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죽으신 분
2026년 5월 20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6:24-32
(6:24) 이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6:25)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
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6:26)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6:27) 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6:28)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6:29)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6:30)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저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6:31) 왕이 가로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하니라
(6:32) 그 때에 엘리사가 그 집에 앉았고 장로들이 저와 함께 앉았는데 왕이 자기 처소에서 사람을 보내었더니 그 사자가 이르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자식이 내 머리를 취하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너희는 보다가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 안에 들이지 말라 그 주인의 발소리가 그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하고
북이스라엘에 감히 이방나라가 쳐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을 믿지 않습니다. 그저 인간들의 근원적인 야망으로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궁지에 몰렸습니다. 사마리아성 안에 있는 자들이 완전 포위 당해 다 죽게 되었습니다. 먹을 게 떨어져서 죽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 누구를 죽이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정말 먹을 게 없어 죽게 된 겁니까 아니면 인간은 원래부터 죽게 되어 있는 겁니까? 인간이 죽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도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사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기이한 일입니다. 적들에게 포위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이 필히 죽어야 합니다.
왕이 있더라도 죽어가는 백성들을 살릴 능력이 없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서서히 다같이 죽어 가는 백성들 사이에서도 무슨 시비거리가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두 여인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두 여인이 약속을 했습니다. 서로에게 갓난 아이가 있으니 오늘은 나의 아이를 같이 나누어 먹고 내일이 되면 너의 아기를 나누어 먹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치의 아이는 둘이 먹고 치웠는데 문제는 약속된 날에 상대방의 여인이 자신이 아이를 먹잇감으로 못내어 놓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상도덕을 위반되는 겁니다. 계약 위반입니다. 마침 왕이 그곳을 지나갈 때에, 이 문제를 해결해서 아직 살아있는 상대의 아기를 잡아먹도록 요청을 하게 됩니다.
왕은 누가 옳고 그른가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참혹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분노를 폭발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있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자기 백성이 이런 참상을 겪도록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편에 서 있다고 간주되는 엘리사 선지자를 죽여버리기로 합니다.
백성이 당한 고통만큼 백성을 대표해서 왕이 선지자에게 복수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엘리사 선지자는 여호람에 대해서 ‘살인자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즉 여호람 왕은 아합왕의 손자입니다. 아합왕은 자기 집 옆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나봇을 죽인 자입니다.
아합왕이나 여호람이 몰랐던 것은 현실 세계란 선지자를 통해서 주어지는 예언에 의해서 구성되고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여호람이나 아합왕은 예언을 무시하고 이방나라와 다를바 없이 힘에 의한 현실을 꾸려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언이 빠진 현실 이해는, 인간의 존재 이유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점을 바로 이 두 여인이 보여줍니다. 양식이 떨어져 살 수 없다면 그냥 죽으면 될터인데 기어이 자신들이 살아남겠다고 인육을 양식으로 삼겠다고 주저없이 결행했다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생존 본능을 결코 인간이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저 살아남으면 그만이라는 의식은 인간을 지배하는 최우선 관심사입니다.
자연적으로 언약이니 예언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왕이 나서서 국가정책상 우상을 섬겨도 백성들은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현실을 지배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방나라 아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굶어죽게 했습니다. 예상대로 이스라엘 왕은 모든 탓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면서 선지자마저 죽일려고 사자를 보내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 왕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 겁니까? 예언이 없는 상태는 죽음보다 더 심한 저주 상태로 들이닥칩니다. 하지만 인간 본성을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의미도 가치도 진리가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밥먹고 살아남는 것이 전부입니다. 자연적으로 예언은 천대받지요.
예언은 예언대로 살리면서 성취되는 현실은 이스라엘 왕의 몫입니다. 이 역할을 완수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즉 떡 먹을 생각 말고 말씀부터 먹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오셔도 사람들은 다른 의미와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6-27)
썩는 양식이란 현실 자체의 의미와 가치를 알지 못하고 그저 내 몸 하나만 생존하면 그만이다는 식으로 살면서 먹는 양식입니다. 따라서 현실 자체를 삼켜야 합니다. 방법은 말씀을 먹는 겁니다. 현실은 바로 그 말씀이 구현되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의 완성은 인간의 무의미한 생존의지로 늘 실패합니다.
그래서 왕이 되시는 주님께서 미리 죽으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위하여 죽으신 겁니다. 구원받을 양은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새로 생겨나는 겁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완성을 자기 양들에게 먹이십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즉 희생의 잔을 마신 주님께서는 성령에 의해서 그 저주의 잔의 효과를 제공된 자들이 바로 예수님을 유일한 목자로 알아먹는 양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과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데서 비로소 존재의 의미가 가치가 발생된 겁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희생만이 우리 안에 자리잡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강-열왕기하 6장 24-31절(먼저 죽으신 분) 26052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6장 24절에서 31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6:24-31
“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 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저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왕이 가로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찌로다 하니라.”
아람이 이스라엘과 전쟁할 때 항복을 강요하기 위해서 많은 군대를 동원해 사마리아 성을 포위했습니다. 그러면 보급로가 다 끊어져서 성안에 갇힌 그 백성들 자체적으로는 먹을 것을 조달할 수 없겠죠. 여기서 전시 경제의 행정이 가동됩니다. 물품은 제한되어 있는데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가게 될 겁니다. 돈 가진 자들은 그나마도 버틸 때까지 버틸 수 있겠죠. 보석이나 금붙이 팔아서 ‘일단 살고 보자’ 하고 양식을 구매했을 것이지만, 없이 사는 일반 사람은 장기간 포위된 입장에서 먹을 것이 바닥났습니다.
그런데 마침 거기에 여호람 왕이 지나갔어요. 지도자가 지나가니까 한 여인이 도와달라고 했어요. 여호람 왕이 스스로 생각했죠. ‘양식이 떨어져서 백성들이 진짜 굶어 죽는 일이 일어나는구나.’ 그렇게 미리 생각하면서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왕으로서 내가 도와줄 게 없습니다. 지금의 이 상황이 하나님마저 도와주지 않는 상황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 북이스라엘에서 손을 뗐습니다. 이 동네에 하나님의 뜻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 도와주는데 왕인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겠습니까?’ 그렇게 백성을 달래려고 한 거예요.
“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왕하 6:27).
그 여인이 도와달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어요. 지금의 사정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고, 개인적인 문제, 소위 경제 정의를 실현해 달라는 거죠. 상거래 질서를 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겁니다. 양식이 없으니까, 살아야 하니까 가난한 이웃집끼리 서로 ‘애 먹자’ 이렇게 합의를 봤어요. 애는 또 낳으면 되니까.
어떻게 계약했느냐 하면, “일단 오늘은 내 애부터 나누어 먹자. 그리고 내일이 되면 네 애를 오늘처럼 나눠 먹자. 오케이?”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약속대로 오늘은 내 아들을 삶아 먹었습니다. 그다음 날 딱 되니까 상대방 엄마가 마음이 싹 바뀌었어요. “오늘은 네 애 삶아 먹는 날이다.” 이웃집 여자가 하는 말이 “죽어도 내 아이는 못 내놓겠다.” 내 배 째라, 이렇게 나온 거예요.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왕하 6:28-29).
이것은 뭐냐 하면, 상도덕에 어긋나죠. 거래 질서가 문란해졌어요. 왕이 그 말을 듣고 이런 처참한 참극이 발생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것이 31절에 나옵니다. “왕이 가로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찌로다 하니라.”
이런 일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바로 하나님인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까 죽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에 대해서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백성들이 이판사판인데 나도 이판사판이다. 내가 선지자 죽여버린다. 이런 심각한 사태 앞에서는 내 결정이 인간으로서 당연하다.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런 소리는 이런 지경에서는 나올 수 없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 차원에서, 하나님께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선지자의 목을 내가 베겠다’라고 한 겁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가 여호람 왕의 그 마음 자세에 대해서 충분하게 이해되고, 그리고 본문의 두 여인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어요. 자기 아들 삶아 먹을 때 ‘내일도 또 고기를 먹겠구나’ 이런 마음으로 즐겁게 먹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오늘 내 아이 삶아 먹을 때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내일도 역시 또 버텨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그 여인의 심정도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겠죠.
그런데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 엘리사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열왕기하 6장 32절에, “그 때에 엘리사가 그 집에 앉았고 장로들이 저와 함께 앉았는데 왕이 자기 처소에서 사람을 보내었더니 그 사자가 이르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자식이 내 머리를 취하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너희는 보다가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 안에 들이지 말라 그 주인의 발소리가 그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살인한 자의 자식이 내 머리를 취하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라고 되어 있어요. 여호람 왕에 대해서 ‘살인한 자의 자식’이라고 했어요. 여기서 ‘살인한 자’는 누구냐? 그 족보에 있는 왕의 할아버지가 아합왕이에요. 아합왕은 자기 욕심 채우기 위해서 왕궁 옆에 있는 포도원 주인을 그냥 죽여 버렸어요(왕상 21장). 순전히 욕심 채우기 위해서.
그 부인 마누라가 그렇게 시켰죠. ‘왕 같으면 그 정도는 취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왕은 그런 것은 문제도 아니야.’ 이런 식으로 해서 포도원을 강제로 취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살인한 자죠. 그 살인한 자의 DNA, 그 피가 전해진 아들이 아하시야인데 열왕기하 1장에 보면 병들어서 일찍 죽어요. 그다음 왕이 여호람입니다. 여호람, 요람 같은 왕이지요.
아합과 아하시야와 여호람의 특징이 있어요. 이게 중요한데 그 특징이 뭐냐? 여기에 선지자의 예언이 투입됩니다. 현실은 닥쳐보면 아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예언이 현실을 구성해 나갑니다. 예언에 따라서 족보가 주어지는 거예요. 그 예언, 하나님의 말씀, ‘너는 저주받아라’라는 예언이 떨어졌으면 그 핏줄은 그 예언에 따라 적용을 받는 족보가 형성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의 밑밥이 깔리고 그 위에 현실이 예언대로 진척되는 거예요. 이게 엘리사의 견해예요.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해요. 가뭄이 들었잖아요. 가뭄이 들고, 또 성까지 포위됐다는 말이지요. 가뭄이라는 것은 바짝 메말랐다는 뜻이거든요. 오늘 본문을 보면서, 현장에 있다면 ‘그래. 그럴 수 있어. 자식이 귀하지만 일단 어른부터 먹고 살아야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예언의 입장에서는요, 양식이 없잖아요, 양식이 없으면 양식 없는 대로 자기 갓난애 잡지 말고 그냥 굶어 죽어야 해요. 굶어 죽으면 된다고요. 문제 굉장히 간단하죠. 지금 양식이 어느 정도는 없느냐?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왕하 6:25).
나귀 머리 하나가 엄청난 비용이고, ‘합분태’라는 것은 비둘기 똥이거든요. 별로 영양가도 없어요. 영양가도 하나도 없는 그런 것도 상품으로 팔릴 정도 같으면 소위 없는 사람이 양식 없어 먼저 죽고, 그다음에 그런 것도 다 메말라 버리면 가진 자도 죽고, 그러면 나라 전체가 다 멸망 당하고, 이게 엘리사의 예언에 합한 현실상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왕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 이 본문을 보는 우리조차도 어떤 의도가 있느냐 하면, ‘말씀이고 뭐고 간에 일단 살고 보자’라는 그 본능이 ‘하나님이 누구시고, 그 뜻이 어떻고’ 그것보다 앞서요. 하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누군지 그것보다도 ‘무조건 살고 보자. 가진 게 있든 없든 무조건 살고 보자.’ 그냥 ‘살고 보자’ 인데 특징이 뭐냐?
이유가 없어요. 산다는 데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 없이 그냥 본능으로 사는데 그 본능이 뭐냐? ‘무조건 살고 보자.’ 그러면 말씀은? 말씀은 몰라요. 살아남는 내가 진리예요. 내가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진리예요. 말씀이 어떻고…, 그것은 나중에 풍부하게 살 때나 취미로 ‘신경 한번 써볼까?’ 이러지, 말씀보다도 먼저 ‘무조건 나는 살아야겠다. 왜, 라고 묻지 말라. 사는데 무슨 이유가 있느냐?’ 그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하나님의 택하신 이스라엘과 전혀 상관없는 나라가 되죠. 그들이 믿던 여호와는 건성으로, 겉으로는 여호와인데 속에서 그들이 바알을 섬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들은 본능에 충실한 거예요. 무슨 본능? ‘나만 살면 되지’라는 본능. 그렇게 사는 게 우선적인 본능인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그 본능을 부추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대로, 말씀대로 일을 벌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떡 먹고 살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주께서 먹으라는 것은, 말씀을 먹으라는 거예요.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분명히 ‘만나’는 음식입니다. “그런데 너희 눈에는 음식으로 보이냐?” 음식 먹고 하루하루 연명해서 살라는 그 뜻이 아니고, 말씀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라고 하루치 양식으로서 만나를 매일 같이 준 거예요. 매일 같이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함께하는 생명의 유일한 민족이라는 거예요.
이방 민족이야 돈으로 살든지, 떡을 먹든지 그대로 놔두고, 너희들은 말씀이 늘 살아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엘리야, 엘리사에게 말씀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줄 때는 모든 말씀은 인간의 근본적인 본능, ‘죽으면 안 돼. 무조건이야, 이유도 없어. 무조건 나는 살아남아야 해. 죽는 것은 안 돼’라는 인간의 본능을 건드리면서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죽음, 우리의 죽음을 겨냥해서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을 볼 때 ‘사는 것은 기본이고, 그건 당연하고 살아 있는 내가 이왕이면 복 받고 살기 위해서 말씀을 보자.’ 이런 식이에요. 그건 아니에요!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기본이 아니고, ‘네가 떡을 먹고 살았다는 그 생각 자체를 제거하고 말씀이 말씀 되기 위해서,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그동안 살려왔다’라는 그것을 겨냥하면서 주께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예를 들어보면 되죠. 두 가지의 예를 들게 되면, 누가복음 12장 18-20절에 보면,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보세요. 얼마나 이게 본능적입니까? 어떤 본능? ‘사는 게 진리고 그게 최고지. 그게 내 목적 달성이다’라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에요.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이 예를 들면서 말씀으로 치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영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가게 되면 네가 창고 지었던 그 수고, 창고 안에 있던 막대한 곡식은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너 죽는 것 신경도 안 써요. “다른 사람이 곡식 다 들고 가. 그러면 네가 창고에 쌓아 놓은 곡식은 남 좋은 일 시킨 건데? 아직도 네가 누군지 모르겠는가? 아직도 네가 사는 이유 모르지? 다 빼앗기려고 사나? 그 사는 의미가 ‘남한테 다 빼앗기겠어.’ 그런 의미로 살아가는 거야?”
도대체 네가 왜 사느냐? 사는 이유가 뭐냐? 의미가 뭐냐? 인간은 몰라요. 그냥, 그냥, 그냥, ‘그냥 살고 싶다’예요. 요한복음 6장 26-27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여기에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합니다. ‘내가 너 모를 줄 알아? 너희 본능을 내가 모를 줄 알아?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그다음에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너희들이 나를 찾는데 너희들이 나한테 원하는 것과, 내가 너희한테 주고자 하는 것이 이게 안 맞잖아’라는 그런 뜻이에요. ‘너희에게 오병이어, 떡을 줄 때 너희를 더 살게 하려고 떡 준 줄 알아? 아니야, 아니야!’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왜 찾습니까? 예수님을 왜 찾죠?
우리가 밥 먹고 사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일이라는 그것을 한번 제껴봅시다. 그것을 지워봅시다. 그것을 제거해 봅시다. 내가 무조건 살아 남아야 한다는 그것을 나에게서 탈락시키고 빼봅시다. 제거해 봅시다. 그러면 그 빈 자리에 남아 있는 게 뭐죠? 5초 드립니다. 왜 살지요? 사는 의미는 뭡니까?
그것은 아까 후딱 이야기했어요. 학교 복도 있잖아요. 쭉 가다가 저 끝에서 꺾이는 게 있죠. 그러면 보이는 게 이쪽 복도만 보여요. 그런데 오른쪽으로 꺾여서 다른 길에는 뭐가 있는지는 안 보이죠. 인간이 사는 이유는, 살아 있는 내가 보는 그 끝 꺾인 쪽 보이지 않는 곳에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 죽음을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자기 택한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줘요. 먼저 주게 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참극,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 비참한 참극은 이런 이야기예요. ‘나중에 너희들이 가게 될 영원한 지옥은 너희들이 자식 잡아먹는 이런 것,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참극은 지옥 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게 무슨 대수냐? 더 엄청난 게 기다리고 있다. 너희 눈에는 안 보이지? 왜? 꺾였으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복도 많지요. 선지자가 존재하니까요. 선지자를 통해서 지옥의 참극을 그들이 살아 있으면서 생생하게 체험케 한 겁니다. 바로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를 포위해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게 하는데, 참 이것만 해도 부모로서는 할 도리가 아니지요. 자식 죽여서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닌데,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아줌마가 약속을 또 안 지키네요.
오늘 내 애를 함께 먹었으면 내일 네 애를 내놔야 하지 않습니까? 다음 날 되니까 갑자기 마음 싹 바뀌어가지고,
“죽어도 내 애는 못 내놓는다.”
“약속이 틀리잖아.”
“약속 틀려도 좋아.”
“너는 인간도 아니다.”
“나 원래 인간 아니야.”
“아니, 왜 자식을 못 내놓는데?”
“나도 몰라, 나도 몰라! 나는 이유도 몰라. 그저 내 자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그것뿐이야.”
“그러면 어제는, 어제는 내 애 왜 먹었는데?”
“그것은 내 애 아니고 네 애 거든.”
그때 마침 왕이 지나간 거예요. “왕이여. 너무 억울합니다.” 왕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도저히 인간이 말로서는 형언할 수 없는 참극에 대해서 ‘그 모든 책임은 엘리사가 믿는 하나님, 하나님이 책임져야 한다.’ 겉으로는 옷을 찢고, 베옷을 입었다고 하지만 실은 지금 반항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회개도 다 했는데 하나님이 먼저 건드렸잖아. 나 이제 더는 못 참는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예언대로, 예언대로, 우상을 섬길 때 나타나는 현상을 미리 앞당겨서 이스라엘 나라 역사에 남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스라엘 역사를 남긴 이 성경책이 오늘날 꾸준히 현실로 계속 형성되게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딱 하나죠. ‘왕이 뭘 해야 되는데? 이런 형국에서 왕이 뭘 해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미리 정답을 말씀드릴게요. 왕은 미리 죽으면 돼요. 미리, 미리 참극을 당하면 돼요. 왕이 미리 지옥을 당하면 되는 거예요. 인간 세상에 대해 다시 말씀드립니다. 오늘 여러 번 이야기 합니다. 인간 세상은 아무 이유도 없이요. 그리고 아무 의미도 없어요.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유와 의미는 말씀에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에 게만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어요. 말씀 없는, 언약이 없는, 약속이 없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이런 참극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냥 본인의 선택과 본인의 결정으로 매일매일 살아가거든요. ‘오늘 뭘 하지?’ 또 ‘오늘은 뭘 하지?’ 이렇게 살아가다가 이런 참극을 맞닥뜨린 거예요. 물론 지옥보다 더 심하지는 않지만 만만치 않은, 지옥 못지않은 이러한, 완전히 자기 자신을 파괴 시키는 일을 당했어요.
어제 뉴스에 이런 것이 있었어요. 이모가 조카를 고소했어요. 이모가 하는 말이 “너희 엄마 간병한다고 주식을 매도할 시점을 놓쳐서 제때 매도 못 해 손해가 났으니 네가 물어내라.” 아, 독하다 독해. 독하고 독해요. 저 시원한 응달에 따가운 햇살 피해서 차를 대놨는데 위에서 기왓장이 떨어져서 차 두 대가 박살 났어요. 우리 빌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물어내라!”
도대체 그런 사람한테 묻고 싶어요. 왜 사십니까? 왜 사십니까? 없어요. 그냥 내 거 지킨다고 사는 거예요. 왜 자기 것 지킵니까? 몰라요. “이것은 본능인데?” “왜 그런 본능을 갖게 되었습니까?” 몰라요. 의미 없어요. 어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인간도!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일을 발생시킨 것은, 엘리사가 그들 속에 있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개해서 알려주는 선지자의 존재 안에, 비로소 이런 참극이 일어난 이유와 의미가 그 안에 있어요. 그 이유는 1번, 2번 3번으로 나눠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현실 속에 살려고 하지 마라. 현실 속에 살려고 하지 마라. 왜? 현실을 꾸려나가겠다는 나의 선택과 결정이 현실을 꾸려나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두 번째 한다고 첫 번째 다 잊으면 안 돼요. 또 반복해 드립니다. 첫 번째, 현실 속에 살려고 하지 마라.
두 번째, 그러면 어떻게 사느냐? 현실을 삼켜라. 현실을 아예 먹어버려라. 현실 전체가 네 안에 들어오도록 해라. 어떻게? 말씀을 먹으면 되잖아요. 왜? 이스라엘에서 현실은 말씀에 입각해서 현실이 예언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선지자가 갖고 있던 의미고, 그 선지자의 의미가 확산되는 것이 진짜 이스라엘의 참모습이에요.
‘현실은 크다. 나는 그 모퉁이에 자리 하나 잡아서 내가 살아야지.’ 현실 자체가 말씀 위에 있는 한 그러한 삶은 주께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살아도 헛산 게 돼요. 통으로, 현실을 통으로 먹으면 돼요. 말씀을 먹으면 됩니다. 그게 두 번째입니다.
세 번째, 그 현실을 먹고 그 현실이 완료될 때, 현실에 있는 모든 말씀이 완료될 때 나타나는 그 효과, 현실조차도 능가하는 그 효과를 먹으세요. 첫 번째는, 현실 속에 살려고 하지 마라. 두 번째는, 아예 현실을 통째로 삼켜라. 삼키는 방법은, 말씀만 먹으면 현실이 다 들어온다. 세 번째, 삼켜서 그것을 또 실천에 옮긴다든지 그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 말씀이 스스로 완성된 그 효과와 효능을 마셔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먹어라’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어떻게 되느냐? 요한복음 6장 52-53절에 보면,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그러면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면 되겠네요. 마태복음 26장 26-28절에 보면,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먹고 마시는 거죠.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9)라고 했어요. 여기서 피, 그리고 찢겨진 살, 이것은 전제가 뭐냐 하면, 어떤 인간도 자기의 본능을 이겨서 말씀대로 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요. 죄를 사해준다는 말은 죄가 있어야 사할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할 일은 뭐냐? 이 현실 속에서 우리가 현실을 이기지도 못하고, 살기에 급급한 현실 속에서 내 월급이나 바라고, 내가 그냥 건강하기만 바라고, 편안하고 무탈하기만 바라는 그것이 본능이고, 거기에 아무 이유도 없고 무조건 무조건이야,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 언약도 없고, 말씀도 없고, 예언도 없고, ‘내 몸뚱아리 하나 챙기면 오케이다’라는 그것, 주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리고 이방 민족을 통해서 ‘그게 바로 죄’라는 거예요.
죄라는 것은 ‘죄를 이길 수 있다’가 아니라, ‘이길 수 없다’를 전제로 해서 그걸 죄인이라고 이야기해 줘요. 말씀 공부한다고 그게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요. 말씀을 공부한다는 것은, 전에는 현실 속에 있었는데 이제는 말씀 자체가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에, 앞으로 될 어떤 현실도 그것을 말씀으로 그냥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 안에 있잖아요. 먹었으니까. 그런데 먹기만 하면 뭐 합니까? 그 말씀이 완성이 돼야 하죠. 그 완성의 담당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우리의 왕으로 오셨어요. 자, 왕이 있다는 말은, 왕이 먼저 죽어서 그 죽음이 효과를 줄 때 비로소 그 왕의 백성들이 새롭게 생산된다는 거예요. 여호람, 이것은 살인자의 자식인데 우상이나 섬기고 자기 단도리, 자기 정당성밖에 모르니까 안 되죠. 이 왕은 죽을 생각을 안 해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방금 이야기한 취지의 말씀이 나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지도자가 나오고 목자라고 우기는 인간이 많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특징이 있어요. 그들의 특징은 뭐냐? 그들이 다 가짜인데 그 가짜의 이유가 뭐냐? 먼저 죽을 생각을 안 해요. 요한복음 10장에 나옵니다.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요 10:12-13).
참 이게 참 무서운 이야기죠. 무서운 이야기예요. 우리나라 나무호가 피격당했잖아요. 호르무즈 해협에서. 그때 우리 이재명 대통령께서 “나 간다. 말리지 마. 간다. 내가 먼저 죽을게. 호르무즈에 빠져 죽을게.” 이런 대통령 아닐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지도자, 생명을 주지 못하는 지도자는 사이비입니다, 사이비에요. 인간은 사이비를 대통령으로 뽑은 거예요. 기껏 뽑아봤자 뽑는 대통령, 왕은 전부 다 사이비입니다. 왜? 자기가 살고, 더 잘 살고자 하는 기대치에 의해서 뽑힌 지도자이기 때문에.
그러나 요한복음 10장 14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인데, 왜 선한 목자냐? 내가 양을 위해서 먼저 죽는 거예요.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여기서 먼저 죽는 게 중요해요. 먼저 죽는 이유는, 어떤 인간도 안 죽으려고 하기 때문에 먼저 죽으셔요.
먼저 죽는데, 죽기 전에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한테 기도합니다. 겟세마네 기도에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요 26:39).
하나님한테, “아버지, 제가 굳이 이 잔을 마셔야 되겠습니까?” 세 번 기도하죠. “할 수만 있거든 어지간하면 ‘그래, 안 마셔도 된다’ 하고 나를 지나쳐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했다고요. 그 아버지 뜻이 뭐냐 하면, 내가 잔을 마시는 게 아니고, “아버지여, 그 잔을 저에게 마시도록 해 주시옵소서.”
거기에 누가 관여하느냐 하면, 성령께서 관여해요. 성령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십자가에 죽도록 유도하시고 실행에 옮기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2장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누구든지 인자의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함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함을 얻지 못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위해서 죽으신 거예요. ‘예수님 좋아, 너무 좋아. 왜? 나를 위해 죽었으니까.’ 나를 위해 죽은 게 아니고 ‘말씀’이라는 공통 영역을 따로 만들어 놓고, ‘나’도 희생되어서 말씀 안에 있을 테니까 말씀을 먹은 ‘내 백성’도 이 잔, 이 ‘희생’이라는 자리에 같이 들어오는 조건하에 ‘너’가 속죄함을 받는 거예요.
이걸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데’ 그 뒤의 말이 놀랍습니다. ‘양도 이것을 안다’는 거예요.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양이 이걸 안다는 겁니다. 양은 이 세상에 없어요. 예수님 죽으실 때, 희생할 때 예수님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만 희생해요. 그런데 성령께서 누구한테 가느냐 하면, 장차 하나님의 천국 백성한테 성령이 가버리니까 그때 양이 처음 생기고 양은 비로소 ‘내가 속죄받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없는데 누가 나보다 먼저 희생했지? 어? 예수님이 먼저 했으니까 예수님이 선한 목자, 진짜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선한 목자구나.’
그분이 먼저 희생하셨고 그 희생이 종결된 희생이에요. 그래서 나의 어떤 가치와 의미를 다 제끼고, 오직 그 희생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사는 이유를 그 희생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 그게 바로 속죄의 효과를 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주님께서 희생할 때 그 쓴 잔 마신 자가 누굽니까? 베드로예요, 야고보예요, 요한이에요? 아무도 안 마셨어요. 쓴 잔을 예수님만이 마셨다는 것, 잡쉈다는 것, 그리고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 하는 그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고, 성령께서 희생자를 예수님으로 종결시켰어요. 더 이상 희생자가 없어요. 대속하시는 것은 예수님 주의 이름만 대속했지, 나머지는 없어요.
그다음에 성령을 보내서 ‘주께서 이미 다 이루었다’ 하는, 속죄가 이루어진 그 ‘희생’에 참여케 하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성령의 효과가 이제는 예수님뿐만 아니고 양이 될 사람, 양이 되어서 목자와 함께 영원한 천국에 갈 사람에게도 성령이 동일하게 효과가 오는데 그 효과의 원천이 뭐냐?
예수님께서 혼자서, 그 모든 속죄함의 희생 그 모든 것을 혼자서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기르시는 백성이고. 이 말씀에서 인간이 사는 이유에 대해서 본인이 결정하고 선택한다는 이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사도행전 10장 13절에 보면, 베드로가 나오는데요. 하늘로부터 주님께서 이렇게, “…소리가 나서 가로되 베드로야, 일어나라.” 일어나 보니까 보자기가 내려와요. “베드로야, 잡아먹어라.” 이렇게 하니까 베드로가 보자기 안에 뭔가 보니, 이것은 율법에 못 먹는 것만 딱 들어 있었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선택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 못 먹습니다” 하는 거예요. 말씀에 대한 판단을 본인이 하고 있는 거예요. “못 먹습니다.” “먹어라.” “못 먹습니다.” “먹어라.” 그다음에 그 그릇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행 10:11-15).
그러니까 평소에 예수 믿는다, 십자가 믿는다, 하면서도 계속해서 우리는 뭐냐? 내 선택과 내 결정을 자꾸 내가 해요. 왜냐하면 희생에 참여한 주님으로부터 의미와 내 생존의 이유가 나와야 하는데, 내가 ‘여기 있음’이 내 생존의 이유가 되고 의미가 돼버렸던 거예요. 그래서 맨날 뭐가 나오냐? 맨날 죄만 나오는 거예요.
그 죄를 죄라고 아는 것은 이미 예수의 피와 예수님의 살을 먹어서 영생을 주와 함께, 영역을 주와 함께 공유했기 때문에 ‘아, 주께서 희생한 그 죄, 지금도 나에게서,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이런 죄가 나온다’라는 것을 알 때, 여러분 얼마나 기쁘게요? 얼마나 기쁩니까! 비로소 우리는 존재 이유와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되었죠. 죄만 지을 수밖에 없으니까 ‘룰루랄라’고, 신바람 기쁘죠.
왜? 주님에게서 나오는 그 속죄의 효과로 내가 죄인임을, 죄인의 괴수임을 깨닫게 되었으니까 이것은 주님과 속죄 안에서 ‘공통의 영역’을 갖게 된 거예요. 끝으로, 진짜 끝입니다. 끝으로, 강남 강의에서 마지막에 했던 거, 로마서 8장, 장소를 잘 생각해요, 장소, 어느 ‘장소’인지?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속에 살면서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내가 태어났는지, 끝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아무 관심도 없이 오늘 또 밥 먹고 살아야 한다는 그거 하나. 주여, 이런 세상에 주께서 그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속죄의 사건을 남겨주시니 이제야 그 의미를 찾은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