼요. 반대로 생각해야 돼요.



우리는 남을 속이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남을 속여야 돼요. 그 속이는 현장이 뭐냐? 고된 노동의 현장입니다. 고된 노동의 현장에 우리는 던져져서 속이는 것에 점차 단련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속임의 달인이 되는 거지요. 애들은 속이는 것도 유치해요. 빵 먹지 말라고 했는데 빵 먹어놓고 엄마가 “빵 누가 먹으라고 했어?” 하면 “엄마, 나 빵 안 먹었어. 동생이 먹었어.” 하는데 입 주변에 온통 허연 빵 가루가 묻었어요.



속이는 난이도가 높을수록 이 세상에서는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에요. 감언이설로 속이는 사람치고 인간성 나쁜 사람 없습니다. 제 말 잘 들어야 돼요. 잘 속이는 사람은 다 인간성이 좋아요. 그런데 꼭 어설프게 속이는 사람, 노동의 현장에서 속임수에 숙달되지 못한 사람은 직접적으로 속이려 들기 때문에 후안무치하달까, 짐승 같은 인간으로 취급당해요. 그래서 이 땅에서 가장 비판적인 사람이 인간성 나쁜 사람이거든요. 성경에서 제일 인간성 나쁜 사람이 예수님이고 인간성 제일 좋은 사람이 가룟유다입니다. 안 그런 척 할 수 있는 노하우가 그만큼 숙달되어 있기 때문에. 얼마나 양심적으로 인간성이 좋았으면 자살을 다 해요.



타인으로부터 내가 얼마나 가치 있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난이도를 조절하고 그 수완을 계속해서 개발해 나갑니다. 사람이 혼자 못사는 이유는요, 계속 자기가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은 자기 가치를 자랑질 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졌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사람이 못살아요. 꼭 누구를 만나서 자꾸 속여 줘야 돼요.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속이는데서 사는 재미를 느끼는 겁니다. 요즘 우리 어머니에게 새로운 소일거리가 생겼어요. 요양사가 새로 와서 화투를 전도했는데 어머니가 화투치는 손맛이 아주 매워요. 딱, 딱 들어맞게 치는데 잃었던 기능이 다시 회복된 겁니다.



옛날에 비산동에 살 때 가게 하면서 손님 없을 때 하숙생 라디오드라마 들으면서 시누이하고 민화투를 쳤거든요. 제가 증인입니다. 연세가 그런데도 전의 그 손맛이 나온다니까요? 딱딱 소리 나면서 들어맞아요. 화투가 재미있는 이유는 속이는 게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 가르쳐 줘. 상상해. 너희들이 무서워하는 거 내가 쥐고 있어.” 그 순간만큼은, 광 쥐고 있는 동안만큼은 자신을 아주 우수한 존재로 여기는 겁니다. 내가 태양이 되고 내가 바로 별이 되는 거예요. 내가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겁니다.



왜 사람들이 도박에 빠집니까? 남들 비위 맞추는 것이 너무 힘들 때 이제는 도박을 하면서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그 짜릿함 때문에 돈이 들더라도 도박에 빠지는 겁니다. 우리는 왜 도박에 안 빠지는가? 돈이 없어서 안 빠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진실을 이야기할 때,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할 때의 그 진리는 “네가 너 자신을 중심에 놓고 백날 진리를 외쳐봐야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주님께서는 이렇게 합니다. “나를 향하여 속여라. 나를 속여, 나를. 나를 속이는 그것이 너의 구원의 길”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길입니다. “남 속이지 말고 나를 속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속아 넘어가 줄게.” 이게 바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곱이에요. 이삭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자식들에게 복을 전수할 때 거기 공모자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27장 11절에 보면 “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찐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찌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이렇게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눈이 어두워서 마지막 유언을 하면서 “나에게 별미 가져온 자식에게 모든 축복을 다 주겠다. 그리고 나머지는 저주하겠다.” 이렇게 선언을 했습니다. 그걸 듣고 어머니 리브가가 자기가 좋아하는 야곱과 공모해서 아버지를 속이기로 했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 생각해요. ‘도대체 하나님은 눈 먼 하나님 아니야? 어떻게 인간의 어설픈 거짓말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쉽게 속임을 당하느냐?’ 그 말이지요. 거기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진실과 하나님의 진실이 차이가 거기서 나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스스로 희생자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속였던 죄를 죄로 묻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바로 그 방식이에요. 이 사실은 자기를 태양이라고 여기는 인간들의 머리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입니다. 이런 발상은 나올 수가 없어요. 우리가 구원받은 거요? 우리가 예상해서 나온 발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요? 아직도 그것 가지고 안 돼요. 뭐냐? 실제 생활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복음을 알고 난 이후에 남을 속이는 재미로 살아야 될 그런 인간으로 이미 확정되어 있어요. 복음을 알든, 십자가를 알든, 피를 알든 그런 것 안다고 필요 없어요. 우리는 매일 같이 남 속여먹는 재미로 그런 육신을 가지고 살아야 돼요. 그래야 돼요.



교회 좀 나오세요. 교회 나와야 자기가 믿음 좋을 거라고 상대방이 그 속임에 넘어가는 기쁨도 같이 누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을 안 만나게 되면 자기가 진짜 믿음 좋은지 알아요. 그런데 교회 나와서 “와, 집사님 진짜 믿음 좋으십니다.” 하면 내가 믿음이 없는데 믿음 좋다고 하니 얼마나 신납니까? 나 혼자 신나는 모양이지요. 개척교회 하는 목회자가 큰 교회를 꿈꾸는 이유는 많은 사람을 속일 때 적은 수의 사람을 속일 때보다 훨씬 기쁨이 크기 때문에 그래요.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설교 가지고 설득하려고 하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아멘을 하면 저는 뭐가 되는지…….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리브가의 공모에 넘어가줍니다. 넘어가주고 속이는 자에게 축복을 해버려요. 이렇게 되면 후대에 어떤 원칙으로 남는가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따내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라도, 곧 축복을 지향하기만 해서 결과만 좋으면 수단이 어찌되었든 묻지를 않는다는 전철을 남기는 셈이 되잖아요. 그걸 하나님이 유도했습니다. 왜? ‘야, 하나님의 일에서도 속여서 무조건 내 것 만들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진즉에 가졌어야 돼요. ‘나는 이제 하나님께 구원 받았으니 하나님께 무엇으로 보답할꼬? 이제 몸과 마음을 다 해서 헌신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도 않는 소리 하지 말고 ‘야, 하나님마저 나에게 속아 넘어가니 하나님도 만만하다.’ 그런 마음으로 그냥 가야 돼요. 마이 웨이, 죽 나의 길을 그냥 가야 돼요.



가면서 그 중간중간에 야곱의 인생에 개입을 하십니다. 이제는 야곱이 주변 사람으로부터 속임을 당하는 순서가 남아 있습니다. 창세기 30장부터 나옵니다. 길기 때문에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가서 일하면서 임금을 열 번이나 변경 당했습니다. 그 전에는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 라헬인데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삼촌 라반이 야곱을 속여서 “우리 동네에서는 언니 놔두고 동생 먼저 시집가는 법이 없다.”는 것을 내세워서 할 수 없이 진짜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언니와 먼저 결혼하고 다시 라헬과 결혼했습니다. 마트에서 1+1 세일 하듯이 그렇게 결혼했거든요.



야곱은 전부 속임을 당하는 인생을 살아요. 그리고 야곱은 거기에 대해서 또 삼촌을 속입니다. 삯을 자꾸 속이니까 야곱이 제안을 하지요.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자를 가리어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 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 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창 30:32-33)



그렇게 해놓고는 야곱이 자기 양떼에게 이렇게 합니다.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떼의 눈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아니하니 이러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창 30:37-43)



이것은 산업기술에 해당되는 문제지요. 노하우에 관한 것인데 그걸 이용해서 무조건 비실비실한 것은 삼촌 것으로 만들고 실한 것은 다 자기 양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야곱 이름 자체가 속이는 자에요. 속이는 인생, 바로 우리의 본 모습으로 역사 속에 야곱을 먼저 상정시켜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임을 당했지요. 당했는데 그게 하나의 시발점이었습니다. “그래. 속임을 당할게.” 해놓고 야곱과 더불어 사시면서 야곱이 타인에게 속임을 당하면서 축복이라는 것이 속여서 빼앗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속임을 당하는 그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속였으니 내 것이 된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속였더니 그 때부터 속였던 나 자신을 주님께서 재료로 사용해서 진실을 찾는 거예요. 진실이란 사기에서, 생명이란 죽음에서, 모든 것을 다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놓고 허무하다고 다 나자빠질 때 그리고 절망할 때 그 속에서 진짜 예상치도 못한 구원을 끄집어내는 방법을 주께서는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이 신약에 와서 어떻게 되는가? 신약의 마태복음 17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변화산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얼마나 좋았던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 17:4) 미래가 미리 현재 속에 삽입되어 들어온 거예요. 죽음 이후의 사람은 죽기 전에 이미 죽음 이후의 삶을 산다고 했지요. 이 변화산에서 “여기가 좋다.”고 말할 때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시켜도 괜찮았어요.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비로소 그 의미가 다가오지요. 여기 있는 것이 좋은데 남이 나를 속인들, 내가 남을 속이게 되었다고 한들, 내가 남을 속였다고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남이 나를 속였다고 해서 내 처지와 내가 받아야 될 영광이 훼손되는 것도 아닌 그런 세계, 그런 세계를 주께서는 준비해놓으신 겁니다.



‘그 준비된 세계를 우리가 좀 받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생각하지요? 여러분의 그 마음을 가지고 받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남을 속이면서 속이는 재미로 사는 그 범죄의 현장에서 이 모든 축복이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늘 속이세요. 속이면서 ‘나는 드디어 이겼다. 남 속여먹는 재미가 이렇게 고소하네.’라는 순간 뭔가 뻥, 하고 변화산이 날라 오게 되면 “주여, 나는 여기가 더 좋습니다. 남 속여서 사는 작은 재미, 내가 승리했다는 작은 재미보다도 주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하는 생각이 들 때 그 은혜는 주님의 공로가 됩니다.



이것은 내가 그 은혜를 간직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덮쳐버린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간직한 것이 없는데 주님이 나를 가져버렸어요. 주님이 나를 가져버리니까 그 때부터 신약, 이 고린도전서 6장의 말씀이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겁니다.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오늘 설교제목이 “속아주어라.” 왜? “이제는 거기에 네가 신경 거슬릴 것이 없잖아. 여기가 좋다는데. 여기가 좋다는데, 아직도 ‘네가 속였다. 속았다. 이겼다. 졌다.’ 그런 자기 기준을 적용시키지 말고 주님이 마지막 때 택한 자에게 주는 변화산의 원칙을 그냥 받아버리면 나머지 이 인생살이라는 것은 다 의미 없다.” 하는 거예요.



의미가 없기 때문에 주께서 주님의 의미로 우리 자신에게 덮치는 겁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 나의 모든 것이 다 주님에게 의미 있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드라마를 지나다가 언뜻 보니까 김영란이라는 탤런트가 나와요. 그 장면이 저에게 너무나 확 다가왔어요. 오열하고 통곡하면서 뒤에 있는 커튼을 잡아 내리는 장면이 나왔어요. <압구정백야>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 같아요. 잘 키워놓은 아들이 자식도 있는 과부하고 결혼한다고 하니 놀래서 그런 것인데 거기서 제가 뭘 치명적으로 봤느냐?



커튼을 잡아당기니까 그 커튼이 와르르 내려앉았다는 말이지요. 그게 뭡니까? 바로 이 세상은 세트장이에요. 세트장이기 때문에 김영란이라는 탤런트가 잡아당겨도 소품담당이 다시 설치하면 되거든요. 이 세상 주변의 모든 것은 잡아 당겨서 울고 싶을 때는 울라는 말이지요. 웃고 싶을 때는 또 웃고. 세트장을 잡아 당겨도 주께서는 “내 것을 왜 네가 망치느냐?”하고 묻거나 따지지를 않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연극무대에, 세트장에 가두어진 입장이라는 말이지요. 무너질 때는 무너져야지요. 내려앉을 때는 내려앉아야 돼요. 그래야 드라마가 되니까.



그 탤런트가 ‘아까워라. 이거 망가지면 안 되지.’ 하면서 살살 뭐라도 안 망치는 식으로 하면 이 드라마가 살지를 않아요. 그리고 화가 나서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치워라!” 하면서 다 엎을 때 우리 보기에는 ‘아, 저거 설치한다고 무지 고생했을 것을.’ 하고 걱정되지만 연기를 위해서는 그것을 그대로 확 엎으면서 “치워라!” 해야 돼요. 이 세상은 속고 속이는 겁니다. 그러면 참되다 하는 것은 뭐냐? 참되다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체가 진리를, 진실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 우리가 거짓을 충실히 행할 때, 비로소 그것이 세트장의 커튼처럼 내려앉고 뭉개질 때 비로소 그동안 우리가 가렸던 진실은 그 현장에 나타나는 법이에요.



“내가 이래서 못산다.” 할 때 ‘어, 이게 바로 변화산이구나. 아, 변화산…….’ “나는 도저히 이래서는 못산다. 갈라서자.”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히죽, 웃어야 돼요.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무너지는 이 세트장과 더불어서 ‘내가 그동안 나 살기 위해서, 내 존재의 의미, 내 존재의 목적 때문에 얼마나 주님이 주는 변화산의 은혜를 우리가 가리면서 살아왔느냐.’를 다시 한 번 우리가 깨닫게 하는 기회로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야곱이에요.



어떤 소설에 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어떤 미망인의 남편이 죽은 이유가 있어요. 아내가 다른 남자하고 사귀니까 질투심에 자살하듯이 죽어버렸어요. 남편이 죽고 나니 사귀던 남자와 결혼하면 되겠지요. 남자는 이제 걸릴 것이 없으니까 결혼하자고 졸라댈 때 여자가 결혼을 안 해줘요. 왜? 죽은 남편에게 너무 미안하고 또 예의상 ‘나 때문에 죽었는데 내가 결혼할 수 있느냐. 나는 결혼 못하겠다.’라고 상대방 남자를 속여요. 왜 그런가? 내가 이 남자와 결혼하게 되면 이 남자가 또 다른 여자하고 사귈까 두려워서 결혼을 안 하는 겁니다.



마치 외부에서는 이제는 정신 차린, 회개하는 여인으로 비추는 그런 이익, ‘아, 저 사람은 남편이 죽었는데도, 그리고 좋은 사람이 있는데도 결혼 안하잖아. 진짜 이 세상의 진실은 저 여자가 갖고 있어.’라고 남이 그런 소리 하는 그 귀한 것이 나한테 들어 있다고 위장하면서……, 나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복잡해서. 그걸 위장하는체로 정숙한 여인처럼 살아가지만 실은 인간은 자기 외에는 자기를 챙길 누구도 없다는 것을 명심합니다. 그게 야곱이에요. 야곱은 가는 곳 마다 속임을 당해도 ‘속이든 뭐든 내가 알아서 나는 무조건 살아남아야 돼.’ 그게 진실한 야곱이었습니다.



그 야곱을 주께서는 구원해 내십니다. 바로 나밖에 없다는 그것이 가장 구원의 순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야만 오직 주님의 공로만,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되어서 하늘나라 갔을 때에 주님께만 영광 돌리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주님만 보면서 진심으로 좋아하는, 주님 주위를 늘 돌고 또 도는 기쁨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에 구원은 우리가 지식으로 챙기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우리 본색이 다 노출되는 그 현장에서 다시 한 번 십자가 기준으로 구원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제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임수란 바로, 자기 안에 남들이 원하고 있는 바가 들어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에게 꼭 필요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으면서 세상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쉬지 말고 타인을 속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자기를 속이려는 사람에게 큰 양보와 배려를 베풀어서 타인으로 하여금 더 이상 나는 상대를 속이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되어 이로서 형제로 다시 통합을 이루려는 원대한 양보를 실천에 옮기는 사람으로 비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태도로 인하여 상대는, ‘나는 늘 당신을 속이는 자’라는 것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는 전략이 성립합니다. 즉 “나는 당신이 기대하는 착한 사람, 늘 양보할 정도로 상대를 배려하는 그 귀한 품성을 이미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라는 기대를 유지하게 되는 그런 속임수를 발휘하게 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실천력으로 형제와 형제를 통합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담을 정신적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그 어떤 경우라도 그 모든 것이 자기 잘남으로 질적 변화가 일어나며 그 업적은 자아 정체성 창고에 보관이 됩니다.

그런데 바로 사람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로를 위하여 소중하게 쓰일 재료가 됩니다. 구약에 그런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창세기 27장에서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하여 형에게 돌아갈 축복을 자기 것으로 돌려놓는데 속임수를 사용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야곱의 속임수로 넘어갔고,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차라리 그런 야곱을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도리어 속임을 당하는 하나님’이 바로 자기 백성을 위해 대신 희생당해야 하는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마저 속이는 현장이 하나님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계속해서 관여하여 야곱으로 하여금 라반 삼촌에게 속임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 와중에서 야곱은 지지 않고 맞받아치면서 속임수와 속임수의 배틀이 이루어지는 야곱 인생을 하나님이 진행시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얍복강가에서 밤에 찾아갈 때, 야곱은 자신의 속임수 있는 인생 전체를 자신이 자기를 지키는 유일한 방식으로 확정된 티를 유감없이 발휘해서 낯선 방문지와 죽도록 밤새 싸우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야곱입니다. 즉 인생이란 바로 궁극적으로 본인이 아니라 아무도 지켜 줄 위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야곱이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옛적 살던 동네입니다. 이 동네에서 우리는 자신의 진면목을 되풀이하면 주님의 용서하심을 되풀이하면서 증거하게 됩니다. 우리의 위선적 가면이 환경과 더불어 원치 않고 무너져 내릴 때, 비로소 우리를 지켜보신 낯선 시선을 느끼게 됩니다.

마태복음 17:4에 나오는 변화산 기적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소감을 밝힙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더 이상 속고 속이는 것조차 의미없는 세계에서 성도는 죽기 전부터 이미 죽은 자의 삶을 고백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 위선없이 살지 못하고 남에게 자신이 마치 존재할 가치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기준인 십자가를 늘 새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3-24 05:56 
33강-고전 6장 6-8절(속아주어라)1503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6장 6-8절입니다. 신약성경 268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6:6-8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속이는 문제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진실한 것을 따로 챙기고 있다는 이것을 분명히 해주는 겁니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그 진리라는 것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누구냐, 형제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진리를 믿기에 그 진리가 주님에게 있기 때문에 예수님 빼놓고 인간과 인간, 교인과 교인, 성도와 성도 사이에는 뭐가 교류되어야 하느냐하면, 진리만 교류되는 것이 합당하지요. 이 진리문제에 대해서 이미 정답이 나와 있는데 어떻게 마치 정답을 모르는 것처럼 진리를 거부하는 세상 재판관 앞에서 “진리를 우리에게 정해주세요.”라고 설 수 있느냐고 답답해하는 겁니다. “그러고서도 형제냐? 예수님의 형제고 너희들끼리 형제냐?” 묻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거기에 대해서 반발하기를, 재판과 송사에 대해서 반발하기를 “물론 주님이 진리지요. 하지만 저의 재산 손해 봤습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대꾸가 있을 것이 뻔합니다. 나는 바르게 했는데 저 형제가 나를 속였습니다. 내 것 손해 봤으니 받아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송사했습니다. 재판의 권력은 판사가 갖고 있으니까 제 권리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네가 진리를 아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반영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진리십니다.” 해놓고 실상에서는 전혀 진리가 먹히지를 않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뭔지 알아? 진리라는 것은 예수님의 진리가 너희 생활 속에 파급이 되어야 너희는 하나하나가 주님의 형제라고 인정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 진리가 뭐냐?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하는 겁니다. 차리라 속는 것이 낫다. 숫자 얼마 안 되는 우리 교인들 같으면 설교자가 심적인 부담이 안 되는데 서울의 사랑의 교회나 늘 소송이 일어나고 있는 그런 교회 가서 이런 설교 할라치면 사람들은 예수 믿는 변호사 찾고 예수 믿는 판사 찾는다고 바빠요. 그러나 재판에서 배정을 함부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옛날에 일어났는가?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형제라는 것은 성도 본인 나름대로의 자기의 가치나 의미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다 아시고 구원을 해줬는데 우리는 따로 나름대로의 나의 가치나 의미를 챙기려 하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왜 나에게 손해를 주느냐? 나도 가만있을 줄 아느냐? 같은 교인이지만 소송해야 되겠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것은 어디서부터 생각되느냐?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만 이 세상에 존재의 의미를 갖고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은 우리한테는 존재의 이유가 없고 목적도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목적이 있는 삶, 목적이 이끄는 삶은 없습니다. 속임수가 언제부터 시작되느냐 하면, 바로 나한테 어떤 존재의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오해하는 데서부터 남을 속이기 시작해야 되고 또 속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아무리 살아 보세요. 우리는 왜 사는지, 왜 오늘 이렇게 살아가는지의 이유를 우리에게서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발견할 수가 없고 가질 수가 없습니다. 깔끔하게 이야기해서 우리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는 이유나 의미가 없습니다. 아예 인생의 목적이나 존재의 의미 같은 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왜 그래야 되는가? 그걸 코페르니쿠스의 발상의 전환이라 하는데요. 옛날에는 태양이 지구주위를 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옛날 중세 때는. 그 당시 한국에서는 그런 것 신경 쓰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말하기를 태양이 있고 별이 중앙에 있고 주위를 지구가 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큰 발상의 전환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고 예수님이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중앙에 있고 우리가 그 주변을 돌고 있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 18절에 나와 있어요.



세상 모든 변화는 다 예수님을 위해서 있지 우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로마서 14장에 보면, 우리가 살아도 혹은 죽어도 주를 위해서 살기도 하고 주를 위해서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에스겔 24장 18절의 이런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에스겔의 아내가 졸지에 죽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악에 받쳐서 막 하나님께 대들었을 거예요.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는데 사랑하는 아내를 데려가게 되면 내가 무슨 의욕을 가지고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까?” 하고 악이란 악은 총동원시켜서 대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에스겔은 담담합니다. 왜? 자기가 태양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태양이 아니거든요. 나는 별이 아니고 나는 태양을 도는 행성에 불과합니다. 이 발상의 전환이 되는 사람을 가지고 성도라, 형제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본문 고린도전서가 신약이잖아요. 여러분은 그냥 보지만 이 본문이 신약에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구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 있어요. 성경 후반부에 있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신약이 너무 어려우니까 앞으로 신약 하지 말고 구약을 설교해 달라고 하는데……, 왜 그런가? 이 신약은 마무리, 끝 지점에 나오는 말씀들이에요. 끝 지점이라 하는 것은 더 이상 시간을 지연할 아무런 이유가 없이 모든 것이 마무리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끝 지점에 나올 예수님의 형제, 예수님의 몸, 지체라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미 죽음 속에 갔다가 튕겨져 나온 사람이에요. 그러니 죽기 전에 이미 죽음 이후의 삶을 사는 사람을 가지고 형제라,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신약이에요. 그런데 신약을 볼 때는 죽음에 의해서 튕겨져 나와야 하는데 아직 튕겨져 나온 일이 없이 아직 살려고 하는 사람이 그냥 신약을 보니까 성경을 봐도 전부 육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신천지의 요한계시록 해석이고 그게 육적인 해석이 되는 겁니다. 살아보려고 하는 것. 이미 죽어버렸는데 뭘 살아봐요? 이미 죽어버렸는데.



구약은 선언이고 신약은 성취에요. 구약에서 “네가 십계명을 어기고 범죄 하면 죽는다.” 했고 신약에서는 “너는 그래서 죽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죽음을 성취시킨 거예요. 우리가 무슨 목적이 있고, 무슨 목적이 이끄는 삶이 있고 무슨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까? 이미 죽은 자로서 튕겨져 나왔는데요.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게 되면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냥 돌아가는 회전목마에 불과합니다. 회전목마까지 갈 것도 없이 어린애들 놀이터에서 빙빙 도는 것 타고 돌아보세요. 아무리 돌아봐도 주변 환경이 그냥 반복해서 돌 뿐이에요.



어떤 사람은 20년 돈 사람이 있고 30년, 30년은 별로 없다만, 40년, 50년, 60년, 70년, 80년, 지금 80년 되신 분이 계시다고요. 백날 돌아봐도 풍경이 똑같아요. 사는 것이 거기서 거기고 똑같아요. 어떤 촌에 있는 할머니, 경상도 사는 할머니인데 90평생 동안 제주도 한 번 안 가봤답니다. 90년 동안 살았어도 누가 데려가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감자농사만 짓고 사는 거예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냥 뺑뺑이 도는 겁니다. 피겨선수가 그 자리에서 도는 것처럼. 대통령 바뀌어도 마찬가지고 국무총리 바뀌어도 마찬가지고. 국무총리 이름도 몰라요. 이 완구인지도 몰라요. 옛날 어릴 때는 장관 이름 다 외웠습니다. 지금은 외워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요. 맨날 바뀌니까. 보던 풍경 그대로에요.



인생이 이 땅에서 아무리 행복하니 불행하니 해도,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고 청룡열차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도 보던 풍경이 맨 거기서 거기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께서 마지막 때 일을 벌였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일은 네 체제 안에 담기지 않는다는 거예요. 네가 주님 주위를 도는 하나의 행성처럼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이미 죽은 자로서 다시 이 세상에서 파견근무 들어오는 겁니다. 보통 우리 상식에서는 화장실이나 문을 열 때 닫힌 문을 노크하잖아요. 신약에서의 성도는 닫힌 문을 노크하는 것이 아니에요. 열린 문을 노크하는 거예요. “실례합니다. 케이블에서 왔습니다.” 케이블 기사가 들어오듯이 이미 열린 문, 문을 열어놓고 열린 문에 들어가는 거예요.



거기 들어가 보면 옛날 자기가 구원 받기 전에 놀던 동네에요. 다 알아요. 왜 술 먹는지 알고 왜 담배 피우는지 알고 나이트클럽에 왜 가는지도 알고, 다 압니다, 다 알아요. 그래서 술 끊고 구원 못 받아요. 그걸 이미 알고 있어요. 담배 끊는다고 구원 못 받아요. 나쁜 짓을 끊는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어떤 인간이 어떤 노력을 다 해도, 교회 다니고 목사 장로가 되어도 구원 못 받는다는 것을 이미 안 사람이 다시 교회 다녀야 됩니다. “실례합니다. 아이고, 쓸데없는 짓 하고 있네.” 이런 식으로. 구원 받은 자의 여유? 구원받은 자의 여유로 가야 돼요.



이게 바로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 “속이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아니하냐.” 하는 이 대목을 육신으로 해석하지 말고 신약 때 성령 받은 영으로 해석돼야 돼요. 육신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형제가 속이더라도 이미 너는 가진 자니까 차라리 속아줘 버려라. 그러면 그 형제와 네가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 몸을 이룰 것이 아니냐? 참는 사람이 이긴 자다. 그렇게 생각해라.” 그게 바로 육신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나 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절대로 인간이 양보한다고 해서 그 사람과 통합되지 않습니다. 형제로 하나 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네가 차라리 속아줌으로 말미암아 저쪽 상대방이 나를 속일 때 ‘나는 저 사람을 속여도 저 사람은 나를 안 속이는구나.’ 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억울한 나는 너를 안 속여도 그동안 너는 나를 속여 왔어.’ 하고 안심 푹 놓게 해줘야 그 다음부터 내가 마음 놓고 저 사람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영적인 해석이에요. 무슨 말인지 나도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할 때 너라는 존재는 매일 같이 속지 아니하면 너는 살 수 없는 인간으로 이미 확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속이지 않는 분은 주님 한 분으로 족하지 너까지 속이지 않는 사람으로 행세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주님 앞에 나타나지 아니하면 너는 바르게 산다고 우길 사람이야. 하지만 네가 너를 보는 기준은 마치 네가 중심이고 주님이 태양 주위를 돈다는 발상인데 제대로 된 발상, 주님이 중심이고 우리가 돈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에 의해서 자기 자신은 늘 속이면서 살아야 된다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죽고 난 뒤에 감옥에 있으면서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그걸 저는 패러디해서 “우리는 매일 속이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습니다.”



사람이 왜 남을 속여야 되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불가능한, 우리가 할 수 없는 신적인 말씀, 율법이지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지요, 그 법을 우리 속에 집어넣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성취할 수 없는 요소가 우리한테 잠식되는 순간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고 그야말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괴물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 속이지 않아서 구원 될 이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그 말입니다.



신약에 와서 이미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있어요. 거기서부터 남을 속일 때 어떤 취지로 속이느냐 하면, 남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귀한 것이 마치 나에게 있는 듯이 행세하면서 남들을 속여 나갑니다. “너희들 나 무시하지 마라. 너희들이 찾고 있는 것이 나한테 있다.” 이런 식으로 속여 가는 거예요. 그게 남들에게 의미가 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마치 너희들이 원하는 그 귀한 것이 나한테 있는 것처럼, 따라서 너희들이 나에게 잘해주면 너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고 못해준다면 너희만 손해지, 라는 식으로 행세하는 그 보람으로 인생 살아갑니다.



그게 뭐냐? 그게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억지로 만들어낸 존재의 의미에요. ‘내가 사는 존재는 네가 있기 때문이다.’ 김 종환이가 이야기했어요. 존재의 의미란 뭐냐? “너희들이 원하는 것이 나한테 있기 때문에 나를 사람으로 대우해줘. 부탁이야.”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없어요. 없으면서 그런 식으로 자꾸 기어 붙어야 돼요. 그렇게 자기를 위선하고 위장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괴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래야만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는, 주님의 자기의 명예와 관련되어서 이 신약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해라. 왜? 너는 당해도 싸니까.” 그게 정답이에요. 오늘 본문의 정답. “참아라. 참으면 언젠가는 너에게 감동이 올 거다.” 그게 정답이 아니에요. “내가 양보할게. 그래, 네가 이겼다.” 이렇게 돼버리면 자기를 사기 처먹은 사람이 말하기를 “비록 네 돈은 처먹었지만 저 사람은 인간성 하나는 좋더라.” 이렇게 되고 그리되면 “내가 인간성 괜찮은 사람 아는데 나한테 사기당해 놓고 재판도 포기하고 ‘너나 잘 먹고 잘 살아라.’ 해서 나한테 없는 게 그 사람한테는 있어.”라고 내가 그 쪽을 속이는 셈이 되잖아요. 참 복잡합니다.



그렇게 해서 소설을 써가지고 “네가 아무리 이겼지만 나는 너보다 더 훌륭해. 우수한 존재라고.”라는 것으로 그 상황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유지하려고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본인이 태양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이 필요치 않아요. 자기가 잘났는데 자기가 구원하지 왜 예수님이 필요하지요? 그게 무슨 죄인의 괴수에요? 잘남의 총수지.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주께서 신약에서 선언합니다. 선언입니다. 선언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 성취는 주님이 하시고요. 잊지 마세요. 선언은 주님이 하시고 성취도 주님이 하시고.



선언한대로 하시는데 그 선언에서 성취로 바뀔 때에 내가 정하는 기준을 빼버리고 주님이 주신 기준을 집어넣습니다. 그 대표적 기준은 뭐냐? 우리가 창안한 게 아니에요. 그 기준은 선악과입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네가 죽으리라. 그 기준은 우리가 만들어낸 게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파고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일방적으로 죄인 돼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가 우리 죄를 용서하려고 죽은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우리로 죄 짓게 해서 십자가 죽으신 예수님만의 공로를 높이기 위해서, 곧 죄를 짓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그 말씀을 주신 겁니다. 왜? 주님이 태양이기에. 우리는 태양인 주님을 도는 하나의 지구에 불과해요. 그래서 내 중심으로 내 의미를 생각하면 안돼요. 반대로 생각해야 돼요.



우리는 남을 속이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남을 속여야 돼요. 그 속이는 현장이 뭐냐? 고된 노동의 현장입니다. 고된 노동의 현장에 우리는 던져져서 속이는 것에 점차 단련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속임의 달인이 되는 거지요. 애들은 속이는 것도 유치해요. 빵 먹지 말라고 했는데 빵 먹어놓고 엄마가 “빵 누가 먹으라고 했어?” 하면 “엄마, 나 빵 안 먹었어. 동생이 먹었어.” 하는데 입 주변에 온통 허연 빵 가루가 묻었어요.



속이는 난이도가 높을수록 이 세상에서는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에요. 감언이설로 속이는 사람치고 인간성 나쁜 사람 없습니다. 제 말 잘 들어야 돼요. 잘 속이는 사람은 다 인간성이 좋아요. 그런데 꼭 어설프게 속이는 사람, 노동의 현장에서 속임수에 숙달되지 못한 사람은 직접적으로 속이려 들기 때문에 후안무치하달까, 짐승 같은 인간으로 취급당해요. 그래서 이 땅에서 가장 비판적인 사람이 인간성 나쁜 사람이거든요. 성경에서 제일 인간성 나쁜 사람이 예수님이고 인간성 제일 좋은 사람이 가룟유다입니다. 안 그런 척 할 수 있는 노하우가 그만큼 숙달되어 있기 때문에. 얼마나 양심적으로 인간성이 좋았으면 자살을 다 해요.



타인으로부터 내가 얼마나 가치 있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난이도를 조절하고 그 수완을 계속해서 개발해 나갑니다. 사람이 혼자 못사는 이유는요, 계속 자기가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은 자기 가치를 자랑질 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졌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사람이 못살아요. 꼭 누구를 만나서 자꾸 속여 줘야 돼요.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속이는데서 사는 재미를 느끼는 겁니다. 요즘 우리 어머니에게 새로운 소일거리가 생겼어요. 요양사가 새로 와서 화투를 전도했는데 어머니가 화투치는 손맛이 아주 매워요. 딱, 딱 들어맞게 치는데 잃었던 기능이 다시 회복된 겁니다.



옛날에 비산동에 살 때 가게 하면서 손님 없을 때 하숙생 라디오드라마 들으면서 시누이하고 민화투를 쳤거든요. 제가 증인입니다. 연세가 그런데도 전의 그 손맛이 나온다니까요? 딱딱 소리 나면서 들어맞아요. 화투가 재미있는 이유는 속이는 게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 가르쳐 줘. 상상해. 너희들이 무서워하는 거 내가 쥐고 있어.” 그 순간만큼은, 광 쥐고 있는 동안만큼은 자신을 아주 우수한 존재로 여기는 겁니다. 내가 태양이 되고 내가 바로 별이 되는 거예요. 내가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겁니다.



왜 사람들이 도박에 빠집니까? 남들 비위 맞추는 것이 너무 힘들 때 이제는 도박을 하면서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그 짜릿함 때문에 돈이 들더라도 도박에 빠지는 겁니다. 우리는 왜 도박에 안 빠지는가? 돈이 없어서 안 빠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진실을 이야기할 때,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할 때의 그 진리는 “네가 너 자신을 중심에 놓고 백날 진리를 외쳐봐야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주님께서는 이렇게 합니다. “나를 향하여 속여라. 나를 속여, 나를. 나를 속이는 그것이 너의 구원의 길”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길입니다. “남 속이지 말고 나를 속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속아 넘어가 줄게.” 이게 바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곱이에요. 이삭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자식들에게 복을 전수할 때 거기 공모자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27장 11절에 보면 “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찐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찌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이렇게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눈이 어두워서 마지막 유언을 하면서 “나에게 별미 가져온 자식에게 모든 축복을 다 주겠다. 그리고 나머지는 저주하겠다.” 이렇게 선언을 했습니다. 그걸 듣고 어머니 리브가가 자기가 좋아하는 야곱과 공모해서 아버지를 속이기로 했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 생각해요. ‘도대체 하나님은 눈 먼 하나님 아니야? 어떻게 인간의 어설픈 거짓말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쉽게 속임을 당하느냐?’ 그 말이지요. 거기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진실과 하나님의 진실이 차이가 거기서 나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스스로 희생자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속였던 죄를 죄로 묻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바로 그 방식이에요. 이 사실은 자기를 태양이라고 여기는 인간들의 머리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입니다. 이런 발상은 나올 수가 없어요. 우리가 구원받은 거요? 우리가 예상해서 나온 발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요? 아직도 그것 가지고 안 돼요. 뭐냐? 실제 생활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복음을 알고 난 이후에 남을 속이는 재미로 살아야 될 그런 인간으로 이미 확정되어 있어요. 복음을 알든, 십자가를 알든, 피를 알든 그런 것 안다고 필요 없어요. 우리는 매일 같이 남 속여먹는 재미로 그런 육신을 가지고 살아야 돼요. 그래야 돼요.



교회 좀 나오세요. 교회 나와야 자기가 믿음 좋을 거라고 상대방이 그 속임에 넘어가는 기쁨도 같이 누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을 안 만나게 되면 자기가 진짜 믿음 좋은지 알아요. 그런데 교회 나와서 “와, 집사님 진짜 믿음 좋으십니다.” 하면 내가 믿음이 없는데 믿음 좋다고 하니 얼마나 신납니까? 나 혼자 신나는 모양이지요. 개척교회 하는 목회자가 큰 교회를 꿈꾸는 이유는 많은 사람을 속일 때 적은 수의 사람을 속일 때보다 훨씬 기쁨이 크기 때문에 그래요.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설교 가지고 설득하려고 하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아멘을 하면 저는 뭐가 되는지…….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리브가의 공모에 넘어가줍니다. 넘어가주고 속이는 자에게 축복을 해버려요. 이렇게 되면 후대에 어떤 원칙으로 남는가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따내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라도, 곧 축복을 지향하기만 해서 결과만 좋으면 수단이 어찌되었든 묻지를 않는다는 전철을 남기는 셈이 되잖아요. 그걸 하나님이 유도했습니다. 왜? ‘야, 하나님의 일에서도 속여서 무조건 내 것 만들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진즉에 가졌어야 돼요. ‘나는 이제 하나님께 구원 받았으니 하나님께 무엇으로 보답할꼬? 이제 몸과 마음을 다 해서 헌신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도 않는 소리 하지 말고 ‘야, 하나님마저 나에게 속아 넘어가니 하나님도 만만하다.’ 그런 마음으로 그냥 가야 돼요. 마이 웨이, 죽 나의 길을 그냥 가야 돼요.



가면서 그 중간중간에 야곱의 인생에 개입을 하십니다. 이제는 야곱이 주변 사람으로부터 속임을 당하는 순서가 남아 있습니다. 창세기 30장부터 나옵니다. 길기 때문에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가서 일하면서 임금을 열 번이나 변경 당했습니다. 그 전에는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 라헬인데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삼촌 라반이 야곱을 속여서 “우리 동네에서는 언니 놔두고 동생 먼저 시집가는 법이 없다.”는 것을 내세워서 할 수 없이 진짜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언니와 먼저 결혼하고 다시 라헬과 결혼했습니다. 마트에서 1+1 세일 하듯이 그렇게 결혼했거든요.



야곱은 전부 속임을 당하는 인생을 살아요. 그리고 야곱은 거기에 대해서 또 삼촌을 속입니다. 삯을 자꾸 속이니까 야곱이 제안을 하지요.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자를 가리어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 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 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창 30:32-33)



그렇게 해놓고는 야곱이 자기 양떼에게 이렇게 합니다.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떼의 눈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아니하니 이러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창 30:37-43)



이것은 산업기술에 해당되는 문제지요. 노하우에 관한 것인데 그걸 이용해서 무조건 비실비실한 것은 삼촌 것으로 만들고 실한 것은 다 자기 양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야곱 이름 자체가 속이는 자에요. 속이는 인생, 바로 우리의 본 모습으로 역사 속에 야곱을 먼저 상정시켜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임을 당했지요. 당했는데 그게 하나의 시발점이었습니다. “그래. 속임을 당할게.” 해놓고 야곱과 더불어 사시면서 야곱이 타인에게 속임을 당하면서 축복이라는 것이 속여서 빼앗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속임을 당하는 그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속였으니 내 것이 된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속였더니 그 때부터 속였던 나 자신을 주님께서 재료로 사용해서 진실을 찾는 거예요. 진실이란 사기에서, 생명이란 죽음에서, 모든 것을 다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놓고 허무하다고 다 나자빠질 때 그리고 절망할 때 그 속에서 진짜 예상치도 못한 구원을 끄집어내는 방법을 주께서는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이 신약에 와서 어떻게 되는가? 신약의 마태복음 17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변화산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얼마나 좋았던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 17:4) 미래가 미리 현재 속에 삽입되어 들어온 거예요. 죽음 이후의 사람은 죽기 전에 이미 죽음 이후의 삶을 산다고 했지요. 이 변화산에서 “여기가 좋다.”고 말할 때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시켜도 괜찮았어요.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비로소 그 의미가 다가오지요. 여기 있는 것이 좋은데 남이 나를 속인들, 내가 남을 속이게 되었다고 한들, 내가 남을 속였다고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남이 나를 속였다고 해서 내 처지와 내가 받아야 될 영광이 훼손되는 것도 아닌 그런 세계, 그런 세계를 주께서는 준비해놓으신 겁니다.



‘그 준비된 세계를 우리가 좀 받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생각하지요? 여러분의 그 마음을 가지고 받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남을 속이면서 속이는 재미로 사는 그 범죄의 현장에서 이 모든 축복이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늘 속이세요. 속이면서 ‘나는 드디어 이겼다. 남 속여먹는 재미가 이렇게 고소하네.’라는 순간 뭔가 뻥, 하고 변화산이 날라 오게 되면 “주여, 나는 여기가 더 좋습니다. 남 속여서 사는 작은 재미, 내가 승리했다는 작은 재미보다도 주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하는 생각이 들 때 그 은혜는 주님의 공로가 됩니다.



이것은 내가 그 은혜를 간직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덮쳐버린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간직한 것이 없는데 주님이 나를 가져버렸어요. 주님이 나를 가져버리니까 그 때부터 신약, 이 고린도전서 6장의 말씀이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겁니다.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오늘 설교제목이 “속아주어라.” 왜? “이제는 거기에 네가 신경 거슬릴 것이 없잖아. 여기가 좋다는데. 여기가 좋다는데, 아직도 ‘네가 속였다. 속았다. 이겼다. 졌다.’ 그런 자기 기준을 적용시키지 말고 주님이 마지막 때 택한 자에게 주는 변화산의 원칙을 그냥 받아버리면 나머지 이 인생살이라는 것은 다 의미 없다.” 하는 거예요.



의미가 없기 때문에 주께서 주님의 의미로 우리 자신에게 덮치는 겁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 나의 모든 것이 다 주님에게 의미 있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드라마를 지나다가 언뜻 보니까 김영란이라는 탤런트가 나와요. 그 장면이 저에게 너무나 확 다가왔어요. 오열하고 통곡하면서 뒤에 있는 커튼을 잡아 내리는 장면이 나왔어요. <압구정백야>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 같아요. 잘 키워놓은 아들이 자식도 있는 과부하고 결혼한다고 하니 놀래서 그런 것인데 거기서 제가 뭘 치명적으로 봤느냐?



커튼을 잡아당기니까 그 커튼이 와르르 내려앉았다는 말이지요. 그게 뭡니까? 바로 이 세상은 세트장이에요. 세트장이기 때문에 김영란이라는 탤런트가 잡아당겨도 소품담당이 다시 설치하면 되거든요. 이 세상 주변의 모든 것은 잡아 당겨서 울고 싶을 때는 울라는 말이지요. 웃고 싶을 때는 또 웃고. 세트장을 잡아 당겨도 주께서는 “내 것을 왜 네가 망치느냐?”하고 묻거나 따지지를 않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연극무대에, 세트장에 가두어진 입장이라는 말이지요. 무너질 때는 무너져야지요. 내려앉을 때는 내려앉아야 돼요. 그래야 드라마가 되니까.



그 탤런트가 ‘아까워라. 이거 망가지면 안 되지.’ 하면서 살살 뭐라도 안 망치는 식으로 하면 이 드라마가 살지를 않아요. 그리고 화가 나서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치워라!” 하면서 다 엎을 때 우리 보기에는 ‘아, 저거 설치한다고 무지 고생했을 것을.’ 하고 걱정되지만 연기를 위해서는 그것을 그대로 확 엎으면서 “치워라!” 해야 돼요. 이 세상은 속고 속이는 겁니다. 그러면 참되다 하는 것은 뭐냐? 참되다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체가 진리를, 진실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 우리가 거짓을 충실히 행할 때, 비로소 그것이 세트장의 커튼처럼 내려앉고 뭉개질 때 비로소 그동안 우리가 가렸던 진실은 그 현장에 나타나는 법이에요.



“내가 이래서 못산다.” 할 때 ‘어, 이게 바로 변화산이구나. 아, 변화산…….’ “나는 도저히 이래서는 못산다. 갈라서자.”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히죽, 웃어야 돼요.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무너지는 이 세트장과 더불어서 ‘내가 그동안 나 살기 위해서, 내 존재의 의미, 내 존재의 목적 때문에 얼마나 주님이 주는 변화산의 은혜를 우리가 가리면서 살아왔느냐.’를 다시 한 번 우리가 깨닫게 하는 기회로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야곱이에요.



어떤 소설에 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어떤 미망인의 남편이 죽은 이유가 있어요. 아내가 다른 남자하고 사귀니까 질투심에 자살하듯이 죽어버렸어요. 남편이 죽고 나니 사귀던 남자와 결혼하면 되겠지요. 남자는 이제 걸릴 것이 없으니까 결혼하자고 졸라댈 때 여자가 결혼을 안 해줘요. 왜? 죽은 남편에게 너무 미안하고 또 예의상 ‘나 때문에 죽었는데 내가 결혼할 수 있느냐. 나는 결혼 못하겠다.’라고 상대방 남자를 속여요. 왜 그런가? 내가 이 남자와 결혼하게 되면 이 남자가 또 다른 여자하고 사귈까 두려워서 결혼을 안 하는 겁니다.



마치 외부에서는 이제는 정신 차린, 회개하는 여인으로 비추는 그런 이익, ‘아, 저 사람은 남편이 죽었는데도, 그리고 좋은 사람이 있는데도 결혼 안하잖아. 진짜 이 세상의 진실은 저 여자가 갖고 있어.’라고 남이 그런 소리 하는 그 귀한 것이 나한테 들어 있다고 위장하면서……, 나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복잡해서. 그걸 위장하는체로 정숙한 여인처럼 살아가지만 실은 인간은 자기 외에는 자기를 챙길 누구도 없다는 것을 명심합니다. 그게 야곱이에요. 야곱은 가는 곳 마다 속임을 당해도 ‘속이든 뭐든 내가 알아서 나는 무조건 살아남아야 돼.’ 그게 진실한 야곱이었습니다.



그 야곱을 주께서는 구원해 내십니다. 바로 나밖에 없다는 그것이 가장 구원의 순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야만 오직 주님의 공로만,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되어서 하늘나라 갔을 때에 주님께만 영광 돌리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주님만 보면서 진심으로 좋아하는, 주님 주위를 늘 돌고 또 도는 기쁨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에 구원은 우리가 지식으로 챙기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우리 본색이 다 노출되는 그 현장에서 다시 한 번 십자가 기준으로 구원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제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