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140320a-(언약)1강 - 이 근호 목사 제가 오늘하고 싶은 것은 성경 전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성경 전체가 우리한테 딱 이야기를 할 때,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제가 지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간단한 그림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말하면 또 잠이 오니까 그림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자, 이렇게 두꺼운 성경책이 있습니다. 성경책이 있는데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여기에 우리 인간들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성경책이 있으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하나님을 알고 그 다음에 성경책을 이렇게 들여다본다. 이게 ①번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을 아는데 내가 여기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있고 따라서 만드신 분에게 나는 성의를 다할 때, 하나님은 나에게 복주시고 죽어서는 천국 보내준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 다음에 성경을 보는데, 사실은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가 여기에 있다면 이렇게 성경을 거쳐서 우리가 봐야 됩니다. 성경을 거쳐서. 이게 ②번이에요. 성경을 거쳐서 이렇게 하게 되면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에 ‘우상’이란 말이 나와요. 우상이란 말은 뭐냐 하면, 이게 ‘신’이라는 말입니다. 자, ①번을 보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섬긴다. 너무나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제대로 믿었다 할 수 있는데 막상 성경을 통해서 보니까 하나님이 두 종류가 돼요. 성경을 통해서 보니까 ①번이 아니고 ②번입니다. 이렇게 보면, 신이 두 종류가 있어요. 한 종류는 뭐냐 하면, 보통 사람들이 섬기는 신, 보통 사람들이 관계하는 신. 이게 창세기4장에 보면 누구냐 하면, 가인이에요. 여러분이 아시겠지만, 가인이 제사를 드렸잖아요. 가인이 누구한테 제사를 드렸어요? 자기 이웃사람한테 했습니까? 아니면 동네사람보고 했습니까? 제사를 누구한테 했습니까? 하나님한테 했지요. 가인이 하나님한테 할 때, 자기는 추수감사를 한 거예요. 다름 사람이 보기에는 가인의 믿음이 너무 너무 좋아 보이고 착해 보이고 “야, 세상에 가인처럼 자기가 챙겨놓고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면 훌륭하다.” 이 가인이 상당히 좋아보입니다마는 가인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저주받게 되어 있지요. 보통 사람들이 신을 섬길 때, 그냥 하나님께 섬기겠다는 게 굉장히 차분하고 성실하고 착해 보이지만, 가인에게는 이것이 저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 신 말고 다른 신이 뭐냐? 이것은 인간이 찾아갈 수 없는 하나님이 등장해요. 찾아갈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지시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①번처럼 내가 찾아가는 거예요. 내가 찾아가고, 찾아가고, 찾아가고, 찾아가는 하나님이지만, 이쪽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하나님이 지시를 하죠.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요. 찾아와 가지고 너는 제사를 이렇게 드려라, 라고 지시를 합니다. 지시를 하게 되면 여기서 보통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뭐하느냐 하면, 미워합니다. 미워하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을 신이라고 하고, 진짜 하나님이 찾아온 사람이 바로 이것이 뭐냐 하면, 제가 오늘 첫 째 공부할 것은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자, 이쯤해서 다시 한 번 복습 들어가 봅시다. 우리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인간 쪽에서 찾아가는 하나님이거든요. 여기는 언약이라는 이 어려운 말은 없습니다. 그냥 내가 있고 신이 나를 만들었으니까 만든 신에게 그냥 섬기면 된다, 할 때는 언약이라는 게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 구약(옛 언약)과 신약(새 언약)은 언약이죠. 언약의 책을 통해서 바라보게 되면, 거기서 언약의 하나님이 나오고 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요 사람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이 이스라엘 하나님에게는 뭐냐 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했습니다. 여기 나라는 하나님이죠. 다른 신은 또 신이지요. 우리가 이거 모른다고 칩시다. 사람인 내가 여기 있고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있으면 그냥 섬기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어느 나라가 나온다고요? 이스라엘이 나오면서 뭐라 고해요? 나 외에 다른 섬기지 말라 해서 신의 종류가 몇 종류입니까? 진짜 하나님 있고 그것 말고 또 하나의 신이 있고. 신이 두 종류가 되는 겁니다. 성경을 안 보게 되면 신은 한 종류밖에 없지요. “하나님을 믿습니까?” “열심히 믿습니다.” 한 종류밖에 없어요.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이스라엘 나오고 이스라엘에게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되어 있어요. 나 외에 다른 신을 했는데 다른 신은 우상이라 했고 나는 어떤 신이냐 하면 바로, 언약의 하나님, 언약이란 말은 뭐냐 하면 쉬운 말로 약속입니다. 내가 너한테 먼저 찾아와서 약속을 주신 그 하나님만 섬겨야지 언약이 없고 약속이 없는 니가 보통 사람들이 하는 그런 신은 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신을 무슨 신이라 하는가 하면, ‘이방인의 신’ 또는 ‘이방민족의 신’ 또 다른 말로 하면 ‘우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이 있고 다 신이지만, 이쪽의 이스라엘이 봤을 때는 뭐가 되느냐 하면, 우상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 어렵지 않지요? 어렵지 않지만 제가 또 걱정이 돼서 또 한 번 복습 들어갑니다. 자, 성경을 모른다 하면, 하나님, 조물주, 모든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섬기면 되게 되어 있어요. 잘 섬긴다고 교회 와서 뭐도 드리고 잘 섬긴다고 하면 됐는데 막상 성경을 보니까 신이 한 종류인 줄 알았는데 신의 종류가 몇 종류 되었다고요? 두 종류 되었지요. 두 종류 되어가지고 보통 이스라엘 사람 아닌 사람이 필리핀, 일본, 중국 그리고 한국, 알레스카, 에스키모, 남미에 있는 인디안, 하여튼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이고요? 이게 이방인의 신이 되는 거예요. 거기에 가도 교회 있고 거기에 가도 잘 보이는데 그것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너무 어려운 말하는 게 아니고 중요한 말을 한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었으니까 만들어진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들어보면 맞는 것 같은데 뭔가 빠졌어요. 뭐가 빠졌는가 하면, 언약이 빠져버렸어요. 예레미야11장3절,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언약을 모르는 자는, 언약을 쫓지 않는 자는 뭘 받는다고 했습니까? 저주를 받는다는 거예요. 세상에 언약을 모른다고. 다른 민족도 신을 섬겨요. 이스라엘 주변에 이방민족들이 많았거든요. 모압, 암몬, 블레셋, 아람, 구약 성경보시면 여러 가지 이름들 나오지요. 바벨론, 앗수르, 그 사람들 다 신을 섬기거든요. 신을 섬기는데 그 곳에는 뭐가 없다고 했어요? 다른 민족들이 섬기는 신에게는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언약이 없어요. 아, 그렇다면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잖아.” 라고 말하기가 “우리는 우리끼리 우리 이방민족끼리는 그래, 같은 하나님이야.” 되는데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한테는 같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될까요? 안 될까요? 같은 하나님이라고 될까요? 안 될까요? 언약이 없으면. 안되지요. 안됩니다. 이렇게 답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왜냐, 진도가 나가니까. 고맙습니다. 언약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누가 뭐라 하거든 예레미야 11장 3절 대세요. 이 언약의 말을 쫓지 않는 자는 뭘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 언약이 없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저주를 받는다. 그런 뜻입니다. 여기 성경에 나와요. 그리고 8절에 보면,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하였어도 그들이 행치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말로 그들에게 응하게 하였느니라 하라”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준비된 저주를 너희에게 퍼부을 것이라, 라고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언약을 앞장세워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제 강의가 여기까지 했는데 강의를 잠시 멈추고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내 쪽에서 하나님께 다가서게 되면 언약이라는 게 없어요. 왜냐 하면, 언약이라 하는 것은 창세전에 하나님하고, 하나님하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하나님끼리만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만 알고 있는 약속이 하나님만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창세전에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 누가 끄집어내는가, 내가 섬기고 싶은 대로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거예요. 그냥 우리 조상들은 맑은 정화수 떠놓고 그냥 정성들여 빌면 복 준다. 열심히 하면 복 준다. 이게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필리핀, 아프리카, 유럽 하여튼 이스라엘 빼놓고 모든 나라의 족속들은 그냥 성의 있게 빌고 열심을 다해 빌고 정성을 다해 빌면 복 준다. 복 준다는 것을 같은 나라끼리니까 다 같이 그렇게 공감하고 동의를 했어요. 거기도 교회 있고 다 있어요. 그런데 유독 이스라엘만큼은 내가 섬기고 싶도록 섬김은 안 된다는 걸 유독 이스라엘만 알아요. 왜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한 사람 한 사람 있습니다. 이름이 뭐냐 하면, 모세입니다. 모세. 모세라는 분이 시내산에서 누굴 만나는가 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만나요. 청와대 가게 되면 대통령 만나고 싶으면 만나집니까? 어디서 바쁜데. 안 되잖아요. “대통령 나오라고 그래, 내가 만나고 싶어.” 이러면 만나주지 않지요. 하나님은 내가 믿고 싶다고 쪼르르 쫓아와 믿는 게 아닙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어요. 모세도 벌벌벌 떨면서 시내산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누굴 만났는가, 하나님을 만났어요. 자, 이제 묻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맨 몸으로 내려왔습니까? 뭘 가지고 내려왔습니까?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그겁니다. 그게 필리핀, 알래스카, 미국, 브라질, 중국 사람들이 믿는 거하고 달라요. 그들은 맹탕이라,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정성으로 손바닥 빌고 정화수 빌고 착한일하면 천국 간다고 다들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뭘 가지고 온 거예요. 그게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게 십계명이거든요. 그 십계명 중심으로 더 붙어지면 그게 언약, 약속이 돼요. 그 약속대로 장차 메시아가 왔으니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달리면서 약속을 다 이루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 그 다음 문제입니다. 지금까지는 잘 이해했다 하고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제가 성경을 다 치우고 제가 강의 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 지웁니다. 강의 처음 할 때로 돌아갔습니다. 달랑 남는 건 이것만 그리겠습니다. 사람이지요. 다른 말로 ‘나’입니다. 여러분, 나입니다. 사람이 죽잖아요. 죽으면 죽어서 뭐가 될까? 궁금하지요. 죽어서 지옥갈래, 하는 사람 없다 말이죠. 이 땅에서는 고생했지만 죽어서는 편하게 살고 싶잖아요. 그러면 죽어서 어디 가는가, 극락 또는 천국가고 싶잖아요. 그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 계신 곳에 가야 좋은 곳에 가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 계신 곳이 뭐냐, 그걸 하나님 나라라고 여기고 우리가 이렇게 나아가는데 나아가는 방법은 뭐냐 하면, 아마도 천국은 착한 사람이 가니까 내가 착해야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성의를 보시니까 열심과 성의를 다해야 된다. 라고 했습니다. 자, 강의를 처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거 맞습니까? 뭐가 빠졌다고 했습니까? 뭐가 빠졌다고 했습니까? 제가 3번째 묻는 겁니다. 무식해서가 아니라 다시 한 번 다지고 다지기 위해서 합니다. 뭐가 빠졌어요? 언약이 빠졌지요. 언약이 빠진 거예요. 그러면 “아이고, 언약이 빠지면 집어넣으면 되겠네.” 나는 여기 있고 하나님 여기 있고 나는 가고 싶은데 이게 아니면 언약을 통해서 가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여기서부터 어려워요. 언약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우리를 뭐하는가 하면, 우리를 나무랍니다. 나무라고 언약이 우리를 공격해요. 요게 제가 설명할 때 제일 어려운 부분이에요. 우리는 뭐 하나 추가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추가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우리를 나무랍니다. 아까 제가 언약을 다 이룬 분이 누구라 했습니까? 예수님.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 응애, 응애 애기로 태어나서 다 이룬 거예요? 예수님이 청년이 되어서 성전에 들어가서 토론할 때 그 때 다 이룬 겁니까?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다 이룬 거예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외친 그 곳이 무슨 장소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맞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거든요. 이 십자가를 가지고 이게 언약이거든요.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를 나무라고 우리를 공격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라.’고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우리는 이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쪽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 가는 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은 옛날에 모세 때 줬던 십계명 모든 말씀을 예수님께서 다 품고서 십자가의 피로 만들어서 그 피를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는 뭘 느끼는가 하면, ‘어? 나는 착한데, 나는 열심히 믿는 사람인데, 나는 굉장히 성실한 사람인데. 예수님이 왜 피를 흘렸지? 이상하다. 나는 시키기만 하면 잘 따를 수 있는 사람인데. 왜 피를 흘렸지?’ 이리 되거든요. 그 피를 흘린 것이 왜 피를 흘렸는가 하면,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피를 흘렸거든요. 죄인의 피. 그러면 이 피를 알려면 우리가 용서를 알려면 우리가 먼저 뭐가 되어 있어야 되겠습니까? 죄인이어야 합니다. 죄인이었을 때, 주님의 피가 와서 용서받아서 주님 때문에 진짜 천국을 갈 수 있거든요. 이게 언약이에요. 요걸 가지고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어렵지만, 언약이 완성된 새 언약인데. 그럴 때 죄인의 죄를 용서함으로 구원받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이 자리에서 이거 다 지워버리고 벌써 다섯 번째 합니다. 다 지워버릴 때에 여기서 “내가 죄입니다.” 라고 말을 할까요? 아니면 “나는 성실합니다.”라고 할까요? 아무것도 없으면 어느 쪽으로 갈까요? 그 때 나를 죄인이라고 알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뭘 가지고 뭘 근거로 나를 죄인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의 몸에서 태어나서 죄가 있다고 여깁니다. 예, 제가 이제부터 설명하는 게 바고 그겁니다. 내가 죄인이다 하는 것, 이것을 우리가 이해는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살아가면서 언제까지? 평생. 평생 살아가면서 왜 내가 죄인인가를 살아가면서 온몸으로 체험이 되어야 돼요. 주부가 설거지 하면서도 내가 죄인이야, 내가 동네 목욕탕에 목욕하면서도 죄인이야, 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나는 죄인이야, 심지어 기도 하면서도 내가 죄인이야, 목사가 설교하면서도 내가 죄인이야, 주부가 애의 기저귀를 갈아주면서도 내가 죄인이야, 밤에 자면서 베개 베고 누워 있는 것도 사는 것도 죄인이야, 라는 것을 느낄까요? 안 느낄까요? 평소에. 평소에 안 느껴지지요. 못 느끼지요. 바로 제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그거에요. 우리는 평소에 느끼지를 못합니다. 그리니까 이게 신앙생활이 겉도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죄인임을 못 느끼면 반대말로 우리는 뭘 느낍니까? 나는 잘났어. 나는 자식을 이만큼 잘 키웠어. 나는 이렇게 남한테 뒤떨어지지 않아. 나는 우리 교회에서 제일 오래 기도해. 나는 성경을 제일 많이 알아. 나는 복 받을만한 그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야. 나는 남한테 안질 정도로 나는 아주 두뇌가 명석해. 온갖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정반대로, 나는 이만큼 자존심이 세도 괜찮아. 나를 건드리기만 해봐 가만히 안 둬. 하는 쪽으로 그게 온몸으로 체험이 되지요.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그러니 겉으로는 진짜 하나님인데 살아가는 거 보면, 이방신을 섬기는 거와 같은 똑같은 차이가 나지를 않아요. 이제 가인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에게 받은 것을 감사해서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이 정도로 챙깁니다. 남들은 사는 것으로 제사 안 드리지만, 나는 신의 은혜를 받은 것을 챙길 정도로 나는 아주 우수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제사와 예배 분명히 받을 거죠?” 하면서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제사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안 받았어요. 그 다음부터는 어떤가 하면 독이 올랐습니다. 동생의 제사를 받았거든요. 그때부터 문틈에서 마귀가 성경이 죄가 되었어요. 죄가 문틈에서 강아지처럼 엎드려 있다가 가인보고 “죽여라, 죽여라, 감히 너보다 우수한 동생이 있다는 것은 못 참겠지. 못 참겠지. 죽여야지. 동생이 없어져야 니가 훌륭한 사람이 돼! 만약에 동생이 있으면 니 동생보다 못한 형이 되는 거야. 죽일 거야? 말거야? 죽여야 돼! 니가 죽여야 니가 살아. 죽여야 니가 살아.” 자꾸 강아지처럼 죄가 덮이니까. 원래 형이 동생 죽이는 게 취미가 아니거든요. ‘아휴, 나는 그동안 내가 살아온 이 우수한 거, 가치 있는 삶, 내가 착하게 조심스럽게 살아온 이 모든 게 안 돼! 안 돼! 하지 마!’ 죄가 덮치니까 “에이씨”하고 동생을 몰래 죽였습니다. 그 가인의 후손의 인간들이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아벨의 후손은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여섯 번째입니다. 이걸 지워볼게요. 이걸 지워버리면, “신이시여, 받으소서. 받으소서.” 조상제사 지낼 때 하잖아요. “받으소서. 이 착한 나의 소산을 받으소서.”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이 착한 마음을 다하여, 경건심을 다하여 받으소서.” 했는데 제가 아까 그림 그릴 때 무엇을 통과해라 했습니까? 이렇게 하면 안 되고요, 하나님은 뭘 통과한다고 했습니까? 성경을 통과하지요. 성경을 통과하니까 여기 가인나왔지요. 모세 나왔지요. 이스라엘 나왔지요. 아까 한 것만 하겠습니다. 언약 나왔지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뭐 받는다? 저주받는다. 예레미야11장3절에 너희가 언약을 따르지 않으면 뭐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 이야기를 했지요. 성경을 모르기 전에는 나는 이 정도로 착하다고 우겼는데 성경을 딱 들어가 보니까 가인은 뭐며, 모세는 하나님을 왜 만났지? 이스라엘은 뭐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어떻게 신이 두 종류야? 라고 새로운 의문점이 자꾸 발생되지요. 거기다가 예수님께서 피 흘려 죽었다는 겁니다. “니가 받을 저주를 내가 다 받는다. 니는 저주 받아야 돼! 하지만 그 저주를 내가 담당하는 거야.” 라는 이야기가 이 성경에서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건물을 볼 때, 건물이 절인지 교회인지 뭘 보면 압니까? 교회가 절하고 다른 특징이 뭡니까? 앞에 지붕 꼭대기에 뭐 있지요? 십자가지요. 십자가. 십자가가 뭔 뜻입니까? 누가 죽었다는 이야기잖아요. 누가 죽었어요? 하나님이 죽었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이거든요. 나는 안 죽었는데, 나는 매일 살려고 하는데 나는 사는 게 취미고 사는 게 재미고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를 건드리면 안 돼! 나는 아파도 안 돼! 매일 우리는 나 살기를 원했는데. 정작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살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어떤 분입니까? 만약에 이 만포에 예수님이 오셨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나는 살려고 하는 내 곁에서 그 예수님은 죽어버렸어요. 자살했습니까? 아니면 맞아죽었습니까? 맞아 죽었잖아요. 찔러 죽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살려고 “신이시여!” 하고 있다 말이죠. 진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내 곁에서 지금 맞아 죽었는데 우리는 엉뚱한 곳을 향하여 “신이시여, 내 정성과 내 성의를 받으소서.” 이러고 있다 말이죠. 왜 그렇게 해요? 우리가 신을 섬긴 만큼 내가 대단하고 잘났고 훌륭하고 멋있고 대단하고 믿음 좋고 아주 우수하고 남은 망해도 나는 안 망해야 되고 그런 것을 갖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아까 말씀대로 하면 뭐가 없어요?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으니까 나보다 다른 사람이 믿음 좋으면 죽이고 싶다 말이죠. “저거 예배 받고 내 예배 안 받아. 죽여 버릴 거야.” 이런 가인 같은 생각을 가졌는데 막상 이 쪽에 오니까 바로 여기에는 십자가 등장하고 십자가 앞에 설 때에 나는 태어날 때부터 원래부터 의인이 아니었다는 거죠. 죄인이었거든요. 그렇다면 묻습니다. 죄인인데 누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자기를 의인행세 하라고 누가 꼬드겼습니까? 마귀가 뭘 못 보라고 막은 거예요? 뭘 보지 말라고? 니 잘난 맛에 살라고 뭐만 자꾸 가리는 거예요? 뭘 못 보도록? 십자가 못 보도록. 그러니까 십자가 가리고 내 잘난 맛보면서 그냥 성경 다 하면 복 받고 천당 간다고 요쪽으로 하라고 하지 저쪽으로 십자가는 안 보이도록 그렇게 한 거예요. 십자가 보지 말라고. 십자가는 부정적 사고방식이고 이것은 긍정적 사고방식이고 보지 말라고 그렇게 말린 거예요. 마귀가. 그래서요, 성경에 보면 마귀가 언제 나타나는가 하면, 마귀는 보통은 안 나타나요. 나타날 필요가 없어요. 자기 다 수하고 자기 부하기 때문에. 언제 누구한테 마귀 나타나는가 하면, 바로 예수님과 연결된 사람이 십자가 이야기하고, 복음이야기하고,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요 이야기할 때는 그 때 마귀는 발작을 일으킵니다. 마귀가 발작을 일으켜요. 발작 알지요? 간질을 일으키는 것처럼. 발작을 일으키면서 갑자기 착하고 점잖은 사람도 갑자기 우울해지면서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면서 “십자가 필요 없다. 십자가 없이도 우리가 천국 간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열심히 하면 천국 간다. 복 받는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지요. 그게 그렇게 보고 싶었던 마귀의 모습입니다. 마귀는 나를 해롭게 하는 게 마귀가 아니고 내가 죄인인 것을 고백 못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마귀는 오히려 반대로 우리를 잘났다! 잘났다! 훌륭하다! 잘난 척을 하게 하도록 그렇게 하는 게 마귀의 역사입니다. 자, 지금까지는 잘했으니까 이제 진도 나가는 의미에서 지워버리겠습니다. 지워버리고 이거 하나만 남기겠습니다. 언약. 진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여러분들이 설렁탕집에 간다 합시다. 설렁탕집에 앉으니까 설렁탕 두 그릇요, 하잖아요. 그럴 때 서빙하는 아줌마들이 앞에 뭘 앞장세우고 가져 옵니까? 손님, 자장면 시키셨죠, 하고 가지고 옵니까? 탕수육을 시키셨습니까, 합니까? 설렁탕집에서는 설렁탕 가지고 오지요. 이 언약의 하나님께서는요, 뭘 가지고 오느냐 하면 바로 언약을 앞장세웁니다. 약속을 앞장세워요. 언약은 뭐냐 하면, ‘어린양의 죽음’이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출애굽. 출애굽이라는 것은 애굽나라에서 빠져나올 때 있었던 일, 출애굽입니다. 합쳐서 출애굽. 성경에도 창세기 다음에 뭡니까? 출애굽기잖아요. 애굽에서 빠져나올 때. 애굽에서 빠져나올 때 문지방에 뭔가를 발랐지요? 하얀 페인트칠했습니까? 어린양의 피를 발랐지요. 오늘 진도 참 잘 나갑니다. 어린양의 피를 발랐다 말이죠. 어린양의 피 인데, 요한복음1장에서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보라, 저분을 보라, 저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보고 하는 말이 요단강 세례 받을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뭘 보라? 어린양을 보라.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나라 보좌가 있는데 그 보좌는 무슨 보좌?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흐르면 그게 천국이에요. 천국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 만들어 놓고 우리보고 오라는 겁니다. 우리보고 오라하면서 자신이 들리면 자기 사람들을 거기서 데려온다는 그건 요한복음12장의 말씀도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금 설명하는 것이 뭐냐 하면, 설렁탕 앞장세운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뭘 앞장세웁니까? 언약을 앞장세우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세우는 언약은 설렁탕이 아니고 뭐냐 하면, 어린양의 죽음. 어린양의 피. 어린양의 죽음, 피를 앞장세웠습니다. 자, 여기서 묻습니다. 그 애굽에서 이스라엘 나올 때, 인물보고 나오겠습니까? 신장, 몸무게 보고 나오겠습니까? 그들은 무슨 조건으로 애굽에서 나왔습니까? 체중이었습니까? 성격이었습니까? 성질이었습니까? 착함이었습니까? 죽음의 사자가 집집마다 죽이는데 어린양의 피가 있을 때는 약속의 피, 언약의 피, “그래, 이 집은 살았어.” 하고 그 다음 집, “오? 없잖아.” 죽였다 이 말이죠. 고 약속을 우리는 모르는데 창세전에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 창세전에 이미 약속을 해놨어요. 에베소서1장4절에서 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몰랐어요. 우리는 그런 일도 모르고 아까 한 것처럼 알래스카 사람처럼 그냥 자식 바치고 여자 바쳐가지고 불태워서 빌면 복 받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창세전에 하나님이 우리대신 제물이 되셔가지고 우리가 천국 가는 그 아이디어는 하나님끼리만 알고 우리는 몰랐어요. 그런데 그걸 많은 민족들이 있지만 오직 그걸 누구한테만 알려줬는가 하면, 이스라엘에게만 알려줬어요. 알려주는데, 이제부터 잘 들어보세요. 알려주는 것이 지식으로만 알려주는 게 아니고 실제로 그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실제로 고생을 많이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니가 짐승의 피를 받지 아니하면 매매를 못한다는 그런 대목이 기억나지요. 666 나오기 직전에 나오지요. 바로 애굽에서 히브리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어요. 이것은 매매 못할 정도가 아니고 애굽의 산부인과는 아들도 순풍, 순풍 잘 놨는데 만약에 히브리인들이 아들을 낳았다. 이것은 법으로 매매정도가 아니고 법으로 아예 그 아들을 죽여 버려야 됐습니다. 이게 그냥 지식입니까? 아니면 체험입니까? 그 당시 사람에게. 실제 상황이에요. 실제 체험이에요. 체험이고 그걸 혹독하게 눈물 콧물 짜내가면서 도저히 우리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 고생하느냐, 실제로 그런 고생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인이란 이유 때문에 그들은 노예생활 했고 짚을 주지도 않으면서 벽돌을 그전만큼 해야 되고 혹독하게 했어요. 그게 삶입니다. 그건 지식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고 그냥 사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실제로 힘든 생활을 청산한 것은 지식이 아니고 실제로 어린양을 잡고 실제로 피를 바르니까 실제로 하나님이 나타나가지고 실제로 그들을 홍해바다 건너가게 해서 분리시켰거든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지식으로 신학으로서 성경책을 둘둘 외우는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로 이 땅에 오셨어요. 그리고 실제로 죽었습니다. 실제로 사흘 만에 살아났고요, 실제로 살아나서 무덤에 시체가 없어요. 다른 종교에 이런 이야기 있습니까? 다른 종교는 도만 닦으면 되지 이런 이야기 필요 없잖아요. 그러나 이 복음은 종교도 아니에요. 실제로 현실이에요. 실제로 하나님이 이 땅에 다녀갔고 실제로 했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실제로 다메섹에서 사도바울에게 나타났어요.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뭐한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착하게 살면 저주 안 받는다? 아니에요. 성의를 다하면? 아니에요. 아닙니다. 뭐냐?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간판이 목사가 되던 집사가 되던 관계없이 저주를 받는다. 그래서 저것이 십자가 복음이냐, 십자가 복음을 가리는 이야기이냐, 잘 구분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게 종교 문제가 아니고 실제 문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에 가서 전설에 의하면 목 베어 죽었다고 하거든요. 목 베어 죽을 때, 우리 같으면 “총회장, 당회장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사람이 죽으니까 우리는 안타까웠는데. 평소에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자기가 소원이 있어요. 무슨 소원이냐 하면, 바로 내가 일찍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지금 그 상태에 있습니다. 빨리 죽어서 주님 만나고 싶은 소원이에요. 답변하기 참 곤란하지요. 더 살고 싶은데. 더 살아서 우리 딸 시집가는 것도 보고 싶고, 손자도 보고 싶고, 손자 잘되는 것도 보고 싶고, 보고 싶으니까 이상스럽게 더 살고 싶잖아요. 이게 뭐냐, 육신의 체험이에요. 우리가 성경에서 들은 것 말고 안 것 말고 실제로 육신을 더 살고 싶은데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그 때 그 때마다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사도바울은 빨리 죽고 싶어 하는데 니는 왜 자꾸 살고 싶어 하느냐? 니가 지금 천국, 천국하지만 천국보다 니가 눈에 보이는 세계가 더 마음에 드는 게 아니야? 마음에 더 들지? 아예 죽기 싫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 생활이 더 좋지?” 사실은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보다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다가 갑자기 주께서 갑자기 임해버리면 전부 다 유황불 받거든요. 성경에서 자꾸 그런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게 지식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조선일보, 동아일보, MBC, KBS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이게 실제상황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실제 상황이듯이. 그래서 제가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앞장세울 때는 출애굽을 할 때는 뭐했다? 어린양의 죽음, 피를 가지고 나왔던 게 실제 상황이라면 지금 2014년도 3월 20일 오늘 같은 경우는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 피로 다 이루었다! 누가 너희를 정죄하리요, 누가 너희를 송사하리요, 누가 너희를 죄 있다 하리요, 내가 너희를 용서했다. 주님의 용서가 오직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게 실제상황이에요. 실제상황. 이것은 기독교 교회, 종교건 떠나서 이건 북한의 핵 준비 떠나서 말레이시아 비행기가 떨어진 것이 실제 상황이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려 죽음으로서 피를 믿는 자는 피로서 깨끗하게 용서받는 것도 실제상황입니다. 실제상황이에요. 그래서 살아도 영생이요, 죽어도 영생이요, 살아도 영생 받고 죽으면 오늘밤에 낙원에 가있고. 병원에 가도 영생이요, 병원에서 돌아가셔도 영생이요, 이래도 영생이요, 저래도 영생인 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말한 “내가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이겼노라.” 세상이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다는 거예요. 겁날 게 없다는 겁니다. 왜? 실제상황이기 때문에. “니가 예수를 만나봤어? 니가 다메섹에서 예수 만나봤어? 안 만나봤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났어. 그래서 같이 성령 받은 사람에게 이 소식 전하라고 나보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웠어.” 자, 그러면 이방인의 사도 설명하고 10분 쉬겠습니다. 자, 뭐든지 복습을 해야 돼요. 7번째 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어디서 왔지? 아! 하나님이 만들었구나! 그래, 하나님 잘 섬겨야지.’ 신을 섬깁니다. 그냥 섬깁니다. 뭐가 빠졌어요? 언약이 빠졌어요. 설렁탕집에 서빙하는 분이 설렁탕을 안가지고 맨몸으로 온 거와 똑같아요. 하나님 쪽에서 뭔가 주시는 게 있어야 되는데 그냥 아무것도 없이 맹탕으로 온다면 우리가 알아서 갈 수밖에 없는데 그건 가짜거든요. 성경책, 언약 책을 통과해서 보니까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나님은 언약을 앞장세워서 오십니다. 그 언약을 아까 비유로 뭐라고 했습니까? 설렁탕. 설렁탕집에 설렁탕을 앞장세워서 오는 거예요. 그냥 자장면을 들고 오는 게 아니고 설렁탕. 그 언약이 오니까 그 언약에 의하면 언약이 없는 이쪽은 뭐냐 하면, 저주 받을 자에요. 뭐가 없기 때문에? 언약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제가 아까 강의하기를 사도바울은 무슨 사도라고 했습니까? 이방인의 사도라고 했지요. 이스라엘이 보기에 이쪽동네가 무슨 동네인가 하면, 이게 이방인의 동네거든요. 이방인의 동네. 뭐가 없다고 했어요?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으니까 그냥 자기가 섬기고 싶은 대로 그냥 정화수 떠놓고 옛날 우리 할머니도 그랬어요. 할머니도 교회 안다녔는데 매일같이 때가 되면 음력 월초가 되면 부엌에서 혼자 궁시렁, 궁시렁 했다 말이죠. 하여튼 새벽에 들어보면 그저 남산 위에 시계처럼 우리 자식 잘되게 해주시고 올 때 건강하고 사업 잘되게 하시고, 그냥 비는 거예요. 사람들이 정동진의 해 뜨는 걸 보고 빌듯이 보름달 뜨면 그냥 비는 거예요. 언약이 없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언약이 없고 그냥 비는 거예요. 그저 하얀 소복입고 빌고 그 다음에 종이가 있어요. 종이를 가지고 성냥개비로 태우니까 종이가 불이 붙으니까 올라가잖아요. 올라가면 막 올려요. 아직도 그 기억나요. 그냥 비는 거예요. 요게 뭐냐, 이방인의 신이에요. 사도는 바로 언약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구하라고 사도가 이것 비는 대신에 십자가피를 소개하라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찾아왔습니다. 찾아왔어요. 옛날에는 너희들이 언약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 성의껏 정성을 다하여 깨끗하게 살면 천국 갈 줄 알고 빌었는데 이제는 이 복음, 십자가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뭘 받는다? 저주 받는다. 이 저주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협상할 대상이 아니에요. 봐주기가 될 수 없어요. 사도바울한테 무슨 봐주기가 있습니까? “사도바울님, 그 십자가 말고 구원 받을 거 있습니까?” 물으면 “아이고 뭐 당신한테는 특별히 십자가 없이도 구원받게 해줄게요.” 이런 식으로 사도바울이 나서서 협상을 못해요. 자기는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못해요. 교인이 몇 명이냐, 자기편이 몇 명이냐, 그거 지금 고려대상이 안됩니다. 자기는 죽고 싶은 거예요. 자기는 내편이 몇 명이다, 다 귀찮아. 빨리 죽어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 달리신 그 예수님을 빨리 얼굴을 마주 보고 싶어요. 그거 보고 싶지, 자기 팬 관리하고 이런 것도 다 귀찮고 그저 죽고 싶은데 내가 못 죽는 것은, 빌립보서 1장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내가 지금 죽고 싶지만 못 죽는 것은 너희들 때문에 못 죽는다. 전할 복음이 남아있기 때문에 못 죽는다 했어요. 자기는 막 가고 싶은데 사람들이 마구 잡아당기는 것 같아. 그래서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의 피로서 죄가 용서받는 식으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화가 이만큼 났어요. “사도바울 당신! 당신 율법이 필요 없다는 말이냐?” 이런 식으로 화를 냈거든요. 그럴 때 사도바울이 말하는 유명한 말이 있어요. 성령을 받는데 율법을 행함으로 성령을 받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갈라디아서3장에서 합니다. 내가 성령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지 않았는데, 그들은 율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성령이 내려온 걸 봐서 성령이 와서 십자가 피를 알기 위해서 구원받는 데는 성령을 먼저 공부해야 된다는 조건 없이 왔다는 거예요.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다시 성경책을 보게 되면, ‘아! 율법이라는 것은 법은 우리로 하여금 날 때부터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구나! 죄인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래, 나 죄인이야.’ 이제부터는 내가 자기 잘난 맛에 기쁜 게 아니고 내가 죄인 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 다음부터는 스트레스도 안 받고 인생의 모든 짐이 진짜 배설하는 것처럼, 오줌 눌 때 쏴 누면 기분 좋잖아요. 배설할 때 화장실에서. 뭔가 온 몸에서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아. 무거운 짐이 ‘내가 잘나야 돼! 나는 뛰어나야 돼! 남은 죽어도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는 오래 살아야 돼! 나는 망하면 안 돼, 나는 아프면 안 돼.’ 하여튼 이 모든 나는, 나는, 나는 잘되어야 돼! 하는 그 모든 스트레스, 자존심, 체면, 위신, 그게 배설물을 통해서 다 날아가듯이 나의 의로움이 다 내려가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그래서 빌립보서1장에서 하는 말이 나는 그동안 내가 잘났다 하는 것은 지금은 나는 화장실에 가가지고 배설물로 다 버리고 왔다.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이 지식을 알고부터는 그동안 내가 자랑해왔던 철학과 모든 학문과 뛰어남과 착함과 완벽한, 사도바울은 사도되기 전에 율법에 완전한 사람이었어요. 자기보다 완전한 사람 못 봤어요. 그 완전함, 이런 것도 하나의 당뇨병 환자처럼 당뇨가 다 빠지잖아요. 포도당 빠지듯이 그냥 노란 오줌 속에 그 모든 자존심, 체면도 싹 빠지면서 죽기 전부터 이미 천국 생활을 사도바울이 했던 겁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요 언약이 어떻게 진행 되는가를 거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첨부파일 : 수원140417a-(언약)1강 - 이 근호 목사.hwp (31.5K), Down: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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