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8a 부산강의 : [시편]82(66:6)-아들 안의 아버지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66편.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로 발할찌어다” 할 때 “하나님께” 하나님‘에게’라는 말은 우리가 있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계시다는 것은 성경에선 대단히 당연한 거예요. 이 당연한 것이 어디에 방해되느냐 하면, 모든 게 나에게, 나 있음을 당연한 걸로 여기는 것, 둘 사이가 대결관계에 있어요. 대립관계에 있고 마찰관계에 있어요.
이번은 ‘나에게’ 이것과 이번 사건은 ‘하나님께’ 이게 대비 관계가 된다고요. 사 층에서 물이 새서 전기가 안 통해서 오늘 예배 컨셉은 창세기 1장 1절과 2절입니다. 흑암 가운데, 이게 무대세트가 흑암이에요. 흑암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무엇이 새롭게 부각되느냐 하면 빛이라는 것이 우리가 마땅한 게 아니고 빛이란 게 있는 것은 우리를 ‘나에게’라는 나를 ‘하나님께’로 돌리는 하나의 세트장으로 활용되게 하시는 겁니다.
지옥은 어떤 곳이냐는 것은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나옵니다. 마가복음 9장에도 나오는 데요. 일단 마태복음 8장 12절에 보면, 지옥의 환경을 “바깥에 어두운데 쫓겨나” 어두운 쪽으로 갔다는 말은 이쪽은 뭐다? 하나님의 빛의 은혜를 지금 공짜로 누리고 있는 이런 세상에서 어디로 빠지느냐 하면 빛이 철거되는 바깥 어두운 데로 간다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거기 마가복음 13장 같은 경우에는 24절에 이렇게 돼 있어요.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라고 돼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 하는 일은 뭐냐 하면 너희들 공짜로 많이 받았잖아. 이제는 은혜 끝, 이제는 저주 있는 곳으로, 하고 그쪽에 가야 될 자를 분류시켜서 돌려보내는 일을 주께서 하십니다. 이 일은 차질이 없어요. 빈틈이 없어요.
반드시 이미 이건 실시됐기 때문에 취소되거나 너무 그러지 마세요, 라고 말릴 수도 없고 그냥 지옥 갈 사람은 지옥 가는데, 그 지옥이 뭐냐 하면 그동안 내가 살아온 것은, 이거는 값으로 따질만한 많은 혜택을 공짜로 누렸다는 것을 인식케 하면서 지옥으로 보내버려요. 네가 받을 때는 당연한 걸로 받았는데 이게 다 내가(예수님) 희생한 값으로 이러한 빛의 혜택을 받았다. 네가 있어야 될 본래의 자리, 본모습에 합당한 자리는 영원한 빛이 없는 바깥 어두운데 가서 영원토록 거기서 사는 거예요. 그게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인간의 본모습에 대해서 아주 많이 이천 년 이상 연구하고 탐구했던 그 단체가 있어요. 인간의 본모습에 대해서. 그 단체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게 뭐냐 하면 불교입니다. 요 아래 층. 이 불교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람이 죽어도 다시 이곳에서 산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윤회설이에요. 영겁, 회귀, 윤회설, 다시 산다는. 죽어도 또 다시 여기서 반복해서 계속 산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인간 자체가 지옥 같은 세상에 못 빠져나온다는 고백이에요. 이 세상이 지옥인데 지옥 또 살아야 되는 거예요.
김광석이란 사람이 불렀던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말기”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노래 가사에. 다시는 우리 이런 식으로 살지 말자, 이 말이거든요. 다시 이 세상에 안 오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그거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 외에는 없어요.
어제 낮 설교에 전부 다 두부 먹는다 했잖아요. 출소 기념으로. 그건 무엇의 외침이냐 하면, ‘우리 다시는 이 세상 사람으로 태어나지 말자. 다시는 부부로 엮이지 말자’ 그런 건 아닙니까. 그때는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가고 마치 뭐와 같다? 천사와 같다. 제발 시집가고 장가가고 엮이고 하는 이런 짓은 요 생애로 그냥 끝내자. 고만하자. 많이 먹어도 고만 하자. 여기서 끝내자. 애들 가르치고 하는 것, 이 생으로 끝내자. 12월 달로 종치고, 퇴직 기념인지.
그런데 인간은 못 끝내요. 인간이 못 끝내는 이유는 자기에 대한 미련 때문에. 내게로, 이놈의 내게로, 내 쪽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이고, 예수고 막 돌아다니면서 뭘 믿는다 할지라도 결국은 뭐냐 하면 내 자리는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완전히 확정되고 고정된 나 있을 곳이라고 자기한테 머물러버립니다. 누가 이렇게 작대기 가지고 꽂아놨느냐? 마귀가 자기로부터 못 벗어나도록 하나의 포인트를 쳐버린 거예요.
네가 너를 떠나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마귀 정신이 그래요. 하나님이 뭐라 해도 나는 내 식으로 살겠다는 확정된 그 정신을 인간에게 줘버린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자기 힘으론 고칠 수가 없어요. 인간의 힘으론 자기로부터 떠나지 못합니다. 떠나지 않는 그 인간을 강제조치로 해서 자기로부터 떠나도록 만든 그런 환경을 설정했습니다.
자기로부터 자기를 떼어내는 환경,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시편 66편 5, 6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 인생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 되게 하셨으므로” 이 단어 역시 창세기 1장에 셋째 날의 이야기입니다. 바다가 둘째 날에 만들어진 게 아니고 셋째 날에 만들어졌어요. 하늘 궁창과 땅 궁창이 나누어지는 건 둘째 날이지만, 바다가 만들어진 건 셋째 날이고 동시에 땅이 만들어져요. 그리고 셋째 날에 땅이 그냥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식물이 자라나게 했어요.
그렇다면 이 점에서 불교라고 쓴 것은 영원히 자기가 자진해서 지옥을 맴도는 인생, 그게 이천오백 년 동안 석가모니를 연구한 결과로 내놓은 게 뭐냐 하면 우리는 이 지옥에 되돌아와서 또 산다, 또 사는 것의 반복이다. 이거는 뭐 지옥의 반복이에요. 하여튼 불교가 똑똑해요. 아는 지옥에 맞춤 인간이다. 요 이 층입니다.
그런데 삼 층은, 교회는 다시는 우리가 이 곳에 오지 말기를. 오지 않으려면 무엇이 뜯어져야 돼요? 이불호청 실밥을 강제로 잡아당기면 이불이 찢어지고 하잖아요. 그 실밥을 가위로 딱딱 끊으면 안의 솜과 분리되잖아요. 그게 뭘 떼어내느냐 하면 천국 가려면 이걸 떼야 돼요. 불교 용어지만 모든 인연을 떼야 됩니다.
이게 마태복음 10장에 나와요. 천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그런데 거기다 추가를 합니다. 네 자신으로부터 네가 떨어지지 아니하면 천국은 없다. 가장 마지막에 남아있는 뜯기지 않는 인연, 그거는 나 자신이죠. 그럼 나 자신을 뜯어내야 되는데, 그래야 다시 나한테 소환되지 않거든요. 다 내 자리로, 내 자리가 없어요. 없는데 자꾸 내 자리 찾아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자리를 뜯어내는 방법은 뭐냐? 바로 광야에서 자연세계의 질서를 이용해서 새로운 자연세계에 부합되는 새로운 인종의 계발, 인종의 창조, 이게 바로 광야의 생활입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 주께서 독수리 날개로 업지요. 독수리 날개 평수 몇 평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독수리 날개로 업었다는 말은 너, 나의 어떤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겠다. 왜? 모든 인간의 차별성은 나에게 소환될 때 있던 주특기잖아요.
나는 너보다 낫다가 성립되는 모든 관계는 일체 하늘나라에서 안 받습니다. 너는 나보다 똑똑하다, 낫다, 잘 산다, 못 산다, 못났다 이런 것, 신앙생활 잘한다, 못한다는 이런 모든 구분은 철폐됩니다. 이걸 철폐함으로서 내 중심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 평가하는 것 자체를 하나님께선 그걸 인정하지 않아요.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 주께서 그걸 제거해버립니다.
내가 나를 판단하지 않을 때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지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요. 어려워도 합시다. 내 안의 나는 타인의 요구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내 안에 너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진짜 너무 어려워서 어떻게 강의 진도가 나갈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노래 가사가 동원될 수밖에 없어요. 안 그러면 전혀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할 거예요. 이런 노래가 있는데 가사가,
비 오는 거릴 걸었어 너와 걷던 그 길을
눈에 어리는 지난 얘기는 추억일까
그 날도 비가 내렸어 나를 떠나가던 날
내리는 비에 너의 마음도 울고 있다면
다시 내게 돌아와 줘 기다리는 나에게로
그 언젠가 늦은 듯 뛰어와 미소 짓던 모습으로
사랑한 건 너뿐이야 꿈을 꾼 건 아니었어
너만이 차가운 이 비를 멈출 수 있는 걸
<비 오는 거리>란 노래인데요. 가사가 뭐냐 하면 이거에요. 비라는 환경이 지난날까지 나에게로 모든 걸 소환시키는 효과를 준다는 거예요. 비가 올 때마다 지난날 좋았던 시절이 생각이 나는 거예요. 이때는 저작권 있든 말든 노래를 들어봐야 돼요. 노래 들으면 들은 기억 날 수 있는데…. 가사를 생각해보세요.
이승훈이 부른 걸 정서주란 여자가수가 커버한 건데요. 자연은 개인의 조건을 사정없이 지워버린다는. 지금 몇 년도고 몇 월 며칠이냐는 그것을 무시해버리고 다시 비가 와버리면 어때요? 그때 헤어졌던 그 사람이 또 다시 반복해서 나한테 회상되는 것, 이거는 반칙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6일째 만들어놨는데 앞에 있는 1, 2, 3, 4, 5를 완전히 무시하고 6일에 만들어진 나를 계속 고집하고 고정화시키는 것, 마귀가 그 짓하고 있는 거죠.
하나님께선 다시 우리로 하여금 1, 2, 3, 4, 5, 6의 내용을 그걸 전부 다 완성시키고 포함시킨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에 부합되는 새로운 인간의 창조에요. 하나님의 형상. 날아가 버린 형상이 아니고 우리 형상, 옛날 첫 번째 아담의 형상이 아니고 두 번째 아담 예수님의 형상에 합류된 새로운 피조물 생산에 하나님은 열심을 냈던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 안의 나가 아니라 아버지 안의, 이거 진짜 어렵다, 정말. ‘아버지 안의 아들’과 ‘아들 안의 아버지’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활동하지 아니하면 이게 일치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추방했으니까 인간이 범죄한 언젠가는 부셔져야 될 파멸될 세상에다 추방했기 때문에 아버지 안의 아들이 되려면 아들 안의 아버지와 계속 연락을 취하면서 창세전의 아들과 아버지의 모든 계약은 지상에서 완료를 해야 돼요. 이 땅에서.
그런데 몸은 무슨 몸이냐? 죄 있는 몸이 와요. 죄 있는 몸으로서 아버지의 온전한 법을 다 이룬다? 죄 있는 몸인데 그게 성립이 될까? 성립이 안 되죠. 그래서 시편 66편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요. 하나님의 방법은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없는데 어떤 방법으로 했느냐? 서원, 그다음에 서원한 제물을 예수님이 바칩니다. 자기의 제물을.
율법에는 제사법이 있거든요. 그 제사법을 통해서 죄로 인하여 끊어진 것이 제물로 투입되면 끊어진 게 이어질 수 있다는 창세전의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을 성사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아버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들 안에만 내포돼 있어요. 그러니까 불교신자들이 예수를 연구하고 하나님을 연구해도, 철학자들이 연구해도 모르지요.
아버지는 독점적이에요. 누구한테만 있다? 아들에게만 있어요. 아들에게만 있다는 이 사실을 신약에, 신약은 마지막 때입니다.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해서 알려지면서 그 마지막 때의 긴긴 가로등의 긴 그림자, 그 그림자가 뭐냐? 구약이에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말씀이 주어졌다 이 말이에요. 그 긴긴 그림자 중의 하나가 시편 66편. 그 안에는 서원도 있고, 그 안에는 아까 이야기한 광야도 있어요. 광야생활의 시작도 있어요. 이스라엘도 있습니다.
여기 서원부터 말씀드릴게요. 여기 15절에, “내가 수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 이게 서원한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 강의에서 해야 될 숙제가 뭐냐 하면 주께서 6절에 바다를 육지로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애굽에서 나왔는데 땅이 없어요. 땅이 없는 곳으로 가요. 있을 곳이 있는 게 아니고 없어요.
없는 땅인데 그 땅을 만들기 이전에 땅에서 해야 될 원칙부터 먼저 주어지는 것이 바로 광야에서 율법이 주어지는데 그 율법은 뭐냐? 제사법입니다. 제사법을 계속해서 완성할 땅에만 너희는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냥 우리 살기 위해서 천당 가기 위해서 준 땅이 아닙니다. 살기 위한 땅은 아니에요.
그게 바로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떨기나무로 모세 부를 때에 장차 모세 너와 네 민족이 해야 될 것을 미리 알려줍니다. 네가 어떤 지정된 지점에 갈 것인데 거기서 너는 내게 제사를 드려야 된다. 그러면 우리가 그 대목 보면 우리가 제사 드리면 구원받습니까, 이런 생각 들 수 있잖아요. 그게 아니고 장차오실 나타날 메시아가 하는 일을 긴 그림자로 먼저 모형으로 보여준 거예요.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알아도 이스라엘 내부에 아버지가 없다니까요. 여러분, 하나님과 아버지가 달라요. 하나님은 계속 이스라엘과 지시와 명령과 율법을 준다고요. 심지어 그들이 그것을 상상했습니까? 아닙니다. 모세가 실제로 시내산 올라갔잖아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시내산에 모세가 올라간 취지가 이겁니다. 이게 아브라함언약의 연속인데 딱 두 가지에요.
모세가 함께 있었잖아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나왔는데 다른 사람은 못 따라가요. 전부 다 떨쳐내고 혼자만 올라갔어요. 시내산 화산 꼭대기에 올라갔다고요. 그러면 분명히 있음이었지요. 있음인데 올라갔으니까 있음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없음이죠. 그런데 없는데 어디 놀러갔습니까, 여행 갔어요? 아니지요. 불붙는 화산 속에 갔잖아요. 화산이 얼마나 맹렬한지 산 전체가 흔들렸다 했어요.
그 진동이 바로 히브리서 12장 끝에 나오는 거예요. 이 세상을 시내산을 진동함으로서 앞으로는 시내산에 속한 땅뿐만 아니고 그 시내산 위에 있는 하늘 궁창까지 다 진동하는 날이 올 것이다. 진동이란 지명이 어디 있는 것 같은데? (경상남도 창원시 진동면) 하여튼 하늘과 땅이 다 진동하는 거예요.
그러면 1, 2, 3, 4, 5, 6이라는 창조 안에서 느긋하게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면 그만이라고 자기한테로 소환되는 그 일상적인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삶은 이건 뭐냐? 협소한 관점이죠. 관점이 너무 좁은 편협한 관점,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나만 편하면 된다는 것, 내 할 일 충실하면 된다는 것, 이 모든 뭐냐? 그 사람 속에는 아버지가 없어요.
지금 아버지라 하는 것은 어떤 거냐 하면 없는 아버지, 모세가 시내산 감으로서 있음은 뭐가 된다? 없음이 되고 간 곳이 진동하는 시내산이에요. 그러면 여기 들어가면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면 살아 있음은 뭡니까? 죽음이 되지요. 있는 것은 없게 되고, 살아 있는 건 죽음이 되고. 그다음부터 여기에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는 이것까지.
그다음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라, 이거는 놀랍게도 위엄 있게 한다는 말은, 인간은 근처도 생각 못하고 예상도 못하고 이거는 사람이 상상도 못한 일을 하나님 쪽에서 일으켰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없음에서 뭐가 있느냐 하면 있음이 되고, 죽음에서 살아남인데 이걸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누가 보여주느냐? 40일 만에, 이 40일이 문제야. 40일 만에 없는 모세가 나타났고요. 죽은 모세가 살아났어요.
마치 40일 동안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고 난 뒤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다른 인간들이 생각할 수도 없는 이상한 이야기만 계속 쏟아내면서 십자가에 죽어가는 것만 똑같은 거예요. 사람들이 어떻게 예상하거나 기대할 수 없는 인간이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 쏟아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행하심이 아니고 그것도 아버지의 행하심, 아버지의 뜻이 나를 통해서 다 이루어진다는.
그러니까 모세가 그냥 여기서 오늘 강의에서 첫 번째 중요한 것은, 모세가 없는 데서 있을 때, 죽은 데서 살아났을 때 모세 곁에는 뭐가 있습니까? 율법이 있었다는 거예요. 모세가 구원받을 때 그냥 구원받는 게 아니고 없는 데서 나타날 때 그냥 옛날처럼 짠 나타나는 게 아니고 옆구리에 뭔가 있어요.
그다음에 66편 1절에,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찌어다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찌어다” 영광이 나오지요. 그 모세가 율법을 쥐고 있을 때 그 율법의 영광과 격이 맞는 새로운 존재로 내려왔기 때문에 모세 얼굴에는 영광의 빛이 빛났습니다. 그 빛은 1, 2, 3, 4 자연세계의 빛이 아니고 빛의 원류, 빛이 나온 바탕을 모세는 죽어서 맛본 거예요. 없어지면서 맛본 겁니다.
기존에 창조했던 인간의 시선, 두 눈동자로는 차마 볼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빛이 이 해와 달이라는 기존의 빛을 물체를 반사해서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 간접적인 것이 철거할 날이 옵니다. 뭐 전기 나가는 것 문제도 아니에요. 신약에 보면 우리 마음속에 빛이 들어온다 했거든요.
우리 마음속에 빛이 들어온다는 말은, 우리 마음속에 천국생활이 시작, 이미 스타트가 된 거예요. 세상이 줄 수 있는 영광, 빛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빛 되신 분이 오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한량없는 어두움이었다는 사실, 내 자체가 어둠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평생토록 나에게로 항상 나에게로, 내게 어떤 이익이 있느냐, 내게 어떤 손해가 있느냐 이것만 생각하며 기존의 나를 사수하고 지키는 이것이 바로 새로운 빛 앞에서는 이게 지옥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옥이 따로 없다.
그러면 이 죄인을 어떻게 해야 돼요? 그거는 그 모델은 예수님이 먼저 시범을 보여줬지요. 네 속에 아버지 있다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은 마땅하다, 이것 뭐 복잡하지 않지요. 아까 다시 써볼까요? 내 안의 아버지로 인하여 아버지의 아들과 이 두 문장을 일치시키는 일을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걸 실행에 옮겨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걸 못해요. 우리는 아버지가 없어요.
그런데 내 안에 아버지 계시는 그 예수님의 영이 우리에게 와버리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아버지가 그다음부터는 아바 아버지라고 나의 아버지가 돼버려요. 내 안의 아버지가 된다고요. 그럼 내 안에 아버지가 오는 순간 우리는 이루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서원해서 바친 그 제물의 효과, 혜택이 우리 안에서 작렬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작렬하는 게 뭐냐, 어떻게 하느냐? 모든 일어나는 일은 전기가 나가든 분위기가 이상하든 모든 일어나는 일은 누가 일으켰다? 아버지께서 이루신 거예요. 아버지와 예수님이 합의해서 이루어진 거예요. 하여튼 하나님도 바빠. 전기까지 나가는 일까지 신경을 다 쓰니 굉장히 바쁜 거예요. 혼동과 흑암과 이 모든 것까지 이제는 누구의 일이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그것까지 흡수하셔요. 왜냐? 주님은 죄인과 하나 됐기 때문에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참한 삶의 조건마저 내가 접수할게.
만약에 어떤 부부가 이혼한다고 법원의 민원실에 가서 “우리 둘이 헤어지려하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거기 서류작성하세요.” 내가 알아서 할게. 같이 둘이 집에 가시고 헤어질 준비만 헤어질 결심만 꾸준히 해주시면 나머지는 며칠 뒤에 통보할 겁니다. 둘이 이젠 법적으로 남남 됐습니다. 그리고 재산분할 이런 것은 우리가 다 정리했습니다. 통보 올 거예요.
그것 전문으로 하는 데가 가정법원 아닙니까. 법원이 뭘 다뤄요? 법을 다뤘잖아요. 우리 자신은 법을 다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거는 내가 지켰고, 이건 어겼고’ 그거는 우리가 생각할, 우리 담당이 아니에요. 우리 담당은 ‘내게로’를 뭐로 바꾼다? 법적으로 또는 법을 완성하신 주님 쪽으로 방향을 트는 거예요.
이렇게 보니까 여러분들에게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오늘 제목이라고 미리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인생의 길은 없어요.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전부 다 지옥의 고 동네, 고 동네에서 사는데 무슨 인생에 내 길은? 내 길은 없어요. 니 길도 없어요. 뭐가 있냐? 터닝 포인트만 생겨요. 터닝 포인트를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길은 없는데 주님만 알고 있는 잠재적인 길이 있다가 터닝 포인트, 헤어지는 갈림길이 생겨요. 이게 주어지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그냥 우리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점선이 아니고 실선으로 계산하는 거예요, 평소에. 대표적인 게 일기장 쓰기 아닙니까. 난 이렇게, 이렇게 착실해서 이걸 다듬어서 보태고, 보태고, 보태고 하면 점점 더 나는 좋은 길 갈 수 있다. 거기다가 마태복음 7장까지 봤으니까.
마태복음 7장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네가 좁은 길로 가거라. 또는 좁은 길, 넓은 길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줄로 알고 내가 어떻게 바르게 살면 영생 가는 길인 줄 알고, 찾는 사람이 적으니라. 찾는 사람 적은 데 가보세요. 사람들 많이 와요. 벌써 백화점 오픈 런, 막 뛰어서 천국 가는 길인 줄 알고. 안 그럴 사람 어디 있어요. 좁은 길인데 많이 와 있다고요. 그것도 번호표 뽑고 대기하고 귀찮아 안 돼.
인간에겐 어떻게 살든 길은 없어요. 그냥 오버한 거예요. 본인이 조작한 본인이 연출한 그 길은 뭐냐? 그 길이 뭐가 문제냐 하면 ‘나에게로’가 삭제되지 않는 길만 인간은 평생토록 그것을 꾸리고 살아왔던 거예요. 자기 부정이 안 되는 자기 부인이 안 되는. 나를 지킬 것은 오직 누구밖에 없다? 나밖에 없다는 그것만 고집하고 있는 거예요. 애인과 헤어져도 내 곁에 내가 있다, 이런 노래가 지금 유행하지 않습니까.
터닝 포인트는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찾아오면서 비로소 과거까지 주께서 그렇게 이끄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그러면 이건 내 길이 아니고 누구 길이었습니까? 주께서 나와 함께 동행했던 그 길은, 길이 없다는 게 뭐냐 하면 이게 광야 길이에요. 광야 길은 한 순간, 한 순간이 인간의 예상을 넘어서는 거예요. 인간의 예상을 넘어서는 요소들로 가득차고 그것이 연발, 연발 이어지는 거예요.
광야 길을 다른 말로 하면 사건의 길. 계속해서 무슨 사건이 터질지 알 수 없어요.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 터질 사건을 예상하면 안 된다는 그 사건. 왜냐하면 광야에서는 나에 대한 집중을 더욱더 몰입시키는 길이에요. 사건 터지면.
더욱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움츠려짐으로서 진짜 내 모습은 오직 모든 것을 내 이익을 위해서 나 챙기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그런 식으로 태어날 때부터 정신구조와 영혼구조가 그렇게 돼 있다는 걸 발각당하는 그 길, 그것이 바로 광야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았던 그 시험이 사실은 우리가 꾸준히 악마로부터 계속해서 압력 받아왔던 그 길이에요.
여러분 이것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협박. 협박 받으신 적 있어요? 그 담보가 뭡니까? 협박이란 것은 어떤 경우에 받느냐 하면 지킬 소중한 것 있을 때 협박이 가능해요. 드라마 같은 데 보면 어떤 사람이 훌륭하게 경찰 일을 한다든지 정의로운 판사 일을 한다든지 할 때 갑자기 범죄 쪽에서 협박, 공갈이 나오지요.
“까불지 마라. 네 딸을 생각해야지.” 미국영화에 얼마나 많습니까.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네 딸의 목숨은 보장 못한다. 내가 동영상 하나 틀어줘?” “아빠, 어디 있어?” 딸이 사탕 먹고 있고 옆에는 아저씨가 있으면서, “네 딸은 내가 잘 지켜줄 테니까 함부로 나대지 마라” 협박할 때 뭐가 소중합니까? 딸이죠, 딸.
그 사람은 정의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려하는데 내 목숨은 버려도 되는데 내 목숨 버리겠다는 그 잘난 체 때문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누굽니까? 이삭. 애꿎은 딸이 왜 정의로움의 희생물이 돼야 됩니까? 사사기 11장에 나오는 유명한 깡패두목 입다. 이게 바로 인간 선의 한계에요. 인간들이 하는 모든 선은 그 안에 아버지가 없어요. 아버지가 없고 하나님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번 전쟁에 승리케 한다면 누구라도 내가 먼저 드리겠다고 했는데 입다가 대외적으로는 나는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은 내게 없다고 떠벌리고 있었죠. 이 정도 하면 완벽에 완벽한 신앙이 아니냐. 완벽한 신앙을 내가 추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신앙자에게는 모든 기도에 응답해준다. 그런 생각이에요, 입다가.
오늘 본문도 나와요. 여기 18절에,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이걸 기도원 강사가 갈멜산기도원이든 최자실금식기도원이든 이 말을 던져줄 때에 그 기도원에 와서 응답받으려 하는 교인들은 무엇부터 청산해야 돼요? 지금 하나님께서 기도를 안 받겠다는 조건을 걸었잖아요.
거래조건이 뭡니까? 죄를 품으면 안 받는다, 무슨 뜻입니까? 죄의 문제에 대해서 포기한다면 네가 무엇을 구하든 내가 듣겠다, 이 말이잖아요. 그러면 방법은 알았으니까 남아 있는 것은 누구 몫입니까? 내가 얼마나 내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간절하게 빌면 이제는 내가 소원한 것은 따 놓은 당상이다, 이래 된다 이 말이죠.
조진웅이란 사람이 자기에게 소중한 것은 뭐였어요? 자기가 영화배우로서 잘 나갔잖아요. 그런데 협박, 공갈 들어왔죠. 네 과거, 청소년 때 했던 강도짓하고 나쁜 짓한 그거 내가 쥐고 있다. 까불지 마. 네가 잘난 척하고 배역도 안중근 배역에다 네가 대단한 국민영웅인 줄 알지?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나왔을 때에 조진웅이 기독교신자라는 말이 있어요.
그 사람이 지금 뭘 노린 거예요? 조진웅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음을 근거로 해서 나를 비난한 사람이 공격했잖아요. 그럼 비난 안 하면 뭐만 버리면 돼요? 내가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면 되겠지요. 그게 배우였잖아요. 그럼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건 뭡니까? ‘자기 의’입니다. 주님께서 공격하는 것은 뭐냐? 십자가 공격이 뭐냐? 너는 죄인이라는 거예요. 죄인이 죄를 버렸습니다, 하지 말고 기뻐하란 말이에요.
내 진짜 모습은 아담의 자손으로서 그 죄를 계속 유산처럼 물려받아 상속했다. 그런데 나는 그걸 감추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누구한테 들통 났다? 주님한테 들통 났으니까 이 얼마나 속 시원한 기쁜 소식이냔 말이죠. 그러면 내 죄를 버릴까요? 못 버립니다. 왜 죄를 못 버리는가? 죄가 뭔지를 몰라요. 죄를 버려야 되는데 못 버리니까 안 버리면 돼요.
뭘 알아야 버리죠. 내가 기대하는 죄는 이건 선악체제, 마귀가 우리한 협박하기 위해서 알게 해준 죄에요. 네가 살인했다, 뭐했다. 성경대로 봐. 성경대로 간음하고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하고 뭐하고 하는데 세상에 거짓말 안 하고 살아가는 사람 어디 있어요. 말만 하면 거짓말인데. 사람은 사람과 엮이려고 해요. 엮이는 이유가, 나한테 돌아올 이익이 있어야 살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엮일만한 사람 같으면 자꾸 엮이려고 해요.
그런데 그때는 육칠십 년대고 지금 젊은 사람들은 취직 안 해도 엄마아빠가 다 먹여주잖아요. ‘장가 안 가도 걱정하지 마. 나하고 살면 돼.’ 이렇게 되기 때문에 아쉬울 게 없을 때는 굳이 사람과 엮일 필요가 없지요.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족하는 거예요. 20~30% 니트 족이 뭐냐 하면 굳이 저 사람과 엮일 필요 없다. 난 하고 싶은 것 해도 기본적인 생활은 부모가 대준다. 모든 걸 노라고 하는 거예요. 사는 게 여유가 있으니까. 취직했다? 더러워서 안 다녀.
이게 왜 그렇습니까? 단순히 돈에 쪼달리지 않으니까 돈보다 더 소중한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 자기 잘남이고 자존심이었어요. 체면, 자기 의. 그걸 누구 그렇게 키워줬습니까? 부모가 그렇게 키워준 거예요. ‘우리 아들 잘났다. 잘한다.’ 칭찬은 고래도 웃게 한다느니 이상한 미신 같은 걸 만들어서 내 아들 절대로 기죽으면 안 된다. 내 딸은 절대로 기죽이지 않는다.
“엄마, 남편 때문에 못 살겠어.” “이혼해. 내가 나서서 이혼시켜줄게. 자식 내가 다 키워줄게. 기죽지 마. 내 몸이 부셔지더라도 망가지더라도 너는 기죽지 말고 살아야지. 난 얼마나 기죽고 살았는데 다시는 이런 인생 너한테 안 넘겨줄게. 너는 싱싱하게 살아야지.” 참 훌륭한 부모인데 그게 자기 의가 됐지요. 어떤 경우라도 자기 의를 못 뽑아냅니다.
이 못 뽑아내는 자기 의를 시편 구약성경 광야와 서원이 어떻게 만나는가, 이거는 10분 뒤에 우리가 해보는데 첫째 시간 마치면서 끝으로 해야 될 것은 터닝 포인트 말하고 마치겠습니다. 터닝 포인트라 하는 것은 아까 여기서 실선으로 갈 때 찬양하라, 영광돌리라, 기뻐하라. 기쁨, 찬양은 어디서 오느냐? 헤어짐에서 오는 기쁨이에요. 이 세상과 다 강제조치로 헤어질 수 있을 때 내가 남과 헤어지는 게 아니고 주님이 강제로 헤어지게 하시는 거기에 합류되는 기쁨, 이 기쁨으로 일단 한 10분간 쉬시기 바랍니다.
■20251208b 부산강의 : [시편]82(66:6)-아들 안의 아버지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수님의 긴 그림자가 이스라엘 역사 안에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각각 ‘나에게로’라는 개인의식이 있어요. 개인의식을 어떻게 단일형상으로 개인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의 개인화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광야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무슨 날개? 독수리 날개로 업었다는 거예요.
이걸 흔히 세상에서 잘 쓰는 운명, 그다음에 뭡니까? 공동체. 여럿인데 집단인데 거기에 대한 모든 상응하는 상황은 개인에게 너 따로 없고 나 따로 없는 전체가 한 덩어리의 ‘나’가 되는 식으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운명공동체라 하는 거예요. 운명공동체에 대해서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신약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운명으로 묶어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이란 성경적으로 말해서 개인적으로 수치스러운 것이 연합해서 그 수치가 소멸되는 것을 사랑이라 해요. 부끄러워라, 하는 것이 같이 있을 때는 소멸돼요. 이게 창세기 2장에 같이 있음에 벌거벗으나 그다음에 뭡니까?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그 관계가 바로 사랑입니다. 신약에 와서 이 사랑을 이렇게 잇지요. 연합이란 말이에요.
연합이란 말을 로마서 6장에서 이걸 세례라고 한 거예요. 세례 요한이 광야에 있을 때 부끄러워하지 말고 물속에 잠수해. 내 쪽에 와서 그냥 물과 같이 연합해. 물에 수장해버리면 물세례, 불에 수장해버리면 불세례, 성령에 함께 있으면 성령세례. 어차피 인간은 불세례 받으니까요. 심판세례 받으니까 이거는 주저주저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언젠가는 닥칠 일이거든요.
군의 영장통지를 받고 주저주저할 때 “빨리 논산 가.” “엄마 나 머리 깎는 것 싫어. 머리 얼마나 고이 길러놨는데….” 머리 깎는 것이 공동운명체에서는 부끄럽지 않아요. 너나 나나 다 똑같은 처지기 때문에. 같은 처지에 같은 운명공동체에 내가 머리가 깎였다고 해서 그것을 서글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여자가 불교에 귀의한다, 여승이 되고자 한다. 갑자기 머리 깎으니까 눈물이 쏟아지지요. 머리카락은 내 것이 아니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건데 머리카락을 다 날린다는 말은, 이래서 내가 부모에게 불효자가 되는구나. 불효자가 되는데 왜 울지요? 자기 의가 날아가 버리죠. 그러면 저 같으면 불교에 귀의해서 뭘 연구해야 되느냐 하면 왜 안 해도 되는지 중이 된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고 인간의 모든 생사고락, 인간의 어떤 욕심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게 목적이라 하는데 그것과 머리 깎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무 관계없거든요.
중이 머리 깎는 것은 권력입니다. 머리를 깎아야 돈이 생겨요. 머리 안 깎는 중은 돈이 안 돼요. 자기를 비우지 않았다는 오해를 받기 때문에 신뢰가 가질 않는 거예요. 내 쪽에서 자기 학대가 되어야 그 자기 학대가 돈 버는 밑천이 컨셉이 돼요. ‘세상에 얼마나 도를 닦았으면 여자가 자기 머리까지 홀라당 깎을 정도로 진리에 저렇게 확고하냐? 저 분한테 인생 상담을 하게 되면 돈 준 돈값은 하겠지.’
이래서 머리 깎은 여중한테 가서 내 자식이 어려운데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상담이 되지 지는 미장원에 가서 머리 높이고 70년대 애마부인도 아니고 온갖 것 다 하면서 뭘 도와줄까요, 이거는 말이 안 되지요. 신뢰감이 없어진다고요. 세상을 초월하고…. 무슨 세상을 초월해요? 머리 걱정하고 있는데. 파마하고 수건 감고 있으면서 무슨 상담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이게 돈이 되는 거예요. 돈이 되는데 이걸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해줘요. 왜냐하면 불교는 돈 된다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는 단체거든요. 운명공동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돈의 매트리스 위에 살고 있어요. 어디를 들어도 돈 소리가 나올 수 있는가, 그걸 탐지하면서 살아가는.
물론 주일날엔 교회를 나오지만 평소에는 도대체 돈을 어디에 투자하면 이윤이 많은가, 그거 탐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남은 돈으로 어딜 투자해야 사기 안 당하고 은행이자보다 더 쳐주는데 어디냐, 그것 탐지하고 있는 거예요.
매트리스가 두껍잖아요. 그 매트리스의 제일 위 표면에 자리 잡은 사기꾼들. 사기꾼에 두 종류가 있는데 공적인 사기꾼과 지하 사기꾼들(진짜 사기꾼들). 여러분, 저를 믿어져야 됩니다, 이래서 나온 거예요. 여러분에게만 알려줍니다, 하는 사기꾼. 은행이율은 나라가 보장해주는 안전 빵인데 2.3%. 굳이 농협 이야기 안 해도 되지요. 신한은행 다 하고 있으니까. 2.3% 정기예금, 세금 떼면 얼마 되지도 않아요. 그래도 항상 표면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돈의 매트리스에요.
이게 운명공동체. 매트리스가 되게 되면 여기에 통용되는 주고받는 언어, 단어, 개념 이것은 바로 돈에 실려서 같이 움직이고 유통되고 있어요.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에는 돈을 얻는데 유리한지, 불리한지가 그 개념의 가치를 결정하는 그런 매트리스, 운명공동체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 이게 뭐가 문제냐, 우리가 자연스러운 것 아니냐? 돈의 공동체의 문제는 뭐냐 하면 있음을 없음으로 보내지 않는다는 거예요. 살아 있는 것을 죽음으로 보는 게 안 된다는 거예요. 살아 있는 것을 살아 있음, 살아 있음, 살아 있음 계속 억지로 버티고, 버티고 있으면서 나이 팔십 넘어 늙어 죽는 거예요. 그럼 왜 살아야 되는가? 사는데 무엇이 실려 있는가? 내 목숨이 수레라면 수레 안에 뭐가 있느냐? 아까 이야기했지요. 수레 안에 자기 잘남이고 자기 의가 담겨 있겠지요.
자기 의가 있는데 자기 의를 무엇에 활용하느냐? 자기한테 소환하지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쁜가?’ 이게 20대나 가능하지 80대에 거울 보세요. ‘거울 거리 가! 나 거울 안 볼 거야. 찍지 마라. 사진 찍지 마라.’ 왜냐? 내가 상상한 내 모습과 찍힌 사진의 모습과 대비해볼 때 이거는 처참하게 망가진 모습이고 상상하기도 싫은 모습이니까 찍지 말라고 되는 거예요.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것은 역시 마지막에는 자기 의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서원을 안 받습니다. 왜냐하면 뭘 해도 법을 지키든 하나님을 믿든 끝까지 감추면서 내놓을 수 없는 게 자기 의로움이에요. 이것은 종교의 힘으로도 내놓을 수 없어요. 머리를 깎고 절에 가고 수녀가 된다든지 뭐가 된다든지 해도 그들은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누가 알아요? 본인이 알지요. 본인이 안은데 그 감추는 방법으로 뭘 한다? 공동생활 하는 거예요. 수녀원 공동생활, 그리고 여중들 공동생활 함으로서 위선을 서로 정당화시키는 방법으로 자체적으로 정을 나누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적인 연합입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랑은 뭐냐? 사랑은 연합하는 거예요. 그러면 문제를 다시 제가 적어볼게요. 죄 사함이 되어지는 모습은? ‘그냥 죄 사함 된다. 믿어라.’ 우린 그렇게 알잖아요. 그걸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는 거예요. 죄 사함이 진행되는 모습은 어떻게 되는가? 아까 제가 일단 전체적인 이야기를 했어요. 사랑이다. 사랑은 뭐냐? 사랑은 수치가 소멸된다.
그런데 이 수치는 뭐냐 하면 나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수치가 들어있는 거예요. 이것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다는 것을 갖고 있는데 사랑의 대상자가 와서 우리 그냥 자기 의 있는 대로 인정하고 너나 똑같으니까 그냥 삽시다. 연합해서 공동체 이룹시다. 이래버리면 정작 끄집어내야 될 가장 수치는 하나의 고질병은 손도 안 대고 그냥 넘어가는 거죠. 이거는 죄 사함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갖고 있는 소중한 내 죄를 건들지 말라고 인간들이 연합해서 하는 것이 무슨 행사냐 하면 회개하는 거예요. 회개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죄만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수치의 원인에 대해서 내가 몰라요. 내가 무엇에 수치인지 모르면서 어떤 행동할 때 자연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수치심이 떠오르는 거예요. 어떤 예상 못한 사건에 부딪치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부부싸움 할 때 가장 민감한 예민한 부분을 대면 걷잡을 수 없이 둘이 갈라서거든요. 싸울 때도 예의가 있어야 되는데 가장 수치스런 것을 내가 폭로하기 전에 네가 건드리지 않기, 내가 자진해서 말하기 전까지는 네가 날 건드리지 않기. 내가 알아서 나는 이런 죄입니다, 떠벌이는 것은 되지만 내가 말하기 전에 네가 나서서 파악해서 나에게 그런 일을 하면 너와 나의 관계는 끝이다. 그다음부터 이거는 아주 심각한 공동체가 깨어지는 그런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제부터 본격으로 해보겠어요. 구약에서 인간의 수치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일단은 주님께서 육체로 시작해서 영으로 파고들어가는 방법을 사용해요. 일단은 부분적인 수치에 대해서 나온 것이 사무엘상 1장, 여러분 다 외우니까 다 알고 있으니까 그냥 말로 할게요.
사무엘상 1장에서 한나라는 여인이 등장하는데 수치스러워요. 왜? 자식이 없어요. 자식이 없어서 남편한테 앙탈을 부립니다. 당신은 첩한테만 가고 나한테는 오지도 않고, 이런 식으로 하니까 남편이 하는 말이, 아내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자. 나는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질투하는 첩보다 당신을 사랑하는데 잉태하고 잉태하지 않는 이것은 내 소관이 아닌데 왜 나에게 뭐라 하느냐?
그러니까 한나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남편이 정신적으로 사랑해주면 그걸로 족하면 되는데 이게 구약이기 때문에 인간이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대로 다 노출해요. 문제는 남편이 사랑한다고 하는데 옆에 있는 브닌나라는 첩이 말하기를, “남편이 사랑하면 뭐하노. 자식이 없는데. 대외적으로 딱 깨놓고 말해볼까? 그렇게 남편이 너를 사랑하는데 왜 자식이 없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네 편 아니야.”
그렇게 하면서 성경에서는 브닌나를 뭐라고 하느냐? 원수라 했어요. 하나님의 원수가 하나님과 파트너가 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제 오후 설교에도 했잖아요. 우리 안에 가룟 유다의 요소가 없으면 구원이 안 된다고요. 처음으로 마귀를 최측근으로 삼았다는 것은 우리가 건성으로 믿는 척하면 안 되고 우리의 근원을 경유해서 훑고 내려와서 진짜 구원은 내가 원하다고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원함대로 되는구나. 따라서 구원되고 난 뒤에는 나라는 것은 아예 폐기처분돼야 마땅하다는 것을 느낄 때 그게 바로 주님의 사랑이란 말이죠.
이야기 이어가기 전에 요한일서 4장 10절을 보겠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사랑이 없는 게 아니고 있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고 돼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라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뭐라도 이야기할 권리가 있습니까? 없지요. 이 말은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완전히 개무시하는 쪽으로 그런 방식으로 찾아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을 해줘도 사랑을 받지 못할 하나님의 천국백성이 아니라면 강력하게 원수가 작렬해서 오히려 사랑을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모독으로 이해해서 내 쪽에서 사랑한다는 예수에 대해서 얼굴을 외면해버리죠.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복음이라고 들리면 도망치기 마련이죠. 나 복음 안 듣는다. 왜? 내 걸 감히 아무리 하나님이지만 내가 고이 지키고 싶은 내 방식을 뭔데 치고 들어오느냐?
그래서 어제 낮 설교에 예수님만 없다면 난 뭐도 좋다? 지옥이라도 좋다. 야아 이 당돌함, 이 고집 보세요. 예수만 없다면 내 자진해서 알아서 지옥 갈게. ‘예수 있는 천국보다 예수 없는 지옥이 더 낫다’ 이 본성 누가 그렇게 심어놓은 마음이에요? 마귀가 그렇게 심어놨고, 아까 돈의 매트리스 위에서 확장되는 거예요.
전 세계에 확장되고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동의하고 그래서 우린 운명공동체라고 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 마귀가 심어준 그게 마지막 최종적인 항변의 표시가 뭐라 했습니까? 그 점을 제가 낮 설교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할 수 없어서 짧게 이야기했지만 그것을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모든 인간 윤리의 최종판입니다. 사람은 돈으로 살지 못한다. 사람은 여유 있다고 사는 게 아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은 누군가 나를 사랑해줄 때 그게 사랑이다. 그런 노래도 있잖아요. <사랑 없인 못 살아요> 그것 말고, 자꾸 육적으로 가지 마시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 노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에요. 그 노래에 대해서 동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평소에 나는 누군가 나를 사랑하기를 내가 원하고 있는 그런 입장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마귀 생각인 것을 상상도 못했지요. 내가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는 권한, 자격이 있다는 거예요.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참 주께서 불러서 패도 많이 패야 돼요. 지옥 가도 패버립니다. “도대체 네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지 증명해보라.” 그럼 인간이 뭐라 하겠어요? “내가 사랑받을 수 없는 자격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증명해보세요?”
“증명해볼까? 네가 하나님 죽였잖아.”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거예요. 정확하게 너를 이야기한 그분을 죽였잖아. 듣기 싫다고 죽였잖아.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운명공동체로서 동조했잖아요. 그리고 우리는 그런 마음을 우리 자식들에게 대물림해줬잖아요. 아담에서. 그러니까 십자가란 완전한 막힘이에요. 어떤 누구도 천국으로 건너올 수 있는 자격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짜 사랑받은 사람은 바로 본인이 몰랐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을 영광과 그 이름에 대해서 찬양할 수밖에 없어요. 주여, 내가 사랑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그런 인간을 사랑해주셨습니다. 비로소 성경이 풀리기 시작해요. 무엇처럼 풀리기 시작하느냐? 누가 이야기하신 것처럼 고구마줄기처럼. 풀릴 때 어떻게 풀린다고요? 고구마줄기처럼 풀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로마서 9장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15,16절) 이것과 전부 다 연관이 되고, 로마서 11장에 “모든 것은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36절)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35절)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갚을 것이 없게 만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왜? 갚을 자격이 애초부터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자신이. 성경 전체가 안 풀릴 수가 없어요. 값없이 준다는 말은, ‘야 공짜잖아’라는 게 아니고 도대체 내가 그 값을 메울 수 없는데 그 값을 대신 치러버렸단 말이죠. 치렀으니까 그 치른 값, 그 희생 값한다고 아무 가치도 없는 우리를 건져준 거예요.
‘너를 구원한다’가 아니라 ‘네 속에 있는 나를 구원한다’는 거예요. 네 속에 있는 나의 사랑을 회수하는 일이 바로 구원의 일입니다. 내 안에 들어온 주님의 사랑, ‘어 내 것이 여기 있네’ 하고 가져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결혼에 대해서 언급했어요. 남편이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 것처럼 사랑하라, 이 말은 아내를 사랑하란 말이 아니고 자기 준 걸 그냥 잡아당기는 거예요.
낚싯대 드려놓고 낚싯줄만 돌려버리면 영생으로 가는 영원한 연합이 되는 거예요. 잠시 헤어지고 비 오는 날만 회상하고 나머지는 헤어지고, 이게 아니고 영원한 사랑이 되려면 이미 일방적인 사랑이 거기 침투해서 상대로 하여금 그가 꼬깃꼬깃 숨겨놓은 그것까지 발각시키는 사랑, 그 사랑을 어떻게 하느냐? 바로 구약에서 광야에서 개인들의 연합체인 이스라엘을 단일형상, 또는 집단형상으로 하나의 형상으로 모든 것을 쪼아버립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서원이에요.
사무엘상 1장 계속 해봅시다. 사무엘상 1장 11절에서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그다음에 나온 말이 뭐죠? “서원”이죠. 이것 약간 어렵습니다. 이 사무엘상 1장 11절, 우리가 보이지요. 한나가 시건 없다는 것, 이제 우리 신약 입장에서는 참 얼마나 자기중심이냐, 이제 눈에 보여야 돼요. 그래야 고구마줄기 돼요. ‘아이고, 한나 훌륭하다’ 이러면 세상에 무슨 훌륭한 사람이 있어요.
그것과 레위기 17장 11절요. 누가 읽어보세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됐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서원에 의하면 누구 하나 어떤 제물의 취지를 온전하게 뒤집어쓴 분의 그 피만을 하나님이 받습니다. 다른 건 일체 안 받아요.
그런데 아까 사무엘상 1장 11절에는 한나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신다면 어떻게 하겠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그다음에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바치겠다는 거예요. 받습니까, 받아요?
지금 집단, 개인형상은 깨졌어요. 마귀로부터 개인형상은 깨졌거든요. 근데 개개인이 인형이라면 그 인형에 줄 묶어서 그 줄을 누가 쥐고 있느냐 하면 마귀가 쥐고 있다고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욥기 1장에 벌써 나옵니다. 인간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아는 존재가 없다. 전 인간에 대해서 너무 잘 압니다. 인간은 소유로서 자기를 규정하기 때문에 소유를 빼앗아버리면 인간은 전부다 하나님을 원망하게 돼 있습니다.
악마는 자신만만해요. 왜? 죄가 왕 노릇하기 때문에, 울상강의에서. 죄가 왕 노릇하기 때문에, 왕이란 말은 뭐냐 하면 의논하고 타협하고 민주주의제도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왕이라 하는 것은 사무엘상 8장에 나오는데 이건 시간 가더라도 봐야 돼요. 굉장히 길기 때문에 제가 빨리 읽겠습니다. 12절부터 18절까지.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자, 왕의 특징이 뭐할 것이며, 뭐할 것이며 특징이 뭡니까? 왕은 개개인이 갖고 있는 특성이 있잖아요. 특성이 뭐냐 하면 뭐든지 내 것 만들어야 속이 풀리는 특성, 특성의 대변자가 누구냐? 그걸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뭐냐? 왕이고, 그 자리가 왕의 자리입니다. 왕을 미워하면서도 자기 자식을 나중에 출세시키고 싶은 이유가, 왕이 근사하는 것을 먼저 갖고 있거든요. 선점하고 있거든요.
“수능 만점 받은 사람이 다섯 명 나왔는데 너는 점수가 이게 뭐냐?” 왜 쥐어박느냐 하면 최고정점이 어떤 자리인 것을 알고 있어요. 우리가 갖고 싶은 것, 원하는 것, 그 욕망의 끝은 뭐냐? 소유하는 거예요. 어떤 것, 나쁜 것? 아니에요. 좋은 것을 그냥 자기한테 집중해서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 그걸 출세라고 이야기해요. 그걸 성공한 삶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이 동네 상태 보셨지요. 대낮에 술 먹고 벌겋게 할 때 이 동네 상태가 왜 이래, 하잖아요. 그럼 이 동네 상태 말고 서울에 청담동이라든지 남산 밑에 있는 이태원이라든지 이 동네 상태 보세요. 어떠한 외판원이나 그 근처도 못 갑니다. 지키는 가드들이 다 쫓아내니까. 그 동네 상태는 어떤 상태에요? 우리가 어느 쪽을 부러워합니까? 이태원 쪽에 우리나라 재벌들 다 거기 있거든요.
그러면 그들은 뭘 하느냐 하면 권력의 최정점에 있음을 자기의 거주지로 차이 나게 보여주는 거예요. 아파트에서 데모를 한다. 왜 데모를 합니까? 못 사는 사람들이 수준 떨어지는 주민들이 왜 우리 아파트 근처에 사느냐 말이에요. 이것은 이론상 못 사니까 위태롭다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경험해보면 못 사는 동네의 사람들이 와서 자기 일가친척들이 와서 사건사고가 터져버리면 그 수습은 누가 해요?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잖아요.
잘 사는 사람들은 담배도 안 피우는데 이쪽은 담배 피운다고 해서 층간소음해서 칼 들고 설치는 이런 사건이 일어나야 되겠어요? 그러면 뭐라 합니까? 싫으면 좋은 아파트 사서 가든지. 지 인생 조지는 건 생각 안 하고 왜 우리끼리 사느냐. 왜 당신이 돈 없어 이 동네 사는 걸 어떡하란 말이냐, 이래 되는 거죠. 아까 그걸 무슨 매트리스? 돈의 매트리스. 모든 것은 돈이 그 인품과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권력이란 게 뭐냐 하면 남의 것을 가진 자가 소유만 가지는 게 아니고 권력도 가지고, 없는 쪽은 재산만 없는 게 아니고 근원적으로 뭐냐? 권력에서 배제된 자들이에요. 소외된 자에요. 권력에서 배제됐다는 말은, 내 편 들어서 나를 지킬 그러한 내 편이 별로 없다는 뜻이에요. 그게 없는 것끼리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없는 것들끼리 혼자 살면 되겠어요? 없는 것들끼리 서로 다정하게 비비고 살든지 비비며 살든지 비벼야 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은 사랑 없이는 못 산다. [자기 앞의 생](프랑스의 소설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1975년에 출간한 소설) 거기에 아주 소외된 창녀 출신의 아줌마와 버려진 고아소년 모모와의 사랑, 사람은 사랑 없이는 못 산다. 저희끼리의 사랑. 얼마나 위협을 느끼고 외로움을 느꼈으면 우리 못난 식구끼리라도 의지하며 삽시다. 이게 인간이 마지막 보여줄 수 있는 인간의 최선의 활동이잖아요.
그러면 그 많은 권력 누가 가져갔어요? 위에 귀족층이 다 가져갔잖아요. 일종의 정신적인 바벨탑이고 피라미드에요. 아래층은 많은데 위쪽은 점점 더 소수자가 누리는 여유, 그 여유가 권력의 풍성함만큼 제공되는 양에 따른 여유입니다. 그러면 저 높은 곳을 향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한나가 지금 뭘 모르고 있어요? 아들만 있으면 나는 진짜 본처 행세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브닌나가 뭡니까? 하나님이 너로 못 낳게 해서 너는 인생 버림받았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한나가 여기서 뭐 하느냐 하면 서원을 하는데 아아 대단한 도박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정신적으로 분명히 사랑받고 있고 하나님 믿습니다, 하는데 누가 안 알아줘요? 주변에서 타인의 욕망들이 시선이 안 알아주잖아요.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뭐로? 서원하는 것으로. 일종의 객기 같은 거죠. ‘그것 봐. 하나님 나 사랑하고 있잖아, 맞잖아.’
그래서 아까 여기서 나오지만 원수라는 말, 그 한나 수준의 원수가 이미 기존에 인간적인 모습으로 있잖아요. 이게 사사기 13장에 나오는 진짜 서원한 자의 모습은, 이건 뭐냐 하면 누가 나보고 조롱하고 자식 없다고 미워하는 게 아니고 아예 마노아 가정은 자식이 없어요. 누군가 서원을 해야 될 자를 주께서 개입해버려요. 그냥 일방적으로 집어넣어버려요.
“네가 자식이 없지?” “없습니다.” “네가 자식이 생길 거야.” “그래요?” “생기는데 나한테 바쳐야 돼.” 무슨 요소가 빠졌습니까? 나는 원하는데 자식 없다고 남들이 욕합디다. 내 자존심 채우기 위해서 주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주세요, 이 요소가 빠졌지요. 일방적으로 집어넣어서 일방적으로 사원을 해버리면 이거는 뭐냐 하면 바로 ‘아들 안의 아버지’라는 공식이 성사되는 겁니다. 그걸 오후에선 이질적이라 했지요.
나는 나 혼자 조용하게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하나님이신 아버지가 나를 가만두지 않고 거기다가 주님이 십자가 사건을 집어넣어요. 그러면 나는 내 안에 이미 가룟 유다가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 모든 서원을 주께서는 유일하게 지옥에서 천국으로 통로를 뚫어버립니다.
아까 제가 레위기 17장 11절 읽어보라 했잖아요. 그 내용이 뭐였습니까? 주께서 뭐만 받는다? 피만 받아요. 피만 받으면 주께서 내 피는 받습니까? 내 피는 안 받지요. 그럼 어떤 인간의 피는 받습니까? 안 받아요. 제사장 피 받습니까? 제사장 피 안 받습니다. 제사장은 양의 피를 안고 들어가야 받아요.
그러니까 안고 들어가는 그것, 그거는 사랑의 대상이지만 나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에요. 사랑이란 수치를 소멸시켜 없애서 연합시키거든요. 연합하기 전에 먼저 개인의 수치를 안고 있는 개인을 대표해서 집단적으로 대표자가 있어야 돼요. 설명이 더 필요한데, 대표자가 있어야 돼요. 그 대표자가 누구냐? 왕입니다.
아까 사무엘상에서 왕은 뭐하는 짓을 했다? 네 것도 내 것이라고 계속 소유로 하고 싶지요. 백성들은 그것을 빼앗기면서도 왕이 있어야 될 이유가, 저 왕이 누굴 지켜준다? 변변치 않은 나를 지켜주는 것은 내 것을 가져도 저 왕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협소한 생각이에요.
그러나 주님의 왕은 우리한테 없는 왕이에요. 없는 왕인데 불쑥 나타나서 우리한테 의논도 하지 않고 알아서 아버지 앞에 서원을 해서 자신이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이미 피를 생산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그러니 율법에 대해서 이스라엘 집단형상과 의논하지 않고 율법이 이야기하는, 그걸 나실인이라 해요. 포도주 먹지 말고, 주검 가까이 하지 말고, 머리 깎지 말고.
다시 말해서 머리 깎지 말라는 것은 약속의 땅과 일상에 괴리된 모습으로 살아가라. 인간이 생각하는 약속의 땅과는 전혀 다른 약속의 땅을 앞당겨서 보여주는 게 나실인이거든요. 의논하지 않고 피를 흘렸다 이 말이죠. 그다음부터는 뭐냐? 빼앗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지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서 다툼이 일어나는 거예요.
권력은, 다른 말로 하면 돈이죠. 권력을 얻고 싶습니다. 권력을 얻는 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니까 남들 잘 사는 것처럼 저도 부자 되게 해주세요, 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그 모델은 뭐냐 하면 모든 권력을 다 쥐고 있는 왕이 모델이겠지요. 그러면 일반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살려면 누구와 선이 닿아야 돼요? 왕과 왕족. 왕과 가까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제사장, 선지자, 랍비들이에요.
랍비는 나중에 나왔지만 제사장, 선지자 이래 돼 있지요. 관리, 또는 장로 계급 그들에게 서민들이 가까이 와서 권력을 얻으려고 하니까 권력자들은 있는 것까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재산까지 노리면서 이것 해주면 해줄게, 라는 인간적인 거래행사가 되겠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점점 더 뭐가 돼요? 권력단체가 되겠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구약에서. 고구마줄기처럼 다 연결돼 있어요.
내가 원하는 권력은 내 소원대로 이뤄지는 게 아니고 그런 나를 권력자가 나를 철저하게 이용해먹는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이거는 실험에서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 상황을 주께서 허용한 이유가 뭐냐? 주께서 준비한 왕은 인간들이 생각한 것 꼭 반대 방향으로 노출해요. 그냥 값없이 천국 문을 허용해버려요. 아무 대가없이 천국 문을 허용해버립니다. 값없이 그냥 생명수를 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이미 준비된 거예요. 왜냐하면 그건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계약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인간도 그 언약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참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나님은 이렇게 했어요. 누구든지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받고 지키면 복을 받는다, 라는 말을 신명기 28장에서 했잖아요. 그거는 누구도 내 율법 계약을 지킬 수 없고 참여할 수 없다는 말로 들어야 되는데 이걸 잘못 알아듣고 열심히 노력하게 되면 나도 복을 받겠다는 본인의 숨어있는 권력욕을 율법을 통해서 그걸 노출시켜버린 거예요.
여러분, 시편 1편 정도는 다 외우지요. 뭐 답변 안 하셔도 됩니다. 이게 성경적 방법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너 십계명 정도는 다 지켰지, 이 말은 뭡니까? 너희 중에 아무도 못 지켰다는 뜻이에요. “복 있는 사람은 날마다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하지 뭐. 묵상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묵상의 의미는 뭔데? 몇 시간 쉬고 묵상해? 쉬는 시간 몇 분인데? 전혀 마련된 게 없어요.
그래서 바리새인은 뭘 준비합니까? 십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세칙들을 마련하는 것이 유대인 사회였고,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었고 그 세칙 마련할 때 그들이 뭘 갖고 있나? 문자를 갖고 있고, 그 문자는 그들이 율법을 구성하는데 하나의 언어를 담당하기 때문에 그게 권력이 작용하는 거예요. 무식한 인간들은 우리가 지은 법이나 지켜.
예수님께서 거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신명기에 그런 법이 있다고? 간음한 자를 돌로 쳐라. 그러면 이중에서 죄 없는 자가 돌을 쳐라. 죄 없는 자가 돌을 치는 것이면 우리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럼 나네, 하고 돌로 쳐야 되는데 이상하게 그러지 않았던 이유가 있어요. 그 당시에 주님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손을 넣고 글을 씁니다. 이걸(화이트보드) 땅이라 하고 글을 써보겠습니다.
김 아무개, 1965년도 3월 5일 오후 3시에 율법에 위반했음. 또 최 아무개, 돌 들고 있지요. 최 아무개, 1972년도…. 왜 이렇게 안 써도 되는 이유는, 인간의 자기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위선적인 죄는 평생 갈 때까지 반복하기 때문에 문장 몇 개만 해도 돌 다 놓게 돼 있어요. 왜냐? 찔리기 때문에. 그러니까 땅에 글 쓴 거예요, 그 사람 마음에다 글 쓴 거예요? 마음에다 글 쓴 거예요.
카프카의 [유형지]라는 단편소설이 있어요. 유형지에서 어떤 장교가 기계를 만들었는데 이 기계가 뭐냐 하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형틀을 만들어놓고 무엇 때문에 죄냐 하는 것은 그 형틀에 찌를 때 바늘로 몸에다가 그 사람의 지은 죄 문장을 문신처럼 바늘로 콕콕 찔러서 죽어가는 죄수의 몸에다가 그 죄목을 적는 방식으로 사형을 시키는 기계를 만든다는 거예요. 잔인하지요. <어쩔 수가 없다> 영화보다 더 잔인한 것 같아.
네가 죽는 이유는 이 죄 때문이야, 라고 사람이 바늘에 찔려서 피 흘려 죽게 만드는 기계. 그걸 장교가 시범 보인다고 지가 먼저 죽어버렸어요. 카프카는 그렇게 했어요. 그걸 시범 보이는 본인이 벌거벗고 누었다가 죽어버렸어요. 이게 인생이다. 인간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벌 받고 있는 게 인생이다. 인생이란 벌 받는 과정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죄가 뭐냐 하는 건 지옥 가서야 아는 거예요.
인간의 죄는 뭐냐? 피의 사랑이 도착하지 않아서 수치스러운 것이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게 죄가 되지요. 수치가 해소되는 게 아니고 사랑에 의해서 이미 다 용서받은 상태에서 도대체 뭐가 용서받았지? 내가 이런 의로움을 유지하고 있었구나, 그걸 들춰냄을 당할 때 그 관계를 뭐냐? 의라고 하는 거예요. 의는 소유가 아닙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가, 그 관계가 사랑이에요. 우리는 그 사랑을 보여주는 들러리고. 우린 껍데기고 안에는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영원한 관계가 있어요. 그걸 가지고 전에 봤지요. 그게 언약이에요. 히브리서 13장 마지막에 나와요. 언약의 피를 살리기 위해서 그동안 하나님께선 자기 죄인들 사용했다.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언약을 구원하는 거예요. 그걸 아까 제가 뭐라 했습니까? 주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심어놓고 그 사랑을, 우리를 가져가는 거예요. 받은 인간들은, 성령 없이 사랑을 이해하게 되면 그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 하면 그게 바로 전영록이 불렀던 무슨 노래? <얄미운 사람> 정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지만 지금은 남이 되어 떠나가느냐. 김지애가 부르고 작곡은 전영록이 하고.
원래 인간은 피조물이에요. 인간은 6일째 마지막에 만들어졌다고요. 다른 해와 달은 그런 데모를 안 합니다. 4일째 만든. 꼭 인간들이 마귀의 앞잡이 되어 달려들고 항변하고 이러고 있어요. 그래서 주께서는 예수님이 고분고분하잖아요. 예수님은 십자가 죽을 때 고분고분했지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주옵소서.”
주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할 수 있거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그 고분고분한 그 마음이 성령이라고 해요.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그다음부터 우리 육신에 있던 죄가 얼마나 발악을 하고 있는지를 비로소 우리는 밝혀집니다. ‘주여, 사랑 없이는 못 살잖아요. 내 인생 이래 조져놓으면 안 되잖아요.’ 이런 식으로 발악하는 것이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
다시 반복하면서 회상되면서 이게 바로 죄였구나, 하는 죄를 들춰내는 기쁨, 내가 온전하게 사랑을 소유했다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내가 이렇게 철딱서니 없이 주님께 개기고 대들고 맨날 육신이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 때 ‘주여, 날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다고 떠나지 않습니다.
이미 안 떠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범사에 감사와 기쁨으로 이어지도록 주께서 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바로 이 마지막 때 주 앞에 바쳐진 한나, 바쳐진 서원하는 입다의 딸처럼 그렇게 다뤄집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신분이 바뀌고 자리가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뀌게 하는 것은 우리의 수치를 수치답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주님의 그 큰 사랑뿐인 것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