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4. 8. 22) 6-1
마가복음 1장 40절의 내용은, 문둔 병자가 있었는데 예수님께 낫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예수님은 낫게 해 주시면서 뭔가를 요구하셨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신 후에 한적한 곳으로 떠나 가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문둥병을 낫게 한 것보다 더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문둥병자가 낫게 해 달라고 할 때 그 사람의 소망은 몸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주님은 문둥병을 고쳐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병을 낫게 해 주시면서 뭔가 지시를 하는데, 그 지시는 문둥병자가 기대했던 것은 아닙니다.
문둥병자는 자기 몸만 온전하게 되면 목적 달성을 한 것이기에 그것으로 족한데 예수님으로부터 추가적인 지시가 올 줄은 예상치 못했어요. 그런데 예상 못한 그것이 핵심이 됩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 병 고치러? 그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추가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겠지요.
문둥병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이 추가적인 지시를 예상 못했지요. 이것은 바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 소원대로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이용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혹 떼러 왔다가 혹 붙이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 소원을 들어주기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자기 소원을 위하여 우리를 덧에 걸리게 하신 겁니다.
이 예수님의 덧에 걸린 자는 구원 받는 것이고, 뺀질이처럼 예수님만 이용하고 도망치면 그 사람은 지옥 가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나름대로의 자기 목적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을 해야 돼요. 우리 목적 달성하기 위해 예수님께 잘 보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님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까마득히 생각 못했지요.
성경을 보면 우리가 예상 못한 다른 계획을 주님이 가지고 있었고, 그 주님의 계획에 우리가 말려들 때 우리는 영생 얻고 구원 받은 겁니다. 주님 계획에 말려들면서 우리는 자동적으로 나의 계획은 폐기처분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잘 사귀면 우리 유익을 위해 꼭 필요한 분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럼 주님의 추가적인 지시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레위기 14장에 나오는 율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지정된 예물을 드리라고 했는데, 그 지시를 누가 했습니까? 예수님이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지시와 율법 중 어느 것이 완성이죠? 예수님의 지시가 완성이죠.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 문둥병자를 예수님의 자기율법 완성을 위해 이용하신 거예요. 문둥병자는 자기 건강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주님께 이용당하는 계기가 되었단 말이지요.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 ‘예수 믿고 천국 가고 싶습니다.’라고 기대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걸려들면 예수님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우리의 기대를 이용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은 접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통해 영생을 얻고자 하는 생각은 주님의 계획에 의하면 잘못된 판단으로 가담이 되는 겁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욕심의 일종으로 우리는 주님 일에 가담이 됩니다. 그럼 이것이 잘못이라면 처음부터 잘못 된 생각을 하지 않으면 될 것이 아닌가?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은 순수하지 않습니다. 죄인이기에 순수한 마음은 없습니다. 차라리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 낱낱이 발각될 때 우리 바깥에 순수하신 분이 있고 그분과 관계가 성사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내가 순순하지 않다는 것이 폭로될 때, 그 폭로하시는 것은 순수함입니다. 따라서 순수를 만나는 좋은 계기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을 깨닫는 놀라운 순간이 옵니다.
교회 와서 자식들 위해 기도하고, 남편 위해 기도하는 것은 결코 순수한 것이 아니고 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은 순수에 걸려든 사람입니다. 곧 구원 받는 순간이지요.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게 되면, 어떤 인간도 순수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순수한지 아닌지 판정을 내리지도 못한 채 그저 필요에 따라서 예수 믿고자 했을 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의도마저도 사용하셔서 예수님의 자기 계획을 드러내는 계기로 순수하게 사용하시는 겁니다.
제가 '순수'라는 표현을 섰습니다만 성경에서는 이것을 '거룩' 혹은 '의'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과 우리가 맺은 관계 자체가 의롭고 거룩한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집안에 아버지가 장관이라면 아버지는 장관이지만 아들은 장관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 아들이 골목에 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장관 집 아들이다.' 이렇게 말하지요.
아들은 장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장관이기 때문에 자기는 장관 집 가족이 되지요. 우리는 이런 식으로 구원 받습니다. 나는 내 성실과 선함으로 구원 받고자 시도했는데, 예수님께 걸려들어서 예수님의 거룩 때문에 내가 예수 안에서 의로운 가족이 되는 거예요.
계란을 삶을 때 물에 넣고 15분 쯤 끓여서 채로 계란만 건져내면 됩니다. 우리는 순수하지 않습니다. 항상 노림수가 있어요. 그런데 주님의 의로운 채로 건져버리면 나의 노림수가 빠집니다. 계란을 채로 건지면 물이 빠지듯이 우리의 노림수는 다 빠집니다. 건지는 채, 그물 망이 언약 관계이고 그것이 의로운 거예요.
죄인을 부르러 와서 건져내면 우리의 죄는 빠집니다. 우리가 주님께 안 걸려들면 예수 믿는 것도 자랑하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그것은 종교생활, 취미생활이지 구원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채로 건지시면 뭔가 빠지는 것이 있어요. 우리 죄가 쏙 빠집니다. 죄가 빠지면서 우리는 순수에 걸려든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에 걸려든 거예요. 구원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주님의 말씀이 성립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말을 오해해서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으니 내가 죄인이 되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주여, 저는 완악한 죄인입니다. 과거에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마음을 낮추면 주님이 긍휼히 여기 주실 것이라고 하는 작전을 쓰지요.
바리새인들이 이런 작전을 섰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나는 부족합니다. 다 내 탓입니다." 이건 가식입니다. 인간은 자기 죄를 몰라요. 왜냐? 스스로 반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돌아서서 반성을 해요. "내가 오늘 너무 심했지? 그런 소리를 할 필요는 없었는데. 지금 어쩔 수는 없지만 좀 심했어. 주여 용서해 주소서." 이렇게 반성을 해요. 이런 식으로 해서 인간은 스스로 의로운 자로 만들어요.
회개하고 반성하는 자질과 능력을 가졌기에 결과적으로 의롭게 됩니다. 예배 시간에 늦게 갔다면 헌금을 작정한 금액보다 조금 더 한다든지 해서 자신의 잘못해 대해 스스로 정화시키는 작업을 해서 늘 자신을 정결케, 의롭게 만들어요.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 자기 잘못을 깨달고 자기 힘으로 잘못을 벌하고 죄를 없이 만드는 것이기에 주님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리새인들이 한 짓이었고,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교육하고 양육시킵니다. '이런 잘못을 했을 경우에는 이런 방법으로 회개하고, 저런 짓을 했을 때는 저런 방법으로 스스로를 낮춰라.'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이런 방법을 쓰지요. "제가 시어머니와 다투었습니다." "그러면 주기도면 10번 외우시고 시어머니께 용돈을 좀 더 드리세요." 이런 식으로 고해성사를 하고 신부가 해답을 제시합니다.
이런 상담 받으면 마음이 어떻습니까? 희망이 생기고 마음이 편안하지요. 왜? 해결책이 주어졌으니까. 사람들이 병원에 가는 목적이 뭡니까? 처방전을 받으러 갑니다. 만약 처방전에 "당신의 병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었다면 굉장히 난처한데, "아스피린 1알, 소화제 1알." 이렇게 적혀있으면 희망이 생깁니다.
교회가 마치 영혼을 치유하는 동네 병원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요. 그래야 고객들이 오니까요. 그러나 교회가 처방전을 발부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같은 인간이 인간에게 처방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처방전을 주는 것은 죄인이 죄인을 처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삶은 계란을 건져내듯이 그렇게 낚아채는 경우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안 보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을 만났는데 우리가 예수님과 문둥병자가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이 실감나려면 우리도 예수님과 만나서 예수님의 지시를 들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안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건져 주셔야 구원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대책은 뭡니까? 해결책 없지요? 목사가 이야기하면 엉터리 처방전이 될 뿐입니다. 목사는 믿을 수 없습니다. 자신도 죄인인데 어떻게 해결책을 내놓습니까?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해결책을 줘야 되는 거예요. 그 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알지 못했던 죄를 깨닫게 되고, 죄를 깨닫는 그 자체가 '순수'라고 했지요.
순수한데 걸려들면 우리가 순수하게 되는 거예요. 순수에 걸려들면 우리는 영생 얻습니다. 이 대책은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고, 주님이 직접 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하지요? 믿는다는 것도 자기 신념, 자기 최면일 수 있잖아요.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이 말은 과거형이 됩니다. 과거형은 우리의 기억 속에 들어갑니다. 지금 남는 것은 내 기억 창고에 있는 것을 다시 끄집어내어 '주님, 제가 믿는 것 맞습니다.' 이렇게 될 수가 있어요. 우리의 두뇌 구조가 그래요.
5년 전에 은혜 받은 것 또 끄집어 낼 수가 있고, 3년 전에 병에서 나은 것 또 끄집어 낼 수 있고. '믿습니다.'하고 내뱉는 순간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고 기억으로 남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 낼 수밖에 없어요.
‘율법대로 하라’고 했지요. 제가 방금 한 질문, 예수님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이 질문은 여러분에게만 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문둥병자가 병 낫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주님은 병을 고쳐주시면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했지요.
이 율법은 말씀에 해당되지요. 그러면 여기서 ‘내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이것이 성립됩니까? 이 질문은 ‘내가’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문둥병자가 예수님 찾아올 때 했던 이야기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몸이 깨끗하게 됩니까?”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고 하시는 말씀이,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은 ‘내가’에서 말씀 속으로 위치가 바뀌게 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네가 나에게 요청해서 병 나은 것이 아니고, 너는 모르지만 율법이 완성되기 위해서 너는 애초에 문둥병 걸려야 했고, 지금 이 순간 너는 나를 만나야 했고, 내가 낫게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여,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 받습니까?’라고 할 때, 정작 구원 받은 사람은 ‘내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라는 말도 창세전에 이미 계획된 것을 내뱉고 있는 거예요. 이미 구원 받았기에 그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겁니다. 쉬운 예로, 작가가 드라마 시나리오를 써는데, 김수연, 임성한 이런 분들이 유명한 분입니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그 장면에 빠져듭니다. ‘다음 장면은 어떻게 될까?’ 예를 들면, 며느리가 시집을 왔는데 시어머니가 비타민 약을 먹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 비타민 약 속에 피임약에 들어 있어요. 그 사실을 나중에 며느리가 알았어요. [청담동 스캔들]이야기입니다.
이런 스토리를 보면서 ‘이제 어떻게 될까?’ 궁금해 합니다. 왜냐? 우리는 작가가 아니니까. 그런데 작가는 그걸 보면 어떻겠어요? ‘이쯤 되면 시청자가 궁금증이 극에 달했겠지?’ 지금 상황에서 누가 느긋합니까? 작가는 느긋한 거예요. 그 이후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구원이 뭔가 하면, 내가 천국 간다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우리가 작가의 세계 속에 들어가면 나의 기억과 나의 과거를 버려야 되고, 주님의 창세전 계획과 이 세상 끝난 후의 일을 우리 몸에 퍼붓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말씀의 세계입니다.
출발점은 내가 아쉬워서 예수님께 도움받기 위해서 교회 가고, 예수 믿으려고 했잖아요.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것이 출발점이 아니고 ‘너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내가 창세전에 이미 계획했다.’는 겁니다. 창세전에 이미 야곱은 사랑받기로 했고 에서는 미움 받기로 했지요. 그러면 에서와 야곱이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은 창세전 계획대로 움직입니까, 제 마음대로 움직입니까? 계획하신 대로 움직입니다.
그 계획에 참여하게 되면 ‘내가’는 날아가 버립니다. “주께서 구원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그런 시도를 해야만 했군요.”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의 자리에 누가 들어갑니까?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께서 나로 하여금 ‘내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라는 말을 하게 하신 것 맞지요?”라는 고백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소급해서 창세전 계획을 고백하고 또 고백하는 겁니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되어진 일이 어느 것 하나 오류가 없는데 우리는 내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이것은 이런 아쉬움이 있고, 저것은 저런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내가 주가 되어 평가하고 원망하고 수정하려고 합니다.
내가 드라마 작가가 되어 내가 이 세상을 주관하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죄가 됩니다. 이런 강의를 들어도 돌아서면 또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되고 주님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면 되는 분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응답해 주시면 내가 주님을 잘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거래하고 흥정에 나섭니다.
이 병은 죽어야 고칠 수 있는 병입니다. 절대 이 병은 안 고쳐집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고쳐야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 받았기에 이것이 병인 줄 압니다.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습니다. 문둥병자는 병 낫기 위해 예수님께 왔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시면서 예상 못할 추가적인 것을 말씀하셨다. 자기는 병 낫고 ‘감사합니다.’하고 돌아서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제사장에게 예물을 드려라.’고 하십니다. 추가적인 사명, 지시가 떨어진 거예요.
병 나으면 끝났는데 왜 그런 지시를 따라야 합니까? 문둥병자는 이런 의문을 안 갖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그럼 왜 예수님은 이런 지시를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입니다. 율법은 예수님 홀로 완성하십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거론했고, 자신이 율법의 완성자가 되고.
그렇다면 인간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안식일 지키기, 십일조 하기, 구제하기, 전도하기. 이런 해서는 안 될 일을 인간들이 하고 있는 거예요. 전도는 누구 합니까? 예수님이 하는 거예요. 집안에 아이는 누구 키웁니까? 주님이 하시는 거예요. 설거지를 누구 합니까? 주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설거지도 하고, 아이들 키우고 온갖 수고를 다했다.’고 하면서 “주님이 보여야 부탁도 하고 할 텐데 안 보인다. 이미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다고 사람들이 말하는데 나는 만난 적이 없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은 내가 주체가 된 상태고, 내가 안 하면 아무 일도 안 된다는 철석같은 믿음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이미 믿음이 있어요.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했을 때, 누가 믿습니까? 내가 믿지요. 이 말은 내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예수 믿는 나를 믿는 것입니까? 인간은 교회 다니고, 성경 읽고 해도 결국은 자신의 결단과 의지와 희망을 믿는 겁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사람들만 모여 믿는 척을 하는 위선자의 모임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믿으면서 마치 예수를 믿는 것처럼 말하는 단체가 교회입니까? 상당히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누가 믿는 자입니까? “나는 예수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자가 믿는 자입니다. “나는 절대로 내 힘으로 예수 믿을 수 없습니다.” 왜요? 나는 내 행위만 의지하고 기억하는 주특기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예수 믿을 능력이 없으니까 지옥 가겠네요?”라고 하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하시기에 나는 못한다는 놀라운 고백이 나옵니다. 주의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나는 뭘 해도 내 자랑뿐입니다.”라는 순수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이 세상의 드라마 작가가 아니라 작가는 따로 있고, 나는 그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는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은 이미 성령에 의해 장악된 사람입니다. 내가 설거지를 해도 주가 주신 힘으로 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4:11).”
순수, 완전, 경건, 거룩은 우리와 무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관계없음을 보여주는 계란 건지는 채가 의로운 거예요. 그 엮어짐이 의로운 겁니다. 그것이 바로 완전이고 순수함입니다. “문둥병자야 너는 내 율법 완성에 걸려들었어!” 따라서 문둥병 치료는 병자를 위함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계획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의 일환입니다.
우리들도 이 주님의 계획에 걸려들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어떤 죄도 용서하시도록 이미 장치가 마련되어 있음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걸려들기를 바랍니다. 복권 1등에 당첨된 것이 아니고 1등에 걸려들 때 우리가 1등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창조주가 아니고 피조물이기 때문에 항상 피동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보다 앞선 계획이 있어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몰라요. 자신이 1차인 줄 알아요. 자신이 우선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것이 아니라 나를 있게 하신 나보다 우선 되는 분이 있음을 알지요. 우리는 그분을 증거하기 위해서 각자의 인생을 할당받은 겁니다. 우리가 현재 여기에 사는 것도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며 주님의 계획이고 뜻입니다. 고민한다는 것은 사치스런 취미가 될 수 있어요. 오 목사님도 너무 근심하지 마세요.
그런데 어려운 점은 관계입니다. 레위기 14장을 제가 여러 번 언급했는데, 여기에는 문둥병자가 깨끗해지면 하나님의 조치인줄 알라는 것입니다. 더러운 문둥병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다면 이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앞당겨 그런 혜택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을 ‘모형’이라고 합니다.
모형, 혹은 그림자라고 하지요. 그림자만 있는 그림자 봤습니까? 그림자를 따라가 보면 반드시 그림자를 있게 한 실체가 있어요. 구약 전체가 그림자입니다. 발람 선지자는 가려고 하는데 당나귀가 안 갔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당나귀를 때렸어요. 그 때 갑자가 당나귀가 말을 했어요. “왜 때립니까?”라고.
당나귀가 왜 말을 합니까? 답변해 보세요. 성경을 보면 질문할 내용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별로 질문이 없는 것 같아요. 정답을 말씀드리면 당나귀가 그림자입니다. 당나귀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당나귀 속에서 어떤 분이 이야기한 거예요. 분명히 히브리서에서 구약 전체는 모형이라고 했어요.
모형인데 뭘 못 만들겠어요. 음식도 만들고 꽃도 만들고 온갖 것을 다 만들어요. 당나귀가 말하는 것도 있고, 우박이 떨어지고, 해가 지지 않고 계속 조명을 비춰 전쟁을 지속하게 만들고, 해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가고, 홍해가 갈라지고, 성경에는 별별 모형이 다 있어요. 이런 것들은 기적 축에도 안 들어갑니다. 진짜 기적은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욥이 고난 받으면서 한 이야기가 뭔가 하면 “하나님, 저를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 나오기까지 욥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자녀 10명 다 죽고, 엄청나게 많은 재산 다 사라지고, 온 몸이 만신창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 일을 겪고 난 후 질문을 했지요. 욥은 이미 순수에 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살기 바빠서 주님 곁에 계셔도 더치 하지 않을 거예요. 욥처럼 망해봐야 더치하지요. 기적은 뭔가? 내가 없어도 되는데 왜 여기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집에 혹시 바퀴벌레 나오거든 기적인줄 아세요. 없었는데 있게 하신 분에 의해 있게 된 것입니다. 하수구에서 나왔다고 하지 마세요. 그건 답변이 아니에요.
있음 자체의 목적과 의미에 진정성 있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는 하나님이 친히 마련해야 되지 우리는 살기 바빠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구약 율법에서 문둥병이 있다가 낫게 되면 이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문둥병을 낫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메시아가 구약에 오게 되면 키가 170, 몸무게가 67킬로그램? 아니에요. 구약은 모형이고 그림자지요. 장차는 사람이 오지만 그 사람이 모형으로 오게 되면 그것은 법체계로 오십니다.
그림자는 법이고 그 법의 완성은 어떤 인물입니다. 그래서 지금 어떤 분이 오신 입장에서 이 시대는 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십일조, 안식일 그런 법은 없습니다. 그분이 주신 사랑이 온 율법을 다 이룬 겁니다. 제가 수련회에서 이야기했어요.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완성은 바람피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겁니다.
남편이 아내와 같이 살면서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당신에게 폭언 한 마디 안했고, 퇴근하면 즉시 집에 왔고, 가사일도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이게 남편의 사랑입니까? 물론 이런 기본적인 것도 안 하는 사람이 많아요. 하지만 이런 것을 했다고 그것이 사랑이냔 말이죠? 아닙니다. 이것은 법입니다.
모형과 그림자로 잘 난 척 하면 안 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알려주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대전 강의에서 제가 율법을 ‘인두’라고 했어요. 다리미가 나오기 전에 옛날 사람들이 숯불을 담아 옷감 위를 지나가면 구김살이 펴지잖아요.
인두인데 시뻘건 인두에요. 옛날 고문할 때 인두로 지지면서 “네 죄를 알렸다!”라고 하지요. 그게 율법이에요. 그게 모형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요? 못 믿습니다. 왜냐?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네 죄를 알렸다!” 이것입니다. “네 죄를 알렸다!”의 완성이 예수님입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피 앞에서 네가 과연 잘났느냐?’를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 피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했어요. 십자가 피 앞에 설 때 우리는 변명 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이 규정되고 확정됩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우리는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나는 예수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믿음도 소유했고, 사랑도 있다는 자기 자랑입니다. 이것은 온전한 믿음과 사랑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주님은 왜 돌아가셨지?” “아, 내가 바로 죽어야 할 죄인이구나.” 다른 인간들과 비교했을 때는 내가 잘난 존재일 수 있지만 십자가 앞에서 내 모습을 보면 죄인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드러내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 구원 받은 자임을 소급해서 통보해 주십니다.
‘소급’이라는 말은, 믿는 순간 구원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창세전에 확정된 것이 이제 통보된다는 거예요. 구원파는 어떻게 주장합니까? 이미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믿는 순간 구원 받는다고 합니다. 구원파는 침례교에서 나온 자들이고 침례교는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 받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자유 의지로 구원받아요.
그래서 구원파들이 전도할 때 묻는 말이 이것입니다. “혹시 교회 다니십니까? 그러면 구원 언제 받았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황하지 말고 “창세전에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이고 야곱이 고백한 겁니다. 내 세계에서 벗어나 말씀의 세계에 가보니까 시작과 끝이 이미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소나기처럼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율법인데, 새 두 마리를 가지고 한 마리는 흐르는 물가에서 죽여 그 피를 다른 한 마리 새에 묻혀 날려 보내라는 겁니다. 두 마리가 왔다가 한 마리는 죽고 다른 한 마리는 자유를 찾아 날아갔지요. 날아간 새는 날개에 죽은 동료의 피가 묻은 채 날아가니까 어디를 가도 흠 없는 동료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 백성의 표식입니다. 천국 가도 묻어있는 피.
“창자국과 못자국을 봐라.” 부활해도 남아있는 흔적. 이게 바로 유일한 순수입니다. 죄인도 천국 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이 제시해야 되고, 그것은 구약에서는 문둥병을 통한 역할극을 했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소급해서 통보해 주는 그것이 실체입니다.
10분 쉽시다.
(2014. 9. 1. 08:44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