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척도의 변화

아빠와 함께 2026. 4. 15. 08:49

20260413a 부산강의 : [시편]84(68:1)-척도의 변화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시편 68편 전체 다 하겠습니다. 1절에, “하나님은 일어나사” 이게 이상한 이야기에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 일어난다는 것은 누구의 동작이냐 하면 지상에 사는 인간들이 이쪽 자리에서 저쪽 자리로 옮길 때 ‘일어나사’ 이동이 가능하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 인간들이 하는 동작을 했다는 말은 인간세계 속에 섞여 들어왔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왜 섞여 들어오지요? 섞여 들어오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시지 왜 섞여 들어오느냐?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쟁’입니다. 전쟁을 하시려고 하시는 거예요. 전쟁을 굳이 해야 될 이유가, 포로 된 자를 구출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것을 어디서 보여주느냐 하면, 원래 이스라엘이란 나라 자체가 없어요. 없는데 이스라엘이 어디에 노예생활을 했느냐 하면 애굽의 노예생활 했잖아요. 그전까진 이스라엘 나라 없습니다.

이게 애굽입니다. 애굽 나라의 특징은 뭐가 없어요? 언약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이 없는 여기에 고센 땅에 누가 살고 있느냐? 일단 어떤 집단이 있어요. 이 집단은 사백 년 가까이 무엇을 유지되고 있었느냐 하면, 여기에 언약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언약이 있다. 대부분의 나라는 언약이 없다. 언약이 없는 것이 언약이 있는 집단을 프레스, 억압을 했지요.

억압을 했다는 말은 이런 겁니다. ‘나는 살래.’ 어떻게 사느냐? 너희의 에너지를 뽑아내어서. ‘우리는 살래.’ 산다는 것은, 에너지가 비축이 가능하다. 피라미드, 그리고 스핑크스 그 덩어리가 무슨 덩어리냐? 에너지 덩어리에요. 그렇다면 그냥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누가 회초리를 때려야 하지 않습니까. 화려한 문명의 건물, 그 자체가 에너지, 에너지, 에너지의 블록이죠.

중앙아시아에 키르기스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있지요. 그들 나라의 관광객들이나 사람들이 뭘 보느냐? 허허벌판에 인구는 별로 안 되지만 중앙에 거대한 건물이 서 있는 걸 볼 거예요. 그것까지 볼 것도 없이 서울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평양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전 안 가봤습니다만 김일성 궁전 있지요. 그게 왜 필요하지요? 김일성 죽었는데 그게 왜 필요합니까? 힘의 비축이거든요.

여자들이나 남자들이 나이 많으면 아랫배가 나오지요. 이게 뭐냐 하면 전쟁 비축용입니다. 먹을 게 없을 때 라면으로 채운 에너지가 있어야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 한 달 가면 아랫배 빠집니다. 활동은 해야 되지 지방으로 저축된 것 빠지지요. 너무 비축을 해서 문제 될 때가 있는데 적당히 비축된 사람이 오래 산다는 말이 있어요. 운동해서 뺀 사람은 위급할 때 진짜 그냥 자빠져요. 중심이 아랫배가 있어야 덜 자빠진다는.

이게 에너지 비축이죠. ‘나는 살래, 너를 죽여서. 너의 에너지 뽑아서 나는 살래.’ 이게 애굽 나라입니다. 애굽 나라의 특징은 뭐냐 하면 그 안에 언약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걸 정리하면 ‘언약이 없어도 산다’가 성립된다는 의식입니다. 굳이 하늘에서 온 언약이 없어도 산다는 거예요. 어떤 분이 질문했지요.

언약과 약속의 차이점이 뭐냐? 대부분 관심도 없어요. 언약이 뭐든 약속이 뭐든 그냥 믿으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이걸 구분하게 되면 언약보다 약속이 먼저 있었습니다. 약속이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올 때 언약이 돼요. 언약이 되니까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언약이 완성이 되게 되면 약속으로 귀속이 되는 겁니다. 약속은 알파요 오메가니까, 처음이고 나중이니까.

그래서 어제 오후설교 때 국민학교 여자 애들이 무슨 놀이한다 했어요? 고무줄놀이 할 때 둘이 묶여있지요. 묶여있을 때에 고무줄이 위아래로 움직이고 변동을 하는 거예요. 해봤자 이 약속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언약이 시간과 공간에 올 때 누가 오느냐? 언약을 내리신 분이 같이 따라 들어와요. 인간 속에. 언약을 주신 분을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건방지게 물었어요. 나를 보낼 때 누가 보냈냐고 이야기할 때 나를 어떤 분이 보냈다고 이름을 알려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할 때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름은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나중에 이야기했어요. 뭐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거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인간에게 붙이는 이름은 나에겐 그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이름을 붙이려면 피조물과 창조주 관계가 될 때 만들어진 자에게 이름을 붙여야 되는데 주님은 세상은 만드신 분이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수 없고 어떤 기능을 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그래서 교인들이 기도할 때 누구 이름으로 기도합니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언약으로 언약만 드러나게 나를 다뤄주옵소서.

사극에서 감독이 배우들을 재촉을 해요. “자기 맡은 역할에 집중하세요.” 굉장히 다그치지요. 어떤 연기? 메서드 연기하는 거예요. 지금 당신은 연기자라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가 이 시대에 들어왔다고 집중하세요, 하면 그 사극하는 사람들 옷도 뭡니까? 옛날 조선시대 옷 입고 진짜 조선시대인 것처럼 공주나 여자 옷 입잖아요.

그 현장에서 유일하게 옛날 옷 안 입는 사람은 누굽니까? 감독밖에 없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감독이 시키잖아요.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감독 머릿속에는 다 이루었다가 있는 거예요. 고무줄 양쪽 끝, 시작과 끝을 다 알고 있는 거예요.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약속을 버리고 언약을 탄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이름은, 주의 이름은 시공간 속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인간이 언약이 없는 곳에 에너지 다 빼앗기고 노예생활하고, 노예란 포로로 잡힌 거죠. 사로잡혀 있는 상황에 있음을 하나님이 깊숙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했다’를 두 자로 줄여보겠습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상대방에게 “나, 당신 사랑해” 할 때 “우리 밥이나 먹자” 하면 이거는 사랑이 성립이 안 돼요. “당신이 날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나는 당신을 이상하게 안 좋아지네.” 그러면 사랑은 성립되지 않아요. 사랑이 신기한 게 양쪽 다 불꽃이 튄다는 게 원하기는 했지만 강요 안 한 상황 아닙니까.

그러니까 사랑은 굉장히 신기해야 되고, 그 신기함이 계속해서 어떻게 돼요? 유지돼야 되겠지요. 근데 사랑으로 시작했는데 한 달도 안 되어 없어졌다면 그 사랑은 어디에 해당됩니까? ‘언약이 없다’에 해당되겠지요. 그래서 인간들의 사랑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왜 어긋나는가? 왜 안 맞는가를 사랑을 가지고 우리한테 실습시키는 거예요.

사극 속에서 두 배우가 메서드 연기해서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연기를 해줘야지요. 그러면 감독이 컷, 하고 난 뒤에 둘이 연애하러 갑니까? 아니지요. 그게 무슨 세계냐 하면 바로 우리는 허상 속에 살고 있는 거예요. 어쨌든 여기서 하는 것은 주님께서 함께 들어왔을 때는 사랑을 다 이루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런데 이 언약에 대해서 언약을 달성할 자격이 없는 자, 그게 누구냐 하면 인간이죠. 언약을 인간이 지킬 수 있다면 굳이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인간 속에 들어올 이유가 없고, 인간을 사랑으로 들어올 이유가 없습니다. 너희가 알아서 다 사랑해서 나 있는 곳에 오라, 이러면 되는데 그게 성립이 안 돼요. 누가 누가복음 15장 4절 읽어보세요.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뜻은 잃었다가 찾는 내용이 없으면 그 내용이 빠져있으면 그거는 구원된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늘나라 계획부터 이래요. 충분히 잃어야 돼요. 충분히 잃어버려야 돼요.

충분히 잃어버리는 것을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면 주님을 따라올 수 없어요. “진짜 나를 원해, 나를 찾아? 그러면 너한테 조건 줄게. 자기를 잃어버리고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이것 인간으로 해낸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이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식이 뭐냐 하면 구원은 믿음 없이 구원을 받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믿어버리면 이거는 자기를 부정할 수 없어요. 믿음 있는 나를 어떻게 부정이 됩니까? 어디까지 잃어버려야 된다고요? 내가 믿는다는 말도 잃어버려야 돼요. 그 믿음마저 잃어버리는 예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마태복음 14장31절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지요. 재미있다고 하루 종일 걸었습니까? 풍랑이 일 때 빠졌지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베드로가 빠질 때 주님께서 도로 건졌다는 것만 알잖아요. 건질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믿음이 없는 자를 건지는 거예요. Immediately Jesus reached out with His hand and took hold of him, and *said to him, “You of little faith, why did you doubt?” 믿음이 없음을 분명히 했을 때 그때 주께서 건져내는 것이 누가복음 15장 4절, 온전하게 제대로 잃어버린 거예요. 잃어버린 줄도 몰랐어요.

제가 주님이라면 건질 때, ‘컷!’ 영화 잘 됐어. 왜? 주님은 감독이니까. 왜? 이 세상 자체가 허상이니까. 보이는 것에 실상이 나타난 것이 보이는 것의 죄를, 인간은 보이는 것밖에 몰라요. 과학, 과학은 측정해야 아니까. 보이는 세상의 죄를 들춰내기 위해서 실상이 보이는 곳에 침투해서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건집니다. 건질 때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게 만들어요.

그래서 그 믿음은 어디서 온 믿음이냐? 주님께서 자기 믿음을 대신 집어넣은 믿음이에요. 주님께서 집어넣었다는 말은, 내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위선이고 속임수죠. 하나님을 속이는 거예요. 왜? 뭘 보고 그런 아이디어를 얻었겠어요? 성경 보고. 로마서, 요한복음 보면서 ‘이건 행함으로 안 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구나. 믿자.’ 그 믿음은 행함에 해당되지요. 그걸 꼼수라 하는데 그게 요령이에요. 인간은 자기 구원에 미쳐버렸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하라 하는 대로 끝까지, 그것 안 하면 내가 지옥 가니까 이건 나만 손실이 되니까 내가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는 무슨 짓도 다 하겠다는 거예요. 무슨 짓까지 하겠습니까?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소망합니다.’ 이런 헛짓까지 해요. 그러면 기존교회에서 손들고 나오세요, 여러분. 박수치면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옵니다. 오늘도 등록했습니다. 주님께서 뭐라 합니까? ‘컷!’ 네가 영화 찍는구나. 커트입니다, 커트.

이게 시편 68편과 관련돼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이 친히 일어서서 전쟁하는 것, 이게 언약궤가 움직이는 걸 말하는 거예요. 민수기 10장. 친히 전쟁을 해야 될 이유가, 오늘제목이 이게 적당하다고 보는데, 일단은 이렇게 봅시다. ‘탈락자 배출’ 탈락자를 생산해내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4장 17절인지 내 입에서 나오는 맞는다는 게 이상해. 하여튼 틀릴 가능성이 많은데 맞아야 되는데, 이거는 맞네요. 이상하다.

베드로전서 4장 17절,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하나님의 심판이 출발점이 어디에요? “하나님 집에서” 교회에서 시작되는 거예요. 교회가 왜 있는가? ‘탈락자를 배출하기 위해서’에요. 어떻게 배출하느냐? 탈락자를 생산해야지, 교회에서. 구원받지 못하면서 구원받는다고 착각하는 자를 교회가 생산 공장이 되어서 거기서 탈락시키는 그 작업을 구약 때부터 이미 주께서 언약으로 실시해왔습니다. 이제부터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를 할 거예요. 지금까지는 쉬웠는데.

이 차이를 보세요. 예배당, 교회, 성전 차이점? 성전은 구약에서 만들어진 공간개념이에요. 제가 좀 어려운 단어를 쓸 수밖에 없어요. 쓰는 것을 용납해주세요. 공간개념을 사용하는데 공간개념 이걸 다양체라 해요. 다양체란 말의 반대말이 다양성입니다. 이런 게 어려워요. 우리는 다양체=다양성, 같은 뜻이라 생각하잖아요. 이게 반대개념이에요.

다양성 개념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민주적 집중성’에서. 두 가지의 단어가 여러분, 대립된다고 생각 안 들어요? ‘민주적’이란 뭡니까?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개인의 의사가 모이면 그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죠? 독재가 돼요. 희한하죠. 그 대표적인 것이 나치. 나치의 히틀러를 그 당시 독일 사람들 85%가 믿어줬어요. 어떻습니까? 선거에 의해서 표가 집중되었지요.

패션의 세계에서 옷을 고른다든지, 모든 자본주의 시장에서 유행을 따른다 할 때 결정을 누가 합니까? 본인이 하지요. 그 본인의 경향성은 뭡니까? 대다수가 좋아하는 트렌드를 벗어날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벗어나지요. 젊은 사람들이 문신을 하더라. “성경에 문신하지 말라 하는데 네가 문신을 하느냐?” “엄마, 이게 트렌드야, 경향이야.” 트렌드의 속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집중에 있지요.

북한의 김정은에 투표하는데 선거결과가 몇 퍼센트입니까? 백 퍼센트지요, 백 퍼센트. 만약에 걸리면 그 마을 자체를 아오지 탄광에 다 집어넣습니다. 이란에서 이슬람공화국 지지하는 사람이 몇 퍼센트입니까? 25%에요. 그런데 이란공화국 정치가 뭡니까? 여자는 다 히잡 써야 되고. 이슬람공화국이죠. 25%가 뭘 장악했어요? 75%를 장악한 거예요.

이 세상은 애굽입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데 그 존중한 다양성이 뭐로 바뀝니까? 독재로 바뀌게 돼 있어요. 이 독재가 무서운 것은 자발적 독재라는 거예요. 다양성에서 집중성이 되게 되면 그다음부터 원하는 것은 우리에게 지시와 우리에게 명령을 해 주옵소서, 이렇게 돼요.

그래서 제가 자꾸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시편 68편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일어서서 전쟁을 하잖아요. 전쟁하려고 일어설 때 전쟁의 주체적 집단은 누구냐 하는 거예요. 단어가 자꾸 어려워요. ‘주체적 집단’이라 하는 건 주체하는 집단하고 여러분, 이 단어가 결합이 돼야 돼요.

왜냐하면 보통 주체라 하는 것은 나를 두고 이야기하잖아요. 집단은 여럿이 모인 것을 집단이라 하잖아요. 어떻게 내가 속했는데 내가 집단의 말 듣는다? 이게 있을 일인가, 라고 생각하겠지요. 그거는 결정하고 판단하는 나와 그런 나를 뒤에서 내가 그런 나를 내 존재의 바닥에는 내가 모르게 나의 결정과 의사를 조종하는 다른 어두운 힘이 있어요. 그 어두운 힘과 싸우기 위해서 누가 일어선다? 여호와께서 일어선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22장, 23장, 24장이, 하여튼 점심 먹고 난 뒤에 졸기만 해서, 뭐 조는 것도 주의 은혜니까. 민수기 봅시다. 지금 이 대목을 단어로 연결하니까 구체성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내가 성경에서 찾아볼게요. 민수기 24장 17절, 발람이 예언합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이렇게 돼 있지요.

이건 누굽니까? 이 별은 나중에 아기 예수의 별과 관련돼 있는데, 물어볼게요. 이스라엘이 전쟁을 원합니까? 원하지 않지요. 사람은 좀 자길 안 건드리면 제일 좋아요. 이걸 평화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언젠가 했잖아요. 유치원 졸업식에 장래 희망을 하는데 어떤 아이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너 장래 희망이 뭐냐?” “나는 전쟁하지 않는 그런 대통령이 되고 싶다.” 그 현장에 있던 내가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여러분, 전쟁 없이 평화가 있습니까? 전쟁을 하고 싶어서 하는 대통령이나 나라가 어디 있어요? 평화가 안 되니까 전쟁을 하는 거예요. 온 집이 전부 다 조폭이고 깡패 집인데, 나 조용하게 살래, 이게 됩니까? 윗집에서 층간소음 일으키는데 나 조용하게 살래, 뭐 귀마개 두 개 할래요? 이 세상이 나의 주체, 나의 의도,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질 않아요. 우리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어디에 휘말려있어요? 전쟁에 휘말려있습니다. 이걸 자꾸 부정하면 안 돼요.

그런데 여기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별이 나타나고 왕이 있다 이 말이죠. 그 왕이 이스라엘을 곱게 인도하겠어요, 전쟁을 벌이게 하겠습니까? 전쟁을 벌이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조용하게 살고 싶어서 나왔는데 그런 이스라엘의 주체적 집단의 의사를 무시하고 그 안에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침투해버리니까 그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디에 휘말렸습니까? 전쟁에 휘말린 거예요.

이게 교회입니다, 오늘날. 그게 성전이고. 성전은 언약궤가 있는 데가 성전이거든요. 성전의 스케일이 심화되게 되면, 질적으로 심화되게 되면 그것이 신약까지 이어지게 되고, 그 성전이 신약까지 이어지게 될 때 오순절 성령이 오잖아요. 그래서 어떤 집단이 건물이 있어서 건물 안에 성령이 있다, 라고 그렇게 우리는 생각하겠지만 성령부터 먼저 오고 그다음에 성령의 활동중심으로 아우라가 건물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면 그게 바로 신약의 성전입니다.

그게 우리 몸이라고 했어요. 에베소서에 보면 성도끼리 네트워크라고 돼 있어요. 그러니까 다양성이 아니고 다양체가 되는 거예요. 이게 다양성, 다양체 아시겠습니까? 아직 모르겠다면 여러분 발에 티눈 알지요. 티눈 작아요, 커요? 작지요. 작은 티눈 때문에 주위에 있는 근육이 신경이 다 눌려서 아파요. 그땐 약국에 가면 발라서 티눈 떼어내는 게 있어요. 주께서 내 허락도 없이 감히 내 안에 티눈이 되고 말았습니다.

티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때부터 본의 아닌 전쟁에 나서는 데 우리로 하여금 개뿔도 믿음도 없이 그냥 완전하게 끝까지 잃어버리었던 자를 주님께서 티눈께서 건져줌으로 말미암아 너 같은 조건, 너 같은 그러한 기준이 아니면 천국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우리를 앞장세워서 전쟁에 나서요. 좀 조용히 살고 싶어요, 우리는 정말. 전도고 뭐고 짜증나. 나 죽어서 천당 가면 끝나는 거야. 조용히 살고 싶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있는 믿음 없애고, 사랑 없애고, 소망 없애놓고 없애는 방식으로 우리를 건져놓고 너 같은 기준과 조건에 있는 자를 주께서 앞장세우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시편 68편이에요. 무엇이 가짠지, 진짠지 널 앞장세워서 하겠다. 그러면 겨울에 길 걸을 때 맞바람 불면 제일 힘들지요. 막 고개 숙이고 그러지요. 그다음부터는 세상의 온갖 맞바람 다 날아와요.

참 그 맞바람이 구약 때 바벨론, 또 앗수르, 블레셋, 아람, 모압. 특히 아람, 지금 시리아에요. 대단히 괴롭혔어요. 암몬, 특히 형제라고 하는 에돔. 그들의 맞바람이 이스라엘을 세차게 몰아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요. 성경을 보면서 항상 이스라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거는 자기를 안 잃어버리려고 하는 그냥 사투요 몸부림이에요. 여호와는 내 편이다. 난 족보가 뿌리가 이스라엘이다. 그걸 누가 생각하느냐 하면 망했던 가짜 이스라엘이 그 생각하다가 주님한테 내침을 당했어요.

그 이스라엘이 누굴 죽였느냐?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예수님 죽일 때 누구 입장을 생각해야 돼요? 나는 예수님 편이다? 여러분, 십자가 달릴 때 예수님 편 한 명도 없었어요. 심지어 세 명의 여인, 막달라 마리아, 살로메하고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도 주님의 뜻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어요. 주님의 무덤에 가서 놀래자빠져서 도망치기 바빴어요. 누가복음에 보면. 아무도 없었어요.

그들이 주님을 찾아간 것은 주님을 끝까지 인간적인 사랑으로 애착을 가지고 딴 건 다 버릴지라도 주님은 버리지 않겠다고 주님에 대한 자기 사랑은 뭔가 의미가 있고 건전하고 이거는 하나님께서 인정할 거라는 기대감으로 갔는데 예수님의 빈 무덤이 그 기대감마저 그것도 자아의 소관이라 하는 것을 밝혀내지요.

성령이 와야 비로소 십자가의 영이 와야 주님의 티눈이 박여야 사태 파악이 돼요. 그렇게 되면 내 인생의 영안은 컷, 끝났어요. 이제는 맞바람만 맞으면 되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베드로전서 4장 앞부분에 나옵니다. 4장 12절부터 13절에 보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궁금한 것, 내가 성령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자꾸 저한테 묻지 말시고요, 베드로전서 4장 12절과 13절을 읽어보시면서 각자 본인한테 적용하면 되지요. 누가 읽어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잠깐 스톱, 이상한 일로 그다음에 뭡니까? 그러니까 이게 내가 원했던 거예요? 고난 받고 살래, 십지가 질래? 아니지요. 그건 예상한 거잖아요. 어떻게 와요? 이상하다는 말은, 내 쪽에서 해독이 된다, 안 된다? 해독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영적인 일은 뭐냐? 내가 기대하거나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거예요. 육적인 일은 성경과 유사한 것을 내가 자꾸 기대하고 내가 스스로 창작을 해서 아마 이쯤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거야, 그건 전부 다 육적인 거예요. 아무리 고상해 보여도. 그건 미리 대비가 가능해요. ‘내가 이런 일이 있다면 이렇게 해야지.’

나중에 인민군이 와서, 요샌 인민군도 필요 없어요. 민주당이 와서 예수 밟아라, 그 시대가 올지 모르거든요. 정치적 발언이니까 곤란하지만. 이재명 대통령이 명령해서 “누구든지 예수 사진을 밟으면 살려줄게. 안 그러면 죽인다.” 이런 시대가 올 수 있다 이 말이죠.

여러분, 이 교회가 다양성을 갖고 있어요. 교회가 다양성을 갖고 있다는 말은 뭐가 된다 했습니까? 민주적인 집중성을 갖고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교회가 스스로 교회를 지탱하고 유지하려고 버티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다양체에 의해서, 다양체란 우연입니다. 예상 못한 주의 일입니다. 육적인 전략적인 행위가 아니고 주께서 돌변해서 일으킨 이 다양체에서는 매주 이 교회의 교인은 단 한 명도 없어야 돼요.

없는데 한 사람이 11시 예배인데 11시 반에 들어왔다. 이건 어떻게 돼요? 고맙습니다, 감사가 되겠지요. 목사는 매일같이 우리 교인은, 누가 조사 와서 교인 몇 명입니까? 0. 그럼 당신은 교인입니까? 나도 아니죠. 왜? 주께서 티눈 조건을 유지할 때만 나는 되니까요. 나는 조선시대 옷 입고 현재 내 배역에 충실할 뿐이지 되고, 안 되고는 누구 소관이죠? 감독 소관이잖아요. 배우가 까불어서 감독 자리를 가지면 돼요, 안 돼요? 안 되면 그거는 뭐냐? 자기에 대한 단독적인 집중성이 되는 거예요.

이게 지금 과한 이야기처럼 들립니까? 마태복음 18장 20절엔 절대로 과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누구든지 두세 사람도 내 중심으로 모입니까? 교인중심, 집사님중심으로 만나요? 누구 중심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모-일-때-만 교회가 되니까 그렇게 하는 이유가 탈락자를 계속해서 배출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하도 가짜가 많이 오니까.

티눈 되신 주께서, 다시 정리하면, 인간 시공간 속에 주님께서 언약적으로 임했던 그 상황을 주님 쪽에선 유지해야 되기 때문에, 계속 유지를 해야 돼요. 그럼 유지할 때 인간 쪽에서 기대하거나 고대하거나 우리 교회는 부흥 돼야 된다는 생각을 가졌을 때 주께서 도와줬습니까? 아니지요. 이들은 지금 민주적 집중성 속에 이 세상 속에 그들은 노예생활하고 있었어요. 한 통속이 되어.

이 이야기의 근거는 뭐냐 하면 이거에요. ‘성전은 없다’가 돼요. 성전은 없는데 언제 있느냐? 언약궤가 등장해요. 언약궤가 어떤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요. 이게 바로 성전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약궤니까 언약, 언약을 담은 상자잖아요. 여러분, 상자와 인간이 싸우면 누가 죽고, 누가 살겠어요? 묻는 내가 나쁘다. 상자 그것 발로 부셔버리면 되잖아요. 누가 이겨요? 인간이 이기죠. 이게 애굽이 히브리인을 압살하고 노예로 많은 아들을 죽였잖아요. 실제로 딸은 살리고 아들은 죽였잖아요.

이 언약궤 상자를 들여다본 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역전됐지요. 상자가 이기고 누가 졌어요? 사람이 죽었잖아요. 그 무서운 상자를 품은 자가 뭐다? 그게 바로 오늘날 성도고 그게 바로 교회가 되는 거예요. 품은 자라 하니까 갑자기 노래가 나와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안치환, 1977) “강물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음악을 품은 자가 아름답다는 노래잖아요.

십자가의 사건이라는 것은, 인간은 지옥으로 떨어지게 돼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 아담이 저주받았으니까. 예를 들어서 옥상에서 어떤 여자가 뒤로 넘어져요. 평소에 티격태격하던 남편이 자기 아내가 옥상에서 앞으로 떨어지면 대비가 되는데 뒤로 그냥 넘어졌을 때 남편이 달려들어서 아내가 먼저 떨어졌어요.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지금 자유낙하하고 있는데 그걸 보고 남편이 뒤에서 그 여자를 안으면서 같이 떨어지면 같이 죽는데 남자가 떨어지면서 남자의 무게 m질량이 들어가니까 여자를 붙들고 뺑 돌아 뒤로 떨어져서 남자는 죽고 여자는 살아났어요.

목사님, 실제입니까? 실제는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 드라마 이야기에요. 주님은 죽고 우리는 살아난 거예요. 주님 보고 나 몰라라 할 수 있어요? 안 되지요. 그럼 두 번째 질문, 내가 중요합니까, 주님이 중요합니까?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내가 값을 주고 샀으니까 더 이상 너는 너의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6장 끝에 보면 나와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 20)

이걸 그냥 말로 하지 말고 제가 시연을 보일게요. 손가락 가운데 긴 손가락 있잖아요. 가슴팍이나 이마를 누르는 거예요. “너는 내 거라 했어, 안 했어?” 밀어내는 것, 그게 뭐냐? 일상생활입니다. “몸이 아파요. 죽겠어요.” “네 몸은 내 거라 했어, 안 했어?” “자식이 애를 먹여요.” “네 자식은 예수님 거라 했어, 안 했어? 도대체 몇 번을 이야기해야 돼, 몇 번을? 너 탈락자 돼 볼래?” 기도해서 은혜 받고, 복 받고? 탈락, 탈락이다. 어디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이용을 해도 주님이 우리를 이용해야지 왜 우리가 예수님을 이용해요? 그걸 우상숭배라 하는 거예요. 탈락자들이에요.

민수기에 발람에 의하면 하나의 별이 그들과 함께 동행을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싸울 의미가 없어요. 아무 싸울 의사가 없어요. 그냥 조용히 통과하길 바라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문제가 아니고 이스라엘에 들어갔던 그 별, 이건 이스라엘 본인도 몰라요. 이스라엘은 그냥 모세가 인도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는 게 아니고 이방인 선지자인 누구? 발람이 그걸 체크해주잖아요.

우리는 신앙생활하고 싶지도 않고요. 우리는 그냥 교회 와서 제발 좀 조용하게 놔둬라, 우리 본심은 이거에요. 내가 기껏 가진 것으로 버티겠다는. 이때쯤 ‘아멘’ 좀 나와야 되는데…. 우리의 본심은 이거에요. 내가 부자 되려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재벌 되려는 것도 아니고. 평생 동안 그나마 내가 수고한 성과 있잖아요. 성과가 나의 가치고 의미니까 이거라도 지키도록 좀 내버려두면 안 되겠습니까, 주님?

행운이 온다면 약간 더 채워줄 수도 있고, 행운이 온다면 십일조로 성의를 보일 용의가 있으니까. 어쨌든 간에 제발 내 거는 건드리지 마라. 거기에 대해서 주님은 뭐라 합니까? 손가락 내밀면서, 네 게 어디 있는데? 없는 데서 생겼는데 죽은 데서 살렸는데 네 게 어디 있는데? 도대체 이 싸움을 언제까지 벌일 거야.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다양체라 하는 것은 인간세계에서 인간을 논할 때 있었던 여러 가지 기준이 주님 앞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다양체 어떻게 하느냐? 다양성을 통해서 다양체로 가야 돼요. 다양성을 통해서 탈락자를 탈락시키고 거기서 뽑아내는 거예요.

그러면 왜 이걸 단일체로 해야지 다양체로 하느냐? 왜냐하면 인간은 보이는 것은 다양하게만 보이기 때문에 다 다른데 이상하게 본의 아니게 동일한 고백을 내놓잖아요. 그 고백이 시편 68편이잖아요. 여호와께서 일어서서 우리를 다루어서 전쟁에 이끌게 했다. 너도 그래? 나도 그래. 이상하네. 이것이 기드온의 몇 명 용사? 삼백 명.

삼백 명인데 뒤에 ‘용사’ 붙이지 마세요. 그거 떨거지들이에요. 용사가 아닙니다. 용사는 참전이 돼야 용사인데 그들은 참전한 게 없어요. 왜냐하면 그때 미디안과 싸웠잖아요. 밤중에 미디안 진영에서 뭔가 죽였는데 그 많은 군사가 죽을 때 누가 누굴 죽였습니까? 자기들끼리 죽였어요. 그러면 그때 삼백 명 뭐했습니까, 그 떨거지들 뭐했습니까? 시키는 대로 횃불을 항아리 안에 감추고, 몇 명은 나팔을 불었고 이렇게 있었단 말이죠.

이 시추에이션 지금 우리가 무슨 짓을 하지? 몰라요. 항아리가 왜 필요하고, 횃불은 들면 되지 왜 항아리 안에 감춰서 빛이 안 나오는 이유를 모르겠고. 칼은? 칼이 없어요. 칼 없이 무슨 전쟁을 합니까? 나중에 뒤늦게 잔당들 소탕할 때 칼 들고 나갔지만 처음에 삼백 명 한 것은, 왜 삼백 명이냐 하면 처음에 만 이천 명 왔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이만 이천을 가라고 해서 만 명으로 줄여놓고 만 명도 많다고 했어요.

왜 많으냐? 숫자가 되게 되면 이 전쟁에 인간이 본인도 어떤 역할이 있고 본인이 거기에 기여한 바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 전쟁에 대해서 모독하는 거거든요. 주님의 전쟁은. 잃어버리려면 제대로 잃어버려야 되고, 죽었으면 제대로 죽어야지 막 눈 한쪽 뜨고 죽었습니다. 주여, 천 번이라도 회개합니다. 이게 뭐예요. 주님의 시나리오를 지가 베껴서 지가 연기하고 있느냐 말이죠. 시키지도 않은 일을.

그래서 이 다양체라 하는 것은 공간개념입니다. 서로를 볼 때에 우리가 왜 이렇게 집단화됐는지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없는데 결과적으로 그들이 공간이 움직여요. 움직이면서 A란 사람, B란 사람,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C 나도 아니고 다른 뜻에 의해서 이게 전쟁에 주체적 집단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그들은 결과와 만나면서 찬양이란 이름으로 고백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게 바로 시편 68편에 나오는 이스라엘을 정의하는 규정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떻다? 전쟁하는 것이다. 이름 자체가 이 땅에 있는 모든 신들과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 대해서 전쟁에 나선 집단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특징은 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고나니까. 신을 만들고 섬기는 것은 인간에게 타고났기 때문에 신 없는 하나님 없는 인간이 없거든요.

로마서 1장 21절에 저희가 하나님을 알되, 하잖아요. 하나님 이미지가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불교도 하나님 이미지가 있어요. 미륵보살, 그게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 없는 자가 없는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을 우상이라고 지적하고 없애버리는 그 역할이 하나님의 외부전쟁을 통해서 인간의 내부전쟁으로 확산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 이스라엘 빼놓고 바깥에서 움직이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 말씀이 어디를 찔러갑니까? 소위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하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쪽으로 내부전쟁으로 이제 다윗 이후에는 내부전쟁으로 들어가면서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쪼개집니다. 좀 더 이야기하면 남쪽에는 ‘성전 있다. 너희들은 뭐 있나?’ ‘성전 없다’가 되지요.

좀 더 나가면 성전 있는 유다나라가 성전을 내가 부수겠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성전이 있던 것이 성전을 만드신 하나님에 의해서 성전이 불타버리고 없지요. 그러면 성전 있는 곳은 이 땅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거는 10분 쉬고 두 번째 강의에서.

 

 

 

20260413b 부산강의 : [시편]84(68:1)-척도의 변화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민수기 23장 8절, 제가 읽어볼게요. 발람에 의해서 외부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일어날 일을 외부강사 선지자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거죠.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그다음에 20절,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왕이 되셨다 이 말이죠. 왕이 하는 일은 영토 넓히는 거예요. 고대부터. 아까 에너지 이야기했잖아요. 애굽 왕이 해야 될 것은, 에너지가 축적돼야 자기 권력이 유지가 되는 겁니다. 왕에게 권력이 있을 때 백성들은 종이 되면서 나라가 안정적이 돼요. 아까 민주적 집중성이라 했지요.

민주적 집중성이 되어 결국 백성들이 국민으로 시작했다가 백성들이 돼버려요. 나치 같은 경우에 히틀러부터 뭘 원했다 했습니까? ‘나를 지시하고 나를 명령해 주옵소서. 따르겠습니다.’ 결국 이건 뭐냐? 민주적으로 시작했는데 독재로 마감되지요. 모든 집단이 다 그래요. 그렇다면 방금 민수기 봤으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는다고 돼 있지요.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이스라엘 외부 발람 선지자가 이야기했잖아요. 그 이야기를 이스라엘이 지금 들었다 합시다. 이건 발람이 발락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한테 뇌물 줘서 저주하라고 시킨 모압의 왕한테 이야기한 건데 이 이야기를 이스라엘 들었다면, 제 질문은 이스라엘은 본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렇지요. 이제는 우리 내부에서 더는 뭐가 없다? 탈락자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왜? 하나님이 선언했으니까. 저주, 죄 다 사해주고 복으로 바꿔준다고 누가 이야기했다고요? 우리 안에 계시는 여호와께서 왕이 되시는 거예요. 왕은 권력이 집중돼 있는 거예요.

이미 개인의 반항, 개인의 다툼 이런 것은 무시되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도 왕이 그렇다면 내가 그렇다는 것을 완전히 밟아버려요. “주님, 저 지옥 갈래요.” “까불지 마. 천국에나 와.”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나 지옥 가기 위해서 죄를 많이 지어서 모아야지.” 주께서 뭐라 합니까? “네 마음대로 해봐라. 네가 지옥 갈 수 있는가?” 이게 왕이에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이스라엘은, ①기분 좋다. ②기분 나쁘다. 몇 번입니까? 기분 좋다, 이게 탈락자의 특징입니다. 민수기를 보면서 오늘날 교인들이 다 그렇게 생각해요. 이제 이스라엘은 내부에 탈락자는 다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민수기 25장을 보겠습니다. 25장 9절에,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얼마다? 이만 사천 명 탈락했어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너는 내 아들이 되고, 너에게 따르는 자는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성전을 짓지 말라. 내가 친히 너와 네 백성을 뭐 되게 하겠다? 성전 되게 하겠다고 사무엘하 7장 14절에서 한 약속이 무슨 약속이냐 하면 다윗언약. 지금 시편 68편은 다윗언약에 기준해서 진행되는 거예요.

이렇게 할 때 여러분 하나님이 왕만 건전하면 백성들은 어떻게 해도 탈락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 생각 들지요. 그런데 이 다윗언약, 백성, 다윗 후손의 혈통적 계통의 왕들, 백성들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떻게 됐습니까? 다 쪼가리 났지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건데요? 구약을 여러분들이 그만큼 많이 보고 민수기를 그렇게 보고 하나님의 다윗언약을 이렇게 이해했는데 이스라엘은 왜 망했는가, 라는 질문을 누가 하느냐 하면 나중에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해요. 예레미야나 선지자들이.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뭘 모른단 말입니까? 주의 뜻이 뭔지를.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왜 약속이 다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결과는 뭡니까? 우리고 믿고 예상했던 것과 안 맞지요. 이래서 과연 우리가 주님을 계속 믿어야할지 말아야할지 우리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여, 이 갈등을 우리가 해소할 수 있는 어떤 대안이 없습니까, 라고 예수님을 죽였던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나름대로의 신학체계로 이 갈등을 해소하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그들의 가진 신학이 누굴 죽게 만들었어요?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 문제가 성경에 있으니까 ‘나 안 할래. 나 관심 없어.’ 이럴 수가 없어요.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고민, 유대인들의 고민, 바리새인의 고민을 같이 동참해야 돼요. 다양성에서 의견을 집대성하면 이게 뭐가 된다? 독재가 돼요. 투표를 통한 독재에요. 다양성에서 독재가 되고, 아까 몇 번 이야기했는지 모릅니다.

독재가 되면 우리는 뭐만 쳐다보고 살아요? 독재 입에서 나오는 ‘지시+명령’을 무조건 이거는 우리는 옳다고 수용할 마음자세가 돼 있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수용해야 나라꼴이 돌아갑니다. 혼돈을 잠재우는 방법은 상위 단위에서 그 혼돈을 질서로 잡아줄 때 우리는 한 마음으로 협동이 되면서 거기서 뭐가 생긴다? 에너지, 힘이 생깁니다. 이게 정치적 한계지요. 인간이 기껏 끄집어낼 수 있는 정치적 수단입니다.

이 정치적 수단을 누구한테 배웠겠어요? 인간이니까 아담의 후손이니까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악마로부터 배운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누구와 싸운다? 인간과 안 싸워요. 인간은 철딱서니 없으니까 싸울 대상도 안 되고 악마와 싸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경유했어야 돼요? 도대체 내가 품고 있는 악마의 생각이 어떻게 해서 나는 그 생각에서 발을 못 빼는가? 발을 못 빼는 이유가 뭐냐?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정리해야 되겠지요.

성경에서는 사도 바울은 아주 냉정하게 이야기해요. “우리는 죄의 종이다.” 죄의 종이란 말을 이거는 바리새인들도 이야기하고, 예수님 죽였던 유대인도 다 아는 이야기에요. 사도 바울 자체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그 용어를 다 알잖아요. 사도 바울은 여기서 과격하게 표현합니다. 물론 주님의 계시에 의해서. 죄의 종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구체화시켜요. 육의 종으로 바뀝니다. 이거는 충격이에요, 충격. 육의 종입니다.

죄라 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착하게 선하게 먹으면 죄를 우리 선에서 컨트롤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고 나쁜 짓을 하게 되면 나쁜 짓 되는데 나쁜 짓 안 하고 선한 일을 한다면 선하게 된다는 것,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 인간이 그런 사고를 갖고 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런 사고가 누구한테 배운 것이다? 악마로부터 나왔다는 거예요. 왜? 악마가 인간에게 무슨 지식을 심어줬습니까? 이게 선이고, 이게 악이라는 그러한 선과 악의 지식을 이미 심어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악마가 인간 속에 위치추격기를 심어놓은 거예요. 심어놓고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인간은 스스로 그 추적된 절대로 있으면 안 되는 선악 지식에 의해서 스스로 자기가 자기한테 놀아나게 만들어놓은 거예요, 악마가.

이게 선일까, 이게 악일까? 선하면 복을 받을 거고, 이건 희망 있는데. 내가 나쁜 짓했으면 어떻게 하지? 이거는 이번 주 아주 중요한 계약이 있는데 계약 파토나는 것 아닌가? 그럼 어떻게 하지? 옳지, 헌금을 더 보태면 되겠다. 헌금은 선한 거니까 선한 것을 하면서 이번 주에 다가올, 특히 이번 주에 애가 중요한 시험이 있다든지 안 그러면 이번 주에 상견례가 있다든지, 면접을 볼 일이 있을 때는 갑자기 주일 되면 착한 권사가 되고 말도 조심스럽게 하면서.

왜? 당신, 요새 성령 받고 난 뒤에 달라졌는데? 성령 받고 달라진 게 아니에요, 지금. 이번 주에 중요한 안건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이건 뭐냐? 매일같이 선과 악을 심어놨다는 것은 거기서 동시에 등장한 것이 판단력이 생긴 거예요. 판단력이 생기면서 그 판단력에 대한 거기에 의지가 더하니 그 의지가 뭐냐 하면 자유의지가 들어가요. 이걸 철학적으로 규명하자, 이렇게 되지요. 자율성.

‘모르겠습니다’가 정답인데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 그게 우리 수준에 맞고 우리 입장에 합당한 거예요. 무지몽매한 거예요. 몰라야 돼요. 내일 일을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는 과거도 몰라요. 현재 유용한 과거 기억만 알아요. 과거 그 시대를 우리가 몰라요. 하지만 그런 과거 가운데서 현재 자기가 얼마나 정당한 존재인 것을 증명해줄 밑천으로서 과거를 뽑아서 자기가 거기서 수집해 있는 겁니다. 왕년에 내가, 이렇게 나온다는 말 자체가, 그래서 어쩌라고? 지금 잘났다, 그 이야기에요.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이 얼마나 이게 악한 말인지 몰라.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은, 나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나는 뭐다? ‘나의 죄를 알 정도로 나는 의인이다.’ 이 말이에요. 자기 자리에서 발을 못 빼요. 뺄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불교, 우상숭배, 이게 신이에요. 자기를 부인한 나는 부인 못해요. 자기를 낮춘 나를. 고개 숙이자. 고개 숙이면 그게 부인입니까? 마음을 낮추자. 낮추면 그게 낮춰집니까?

마음을 낮춤이 성립되려면 바닥이 있어야 돼요. 마음이 높이 있다가 낮춰지면 마음 낮아진 기준에 점점 가까이 가니까 갑자기 여기서 어떤 생각이 들어요? 갑자기 내가 일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겠지요. 내가 이 정도까지 낮아질 수 있다니. 나, 정말 신자 같아. 이거는 도 닦는 거예요. 이걸 일거에 작살낸 분이 계시는 데 그분이 누구냐 하면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말씀하신 분 누굽니까? 예수님. 산상설교죠.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산상설교에 걸리면 다 걸리게 돼 있어요. 산상설교 자체가 인간으로선 도저히 들어가기가 힘들어요.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오지요.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쫓아낸 것 맞아요. 내가 주의 복음을 전하고, 맞아요. 그리고 병을 고쳤습니다. 맞습니다. 결과를 기다리면 되지요. 이 정도 했습니다. 주의 답변은 뭐였습니까? 간단합니다. ‘누구세요?’ 난 누군지 모르겠는데.

그동안 그 사람 뭐했어요? 주의 이름으로 살았어요. 누가? 본인이. 본인이 주의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이걸 누가 알고 있어요? 본인이 알고 있으니까 주의 이름으로 살았음을 본인이 본인의 기억에서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게 있어줘야 자기가 의롭고 잘난 사람이 되기 때문에. 그러면 정답은 뭐냐? 나왔어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이사야 55장 8절을 찾아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됐습니다. 다르다는 말은 차이 지도록 주께서 불러낸 거예요. 차이를 차이로 드러내기 위해서 호출 당한 자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 말씀을 내 힘으론 이룰 수 없어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누가 하셨다? 주님이 모든 말씀은 로마서 아니고 요한복음 5장 39절, 로마서 아닙니다.

주님께서 모든 말씀은 누구한테 달려온다? 내게로 달려오지요. 왜 달려옵니까? 주께서 그 말씀을 독점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주님은 누구와 싸우기 때문에? 인간 배후에 있는 악마와 싸우기 때문에 인간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악마는 자꾸 누구? 졸개를 앞장세워요. 자기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로 뒤로 물러섭니다. 그 인간 속에 통용되는 모든 수학적 기호와 언어는 보이는 것에 이름을 붙여서 보이는 것끼리 개념 형성의 그 망이 바로 의미의 망이에요.

다양성을 유지하는 어떤 점들, 이 점들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점들과 연결, 연결망을 성경은 이야기해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보이는 것들은 보이는 것들밖에 볼 줄 모른다 이 말이에요. 이걸 요한복음 9장에서 네가 소경이다. 자꾸 보이는 것들을 보이는 것으로 설명하려하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분을 대비하면 그거는 욕 얻어먹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38년 된 병자 있었잖아요. 병자가 왔을 때 안식일에 가만있으면 되는데 주님께서 시켰어요. 맞바람 보이게. 안식일에 그냥 있어야 되는데 담요 들고 가게 일부러 시켰어요. 시키니까 바리새인들이 심문을 하는데 누가 너로 하여금 안식일에 가게 하느냐? 또 9장에 보면 누가 너더러 눈 감긴 네가 눈 뜨게 했느냐? 바리새인들이 그 심문을 할 때 답변을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보는 것으로 답변해 달라. 우리가 납득이 되게. 자꾸 예수님 거론하지 말고. 보이는 것들로 하자.

빌라도가 예수님 재판할 때 보이는 예수님을 심문할 때 자기는 로마법을 다양성 속에서의, 아까 한 것 여러분 복습해봅시다. 다양성 속에는 민주적 뭐다? 집중성입니다. 집중성에서 뭐가 나온다? 지시와 명령이 나오지요. 본디오 빌라도가 명령받는 것은 로마 황제로부터 명령받는 거예요. 본디오 빌라도가 나중에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심판했다는 것을 욕 얻어먹지 않기 위해서 공무원이기 때문에 재판할 때 여기다 뭘 집어넣습니까? 그 당시의 로마법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때 예수님 답변은 뭡니까?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진리 때문이다, 하니까 진리라 하는 것은 어디 있습니까? 로마법에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지요. 보이는 것이 전분데 무슨 진리가 있어요.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관계성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거예요. 그럼 인간은 낄 자리가 아닌 거예요. 영적 사람이 됐다는 말은 낄 자리도 아닌데 끼게 된 거예요.

어제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듯이 베드로가 평소에 취미가 뭐냐? 물 위를 걷는 게 취미였어요? ‘와 물이다. 막 건너자.’ 이랬습니까? 아니잖아요. 결국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에 대해서 누가 제일 놀랐겠어요? 베드로 본인이 제일 놀란 거예요.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지? 이게 사도 바울에서는 뭐냐 하면 예수 믿는 거예요.

‘예수 믿어서 이런 효과 봤다’가 되면 이거는 물 위를 걷는 게 아니에요. 지금 이용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탈락자를 탈락시키는 방법은 뭐냐 하면 예수 믿는 자에게 도저히 감당되지 않는 일들을 발생시키면 다 탈락해요. 그게 교회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는 겁니다.

뜸들일 것 없이 뜸들이면 여러분에게 고문이 되기 때문에 해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떻게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거예요. 우리는 세상의 지시와 명령, 다양성 속에서 살아오고 있는데 척도가 달라져요. 이게 하나님의 계시가 계속 되면서 인간이 알고 있던 기준, 발람 들어봤지. 우리는 어떤 죄를 짓든 용서받는대. 우리 숫자는 하나도 제거 안 돼. 우리는 멀쩡하게 다 구원받는 거야.

홍해 건너왔을 때 그들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전체 다 어디 간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홍해 건너왔을 때 그 기준이 바로 출애굽기 15장에 미리암의 찬양 속에 나와요.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했으니까 우리가 이기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서 이기게 해준다, 할 때 그들의 근본의식은 뭡니까? 얼마 안 남았어요. 거리가 1년까지 안 걸려요. 몇 개월만 하면 어디 갑니까? 그리던 약속의 땅에 가는 거예요. 그들은 이사 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사가 뭡니까? 애굽에 살다가 다른 집에 가는 게 이사잖아요. 이 집에 살다가 죽고 난 뒤에 다른 집에 이사 가는 것, 이삿짐센터가 그걸 요구하던가요? 주님은 요구를 해요. 약속의 땅에 가려면. 주님은 우리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약속의 땅의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참새 옷 입힙니까? 개한테 옷 입히는 건 미친 짓이고요. 고양이한테. 본인은 얼마나 힘들겠어요. 참새한테 옷 안 입히지요. 들풀은 그 자체가 옷이지요.

그렇다면 인간에게 옷이 있다는 말은 뭡니까? 이건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거예요. 옷 입어야 될 옷이 필요 없는 영적 세계로 구원받는 겁니다. 이것은 옷을 벗는다는 것 자체가 수치를 공개하는 거고, 공개된 수치스런 몸은 주께서는 안 받아줍니다. 광야에 그들이 올 때 그들의 척도, 여호와를 생각하는 기준, 그 기준은 너무나 좁았어요.

지구가 있잖아요. 지구는 구면이죠. 둥근 면인데 쪼가리를 낸다는 것, 이 쪼가리는 구면입니까, 평면입니까? 평면처럼 느껴져요. 왜? 보는 식견이 좁기 때문에 그래요. 경주에서 기차를 탄 신혼부부가 얼마나 재미난 시기를 보냅니까. 기차 타고 난 뒤에 대화가 끊일 새 없이 남자, 여자가 기차 칸에서 열심히 일합니다. 그 작은 자기 구멍에서 굉장히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죠. 그런데 그 뒤에 앉아있는 나는 시끄럽겠어요, 안 시끄럽겠어요? 시끄럽지요. 철이 없다는 말은, 자기중심의 좁은 표면밖에 볼 줄 모르는 거예요. 넓게 볼 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의 이사야 같은 경우에 신앙이라는 것은, 넓게 보려면 어디로 올라가야 돼요? 위에 올라가야 되죠. 너의 신앙이 어떻게 된다? 독수리 날개처럼 위에서 위로 올라가야 된다. 올라가야 되는 그 말씀이 예수님을 경유하면 예수님 코스대로 올라가는 자만이 전체를 다 볼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올라가게 되면 우리는 옷을 입은 자체가 이미 무슨 자다? 시체에 옷 입힌 거예요. 옷을 입었다는 말은 김 시체, 박 시체, 최 시체에 옷 입혀놓은 거예요. 그 앞에서는 주님의 저주 앞에서는 노아의 홍수 앞에서는 남자 따로 줄 세우고, 여자 따로 줄 세우는 법이 없어요. 남자, 여자 자체가 아무 의미 없어요.

거기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지상의 호흡이 있는 자는, 이게 성경에 나옵니다. 창세기 8장에 나와요. 호흡이 있는 자는 다 죽였어요. 다 죽였는데 시편 150편에 보세요. 어떤 이야기가 나옵니까? 6절에,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그러면 그 호흡은 내 호흡이 아니고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호흡이에요? 죽은 자를 살리는 그 성령의 호흡이 있는 자만이 뭐가 나온다? 찬양이 나온다.

그러면 원래 찬양은 누구 찬양이냐 하면 누가복음 2장에 보면 광야의 목자가 있을 때 목자가 찬양했습니까, 안 그러면 찬양을 들었습니까? 들었지요. “하늘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는 자의 평화로다” 그 찬양 작곡, 작사 누가 했습니까? 땅에서 안 했지요. 헨델이 안 했지요.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가 한 게 아니지요. 작곡자가 따로 있어요.

마치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처럼. 어느 누구도 작곡할 능력은 없어요. 그러면 뭡니까? 천사 쪽에 사는 천사와 함께 사는 그쪽 세계에서의 찬양이 원작곡자, 작사가가 되겠지요. 그게 바로 사실은 성령입니다. 호흡을 무슨 용도다? 찬양하기 위한 용도다. 찬양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 경로를 밟아야 된다. 예수님이 찬양 받으실 분이 이 땅에 욕을 받고 죽었지요.

그러면 성도가 찬양하기 위해서는 뭘 경유해야 돼요? 문제 너무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답변은 간단해요. 욕설을 경유하면 되지요. 누가 누구한테 욕하는 데요? 내가 나한테 욕설하면 되지요. 간단한 문제죠. ‘오늘만 살고 죽어라, 인간아.’ 다시 긴 손가락 나올까요? 욕설의 근거는 말씀이에요.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를 투자증권회사 앞에다 붙여보세요. 비트코인 거래소에다 붙여보라고요. 그거 못 붙입니다. 대번에 떼어버립니다. 뭐 주식이 내려갔습니다. 이번에 완전히 파장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제가 제일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것은, “오늘 아침 잡솼어요, 안 잡솼어요?” “먹고 나왔습니다.” 그럼 됐지 뭐. 그럼 됐잖아요. 과도한 욕망이 나로 하여금 쓸데없는 화병을 나한테 유발시킵니다.

아까 사도 바울이 뭐라 했습니까? 인간의 죄 문제를 뭐로 끌어당겼어요? 외부전쟁에서는 죄가 이스라엘의 시공간에서 전쟁을 일으켜요. 이게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육으로 내려와요. 그럼 내부전쟁이 뭡니까? 내 내부전쟁이죠. 육에 대해서 성령이 이스라엘의 전쟁을 우리한테 그대로 시편 68편 완성된 상태에서 시비를 걸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민수기에서 신약까지 이스라엘 역사가 나와 있지요. 그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뭐가 계속 바뀌겠어요? 세상을 보는 척도, 기준이 바뀌는 거예요. 내가 육이라 하는 게 육이 저게 아니었구나. 내가 영이라 한 그게 아니었구나. 내가 율법이 이건데 율법이 아니었구나. 바리새인은 그걸 몰랐어요.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이라도 새로운 척도, 십자가란 척도를 받아들이면 구원이 됩니다. 내가 사람이 아니고 뭐였다? 육이었다. 내가 사람이 아니고 그냥 육인데 그 육에는 뭐가 포함돼요? 공고한 육이거든요. 공고한 육의 근거가 뭐냐? 그 안에 누가 있어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나는 선하고 싶어도 선할 수 없는 다른 괴물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게 나로 시체로 만드는 그게 뭐냐? 내 속의 악이 선한 나를, 그다음에 뭐 나오죠? 어떻게 한다? 사로잡아 지끌고 잡아당겨서 나로 하여금 너는 내 손아귀에서 절대로 못 벗어나.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 라는 그게 강력한 육의 에너지가 애굽의 에너지고, 우리는 이스라엘이라고 나왔는데 멱살은 그대로 쥐고 다시 하나님이고 복음이고 언약이고 다 소용없고 육이 어디로 가야 돼요? 육으로 끌려가는 것, 스스로 잃어버릴 수 없는 나를 잃어버리게 하는 그 작동, 그게 십자가에 참여시키는 주님의 활동입니다.

아아, 주님이 오묘하지요. 주의 생각과 우리 생각이 다르지요. 우리 육적인 생각 같으면 사도 요한 같으면 얼마나 옆에서 주님이 뜻을 알아서 주님께 칭찬을 받았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지요. 사도 요한은 베드로가 아니고 요한은. 그런데 요한복음 21장 22절 누가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너는 지금 베드로 생각하면 안 돼. 그걸 다섯 자로, ‘선 넘지 말라’ 네가 복음을 전했다고? 네가 강의를 했다고? 주의 뜻은 뭡니까? 선 넘지 말라. 네가 한 것이 있다, 없다? 없고, 너는 죄만 지었다. 내가 한 것을 내가 기억하는 자체가 내 안에서 뭐로 누적돼요? 이게 적금이 됩니까? 죄로 적금이 되는 거예요. 죄를 용서받았기에 어떤 죄가 용서받았는지 알기 위해서 죄가 나이 든 만큼 차곡차곡 쌓입니다. 그래서 연세가 많은 사람은 죄가 많이 쌓였고, 젊은 사람은 철딱서니 없어서 죄가 얇아. 얼마 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죄를 많이 아는 사람이 철이 난 거예요.

“이스라엘한테 밉보였으니까 이스라엘이 우릴 공격하면 어떻게 돼요?” “걱정하지 마. 세상은 전부 다 불 심판되는 거야.” 이게 좀 철이 난 사람이고. 그렇지 않고 이스라엘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철딱서니 없어서 가짜 뉴스에 빠져서 했습니다, 이러면 철이 없는 거예요. 사과 안 한다는 것은 철이고 뭐고 그거는 자기 집권, 정권만 쥐려는 야욕 외에는 안 돼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뭘 봐야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 된다. 철저하게 육이 나를 통해서 비로소 새삼스럽게 영을 발견하니 모든 일이 그러니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 안 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나를 육 되게 하고 그 차이를 통해서 주께서 하는 일이 새삼스럽게 새롭게 나타나니 감사할 뿐이지요. 그것을 예수님 쪽에서 이미 완성이 된 시편 68편을 오늘날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보고 있습니다.

3절에,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찌어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이게 뭔 뜻입니까? 신약에 와서 밝혀지지요. 십자가 안에 있는 자가 그게 의인이거든요. 내가 의인이란 말이 아니고 소속이 의인이란 집단에 소속 자체가 의인이란 관계망 속에 있는 거예요. 아까 시체가 옷 입었다 했지요. 갈라디아서 3장에 무슨 옷 입었습니까? 예수님의 옷을 입잖아요. 그러니까 안에는 뭐가 들어있어요? 시체 된 것이 얼마나 고마워요.

만약에 예수님의 옷이 빛나려면 우리는 철저하게 뭐가 돼요? 시체로서 어제부로 죽어도 괜찮아요. 옷이 우리를 살려주고 있다는 이것이 3절에 의하면 기뻐하고 뭐한다? 누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뛰노는 거예요. 호흡이 있는 자마다 뭐하라? 찬양하라. 여기 ‘하나님 앞에서’라고 돼 있는데 신약 사도 바울의 편지는 ‘예수님 안에서’로 바뀌어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소속 속에서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 말이에요.

4절,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그 이름은 맨 같은 이야기고요. 그다음에 5절에 보면,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이 말할 때마다 자꾸 염려가 되는데 아까 한 시간 반 동안 이야기한 것이 이 안에 다 들어있지요. 여기 이 처소는 공간을 말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계신 곳이라는 걸 이젠 아시겠지요.

그 당시 이스라엘은 이 말을 오해한 거예요. 척도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아직 메시아 올 때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 존재하는 이 약속의 땅, 다윗 시대 입장에서만 성경을 오해한 거예요. 아직 계시 안 끝났는데 자기 계시가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신약성경은 다 이루었다고 끝났어요. 끝났으면 예수님 안에서 이걸 바라볼 때에 어떻게 해석합니까?

5절에 어떻게 해석합니까?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이게 뭔 뜻이에요? 고아와 과부가 이 땅에서 살만한 세상으로 여깁니까, 안 살고 싶어요? 빨리 죽고 싶지요. 어떤 사람이 재산이 75억 있고 땅이 15만 평 있는데 살기 싫어. 그 사람 뭡니까? 그리고 아내가 네 번째 결혼했고, 자식을 낳았어요. 그 사람 뭐예요? 고아와 과부지요, 뭐. 이 땅에 있는 건 쓰레기인 줄 아니까.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 아닌 약속의 땅이 아니니까. 어떻게 알았어요? 주께서 쓰레기장에다 쓰레기장을 되풀이하라고 나를 살려준다는 거예요.

지난,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우는 소리하면서 살면서 우는 소리는 하는 우는 소리 내는 척하는 그걸 즐거워하라 했잖아요. ‘나 없어. 돈 없어. 나 곧 죽을 거야’ 하는 그 우는 소리를 본인이 즐기는 거예요. 미쳤지, 뭐. 그냥 정말 미쳤어.

그다음에 6절에 봅시다.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인간이 고독한 이유가 뭡니까? 그동안 친하게 살아온 사람이 이별할 때에 나의 나됨이 같이 없어지잖아요. 친구를 통해서 나는 나하고 살았는데 그 친구 없어지면 나는 누구와 놀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한다고요? 기뻐하는 거예요. 아버지도 없어 부모도 없어 남편도 없어. 세상에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사람도 없어. 그런데 어떻게 한다? 그걸 즐기는 거예요. 또 한 번 이야기해요. ‘정말 미쳤어.’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요. 이걸 어떻게 인간의 눈으로 설명합니까.

7절, 하나님 앞에서 광야에 행진할 때에 하나님이 움직이지요. 움직일 때 뭐로 합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어떤 장소에서 피어오르죠? 언약궤 위에서. 언약궤가 하나님과 자기 백성이 만나는 장소지요. 나갈 때 8절에 뭐가 진동합니까? 땅이 진동하는 거예요. 바다가 갈라지고 땅이 진동해요. 시내산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시내산 천지가 진동해요.

진동한다는 말은 이 세상에 진동하지 않는 확정된 분이 확정된 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변에 진동 안 하게 보이는 것들이 산과 강, 바다 자체가 경상도 말로 나 아니라예, 진동하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 아니라예. 자꾸 나 의지하고 살지 마세요. 보이지 않는 분을 의지해야지. 그분이 진동하지 않는 분입니다. 진동하면 자꾸 하동 근처 거기 생각나요. 그때마다 시내산이 생각나고.

그다음에 9절 역시 자연세계가 도와주는 겁니다. 12절 봅시다.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요거 척도가 점점 더 발달하게 되면 그전에 이해 못했던 말씀이 이해가 되는 그걸 실습시키는 현장이 이스라엘에게 기다리고 있어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말씀이 이게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현실을 구성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시나리오를 따르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끌고 없던 현실이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현상이 일어나요.

예를 들면 시편 2편에 보면 이렇습니다. 시편 2편을 여러분들의 다윗 시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게 무슨 뜻인가를 생각해보세요. 이해되는지. 1절에,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이것을 다윗 시대 때 이 사람들이 온전히 뜻을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몰라요.

왜 모르느냐 하면 거기에 7절에 보세요.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했잖아요. 시편 2편에 낳았다는 이야기가 현실로 다가오는 것은 마태복음 1장에 마리아 예수님을 임신해서 출생할 때 그때 이야기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 사이에 뭡니까? 말씀이 만들어낸 현실을 겪어야 될 이스라엘 자기 백성들이 필요한 거예요.

그럼 오늘날 성도는 뭐냐? 구원받았으면 빨리 데려가지 그건 사도 바울의 소원이고, 사도 바울이 죽고 싶어도 못 죽는 이유가, 십자가에 달렸잖아요. 달린 그 사건이 어떻게 남은 현실을 움직이는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을 못 죽이는 거예요. 안 죽이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 “예수 믿고 됐습니다. 천당이나 갑시다.” “안 돼. 할 일이 생겼어. 아직까지….” 네타냐후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아직 할 일 남아있다”고.

맞바람 받아야 돼. 할 일이 있어요, 우리가. 과연 십자가의 위력이 잃어버린 자를 그냥 아무 우리는 이유도 없는 채 사랑을 받았다는 것, 우리는 사랑하지 않았는데 사랑하신 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일방적으로 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돼요. 이 말은 죽고 사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고 또 긴 손가락, 내 거야.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마태복음, 얼마 전에 대구강의에서 했잖아요. 수요일 날 했어요.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을 오늘 입히신다. 내일 죽을 걸 오늘 왜 입힙니까? 그게 무슨, 효용성이 떨어지잖아요. 어차피 내일 죽을 거잖아요. 오늘 왜 그렇게 착실하게 알뜰하게 살리십니까? 이게 뭐냐 하면 들풀 자체의 주체성을 뺏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참새의 주체성을 빼앗아서 텅 빈 주체성에 하나님이 친히 기르시나니, 말씀이 주체성으로 교체되어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시편 68편을 보면서 바로 이 현장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삶의 현장이란 것을 삶의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조용남처럼 올라가서 함에다 넣는 그런 것 말고. 옛날 KBS 프로그램에 <체험 삶의 현장>(1993년 10월 24일 ~ 2012년 2월 25일)이라고 일당을 구제한다고 넣는 것 있었어요.

그다음에 봅시다. 우리가 하지도 않았는데 탈취물을 나눈다는 건 다윗 시대에 자기는 위장귀순해서 있으면서 블레셋 신하로 있으면서 자기 할 일은 다해서 탈취물 받아서 군에 전쟁에 나가지도 않는 일반 집에 있는 아줌마까지 나눠줬다 말이죠. 전쟁에 나갔던 사람들은 불량배였거든요. 그들이 노동하지도 않았는데 왜 주느냐고 삐졌어요. 그냥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공짜로 주시는 거예요.

그다음에 14절에 살몬 산이 나오는데 2744미터, 지금의 헐몬 산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 높은 산은 바로 모든 민족 중에 뛰어난 민족이 되는 높은 산이라고 돼 있고요. 그다음에 16절에 보면, 높은 산마저도 주께선 더 높다는 그 말이거든요. 17절에,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이걸 누가 몰랐느냐? 게하시가 몰랐어요. 엘리사 시대에 천군천사가 보이지 않은 채로 선지자를 보호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시편 68편은 다윗의 시잖아요. 제목에 나와 있어요. 다윗 때에 엘리사에 있던 그런 상황을 미리 알았겠어요, 몰랐겠어요? 몰랐지요. 척도가 달라지기 위해서 이 말씀에 준해서 계속 실습, 실습에 나서는 거예요. 18절에 나오는 선물 준다는 이야기도 에베소서 4장 8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는 것, 그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항상 이렇게 모든 것을 신약을 통해서 다시 구약으로 보시게 됩니다.

그다음에 24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누가 행차해요? 왕이 성소에 행차하지요. 이 사람들이 왕을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했을 것 아닙니까. 다윗 시대 때. 실제로 예수님께서 행차할 때는 뭘 타고 왔어요? 나귀새끼 탔지요. 스가랴 9장 9절인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나귀새끼 타고 오신 거예요. 도대체 인간의 모든 예상을 다 뛰어넘습니다. 그 당시 이 사람들이 왕이 행차할 때 거대하게 온다는 걸 몰랐겠어요? 알지요.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서 온전히 다 드러나고 그 주인공 되시는 주체자는 예수님이 나귀새끼 타고 왔던 거예요.

그다음에 계속해서 22절 보겠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데서 도로 나오게” 하지요. 시편 139편에 보면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있고 음부에 내려갈지라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이 로마서 10장에 보면, 이젠 갈 필요 없다. 내 안에 하늘이고 바다고 다 있다. 그러니까 구약 자체는 모르고 모든 것을 경험한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 안목으로 다시 시편 68편을 바라보면 해답이 나오는 거예요.

29절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이것은 바로 빌립보서 2장 11절에 나와요. 십자가 지신 분을 주님이 높여버리니까 모든 이름으로 하여금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것이 시편 68편 29절 말씀이 그대로 예언된 거예요.

그다음에 32절, “땅의 열방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한다는 말은, 다윗의 국가가 너무 위대하기에 다른 이방민족들이 원조를 구하는 식으로 절차를 밟아요. 밟고 그다음에 영원한 이 말씀의 왕이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난 뒤부터는 성도라면 모든 원조, 성도를 도와준 모든 힘은 어디서 나온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이 말씀이 이렇게 성취가 된 겁니다. 그것이 마지막 35절까지 이어집니다.

35절을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뭘 주십니까? “힘과 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하라” 무슨 힘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찬송하라. 천사가 불렀던 찬송가가 이제는 그 찬송가의 결과물이 된 성도를 통해서 그 찬송이 실현되는 그것을 여러분들과 저와 같이 체험하는 남은 영원한 세월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게 아니고 실은 말씀이 살았고 우리가 활동한 것이 아니고 말씀이 친히 활동케 했음을 이제는 성령 안에서 주님 안에서 그걸 발견하면서 모든 일에 감사하고 기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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