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이전지역강의포함)

서울강의-믿음속130809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7. 20. 20:44
2013-08-10 00:47:58 조회 : 775         
믿음 속 130809 이름 : 이근호 (IP:119.18.93.55)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김창길 (IP:210.♡.60.212) 13-09-28 22:37 

서울 의존교회130809a (믿음속)―이 근호 목사

오늘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장부터 보겠습니다.  

살후 3:1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살후 3: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살후 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보통 사람들은 사람이 먼저이고 그다음에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말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도 바울의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뭐냐 하면 말씀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사람이 있다.  말씀이 사람을 만들어 내는 거죠. 말씀이 사람을 만들어 내게 되면 기존의 사람은 사람으로 간주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에 못가면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쳐주지를 안 해요. 지옥가는 사람들이 돈 많다고 으시대는데 거기에 기죽을 일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을 펼치게 되면 여기에는 사람을 볼 때에 이렇게 말씀으로 중심으로 봐야 하고 말씀으로 평해야 된다는 것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우리들이 말씀을 덮어버리니까 세상 인간들이 인간들로 보이는데 성경만 펼쳐 버리면 그 말씀이 없는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되거나 다루어 질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속한 사람들도 그렇게 봐야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보고 우리는 그렇게 안보면 그러면 하나님의 생각따로고 우리 생각 따로 있잖아요. 그러면 안되잖아요.

여기에 1절을 보면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이렇게 되어 있지요. 세상에 종교들이 많은데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본인들이 종교의 경전을 사수하고 지키고 행하고 해서 신과 합의를 한다든지 아니면 도를 닦는다든지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복음은 그렇지 않아요. 주의 말씀이 인간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겁니다. 말씀 안에는 그만한 능력이 있어요. 주의 말씀은 그만한 능력이 있는 이유가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냥 말씀이 아니고 주의 말씀입니다.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여기에 주님이 계시고 말씀을 주시고 우리보고 지키라가 아니라 이 성경말씀에 주님이 함께 가계신거예요. 주님이 함께 가 있어서 이 말씀을 누가 다루느냐 하면, 이 말씀이 불도저라면 불도저를 주님이 운전해서 우리를 덮쳐버리면 우리는 여기서 뭘보느냐 하면 내가 지킨 말씀이 아니고 주의 말씀이 나를 덮쳤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굉장히 간단한 문제지요. 주의 말씀이 나를 덮쳤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말씀이나 이런 것을 뭐라고 자꾸 생각하느냐 하면 교본 또는 잔소리, 내가 그 말씀을 지키면 나에게 작용하고 안 지키면 그 말씀은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그렇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본래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니라서 그래요. 본디 하나님께서 처음 만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에서 따먹은 그 인간들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했는데 따먹은 인간은 어떻게 됩니까? 죽지요.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잖아요. 그러니까 그 아담은 죽었잖아요. 흙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주의 말씀이 우선이고 인간은 나중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리 까불고 난리를 치고 자기 나름대로 뭔가 해 보려고 해도 주의 말씀 테두리안에서 벗어납니까? 벗어날 수가 없어요. 오늘도 주의 말씀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이 아무리 해도 의존교회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주의 말씀에서는 벗어나지 않습니다. 벗어날것같으면 교회가 아니죠. 교회는 절대로 주의 말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마태복음 18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마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주의 말씀이 덮치게 되면 이쪽 사람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주여! 주여! 하는 것 말고 주의 말씀이 덮쳐서 나오는 주의 이름, 그러면 이것은 이미 말씀을 쥐고 있는 주님께서 이들을 모이게 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즐거움과 행복은 뭐냐 하면 매일같이 주님께서 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것을 늘 느끼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마태복음 18장20절을 보면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아하 이 말씀이 그 말씀이구나! 하고 느껴 지는 거예요. 여러분도 느껴지지요?  왜, 느낌 아니까 느껴지지요. 느껴지게 되면 교인수에 연연하는 일은 없습니다. 만약에 어떤 주일에 50명이 왔다. 그것을 잊으세요. 그것을 잊어져야 해요. 그게 50명이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주의 말씀을 벗어나고 있는 겁니다.

주의 말씀을 믿어야 할 것을 50명 온 교회를 믿게 돼요. 내 친구가 10명이다, 그러면 내 친구가 10명인데 내가 호출해서 등산가자 했는데 10명 가운데 1명왔다 하면 즐겁게 갑니까? 양 9마리 어디 갔느냐?  이렇게 나올 수 있다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주의 말씀이 덮친 것이 아니고  본인이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할 때 오류가 발생되는 겁니다.

주의 말씀을 지키다 보면 차차 주님의 말씀이 덮친 것이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라는 변명들을 늘어놓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1장 3절에 보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배짱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꿀릴 것도 없고 우리 주님께서는 손해 볼일도 없고 안타까울 일도 하나도 없어요. ‘안 믿겠습니다.’ 하면 ‘믿지 마!’ 믿지마라고 일부러 너 못 오게 하는 거야! 누가 믿으라고 환장을 했습니까? 안 믿어주면 답답한 일있습니까?

주님은 마음이 확고해요. 주의 말씀이 덮쳐서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 진 인간이 아니면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구원할 때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회개기도 했습니까? 여보! 이리와, 손 모으고 주여! 주님이여! 우리가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 따먹었습니다. 이렇게 회개 했더니 하나님이 찾아왔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 쪽에서 나가고자하는 그런 수단과 방법에 지나지않아요.

하나님께서 만약에 그런 식으로 다시 원상회복한다면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라는 길을 일부로 차단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차단한 것을 우리 코앞에 들이냅니다. 차단되었다. 생명나무 가는 길은 차단되었다.

동네 아파트에 있으면 여러분은 낮에 일하러 나가니까 있을 일이 없겠지만 동네아줌마들이 보면 ‘세탁-’ 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컴퓨터, 고장 난 컴퓨터, 전화기, 티브이 삽니다.’ 이러면서 지나 갑니다. 세탁 맡길일있으면 맡기고 고장난 했하다 고장난 컴퓨터 없으면 듣고 그냥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우리 주님은 뭐냐 하면 ‘생명나무 막혔음!’ ‘막혔음’, 또는 이번 수련회 한 것처럼 ‘소용 없음!’ ‘소용없음!’  저게 무슨 소리지 하고 나오는 사람은 땡잡은 사람입니다. 만날 하는 ‘세탁’ 하는 소리는 하루나 이틀 오는 게 아니고 일년내내 만날 오는 건데 내일 또 올 건데, 이렇게 생각하죠.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오늘 본문에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굉장히 난해해요.  왜냐 하면 믿음 자체가 인간이 믿으려고 한 믿는 믿음은 인정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왜 난해 하느냐 하면 사람을 구원하려고 이 말씀을 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난해 합니다. 사람을 구원하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조치에 대해서 ‘세탁-, 세탁-’ 이렇게 오니까 난해 한 겁니다. 저게 무슨 소리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저게 무슨 소리지? 

큰 교회, 한 5천명 모이는 교회 가서 여러분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하면 저게 무슨 소리지?  전부 다 궁금해 하는 거예요. 전부 다 그 소리에 반응하기를 아,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니까 아하, 우리 교회에 있는 교인들만이 믿고 나머지는 안 믿는 모양이구나! 다들 그렇게 반응이 나타내거든요. 그거 아닙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말은 제가 쉽게 말씀 드릴게요. 믿음은,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사람에 누가 포함되느냐 하면 모든 사람이 포함돼요. 말 되지요?  모든 사람에 모든 사람 다 포함됩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나는 모든 사람에 포함되지 않고 따로 나와 있다 할 때는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하냐 하면 이 사람의 사고방식과 이쪽 사람의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증빙 서류가 들어가야 돼요. 다르다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미국의 비밀정보를 폭로해서 러시아에 망명한 스노든이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공항 안에서 40일 동안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그 안에서 세수하고 햄버거 먹어가며 러시야  망명 서류가 처리되는 동안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러시아 공항에 스노든 망명자 한사람이 있어요. 비행기가 착륙하고 러시아 안으로 들어오는데 이 스노든은 밖으로 못 나와요. 전부 다 기내에 있는 사람은 나옵니다. 그런데 스노든은 40일동안,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말이 40일이지 얼마나 오랫동안입니까?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려면 망명허가가 돼야 나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러시아로 간다고 하면 이 사람은 나 못가! 하면 모든 사람과 이사람과의 차이나는게 있어야 돼요. 차이나는게 없으면 이것은 일방적으로 괜히 여기 배고픈 사람에게 통닭 한 마리 줍니다. 라고 이야기 하니까 실컷 방금 밥먹어놓고 통닭먹고 싶어서 ‘저, 배고파요!’ 이렇게 나오면 통닭 주는 사람이 그사람의 배를 째겠지요. 왜 다른 사람은 배 불러서 통닭 안 먹겠다는데 혼자 통닭 먹겠다고 하니까 모든 사람과 통닭먹겠다는 사람과 어떤 차이가 나야겠지요?  그 차이가 이쪽에 통닭 주겠다는 사람의 조건에 부응해야 통닭을 줄 꺼잖아요. 제 말이 맞지요?  그러면 배를 갈라봐야돼지요? 말이야 무슨 소리를 못합니까? 배를 갈라봐야 알지요. 배를 갈라놓으면 뭐가 나오죠? 뭐 배설물 나오죠.

마찬가지로 똑같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이렇게 할 때 ‘저는 3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여서 이제 믿는 사람 맞습니다.’  할 때 그것은 3년전의 이야기잖아요. 3년 전에 믿었고 그 다음에 믿는 것은 뭐냐?  내가 방금 예수를 믿었다는 자기 자신을 믿는다니까요. 여러분, 안 그럴 줄 알지요?  

복음을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말하는데 ‘복음을 믿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복음 이야기를 해도 오지를 않아요. 보니까 복음 믿는 자기 자신을 믿어요. 이게 무슨 복음 믿는 겁니까? 그것은 복음 믿는게 아니잖아요. 복음 알았습니다. 하는 본인을 믿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조건이냐 하면 복음 안다는 본인을 믿지 않습니다. 하고 이야기 할 사람이 과연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런 사람이 없다니까요.

신약시대에도 구약의 이스라엘 이야기를 할 이유가 뭐냐면. 이스라엘은 언약에 의해서 만든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나, 이스라엘 될래’ 하면서 손들고 와서 이스라엘된 것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 된 거예요. 신약의 교회는 뭐냐 하면 새언약에 의해서 교회가 된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6대손이 자기가 이스라엘이 되고 싶어서 딱 기다렸다가 이스라엘 사람 결혼 할 때 영혼이 들어가서 임신된 게 아니잖아요. 이스라엘의 언약이란 그 언약이 뭐냐 하면 인간의 육신조차도 언약안에 언약이 장악해서 너는 이땅에 아브라함 자손으로 태어나야해 해서 태어날 때 그 육신은 언약에 의해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이 애굽사람이 히브리인이 되고 싶어 환장해서 저 히브리인 되고 싶어요 해서 된 것이 아니잖아요. 남자가 여장한다고 여자 되는 것은 아니죠. 그게 육신의 한계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신을 통해서 아브라함 자손, 혈육적 자손이라는 언약적 한계가 구약에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아브라함 언약이 되려면 그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조치가 없으면 아브라함 언약의 이스라엘 될 수가 없어요.  종이 되든지 물을 깃는 사람이 되던지 그렇게 돼요.

기브온 사람들이 그렇게 했거든요.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사람한테 종이 돼서 굴복해서 물 깃는 사람으로서 옛날에 물이 귀했으니까 광산에서 광산 캐는 것만큼 힘들었던 모양이죠. 물 깃는 사람이 돼서 이스라엘이 된 거예요. 아브라함언약에 소속되었습니다. 그것도 영원히 노예로 살면서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아브라함 언약의 자손이 되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이 되었다는 본인의 의사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죠.

그렇다면 신약에 있어서 신자 되는 것이 자기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잖아요. 하나님의 뜻인데 하나님의 뜻을 믿어야지 하나님의 뜻을 믿는 자기를 믿으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이것은 믿음이 아니잖아요. 성경 말씀을 내가 지키겠습니다. 하는 것 자체가 건방지기 짝이 없어요. 네가 뭔데? 너를 왜 지켜? 나는 내가 예수 믿습니다. 하는 그것도 잘못 된 말이에요.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돼야죠.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돼야 되는데 내가 믿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내가 안 믿고 싶을 때는 안 믿을 수도 있지요. 이런 것과 똑같은 뜻이에요.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가 믿음 약할 때 내가 알아서 믿음 다 키우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하고 마찬가지입니다. 5년만 쉬다가 6개월 뒤에 교회 나오겠습니다. 이게 또 무슨 소리에요?  마태복음 18장 20장볼 때 뭐라 합니까? 벌써  세 번째 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했죠. 누구 마음대로 교회와요? 예배당에 붙어있으면 교인입니까? 주께서 불러줘야 교회에요. 주의 이름을 부를 때만 교회인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옆에서 같이 찬송이고 주의 이름으로 헌금하면 그게 교회입니까? 자기가 알아서 왔지, 자기가 알아서 온 거예요.

진짜 믿음은 내가 믿음을 철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기가 인정하는 거예요. 내 믿음을 철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면 자기가 믿음을 철회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지금 말이 이상하게 되지요?  무슨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나는 매일같이 안 믿으려고 하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매일 믿게 했다는 그런 흔적과 증거물을 가지고 있어야 그게 신자라니까요.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무슨 흔적만 있느냐 하면 매일같이 믿으려고 애쓰는 흔적만 있으니까 그게  믿음이 아닌 거예요.  말씀 잘 들어야 돼요. 지금 중요한 대목입니다. 나는 잘 믿어야지 하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사람이에요. 나, 진짜 예수 믿는가 한번 봐라. 하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노력했는데도 진짜 과연 안 믿어진다면 그것도 신자 아니에요. 안 믿어지면 신자아니라니까요 안 믿으려고 하는데 자꾸 믿어질 때 그게 신자인데 이게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교회되게 하신 주의 능력에서 나온 거예요.

이것이 히브리인 되기 싫어도 아브라함 자손 되기 싫어도 이미 육신적으로 규정을 시켜 놓은 그 규정의 능력이 언약의 능력이 이미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사항은 믿지 마라! 세탁! 세탁! 늦게 온 사람은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생명나무 막혔음! 하고 이것을 계속 외치는 거예요. 생명나무 가는 길이 막혔다는 거예요. 그 막혔음을 같이 막혔다고 동의하는 거예요. 예, 막혔습니다. 막혔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모든 사람은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에 모든 사람이 믿음이 없으되 믿음이 그 중에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 있잖아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이 되니까 당연히 믿음이 없어야 될 나에게 말씀이 주와 함께 찾아오니까 믿음이 생겨 버린거예요. 이 믿음은 우리가 믿은 믿음이 아니라 누가 주신 믿음이다? 주님이 데살로니가후서 3장 3절에 의해서 우리에게 쏙 집어넣은 말씀이 그냥 말씀이 아니고 누구의 말씀?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 심어져 있으니까 우리가 감당할 수가 없어요. 주께서 심어서 감당못하니까 아하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고 진짜 모든 사람이 믿음이 없어도 마땅한데 왜? 생명나무가 끊겼으니까 믿는 자는 따로 있구나하는 것을 늘 깨달으면서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 생활하지 말라고 해서 많이 놀라셨습니까? 많이 당황 하셨어요?  우리가 믿음을 믿고 자해서 믿어버리면 그것은 이방민족이 나 아브라함 언약 믿으면 아브라함 사람이 된다는 것하고 똑같은 소리에요. 아브라함 자손은 혈육 적으로 이미 다른 민족이 파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민족이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확정된 육신, 그 육신이 육체를 깨뜨리고 들어가는 경우는 어떤 경우 밖에 없느냐 하면 아브라함 자손의 경우는 어떤 경우 밖에 없느냐 하면 이삭뿐입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혈육에서 나온 게 아니죠. 이스마엘은 육에서 나왔지만 이삭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이삭의 임신 소식을 누가 전합니까? 1번 사람, 2번 천사  몇 번입니까? 천사잖아요. 천사가 개입해서 임신을 했다면 오늘날의 성도는 성령이 개입해서 다른 말로 하면 주의 영이 개입해서 다른 말로 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그 사람을 성도되게 하신 거예요.

따라서 주님이 개입해서 성도된 사람의 가치를 돋보이기 위해서 살려주는 주님이 찾아오지 않는 사람을 전부 다 탈락시키는 말씀만 골라서 주께서 사도의 편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참 듣는 사람은 섭섭하겠지만 그런데 그렇게 섭섭하게 느끼는 사람이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고 환호를 부르는 사람, 할렐루야! 야호! 하는 사람, 천사가 찾아와도 삼손 같은 사람은 여자 밝히면 마찬가지지만 소용없어요. 천사가 찾아와도 마누라가 임신을 해도 여자 밝히는 사람은 안되잖아요.

천사보다도 더 확실한 한번 박히면 잘 빠지지 않는 성령에 인 박힌 사람,  그 사람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신약에 새 언약 가지고 작용을 실시하는 겁니다. 무슨 언약입니까? 옛 언약이겠죠. 신약에는 새언약입니다. 차이점은 구약은 그냥 들이대는 것이고 신약에는 와서 대는 겁니다.

수요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 자신이 원인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결과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결과물이에요. 결과물이 마치 내가 원인이 되어서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산물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산물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은 약속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그 약속에 의하면 이미 약속 속에 시나리오가 정해 져 있어요. 함의 땅에 가서 4대만에 다시 올라온다는 겁니다. 그 당시 인간이 애기 낳는 회수가 100년이기 때문에 4대 만에 온다는 것은 400백년 만에 돌아온다는 겁니다. 400년만에 돌아오도록 프로그램이 이미 짜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받을 때 창세기 15장 15절에 네 자식이 4대만에 이 땅에 돌아오리라 되어 있고 그 다음에 제가 주의 깊게 보라고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17절입니다.

창 15: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고기는 누가 장만 했는가 하면 아브라함이 잡으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장만 했는데 아브라함이 정육점에 가서 사태살 좀 주세요. 이렇게 장만한 게 아니고 여기서 목살 두근 주세요! 하고 장만한게 아니고 장만하는 항목도 그 앞에 보면 3년된 암소와 3년된 암염소와 3년된 수양, 산비둘기……. 그 제물 리스트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공해 주셨습니다.

제물을 주고 난 뒤에 아브라함이 그 제물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아브라함의 제물을 아브라함 본인의 아이디어에 의해서 낸 겁니까? 아니죠. 그렇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신에게 다가갈 때 예배나 제사를 통해서 다가가잖아요. 이 예배와 제사가 하나님께서 인정한 겁니까? 인정한게 아닙니까? 인정한 게 아니에요. 그리신산에서 예배 드릴까요 예루살렘에서 예배 드릴까요?  그 자체가 하나님이 생각한게 아니라니까요

우리가 왜 신앙생활이 힘든 가운데 있느냐 하면 이미 인간 세상에 신을 향하여 뭔가 준비해 놓은 게 있고 그 준비해 놓은 제도와 절차와 방법들이 있어요. 있는데 그것을 no! 그게 아니야 라고 한다는 것 자체가 그 공동체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는 그런 여건이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성도를 둘러싸고 있어요.

그게 아니야!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게 아니야 하고 이야기를 할 때 그 쪽에서 반발이 아주 대단하다 말입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 하는 그 반발이 결국 어디 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취직문제까지 계속 이어져요. 너 우리 집에서 호적을 파라! 하는 그런 문제까지 나오는 겁니다. 사랑하는데 신앙이 안 맞으니 갈라 섭시다. 사랑해 놓고 나중에 헤어지고 헤어지고 다른 남자하고 결혼하고 나니 아깝고 ……. 세상에서 마음의 상처까지 안고 있는 거예요.

잠깐 살펴봅시다. 생명나무라는 것은 막혔어요?  안 막혔어요? 막혔죠.  막힌 입장에서 인간 쪽에서 뭐를 바쳐도 뭐를 제사해도 받겠습니까? 안 받겠습니까? 안 받는 거예요. 그렇다면 가인이 제사를 안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연한 거예요? 당연하지 않은 거예요?  당연한 거죠. 그러면 가인의 제사를 안 받으면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아야 돼요?  안 받아야 돼요?  안 받아야 맞아요. 아벨의 제사를 안 받아야 하나님의 뜻이 일관되고 항상 같은 원칙을 적용시킨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잖아요.

아, 하나님이 제사 안 받는 구나! 하고 아는데 문제는 모든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괜찮다니까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안 믿는데 믿는 게 생기는게 문제이고 가인의 제사를 안 받는게 정상이고 아벨의 제사를 받는게 비정상이에요. 그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잖아요. 그러면 이런 제사 사건을 통해서 결국 남은 게 뭡니까? 남은게 하나님 때문에 유발된 억울한 죽음만 남지요?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원인이 돼서 결과로 주어지는 예배는 받는데 그 예배의 진수, 예배의 본 모습은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죽음입니다.

예수님도 아벨과 사가랴의 피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했는데 이 죽음을 물질로 한 자로 표현하면 ‘피’가 돼요. 성경을 처음부터 자세하게 훑어보면 하나님의 뜻은 모호하지 않습니다. 분명합니다. 예배 안받는다 했는데 하나님쪽에서 자기의 원칙 위배해 버려요. 반칙 해 버려요. 예배 안 받는다 해 놓고 예배를 받으니까 안 받는다 했으면 쟤도 안 받아야지 쟤는 뭔데 받습니까? 해서 죽이죠. 그 죽은 아들 이름이 뭐죠. 아벨이죠.

아벨의 뜻이 뭡니까? ‘허무’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허무라는 이름의 예배를 받아요. 허무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제사를 주께서는 받습니다. 가인은 너무 허무하기 때문에 그 제사를 드릴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그 제사를 드리고 나면 본인도 허무해 지니는데 미쳤다고 우리가 그런 짓을 합니까? 허무하지 않으려고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데 제사 실컷 드리고 피 흘리고 제사 실컷 드리고 죽고.... 미쳤나, 그렇게 살게 아무도 그렇게 살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안 믿어요.

그런데 주의 말씀이 덮치게 되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삶이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신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식을 낳는다 했는데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그 자식이 아니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자식이 없는 거예요. 없는데 천사가 와서 자식이 있을 거라 했죠. 그 자식은 죽어야 될 자식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그 이삭을 받침으로 말미암아 그 이삭은 더 이상 아브라함에게 있는 존재?  없는 존재?  둘 중에 어느 겁니까? 있는 자식이에요?  없는 자식이에요?  없는 자식이에요. 이미 죽어 없는 자식이 현재 있다고 우기는 아버지를 살리는 방식이 주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요 영광이요 생명입니다.

왜 그러느냐?  생명은 이 땅에 없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식으로 생명은 우리에게 전달돼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명은 이 땅에 없었더라 이 말입니다. 없는 생명은 인간은 조작해서 조잡하게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없는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놓고 자기가 원인이 되어 만들어 낸 그 결과물 가지고 그것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이여! 이게 믿음입니다. 하고 들이대는데 그것을 누가 받습니까?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받을 이유가 있습니까? 더러워서 안 받습니다. 언약도 아닌데 안 받지요.

사람들이 자꾸 잊어버려요. 하나님의 생명나무 가는 길이 없다! 끊어졌다! 이것을 자꾸 잊어버려요. 하나님은 똥배짱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속에 없는 자가 등장해야 있는 자가 산다는게 원칙이 들어있는게 되면 아브라함이 오늘 본문에서 제물을 드릴 때 이 제물조차도 그 출발점이 아브라함이 정육점에 가 고기 대충 드리는 게 아니에요. 벌써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몰라요. 하나님은 인간의 제사를 안 받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제사를 안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제사를 준비하게 해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제사를 오늘부터 받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광고하듯이 끝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제사를 안 받는다는 것을 어떤 식을 알려 주느냐 하면 제사를 드리게 해 놓고 그 제사 속에 너희 제사을 안받는다을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믿음은 우리가 매일같이 ‘내가 다시 예수 믿으면 나는 개다.’ 라는 노력을 하게 만들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조치하는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 믿는 방법은 예수님 대신 하나님 대신 천국 대신 돈을 믿으면 돼요. 그 놈의 돈! 돈! 돈!

이번 수련회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의 품격이나 품위는 돈만 있으면 품격 생기고 품위 생기고 돈 없으면 품격이고 품위도 날아가 버립니다. 사람의 인간됨? 자존심? 돈만 있으면 저절로 생기고 돈 없으면 있는 자존심 다 가버립니다. 인간이 개뿔을 믿어요?  뭘 믿어요? 지금 믿을 것이 없으니 하나님 믿지 대번 믿을게 있으면 하나님 때려치우죠.

삼손?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가지고 여자 3명이나 바뀌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 것은 남자의 매력이 다 빠진, 눈 빠졌지 머리카락 잘렸지 그게 뭐가 남자의 품격입니까? 신사의 품격이 그렇습니까? 눈 빠져서 신사의 품격입니까? 어느 여자가 좋아합니까? 긴 머리 휘날릴 때 그때 좋았죠. 긴 머리 있을 때 완전 훈남이었습니다. 자기 성질 건드린다고 나귀 뼈다귀로 3천명 죽일 때 사나이중에 사나이 아닙니까? 그런 사나이가 어디 있어요? 

추성훈이 있죠. cf도 나오고 남자 같잖아요. 그런데 그 선수가 만약에 눈 다 빠지고 늙어있으면 누가 cf 찍자 하겠습니까? 말이 안 되죠. 삼손이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 비로소 그 순간의 하나님의 나실인을 감당했다니까요. 주의 말씀은 자기가 하려고 할 때는 주의 말씀이 안돼요. 자기 한 모든 것이 소진 됐을 때 ‘아이고 주여, 더 이상 믿고 싶어도 믿을 만 한 돈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이럴 때 비로소 그 때 누가 보입니까? 선물로 주신 믿음이 그때 보입니다.

팔팔하고 예쁘고 참하고 활기차고 돈 꽤나 있을 때 그 때는 주님을 믿는 게 아니고 주님이 주셨다고 믿는 건강과 돈을 믿어요. 그것은 믿는 게 아닙니다. 제가 쓴 ‘기독교의 허상’이라는 책에 보면 목회자의 구원은 목회가 망하는 겁니다. 목회 망할 때 구원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주를 욕할 그 때 인간의 육신의 본성이  비로소 처음으로 공개되는 겁니다. 본인이 그것을 느끼면 아,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구나! 내가 이토록 하나님을 싫어하고 안 믿었구나! 입만 열면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이 구라, 이 거짓말, 세상에 어떻게 그 당시에 이렇게 뻔뻔 스럽게 구라를 했지?  아 남들에게 먹히니까 남들이 속아 넘어가 주니까 이게 믿습니다. 하고 만발한거예요.  본인도 몰랐죠.

인간은 예수 믿는 본인을 믿게 되어 있어요. 예수를 믿는 게 아니에요. 예수 믿는 자신을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마저 죄라고 규정하는 것은 주의 말씀에 의한 사건이 들어 올 때인데 그 사건은 천지개벽 지진나고 우박 떨어지는 그런 사건이 아니고 오늘 본문 그대로입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바로 준비는 아브라함이 했지만 그 아브라함이 준비한 그 제물에 밤중에 쉬이익 하고 지나가죠. 뭐가 지나갑니까?  횃불이 제물을 쪼개는 거기다가 고속도로를 만들어 놨어요. 제물을 쪼개놓고 쉬이익 하고 지나가는 거예요. 참 하나님은 우리의 정성만 받으면 되는데 왜 이리 복잡해요?  하나님 받으소서! 하나님 한잔 받으소서! 하면 하나님이 어 맛있네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놨어요.

제물을 두 쪽을 내서 마주보게 해 놓고 마주본다는 것은 이렇게 쪼개 놓는다고 해서 각각 분리될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쪽 제물과 저쪽 제물이 시선이 마주치게 되는 이 비어 있는 공간이죠. 이 빈 공간에 뭐가 차지한다?  뭐가 찾아온다?  아브라함이 술을 부웠습니까? 경주법주를 참이슬을 거기에 붜요?  여기에 뭐가 지나 갑니까? 밤중에 주님이 지나 가지요.  그렇다면 이 쪼개놓은 중간을 지난다는 말은 주님이 여기 계시고 제물을 다시 합쳐버리면 결국은 이 제물은 누구를 보여 준다?  이 제물은 바로 장차 오실 예수님을 아브라함 그 당시 식으로 내막을 쪼개놓고 보여 준 거예요. 그 전에 뭐라 했느냐 하면 너희 자손이 4대만에 애굽에서 올라 오리라 했잖아요. 그러면 애굽에 갔다가 아브라함 자손이 4대만에 올라오는 것은 그 모든 성과와 모든 원동력은 어디서 나온겁니까? 그렇게 예언을 하시고 원인 제공을 하신 그 주님에 의해서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야 만 하는 사람들이에요.

여기서 중요합니다. 나와야만 하는데 그 나올 때 아브라함의 언약에 여기 창세기 15장의 정신을 알고 나올까요?  모르고 나올까요?  모르고 나와요. 왜?  그것을 알려주는 것은 일단 나오라했는데 광야 지나면서 그 다음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다는 것은 그 다음 사건속에서 일어나줘야 되는 거예요. 일어나면서 아브라함의 언약이 계속 쪼개놓고 주의 말씀드러내고 또 그들끼리 합치면 또 쪼개버리고 또 드러내고 그러니까 계속 쪼개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예 전기톱을 손에 들고 있어요.

주님께서 계속 쪼개는 거예요. 네가 믿는 것은 그 안에 그리스도가 들었기 때문에 믿는 거예요. 이것을 쪼개는 거예요. 그럼 밖에 있는 것은?  안 믿겠다는 소리 하는 거죠. 사람이 예수 안 믿겠다는 것은 ‘안 믿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여! 바쁩니다. 주님이여! 저 돈 좀 벌어야겠습니다. 다른 것, 돈과 세상적인 그것이 있어야 진짜 나다운 나의 품격, 나의 품위, 나의 생존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바로 세상과 결합이 될 때 주어집니다. 라고 확고히 할 때 그것을 중간에 전기톱 가지고 칙이익 잘라버린다는 겁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되는게 언약이에요. 우리는 아브람이에요. 매일같이 우리를 전기톱 자르고 우리에게 생명나무 주는 겁니다. 왜냐 하면 그래야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산 예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밖에 모르는데 제물은 바로 주님이 함께 있을 때 제물 되지 주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 우리는 산제사를 드릴 수 없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볼 때에 하나님의 아브라함의 언약의 취지는 지금도 여전해요. 우리교회에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브람 언약과 새언약의 차이점이 뭡니까? 질문은 간단한 거예요. 간단하게 질문했으니까 간단하게 답변 했죠. 아브라함 언약은 아브라함보고 맺은 언약이고 새언약은 예수님보고 맺은 겁니다. 그 사람이 듣고 싶은 답변은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까 그런데 질문을 그렇게 했기 때문에 답변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연이어 그 사람이 질문을 하는데 아브라함에게 준 복과 신약의 복이 뭡니까? 그렇게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먼저입니까? 신약의 언약이 먼저 입니까? 쭉쭉 그런 질문이 또 나와요. 제가 감사하고 고맙게 여기는 것은 언약이라는 것이 세상의 일부가 아니고 언약 때문에 지금 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먼저 있고 날 살려서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에서 그런 질문을 했다면 제가 참 고맙겠다 하는 생각을 혼자서 해 봤습니다.

언약이 먼저 있고 내가 있다.  집에 돈이 없다, 그러면 내가 돈이 없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돈을 없게 한 거예요. 제발 나는 좀 빠져주세요. 언약이 돈을 없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돈 벌기 위해서 잠시 예수 믿는 것 그만두고 교회 안 다니고 돈 바짝 벌어야겠다 해도 괜찮아요. 왜?  언약이 그렇게 했다고 믿어지면 되는데 사람들이 언약이 했다고 해서 돈 벌러 나가면 그것은 괜찮은데 이것은 언약이 했다 하지 않고 뭐라 하느냐 하면 내가 교회 가고 안 가고는 내 마음이다.

자기 자신을 믿으니까 언약은 뒷전이고 자기가 앞장서니까 이것은 그야말로 말이 마차 뒤에 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순서로 나열된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내가 앞장서서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내가 주인공이 된 이 세상은 현실이 아니고 허상이고 망상입니다. 나 이전에 먼저 나를 이렇게 집어넣은 그분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김창길 (IP:210.♡.60.212) 13-09-28 22:38 

서울 의존교회130809b (믿음속)―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 하겠습니다.
대구가 오늘 40도라고 하는데 우리가 보통 뭐라 하느냐 하면 더워 죽겠네 하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죽으라고 덥게 하신 거예요. 더워 죽겠다는 말은 살고 싶다는 뜻이거든요. 살고 싶다고 하니까 주님을 못 만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 40도 안되고 늘 18되게 해 줄게 하는 그런 권리가 인간에게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그런 요구할 권리는 없어요. 하나님 18도요 하나님 이번에는 17도요 누구보고 시키느냐 말입니다. 인간이 신을 다룰 수 있는 처지가 못 됩니다.

이 땅은 우리 보고 죽으라고 있는 거예요. 왜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예수님은 더워서 죽지는 않았어요.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죽었어요. 우리가 만날 짓는 죄 때문에 죽었거든요. 우리는 죄를 지어도 인간인 이상 그럴 수도 있지 그냥 넘어가는데 주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아요. 왜냐 하면 이 세상은 유황불로 불타 없어 져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안양에서 오늘 오후에 공부를 하는데 어떤 집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하도 날씨가 더워서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다니엘 세 친구가 불속에 들어간 그 느낌을 본인은 느꼈다는 겁니다. 더 뜨거워야 돼요. 칠배나 더했는데 그까짓 35도 가지고 안 되고 35도 곱하기 7해야 됩니다. 이것은 상상 못할 정도로 뜨거워야 되고 그리고 거기에 보면 다니엘 세친구는 반드시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 말은 그 다니엘 세친 구를 죽임으로서 장차 오실 다니엘 세 친구를 건져낼 주님도 죽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니엘 세 친구는 불속에 죽고 다니엘은 사자한테 먹혀죽고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지만 사실은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보다 보이지 않는 상황, 세상은 뭐로 규정되어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저주 받을 죄로 갇혔고 뒤덮여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구원할 백성들로  하여금 그러한 사자굴이나 유황불이나 또는 40도 이상에서 더워 죽겠다는 그러한 경우를 당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겠다 하고 나올 때 성도 같으면 아하 내가 세상을 져다보는 자체가  이것이 아이고 난 또 잊어버렸네! 이게 죄인줄 또 잊어버렸어!  하고 다시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계기를 축복으로 주시는 거예요. 사람이 이 땅의 것으로 살 것 같으면 하늘에 있는 우리 생명을 쳐다볼 이유도 그럴 필요조차 없잖아요.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하는데 우리는 뭐라 합니까? 말로만 현실감 뚝 떨어진 말을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이런 소리를 한다니까요 마치 만날 빌빌 노는 남편이 하는 말이 ‘내가 이번 일만 잘되면 좋은 집 사줄게!’하면 아내가 뭐라 합니까? ‘내가 젊을 때나 속아 넘어갔지 지금은 안속아 넘어가!’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주님의 말이 신빙성이 하나도 없어요. 지질이 못난 남편보다도 그 말이 신빙성이 없어요. 주님을 믿다가는 죽어요. 참 오랜만에 맞는 말 했죠. 주님 믿다가는 죽는다니까요. 주님께서는 그렇게 죽으라고 날 믿으라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스데반 집사잖아요. 스데반 집사가 설교하고 난 뒤에 설교비 얼마 받았습니까? 받기는 뭘 받습니까? 설교 마치고 나니까 돌 맞아 죽었어요.

죽으라고 주께서 성령 충만해서 그 설교 시킨 겁니다. 죽으라고 설교시키고 죽으니까 주님이 일어서서 스데반 집사를 영접하잖아요. 마치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나왔잖아요.

계 3: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이 스데반 집사에게 그대로 실행되는 겁니다. 그런 사건들을 놓치지 마세요. 그런 사건은 모든 인간들이 만들어 낸 그런 조작된 현실 속에서는 찾아내기 힘든 것이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집어넣어주게 되면 퍼뜩퍼뜩 눈에 띄게 되어 있어요.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그런 사건들이 눈에 띕니다.

데살로니가후서를 다시 보면서 정리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믿음이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이유를 설명하면 이스라엘 보아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이스라엘이 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에 이전에 뭐가 있었다고 했습니까? 언약이 먼저 있었고 네가 4대만에 돌아오리라 했던 약속도 주님부터 시작해서 주어진 결과이지 아브라함이 혼자 심취해서 야, 하나님 복 받아서 자식 많이 낳아서 4대만에 돌아가자 하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왔거든 주의 뜻이 아닌 줄 아시기바랍니다.

우리의 아이디어는 아무 쓸모도 없고 그야말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될 수밖에 없는 그런 거예요. 이번 수련회 전도서 하면서 주제가 뭐였습니까? 모든 것이 끝이잖아요. ‘끝’, 하나님은 끝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끝이 아니라고 버티니 우리가 제대로 현실을 알기는 아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에 와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이것은 믿기지 않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믿음이 있다니?  믿을 수 없는데 뭘 믿어요?  아무도 믿지 않는데 무슨 믿음이 있어요? 오히려 우리는 의아하게 여겨야 해요. 그렇게 하는 원인은 뭐라 했습니까? 그것은 지금도 주님이 살아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데살로니가후서를 보게 되면 사람들은 사도행전을 지나갔기 때문에 사도행전이 그 다음 시대인줄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 전부 다 누가 썼습니까?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행전 2차, 3차 전도때 쓴거예요. 아직 사도 행전 안 끝났어요.

그러면 데살로니가 후서를 알면 사도행전에 전체적인 내용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 사도 행전의 전체적인 내용이 뭐냐 하면 기이한 일이잖아요. 갑자기 하늘에서 불 떨어지고 성령오고 그래 봐요. 성령이 온다는 것은 인간들이 애써서 하는 일이 아니에요. 이것은 귀이한 일이고 천지개벽하려고 환장한 일이지 멀쩡한 세상에 성령이 왜 옵니까? 누가 어디서 오라고 이야기 해 줬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하늘에서 삐라 뿌리듯이 하늘에서 광고지 뿌리듯이 자수하라 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그냥 뿌린 거예요. 뿌린 것이 얻어 걸린사람은 성령세례 받은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령세례 못 받은 사람이에요.  그게 사도 땡전이에요.

그게 성경책 속에 있어요. 세상 자체가 지금 놀라운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을 찾는 사람은 누구냐? 성령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그것만을 찾고 있어요. 세상은 돈 얼마 받았냐?  그것만 찾고 있지만 성경은 네가 성령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그것만을 찾고 있어요.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참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마다 죄송스런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요.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을 뿐더러 불러도 인간이 아닌 거예요. 아버지 해도 인정도 안 해 주고요.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영광도 받는데 고난 받기 때문에 이땅에서 주님 가신 길을 성령께서 몰아 넣기 때문에 고난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 이야기 먼저 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게 되니까 예수님이 다닌 길 전체가 죄와 어둠으로 드러났고 예수님은 공격을 받게 되어 있어요. 공격을 받게 되면서 여기서 고난이 발생 되잖아요. 이게 성령께서 예수님과 함께 있으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 현상을 누구한테 반복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된 사람에게 반복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께서 고난 받아서 십자가 지셨잖아요. 부활하셨잖아요. 부활하셨으니까 육신의 죄가 있던 자신이 성령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죄가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죄 없는 상태를 일끌기 위해서 자신의 영으로서 똑같이 주님을 일끌던 그 성령의 사역을 그대로 성도에게 반복해서 가는 겁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따라 오지 않으면 너의 몫은 없다! 너의 생명은 없는 거예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기고 혼자 가면 안 되고 십자가 지고 누구를 따라오라? 나를 따라오라! 주님께서 나를 따라 오라하는 것은 빈 말이 아니고 성령을 보내지게 되면 주의 가는 길을 가게 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십자가 지신 것은 그 본을 쫓아 따라오게 하심이라, 따라 오게 하는 겁니다. 계속 그 길을 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 길을 가고 있는지 안 가고 있는지 어떻게 확인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가신 길로 주변에서 죄가 어두움을 드러낸다고 했지요? 마찬가지로 성도가 성령받고 가게 되면 주변은 뭐로 드러나느냐 하면 주변은 죄와 어두움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 죄와 어둠에 관한 상황을 3장 4절부터 끝까지 나오는데  두 번째 시간에 이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주의 말씀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 주의 말씀이 덮치게 된 사람은 이제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 가야되는데 그렇게 가게 되면 그야말로 카드 긁듯이 세상을 긁어버리면 그 주변에는 멀쩡한 세상이 어둠과 죄악된 세상으로 노출이 되는 그런 현상이 나는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여기서 주의 할 것은 내가 주님 노릇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교주가 되어 버려요. 제가 그것 때문에 오늘 첫 번째 시간에 그 대목을 언급한 겁니다. 누구든지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누가 함께 있다?  주님께서 함께 있느니라  그 말을 바꿉시다. 주님이 함께 있고 싶어서 두 세 사람을 불렀다는 것을 믿어라! 이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이 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두 세 사람을 부른 거예요. 부르지도 않은 5천명이 모였다면 두 세 사람만 빼놓고 5천명 다 가짜고 두 세사람만이 관계가 있다 말이죠. 5천명이 같이 찬송을 하고 합창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5천 명 중에 두세 사람 있으면 그것도 비율상 많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나보다 언약이 먼저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있어 버리면 내가 열심히 전도해서 만약에 세 사람 네 사람 모았다면 그 다음 주일돼서 그 중에 한 사람 빠져 버리면 본인의 마음의 품위와 품격이 확 떨어져요. 이것은 나라는 존재가 이 땅에 살아야 될 이유가 없네! 이렇게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할 것같으면 차라리 눈감고 죽는게 낫지, 이런 실패와 이런 모멸과 모독을 당하다니 차라리 죽는게 낫지 라고 생각한다면 결국 지난 주에 자신이 모아 놓은 것은 누가 모은거예요?  그것은 주의 이름이 아니고 자기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억지로 모은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열 댓명 모이면 의심하세요. 주의 이름에 의해서 모인 분 혹시 계십니까? 제가 없는 줄 알거든요. 혹시나, 혹시 주께서 불러주셔서 오신 분 계십니까? 그런 사람한테는 복음만 전해도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몰아서 온 사람 같으면 복음만 전하면 두 번다시 안 옵니다.  왜냐 하면 딴 것을 원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교회를 나오기 때문에 주님이 필요해서 온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필요해서 예수님을 찾는 사람이기 위해서 그런 사람은 주님을 증거할 때는 오지 않지요.

그러니까 이 마태복음 18절 1절 한 절의 말씀이 평소에 우리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얼마나 송곳으로 치르는 말씀입니까? 이래 찌르고 저래 찌르고 계속 찔러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매일같이 찌름을 당할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말씀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찌릅니다. 두 세 사람이 함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느니라 주여, 지난 밤에 우리교회 세 사람이 왔는데 세 사람 다 주의 이름으로 왔다니까 감사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찌르고 찌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그동안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평소에 우리가 세상이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사실은 세상이 힘든 게 아니고 내가 주님 보시기에 자기가 스스로 힘들게 살다보니까 세상이 안 받쳐주는 거예요. 세상이 안 따라 주니까 주님 원망하다가 세상 원망하다가 이렇게 사니까 자기 고생을 사서 고생을 해요. 개뿔도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 척해야 되고 골치 아파요. 사람들이 어디 가서 말을 안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사람들이 어디 가서 말을 안 하는 이유가 믿음이 없으면서 믿는 척, 있는 척 하려니까 밑천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어요. 참 그 사모님 과묵하다 그런 칭찬 받으려고…….

입만 떼면 뒤에서 씹거든요.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사모가 믿음도 없더라. 이렇게 나올 것 같아서 차라리 말을 안 해요. 그래서 사모가 기도 하는 것도 힘겨워해요. 부탁합니다. 여보 나 기도 빼줘! 기도 빼달래요. 기도 빼달라는 기도를 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주께서 응답하실 텐데, 하나님 아버지 다음부터 기도 빼주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이런 기도라도....

지금 내가 구원하는 게 아니고 남편이 구원하는 게 아니잖아요. 왜 남편을 붙들고 난리입니까? 남편이 구원하는게 아닌데요.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이것이 바로 사단입니다.

세상 자체가 불 꺼진 소리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잡아먹힙니다 또 잡아 먹힐만도 하지요. 돈에 미쳐 사는데 안 잡힙니까? 마귀가 좋다고 밥이라고 놀리고 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음이 있다 하는 이 모든 공로는 주님의 언약이 나보다 우선되는 거예요. 언약이 먼저 있고 언약을 위해서 우리가 뽑혀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왜? 얼마나 내가 못됐고 못난 존재이고 얼마나 내가 죄인이며 얼마나 주님은 나 때문에 고생했는지를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세상을 좋아할 것이 아니고 같이 더러워진 세상을 관통하면서 다른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네가 미쳤구나! 라는 소리를 들어야 돼요.

우리가 돈 밖에 모른다 할 때는 멀쩡한 줄 알았지만 하지만 예수이름으로 피로 구원받았다 하니까 그 점에서 미쳤구나 하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나는 죄만 짓는다! 그때는 다 같이 동의 하면서 죄지으니까 나도 죄짓는다 이렇게 나오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오니까 미쳤다 하는 거예요. 이게 지식이 아니고 지식을 깨는 식으로 실제로 주께서는 살아계셔서 우리를 주의 이름만 교회 와서 만이 아니고 평소에 집구석에서도 주의 이름을 불러야된다는 것, 주의 이름을 부를 수 밖에 없는 두 세 사람을 모이던 흩어지던지 친히 주께서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5절에 나옵니다.
살후 3:4 너희에게 대하여는 우리의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살후 3: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주체가 주죠. 이것을 구약적 용어로 바꾸면 아브라함의 언약이 너희에게 인도 하는 것을 봤다 하고 똑같은 거예요. 아브라함 언약에서 횃불 지나감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언약의 모든 계획은 아브라함이 정한 것이 아니고 누가 정한다?  지나 가신 하나님이 정한다 했지요. 하나님이 정할 때 그 다음에 아브라함에게 어떤 혜택이 있는가? 아브라함에게 혜택 하나도 없어요. 여러분, 이것을 오해하시면 안돼요. 아브라함은 혜택 없어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게 합니다.

이삭을 낳게 할 때에 아브라함은 마치, 이삭이 낳은 것이 아브라함이 혜택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게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오해를 할까 안 할까를 시험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친히 아브라함의 손으로 잡아 죽이게 하지요. 축복이야?  축복은 잡아야지 이삭을 머뭇거리지도 않고 잡아 죽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위해서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아브라함을 이용할 뿐이죠. 하나님이 먼저 있고 나중에 아브라함이 생겼잖아요.

하나님이 먼저 계시고 나중에 우리가 만들어 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용하려는 거예요. 수련회때 이것을 뭐라 했지요? 우리는 주님이 하얀 가운입고 차트 쓰시고 우리는 실험실에 하얀쥐입니다. 주님의 쥐에요.

천사가 말합니다. 지금 왼쪽으로 봅니다. 노래방 하다가 말아먹고 지금 치킨집합니다. 알았어. 치킨 집. 치킨집하면서 손님하고 싸웁니다. 술 먹는다 안 먹는다 술값 많이 받아서 싸우고 있습니다. 알았어! 차트에 있습니다. 우리는 갇혀있는 실험실의 하얀쥐에요. 아브라함은 하얀쥐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에요.

그것을 가지고 히브리서 1장에 뭐라 했느냐 하면 오늘 안양 강의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집에 머슴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일꾼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환이 사환 노릇을 제대로 못하죠. 왜?  사환은 아들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사환 믿다가는 안되고 아들되야 되요. 그런데 모세때에 아직 아들 안 왔어요. 언제 왔습니까? 마지막 때에 오십니다.

항상 구약을 염두에 두어 둬야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구약 전체를 포함해서 믿어야 되는 겁니다. 구약을 모르니까 그냥 덜렁 예수의 이름만 불러 버리니까 이것은 내가 먼저 있고 예수는 나중에 있는 것처럼 나를 위해서 예수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하는 거예요.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언약이 먼저 있고 이스라엘이 나중에 있었던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이지 우리를 위해서 주님이 있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너희마음을 인도하여’ 이것은 바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 할 때 하는 방정식과 동일한 방정식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것도 이상하죠. 하나님의 사랑을 주게 되면 받아 누리면 그만인데 인내는 왜 들어갑니까? 인내가 없도록 조치해야 사랑이 아닐 까요?  힘들어도 참아라! 참아라할 필요가 없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여기 돈 있다! 즐겨라! 이런 게 사랑 아닙니까? 돈 없어! 참아라! 이것은 너무 심한 인내를 요구하는 것 같아요.

다시 예를 들게요.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거기에 함께 있느니라  이것은 목회자들에게 얼마나 큰 인내를 요구합니까? 그리스도의 인내라는 것은 그야말로 그리스도가 결국은 목자를 치니 누가 흩어져요? 목자를 치게 되면 양떼가 흩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양이라 하는 것은 목자치면 양들이 흩어지고 결국 마지막 제거되고 마지막은 예수님만 그분만 남지요. 그 분만 남아야 그분이 구세주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만 남고 나는 뒷전 되게 만드는 그런 인내를 해야 해요. 인내라고 하는 것은 버티는 게 인내가 아니고 나를 멀리하고 주님만 보일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인내의 조건입니다. 그런 조건을 주께서 주의 인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그런 상황이 우리에게 이루어진다 이 말입니다.

말씀 듣게 되면 우리가 걱정할 것이 손톱만큼도 없어요. 시원해야 될 이유가 없다니까요. 주께서 에어컨 틀어 시원하게 만든 것은 너 에어컨 믿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시원하게 한 겁니다. 주여! 에어컨 믿는게 아니고 감사할 뿐입니다. 알았어! 그러면 좀 있다가 그럼 네가 에어컨을 모리 산에 가서 잡아라! 하면 아니 아니되옵니다. 40도인데 더워서 안됩니다. 에어컨 없이 못삽니다. 거봐 거봐 말만 안 믿었지 에어컨 믿었잖아!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한테 이렇게 말씀으로 시달리게 되는 겁니다.  매일같이 시달릴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주님에게 시달리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어 가시겠습니까?

막혔던 사실을 생각해야 돼요. 이게 천국이고 이게 세상이라면 이 세상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지옥으로 바뀝니다. 이게 하늘나라 이면 하늘나라 천국은 아들의 나라로 바뀝니다. 아들을 경유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천국은 우리가 살기 좋은 에덴동산의 회복이 아니고 아들의 나라에요. 아들 속에 없는 사람은 천국을 자꾸 상상하게 만들어요. 천국을 자기가 들어가서 살기 좋은 나라로 생각 하는데 이것은 우상입니다. 아들의 나라입니다. 아들이 합류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 지옥은 자기 밖에 모르는 자기를 위한 우상을 섬기는 나라입니다.

여기서 뚫고 들어갈 때 어느 지점에서 나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바뀌겠습니까? 어느 대목에서 바뀌겠습니까? 바뀔 수가 없지요. 뚫어보세요. 전기 용접하는 것 가지고 은행이 있으면 은행 비밀금고 밑에는 콘크리트가 되어 있어서 밑에서 땅굴 파고 못 들어오게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뚫는 도둑놈도 있어요.

밑바닥을 뚫을 때 5센티 뚫었습니다. 뚫을 때 누가 뚫었습니까? 주의 은혜로 뚫었습니까? 자기가 뚫었습니까? 본인이 살고자 뚫었잖아요.  그러니 자기 부인이 돼요? 안돼요?  안되지요. 그러면 10센티만 뚫었습니다. 지금 까지 누가 뚫었습니까? 자기가 뚫었잖아요. 뚫으면 뚫을수록 점점더 생생하게 자기의 공로와 수고와 땀과 인내 이런 것들이 그대로 살아있지 이런 것들을 어떻게 부정합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천국 밑바닥을 뚫을 수가 없는 겁니다.

만날 뚫으면서 하나님, 착한 일 하고 있지요. 착한 일하고 있는 것 봐주셔요. 만날 착한 일하고 있데요. 착한 일 하니까 못 들어가는 거예요. 이번에 수련회에서 10가지 없는 것 했었지요. 저도 못 외워요. 대중 생각나는 게 뭐냐 하면 천국에는 착한게 없지요. 천국에는 윤리 도덕도 없고 착함도 없고 신앙생활도 없고 천국에는 인간관계도 없어요. 그게 왜 그런가?  사람은 천국 가고자 할수록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천국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언약이 먼저입니다. 내가 먼저가 아니고 언약이 먼저입니다. 여러분, 지하철 내릴 때 전부 다 카드를 데고 내리는데 카드 없이 그냥 문 열어주는데가 딱 한군데 있어요. 그것도 또  돈 없는 사람이 자주 나오는데 노인네나 화장실 이용한다든지 이렇게 소위 고속도로 같은 경우 되돌아오는 구간이 있어요. 그것처럼 이 문을 뚫는데 언약에서 출발해서 문을 뚫었기 때문에 이게 여기에 오게 되면 새언약이 돼요.

새언약은 십자가만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보고서 구약의 언약과 통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발견한다면 얼른 여기를 붙잡겠지요. 십자가 붙잡을 때 성령께서 주님께서 고난 가운데 뚫고 올라갔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가면서 여기서 무엇이 구원됩니까? 성령에 의해서 나는 죄인 맞습니다. 나 같은 것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이것을 통과하겠지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오직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는 말씀, 믿음은 모든 사람같이 아니다. 그런 말씀과 더불어서 계속 가는 거예요. 가게 되면 이것이 바로 좁은 길이고 이것이 바로 주님가신길이고 이것이 바로 끝에 그렇게 보고 싶은 생명나무가 활짝 우리를 반기는 요한계시록 22장의 그 천국이 눈앞에 보이는 겁니다.

이야기를 하니까 신납니다. 38도면 어때요. 지금 38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이 우리를 신나게 하는 겁니다. 이 길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여기를 뚫는 분이 자기의 영을 주니까 아는 거예요. 이것을 알았으면 두 세 사람 모이더라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씁쓸해 하지 마세요. 이것을 알았으면 성경공부 사람 떨어져도 감사해요.

살후 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 다음에 8절에 보면 ‘살후 3:8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살후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 그러면 일하지 않고 먹으면 지옥 가는 겁니까? 저주 받는 거예요? 이 말씀을 안 했으면 좋았는데 5절에서 끝내버렸으면 참 은혜롭겠는데 갑자기 이런 말씀이 툭 튀어나오면 백수들 망하는 겁니다. 이제 백수들 지옥갈것아닙니까? 왜 이런 말씀이 있느냐?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십자가를 의미를 들어내기 위해서 모든 말씀이 있습니다. 그 원칙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에 보면 남편 섬기는 것을 주 안에서 섬겨라, 남편을 섬기라는 말이 아니에요. 반드시 경유하기를 주님을 경유해서 남편을 섬겨야 돼요. 교회 가지 말라 하면 이혼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갈라디아에서 이상한 이단 믿거든 이혼하고 말래요. 저라도 이혼 할 겁니다. 제 아내가 안 산다 하면 이혼해야 되지요. 기다리고 있습니다. 못 삽니다. 살 수가 없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전라도로 갈까요? 둘이 지금 찢어지는데 한 몸인데 둘이 찢어지는데 지금 양다리가 지금 벌어지는데 무슨 수로 삶니까?  살 수가 없는데 복음 안다고 해 놓고 결혼해도 다 찢어질 판인데 아, 복음압니다. 나 복음압니다. 해놓고 해 보면 알기는 개 코를 합니까? 꼬시기 위해서 거짓말한 거예요.

 바로 일 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이 말씀은 사람이 목적하는 바가 살기 위해서 산다는 것, 그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하는 것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살아야 된다. 따라서 살기 위해서는 먹을게 있어야 된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일해야 된다. 이런 원리에 따라서 사라는 사람, 그 사람은 살아도 늘 죽은 겁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준다면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하는 생각을 갖겠지요. 그것도 죽은 사람입니다. 목적이 밥 먹고 사는게 목적인 경우 같으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이 말씀이 싫어서 예수를 안 믿을 것이고 아, 참 어렵죠. 진짜 사는 게 목적이라면 그러면 살도록 하늘에서 돈 벼락을 주던지 그러면 살기 위해서 주님을 홀데하지 않지요, 라고 하는 사람을 까발리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나한테 복을 주시게 되면 내가 살린다는 조건하에만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하는 그런 가짜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셨고 또 하나님을 믿었으니까 이제는 나를 먹여 살려 주세요. 하는 인간, 그것도 가짜라는 것을 들추어 내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거예요,

그러면 둘 다  문제점이 어디 입니까? 둘 다 문제점에 뭐에요?  둘다 전제가 뭐였습니까? 신이시여! 나를 살려내라! 그 말아닙니까? 살려주면 믿고 안 살려주면 안 믿겠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게 예수님께서 경유한 방금같이 드러난 세상의 정체입니다.

목사가 목사 되고 난 뒤에 놀란 것은 신학교 졸업하고 놀란 것은 모든 목사들이 밥먹고 살기 위해서 목사 질을 해 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 덕좀 봅시다. 다른 사람들은 농사짓고 살지만 나는 하나님 덕분에 좀 삽시다. 구약보세요. 구약의 제사장들이 어떻게 살았다?  구약에 하나님께 제사 지낸다고 십일조 갖다 줬으니까 그 십일조 했으니까 나도 십일조 얻어먹고 살아 봅시다. 해서 목사된 거예요, 그래서 목사한테 십일조 없다는 소리를 한다는 것은 사실 내 목을 쳐라하고 같은 소리입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제사장 먹여 살리라고 십일조 있는 게 아니고 백성들이 하나님을 안 믿거든 너도 죽어라 이 말입니다. 십일조라는 것이 돈 얼마 낸다고 십일조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내야 그게 십일조거든요. 그런데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라 하니까 버릇이 돼서 복 받아서 주는게 아니고 처음에는 복받아줬겠죠. 나중에는 뭐냐 사람들이 복을 얻어내기 위해서 십일조를 바친거예요, 아닌 눈짓 하지 마세요, 다 그렇게 사는 겁니다.

복을 안 주게 되면 쉽게 말해서 경제 안 좋아지면 십일조가 깎는 거예요. 헌금이 깍아져요. 10만원 내다가 경제 안 좋으면 5만원 줄어들고 5만원도 경기 안 좋으면 2만원 줄어들고 그렇다면 제사장들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러면 죽으면 되잖아요. 대구 날씨 40도 더워 죽겠다고?  죽으면 되는 거예요. 더워죽겠으면 죽으면 되는 거예요. 40도 같으면 어제는 아스팔트 온도가 50도가 넘습니다. 넘어지면 2도 화상 돼요. 넘어져서 10분 있으면 돼지 고기도 구워져요. 그러면 타서 죽으면 돼요. 죽는 방법 쉬워요. 40도 아스팔트에 드러 누으면 죽어요. 그런데 육신의 본성은 벌떡 일어나거든요. 벌떡 일어나서 병원에 입원해서 국가에서 주는 보험금도 다 타 먹는다니까요.

여러분,  사람들은 안 죽어요. 하나님이 목 졸라 죽여은 죽지 우리가 알아서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이 말씀을 지킬 위인이 있다?  없다?  없다는 겁니다. 해답이 나왔습니다. 이 말씀을 주신 것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우선이 아니고 자기 생존이 우선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겁니다.

살려만 준다면 하나님을 왜 안 믿겠습니까? 하나님 믿다가 내가 죽을 일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 믿으니까 살려 내라는 억지 부리는 인간도 있고 그러니까 뭐라 하느냐 하면 네가 하나님 믿는다고 하나님이 도와 줄줄 알아? 그러면 차라리 굶어죽어라!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그 다음 말은 안 먹으면 사람이 세포가 버티지를 못해서 죽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일하기 싫거든 죽어라! 이 말입니다. 죽어!  죽어! 이 뜻입니다.

죽으라 할 때 그동안 살기 싫었는데 감사합니다. 하면 되는데 죽기 싫어요. 이러니까 이 말씀은 헛 말씀이 되어버리죠. 이 말씀 주신 주님을 못 믿겠습니다. 주님을 믿을 때 십자가만 믿지 말고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말씀도 같이 받아야 하는데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게 아까 지하철 샛길, 안 찍고 내리는 유일한 길, 노약자들이 지나는 문, 십자가 들어가면서 우리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말씀으로 한다 이 말죠. 이렇게 하게 되면 세상이 어둡고 죄로 어두울뿐만 아니고 누구도 죄로 어둡다? 질질 끌려가는 나도 죄고 어두움이라 사실을 우리가 아는 거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로 하여금 살려주시고 뒤에 양식을 넉넉하게 해 준 뒤에 그 다음에 우리보고 일하라 한다면 우리의 일은 그냥 건성 건성합니다. 왜냐 하면 먹을 것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먹을 것도 없는 입장에서 일하라 하면 우리는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할 수밖에 없는 우리 육신의 본성이 미련없이 발휘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시켰잖아요. 일 하기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그래서 살려고 내가 일하는데 이 일하는 시절에 어느 세월에 하나님을 믿고 어디 교회를 나오고 기도하고 성경하고 수련회 참석하고 어디 그런 여유가 있습니까? 아이고 해하다 하여튼 시간도 남아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시간도 없어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즐겁게 일하다 보니까 교회갈  시간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임은 하나님이 져야지 우리보고 책임지라 하면 안돼요.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지금 네가 잘났다는 말인가?  잘난 게 아니고 제가 죄인이라고 고백 했잖아요. 그럼 죄인이면 죄인이라고 하라고 어디서 궁시렁 궁시렁 이핑계 저핑계 대고 있어!

그러니까 이 말씀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은혜라는 것을 우리가 계산하는 은혜를 은혜라고 그렇게 선입관을 갖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일하기 싫고 내가 노동하기 싫고 내가 편하게 살고 싶어서 주여! 은혜 주시옵소서! 하는 말은 우리의 본성, 주님 알아서 돈 보따리 내 놓으라는 그 소리 인데 그것을 은혜로고 이야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뭐가 은혜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그 말씀이 딱 나한테 적합한 잔소리이고 적합한 말씀이 맞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이게 진짜 은혜입니다.

우리는 돈만 있으면 일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주님께서 눈치를 챘는지 나는 돈만 있으면 일 안합니다. 미쳤다고 일합니까? 40도인데 왜 일합니까? 일용직 노동자가 로또 해서 40억 탄 사람이 지금 38도 넘어가는데 집에 40억이 있는데 그것가지고 찜통 들고 오르락 내리락 하겠어요?  에이씨 더러워라! 이 고생 안하고 때려 치우지!  지금 우리가 그렇게 힘들게 사는 것은 지금 돈이 없어요. 문제는 돈이 없어서 그래요. 

우리가 언약이 우선이 아니고 내 우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대로 일을 하거든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힘든 식으로 우리에게 먹이시는구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 위해서 나에게 힘든일을 주시는구나! 그것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겁니다.

 MBC에서 무슨 프로그램이 있느냐 하면 ‘진짜 사나이’ 가 있는데 그것을 보면서 과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꼭 군대 생활하는 것이 이 세상 사는 것과 같아요. 누가 군대 가라 했습니까? 군에 자원입대 했습니까? 군에 못가서 환장했어요? 강제로 끌려갔으면 좀 봐주기라도 하지 강제로 끌려간 것도 서럽거든 거기다가 명령도 명령같지도 않은 명령있잖아요. 엉터리 말도 안되는 소리 해 가면서 나이많은 사람한테 반말하면서 사람취급도 안해요. 그래서 군에 간 어떤 사람이 자살한다는 소리 후배에게 그런 소리를 너무 힘들어서 했답니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처신할 줄을 알 수가 없어요.

주의 말씀에 우리가 묻습니다. 주여! 대체 나보고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돈도 벌지 말고 밥도 먹지 말고 죽으라는 말인가?  어떻게 하란 말이요?  이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강제로 천국으로 집어넣느니라. 이렇게 합니다. 네가 많이 당황스럽지? 당황스럽습니다. 강제로 집어넣느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런 혜택이 없어요.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는 이 말씀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의인인데 악인들은 의인의 자리에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이에요? 그런 귀한 말씀을 받았으면 이런 잔소리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다시 말해서 난 돈만 있으면 일 안할래! 하는 그런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지 말라 네가 하게 한 것도 일용할 양식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이요 조치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사도 바울이 천막장사 한 일이 있거든요. 끝까지 천막 장사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안했죠. 그럼 사도 바울은 다른 돈은 어디서 받아먹었습니까? 교인들이 천막 장사해서 받아준 돈 아닙니까? 자기가 한게 아니고 한 때 잠시 고린도에서 했거든요. 했잖아요. 계속한 게 아니고 계속했으면 뭐가 됐겠어요? 로마 천막장사 협회에 노동조합에 총무까지 올라갈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안 했거든요. 안하고 그 다음에 편지를 보면 만날 너희들이 도와줘서 그랬다 너희들이 아플 때 돌보았고 너희들이 춥다고 외투하나 주고 고맙다 이런 식이다 말이죠.

로마 가서 천막 장사했습니까? 안 했거든요. 복음 전하는 사람은 복음으로 먹고 산다는 이런 이야기하고 그러면 이 말씀은 본인 이야기하고 다른데요?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런 소리 합니다. 자기가 천막 장사할 때는 이런 소리 했다가 천막장사 그만 둘 때는 없다 소리 한다고...

 세상에, 이 소리가 사도의소리가 아니고 그런 욕하려거든주님께 하세요, 주님의 계시입니다.

모델은 사도 바울이 모델이 아니고 예수님이 모델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소 장사 했습니까? 천막 장사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밥벌이하기 위해서 고기 잡았습니까? 뭐했습니까? 주님은 백수였습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이제 말씀드립니다. 주님은 백수였었어요. 왜? 처음부터 죽기 위해서 사신분입니다. 그게 주님의 양식입니다. 일하다 죽으시기 바랍니다. 치매 거리다가 죽으시기 바랍니다. 요양 등급 3급 받고 죽으시기바랍니다. 운동하다가 똥배 나와 죽으시기바랍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주께서 우리를 죽이시는 그 길이고 여기 앞에 애들은 공부하다가 죽어요. 공부 1등하다가 죽어요. 우리 가는 길은 사는 길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것이 우선이고 주님이 나중이 아니고 주와 함께 죽는 것이 우선이고 죽는 방법 중의 하나가 천막 장사였던것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이 더운 세상보다 시원한 세계를 원하지만 그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만 높이는 주님의 아들의 나라 인 것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날이 갈수록 깨닫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