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10a 부산강의 : [시편]81(65:3)-기억에 없는 기억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시편 65편,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기다린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를 하나님 쪽에서 임의적으로 이미 설정을 했어요. 설정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인간 결정을 거부한다. 더 알기 쉽게, 하나님은 인간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너의 생각은 어떠냐?’ 이런 게 없어요. 너의 생각을 안 물어요.
인간의 말을 듣지 않고 일을 실시하시고 그다음에 일방적으로 추진해 나가시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추진을 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사람의 의견은 안 듣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의견을 안 듣기 때문에 우리는 그만 입 다물고 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우리 인간이 입을 다물 인간이 아니에요. 답답하면 뭐라고 외치고 빌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인간의 결정을 거부해요. 네가 얼마나 애쓰는지 안타까운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해요. ‘이 세상의 흐름과 하나님 나라의 흐름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이 세상의 흐름에 따라서 사는데 살다가 언젠가 힘 빠지면 죽겠죠. 죽으면 가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다음에 뭐냐 하면 일치하지 않아요. 흐름이 인간이 상상한 하늘나라와 연결이 되질 않아요.
그래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수집하는 모든 정보를 가지고 소유해서 천국까지 뚫어내려는 모든 시도는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인간 자기 결정의 정보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뭐한다? 거부하신다. 대표적인 것이 종교 활동이죠. 인간의 종교 활동을 하나님이 거부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종교 활동이 어디서 나왔어요? 이 세상에 자신의 삶의 흐름에서 수집된 거예요. 끌어 모은 거예요.
이렇게 끌어 모으면 중심은 누가 되겠어요?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수집에 나서겠지요, 인간은. 평소에 하는 것처럼 교육도 마찬가지고, 돈 마찬가지고. 모든 것을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목적은. 나를 잃어버리면 모든 걸 잃어버리니까 인간은 이건 딱 싫은 거예요. 세상은 꺼져도 나는 꺼지면 안 되거든. 세상은 망해도 마지막 때에 나는 살아남아야 되니까요.
제가 옛날에 젊었을 때 본 <매드맥스>란 영화, 혹시 이중에 보신 분 있어요? 1, 2, 3 나왔어요. 그 영화의 첫 장면이 뭐냐 하면 핵폭탄에 의해서 모든 세계가 멸망되었다. 그러면 영화가 시작할 필요 없잖아요. 다 멸망했는데. 영화 첫 장면은 뭐냐? ‘그중에 나만 살아 있다’라고 난닝구 다 째진 것 하나 걸치고 고물된 오토바이와 완전히 황폐한 사막 위에서 영화가 시작해요. 시작하면서 나만 남았다고 하는 자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원시시대를 방불케 하는 그러한 공동체를 찾아가는 그 장면이 영화의 시작 장면이에요.
그러니까 멸망했다하면 끝나잖아요. 그런데 멸망했는데 아직 누가 남아있다? 내가 남아있으니까 남아있는 자가 해야 될 것은,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귀하니까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모든 할 수 있는 것은 다해보는 것, 거기서 새로운 공동체로서 협동해서 다 상실한 인류의 문명을 남은 자들끼리 다시 한 번 일으켜보자, 하는 그 영화. 그 촬영을 호주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항상 모든 집중이 나한테 있지요. 여기는 정보가 누구한테 집중돼 있습니까? 나한테 집중돼 있지요.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나한테 집중돼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결정하신 것은 인간 결정이 아니고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의논한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사이에 결정했기 때문에 인간 결정은 거부되는 거예요.
자, 거부되니까 나는 나를 위해 살지 말고 주를 위해 살면 되겠네, 이렇게 보통 생각하잖아요. 그러면 안 됩니다.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주를 위해서 살겠다는 그것도 따지고 보면 돌고 돌면 결국 누구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나 좋으라고 지금 꼼수를 부리는 거예요. 그거는 말장난에 불과한 거예요.
이 땅에서 태어난 우리는 아무리 나를 버리고 또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또 부인해도 그게 돌고 돌면 결국 누구한테 꽂힙니까? 나 좋으라고 하는 내 이익과 관련된, 나의 앞의 신세, 나의 팔자 피는 것과 관련되어서 돌아오게 돼 있어요, 모든 게. 그래서 인간은 자기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간 결정을 거부하고 인간이 수집한 정보, 천국 가는데 필요한 정보수집도 주께서 거부한다면 그 거부내용을 우리가 알면 되잖아요. 이 세상의 흐름과 하나님 나라의 흐름이 일치되지 않다 했잖아요. 일치되지 않음을 알면 되잖아요. 일치되지 않음을 알기 위해서 양쪽 다 알면 된다 이 말입니다. 쉽지요.
‘나 이것 버리고 하늘나라 찾을래’ 하지 마세요. 그런 짓해도 그거는 위선입니다. 교묘한 위선이에요. 거룩을 흉내 낸 위선, 그러한 짓은 우리 주님한테 다 들킵니다. 인간들은 속일 수 있지만 주님은 안 속아 넘어가요. 백날 애써봐야 네 자신을 해놓고, 말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늘나라 전파를 위해서,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서 했다는 그러한 거짓말은 이제부터 뚝.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키는 그 외에는 우리에게 나올 수 없음을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오늘 시편 65편 3절인데 처음으로 제창을 해봅시다. 하나, 둘, 셋 하면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 둘, 셋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스톱! 스톱, 스톱 거기까지만. 나하고 죄에서 누가 이겼다고요? 죄가 이기고, 누가 졌다고요? 내가 진 채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뭐 어떻게 종교적인 방법으로, 복음으로 빠져나올 수 없어요.
죄가 우리를 이겼기 때문에 우리는 갇혀있는 존재기 때문에 못 빠져나옵니다. 안 빠져나와야 돼요. 빠져나오면 이거는 예수님이 필요 없어요. 못 빠져나오고 죄는 우리보다 항상 세요. 그 구절과 관련해서 시편 65편 3절, 이것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시편65편 3절을 근거해서 제가 공식 하나 만들어봤습니다.
‘말씀의 기능은 숨어있는 죄를 발굴하고 들추어내는 능력’ 이게 바로 말씀의 기능, 또는 말씀의 능력. 말씀의 능력은 숨어있는 우리 죄, 그걸 발굴해서 들춰내는 능력이에요. 여기서 여러분들이 유념해야 될 것은, 내 속에 있는 죄를 말씀이 외부에서 와서 내 속에 있는 시커먼 죄를 완전히 고고학 발굴현장이라 보면 됩니다. 옛날 유적들 있잖아요. 경주에 가면 토기 같은 것들 끄집어내잖아요.
내가 모르는, 내가 몰라야 돼요. 내가 아는 죄는 안 끄집어냅니다. 왜냐? 그게 자기 잘남이 되고, 자기 반성하는 자기 의로움이 되기 때문에 회개하는 자기 의로움은 이게 나의 의에 해당되지 주의 일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잘못됐습니다. 다시는 그런 짓하지 안 할게요.’ 그거는 지 잘난 맛에 사는 거예요. 그런 짓하면 안 돼요. 인간이 다신 안 한다고? 그건 지가 몰라서 그래요. 또 하게 돼 있어요. 한 번하는 게 어렵지 두 번하는 건 어렵지 않다니까요.
숨어있는 죄를 고고학자들이 발굴하듯이 성령께서 천사들이 발굴해서 들춰내는 거죠. 그러면 말씀이 들어오면 나의 숨어있는 죄가 있잖아요. 이 죄가 들춰지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다른 이도 나와 똑같은 죄가 있음을 내가 드디어 타인을 파악할 수가 있어요. 이거는 나의 단독적인 죄가 아니라 아담의 죄로부터 물려받은 인간은 공통적으로 거기에 다 들어있음을, 이걸 가지고 ‘보편성’이라 하거든요.
죄의 보편성을 나란 개별자를 통해서 들춰지는 기회를 받은 것을 주께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께 감사해야 돼요. 나도 들어있고 너도 들어있는 죄를 너는 모르고 나는 미리 눈치 챘다는 그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은 말씀의 구원의 능력과 접촉이 된 사람이에요. 그 나라와 그 의로 가는데 필요한 능력으로부터 우리에게 꽂힌 겁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화살로 꽂힌 거죠.
슈슈슛 화살로 꽂히면 이걸 분석하지 말고, 화살을 뽑으면 말씀에 묻혀있는 뭐가 나오겠어요? 내 죄가 묻혀서 이것은 내 할 일이 아니었고, 내가 안 하고 싶어도 주께서 나를 사용해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사용하시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아는 감격이 이어지는 겁니다. 이 현상을 하나의 짧은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나만 쓰레기인가?’ 요한복음 8장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에 대해선 제쳐두고 잡아온 바리새인을 지목하는 겁니다. 아담의 보편적인 죄를 생각 못하고 저 여자만 죄 지었다 하는데, “좋다. 저 여자만 죄 지었는지 너희들은 죄 안 지었는지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게” 하고 주께서 땅에다가 뭘 썼어요. 글씨를 썼다고요.
말씀의 무슨 기능입니까? 숨어있는 기능을 하니까 그 짱돌 들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지금 무슨 내용의 글을 쓰는지 보니까 그 글이 자신의 돌을 던질 수 없을 지경으로 내가 누구한테 돌을 던질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그런 내용이 들어있기 사람들은 부끄러워서 그 현장을 떠날 때 재미있는 현상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떠났다고 돼 있어요. 그만큼 부어놓은 적금이 많다는. 세월이 지난만큼 죄는 죄다 다 지은 거예요.
그런데 그 현장을 떠나면 안 돼요. 남을 향해 던지기 위해서 준비된 돌은 사실은 내 자신을 처 죽여야 될 돌인 것을 알고 그 현장에 있어야지요. 그 여자는 왜 떠나느냐? 그 여자는 못 떠나요. 붙잡혀 왔기 때문에 떠날 수 없는 거예요. 그 여자는 복 받은 거죠. 이런 복이 없어요. 간음하다 들킨 복, 진짜 이건 땡 잡은 거예요.
왜냐하면 순회재판이거든요. 즉석에서 심판주 되신 주께서 이런 판정을 내립니다. “너에 대해선 내가 죄를 묻지 않겠다, 끝.” “어이 기록, 적었지? 이 사람 죄는 있어, 없어?” “없어요.” “너도 죄 없어.” 이게 이 교회의 명칭과 관련돼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는 거예요. 붙잡혀온 거예요.
어떤 입장에서? 잘나서, 훌륭해서, 신앙생활 잘해서? 아니에요. 뭡니까? 죄인의 모습으로 잡혀왔는데 죽을까 싶어서 바들바들 떨고 왔는데 진짜 인간의 결정에서는 죄인인데 주님의 결정은 뭡니까? 죄 있었는데 지금은 죄 사함 받은 사람이란 결정을 받은 거예요. 합격통지서. 그게 천국 합격통지서를 받은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온 것은 너희를 심판하려 오심이 아니고 심판은 누가 하느냐? 나보다 먼저 왔던 모세가 너를 심판한다. 나는 너희를 뭐 하러 왔다? 구원하러 왔다는 거예요. 구원하러 왔는데 조건이 있어요. 뭐냐? 의인은 구원 안 해요. 의인은 구원하지 않습니다. 지 잘난 맛에 사는 걸 왜 구원해요. 지옥에나 가라, 하면 끝나는 거예요. 의인은 구원 안 해요. 뭐만 합니까? 죄인을 구원합니다.
근데 이 이야기 듣고 인간은, 뭐 또 내가 어떻게 죄를 지었느냐 하는데 가만있어 보세요, 성급하게 나서지 말고. 본인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걸 본인이 죄인 줄 몰라요. 죄는 주님의 말씀이 와서 발굴해야 되지 내가 추가적인 죄를 짓는다고 해서 본인의 정보에 의해서 본인의 결정에 의해서 죄라고 규정하는 그것은 주께서 죄로 취급을 안 합니다.
죄로 취급하는 그 주사바늘 안에 죄에 대한 죄 사함의 효능도 같이 들어있는 주사에요. 괜히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자꾸 헛소리하지 마세요. 그냥 살아. 어제 주일오후 말씀처럼 돈이나 벌어. 쓸데없이 하지 말고 그냥 돈이나 벌어. 잘하잖아, 그런 것. 제가 오후설교 끝에 딴 생각하지 말고 돈이나 벌라고 한 이유가 있어요. 그걸 설명 드리겠습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흐름은 무엇과 같지 않다? 하늘나라의 원칙과 일치하지 않다. 그러면 이것 버리고 이것 취하면 된다, 이러면 안 되지요. 양쪽 다를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 출신이 이 세상 출신이기 때문에 같지 않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양쪽 다를 알아야 돼요. 이 세상 흐름은 뭐냐? 이 세상 흐름은 두 가지로 돼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에요.
첫 번째는 제품생산, 두 번째는 제품으로 간주되는 나. 이게 이 세상 흐름의 전부에요. 이게 무슨 의미냐 하면 이 세상은 시장원리를 따른다. 이야기 들어보면 여러분들이 살아온 모습 그대로에요. 시장원리가 뭐냐? 나 자체가 상품시장에서 상품화돼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나를 어떻게 해야 돼요? 구매를 해야 되지요. 구매를 하면서 나한테 뭐가 들어오느냐? 돈이 들어오지요. 돈은 힘이 되고.
돈이 있는 자는 이 세상에서 돈이 처발라지면 전에 돈 없던 상품가치가 돈이 있음으로서 상품가치가 더 확대되겠지요. 그게 모든 세상사는 원리가 이 원리입니다. 전에 신분사회에서는 양반, 상놈, 귀족, 서민 이렇게 있을 때는 제품으로서의 나가 없고, 출생 자체가 귀족이면 귀족이에요. 상놈이면 상놈입니다.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관심은 뭐냐? 제품생산이에요. 시장에 나가서 싱싱한 고등어 산다든지 안 그러면 공장에서 잘 만든 제품을 돈으로 구입한다든지 이게 상품이라 했는데,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에 귀족을 끄집어 당겼잖아요. 인간들이 그 귀족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겁니다. 지금의 팬션이나 건물이나 귀족들이 사용하던 물품, 침대생활 전부 다 옛날 귀족들이 했던 거잖아요. 나도 귀족생활 할 수 있다고 돈 있는 사람이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그게 부르주아라고 하는 거예요.
본인이 소비자도 되고 본인이 생산자도 되는 주체, 그게 부르주아거든요. 부르주아의 원뜻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신분제도, 신분사회는 그전에는 하늘로부터 지정해줬다는 거예요. 하늘로부터 지정한 것이 날아가 버렸어요. 그럼 뭐냐? 신분은 자기 능력껏 장만하면 되지요.
신분을 장만한다는 것이 더 값나가는 탐나는 뭐로 바꾸면 돼요? 자기를 상품화하면 되겠지요. 나의 상품화. ‘나 그렇게 값싼 존재 아니야.’ 나를 비싸게 만드는 조건에 평생을 거기에 매달립니다. 지금 유치원 애들도 의대고시를 준비해요. 왜 그러냐? 내가 상품이니까. 이 생각에서 24시간 가운데 한 번도 떠난 적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이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요. 왜? 이 아프면 누가 찾습니까? 안 찾습니다. 멀쩡해야 상품의 단가가 높아진다니까.
옛날의 신분제도는 어떻게 했습니까? 밥이나 먹여준다면 이 집안에 하녀 되겠습니다, 해서 딸 많은 집에선 여자를 치운다 하잖아요. 슬슬 밀어내서 우리 집에선 밥 굶으니까 돈 많은 논마지기 많은 집에 쓱 밀어 넣었다고요. 그래서 그 집에서 아들 낳아주면 내 사람으로 해줄게, 해서 아들 낳으면 나중에 그 집에 자리를 잡고 그 집안사람 되는 거죠.
그러나 지금은 그 집안의 사람이 아니고 결혼을 하나 안 하나 나는 누구에요? 나는 독자적인 상품가치를 지닌 나에요. 값나가는 나로 하려면 상대도 그만한 격이 맞는 값나가는 상품을 구매자를 찾는 겁니다. 모든 게 뭡니까? 이 세상은 하나의 자본주의 시장이에요. 모든 생각과 모든 교육과 활동이 나를 어떻게 값나가는 상품으로 다뤄지느냐에 거기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이게 이 세상의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이 세상의 흐름이다. 지식도 지식의 상품화죠. 나의 상품화.
자기를 부인한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 이게 자본주의사회에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사고방식 안 되지요. 많은 지식을 탑재한 나는 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사람들의 구매력을 당기는 요소가 된다, 이 정신 말고 다른데 정신 팔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모든 시간을 압축해서 여기다 집어넣으니까. 딴 데 신경 쓰는 시간을 낭비하는 게 되지요. 어쨌든 간에 내 가치를 높이는데 집중, 집중을 해야 되는.
그런데 이 세상의 이 원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못 들어가지요. 그러면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알아 맞춰보세요. ‘이 세상에서 복음만 장착해서 죽어서 천국 가기를 고대한다.’ 이게 ①부합된다, ②부합되지 않는다? 부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장착함으로써 자기의 상품가치가 높아진 삶의 방식은 이 세상에서나 통하는 방식이에요. 하늘나라에는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걸 보고 뭐냐? 너의 죽음을 대비하는 모습으로 간주해서 하나님께선 거절합니다. 나의 죽을 때를 대비해서 사전에 미리 죽고 난 뒤의 삶을 내가 확보하고 보장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필요한 정보를 성경을 통해서 얻겠다는 시도, 하늘나라에서는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여기 선배가 있어요. 이런 짓을 하는 선배가 누굽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에요.
말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서 금식을 쉬지 않고, 십일조, 간음하지 않고, 구제 다 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불합격했어요. 누가복음 18장에서. 실컷 고시 공부했는데 불합격이에요. 그런데 한쪽은 뭐냐? 나는 이런 준비도 못하고 나는 감히 고개들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인간은 천국에서 안 받아주셔야 마땅합니다, 라고 하니까 합격이에요, 합격. 괜히 학원 다녔어. 교회라는 이름의 학원 괜히 다녔어. 천국 보내는 학원도 소용없어요. 요새 학원 중에 유명한 학원 있어요. 복음학교라고 있어요. 이것 소용없거든요, 복음학원.
둘 다를 알아야 되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나에다가 복음을 장착해서 천국 가는 것으로 고대하게 만든다, 이것도 알아야 되고, 천국은 그걸 거부한다는 이것도 알아야 되겠지요. 이게 뭐냐 하면 죽음을 대비해서지요. 이게 틀렸어요. ‘나는 죽게 된다.’ 이게 틀린 말이에요. ‘나는 사망이다.’ 이게 정답입니다. 내가 사망이에요. 벌써 죽은 사망으로서 계속 살아 있는 겁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가 사망이라는 자격으로 계속 이 땅에서 살아 있는 거예요. 주께서는 사망을 실어 나르고 천국 갈 때는 이 사망 속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냅니다. 그걸 어제 낮 설교에서 제가 이런 표현을 했지요. ‘신생아’라 했지요. 신생아가 어디서 나오느냐? 내가 죽은 자리에서 신생아가 나와요.
내가 살아 있는 것을 그냥 구원하려 하면 이거는 개조가 돼요. 수리업체가 돼요. 수리해서 하지 않습니다.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 착하게 살아서 구원받았어요? 착한 분이 아버지의 저주를 왜 받습니까?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그 고백했잖아요. 나를 버리신 그것이 말씀의 성취였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말씀 실천성, 말씀의 완성 이것과는 완전히 상상도 못하는 사태가 십자가라는 특이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나타난 거예요.
베드로도 얼추 따라가려고 애를 썼어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왜?” “따라가려고요.” “따라오지 마. 너는 속성상 내 가는 곳에 합류가 안 돼.” 합류 될 수 없다고요. 누가 하느냐? 독자적으로 예수님만 해요. 예수님만 함으로서 새로운 신생아는 기존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살게 됩니다. 새로운 이름이 사망을 둘러싸서 새로운 이름으로 살게 되는데 이 이름이 무슨 이름이냐? 바로 ‘주의 이름’이죠.
그럼 내 이름은? 내 이름은 탈락되죠. 내 이름은 없어요. 육에 속한 이름, 부모로부터 온 이름은 우리 인간들끼리는 통하는데, ‘아이고 집사님’ 통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아이고 집사님’ 같은 것 없어요. 주의 이름으로 불려서, 주의 이름을 불러줬더니만 죽은 자가 살아나는 거예요.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이에요.
그걸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나는 죽고, 다시 말해서 내 이름은 나한테 죽고 내 안에는 무슨 이름이 살아 있다? 주의 이름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러면 왜 굳이 내 이름을 죽여야 되느냐? 안 죽이면 우리는 율법적으로 법적으로 나의 의로움과 정당성을 계속 외치게 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갖고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를 뭐한다 했습니까? 자기를 상품화시키는. ‘나 괜찮잖아. 나 이 정도 살았으면 꽤나 내 인생에 충실하다고 나는 나름대로 자부한다.’ 성도는 타인과 비교하거나 대비할 필요가 없어요. 성도가 비교되는 것은 십자가 가신 주님과 대비하면서 살아가지 같은 종류의 죄의 보편성 갖고 있는 그런 인간들, 같은 감옥의 죄수들 비교해서 뭐합니까?
“나, 폼나지?” “폼나나마나 너도 사망이고.” 사망이 색깔 자랑할 일이 없어요. 사망에 무슨 때깔이 있어요? 잘 먹으면 때깔 좋은 사망입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모조리 자기 상품화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는데. 독자적인 자기의 가치에서 못 빠져나와요.
그래서 제가 오후 설교 때 돈이나 버세요, 이 말을 한 것은 네가 할 수 있는 것에 충실하라, 이 말이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상품화 밖에 없어요. 상품화하는 거예요. 세상이 하는 모든 움직임이 심지어 목회, 개척교회 모든 게 뭡니까? 그걸 왜 하는 거예요? 놀기보다 그게 더 나의 가치를, 품위를 높이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너 뭐하노?” “요새 논다.” “아이고, 죽어라.” 그렇게 되지요. 요새 뭐하노, 하면 “나 요새 개척교회한다.” “아이고, 보람 있는 일을 하시네.” 뭐가 보람 있는 일이에요? 자기 업적, 상품화하죠. 그런데 그걸 욕할 수 없는 이유는, 너의 그 죄성이 나한테 이미 거기 합류돼 있다는 사실이에요. 왜? 같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직 나는 덜 노출되고 저건 노골화돼 있고, 먼저 노출되고 나는 뒤늦게 노출되고. 내 죽을 때는 좋은 관으로 해라, 마지막 죽어가면서도 자기가치를…. 보람상조 빨리해서 내 죽을 때 관 비싼 것 해라, 또는 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돈이나 벌면서 그 현장성에서 말씀의 화살이 어떻게 내 현장까지 따라왔는지를 현장 속에서 세상 것을 찾는 시장구조 안에서 내 가치만이 집중할 때 주님이 그곳까지 따라와서 말씀으로 우리의 죄를 발굴하는 그런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 죄를 아는 기회, 그 기회를 위해서 우리는 계속 수명이 이어지고 있어요. 교회 가도 자기 죄 발굴, 세상에 나와도 죄의 발굴. 밖에 있으나 없으나 아무 차이가 없어요.
좀 더 나가서 65편 봅시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지금부터 어렵습니다. 시온에서 주를 기다린다고 돼 있잖아요. 그런데 시편 65편이 유난히도 난해하고 어려운 이유가, 주어가 인간이 아니에요. 개념이 주어입니다. 뭐라 하느냐? 사람이 찬송을 하는 게 아니고 찬송이 사람을 활용하고 있다는. 이것은 인간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문법이에요, 어법이에요.
찬송이 인간을 찬송케 하는 거예요. 인간이 수동적이고 피동적으로 바뀌는 겁니다. 어디에서? 시온에서 주를 기다린다. 시온은 만남의 공간이에요. 하나님과 유일하게 만나는 거예요. 세상과 천국은 막혀 있잖아요. 흐름이 틀어지니까 계속 거부하고 있는 거예요. 네가 보기도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는 사도행전 28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내가 말을 전하는 것은 죄를 발굴하기 위함이지 네가 그 말씀 듣고 천국 오라고 말 전한 건 아니에요.
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 그 인간을 우리는 부모로부터 부여받아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안 듣는 게 아니고 듣는데 들으면 뭐가 생산돼요? 자꾸만 무슨 생산물이 나옵니까? 지식과 죄가 나오지요. 죄가 나온다는 데 그걸 약간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질문형식으로 해볼게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 행복할까요, 불행할까요? 신났지 뭐 신났지.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는 그것이 얼마나 이 세상을 화기애애하게 만들어요. 카페에서 부담 없이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세 시간 동안 이야기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없다는 게. 얼마나 이게 자연스럽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친숙이라 친숙. 지금까지 해왔던 그것, 억지로 정신적으론 교회 와서 복음을 생각하지만 몸은 하나님 없는 몸이에요. 몸이 기억해요, 몸이 기억한다고요.
그러니까 복음이나 성경 공부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짓이지만 억지스러운 것을 멈출 때 갑자기 우리가 그동안 잃어버렸던 나의 행복의식은 다시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 빛을 발하면서 나의 의식이 발동하면 상상력이 생기고,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이 개념이라는 거예요. 이 개념은 우리의 모든 다양성을 내 몸을 통해서 이걸 일체화시켜요. 내 다양성을 내 것으로 내 행복으로 단일화시킨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사람들이 주고받는 언어, 말이에요. 언어, 말은 뭐가 들어 있느냐? 개념덩어리들, 개념들은 개인적으로 끌어 모은 거예요. 어제 내가 뭐 어떻고 할 때 개념덩어리, 그걸 서로가 부담 없이 소통하고 잘 알아들어요. 귀 나쁘지 않은 이상 귀만 멀쩡하면 알아들어요.
야구선수 정근우가 있는데 정근우 아들을 KBS 기자가 인터뷰를 했어요. 정근우 아들이 상당히 의미 있는 말을 해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데, 어제 <당나귀 귀>에 얼른 보니까 나와요. 뭐라 하느냐 하면, 너 사는 목적이 뭐냐? 정근우 아들이 아니고 내가 착각했다. 정근우 딸은 피겨선수로 국가대표가 돼서 메달 따는 것이다, 하니까 정근우 아들이 아니고 중국집 정지선 셰프 아들보고 너 사는 게 뭐냐, 하니까 내 목적은 꿈을 찾는 것이다.
지금 같은 말을 두 번 한 거예요. 네 꿈이 뭐냐? 꿈을 찾는 것이다. 이 말은 똑같은 말이에요. 네 꿈이 뭐냐? 꿈을 찾는 것이다.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질문 자체도 그렇고 답변도 그렇고 지금 서로 의견을 안 맞추려고 하는 거예요, 말을 맞추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같은 죄인끼리 서로 통하지요. 통하는 말은 뭐냐 하면 바로 어디까지나 내가 주인공이라는 거예요. 여기 다양성을 여러 가지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일치시키려고 또는 동질화시키려고 애쓸 때 필히 여기서 누가 주입되느냐? 내가 주인공이 돼야 이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많은 개념 안에는 뭐가 들어 있습니까? 어떤 개념이라도 사랑, 성전, 율법, 천국, 하늘나라, 지옥,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뿐만 아니고 세상에 나오는 국가, 사회, 가정, 행복, 성공, 출세 모든 개념은 누가 주인공입니까? 내가 주인공이 됐다는. 그러니까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자연스럽게 잘 풀려나가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네가 주인공이지, 나도 주인공이야. 악수하자. 우리 서로 통하는 사이다. 이게 모든 인간사에 뉴스나 신문이나 심지어 교회 목사 설교까지 서로 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주인공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러거든요. 그럼 목사는 그 설교를 왜 합니까? 이 교회가 우리의 주인공입니다. 여러분들이 몸 바치고 돈 바치고 시간 바쳐서, 그것도 무임금 노동이죠. 해서 교회를 지킵시다.
그게 신천지지요. 그게 신천지고 통일교 그렇잖아요. 나의 구체화가 교회라는 종교단체로 대체돼 있으니까. 언제 우리가 우상 아니었던 적이 있습니까? 내가 나에 대한 영원한 우상입니다. 왜? 우상의 특징은 굳이 안 알아도 말 안 해도 아는 게 우상이에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말해줘도 못 알아듣는 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막혀 있기 때문에.
뭐로 막혀 있다 했습니까? 십자가 사건으로 막혀 있어요. 십자가 사건이 뭔데요? 하나님이여, 하나님은 저를 버리시는 분입니다. 이 하나님, 나를 받아주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를 버리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그 누구도 몰랐고, 심지어 예수님이 왔다 가셔도 아무도 몰랐고. 오직 주님이 가신 이미 사망을 쥐고 계신 그분이 내가 죽었다는 사실의 마음을 안고 그 마음을 우리에게 성령의 이름으로 주실 때 아는 거예요. 나는 이미 죽은 자구나. 이미 나는 십자가에 죽었다. 십자가 안목으로 볼 때 죽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눈이 어디 있지요? 우리의 눈은 앞에 달려있지요. 사실은 눈 쪽을 앞이라 해요. 그럼 뒤쪽은 뭡니까? 눈이 없어요. 볼 수가 없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나가는 쪽에 주님이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우리의 판단력, 결정, 지식활용, 정보 이런 것.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뒤에 계십니다. 이게 출애굽기 33장에 있는데 봅시다. 모세가 하나님 만나는 그 대목이었습니다.
33장 21~2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이런 내용이에요.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반석 위에 설 때 그 위치 자체가 모세에게 어떤 기능을 부여하는데 그건 뭐냐? 내가 반석 위에서 만날 때 너는 두 손으로 네가 앞을 보니까 두 눈을 본다는, 네가 평소에 보면서 판단했고 네 인생을 구축했던 그 두 눈을 네 손으로 막아버리는 거예요. 손바닥으로 눈을 가릴 때 주님은 어떤 분이냐? 이미 지나가신 분이다.
이게 중요해요. 이미 지나가신 분이에요. 내 소유가 될 수 없어요. 눈 안 감아놓고 감은 척하면 안 돼요. 안 옵니다. 주님은 이미 지나가신 분. 지나가시면서 나라는 존재는 뭐로 바뀌느냐? 하나의 포인트, 점, 사건이 돼요. 나는 이 땅에 태어나서 구십까지 사는 것이 우리 보기엔 길게 살았잖아요. 그런데 시편에 보면 우린 뭐냐? 찰나, 한순간의 포인트, 점이었다.
존재가 점으로 축약되는 것은 주께서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나가면서 존재를 점으로 바꾸어야 우리 존재에 가렸던 진짜 존재,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우리 주님의 활동이 나로 인하여 가려지지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안 가려지겠지요. 내가 존재가 되면 자꾸 의미를 끌어 모으잖아요. 모든 변화를 내 위주로 동일시하잖아요.
근데 존재가 내 쪽이 아니고 나는 다른 존재가 일으키는 하나의 포인트, 점이 된다면 모든 의미는 어디서 쏟아집니까? 그 외부에서 쏟아지지요. 그 외부에서 쏟아지는 이야기가 시편 65편의 이야기에요. 내가 아는 개념 말고 다른 개념이 나의 주체를 대행하는 개념이 있어요. 내가 찬송하는 게 아니고 찬송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찬송이 너를 기다린다. 어디서? 막혀 있는 장소에서. 어디서 막혔어요? 시온에서. 시온에서 기다리겠다.
네가 살아온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이 작동하는 천국에서 패스할 것이냐, 탈락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그 장소, 만남의 장소는 신명기 12장 5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선점해서 가 계신 곳이 바로 시온이에요. 시온, 다윗 성 같은 말이에요. 또는 예루살렘. 어제 낮 설교에 뭡니까? 우리들은 이렇게 늘 변화하지만 그걸 뜯어내면 영원한 것이 따로 있다 했지요. 이게 가려져서 우리가 자꾸 모르는데 성령께서 말씀으로 알지네이트 하는 것, 조각품 뜯어내게 되면 그 안에 영원한 것이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신 것이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개념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상황에 휘말리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왜 교회 갔습니까? 주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왜 그때 울었어요? 주께서 울게 하셨어요. 왜 웃었어요? 주께서 웃게 하셨습니다. 해는 왜 있습니까? 해도 주께서 시킨 대로 합니다. 달은? 단풍지는 것은? 올해 단풍은 별로 예쁘지 않아. 왜 예쁘지 않지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지요.
그러면 그다음 차례, 너는? 나는 주께서 일으킨 하나의 파동이죠. 하나의 바다의 물결과 같은 존재. 그래서 내 마음대로 임으로 사랑할 때도 있고 헤어질 때도 있고 태어날 때 있고 죽을 때 있고. 이때, 저때, 이때, 저때. 콩나물국할 때 있고 미역국 끓일 때 따로 있고 주는 대로 먹어라, 이 남편아.
모든 때는 그냥 하나의 사건화 돼 있다는 사실을 미리는 알 수는 못하고 나중에 주께서 말씀과 결부될 때 추후적으로 나라는 것은 주님이 사건, 주의 일에 휘말려서 내 일은 없고 다 주의 일이라는 것을 꼭 이렇게 우리 죄를 아는 것을 경유해서 우리를 매개로 해서 주의 개념이 나의 개념을 허물면서 주의 개념으로 우리를 덮어줄 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251110b 부산강의 : [시편]81(65:3)-기억에 없는 기억
(강의:이근호 목사)
의지적일 때 여기에 뭐냐? 조작이 일어나요. 주변에 일어난 각양 실제적으로 일어난 변화를 내 쪽에서 편집해요. 편집하는 힘은 뭐냐? 나 잘났다. 내 가치를 지키는 것, 그것으로 편집을 하는데 만약에 비의지적이라면 철저한 뭐냐? 수동적이죠. 비의지적이 뭐냐 하면 내가 의지적인 인간이 비의지적이 될 때는 여기서 사건이 벌어지지요. 어떤 사건? 말씀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말씀이 뒤에서 떠밀어서 나를 자빠뜨리는 거예요. ‘이 잘난 의지야, 그게 현실이 아니야.’
뭐가 현실이냐? 말씀 세계가 현실이에요. 죽고 난 뒤에 하늘나라가 이 하늘나라의 말씀이 먼저 자기 택한 백성에게 찾아와서 자빠뜨리게 하는 거예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거예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 천국 갈 수도 없는 인간을 천국 가는 인간으로 이걸 누가 제시하느냐 하면 말씀이 와서 재생시키는 작업을 주께서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중에 가장 초점이 뭐냐 하면 아까 우리 자신을 말씀에 입각하면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의하면 나는 뭐가 돼요? 사망이죠. 하나님께서는 사망이라 해놓고 이 사망을 사망시켜요. 사망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나를 사망케 할 때는 여기다 뭘 집어넣느냐 하면 율법을 집어넣어요.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옵니다. 율법이 없을 때는 나는 살았는데, 성경 그대로에요. 더 보태지도 않았어요.
율법이 없을 때는 살았는데 하나님의 율법이 오니까 나는 죽었도다. 얼마나 명쾌합니까? 살아서 뭐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아니 말씀이 오게 되면 네가 죽었다니까. 죽었는데 뭘 해요. 헌금하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찬송하고, 그건 네가 어디까지나 의지적으로 할 때 이 의지에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바리새인처럼 성경말씀, 말씀이 결함해버리면 여기서 뭐가 일어난다 했어요? 조작이 일어나지요. 소위 편집하는 거예요.
편집하는 목적은 뭡니까? ‘나 이렇게 구원받았다, 나 이렇게 잘났다, 성경에 말하는 성도는 바로 나다.’ 이런 식으로 자꾸 조작을 하는 거예요, 본인이. 피곤하지도 않아. 힘들어. 그런데 여기서 밀어버리면 자빠지죠. 자빠뜨리면 뭐 깨집니까? 코 깨지죠. 이빨 나가고. 열심을 했는데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했는데 ‘Why me? 왜 하필이면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래 나오는 거예요.
사망을 사망한다는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죽여 놓고 죽였다는 그 경로에 들어선 자에게만 부활에 이르게 하지죠. 경로에 들어설 때는 율법이 나로 하여금 사망케 하고, 그다음에 사망을 사망케 하니까 부정어 두 개 들어갔으니까 뭡니까? 부활이죠. 부활할 때는 율법 자체를 폐기시켜버립니다. 왜? 율법은 자기 할 일을 다 했거든요.
우리를 멋지게 살아 있다고 상품화됐다고 나같이 고가의 인간이 어디 있느냐? 나와 봐. 나같이 이렇게 훌륭한 자질되지, 인격 되지, 품격 되지, 돈 되지, 집안 되지, 키 되지, 성격 되지, 만날 ‘되지’야. 뭐 되지, 뭐 되지, 다 되고 출신 되고 다 되는데 이걸 이 사망을 율법으로, 그러면 네가 율법대로 살았어?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 네가 미워하는 것도 무슨 죄? 살인죄. 네가 그렇게 살았냐 이 말이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했다. 근데 알아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오른손을 텍사스전기톱으로 잘라버려야 돼. 왜? 죄 지었으니까. 그러니까 주의 말씀은 아주 극단적이야, 극단적. 도대체 주의 말씀 지켰다는 인간 나와 보라 그래.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주님도 본인은 죄 안 지었지만 몸 자체가 죄 있는 몸으로 오셔서 그 죄로 인하여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뭘 받았어요? 저주받았어요.
저주보존의 법칙. 에너지보존의 법칙, 엔트로피 법칙이 나오거든요, 물리학에서. 저주는 이 땅에서 늘 넘쳐야 되고 가득 차야 되고, 이 땅에는 절대로 저주 외에 다른 게 있으면 안 된다는 것, 그래야 이 세상이 폐기처분될 정당성이 보장되거든요. 그런데 그 저주 세상에 누가 들어왔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들어왔어요. 저주보존의 법칙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도 예외가 없이 저주받아야 됩니다. 예외가 없어요.
죽을 뻔했는데 살아난 게 아니에요. 주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진짜 죽었어요. 진짜 시체가 되었습니다. 이게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주께서 보여주는 겁니다. 죽을 뻔했는데 뭐 살았다, 이러면 안 돼요.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뭐 나옵니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뭘 준다? 생명의 면류관.
①죽을 뻔까지 했는데 살아났다. 이것 이 말씀과 일치됩니까, 일치 안 됩니까? 죽을 뻔은 아니에요. 유사 죽음이니까 안 돼요. 그러면 죽을 뻔했는데 살아났다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의지가 있지요. 의지는 뭘 한다 했습니까? 의지는 조작을 하지요. 아마 이게 순교일 거야. 이 정도 죽었으니까 주께서 충분히 네가 날 죽도록 사랑했구나. 그만 그 사람 살려줘라. 이 조작을 자기 사연이거든요. 인간은 자기 사연을 매일같이 재편집하고 조작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들은 자기 의지로 중력이 쏠리기 때문에 뭘 모르느냐 하면 이 세상이 어두움의 왕이 지배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런데 실제 세상은 너무 밝아요. 착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모모>(미하엘 엔데(Michael Ende), 1973)라는 소설이 있어요. 모모는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진짜 밝게 바르게 사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델을 제시한 거예요. 그 이름이 모모에요. 소녀입니다. 출신도 변변치 않고 지 나이도 잘 몰라요. 좀 미친 것 같아. 나이 몇 살이냐 하면 백 살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 모모의 특징은 뭐냐? 본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줘요. 소설에서 왜 모모라는 소녀를 가장 이상적으로 보여주느냐 하면 이 세상에 남의 말 들어주는 사람이 점점 희박해지니까 세상이 각박해졌다는 거예요. 모모처럼 자기 수다 떨지 말고 남의 이야기를 침착하게 끝까지 다 들어주는 사람만 있다면 그 사람이 메시아가 아닌가, 그게 행복의 원인이 아닌가.
그러니까 사람이 친구를 찾는데 친구가 뭡니까? 나한테 좋은 소리하는 사람을 친구로 보지 않고 내가 무슨 소릴 해도 어떤 성질을 부려도 그걸 감내하고 다 들어주는 사람을 친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친구가 점점 더 없어지는 거예요. 모모는 어떻다, 세상에서는? 모모는 철부지, 김만준이 부른 노래 있잖아요.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이런 노래 있어요. 젊은 사람들 이 노래 몰라요. 하도 오래된 노래라서(박철홍 작사/작곡, 김만준 노래, 1978).
이 모모라는 소설에 보면 대비되는 사람이 있어요. 회색 신사복 입은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사람은 시간저축은행에서 나온 직원들이에요. 시간저축은행이 뭐냐 하면 자꾸 한담하지 말고 쓸데없이 잡담하지 말고, 당신의 상품가치에 매진하고 나머지 시간은 우리가 저축해놨다가 나중에 육십, 칠십 되거든 몰타 가든지 그리스의 하얀 집 있는 섬, 산토리노로 놀러가든지 그때 줄 테니까 지금은 딴 생각하지 말고 자기계발과 자기발전과 자기출세를 위해서 전폭적으로 힘쓰라. 그것 하는 직원들이었어요.
그러니까 대비가 되죠. 누구와 대비됩니까? 모모하고 대비가 돼요. 모모는 내 시간이라는 것이 없고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시간이 내 인생을 거기다가 대입하는 거예요. 이전하는 거예요. 나는 몇 년을 살았다가 아니라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기간이 몇 년이라는 그걸로 측정하는 것이 모모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모모 소설에서 이상적인 현실에 있지 않는 그런 사람을 등장시켰지요.
결국 이 세상을 어두움의 왕이 지배하는데 서로가 지금, 아까 모모 같은 사람이 등장해서 희망과 기대를 갖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아까 어두운데도 안 어둡게 하는 것은, 나의 의지를 좋게 몰두, 또는 몰입하는 거죠. 타조가 가는데 뒤에서 야수가 와서 공격했다? 타조는 도망갈까요? 자기 얼굴을 모레 파묻는 거예요. ‘이쯤해서 갔을 거야.’ 그런데 사자가 팔짱끼고 기다리고 있는데?
얼굴을 파묻으면서 그냥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세상은 굉장히, 성경에선 어두움의 영이 지배한다는데 전혀 세상이 어둡지 않는 것은, 일단 자기한테는 인생에 아무 일이 없다는 뜻이에요. 나한테는 밝으니까 세상도 같이 밝은 걸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약간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냐고 하나님께 달려드는 겁니다. 제가 말하는 건 이겁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면, 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자기 의지에 몰두할 때 이런 생각이 계속 하나님이 없다는 얘기잖아요. 이게 더 나가요. 뭐냐 하면 ‘정말 없다’ 이렇게 돼요. 하나님이 정말 없는 거예요. 교회는 있다고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을 인터뷰해보면 하나님은 없어요. 심지어 교회 다니는 권사, 집사, 목사, 일반교인들도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 기도는 하는데 대표기도하고 내려오는 사연은 뭡니까? 아예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이 없는 생활에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참….
그런 인간들이 이게 왜냐하면 자기 자율성, 그리고 자기의 주체성을 포기 못해서 그런데, 시편 65편을 근거로 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없다가 돼요. 이게 정설이에요, 정설, 과학적 정설. 하나님이 없어요. 없는데 시편 65편 3절에 보면,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라는 고백을 다윗이 하고 있지요.
죄악이 나를 이겼다 할 때 여기서 나는 누구의 지배를 받게 돼 있어요? 죄의 지배를 받게 돼 있어요. 그러면 내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왜? 죄악이 나를 이겼기 때문에. 내가 뭘 시도하게 되면 그것조차도 어디 포함됩니까? 죄의 일종이에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겼사오니, 그다음에 누굴 찾습니까? 주님을 찾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나는 누가 이겼다? 죄가 이겼지요. 죄는 누가 이겼다? 주님이 있는 거예요. 이 말씀의 세계가 바로 현실의 세계다.
이 현실에서 나는 말씀이 오기 전까지는 이 현실의 구조 자체가 나한테는 없었지요. 그런데 말씀이 시편 65편이 오는 순간 나는 이 구조에서 제일 막내아들, 제일 아래쪽에 속하는 거예요. 제가 어제 오후에 제시했던 기도제목이 기억납니까? “제발 최상위층의 말을 들어라.” 하빠리인 네가 네 말 듣지 말고 최상위층의 말을 들어라. 최상위층이 놀지 않아요. 활동을 해요. 그러면 우리도 뭡니까? 활동을 하지요.
그러면 비교되는 게 뭐냐 하면 나에 대한 나의 사명감과 나에 대한 주님의 사명감이 어떻게 돼요? 이 세상에서 자꾸 충돌을 일으키는 거예요. 한 고집하는데 주님의 열심이 내 고집보다 더 세죠. 주님이 나보다 세다, 우린 이걸 받아들이는데 그러면 안 돼요. 중간에 뭐가 빠졌어요? 죄가 나를 이겼다는 이 사실을 왜 자꾸 빠뜨립니까? 부등호 기호표시를 주님하고 바로 지우지 마시고 죄를 집어넣어야 돼요(나⟨죄⟨주님).
집어넣어야 뭐가 되느냐? 내가 주님의 피동체가 됩니다. 피조물, 또는 피동체가 돼요. 만약에 이 죄를 빠뜨려버리면 나와 주님에 대해서 내가 주님한테 복종하는 것이 내 의지에서 나와 버린 게 돼요. 종교적인 욕구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겠습니다. 순종하지 마. 너는 죄에 순종하고 있어. 자꾸 내가 주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우리는 주님께서 순종하지 않는 존재로 태어난 사람이에요.
그런데 왜 주의 말씀을 순종하겠습니다, 이 말은 뭐냐? 중간에 이걸 바라봐야 돼요. 내가 주님께 순종하도록 누가 가로막아요? 나를 이긴 죄가 이걸 가로막는다고요. 그러니까 이 문제는 내가 나에게 책임질 일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이게 자유입니다. 교도소 갇힌 죄수가 교도소 운영비문제, 예산문제에 지가 고민을 왜 합니까? 교도소 예산문제 고민했던 영화가 있어요. 은행출신으로 억울한 누명쓰고 감옥에 왔는데 교도소장과 짜고, <쇼생크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 1995) 그 영화는 돼요. 지가 월급은 안 받지만 교도소 운영직원과 똑같은 거잖아요. 금융담당직원.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운영하지 마세요. 그러나 운영하라고 누가 시킵니까? 중간에 죄가 나보고, ‘너 인생 그렇게 사는 것 아니야. 네 상품가치 떨어져. 아무도 너 안 찾잖아, 봐. 너 맛이 간 거야. 뭐해야 돼. 남들 시간 낭비하는데 자꾸 몸으로 살지 말고 시간 낭비하지 마.’ 결국 인생이란 자본주의사회에서 뭐 떨어지면 인간가치 떨어진다? 돈 떨어지면 가치 떨어지는 거예요.
그 말이 맞아요, 틀려요? 맞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돈이나 벌라하는 거거든요. 왜 본인을 자꾸 속이려고 해요. 돈 좋아하면서. 나이 구십 되도 돈 좋아한다고요. 이걸 뭐 복음으로 기도로 이겨야지. 그걸 왜 이깁니까? 못 이긴다는 걸 알면 돼요. 이길 수가 없어요. 지금 돈이 없어 문제지 돈을 못 이겨서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이 자기 음식에 대해서 탐이 나지 않을 경우가 어떤 때냐 하면 남들이 내 먹는 것을 가져가도 기분 나쁘지 않을 때는 이미 내가 배부른 상태기 때문에. 그걸 뭐라 하느냐? 자비, 배려심. 가진 자만이 선해요. 이재용 삼성그룹회장이 잠바 입고 나와도 사람들 누구도 그를 가난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가진 자의 여유거든요.
이 세상은 가진 자만이 선해요. 선을 하려면 일단 뭔가 챙긴 게 있어야 선하지 개코도 없는 게 뭘 선해요. 지가 모모도 아닌 주제에. 이 세상은 가진 자의 세계고 그게 상위층을 형성합니다. 새로운 계급제도가 형성돼 있습니다. 그게 어두움이라고 표현해요. 악하고 어두운 세계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해결책 봅시다. 해결책은 뭐냐 하면 역사 초반으로 가요. 역사 초반의 사정은 역사 후반에서 반복해요. 역사 초반에서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 했잖아요. 이미 이 세상은 누구 지배에 들어갔느냐? 마귀의 지배에 들어갔어요. 악마의 지배입니다. 그런데 역사 후반까지 이게 조용해요.
아주 화기애애하고 세상은 밝고 힘의 발휘에 대해서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특수한 민족이기 때문에 주께서 관여하지만 이방민족은 힘만 있으면 힘의 계급화가 이뤄진 것에 대해서 그게 안정적 구조를 이룹니다. 가진 자가 큰소리 치고 힘없는 민족은 엎어지는 것이 세상은 법칙처럼 굳어져 있어요.
근데 역사 후반, 성경에서 이걸 종말이라 해요. 종말에 오게 되면 이게 드디어 갈라집니다. 나쁜 고기와 좋은 고기, 그리고 양과 염소로 갈라진다고요. 초반의 역사가 가면서 마지막에 갈라지게 돼 있어요. 그러면 시편 65편은 어디 있느냐 하면 갈라진 역사 속의 역사, 김밥 안에 있는 소시지. 김밥이라는 인류역사 전체에 그 핵심부를 전선으로 연결하듯이 연결시킨 역사 이스라엘 역사에요.
이스라엘 역사의 특징은 뭐냐? 바깥은 바알이거든요. 바알은 누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누구나 자기의 욕망과 정성이 집대성되어 아쉬울 때 신을 찾는 거예요. 신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거든요. 신을 찾는 이유가, 이상적인 자아를 찾는 거예요. 지금 이 서글픈 꼬락서니 말고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찾기 위해서 신의 이름으로 찾는 거예요.
우리 손자는 이번에 수능 20점 더 나와야 돼, 하고 갓바위 올라가는 이유는, 수능 중간 떨어지는 것은 우리 집안에서 용납을 하지 않아요. 만약에 손자가 수능 쳤는데 성적이 안 나왔다? 그러면 우리 집안의 안정성에 해가 되는 거예요. 어제 설교했잖아요. 우리교회 앞에 차들이 갓바위로 막 가잖아요. 왜냐하면 내가 확보한 이 안정성을 계속 유지해야 나의 역사가 되기 때문에.
역사에서 예를 들어서 제주4‧3사건, 한강 작가가 다룬(작별하지 않는다) 이 사건에서 이제는 피해자 입장에서 보겠다는 거예요. 억울하다 이 말이죠. 그러나 공산당혁명 입장에서 보면 이거는 처리될 자들이에요. 왜? ‘역사란 승리자의 사연으로 재 기입된다.’ 승리자의 사연으로 다시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뭐냐? 기억조작이죠. 현재 자신의 절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나간 사건에 대해서 재해석이 현재 살아 있는 나에게 포함시키는 겁니다.
이걸 어려운 말로 뭐냐 하면 현재를 누리는 자의 특권인 거예요. 그러면 이것이 지금 이 세상의 흐름이잖아요. 하늘나라의 흐름과 같다, 안 같다? 안 같지요. 그럼 이건 뭐냐? 하나님이 하는 방법은 기억나지 않는 기억을 주는 거예요. 역사 초반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 심어버리는 방법을 하는 겁니다.
역사 초반을,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원칙을 역사 중간에다 이걸 말씀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그럼 역사 초반은 누구 세계입니까? 주님이 먼저였고, 주님에 의해서 인간이 후발주자로 만들어진 구조 아닙니까. 그것을 시편 65편에다 새기는 거예요. 어디서? 시온에서 새겨버리는 거예요. 시온에서 말씀으로 새겨버려요.
그러면 그 말씀으로 오지 않으면 인간성은 기억조작에 나서지요. 기억조작에 나설 때 여러분들이 제가 그냥 기억조작을 한다, 이렇게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모든 것도 쉬지 않고 기억조작에 나서는 겁니다. 예를 들면 제가 노래가사를 불러드리겠습니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텅 빈 하늘 밑 불빛들 켜져 가면
옛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보네
옛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본다는 것은 소환한다는 거예요. 지나간 기억을 현재 누리는 나의 특권에 안정성 확보를 위해서 소환하는 거예요.
찬바람 불어와 옷깃을 여미우다
후회가 또 화가 난 눈물이 흐르네
누가 물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지나온 내 모습 모두 거짓인가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두듯이
흰 눈 나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 길 찾아가지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요 대목이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적어보겠습니다.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내 맘에 고독이 너무 흘러넘쳐
사랑을 잃으면 고독이 돼요. 이것은 내 눈이 내 앞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내 뒤에 있고. 끝까지 우리는 우리 역사 사연을 계속 유지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적립하는 것이 평생 우리의 할 일이었습니다. 상실돼버렸거든요. 사랑을 상실하니까 결핍이 생기지요. 그 결핍을 뭐라 하느냐 하면 고독이라 하는 거예요. 그럼 고독은 결핍이니까 비어있으니까 나의 나 됨에 빵꾸가 났으니까 빵꾸는 그냥 놔두면 돼요, 뭘 채워야 돼요?
그 채우는 방법이 뭐냐? 지나간 일들은 지금 재편집해서 다시 빈곳으로 소환시켜서 지나간 모든 것을 너무 크니까 다시 노래를 부르든지 뭘 하든지 채우는 겁니다. 결국 채워놓으면 남는 것은 뭐냐? ‘나 잘났다’가 되죠. 그 대목을 잠시, 자꾸 트니까 유튜브에서 주의가 들어와서…. 조금만. 다 아는 노래지만 자칫 우리가 옛날에 좋아했던 옛사랑에 빠질 수가 있어요.
옛날에는 함부로 불렀어요. 이젠 아껴 불러요. 왜? 재편집했기 때문에, 내가 아까운 존재기 때문에, 내 아픔에 고이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이쁘게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그때는 아껴 불러요.
지금 자기를 달래는 겁니다. 아픈 자기를.
이제 중요한 대목. 이제 나와요. 노래교실이죠. ‘영원 속에 있네’ 이것 찾으려고…. 영원 속에 있네, 내가 영원한 거예요. 나를 영원히 하기 위해서는 영원한 기억들이 재편집되어서 조작해서 내 안에 들어와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나는 나를 지키는 거예요. 복음, 성경공부해도 돌아서면 이문세에요. 아무리 교회에서 예배드려도 돌아서면 집에 가면 다시 이문세로 돌아간다는. 자기관리로 들어가요.
그게 바로 뭐냐? 이게 어두운 세계라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자꾸 이러면 안 되고, 하지 마시고 아직도 멀었다. 이문세 나오지만 또 딴 노래 나올 거예요.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이 왜 내가 죄인이며 이 죄가 내 손에서 해결이 안 되는지를 그걸 말씀과 결부되어서 알게 하시는 환경을 누가 조성했다? 주님이 조성한 거예요.
그럴 때 시편 65편 3절을 다시 봐야 돼요. 죄악이 뭘 이겼사오니? 날 이겼사오니. 그러니까 뭐냐? 이걸 알면 그다음부터는 내가 찬송하는 게 아니고 찬송이 내 삶이 찬송이 될 수 있도록 나 말고 주께서 그렇게 내 일상을 하고 계신 거예요. 다음 4절을 봅시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그다음에 공간이 나오는데 무슨 공간입니까? “주의 뜰”입니다.
아까 했던 것 잊어버릴까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는 주의 공간, 주의 성전 이미 우리 눈을 가린 상태입니다. 우린 하나의 점이 되지요. 하나의 파동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주체적으로 할 수 없어요. 그런데 눈을 다시 치워버리니까 나는 다시 죄인이 되고 죄인으로 드러나는 그 공간, 엑스레이 찍을 때 아무데나 찍으면 안 되잖아요. 그 앞에 서야 되잖아요. 렌트겐 사진기 앞에 서야 되잖아요. 그 서는 자리가 뭐냐? 주의 성전의 자리, 그게 신약에 오면 무슨 사건의 자리? 십자가 사건. 십자가 사건의 강도.
제가 어떤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십자가 사건의 현장은 뭐하다고 이야기했어요. 그게 뭐냐? 어수선한 거예요. 어수선해요. 혼잡스럽고 혼란스러워요. 한쪽은 죽이라고 고함치고 한분은 아무 이유도 없이 죽어요. 말이 안 통한다는 것 때문에, 서로 개념이 안 맞았기 때문에 죽어버렸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어수선한 개념을 의도적으로 기획했어요. 그 프로그램을 의도적으로 연출을 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 바리새인들이 착한 사람이잖아요. 어지간하면 사면이 돼요. 용서된다고요. 그럴 수도 있지. 미친 사람이 그런 소리하는 것 같은데 우리 모른 척하자. 넘어가기 때문에 절대로 그들이 나를 안 죽이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주제를 내용으로 내놨습니다.
교회 부흥을 외치는 어떤 교회 다니면서 십자가 이야기해버리면 딴 건 다 용납해도 십자가 복음은 용납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교회 부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집대성돼야 돼요. 모든 교인들이 결집해서 여기다가 힘을 모아야 되고 돈도 모으고 시간 모으고 모아야 돼요. 십자가 사건은 뭡니까? 이 행함을 십자가 사건은 어떻게 합니까? 죄로 규정해서 다 없애버리죠.
그러면 그 목사가 뭐라 합니까? 그래선 교회가 안 된다는 거예요. 주의 십자가는 뭡니까? 교회가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교회는 사망이 돼야 되는데 교회가 펄펄 살아버리면 뭐가 죽습니까? 교회 종교단체 권력이 십자가의 복음을 짓밟아버리잖아요. 그러니까 목사가 모든 걸 용납해요. 강도질해도 괜찮아요. 간증집회하면서 열 번 교도소 가서 교도소에서 영접했습니다, 다 용납을 해요.
그런데 단 한 가지 용납하지 않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행함이 죄가 된다는 그건 용납 못해요. 그건 때려죽여도 용납을 못해요. 그러면 대번에 목사가 나서기 전에 열심 있는 권사부터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령 받아서 찬송했는데 그것도 죄입니까?” 질문 자체가 막 나와요. “예 죄입니다.” “주께서 기적으로 돈 벌이해서 십일조 했는데 죄입니까?” “예 죄입니다.” “그럼 목사 설교도 죄입니까?” “죄입니다.” “당신 강의도 죄입니까?” “죄입니다.”
도대체 그게 의사소통이 개념소통이 될 수 없지요. 죄인의 몸으로 태어난 주님도 이 세상의 구조에서 최후를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아버지께 저주받아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예 죄의 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짓는 우리는 어딜 가야 되지요? 주님의 기억 앞에 있어야 되지요. 역사를 시작했던 그 선악과 따먹는 사건이 역사 초반에 갈라졌잖아요. 그걸 김밥 속의 소시지처럼 이스라엘 속에서 통과시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뭘 느끼느냐 하면 65편 6절 봅시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라고 돼 있지요. ‘진정’이란 말을 했지요.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요란스러워도 마땅하지요. 마땅한데 누구 덕분으로 은혜 덕분으로 우리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됩니까? 진정된 상태에 들어가니까 이거는 누구 공로다? 주님의 공로입니다, 라고 다윗이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나를 편하게 해주시고 행복하게 해주십니까가 아니라 다윗의 질문은, 나는 불행해야 되고 마땅히 조기에 죽어야 되고 더 살 이유도 없는데 왜 이렇게 저로 주를 알게 하시고 죄를 알게 하시고 계속 살도록 여유 있는 삶을 허락해주십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질문 자체가 바뀌어요. 성도가.
그게 이유가 있어요. 4절에,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뭐로 만족한다고요? 공간 자체, 특정 공간에 놓여있는 자체로 만족한다 했어요. 이걸 열왕기상 8장 46절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 지어놓고 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아아 솔로몬이 뭘 알지요. 인간 근원을 알아요. 인간이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의 권능이 인간보다 세다는 것을 이미 인정하고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가 헌금을 하던 뭘 해도 죄 아닌 게 없다는 걸 인정하고 들어가요.
중요한 것은 죄를 알게 하는 동시에 죄를 씻어주는 그 성전의 뜰, 그 공간이 되게 하셨사오니 여기서 우리 죄를 안다면 주께서 용서해주실 거죠? 이렇게 기도하고 있어요. 적어볼게요. 왜 우리가 이문세의 한계, 곧 우리의 한계를 아시겠지요. 나를 위한 기억이 아니고 우리가 모르는 기억조차 못하는 기억을 우리한테 삽입시키는 거예요. 우리 역사 속에 난데없이.
성전 자체 공간, 뜰이 있잖아요. 뜰에 무슨 능력이 여기 있어요. 오늘 본문에 권능인데, 권능은 뭐냐? 우리가 잘났다. 내 잘난 쪽으로 어떤 죄를 지어도 우리는 반성하면 되잖아, 라는 자체가 뭡니까? 그만큼 죄는 지어 인정하지만 반성했잖아, 하는 나는 뭡니까? 잘난 존재가 되지요. 왜? 반성하는 능력이 있으니까 상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인격적이라는 것을 내세울 수 있는 근거가 되니까.
이런 것을 뭐로 만들었습니까? 죄가 나를 이겼다고 들어오지요. 그러면 말씀의 기능은, 아까 율법의 기능은 멀쩡한 우리를 뭐로 만들어요? 죄로 만들 때 율법이 나왔던 그 처음 공간이 성전에서부터 율법이 나와서 우리를 소환시켰다 이 말이에요, 죄인으로. 소환시켰던 이유가 뭐냐? 죄를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의 죄는 죄대로 우리의 태어난 운명이고 이것을 여기에 미지의 능력으로 이 죄를 사해줌으로서 성전의 존재가치가 나의 가치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게 다윗언약이에요. 월등하다는 것, 성전의 가치가.
그러니까 이 가치 앞에 이 사람이 착합니까? 착한 게 아니죠. ‘니 마음대로 사세요’에요. 니 마음대로 사는데 지금 나는 나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으로 호출된 그 공간 안에 모여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그걸 뭐라 하느냐? 나는 어디 안에 있다? 십자가라는 공간 안에 있다. 의외로 이게 넓어요. 구원받을 사람들 집합해 있기 때문에 넓다니까. 마당이 넓어요.
십자가 안에 공간 안에 이 말이 뭐냐 하면 사건은 지상의 공간개념을 능가하는 공간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공간이 사건 공간이에요. 십자가 사건이 나에게 율법을 말씀으로 죄를 발굴하는 기능으로 작용해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앞에 서있다. 내 피와 내 살을 먹지 아니하면 너에게 뭐가 없다? 생명이 없지요. 요한복음 6장 55절에.
그러면 이 말을 줄이면 원래 나한테는 뭐가 없다? 생명이 없다. 생명이 없는 것을 생명의 운반체로 생명의 전달체로 매개체로 우리를 활용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한 거예요. 내가 훌륭하다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만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이미 씻어준 거예요.
옛날에 어느 설교에서 그걸 이렇게 했어요. 이미 십자가 사건은 터져버렸지요. 발생했어요. 돌이킬 수 없어요. 돌이킬 일이 아닙니다. 어제 낮 설교의 제목을 뭐라 했느냐 하면, ‘세상의 운명’입니다. 굳어진 팔자, 이게 성도입니다. 성도는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창세전부터 차출된 사람이에요.
차출될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몰랐어요. 성령 오기 전엔 모르고 말씀을 지킨다 하는데 말씀이 와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뭘 하느냐 하면 착상을 해요. 자궁에다 수정란이 착상되면 나중에 뭐가 나오죠? 신생아가 나와요. 그 신생아가 예수님의 형상입니다.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우리를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했다고요.
그러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한 것과 똑같은 절차를 오늘날 성도가 밟는 거예요. 성도 안에 임마누엘, 성도 안에 성령, 예수님의 영이 임함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받는 예수님의 동생들, 장자니까 장자를 높이는 같은 식구가 되게 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그러면 그 작업은 같은 성전 뜰에서 일어난다는 거예요.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다음에 8절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땅 끝이라 하는 것은 역사를 다 끝내고 난 뒤에 그러니까 인간이 기억하지 못한 기억, 오늘 제목을 이걸로 정해야지. 기억하지 못한 기억이 삽입돼 들어간 거예요. 왜? 말씀으로 삽입돼 들어왔으니까. 그러면 역사의 시작이나 끝이 반복된다면, 여러분 자크를 내리잖아요. 내린 자크는 올리면 되지요.
그런데 그 자크가 궤도를 이탈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예 힘줘서 당겨버리면 그 자크는 어떻게 내 쪽에서 내가 알아서 주의 말씀을 조절할 수 없는 우리 능력 밖의 이야기에요. 능력 밖의 문제에요. 그럼 시간이란 궤도를 이탈해버리면 더 이상 우리는 이문세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지나간 내 과거로 레고 조립하듯이 조립할 수가 없어요. 이거는 내가 할 수 없는 바깥에서 내가 조립돼야 된단 말이죠. 그 기억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낯선 사람이 되고 낯선 사람 취급을 받고, 이상하다 이단 아니야, 이런 소리 듣고 그러지요.
그리고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여기에 9절에,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 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 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11절에, “주의 은택으로 년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
이 모든 것이 내 농사법이다, 아니면 주님의 은혜다? 어느 쪽입니까? 주님의 권능이 되겠지요. 예수님의 은혜 받아도 달라지는 게 없죠. 달라지는 게 있다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내 중심에서 벗어나서 주님께서 지금 일하고 있는 것에 내가 합류돼 있다, 참여돼 있다는 그런 세상관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일상에서 어떤 벌어져도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든지 뭐 관세가 100% 되든지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에 그 모든 것은 이미 확정된 하나님의 죄 사함이라는 그 성전의 기능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주께서 실시하는 거예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그다음부터 뭡니까? □다. 너희는 누구의 증인된다? 내 잘남이 아니라 누구의 증인?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의 세계가 곧 현실인 것을 우리는 지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우리 자신의 욕구에 막혀서 참 주님을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이제는 때마다 시마다 말씀으로 우리를 깨워서 우리의 죄가 십자가를 모욕하고 있음을 아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인생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