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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신학(부산강의)140513

아빠와 함께 2014. 5. 17. 09:16

20140513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3-청교도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청교도에 대해서 할 차례인데 여기 55번, 리처드 박스터는 영국 사람입니다. 청교도는 언제 생겼느냐 하면, 1560~1662년까지 청교도운동이라고 남들이 불러줬는데 청교도운동 후반부에 리처드 박스터라는 사람이 상당히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1615~1691까지 살았다고 돼있는데 이 사람 이전에 청교도운동이 있었습니다. ‘청’이란 말은 깨끗하다는 뜻인데 영어로는 puritan, 순수한 사람인데 본인들이 붙인 게 아니고 남들이 놀리면서 붙여준 거예요.

청교도운동이 영국에서 생긴 동기가 있어요. 헨리8세란 사람이 로마교황의 지시받는 게 싫어서 독자적인 교회를 선언했어요. 그걸 영국성공회, 국교회라고 해서 그건 정치적입니다. 정치적으로 분리, 독립하겠다는 겁니다. 헨리8세가 정치적으로 독립했다는 말은, 자신이 왕답게 행세해보겠다는 겁니다. 종교에 휘둘리지 않고 왕으로써 자기 나라에서는 왕의 자존심을 세우겠다고 나온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천주교에서 벗어나서 영국에서 독자적으로 자기 나라만의 교회를 했는데 1560년경부터 1564년에 어떤 현상이 일어났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영국국교회라고 로마천주교에서 독립은 했는데 형식은 천주교의 의식을 채택한 거예요. 미사라든지, 유니품을 입는다든지, 세례 받는 자들이 꿇어앉는다든지, 성만찬이나 의식이라든지, 모든 것이 천주교 식인 거예요. 정치적으로는 교황으로부터 분리됐지만 내용은 천주교와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어떤 운동이냐 하면, 성경대로 하자. 성경이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고, 성경이 하라는 대로 하는 그것이 옳다고 나온 거예요. 이미 그 당시에 루터와 칼빈이 등장한 후기 때문에 루터와 칼빈의 정신을 그대로 받아서 그냥 정치적으로만 분리하지 말고 내용도 루터와 칼빈이 주장한 대로 따르는 게 옳다. 그게 뭐냐? 성경이 시키는 것만 진리고, 성경이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해야 된다는 그런 주의가 등장한 겁니다. 영국 자체 내에서. 그러니까 영국성공회에 대해서 너무 까탈스럽다, 너무 지적 사항이 많다고 놀린다고 순수한 사람, 청교도, 모든 걸 시비 거는 사람들이라고 본 겁니다.

그런데 그 운동이 점점 더 퍼지니까 헨리8세 다음에 엘리자베스1세, 제임스1세로 이어지는데 엘리자베스1세 여왕이 1593년에 나라 종교의 말을 안 듣거든 다 나가라고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네덜란드 라이덴이란 곳으로 갔습니다. 지금도 라이덴 대학교가 개혁주의의 유명한 신학교에요. 그 다음에 미국으로 가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동부에 뉴헤이븐이란 곳에 도착해서 정착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그들은 인간 위에 인간 없다는 민주주의 정책을 쓰면서 청교도가 안정을 취하고.

그렇게 옮겨가는 가운데서 1643년부터 크롬웰이란 사람이 혁명을 일으켜요. 1643~48년까지 청교도 정신으로 신앙고백서를 만들었어요. 청교도가 무엇인지 보려면 그 당시 청교도신학을 전부 정립한 신앙고백서가 있습니다. 1643년부터 1649년까지 작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는 거예요.

이 시간에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청교도가 과연 복음적인지 따져봐야 되겠지요. 한국교회 개혁주의에서는 청교도가 이상적인 모범적인 성경의 진리를 갖고 있다고 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특히 장로교 같은 경우에 케임브리지 교수인 카터라이트 같은 사람은 국교회라고 하지 말고 장로 중심으로 장로교라고 하자고 나왔고, 또 침례교 쪽으로 해서 독립교회 등 여러 가지 교회 정치 형식이 나옵니다.

그래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좀 달라요. 지금은 같이 보지만 초창기에는 달라요. 청교도가 꿈을 펼친 것은 미국에서고. 결국 청교도는 영국국교회가 없으면 생겨날 수 없었던 사상운동입니다.

청교도에 대해서 교재 136페이지 이후에 나와 있어요. 거기에 보면, 내적 확신, 성령의 확신, 가정을 중요시 하고, 기도와 경건한 기도라 해서 노동도 강조하고, 어떤 제복도 입지 않고, 모든 의식은 다 버리고 오직 세례와 성찬만 고집하고, 그리고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거예요. 초대교회 이후에 중세 시대, 1500년 동안 모든 교회는 잘못된 길을 갔다고 거부하는 겁니다.

그리고 전에는 교회가 국가의 인가를 받아야 교회를 세울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처럼 나라 허가 없이 구청에 등록 안 해도 다 세우는 거예요. 사실 요즘은 등록해야 될 판이에요. 연말에 세금감면 때문에. 혹시 어떤 교인이, “이 교회는 세금감면 됩니까?” 할 때 안 된다고 하면 다른 교회로 가버리고. 하여튼 로버트 브라운이란 사람이 1580년에 처음으로 허가 없이 개척교회를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정말 우리가 보기에 반박이 없을 정도에요. 138페이지에 보면, [리처드 박스터는 선언하기를,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삶이 은총 안에서 자라게 하고, 그들의 영혼 안에 그리스도의 일을 강화하고 증진시켜며 육체의 일을 정복해야 한다.’라고 했다. 은총만이 사람을 신앙과 죄에 대한 회개로 인도하며 구원의 길로 안내한다. 청교도는 거듭남의 체험, 또는 변화된 의지의 확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에게 회심의 체험은 그 영성의 중심에 서있었다. 회심은 성령의 사역이며 인간의 도움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향한 기도와 명상은 청교도로 하여금 인간의 내적인 마음을 강조하게 했다.] 이걸 반박할 여지가 없잖아요.

영국국교회가 없었으면 청교도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청교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국가 정치적으로 교회는 일률적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선언을 했던 것이, 청교도라는 최종 진리, 확정된 진리, 궁극적인 진리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까요? 지금은 그렇게 이야기해요. 장로교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전부니까. 그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강의 주제가 청교도신학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1643년 7월 1일부터 1647년 2월 20일까지, 사실 이때 크롬웰이 청교도혁명에 성공해서 정치적으로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151명의 성직자들이 모였고 30명은 평신도로 그 중에 상원의원 10명, 하원의원 20명.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모여서 작성을 한 겁니다. 신앙고백을 쉽게 훈육하기 위해서 교리문답을 만들었지요. 그것을 미국 장로교회에서 채용했고 그것이 한국교회까지 건너왔고.

무슨 말이냐 하면, 최종적이란 말이죠. 손 댈 것도 없어요. 이걸 위반하면 이단입니다. 그 정도로 완벽한 신앙고백서를 만든 겁니다. 이 신앙고백서를 만들기 전에 그들이 경험했던 것이 있지요. 그들은 천주교, 영국국교회의 비성경적인 요소를 이미 경험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안 거예요.

제가 강의하면서 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자신이 이단 소리를 듣고, 주위로부터 어려움을 당했다는 그것이 반대로 이것만이 진리라고 우길 가능성이 농후해요. 공격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공격한 쪽과 반대로 하게 되면 내가 진리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자의식이 발생될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그 중에 하나지요.

청교도와 기존에 영국국교회나 천주교와의 차이점이 뭐냐? 딱 하나만 이야기하라면 설교 중심입니다. 저쪽은 의식, 의례, 형식적인 제도 중심이라면 설교 중심이에요. 그러면 여러분은 뭘 생각하겠습니까? 전에는 교회에서 신부가 중요했는데 이제는 설교자가 중요한 거예요.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살펴보세요.

우리가 장로교 출신이기 때문에 마땅히 배운 그것이 천주교와 다르고, 영국국교회와 다른데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고 훨씬 더 성경에 부합된다는 그런 생각이 들겠지요. 장로 중심의 제도, 그리고 예정론을 비롯한 모든 교리, 예배형식, 신앙적인 성도의 삶 등 모든 것이 저쪽과 다르기 때문에 따져볼 것도 없이 우리는 합당하다고 생각이 들겠지요.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저쪽 천주교에서 학대받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나가라고 해서 나온 거예요.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들을 반대했다는 웨스트민스터에 가득 담겨있다면 이 신앙고백서가 순수하게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상당히 정치적인 의향이 들어있겠지요. 어느 누구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펼쳐놓고 따지는 데는 없습니다. 왜 따질 수 없느냐 하면, 그들 보기에 다 맞는 말이기 때문에. 일부러 꽁한 마음으로 캐보자는 나쁜 의도로 해봐도 다 맞는 말이에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다 맞는다는 말이 뭘 의미하느냐 하면, 결국 이런 식으로 나가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목사는 하나님이 택한 목사가 아니고 성령을 받은 성도가 아닌 게 됩니다.

자, 보세요. 성경중심이지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이 성경에 관한 것이지요. 모든 것이 성경 중심이라고 이야기했다는 이유 때문에 성경 중심이 아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중심으로 진리가 확정이 될 때 누가 거기에 대해서 반박할 수 있겠습니까? 반박해보세요. 뭐가 문제지요? 우리가 강의하면서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지난 대전강의에서도 했어요.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것을 내가 입으로 고백하면 맞는 거예요?

성경에 이 말이 있지요. 성경은 무조건 옳습니다. 궁극적 진리는 성경입니다. 그걸 내가 고백하게 되면 고백한 이유 때문에 내가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도 있잖아요. 그게 아니라면 아닌 이유를 대라니까. 내가 성경대로 입술로 이야기했는데 그게 틀렸다면, 틀린 이유가 뭐지요?

-성경을 대상으로 두고 인간이 주체가 되어 성경을 해석한 게 문제라는 거지요.

그렇지요. 그거라니까.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책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내가 먼저 있고 내가 바라본다는 거예요. 내가 바라본 예수가 돼버려요. 그러면 사람이 둘 있으면 예수가 달라요. 진리가 한둘이 아니에요. 교회가, 설교자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건데요? 다 옳다고 할까요?

칸트할 때 보다 세밀한 논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데카르트는 말하기를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조건 진리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걸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게 진리거든요. 모든 걸 의심하고 의심해도 안 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그걸 진리의 출발로 삼자는 겁니다. 데카르트가 그렇게 이야기할 때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반박할 수 없는 거예요. 아무리 들어도 그 말이 맞는 이야기거든요. 그 말에 동의된다는 말은 결국 데카르트도 몰랐고 그 뒤에 사람들도 몰라요.

예수님이 나는 진리라고 했지 네가 진리라고 한 적이 없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말을 기억은 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누가 진리입니까? 내가 여기 있음에 세상은 내 중심으로. 이게 진리로 활용되기를 원하고 있단 말이지요. 신앙생활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신앙생활을 못 하는 이유가 어디에서 못 벗어나요? 내가 있다는 게 진리의 첫걸음이기 때문에 신앙생활 하고 싶어도 본인만 믿지 본인 외에는 믿을 수가 없어요. 그게 무슨 신앙생활입니까?

‘천국’ 하니까 내가 간다는 거예요. 지가 가는 것이 무슨 천국이에요. 탈락될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주님 계신 곳이 천국이지요. 출발을 나부터 출발하지 말고 주님에서 출발해야 돼요.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로부터 출발하지 말아야 되거든요. 나로 하여금 진리에서 떨어뜨려낼 능력이 우리한테 있습니까? 우리한테 이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나, 포기할게.”라고 포기해놓고 은근히 노리고 있다고. 자기 자신을 진리가 아님에도 불구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진리여야 된다는 욕구와 욕망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진리라는 것을 평생 두고두고 포기 못합니다.

포기 못한 상태에서 구원받으려면 결국 자기 부인은 안 돼요. 자기 부인 해봐야 자기 부인한 자기를 긍정하기 때문에 안 된단 말이죠. 그럼 어떻게 하느냐? 누가 지적질 해줘야 돼요. 그것이 주님 십자가에 근거해서 성령이 와서 우리에 대해서 책망을 할 때 우리는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책망 받으면서 책망 받은 주체가, 나를 책망하신 그분이 주체가 되면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 네 안에 성령이 있으면 너는 그리스도 영이라.

주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전에는 내가 존재한다, 내가 먹는다, 내가 물 마신다고 했는데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께서 물마시게 하셨다, 주께서 밥을 먹게 하셨다, 주께서 강의하게 하셨다고 하면서 우리는 수동적으로 변하고 주체는 우리 안에 따로 있는 겁니다. 그것을 십자가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지요. 산다는 것은 누구한테만 배당해야 돼요? 나한테 살아있다고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나한테 배당되는 것은 죽어 있다가 되고, 죽은 것은 숨이 끊어지는 게 아니고 저분과 같이 살아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저분이 살아있음과 대립 개념으로 죽었다는 개념을 우리한테 적용시켜야 된다 이 말입니다. 주 안에서 우리는 죽어있음을 통해서 죽어있다고 지적하시는 그분이 우리한테 살아있어요. 우리는 짝, 주님과 동행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죽은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 하나의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지적하면서 우리는 근원을 몰랐는데 우리의 근본 뿌리를 보여줄 사건이 터져버렸어요. 그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 아래서 세상과 우리 자신을 다시 볼 수 있어야 돼요.

이쯤 하면 여러분이 뭘 간파해야 되느냐 하면, 청교도운동, 청교도신학이 굉장히 수상하다는 것을 짐작해야 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수상하냐 하면, 어느 누구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는 점에서 강원도 말로 많이 수상해. 아무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성경에 위반됐다고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기 때문에 마치 지금도 성경으로 일하시는 성령의 일을 대체할 수 있는 신앙고백서, 그러니까 제2의 계시로 활용이 가능하다고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준다는 점에서 많이 수상해.

이 말은 결국 누가 수상하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수상해. 예수 믿는 나 자신이 신앙이라고 우기는데 따지고 보면 신앙생활 안 하면서 안 하는 걸 감추기 위해서 성경에 동의하는 걸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은 다 반대합니다. 청교도의 주장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이 이야기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청교도신학이 우리가 이걸 평가할 때 평가할 방법은 간단하지요. 청교도가 말하기를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은 다 반대한다고 하잖아요. 만약에 성경에 가르치지 않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있다면 우리는 반대해야만 하지요. 그들의 논리나 우리의 논리나 성경에 반대하는 게 있다면 우리는 반대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이 안에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들어있을까요, 없을까요?

순서를 봅시다. 1장부터 35장까지 있는데, 31장에 대회와 회의에 대해서 나오지요. 이게 성경에서 가르치는 겁니까? 정치적이지요. 과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속에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단지 일부만 들어있는지, 아니면 전부 다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인지 보잔 말이죠. 그런데 일부가 아니고 전부 다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제가 만약에 결론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내용이 전체 다가 성경적이 아니라면 우리가 성경적인 것에 근거해서 따로 만들면 되겠다고 하잖아요. 그게 만들 수 있을까요? 만들 수 없는 게 성령, 주님의 영 자체가 성경만 하기 때문에 아무리 만들어도 성령께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옳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을 만들었어요. 왜 만들었는가? 이것이 복음적이 아니고 결국 정치적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우리들끼리는 이상적인 교회다. 만약에 “십자가마을에서 등록한 사람은 이러한 규칙을 지키세요.” 하면 그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비 복음적이에요. 왜냐하면 십자가마을은 죽은 것이고 없는 거거든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아까 있다는 말은 누구한테 붙일 수 있다? 주님한테만 붙일 수 있어요.  사흘 만에 부활했기 때문에.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했잖아요. 그 있음이란 말이죠. 저도 있잖아 하지만 아니에요. 주님이 있음으로 우리가 있는 거예요. 주님이 만약에 두 시간 뒤에 죽여 버리면 우린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있어야 있음이 되지 있다가 없는 것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결국 마지막에는 없어지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없는 게 된다면 지금 있는 것도 없다는 말이 합당하다는 말이죠. 그럼 누구만 있으면 돼요? 주님만 돼요. 그게 신앙인이고 성령 받은 사람의 고백이란 말이죠. 배가 뒤집혀서 물에 빠져도 괜찮아요. 주님만 있으면 돼요.

사람들이 평소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이유가, 주님 있음은 느껴지지도 않고 나만 무조건 있어야 돼. 하여튼 제일 먼저 최종 순위가 나는 무조건 있어야 돼. 세상이 어떻게 되든 배가 뒤집어지든 나는 무조건 있어야 돼. 나는 어디까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죽어서 천국에 가면 내가 있어야 돼. 너는 있든 말든 내가 무조건 천국 가야 돼. 이건 신앙이 아닙니다. 그건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낸 거예요. 그것은 마귀가 우리 마음을 계속해서 농락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농락당하고 있고.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해봅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청교도신학이 담겨있다. 이걸 왜 만들었느냐? 정치적이다. 왜 정치적이냐? 심사하겠다는 거예요. 자기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근거해서 심사해서 여기에 합격하면 성도로, 그걸 가견적 교회라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이런 이야기 나와요. 가견적 교회에 오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천주교와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천주교는 교회 없이는 구원 없지요. 칼빈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없으면 구원 없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칼빈과 청교도가 구원을 이해 못해요. 사람을 건져주는 게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주님이 하는 프로젝트가 완성된 상황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구원만이 구원이고 우리 구원은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예수님을 구원하기 위함이지 우리 구원이 아니에요. 세상에 어떤 인간도 구원된 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의 이름으로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구원되는 사람은 아브라함이든, 엘리야든 반드시 본인은 사라지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돼요. 야곱은 이스라엘로,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사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이름 말고.

사람들이 이런 데 관심이 없기 때문에. 왜 그러냐 하면 자기 신상이 편안하거든요. 아무 일이 없어요. 만약에 여기 몇 명 모였는데 경찰이 와서 “여기서 무슨 공부합니까? 등록했습니까? 안 했어요? 허가도 안 받은 게 교회입니까?” 이래서 만약에 체포한다면 그제야 반항하면서 “목사님, 우리도 신앙고백 만듭시다.” 해서 이것은 우리가 순교를 근거로 해서 순교한 우리만이 참된 신자라는 표시라고 만들어낼 거예요. 그렇게 해서 백교도라고 할까요?

“십자가마을, 너만 잘났나?” 하는 소리가 십자가마을 공격하는 게 아닙니다. 공격하는 본인의 소속을 지키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자신들의 조직을 얼마나 지키고 싶었으면 너만 잘났나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1장 성경에 대해서 봅시다. 이런 말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빛과 창조의 섭리로서 구원 얻기에 충분치 못함으로] 벌써 비 복음적이라. 이 말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구약 때 주님께서 일하지 않았다는 거거든요. 여러분 구약 때 주님이 일 안 했습니까?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보세요. 이미 선지자 속에 예수님의 영이 미리 가 있지요. 충분치 않아요? 구원받기에 충분치 않다는 말은 결국 어떤 뉘앙스입니까? “주님이여, 우릴 구원하소서.” 내가 중요하니까. 그럼 하나님 쪽에서 “내가 해와 달을 만들어줬잖아요.” “충분치 않습니다.” “가만있어 봐. 성질 급하기는. 그럴 줄 알았어. 충분하도록 마지막 때에 예수님 보낼게.”

그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처음에 나온다니까. 그게 맞는 말이에요? 열불 난다. 총신에서 다 그렇게 가르쳤잖아요. 그게 맞는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구원을 못해서 환장을 했어.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을 쫓아낼 때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데 이제 와서 구원 못해서 안타까워하십니까? 애초부터 “사람이 따먹을 수도 있지. 내가 나무 하나 더 심지 뭐.” 이렇게 될 문제를 왜 그것 따먹었다고 인간을 추방해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 내가 미리 조치해야 되는데.” 그래서 신학교 교수한데 물어보라고 한 거예요. 예수님 먼저 오면 될 걸 왜 아브라함을 보냈는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일부 잘못된 게 들어있는 게 아니고 초반부터 정신, 사고방식 뿌리 자체가 이미 복음과 상관없는 정치적인 그러니까 여러분 구원받고 싶지요. 우리 단체에 오세요. 새로 청교도 만들었으니까 오세요. 여러분이 납득이 되는 정보를 제공할 테니까. 그 정보가 뭐냐?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창조의 섭리가 희미해서 몰랐는데 마지막에 예수님 보내서 이제는 예수님도 믿고, 그리고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보냈잖아요. 예수님만 믿었는데 천지창조가 하나님 뜻이 아니라고 믿으면 어떻게 돼요? 그럼 탈락이에요? 둘 다 믿어야 됩니까? 하나는 안 돼요? 둘 중에 하나만 대충하면 안 되겠어요?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을 몰랐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디 가 있느냐 하면, 결국 천국 간다는 겁니다. 왜? 그 사람들이 글을 너무 잘 썼거든. 뛰어나다는 것은 하나님 주신 일이니까 하나님이 자기가 일을 시켜놓고 버릴 리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야고보서 2장에 어긋납니다. 야고보서에 하나님을 한분인 줄 믿는 존재가 나와요. 마귀지요. 마귀를 구원해야 돼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니까. 플라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잖아요. 그를 구원한다면 마귀도 연옥 보내서 결국 구원해야 돼요.

출발점이 잘못됐어요. 출발점이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고 구원 중심이에요. 청교도도 이야기해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이야기하는 배경에 무엇이 깔려있습니까?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이야기하는 자는 결국은 자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자기 구원을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경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고 고백하면 된다고 결국 자기의 존재의 영원성, 불멸성을 노리고 있는 겁니다.

두 번째 삼위일체에 대해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하나님이 한 분이십니까? 한 분 맞아요? 하나님은 하나에요. 하나님은 하나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지요. 그 말을 왜 합니까? 한 분인데 한 분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는 따로 계시고 나도 따로 있는데 합쳐서 하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여기 삼위일체에 보면,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고 돼있어요. 이것은 바로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자체가 인간이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한계 있는 언어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도 역시 한계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하나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 분이라고 해서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구원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습니다. 제가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살아있는 내가 그걸 믿는 게 아니고 살아있다는 것은 예수님만 적용돼요. 살아계신 주님이 죽어있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를 깨울 때 성령이 들어가게 되고 관계성이 맺어지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미래를 전부 다 예견했다는 겁니다. 예견했지만 그것이 정해진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견했지만 일정한 상태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다고 해서 그것이 정해진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예견은 했지만 안 정해졌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은 안 정해진 채로 예견했다는 말이에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자식을 낳아도 예견할 수 있습니까? 예견 못하지요. 만약에 자식에 대해서 예견했다면 어떻게 합니까? 장애자로 태어날까봐 미리 dna 조작해서 장애로 안 태어나게 하겠지요. 우리는 몰라요. 낳고 보니까 문제가 있다면 결국 뭡니까? 예견 안 됐다는 자체가 내가 원대로 정한 권리에서 배제된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견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예정된 대로 진척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미리 정해진 거잖아요. 그게 주께서 미리 예정하신 것 맞아요.

왜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지요? 뭐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취지를 제가 나름대로 추정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미리 정해놓고 예정했다고 우기면 안 된다고 그런 뜻 같아요. 나쁜 짓해놓고 이것도 예정 됐다고 해버리면 윤리, 도덕적으로 무책임한 게 되잖아요. 그래서 예견됐지만 우리 쪽에서 정했다고 못 박을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 뒤에 보면 그런 뜻도 아니에요. 그렇게 좋게 생각해주려고 해도.

그렇게 해석되지 않는 다른 게 있습니다. 청교도신학에 칼빈의 예정론이 들어가거든요. 미리 하나님께 선택 되었다. 여기도 문제 되는 것은, 선택 전 예정 이야기인데 그건 여기서 하지 말고. 어쨌든 미리 예견했지만 정해진 건 아니라고 마치 인간의 역사는 자기 책임과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뒤늦게 인정한다는 뉘앙스가 강해요. 일부 사람의 자기 보람, 자기 성취감 같은 것을 마치 허용한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죠.

네 번째가 창조지요. 무에서 창조했다는 겁니다. 무에서 창조했습니까, 혼돈에서 창조했습니까? 창세기 1장에 보면, 혼돈 가운데 있었잖아요. 흑암 가운데 있었잖아요. 왜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까? 뭔가 있었는데. 청교도신학이 뭘 모르냐 하면, 창조할 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하시는 작업이 포함된 걸 창조라 하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있는 걸 창조라고 보는 거예요. 혼돈이라는 있음에 대해서는 대처가 안 되는 거예요. 혼돈이 있잖아요. 혼돈은 누가 만들었는데? 혼돈까지도 창조돼야 되겠네. 그러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전에 창조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 있음, 천사 있음, 그리고 하나님 있음, 그 창조는 어떻게 되는가?

복음적으로 말해서 창조는, 그리스도와 관계된 창조라고 했을 때 그게 창조지 그리스도와 무관한 창조는 창조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지 않는 창조는 창조라고 할 수 없어요. 주님께서 그렇게 규정하신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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