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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 일

아빠와 함께 2026. 7. 13. 20:30

70강-YouTube강의(장래 일)1404017-이 근호 목사


제목은 “장래 일”입니다. 장래 일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 장래일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게 어디 나오냐 하면, 전도서8장7절에 보면,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 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신약에도 똑같이 장래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데 신약에는 장래 일이란 글을 쓰면 안 됩니다. 그 장래 일이 현재 일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종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람이 개인적으로 장래일 같으면 그것은 이 세상이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데로 세상이 맞추어 줄까? 그렇게 자기 사적인 장래 일만 뽑아서 관심들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개인을 위한 성경책은 없습니다.

에베소서2장8절에 보면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할 때에 그 말을 보고 사람들은 대단히 많이 오해해요. ‘날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사적으로 믿음을 주셨구나.’ 하고 이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에베소서1장에 보면, 사적인 구원은 애초에 없고 교회에다 믿음을 준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집단적으로 믿음을 준건데 사람들은 자기와 형제, 자기집단, 교회의 머리가 된다 생각하지 않고, 나의 머리가 된다고 주님을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아, 나를 위해서 이 믿음을 특별히 선물로 주었구나.’ 이렇게 생각해 버려요. 그렇다면 이런 믿음은 어디다 써먹느냐 하면, 나만이 구원받는데 쓸모있는 믿음이 돼버려요. 그런 믿음은 구약에도, 신약에도 없습니다.

구약 전도서에서 장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장차 신약 때 와서 종말이 되게 되면, 우리가 사적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인가가 완전히 다 노출되는 그 시점이 종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종말이란, 우리의 개인적인 모든 일이 전혀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음이 다 노출되는 그 시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입니다.

자,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것은, 성경에 나와 있거든요. 여러분들이 실제로 마지막 때라는 것을 실제로 체험합니까? 전혀 체험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우리는 여전히 사적인 나름대로의 꿈과 계획에 푹 빠져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바꿀까요? 무엇을 무엇으로 바꿀까요? 사적으로 마지막 때 이런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적으로 나에게 이런 믿음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사적으로 나만이라도 먼저 구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는 남의 집안보다 우리 집안부터 먼저 구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의 남편보다 내 남편이 먼저 구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사적인, 사적인, 사적인 모든 욕구와 욕망이 신약이 되면, 마지막이 되면 그 자체가 오해고, 오해고, 오해라는 것을 집단 구원에 의해 앞에서 전부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사적으로 난 구원받았다는 그 자체가 잘못이다. 는 것을 종말의 원칙 앞에서 회개되어야 되고, 인정 되어야 되겠죠. 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뭐냐.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장래일과, 신약에 막상 왔던 그 종말과 사후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구약에서 장래 일이라 하는 것은, 항상 출발점이 내가 궁금한 나의 장래일, 보통 사주팔자 볼 때도 그렇게 하자나요. 어제 진도에서 안산고등학교 학생들이 배가 침몰해서 죽었는데 안산고등학교 학부모 입장에서 어떻습니까? ‘아후.. 미리 알았으면 내 애는 그 배에 태우지 않았을 건데..’ 라고 생각하겠죠. 그게 바로 종말에서 말하는 종말 때 죄가 되고, 잘못된 해석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장래 일이라 해서 내가 미처 모르는 어떤 미래 일을 자꾸 장래일이라 생각하는데 그런 장래일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 집단적인 장래 일을 이야기해주죠. 사적으로 활용도가 높은 장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인 장래 일을 언급하는 겁니다.
만약에 그 배가 미리 침몰하는 것을 안다면, 내 애는 거기 보내지 않겠죠? 사적인 이익부터 먼저 챙기고 그 다음에 친한 친구한테 ‘애 거기 가지마. 거기 침몰하게 돼있어.’ 이렇게 알려줄 거예요. 미리 안다면, 별에서 온 그대라면 미리 그렇게 이야기 할 거예요.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런 식으로 인간들이 기다리고 고대하고 있는 그 장래 일을 만족시켜주고 그걸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그런 종말, 그런 장래 일로서의 종말 덩어리가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어쨌든 사적인 궁금증이라든지 기대, 희망 그런 것을 다 드러내는 종말은 아니다. 개인적인 궁금증을 풀어주는 종말은 아닌 거예요. 그럼 종말은 누구를 위한 종말이냐.

구약에서 이스라엘나라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염두해 둡시다. 그 이스라엘나라 백성들은 자기 나라 어떻게 되느냐가 궁금했고 나중에 메시야가 오게 되면, 필히 우리 혈육적인 아브라함자손만은 반드시 구원된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한 성경해석 문자 그대로 풀이하게 되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지 다른 나라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그럼 그 이스라엘 하나님 할 때, 그 이스라엘이 어느 나라입니까. 바로 본인의 나라 말고, 달리 이스라엘 나라가 없는 거예요.
똑같은 오해가 오늘날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라니까 사람들은 교회마다 주님이 자기머리라고 우깁니다. 왜, 자기가 생각하는 이 교회 말고 다른 교회가 도저히 생각하기도 싫고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죠. 이게 바로 제가 아까 처음부터 이야기한 사적인데 매여 있다는 이런 오류가 자꾸만 성경을 봐도 그런 오류가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자꾸만 이야기 합니다. 종말은 이런 사적인 기대나 희망을 들어주기 위해서 종말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럼 이게 아니라면, 기존의 이스라엘도 아니라면 그럼 누굴 위한 종말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따로 챙겨놓은 집단, 그 진짜 이스라엘을 위한 종말입니다.
그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개인예정론이 아닌, 개인선택론도 아닙니다. 개인이 창세전에 예정 받아서 받는 그런 구원론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출발점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그 지체 자체가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제가 보기엔 차이점이 없는데, 차이점이 뭐냐.
얼른 생각하면 차이점이 안나죠? 개인 개인이 모여서 교회되니까 교회가 이행됐다는 이야기나 방금 제가 이야기한 창세전에 교회를 예정했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 아니냐. 라고 생각  하시겠는데 이게 똑같은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똑같은 말이 아니냐 하면, 진정으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서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를 위해서 성령으로 믿음을 선물로 준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더불어 된 이 교회를 위해서 선물로 줬습니다. 따라서 나 말고라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왜, 더불어 생각하니까. 그게 우리입니다. 우리라는건 더불어 새로운 우리, 더불어 생각한 그 집단을 위해서 일괄 믿음을 줬지, 나만 달랑 구원 받으라고 믿음주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로 고백이 될 때, 이것이 진짜 성령 온 믿음에 합당한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저희보고 ‘너희만 교회냐. 너만 신자야? 너만 예수 잘 믿어? 너만 복음 알어?’ 라고 지적할 때, ‘그래 성령께서 나에게 믿음을 선물로 줬기 때문에 나는 성령 받았어. 그러니까 내 믿음은 옳은 믿음이야.’ 라고 대답한다면, 그 대답 자체 속에 하나님의 집단성이 지금 빠져버렸어요.
‘나는 구원 받아야 돼.’ 하는 그 욕구와 욕망과 부합된, 오류된 성경해석을 본인이 하고 있는 겁니다. ‘너만 잘났어. 너만 교회야. 너만 참된 믿음이야.’ 라고 할 때, 아니야. 우리야. 왜, 주님 안에서 ‘나’ 라는 것은 소멸되고 사라지는 겁니다. 왜, 구약 때 나만이, 나만이 하다가 멸망한 나라가 이스라엘 백성이거든요.
따라서 그걸 안 이상 신약에서의 이스라엘은 ‘나만 잘났어. 나만 진짜 믿음 좋아.’ 라고 할 수가 없고, 주께서 주님을 출발점을 해서, 주께서 참된 신앙인이니까, 주님이 참된 의인이니까 주님의 몸의 지체에 합했던 자들을 위하여, 교회 자체를 만들기 위해서 일괄적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믿음을 선물로 줬기 때문에 나만 잘 믿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질문한 사람들도 ‘너만 잘 믿냐.’ 라는 질문자체가 바로 개인적인 욕구에 빠져있는 사람의 잘못된 질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종말이란, 우리가 궁금해 하는 그 장래 일을 해결해야 되는 종말론이 아니라, 종말론은 예수님 중심으로 인간의 모든 생각이 오류가 있음을 오히려 노출시키고, 주께서 그냥 일괄적으로 자기 교회를 일방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수용하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종말적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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