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놀라운 묘기

아빠와 함께 2026. 5. 14. 08:32

놀라운 묘기 

2026년 5월 13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6:18-23

(6:18)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6:19)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의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저희를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6:20)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저희의 눈을 여시매 저희가 보니 자기가 사마리아 가운데 있더라
(6:21) 이스라엘 왕이 저희를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6:22)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
(6:23) 왕이 위하여 식물을 많이 베풀고 저희가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저희가 그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이스라엘과 이방나라의 관계는 늘 뚜렷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은 축복과 저주를 명쾌하게 가름되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명백함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일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지상의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자기 삶에 불편함이 없기를 도모합니다.

이스라엘이 품고 있어야 될 언약과 그 언약을 활성화하는데 주력하시는 하나님의 취지를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받아들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정착하고 난 뒤부터는 언약을 버리고 다른 이방나라의 풍습과 생활방식에 쉽게 동화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멈추지 않으시고 밀어붙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다워야 한다는 겁니다. 언약이 살아나고 그 결과로 생존하고 존재하는 나라이어야 하는 겁니다. 죽어 있는 이스라엘 속의 언약을 살리는 데 있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원칙이 작용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방민족으로 이스라엘을 둘러치게 하신 겁니다.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삿 2:19-23)

마치 이스라엘이 정신 못차릴 때, 이방나라 군대장관인 나아만을 문둥병 걸리게 해서 그가 이스라엘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 엘리사에게 연결되어 이때부터 그는 자기 조상 신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반대로 하나님의 언약에 어두운 엘리사 선지자 사환인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이 들렸던 문둥병에 걸리게 하는 방식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람 군대라는 집단이 직접 엘리사 선지자와 연계되게 하십니다. 엘리사를 체포, 제거하려는 그 군대는 엘리사에 의해서 단체로 눈이 어두워집니다. 전쟁은 이미 하나마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패배한 군대가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다들 배부른 상태에서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갑니다.

죽어야 할 자들이 건강하게 살아서 돌아가는 이유는 놀랍게도 그들이 ‘눈이 어두워졌음’에 있습니다. 창세기 3:7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하나님께서 처음 만들어놓으신 인간은 결코 눈이 밝아서는 아니되는 인간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기르시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눈이 밝아 독자적인 정신으로 돌아서게 되면 그들은 자기를 보게 됩니다. 눈이 밝은 상태에서 말입니다. 이렇게 되니 인간들은 자기 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자기 세계를 따로 구축하면서 자신의 눈이 밝아졌음을 나타내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이게 ‘자아’ 곧 ‘나’입니다.

이런 ‘나’와 ‘’나‘들이 만나 나름대로 의미를 생산하고 유통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극히 비(非)-자연적인 모습입니다. 성경 욥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 욥을 만나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욥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결코 인간들처럼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으로 하여금 친히 하나님께서 기르심을 드러내는 마음을 장착해야 합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2-3)

인간의 마음은 육신에 붙여있는 두 눈을 통해 스스로 자기 마음에 드는 보물을 채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보물을 먼저 전제로 하시고 그 보물을 바라보게 하는 식으로 새 마음을 갖고 있어야 천국 백성이 된다고 하십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0-21)

따라서 기존의 마음을 갈아치우는 방법은 일시적으로 장님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자기의 눈 밝음을 발휘해서 얻을 결과물이 차단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쟁은 아람군대가 눈이 어두움에서 승패는 벌써 끝났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이 아람군대처럼 되어야만 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패배한 아람군대가 엘리사의 기도로 다시 눈을 떠면서 그들은 무사히 살아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눈이 밝아 자아 위주로 사는 것이고 반면 생명이란 자기 눈이 감겼다고 오로지 주님의 시선을 공유하기 위해 다시 눈 뜬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례가 사도행전 9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려 간 사울이라는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잠시 장님이 되었다고 다시 눈을 뜨게 되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사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됩니다.

요한복음 20:29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묘기입니까! 기존에 달려있는 자신의 눈, 즉 자기 마음의 창구가 전혀 소용없게 만들고 방해받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 예가 누가복음 5:8에도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베드로는 자진해서 그동안 자신이 눈 떠서 살아온 모든 것들이 주님의 가치와 의미를 훼방해 왔음을 인정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암은 포로잡혀 온 아람군대를 다 죽여버리자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여전히 자기 눈에 밝아서 선지자의 안목과 같이 못하고 있음을 반영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되는 데서 의미 있음을 밝혀주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모든 끝을 마감하시는 분임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나오는 주님의 시선과 안목을 같이 하는 자들만이 예수님의 영원히 함께 사는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매사가 우리 인간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주님의 일인 것을 눈을 떠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강-열왕기하 6장 18-23절(놀라운 묘기) 26051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6장 18절에서 23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6:18-23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의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저희를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저희의 눈을 여시매 저희가 보니 자기가 사마리아 가운데 있더라 이스라엘 왕이 저희를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왕이 위하여 식물을 많이 베풀고 저희가 먹고 마시매 놓아 보내니 저희가 그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아람 나라와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결국은 두 나라의 전쟁이 아니고 엘리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 그리고 선지자 엘리사가 있는 쪽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북이스라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북이스라엘 자신의 본질을 망각해 버렸다는 거예요.

원래 이것은 선지자가 나설 필요도 없어요. 제대로 된 이스라엘 같으면 이방 민족에게 능히 승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을 얕잡아보고 넘보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이 사사기 2장 20-23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약속의 땅에서는 약속이 살아나야 해요. 그런데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살게 하고부터는 본인이 살겠다는 그 정신이 하나님의 약속보다 우선이 되었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그들이 부름을 받은 백성이라는 생각은 못 하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으로 생각한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중간에 약속이라는 것이 날아 가버렸어요. 그것이 빠져버렸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약속대로 이뤄지는 관계, 그러한 나라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이미 규정을 해놓았습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니지요.

자기 스케줄, 자기 움직임, 자기활동…, 오늘날의 우리가 조용하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굉장히 분주하고 바쁘지요. 자기 일에 분주하다 보니 자기 일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아침에 눈 떠서 해질 때까지 그렇지요. 그런데 약속이라 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땅에까지 내려와서 어떤 활동을 하는 그것이 약속이에요.

땅에서 인간들이 자기활동에 집착하면서 거기에 매진하고 있고, 하나님은 위에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서 하나님의 활동, 하나님의 스케줄, 하나님의 움직임,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신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되니까 자기 일에 정신 팔려있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활동하심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한번 실행에 옮기고, 실천에 옮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 이스라엘은 이미 버려놓았어요. 이스라엘은 아예 관심도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지를 통해서 그 약속의 진수를 알려주는 것에 관한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히 하나님의 주 관심사임을 어떤 식으로 이스라엘에 나타내시는가?’

문둥병 걸렸던 나아만 장군 이야기에서 엘리사의 비서죠, 그 사환에게 문둥병이 옮겨간 것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북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어요. 우상 섬긴다고 정신이 없습니다. 왜? 백성들이 다 그것을 원하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을 여전히 깨우치기 위해서 아람 나라, 이방 나라, 약속이 없는 이방 나라의 장군이 문둥병에 걸리게 했어요.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이 걸려서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왔는데 문둥병 걸렸던 나아만 장군은 그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내가 본국에 돌아가더라도 여호와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게 원래 이스라엘이 보여줘야 할 본질이잖아요. 하도 이스라엘이 그 본질을 안 보여주니까 이스라엘을 치려 하는 아람 나라 장군, 그것도 국방부 장관을 통해서 알려줬듯이 오늘 본문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아람 나라가 이스라엘을 치면 안 돼요. 공격하면 안 됩니다. 공격을 못 해요. 그런데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방 나라와 진배없어요. 똑같아요. 같은 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아만 장군의 이치와 똑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람 나라 장군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치게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희는 너희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민족이 아니다’라는 것, ‘하나님의 약속을 드러내는 용도로 너희가 이스라엘이 되었다’라는 그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아람 나라가 쳐들어오게 했는데, 이스라엘이 전쟁할 수 있는 무슨 재주가 있습니까? 아람이 강대국이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솔솔 그 수많은 아람 나라 군대를 어디로 유도했느냐 하면, 엘리사 있는 곳으로 유도했어요. 아람 나라가 공격하려고 할 때마다 미리 정보가 어떻게 샜는지 이스라엘이 미리 다 막아서니까 “그게 다 엘리사 때문입니다” 하고 신하들이 일러줘요.

마치 그전에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렸을 때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 온 소녀 하나가 “당신의 병은 이스라엘의 엘리사 선지자가 고칠 수 있습니다” 알려줘서 그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를 찾아왔던 것처럼, 북이스라엘이 진즉 엘리야의 가치, 엘리사의 가치를 알아서 찾아와야 해요.

북이스라엘이 자기 나라 선지자의 가치를 몰라주니 이방 나라까지 동원해서 엘리사의 가치를 알게 하려는 겁니다. 엘리사의 가치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자기 일에 바빠서 하나님의 일은 안중에도 없잖아요. 그래서 그 아람 군대가 “엘리사부터 잡자. 그다음에 이스라엘을 치자”(왕하 6:12-14). 엘리사가 너무 똑똑하니까요. 참모도 그런 참모가 없잖아요.

지략이 있는 자를 먼저 제거하고 그다음에 넉넉하게 이스라엘을 치면 된다는 식으로 해서 엘리사가 있는 곳으로 쳐들어왔는데 여기서 엘리사의 사환이 놀라버렸지요.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왕하 6:15).

“우리는 이제 죽었습니다.” 한 거지요. 그런데 엘리사가 사환의 눈을 뜨게 했잖아요.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사환이 눈을 뜨니까 엘리사 편에 있는 하늘 천사의 군대가 아람 군대의 숫자보다 더 많았던 겁니다. 그래서 사환은 ‘이제는 우리가 이겼구나.’ 이렇게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이기고, 지고’가 문제가 아니고 엘리사 한 사람이 어떻게 아람의 군대를 다 포로로 잡는지 그 방법이 중요해요.

그 방법이 뭐냐? 그들이 왔을 때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 기도 내용이 신약에 있는 복음의 내용을 미리 앞당겨서 엘리사가 하는 전쟁의 본질로 들어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들의 눈을 어둡게 했습니다.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왕하 6:18).

잘 들어보세요. 눈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몸에 붙어 있는 거예요. 몸에 눈이 붙어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인간에게 이게 문제인 거예요. 창세기 3장 7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선악과를 따먹었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하나님이 만드신 정확한 그 인간에서 이제는 어긋났다. 하나님께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으로 전락했다. 그 특징이 뭐냐? 육신이 갖고 있는 눈이 밝아져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된 거예요. 자기 자신을 보게 된 겁니다.

이런 종족, 이런 종류의 인간은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을 구원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육신을 자기가 보고 있다는 것, 너무나 이것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거울 보면 다 보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일으킨 일이에요. 그 모든 일을 자기 쪽으로 의미 있게 연결시킬 자격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인간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알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이미 범죄했기 때문에 눈이 밝아졌어요. 눈이 밝아져서 시시콜콜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나는 세상의 모든 일을 자기와 영광과 관련시켜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것이 뭐냐? 고민, 걱정, 염려, 불안, 특히 공포심, 특히 공포심입니다. “아이고, 우짜노? 아이고, 어떻게 해?” 이렇게 된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같잖습니다, 같잖아요. “이것이 너 좋으라고 일으킨 일이 아니야. 네가 왜 호들갑이야? 이 모든 일어나는 일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그 아들과의 관계에서 아들이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들이 휘두르는 그 바람, 회오리바람, 그 일과 관련되어 있는 거”예요.

예수님에게만 의미 있는 일을 일으켰는데 인간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의미 있다’라고 생각 못 하고, 본인의 눈이 밝으니까 이런 사태나 사건에 대해서 자신의 실익, 이익, 손실 이런 것에 신경 써서 바들바들 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눈이 밝았다는 그 말이죠.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이겁니다. 아람 나라 군대가 엘리사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그들이 눈이 밝아서예요. 그들의 눈이 밝았기 때문에 엘리사가 기도해서 그 밝은 눈을 어둡게 하니까 그들은 엘리사의 포로가 되었어요. 엘리사의 포로가 되는 순간 그들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목숨을 건졌어요!

으레 전쟁하면 패배한 쪽은 모가지가 다 날아가게 돼 있잖아요. 그리고 현재 이스라엘의 피해는 전혀 없어요. 포로 교환도 안 돼요. 뭐 누가 잡혀갔어야 포로 교환이 되죠. 북이스라엘은 한 명도 안 잡혔어요. 아람 군대는 몽땅 다 잡혔습니다. 그런데 그 사로잡힌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 이스라엘 수도에 오니까 여호람 왕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들을 다 죽여버릴까요?”

“이스라엘 왕이 저희를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왕하 6:21).

왜? ‘우리 쪽에서 이번 전쟁에 승리했기 때문에 그 처분은 승리한 쪽에서 결정하면 되잖아요. 다 죽여버릴까요?’ 이렇게 엘리사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누가 누구 편입니까? 여호람 왕이 자기가 엘리사하고 한패라고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한패가 아닙니다. 이번 전쟁에 누가 패배했는가? 아람 나라가 패배했고요, 또 누가 패배했는가? 이스라엘이 패배했어요. 둘 다 패배했어요.

누구 앞에서? 엘리사 앞에서. 왜? 둘 다 눈이 밝았기 때문에. 눈이 밝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눅 6:22-23).

사람에게 눈이 있는데 그 눈은 사람 내부에 있는 마음이 바깥을 쳐다보는 창구, 창문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 이 말은 뭐냐?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가 아니고,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

이것을 번역하면 ‘보물이 네 안에 있는 마음을 새롭게 바꿔줄 때만 너는 구원받는 마음으로 교체돼 있다.’ 이런 뜻입니다. 마태복음 6장의 그 말씀 앞에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보물은 어디 있느냐 하면, 하늘에 있다는 거예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이 말은, 땅에는 보물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범죄 한 몸을 가지고 눈이 밝아서 어떤 보물을 찾느냐 하면, 눈이 밝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보물, 땅에 있는 보물을 찾다보니까 자기의 마음이 먼저 있고 그 마음이 좋아하는 대로 보물을 본인들이 결정하는 거예요. 이게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예요.

그 어려운 이야기를 다시 해볼게요. 인간의 속에는 마음이 있는데, ‘있다, 없다’를 뭐로 아느냐? 이 눈을 통해서 바깥의 어떤 것을 뽑아서 그것과 자기를 어떻게 연관시키는가가 자기 안에 있는 그 무엇, 마음이죠, 마음이 작용하고 있는 그러한 모습이라는 거예요.

더 쉽게 합시다. 값이 4천만 원인 전기 자동차에서 배터리값이 2천만 원이랍니다. 그런데 배터리는 차 외부에서 안 보여요. 안 보이는데 차가 움직입니다. 안 보이는데 차가 움직이는 거예요. 주께서는 그 배터리를 바꿔야 한다는 거예요. 배터리를 바꿔야 한다. 눈이 밝으니까 자꾸 기존에 있는 마음이 작동해서 이 눈에 보이는 것, 자기가 원하는 것…, 그러니까 이 몸 자체가 지금 사달 났잖아요.

눈이 안 밝아야 하는데 밝아버렸어요. 눈이 밝아버리니까 세상에 있는 여러 가지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전부 다 자기만의 영화를 찍어요. 자기가 주인공이 된 영화를 찍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왜 삽니까? 자기한테 집착하기 때문에 사는 거예요. 자기한테 집착한다는 말은, 자기의 고향 친구, 가족 등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에 집착하면서 그것이 나의 보물이고 잘될 것이라는 그 기대감이 이 세상 살아가는 하나의 에너지, 동력이 되는 겁니다. 눈에 보이니까.

그것 때문에 뭐가 안 보이느냐?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그것 때문에 안 보인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보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들이 ‘보인다’ 하는 그 눈을 어둡게 만들어 버려요. 어둡게 만들어 버리면, 뭐 보이는 게 없잖아요. 보이는 게 없으니까 자기의 욕망대로 골라, 골라, 골라잡을 게 없어요. 그냥 누가 인도하는 대로, 인도하는 데 이끌려 갈 뿐입니다.

이 모양새를 누가 집단적으로 보여주는가? 아람 군대가 보여주는 거예요. 이 아람 군대가 엘리사에게 패배해서 이끌리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이렇게 시키는 대로 이끌려서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야 될 그런 책무가 있는 자들이 원래 이스라엘이어야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나 아람이나 둘 다 눈이 밝아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듣다 보니까 그렇게 되는 거죠.

인간의 몸속에 있는 그 눈이 밝았다는 말은, 이제는 이 몸을 자기 몸이라고 간주하기 시작한 거예요. ‘나’가 생긴 겁니다. ‘자아’가 생긴 거예요. 자아가 생겨서 이제는 자기 몸을 굴리는데 자기만의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또는 내가 눈이 밝다는 것을 남한테 알리기 위해서 남을 찾아가요. 타인들을 찾아간다고요. 그게 자기가 상상하는 겁니다.

여러분, 욥기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마지막에 폭풍 속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서 욥에게 대화하는데 그 대화 내용이 뭐냐?

“욥아”
“예”
“저 들소에게 자아가 있는가?”
“없습니다.”
“해에게 자아가 있나?”
“없습니다.”
“황무지에 자아가 있나?”
“없습니다.”
“그러면 채소에 자아가 있나?”
“없습니다.”

욥기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식물이든 동물이든 간에 해와 달과 별까지 그 특징이 뭐가 없느냐? 자아가 없어요. 자아가 없는데 누가 기르시느냐? 친히 주께서 관리하시고 친히 주께서 길러주시는 거예요. 이게 이사야 1장 2-4절에도 나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자식을 누가 양육합니까? 부모가 양육하죠. 부모가 양육한다는 말이죠. ‘따라서 이스라엘아, 네가 자아가 있어야 돼, 없어야 돼?’ 그걸 묻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네가 독자적으로 눈이 밝을 게 있어야 돼, 없어야 돼?’를 묻는 거예요. 독자적으로 자기의 눈이 밝으면 안 돼요. 왜? 주께서 친히 양육하고 기르시면 기르신 그대로 있으면 되는 거예요.

내가 나를 기르고, 내가 나를 잘 판단해서 내 인생 산다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부하는 인간, 저주하는 인간상이에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라는 것. 그러면 참새는요? 들풀은요? 해와 달은요? 주께서 운행하잖아요. 인간은 왜 안 돼요? 안 되는 이유가 뭐냐?

인간은 악마의 포로가 되어서 악마의 자아가 인간의 자아로 들어왔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뭐든지 자기 쪽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형성하는 식으로 ‘나 눈 밝다. 나 눈 되게 밝거든!’ 이것을 자랑질한다고 신경 쓰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 자아들이 모인 것이 뭐냐? 이 현실 세계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걸 ‘상징계’라고 했는데 상징계란 말은 굉장히 어렵지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상징’이라는 말은 자연스럽지가 않다는 거예요. 인위적이라는 거예요. 뭐가 인위적인데? 이 세상에는 각자 각자 자기 의미가 있거든요. 그 의미를 유통하는 세계가 바로 상징계의 세계입니다. 의미가 있으면 안 되는데도 내가 있기 때문에, 나한테 의미가 있어야 되기 때문에 인간들 저희끼리 의미를 만들어낸 세계가 상징계라 하는 겁니다.

의미를 소통하는 세계, 그 의미는 언어를 통해서 유통되는 세계. 그 의미는 일방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그 세계는, 이 현실 사회는, 인간들의 세계는 그냥 허상입니다. 가짜입니다. 가짜 인간들이 의미를 억지로 만들어낸 세계, 이 세계가 오늘날 인간 사회, 인간 세상입니다. 특징은, 아무도 자기 외에는 나를 기르시는 분을 인정하지 않아요.

왜? 너도 나도 다 눈이 밝기 때문에, 눈이 밝아서 ‘내 인생은 내가 단도리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게 바로 범죄 한 이스라엘이고 이게 아람 군대였습니다. 엘리사는 주님의 신이, 영이 임한 사람이에요. 엘리사를 움직이는 것은 엘리사가 아닙니다. 엘리야를 움직이는 것은 엘리야가 아니에요.

엘리야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모세도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엘리야를 움직이고 모세를 움직인 것은 하늘에서 땅으로 오실 그분의 활동이었습니다, 그분의 활동이었어요. 엘리야나 엘리사는 하나님의 언약에 붙잡힌 바 되어서 언약을 드러내는 사람인데, 원래 이스라엘은 그래야만 했었어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 이런 것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람 나라예요.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을 지적하기 위해서 아람 나라를 집단으로 봉사를 만들었어요.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내가 어느 길로 가면 되고 어떻게 하면 된다.’ 이거였어요. 그런데 보이는 눈을 감기게 하니까 자기 안에 있는 배터리가 방전됐죠.

자기 안에 마음이 있으나 마나예요. 포로 잡힌 상태죠.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까 누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갈 뿐이에요. 이게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모습이어야 되고, 이렇게 살아야 해요.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가야지 독자적으로 자기가 눈이 밝아서 내가 내 인생 결정하는 것, 이것은 잘못입니다.

이유를 말씀드릴까요? 그 이유는 뭐냐? 해와 달의 움직임, 들풀 그리고 참새 짹짹거리는 것, 이 모든 것은 나, 눈이 밝은 나를 위해 일어난 일이 아니고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나하고 아무 상관 없어요, 상관없다고요.

예를 들까요? 어제 삼성하고 LG하고 경기하는데 11대 1로 이겼어요, 삼성이. 그게 누구를 위한 일입니까? 삼성 팬을 위해서 일어난 일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일으킨 일이에요, 주님께서. 오늘은 초반에 2대 빵으로 지고 있었어요. 그것은 누가 일으킨 일입니까? 주께서 일으킨 일이에요, 주께서! UFO가 나무호를, 우리나라 선박을 공격한 게 아니에요. 주께서 공격케 하신 겁니다.

철저하게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식으로서 양육하는 그 관계에, 마귀로부터 끼어들도록 자꾸 독촉받지 마세요. 그래서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본다는 게 문제예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성도에게, 여러분 성도에게 믿음은 묘기입니다. 성도에게 믿음은 묘기예요. 왜? 인간의 능력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니까요. 누가복음 5장 4절에도,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을 베드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는데, 주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물을 던지니까 고기가 안 잡힌 게 아니고, 잡혀도 너무 많이 잡혔어요.

그럴 때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나올 수 없는 묘기가 발휘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이게, 이게 묘기 아닙니까? 이게 믿음이잖아요. 진짜 믿음이잖아요. 인간에게서, 눈 밝은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고백이 나와버린 거예요.

‘나는 죄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여, 나는 눈이 어두운 인간이었습니다. 눈이 어두운 인간이면서도 나는 눈이 밝다고 마귀한테 속아서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는데 주여, 이런 죄인은 주께서 상대 안 해줘도 괜찮습니다. 나를 떠나소서.” 베드로는 자기의 주제 파악을 한 거예요. 눈이 밝다는 것이 악마의 포로 된 상태라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는데, 이 사울이 자기 딴에는 하나님께 열심을 다 한다고 예수 믿는 성도를 그렇게 많이 핍박했어요. 그래서 기세가 등등해서 다메섹에도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부터 그들을 체포하러 가는데, 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울에게 찾아옵니다.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4-5) 하시면서 나중에 대화 끝나고 난 뒤에 7절부터 보면,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행 9:7-8).

여기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에게 경호원들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함부로 체포하다가 공격당하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같이 가던 사람들은 놀랍게도 사울에게 나타난 예수님을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 말은, 그들은 여전히 눈이 밝았어요. 눈이 밝다는 것은, 모든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자아 중심으로 의미를 찾는 식으로 보니까 그냥 그대로 뭔가 소리는 들렸는데 예수님이 안 보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본 사람은 누구냐?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사람은 누구냐? 거기 딱 한 사람, 사울만이 그 소리를 들었는데 그 예수님 음성을 들은 사울은 어떻게 됐는가? 눈이 갔어요. 눈이 감겼습니다. 그러면 구원은 뭐냐? 내가 기존에 알던 이 배터리가 교체돼야 하는 거예요.

내가 밝히 알던 내 인생 이것은 가짜 의미, 가짜 인생, 가짜 구원, 가짜 천국, 모조리 내가 눈이 밝아서, 내가 판단한다는 이유때문에 전부 다 악마한테 속아서, 악마한테 포로가 되는 엉터리의 결론들을 내리면서 자기 인생에 매진했던 겁니다. 똑똑하기는 되게 똑똑해요. 수학 시험 치면 100점 맞아요. 국어는 별로지만.

백 점 맞고 똑똑은 한데 눈이, 자기 눈이 감겨야 하는데 똑똑한 그것이 바로 주님을 못 보고 있는 거예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그거 묘기 아닙니까? 세상에 그런 묘기가 어디 있어요?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믿습니다!’가 됩니까? 그런데 주께서는 그런 사람만 천국 간다는 거예요.

이것은 모험도 보통 모험이 아니에요. 내기해도 보통의 내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래서 그 사울의 눈이 감겼죠. 눈이 감기니까 어떻게 되느냐? 눈이 밝을 때 자기가 했던 모든 그 의미 있는 것들이 이제는 전부 다 중지가 되겠죠. 안 보이니까 중지가 되는데 그것을 사전에 주님께서 계시로 알려줬어요. 다메섹에 들어가서 사흘 동안 아무것도 못 보고 있는데, 그때 주께서 미리 손을 써놨습니다.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행 9:10). ‘…이러이러한 사람이 눈이 장님이 되어서 너한테 찾아올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냐? 그동안 말씀도 모르고 율법도 모르고 여호와도 모르는, 그야말로 마귀의 종이 되어서 나 똑똑하다, 하는 그런 식으로 살아갔던 그 모든 이방인들에게 진짜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과 그리고 주님에 의해 주님의 모든 일을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그들의 사도가 될 사람이 찾아갈 테니까 네가 안수해라.’

그래서 아나니아가 안수했습니다. 안수하니까 사울에게서 비늘이 떨어지면서 눈이 밝어졌어요.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 9:15-18).

눈이 밝았습니다. 눈이 밝고 난 뒤에 비로소 인간이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보이지 않는 분이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열심히 다 일으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끝으로 이 점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전쟁이죠, 전쟁. 전쟁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하기 싫어요. 그저 주변 나라와 좋게 좋게 좋게, 그냥 좋게 가고 싶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원래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실현시킬 책임자들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방 민족과 끊임없이 전쟁해야 하는데 그들은 좋게 좋게 가려고 한 거예요. 전쟁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쟁해야 할 그 본래의 책임을 수행하게 합니다. 신약 요한복음 16장 33절에 보면, 바로 이스라엘에 있던 그 전쟁의 원칙을 ‘예수님의 제자와 교회와 새로운 이스라엘’을 통해서 완성시킵니다. 그 대목을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게 뭐냐 하면, 이 세상 모든 걸 마감했다는 거예요. 전쟁의 모든 걸 마감을 해놓으니까, 신약에서는 모든 끝 그 너머에 새로운 주님의 시선과 안목이 있고, 그 안목과 시선이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제자들에게 할당이 되고 분배가 돼 버리면, 예수님과 똑같은 안목을 가질 때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안목, 예수님의 안목은 어떠냐? 모든 것을, 모든 일을 주께서 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아는 안목, 시선. 그러니까 나한테 일어나는 일은, ‘벌써 주께서 다 끝냈다, 주께서 홀로 전쟁에서 승리했다. 담대하라! 승리했다. 너는 평안하라! 이제는 걱정 없다. 감사하라’라는 그 안목으로 현재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그걸 받아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끝은 뭐냐? 그냥 감사함이죠. 왜? 주께서 일을 벌여놓고, 주께서 일을 다 마감을 했으니까. 끝 그 너머 세계의 시선이, 주님의 마음이 새로운 배터리가 되어서 우리의 마음이 되고, 우리의 육체에 있는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볼 때에 주께서 마감한 일을 주님과 함께 볼 수 있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런 사람은 담대하죠.

노래 제목이 이런 게 있어요. <이 밤의 끝을 잡고>(솔리드, 1990) 라는 노래가 있어요. ‘고체’가 부른 노래죠. 솔리드라고. ‘이 밤의 끝을 잡았다’라는 말은, 여러 갈래가 있는데 그 끝을 잡았다. 그 끝을 잡고 그 끝 너머의 시선으로 주님과 함께 보면서 끝으로 오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주님과 더불어 같이 승리했다는 안목으로 볼 수 있을 때 그게 바로 생명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람 군대의 눈이 다 감겼잖아요. 그런데 엘리사가 그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다시 기도하니까 그들이 눈을 떴잖아요. 그런데 여호람 왕이 “저것들 다 죽여버릴까?” 할 때 엘리사가 하는 말이 “물 먹이고 밥 먹여서 고향으로 돌려보내세요.” 이랬어요.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왕하 6:22).

전쟁터에서 눈이 감겨서 죽었는데, 눈을 떠서 산 거예요. 우리의 눈 뜬 이것은 저주고, 주님에 의해서 눈이 감겼다가 주님의 눈을 같이 공유할 때 영생의 나라 고향에 도달한 겁니다. 그러니까 뭐가 필요한 거예요? 묘기가 필요하죠. 무슨 묘기입니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는 묘기, 세상에 돈 주고 살 수 없는 이 성령의 선물, ‘아무나’한테 주지 않지요? 각각, 앞앞에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주님의 마음과 안목을 선물로 받게 된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서 정말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주옵소서. 그동안 똑똑하고 잘났고 ‘모든 것이 내게 이익이 돼야 한다’는 의미로 살아왔던 우리들, 자기 의미에 집착했던 우리들, 그것이 악마의 포로 잡힌 죽은 상태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고 난 뒤의 시선과 안목으로 밝히 보면서 주님이 하신 모든 일에 고맙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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