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130809a (믿음속)―이 근호 목사
오늘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장부터 보겠습니다.
살후 3:1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살후 3: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살후 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보통 사람들은 사람이 먼저이고 그다음에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말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도 바울의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뭐냐 하면 말씀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사람이 있다. 말씀이 사람을 만들어 내는 거죠. 말씀이 사람을 만들어 내게 되면 기존의 사람은 사람으로 간주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에 못가면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쳐주지를 안 해요. 지옥가는 사람들이 돈 많다고 으시대는데 거기에 기죽을 일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을 펼치게 되면 여기에는 사람을 볼 때에 이렇게 말씀으로 중심으로 봐야 하고 말씀으로 평해야 된다는 것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우리들이 말씀을 덮어버리니까 세상 인간들이 인간들로 보이는데 성경만 펼쳐 버리면 그 말씀이 없는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되거나 다루어 질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속한 사람들도 그렇게 봐야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보고 우리는 그렇게 안보면 그러면 하나님의 생각따로고 우리 생각 따로 있잖아요. 그러면 안되잖아요.
여기에 1절을 보면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이렇게 되어 있지요. 세상에 종교들이 많은데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본인들이 종교의 경전을 사수하고 지키고 행하고 해서 신과 합의를 한다든지 아니면 도를 닦는다든지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복음은 그렇지 않아요. 주의 말씀이 인간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겁니다. 말씀 안에는 그만한 능력이 있어요. 주의 말씀은 그만한 능력이 있는 이유가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냥 말씀이 아니고 주의 말씀입니다.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여기에 주님이 계시고 말씀을 주시고 우리보고 지키라가 아니라 이 성경말씀에 주님이 함께 가계신거예요. 주님이 함께 가 있어서 이 말씀을 누가 다루느냐 하면, 이 말씀이 불도저라면 불도저를 주님이 운전해서 우리를 덮쳐버리면 우리는 여기서 뭘보느냐 하면 내가 지킨 말씀이 아니고 주의 말씀이 나를 덮쳤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굉장히 간단한 문제지요. 주의 말씀이 나를 덮쳤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말씀이나 이런 것을 뭐라고 자꾸 생각하느냐 하면 교본 또는 잔소리, 내가 그 말씀을 지키면 나에게 작용하고 안 지키면 그 말씀은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그렇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본래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니라서 그래요. 본디 하나님께서 처음 만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에서 따먹은 그 인간들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했는데 따먹은 인간은 어떻게 됩니까? 죽지요.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잖아요. 그러니까 그 아담은 죽었잖아요. 흙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주의 말씀이 우선이고 인간은 나중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리 까불고 난리를 치고 자기 나름대로 뭔가 해 보려고 해도 주의 말씀 테두리안에서 벗어납니까? 벗어날 수가 없어요. 오늘도 주의 말씀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이 아무리 해도 의존교회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주의 말씀에서는 벗어나지 않습니다. 벗어날것같으면 교회가 아니죠. 교회는 절대로 주의 말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마태복음 18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마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주의 말씀이 덮치게 되면 이쪽 사람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주여! 주여! 하는 것 말고 주의 말씀이 덮쳐서 나오는 주의 이름, 그러면 이것은 이미 말씀을 쥐고 있는 주님께서 이들을 모이게 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즐거움과 행복은 뭐냐 하면 매일같이 주님께서 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것을 늘 느끼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마태복음 18장20절을 보면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아하 이 말씀이 그 말씀이구나! 하고 느껴 지는 거예요. 여러분도 느껴지지요? 왜, 느낌 아니까 느껴지지요. 느껴지게 되면 교인수에 연연하는 일은 없습니다. 만약에 어떤 주일에 50명이 왔다. 그것을 잊으세요. 그것을 잊어져야 해요. 그게 50명이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주의 말씀을 벗어나고 있는 겁니다.
주의 말씀을 믿어야 할 것을 50명 온 교회를 믿게 돼요. 내 친구가 10명이다, 그러면 내 친구가 10명인데 내가 호출해서 등산가자 했는데 10명 가운데 1명왔다 하면 즐겁게 갑니까? 양 9마리 어디 갔느냐? 이렇게 나올 수 있다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주의 말씀이 덮친 것이 아니고 본인이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할 때 오류가 발생되는 겁니다.
주의 말씀을 지키다 보면 차차 주님의 말씀이 덮친 것이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라는 변명들을 늘어놓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1장 3절에 보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배짱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꿀릴 것도 없고 우리 주님께서는 손해 볼일도 없고 안타까울 일도 하나도 없어요. ‘안 믿겠습니다.’ 하면 ‘믿지 마!’ 믿지마라고 일부러 너 못 오게 하는 거야! 누가 믿으라고 환장을 했습니까? 안 믿어주면 답답한 일있습니까?
주님은 마음이 확고해요. 주의 말씀이 덮쳐서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 진 인간이 아니면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구원할 때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회개기도 했습니까? 여보! 이리와, 손 모으고 주여! 주님이여! 우리가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 따먹었습니다. 이렇게 회개 했더니 하나님이 찾아왔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 쪽에서 나가고자하는 그런 수단과 방법에 지나지않아요.
하나님께서 만약에 그런 식으로 다시 원상회복한다면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라는 길을 일부로 차단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차단한 것을 우리 코앞에 들이냅니다. 차단되었다. 생명나무 가는 길은 차단되었다.
동네 아파트에 있으면 여러분은 낮에 일하러 나가니까 있을 일이 없겠지만 동네아줌마들이 보면 ‘세탁-’ 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컴퓨터, 고장 난 컴퓨터, 전화기, 티브이 삽니다.’ 이러면서 지나 갑니다. 세탁 맡길일있으면 맡기고 고장난 했하다 고장난 컴퓨터 없으면 듣고 그냥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우리 주님은 뭐냐 하면 ‘생명나무 막혔음!’ ‘막혔음’, 또는 이번 수련회 한 것처럼 ‘소용 없음!’ ‘소용없음!’ 저게 무슨 소리지 하고 나오는 사람은 땡잡은 사람입니다. 만날 하는 ‘세탁’ 하는 소리는 하루나 이틀 오는 게 아니고 일년내내 만날 오는 건데 내일 또 올 건데, 이렇게 생각하죠.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오늘 본문에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굉장히 난해해요. 왜냐 하면 믿음 자체가 인간이 믿으려고 한 믿는 믿음은 인정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왜 난해 하느냐 하면 사람을 구원하려고 이 말씀을 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난해 합니다. 사람을 구원하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조치에 대해서 ‘세탁-, 세탁-’ 이렇게 오니까 난해 한 겁니다. 저게 무슨 소리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저게 무슨 소리지?
큰 교회, 한 5천명 모이는 교회 가서 여러분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하면 저게 무슨 소리지? 전부 다 궁금해 하는 거예요. 전부 다 그 소리에 반응하기를 아,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니까 아하, 우리 교회에 있는 교인들만이 믿고 나머지는 안 믿는 모양이구나! 다들 그렇게 반응이 나타내거든요. 그거 아닙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말은 제가 쉽게 말씀 드릴게요. 믿음은,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사람에 누가 포함되느냐 하면 모든 사람이 포함돼요. 말 되지요? 모든 사람에 모든 사람 다 포함됩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나는 모든 사람에 포함되지 않고 따로 나와 있다 할 때는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하냐 하면 이 사람의 사고방식과 이쪽 사람의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증빙 서류가 들어가야 돼요. 다르다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미국의 비밀정보를 폭로해서 러시아에 망명한 스노든이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공항 안에서 40일 동안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그 안에서 세수하고 햄버거 먹어가며 러시야 망명 서류가 처리되는 동안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러시아 공항에 스노든 망명자 한사람이 있어요. 비행기가 착륙하고 러시아 안으로 들어오는데 이 스노든은 밖으로 못 나와요. 전부 다 기내에 있는 사람은 나옵니다. 그런데 스노든은 40일동안,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말이 40일이지 얼마나 오랫동안입니까?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려면 망명허가가 돼야 나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러시아로 간다고 하면 이 사람은 나 못가! 하면 모든 사람과 이사람과의 차이나는게 있어야 돼요. 차이나는게 없으면 이것은 일방적으로 괜히 여기 배고픈 사람에게 통닭 한 마리 줍니다. 라고 이야기 하니까 실컷 방금 밥먹어놓고 통닭먹고 싶어서 ‘저, 배고파요!’ 이렇게 나오면 통닭 주는 사람이 그사람의 배를 째겠지요. 왜 다른 사람은 배 불러서 통닭 안 먹겠다는데 혼자 통닭 먹겠다고 하니까 모든 사람과 통닭먹겠다는 사람과 어떤 차이가 나야겠지요? 그 차이가 이쪽에 통닭 주겠다는 사람의 조건에 부응해야 통닭을 줄 꺼잖아요. 제 말이 맞지요? 그러면 배를 갈라봐야돼지요? 말이야 무슨 소리를 못합니까? 배를 갈라봐야 알지요. 배를 갈라놓으면 뭐가 나오죠? 뭐 배설물 나오죠.
마찬가지로 똑같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이렇게 할 때 ‘저는 3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여서 이제 믿는 사람 맞습니다.’ 할 때 그것은 3년전의 이야기잖아요. 3년 전에 믿었고 그 다음에 믿는 것은 뭐냐? 내가 방금 예수를 믿었다는 자기 자신을 믿는다니까요. 여러분, 안 그럴 줄 알지요?
복음을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말하는데 ‘복음을 믿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복음 이야기를 해도 오지를 않아요. 보니까 복음 믿는 자기 자신을 믿어요. 이게 무슨 복음 믿는 겁니까? 그것은 복음 믿는게 아니잖아요. 복음 알았습니다. 하는 본인을 믿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조건이냐 하면 복음 안다는 본인을 믿지 않습니다. 하고 이야기 할 사람이 과연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런 사람이 없다니까요.
신약시대에도 구약의 이스라엘 이야기를 할 이유가 뭐냐면. 이스라엘은 언약에 의해서 만든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나, 이스라엘 될래’ 하면서 손들고 와서 이스라엘된 것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 된 거예요. 신약의 교회는 뭐냐 하면 새언약에 의해서 교회가 된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6대손이 자기가 이스라엘이 되고 싶어서 딱 기다렸다가 이스라엘 사람 결혼 할 때 영혼이 들어가서 임신된 게 아니잖아요. 이스라엘의 언약이란 그 언약이 뭐냐 하면 인간의 육신조차도 언약안에 언약이 장악해서 너는 이땅에 아브라함 자손으로 태어나야해 해서 태어날 때 그 육신은 언약에 의해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이 애굽사람이 히브리인이 되고 싶어 환장해서 저 히브리인 되고 싶어요 해서 된 것이 아니잖아요. 남자가 여장한다고 여자 되는 것은 아니죠. 그게 육신의 한계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신을 통해서 아브라함 자손, 혈육적 자손이라는 언약적 한계가 구약에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아브라함 언약이 되려면 그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조치가 없으면 아브라함 언약의 이스라엘 될 수가 없어요. 종이 되든지 물을 깃는 사람이 되던지 그렇게 돼요.
기브온 사람들이 그렇게 했거든요.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사람한테 종이 돼서 굴복해서 물 깃는 사람으로서 옛날에 물이 귀했으니까 광산에서 광산 캐는 것만큼 힘들었던 모양이죠. 물 깃는 사람이 돼서 이스라엘이 된 거예요. 아브라함언약에 소속되었습니다. 그것도 영원히 노예로 살면서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아브라함 언약의 자손이 되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이 되었다는 본인의 의사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죠.
그렇다면 신약에 있어서 신자 되는 것이 자기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잖아요. 하나님의 뜻인데 하나님의 뜻을 믿어야지 하나님의 뜻을 믿는 자기를 믿으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이것은 믿음이 아니잖아요. 성경 말씀을 내가 지키겠습니다. 하는 것 자체가 건방지기 짝이 없어요. 네가 뭔데? 너를 왜 지켜? 나는 내가 예수 믿습니다. 하는 그것도 잘못 된 말이에요.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돼야죠.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돼야 되는데 내가 믿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내가 안 믿고 싶을 때는 안 믿을 수도 있지요. 이런 것과 똑같은 뜻이에요.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가 믿음 약할 때 내가 알아서 믿음 다 키우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하고 마찬가지입니다. 5년만 쉬다가 6개월 뒤에 교회 나오겠습니다. 이게 또 무슨 소리에요? 마태복음 18장 20장볼 때 뭐라 합니까? 벌써 세 번째 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했죠. 누구 마음대로 교회와요? 예배당에 붙어있으면 교인입니까? 주께서 불러줘야 교회에요. 주의 이름을 부를 때만 교회인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옆에서 같이 찬송이고 주의 이름으로 헌금하면 그게 교회입니까? 자기가 알아서 왔지, 자기가 알아서 온 거예요.
진짜 믿음은 내가 믿음을 철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기가 인정하는 거예요. 내 믿음을 철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면 자기가 믿음을 철회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지금 말이 이상하게 되지요? 무슨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나는 매일같이 안 믿으려고 하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매일 믿게 했다는 그런 흔적과 증거물을 가지고 있어야 그게 신자라니까요.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무슨 흔적만 있느냐 하면 매일같이 믿으려고 애쓰는 흔적만 있으니까 그게 믿음이 아닌 거예요. 말씀 잘 들어야 돼요. 지금 중요한 대목입니다. 나는 잘 믿어야지 하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사람이에요. 나, 진짜 예수 믿는가 한번 봐라. 하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노력했는데도 진짜 과연 안 믿어진다면 그것도 신자 아니에요. 안 믿어지면 신자아니라니까요 안 믿으려고 하는데 자꾸 믿어질 때 그게 신자인데 이게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교회되게 하신 주의 능력에서 나온 거예요.
이것이 히브리인 되기 싫어도 아브라함 자손 되기 싫어도 이미 육신적으로 규정을 시켜 놓은 그 규정의 능력이 언약의 능력이 이미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사항은 믿지 마라! 세탁! 세탁! 늦게 온 사람은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생명나무 막혔음! 하고 이것을 계속 외치는 거예요. 생명나무 가는 길이 막혔다는 거예요. 그 막혔음을 같이 막혔다고 동의하는 거예요. 예, 막혔습니다. 막혔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모든 사람은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에 모든 사람이 믿음이 없으되 믿음이 그 중에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 있잖아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이 되니까 당연히 믿음이 없어야 될 나에게 말씀이 주와 함께 찾아오니까 믿음이 생겨 버린거예요. 이 믿음은 우리가 믿은 믿음이 아니라 누가 주신 믿음이다? 주님이 데살로니가후서 3장 3절에 의해서 우리에게 쏙 집어넣은 말씀이 그냥 말씀이 아니고 누구의 말씀?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 심어져 있으니까 우리가 감당할 수가 없어요. 주께서 심어서 감당못하니까 아하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고 진짜 모든 사람이 믿음이 없어도 마땅한데 왜? 생명나무가 끊겼으니까 믿는 자는 따로 있구나하는 것을 늘 깨달으면서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 생활하지 말라고 해서 많이 놀라셨습니까? 많이 당황 하셨어요? 우리가 믿음을 믿고 자해서 믿어버리면 그것은 이방민족이 나 아브라함 언약 믿으면 아브라함 사람이 된다는 것하고 똑같은 소리에요. 아브라함 자손은 혈육 적으로 이미 다른 민족이 파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민족이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확정된 육신, 그 육신이 육체를 깨뜨리고 들어가는 경우는 어떤 경우 밖에 없느냐 하면 아브라함 자손의 경우는 어떤 경우 밖에 없느냐 하면 이삭뿐입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혈육에서 나온 게 아니죠. 이스마엘은 육에서 나왔지만 이삭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이삭의 임신 소식을 누가 전합니까? 1번 사람, 2번 천사 몇 번입니까? 천사잖아요. 천사가 개입해서 임신을 했다면 오늘날의 성도는 성령이 개입해서 다른 말로 하면 주의 영이 개입해서 다른 말로 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그 사람을 성도되게 하신 거예요.
따라서 주님이 개입해서 성도된 사람의 가치를 돋보이기 위해서 살려주는 주님이 찾아오지 않는 사람을 전부 다 탈락시키는 말씀만 골라서 주께서 사도의 편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참 듣는 사람은 섭섭하겠지만 그런데 그렇게 섭섭하게 느끼는 사람이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고 환호를 부르는 사람, 할렐루야! 야호! 하는 사람, 천사가 찾아와도 삼손 같은 사람은 여자 밝히면 마찬가지지만 소용없어요. 천사가 찾아와도 마누라가 임신을 해도 여자 밝히는 사람은 안되잖아요.
천사보다도 더 확실한 한번 박히면 잘 빠지지 않는 성령에 인 박힌 사람, 그 사람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신약에 새 언약 가지고 작용을 실시하는 겁니다. 무슨 언약입니까? 옛 언약이겠죠. 신약에는 새언약입니다. 차이점은 구약은 그냥 들이대는 것이고 신약에는 와서 대는 겁니다.
수요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 자신이 원인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결과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결과물이에요. 결과물이 마치 내가 원인이 되어서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산물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산물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은 약속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그 약속에 의하면 이미 약속 속에 시나리오가 정해 져 있어요. 함의 땅에 가서 4대만에 다시 올라온다는 겁니다. 그 당시 인간이 애기 낳는 회수가 100년이기 때문에 4대 만에 온다는 것은 400백년 만에 돌아온다는 겁니다. 400년만에 돌아오도록 프로그램이 이미 짜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받을 때 창세기 15장 15절에 네 자식이 4대만에 이 땅에 돌아오리라 되어 있고 그 다음에 제가 주의 깊게 보라고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17절입니다.
창 15: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고기는 누가 장만 했는가 하면 아브라함이 잡으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장만 했는데 아브라함이 정육점에 가서 사태살 좀 주세요. 이렇게 장만한 게 아니고 여기서 목살 두근 주세요! 하고 장만한게 아니고 장만하는 항목도 그 앞에 보면 3년된 암소와 3년된 암염소와 3년된 수양, 산비둘기……. 그 제물 리스트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공해 주셨습니다.
제물을 주고 난 뒤에 아브라함이 그 제물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아브라함의 제물을 아브라함 본인의 아이디어에 의해서 낸 겁니까? 아니죠. 그렇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신에게 다가갈 때 예배나 제사를 통해서 다가가잖아요. 이 예배와 제사가 하나님께서 인정한 겁니까? 인정한게 아닙니까? 인정한 게 아니에요. 그리신산에서 예배 드릴까요 예루살렘에서 예배 드릴까요? 그 자체가 하나님이 생각한게 아니라니까요
우리가 왜 신앙생활이 힘든 가운데 있느냐 하면 이미 인간 세상에 신을 향하여 뭔가 준비해 놓은 게 있고 그 준비해 놓은 제도와 절차와 방법들이 있어요. 있는데 그것을 no! 그게 아니야 라고 한다는 것 자체가 그 공동체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는 그런 여건이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성도를 둘러싸고 있어요.
그게 아니야!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게 아니야 하고 이야기를 할 때 그 쪽에서 반발이 아주 대단하다 말입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 하는 그 반발이 결국 어디 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취직문제까지 계속 이어져요. 너 우리 집에서 호적을 파라! 하는 그런 문제까지 나오는 겁니다. 사랑하는데 신앙이 안 맞으니 갈라 섭시다. 사랑해 놓고 나중에 헤어지고 헤어지고 다른 남자하고 결혼하고 나니 아깝고 ……. 세상에서 마음의 상처까지 안고 있는 거예요.
잠깐 살펴봅시다. 생명나무라는 것은 막혔어요? 안 막혔어요? 막혔죠. 막힌 입장에서 인간 쪽에서 뭐를 바쳐도 뭐를 제사해도 받겠습니까? 안 받겠습니까? 안 받는 거예요. 그렇다면 가인이 제사를 안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연한 거예요? 당연하지 않은 거예요? 당연한 거죠. 그러면 가인의 제사를 안 받으면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아야 돼요? 안 받아야 돼요? 안 받아야 맞아요. 아벨의 제사를 안 받아야 하나님의 뜻이 일관되고 항상 같은 원칙을 적용시킨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잖아요.
아, 하나님이 제사 안 받는 구나! 하고 아는데 문제는 모든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괜찮다니까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안 믿는데 믿는 게 생기는게 문제이고 가인의 제사를 안 받는게 정상이고 아벨의 제사를 받는게 비정상이에요. 그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잖아요. 그러면 이런 제사 사건을 통해서 결국 남은 게 뭡니까? 남은게 하나님 때문에 유발된 억울한 죽음만 남지요?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원인이 돼서 결과로 주어지는 예배는 받는데 그 예배의 진수, 예배의 본 모습은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죽음입니다.
예수님도 아벨과 사가랴의 피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했는데 이 죽음을 물질로 한 자로 표현하면 ‘피’가 돼요. 성경을 처음부터 자세하게 훑어보면 하나님의 뜻은 모호하지 않습니다. 분명합니다. 예배 안받는다 했는데 하나님쪽에서 자기의 원칙 위배해 버려요. 반칙 해 버려요. 예배 안 받는다 해 놓고 예배를 받으니까 안 받는다 했으면 쟤도 안 받아야지 쟤는 뭔데 받습니까? 해서 죽이죠. 그 죽은 아들 이름이 뭐죠. 아벨이죠.
아벨의 뜻이 뭡니까? ‘허무’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허무라는 이름의 예배를 받아요. 허무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제사를 주께서는 받습니다. 가인은 너무 허무하기 때문에 그 제사를 드릴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그 제사를 드리고 나면 본인도 허무해 지니는데 미쳤다고 우리가 그런 짓을 합니까? 허무하지 않으려고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데 제사 실컷 드리고 피 흘리고 제사 실컷 드리고 죽고.... 미쳤나, 그렇게 살게 아무도 그렇게 살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안 믿어요.
그런데 주의 말씀이 덮치게 되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삶이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신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식을 낳는다 했는데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그 자식이 아니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자식이 없는 거예요. 없는데 천사가 와서 자식이 있을 거라 했죠. 그 자식은 죽어야 될 자식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그 이삭을 받침으로 말미암아 그 이삭은 더 이상 아브라함에게 있는 존재? 없는 존재? 둘 중에 어느 겁니까? 있는 자식이에요? 없는 자식이에요? 없는 자식이에요. 이미 죽어 없는 자식이 현재 있다고 우기는 아버지를 살리는 방식이 주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요 영광이요 생명입니다.
왜 그러느냐? 생명은 이 땅에 없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식으로 생명은 우리에게 전달돼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명은 이 땅에 없었더라 이 말입니다. 없는 생명은 인간은 조작해서 조잡하게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없는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놓고 자기가 원인이 되어 만들어 낸 그 결과물 가지고 그것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이여! 이게 믿음입니다. 하고 들이대는데 그것을 누가 받습니까?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받을 이유가 있습니까? 더러워서 안 받습니다. 언약도 아닌데 안 받지요.
사람들이 자꾸 잊어버려요. 하나님의 생명나무 가는 길이 없다! 끊어졌다! 이것을 자꾸 잊어버려요. 하나님은 똥배짱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속에 없는 자가 등장해야 있는 자가 산다는게 원칙이 들어있는게 되면 아브라함이 오늘 본문에서 제물을 드릴 때 이 제물조차도 그 출발점이 아브라함이 정육점에 가 고기 대충 드리는 게 아니에요. 벌써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몰라요. 하나님은 인간의 제사를 안 받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제사를 안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제사를 준비하게 해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제사를 오늘부터 받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광고하듯이 끝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제사를 안 받는다는 것을 어떤 식을 알려 주느냐 하면 제사를 드리게 해 놓고 그 제사 속에 너희 제사을 안받는다을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믿음은 우리가 매일같이 ‘내가 다시 예수 믿으면 나는 개다.’ 라는 노력을 하게 만들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조치하는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 믿는 방법은 예수님 대신 하나님 대신 천국 대신 돈을 믿으면 돼요. 그 놈의 돈! 돈! 돈!
이번 수련회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의 품격이나 품위는 돈만 있으면 품격 생기고 품위 생기고 돈 없으면 품격이고 품위도 날아가 버립니다. 사람의 인간됨? 자존심? 돈만 있으면 저절로 생기고 돈 없으면 있는 자존심 다 가버립니다. 인간이 개뿔을 믿어요? 뭘 믿어요? 지금 믿을 것이 없으니 하나님 믿지 대번 믿을게 있으면 하나님 때려치우죠.
삼손?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가지고 여자 3명이나 바뀌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 것은 남자의 매력이 다 빠진, 눈 빠졌지 머리카락 잘렸지 그게 뭐가 남자의 품격입니까? 신사의 품격이 그렇습니까? 눈 빠져서 신사의 품격입니까? 어느 여자가 좋아합니까? 긴 머리 휘날릴 때 그때 좋았죠. 긴 머리 있을 때 완전 훈남이었습니다. 자기 성질 건드린다고 나귀 뼈다귀로 3천명 죽일 때 사나이중에 사나이 아닙니까? 그런 사나이가 어디 있어요?
추성훈이 있죠. cf도 나오고 남자 같잖아요. 그런데 그 선수가 만약에 눈 다 빠지고 늙어있으면 누가 cf 찍자 하겠습니까? 말이 안 되죠. 삼손이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 비로소 그 순간의 하나님의 나실인을 감당했다니까요. 주의 말씀은 자기가 하려고 할 때는 주의 말씀이 안돼요. 자기 한 모든 것이 소진 됐을 때 ‘아이고 주여, 더 이상 믿고 싶어도 믿을 만 한 돈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이럴 때 비로소 그 때 누가 보입니까? 선물로 주신 믿음이 그때 보입니다.
팔팔하고 예쁘고 참하고 활기차고 돈 꽤나 있을 때 그 때는 주님을 믿는 게 아니고 주님이 주셨다고 믿는 건강과 돈을 믿어요. 그것은 믿는 게 아닙니다. 제가 쓴 ‘기독교의 허상’이라는 책에 보면 목회자의 구원은 목회가 망하는 겁니다. 목회 망할 때 구원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주를 욕할 그 때 인간의 육신의 본성이 비로소 처음으로 공개되는 겁니다. 본인이 그것을 느끼면 아,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구나! 내가 이토록 하나님을 싫어하고 안 믿었구나! 입만 열면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이 구라, 이 거짓말, 세상에 어떻게 그 당시에 이렇게 뻔뻔 스럽게 구라를 했지? 아 남들에게 먹히니까 남들이 속아 넘어가 주니까 이게 믿습니다. 하고 만발한거예요. 본인도 몰랐죠.
인간은 예수 믿는 본인을 믿게 되어 있어요. 예수를 믿는 게 아니에요. 예수 믿는 자신을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마저 죄라고 규정하는 것은 주의 말씀에 의한 사건이 들어 올 때인데 그 사건은 천지개벽 지진나고 우박 떨어지는 그런 사건이 아니고 오늘 본문 그대로입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바로 준비는 아브라함이 했지만 그 아브라함이 준비한 그 제물에 밤중에 쉬이익 하고 지나가죠. 뭐가 지나갑니까? 횃불이 제물을 쪼개는 거기다가 고속도로를 만들어 놨어요. 제물을 쪼개놓고 쉬이익 하고 지나가는 거예요. 참 하나님은 우리의 정성만 받으면 되는데 왜 이리 복잡해요? 하나님 받으소서! 하나님 한잔 받으소서! 하면 하나님이 어 맛있네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놨어요.
제물을 두 쪽을 내서 마주보게 해 놓고 마주본다는 것은 이렇게 쪼개 놓는다고 해서 각각 분리될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쪽 제물과 저쪽 제물이 시선이 마주치게 되는 이 비어 있는 공간이죠. 이 빈 공간에 뭐가 차지한다? 뭐가 찾아온다? 아브라함이 술을 부웠습니까? 경주법주를 참이슬을 거기에 붜요? 여기에 뭐가 지나 갑니까? 밤중에 주님이 지나 가지요. 그렇다면 이 쪼개놓은 중간을 지난다는 말은 주님이 여기 계시고 제물을 다시 합쳐버리면 결국은 이 제물은 누구를 보여 준다? 이 제물은 바로 장차 오실 예수님을 아브라함 그 당시 식으로 내막을 쪼개놓고 보여 준 거예요. 그 전에 뭐라 했느냐 하면 너희 자손이 4대만에 애굽에서 올라 오리라 했잖아요. 그러면 애굽에 갔다가 아브라함 자손이 4대만에 올라오는 것은 그 모든 성과와 모든 원동력은 어디서 나온겁니까? 그렇게 예언을 하시고 원인 제공을 하신 그 주님에 의해서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야 만 하는 사람들이에요.
여기서 중요합니다. 나와야만 하는데 그 나올 때 아브라함의 언약에 여기 창세기 15장의 정신을 알고 나올까요? 모르고 나올까요? 모르고 나와요. 왜? 그것을 알려주는 것은 일단 나오라했는데 광야 지나면서 그 다음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다는 것은 그 다음 사건속에서 일어나줘야 되는 거예요. 일어나면서 아브라함의 언약이 계속 쪼개놓고 주의 말씀드러내고 또 그들끼리 합치면 또 쪼개버리고 또 드러내고 그러니까 계속 쪼개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예 전기톱을 손에 들고 있어요.
주님께서 계속 쪼개는 거예요. 네가 믿는 것은 그 안에 그리스도가 들었기 때문에 믿는 거예요. 이것을 쪼개는 거예요. 그럼 밖에 있는 것은? 안 믿겠다는 소리 하는 거죠. 사람이 예수 안 믿겠다는 것은 ‘안 믿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여! 바쁩니다. 주님이여! 저 돈 좀 벌어야겠습니다. 다른 것, 돈과 세상적인 그것이 있어야 진짜 나다운 나의 품격, 나의 품위, 나의 생존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바로 세상과 결합이 될 때 주어집니다. 라고 확고히 할 때 그것을 중간에 전기톱 가지고 칙이익 잘라버린다는 겁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되는게 언약이에요. 우리는 아브람이에요. 매일같이 우리를 전기톱 자르고 우리에게 생명나무 주는 겁니다. 왜냐 하면 그래야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산 예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밖에 모르는데 제물은 바로 주님이 함께 있을 때 제물 되지 주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 우리는 산제사를 드릴 수 없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볼 때에 하나님의 아브라함의 언약의 취지는 지금도 여전해요. 우리교회에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브람 언약과 새언약의 차이점이 뭡니까? 질문은 간단한 거예요. 간단하게 질문했으니까 간단하게 답변 했죠. 아브라함 언약은 아브라함보고 맺은 언약이고 새언약은 예수님보고 맺은 겁니다. 그 사람이 듣고 싶은 답변은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까 그런데 질문을 그렇게 했기 때문에 답변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연이어 그 사람이 질문을 하는데 아브라함에게 준 복과 신약의 복이 뭡니까? 그렇게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먼저입니까? 신약의 언약이 먼저 입니까? 쭉쭉 그런 질문이 또 나와요. 제가 감사하고 고맙게 여기는 것은 언약이라는 것이 세상의 일부가 아니고 언약 때문에 지금 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먼저 있고 날 살려서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에서 그런 질문을 했다면 제가 참 고맙겠다 하는 생각을 혼자서 해 봤습니다.
언약이 먼저 있고 내가 있다. 집에 돈이 없다, 그러면 내가 돈이 없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돈을 없게 한 거예요. 제발 나는 좀 빠져주세요. 언약이 돈을 없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돈 벌기 위해서 잠시 예수 믿는 것 그만두고 교회 안 다니고 돈 바짝 벌어야겠다 해도 괜찮아요. 왜? 언약이 그렇게 했다고 믿어지면 되는데 사람들이 언약이 했다고 해서 돈 벌러 나가면 그것은 괜찮은데 이것은 언약이 했다 하지 않고 뭐라 하느냐 하면 내가 교회 가고 안 가고는 내 마음이다.
자기 자신을 믿으니까 언약은 뒷전이고 자기가 앞장서니까 이것은 그야말로 말이 마차 뒤에 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순서로 나열된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내가 앞장서서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내가 주인공이 된 이 세상은 현실이 아니고 허상이고 망상입니다. 나 이전에 먼저 나를 이렇게 집어넣은 그분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