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냐 말씀이냐
2026년 5월 6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6:14-19
(6: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6:15)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6: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6: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6:18)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6:19)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의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저희를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은 인간들 각자에 자리잡은 욕망들이 동일한 목적성을 보여주면서 세상을 인간 위주로 구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등장된 것이 바로 국가입니다. 에덴 동산에 살았던 인간이 이 세상에서 내려와서는 국가를 만들고 그 안에 자리잡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국가체계 안에서 다 집결해놓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허락 맡은 것은 근본된 토지입니다.(창 3:17) 그 토지 위에 인간의 노동이 주어집니다. 여기서 인간의 욕망과 야심은 정확하게 하나의 목표로 의견을 모으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대자연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노동의 대가를 국가 형태로 수립한 인간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질서는 공격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자연과 인공적인 시도는 어떤 식으로 마찰을 일으키는 것인지 절차를 통해서 보여주게 됩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없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순전히 아람나라와 북이스라엘 간의 전쟁으로 굳어집니다. 하지만 이 국가 대 국가의 전쟁 양상이 바뀌게 됩니다. 아람 나라가 한 개인을 향해 공격하는 전쟁으로 바뀝니다.
그것은 아람 나라가 북이스라엘을 치려는 전략이 사전에 다 들통났기 때문입니다. 아람 국가는 선지자는 기존의 국가, 즉 북이스라엘 국가에 예속된 자라고 이해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엘리사의 사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의 안목이란 그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질서에 속하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인간들은 인위적인 노동의 질서와 그 실적에서 살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군대의 힘이 말씀을 꺽고 없앨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들 아람 군대의 인식을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이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왕하 6:14-15)
맞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결코 국가의 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 있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힘을 벗어나는 것은 죽음 뿐입니다. 그래서 엘리사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온 수많은 적군을 보고 엘리사의 사환이 탄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을 겁니다.
이처럼 육에 갇혀 있는 그 어떤 인간도 영의 세계로 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누구나 느끼는 이러한 ‘인공적인 현실상’을 그대로 말씀의 현실상과 마주 대하게 하시는 이벤트를 준비하셨습니다. 탄식하고 절망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말씀의 사건 앞에서 그대로 드러내게 합니다.
이런 상황은 신약에 와서도 멈추지 않고 반복됩니다. 마태복음 21:28-31에 보면,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두 아들들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마음에 맞는 아들이냐고 말입니다. 그들은 아주 쉬운 문제인 양 여겨서 “둘째입니다”고 답변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뉘우치고’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뉘우치고’는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과 관련있는 내용입니다.
도저히 이 육의 세계, 국가 중심의 현실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서 제대로 뉘우친다는 것은 ‘오신 메시야’ 앞에는 더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의 목숨보다 말씀의 사람으로 전환되는 인식을 말합니다. 즉 ‘창녀와 죄인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것’이 자기 의미와 가치를 위해 평소에 그런 식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하는 삶입니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전부라고 여긴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에게 선지자는 눈을 열어 다른 세계를 보게 합니다. 자기 쪽에 엘리야 선지자의 세계가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이는 ‘과연 이 세상이 인간들의 세계가 전부이냐’는 식으로 의문을 품게 합니다.
그동안 인간의 행할 수 있는 것, 인간의 노고와 노동에 입각해서 국가를 건설하고 유지·지탱하는 것이 대대로 존재의 의미로 여겼는데 이것은 도리어 말씀의 질서를 도전하고 공격하는 태도인 겁니다. 국가는 자체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고 운용해 왔습니다. 이스라엘을 뒤쫓던 애굽의 군대가 그러합니다.
뿐만아니라 광야를 통과할 때에 등장했던 아말렉 군대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원칙은 이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이 원칙에 준해서 하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서 모세로 하여금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내내 지팡이 내려오지 않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출 17:10-12)
산 밑에서 아말렉 군대를 맞이해서 싸우는 여호수아의 군대는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욕망을 다스릴 수 있다고 자부하지만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국가는 인간들의 욕망이 집대성된 짐승의 신체입니다. 스스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구성한 그 끝은 도리어 인간을 그동안 욕망으로 이끌은 악마의 세계입니다.
살려고 한 욕망이 도리어 인간 자신을 죽게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유일하게 이 육의 세계를 뚫고 천국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 십자가 사건의 영을 받은 자만이 자신이 여태껏 불신자였음을 아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보이는 것은 말씀의 나타남에 해당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강-열왕기하 6장 14-19절(국가냐 말씀이냐) 26050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6장 14절에서 19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6:14-19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의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저희를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아람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전쟁 합니다. 아람 나라가 전쟁할 때 그 전쟁의 목표가 처음에는 북이스라엘을 치는 겁니다. 엘리사를 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그 많은 군대가 한 사람을 쳐서 뭐 하겠어요? 나라 전체를 빼앗아야 하니까요. 그들이 회의해서 ‘어느 때에 쳐들어가서 어떤 식으로 북이스라엘을 치자’ 이렇게 그들이 의논했어요. 그들이 은밀하게 자기 지휘관끼리만 작전 회의를 했으니까 그 내용은 아무도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엘리사가 어떻게 알았는지 그것을 알아채서 북이스라엘 여호람 왕에게 “이번에는 아람 나라가 이쪽으로 쳐들어옵니다.” 그래서 방비를 해버리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 10절에 나옵니다. 열왕기하 6장 10절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자기에게 고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아람이 회의해서 “이번에는 이쪽으로 쳐들어가자” 하면 엘리사가 그것을 미리 캐치해서 이스라엘 왕에게 “이번에는 이쪽으로 오니까 방비하세요” 이렇게 하니까 11절에,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번뇌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의 내응이 된 것을 내게 고하지 아니하느냐.”
아람의 왕이 하는 말이 “우리 가운데 북이스라엘하고 내통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은밀하게 회의한 내용을 어떻게 저들이 다 알고 있느냐?” 그러니까 12절에, “그 신복 중에 하나가 가로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
북한의 김정은이가 부부간에 침실에서 이야기한 것을 우리나라의 어떤 목사님이 다 알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아람 나라 입장에서는 국가 대 국가의 싸움은 나중 문제고, 당장 엘리야 한 사람을 잡아서 처단해야 이스라엘 나라를 공격하는 작업이 수월하게 진행되겠다고 생각해서,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가지고 엘리사가 있는 그 성을 포위한 거예요.
그러니까 전쟁이 아람 나라와 북이스라엘, 나라 대 나라의 전쟁을 시작했는데 이제는 나라 대 나라의 전쟁이 아니고 한 나라가 한 사람, 한 사람 엘리사 선지자를 공격하는 전쟁으로 전환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전쟁의 양상이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의 특별한 인간을 향하여 전쟁을 벌이게 하는 이유,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은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이 국가 안에 소속돼 있어요. 모든 인간은 각자 자기 국가가 있고 자기 민족이 있는데, 자기가 있는 민족과 국가에서 본인이 벗어나지를 못해요. 소속돼 있습니다. 개인이 ‘혼자서 산다’ 하지만 국가의 힘은 더 세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을 국가가 그렇게 용납하거나 허락하지를 않아요.
따라서 ‘국가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간이 어떻게 하늘나라, 천국을 가겠느냐?’ 하는 이 문제와 관련돼 있습니다. ‘육에 갇힌 인간이 어떻게 영의 세계로의 진입이 성사되겠느냐?’ 신약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죠.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죠.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지금 그 문제가 아니예요. ‘내 남은 생애가 얼마나 편안하겠느냐?’ 지금 그 문제가 아닙니다.
‘빠져나올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무사히 빠져나가서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인간이 살 수 없는, 갈 수 없는 그 나라에 어떤 식으로 갈 수 있느냐?’ 하는 그 해답을 제시해야 하는 이런 사태가 엘리사 시대에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면 되느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이것은 안 됩니다. 소용이 없어요. 어떻게 행동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어떤 식으로 선지자가 가는 천국, 엘리야가 가는 천국, 엘리사가 가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 세상 나라가 먼저 움직여서 어디를 건드리느냐? 하늘나라, 천국의 사람이 미리 이 지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곳을 향하여 세상의 힘이 공격하는 식으로 상황이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자신이 어디에 해당하느냐?’를 일단 정해봅시다. 엘리사 옆에 있던 사환이 저와 여러분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엘리사 옆에 있던 사환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를 뭐로 보느냐 하면, 그 시대의 예수님이라고 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일반 사람들은 여전히 누구 편이었느냐 하면, 이 세상 편에 서서 살았어요.
국가의 단단한 테두리, 국가의 권력에 갇혀 있음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국가가 누구를 공격하느냐 하면, 한 분, 한 분 예수님을 공격하는 거예요. 마치 아람 나라가 엘리사를 공격하듯이 그 당시 유대 국가 전체가 한마음이 되고 한통속이 되어서 한 분 예수님을 공격하고, 한 분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재판했고, 사형시킬 때 그때 그 사건을 근거로 해서 주어지는 새로운 힘이 나와요.
바로 십자가의 영이 나옵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 십자가의 영이 자기 택한 백성 제자들에게 흘러들어오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제자들 입장에서는 자기가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가는데 아무도 뭘 한 게 없어요. 그냥 오순절 날 성령이 왔을 뿐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4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가만히 있어라. 여호와께서 싸우신다.’ 시편 91편 11절에 보면,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출애굽기 14장 14절에서 말씀대로 홍해도 그렇게 갈라졌지만, 출애굽기 17장에 있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너희는 그야말로 가만히 있어라. 내가 너희를 건지겠다’라는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느냐? 모세 한 사람, 이것도 역시 선지자 모세, 모세 한 사람인데 ‘모세 쪽이냐, 아멜렉 전체의 군사력이냐?’ 산 밑에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 양쪽을 대조하면서 ‘어느 쪽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가?’를 보게 하셨어요.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서 지팡이를 들어 올리는 것을 백성들이 다 봤어요. 모세가 지팡이를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을 봤다는 말이죠. 칼 들고 아말렉과 싸우는 여호수아 장군은 그냥 폼으로 나간 거예요. 아무런 히마리가 없어요. 모세가 지팡이를 드니까 아말렉 군대가 이상하게 여호수아 장군한테 밀리는 거예요. 여호수아 장군이 솜씨가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 ‘아이고, 팔 아프다. 팔이 왜 이렇게 결려?’ 이래서 잠시 모세가 들었던 지팡이가 내려가니까 아말렉 군사의 사기가 올라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여호수아 군대가 막 밀리는 거예요. 산꼭대기에 같이 올라갔던 아론과 훌 그 두 사람이 그걸 보면서 돌을 가져다 놓고 모세의 손을 붙들어서 지팡이를 든 모세의 팔이 안 내려오도록 해서 전쟁을 했어요.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출 17:12).
이게 무슨 전쟁입니까? 뭐 이런 전쟁이 다 있어요? 원격 전쟁이에요? 산 밑에서 눈에 보이는 인간들이 칼 들고 설치는 것, 여호수아 장군의 이스라엘과 아말렉이라는 두 전쟁 당사자, 그게 인간들이 흔히 아는 국가 대 국가의 전쟁, 민족 대 민족의 전쟁, 이게 전쟁의 양상이잖아요. 그게 전부잖아요. 그걸 보아 왔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 군사들이 뒤따라오는 그것을 봤다는 말이죠.
군대가 뭡니까? 뭘 하기 위한 군대예요? 전쟁하잖아요.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군대를 양성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했을 경우에는 그것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거예요. 이 군대라는 것 자체, 군대라는 것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말은 뭐냐? 인간이 이 국가라는 것, 그 현실인 육의 나라에서 벗어나서 천국 가는 것, 영의 나라에 가는 이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보여주는 식으로 자기 백성을 천국으로 이끄십니다. 나는 내 구원에 무용지물이 되는 거예요.
노래도 그런 것이 있잖아요.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 줄게
현실일까 꿈일까 사실일까 아닐까
헷갈리고 서 있지마 우~
남진의 <둥지>(2005)라는 노래죠. “가만히 있어” 얼마나 복음적이에요. 그분이 또 장로님 아닙니까? 이 노래 가사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가만히 있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가만히 있어야 해’라는 식으로 우리 자신이 가만히 있는 행동을 하면 안 돼요.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있는 그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위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 육의 세상에서 벗어나서 천국 갈 수 없는 존재예요. 내가 이 육의 세상에서 벗어나서 천국 가고 싶어도 못 간다는 것을 그냥 보여주는 것, 그 보여주는 걸 통해서 우리는 뭐냐, 그다음부터 하나님이 준비한 멘트를 받아요.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아까 제가 우리를 어디에다가 위치하라 했습니까? 엘리사의 사환에 위치하라 했죠. 자, 드디어 아람 나라의 그 무수한 군대가 엘리사 한 사람 잡겠다고 쳐들어왔을 때 옆에 있던 사환이 그걸 봤어요. 열왕기하 6장 15절에,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아아~!’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사환의 역할이 있어요. ‘평소에 우리가 어떻게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어떻게 잠자리에 드느냐? 하루 24시간 동안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고 보내느냐?’를 대변해 주고 있는 사람이 사환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고,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이고 그걸로 끝! 그걸로 끝이에요. 여기서 한발자국도 우리의 시선은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면서 눈을 떴다, 할 때는 뭔가 보이잖아요. 뭔가 보이는 것이 우리에게는 유일하게 현실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 현실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이 육의 세계에서 벗어나 천국 갈 수 없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는 말이에요. 이렇게 볼 때 엘리사가 있는 성에 쳐들어온 아람 군대의 그 사고방식과 응시, 시선, 그 시선과 엘리사 옆에 있는 사환의 시선이 동일해요. 똑같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그쪽 열방, 그리고 엘리사 옆에 있는, 말만 이스라엘인 사환의 사고방식이 동일하고 일치합니다. 이스라엘이 ‘우리는 이방 나라와 차이 난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다’라는 모든 말은 전부 다 빈말이고, 해도 소용없는 거예요. ‘우리가 불신앙이다’라는 것, ‘나는 불신앙이다, 불신앙이다’라는 말 자체도 다 헛말이에요.
우리는 불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냥 살아요. ‘우리가 불신앙이다’라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신앙이 있는 분이 ‘이 세상 전부가 왜 불신앙이냐?’ 하는 것, 곧 우리를 포함해서, 너를 포함해서 ‘왜 너희들은, 이 세상은 불신앙적이냐?’를 알려주는 사태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때나 ‘우리가, 내가 불신앙이구나!’ 하고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불신앙이다. 나는 믿음이 없다’라고 알면, 이미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우리는 불신앙이다’라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하고 똑같아요. 신앙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면서 불신앙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주께서 그런 사태가 일어나게 해줘요.
신약 마태복음 21장 28-3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라고 시작하는데 예수님께서 “너희 생각은 어떠하뇨?” 했으니까 요 말씀대로 제가 여러분한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라고 여러분께 돌려드릴게요.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묻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이렇게 물었어요. 사람들이 뭘 아는 척하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한 것은 둘째입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의 질문에 정답 맞췄다고 사람들이 흐뭇해했을 거예요. 그거 정답 아니에요. “첫째입니다!” 그것도 정답 아니에요. 주님께서 “둘 중에 누가 아버지 뜻을 알았느냐?” 하면 ‘둘 중에서’니까 둘 중 하나는 정답인 걸로 알고 ‘첫째는 아니니까 둘째일 것이다. 둘째가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대로 갔으니까 이것은 둘째가 맞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준비한 정답은 따로 있어요.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 바리새인들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의 정답은 뭐냐? ‘네가 자진해서 욕 얻어먹는 죄인이 될 용기가 있느냐?’를 물어요. 이게 정답이에요. “예, 저 창녀 되겠습니다. 예, 세상에서 욕 얻어먹는 사람 되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천국 가는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는데 둘째 아들이 안 가겠다고 한 그 이유가 뭐냐? 이유는 간단해요. 가기 싫으니까. 왜 가기 싫은데? 가면 일하니까. 일하면 왜 싫은데? 일하면 땀 흐르니까, 땀 흐르면 귀찮으니까, 내 온몸이 아프니까 그게 싫은 거예요. 그게 인간의 출발점이에요. 모든 인간은 일치되게, 동일하게 둘째 아들 식대로 현재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육적 인간이, 눈에 보이는 대로 사는 인간이, 자기 편한 대로만 생각하는 인간이 하늘나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교회 나와도 마찬가지예요. 우리의 본성은 안 바뀝니다.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상한 것은, 둘째 아들이 안 가겠다고 자기의 본성대로 이야기해 놓고 도대체 왜, 무슨 마음이 들어서 뉘우치고 “가겠나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뉘우쳤느냐?
첫째 아들은 맏이니까 ‘아버지 뜻대로 해야지’ 하다가 “일 너무 빡세게 시키니 가기 싫습니다.” 둘째 아들이나 첫째 아들이나 자식은 둘 다 똑같아요. 둘 다 누구만 생각한다? 자기 편한 것, 땀 안 흘리고 사는 것, 자기 수월하게 인생 사는 것, 자기가 행복하게 사는 것, 인간은 거기서 거기예요. 그것뿐이에요. 자기로부터 탈피하지 못하고 자기의 욕망과 욕구, 편하고 싶은 욕망에서 자기 발을 빼지 못하는 것, 이게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이 구원을 받아요? 그런 엘리사의 사환이 구원을 받아요? 지금 아람의 수많은 군대가 왔다 해봅시다. 그 현장에 여러분들이 사환으로 있다고 칩시다. 그 광경을 보고 난 뒤에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사환과 동일한 이야기를 할 거예요. “아아~! 죽었다, 우리는 죽었다. 우리는 이제 우리는 골로 갔다.”
주님의 뜻은 이거예요. ‘좀 골로 가라’ 이 말입니다. 이게 오늘 설교의 핵심이에요. “좀 골로 가라.” 다시 말해서 말씀을 듣고, 설교를 들을 때, 이 말씀을 볼 때에 ‘나를 죽이고, 나를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말씀만 해주시옵소서’라는 생각과 마음으로 말씀과 설교를 들어야 해요. 그래야 죽었던 나를 살리는 말씀에 감사할 게 아니겠습니까?
교회 가도 그만이고 안 가도 그만이고 이런 식으로 지금 사람들은요, 말씀이 중요하지 않아요. 자기의 몸에서 땀 안 흘리는게 중요해요. 여러분 생각에 ‘내가 나쁘다’가 아니고, 이것은 너무나 상식인데요, ‘참 내 욕망이 나쁘구나’가 아니라 욕망이 나를 지배해요. 그러니까 첫째 아들이 처음에는 ‘가겠소이다’ 했다는 말은, 마치 편하고 싶은 자기 욕망을 자기가 관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지없이 본성을 드러내죠. “아이고, 안 갈랍니다. 아버지!” 이렇게 된 거예요.
“네가 죽도록 나를 위해 살아서 천국 가겠느냐?” 지금 이 자리에서 사도 바울이나 주님이 이렇게 이야기하면요, 일단은 그게 옳기 때문에 “예! 그렇게 살겠습니다” 해놓고는 우리의 마음은 뭐냐? 우리의 마음을, 내가 내 욕망을 관리하는 자가 아니에요. 욕망이 나를 관리해요.
“에이, 힘들어서…”
“방금, 방금 뭐라 했는데?”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지금 이상한 게요, 첫째 아들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뭐가 이상하냐 하면, 둘째 아들이 이상해요. ‘둘째 아들 같은 경우는 없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천국 가는 길은 예수님이 가는 길이잖아요. 예수님이 다시 아버지께 복귀할 때 멀쩡하게 갔습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핍박받고 죽어서 갔습니까? 죽어서 갔잖아요.
죽어서 갔다는 말은, 아무도 그 길에 나선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엘리사의 사환을 포함해서 아무도 없어요. 지금 주님께서는, 아무도 갈 수 없는 그 나라에 우리를 데려가 주시겠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주께서 하시는 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거예요. ‘가만히 있으라’는 그 말은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말이 아니고, 네가 어찌 할 수 없는, 곧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내 욕망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우리가 죽는 게 낫지, 세례와 창기가 될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렇게 사는 것은 살아있는 게 욕이에요. 그렇게 될 바에야 고상하게 내 인생을 마감하는 게 낫지, 추잡하고 더럽게 내 목숨 연연하려고 그 짓까지는 안 하잖아요. 그래서 이 아람 나라 그리고 북이스라엘, 모조리 다 국가입니다. 국가라 하는 것은 가룟 유다의 심정이 집단화됐다 보면 돼요.
무의식적으로, 집단적으로 국가는 자체적으로 의미를 생산합니다. 자체적으로 그 의미를 생산하는데 그 의미가 뭐냐?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욕망이 가르친 대로 - 그 욕망은 악마의 욕망이에요 - 마귀의 욕망, 짐승의 욕망이 가르친 대로 그 의미를 생산해서 ‘눈에 보이는 이게 전부다’라는 것을 이구동성으로, 서로서로 교육과 양육이라는 이름으로 주고받으면서 그 사상으로 완전무장 해서 거기서 의미를 소통하며 살아갑니다.
그 의미를 실어 나르는 소통의 수단이 언어라는 거예요, 말이라는 겁니다. 말과 언어를 통해서 동일한 사상을 주고받으면서 인간은 국가를 지켜내기 위해서 서로 협조하고 협력하는 거예요. 우리의 욕망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은 굉장히 자연적인 거예요.
이걸 체계적으로 해봅시다. 애굽이 뭐냐? 다 아는 이야기니까 간단하게 넘어갑니다. 애굽은 뭐냐? 일단 토지가 있어요. 창세기 3장 23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아담이 낙원에서 추방되어서 기본 토지를 갈았다. 토지가 있고 토지에 노동력을 거기다 가미해요.
토지에 노동력을 가미하면 그게 뭐냐? 인공적이에요. 인공적이고, 인위적입니다. 그 인공적인 것은 무엇과 싸우느냐 하면, 이 자연과 싸워요. 이 자연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운영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악마의 마음 때문에 인위적이고 인공적이고, 내가 일해서 그 대가를 낳아요. 토지에 내 노동의 대가로 어떤 거대한 결과물을 낳는데 그 결과물이 뭐냐? 국가라고 돼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국가에 대해서 이제 아시겠죠? 시편 9편 5절에,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열방, 국가, 모든 국가, 심지어 이스라엘 국가도 망했어요. 모든 국가 형식은 어쩔 수 없이, 무의식적으로 인간들의 행함과 내 노동의 대가를 끌어모으는데 노동의 대가를 끌어모으니까 노동한 당사자가 누구냐?
노동의 대가를 끌어모으니까 노동한 당사자가 누구냐? 자기 자신이잖아요. 자기 이름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그들은 국가에 부양하는 식으로 대대로, 대를 이어서 국가에 지사충성하는 것이 사람들이 사는 의미라고 본 겁니다. 그게 짐승의 나라예요. 마귀의 나라예요. 그래서 저들은 국가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에 보게 되면 엘리사가 그 사람의 눈을 열어줬습니다. 사람의 눈을 열어주니까 세상에,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했습니다. 불말과 불병거는 뭐냐? 엘리사의 스승인 엘리야에게 불 수레 보냈던 그 천사 그룹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우리의 목숨을, 목숨을 노리고 물어요. 말씀은 우리의 목숨을 노리니까, ‘과연 이 세상이 인간들만의 세계냐?’라고 물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이 과연 인간들만의 세계냐, 아니면 천사들이 함께 있는 세계냐?’라는 사실에 대해서 ‘네가 너의 목숨을 이 진실에, 이 진리에 걸 용의가 돼 있느냐?’를 우리에게 묻습니다.
단순히 성경 구절 좀 알고, 단순히 교회 좀 다닌 것, 기독교 신자라는 그 타이틀 가지고 내 목숨을 구제하는 요건으로 그렇게 쓰면요, 그거 하나님이 안 속습니다. ‘내 목숨 건사하다가 죽어서 천국도 가야지.’ 이런 꼼수는 주님 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육의 사람을 말씀이 잡아먹고 죽이는, 삼켜버리는 그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때 그때 말씀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아까 마태복음 21장에서, 둘째 아들이 뉘우쳤다 했잖아요, 뉘우쳤다. 뉘우쳤다는 말은 그동안 나 편한 것, 내 땀 흘리기 싫은 것, 나에게 연연하며 나만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 나는 가기 싫습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거잖아요. ‘나를 위해서 사는’ 그것 자체를 뉘우친 거예요.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1900 몇 년도에, 여러분 주민등록에 나와 있잖아요. ‘나를 위해서 살지 말라고’ 태어난 거예요.
이걸 뒤늦게 눈치챈 사람이 뭐냐? 이미 방향이 천국 쪽으로, 주께서 이끄시고 가는 천국의 백성입니다. 재미나는 것은, 아람 쪽이 먼저 엘리사를 공격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공격을 어떻게 만들었느냐 하면, 공격으로 느끼게 만드는 ‘방어’로 되돌려 줘요. 공격을 안 하고 방어만 했는데 그 방어가 꼭 공격 같아요. 꼭 공격 같습니다. 어떤 공격이냐? 편재(遍在)의 공격.
편재의 공격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편재의 효과. 편재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를 덮치고 있다.’ 편재, 골고루 덮치고 있다는 그 증거로 인하여…, 개인적으로 빠른시간 내에 출세하고 승진하는 것, 곧 인간들이 무언가 할 때는 속도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이고, 언제 저렇게 승진했나?’ 하잖아요.
그런데 편재의 효과는 뭐냐?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속도가 빨라요. 움직이지 않는데도 속도가 있어요, 자체적으로. 인간들은 감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운영되는 자연을 인공적으로 사육하려고 했습니다. 그게 국가의 이념들이에요. ‘우리의 토지에 우리의 노동을 투자해서 그 투자의 대가로 우리는 비록 힘들지만, 대를 이어서 이 땅에 우리 인간의 국가를 영원토록 이어 나갑시다.’ 이것이 오늘날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의 이념이죠.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말합니다. “너, 눈 안 뜰래?” 눈을 뜨게 해줬어요. 사환도 우리하고 똑같거든요. 사환도 눈에 보이는 게 다인데, 사환이 눈을 다시 떠버리니까, ‘아, 그동안 자신의 눈에 보이는 현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 현실이고 그것이 전부라고 여겼던 것이, 살고자 했던 나를 도리어 지옥 쪽으로 멸망시키는 거’였어요, 이게!
인간은 바보 등신 같아요. 인간은 자기가 편리한 도구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거든요. 인간의 그 생각은 틀렸어요. ‘인간이 도구를 만들었다.’ 옛날에 쇠로 칼을 만들고…, 그렇게 도구를 만들었다는 거죠. 인간이 도구를 만든 게 아니에요. 도구가 도구를 위해서 도구에 매이도록, 집착하도록, 애착하도록 인간을 그런 식으로 이끌고 온 거예요. 그 인간의 도구 가운데 최신 도구가 뭐냐? 인공지능, 인공지능이에요.
AI, Artificial Intelligence가 AI거든요. “AI? 야, 도구다! 우리가 사용하자.” AI가, “아서라, 말아라. 이제는 내가 너희를 지배한다. AI를 너희가 손대지 마!” AI가 AI를 다뤄요. 바둑 두는 사람은 다 알아요. 전에는 이세돌이가 알파고하고 바둑 뒀거든요. 지금은 알파고하고 다른 AI하고 바둑 둬요. 그걸 인간들이 사육 받고 교육받아요, 도리어!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범용인공지능이지요, General, 특정 분야가 아니라 모든 작업을 실행하는 그런 시대가 오는데 인간들이 “야, 이제 AI가 다 하는구나. 그러면 우리는 그 혜택만, 그 효과만 받으면 되지”라고 했던 그 시대가 ASI(Artificial Super Intelligence)가 돼버리면 이게 뭐냐? ‘Super AI시대’가 오게 되는데, 그다음부터 우리는 노예가 돼요. ‘AI를 사용할까, 말까?’도 AI가 시켜야 가능해요.
AI가 뭐냐? 인간의 안에 있는 짐승의 욕망이에요. 마귀가 인간을 그런 식으로 꾸준히 다뤄 온 거예요. 마귀가 인간 보고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부추기며 왔던 거예요. 잘하니까 진짜 잘하는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언제 그 마귀의 자기 정체가 사달났느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 엘리사가 왔을 때, 엘리야가 왔을 때, 선지자가 왔을 때, 모세가 왔을 때, 그때 그들은 바로 악마 – 요새 AI죠 – 악마가 이야기한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내가 누구냐를 내가 알 수 없었다’는 겁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 선지자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니까 –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나는 내가 누군지를 그동안 몰랐다는 거예요. 그냥 마귀가 시킨 대로 눈에 보이는 학교에서 교육받은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 마귀가 우리한테 세뇌시킨 것은 뭐냐 하면, ‘어떤 경우라도 네 목숨은 네가 건져야 된다. 네 가치, 네 의미 놓치면 안 된다.’ 그래서 그 사탄의 전형적인 모습이 뭐냐? 가룟 유다 아닙니까? ‘이런 꼴 보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다.’ 인간이 만든 사다리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사다리를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자기가 죽는, 저주받는 자리에 도달하게 만드는 겁니다. 다시 내려올 수도 없어요.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이성적이고 똑똑한 그것이 AI, 인공지능인데 결국 인공지능으로 하여금 ‘우리는 이제는 차라리 죽는 게 낫지’라고 여기게 만들어요. 왜? 인간은 있어도 아무 소용 없어요. 인공지능의 종이 되어서 인공지능만 쳐다보면서 ‘주식 어디에 투자할까요? 삼성에 할까요, 어디에 주식 투자할까요?’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 증권회사가 AI 가지고 다 하는 이 시대를 보면서 그래도 인간들은 자기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생각을 안 해요. 말씀 앞에서 뉘우칠 줄 몰라요.
이것은 누가 와야 하느냐? 예수님의 십자가, ‘죽는 길이 사는 길’이라는 십자가의 영이 임할 때, 우리는 그때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위한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욕망이 아니고, AI가 아니고 말씀이 나를 오늘도 이끄시고 있다는 것, 지금까지 말씀이 이끌었다는 이 사실에 눈을 떠서 발견하는 자가 이 땅의 지금 시대에 유일한, 그런 분들이 바로 유일한 천국 백성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나 안일하게 말씀을 대하고, 그저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 내 사는 데 지장 없을 경우에만 듣는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그 태도, 그것이 곧 마귀가 시킨 일인 것을 이제는 눈을 열어서 깨닫게 해주옵소서. 그리고 뉘우치게 하옵소서. 내 목숨보다 우리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귀하다는 것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