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3. 1. 25) 38-2
첫째 시간에 강의한 내용은, 율법을 줄 때는 그냥 인간으로 대우하지만 새 영이 올 때는 더 이상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그냥 흙이라고 했습니다. “너는 사람 아니야.” 이렇게 됩니다.
만약 우리를 인간이라고 여기고 생명을 주시면 어떤 꼴인가? 선악과 따먹고 난 후에 생명과실을 먹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조치를 취하셨지요. 선악과 따먹은 후에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했어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새 영을 주신 것은, 선악과 따먹은 인간을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돼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을 그대로 둔 채 생명나무를 주신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하시지 무엇 때문에 예수님 보내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선악과 따먹은 인간을 처리를 하는데, 처리하는 방법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으로 가져와야 됩니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 생명나무마저 따먹게 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든 처리를 해야 되는데, 그냥 가만히 두어도 흙인데 무엇 때문에 새 영을 보내는가? 하나님의 영이 오신다는 것은 인간을 구원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선악과 따먹은 이 자리를 하나님이 계시는 자신의 성전으로 전환시킨 결과 우리가 구원된 것입니다.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 앞에 죽은 우리는 저주 받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 저주 받는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와서 살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36장 28절에 나옵니다.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죄인으로 나타나거든 불도저와 포클레인이 등장해서 주택단지 조성하는 굉음이 들린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서 불도저와 포클레인은 천사를 말합니다. 천사들이 와서 하나님이 살만한 곳으로 택지 조성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구원 받아야지.”라는 그 깃발조차도 천사가 작동하는 불도저에 의해 다 짓밟히고 묻혀 버리지요.
천사가 점령군처럼 우리를 점령해 버립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악마를 어떻게 이기는가를 구경하면 됩니다. 저주 받을 곳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예수님이 뛰어들었습니다. 사흘 전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어요. 시골 공장에서 불이 났는데, 그 장면이 CC TV에 찍혔습니다. 왜 불이 난 것인가 보니까 강아지 몸에 누가 불을 질렀어요. 그래서 개다 뜨거워서 달려간 곳이 공장인데, 그 결과 공장도 불타고 개도 죽었어요. 그 뛰어든 개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몸에 불을 붙여서 공장이라는 이 세상에 뛰어드니까 세상 전체가 다 타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뛰어들어서 온 세상이 저주 받게 되었어요. 이게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나오지요. ‘한 분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것이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의 그 버림은 예수님 혼자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중앙에서 그 사건이 벌어진 것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준 그 어둠의 세력도 저주 받고, 그 죄를 대신 뒤집어 쓴 예수님도 저주 받은 거예요.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 앞에 저주 받는 곳이 되었지요.
함께 저주 받을 때(로마서 6장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죽음에 넘겨다가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함이라.’
우리가 그냥 늙어서 죽는 것은 안 되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불붙은 개가 우리 품안에 들어와야 돼요.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불붙은 개로 여기시고 우리 속에 집어넣어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저주 받아야 될 자로 드러납니다. 이것을 다윗은 뭐라고 했는가 하면, “나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
누가는 말하기를, ‘다윗은 우리야 죽이는 사건을 제외하고는 평생 온전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성신을 받은 다윗은 뭐라고 합니까? ‘나는 죄 중에 태어났다.’ 이 두 문장을 합치면, 죄 안 지었다고 여겼던 모든 사건들이 더 근원적인 사건에 파생된 사건에 불과한 거예요.
평소에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수금을 켜서 병을 낫게 하는 등등의 착한 사건이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되고 어디로 끌려가야 하는가? 나는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규정할 사건에 합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 질 때 그 사람을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령 받은 사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죠.
원 사건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이지만 앞당겨서 예수님과 자기 백성들 사이에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시편 51편 사건입니다.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다윗이 드린 제사도 괜찮은 사건이었지만 하나님이 정작 원하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고 상한 심령이었습니다. 난데없이 불붙은 개가 들어와서 몽땅 다 타버린 사건, 저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 심령을 갖고 있어야 하나님이 거할 수 있는 집이 됩니다.
이런 것은 우리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 아닙니다. 성령이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을 안 받으면 이런 생각에 젖어 있어요. ‘언젠가는 내가 천국에 가고야 말리라. 그리고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꼭 확인시키고 말리라.’는 생각으로 도약을 위해 현재는 움츠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노래가 있지요. “네 꿈을 펼쳐라!”
이 말은, 지금은 접혀 있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활짝 펴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오디션 시대입니다. 그래서 심사위원에게 자기 솜씨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눈에 띄면 케스팅 됩니다. 그래서 모두가 열심히 해서 단점은 제거하고 장점을 키워서 뭔가를 보여줘야 합니다. 혼자 잘났다고 하면 안 되고 뭔가를 펴서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내 꿈을 펼칠 무대가 이 세상이기 때문에 그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면 내 꿈은 어떻게 됩니까? “세상아, 기다려라.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보여줄 때가 있을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희망을 거는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제일 황당한 일은 이런 경우입니다. 학생들이 소풍을 가서 장기자랑 시간이 있는데, 이 때 자기 솜씨를 마음껏 뽐내기 위해 춤과 노래를 열심히 준비하고 의상까지 마련해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서 소풍을 끝내고 집에로 해산할 때 얼마나 허탈합니까? 세상이 자기를 과시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때 이것은 불평등의 사회,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라며 욕하지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기회는 주자. 그 사람이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지만 기회조차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게 바로 육신의 생각입니다. 영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과 완전히 달라요. 육신의 생각은 ‘나’로부터 출발하지만 영의 생각은 어떤 궁극적인 사건이 나를 잡아당깁니다. 질질 끌려가면 된 겁니다. 상한 심령이지요.
궁극적인 사건이 있고, 다윗은 개인적인 사건을 경험합니다. 이 사건에 다양함, 반복적인 다윗 뒤에 누가 오느냐? 다윗의 자손이 옵니다. 다윗의 자손은 혈통적이면서도 다윗의 사건과 같은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면서 다윗의 자손이 오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은 역사적으로 소멸됩니다.
역사는 영웅들, 실적과 업적을 남긴 자들만 유명 인사가 되는데, 다윗의 자손은 역사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어요. 땅 밑에 깔려 보이지 않았는데 나중에 불쑥 튀어나오지요. 등장할 때 두 남녀가 나옵니다. 남자의 이름은 요셉이고 여자는 마리아. 마리아가 유명합니까? 제가 항상 ‘구미공단 여공’이라고 하는데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마리아.
요셉은 어떻습니까? 공익 근무 한다든지, 중소기업에서 일하든지 그냥 평범한 총각이지요. 마리아는 평범한 처녀, 요셉은 평범한 총각. 그러나 이들이 위대한 다윗의 혈통과 관계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기 직전 성령이 개입하셔서 둘 사이가 연결이 안 되도록 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 족보에서 이것이 참 신기해요. 분명히 두 사람이 동침 이전인데 갑자기 성령이 개입해서 자식이 태어났단 말이지요. 다윗의 자손이란 그 혈통이 이어졌습니까, 안 이어졌습니까? 안 이어졌지요. 그러니까 요셉이나 마리아나 구원을 받으려면 뭔가 이 둘 사이에 개입한 적이 있던 성령이 아니고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육은 아무리 태어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영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영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육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육은 안 된다는 것을. 시므온과 안나가 신앙생활 잘 해서 구원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를 기다렸어요. 그리고 만나서는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이처럼 뭔가 휙 지나가는 것. 그분을 만나야 돼요.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진화론과 창조론] 글에서 제가 이런 내용을 썼습니다. 진화론에서 이런 주장이 있습니다. “만약 지구의 역사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이 있다면, 그를 통해 지구 역사를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보다 더 오래 사신 분이 누굽니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 누구지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모세를 만났지요. “모세야, 네가 창세기 기록할 때 왜 네 마음대로 기록했어? 어떻게 천지창조를 6일만에 다 했어. 지구는 47억년이 걸렸어. 네가 6일만에 창조되었다고 기록해서 후세 사람들이 다 혼란을 겪고 있잖아. 빨리 창세기 1장 수정해. 그리고 노아 시대에 온 세상이 물로 덮였다고 했는데 왜 거짓말 했어? 메소포타미아 그 지역만 물에 잠겼고 다른 지역은 아닌데 왜 엉터리로 기록했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그러면 모세가 말하기를 “예수님은 저보다 후세에 태어나셨는데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나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어!” 이 세상 전부는 예수님이 다 아십니다. 만물이 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잖아요. 다 아신 분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잖아요. 그런데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그런데 고고학이 왜 있고, C14 탄소동위원소 연대측정이 왜 있느냔 말이지요. 내가 1,900년대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공부해보니까 성경 내용을 못 믿겠다는 거예요. 나보다 더 오래 산 영감님이 확실한 것을 알려주면 믿겠다는 말이잖아요. 그 영감님 중의 영감님이 예수님이잖아요.
변화산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는 저의 말만 들어라.”고 했지요. 그러면 우리보다 더 오래 살고 세상을 친히 만드신 분을 믿어야지 누구를 믿겠어요. 아인슈타인을 믿어야 합니까? 창조론자를 믿어야 할까요, 진화론자를 믿을까요?
여기에서 하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다 안다는 것과 다릅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우리는 선입관이 있어서 ‘이 정도면 아는 것이다.’라고 우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도 바울의 편지는 성령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억지로 풀다가는 망한다”고.
고린도후서 3장에서 “이 편지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고 영으로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령 받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 못 받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사도도 성령으로 편지를 썼고, 성령 받은 사람이 그 편지를 읽고 그렇게 될 경우에 “우리는 날 믿어서는 안 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면 되는구나.”하는 것을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서 주님을 모신 상태에서 그런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모시고 다니는 가마, 또는 경운기, 자동차. 어떻게 표현해도 좋아요. 주님을 모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이지요. 그러면 자기 자신의 판단을 접어야 됩니다. 왜냐? 우리는 인생을 살았다고 하지만 몇 년 안 살았어요. 또 경험했다고 해도 몇 가지 안 됩니다. 지금 브라질 계곡에 있는 화초가 몇 년도에 핀 것인지 압니까?
지난 주일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사람의 눈은 1초에 5회 깜박입니다. 스냅 사진을 5장 찍는 거예요.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은 2장 혹은 3장만 기억에 남고 나머지는 없습니다. 사람이 사물을 보면서 사진을 찍으면 사진을 찍는 그 순간에도 자연은 0.1초 안에 천장, 만장을 찍는 거예요. 그러면 보세요. 속도 늦은 내 눈으로 5장 찍고, 그것도 2장만 기억해서 이것으로 세상관을 만들어내지요.
그러면 우리가 보는 세상(현실)관은 현실이 아니고 환상에 불과하고 비현실이 됩니다. 그 비현실 때문에 자살도 하고 난리를 칩니다. 자신이 스냅 사진 찍은 그것으로, 그것도 전부가 아닌 일부만을 기억(편집)해서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아요. 자기가 본 드라마가 끝났다고 해서 같이 죽는 그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내가 만든 드라마에 내가 매일 속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고싶다] 드라마가 지난 주에 끝이 났습니다. 이제 [7급 공무원]하는데, 그것이 끝났을 때 같이 죽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뭘 안다고. 자기도 세상의 일부로 포함되었으면 전부를 모른다는 뜻이에요.
산 정상에 서면 보이지만 산 아래에서 산이 이렇다 저렇다 말을 못해요. “나는 절망이다. 인생 실패다. 나는 성공했다.” 이게 다 우스운 소리입니다. 간호학과에 떨어졌다고 울면서 술 마시고 하는데 아프리카 빈민촌에 가서 그런 소리하면 맞아죽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한 끼 겨우 먹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웃고 즐거워합니다. 왜냐? 다 같이 그런 생활을 하니까요.
인간은 자기가 만든 드라마에 매일 속고 있습니다. 터미널에 가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로 떠나지요. 나도 남의 눈에는 승객의 일부로 보일 뿐입니다. 백화점에 가면 주차요원이 나에게 “사랑합니다. 고객님!”하고 친절하게 인사를 하지요. 그 소리 듣고 흥분하지 마세요.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소리를 합니다. 그 사람이 보기에 나는 수많은 손님 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보는데 주님 앞에 내가 뭐 그리 대단합니까? 그냥 돌아온 탕자에 불과하지 전혀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우리를 가마로 또는 경운기로 사용하신다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유다 나라를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 가도록 한 이유입니다. 여기서 내 나라라는 것은 없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도 없고, 나를 위한 나라도 없어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는가? 그런 가운데 주께서 찾아오십니다. 36장 37절 봅시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드릴 양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떼 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지금까지 강의를 했는데, 이 말씀 들으면 또 오해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그 다음에는 독자적으로 이 말씀을 지켜서 사람들을 많이 모아서 새롭게 이스라엘을 건설하자.’ 이렇게 나오는 것이 바로 현재 이스라엘 나라의 오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미 우리는 저주 받은 자,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에게 율법(문자)이 온 것이 아니고 성령이 왔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다루시는 우리가 됩니다. 성령이 오실 때는 에스겔 36장에 있는 말씀은 누가 필히 이것을 다 성취한다는 말입니까? 우립니까, 성령입니까?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기에 우리를 육이라고 꾸짖으면서 그 일을 하십니다. “육이니까 손 떼라.”
하나님이 어떤 사건을 일으키시면 그 사건은 우리에게 하라는 사건이 아니고 우리가 육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사건으로 매일 일상을 허락하십니다. 교사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운데서 내 포부를 달성해 보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육의 모습입니다.
37장을 봅시다. 1절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 3절에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죽여준 것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십자가의 궁극적인 사건을 우리에게 반복해서 다양한 사건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궁극적인 사건은 십자가인데, 지금 에스겔에서는 십자가가 감춰져 있습니다. 몸통은 숨겨져 있고 나타난 것은 손바닥인데, 현재 손바닥은 해골입니다. 손바닥만 보이는데 살게 하시는 영이 어디서 나오는가? 이것은 신약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인자야!”라고 부른 것은, 장차 인자 되시는 분이 오신다는 뜻입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살겠느냐?” 이 뼈들을 보세요. 하나님이 인자의 모습으로 들이 댈 때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뼈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묻습니다. “이 뼈들이 살겠느냐?” 어떤 경우에도 뼈가 자진해서 살 수가 없어요. 지금도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가르치는데 “무수한 세월이 흐르면 단백질이 합성해서 아미노산이 되고, 아미노산에서 DNA가 생기고 --” 이론 주장을 합니다.
수학으로 계산해 보면 무수한 세월이 아니라 우주의 역사(137억년 이라고 합니다)보다 천배 만배 세월이 흘러도 이런 일은 안 생깁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안 됩니다. 무구한 세월이란 말은 인간이 하면 안 됩니다. 왜냐? 시간에 대해서는 예수님께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만들었기 때문에.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요. 성경은 모든 역사를 1,000으로 마감시켜 놓았습니다. 천년왕국. 1,000 이상은 없어요. 지난 수련회에서 말씀드렸지요. 144,000은 12 X 12 X 1,000입니다. 여기 1,000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지극히 큰 수입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라고 물었는데, 인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냥 뼈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성령이 황후 아줌마를 마취해서 구멍을 뚫어서 약재를 넣는다고. 지금 문제는 이들이 생명을 얻을 가치가 있습니까? 없어요. 왜냐?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그러면 당연히 죽어 해골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죽는 것이 마땅한데 이들이 다시 산다고 하니까 이것은 뼈들의 희망사항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뼈입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이것은 안 됩니다. 선악과 따먹어서 죽었는데, 살려달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인자되시는 주님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거래를 해서 “살겠느냐?” “못 삽니다.”
그런데 말씀이 임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 뼈들은 개인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사는 것은 없고 인자에 속한 하나님의 군대로 인자에 예속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는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몸의 지체라. 손이 눈에게 쓸데없다는 소리를 못하고, 발이 귀에게 쓸데없다 못하고--” 우리들은 사적으로 ‘나’라고 이야기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적인 것을 버리는 것을 ‘은사’라고 합니다. 은사를 받으면 개인은 사라집니다. 은사를 받으면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이렇게 됩니다. 왜? 주님만 보이기 때문에. 이들은 남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가난한 자를 위해 밥 퍼주자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것은 은사 아닙니다.
은사를 받으면 자기를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남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거예요. 만약에 대통령이 은사를 받으면 대한민국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주를 위해서 살게 됩니다. 오직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요.
어쨌든 성령 받는 순간 이제 남을 위해 사는 것도 없어요. 자기를 위해 사는 것도 없고. 이 말은, 나는 그냥 경운기인데 주를 모시는 거예요. “우리 가운데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사람도 없도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다.” 그런데 그 하는 일들이 다양하지요.
다양성의 그 차이는 나의 동질성을 포기하게 만들어요. “어제 봉사했는데 참 잘했어.” 그 어제의 봉사가 오늘로 이어지면 나의 동질성이 유지되지요. 차이가 그것을 차단합니다. “어제도 주를 위해서 했고, 오늘도 주를 위해 해야지. 나를 위해 한 것은 없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성공도 실패도 없습니다.
자, 그러면 이것이 손바닥인데 이것은 다양성 또는 사건의 반복성이라고 했습니다. 궁극적은 것은 숨어 있다. 여기에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은 살 수가 없어요. 저주 받게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 5장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를 살리느니라.” 왜냐?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다 일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일임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하신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건진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선악과 따먹고 저주 받은 자를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건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들 속에 들어가 함께 죽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처분을 맡깁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살릴 때 성령으로 살렸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사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산 거예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뭘 생각하는가 하면, 절대 내 단독으로 신앙 좋아서 구원 받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십일조 하고, 봉사하고, 무슨 일을 해도 절대 나는 이런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구원 받는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도 성립이 안 돼요. 왜냐?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나는 죽었고” 이것이 말이 안 됩니다. 내가 죽었다고 말하는 나는 이미 죽었어야 하는데 이미 죽는 자가 어떻게 내가 나오냔 말이지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어요.
그러면 “나는 죽었고”가 되려면 나는 입 다물고 있어야 되는데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잖아요.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지요. “내가 말하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말하게 했다.” 이런 소리 들으면 반발심이 생기지요. “네가 뭔데 너는 네 속에 그리스도가 말하고 나는 그냥 내가 말하는 것인가?”
이런 반발을 들은 자들이 선지자입니다. 미가야가 이런 소리 들었어요. “천상회의에 너만 초대받고 우리를 못 받았단 말인가?” 이것을 미가야에게 물으면 안 돼요. 미가야가 천상회의에 참석하려고 뇌물 준 사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이것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허락’이라고 한 거예요. 허락된 사람에게만 씨 뿌리는 비유를 알게 했다는 거지요.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을 하나 올렸어요. “어떤 선을 넘어서”라고. 이 제목을 어디에서 따왔는가 하면 TV드라마 [사랑과 전쟁]에서 따왔어요. 사람들이 선을 넘어서 가니까 나도 들어가려는데 천사가 막습니다. 왜냐? 하나님의 허락이 안 떨어졌다는 거예요. 선택 받지 않은 사람은 생명의 길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다시 정리해 봅시다. 인자가 와서 뼈를 살린다. 이걸 보고 “우리는 인자(또는 성령)가 오도록 뼈라는 것을 고백하자.” 그러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지요.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손 떼라고 합니다. 그냥 성령이 임하면 “아, 그 뼈가 바로 나였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지, 성령이 오기도 전에 “우리가 해골로 있으면 인자가 오셔서 우리를 살리실거야.” 이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주께서 지켜서 우리에게 그냥 제공하십니다. 율법이 우리 앞까지 와서 “지킬 거야, 말거야?” 이것이 아니고, 아예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는 육신이고 뼈란 말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황후 아줌마를 마취시켜서 옷을 젖히고 구멍을 뚫어서 한약재를 넣어서 한약재와 뼈가 직접 만나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 속에 악마가 있거든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었는데 아버지에 의해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요. 이것을 고린도전서에서는 “첫째 부활”이라고 해요.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능력에 의해서 밀려오는 것이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됩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은(이것은 한약재입니다) 피가 아니면 우리는 구원 못 받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권면, 명령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많은 말씀을 깔아주면 우리는 해골이고 저주 받을 자인데, 거기에다 피를 뿌리면 그 피와 악마가 만나서 악마는 패하고 우리는 “아, 내가 죄인이었구나. 성령이 오셔서 날 상한 심령이 되게 하셨구나. 맞습니다. 저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지은 죄는 사람에게가 아니고 모두 하나님께 지은 거예요. 이웃도 나도 없어요. 남을 위해 살 수도 없고, 날 위해 살 이유도 없습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 죄고, 우리의 모든 하는 일들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도 누구를 만나든 내 몸을 지니고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아까 경운기라고 했는데, 리어카가 더 적당할 것 같아요. 매일 느릿느릿 가는데, 주님을 실었는지 안 실었는지 구분도 안 되고, 늘 자신만 생각하지만 주님은 이런 나와 함께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역사가 장난이 아니고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 그것마저 우리는 상관없다고 외면해 버립니다. 이스라엘이 포로 잡히고 해골이 된 자에게 다시 찾아오시고 말씀으로 군대가 되고, 이 모든 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을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 2. 22. 09:36 녹취 마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