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으로 전국이 떠들썩 했다. 이제 늦은 이야기만, 이 사건(?)은 참 영적이다. 너무 육적이라 너무 영적이다.
나는 가수다. 이 말은 나는 나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정립한 가수라는 존재이고, 그것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나와 가수는 분리되지 않은 나 그대로 이다. 매우 안정적이다. 그런데 여기에 타인의 평가가 개입된다. 나는 가수라는 흔들림 없던 자존감에 타자가 끼어든 것이다. 그래서 어떤 가수(?)들은 이 프로그램 자체를 반대하기도 했다.
타인의 평가로 어떤 유명 가수가 탈락을 했다. 탈락? 그럼 나는 가수가 아니다가 되 버린다. 적어도 나는 탈락하지 않은 가수보다는 못한 가수가 되어 버린다. 나와 가수라는 개념이 비로소 분리되는 것이다. 탈락이 몰고온 것은 내가 어떻게 가수되었는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로 나를 끌어 들이는 것이다.
가수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가수를 좋아해 주는 펜들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상품이다. 나와 누군가의 관계에서 파생된다. 가수는 나는 가수다라고 선언할 문제가 처음부터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나는 성도다라는 주장은 어떨까? 나와 성도라는 말은 서로 원수지간이다. 나는 성도를 소유할 수 없다. 성도는 나를 죽이는 방식으로 세상을 산다. 왜 이런 격한 주장을 하는가.
성도가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새로 빚어졌다. 내가 장성해서, 내가 피와 결합해서 된 나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 주님의 피가 토해 낸 정말 기적같은 존재들이다. 처음부터 나를 죽이는 방식으로 이 땅에서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죽은 내가 새로 태어난 성도라고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비유하자면 이렇다.
병균이 우리 몸에 침투하면 우리 몸은 비상이 걸린다. 호르몬 분비가 달라지고 체온이 올라가고 식은 땀이 나기도 한다. 온 몸이 춥기도 하다. 백혈구들은 병균과 처절한 전투 끝에 죽기도 한다. 몸 전체가 병균에 반응한다. 이런 고통과 죽음 후에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항체'라는 것이다. 이 때 병균이 말하기를 "병균은 항체다." 라고 주장해 버린다면, 그 때문에 죽었던 백혈구들과 몸 전체에 퍼졌던 고통은 통채로 편집되어 버리고 만다. 병균은 항체가 결코 아니다. 병균이 항체임을 자랑한다는 것은 더더욱 배설물 같다.
나는 성도다 라는 주장이 마치 이와 같다. 나 때문에 죽으신 그 분의 고통과 눈물이 없다. 나만 남는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내가 덮썩 물고 있는 모습니다. 개가 뼈다귀를 물고 있는 것처럼.....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는 바울의 첫 마디는 부르심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부르심을 입은 바울. 부르심이 나를 덮고 있다. 부르신 분이 엄연히 따로 계신다. 성도는 바로 이런 자들이다. 성도라 부르심을 입어야 한다.(2절) 내가 성도됨을 소유할 수 없다. 나는 성도다라는 말은 병원균이 스스로는 항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항체가 바이러스를 죽이듯이 성도라는 부르심은 늘 날 노린다. 예수 안에 있는 나는 성도의 사냥감에 불과하다.
부르시는 분이 따로 계시기에, 내가 어떻게 나의 개성을 발휘해서 사도나 성도된 것이 아니기에, 오직 부르신 예수님의 말씀과 마음만 남게된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감사하다.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이 풍족하다, 너무나 견고하다, 흔들림이 없다. 너무 풍족하다, 결핍이 없다.(4절-8절). 결국 성도는 다 같은 말을 하고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 뿐이다(10절).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는 분쟁이 있었다. 세례라는 핑계로 나를 정립하고자 한 것이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를 통하여 나를 발견코자 한 것이다. 나는 아볼로에게 세례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성도다. 나는 게바에게 세례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성도다. 이런 식이다.
나는 성도다라는 주장이 불러오는 자연스런 폐단은 "그럼 너도 성도냐?"라고 묻는 것이다. 나는 성도를 이렇게 정립했는데 그 기준에 의하면 너는 성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를 부각시켜야 하겠기에 너와의 차별성에 눈독 들인다. 나의 기준에 부합해야 성도라는 주장이다. 여전히 나 때문에, 내가 죽인 피해자의 이름은 여전히 등장하지 않는다. 살인자의 이름만 득실된다.
사도바울은 1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보내심의 목적이 세례가 아닌란다. 복음이란다. 복음이 무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닌가! 복음은 성도를 창조한다. 그 성도는 내가 없다. 십자가만 남는다, 예수님의 몸만 남는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복음이 말의 지혜로는 전파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일까? 간단하다! 말의 지혜는 나는 성도다를 긍정해 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말의 지혜는 설득을 전제로 한다. 설득은 살아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복음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삶과 죽음이 서로 충돌하는 형형색색의 피 자욱이 바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와 사도가 여행하는 곳의 죽여주는 비경들이다.
나는 성도라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한다. 나는 성도에게 죽었다. 성도는 원래 준비되어 있었다. 나라는 재료 따윈 필요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죽임을 당했다고 주장하면서, 당신 처럼 그렇게 죽어서는 안된다고 유형화 할 수 있는가? 성도라면 이러 이러한 반응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당신처럼 용서받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주님의 피를 부정하는 것이다. 성도라면 최소한 이런 면을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자신이 새로 차린 예수라는 공장에서 성도를 제조하여 이마트에 진열하는 것이다. 그런 마트가 지금 얼마나 많은가? 무슨 무슨 교회 마트......
죽은 주제에, 성도라면 이렇게 죽어야 한다는 주장은 처음부터 죽기 싫다는 윽박지름 외엔 아무 것도 아니다.
윽박은 예수님의 부르심이 아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우리를 부르셨다, 하나님의 죽음으로의 초청이다.
성도는 바로 그 초청을 덧 입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