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방 설교 창세기 12장 13절 20260616-이 근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또 말씀을 통해서 모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라도 모여 있으면 내가 함께 있겠다고 했으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주께서 늘 자기 백성을 관리하고 건져내시고 탈출시키는 이 작업을 어느 곳이든지 늘 체감하고 느끼면서 사는 그러한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12장 13절 하겠습니다.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내를 팔아서 누구한테 상납하죠. 애굽의 바로 왕에게 상납을 해서 목숨 한번 건져보자, 아브라함이 그렇게 행동에 나섰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애굽까지 오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갔는데, 갈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라”(창 12:3)라고 특별 관리해주겠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가나안 땅에 도착을 했잖아요. 왔는데 10절에 보면 기근이 있어요. 가나안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특별 관리를 해주신다는 그런 안도의 마음을 가졌었는데, 여기에 갑자기 기근이 심하게 일어났거든요. 10절에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처음에 이야기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린다’는 이 기준점이 한 곳에 고정되면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아, 하나님이 나를 참 이렇게 복과 저주의 기준점으로 사용하는구나.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나에게 뭔가 하나님이 ‘너 걱정하지 마. 내가 잘해줄게.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를 위해서라도 내 약속을 위해서라도 너를 지켜주마.’’ 뭐 그런 인식을 가질만한데, 갑자기 기근이 심해가지고 약속의 땅이 아닌 남의 나라 땅, 애굽 땅에 내려간 거예요.
본토 아비 집을 떠나서 아주 대단한 결심 없이는 될 수 없는 식으로 자기 고향을 떠나서 타향에 왔는데, 왔을 때 믿는 구석이 있었죠.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신다.’ 그렇게 두 부부가 철석같이 믿었어요.
안 지켜주는데? 지켜주질 않아요. 천하의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안 지켜줍니다. 자,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것과 똑같아요.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베드로뿐 아니라 열두 제자 모두 그렇게 생각했죠. ‘야, 주님께서 내 인생 책임지는구나.’ 아주 신바람이 나가지고 ‘주의 나라 임할 때 우리가 어느 정도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까?’ 지금 그 생각했단 말이죠.
그런데 그 기준,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이게 사달 나버렸네요. 베드로 포함 열두 제자는 ‘에이, 모르겠다. 우리가 믿던 그 분은 이제 없다.’ 단지 ‘죽었다’ 정도가 아니고, 아예 없어진 거예요. 예수님이 없어졌을 때 베드로와 열한 제자-그 중에 가룟 유다는 자살했지만-가 생각하기에 ‘역시 믿을 것은 나의 존재뿐이다. 나뿐이다. 내가 살고 죽는 것은 내 처신하기 나름이고, 내가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가는 이게 전부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여기 오늘 본문 창세기 12장에도 마찬가지에요. 갔는데 기근이 심했다. 그래서 애굽으로 갔을 때는 뭐를 포기했느냐 하면 약속의 땅 전체를 싸그리 다 포기한 거예요. 날아간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이고 살고 보자.’ 너무나 인간적이고 너무나 솔직한 행위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복의 근원이에요. 축복하는 자, 저주하는 자.
더구나 가만히 있으면 될 터인데 괜히 또 오버합니다. 11절,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아브라함의 사라가 얼마나 예뻤던지 바로의 대신들도 보고 스카웃 해서 임금 궁에 후처로 취업이 된 거죠(창 12:15).
아브라함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죠. ‘네 덕에 내가 살았다. 역시 우리의 묘수는 묘수였었어.’ 아내지만 아내라 하지 않고, 누이동생인데 그것도 예쁜 누이동생이잖아요. 예쁜 누이동생 덕에 오빠인 내가 덕을 보는, 우리 그런 것으로 조인트 되는 그런 약속을 했죠. 하나님의 약속보다 내가 살기 위해서 한 약속이 더 든든하고 더 우선이었던 겁니다.
창세기 20장 1-2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3절에,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지금 하나님이 개입했지만 사실은 개입할 수밖에 없는 여지를 먼저 준 것은 역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역시 여기도 자기 아내를 누이라 해서 그때 애굽에서 써먹고 효과 본 것을 여기서도 써먹겠다는 거예요.
그럼 이쯤에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나는 약속의 사람이다’, 뭐 이런 거 저런 거 지금 그게 머리에 안 들어옵니다. 들어올 수가 없죠. 곱게 하나님이 관리해주시면 ‘이제부터 내 할 일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말씀만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겠는데, 돌아가는 사태가 곱게 안 돌아가잖아요.
소위 신앙생활 한번 마음먹고 해보겠다는데, 세상에 그것마저 주께서 작살내버려요. “신앙 같은 소리하고 있네. 정신 차려라! 너부터 살아야지, 이거하고 신앙하고 무슨 관계있는데?” 주위 사람도 은근히 그걸 요청했는데, 아브라함도 못지않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 아브라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시다. 뭐야, 당신? 당신 복의 근원 맞아? 신앙의 조상이라며? 뭐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데… 너무 비겁한 거 같아. 아내 팔아서 지 목숨 건지겠다고. 당신이 그럼 신앙인으로서 업적? 실적? 한 게 뭐가 있는데? 아무것도 없으면서. 아이고, 쪼잔한 인간. 지 살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세상의 권세와 세상의 상황에 눈치 보면서 ‘그냥 살려만 주이소!’
아이고, 참내. ‘살려만 주이소’가 신앙이에요? 그런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렇게 움직였어요. 이렇게 움직였다고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신앙의 ‘신’자도 못 나오도록, 딴소리 못하도록 “네 본성에 충실하라. 네 본성에 충실해.” 어떤 행운이라든지 어떤 기적을 얍삽하게 바라는 그런 짓은 하나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취지가 뭐냐?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그게 나옵니다. 3장 6절, 참 이게 엄청나게 어려운 이야기에요. 3장 6-7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죠.
논리가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릴게요. ‘아브라함 자기 본성이 어떻게 괜찮은 본성으로 바뀌는가?’ 이것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네가 지금 믿음이 없으니까 믿음 있어야지.’ 이걸 하나님께서 시도한 적도 없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신 적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예수님의 본성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튀어나오게 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본성이 뭐냐? ‘예수님의 의’에요. 예수님의 의입니다. 그 예수님의 의에 아브라함의 의가 같이 섞여 들어갈까요? 턱도 없는 소리죠. 이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다. 내가 바르게 살아야지. 믿음대로 살아야지.’ 이게 예수님의 의에 합류가 될까요? 하나님께서 차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 본성을 감출래야 감출 수 없게 만드는 상황으로 계속 몰아세우는 거예요. 감출 수 없게 만드는 상황으로, 끊임없이.
그렇게 되면 그 아브라함이 느끼는 것은 간단합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아브라함이 지식으로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죄인이야.’ 이거잖아요.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나는 ‘진짜루!’. ‘진짜’로 모자라면 앞에 하나 더 붙입시다, ‘정말’. ‘정말, 진짜로 아무것도 아니다. 암에 걸리든 안 그러면 내일 죽든 내가 거기에 대해서 신경 쓸 권리나 자격이 없을 정도로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이 경로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하나님의 의가 부각되는 유일한 경로에요. 이걸 아브라함이 먼저 보여준 거예요. 온갖 추잡하고 지저분한 짓, 비겁하게 남자가 되어서 여자 앞장세워가지고 밥 먹고 살려고 한 것, 고생은 여자가 하고 지는 살겠다고 한 그 추잡한 짓,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에요, 계속 나오게 만드는 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러다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로 아무것도 아니다.’
“네 아들 바쳐라.” “바칠게요.” “왜? 그걸 왜 바쳐? 너 사랑했잖아.” “저 진짜로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너 그래놓고 나중에 또 딴 소리할 거지? 또 변할 거지?”
‘아브라함의 믿음이 진짜로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걸로 달라졌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만 쏟아내고 있다.’는 것을 결국 어디서 아느냐 하면, 아내가 죽음은 그게 하나의 현상이지,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막벨라 굴에다 매장지 삼은 것으로 아는 거예요.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남편인 아브라함 내가 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했다면, 이 땅의 무덤을 만들어놓고 무덤 속에- 네가 먼저 죽었으니까 너 집어넣고 그다음에 나 집어넣고 내 아들 집어넣고 내 손자 집어넣고. 그 막벨라 굴에서 우리 한데 모이자. 모이자.
왜냐하면 아무것도 아닌 자의 아무것도 아닌 죽음을, 예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막벨라 굴의 죽음에 예수님의 죽음, 그게 언약이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이 합류되게 하는 겁니다. “네 죽음 말고, 아무것도 아닌 네 죽음 신경 쓰지 말고, 내 죽음이 네 죽음보다 더 소중하기에 내 죽음을 위해서 네 죽음을 내가 충분하게 활용한다. 각오되어 있지?” 나의 죽음과 주님의 죽음이 결합될 때, 그때 하나님의 의가 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모두 해야 될 것은, 간단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또 우리가 고집이 세잖아요. 한 고집하잖아요. 그것을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작살내버립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어디 아래에 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것을 미리 간파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활용된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고자 하는 이야기는 10절을 무시해버려요. ‘뭐 구원 받았는데… 다 율법 벗어나 구원 받았는데.’ 아니에요. 끝까지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로 정말로.’
식당에서 밥을 먹든 뭘 하더라도 어느 것 하나 저주받을 죄가 아닌 게 하나도 없게 만드는 데에 충실하게 주께서 율법의 기능을 다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에요.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망할 수 있습니까? 망하는 방법은요?’
‘하나님, 살 수 있는 방법은 뭡니까?’ 묻지 마시고, ‘아, 이게 내가 경험하지 못한 망함인가? 아, 더 있을 거야. 더 있을 거야.’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면 정말 망하는 노선을 찾기를 바라는 적극적인 마음, 이게 다 필요해요.
“아, 이 정도까지 망했는데… 주께서 이렇게 망하게 하셨군요.” 주님이 “그것도 지금 망한 거야? 한참 멀었어! 왜 이래? 왜 이렇게 성질 급해? 기다려 봐, 더 망하게 해줄 테니까. 얼마나 치졸한지, 얼마나 네가 비겁한지, 얼마나 믿음이 없는지 내가 딱딱 긁어서 아까 시커먼 누룽지처럼 죄란 죄는 죄다 끄집어낼 때까지 내가 해줄 거야.”
주께서 나의 의가 아니고 주님의 의만 드러내기 위해서 그 노선이 바로 유일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천국의 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일론 정도가 아니고 진짜배기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말로 아니라 새록새록 날마다 그걸 감지하는 그 희열과 감격과 그 행복과 감사와 고마움이, 예상 못한 것이 계속 터져 나올 수 있도록 주께서 이끌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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