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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강의-성령의 수술130125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8. 24. 09:46

2013-01-26 02:05:44 조회 : 1368         
성령의 수술 130125 이름 : 이근호 (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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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 (IP:121.♡.190.236) 13-02-08 10:29 
광주 강의(2013. 1. 25) 38-1

에스겔 36장 26절을 봅시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에 ‘육신’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하나님은 사람이 있어도 그것을 ‘사람이 있다’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있음’은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만 해당됩니다. 우리는 있다가도 없어지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흙’입니다.

흙의 특징이 뭐냐 하면, 지구에 사람이 산다는 것은 지구 위에서 사람이 뛰고 노래하고 춤추고 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흙의 일부가 돌출되어 있는 것인데, 움직여도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설치고 활동하고 해도 이것은 흙덩어리 일뿐입니다. 여기에 말씀을 주면 변화가 일어나겠어요? 아니지요.

만약 우리가 흙으로 같이 붙어있지 않고 독립되어 있다면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되는데, 이것이 아니고 인간 자체가 흙에서 돌출한 것으로 흙의 일부라면 말씀을 주셔도 어떤 변화도 보일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너는 뭘 해도 네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흙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인간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런 안목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뭔가 계획하고 사업을 추진하면서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고 여기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듯 잠시 흔들릴 뿐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간다면 새롭게 환경이 바뀐 것으로 여기잖아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약간 늙은 흙, 여전히 땅의 기운만 냄새 맡고 사는 존재, 땅에서 뿌리가 뽑힌 적이 없는 자로 봅니다. 대통령도 그렇고 노숙자도 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흙에 속해 있으면서 벗어날 마음도 없고, 고생을 해도 이 세상이 좋고 그렇습니다. 주의 말씀을 따라 천국 가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고 관심도 없어요.

성경 말씀은 우리가 흙과 결별하고 여기서 탈출해서 천국으로 오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흙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즉 육체로 봅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에스겔을 데리고 골짜기로 가는데 그곳에 뼈들이 있어요. 인간은 살아있다고 여기지만 세월 지나면 하나의 해골이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 말씀 “흙으로 지음 받아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흙에서 벗어나지 않았어요. 말씀은 우리를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기에 “나는 말씀 듣고 새사람 되었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있고 세계가 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현대철학에서도 이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합니다. 현대철학에서는 ‘내가 여기 하나의 개성으로 있다는 것은 잘못이고,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중에 존재한다.’고 하지요. 그러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이미 세계 속에 포함이 되어 있지요.

내가 세상 분위기에서 독립해서 독야청청 홀로 있을 수 있습니까? 어림도 없지요. 세상이 요동치면 같이 흔들리게 되어 있어요. 세상은 나와 같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철학에서는 나를 없애버리라고 합니다. 나는 액체입니다. 간호학과 졸업생이 취직이 잘 되니까 많은 학생들이 간호학과로 몰려듭니다.

세상이 가는 데로 우리는 출렁거리면서 따라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있고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세계만 달랑 있고 나는 거기에 담겨 흘러가는 것뿐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흙이라면 우리는 흙의 돌기(돌출)부분입니다. 성경은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을 ‘육신(육)’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흙에서 왔기에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면 육이 아닌 자가 있는가? 그런 자는 없습니다. 인간은 다 육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준 것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재 파악을 못하니까 주재 파악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겔36:26)을 보면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준다”고 합니다. 이게 뭔가 하면, 나는 나의 세계만 있는 줄 알았는데 새로운 영역, 새로운 세계가 들어오는데 이것이 바로 영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영의 세계가 들어온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여기에 모델이 된 자가 인자, 에스겔입니다.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되고, 새로운 세계가 임하게 되면 우리 자신을 나로 보는 안목에서 육신으로 보면서 영과 마주할 준비가 갖춰져요. 나라고 여겼던 것이 육신으로 개념 자체가 바뀌는데, 하나님이 나를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육으로 보는 이유는 영과 접목을 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순간접착제(5초 본드)를 바를 때 어떻게 합니까? 접착 면을 사포로 닦고 난 후에 본드를 바르고 5초 후에 붙이면 됩니다. 이처럼 준비 단계, 즉 사포로 닦아서 우리의 면상이 깎여 나가게 만들지요. 이렇게 보면 됩니다. 우리 자아의 피부 층을 뜯어내면 뭐가 보일까요? 육이 보이지요. 고상하게 자기를 치장하는 것을 강제로 뜯어내는 거예요.

고상하고 아름답고 훌륭한 것으로 꾸민 것을 뜯어내면 그 안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드러납니다.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마음속으로 음행하는 것도 간음이고, 형제에게 욕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하셨어요. 이것이 강제로 피부 층을 뜯어내는 작업입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어떤 선교사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을 알고 난 뒤 “내 손을 잘라버리세요. 제 눈을 뽑아주세요. 이제 하나님을 알게 된 이상은 이런 것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주께서 우리의 피부 층을 뜯어냅니다. 진짜 뜯어내면 병원에 가야 하지만, 성령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덮쳐오면 우리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치장해 놓은 모든 것들을 뜯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사라지고 육신이 드러납니다. 그동안 우리는 육신을 감추면서 살아왔는데 성령이 와서 우리의 피부 층을 뜯어내니 더러운 육신이 노출되는데, 이 모습은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더러운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과의 마주침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의 피부 층을 뜯어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했는데 전혀 그게 아니었습니다. 지금 유다는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가 있습니다. 이방 나라에 유다가 사로잡혀 갔다는 것은, 유다 나라도 이방 나라 못지않게 이방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동안 이방 나라 바벨론의 부귀영화를 많이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다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도록 했습니다. “바벨론이 그렇게 부러우면 그곳에 가서 살아라.” 이렇게 된 것이지요. 입으로는 하나님을 찾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고 세상이 부럽고 좋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로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고 세상 나라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원수의 나라에 유다 나라를 집어넣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니 둘 다 원수의 나라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뭔가 하면, 포로 잡혀간 그들에게 새 영을 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제 2의 출애굽이 시작됩니다. 제 1의 출애굽은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이 나온 것이고, 제 2의 출애굽은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다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제 1출애굽은 영이 아니고 율법으로 왔지요. 율법으로 와서 율법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었고, 제 2출애굽은 하나님의 영을 집어넣습니다. 26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7절에는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라고 했어요. 이것이 바로 기존의 모든 기독교 신앙은 엉터리고 반 복음적이고 개혁주의도 전부 엉터리임이 드러나지요. 누가 행하게 합니까? 주께서 행하게 하시는 거예요.

술에 취하는 자는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어요(고전 6:10). 술 마시는 이유가 취하려고 먹지 안 취하려면 음료수를 마시지 왜 술을 마시겠습니까? 그런데 술 취하는 자는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단 말이지요. 그런데 나는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지금까지 술을 안 먹었다면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지옥 갈 이야기입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술 먹는 자는 지옥 가고, 나는 술 안 먹었으니까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 내가 바로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디에 위반되어서 그렇습니까? 새 영의 작용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술 안 먹었다는 내가 방해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는 거지요.

내가 그동안 술을 안 먹은 것은 주가 안 먹게 하신 것뿐인데, 그것을 우리는 ‘내가 굳은 결심을 해서 안 먹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령이 아니면 나는 술을 먹어도 천 번도 더 먹었다. 지금이라도 성령이 떠나시면 지금도 술에 끌린다.’는 것입니다.

술을 취미로 마시는 사람도 있지만 정말 마시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대학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마음껏 마시고 취하고 싶지요. 정말 마시고 싶은 상황에 있어요. 그러나 성령께서 못 먹게 막으시는 환경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설사 술을 먹었다 하더라도 “주여, 이것은 성령이 하신 것이 아니고 내가 좋아서 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뜻에 어긋납니다.”라는 마음으로 먹는다면 이것은 자신의 육신 됨이 드러나는 거예요.

이래도 하나님께서 나를 건지신다는 믿음의 바탕 위에서 하는 짓이에요. 참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참아봐야 점점 더 오기만 생기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아버지가 인쇄소를 운영하다 세상을 떠났는데 타지에서 사업을 하든 아들이 아버지 사업을 잇기 위해 귀향해서 인쇄소에 갔는데, “절대 열지 마세요.” 라는 봉투를 발견했어요.

아들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야겠다는 의미에서 열지 않았어요. 3년을 버텼습니다. 피부 층은 내가 뜯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뜯어줄 때만 영이 임합니다. 3년을 버텼는데 점점 열고 싶은 욕망이 강렬해 집니다. 결국은 열어봤어요. 200장 정도의 인쇄물이 있는데 전부 “절대 열지 마세요.”라고 쓰여 있었어요.

손님이 부탁한 거예요. “절대 열지 마세요.”라고 인쇄해 달라고. 그런데 아버지가 그것을 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돌아가신 거예요. 그러니까 봉투에 쓰인 “절대 열지 마세요.”라는 것은 안의 내용물을 겉에 표기한 것뿐인데, 아들은 아버지가 중요한 무엇을 숨겼다고 생각하고 참다 참다 더 이상 못 참고 열어본 것이지요. 이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뜯어봐야 피부 층만 있어요. 아무리 뜯어도 계속 육만 있을 뿐입니다. “나는 말씀 열심히 지켰다.” 또 뜯어보면 “나는 말씀 열심히 지켰다.” 이것뿐입니다. 100년을 살아도 하루 산 그 인간의 반복일 뿐입니다. 봉투 안에 있는 종이처럼 똑같은 육신입니다. 육신이 이틀 산다고 육신에서 천사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육신이 다음날 자고 일어나도 그 육신입니다.

모든 주의 일은 하나님이 나서서 천국으로 보내지 우리가 개과천선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실어서 우리에게 그냥 집어넣어 줍니다. 어떻게 집어넣는가? TV드라마 [마의]가 있어요. 중국의 황후가 골수에 문제가 생겨서 구멍을 뚫어서 그 통로로 약재를 넣습니다. 하나님도 이처럼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씀을 주십니다.

육신에게 백날 잔소리를 해봐야 우리는 고상한 껍데기만 달라붙어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구멍을 뚫습니다. 이것을 ‘사건’이라고 합니다. 구멍을 뚫어서 약재를 넣어버립니다. 예수님의 피를 넣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가면 죽을 너희 몸도 그 영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개혁주의 신학은 엉터리임이 드러납니다. 분명히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원하는데, 그들은 “성령으로 구원한다면 말씀은 왜 주셨는가?” 라고 나옵니다. 성령을 받고, 그 다음에 말씀을 지켜야 되지, 성령은 받았는데 말씀을 안 지키면 줬던 성령도 회수한다는 겁니다. 이건 뭐냐 하면, 중국의 황후가 마취되어 엎어졌는데 의사가 “황후님, 앞으로 착하게 살래요, 안 살래요? 착하게 안 산다면 약재 확 뽑아갑니다.” 이런 식으로 치료합니까? 아니죠.

지금 엎어져 있는 황후가 앞으로 착하게 살지 어떨지 그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그냥 환자이기에 치료를 하는 것입니다. 황후가 엎어져 있는 것을 가지고 ‘육’이라고 하는데, 육은 육밖에 안 나와요. 육은 어둠을 좋아하고 세상을 좋아하고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성경에서는 세상이 악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우리 귀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환영받고, 인정받으면서 살고 싶지 세상을 떠날 마음이 없어요. 이게 육입니다. 그래서 육은 죽은 거예요.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네가 죽으리라.” 이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고 이미 죽었어요. 그리고 진짜 살아계신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안개는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은 죽은 것인데, 죽은 인간에다 주께서 성령을 집어넣었어요. 마치 골수염 걸린 왕후에게 구멍을 뚫어 약을 투입한 것처럼. 그래서 낫게 된 황후는 “감사합니다. 제가 앞으로 도울 일 있으면 말씀하세요. 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런 반응을 하는 것이 열매라면 황후는 무슨 열매를 맺은 거예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말하고 웃고 걷고 하는 모든 것이 약기운 때문이니까 결국 이것은 약의 효과, 즉 성령의 효과지요. 성령 본인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을 집어넣었지요.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다 이루심을 집어넣으니까 그때부터 성령에 속한 사람들은 말씀이 어떤 식으로 나에게 다 이루셨는지 확인하고 증거하는 삶이 됩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이이 되리라.”고 하셨지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자기 증인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약이 들어있다는 것. 그래서 “인간도 아닌 내가 예수님 때문에” 이런 말을 계속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는 육이니까 결국 죽지요. 육은 육으로 가야 되는 거예요.

이러한 변화 자체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런 변화 자체를 주께서 뒤집을 수 있겠어요? 죽은 사람 등에 구멍을 뚫어서 약물을 투여해놓고 말 안 듣는다고 해서 약물을 다시 빼내느냔 말이지요? 그렇게 하실 경우가 있어요. 성령이 온 게 아니고 율법이 왔을 때는 그렇게 돼요. 율법은 우리 마음까지는 안 오고 마음 앞까지 와요.

“십계명 지켜! 못 지키면 철수한다.” 이것은 우리 앞까지 왔고 우리 마음속으로 안 들어왔기 때문에 얼마든지 철수가 가능해요. 그러나 성령이 온다는 것은 구멍을 뚫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점령해 버린 거예요. 골수와 뼛속까지 성령이 임했는데 이것을 ‘성령의 보증’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 다시 털어내고 무효화 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무엇이 정리가 안 되는가 하면 “성령에 의한 예수님 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 정리가 안 돼요. “그렇다면 신약 성경은 그 이야기만 반복해야 될 텐데 왜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이게 서로 융합이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성경에는 십자가 이야기도 있고,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도 있는데 둘 다를 이야기해야지 십자가만 이야기하면 다른 말씀은 기록할 필요도 없는데 왜 기록해 놓았는가? 이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왜 이해가 안 될까요? 성령을 안 받았기에 그렇습니다.

성령을 안 받았으면 그 사람은 그냥 육신입니다. 그런데 사단이 이런 육을 인간으로 둔갑시킵니다. 새로운 인간이라고. 이것은 육이 원래 기대했던 바입니다. “사람이 고생하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이다. 따라서 생로병사의 고생만 있는 세상에서 행복으로 가려면 외부로부터 축복을 받아야 한다.” 그 축복을 받게 되면 생로병사를 느끼는 이 가치가 소멸될까요, 유지될까요?

육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부인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이게 문제 아닙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나를 버림이 아니고, 나를 더욱 위대한 나로 거듭나기 위해서 하나님의 힘을 잠시 빌려오는 거잖아요. 교회 가는 이유가 자기 좋으라고 가지 남 좋으라고 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공부해서 남 주나?” 하는 것처럼, 예수 믿어도 내 잘 되려고 하지 남을 위한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절대 포기 못하는 거예요. 이것은 결국 ‘영웅주의’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언젠가는 보란 듯이 성공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영웅을 지향하는 자들의 마음입니다.

“지금 나는 영웅은 아니지만 내 속에 영웅이 될 요소가 있다. 이것이 발현되기만 하면 너희들은 결국 내 앞에 다 무릎 꿇을 거야.”라는 것이 육의 본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에요. 그들이 할례는 행했지만 결코 마음속에 할례를 행한 적이 없어요.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뭔가 하면, 라마르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다윈 이전 사람인데 용불용설과 획득형질이 있어요. 용불용설은 쓰는 것은 발달하고 안 쓰는 것은 퇴화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환경에 적응된 획득했던, 자기에게 습관화 되어서 굳어진 것은 다음 후손에 가서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장기가 그대로 자식에게 나온다는 것이 획득형질입니다.

그 후 다윈이 나왔어요. 이 사람은 적자생존을 주장해요. 환경이 자연선택에 의해서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둘 다 노린 게 뭐냐 하면, 언젠가는 내가 반드시 빛 볼 날이 올 거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나에게는 내 출세에 지장되는 것도 있고 도움 되는 것도 있는데, 내가 어릴 때부터 내 속에 있는 것들을 잘 활용해서 위대한 나를 만들려는 생각이 현대의 진화론입니다.

이게 모든 인간의 의식입니다. 그러면 문제가 뭔가? 유대인들이 할례를 한 두 세대에만 한 게 아니고 대대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것은 라마르크에 의하면 획득형질이지요. 그러면 자식을 낳으면 할례 행할 필요 없이 출생 때부터 할례 된 채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요.

라마르크의 주장이 옳은가, 엉터리인가 하는 문제를 따지기 전에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좋아했다는 게 문제입니다. 왜 좋아했지요? 자기 마음에 맞아떨어지는 소리를 했기에 그래요. 주의 말씀은 안 좋아해요. 다윈이나 라마르크처럼 인간이 긍정할 수 있는 주장을 듣고 싶어서 환장한 것이 우리들입니다.

누가 그런 소리를 안 해주면 스스로 자신한테 그런 식으로 자신을 격려합니다. 이게 바벨론인데 이스라엘도 이것을 좋아했어요. 좋아할 수밖에 없지요. 바벨론이나 유다나 둘 다 육이니까. 똑같은 인간인데 이스라엘에는 십계명이 왔다가 가버린 거예요. “십계명 지킬 거야? 탐내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부모공경 할 거야?” “예이 죄인들!” 하고 가버린 거예요.

[개그콘서트]에 보면 인형 ‘브라우니’한테 명령합니다. “물어! 물어!” “뛰어! 높이 뛰어!” “못 뛰어?” “평발이네.”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죽은 자로 봅니다. 죽은 자가 과연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율법이 말하는 바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3:19).”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에 포로 잡혔다는 성경 말씀은 진짜 현실입니다. 이게 소설이 아니고 실재입니다. 실재로 율법은 왔다가 가버렸고, 성령이 실재로 우리한테 임하면, 우리에게 구멍을 뚫어 성령을 통해 예수님 피를 투입하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뭘 해도 자기 자랑 안 하고, 내가 잘라서 구원 받았다는 소리 안 하고--

“목사라서 술을 안 먹지 집구석 꼴 보면 흠뻑 취하고 싶다. ‘참이슬’인지 ‘처음처럼’인지 닥치는 대로 실컷 마시고 세상만사 다 잊고 싶다.” 이런 순간이 올해에도 많이 올 거예요. 이런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인간이 아니고 흙의 돌출부분, 그냥 세상 사람과 똑같은데, 여기에 성령이 임합니다.

모든 사건은 한 곳에서 나온 것입니다. 천지창조, 홍해 사건, 노아 사건, 마지막 심판.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이 십자가 지신 사건에 종속된 사건입니다. 여기 ‘사건’에는 너와 나는 없는 거예요. 왜 나는 없습니까? 나는 안개입니다. 그냥 육입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자는 것이 아니고,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건(당나귀가 말하고, 앉은뱅이가 걷고 등등)들은 하나의 사건(십자가 지심)을 보여주기 위한 사건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곳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와서 위에서 아래로 흘러 아래쪽이 생명으로 가득 찹니다.

유리창 청소할 때 위에 물을 부으면 아래쪽으로 물이 흘러내리지요. 이처럼 어린양의 피가 옵니다. 그런데 어려운 것은 사건은 1회성입니다. 한 번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한 번인데 왜 종속된 사건은 다양하게 많이 일어납니까?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차이나는 사건을 제공하는 겁니다.

동일하다는 것은 같다는 뜻이고, 차이는 다르다는 뜻인데 어떻게 동일성과 차이가 같은 문장에 섞일 수 있는가? 좀 의아하지요. 차이나는 사건들을 통해서 이 사건을 이보다 한 단계 높은 최종 단계에 있는 사건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 사건 자체의 자리에서 떠나게 만드는 겁니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급식을 위해 식권을 나눠주는데 어떤 학생을 빨간 색, 어떤 학생은 노란 색, 어떤 학생은 파란 색의 식권을 나눠 줬어요. 빨간 색, 노란 색, 파란 색이 차이가 나잖아요. 그러니까 학생들은 상상을 해요. “1학년은 빨간 색, 2학년은 노란 색, 3학년은 파란 색으로 구분해서 1학년은 조금 주고 3학년은 좀 더 주려고 하는 것 아닌가?”하는 온갖 가설을 만든단 말이지요. 어쨌든 식권이 차이가 나니까요.

식권은 차이가 나는데 막상 식권 들고 식당에 가서 밥을 받는데 똑같아요. 그러니까 학생들이 의심을 합니다. “똑같은 밥이라면 같은 색깔의 식권을 줘야 되는데 왜 식권이 다를까?” 여기에서 머리 좋은 학생들은 알아요. “식권을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식권을 보고 따질 권리도 없고, 이 식당에 있는 모든 밥과 반찬은 우리 교장선생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으로 제공될 뿐이다.”라는 것을.

일체 우리의 모든 가설들은 다 쓸모없는, 그냥 우리 입장만 생각했던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더 높은 차원의 사건이 있는데, 그 차원에서 기다리는 것이 뭐냐? 이게 바로 죽음입니다. 결국 높은 차원의 사건이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죽음 사건인데, 이 죽음에서 생명이 나옵니다. 어떻게 생명이 나오는가 하는 것은 좀 쉬었다 합시다.

10분 쉬겠습니다.

(2013. 2. 8. 09:42 녹취 마침)
 서경수 (IP:121.♡.190.236) 13-02-22 10:19 
광주 강의(2013. 1. 25) 38-2

첫째 시간에 강의한 내용은, 율법을 줄 때는 그냥 인간으로 대우하지만 새 영이 올 때는 더 이상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그냥 흙이라고 했습니다. “너는 사람 아니야.” 이렇게 됩니다.

만약 우리를 인간이라고 여기고 생명을 주시면 어떤 꼴인가? 선악과 따먹고 난 후에 생명과실을 먹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조치를 취하셨지요. 선악과 따먹은 후에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했어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새 영을 주신 것은, 선악과 따먹은 인간을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돼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을 그대로 둔 채 생명나무를 주신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하시지 무엇 때문에 예수님 보내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선악과 따먹은 인간을 처리를 하는데, 처리하는 방법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으로 가져와야 됩니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 생명나무마저 따먹게 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든 처리를 해야 되는데, 그냥 가만히 두어도 흙인데 무엇 때문에 새 영을 보내는가? 하나님의 영이 오신다는 것은 인간을 구원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선악과 따먹은 이 자리를 하나님이 계시는 자신의 성전으로 전환시킨 결과 우리가 구원된 것입니다.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 앞에 죽은 우리는 저주 받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 저주 받는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와서 살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36장 28절에 나옵니다.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죄인으로 나타나거든 불도저와 포클레인이 등장해서 주택단지 조성하는 굉음이 들린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서 불도저와 포클레인은 천사를 말합니다. 천사들이 와서 하나님이 살만한 곳으로 택지 조성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구원 받아야지.”라는 그 깃발조차도 천사가 작동하는 불도저에 의해 다 짓밟히고 묻혀 버리지요.

천사가 점령군처럼 우리를 점령해 버립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악마를 어떻게 이기는가를 구경하면 됩니다. 저주 받을 곳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예수님이 뛰어들었습니다. 사흘 전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어요. 시골 공장에서 불이 났는데, 그 장면이 CC TV에 찍혔습니다. 왜 불이 난 것인가 보니까 강아지 몸에 누가 불을 질렀어요. 그래서 개다 뜨거워서 달려간 곳이 공장인데, 그 결과 공장도 불타고 개도 죽었어요. 그 뛰어든 개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몸에 불을 붙여서 공장이라는 이 세상에 뛰어드니까 세상 전체가 다 타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뛰어들어서 온 세상이 저주 받게 되었어요. 이게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나오지요. ‘한 분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것이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의 그 버림은 예수님 혼자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중앙에서 그 사건이 벌어진 것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준 그 어둠의 세력도 저주 받고, 그 죄를 대신 뒤집어 쓴 예수님도 저주 받은 거예요.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 앞에 저주 받는 곳이 되었지요.

함께 저주 받을 때(로마서 6장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죽음에 넘겨다가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함이라.’

우리가 그냥 늙어서 죽는 것은 안 되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불붙은 개가 우리 품안에 들어와야 돼요.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불붙은 개로 여기시고 우리 속에 집어넣어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저주 받아야 될 자로 드러납니다. 이것을 다윗은 뭐라고 했는가 하면, “나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

누가는 말하기를, ‘다윗은 우리야 죽이는 사건을 제외하고는 평생 온전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성신을 받은 다윗은 뭐라고 합니까? ‘나는 죄 중에 태어났다.’ 이 두 문장을 합치면, 죄 안 지었다고 여겼던 모든 사건들이 더 근원적인 사건에 파생된 사건에 불과한 거예요.

평소에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수금을 켜서 병을 낫게 하는 등등의 착한 사건이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되고 어디로 끌려가야 하는가? 나는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규정할 사건에 합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 질 때 그 사람을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령 받은 사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죠.

원 사건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이지만 앞당겨서 예수님과 자기 백성들 사이에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시편 51편 사건입니다.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다윗이 드린 제사도 괜찮은 사건이었지만 하나님이 정작 원하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고 상한 심령이었습니다. 난데없이 불붙은 개가 들어와서 몽땅 다 타버린 사건, 저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 심령을 갖고 있어야 하나님이 거할 수 있는 집이 됩니다.

이런 것은 우리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 아닙니다. 성령이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을 안 받으면 이런 생각에 젖어 있어요. ‘언젠가는 내가 천국에 가고야 말리라. 그리고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꼭 확인시키고 말리라.’는 생각으로 도약을 위해 현재는 움츠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노래가 있지요. “네 꿈을 펼쳐라!”

이 말은, 지금은 접혀 있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활짝 펴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오디션 시대입니다. 그래서 심사위원에게 자기 솜씨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눈에 띄면 케스팅 됩니다. 그래서 모두가 열심히 해서 단점은 제거하고 장점을 키워서 뭔가를 보여줘야 합니다. 혼자 잘났다고 하면 안 되고 뭔가를 펴서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내 꿈을 펼칠 무대가 이 세상이기 때문에 그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면 내 꿈은 어떻게 됩니까? “세상아, 기다려라.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보여줄 때가 있을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희망을 거는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제일 황당한 일은 이런 경우입니다. 학생들이 소풍을 가서 장기자랑 시간이 있는데, 이 때 자기 솜씨를 마음껏 뽐내기 위해 춤과 노래를 열심히 준비하고 의상까지 마련해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서 소풍을 끝내고 집에로 해산할 때 얼마나 허탈합니까? 세상이 자기를 과시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때 이것은 불평등의 사회,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라며 욕하지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기회는 주자. 그 사람이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지만 기회조차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게 바로 육신의 생각입니다. 영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과 완전히 달라요. 육신의 생각은 ‘나’로부터 출발하지만 영의 생각은 어떤 궁극적인 사건이 나를 잡아당깁니다. 질질 끌려가면 된 겁니다. 상한 심령이지요.

궁극적인 사건이 있고, 다윗은 개인적인 사건을 경험합니다. 이 사건에 다양함, 반복적인 다윗 뒤에 누가 오느냐? 다윗의 자손이 옵니다. 다윗의 자손은 혈통적이면서도 다윗의 사건과 같은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면서 다윗의 자손이 오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은 역사적으로 소멸됩니다.

역사는 영웅들, 실적과 업적을 남긴 자들만 유명 인사가 되는데, 다윗의 자손은 역사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어요. 땅 밑에 깔려 보이지 않았는데 나중에 불쑥 튀어나오지요. 등장할 때 두 남녀가 나옵니다. 남자의 이름은 요셉이고 여자는 마리아. 마리아가 유명합니까? 제가 항상 ‘구미공단 여공’이라고 하는데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마리아.

요셉은 어떻습니까? 공익 근무 한다든지, 중소기업에서 일하든지 그냥 평범한 총각이지요. 마리아는 평범한 처녀, 요셉은 평범한 총각. 그러나 이들이 위대한 다윗의 혈통과 관계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기 직전 성령이 개입하셔서 둘 사이가 연결이 안 되도록 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 족보에서 이것이 참 신기해요. 분명히 두 사람이 동침 이전인데 갑자기 성령이 개입해서 자식이 태어났단 말이지요. 다윗의 자손이란 그 혈통이 이어졌습니까, 안 이어졌습니까? 안 이어졌지요. 그러니까 요셉이나 마리아나 구원을 받으려면 뭔가 이 둘 사이에 개입한 적이 있던 성령이 아니고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육은 아무리 태어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영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영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육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육은 안 된다는 것을. 시므온과 안나가 신앙생활 잘 해서 구원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를 기다렸어요. 그리고 만나서는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이처럼 뭔가 휙 지나가는 것. 그분을 만나야 돼요.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진화론과 창조론] 글에서 제가 이런 내용을 썼습니다. 진화론에서 이런 주장이 있습니다. “만약 지구의 역사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이 있다면, 그를 통해 지구 역사를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보다 더 오래 사신 분이 누굽니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 누구지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모세를 만났지요. “모세야, 네가 창세기 기록할 때 왜 네 마음대로 기록했어? 어떻게 천지창조를 6일만에 다 했어. 지구는 47억년이 걸렸어. 네가 6일만에 창조되었다고 기록해서 후세 사람들이 다 혼란을 겪고 있잖아. 빨리 창세기 1장 수정해. 그리고 노아 시대에 온 세상이 물로 덮였다고 했는데 왜 거짓말 했어? 메소포타미아 그 지역만 물에 잠겼고 다른 지역은 아닌데 왜 엉터리로 기록했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그러면 모세가 말하기를 “예수님은 저보다 후세에 태어나셨는데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나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어!” 이 세상 전부는 예수님이 다 아십니다. 만물이 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잖아요. 다 아신 분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잖아요. 그런데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그런데 고고학이 왜 있고, C14 탄소동위원소 연대측정이 왜 있느냔 말이지요. 내가 1,900년대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공부해보니까 성경 내용을 못 믿겠다는 거예요. 나보다 더 오래 산 영감님이 확실한 것을 알려주면 믿겠다는 말이잖아요. 그 영감님 중의 영감님이 예수님이잖아요.

변화산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는 저의 말만 들어라.”고 했지요. 그러면 우리보다 더 오래 살고 세상을 친히 만드신 분을 믿어야지 누구를 믿겠어요. 아인슈타인을 믿어야 합니까? 창조론자를 믿어야 할까요, 진화론자를 믿을까요?

여기에서 하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다 안다는 것과 다릅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우리는 선입관이 있어서 ‘이 정도면 아는 것이다.’라고 우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도 바울의 편지는 성령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억지로 풀다가는 망한다”고.

고린도후서 3장에서 “이 편지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고 영으로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령 받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 못 받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사도도 성령으로 편지를 썼고, 성령 받은 사람이 그 편지를 읽고 그렇게 될 경우에 “우리는 날 믿어서는 안 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면 되는구나.”하는 것을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서 주님을 모신 상태에서 그런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모시고 다니는 가마, 또는 경운기, 자동차. 어떻게 표현해도 좋아요. 주님을 모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이지요. 그러면 자기 자신의 판단을 접어야 됩니다. 왜냐? 우리는 인생을 살았다고 하지만 몇 년 안 살았어요. 또 경험했다고 해도 몇 가지 안 됩니다. 지금 브라질 계곡에 있는 화초가 몇 년도에 핀 것인지 압니까?

지난 주일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사람의 눈은 1초에 5회 깜박입니다. 스냅 사진을 5장 찍는 거예요.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은 2장 혹은 3장만 기억에 남고 나머지는 없습니다. 사람이 사물을 보면서 사진을 찍으면 사진을 찍는 그 순간에도 자연은 0.1초 안에 천장, 만장을 찍는 거예요. 그러면 보세요. 속도 늦은 내 눈으로 5장 찍고, 그것도 2장만 기억해서 이것으로 세상관을 만들어내지요.

그러면 우리가 보는 세상(현실)관은 현실이 아니고 환상에 불과하고 비현실이 됩니다. 그 비현실 때문에 자살도 하고 난리를 칩니다. 자신이 스냅 사진 찍은 그것으로, 그것도 전부가 아닌 일부만을 기억(편집)해서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아요. 자기가 본 드라마가 끝났다고 해서 같이 죽는 그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내가 만든 드라마에 내가 매일 속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고싶다] 드라마가 지난 주에 끝이 났습니다. 이제 [7급 공무원]하는데, 그것이 끝났을 때 같이 죽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뭘 안다고. 자기도 세상의 일부로 포함되었으면 전부를 모른다는 뜻이에요.

산 정상에 서면 보이지만 산 아래에서 산이 이렇다 저렇다 말을 못해요. “나는 절망이다. 인생 실패다. 나는 성공했다.” 이게 다 우스운 소리입니다. 간호학과에 떨어졌다고 울면서 술 마시고 하는데 아프리카 빈민촌에 가서 그런 소리하면 맞아죽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한 끼 겨우 먹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웃고 즐거워합니다. 왜냐? 다 같이 그런 생활을 하니까요.

인간은 자기가 만든 드라마에 매일 속고 있습니다. 터미널에 가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로 떠나지요. 나도 남의 눈에는 승객의 일부로 보일 뿐입니다. 백화점에 가면 주차요원이 나에게 “사랑합니다. 고객님!”하고 친절하게 인사를 하지요. 그 소리 듣고 흥분하지 마세요.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소리를 합니다. 그 사람이 보기에 나는 수많은 손님 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보는데 주님 앞에 내가 뭐 그리 대단합니까? 그냥 돌아온 탕자에 불과하지 전혀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우리를 가마로 또는 경운기로 사용하신다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유다 나라를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 가도록 한 이유입니다. 여기서 내 나라라는 것은 없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도 없고, 나를 위한 나라도 없어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는가? 그런 가운데 주께서 찾아오십니다. 36장 37절 봅시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드릴 양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떼 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지금까지 강의를 했는데, 이 말씀 들으면 또 오해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그 다음에는 독자적으로 이 말씀을 지켜서 사람들을 많이 모아서 새롭게 이스라엘을 건설하자.’ 이렇게 나오는 것이 바로 현재 이스라엘 나라의 오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미 우리는 저주 받은 자,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에게 율법(문자)이 온 것이 아니고 성령이 왔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다루시는 우리가 됩니다. 성령이 오실 때는 에스겔 36장에 있는 말씀은 누가 필히 이것을 다 성취한다는 말입니까? 우립니까, 성령입니까?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기에 우리를 육이라고 꾸짖으면서 그 일을 하십니다. “육이니까 손 떼라.”

하나님이 어떤 사건을 일으키시면 그 사건은 우리에게 하라는 사건이 아니고 우리가 육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사건으로 매일 일상을 허락하십니다. 교사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운데서 내 포부를 달성해 보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육의 모습입니다.

37장을 봅시다.
1절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 3절에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죽여준 것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십자가의 궁극적인 사건을 우리에게 반복해서 다양한 사건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궁극적인 사건은 십자가인데, 지금 에스겔에서는 십자가가 감춰져 있습니다. 몸통은 숨겨져 있고 나타난 것은 손바닥인데, 현재 손바닥은 해골입니다. 손바닥만 보이는데 살게 하시는 영이 어디서 나오는가? 이것은 신약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인자야!”라고 부른 것은, 장차 인자 되시는 분이 오신다는 뜻입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살겠느냐?” 이 뼈들을 보세요. 하나님이 인자의 모습으로 들이 댈 때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뼈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묻습니다. “이 뼈들이 살겠느냐?” 어떤 경우에도 뼈가 자진해서 살 수가 없어요. 지금도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가르치는데 “무수한 세월이 흐르면 단백질이 합성해서 아미노산이 되고, 아미노산에서 DNA가 생기고 --” 이론 주장을 합니다.

수학으로 계산해 보면 무수한 세월이 아니라 우주의 역사(137억년 이라고 합니다)보다 천배 만배 세월이 흘러도 이런 일은 안 생깁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안 됩니다. 무구한 세월이란 말은 인간이 하면 안 됩니다. 왜냐? 시간에 대해서는 예수님께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만들었기 때문에.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요. 성경은 모든 역사를 1,000으로 마감시켜 놓았습니다. 천년왕국. 1,000 이상은 없어요. 지난 수련회에서 말씀드렸지요. 144,000은 12 X 12 X 1,000입니다. 여기 1,000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지극히 큰 수입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라고 물었는데, 인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냥 뼈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성령이 황후 아줌마를 마취해서 구멍을 뚫어서 약재를 넣는다고. 지금 문제는 이들이 생명을 얻을 가치가 있습니까? 없어요. 왜냐?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그러면 당연히 죽어 해골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죽는 것이 마땅한데 이들이 다시 산다고 하니까 이것은 뼈들의 희망사항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뼈입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이것은 안 됩니다. 선악과 따먹어서 죽었는데, 살려달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인자되시는 주님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거래를 해서 “살겠느냐?” “못 삽니다.”

그런데 말씀이 임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 뼈들은 개인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사는 것은 없고 인자에 속한 하나님의 군대로 인자에 예속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는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몸의 지체라. 손이 눈에게 쓸데없다는 소리를 못하고, 발이 귀에게 쓸데없다 못하고--” 우리들은 사적으로 ‘나’라고 이야기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적인 것을 버리는 것을 ‘은사’라고 합니다. 은사를 받으면 개인은 사라집니다. 은사를 받으면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이렇게 됩니다. 왜? 주님만 보이기 때문에. 이들은 남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가난한 자를 위해 밥 퍼주자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것은 은사 아닙니다.

은사를 받으면 자기를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남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거예요.
만약에 대통령이 은사를 받으면 대한민국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주를 위해서 살게 됩니다. 오직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요.

어쨌든 성령 받는 순간 이제 남을 위해 사는 것도 없어요. 자기를 위해 사는 것도 없고. 이 말은, 나는 그냥 경운기인데 주를 모시는 거예요. “우리 가운데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사람도 없도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다.” 그런데 그 하는 일들이 다양하지요.

다양성의 그 차이는 나의 동질성을 포기하게 만들어요. “어제 봉사했는데 참 잘했어.” 그 어제의 봉사가 오늘로 이어지면 나의 동질성이 유지되지요. 차이가 그것을 차단합니다. “어제도 주를 위해서 했고, 오늘도 주를 위해 해야지. 나를 위해 한 것은 없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성공도 실패도 없습니다.

자, 그러면 이것이 손바닥인데 이것은 다양성 또는 사건의 반복성이라고 했습니다. 궁극적은 것은 숨어 있다. 여기에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은 살 수가 없어요. 저주 받게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 5장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를 살리느니라.” 왜냐?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다 일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일임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하신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건진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선악과 따먹고 저주 받은 자를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건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들 속에 들어가 함께 죽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처분을 맡깁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살릴 때 성령으로 살렸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사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산  거예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뭘 생각하는가 하면, 절대 내 단독으로 신앙 좋아서 구원 받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십일조 하고, 봉사하고, 무슨 일을 해도 절대 나는 이런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구원 받는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도 성립이 안 돼요. 왜냐?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나는 죽었고” 이것이 말이 안 됩니다. 내가 죽었다고 말하는 나는 이미 죽었어야 하는데 이미 죽는 자가 어떻게 내가 나오냔 말이지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어요.

그러면 “나는 죽었고”가 되려면 나는 입 다물고 있어야 되는데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잖아요.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지요. “내가 말하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말하게 했다.” 이런 소리 들으면 반발심이 생기지요. “네가 뭔데 너는 네 속에 그리스도가 말하고 나는 그냥 내가 말하는 것인가?”

이런 반발을 들은 자들이 선지자입니다. 미가야가 이런 소리 들었어요. “천상회의에 너만 초대받고 우리를 못 받았단 말인가?” 이것을 미가야에게 물으면 안 돼요. 미가야가 천상회의에 참석하려고 뇌물 준 사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이것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허락’이라고 한 거예요. 허락된 사람에게만 씨 뿌리는 비유를 알게 했다는 거지요.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을 하나 올렸어요. “어떤 선을 넘어서”라고. 이 제목을 어디에서 따왔는가 하면 TV드라마 [사랑과 전쟁]에서 따왔어요. 사람들이 선을 넘어서 가니까 나도 들어가려는데 천사가 막습니다. 왜냐? 하나님의 허락이 안 떨어졌다는 거예요. 선택 받지 않은 사람은 생명의 길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다시 정리해 봅시다. 인자가 와서 뼈를 살린다. 이걸 보고 “우리는 인자(또는 성령)가 오도록 뼈라는 것을 고백하자.” 그러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지요.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손 떼라고 합니다. 그냥 성령이 임하면 “아, 그 뼈가 바로 나였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지, 성령이 오기도 전에 “우리가 해골로 있으면 인자가 오셔서 우리를 살리실거야.” 이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주께서 지켜서 우리에게 그냥 제공하십니다. 율법이 우리 앞까지 와서 “지킬 거야, 말거야?” 이것이 아니고, 아예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는 육신이고 뼈란 말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황후 아줌마를 마취시켜서 옷을 젖히고 구멍을 뚫어서 한약재를 넣어서 한약재와 뼈가 직접 만나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 속에 악마가 있거든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었는데 아버지에 의해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요. 이것을 고린도전서에서는 “첫째 부활”이라고 해요.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능력에 의해서 밀려오는 것이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됩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은(이것은 한약재입니다) 피가 아니면 우리는 구원 못 받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권면, 명령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많은 말씀을 깔아주면 우리는 해골이고 저주 받을 자인데, 거기에다 피를 뿌리면 그 피와 악마가 만나서 악마는 패하고 우리는 “아, 내가 죄인이었구나. 성령이 오셔서 날 상한 심령이 되게 하셨구나. 맞습니다. 저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지은 죄는 사람에게가 아니고 모두 하나님께 지은 거예요. 이웃도 나도 없어요. 남을 위해 살 수도 없고, 날 위해 살 이유도 없습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 죄고, 우리의 모든 하는 일들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도 누구를 만나든 내 몸을 지니고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아까 경운기라고 했는데, 리어카가 더 적당할 것 같아요. 매일 느릿느릿 가는데, 주님을 실었는지 안 실었는지 구분도 안 되고, 늘 자신만 생각하지만 주님은 이런 나와 함께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역사가 장난이 아니고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 그것마저 우리는 상관없다고 외면해 버립니다. 이스라엘이 포로 잡히고 해골이 된 자에게 다시 찾아오시고 말씀으로 군대가 되고, 이 모든 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을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 2. 22. 09:36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