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32강-소송(고전6;1-6) 1503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3. 21. 08:43
2015-03-15 12:29:33 조회 : 196         
   소송 150315 이름 : 이근호  (IP:119.18.83.91)   
 
소송(고린도전서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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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3-15 13:17 

소송 

2015년 3월 15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6:1-6 

(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6: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6: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6: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소송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나 “소송을 하라”는 말씀이나 모두 동일하게 복음에서 동일한 의미에 도달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순서상 “소송을 하지 말라”가 우선입니다. 성도끼리 소송을 하되 세상 법정에 나가서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통해서 도대체 성도의 신분이 어떤 신분인가를 정립해야 한다는 겁니다. 

소송하는 일이 결코 신앙과 별개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집회 예배 순서를 통해서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소송거리가 발생되는 그 현장에서도 성사될 수 있다는 겁니다. 현실은 성도가 쉽게 외면해도 상관없는 바깥 세상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의도가 있어 유발시킨 현실입니다. 

이는 곧 실제 현실이 하나님이 내리신 답이라는 겁니다. 이제 성도에게 주어진 것은 ‘어떻게 해서 이런 답이 얻어지느냐’에 대한 질문의 구조를 찾는 일입니다. 즉 답은 벌써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졌습니다. 성도의 입장에서, 이 답에 다른 답을 찾으려고 시도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소송하지 말라’로 이어집니다. ⓐ소송을 하는 것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겁니까? 인간은 ‘나는 이런 것을 잃어버려 억울하다’는 소리를 할 자격자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억울함이 애초에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처음은 그저 ‘흙’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데 있어 무슨 자기 나름대로 요구사항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꾸만 송사하고 소송하고 잃어버린 것에 대해 보상받으려 하는 것은 이미 모든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장애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창조 때, 인간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돌아볼 자격자가 아니었습니다. 

즉 선악과 나무 과실을 탐낼 권리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악마가 찾아들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미래를 미리 당겨서 상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들이 신들처럼 될까봐 의도적으로 신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못 따먹게 했다”는 겁니다. 이런 거짓말이 마치 그럴 수 있다는 식으로 인간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은 이미 인간들이 자기 자리를 떠났다는 말입니다. 

선악과 나무를 따먹고 인간들은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을 것같은 느낌을 시달리게 됩니다. 이게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정신적인 저주성입니다. 즉 ‘잃어버린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잃어버린 자기 것’이 따로 있으리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저 경계선 너머에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다보니 여기서 종교행위가 시작됩니다. 신만이 누리는 천국 창고에서 인간들이 자신이 잃어버려 더 채워할 것이 뭔가 들어 있다는 의욕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신에게 아부해서라도 정작 본인들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오겠다는 심보로 움직입니다. 사람들은 ‘이웃 사랑’에다 잔뜩 기대를 겁니다. 

즉 교회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공간이라서 누구를 만나다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을 혹시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기대하고 교회를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그 내용과 관련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보려고 합니다. 말씀을 준수하게 되면 그 보상으로 말씀 너머에 자리잡은 하늘나라 마트에서 자신이 찾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건강을 잃었다고 건강을 되찾아올 수도 있고, 가정을 잃었다면 가정의 행복을 되찾아올 수 있고, 재물을 잃었다면 재물을 30배, 60배, 100배 얻어올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실제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말씀을 가지고 지적하고 책망하는 공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도리어 인간들을 향하여 소송거십니다. “가져간 내 물건 가져오너라”고 말입니다. 인간들은 선악과 과실을 먹음으로서 모든 세상 의미를 자기 있음으로부터 출발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 둘 의미를 부여하고 그 부여된 의미의 망으로 자신을 둘러쳐놓고서는 그것을 ‘세상’ 또는 ‘참 현실’이라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육신적 망가짐이 진행하는 동안에 거기에서 파생된 ‘잃어버린 사항’들이 자꾸만 늘어나고 깊어집니다. 여지간한 것 가지고서는 만족되지 못하는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현실 자체에 대해 불만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만드시는 현실은 인간으로 하여금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현재 인간들이 기대하는 것이 원래의 자리에서 나올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의 스케줄을 실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린 스케줄만 발현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런 작업의 훼방자들이 바로 죄지은 그 이후의 인간들입니다. “소송하지 말라”는 말씀은 “너희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는 요한복음 17:16의 말씀을 그대로 사실화 시킨 결과입니다. 

도리어 요한일서 3:16의 말씀이 성도에게 적합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하지만 이것을 인간들이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이미 망가져버린 개 같은 성품의 소지자들이기 피의 가치를 무시하고 하늘나라에 무가치한 것만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생애는 택배 상자처럼 늘 찢어져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왜 예수님의 피가 궁극적으로 소중한 지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스케줄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스케줄은 예수님이 이 세상을 두 차례 방문하는 것을 말합니다. 첫 번째 방문목적은 죄를 확정짓기 위함이요 두 번째 방문은 그 확정된 죄에 따라 전 우주가 무르익어주기 위함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을 위한 인간’이란 악마가 조작해낸 상(像)입니다. 나에게 의미 있는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가짜 현실은 매일같이 찢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현장이 곧 주님이 작업하시는 작업장에서 하나님나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만 살면 그것이 곧 인생 성공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주님을 의해서 살고 죽음이 확정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3-16 15:49 
32강-고전 6장 1-6(소송)1503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6장 1-6절입니다. 신약성경 268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6:1-6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사도바울이 교회에 대해서 책망을 하는데 책망하는 내용이 교인들끼리 소송을 했다고 책망을 했고 소송하는 그 판단 자가 교회가 아니고 세상재판정이라는 것 때문에 책망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를 보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들이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을 한다고 우기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이런 거예요.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섬기고 모신다는 그것을 신앙생활로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네가 누구로부터 이런 저런 책망을 받을 때 신앙생활 하고 있는 중이라는 판정을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우상, 잘못된 신들은 우리 자신을 귀빈으로 모셔요. “훌륭하구나. 네가 나를 알아 모시고 그 바쁜 가운데서 나를 섬기다니 기특하기도 하여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받고 찬양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교회 밖의 평소 생활에서 늘 지적 질 하시면서 우리와 접촉하시고 우리를 상관하시는 분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지적받아야 돼요. 오늘 본문에서 소송을 한다는데 지금 소송하는 그것도 문제지만 네가 너의 소송하는 그 재판을 누구에게 청했느냐는 말입니다. 



재판하실 분을 누구로 골랐느냐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재판하실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지금 이 세상이라는 것이 어떠냐 하면, 교회를 공격하거든요. 교회를 공격하는 자들의 안목에다 어떻게 진리를 일임하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그들은 무지몽매해서 교회의 가치를 모르고 교회는 다 쓸어버려야 되고 교회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재판을 맡겨버리면 거기서 나오는 모든 결론은 “그러니까 예수 믿지 말란 말이야.”라는 결론에 도달되거든요.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점 보러 다니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사주팔자를 보고 궁합을 보고, 그런 것과 똑같은 겁니다. 주님을 이용하는지, 주님을 믿는 것인지. 그런 사람들의 그 잘못된 신앙의 특징은 누구한테 지적받는 것을 되게 싫어해요. 교회 내에서 소송이 일어나니까 결국 그 소송하는 것을 통해서 둘 다 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신자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 노출된 겁니다. 소송거리가 생겨서, 서로 소송을 통해서 뭔가 얻고자 하는 그 가운데서 평소에 예수 믿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오히려 공격하는 그쪽과 한패인 것이 그만 노출된 겁니다. 



교회라는 것은 몽땅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현존, 주님의 살아 있음을 노출시키고 보여주는 현장이라고 보면 돼요. ‘우리는 교회 갔다. 교회에 나왔다. 교회는 전세버스다. 따라서 전세버스 타면 나중에 죽으면 천국에 도착한다.’ 그게 아니고 그 전세버스 안에 주님이 타셔서 “네가 이 버스 타기 전에는 너밖에 몰랐지? 너 잘난 맛으로 살았지? 이제는 한 번 보자. 내가 몽둥이 들고 설칠 거야. 너희가 과연 천국 갈만한 사람인지 교회에 와서 매를 맞아라.”라고 제대로 하는 거예요. 



인간이 소송을 한다는 것은 사실은 주님 보시기에는 개들끼리 소송하는 거예요. 소송한다는 것은 둘 다 정신적인 장애자라는 말이에요. 둘 다 개라는 뜻이에요. 어떻게 죽은 사람을 상대로 소송을 합니까? 이미 시체가 되어 있는데. 자기가 펄펄 살아있기 때문에, 자기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서, 자존심과 자존심이 충돌해서 소송이 일어나거든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만들었던 인간이 아니고 뭔가 인간에게 장애요소가 왔어요. 인간에게 정신병적인 요소가 뭔가가 왔어요. 이미 잘못되었어요. 자기 자신이 뭔지를 모르고 뭔가 문제가 이미 있는 겁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따먹지 말라고 했을 때 인간의 대처방법은 간단했어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죠. 저도 거쳐 왔습니다만 고3에게 제일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봄이 왔다는 겁니다. 봄이 옵니다. 봄이 오니 목련이 피네요. 우리 할아버지가 집 앞에 목련을 심었어요. 그 목련이 피면 어찌 그리 청초하고 아름다운지 꼭 육영수 여사나 신사임당 같아요. 너무 단아해. 목련이 피면서 공부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개인집이 아닌 학교, 고등학교 3학년 2반 교실 앞에 꽃이 피었어요. 목련은 그저 보기에 아름답기만 하지 라일락이 피었다고 하면 이것은 그 향기가 공부를 방해합니다. 수능방해. 그러면 교장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위로 잘라버려야지요. 사람들이 죄짓고 난 뒤에 인간은 이미 망가졌어요. 장애자들입니다. 주께서 지적질을 하는 것은 “원래 네 모습이 그 모습이 아니고 본래의 네 자리를 잃어버렸다. 네 본래의 자리를 떠났다.”고 지적하는데 인간은 그것이 짜증나는 거예요. 



그러면 가위들고 어떻게 하는가? 모든 말씀, 잔소리를 다 잘라버리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을 때 인간의 결정적인 대처방법은 뭐냐 하면, 아예 선악과 자체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이게 어디서 자꾸 신경을 거슬리게 해?” 따서 삼켜버리면 이젠 두 번 다시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소리는 없는 거예요. 뭐가 있었어? 잔소리는 없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것을 자유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누가 감히 나한테 지적질을 해? 나는 자유다.’ 마귀가 먼저 그 짓을 했기에 마귀가 한 그 짓을 그대로 인간에게 전수한 거예요. “너는 나처럼 되면 자유롭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아담이 이것을 따먹고 난 뒤에 뭔가 이상해. 몸이 이상해졌어요.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이야기하니까 아담이 자기 입장을 이야기해버립니다. “벌거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벌거벗어서 부끄럽다고. 언제는 안 벗었습니까? 처음 인간 만들 때 인간 만들고 속옷 주고 양말주고 겉옷 줬습니까? 처음부터 벌거벗었어요. 벌거벗은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문제없어요. 벌거벗은 그것이 문제가 있다고 여긴 그것이 문제에요. 왜? 본인에게 뭔가 이상증세가 발생되어서 벌거벗어도 괜찮은데 ‘내가 왜 이러지?’ 이렇게 된 겁니다. 



인간은 뭔가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것을 자꾸 만들어내는 병에 걸린 겁니다. 그게 병이에요. 뭔가 잃어버렸다는 것. 잃어버린 것을 자꾸 찾아가려고 하는 것. 어디서 찾는가? 하나님께서 금지한, 그 금지한 것을 넘어가게 되면 내가 보충해야 될 것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금지’라고 본다면, 그 금지선 너머, 예를 들면 남한이 아니고 북한이 되겠지요, 그 금지선 너머에 뭐가 있는 게, 그 뭐가 있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있다는 생각을 안 하고 나를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나오는 거예요. 



‘내가 분명히 뭔가 놓쳤어. 뭔가는 잃어버렸어. 그래서 행복도 없는 거야. 그러나 뭔가는 있을 거야. 그것마저 얻는다면 나는 만족, 자족해서 행복해질 것인데 그게 어디 있을까? 아마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거야. 아마도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을 거야. 그러면 그것을 건지러 어디로 갈까? 교회로 가야 되지. 혹은 성당에.’ 교회나 성당에 가서 얻을 것을 챙기면 나는 만족을 얻는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장애자에요. 이게 정신병자에요. 처음부터 인간을 위한 것은 어떤 것도 없었어요. 인간을 위한 것이 어떤 것도 없는데 인간이 이미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이 이미 망가지고 난 뒤에는 나를 위한 것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우리를 위한 현실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현실이에요. 내가 챙길 것을 챙기기 위해서 이 현실이 주어진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 모양으로 사는 이것은 이게 답이에요. 우리가 필요한 것은 왜 이 답이 나왔는지에 합당한 질문의 구조가 필요한 거예요. 답이 필요한 게 아니고 ‘왜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부합되고 일치되는가?’ 그 질문을 발견해야 되는데 질문을 찾을 생각을 안 하고 답을 찾을 생각을 하는 거예요. 불교 보세요. 철학을 보고 과학을 보세요. 답 찾기 하잖아요. 답 찾기 하면 안돼요. 



그 답 찾아봐야 나를 위한 답이에요. 존 듀이라는 사람이 “진리가 뭐냐? 진리는 실용적이다.”라고 본 거예요. 퍼스나 존듀이의 철학을 실용주의철학이라고 하는데 진리는 필요 없어요. 우리한테 유용하면 진리라는 그것이 과학적사고방식이에요. “주여, 왜 저는 이 모양 이 꼴로 삽니까?” “그게 답이거든.” 하나님 보시기에 그래야만 하는 그것이 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송을 해요? 소송은 미친 짓입니다. “왜 주님께서 이런 답을 주셨습니까?”라는 질문. 



나로부터 출발한 모든 답변은 전부 다 오답입니다. 잘못된 거예요. 뭔가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소송을 하게 하신 이유는 만약에 네가 소송의 당사자로 나선다면 너부터 진짜 재판관에게 소송당할 각오로 나서야만 소송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8장에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라고 했거든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질질 끌고 왔을 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소송자가 되어서 ‘이 나라에 율법을 범한 이런 자가 있다면 이 여인에게만 저주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옛날 아간의 경우와 같이 이스라엘 내부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그 원칙처럼 우리도 같이 당하니까 우리 내부를 정화하고 청결히 함으로써, 이런 범죄자를 척결함으로써 우리가 집단적으로 하나님께 당하는 일은 없도록 조치해야 한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국가통치이념이었습니다. 이데올로기, 통치이념이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색출하는 겁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저주를 유발시킬 요인들을 색출해서 없앰으로서 다른 사람들이라도 복 받고 살자는 식으로 했어요. 그래서 색출하다 보니 율법을 위반한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서 질질 끌고 온 거예요. 그렇게 끌고 와서는 하는 말이 “간음한 그 여인이나 예수 당신이나 똑같다. 너도 색출해서 체포할거야. 우리의 정당한 율법집행에 대해서 네가 할 말이 있거든 해보라.” 하면서 “율법에 의하면 이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의 의견은 뭐요?” 해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한 겁니다. 그들은 답을 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 바리새인이 꼭 오늘날 우리 같아요. 자기들이 소송당사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지요. 그렇게 하고 땅에 글을 썼습니다. 글 쓴 것을 보니 전부 다 자기에 대한 지적, 자기들의 문제성, 다 자기 이야기거든요. 숨겨지고 들키지 않았던 자기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사람들이 돌을 놓고 다 자기 갈 곳으로 가버렸어요. 저는 이게 문제라고 본 거예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는데 돌로 치려고 한 그 사람들의 죄가 발각되었잖아요. 그러면 그 현장에 있어야지요. 



그 현장을 떠나는 것은 그 사람들이 공부가 안 된다는 것을 핑계로 활짝 핀 목련을 댕강 자르는 것과 똑같아요. ‘피해버리고서 안 보면 그만이지. 지적질 안당하면 그만이지. 말씀 안 들으면 되지.’ 안 들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는 잘난 존재임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돌로 치라고 했을 때 모든 사람이 다 가버렸어요. 예수님이 그것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킵니다. “너를 고소하는 자가 있느냐?” 주님은 눈 없습니까? 다 보고 있었잖아요. 알면서도 물어요. “너를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여자가 말합니다. “다 갔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만 안 갔습니다.” 



그렇게 안 가야돼요. 주님의 지적질,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는 그 말씀이 들려오는 그 현장을 떠나면 안돼요. 떠나면 그 다음부터 자기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사람 앞에서 잘난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 예수님은 소송 안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소송해버려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돌을 놓고 왜 떠나버렸습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는데 죄 없는 자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예수님밖에 없거든요. 이제 그들의 남은 일은 뭐냐? 예수님한테 짱돌로 맞는 일밖에 없어요. 



소송하러 왔다가 진짜 순회재판에 걸려들어서 현장에서 돌로 피투성이 되도록 얻어맞는 일만 남아 있다는 말이지요. 그 일을 하라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가지 말고 주님이 던지는 돌에 맞아서 죽게 되면 그 던진 주님에 의해서 영생 얻습니다. 이게 교회잖아요. 이게 바로 교회! 오늘 본문 보면서 백이면 백 다 이렇게 해석합니다. “여러분들은 형제간에 소송하지 마세요. 세상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소송하지 맙시다.” 이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해석이에요. 



저는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소송을 합시다. 접시를 깹시다. 접시 깬다고 세상이 깨지나? 소송을 합시다. 소송을 해야 우리가 소송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소송하면서 양쪽 다 엉망진창이 되는 가운데서 내가 그동안 ‘나는 남에게 소송을 하면 했지 남에게 소송 당하지는 않을 정도로 괜찮은 인간’이라는 위선이 다 깨어지는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질 당하는 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교회에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현실의 삶속에서, 현실 속에서 진행 중입니다. 현재진행형입니다. 사람은 자꾸 잃어버린 것을 찾고자 하는 겁니다. 이 자아, 이 주체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 자아를 어떻게 보느냐?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는데 어릴 때 자기 앞에 등장한 아빠나 엄마를 통해서 ‘내가 저 사람인가? 내가 저 사람과 같은가?’ 해서 비슷하게 동일시하는 가운데서 그것을 자아라고 여기다가 나중에 좀 커서 사회에 나가서는 자기 동일시가 깨지니까 힘 센 사람에게 맞춰서 산다고 자아를 조정하고 있는 거예요. 



조정을 하다 보니 ‘내가 최고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에 일치가 된다.’ 하고 자기 잘난 체하는 그것을 더 깊게, 인간의 마음 깊숙하게 집어넣어만 되는데 그것이 억압이 되는 거예요. 억압된 욕구를 가지고 무의식이라고 하는데 그 무의식이 나중에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을 코팅한 그것이 주체라는 겁니다. 정신병이란 뭐냐? 억압된 무의식이 신체와 그냥 만나지 않고 이 세상의 윤리, 도덕을 경유해서 만나야 하는데 이 무의식이 곧바로 신체와 만났을 때 그것이 히스테리(신경증)나 정신분열증으로 나온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에서 정신병을 치료할 때 어떻게 하느냐? “네가 나한테 거짓말을 해 봐라.” 거짓말이 되면 그것은 나은 것이고 거짓말이 안 되면 그것은 안 나은 거예요. 왜? 모든 인간은 거짓말 하는 것으로 자기치료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냥 성질대로 살면 못살거든요. 그러니까 위선 떨어야 되고, 가면을 써야 하고, 나중에는 가면을 너무 쓰다 보니까 이게 가면인지 아닌지도 분간을 못해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 살아가는 요령이 되니까 그게 바로 정상적인 거예요. 거짓말해야 되고, 위선 떨어야 되고, 아부해야 되고, 폭력도 행하면서 끊임없이 내가 누군지를 찾아가는 그 경로, 그게 정상이고 “나는 나폴레옹이다.” 혹은 “나는 백설 공주다.”하고 나서면 그건 정신병자에요. 무의식이 신체와 너무 직접적으로 만났어요. 



정신분석학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고 자꾸 그걸 찾으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 잃어버린 것을 찾는 방법이 뭐냐? 소송을 통해서 찾는 거예요. 누구에게 자꾸 시비를 걸어서 “내 것 네가 가져갔지? 내놔라.”하는 식이에요. “내 것 네가 가져갔지?” 하니까 꼭 치매현상같이 느껴져요. 어떤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내 금반지 내놔라.” 이런 식이거든요. “내 것 네가 가져갔지?” 우리는 한시도 소송 안하고 지나는 적이 없어요. 매일같이, 3월 15일, 3월 16일, 계속 할 거예요. 매일같이 소송하며 살아갑니다. 내놓으라고. 



교회 오는 것도 하나님 보고 내 것을 내놓으라고 오는 거예요. “내가 교회 왔어요. 잃어버린 나의 자존심을 어서 회복케 하옵소서. 30배, 60배, 100백로 갚아주옵소서.” 맡겨놨나? 맡겨놨어요? 제가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돌로 저를 쳐주옵소서.” 그 현장에 있어야 할 것인데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교회 와서도 새네. 교회 와서도 또 내놓으라는 거예요. 거기에다가 목사는 뭐라고 설교하는가 하면, “여러분은 이웃사랑을 하세요.” 그러니까 이웃사랑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웃, 친절한 사람, 친절한 사마리아사람을 통해서 나의 잃어버린 것을 주시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야기하기를, 어떤 성자(주교)가 있는데 그 성자가 외투를 입고 가다가 노숙자가 보였어요. 그 노숙자가 입던 옷을 벗겨서 자기가 입고 자기가 입고 있던 좋은 옷을 그 노숙자에게 벗어줬다는 거예요. 그게 이웃사랑입니까? 거지 옷을 자기가 입고 자기가 입고 있던 좋은 옷을 거지에게 벗어주는 그것이 이웃사랑이에요? 고스톱 하고 있으면 같이 쳐주는 그것이 이웃사랑이에요? 잠자리 해달라고 하면 같이 자주는 그것이 이웃사랑이고 재능기부에요? 나는 고스톱을 못 쳐서 재능기부를 못하고 있네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채워주는 그것이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그 취지가 뭐냐? 내가 이렇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게 되면 정작 내가 원할 때 주께서 30배, 60배, 100배로 갚아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선교회비 내세요! 선교회비 내세요!” 하면 선교사라 하는 것은 불쌍한 사람이고 그 불쌍한 사람을 선교회비로 도와주게 되면 언젠가는 내가 불쌍할 때……, 항상 인간은 자기가 최고로 불쌍해요, 내가 그만큼 해준 그것이 나에게 결국 돌아오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물위에 뭘 던지면 되돌아온다는 그 전도서의 말씀이 그런 뜻이 아닌데도 전도서말씀까지 인용하면서 그래요. 



뭔가 던지면 그것이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다는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불교의 교리에요. 불교의 모든 교리는 ‘업보가 쌓이면 그것이 나중에 실적이 되어서 내가 원할 때 내게로 온다.’ 하는 겁니다. 보험 들어놓는 거예요. 그건 보람상조입니다. 불교가 보람상조에요. 070…… 어쩌고, 그건 이순재보험이에요. 자기 얻을 것만 생각하면서 이 본문을 볼 때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재판할 때 세상 재판은 하지 말고 교회 내에서 재판하라는 말이구나.’ 그러면 어디로 가야돼요? 큰 교회 가게 되면 반드시 판사나 변호사 한 두 명은 있을 거예요. 법무사도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 사람들에게 재판받아야 됩니까? 같은 교인이니까. 이 본문 내용은 ‘너는 소송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주님이 재판한다는 것만 찾지 마시고 주님이 어떤 안목에서, 어떤 눈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보시는가를 봐야 돼요. 요한복음 17장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천사도 판단”한다고 되는 겁니다.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경우에도 피고석에 앉는 경우는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네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해도 너는 더 이상 피고가 되지 않는다. 왜? 이 주님이 너희들을 이 세상을 재판할 판사, 검사, 사법연수원출신으로 이미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네 자리가 이미 재판할 자리지 그 밑에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혹 김 집사의 돈을 박 집사가 사기쳐먹었다 했을 때 그 일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어? 돈을 안 갚아? 소송해야지. 왜? 나는 얼마 전에 돈을 잃어버렸으니까.’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거예요. 잃어버린 것. 그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나는 행복해지고 만족하니까, 나는 그 정도 되는 자존심을 유지해야 할 자격이 있기 때문에. ‘잃어버렸으니까 나는 재판을 해야 해.’라고 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무엇을 놓쳤느냐 하면, 돌을 맞아야할 현장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어요. 



다시 말해서 정답을 놓쳤어요. 돈을 사기당한 그것이 정답인데 그 다음부터는 돈을 찾는 것이 정답이라고 하는, 자기로부터 정답 찾기에 나서는 겁니다. “주님이여, 왜 사기를 당하게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나는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었다. 나는 너 같은 인간을 위해서 내 생명까지 잃었는데 아직도 네 목숨은 붙어 있잖아. 아직도 많이 남았네. 아직도 여유만만이네. 가진 자의 여유인가?” 이런 식으로 할 때 ‘아하, 내가 주님 앞에 소송당해야 마땅한, 죄로 지적질 당해야 마땅한 죄인이구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진행되고 있는 신앙생활이라는 거예요. 


소송을 하지 마세요, 라고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송을 하세요. 그리고 소송하는 가운데 엉망진창이 되세요. 그게 숨겨놓은 진짜 주님의 정답입니다. “나는 원래 그렇게 살아야 할 마땅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소송 안당하고 또 소송 할 일도 없이 살아온 사람은 백설 공주밖에 없어요. 이 백설 공주는 동화책 보면서 어린 마음에 ‘백설 공주가 바로 나다.’ 철 없게도 “내가 백설 공주 일거야. 내가 언젠가 스무 살 때쯤이면 하얀 말 타고 누군가 와서 몸 아파 누워 있는 나의 볼에 뽀뽀를 해주겠지? 그러면 내가 벌떡 일어나서 ‘누구신지요?’ 라고 묻게 되면, ‘나는 이웃나라 왕자입니다. 이제 나와 결혼합시다.’라고 하겠지.”라는 그런 것, 그 유사성을 자기와 같은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성장해서 백설 공주는 고사하고 대학 나와서 취직도 못하고 있을 때 백설 공주는 어디 있습니까? 없잖아요. 없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잃어버린 것, 내가 백설 공주가 되어야 마땅한데 내가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그 잃어버린 것을 얻기 위해서 교회 나와서 드럼치고 노래 부르면서 열정적으로 “주여, 주여!” “뭘 원하는데?” “잃어버린 것을 주옵소서.” “뭐?” “백설 공주 왜 안 되게 합니까? 속이 이루어주소서, 속히!” “맡겨놨나?” 백설 공주 맡겨놨어요? 



이거 장애자입니다. 우리가 주님한테 소송 거는 거예요. 우리가 성경을 아름다운 목련으로 보고 다 칼로 잘라버려서 성경을 안보잖아요.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한 1서 3장 16절에 이런 단아한 목련이 피어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형제를 보고 소송을 해요? 요한 1서 3장 16절에 보면,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듣기 싫어요? 매직으로 지우든지 가위로 이 대목의 목련을 잘라버리면 그만이에요. “난 안 들었습니다. 난 그런 것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면 그만이에요. 그것도 귀찮으면 아예 성경을 덮어버리면 돼요. 아예 안 보면 되지요. 그래서 아예 안 보잖아요. ‘내가 주님인가? 내가 죄인인데. 맨 날 이 목사님이 죄인이라고 하는데 내가 신나게 죄인 해보자.’ 죄인이라는 이것이 무슨 자랑이 되어버렸어요. 



도대체 우리는 죄라는 것도 몰라요. 뭐가 죄인 줄도 몰라요.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모든 원인이, 소송이 일어나고 뭐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모든 원인이 뭐냐? 내가 여기 있다는 이것이 문제가 되거든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니까 “제가 벗었으므로 부끄러워서 숨었나이다.” 내가 있으니까 내가 있다는 거기서부터 모든 의미가 시~작! 모든 것이 나에게 의미되는 쪽으로 긁어모으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팍팍 도와줘서 나에게 의미가 되는 것.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있다’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스케줄이 있을 경우에만 그것이 ‘있다’가 되고 하나님의 스케줄이 없을 경우에 그것은 죽은 자가 돼버려요. 이게 성경이에요. 지난 수련회에서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창덕궁 마루에 격자창에 비친 그림자가 어른거리면 졸지에 그 매끈하던 마루에 격자무늬가 출렁이면서 생기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도 말한 대로 우리는 하나의 습자지고 거기에 주님의 디자인이 있는 거예요. 주님의 스케줄이 있을 때만 비로소 ‘있다’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스케줄이 뭐냐? 주님께서 이 땅에 두 차례 방문했거든요. 왜 두 차례 방문했나? 첫 번째는 뭐냐? 인간은 죄를 몰라요. 죄를 모르기 때문에 왜 죽는지, 왜 심판받는지 이유를 몰라요. 죄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를 확정짓기 위해서 한 차례 왔고, 두 번째 오시는 것은 그 죄의 기준에 따라서 죄를 무르익게 하기 위해서, 죄를 숙성시키기 위해서, 지난 시간에 누룩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 누룩처럼 죄가 확장되기까지 대기하고 있다가 그 첫 번째 십자가 기준에 의해서 심판하기 위해서 오시는 거예요. 



주님이 왜 그래야 되는가? 주님만 있음이거든요. 주님만 계심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에요. 소송, 의미, 그런 것은 우리가 이미 범죄하고 난 뒤에 그걸 다시 나의 주체 상으로, 정체성으로 다시 가져오니까 평생 동안 그런 오답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존 듀이의 철학처럼 늘 질문하는 것이 ‘나에게 어떤 것이 이익일까? 나에게 어느 것이 유리할까? 이것이 나에게 행복을 얼마나 줄까?’ 이것은 수녀나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나 장로도 마찬가지고. ‘내가 주를 섬기면 나에게 행복이 찾아올까?’ 벌써 이 심보가 더러운 심보에요. 



“주여, 돌로 쳐주옵소서.” 이렇게 수녀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미생>이라는 드라마처럼, 사귀는 남자가 사법고시 준비한다고 뒷바라지 해주다가 사법고시 되고 나니 나 몰라라 했을 때, 그 여자는 뭔가 잃어버린 게 있다는 거예요. 현실상으로는 그것이 날아가 버렸어요. 사귀던 남자가 사법고시 합격하고 난 뒤에 재벌 집 딸하고 결혼해 버렸어요. 졸지에 닭 쫒던 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 어디로 가느냐? 수녀원에 갔어요. 수녀원에 왜 갔습니까? 세상에서 잃어버린 것을 하나님을 통해서 찾기 위해서 간 거예요. 내가 보기에는 정신병자입니다. 거기 가서 된장 만들고 참기름 만들고. 



진짜 수녀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하신 주님한테 돌로 맞아야 되는데 돌로 맞을 거면 굳이 수녀원에 갈 필요가 뭐가 있어요? 수녀원에 가기 전에 이미 남자친구한테 돌로 맞았는데. 남자친구한테 차였을 때 거기가 얼마나 멋진 신앙의 장이 됩니까? 이 세상이 수도원이고 이 세상이 수녀원입니다. 괜히 유니폼 입을 필요 없습니다. 옷 자체가 의미 없어요. 옷이라 하는 것의 의미는 뭐냐? 자기의 신분과 계급을 자랑질 하려고 입는다고 했어요. 옷의 심리학에서. 물론 제가 넥타이 맨 것은 복음을 위해서 맨 거지만. 아이고, 거짓말도……, 저는 정상입니다. 



우리는 구시렁구시렁 하면서 “내가 이렇게 하면 뭘 얻겠습니까?” 할 자격조차 없어요. 없는데 있게 하신 것은 뭐냐? 주님의 그 합류된 뜻, 주님의 안목과 현실이 졸업식에서 밀가루 뒤집어씌우듯이 완전히 우리에게 퍼부어졌어요. 퍼부어지니 이미 우리가 죽은 자가 되어버립니다. 죄를 지어서 죽은 자가 아니고, 칼로 사람 찔러 죽여서 죽은 자가 아니고, 살인이나 간음해서 죽은 자가 아니고 이미 선악과를 따먹어서 모든 관심사가 나로부터 출발하는 그 자체가 죽어 마땅한 죄인이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죄라는 것은 첫 번째 주께서 이 땅에 왔을 때에 죄를 알아요. 그게 뭐냐? 이미 정답이 십자가에요. 나머지 우리가 사는 것은 그 답이 왜 답일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죄짓고 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짓고 난 뒤에 곧장 나서서 후딱 반성을 하고 회개를 해버려요. 왜? 그것은 주님의 영광이 아닙니다. 혹시 반성하고 회개하게 되면 정작 내 육신의 욕구가 놓쳐버린 어떤 것, 어떤 잃은 것이 십자가 저 건너편에 마트 같은 것이 있어서 내가 골라잡을 자격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곳도 하늘나라에요. 교회만 하늘나라가 아니고, 교회가 하늘나라라는 말이 참 부끄럽다만, 교회만 하늘나라가 아니라 온 세상 어디든지 다 하늘나라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어디든지 돌 가지고 칠 수 있는 현상들이 생겨나는 장소이기에 어디든지 하늘나라가 되는 겁니다. 주변에 피어 있는 말씀의 목련화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예 가위들고 설치면서 나타나기만 하면 다 끊어버려요. 주의 요구는 끊어버리고 내 요구는 계속해서 확장시키고 그것을 현실이라고 우기는 것은 죄에서 나온 나의 의미화작업이에요. 



나에게 의미가 되는 식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싶고 장악하고 싶은 겁니다. 젊은 사람들이 선교단체에서 선교 나갈 때 못마땅한 것이 그게 나폴레옹의 정복용이거든요. 칭기스칸의 마음이라는 말이지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할 일 많다고 한 그 사람이 얼마 전에 병원에 있다가 나왔는데, 김우중, 뭐예요 그게? 그 사람이 의미 있다고 한 그것 때문에 다른 투자자들은 망해버렸는데? 자기 혼자 의미 있어요, 자기 혼자. 그 사람들이 교회에 헌금도 많이 했어요. 대한생명회장 그 사람도 교회에 헌금 많이 했습니다. 



이웃사랑을 요구할 자격이 안돼요. 이렇게 하세요. “주여, 주의 스케줄, 주의 초림과 재림을 저의 신체에다 새겨주옵소서.” 아예 재봉틀로 박아버려요. 평화시장 미싱사가 박음질 하듯이 스물네 시간 박음질해서 “네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있다.”는 주님의 현존을 증명하는 그런 삶이 바로 성도의 생애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말을 하는 것은 고린도교회가 교회라는 말이 아니고 그 속에 교회 있다는 말입니다. 내(사도) 말을 듣고 “아,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잖아. 다시 한 번 깨달았네.”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거예요. 



제가 서울에서 강의할 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아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마치 택배가 오게 되면 포장지를 후다닥 뜯어버리고 그 안에 든 진짜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끄집어내듯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지고 진짜 주님 주신 용서하심, 주님의 용서하심, 예수님의 피, 희생, 그걸 끄집어내기 위해서 우리를 갈기갈기 다 찢어버려요. 그 찢기는 기간이 우리의 한평생입니다. 오래 살면 살수록 많이 찢겨요. 나이 90까지 살면 많이 찢깁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말라고요? 찢기도록 오래 사세요. 



말씀이라 하는 것은 그 의미가 주님의 스케줄에서 나왔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정답 아닙니다. 주님이 정답이시고 우리는 그 정답을 정답 되게 해서 지금의 이 모양 이 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소송하는 것이 우리의 버릇인 것처럼 내 자존심 지키기 위해서 소송하고 또 소송하는 인간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찢어버리소서. 그리고 우리 안에 그것이 주님의 스케줄인 것을 우리가 화들짝 놀라면서 새삼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