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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강의-창조의 기원140106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8. 23. 08:37
2014-01-16 22:07:01조회 : 470         
[14 대구강의 1] - [피 108] - 창조의 기원이름 : 구득영 (IP:203.223.97.152)

[14 대구강의 1] - [피 108] - 창조의 기원

                                                            14,01,0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310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개인의 죽음으로 종결되지 않고, 모든 이의 죽음으로 연장된다. 한 사람이 죽었음으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왜, 예수님의 죽음은 다른 사람도 모두 죽은 것이 되는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라고, 이렇게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분명히 나와있는데, 이렇게 나와있어도 이게 우리 인간들의 세계에 들어오려면 설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죽음이 개인의 죽음으로 종결되지 않고, 모든 이의 죽음으로 연결된다" 라고 하면, 그게 어떤 논리로 그런 주장이 펼쳐지는지, 그게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게 이 세상에서는 마땅한 논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죽으면 자기 혼자서 죽는 것이지,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다 죽었다고 하는,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유독 예수님만, "왜 예수님의 죽음은 다른 사람도 모두 죽은 것이 되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 ??

이것을 한 번 적어보면,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 라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말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나오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라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어디 부처가 "내가 죽었으니 너희들도 모두 죽었다" 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마호메트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게 아닌데, "내가 죽었으니, 모든 사람은 다 죽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어떤 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말인가? 수용한다는 것은 납득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데, 납득이 되지 않은데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믿는 척은 할 수 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우리끼리는 통하겠지만 하나님에게는 전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 라고 정리하는데, 하지만 이것은 잘못이란 말이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아는 게 없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일부는 아는데, 일부는 모른다" 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모르면 모두 모르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 십자가를 모르면 바보 멍충이 !!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소위 똑똑하고 지혜롭고 잘났다고 하는 모든 인간들을 어리석게 만들어버린다" 라는 것이다. 아무리 똑똑한 철학박사라고 해도,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라고 해도, 십자가를 모르면 바보 멍충이라는 것이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왜 멀쩡한 사람을 두고 바보라고 하느냐고 다그친다고 하면, "한 사람이 죽었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라는 것에 대해서 답변을 해보라는 것이다. 그게 답변이 안 된다면 바보라는 말이다. 신학자들은 멋도 모르고 성경구절이 있다고 해서 마구 잡아당기고 하는데, 그때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한 사람이 죽었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해보세요" 라고 한다면,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기원문제, 원천문제, 바닥문제 !!

그렇게 남들이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도 설명이 되지 않으면, 그러면 다같이 바보가 되어버리는데, 그러면 곤란하니 이 시간에는 거기에 대해서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혹시 한 집사님은 어떻게 설명이 좀 되겠습니까? 안 되요? (ㅋㅋ)

그래서 지금부터 그것을 해보겠는데, 그게 바로 영어로는 '오리진' 이라고 하는데, 즉 '기원' 이라는 말이다. 바둑을 두는 기원이 아니고(ㅋㅋ), 즉 근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특히 우리 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의 몸이 이렇다"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이렇게 사용하겠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몸의 사용처가 따로 있다는 말인데, 어디에 사용하시는고 하니, 하나님 창조의 기원문제, 원천문제, 다 같은 말인데 말이다. 오리진, 즉 근원을 푸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를 활용하시는 것에서, 거기에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실이 드디어 까발려진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런 것을 하게 되면 참으로 즐거운데, 굉장히 기쁘다는 말이다. "내가 아픈데, 당신도 아픕니까?" 라고 하면,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예수님은 "내가 죽었으면, 다른 사람도 다 죽었다" 라고, 그렇게 같이 덤배기로 묶어서 가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따로, 나 따로",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을 묶을 때 묶는 이유가 있는데, 우리를 구원해주기 위해서 묶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창조의 근원, 기원, 원천, 혹은 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중에서 바닥이 적당해 보이는데 말이다. 바로 그 바닥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의 삶을 이용하신다는 것이다.

◈ 너희들이 바로 아담이다 !!

그러면 "아담이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물을 때, "그런 죽은 사람은 왜 기억합니까?" 라고 할 것이 아니라, 여기서 대해서 성경은 "너희들이 바로 아담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저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습니다" 라고 할텐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선악과를 따먹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에게서는 매일같이 탐심이 발휘되고 있다는 것이다.

선악과나무의 특징이 무엇인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거기에 탐스럽기까지 한데, 그러니 그것을 죄라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무슨 죄를 짓느냐는 말이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곧 죄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죄라고 하지 말고, 주님께서 창세기 3장의 그때 그 시절을 2014년 1월 6일에 우리를 통해서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되풀이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러니 창조의 하나님은 옛날의 하나님이 아니고, 지금 그것을 되풀이한다는 의미에서, 그 주체자로서 창조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원문제이고, 원천문제이고, 바닥문제라는 말이다. 우리가 곧 아담이라는 것이다. 문제가 아주 깔끔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나의 죽음'은 어떻게 되는가? "내가 죽는다" 라고 하면 그야말로 무식한 인간이 되고 마는데, 즉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러니 나도 간다" 라고 하면, 그것을 죽음을 모른다는 말이다. "나는 죽는다" 라고 할 때, 혼자 죽으면 안 되고, 그렇게 되면 기원문제, 원천문제, 바닥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파서 곧 죽을 것 같아" 라고 한다면, 그것은 죽음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죽음이라는 것조차도 기원문제를 따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시키기 위해서 죽게 하셨다" 라고, 항상 그렇게 연결을 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창조는, '나'와 더불어서 만든 이 전체 !!

어제 밤인가 십자가 마을에서 누군가가 질문을 했는데, 쉽게 요약하면 "제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는 것인데 말이다. 그래서 운동기구인 역기를 예로 들어서 답변을 했는데, 그것을 바벨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 역기의 구조를 살펴보면, 이렇게 봉이 가로로 놓여있고, 그리고 둥그런 쇠뭉치가 양쪽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앞에 가로놓인  '나' 라고 하고, 뒤에 있는 쇠뭉치를 '예수님' 이라고 할 때, 구원이란 것은 자기 쪽에서 말씀을 지켜서 나가는 게 아니라, 이미 구조가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근원이고 원천이고 창조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창조라는 것은 '나'만 만든 것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서 만든 이 전체가 곧 창조가 된다는 것이다. 

이게 아주 쉬운 예처럼 보이지만, 그런데 막상 따지고 보면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현대의 양자역학이나 물리학에서 이런 문제 때문에 엄청나게 고민을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즉 "만약에 하늘에 별이 없다고 하면, 내가 회전을 해도 회전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이론이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주변에 이렇게 의자나 난로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돌면 어떤 변화가 느껴지는데, "아하, 내가 돌고 있구나" 라고 말이다. 그런데 주변에 아무 것도 없다고 하면, 자기가 돌아도 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게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인데, 우리로서는 상당히 신기하다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에서 공간 문제가 등장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 나비효과 !!

우리는 평소에 "나만 창조했다" 라고 여기고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같이 더불어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한번 해보라는 말이다. "나와 해와 달과 별과, 다른 사람들이 같이 창조가 되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나비효과인데 말이다. 즉 상하이에서 나비가 펄럭이면 뉴욕에서는 폭풍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데, 효과와 효과가 가속이 되어버리면 엄청난 큰 효과가 일어나서 원인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주 자그마한 원인인데 말이다.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상대에게 서로 서로 주고받는다는 말이다. 불교이론과도 비슷해 보이는데, 모두가 서로 인연으로 엮어져있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도 교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실험으로도 하는데, 예를 들어, 꽃을 키우는 사람들의 경우에, 꽃에게 물만 주면 되는데, 그런데 모차르트의 음악을 왜 틀어주느냐는 것이다. 꽃의 색깔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감성지수(EQ)를 올리려고 할 때도 그런 음악을 틀어주곤 한다는 것이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 말이다.  

그러니 음악이 사람들을 상대로 노래하는 것만이 아니라, 즉 길가에 있는 풀이 우리와 대화를 하는데, 우리가 미처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 점점 더 범위를 넓혀보면 말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창조가 혼자된 적이 없고, 그런 것은 아예 비현실적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더불어서 산다는 말이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더불어 함께 교류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 우리 건물에 불이 났다고 하는데, 괜찮아요?

어제 이 건물 이층에서 불이 났는데, 302호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양반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자기는 지금 시내에 있는데, 자기 가게가 있는 건물에서 불이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에게 전화가 왔는데, 그래서 제가 옥상이 올라가서 보니 별로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가서 확인해보니 불이 조그마하게 났다는 났다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 201호(?)의 존재를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는데, 그러다가 자기의 것에 뭔가 위기가 왔을 때는 "누구에게 도움을 받지? 누구에게 전화를 하면 되지?" 라고 하면서 찾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인데, 자기가 어떤 일을 해도 평소에는 관계가 없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자기가 하는 일을 주시하고 주목하고 있는 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 권사님의 경우에도, 권사님은 그냥 살아가는데 "어떻게 하면 내가 권사님에게 도움을 얻을까?" 라고 할 수 있는 자식이나 며느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냥 자기 인생을 사는데, 그런데 뭔가 주시하고 주목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렇게 뭔가 더불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 우리는 창조주와 더불어 있다 !!

이것을 더 확장해보면 "우리는 창조주와 더불어 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굉장히 간단하고 상식적인 문제인데, 그런데 우리의 본성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내가 하는 일만 잘되면 그것이 곧 행복이다" 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창조주와 우리 사이에서, 그 사람의 경우처럼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했을 경우에,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답변하기를 "구조는 우리가 처분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생로병사는 이미 주어진 구조 내에서 일어날, 즉 상대방을 압력을 주고 갔다 왔다했기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죄를 지어서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기를 험담을 하든지 하게 되면, 그것이 얽히고 해서, 물론 그 과정, 즉 그 메커니즘은 우리가 모르는데, 아무튼 이 세상 자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마솥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일 무슨 사건이 일어날지 우리는 모르는데, 아무튼 창조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창조주가 되신 분과 자기 자신과 관련이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아닌,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

그런데 그 창조주를 우리는 '하나님' 이라고 하는데, 그게 잘못이라는 말이다. 그게 어리석은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라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목사가 지금 또 무슨 튀는 말을 하려고,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가?" 라고 할 분도 있지 싶은데,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창조했다" 라는 것이다.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라는 것은,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때 처음 알았다는 것이다. 겨우 33살을 먹은 나사렛 청년이 온 우주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그렇게도 열심히 섬기던 사람이, 겨우 33살 먹은 나사렛 청년이 온 우주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이전까지 사울에게 예수란 무엇인가? 그냥 청년인데, 그것도 젊은 혈기로 자기가 메시야라고 하면서 까불다가 그만 정치범으로 몰려서, 그래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라는 사형틀에 매달려 죽었던 자기 시대의 한 명의 청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거에 연세대에 다니던 학생인 소위 '박종철 고문사건'이 있었는데, 그런데 "박종철이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라고 하면, 그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는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주가 따로 있는데, 즉 '하나님' 이란 분이 엄연히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예수 자기가 창조를 했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사울은 그런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서 죽였다는 것이다. 예수는 33살을 먹은 청년에 지나지 않는데, 그런데 자기가 스스로 메시야라고 자칭해서 우겼기 때문에, 그것을 '참칭' 이라고 하는데, 즉 자칭해서 우겨서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런 이단을 용서할 수가 없는데, 그것을 믿는 자들을 처단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란 말이다.

◈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랬던 사울이 나귀를 타고 가다가 떨어졌는데, 그래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으니, 거기에서 나오는 답변이 "나는 니가 핍박하던 나사렛 예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보같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믿던 나 자신이 틀렸구나" 라고 하면서 시작하는 것이 곧 사도바울의 로마서이고 갈라디아서라는 말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종교지 하나님의 종교가 아닌데, 하나님의 종교는 유대교나 이슬람교인데, 물론 힌두교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지금 종교를 바꾸는 것인데,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다" 라는 것에서 "예수님이 천지를 만들었다" 라는 것으로 말이다. 그게 곧 복음이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에서 기독교 신자가 많다는 것은 심히 의심스러운 일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짜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아닌 하나님의 종교를 믿고 있다는 말이다.

(그때 목사님이 녹차를 한 잔 마시는데, 아마 듣는 분들도 같이 따라 마신 것 같음) 보세요. 여러분도 따라하잖아요. 누군가가 팔짱을 까면 그것도 옆에서 같이 따라하게 되는데, 심지어 집에 키우는 개도 가만히 보면 주인이 하는 행동을 따라한다는 것이다(ㅋㅋ).

◈ 예수님이 근원이고, '오리진' !!

이러한 것을 A나 B와 같은 하나의 어떤 타입이라고 보지 말고, 근원적으로 따져보면 결국은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예수님과 관련이 되어있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니 우리도 죽는다는 것이다. 이해가 됩니까? 예수님이 근원인데, 예수님이 '오리진' 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 오리지날이 죽었으니 우리도 죽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시작에 불과한데, 겨우 시작으로 들어가는데 이렇게 강의를 길게 했는데, 20분 가까이 말이다.

이것이 분명히 맞는 말인데, 그런데 사람은 어떠한고 하니, 아까 그분이 질문한 것처럼, 이것을 신이라고 여겼으니, 예수님이 아닌 신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신이라고 여기면, 우리 쪽에서 말씀을 지키고 다가가면 된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완전한 신처럼 되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방향을 정해서 다가간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기특하고 대견하게 보일 테니,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주실 것이란 희망을 품고 다가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은 모호하니, 즉 우리가 보기에 규정되지 않으니, 규정된 자기가 신에게 다가가면 된다는 것이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신이시여!"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신은 그렇게 우리가 말을 붙이기 나름인데, 마구 아부를 떨면서 말이다. 신은 구체성이 없는데, 그냥 "천지를 창조하시고" 라고 하면서, 자기가 그 창조를 알게 되면 좋은 놈이 되고 말이다.

◈ 그런데, 하나님이 몸소 이 땅에 오시게 되면?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 어서 오세요. 이런 것이 다 교류인데 말이죠(ㅋㅋ). 하지만 여기에 비해서 예수님은 아주 구체적인 인물인데, 즉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라는 것이다. 저는 총신을 다니면서 이 부분에서 쇼크를 받았는데 말이다. 하나님이라면 그냥 하늘에 계시면 되는데, 굳이 왜 내려오셨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이 몸소 이 땅에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그려놓은 그림이 그만 다 망가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믿었던 '나' 자신은 무엇이 되느냐는 말이다. 그동안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사기를 친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회를 하는 목사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이야기하면 전혀 먹혀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제가 이미 전도사 시절에 실험을 해보았는데, 제가 예상한 것 중에서 맞은 것은 그게 유일한데 말이다(ㅋㅋ).

설교시간에 교인들에게 예수님에게 대해서 이야기하니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빌면 복을 받고 하는, 그것이 우리나라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조물주 사상이라는 말이다. 신에게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빌면 복을 받고, 그리고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저주를 받고 말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실명을 밝히면, 그게 영주 동부교회와 봉화 제일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하나는 합동측 교회이고, 하나는 통합측 교회인데 말이다. 합동을 거꾸로 하면 통합이 된다는 것이다(ㅋㅋ).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이 장사를 하면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저 내가 착하게 살아가는 만큼이라도 복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빈다는 것이다. 새벽을 깨우면서 말이다.

◈ 니, 그것을 어디서 배웠노?

그때 제가 아마 로마서 3장을 설교했지 싶은데, 수십 년이 지나도 기억이 나는데 말이다. 그만 당회장 목사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는 것이다. "니, 그것을 어디서 배웠노?"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로마서를 통해서 예수님을 이야기하니 말이다. 그 당회장의 약간 움찔하면서 라이벌 의식을 느끼면서도, 저를 걱정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교인들이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는데, 니가 예수님을 이야기해서 앞으로 목회를 제대로 하겠나?" 라고, 즉 "그렇게 해서 밥이라도 먹고 살겠나?"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분명히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 길로 갑니다. 저는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합니다. 물론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은 저의 소관이 아니고, 저는 다만 예수님을 전하는 이 길로 갈 뿐입니다" 라고 말이다. (아멘 !!)

이렇게 예수님을 전하게 되면, 조금 전에 말한 그 역기의 구조가 그만 확정이 되어버리는데, 그러면 우리 쪽에서 예수님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 확정된 것이 우리 자신에게로 파도를 치면서 전개되고 밀려오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태평양에서 일어났던 그 큰 파도가 해운대의 파라다이스 호텔까지 밀려오는데, 그러면 그 해변가에 서있는 우리 자신은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주님이 원천이 되고 근원이 되고 바닥이 되어서 밀려온 그 파도가 지금의 우리 자신을 결과적인 산물로서, 지금 이 모양 이 모습으로, 이렇게 우리의 인생을 이끌고 가고 계신다는 것이다.

◈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

사도바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했을 때, "나는 니가 핍박하던 예수다. 너는 이제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 1장에서 하는 말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아시고, 나로 하여금 포행자이고 죄인의 괴수로 만들어서, 오직 은혜로만 구원된다는 소식을, 이 미천한 나에게 전달하는 업무를 맡겼습니다. 내가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아닌 주님이 되는데,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항상 주님을 언급한 그 배후에 계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인데, 즉 다른 민족에서 말하는 신 개념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받은 자들만이 아는 하나님, 아주 폐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오직 십자가 안에서만 발견되는 하나님이란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딤전 1: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런 이야기를 시골에 있는 분들에게 전하면 알아듣지를 못하는데, 물론 도시교회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제가 박사교회에 있을 때 세례를 주려고 문답을 하는데, 그때 "하나님을 아세요?" 라고 하니, "예, 압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아세요?" 라고 하면, "아뇨, 모르겠는데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는데 예수님은 모르겠다고 말이다. 이게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닌데 말이다.

◈ 예수님마저도 육신을 지니면, 그 결과는 '죽음'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미 구체화가 되고 확정된 사실, 즉 하나님이 말씀이 되셨는데, 물론 그것은 우리가 아는데, 여기서 출발해서 구체화가 되려고 하면, "말씀이 되셨다" 라는 것이 육신이 된 말씀이라는 것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곧 말씀인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면서, 그 육신 속에서 육신으로 나타나는 말씀이 나온다는 것이다. 즉 육신으로 표현된 말씀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나중에 십자가에서, 즉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이 되는데, 그러니 하나님마저도 우리가 지닌 육신이 될 때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그 결과는 곧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수학공식과도 같은 것인데, 결국은 "죽는 것이 곧 완성이다" 라는 말이다.

◈ 예수님과 마귀가 만나면 !!

어제 낮 설교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님과 마귀가 만났는데 말이다. 사실 이 마귀가 어떠한지 우리도 궁금한데, 마귀는 항상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너에게 잘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너에게 잘 될 것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 쪽에서 제공하는 조건과, 예수님 쪽에서 나오는 것이 언제나 핀트가 맞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마귀는 "니가 잘 되는 것이 행복이야. 니가 잘되면 그만이야" 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되는 것이 내 뜻이야.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이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 싸움이라는 말이다.

◈ 우리는, 마귀와 단짝이 되고 싶어해 !!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자기 잘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면서도 말이다. 그러니 말씀을 전하는 와중에도 마귀가 작용해서 "그래, 나에게 이익이야" 라고, 그렇게 자기 스스로 마귀와 단짝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게 바로 육의 속성이라는 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완성이 되면, 그게 죽음이 된다는 것이다.

노파심에서 다시 말씀을 드리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인데, 즉 예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은 그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말이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아니란 것이다. 이 역기구조에 있어서, 우리 쪽에서 나오는 신, 즉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창조하시고, 그러한 하나님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십자가에서 출발하지 않은 창조는 창조가 아니라는 말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여기서 교재 312페이지를 보자.

** 사람도, 하나님도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로서 온 우주는 '죽음 안의 체제'를 갖추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음에서 벗어나셨다.

(눅 24: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에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게 누기복음에 나오는 말씀인데 말이다. 성경말씀은 항상 반복을 해야하는데,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이게 누가복음, 즉 복음서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설교시간에도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말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복음서가 있다고 하면, 그 다음에 십자가가 있고, 그리고 신약성경의 나머지 부분인데, 즉 사도들의 편지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서에 나오는 문장은 우리가 바로 해석하면 안 되고,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서 해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를 경유하면 올바른 해석이 되는가?

그렇게 예수님의 하신 일과 말씀들이, 이렇게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면, 거기에 대한 해설서들이 사도들의 편지로서 주어져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본문을 이야기하기 전에 일단 요한계시록을 먼저 보겠는데, 1장 17절과 18절을 보자.

(계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계 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

17절에서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라고 한 다음에 "곧 산 자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냥 산 것이 아니라, 그 앞에 뭐라고 하는가?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시느냐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낯선 사나이가 찾아와서 "나는 여기에 있어요, 그런데 나는 전에 죽었어요" 라고 한다면, 그 분위기가 어떠하냐는 말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지금 찾아온 그 양반이나 우리나 이렇게 다같이 살아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데 그분은 우리에게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전에는 죽었으나, 이제는 살아있는 분으로 오시고, 반면에 우리는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살아있다고 우기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누가 이미 죽음을 이긴 자이고, 죽음을 이기지 못한 자인가? 찾아오신 방문객은 이미 죽음을 이기신 분이고, 하지만 우리는 죽기를 무서워해서 죽음에서 도망치는, 그런 아슬아슬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찾아오신다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그것이 새롭게 다가오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구원이라는 것이, "복을 받고 돈이나 많이 벌어라" 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나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것이란 말이다. 즉 "내가 죽었는데 살아있는 것처럼, 너희들도 나처럼 되었으면 참 좋겠다" 라고 하시면서 주님이 찾아오셨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산다" 라는 것이 아니라, '나' 라는 자체가 기원이고 근원이고 원천이라고 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심장이 되어서, 항상 "죽었지만 살아났다" 라는 것이 우리 속에서 벌떡벌떡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거기에 제공되는 하나의 실험의 장이라고 하면, 우리는 이미 살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우리 속에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자리를 공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았다는 말이다.

◈ 우리의 자리는 박탈을 당하고, 또 당하고 !!

젊은 아이들이 하는 게임에 이런 것이 있는데, 신문지를 접고 접고 접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점점 더 좁아지는데, 그러면 그 위에 사람들이 서로 포개지면서 같이 올라서려고 한다는 것이다. 일부는 넘어지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넘어지면 탈락이고, 오래 버티면 이긴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포개지기를 원하신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자리는 박탈을 당하는데 말이다. 즉 이렇게 바벨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이미 구체적으로 확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확정된 십자가를 신문지로 보면, 신문지를 계속해서 접고 접어서, 바로 그 십자가의 자리에 우리를 집어넣기 위해서 우리의 자리를 계속해서 박탈을 시킨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라고 하면서, 즉 "나는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세상이 나에 대해서 죽고, 또한 내가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십자가 안에 있다' 라는 의미는?

그러면 "십자가 안에 있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여기에 대해서 신학자들이 해석을 내놓지 못하는데, 학위를 받는 것에만 신경을 썼지, 정작 말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어디 독일로 유학을 간다고 해서 모르는 것을 알 수 있는가? 한국에서 모르면 독일에서도 역시 모른다는 것이다. 그 말씀이 그 말씀이니 말이다.

"내가 러시아에 있다" 라고 하면 이해가 되는데, 또 "미국에 있다" 라고 해도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 안에 있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게 공간개념인데 말이다. 지금 어머니가 웃고 계시는데, 아마 정답을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어머니, 그렇지요? (ㅋㅋ)

"우리교회 안에 있다" 라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런데 "십자가 안에 있다" 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다. 십자가는 도대체 무슨 동에 있는가? 우리교회는 지묘동에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게 어떻게 납득이 되냐는 것이다. 안 된다는 말이다.

◈ 나는 정말 바보였구나 !!

하지만 "십자가 안에 있다" 라는 것은 이미 저쪽의 바벨과 같이 이미 확정된 것인데, 그런데 이쪽에 있는 우리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고 말이다. 그래서 파도가 이쪽에서 쳐서 우리에게로 몰려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파도가 밀려오게 되면, "아하, 창조가 더불어 창조가 되는데, 나는 내 몸만 창조된 줄로 알고 있으니, 창조의 이 바깥 원리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나는 정말 바보였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귀담아 듣지도 않고, 반면에 술친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잘 알아듣는다" 라는 말이다. 하지만 술친구보다 더 영향력을 주는, 그야말로 자기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님의 그 밀려오는 파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는 말이다. 평소에 친구만 사귀다가, 도대체 자기가 왜 죽는지 아무 것도 모르는 체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것을 설명해야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또 길어지는데, 이참에 성경말씀도 찾아보고 하면 좋다는 것이다. "죽었다가 살았다" 라는 것은 생각할 때, 그러면 처음에는 무엇인고 하니,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라는 말씀을, 이게 누가복음이라는 복음서에 있는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십자가를 정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복음서는 마태, 누가, 마가복음을 주로 말하는 것이고, 요한복음은 따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요한복음을 살펴보겠는데, 요한복음 3장 35절과 36절에서 최종적인 해답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가면 정말 골치가 아파지는데 말이다.

그러면 요한복음 3장 35절과 36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요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 무엇이 생명이고, 무엇이 죽음인가?

여기서 죽고 사는 것이 '나' 라는 존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개념이 통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서 살아있어도 죽음이고, 하나님의 영생은 죽었어도 살아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죽었어도 살아있다는 것은, 그것은 우리 육신에서 나오는 개념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하나님의 영생이라는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영생은 어디에 나오는가? 생명나무는 창세기 2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 두 가지의 나무가 있었는데,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하나는 선악과나무라는 말이다. 물론 그때는 그 생명이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는데, 요한복음 3장 36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그 생명이라는 것이 하늘나라에서만 통용되고, 이 지상에 있는 인간들에게는 전혀 감추어진 것으로, 그런 영원한 축복상태를 생명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하신다는 말이다. 파도로 밀어 부쳐서, 즉 십자가의 효과로 말이다.

그렇게 생명이 주어지려면,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어도 죽었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진노 대상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을 전제로 깔 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지게 되면, 즉 하나님의 진노의 전제 아래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지게 되면, 그게 영생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럴 때 우리 몸은 오리지날이 된다는 것이다. 근원이 말이다. 즉 예수님의 일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데 활용되는 즐거움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 인간은,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살며시 !!

"선악과를 따먹고 죽었다. 하지만 생명나무는 따먹지 말라" 라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두 그루의 나무를 인간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한 죽음과, 그리고 생명나무의 생명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에 살며시 만들어서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죽음과 생명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이 요한복음에 와서 비로소 풀린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은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거기에 필요한 조치로서, 즉 일종의 장난감으로 에덴동산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방금 장난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것을 히브리서의 용어를 빌리면, "모든 인간은 모형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형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주님의 위해서 기도해야지 말이다.

그러니 그런 모형을 가지고 실체이신 주님을 증거하는 능력은 전적으로 주님에게 속해있는 것이지, 모형을 보고 닦달을 내고 따지면 안 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어떻고 저떻고" 라고 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모형을 붙들어봐야, 장난감에 불과한 레고가 피노키오도 아닌데, 그게 살아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 피노키오를 아세요?

여러분도 피노키오 이야기를 알지요? 어떤 늙은 목수가 자식이 없어서 나무인형을 만들었는데 천사가 와서, 이것은 마치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늙은 엘리사벳이 수태를 하게 해서 세례요한을 낳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완전히 크리스마스 분위기인데 말이다. 이 목수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인형이 아이가 되어있더라는 것이다. 반바지를 입고 말이다. 그런데 피노키오가 말을 듣지 않는데, 그래서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말을 듣지 않는데, 그래서 이렇게 늙어간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는 코가 길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늙어서 죽어간다는 것이다. 피부도 쭈글쭈글해지고, 잇몸도 모두 내려앉고 말이다. 말씀을 듣지 않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즉 원천과 기원을 묘사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를 놓치고 있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마치 이 두 가지 쇳덩이를 연결시켜놓은 역기와 같은 구조로서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이 구조를 우리가 임의로 취소하거나 폐기하거나, 혹은 바깥으로 뛰쳐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지혜로운 자인데, 즉 오직 성령을 받은 자만이 이 구조 안에서의 자기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구조 안에서 말이다. 이것이 무슨 구조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일을 하셨다" 라는 구조가 엮여진 상태에서, 물려진 상태에서, 연결된 상태에서, 그런 상태에서 다시 자기 존재를 발견하게 될 때, 그게 바로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의 특징이란 말이다. 즉 십자가라는 구체적인 사건 안에서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복음 3장을 보고 나면 요한계시록이 설명되는데, 1장 18절을 다시 보자.

(계 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 샤르트르 - '인간은 던져진 존재' !!

열쇠가 어떤 경우에 필요한가? 갇혀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안에서 손톱으로 철문의 구멍을 후벼파면 탈출이 가능한가? 전혀 불가능한데, 프랑스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이것을 실존주의라고 했는데 말이다. 인간은 갇혀진 존재인데, 인간은 기투(企投), 즉 "인간은 던져진 존재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현대의 천문학이나 물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은 그런 학문을 하면서 엄청난 허탈감을 느끼는데 말이다. 처음에는 우주를 보면 엄청 광활한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 우리가 어릴 때는 우리가 살던 마을의 골목이 얼마나 길었는가?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가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게 내가 살던 세계의 전부가 아니었는데?"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천문학자들이 처음에 우주를 볼 때 너무나 광활해서 탄성을 질렀는데, 그런데 그 우주를 모두 알아버렸을 때의 허무감과 허탈감, 그래서 결국에는 그것이 종교가 되고 마는데, 즉 "저 우주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결국 종교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물러가고 ♬

왜 그런고 하니, 이게 서로 교류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한계라는 것이 이미 놓여져 있는 상태에서 그 한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 한계도 같이 밀려버렸을 때 받는 그 갇혔다고 하는 느낌은, 그 절망감은 더욱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손에 잡혀야 하는데, 그런데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물러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도저히 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여러분이 혹시 달을 잡은 적이 있나요? 다가가면 갈수록 밀려 가버린다는 것이다. 우주를 관찰하는 사람들의 절망감이 무엇인고 하니, 우주가 그 관찰하는 행위로 말미암아서 달아나 버린다는 것이다. 자기가 관찰하지 않으면 가까이 오는데, 그런데 자기가 관찰하는 순간 그만 달아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을 현대 물리학에서는 '불확정성의 원리' 라고 하는데, 1927년에 독일의 하이젠베르크가 발견했는데 말이다. 즉 "고양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뚜껑을 열면 죽어있고, 살아있다고 여기고 뚜껑을 열면 살아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의 물리학인데, 미신이 아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선택이 선택을 받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그러니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것은, 이미 있으니까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하는 순간 저쪽에서 변신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초미립자의 세계에서는 말이다. 물론 큰 것은 그렇지 않지만, 하지만 큰 것도 쪼개면 결국에는 작은 세계라는 것이다.

◈ 십자가가 곧 우주의 원리 !!

결국은 "나는 모르겠다" 라는 것인데, 원래 십자가를 모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인데, 진작에 그러한 고백을 해야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는 단순히 어떤 젊은 사나이가 사형을 당한 사건이 아니라, 이 우주의 원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물리학자나 천문학자들이 궁금해했던 원리라는 것이다. 그 원리가 십자가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그게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고후 10: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이번 겨울 수련회에서 이런 철학이나 과학 이야기를 할지 말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는데, 오신 분들의 반응을 보고, 따라온다 싶으면 할 것이고, 그렇게 않으면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 5절에 보면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창세기 11장에서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았을 때는, 그때는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게 아니라 흩어버리는데, "저리 치워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인간의 이름을 높이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그만 흩어지고 만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사태가 이미 종결되어있는데,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목사님, 그러면 절에 가는 사람들도 이렇게 예수님을 압니까?" 라고 하신다면, 물론 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에 뭐라고 하는가? 죽은 사람도 다시 살아나서, 심판대 앞에서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것이다.

(요 5: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저는 교회에 나오지도 않고 복음을 모르는 자들을 보면 짜증도 많이 나지만, 그때마다 마음에 다지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당신들이 아무리 그렇게 해도, 죽어서도 결국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이다" 라고 말이다. 지금 아무리 도망을 쳐도, 죽어서도 십자가의 소리를 들을 때가 온다는 것이다. 그때는 이미 끝났는데, 그것을 미리 당겨서 우리가 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

요한계시록 1장을 다시 보면, 여기에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라고 하는데, 이렇게 사망과 음부는 우리의 한계점인데, 우리가 아무리 현미를 먹고 음식을 싱겁게 먹어도 소용이 없고, 이것은 반드시 열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갇혀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미 죽음을 벗어난 분만이 우리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제 주일설교를 하면서, 시간이 40분 정도로 정해져있기 때문에, 미처 설명을 다하지 못하고 넘어간 부분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출애굽의 사건, 즉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지는 것은, 그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함이 아니라 어린양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말만 그렇게 하고 그냥 넘어가고 말았는데 말이다. 그것을 설명하면 시간이 도저히 감당이 안 되니 말이다. 
 
◈ 애굽은 확장이 되는데 !!

출애굽 사건은 애굽에 있는 사람들을 건져내서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그 어떤 아이디어로도 애굽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애굽은 확장이 되니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스라엘이 제 아무리 도망을 쳐도 애굽도 역시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오직 어린양의 죽음인데, 그래서 천국에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그곳이 곧 천국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이 부분은 어려워서 후다닥 넘어갔는데, 본문과 매치도 되어야하는 문제도 있고 해서 말이다. 그리고 설교를 너무 길게 하면 제가 집에 가면 좀 피곤해질 수도 있는데, 앞으로 딸도 시집을 가고 나면 집에서는 정말로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ㅋㅋ).

아무튼 '어린양의 죽음' 이라고 하는, 이것을 달리 말하면, 어린양을 보여주기 위해서 애굽은 다시금 조성이 되어야하고, 갇혀있는 자들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상황이 현재 21세기에서도 계속해서 반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양을 어린양으로 드러내고 북돋워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활용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 십자가, 복음,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돌아서면 또 다시 김연아, 류현진, 월드컵, 그렇게 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식이나 부동산,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데, 그러니 애굽을 벗어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벗어나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말이다.

◈ 우리 몸이 애굽을 기억한다 !!

그래서 "우리 몸이 애굽을 기억한다" 라고 했는데, 우리가 가장 애굽적일 때, 우리 몸은 가장 즐겁다는 것이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로, 그렇게 우리는 옷을 만들어 둘둘 말아서 입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인생의 성공을 체험하게 되는데, 환희를 느낀다는 말이다. 우리의 육신이 그렇다는 말이다. 어린양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 주변에 있는 이런 상황들이 애굽으로 돌변되는 상황으로, 그렇게 어린양으로부터 조치가 취해지게 되면, 그게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갑자기 갇혀있고, 그런데 탈출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절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오게 되면 감사하게 여겨야 하는데, 왜냐하면 어린양을 바라보라고 주께서 다시 조성하셨다는 말이다.  

◈ 다시, 역기 그림으로 돌아가서 !!

네 번째를 다시 해보면, 이런 역기 그림에서, 여기 뒤에 있는 쇠뭉치, 즉 예수님의 확정된 어린양의 죽음이 말씀의 완성이라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면, 우리는 거기에 봉으로 연결이 되어서, 여기 예수님의 상황이 폭발을 해서, 그 빅뱅이 우리에게 파동을 쳐서, 오늘날 어린양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거기에 같이 매달려서 작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 적응하려는 인간, 그러나 !!

지금 이 보드 펜을 너무 흔들어서 주위가 까만 먹물들이 마구 떨어져있는데, 이런 적은 또 처음인데 말이다. 요즘 힘이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이 세상 자체가 애굽인데,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적응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런 적응이 우리 인간의 본성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절망할 것이 아니라, 이 애굽에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것인데, 즉 어린양의 죽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앞으로 그 어린양의 죽음을 닮아가야 되는, 그렇게 반드시 주께서 만들어내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야곱의 축복이 아닌 이스라엘의 축복이라는 말이다.

물론 야곱과 이스라엘은 동일한 인물이지만, 야곱을 염두에 둠으로서 이스라엘을 그 야곱 속에서, 즉 '속이는 자' 속에서 이스라엘을 뽑아내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시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디에서 구원을 받는가? 야곱에게서 구원을 받아야하는 것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말이다.

◈ 내가 예수를 죽였다 !!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 라는 것은 복음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러면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내가 예수를 죽였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이 같은 육신이기 때문에, 같은 아담이기 때문에 말이다. 말이다. 바로 '나' 라는 육신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라고, "내가 바로 예수님을 죽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속에서,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했다는 그 소식을 우리에게 알려줌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 우리가 활용을 당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주님에 의해서 그렇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 그러한 자들이 바로 '주의 종' 이라는 말이다.

◈ 너희들도 나처럼 !!

그래서 여기 요한계시록 1장에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라고 하는 말씀은, "더 이상 애굽과 같은 이 세상에서 너희들에게 어떤 압력이나 위협이 있더라도, 나 예수가 너희들에게 관여하는 한 너희들은 죽어도 나처럼 살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요한계시록 1장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으로 나올 2장, 3장, 4장에 나오는 모든 일곱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 즉 "이 세상 자체가 애굽이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압박을 가하고 위협이 있을 것이다. 인생 자체가 괴로운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전에는 죽었지만 이제는 내가 이렇게 살아있잖아. 내가 살아있는 한, 나와 함께 있는 너희들은 죽어도 산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는 죽어줘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더라도 산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312페이지를 다시 보자.

** 사람도, 하나님도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로서 온 우주는 '죽음 안의 체제'를 갖추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음에서 벗어나셨다.

(눅 24: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 다시,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에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게 왜 어려운고 하니, 여기서 말하는 '죽은 자' 라는 것은, 예수님만 죽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비롯해서 모든 인간들이 다 죽은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즉 모든 인간이 죽는 것은 당연한데, 그런데 죽지 않는 것은 당연한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분이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얼마나 율법을 잘 지키고, 그리고 "착한가? 그렇지 않은가? 얼마나 양심적인가? 교도소에는 몇 번이나 갔다왔는가?" 라고 하는, 그러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문제를 닦달내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죽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애굽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듯, 너희들은 죽음자체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를 보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라고 하셨는데, 여기에 대해서 제가 질문을 할 테니 답변을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처음 질문은 실체적 질문이고, 두 번째는 구조적 질문인데 말이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 죽음의 권세가 기가 꺾이는 지점은 어디인가?

교회가 죽음의 권세를 이겼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교회를 세우리니"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실체적 질문을 하겠는데, 이렇게 예배당이 있고, 마당이 있다고 하면, 주차장도 이렇게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쯤 오게 되면 죽음의 권세가 기가 팍 죽겠는가? 예배당 입구인가? 주차장인가? 도대체 어디냐는 말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면서 "아, 나는 살았구나" 라고 하는가? 그게 아니면 예배당 의자에 앉으면 그렇게 되는가? 그 의자에 앉았다가 죽으면 천국에 가는가? 그러면 음부의 권세를, 즉 죽음의 권세를 이겼느냐는 말이다. 그것도 아니면 아예 강대상에 기어올라가면 되는가?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음부의 권세를 이겼느냐는 말이다. 그게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당은 일단 교회가 아닌데, 일단 우리는 그렇게 합의를 봤다는 말이다(ㅋㅋ).

교회라는 것은 평신도, 집사, 권사, 장로, 그렇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평신도가 되어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집사나 권사 정도는 되어야 하는가? 어느 정도가 되어야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가?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평신도, 집사, 권사, 장로로 되어있는 것도 교회라는 말인가? 교회가 아니라는 말인가?

◈ 음부의 권세를 이겨야만 교회인데, 그런데?

지금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음부의 권세를 이겨야만 교회라는 것이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맞는데, 교회는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정하셨다는 것이다. 죽음의 권세를 이긴 곳, 즉 죽어도 다시 사는 힘이 발현되는 곳이 교회라는 말이다. 그러면 장립집사가 되면 그 정도의 수준이 되는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목사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어떤 구조적 행태도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당도 교회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 지상에 있는 교회는 무엇이냐는 말이다. 구조적인 것도 아니고, 헌금을 해서 예배당을 지어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에 가서 음부의 권세를 이기느냐는 것이다.

저의 질문이 바로 이것인데, 이것을 신학생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일반 교인들은 물론이고, 목사도 모른다는 말이다. 주님이 규정한 것은 바로,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것이 교회인데, 즉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교회라고 주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주님이 이미 결정했기 때문에 지금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데, "그렇게 되자" 라고 하는 차원이 아니고 말이다. 분명히 그런 교회가 있을 텐데, 그러면 그 교회가 어디에 어떤 행정체제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에 있다고 하면 이런 질문에 답변이 안 되니까,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신천지는 뭐라고 하는가? 자기들은 아주 조직이 잘되어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조직이 잘되어있으면, 자동적으로 잘 모아져서 그게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가? 거기에 비해서 십자가 마을은 조직적으로 어설프다는 말인가? 요즘 대전에는 난리가 났다는데, 거기에는 신비적인 총본부가 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대전의 거기에 가면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말인가? 과연 그러하냐는 것이다. 

◈ 말씀이 구체화되고 반복되어지는, 우리의 몸 !!

여기에 대한 답변이 있어야 하는데, 질문만 할 것이 아니고 말이다. 사실 그 답변은 제가 미리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막상 예상문제에 들어가니 그동안 공부한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ㅋㅋ). 그것을 처음에 제가 언급을 했는데, "우리의 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화하고 반복이 되어지는 몸이다" 라고 말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이런 예배당 짓기, 강의시간에 휴대폰을 꺼놓지 않아서 울리게 하기, 이런 모든 것은 우리의 육신이 반드시 이런 쪽으로, 이렇게 말씀과 일치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한껏 아이디어를 다 뽑아내어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 교회를 만들겠습니다" 라고 해서,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러한 예배당도 지어보고, 조직적으로도 한번 해보고, 그렇게 해보면서 "아하, 이것이 말씀과 일치되는 것이 아니구나. 그러면 왜 말씀과 일치가 되지 않을까?"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육신의 다루어졌기 때문에, 그 육신의 죄의 열매들을 우리의 몸을 통해서 발휘가 되도록 주님께서 슬쩍 다루어주신다는 말이다.

◈ 그래, 그래, 너희들 속성대로 한번 해봐라 !!

다시 말해서, "그래, 그래, 너희들 속성대로 한번 해봐라" 라고 하면, 결국은 탕자처럼 "우리는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 되요" 라고 하면서 돌아오는 사람이 교회라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의 교회라는 것은, "이것이 교회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교회가 아니고, 저것도 교회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어린양의 죽음과 매치를 시키면서, 어린양 중심의 교회를 만드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를 들어보면 굉장하게 간단한데, 그런데 막상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는가?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서 자기가 그 교회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교회에 대해서 건드리면 마치 자기 자존심을 건드린 것과 같이 여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부부싸움을 하다가 너무 심하게 하니 이웃에서 신고해서 경찰이 동원되었는데, 경찰이 오기 전에는 둘이서 싸우다가, 경찰이라는 제3자가 개입하니까 둘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의 육신적으로 보면 항상 제3자에 머물러있는데, 그런데 우리에게 말썽이 생기면 개입을 하시는데, 완전히 구약의 사사기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어도 우리끼리 잘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다가, 갑자기 적들이 몰려오면, 그제야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이 애굽에서 성공하려고 하는데, 빠져 나올 생각이 아니고 말이다. 즉 애굽에서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나는 이 세상이 좋아요 !!

그런데 어린양은 무엇인고 하니, 지금 우리를 애굽에서 빼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애굽 자체가 음부의 권세이고 죽음의 권세를 가졌기에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음부의 권세이고 죽음이고 간에, 우리의 몸은 이 세상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푹 빠져 산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잘해라. 소망을 가져라" 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너는 죽었고, 나는 살았다" 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온다고 하면, 그래서 이 땅에 그냥 머물러 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 순간만큼은 어린양이 고맙게 여겨지는데, 즉 빠져나갈 수 없는데 이미 빼내어주셨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라는 말이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를 데려감이 아니라" 라고, 즉 예수님이 살던 곳에 우리를 다시금 집어넣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반복' 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우리 몸을 통해서 재탕하고 삼탕을 하신다는 말이다. 우려먹고 또 우려먹는다는 것이다.

◈ 짜장면, 하나 주세요 !!

제가 중국집에 갈 때마가 가끔 생각하는 게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그냥 "짜장면, 하나 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 짜장면을 만드는 사람은 얼마나 지루하겠느냐는 것이다. 오는 손님마다 짜장면인데, 돈이 되는 팔보채를 시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요리사는 한껏 자기 솜씨를 부리고 싶은데, 그런데 고객은 매일같이 짜장면을 달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면을 때리면서 "또 짜장면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짜장면을 먹다가 질려서 "팔보채를 주세요" 라고 하면 반갑다는 말이다.

우리 몸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세상살이를 좋아하는데, 남들에게 기죽지 않고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평생을 살면서 말이다. 심지어 늙어도 곱게 늙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톡스도 맞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정말이지 쓸데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때는 짜장면이 아니라 팔보채를 주문한다는 것이다. 그때 옆 사람이 "아니, 당신은 그동안 짜장면을 좋아했는데, 갑자기 무슨 팔보채인가?" 라고 해도, "그게 아냐. 나는 이제 짜장면에 너무나도 질렸어"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십자가 마을이나 우리교회 사람들은 팔보채에 너무 질려서, 다시 또 짜장면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에 너무 질려서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왔다갔다한다는 말이다. 이렇든 저렇든 간에 우리는 역기에 서로 맞물려 있는데, 빼도 박도 못하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잘남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하고 싶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주님께서 어린양으로 빼내어주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육신과 주님의 생명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그것을 우리의 몸을 통해서 계속해서 발휘토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 주님은 어디에 살아계십니까?

그래서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다 죽어버렸다" 라는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왜 예수님의 무덤에 시체를 보려고 찾아왔느냐는 말이다. 시체를 보려고 하지 말고, "주님은 어디에 살아계십니까?" 라고 하면서 와야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를 비롯한 아줌마들은 그게 아니고, 예수님의 시체라도 찾아서 잘 간수해드리려고 왔다는 것이다.

(마 28:1)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그러면 왜 자꾸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은 자기 입으로 분명히 사흘만에 살아난다고 하셨는데 말이다. 그런데 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또 죽은 자를 찾느냐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과 급이 다른데 말이다. 같이 죽어야될 분이 아닌데, 그런데 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죽은 자를 찾듯이, 그렇게 예수님을 찾느냐는 말이다.

◈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우리 경험에는 없어 !!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에는 없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 경험에 없으면 없는 것이란 말이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관찰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즉 경험으로 반복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부활했다" 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자꾸만 다그친다는 것이다. "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가? 나는 그냥 살아난 것이 아니라, 죽은 데서 살아났다" 라고 하시는데, 바로 그런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죽은 데서 살아난 과정이 말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혼자서 살아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를 구원시키는 능력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로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너희들도 죽었지만 나처럼 살 수 있다" 라는 것인데, 누구를 믿으면 말인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으면 살 수 있다' 라는 의미는?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이 부분이 어려운데 말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살 수 있다" 라는 것인데,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몇십 년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을 믿고 있다는 말이다.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산다" 라는 것이 말이 되는지 말이다. 우리가 박근혜를 믿으면 청와대에 취직이 되는가? 말이 안 되는데, 물론 그렇게 믿고 설치는 인간들도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예수를 믿으면 산다" 라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믿으면 산다" 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고 하니, '산다' 라는 것이 믿음을 조성하게 되면, 이 고리에 엮이게 되면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산다' 라는 것인가? 예수님인데,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죽음인데, 그러면 그 죽음에서 살려고 믿는 믿음이 있는데, 그러면 그 믿음을 '1' 이라고 하고, 주님이 주신 믿음을 '2' 라고 하면, 바로 그 '1'과 '2'의 차이성에서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의 믿음을 버릴 수가 없어 !!

말이 좀 어려운데, 이미 죽은 자가 살아서 천당에 한번 가보려고 믿게 되면, 하지만 그것은 이미 죽은 자에게서 나온 믿음인데, 즉 육신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살아난 예수님에게서 오는 믿음이 있는데, 그 믿음이 찾아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자기 믿음을 버리고 예수님의 믿을 가지고 가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자기의 믿음을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부인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부분을 놓치면 안 되는데, 복음을 안다고 하는 목사님들도 이 부분을 빠트리고 설교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결국은 예수님을 자기 이용거리로밖에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정말로 중요한데, "그러면 나를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지" 라고 하는데, 글쎄 그것이 안 된다는 말이다.

◈ 그때부터는 갈등과 투쟁이 !!

그러면 여기 예수님 쪽에서 온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믿음은 내다버려라" 라고 하면서, 그때부터는 갈등과 투쟁이 생긴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도 고집이 있지만, 주님도 한 고집을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고집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믿는 나를 믿고 싶어"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육신의 본성이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도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하는 나를 믿는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3년 전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3년 전의 인간과 지금의 자기를 동일한 인간으로 여기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붙들고 싶다는 말이다.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내가 죽여서 사라지고, 오늘의 나는 내일이 되면 또 사라진다" 라는 말이다.

이것은 들어보면 맞는 말이지만,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거부 반응부터 먼저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늘은 사라지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뭔가 누군가로부터 한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자기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린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제는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는데, 그 어제는 이미 시간과 함께 날아가 버리고 없고, 지금 주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님의 믿음과 우리 자신의 믿음이 서로 갈등과 투쟁을 일으키도록 만들어놓고, 거기에서 주님의 믿음이 승리하도록,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 기생 라합의 경우에 !!

예를 들어서, 기생 라합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냥 자기 직업에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데 그만 정탐꾼들이 와서 그들을 살려주게 되는데, 그런데 이 정탐꾼들이 옴으로서 기생 라합은 "내 민족인가? 아니면 저 히브리 민족을 따라가야 하는가?" 라고 하는 갈등이 생길 때, 주님의 승리로 인해서 기생 라합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믿음이고, 거기에 대한 행함이 거짓말을 해서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께서 하신 행함이 있는 자들은, 이런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그냥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려고 하면, 어떤 오류에 빠지는고 하니, 행함이 믿음을 대신했기 때문에, 믿음이 그만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논리상 말이다.

◈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려고 하면, 두 개가 함께 !!

여기에 이렇게 보드마카인 매직이 있고 지우개가 있는데, 이 매직이 믿음이고 지우개가 행함이라고 하면, 그래서 주께서는 행함을 원하지 믿음은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면 이 믿음인 매직을 버리게 되는데, 그러면 그런 사람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행함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려고 하면, 두 개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육신과의 투쟁 자체가, 그러한 차이성이 계속해서 우리 속에서 근원으로서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나밖에 모르는 인간인데, 주님께서 승리하셔서, 행함이 아닌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야고보서에서 출발해서 로마서에서 그 해답이 제공된다는 것이다.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는 말씀이, 그것이 야고보서에서 출발하게 되면 다 맞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주님이 개입해서 유발시킨 행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주님이 주신 믿음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믿음에서 와서 믿음으로 끝나야하는 것이지, 믿음에서 와서 행함에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중간에 믿음이 날아가게 되면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말씀자체가 서로 맞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 주님만이 나를 이겼습니다 !!

다시 말해서, 믿음이 믿음으로서 있게 되려고 하면, 그 믿음이 자기의 어설픈 행함과 더불어서 함께 있는,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렇게 함께 있는 믿음, 즉 "주님만이 나를 이겼습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렇게 창조의 원천이 반복적으로 행사되는 모습으로서 우리 성도는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의 이야기가 아니고,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 1장에서 "내가 죄인 중의 괴수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고린도후서 13장에서는 "나의 약함에서 오히려 주님은 강함이라" 라고 하는데, 거기에 모두 다 들어있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고후 13: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마지막으로 교재 312페이지를 보자.

**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아들에 대한 순종으로 바뀌어야 한다. 사람들로부터 싫어버린 바 된 그분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분 앞에서는 우리는 다 양처럼 도망쳤음을 인정해야만 하고, 그분의 영에 의해서 그분 앞으로 불려나와서, 그분이 우리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았음을 되풀이해서 인정해야한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아들에 대한 순종으로 !!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아들에 대한 순종으로 바뀌어야 한다" 라고 하는데, 이 부분은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데, 즉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한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모든 것을 아들에게 일임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안 되고 그 아들인 예수님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물론 이것은 제가 강조한다고 될 일은 아니고, 오직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즉 "내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고,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는 가짜 하나님, 즉 내 육신이 만든, 내가 잘 되려고 믿는 하나님이었다" 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런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매일같이 지금도 주님께서 창조하신 그 원천을, 그 근원을 보여주는, 그래서 날마다 애굽이라는 사태와 마주치면서 "내가 얼마나 이 세상을 좋아하고, 얼마나 나만 생각하면 살아가는가?" 라는 것을 통감하고 느끼게 만드는, 그 놀라운 은총, 그래서 우리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은총이 그 바벨의 봉을 통해서 지금도 우리에게 파도처럼 철썩 철썩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 피로 된 파도가 쳐서 말이다. 그런 파도가 칠 때마다 우리의 인생은 그야말로 쓸려서 내려가는데, 물론 그럴 때 "날 잡아봐라" 라고 하면서 가끔은 사진도 찍고 말이다. 그렇게 "나같이 빠져 나오지 못하는 인간이 오직 피로 인해서 살았습니다" 라는 고백, 그런 놀라운 기적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옛날 선배들이 반복했던 생애를 다시 반복하게 된 것은 주님의 조치인 줄로 압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십자가와 창조를 보여주는데 우리의 몸이 활용을 당하게 된 이 은혜가, 이미 연결이 되고 엮여버린, 그래서 그야말로 꼼짝도 못하고 함께 임마누엘이 되는 상태임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1,16 오후 4시에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