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11a 부산강의 : [시편]85(69:28)-두 권의 책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69편 1절에 물들이 내 영혼까지 들어왔습니다. 물들이 내 영혼에 넘치게 했다. 영혼에 물 들어오면 안 되지요. 여기 영혼이라 하는 것은 정신세계인데 물이라 하는 것은 자연세계, 실물이죠. 실정. 실정이 영혼을 덮칠 수 있는가? 샤워하는 것도 아니고. 이걸 통해서 이 자연은 영혼세계를 침범해선 안 되는데 물들이 들어왔다. 물들이 들어왔으면 영혼은 뭐냐 하면 수몰되겠지요.
수몰되면 여기서 영혼이 숨을 못 쉰다는. 이걸 통해서 인간의 신체가 뭐로 되느냐 하면, 신체를 영혼의 가현체, 영혼이 있음을 보여주는 몸으로 표현을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인간이 몸이 있다’ 할 때 그거는 자연물의 대상이잖아요. 과학의 대상인데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몸은 안에 몸의 주인공이 따로 있다. 이게 몸은 뭐냐 하면 영혼의 집, 영혼의 거주지가 됩니다.
그런데 이게 원래 거주지가 보존을 받아야 되는데 물들이 와서 덮쳤으니까 영혼이 혼미하겠지요. 2절에 이걸 가지고 ‘수렁’이라고 해요. 수렁에 빠졌다고 돼 있지요. 4절, 수렁에 빠진 영혼이 슬슬 혼미하게 된 이유가, ‘무고’를 받는 거예요. 3절에는 내 눈이 어떻게 됐어요? 쇠약해졌다. 내 눈이 쇠하였다. 지금 다윗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육신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요.
지금 계속 우리의 의문점은 뭐냐 하면, 누가 다윗의 영혼을 치느냐? 누가 다윗의 몸을 치느냐? 둘 중에 어느 쪽이겠어요? 길 가다가 어깨 툭 치는 걸 말하는 것 아니지요. 내 몸에 대한 몸의 거주지를, 영혼을 쳐버리니까 다윗의 영혼이 혼미해졌어요. 쇠약했고. 이게 슬슬 정체가 드러나는 게 뭐냐 하면 무고, 다른 말로 하면 억울함이 여기서 된다 이 말이죠.
그다음에 5절,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현상이 5절인데 갑자기 자신의 영혼이 쇠약한 것은 다윗은 뭐라 말하느냐 하면 자기의 우매함이라. 우매하다는 건 자기가 어리석다. 내가 어리석었습니다, 라고 갑자기 자기한테 화살을 돌려요. 6절에 보게 되면, 이제는 자기 걱정이 되는 동시에 자기와 함께 있는 자신을 하나님의 선지자, 왕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하지 못할까 걱정합니다. 나로 인하여 다윗 편에 서있는 사람이 욕을 당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을 통해서 다윗의 영혼이 뭔가 개인문제가 아니고 함께 있는 사람을 고려한 다윗의 영혼이라고 생각되지요. 이 점을 여러분들이 쉽게 알려면 지금 안에 다윗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면 이해하는데 그렇게 힘들지 않을 겁니다. 7절에 있는 단어는, ‘수치’에요. 이 수치는 누구 수치냐 하면 자기 수치, 다윗 자신의 수치에요. 8절에 보면, 가정의 냉대. 가족의 냉대, 가까운 사람의 냉대.
나의 수치, 냉대. 지금 이 이야기하면서 제가 다시 이야기해드리면 지금 다윗을 이야기하는데 이걸 쉽게 하려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예수님 생애 중에서 당한 모든 수치를 시편 69편을 통해서 지금 미리 다윗이란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래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런 수모를 당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데요.
이것까지 생각하세요. 예수님 믿는 우리도 이런 전철을 우리 인생 가운데서 이게 카피되듯이 반복되는 것을 각오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다윗에게 일어난 이런 수모가 예수님에게 그 짐이 진짜 본질은 예수님께 다 이유와 정체, 다윗을 공격했던 그 원수의 정체 다 드러나고, 그다음에 예수님을 믿게 된 자에게 동일하게 다윗이 겪었던 똑같은 수모를 겪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다윗-예수님-성도’가 하나의 본질로 이어져있고 연결돼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편을 보면서 사적으로 사주팔자 보지 마세요. 우리의 사주팔자는 끝났어요. 예수님이 당했던 일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따로 개인적인 사주팔자, 그거는 소용없습니다. 무릎팍도사 같은 것 찾지 마시고.
그다음에 10절의 내용은, 자체적으로 다윗이 자기를 낮추지요. 그건 금식입니다. 금식은 자기 욕망을 일시적으로 금지시키는 거죠. 금식 가운데 가장 기본 욕망이 먹는 거예요. 그 먹는 것을 끊었다는 말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란 말이죠. 금식이란 말은, 이대로 내가 더 산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의미가 없다.
하나님에게 나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줄 때만, 하나님이 나를 사용할 때만 그게 나의 존재의 의미, 삶의 의미지 독자적으로 나의 의미라 하는 것은 저는 스스로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것이 금식이에요. ‘나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게 금식입니다. 금식을 할 때 주위 사람들이 다윗의 금식을 어떻게 보느냐? 10절에 보면, 도리어 욕을 하지요.
그리고 10절에서 12절까지 한 단어로 하면, ‘희롱’ 희롱 당함, 놀림 당함, 놀림을 당해요. 그리고 14절에 아까 2절에 나온 단어 또 나오지요. 뭡니까? 수렁. 15절에 1절에 나왔던 단어 나옵니다. “큰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지금 다윗을 질식할 것 같아요. 15절의 단어는 ‘질식’입니다.
시끄러우니까 다시 봅시다. 물이 넘치는 엄몰, 수렁, 쇠약, 무고, 우매함, 욕을 당함, 수치, 냉대, 희롱 당함, 그다음에 질식. 지금 이 사태가 어때요? 사태가 스스로 자기의 의사대로 자기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없는 지경에 완전히 빠져있지요.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했지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고요. 누구 이야기입니까? 다윗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입니다. 이걸 그림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구약에는 다윗, 신약에는 누가 있다 했습니까? 성도들의 있지요. 다윗이 십자가를 향하여 가고, 십자가에서 다 이룬 형태로 이렇게 성도에게 오는 거예요. 여기서 시편 69편이고, 오늘날 성도는 신약성경 전체에 해당되는 사람이죠. 이렇게 됐을 때에 세상에서 들었던 나의 개인적인 평판이라든지 나의 개인적인 소박한 인생 계획 같은 것은 어떻게 됩니까?
다윗과 하나님의 언약된 관계, 하나님과 다윗 관계가 우리에게 그냥 덮쳤다 이 말이죠. 여기서부터 저나 여러분들이 궁금해야 되는 게 있어요. 궁금한 것 적을게요. 답변해보세요. 다윗이 누구에게 당했는가? 다윗이 가만있는데 자진해서 고생한 건 아니니까. 다윗이 누구에게 당했는가? 다윗을 힘들게 한 게 누구냐? 그 답변은, 이렇게 답변을 옮겨야 돼요. 예수님이 누구한테 당했는가?
그러면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도의 곗돈 떼어먹고 도망간 것, 성도는 도대체 누구한테 당하고 있고, 성도의 마음을 힘들게 한 건 누구냐? 그것은 다윗의 원수요, 동시에 누구의 원수가 돼요? 예수님의 원수가 성도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여기서 힘들다는 말은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매하다 하니까, 아까 우매가 몇 절에 나오지요? 5절에 나오지요.
다윗은 나는 우매하다. 왜? 내가 이런 상황인줄 모르고 나는 내 계획대로 룰루랄라 살았는데 이런 상황이 덮칠 줄은 몰랐습니다. 이런 상황을 미리 대처하지 못한 것은 다 누구 탓이다? 나의 어리석음 탓이다, 라고 했다 이 말이죠. 이걸 아주 이렇게 해봅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해답을 통해서 문제를 파악하기 위함이다.
보통 세상에서는 내가 모르는 것을 질문을 하고, 답변을 내가 얻잖아요. 근데 성도에게는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하면 이미 해답으로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에요. 해답으로 둘러싸여 있는 데 오늘날 우리가 안일하게 살다보면 현재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이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해답을 받은 상황인데 이게 왜 최종적인 해답인지를 모르는 우매함,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사소하고 소소한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 자체가 해답이라면 결국은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뭐가 나오겠어요? 끝에 뭐가 나올 때 ‘아하 해답 얻었다’ 할 경우 그때 감정상태가 어떤 감정상태입니까? 감사하겠지요. 그 감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예요. 그게 몇 절에 나오느냐 하면 30절에 나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됐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게 뭐냐 하면 내 기쁨 말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그게 하나님의 기쁨이 해답으로 다가올 때 나도 하나님의 기쁨에 합류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해답인 거예요. 감사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트럼펫, 악기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시내산 꼭대기에서 율법을 줬잖아요. 율법이 해답이잖아요, 하나님의 말씀.
말씀이 나올 때 곱게 나왔습니까,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까? 무슨 소리죠? 나팔 소리. 천사가 하나님의 악기로 사용되는 거예요. 그 악기에 누가 참여되느냐? 요한계시록에 보면 우리 성도가 주님의 악기로 거기에 벌써 해답으로 편성돼 있습니다. 천국의 관현악단에서 여러분들은 드럼치렵니까, 피아노치렵니까? 그거는 주께서 원하는 대로 하는데 거기에서 감사함으로 찬양이 나올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거예요.
시편 50편에 보면 길기 때문에 요약해드릴게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할 때 제물을 가져왔잖아요. 시편 50편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그 제물 왜 가져와?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제물이 아니야.” 왜? 산에 있는 제물을 네가 나한테 갖고 온다고 해서 산에 있을 때도 하나님 내 거였고 갖고 왔을 때도 이게 내 거였다.
이 말은 뭐냐? 어떤 것도 너의 소유는 있다, 없다? 너의 소유는 없다. 내가 다 너한테 준 거잖아요.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준 걸 갖고 오는 걸 원하는 것이 아니고 동물 갖고 오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내 앞에서 인정하는 것이 나를 영화롭게 한다 했어요.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죽여야 된다는 그 취지, 제물을 죽이지 아니하면 나는 안 기쁘다는 취지를 알아채는 것이 나를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까 여러분들이 1절에서 15절 보면서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상황을 하나님이 말씀으로 조성해가지요. 가만있는 다윗에게 어떻게 합니까? 다윗을 힘들게 하지요. 힘들게 할 때 다윗은 뭘 모르느냐? 스스로 우매해서 자기를 힘들게 하는 것에 대해서 ‘왜 이렇게 힘들지?’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힘들게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신다는 해답이 거기 있는 거예요.
다윗은 개인적으로 자기가 편안하게 살며 행복하게 살면 그만인데 그게 아니고 어디에 참여하는 것, 어떤 고통에 무고니까, 아까 무고 나왔지요. 무고한 고통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다윗이 자기의 사적인 행복을 치우고 이 무고한 어떤 분의 고단에 함께 동참하는 그걸 경유해서 주께 내가 예상 못한 감사가 튀어나올 때 그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시편 69편이.
그러니 개인적으로 내 인생 어떻게 해볼까, 하는 것은 물론 인간 영혼의 본성이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으로는 다윗이 갖고 있던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가 흐릿해지겠지요. 해답도 모르면서 요양병원 갈 때까지 평생을 사는 것이 대다수 인간입니다. 해답도 모르면서 기껏 내세운 해답이 뭐냐? 한 평생 나는 무탈하게 살았다. 뭐 자식 잘됐다, 돈 여유 있다. 이걸 해답이라 치고 내놓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기뻐하는데? 그건 난 모르지. 자신의 사적인 행복만 챙기다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뭘 원하는지 관심도 없어요. 자기 단도리하기 바빠서. 그래서 16절부터 진도 나가기 전에 여기서 우리가 방금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서로 대비되는 식으로 동일한 체험이 이뤄진다, 라는 그것을 이렇게 하게 되면 여러분이 알기 쉽습니다.
처음에 출발을 인간은 유신론으로 출발해요. 이것 성경에선 우상입니다. 유신론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신이 있는데 이 신이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한 신이에요. 나를 위한 하나님입니다. 출발을 유신론부터 출발해야 돼요.
그런데 여기에 다윗에게 갑자기 억울하기 짝이 없는 무슨 사태가 일어나서 사태로 인하여 다윗의 영혼이 힘들어졌지요. 난데없이 들어오지 말아야 될 물이 막 차고 들어와서, 풀장에 들어갈 때 답답하잖아요. 숨을 못 쉬니까. 숨을 못 쉴 정도로 뭔가 낯선 물이 차서 내 영혼이 어쩔 줄을 모를 때 이 과정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는 과정입니다.
유신론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유신론이 한계에 이르러요. 그럼 유신론에서 어디로 가야 되느냐? 무신론으로 가야 돼요.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을 안다’에서 내가 우매해서 어리석어서 내가 아는 하나님은 나와 조인트된 나와 결합된 나를 위한 하나님이었습니다, 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태가 일어나요.
무신론을 하게 되면 그다음에 어디로 오느냐? 말씀의 세계에 비로소 입성하는데 이 말씀의 세계가 언약의 세계에요. 언약의 세계에 입성할 때 유신론은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 출발했지요. 나를 위한 하나님이 말씀의 무신론으로 들어갈 때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위한 나로 바뀌어요. 이것 안 바뀌면 구원 못 받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우상이에요. 신을 믿어도 우상에 불과해요.
그런데 우상 된 자는 어딜 가야 돼요? 무신론자 돼야 돼요. 무신론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버림받은 자. 누구로부터?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돼요. 이게 바로 십자가잖아요.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께 버림받지 아니하면 나를 위한 내가 안 버려져요. 고집이 세서. 마귀가 우리를 작동했기 때문에 우리는 나를 버릴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 버림받을 나를 버리십니다.
버릴 때 어제 낮 설교에 몇 번 강조했던 게 나오는데 그걸 내가 적어볼게요. 나는 여기 있는데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내가 갈 수 없는 거예요. 나는 철저하게 나 위주로 살아요. 그래서 내 위주로 사는 사람을 천국에서 어떻게 합니까? 받아줍니까, 안 받아줍니까? 안 받아주지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어딜 못 가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주님 가신 길에 가질 못해요.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미리, 미리 가 있다는 이야기를 어제 낮 설교 때 했지요. 여기서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럼 내가 여기 있고, 내가 두 개란 말이냐. 여기 있는 나는 현재 있는 몸을 통제하고 있는 난데 여기 있는 나는 나 아니고 몸이에요, 몸. 이 몸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새로 만들어진 열매로서 몸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습니다. 나는 여기 있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내 몸은 이미 예수 안에, 천국 안에 가 있는 거예요. 미리 가 있는 거예요.
미리 가 있는 루트, 경로에 대해서 이거는 우리가 못하잖아요. 왜? 갈 수 없는 곳이니까. 내가 아무리 기도하고 애써도 그 나라에 갈 수 없어요. 갈 수 없다는 말은, 미리 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경우는 이 과정에 누가 개입했다는 겁니까? 내가 내 인생에 개입했다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주님의 생애가 주님의 일대기가 이 안에 개입하게 되면 카피를 하게 돼요.
주님은 원본이잖아요. 두 번째 아담의 원본이죠. 마지막 오신 아담이잖아요. 첫 번째 아담이 우리를 몸으로 복제를 해서 이만큼 80억 인구가 된 것처럼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의 부활의 능력으로 지옥에 있는 우리를 빼낼 수 있도록 복제를 해요. 그것이 뭐냐? 양자의 영이고, 그게 예수님의 마음을 복제를 해버리면 시공간적으로는 나중이지만 예수님 안에는 시공간의 차이가 없어요.
주께서 다 이루었다 할 때는 우리 몸은, 가짜 몸은 여기 있고, 지방을 오백 그램 뺐잖아요. 가짜 몸은 있는데 진짜 몸은 주께서 따로 만들어져있어요. 이건 흙에 속한 형상이니까 어떻게 돼요? 폐기돼야 되고, 폐기돼도 괜찮아요. 왜? 하늘에 영광의 몸이 준비돼 있으니까요. 이미 만들어져있어요, 이 몸이. 이것을 성령을 통해서 당겨서 미리 아는 거예요.
원래 신부가 신랑과 만날 때 기름은 언제 준비해요? 신랑 올 때 만나잖아요. 그런데 신랑이 안 나타나도 지혜로운 여자는 기름을 미리 준비했지요. 보청기를 미리 준비했지요. 신랑 떴다 하면 늦었어요. 보청기, 안경을 미리 준비하잖아요.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지혜롭다 해요. 지혜는 우리가 몰라요. 우리는 우매해서 모르는데 성령 안에 있는 주께서 행하심이 지혜로 미리 우리에게 택배로 지혜만 운반하고 이 몸은 폐기 수순에 들어가요.
주께서 개입할 때 주어지는 것이 뭐냐? 예수님의 믿음과 예수님의 소망과 예수님의 사랑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성령을 통해서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여기서 우리는 뭘 포기해야 돼요?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을 포기하죠. 내 사랑을 포기함이 요한일서 4장에 나오지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 우리가 주님을 소망한 적도 없어요.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돈을 소망하지 주님을 소망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구색에 불과한 거예요. 우리는 주님을 믿어본 적이 없어요.
우리는 왜 그러냐 하면 예수 믿는 나를 믿기 때문에 예수 믿는 나를 믿는 믿음이 진짜 예수님 믿음을 방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이 해답인 줄 알고 있어요. 우리 이 몸이 해답이 아니고 주님과 주님이 마련한 그 몸이 해답이죠. 그러나 우리는 습관화 때문에 살아온 이것 때문에 그냥 나 이대로 살래. 나 욕심 안 내겠어, 이렇게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유신론이에요.
유신론의 특징은 유신론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바로 신학이 들어 있습니다. 조직신학, 성경신학. 내가 불신앙을 집어넣으면 되는데 불신앙이 안 되기 위해서 신학과 성경지식으로 나를 채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점점 더 신학 알겠다, 말씀 알겠다, 뭘 포기 못합니까?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는 거예요. 이거는 성령이 아니면 안 되는 거죠.
자기 자신의 신앙 연조, 교회 봉사한 것, 이런 것 차있으니까 막상 실생활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지니까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1절에서 15절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이 연거푸 막 튀어나오는 거예요. 1절에서 15절까지 다윗은 뭐냐 하면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안다는 거예요. 유신론이죠. 그런데 그 마음가짐은 너무 개인주의적이죠. 너무 개인적이에요. “나 왜 이렇게 힘들어? 가족이 나를 버렸어.”
그런데 여러분들은 ‘나 안 그럴래’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이 절차가 그러니까. 유신론에서 무신론, 이기주의. 유신론이 곧 하나님 믿은 게 아니라는 것이 파토 나는, 그게 완전히 까발려지는, 그게 노출되는 그런 경로를 밟아야 그다음부터는 ‘내가 믿습니다’가 아니라 말씀의 사람으로 입성하게 돼요. 말씀이 나를 만들었고 다듬었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이 과정 속에서 진짜 내 모습은 어떠냐 하는 것은, 우리가 인생 살면서, 다 인생사는 것이 우연인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이 정도밖에 안 돼, 라는 것을 온 몸이 저리도록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여러분의 나이만큼 살아오신 거예요.
그 모든 생애의 특징은 뭐냐, 의미는 뭐냐? 나한테 내가 어떻게 잘 됐느냐, 못 됐느냐? 멍게 먹고 배탈 났느냐, 안 났느냐 하는 그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님, 백날 주님, 삼위일체 해도 관심사는 어디에 꽂혀있어요? 티눈 같아. 내 발에 티눈이 몇 달째 안 뽑히는데…. 티눈 같이 ‘나’가 박혀있어요.
근데 이걸 빼면 안 돼요. 왜? 이걸 안 빼야 나는 나만 믿는, 오직 온 정신을 나에게 쏠려서 남들에게 내세우려는 그런 인간밖에 안 된다는 것을 내가 바로 불신자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원수라는 이 경로는 느껴야 돼요. 젊은 사람들 그런 걸 많이 느껴요. 그래서 두 사람에 하나씩 보세요. 많이 복사를 못했는데. 젊은 사람들의 오늘날 인식 같은 것, 가사를 볼게요, 그 사고방식이 어떤지.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조금 덜 만나고 조금 덜 기대하며
많은 약속 않기로 해요
다시 이별이 와도 서로 큰 아픔 없이
돌아설 수 있을 만큼
버려도 되는 가벼운 추억만
서로의 가슴에 만들기로 해요
젊은 사람들의 세상관입니다.
이젠 알아요 너무 깊은 사랑은
외려 슬픈 마지막을 가져온다는 걸
그대여 빌게요 다음번의 사랑은
우리 같지 않길 부디 아픔이 없이
나나~~
꼭 나보다 더 행복해져야만 해
많은 시간이 흘러 서로 잊고 지내도
지난날을 회상하며
그때도 이건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죠
이젠 알아요 너무 깊은 사랑은
외려 슬픈 마지막을 가져온다는 걸
그대여 빌게요 다음번의 사랑은
우리 같지 않길 부디 아픔이 없이
이젠 알아요 영원할 줄 알았던
그대와의 사랑마저 날 속였다는 게
그보다 슬픈 건 나 없이 그대가
행복하게 지내는 먼 훗날의 모습
나나~~
내 마음을 하늘만은 알기를
(<다시 사랑한다면>, 도원경, 2001년)
이 노래, 가사가 어때요? 젊은 사람들을 그대로 대변해주지 않습니까. 결혼해도 너무 가까이 가지 말고 너무 멀지 말고. 언제든지 헤어질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이혼할 준비하고 뭐한다? 결혼하는 거예요.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노래는 여러분 알아서 들으세요.
젊은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어떻습니까? 오히려 나이 많은 우리들이 드디어 본색이 들키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평생을. 건성으로 어떻게 서로에 대해서 이거는 부모 자식도 마찬가지고, 부부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 친구도 마찬가지고. 맨날 테스트하다가 남을 시험, 테스트해보고 갖고 놀만한가, 아닌가, 테스트하다가 결국 믿을 것은 누구밖에 없다? 나밖에 없다. 이게 유신론이잖아요.
그러면 이걸 그대로 신앙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너무 깊게도 믿지 말고, 너무 떨어지지 말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식이 요령이 있는 우리 인생의 삶이다. 이게 우상숭배입니다. 나라는 우상숭배. 그걸 오늘 본문 다윗도 겪고 있습니다.
여기에 예를 들면 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떨어져도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여겼던 자들은 누굽니까? 바로 형제자매지요. 근데 여러분들이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활동 개시하면서 누가 떨어져나가요? 일가친척이 떨어져나가죠.
마태복음 13장 55~57절에 보면,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근데 젊은 사람들은 이 가사에 의하면 배척할 줄 알고, 언제든지 배척해도 손해 보지 않을 선까지만 간격을 가지고 다 주지 말고, 그것도 뒤로 빼지 말고 적당한 선에게 이렇게 살아가는 게 인생을 살아보면서 인간의 경험 치죠. 그래서 딸을 시집보내면서 부모로서 할 말은 뭐냐? “너무 많이 주지 말라. 너 상처 받으면 언제든지 다시 친정으로 돌아와. 널 받아줄게. 사는 게 힘들 때는 언제든지 받아줄게.”
그런데 사는 게 힘들어서 받아주는 게 아니고 애나 보라고 하죠. 그렇게 되지요. 이게 얼마나 인간은 자기 위주고 요령꾼입니까? 초등학교 모든 교육이 그쪽에 집중돼 있지요. 이것을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 세상에는 지식은 있는데 뭐가 없느냐? 진리라는 것이 없는 게 아니고 진리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것을 나한테 들어오는 것을 내가 거부해요.
왜? 진리는 어느 정도가 진리 되느냐 하면 내 목숨을 더는 생각하지, 내 의미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맞바꿀 수 있는 그게 뭐예요? 그게 끝장내는 끝장 보는 진리거든요. 그런데 아까 가사에 보면 뭐가 없어요? 끝장 보는 것을 사전에 차단해버리죠. 끝까지 진리는 누가? 내 존재가 진리죠. 그러면 요한복음 14장 6절, 나는 뭐다? 나는 길이요, 그다음 뭡니까? 진리죠.
그러니까 아무도 예수를 안 믿는 거예요. 교회 다니면서 예수를 많이 다들 찾고 있는데 절대로 나를 예수님에게 넘겨주진 않지요. 왜냐하면 최종적인 의미는 예수님이 의미가 아니고 내가 최종적인 의미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 그 구절은 이렇게 바꾸어서 읽어요.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죠. 그걸 뭐로 바꾸느냐? 아니, 아니. 영어로 NO!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생명이다. 그런 식으로 신학교 안수 받고 목사 되고, 집사 안수 받고 모든 교인들이 세례 받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요. 그러나 예수님 빼놓고 예수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줄 때는 이 말씀 앞에서 모든 인간이 우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율법의 기능과 동일한 기능이죠. 그런데 시편 69편에서 다윗이 그 선을 넘었어요. 야, 이게 놀라운 거죠.
다윗이 15절까지 개인적으로 있다가 드디어 몇 절이냐 하면, 16절부터 응답을 달라 해서 응답이 주어지는 상태, 응답이 된 상태, 응답은 아까 뭐라 했습니까? 답이라 했지요. 답이 주어진 상태가 17절, 18절, 19절, 21절, 22절, 계속 돼요. 여러분들이 궁금한 것은, 여러분들이 궁금한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점심 먹고 잠잔다고 바빠서, 잠이 막 엄몰하죠. 물이 엄몰하는 게 아니고 잠이 엄몰해요.
다윗이 알았던 정답을 남의 이야기처럼 여기면 안 되지요. 우리도 뭘 알아야 돼요? 과연 이 선을 유신론, 무신론, 그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드디어 내가 최종적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 완성이 최종적이 되어서 그쪽 넘어가야 어디 갑니까? 천국 입성하지요. 그게 답인데 그 답을 다윗은 어떻게 이해했느냐? 이렇게 합니다. 다윗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이게 나와요. 저주 나와요.
다윗 입에서 저주가 나왔다는 말은, 성도가 자기 위주로 최종적으로 자기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고 남한테는 안 들키지만 본인만은 이거는 확고한 최종 믿음으로 알고 있던 내가 천국에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입성이 되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우리 입에서 뭐가 나오게 돼 있습니까? 저주가 나오게 돼 있어요.
여러분, 인간 입에서 저주가 나온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여기서 내 입에서 저주가 나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걸 지적할 수 있는 수백 가지의 윤리도덕적인 이론을 우리가 알고 있어요. 수백 가지에요, 수백 가지. 같은 죄인끼리 그럴 수 있느냐, 이것부터 시작해서 사람이 신앙 같으면 좀 더 예의가 있어야지. 네가 나보다 잘난 게 뭐가 있냐. 거기에 대한 저주하면 안 된다는 것에 반박을 우리가 모르는 게 아니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마태복음 10장이라든지 열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전도를 시키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이야기하기 전에 이것부터 먼저 봅시다. 28절, 잘 깰 겸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27절부터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여기서 인간이라면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뭐냐 하면 죄 없는 인간을 더욱더 뭐한다? 죄인 되게 해주시옵소서. 야, 이 기도. 아무리 봐도 죄가 없어. 그러나 죄 없는 인간을 죄를 넘치게 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거봐. 생명책에 기록이 안 된 호적에 빠져있는 인간이잖아“ 라는 것을 들춰주시옵소서, 라는 발언을 다윗이 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교회 나오는 교양 있는 사람의 입에서는 상상도 못할 이야기가 시편 69편 27절, 28절에 나옵니다. 그렇다면 제가 24절부터 읽어볼게요.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이걸 한 마디로 말하면, 저주가 저주되려면 정죄 작업이 선행돼야 되겠지요. 정죄 작업을 하는데 누가 동원되느냐 하면 멀쩡히 있는 다윗의 영혼, 다윗이 미끼가 된 거예요. 누구 미끼?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이루는 미끼로서 활용 당해서 가만있는데 무고하게 억울하게 당했지요.
그러면 다윗이 시편을 하면서 성령을 통해서 뭘 알았어요? 주께서 나를 뭐로 삼았다? 지옥 갈 인간을 지옥 갈 인간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미끼로 하나님께서 활용해주셨구나. 그 미끼로 활용한 자가 뭐냐 하면 구원받은 자의 전형적인 모델이고 모습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런 저주, 여러분은 제일 싫어하는 게 남을 저주하는 거잖아요. 뒤 담화 전혀 모르지요. 그런 우리는 이러한 저주가 안 나와요. 불가능해요. 왜?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 내가 착한 사람 코스프레, 착한 사람 되는 게 제일 중요한 문제에요. 계속 착함을 유지해야 되니까. 근데 그 입에서 저주가 나온 것, 어떻게 나오는가? 10분 후에.
■20260511b 부산강의 : [시편]85(69:28)-두 권의 책
(강의:이근호 목사)
아까 첫째 시간에 나왔던 노래제목이 <다시 사랑한다면>, 도원경이라는 가수의 노래입니다.
두 번째 시간에서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해요. 왜 불가능하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선도 알고 악도 아는 것을 인간의 정신세계, 영혼이 합류하고 있어요. 인간의 영혼은 구성요소가 뭐로 돼 있다? 선과 악의 대비로 구성이 돼 있습니다. 그것으로 자기의 미래를 자기의 운명을 본인이 통제해서 관리하겠다는 거예요. 악은 멀리하고 선은 취득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신처럼 될 수밖에 없지요. 왜? 악은 싫다하고 의는 옳다했으니까 완벽하죠.
근데 이거는 누구의 의입니까? 방금 이야기한 선악에 근거한 의는 누구의 의죠? 자기 의죠. 자기 의의 특징은 남의 의와 차별되는 독보적으로 오직 자기 의만 챙기는 거예요. 자기 의를 남한테 나눠줍니까? 나눠주려야 나눠줄 수 없지요. 왜? 자기 의니까. 이것이 시편 69편에 나오는 27절과 대비가 돼요.
방금 이야기한 선악은 결국 누구의 의로 모아져요? 브랜드가 누구의 의입니까? 나의 의잖아요. 나의 영혼이 있다면 몸은 거주지니까 이 영혼은 상표가 붙는다면 결국 여기 상표를 머리띠라 하고 안 그러면 배에다 붙이든지 하면, 나는 나의 의를 지니고 있다. 나라는 몸은 나의 의의 대변자다. 그래서 모든 행동과 말에 대해서 최종적으로 나는 정당하다. 나는 어떤 것을 해도 정당하다. 그게 나는 곧 길이요 진리고, 내가 살아 있는 조건 하에 생명이다. 내가 살아 있는 게 생명이에요. 나는 절대로 누가 나를 죽이면 안 돼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뭐냐 하면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이야기해요. 전부 다 한 통속이에요. ‘내가 너를 안 죽일 테니까 너도 나를 죽이지 마라.’ 이게 공자의 말에 있고, 유대교의 성경해석 책에 있고, 불교의 불경에도 들어있어요. 공자 말에 있지요. 남이 싫어하는 것을 네가 하지 마라. 그게 진리다. 마태복음 7장에 비슷한 말이 나오지요. 뭐가 율법이고 선지자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면 남을 대접하라.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한 것은 앞에 산상설교가 있잖아요. 산상설교에 나오는 마태복음 5장 11절 12절에 보면 거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시편 69편 27절에 누구 의가 나오죠? 주의 의인데 앞에 뭐라고 돼 있어요? 이러이러한 인간은 어디 들어오지 못하게 하옵소서?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소서.
신약에 마태복음 6장 33절, 계명대학교 교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의 의에요. 의가 아닙니다. 정의 아니에요. 그분만이 독점한 의의 세계에 네가 들어올 수 있느냐에요. 들어오려면 산상설교 다 지켜야 되겠지요. 오른뺨 맞으면 왼뺨 내놓는, 심지어 오른손이 하는 것은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 말은 왼손, 오른손이 다 하나의 육체에 있는 지체기 때문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요. 불가능한 거예요. 오른손을 뒤로 돌리면? 어떻게 가능해요.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여러분 답답해하니까 미리 결론 내리겠습니다. 저주 속에서만 구원이 있어요. 저주 안 가고 구원받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저주받아야 될 이유가 이 세상에 주님의 의 쪽으로 생산하는 게 하나님의 뜻인데 인간들은 그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적대적 관계를 가질 수밖에 이유가 뭐냐? 누구 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내 의를 내가 갖고 있기 때문에 이거는 극렬하게 반대시위를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나의 의를 내가 뽑아낼 재간이 없습니다. 기도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성경공부하고 모든 것이 어느 통장에 쌓이느냐 하면 나의 비트코인, 나의 펀드에 전부 다 자동으로 이체가 되어 다 들어와요. 그때 내가 땅콩과자 줬잖아. 땅콩과자 준 것만 의가 아니고, 그때 강의할 때 내가 졸았으니까 이건 나쁜 거라는 자기반성도 어떻게 됩니까? 자기 의죠. 하여튼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게 뭐로 해석이 되어서 다 누적이 되느냐 하면 자기 의로 기계가 자동시스템으로 돼 있어요. 말만 해도 모든 것은 자기 의로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방법은 자기 의를 극단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해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설교를 그렇게 많이 들어도 산상설교 다 듣고 심지어 베드로가 물위를 걷고 병을 고치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끝까지 제자들은 천국에 못 갑니다. 그게 누가복음 10장 20절에 나와 있어요. 끝까지 제자들은 천국에 못 가요. 천국에 가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만든 다른 몸이에요. 제자들이 뭔가 어떤 경로를 밟아서 제자라는 인간이 사도로 바뀌면서 사도의 몸이 천국 가는 거예요.
제자의 몸이 사도 몸 사이에 중간에 뭐가 있느냐 하면 오순절 성령이 주어지게 돼 있고, 성령이 주어졌다면 제자들은 비로소 알지요. 내 몸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잖아요. 우리가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가는 것은 나는 죽고 내 안에서 누가 나오고? 진실이 교체해서 계속 나오는 거예요.
왜 교체돼야 되는가?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나와야 되는 이유가, 나의 의는 이미 죽은 채로 내 안에 담겨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주의 의를 주는 게 아니고 나의 의를 끄집어내면서 끄집어내는 그 행위 자체가 주의 의가 돼요. 인간은 모든 것이 어디에 모인다 했습니까? 창고가, 자기 의에 모이지요. 자기 의는 내 힘으로 끄집어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끄집어내지요. 그러니 전부 남 탓하잖아요. 못 끄집어낸다고.
따라서 주님께서는 자기 의를 쓰레기로 이걸 분명히 말씀으로 지적을 하면서 이미 너는 네 정과 욕심은 십자가에 죽었다는 십자가 사건의 효과, 발휘되는 능력으로 바뀌어졌음을 이야기할 때 그때 터져 나오는 것은 감사가 또 나오지요. 쉬지 않고 계속 십자가를 경유할 때마다 감사가 계속 나오고. 십자가 없으면 계속 자기 의가 나오고. 그 두 종류의 인간 차이를 주께선 분명히 하십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 보기 전에 17절부터 먼저 봅시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요래 돼 있지요. 여러분들 칠십 명의 제자입니다.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기뻐하겠습니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기뻐하지요. 왜 기뻐할까요? 아까 원리에 의하면 왜 기뻐합니까? 자신의 가치가 돋보이잖아요. “이 정도였어, 내가? 미치겠네, 정말.” 뭐로 인하여 기뻐하느냐 하면 내 존재가 가치 있고 의미 있다는 이걸로 환장하는 거예요. 기뻐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랑질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뭐라 하느냐 하면 그게 기뻐할 일이 아닌 것은 귀신이 떨어질 때 누구보고 귀신 떨어졌습니까? 제자들보고 떨어졌습니까, 주님보고 떨어졌습니까? 제자들은 지금 착각했어요. 주님의 능력을 마치 자기가 발휘할 수 있는 소유된 능력인 줄 착각해서 자기 이름으로 했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신약성경에 보면 절대로 우리 구원은 누구 이름으론 안 돼요? 내 이름으로 안 돼요. 주의 이름으로 한다고 말하지 말고, 내 이름으로 안 된다고 하세요. 내 고백, 내 이름으로 신앙고백, 이거 안 돼요. 안 된다는 말은 절망이고, 안 된다는 말은 나를 천국에 넣어주지 않는다는 것이 일관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천국에 못 간다는 걸 기뻐하는 세상에 이런 미친 사람 봤어요?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내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 구원받지 못하는 나를 쓰레기 같은 몸을 주께서 구원하셔서 내가 갈 수 없는 그 나라에 그 몸을 영광된 몸으로 바꿔서 미리 빼돌린 거예요, 우리에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탄이 사람들에게 떨어져요? 사탄이 미쳤어요. 자기 종한테 떨어지게. 사탄은 주님 능력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은 착각을 해서 사탄이 자기 말 듣는다는 거예요. 사탄이 바보입니까. 우리나라에서 바둑 제일 잘 두는 사람이 신진서 9단인데 그 9단이 나한테 바둑 졌습니다. 그럼 나 10단할까요? 아니지요. 마귀는 지혜로워요. 뱀처럼. 인간에게 진 적이 없습니다.
마귀의 수준은 인공지능 이상입니다. AI 말고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범용인공지능), ASI(Artificial Superintelligence, 초인공지능)는 어느 정도냐? AI를 AI가 만들어요. 지금까지 AI를 인간이 만들었잖아요. 이제는 인간이 AI를 못 만들고 AI가 AI를 만듦으로써 인간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배제돼요. 앞으로의 모든 것이. 참 이 세상 자체가 점점 귀신의 나라가 돼가는 거예요. 인간은 무지몽매하게 되는 거예요.
그때 여기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이 선언과 판단은 일방적으로 주님이 결정한 거예요. 그다음에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여기까지만 봅시다.
귀신이 나에게 항복한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했을 때 뒤에 괄호, 빈칸을 두었을 때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 빈칸을 채울 다른 기쁨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지요.) 있다는 건 너무 나갔어요. 인간으로선 자기로 인하여 기뻐하는 그게 마감입니다. 끝이에요. 자기한테 환장했어요. 정신병자거든요.
나한테 환장해서 내 기쁘면 그걸로 끝이지 그다음 기쁨은 뭐냐? 내가 나를 삭제, 나와 무관한 일과 더불어서 내가 기뻐하는 일이 되려면 나는 그 과정에서 누가 죽어야 돼요? 내가 방해꾼이니까 나가 떨어져야 되겠지요. 그리고 말합니다. 네가 나가 떨어져도 네가 기쁘냐고 묻는 거예요. 네 구원에 대해서 네가 제거되는 조건으로 네가 구원되어도 네가 기뻐할 생각이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이거는 평소에 우리가 살아온 습관에 의하면 도저히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처음에는 구제했고 기도했고 금식 나오지요. 주기도문 나오는 그 대목이에요. 처음에 구제할 때 주께서 잔소리하시기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했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네가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지옥 갈 이방인들이나 하는 기도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나오고.
그다음에 금식할 어떻게 하느냐? 머리에 뭐 발라라? 기름 바르지요. 인간의 입장에서는 금식하면서 얼굴에 기름 바를 목적으로 금식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왜냐? 그거는 금식을 한 게 아니고, 그거는 선 자리에 나가려고 자기를 메이크업하는. 메이크업하면서 나 금식했다 할 사람 누가 있어요? 그건 미친 사람이죠.
주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행함으로 우리의 한계를 지적한 동시에 이 말씀의 세계에 넘어오는 것은 우리의 역량으로선 불가능하다는 말씀만 주신 거예요. 어제 낮 설교에서 우리라는 것은 어느 대목에서 어느 지점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끊어져있는가를 먼저 찾으라고요.
자꾸 유신론자가 되어 하나님 저 어릴 때부터 사대 기독교 집안이고, 유신론하지 말고 유신론하는 건 좋은데 그렇게 해서 믿어서 주께 내침을 당하는 그 지점을 네가 아느냐? 네가 봉사하는 것 내가 다 아는데, 귀신이 물러가는 것도 아는데 귀신이 물러간 내가 결국 주님 앞에는 천국에 못 가는 존재인 것을 발각당하는 지점이 너한테 있느냐 이 말입니다.
어제 낮 설교에 이야기했어요. 그게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갈라디아서 3장 1절,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꼬시느냐 했지요. 마귀가 알아요. 우리가 얼마나 자기도취에 빠져있는지 마귀가 알기 때문에 마귀는 끝까지 십자가는 가리고 십자가는 안 오고 십자가란 개념으로 자기 자신을 우쭐대게 만드는 작업을 마귀가 한 거예요.
나 십자가 복음 안다, 믿음 안다, 이걸로 우쭐대는 거예요. 이것으로 어디 들어가려고? 천국 갈 것이라고 짐작한다면 마귀로선 대성공이죠. 마귀의 전략 성공이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저주 안에 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구원이 없습니다. 왜냐? 그 코스가 누구 코스입니까? 예수님의 코스지요. 그다음에 나오는 어려운 대목이, 기뻐하지 말고 그다음에 빈칸을 채웁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 우리 이름 기록 내가 했습니까, 내가 원했습니까? 아니지요.
지금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지금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2층에 있는 무당집 나가라, 이랬더니만 이사 간다고…. 자, 이 능력을 받았으면 기쁘겠어요, 안 기쁘겠어요? 기쁘지요. 겉으로는 뭐냐? 하나님이 도와줘서 기쁘다 하지요. 진짜 기쁨은 그게 아니고 내가 구원받은 것을 이제는 확정했다. 자기 구원받을 걸로 확정하는 기쁨, 그 기쁨에 도취되는 거예요. 이 선을 어느 인간도 넘을 수가 없습니다.
이 본문에 어려운 것은 우리의 기쁨부터 먼저 깔고 그 뒤에 네모로 비워뒀잖아요. 앞에 있는 기쁨, 그 기쁨으로 우리의 기쁨은 더할 나위 없이 ‘주님 기쁨 더 안 줘도 됩니다. 이걸로 족합니다’ 할 수밖에 없는 기쁨을 준 겁니다. 왜? 우리가 영적인 것을 이겼으니까 우리가 진짜 마귀 원대로 영보다 더 센 하나님 됐잖아요. 느낌 같은 느낌이죠.
진짜 마귀도 굴복하니까 하나님 됐잖아요. 빈칸이 필요가 없어요. 왜? 이걸로 족하니까. 그런데 이것 기쁨과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과 이거는 완전히 다른 동네 이야기에요. 우리가 할 수 없고 넘볼 수 없는 그 동네 이야기라고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 기쁨은 어떻게 돼요? 우리 기쁨은 우리가 포기를 해야지요.
마귀가 우리 손에 떨어지는 그 기쁨마저 이것이 생명책의 기쁨과는 근처도 오면 안 된다는 것, 섞이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지요. 그 기쁨은 누구 몫이냐? 이거는 우리의 소원의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일방적인 주님의 일입니다. 이 작업을 제자들은 이미 칠십 명들은 경험했잖아요. 이젠 우리가 한 평생 살아가면서 이 경험을 해야 되는 거예요.
진짜 기쁨은 사도 바울의 기쁨이에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진짜 너무나 눈물 나게 알게 된, 자기 자신이 죄인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 그 기쁨은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에게서만 흘러나오는 성령이 주신 기쁨이에요. 앞으로는 더 멍게 잡수시고 겁내지 마시고. 왜? 이 기쁨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분명히 멍게 먹을 때 기도하고 잡수었을 거예요, 감사의.
그래서 이 점을 알기 위해서 또 다시 오늘 특별한 사람이 참석해서 한 번 더 노래 가사 들어갑니다. 그 가사를 보면서 에이 이거는 불신자들이, 이야기하지 말고 불신자라고 욕하지 말고 우리가 이 사람을 과연 저주할 수 있는지 보세요. 아까 다윗은 뭐했습니까? 다윗은 구원의 선을 넘으면서 입에서 뭐가 나오지요? 저주 나왔지요. 왜 우리가 남을 저주 못하는가? 그들 사고방식과 우리 사고방식이 똑같기 때문에 그렇다.
어느 정도 똑같은지를 보여주는 가사가 있어서 제가 하나 해왔습니다. 가사 봅시다. 좀 길어요. 길어야 나도 쉬고 하지요. 제목부터가 너무나 감동적이에요. 보시고 반박을 해보세요. 지금 이 시간에 반박할 수 있는가 보세요. , 삶의 이야기책 표지, cover니까 ‘표지’지요. Isla Grant의 노래.
This world, this is a stage
and we all have to take a part in
이 세상은 한편의 연극 무대와 같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연극속의 한 부분을 담당해야만 되지요
The world's greatest play.
The more work you put in
the more you will find grade
the less will be taken away.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연극은
그대가 더 열심히 일한 것만큼
그대는 더 좋은 결과의 열매를 맺을 수 있어요
정말 게으른 삶을 살았다면, 삶의 결과도 낮아지겠죠
For life is a book full of wisdom and truth
and each day a page is turned over
그대 인생의 삶은 한권의 책처럼 많은 지혜와 진실이 담겨 있어요
그리고 하루하루가 책속의 페이지처럼 지나가고 있답니다
어떻게 반박의 여지가 없지요.
So play your part well
and someday you'll find your name
on life's storybook cover.
그래서 그대가 맡은 역할을 잘해 내세요
그러면 언젠간 당신은 당신의 삶의 이야기책의
표지 위에 기록된 그대 이름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누구의 이름이요? 주의 이름? 아니지요. 나의 이름. 왜? 나는 의로우니까.
We have only one chance to shine in this world
for you see this is not a rehearsal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빛을 비추이며 살 수 있는 기회가 단 한번 밖에 없어요
그대가 아시다시피 삶은 연습이라는 게 없답니다
맞지요.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So make sure your act comes
fair from the heart
그대의 삶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만 되요
어떻게 반박의 여지가 없잖아요.
For you are a product in this life's commercial
왜냐하면 그대는 삶들이 만들어내는
많은 인생들 중에 유일한 그대 자신이 아름다운 상품이니까요
자꾸 이걸 비복음적이라고 말하지 말고, 우리가 이 주장과 반대되는 성향이 있는지를 살펴보세요. 이 주장과 반대는커녕 똑같지요.
The director is there to offer advice
우리의 삶을 잘 영위하게 하는 좋은 조언자들이 그대 주위에 있답니다
목사님들이죠.
Be sure that you listen and take in
그대여 그들의 조언을 귀담아 들어
그렇게 하도록 해야만 해요
And if you lose your way,
Don't be frighten to say;
"I am lost, please God help me to get."
그리고 그대 인생길에 때론 실패한다고 해도
이렇게 말하는 걸 두려워 말아요
하나님! 저 지금 모든 것 다 잃었어요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라고 기도 하는 걸 잊지 말아요
어려울 때 뭐하면 된다? 기도하면 주께서 응답해주신다 이 말이죠. 그다음에 봅시다. 이 사람이 미국에서 유명한 나이 많은 여자 분이에요.
For life is a book full of wisdom and truth
and each day a page is turned over
그대 인생의 삶은 한권의 책처럼 많은 지혜와 진실이 담겨 있어요
그리고 하루하루가 책속의 페이지처럼 지나가고 있답니다
So play your part well
and someday you'll find your name
on life's storybook cover.
그래서 그대가 맡은 역할을 잘해 내세요
언젠간 당신은 당신의 삶의 이야기책의
표지 위에 기록된 그대 이름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자, 책 위에 표지 될까요, 아니면 무덤 비석 위에 표지 될까요? 어느 쪽일까요? 비석 위에 표지 되지요.
So play your part well
and someday you'll find your name
on life's storybook cover.
그래서 그대가 맡은 역할을 잘해 내세요
언젠간 당신은 당신의 삶의 이야기책의
표지 위에 기록된 그대 이름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자, 그대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면 영광은 누가 받지요? 그냥 ‘나’하지 말고, 평생 동안 직싸게 지금껏 인생을 살기 위해서 온갖 수모를 다 겪고 역경을 겪었던 누구? 나. 제가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삶의 이야기책 표지, 이 제목처럼 책이 한 권 있다 합시다. 표지가 뭡니까? 한 자로 ‘나’지요. 나가 인생을 다 살고 하는 이야기도 되겠지만 인생이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 80대까지 계속 여기서 뿜어져 나오지요.
이 뿜어져 나온 걸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걸 대화라고 합니다. 커피 카페의 대화가 전부 어디서 나와요? 나에서 나왔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무나 냉정하게 이걸 지워버리고 여기다 뭘 꽂아 넣습니까? 십자가를 꽂아 넣는 거예요. 십자가는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나를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버리시나이까’가 이게 누구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이잖아요. 주의 이름인 나를 여기다 주께선 나를 겹치는 거예요.
겹쳐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평소에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에 이야기했던 모든 것이 그 안에 뭐가 담겨있어요? “이래서 주님은 나를 버리셔야 마땅하군요.” 그것이 뭐냐? 바로 주님의 의가 되고, 주님의 이름이 되고, 주님의 이름이 커버되는 책을 무슨 책? 생명책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제 제가 가사를 이렇게 프린트해온 이유를 아시겠지요. 아까 약속을 했기 때문에 물어봅시다. 이 노래, <삶의 이야기책 표지>라는 이슬라 그란트의 가사를 들으셨잖아요. 여러분, 반박해보세요. 반박이 됩니까? 그래 맞아. 예수 안 믿는 사람 저주해야 내가 진짜 신자다, 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유신론자, 삶을 하나님까지 인정하고 기도할 줄 아는 유신론자의 고백이 복음적입니까? 아니지요. 복음적이 아니지요.
이거는 가사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를 커버해요? 누구를 방어하느냐? 나를 방어하는데 온 긴장을 거기다 쏟고 있어요. 머리는 잘 나왔는가? 오늘 피부 톤이 괜찮아? 여자들 외출할 때 옷 차려입는데 남편들이 30분 동안 봐야 돼. 좋다 하면 안 입고, 안 좋다 하면 입고 나가요.
이런 노래 가사가 있는데 여러분 기억날 거예요. “내 젊음의 빈 노트에 무엇을 채워야하나” 나이 많은 사람은 기억나지요. 한때 이선희와 라이벌이라 했던 그 사람 유미리의 <젊음의 노트> 이것이 한낱 유행가라고 보기에는 모든 사람이 공감해요. 일기장 쓰는 이유가 뭡니까? 이거잖아요. 이거지만 이걸 성경적으로 보면 뭐냐?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는 모든 아담의 후손들의 공통점, 이것은 스스로 이것을 수정하거나 고칠 수 있는 재간이나 능력은 일체 마귀에 의해서 장악되어서 없는 것.
그렇다면 다윗의 영혼에 물이 들어왔다는 말은 다윗 혼자 있을 때 있었던 현실이 아니고 마귀가 언제든지 내 영혼을 쓰레기에 집어넣고 질식시킬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진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미끼로 사용해야 될 이 세상의 표준적인 상황 상태에요. 모습이에요. 아직까지 왜 성도 입에서 저주가 나오는 이유를 설명 안 했어요. 이거는 일종의 전제에 속하는 겁니다.
에스겔 13장 9절을 보겠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여기 ‘호적’이란 말이 나옵니다. 호적이란 말은 그 전제가 뭐냐 하면 실제로 육신이 나타날 경우에만 호적이 되지 귀신들은 호적이 안 되잖아요.
어제 오후 설교인가 했지요. 오전인가? 천사의 문제점은 뭐가 없다? 육체가 없다. 육체가 없으니까 예수님이 천사를 위해서 구원할 이유가 없어요. 육체가 없으니까. 근데 인간은 쓰레기인 건 맞는데 그 육체에 주님이 합류함으로써 육체를 가졌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천국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천사는 천국의 백성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육신을 가진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그 육신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자라야만 천국의 백성이 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아까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는 어디와 결합이 된다? 육신과 결합이 되는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될 때 그 육신은 죄 있는 육신이에요, 죄 없는 육신이었어요? 예수님께서 죄 없는 육신으로 오셨지만 육신 자체는 뭐냐 하면 이 계통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 아담 계통에서 흘러온 거예요. 아담 계통으로 흘러와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히마리 없다. 영적 세계는 넘보지 말란 말이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에요.
육에서 뭐로 옮겨야 돼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니까 육이 뭐로 바뀌어야 돼요? 영으로 바뀌어야 되잖아요. 영으로 바뀔 때 폴짝폴짝 뛴다고 되는 게 아니고, 영에 계신 분이 뭐로 와야 되느냐 하면 육으로 귀찮지만 영이 육이 되셔야 돼요. 그럼 육이 되면 육의 종류가 몇 종류가 돼버렸습니까? 하나님이 육 되신 그 육의 한 종류와 그냥 마귀의 종으로 아담의 죄로 이어지는 육과 기존의 육과 갑자기 두 종류가 생겼잖아요.
그런데 두 종류가 생겼는데 예수님의 육신은 뭐냐? 자진해서 이 육으로부터 욕을 얻어먹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다윗처럼 욕을 얻어먹는 거예요. 진짜 이쯤해서 해답을 내릴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한테 아주 쉽게 말씀드릴게요. 사실은 졸면서 못 알아들을까봐 내가 초조해서 빨리해야 돼요.
기존의 책 말고 또 하나의 책을 만드신 거예요. 그럼 책이 몇 권입니까? 두 권이죠. 기존의 책은 뭐냐? 기존의 책은 인간의 행함이 기록된 책이에요. 이 인간의 행함이 기록된 책은, 이게 요한계시록에 네가 행한 대로 갚으리라, 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행함 자체가 배후가 있어요.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실어버리는 쪽이 누구냐? 마귀가 그렇게 했어요.
그러나 창조하실 때 행함은 누구의 행함만 인정하느냐 하면 우리 주님의 행함만 인정하고 그 외에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주는 대로 먹으면 되니까 인간이 달리 행함이 필요 없어요. 그걸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게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에 만나 왔어요, 안 왔어요? 안 왔지요. 왜 안 옵니까? 굶어죽으라고 안 옵니까? 그전에 사흘 치? 먼저 주잖아요.
안식일에 해야 될 거는 바로 나를 비껴가는 행함을 해요. 내가 내 노동으로 살리는 행함을 하면 안 돼요. 나를 비껴가는 행함은 뭐냐 하면 우리는 주님의 행하심에 내 행함이 섞이면 안 되는 행함을 보여주면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제사에요. 제사는 내가 존재하는 자체가 누구 결과물이어야 된다? ‘주님의 행함의 결과물이어야 된다’를 인정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럼 목사님, 일주일에 6일은 일하고 하루는 쉬고 그렇게 하는 겁니까, 라고 여러분들이 생각할 거죠. 육일 동안 누가 행하고? 내가 행하고, 하루는 주님이 행하고 그걸 기념하고 그런 겁니까, 이렇게 할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 안식일을 창조의 집대성, 창조의 완성으로 보는 거예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 일곱째 날 할 때 주께서는 언제 완성했습니까?
6일째 완성했습니까, 7일째 완성했습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1, 2, 3, 4, 5, 6과 7은 같은 레벨에 속하지 않아요. 7은 모든 것을 종합하면서 하나의 결과로 보고 원인은 어디에 있다? 7일째 있는 거예요. 창세기 2장 2절에, 내가 7일째 쉰다는 말은 하나님의 노동을 축하하는 것에 지상의 1, 2, 3, 4, 5, 6은 의미를 거기다가 섞는다, 안 섞는다? 섞으면 안 되게 돼 있어요.
마태복음 12장에 안식일에 물에 빠진 사람 건지고 빠진 양을 건져내지요. 그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비라고 해요. 자비가 뭡니까? 노동의 대가입니까? 아니지요. 천국은 뭡니까? 천국은 어떻게 들어가요? 노동의 대가로 들어가요? 아니지요. 우리의 행함은 인정하지 않지요. 문제는 인간은 자기의 행함을 못 잊는다는 거예요. 이 사태가 심각한 문제에요. 인간은 자기 행함을 잊지를 못해요.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가사 조금만 해봐요.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지금처럼 하지 말자. 뭐라 돼 있어요? 조금 덜 만나고(자주 만나지 말고) 조금 덜 기대하며 많은 약속을 하지 않기로 합시다. 왜요? 이게 목적이 뭡니까? 무슨 노동이 허비되는 것을 내가 용서치 못 하겠다. 뭐가? 내가 데이트한다고 필요한 돈과 시간 빼는 것에 내 노동이 투여돼 있지요. 내가 바보 같이, 결국은 헤어질 걸.
지금 내 노동의 가치가 나에게 빠지는 것을 누가 용납 못해요? 내가 못해요. 왜? 나는 내 노동 위에 뭐가 서있기 때문에? 나의 의가 있지요. 서있는 그걸 아까 Life's Storybook Cover가 그게 무슨 책이에요? 행위 책이잖아요. 행위 책은 일기장 쓴다고 되는 게 아니고 살아가면 그게 몽땅 뭐가 돼요? 행위 책이 돼요.
치매 걸린 노인 분들 요양원 침대 위에서 하루 종일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입니까? 내가 왕년에 애 넷 키우고 내가 참 네 아버지 보살핀다고 고생 많이 했다, 이런 것 누구 이야기입니까? 자기 이야기죠. 그러니까 누구 말이 맞아요? 이슬라 그란트의 말이 맞지요. 그래서 이 가사를 제가 베껴온 거예요. 사람은 한 순간도 자기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성경은 뭐냐? 네가 지금 바로 악마의 그림자 노릇을 평생하고 있다. 악마는 인간을 어느 책에 묶어놨습니까? 행위 책에 묶어놓은 거예요. 악마는 알지요. 주의 이름은 일체 못 보게 만들지요. 주님의 노동은 일체 근처도 못 가게 만들고. 예수 믿는 것도 내 노동이 되고, 예수님도 나의 의가 되도록 모든 신학을 거기서 조작해버렸어요. 설교도 마찬가지고.
자기 부인 안 해도 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내 행위로 내 속에 기억이 될 수 있도록 박혀있도록 마귀가 할 때 어느 위대한 사람이 이 마귀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나지요. 그때가 뭐냐? 저주 속에 있음을 아는 커버되고, 이게 저주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생명책에 이미 옮겨진 사람이에요. 호적이 옮겨진 사람이에요. 남은 시간 이스라엘 호적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아는 이야기인데 다시 한번 봅시다.
이스라엘 나라가 없을 때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지요.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없어요. 이 세상에 야곱이란 인간은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진 인간은 없습니다. 야곱은 신났어요. 삼촌의 많은 재산을. 삼촌의 양과 염소, 유전자 조작을 해서 자기가 벼락부자 됐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그게 자신의 기쁨이 되는, 다른 기쁨은 필요치 않아요. 왜냐? 하나님께서 알아주지요, 복 줬지요, 자식 열한 명 됐지요. 더 이상 이걸로 내 인생 성공했다 했는데 세상에 그 축복을 빼앗는 자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그때 야곱이 자기가 많은 재산과 처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누가 대신 나섰는가? 자기가 나서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 또는 괴비행기, 괴물체 알지요. 우리나라 선박을 공격한 게 누굽니까? 이란입니까, 괴물체입니까, 괴비행기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괴비행기죠. 아마 외계인 같아. 우리나라 선박을 UFO 안드로메다 외계인이 친 모양이라.
야곱이라는 내가 나를 아는 육의 인식 속의 바깥에 나가면 행함이 깨져요. 알고 행해야 되는데 내가 부딪치는 모든 것은 나로 의미가 되돌아와야 되거든요. 알고 행했더니만 내가 승리했다, 이래 되는데 만약에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면 이것이 나의 공로가 안 돼요. 그러면 내 공로가 안 되면 내 인생은 누가 지킵니까? ‘내가 지켰다, 지켰다’에 이게 누수가 생긴다고요. 그러면 내가 용납을 못해요.
사람들이 남을 기분 나쁘게 하는 방법이 뭐냐?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나를 도와줄 때 완전히 나를 개무시하는 거예요. 내가 시도해서 원할 때 다오. 그냥 줘버리면 나는 당신 앞에 내가 작아지잖아. 그러면 뭐가 쪼그라져요? 나의 의가 인생 내가 알아서 잘 살았다는 자존심이 깨지잖아. 이건 내 속에 있는 마귀가 가만두질 않아요. 마귀는 항상 내 편이잖아요. 일기장에 cover에 남이 도와줬다? 안 돼요.
그래서 소위 기독교 교회 가면 주께서 십자가 졌는데 그 바깥의 십자가에서 안으로 들어온 사람 누굽니까? 누구라고 생각해요? 나지요. 왜? 나의 믿음이 나를 구원했지 주님이 나를 구원한 게 아니고 주님은 십자가 지는 데까지, 그것까지만 그걸 믿고 안 믿고는 누구의 결단이었다? 나의 결단이었다. 이게 바로 마귀가 기독교를 만든 거예요. 기독교를 접수한 이유가 바로 이런 거라고요.
괴한이 왔을 때에 괴한이 내 재산을 노린 게 아니었어요. 괴한이 노린 것은 나를 노린 거예요. 결국은 야곱은 육에서 육이 될 수 있는 것은, 언약을 내가 지킨 게 아니고 언약 당사자가 언약 속에 야곱을 집어넣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추진해나갔던 프로젝트에 야곱이 걸려든 거예요. 마치 꿈이 요셉을 지배하듯이. 요셉이 나 이런 꿈꿀까 한 게 아니듯이 야곱의 언약이 야곱을 죽여 버렸습니다.
죽어서 죽고 난 뒤에 죽어야 되는데 안 죽었다는 증거가 뭐냐? 절룩절룩 저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절고 싶어서 스스로 자해한 게 아닙니다. 뭔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내 행위로 넘어갈 수 없는 다른 분의 행위가 내 행위로 하여금 내 힘의 원천을 빼버렸어요. 야곱의 환도뼈를 빼버렸다는 것은 야곱이 스스로 쓸 수 있는 모든 힘의 원천지를 붕괴시켜버린 겁니다.
그때부터 야곱의 자손이고 모든 일대기는 야곱의 행위가 끼어들 수 없는 언약이 언약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이걸 나중에 누가 아느냐? 요셉이 알아요. 요셉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내가 죽거들랑 굿바이하지 말고 내 해골 들고 이 해골이 어떤 현실을 새롭게 생산하는지를 너희들이 봐야 하는 증인들이 바로 내 후손들이다. 야곱에게 준 언약이 실제로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어떻게 생기고 그게 어떻게 약속의 땅에 정착되는지를 후손들을 통해서 요셉의 해골 들고 이끌지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족보, 호적이 뭐겠습니까? 야곱의 호적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호적이에요. 그러면 야곱에게 일어난 경우가 똑같은 경우가 똑같이 일어날 때 그 사람은 어디 간다? 이스라엘 호적, 생명책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에요. 말 잘해야 돼요. 들어갈 사람이 아니고, 들어갈 이유는 없어요.
들어간 사람에게 그 효과가, 이미 합격한 효과가 내 몸이 천국에 간 효과를 지금 여러분이 아직까지 죽지 않고 있는 육신에 그것이 생생하게 생동감 있는 사건으로, 사건으로 터져 나올 때 우리는 저주가 달리 저주가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한 자체가 저주가 돼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이게 뭐 저주하겠다는 거예요, 뭐예요? 사도가 누굴 저주하는 사도가 아닙니다. 있는 대로 이야기했는데 그게 어떻게 돼요? 언약대로 시편 69편에 나온 그대로 이게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할 자에게는 율법을 위반한 자에게는 저주가 주어지고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저주가 주어진다는 실현되는 과정을 주께서는 우리를 미끼로 사용해서 오늘 이 시대에 남겨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팝송 보고 유행가 가사, 이게 성도는 알 필요가 없다가 아니라 이것뿐만 아니고 시시껍쩔한 것, 타일공사해서 시끄러운 것부터 해서 모든 우리에게 주어진 시공간에 일어난 일이 결코 주님의 허락 없이 일어난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감사함으로 주께 기쁨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이 세상 태어난 것부터 죽는 데까지 어느 것 하나 주님의 손길이 빠진 사건이 하나도 없음을 감사케 하옵소서.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신앙도 잃어버리고 때로는 주인도 생각하지 않고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는 것조차 주님의 계획된 주님의 미끼로서 활용되는 삶인 것을 뒤늦게 늘 감사하고 또 뒤늦게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