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3/3-말씀이 예언으로 찾아와야

아빠와 함께 2026. 3. 3. 08:57

인간은 자기 안에 하나님이 몰라야 한다고 한 그거, 네가 몰라야 한다는 그것을, 마귀를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착한 자는 복 받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그러한 생각이 이거는 하나님께서 준 게 아니에요. 인간은 그거 몰라야 해요. 몰라야 하는데, 인간의 심보 안에 그게 들어 있다고요. 그게 마귀가 사주해서 그래요. 마귀가 집어넣어서 그래요.

 

이걸 빼야 해요. 이걸 삭제시켜야 합니다. 삭제시키는데, 이걸 삭제하는 데 있어서, 같이 삭제되는 게 누구냐 하면은 우리 자신입니다. 이걸 우리 자신을 남겨놓고 이러한 생각과 의도만 따로 뽑아낼 수가 없어요. 이미 우리는 한통속이 돼 있기 때문에, 그 선악 구조를 찢으면서 우리도 같이 찢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인간은 짐승만도 못합니다.  
애기 4징3절  “들개는 오히려 젖을 내어 새끼를 먹이나 처녀 내 백성은 잔인하여 광야의 타조 같도다”  
타조는 알을 낳아놓고 도망쳐요. 아주 잔인한 거예요. 새끼 낳아놓고 자기는 나 몰라라고 도망칩니다. “들개는 오히려 젖을 내어 새끼를 먹이나 처녀 내 백성은 잔인하여 광야의 타조 같도다”
4절에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가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사람이 사람이면 사람 구실을 해야지, 세상에 짐승보다도 못한 게, 어떻게 자식이 배고픈데 어미가 자기만 먹고 자식은 내팽개치냐. 너는 인간도 아니고 짐승이야. 정말 짐승 같아’라고 아직도 욕하는 것은, 아직도 인간의 밑바닥을 몰라서 그래요.

해결점은 뭐냐. 어떻게 선악 논리를 내게서 빼낼 수 있는가. 그것은 말씀이 예언으로 찾아와요. 예언으로 찾아오면 예언이 예언대로 되어버립니다. 아침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다고 했잖아요. 세 번 부인한다고 할 때 베드로는 장담하면서 ‘저는 주님을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했어요. 베드로가 이제 자기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거예요.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기의 사랑이라든지 결심으로 구원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순간에 예언의 위력을 놓쳐버린 거예요. 예언의 위력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그렇게 부인한 베드로가 이제는 주님하고 빠이빠이 된 상태에서, 예언 자체가 찾아가야 해요. 예언 자체가. 베드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에게 찾아간 그 예언의 말씀이 구원될 때, 덩달아 베드로에게 선악과가 떨어져 나가고 예언의 말씀이 붙어 있으면서 그렇게 덩달아 베드로가 구원받아요. 인간은 짐승이라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구원받지 못해요. 그런데 뭔가 들러붙어요. 하나님 예언의 말씀이 들러붙는다고요.

예언의 말씀은 간단하게 이렇습니다. 학대받는 자의 경우에만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그 학대하는 자는 누구냐? 애굽 나라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악을 쓰고 참으면서, 애굽 나라를 떠난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냥 여기서 좀 완화되기를 하나님께 요청했는데, 하나님께서 막상 찾아서 보내신 예언자는 모세와 아론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안 떠납니다. 못 떠납니다. 이게 못 떠나는 이유가, ‘착하면 되잖아, 바르게 살면 되잖아, 하나님 말씀대로 훌륭하게 살면 되잖아’ 계속 선과 악, 선과 악이 작동해서, 바르게 살면 복이 올 거고, 바르게 살면 나중에 천국 보내준다는 선악 구조가 안에 자리 잡아서, 이게 어떤 경우라도 뜯겨나가지를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예언 했어요. 히브리인들을 하나의 점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점으로 만들어요. 점은 지점이 없어요. 지점이 없는 지점이 점이에요. 점인데 질량도 없고 크기도 없고, 없어요. 없는데 그냥 점이에요. 점이 있다는 말은 없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점이라는 것이 찍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끝까지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점이 되기를 싫어하고 마지막에 그들이 가는 곳은 뭡니까? 점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방을 원해요. 나 혼자 독립하는 내 방, 그 방을 원합니다.

텅 빈 것과 가득 찬 것, 어느 것이 환상에서 현실로 옮길 수 있는 방식이 되겠습니까?
가득 찬 것과 텅 비어 있는 거, 어느 쪽이 나의 환상을 깨뜨릴 수 있는 출발점이 되겠습니까? 텅 빈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점(點), 텅 빈 이 텅 빔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순환하게 만들었어요. 공백의 순환, 빈터의 순환입니다.  
이 지옥과 헤어지는 기쁨이 바로 가장 큰 기쁨인 것을 계속 모르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메시아이신 분이 오셔서, 아버지께로 갈 때 이 세상을 떠나서 만났거든요.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떻게 떠났느냐. 학대받으면서 떠났어요. 이게 출애굽이에요. 출애굽. 그런데 그 출애굽 할 때 히브리인들은 가기 싫은데 억지로 나왔어. 억지로. 그 출애굽을 아는 사람은 그 당시에 모세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예언대로, 예언과 더불어, 함께 가느냐면, 마지막 천국을 가로막는 최후의 막인 커튼은 우리 자신입니다. 선악을 지니기 때문에, 본인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아는 양심이라는 것을 마저 포기하기가 겁이 나는 거예요.

 

지난 토요일 날 부산에 아주 대단한 연주회가 있어서 참석했는데  내가 앉은 장소가,  연주자와  1.5미터, 그 정도 떨어져  있었읍니다  1.5미터를 사이에 두고, 두 대의 피아노가 쾅 하고 연주를 하는데, 그 강한 음으로 말미암아 내 주체가 소멸하면서 갑자기 희열의 눈물이 빵하고 쏟아지는 거예요. 연주자는 전혀 몰라요. 연주자는 악보대로 한다고 보면서 정신없이 연주하는데, 강한 음이, 그 환경이 강하게 때려버리니까 내가 사라질 때의 그 희열, 기쁨, ‘나 울고 싶어라’가 아니라, 이거는 그 음이 때려주는 강력함이 울고 싶지 않더라도 내 의지하고 관계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기쁨의 눈물이에요. 기쁨의 눈물. 왜 기쁜지도 몰라요. 그냥 기쁨의 눈물이에요. 평소에 그 기쁨을 누가 막았습니까? 나의 윤리가 막은 거예요. 나의 윤리가, 나의 착함이 막은 거예요. 나의 의가 막은 거예요. 내 의보다 더 센 게 오게 되면, 우리는 아낌없이 내가 없어지고 사라지는 그 희열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상대로 인하여 내가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 백날 외치고, ‘주여’라고 백날 외치고, 뭐 예수고 삼위일체고 뭐 성경이 어떻다 해도, 나를 둘러싼 욕망으로부터 내 힘으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우리 대신 벗어날 수 없는 내 욕망을 주께서 홀로, 말씀을 우리에게 주어질 예언의 말씀을 거두어서, 예수님 홀로 자신의 그 말씀을 가지고, 죽음을 뚫고 나갑니다. 선악과를 뚫고 나갑니다. 선악과를 뚫어야 생명나무가 보이거든요.

홀로 생명나무 뚫어놓고, 생명나무 근처에 가서, 다시 말씀을 완성했다는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줘버려요. 선물로 주게 되면, 내 힘으로 뚫을 수 없었는데, 주께서 우리가 홀로 할 수 없는 것을 선물로, 이 짐승보다 못한 나에게 선물로 이렇게 주셨다는 것을 아셨을 때, 우리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함으로써 말씀이 오고, 다음으로 도착함으로써, 그 말씀 안에 거기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아울러 우리가 발견하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힘으로 탈피할 수 없는 나 자신과 자신의 욕망. 그런데 주께서 이런 인간도 천국에 이미 넣어주시고 다시 우리가 어떤 어설픈 존재인 것을 되돌아보면서, 주께만 감사하고 고마워하면서, 다시는 내 잘남과 내 의와 내 옳음과 착함을 주장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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