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현재 존재

아빠와 함께 2026. 6. 10. 08:56

20260608a 부산강의 : [시편]86(70:3)-현재 존재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70편,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찾는 자로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로 물러가 욕을 받게 하소서 아하, 아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물러가게 하소서 주를 찾는 모든 자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1~5절) 짧게 그렇게 돼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달라는 근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3절에 나와요. “아하, 아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물러가게 하소서” 아하, 아하 한다는 것은 조롱하는 겁니다. 누가 조롱을 받는가? 다윗이 조롱을 받지요. 근데 다윗이 조롱받을 인물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골리앗이 이스라엘 전체를 조롱할 때에 전부 다 겁이 나서 끽소리 못할 때 소년 다윗이 나가서 골리앗을 처부셨잖아요.

그리고 블레셋이 승리케 했을 때에 그거는 백성들이 이미 다윗이 어떤 인물인 것을 인정했어요. 다윗은 다윗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다윗을 이렇게 지목해서 다윗이 대단하다, 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다윗과 누구와 비교했느냐 하면 사울과 비교했어요.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은 왜 공로가 다윗이란 인간에게 쏠리느냐는 겁니다. 그만큼 백성들의 의식이 사고방식이 여전히 눈에 보이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 자기 사는 나라를 수호하려고 지키려고 하는 의도가 강하지요. 이걸 다시 글로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 형성된 이 사회’ 인간들은 이게 한계에요. 사람들만 쳐다보고 있단 말이죠.

이것을 둘러치는 하나님의 언약, 율법, 또는 말씀, 언약의 세계라는 전체의식에 대해서 인간들이 많이 미흡합니다. 백성들은 다윗을 좋아했다. 맞는 이야기에요. 맞아요. 맞는데 거기에 대해서 백성들의 의식의 한계가 뭐냐 하면, 사울을 철저하게 인간중심이잖아요. 사울이 인간중심으로 행동하면서 다윗을 공격했거든요.

공격했을 때에 백성들이 호응했습니까? 이게 문제에요. 자기한테 승리를 가져다줄 때 다윗, 다윗, 다윗 이렇게 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 다윗을 사울의 입장에선 라이벌로 여기고, ‘저 인간 제거해야 되겠다’ 했을 때 백성들은 안 돼, 라고 나섰습니까? 아니지요.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여기서 백성들이 다윗을 환호할 때 어떤 의식을 다윗을 좋아했느냐 이 말이에요. 진정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 말씀의 나라, 율법의 나라를 걱정하면서 다윗을 옹호했을까요? 아니지요.

인간 대 인간에서 뭐가 형성돼 있느냐 하면 권력, 또는 권력구조가 하나의 새장처럼 형성돼 있어요. 형성된 이것을 그들은 이스라엘로 본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세계와 이스라엘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이걸 이스라엘로 권력구조, 자기가 사는 것이 권력구조화, 권력구조가 될 때 사람들은 안정성을 느껴요. ‘나는 이제 권력구조 안에서 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이 영웅으로 떴을 때 사울이 공격했잖아요. 공격했으면 하나님께서 다윗이 이기고 사울이 지도록 했으면 백성들은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다윗 편을 들겠지요. 그런데 사울이 마구마구 다윗을 공격할 때 하나님이 다윗을 안 도와줘요. 사람들이 눈치를 보는 거예요. 권력이 어디로 이동하는가? 눈치를 보니까 여전히 한결같은 사울의 권력은 끄덕도 없는 거예요.

이 비슷한 이야기가 서방에서 이란의 국민들이 정권을 물리치고 자체적으로 봉기를 일으켜서 그들 손으로 혁명수비대를 권력을 무너뜨리기를 기다렸는데 어떻습니까? 전혀 그런 것 없지요. 그만큼 이 권력구조라는 것이 아주 탄탄합니다. 만약에 서방 정권이 들어서고 혁명수비대 그 정권, 기존의 이슬람주의가 무너졌다면 서방에서는 해방을 외쳤을 거예요. 그러나 이란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냥 우리도 남들처럼 밥이나 잘 먹고 잘 살기만 해라. 여전히 누구 중심? 자기중심입니다. 처음부터 그랬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왜 하나님이 그 위대한 골리앗을 이긴 영웅이 비겁쟁이, 사울은 비겁하잖아요. 그 비겁쟁이한테 금방 권력이 이양되지 않고 쫓겨 다니는 신세로 만든 이유가 뭐냐? 이것 아셔야 돼요. 이걸 왜 알아야 되느냐 하면 그 이유를 알아야 어떤 영웅을 기대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거예요.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 할 때 그것 생각할 때 본인들의 문제점이 생각나겠습니까? 야 우리나라 희망 있다. 다윗이 왕이 돼야 돼. 이것뿐이지 우리는 다윗을 환호하고 다윗을 좋아하는 우리 자체가 다윗과가 아니고 사울과라는 것을 누가 알겠어요? 아무도 모르지요. 아무도 없어요. 다윗 곁에 아무도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외롭다’에요.

지금 다윗의 인생은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 속에 착륙할 때, 비행기라면 활주로에 착륙하잖아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나온 하나님의 언약이 이 땅의 세계에서 보이는 식으로 연착륙할 때 그것은 그 착륙의 주인공 되는 자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 뭐 사오백 명 따라 다녀도 사울의 권력에서 백성들을 건지는 데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사백 명이 아니라 한 사십만 명이 따라다니면 희망이 있지요. 그게 아니고 기껏 사백 명이에요.

사백 명으로 사울의 기존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까? 못 이기지요. 이길 수가 없지요. 기존의 권력구조에서 벗어날 수가 없지요. 그러면 여기까지 결론 내려 봅시다. 기존의 권력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①기존의 권력구조가 나쁘게 때문이다, ②그 나쁜 권력이나 나나 한 통속이다, 몇 번입니까? 한 통속이에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한 통속입니다. 똑같아요.

다윗은 쫓겨 다니기를 원했습니까, 차라리 사울의 권력 밑에 들어가기를 원했어요? 야 어려운 문제다. 다윗은 사울로부터 정치적인 핍박과 압박이 왔을 때 사울 쪽에 속하기를 원했습니까, 아니면 젊은 청년 때 모세처럼 독립운동하기를 원했습니까? 사울 쪽에 들어가기를 원했죠. 그래서 사울 쪽에 들어갔잖아요. 사위가 됐잖아요.

누가 용납을 안 해요? 누가 둘 사이를 분리해냅니까? 이게 바로 다윗은 주변에 그야말로 아무도 없다, 외롭다는 말이 성립이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다윗은 다윗 본인에게도 외로워요. 낯설고 외롭습니다. 거기서 다윗은 점점 뭘 느끼느냐 하면 자기 인생을 설계한 분은 이게 내가 아닌 것 같다는 것, 기존 권력에 순응하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용납을 하지 않고 기존 권력에서 나를 분리시키는 그 작업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실행된다는 것을 감 잡았습니다.

어때요? 여러분들도 인생 살면서 그걸 느끼지 않습니까? 잘 어울리려고 잘해보려고 용은용대로 쓰는데 아무 효과가 없어요. 결과물이 좋지를 않아요. 자꾸 뭐가 돼요? 자꾸 외롭고 주위에 같이 일하게 할 상대가 점점 더 없어져요. 그래 놓고 본문 다시 봅시다. 1절에,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얼마나 주변에 사람이 없었으면 누구한테 도움을 구합니까? 하나님께 도움을 원하죠.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은 누구 탓입니까? 하나님 탓이라고 고백을 솔직하게 내놓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경우에 돌입했어요.

상당히 하나님 보시기에 긍정적입니다. 진짜 마음은 건성이라도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고, 사실은 속마음은, ‘하나님이여 내 권력을 빨리 회복시켜주시고 옛날에 인기 좋았던 사울을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이러한 기대치라도 갖고 싶은데 오늘 본문의 내용은 내가 무엇을 기대하는지조차도 완전하게 바닥을 드러냈어요. 믿는 척도 용납이 안 돼요.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고, 하나님 말씀 뭐 그런 기도하지 마시고 적어도 경상도 경북사람 같으면 기도 그래 하면 안 되지요. “마지막 남은 보수의 심장 국민의 힘, 보루를 지켜주옵소서. 감사합니다.” 기도를 그렇게 하란 말이죠. 기도를 그렇게 못하는 이유가 뭐냐? 그렇게 기도하게 되면 지 믿음 없는 게 다 들통 나잖아요.

“나는 나만 행복하게 나만 편하게 살면 그게 진정 나의 소원이었습니다” 자기의 속셈이 완전히 드러나잖아요. 그걸 감추기 위해서 뭐합니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뭐 이상한 그딴 소리하는 거예요. 말씀만 하옵시고, 뭐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고, 그런 이야기, 잡스런 이야기가 누구한테 안 통해요? 다윗에겐 안 통합니다. 네 소원 따로 있잖아. 어디 어쭙잖게 신앙 흉내 내고 있냐. 니 소원 따로 있으면서. “하나님이여 좀 저를 힘들게 마옵소서.” 그게 다윗의 솔직한 마음에요.

내가 골리앗 이기고 싶어서 이긴 것도 아니고, 내가 남보다 유난떨면서 잘 믿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고. 심지어 다윗을 사울의 권력을 내가 전복시키고자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사울 쪽에서 건드리면 건드렸지 자기 쪽에서 사울의 권력을 건드린 적이 있습니까? 단 한 번도 없어요. 권력에 대한 권력욕이 없어요. 권력욕은 사울 쪽이에요. 백성들은 다윗 편도 아니고 사울 편도 아니고 백성들은 자기편이에요. 하나님 편도 아니라니까요.

오늘 이 내용을 좀 더 이해를 돕는 의미에서 사사기 2장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세월 가고 시간 지나가게 되면 그거 옛날이야기잖아, 하고 다 잊어버리죠. 이것은 이렇게 정리하시면 좋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둘로 나눕니다. 과거 존재미래 존재. 대구강의에서 한 것 같은데…. 과거 존재와 미래 존재는 백날 살아봐야 자꾸 여기 과거만 쌓인다. 추억만 될 인생을 인간들은 부지런히 살고 있습니다. 오늘 살면 어제는 과거가 되고, 모레 살면 내일까지의 모든 것은 다 과거가 돼버려요. 미래 존재라 하는데 구약을 적용할 수 있어요. 다윗은 앞일을 알리기 위해서 다윗이 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다윗은 선지자기 때문에 앞의 일을 하니까, 그러니까 미래 존재라 할 수 있지요.

근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복잡하니까 이걸 뭐로 고치냐 하면 현재 존재로 하는 거예요. 현재 존재로 하면 과거의 반대가 미래가 아니고 과거의 반대가 현재가 돼요. 인간은 자꾸 살아봐야 없어질 것만 자꾸 사는 거예요. 그 인간은 뭐와 같으냐 하면 촛불과 같아요. 초에 불붙여놓고 가만히 보세요. 이게 불붙는 게 공짜가 아니죠. 뭐가 자꾸 깎여집니까? 초가 자꾸 깎여지지요.

우리를 하나의 촛대로 봅시다. 예를 들면 이능우 집사님 같이, 길잖아요. 촛대로 본다면 세월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열심히 살았는데 남는 게 없어요. 자식이 남는다고요? 자식은 자기 위주에요. 자식을 키웠다고 자식이 내 세계 속에 들어올 마음이 없어요. 어버이날 용돈은 주겠지만 엄마 인생에 자식이 끼어들 생각은 날이 가면 갈수록 없어요. 손자도 네 살 때까지 손자지 그다음부터는 손자가 아니에요. 네 살까지 즐거웠지요. 네 살까지 엉덩이 두드리면서 예쁘다 하지요. 한 일곱 살 되면, ‘때리지 마세요’ 이렇게 돼요.

그러니까 과거 존재의 특징은 뭐냐 하면 없음이에요. 점점 더 없어진다. 있더라도 임시적으로 보이는 것, 이걸 현상이라. 그냥 인간은 현상,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할까요? 있다가 없어지는 흔적, 인생 흔적이에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권력구조 안에서는 뭐냐? 없어지는 건 맞는데 또 새로운 세대가 있잖아, 라고. 그런데 새로운 세대는 바로 우리 세대에 있었던 모든 것이 어떻게 돼요? 잊어버려요.

그게 사사기 2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알았던 정립된 진리체계,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되고, 우린 하나님을 이렇게 섬겨야 된다는 것, 그거는 당신 생각이고 우리 생각은 당신 생각과 자꾸 엮으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대로 삽니다. 온 몸에 문신 다하고. 세상에 온 몸에 문신하는 것, 우리 젊을 때는 그런 것 없어요. 등짝에도 하고 여자도 하고. 왜 하느냐? 개성입니다. 심지어 등짝에 하다가 얼굴에도 하고. 뭐 군에 안 가려고 하는가? 방위로 빠지려고 하는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는 모든 인간은 언약이 현재로 계속 유지하기 때문에 무슨 존재가 돼요?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과거 존재에서 뭐로 변하느냐? 현재 존재가 되는 겁니다. 과거 존재를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옛사람이라 하고 현재 존재를 새사람이라 해요. 옛사람은 있다가도, 그다음에 뭡니까? 없어지는 것. 현재 존재는 없어야 되는데, 현재 존재는 언약적 인물이에요. 없어야 하는데/마땅한데 어? 한 번 더 있네. 이걸 다윗이 알았던 거예요.

다시 말해서 다윗에 있어서 자기는 사람을 상대할 때는 너도 있고, 그다음에 누구도 있고? 나도 있다, 되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멀쩡하게 있는 나를 소위 멀쩡하게 있다고 여기는 사울 쪽에서 나를 없애는 게 소원이에요. 다윗을 정치적 라이벌로 사울이 자꾸 생각해요. 그거는 사울이 악귀가 들린 거예요. 창 들고 다윗을 죽이려 하고. 그러다 내가 왜 이러지?

이거는 인간 차원의 일이 아니고 악귀가 사울을 부추기죠. 악마가 부추기죠. 악마는 누구와 싸우고 있어요? 여호와와 싸우죠. 그래서 악마는 인간을 무슨 존재로 만드느냐 하면 현재 구성된 권력구조에 속한 사라질 과거 존재로 악마는 굳히기에 들어가요. 반짝 유행하고 인기 있지만 결국 그 인기도 나중에 언제 있었나할 정도로 다하고.

보통 부모가 그러죠. “내 너 키운다고 고생 많이 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빠, 엄마의 현재성 시각에서 나는 너를 볼 때마다 내가 너 키운다고 고생 많이 했다는 그것은 누가 지금 확보하고 있어요? 현재 있는 아빠, 엄마가 확보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키움을 당한 자식은 아빠, 엄마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자식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예, 참 고맙습니다만 지금은 나는 내 세대를 살고 있는 거예요. 나 키운다고 고생 많이 했다는 것, 부모님이 가져가세요. 가져가시고 내 보면서 본인이 노력한 것을 흐뭇해하세요. 하지만 나는 내 세대를 살아야 된다고요. 나는 내 세대에 자식을 낳으면 나는 지금 내 자식 키우는 게 중요해요.” 부모자식이 아니고.

“엄마, 잠깐만 내 애 봐줄래요?” 그러면 그냥 보기만 하면 돼요. 부모는 거기다가 초콜릿 먹이지요, 하루 종일 만화 보여주지요. 보기만 하라 하는데 인수인계를 받았으니까 할머니 입장에서는 자기 세대에 할 수 있는 걸 애한테 적용시키니까 여기서 할머니와 아이 사이와 엄마와 아이 사이에 갭/틈이 생긴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도 못해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돈을 줘야 돼요. 그런데 우리 친정엄마한테 맡기면 친정엄마의 가오가 살잖아요. 어릴 때 너 키웠듯이 손자도 키워줄게, 라는 그런데서 엄마는 자기 의가 확보되는 데 그걸 살짝 이용해서 내 손자 키우면서 엄마의 가오가 클 수 있는 기회를 내가 허락해드리겠습니다. 우유 값은? 엄마 돈 많잖아. 연금 받잖아. 난 착실하게 살아야지.

과거 존재가 볼 때에 과거의 엄마, 아빠는 과거 사람이에요. 이제는 신경 안 쓰고 싶어요. 나 사는 것에 충실하고 싶어요. 그렇게 되지요. 그러니까 이 과거 존재라 하는 것은 결국 어디에 지금 매여 있습니까? 과거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는 악귀, 그 악귀가 누구한테 들어갔다고요? 사울 왕. 사울 왕은 자기 세대에 위치가 자기가 왕이니까 하늘에 태양이 둘 될 수 없지요. 그러니까 자기 일에 자기 맡은 역할에 충실하겠지요. 그러려면 다윗을 제거해야 되지요.

그런데 여기서 희한한 현상이 자기 과거 존재인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현재 존재로 지금 바뀌게 되었어요. 현재는 뭐냐? 인간은 아무리 과거, 현재 시간이 흘러가도 사라지지 않는 게 있어요. 인간은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게 아까 사사기 2장에 보니까 뭐가 살아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계속 살아 있지요.

그러면 다윗은 무슨 존재냐?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존재가 되겠지요. 언약에 속한 존재가 되니까 과거는 있다가도 없어지지만 언약의 존재는 원래 없어야 되는데 자리가 마련되어서 여기서 누가 들어왔어요? 언약에 의해서 다윗이 들어와 버린 거예요. 골리앗을 이긴 게 자기의 솜씨가 아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대로 이루기 위해서 들어간 거예요. 딱 들어와 보니까 여기서 중요한 데 왔습니다. 잠시 졸지 마시고 이것 듣고 조시기 바랍니다.

진짜 중요한 겁니다. 뭐냐 하면 단절현상이 일어난다. 이게 뭐냐 하면 조롱받는 거예요. 같은 시대를 살면서 세대가 분리돼버렸어요. 조롱받는다. 다른 세대, 미래에 올 다른 세대가 복합적으로 다윗 시대에 기존 세대, 기존 세대는 알지요. 인간들 세대, 권력, 사울. 기존 세대와 같이 겹쳐있는 거예요.

자,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현재 다윗이 있을 때 왕이 몇 명입니까? 왕이 둘 됐지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왕은 누굽니까? 다윗이죠. 사람들이 보는 왕은 누굽니까? 사울이죠. 중첩됐지요. 이게 언약에 해당되는 중첩입니다. 다윗이 그렇지요.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뭡니까? 뭐예요? ‘나는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그건 아무 소용없는 이야기고요. ‘나는 이렇게 살래, 저렇게 살래.’ 그건 아무 의미도 없고요.

지금 뭐냐 하면 무슨 힘이, 기존의 세대는 아까 악귀가 들린 사울이 지배하는 세대에요. 심지어 다윗을 좋아하면서도 실제적으로 권력은 어디 속했다? 다윗 편들어서 제사장 많이 죽었잖아요. 실제로 흐르는 힘이 있잖아요, 힘. 일반인들은 어디 속하겠어요? 다윗 참 좋다. 그런데 힘은? 힘은 사울에 있다고요. 한동훈이 좋지요. 그런데 이재명이 현재 있잖아요. 꼭 이래 이야기해야 알아듣습니까? 권력 인수인계가 안 됐잖아요. 한동훈이가 대통령이 아니잖아요. 대통령은 이재명이잖아요.

어제 오후 설교 때 지금의 사탄의 회가 뭐라 했습니까? 민주주의라 했지요. 왜 민주주의라 했어요? 우리나라 헌법 조항에 뭐라 돼 있어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1조 2항) 그러면 그 국민은 오류가 있는 국민이에요, 오류가 없는 국민이에요? 오류가 있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뭔가? 오류가 만든 국가가 대한민국이에요. 그리고 민주주의는 오류 있는 인간들의 의견을 규합한 거예요. 모집한 거죠. 다수결로.

그러면 성도는 어디에 속해요? 성도는 소속이 어디죠? 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가 뭐냐 하면 왕입니다. 왕에 속해요. 이미 우리나라는 성도의 나라는 항상 현재에요. 앞으로가 아니라 지금 벌써 현재화 되었어요. 하늘나라 호적초본에 명단이 있으면 끝난 이야기에요. 끝난 이야기인데 그 왕을 품고 있는 다윗이 살면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아하, 하고 놀림을 당하지요. 조롱받았지요.

그럼 예수님을 이 땅을 살면서 어떻게 되었어요? 죽을 때 환영받고 죽었습니까, 조롱받고 죽었습니까? 실컷 조롱당했지요. 조롱당하면서 그 현장, 무슨 사건현장입니까? 십자가죠.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에 대해서 오늘 시편 70편에 조롱받은 다윗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이여,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어요? “속히 나를 도우소서” 지금 다윗은 조롱당함에 대해 하나님의 복수를 요청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이미 그것도 끝났지요. 누구 편에 서서 살아야 돼요? 조롱당한 예수님이 이거는 말도 안 되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살해당했다는 그 사건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우리는 누구 편에 서서 전사가 돼요, 싸워야 돼요?

왜 인간들은 하나님을 죽이느냐? 요 인생 목적으로 인생의 모든 염려와 근심은 딱 끝났어요. 다 날아가 버렸어요. 왜? 할 일이 생겼으니까. ‘니들이 하나님 죽였잖아, 니들이 하나님 죽였잖아.’ 그러면 우리는 맨날 어디에 모여야 돼요? 잠실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에 모여야지요. 왜? 거기서 송파구 투표 오십 퍼센트 없어졌으니까. 그러면 성도는 어디 모여야 돼요? 맨날 십자가 현장에 모여야지요.

여러분, 물어보겠어요. 일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기분 나쁩니까, 아니면 일거리가 있다는 게 기뻐요? 어느 쪽입니까? 일이 안 되더라도 그거는 시답지 않은 시시한 일이에요. 중요한 것은 일이 되던 안 되던 상관없이 한결같은 내 할 일이 생긴 거예요. 뭐냐 하면 데모하는 거예요. 누굴 향하여? 온 세상을 향하여 데모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누굴 죽였다? 하나님을 죽인 거예요.

이것 놓치면 그다음부터 무슨 짓 나오느냐? 이것 놓치면 뭐냐? 벌벌 떨면서 이것 나와요. 하나님이여, 저 진짜 구원되는 사람입니까? 진짜 지옥 갑니까, 천국 갑니까? 이것 평생 자기 구원에 매여서 마귀한테 평생토록 시달리고 또 시달리고 농락당하는 인생을 살 겁니다. 왜? 주께서 주신 할 일이 따로 있는데 그거는 잠실에 선거사무소인데 나는 내 자리에 그냥 있는 거예요. 바들바들 떨면서.

어제 낮 설교에 했지요. 인간은 실패가 자길 괴롭힌다고. 남이 괴롭히는 게 아니고 일이 잘못 될까봐, 그리고 일이 실패가 될까봐, 하는 일이 내 뜻대로 안 될까봐 자기가 자기 죄를 그렇게 괴롭힙니다. 그것은 자기 할 일을 자기가 일방적으로 만들어내서 그래요. 하나님이 정해준 일이 따로 있는데 자기 마음에 드는 일을 자기가 끄집어놓고 이걸 새삼스럽게 하나님께 재가 받으면서 “하나님이여, 이것 좀 허락해주면 안 됩니까?” 자기가 일을 만들어놓고 하나님께 허락을 구하고 있어요. 그거는 언약 밖의 이야기입니다.

데모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 장소는 어디? 십자가, 십자가. 누가복음 13장 33절 봅시다. 오늘부로 근심, 걱정, 두려움, 염려, 공포 우리 있기, 없기? 없기. 뭐 가정 때문에 근심하고, 자식 때문에 근심하고 있기, 없기? 없기. 자기 잘 키우는 게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바로 아버지의 일에 목적이 있었던 거예요.

이게 누가복음 13장 33절에 나옵니다. 우리 잠 깨우는 의미에서 다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야 예루살렘. 여호와를 믿으면서 여호와 믿는 것으로 마음이 하나가 된 국가, 민족, 유대민족이죠.

그 수도가 어딥니까? 그 수도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은 헤롯이 남의 나라, 타민족 에돔 사람이 지어준 유대나라 통치할 때 잘 보이기 위해서 너희들 종교 예배당 내가 지어줄게, 해서 지은 게 헤롯성전이에요. 헤롯성전에서 그들은 날마다 제사 지낸 그곳이 어디라고요?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이 뭐하는 곳이라고요?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맞아죽는 장소에요. 거기서 다 이루었어요. 거기서 마귀를 이겼지요.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서.

“자꾸 사람 뒤에 숨지 말고 마귀, 너 나와. 비겁하게 숨지 말고 나와!” 마귀가 평소에 인간을 숨어서 다루다가 십자가할 때 인간의 자기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악마가 평소에 인간들을 어떻게 세뇌시켰는지 말이 마구마구 터져 나옵니다. 각 계층마다 터져 나와요. 그게 마태복음 27장에 나옵니다. 같이 봅시다. 27장 28절부터 좀 깁니다. 43절까지 계속 이어지거든요. 천천히 살펴봅시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조롱입니까, 조롱 아닙니까? 조롱이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뭐예요? 사람을 마네킹 만드는 거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뭡니까? “희롱”하지요.

여러분 희롱 받고 있습니까? 중첩된 세대로 인하여 희롱 받고 있습니까? 통뼈야, 뭐야? 우리의 안정적인 권력의 방식을 현재 우리의 체제를 다 인정한다고. 뭐야. 당신은 뭔데 반대소리를 내는 거야. 누구 믿는 거야? 로마가 유대인을 실제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것이 네 눈에 안 보이느냐고 따지고 있는 거예요. 조롱입니다.

잠시 마태복음 27장 놔두시고, 시편 22편 7절에서 8절 보겠습니다. 6절부터 보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걸, 걸 나오지요.

그다음에 12절,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그때 예수님은 힘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힘이 없었습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13장에 나오지요. 주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연약해서 죽었어요. 그다음에 16절,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누가 예언한 거예요? 다윗이 예언했지요. 그럼 다윗 안에 누가 들어가 계십니까, 미리? 예수님이 들어와 있어서 다윗의 조롱받음이 예수님의 조롱받음이고, 다윗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이고,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는 것이 인간세계 전체에게 쫓기는 하나님의 모습이죠. 이게 성경입니다. 이게 성경내용이에요. 여기 무슨 상담이 있어요. 성경에서 무슨 행복이 나와요. 같은 악마 편이면서 무슨 행복을요.

시편 3편을 또 잠시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1절) 많은 정도가 아니고 다 쳐요, 다. 다 찝쩍거려요. 어느 시대에? 다윗 시대에. 그러면 엘리야 같으면? 엘리야 시대에. 미가야 같으면? 미가야 시대에. 열왕기상 22장에 미가야 나올 때 천상회의 참석했잖아요. 그때 미가야가 발견한 게 뭐냐? 천상회의에 가니까 거기에 하나님 곁에 누가 있었어요? 사탄이 있었지요.

사탄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이야기하기를 미가야 빼놓고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 무슨 영을 부어주겠다? 거짓말을 알아듣는 영을 부어주겠다. 거짓말은 누가 하고? 마귀가 하고. 그 거짓말을 진짜 알아듣는 영을 받은 자는 미가야 빼놓고 나머지 사백 명 선지자 다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성경입니다.

성경은 중첩이에요.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합니까? 지금 그 이야기가 성경에 없어요. 내가 어떻게 행동하면 구원받습니까? 그 이야기가 없다고요. 성경은 네가 어느 세대에 속하느냐? 과거의 세대, 현재 영원한 세대에 속하느냐, 그걸 묻는 게 성경입니다. 그 근거는 어디 있느냐? 요한계시록 13장 8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지금 이 대목을 사람들은 이렇게 오해해요. “짐승 나와. 나 예수 믿는다. 경배 안 하겠다.” 지금 그 이야기가 아니고 경배하지 않을 수밖에 그렇게 하나님께서 작용을 하신다 이 말입니다. 생명책에 없는 자는 본인이 버티고 버텨도 굴복하게 돼 있어요. 어느 권력에? 세상 권력에. 지금의 세상권력은 민주주의지만 그 당시는 사울이었단 말이죠.

지금 사울 시대에 다윗 이야기를 통해서 중첩된 언약의 세계가 어떤 세계고 언약 밖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지금 시편 70편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어떤 세계냐, 어떤 차이가 있느냐, 과연 그 두 개의 세계가 같이 존재하는 근거는 뭐냐? 다윗이 뭘 받았다? 조롱받았다.

다시 마태복음 27장 돌아가 봅시다. 로마 군병이 조롱했어요. 그다음에 35절,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그다음에 39절 봅시다. 누가복음에 보면 강도들도 조롱했어요. 처음에 강도 둘 다 조롱했어요.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아까 로마 군병이 조롱했지요. 그다음에 제사장들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조롱했지요. 이번에는 지나가는 자들. 지나가는 자들 그냥 지나가지 그냥 안 지나가요. 지나가는 자들이 자기 머리를 흔들면서, 흔든다는 말은 아주 건방지다 이 말이에요. 흔들면서 안 됐다, 측은하다, 좀 그냥 조용하게 살지 나대기는 왜 나대느냐? 지금 그런 쪽으로 하는 거예요.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이게 뭡니까? 조롱이죠. 예수님이 십자가 내려와서 자기 집 고향에 내려가면 그게 구원입니까? 아까 다시 이야기하면, 구원이 아닌 게 뭐냐 하면 살아도 그냥 과거가 되는 게 구원이 아닌 거예요. 있는 것도 없어지는 그게 이 세상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데 없는 데서 새로 생긴 것이 너무 기이하지 않습니까? 성경 한 구절 찾아보고 10분 쉽시다.

이사야 29장 14절에,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무슨 일입니까? “기이한 일” 여기서 한 가지 설명하고 10분 쉽시다. 기이한 일이라 하는 것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연구하는데 손을 놓지 않았어요. 우수한 천재들이 말씀을 했지요. 인간들이 온갖 지혜를 꺼내서 앞으로 하나님이 이렇게 할 것이라고 연구했잖아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태어난다는 것도 헤롯 때 이미 알고 있지요. 연구가들이 성경전문가들이.

그런데 그런 아이디어에도 속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일? 기이한 일. 이거는 구원받은 당사자도 우리도 우리가 생각하기에 두고두고 생각해도 이게 무슨 일입니까? 기이한 일. 이것 품으면서 10분 쉽시다.

 

 

 

20260608b 부산강의 : [시편]86(70:3)-현재 존재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계속 보면 41절,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아주 희롱이 총체적으로 희롱하고 있어요. 각 직종마다 각 직업군마다 조롱하는 데 있어서 한 마음이 된 거예요. 권력구조지요. ‘나는 있다. 계속 있어야 돼.’ 그것이 통하기 때문에. 내가 없어질 것이 아니고 예수님보고 네가 없어지란 말이죠.

그래서 하는 말이 역시 많이 배운 사람들이 희롱의 수준이 높지요.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상당히 이론적으로 농축이 돼 있지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있다는 말이 아니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 당신의 말을 일단 인정한다 할지라도 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진짜 그 사람이 구원에 갔는지 안 갔는지 그 초기화된 근거는 당신부터 구원이 될 때 당신이 구원되었으니까 당신을 믿었던 사람도 구원이 된다가 되는데 지금 장로와 서기관들은 뭘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말이 구라인 줄 알겠는데 진짜 구라인지 뭐로 테스트해보느냐 하면 죽이는 것으로 해보는 거예요.

그들은 어떠한 이벤트를 원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스톱’ 하든지 천군천사 와서 ‘내 아들을 왜 죽이느냐’ 이러한 일이 나타나기를 오히려 원했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구라 수준이 하도 엄청나고 우주적이라서 그중에 하나는 맞지 않겠느냐, 해서 뭔가 기대했는데 끝까지 조용했어요.

남 걱정하지 말고 오지랖 떨지 말고 당신이나 구원해봐라. 일단은 우리가 죽여 볼게. 당신 힘으로 으라차차 해서 십자가에서 못이 뽑히고 다시 가시면류관이 바람에 날리고 해서 건지면 당신이 구원자인 걸 믿을 게, 라고 하는 그 규정된 개념, 어디서 나온 겁니까? 중첩된 세대가 아니고 악마의 권력구조에서 통용되는 구원 개념이죠.

오늘날 한국교회 보세요. 한국교회의 구원이 뭡니까? 이 땅의 사람들을 포섭해서 종교인을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고대하고 기대하는 그 개념 있잖아요. 그 개념을 성경에서 뽑아서 그 개념들을 유통시킴으로써 내가 믿으니까 내가 구원받습니다, 라는 그게 그 당시나 지금이나 종교지도자가 똑같은, 어떻게 변함이 없어. 레퍼토리가 똑같아요. 구원받고 싶지? 구원해줄게, 이거잖아요.

인간은 구원될 자격이 없습니다. 아무도 구원돼서도 안 되고요. 생명책의 명단은 숨어있어요. 미리 커닝해서 누가 뽑아낸 것 없어요. 아무도 몰라요. 그럴 때 그 현상을 이사야에서는 그걸 ‘기이한 일’이에요.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어서 구원, 나 하나님 아니까 하나님 알고 부르짖으니까 구원해 달라, 이거는 어디에 속하지 않습니까? 이거는 기이한 일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기이한 일은 하나의 기이한 현상으로만 나타나야 돼요. 인간의 모든 예상과 예측을 전부 다 피해갑니다.

그래서 일단 아까 시편 22편에 다윗이 고난 받는 대목이 어떻게 예수님이 고난 받는 것과 유사한지 봤지요. 실제로 다윗은 사무엘하 16장에 압살롬에 의해서 쫓겨 갈 때 시므이란 사람에게 저주를 받았어요.

사무엘하 16장 5~7절,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저주하면서 여긴 ‘가거라’로 돼 있지요. ‘꺼져라’는 말입니다. 우리 사는 동네에서 권력구조에서 꺼져버려. 이 패배자야. 근거가 뭐냐? 8절에 나옵니다.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아주 논리 정연하지요.

다윗이 반란을 당해서 왕권을 압살롬에게 빼앗긴 이유가 뭐라 했어요? 다윗은 건들지 말아야 될 자를 건드렸다. 누굴 건드렸단 말입니까? 사울 족속의 왕관을 건드렸다. 왕은 세습제잖아요. 아버지가 왕이면 아들 왕 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다윗이 뭐에 도전했다는 말입니까? 사울이 왕 되어야 할 것은 지가 왕이 되었으니까 여기에 대해서 시므이 한 논리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이 억울함을 하나님께서 지켜봐주시옵소서.” 하나님 동원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론하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론하는 내 편이어야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이걸 이 중재를 누가 하지요? 지금 시므이가 억지를 내는 게 아니고, 찬송가에 그런 가사 있지요. “진심으로, 진심으로”(463장) 지금 시므이는 다윗을 진심으로 저주해요. 믿음으로, 무슨 믿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으로 누굴 저주해요? 다윗을 저주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유대인들이 진심으로 누굴 믿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마음으로 누굴 죽입니까? 예수님을 죽이지요. 옳고 그름의 판정을 인간이 개입해서 최종판정을 내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이 판정을 못 내린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자기 구원에 대해서 ‘나는 자신있다’ 할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그거는 니 생각하고, 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하늘나라에요.

그래서 이걸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걸 제목으로 삼고자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언약의 초기화’ 언약이 처음 어디서 나왔느냐? 시므이는 사울 얘기죠. 아니지요. 유대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그 장로들은 그 초기를 그들의 시작을 어디서 느낍니까? 그들은 자기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죠. 아브라함부터 시작했지요. 또 율법은 어디서부터 했다? 모세부터 생각하지요.

아브라함 자손이고 모세 생각할 때 그들이 자진해서 아브라함 부정하고 모세 부정합니까? 못 하지요. 자기 뿌리니까. 그것에 기대야 자기 현재 믿음도 무엇을 확보한다? 정당성이 확보되기 때문에. 아브라함 부정하고 모세 부정해버리면 누가 와르르 무너져요? 지금 우리가 믿었던 것이 전부 다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다 무너지지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누굴 건드립니까? 아브라함 건드리죠. 또 누굴 건드리죠? 5장, 7장에서 모세를 건드려요. 요한복음 1장부터 세례 요한이 모세를 건드려요. 율법은 모세로부터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누구로부터다? 내 뒤에 오실 분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근거를 할 때 나는 예수님부터 한다,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출발을 어디서부터 해야 되는가?

언약의 출발점을 인간은 몰라요. 그런데 인간이 아는 것, 인간이 누구나 동의하는 출발점은 아까 제가 언급한 아브라함과 모세, 거기다가 유대인들은 다윗까지 언급해요.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를 구원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살해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그 백성들의 일치된 견해였어요.

따라서 이들이 일치된 견해를 할 수밖에 없던 것에 대해서 요한복음 3장에서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친절하게 소개해줘요. 그 이유를 지금부터 제가 시작합니다. 이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인간들이 의지하고 기대하는 그 역사성, 이 역사성의 결말은 하나님을 죽이는 결말로 끝나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예수님 중심으로 하자, 하면 되느냐? 예수님 중심으로 할 인간은 없습니다. 반드시 뭘 거쳐야 돼요? 유대인들이 거쳤던 그 오류와 과오를 경유해서 누가 문제 있다? 뭔가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내가 문제 있다는 거예요. 아브라함, 다윗, 모세, 그리고 오늘날 나 여기에 공통점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단어가 있어요. 그게 바로 ‘육’입니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분명히 언급했잖아요. 니고데모는 뭐라 합니까?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있습니까, 할 때 주님께서 이렇게 하면 본다고 했어요, 아니면 못 본다는 경우를 먼저 제시했습니까? 다시 말해서 “니고데모야. 네가 육에 속했어, 영에 속했어?”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질문하기 전에 이미 니고데모가 스스로 자백했어요. “내가 어떻게 육에 들어가서 육으로 다시 태어납니까?” 이미 어머니는 늙어버렸는데.

자, 이 아브라함과 나의 초기화, 출발점은 뭐냐?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게 뭐라 했습니까? 한 단어로 해서 이게 ‘육’이다. 육이었어요. 다윗이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모세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을 할 때 바리새인이 뭐가 문제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을 다시 해석해야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그 해석이 육적해석입니까, 영적해석입니까? 영적해석을 그들은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왜? 예수님이 그들 손에 아직 안 죽었으니까. 죽기 직전이니까. 이 세상은 육밖에 없고 육의 연쇄입니다. 연쇄 고리에요. 영은 없습니다. 영은 바람 같이 하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부터 요한복음 3장을 보면서 아까 이야기한 기이한 일이 어떻게 되는가? 그전에 만약에 그렇게 육으로 살면 되잖아, 할 때 이사야 26장 11절 보게 되면, 누가 읽어볼까요?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찌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나이다마는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을 사르리이다” 이거는 뭐 취소 안 됩니다. 영이 육을 사를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이미 그냥 안 믿으면 안 믿는 대로 살지 뭐,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반드시 불로 싸질러버린다는 거예요. 이게 조롱과 관련돼 있는데요. 요한복음 보기 전에 한 군데 더 거쳐서 봅시다.

베드로후서 3장 3절에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그다음의 단어가, “기롱하는 자들” 기롱이 뭔 뜻이냐 하면 조롱한다는 뜻이에요. 놀릴 대로 놀리는 것, 못 놀릴까봐 답답해서 어떻게 하면 잘도 놀릴까 하는 그런 자들이 나타나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세상은 안 변한다는 거거든요.

거기에 베드로가 반박하기를 노아 때까지 그러다가 작살났잖아. 물로써. 이제는 물 정도가 아니라 마지막 때는 불이 나타나서 7절에,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간수한다, 보존하다 하는데 그냥 간수, 보존이 아니고 불의 대기상태, 불 지를 성냥불, 라이터 불처럼 대기상태에 있다.

우리가 보는 하늘과 땅이 불 지르기 직전의 마지막 모습일 수도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은 불속에 이미 우리가 놓여있다. 한 순간에 불붙기 때문에 불 속에 놓여있는 거예요.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 힘으로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구원되지 않습니다. 인간에 구원은 없습니다.

이게 요한복음 3장 봅시다. 이렇게 쯤 돼야 십자가 전의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가 되는 거예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예수님 편에 서서 마태복음에서처럼 조롱하지요. 만약에 우리가 그 현장에 있어보세요. 우리는 조롱 안 하겠습니까? 얼추 말 되는 소릴 해야지. 엄청난 이야기를 하니까.

인자가 구름 타고 온다고요? 몸무게가 얼만데 구름이 그걸 감당해요? 이렇게 쉽게 바르게 사세요, 서로 사랑하세요. 그러면 이해되는데 그게 아니고 자연까지 동원해서 엄청난 이야기를 하니까 이거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믿으려고 애쓰게 하는 말씀이 아니고, 너는 안 돼. 너는 못 믿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 말씀으로 주어진 거예요. 그래야 예수님께서 제대로 죽으시잖아요.

요한복음 3장 보겠습니다. 3장 12절. 천천히 하겠습니다. 내 목을 보호하기 위해서 할 수 없어요.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주님께서 일하실 때 땅에 일을 벌이려 오셨어요. 땅에 일을 벌이는 이유는, 애초부터 너희는 하늘의 일을 아는 게 도통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땅에서 일을 일으킨 거예요.

과연 예수님이 땅에서 일을 일으키니까 예수 믿는 자 있었어요, 없었어요? 요한복음에 없잖아요. 열두 제자 다 도망갔잖아요. 누가 하나님을 이렇게 나서도 소용없다는 것을 베드로도 알지요. 왜? 권력이 어느 편에 서있지 않다? 예수님 편에 서있지 않다는 것을 제자들도 간파했으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생뚱맞게 이야기하지요.

너, 나 배신하는 것 누구도 안다? 닭도 안다, 닭도. 갑자기 거기 닭이 등장합니다. 닭도 알 것이다. 닭도 보조를 맞춘 것 같아요. 난 저분을 저주한다. 꼬끼오! 뭐 추임새 넣는 것 같아. 닭이 마치 그런 것 같아. “두 번 남았어. 두 번.” 세 번 울기 전이니까. 말씀에 세 번이잖아요. 첫 번째 저주했잖아요. 닭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빨리 이야기해. 나도 할 일하고 날아갈 거야.”

이게 땅의 일에요. 땅의 일은 철저하게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밝혀주는데, 구원받고자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 당시 유대인들이 땅의 일 일을 믿겠습니까? 못 믿지요. 믿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게 구약에서는 옛날 세대는 여호수아 뭐 홍해를 잊었지만 이 시대를 잊었다 하잖아요. 구약에선 수평적인 시간대로 해서 옛날 세대와 시간적으로 뒤의 세대 이렇게 되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세대가 위로 바뀌어요. 위 세대와 아래 세대로 바뀌어요. 시간이고 뭐고 지나가도 소용없어요. 위아래로 완전히 구분돼 있습니다.

그게 바로 마태복음 16장에 나와 있어요. 너희가 세상의 천기를 분별할 수 있어도 너희는 뭘 모른다? 이 세대가 얼마나 악하고 음란한 세대인지를 너희가 알지 못한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이 세대의 자식들이란 말이죠. 그걸 에베소서 2장에서는 포괄적으로 이렇게 합니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의 어두운 세력 안에 잠겨서 진노의 자식으로 이 땅에서 살고 있다.

그 대목을 에베소서 2장에서 다시 보게 되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그다음 나오는 이야기가 뭡니까?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악마를 따랐으니. 그 말에 “저는 악마 같은 것 모르는 데요, 저는 좀비도 싫어하는 데요?”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앞으로 세월 지나면 잘 알겠지. 아니 세월과 관계없어요. 아무리 같은 세대의 곽 안에 박스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삼천 년이 되도 악마의 어두움의 권세 안에 놓여있는 것은 한결같아요. 거기서 자기 힘으로 기어 나오고 빠져나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반드시 모든 인간은 죽어야 돼요. 일찍 죽을 것이냐, 나중에 숨 끊어 죽을 것이냐, 그게 문제지 그렇게 돼요.

그다음에 에베소서 2장 2절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악령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다시 요한복음으로 와서 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땅의 일이죠.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야아 들린다는 말이 세대가 위아래 층으로 나눠졌다는 것을 예수님이 들림으로서 아주 핵심적으로 설명합니다. 땅이 있다. 사람이 그냥 죽어 누어있다. 그러면 땅의 세대는 하나밖에 없지요. 어 들린다, 들린다, 들린다. 주님이 들려요. 들리니까 뭐 땅과 들리는 사이에 무엇이 생겼어요? 간격이 생겼지요.

들려서 어디 가지, 어디 가지, 어디 가지? 점점 더 가요. 간격. 저 들려서 어디 가지, 어디 가지, 어디 가지? 점점 더 가요. 가시면서 이렇게(누워서) 들리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바로 서서 올라가지요. 구름 타고 올라가죠. 이 작업이 무슨 작업이냐? 성령세례의 프로젝트에 포함돼 있어요. 세례 요한 성령세례 받았습니까? 안 받았지요. 요단강에서 세례 받은 사람 중에서 성령세례 받은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오직 예수님만이 뭘 받았습니까? 성령세례. 성령이 아버지와 함께 정해놓은 그 프로젝트에 유일하게 진행당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 성령세례에 의하면 주께서는 성령에 의해서 죽어야 되고, 성령에 의해서 살아나야 되고, 성령에 의해서 하늘로 승천해야 돼요. 올라가는 거예요. 올라가면 여기서 간격이 생기지요.

간격이 생기면 세대가 몇 세대로 바뀌었습니까? 이쪽 세대 아래 세대, 위 세대. 그래서 이 두 개의 층이 있다는 전제로 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모아놓은 것이 요한복음이에요. 요한복음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31절에,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요한복음 1장에서 이미 나와요.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두움이 뭘 못 깨달았어요? 내가 어둡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지요. 어두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 깨닫지 못했지요. 그래서 자꾸 어두움에 속한 자가 빛으로 나아가려는 부질없는 시도를 한 거예요. 나아가려 해봤자 그들이 생각하는 하늘나라로 갈 거예요. 그들의 생각하는 천국으로 갈 거예요.

하지만 그들의 천국은 그들 머릿속에 상상한 천국이고, 천국과 지옥은 예수님이 몸이 이 땅에 왔다가 땅을 경유하고, 성령의 프로젝트입니다. 땅을 경유하고 인자와 더불어 들릴 때에 천국도 같이 생겨나는 거죠. 땅에 있는 인간이 나 죽어서 천국 간다고 그 천국이 저 천국 아니지요. 천국 개념을 말할 자격, 그것은 예수님뿐입니다. 지옥을 말할 자격도 예수님뿐이에요. 왜? 명단을 갖고 있는 분이 누굽니까? 명단을 갖고 있는 것은 예수님뿐이잖아요.

어떤 투표기에 투표용지 많이 주고 어떤 데는 적게 준다는 명단을 누가 갖고 있습니까? 선거관리위원장이 갖고 있잖아요. 다른 사람은 모자랄 때까지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지요. 여담으로 선거투표용지 반밖에 안 된다는 것 정말 기이한 일이에요. 아주 신기한 일이에요. 항상 인간 모르게 해요, 구원은. 알면 내 행함이 자꾸 거기 투입되기 때문에. 나도 믿었다, 나도 성경 공부했다, 나도 기도했다 자꾸 들어가기 때문에 그걸 빼는 쪽으로 가요.

제가 오후 설교에서는 이걸 구조라 했어요. 아까 이야기한 곽, 성경 히브리서 3장에서 이걸 집. 이 주님의 집은 인간이 설친다고 허물어질 게 아니에요. 예수님 집을 만들어버린 게 천국입니다. 인간이 살기 좋은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러한 망상과 상상만 할 뿐이지 절대로 인간은 어떻게 실제 세계에서 이런 예수님 세계에 접근이 애초부터 금지되었습니다. 아무리 스스로 폴짝 뛴다고 해서 천국이 생기는 건 아니니까. 예수님이 들려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보면서 왜 예수님이 들려야 한다는 것, 같이 살아난다고 말 안 하고 들려야 하는가? 이것이 겹쳐져 있는 것이 드디어 윤곽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거기서 위가 생기고, 위아래가 생기는 거예요. 그다음 요한복음 8장 보겠습니다. 8장 2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 개념을 추려서 구조를 형성하신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네 옆이 아니라 위아래, 위아래, 위, 위, 아래. 위아래, 위아래. 인간들은 주께서 꾸민 구조에 동원된 자죠. 정사각형 말고 정육면체, 삼차원 구조. 이 구조지점에 필요한 개념들을 주께서 인간을 통해서 여기다가 딱딱 못을 박은 거예요. 위아래, 위아래 이렇게.

그럼 여기서 시간은 뭐냐? 시간은 여기서 갇히게 되고 시간은 종 쳤지요. 이제 과거, 현재, 미래는 이 안에 의미가 없어요. 그냥 이 안에는 영원한 현재뿐이죠. 그런데 육에 속한 인간은 이 구조를 모르고 이걸 평면으로 보니까 백날 살아도 뭐가 돼요? 없어지는 삶, 자꾸만 없어져요. 심지어 오후 설교 같으면 죽음도 구조에요. 첫째 사망, 둘째 사망, 첫째 부활, 둘째 부활 그것도 구조잖아요, 구조. 이미 그렇고, 이미 부활의 세계라, 이미 죽었고.

요한복음 8장 23절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하니까 21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쉽게 이야기하면 나는 간다. 너희들 나 찾아봐야 나 있는 곳에 못 온다. 왜? 너희들은 너희 죄 가운데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너는 너의 죄의 저주에서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나 있는 곳에 가지 못한다. 이렇게 하니까 유대인들의 반항을 보세요. 그 현장에 여러분들이 합세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러한 말에 대해서 그들이 평 내린 것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가 하는지, 동의 안 하는지 체크해보세요.

유대인들이 이렇게 했어요.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요8:22) 이게 뭐예요? 인간의 육으로 예수님 말씀을 그 한계점을 예수님 말씀을 들음으로써 감추지 못하고 노출시키는 거예요. 성경은 우리의 육적인 한계를 노출시키는 데 성경말씀이 지금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기껏 생각한 게 그거야. 그게 다야?’ 이렇게 되지요.

그다음에 계속 진도 나가봅시다. 지금 남아있는 것이 지금까지 한 건 조롱이죠. 조롱이 된다면 아까 뭐한다 했습니까? 대적을 물리치지요. 복수하잖아요. 그럼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주님의 복수의 결과는, 또는 결과물은 뭐냐? 복수의 결과물이 로마서 8장 36절에 나옵니다. 결과물은 말씀과 연계가 되는 결과여야 결과물입니다. 말씀과 동떨어진 결과물 없어요.

‘나는 구원받았다.’ 결과물 아닙니다. 나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내 안에 말씀의 생성물이 되었다가 이게 결과에요. ‘내가’가 아니고 내가 자리에 나를 죽이는 그 세력이 내 자리를 차지하기에요. 나를 죽일 때 뭐로 죽입니까? 복음으로 말씀으로 죽이잖아요. 그러면 나는 뭡니까? 그 복음의 결과물로 등장하는데 그게 36절에 보면,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라고 여기 우리는 복수지요.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럿이지요.

죽는데 뭐로 죽습니까? 종일 누굴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해야 된다. 우리를 죽이고 죽은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 대신 내 자리를 접수하고 점령했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뭐 같이 산다? 도살할 양같이 사는 자의 발생이 하나님의 복수가 성공한 결과에요. 왜? 이런 인간 없으니까.

없는데 하나님께서, 대적이 악마죠. 악마에 붙잡힌 인간을 하나님께서 거뜬하게 자신의 피로 피의 능력으로 건져내니까 건져낸 작자는 뭐가 돼요? 누굴 위해서 죽는다? 자기 구원을 위해서? 아니에요. 이미 구원시킨 주를 위해서 어떻게? 제2, 제3의 예수님처럼, 다윗처럼 조롱받는 사람으로 태어난다 이 말이죠. 그래야 시편 70편이 재현될 수 있기 때문에. 시편 70편은 말씀이잖아요. 말씀으로 우리가 채워지잖아요.

그러면 그 안에 말씀이 시편 70편이 들어있지요. 그 말씀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조롱받는 경우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건 우리의 소원입니까, 뜻입니까? 아닙니다. 조롱받는 게 뭐가 좋아요. 싫지요. 싫은데 주님께서 어떤 모임에서 이야기하게 되면 까르르, 까르르 웃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마치 예수님 십자가 질 때 그 현장에서 들려나오는 조롱들이 쏟아지는 거예요. 

뭐 지가 구원한다고? 너나 구원하세요, 이런 것. 구원받았다고? 네가 뭔데 구원받아. 너 같이 나쁜 사람도 구원받으면 난 그런 예수 안 믿는다는 이런 조롱. 모든 조롱은 십자가의 기이함에 대한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욕설이 나와요. 그러면 우리는 주눅 들어야 되고, 안 그러면 기죽어야 됩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런 조롱이 오면?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36절을 37, 38, 39절과 그다음에 31, 32, 33절 그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우리에 대해 규정돼 있는 도살할 양같이 되었다는 것을 집어넣어요. 그럼 처음 시작은 뭐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33절) 이걸 이야기하지요. 끝부분에 뭐가 나옵니까, 39절에 뭐가 나와요?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마귀나 좀비나 어떤 것이나 할지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세상에 세고 센 것은 누구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내가 세, 이러면 말이 안 돼요. 내가 센 게 아니고 나에게 작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걸 낼 자가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 성경에선 예를 들어서 사도 바울 나오지요. 그럼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8절 봅시다.

근데 이 사랑에 대해서 이미 악마도 알고 있어요. 사도행전 19장 이야기했지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 안다. 그러니 사랑이 바울 쪽에 갔고 내 쪽에 안 왔다는 것을 누가 알아요? 귀신이 알아요. 왜? 귀신같으니까. 귀신같이 아니까. 사도 바울이 움직이는 것이 본인의 똑똑함과 총명한 총기가 아니라 사랑, 사랑, 긍휼, 긍휼로 움직이는 것을 귀신 쪽에서 안다니까요. 괜히 사랑도 안 받았으면서 흉내 내는 인간들, 귀신이 다 걸러내요.

자,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8절에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의의 면류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도로 다 반납해야 돼요. 반납하든 말든 우리는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만 뿜어져 나오면 그게 성도의 존재의 의미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무슨 존재냐? 과거 존재가 아니고 벌써 뭡니까? 현재 존재에요. 중첩된 이중적인 세대를 다 품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현재 존재를 아까 이야기한 것 같이 미래 존재로 봐도 괜찮아요. 왜? 미래에 이 세상을 불로 다 싸질러버리니까. 이게 미래 일이잖아요.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러 오신다. 이게 미래 일이잖아요. 미래 일이지만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이게 바로 현재 일이 돼요.

예수님이 자기가 죽고 난 뒤에 부활될 걸 아는 것은 살아 있을 때는 미래 일이지만 베드로한테 제자들한테는 내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난다. 이게 뭡니까? 예수님 안에서는 성령 안에서는 이게 현재 일이 되는 거예요. 도적 같이 온다. 기다리자. 기다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거는 성령께서 주인공이니까 그렇게 인도하시는 거예요.

요한복음 15장 보시고 16장 보겠습니다. 15장 보시고 제가 질문을 던질 테니까 강의를 마감하면서 반드시 답변해야 될 질문입니다. 우선 요한복음 15장 19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20절) 주님을 핍박 안 한 사람도 너희를 핍박할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했단 말이죠. 질문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주님께 속한다는 것은 내가 어떻게 지켜낼 수 있습니까?

말씀이 있는 건 아는데, 그리고 믿습니다, 라는 말은 하고 싶은데 ‘내가 믿습니다’란 말이 괜히 안 믿으면 지옥 갈 것 같아서 졸아서 예예, 셰셰하는 식으로 믿습니다, 하는 것인지 진짜 주님의 믿음이 들어와서 믿습니다, 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 판정을 하느냐 이 말이죠. 이걸 답변을 좀 하셔야 오늘 강의가 정리가 돼요. 누가 답변을 해보세요. 이걸 확정하고 확인할 수 있느냐? 시간 갑니다. 오초 드리겠습니다. 1, 2, 3, 4, 5. 겸손해서 답변 안 하는 건지, 몰라서 안 하는 건지….

핍박을 사랑하면 되잖아요. 이게 아까 나왔잖아요. 속했다는 그다음에 나오는 증표가 뭐였던가요? 나는 속했다. 한라산 가서 나는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러면 그건 한라산 지 혼자 올라간 거고 한라산 내려가면 주변에 누가 있어요? 우리는 어디에 속했습니까? 육신이 세상에 속했잖아요. 세상에 속한 것과 짝을 이루어서 무슨 현상이 일어난다? 핍박하는 쪽과 핍박받는 현상이 일어나신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주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내용이에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그 앞에 핍박 이야기가 나오지요. 어제 오후 설교 본문에. 핍박을 내가 자진해서 하면 돼요, 안 돼요? 그거는 마귀에 속한 거예요. 순교하겠다고 난리치는데 진짜 순교와 가짜 순교의 차이점은 뭐냐? 진짜 순교는 모든 일에 감사해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자기에게 할 일을 주신 것에 감사해요.

할 일이 뭐라 했습니까? 잠실에서 선거관리사무실 찾아가는 거죠. 항상 마음이 어디 가 있어요? 십자가한테 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너희를 죽였잖아. 너희는 끝났어, 끝났어. 그게 아까 내가 달려갈 길 다 달리고 무슨 싸움을 한다? 선한 싸움을 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그때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때 사도 바울의 마음이 뭐냐 하면 영적 싸움을 하는 거예요.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어떤 현장에 가던 하게 하셔요. 놀러가도 크루즈여행 가도 싸울 거예요. 영적 싸움을. 감사하느냐, 감사 안 하느냐에요. 감사한다는 것은 뭔 뜻입니까?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니다. 나를 지킬 내가 지킬 주인에서 누가 탈락했다? 일찌감치 내가 주인에서 탈락했다.

이거는 정신분석학과 관련된 내용인데요. 정신병을 치료한다는 의미는? 정신병 걸렸는데 이게 치료되었다는, 정신병을 치료한다는 말은, 정신병에서 뭐하느냐 하면 정신병은 앞에 뭐가 중간을 거치지 않고 실재와 마주치는 게 정신병이에요. 그럼 정신병이 치료되었다는 말은 실재, 실재라 하는 것은 걷잡을 수 없는 충동, 또는 도박, 그리고 중독 이런 거예요.

치료되었다는 것은, 예를 들어서 여자가 한 번 성형을 했으면 그다음부터 계속 성형을 하게 돼 있거든요. 전체 균형이 안 맞는다고 또 성형해요. 코만 하려고 했는데 코 하고 나니까 눈과 안 맞아 또 성형해요. 문신하듯이 계속 퍼지게 돼 있는데…. 정신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중간에 뭐냐 하면 남이 이야기해주는 가짜 나를 여기다 박아 넣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너는 훌륭하다, 너는 이 세상에 보람 있는 인간이다, 너는 잘 될 수 있어, 너는 부모한테 효도할 수 있어, 너는 이웃한테 필요한 존재야, 라는 가짜를 박아 넣으면 이 정신병은 실제로 가지 않고 어디로 가느냐? 그 가짜를 만들어주는 세상에 속하고 어울릴 수 있기 때문에 뭐라고 한다? 이걸 치료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에요? 사람은 환상 없이는 못 살아요. 계속 자기를 숨기고 감추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결국 이거는 치료가 된 게 아니고 자기를 위장한 거죠.

그러나 성령은 뭐냐 하면 성령은 끝까지 내가 지옥 가야 되고 죄인인 것을 말씀이 계속 합니다. 우리를 끝까지 밀어붙여요. 끝까지 밀어붙이면 더 이상 내가 나를 ‘나는 이런 인간이다’ 하고 앞에 ‘나’자를 붙일 대상조차도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됩니다. 그걸 제가 낮 설교에 영어로 했어요. body에요. 몸이에요. 남는 것은 몸밖에 없고 그 몸마저 불에 태우잖아요. 화장하잖아요.

결국 인간은 나라 하는 것은 세상에서 부모가 이름 주고 한 것이 내가 흙이 흙으로 산다 하는 이것은 너무 무모하기 때문에 부모가 거기다가 환상을 심어준 거예요. 네가 태권도 잘하면 금메달 따, 이런 것들이, 네가 배드민턴 할래? 안세영 봤지? 1년에 20억 버는 것 봤지? 너도 주특기 발휘하면 되는 거야. 임윤찬이 봤지? 어릴 때부터 동네학원에서 피아노 쳐서 세계 최고잖아. 20대에 벌써 거장이잖아. 군에도 안 가고.

이런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그 사회가 용납이 되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정신병은 용납이 안 돼요. 용납이 안 되는 것을 사회가 부드럽게 치환해서 받아주는 자가 되면 그걸 치료됐다 하는 거예요. 마귀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뭘 준다? 계속해서 환상을 주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어떤 보람을 주는 거예요. 그거는 기적이야, 이런 식으로.

그러나 성경은 성령이 와버리면 관심이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버티느냐가 나의 삶의 이유에서 날아가 버리고 주를 위해서 도살할 양같이 주를 위해서 벌써 다 이룬 일에 대해서 우리는 그걸 증거하는 일이 목숨 걸고 해야 될 즐거운 일이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게 에베소서 6장에 보면 바로 우리의 싸움은 무슨 싸움? 혈과 육(body)이 아니요 공중 권세 잡은 자와 싸운다. 그래서 거기에서는 잠깐 그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죠. 거기에 무기가 나옵니다. 무기 내용이 뭐예요? 다 이룬 거예요. 예수님께서 홀로 이룬 것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작용을 해서 우리는 이 말씀대로 가만있어도 뭐가 돼요?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왜?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핍박을 받는데 기뻐.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 받는데 감격의 눈물이 막 나오는 거예요. 배가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고 있는데 “나와 빨리 나와. 배 타야지” 하고 있는데 ‘내 주를’ 하고 한 사람이 연주하니까 다른 사람이 덩달아 “나도 안 갈래” 해서 ‘내 주를 가까이’ 연주하고 있더란 말이죠.

연주해서 구원받았어요? 아니지요. 이거는 뭘 잊어버렸어요? “산들 뭐하나. 밖에 나가서 월급 받고 살겠지.” 그러나 주어진 것에 대해서 그 순간적으로 지금 내가 주를 위해서 할 것이 뭐야만 생각하는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디부터 출발했는지 나로부터 출발해야 되는지 아니면 예수님 십자가로부터 출발해야 되는지 이제는 그게 구분이 되는 그런 성도로서 주께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날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부산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권의 책  (0) 2026.05.13
척도의 변화  (1) 2026.04.15
희생의 알고리즘  (0) 2026.03.11
아들 안의 아버지  (1) 2025.12.10
기억에 없는 기억  (1) 2025.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