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누구를 보고 성도라고 하나(박윤진)

아빠와 함께 2013. 1. 27. 21:18

성도가 성도를 알아볼 수 있을까?

성도의 삶이란 무엇인가?

성령의 열매는 성도에게 반드시 맺힐까?

 

이런 질문들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성도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의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이중성이란 계시된 성도라는 부르심(A)과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예수 안으로 끌려 들어온 어떤 죄인(B), 이 두 가지 측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A만 성도입니까? 아니면 B가 성도입니까? 아니면, A, B 모두가 성도입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 안]의 세계(A)가 그 안으로 밀려들어온 대상들(B)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를 알면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으로 들어온 B의 실체를 인정하고 그 실체에게 가능성을 부여한다면 B도 성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안]의 세계가 그 안으로 들어온 B를 죽은 자로 여기고 오직 A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의 세계라면 B에게 굳이 성도라는 이름을 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없는 존재에게 이름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없는 존재라는 표현을 야고보서의 기록에서 찾는다면 ‘안개’라는 단어가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많죠? 흙, 마른 뼈,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존재 등등

 

그렇다면, 오직 A만을 성도라고 해야 할 것이고, B에게는 다른 이름이 필요할 것입니다. B의 다른 이름이 바로 ‘죄인’입니다. B를 죄인이라고 부를 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마도 사도바울의 서신에서 수도 없이 B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불렸다는 기억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복음 전파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칭찬하고 싶거나 같은 이유로 꼭 안부를 전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성도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곁가지를 칩니다.

 

예수 안의 세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죠. 인간은 누구든지 행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행위는 율법을 만나 예외없이 모두 죄로 밝혀지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행위를 만들어내는 주체(자기)를 부인하는 죽음의 힘이 작용합니다. 죽은 주체는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없고 그러므로 법도 소용없고 결국 죄도 지을 수 없게 됩니다. 주체와 행위와 법과 죄를 모두 피로 덮어버립니다. 오직 십자가의 사랑만이 주체가 되고 행위가 되고 법이 되어 죄까지 용서하는 의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하나님이 되고 의인이 되셔서 그 다 이루심을 온 천지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적용시키는 곳이 바로 [예수 안]이라는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이름까지 기록했던 그 사람들의 용도는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사도바울이 성도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면서 제시한 수많은 실생활의 모범 규준들을 그들은 모두 기억하고 생활에서 적용하는 성령의 열매의 소유자들이었을까요?

그들의 용도는 앞서 말씀드린 예수 안의 세계가 예수의 십자가 피만으로 충만하다는, 즉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새 언약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죄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도바울이 이름까지 적었던 그들은 죄인입니다. 성도 아닙니다. 성도라는 공간에서 그들의 주체는 박살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별도로 소유하고 있어 별도로 칭찬받고 챙길 만한 행위란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피가 무조건 그들을 성도라고 부른 것입니다.

 

단 한가지 조건,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성도라고 부르셨기에 [깜짝 성도]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되었다면 이미 그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다 이루어진 성령의 열매를 맛보게 됩니다. 어떻게요? 성령의 열매는 과연 무슨 맛일까요? 성령의 [나무]가 어떤 나무일지를 알면 쉽겠죠. 사과나무의 열매는 사과고, 배나무의 열매는 배이니까요.

성령의 나무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그 성령의 열매에서는 피맛이 납니다. 내 죄 용서하신 피 맛이 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니까 B가 맛보기에는 성령의 열매는 마치 죄처럼 피하고 싶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절제, 온유, 양선이라는 성령의 열매들이 모두 용서받은 피 맛이 납니다.

 

여기서 갈라짐이 생깁니다. 성도라는 부르심(A)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니라, 불려들어온 어떤 이(B)도 성도여서 그에게도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고 한다면, 그 주체성을 인정해 주어야 하고, 그 주체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십자가와는 단절된 성령의 열매에 대한 [별도의 의미]분석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절제가 무엇이지? 아, 이런 저런 행동이구나 의미 확인!

온유가 무엇이지? 아,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온유구나 하면서 개념 확립!

 

왜 그럴까요? 성령의 열매는 십자가에서 열려야 하는데 십자가 지신 분은 예수님 뿐이시고, 그 예수님은 철저히 나만 나다라고 주장하시고 다른 인간들은 모두 아예 없는 존재로 취급하시므로, 절제니 온유니 성령의 열매를 [내가] 소유하려면 십자가 말고, 또 다른 개념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도 예수다 혹은 나도 성령 받았다를 주장하면서 나에게 매몰된 예수, 내가 진 십자가, 나에게 사로잡힌 성령이 반드시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납니다.

 

마태복음 7장 16절~19절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 우느니라

 

B의 역할이 바로 찍혀 불에 던져질 나만의 성령의 열매를 죽을 때까지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농부되시는 분이 오셔서 진짜 열매를 보여주십니다. 십자가를 밝히 보여 주십니다.

 

“나는 성령의 열매인 온유가 복음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게 댓글 다는 것도 포함되는 줄 알았는데,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바로 온유 그 자체되심을 이제 알았네. 내가 생각했던 온유는 죄네. 이 죄도 용서하셨네. 십자가가 밝히 보이면, 샛별이 뜨면 속일 수가 없네......”

성도가 성도를 알아볼까요? 성도는 한 몸입니다. 알아보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갑돌이 성도가 주체가 되어 을순이 성도를 객체삼아 성경놓고 분석하면 성도라는 합격 통지서가 인쇄되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을 유도하고 그것의 실체를 체험하면서 경험을 통해 기억에 누적시킬 수 있을까요? 다음의 말씀이 그것을 거부합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배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중략)

 

[악인들의 대답]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게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44절)

 

의인이나 악인이나 주님의 처분 결과에 수긍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동일합니다. 둘 다 자기의 기억을 더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위목록을 꼼꼼히 들여다 볼 때 의인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는데 칭찬받고 있고, 악인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지 않았는데 영벌받고 있습니다.

이제 이들의 행위여부가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행위 누적분을 누가 잘 기억하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만일 위 본문이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서 섬기거나 구제하는 것이라는 임무를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라고 상상하고 내 주위를 살펴보고 그 중 하나를 지극히 작은 자로 삼고 행위에 나서는 순간, 그 사람은 십자가와는 이별하고 십자가와는 상관없는 나름대로의 행위 열매를 규정해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란 이런 의미이고, 영접한다는 것은 이런 행위 목록을 말하고 옥에 갇혀다는 것은 이러 저러한 상태이다 등등.

 

과연 누가 지극히 작은 자입니까? 과연 누가 예수님이 자신과 동일화한 사람입니까? 정답은 예수님만이 아신다 입니다. 예수님과 동일화된 그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인지 누가 결정합니까? 누구에게 물어봐야 합니까? 예수님 아닌가요? 그 예수님만 결정하시지요. 아주 주관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지극히 작은 자 찾기 놀이의 게임방법을 객관화하여 누가 누가 잘하나 경쟁을 붙이시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를 마음대로 결정해서, 마치 인간이 “이 사람이 바로 주님과 동일시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라고 하면 바로 그 지목한 봉사와 구제를 요리조리 피하시면서 부정에 부정을 쏟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던 의인에 포함된 자도, 악인에 포함된 자도 머리만 긁적거릴 수밖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을 확인하는 셈입니다.

 

여기 어디에 [박윤진]이라는 이름표가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창세전에 예비한 나라를 상속 받도록 내가 귀한 존재라구요? 창세 전이란 [나]라는 존재가 있지도 않은 때입니다. 아무 육체도 없었던 때입니다. 결국 창세전에 예비한 나라란 아무 육체도 그 나라를 상속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통하시면, 죄를 덮고 계신 진리가 거리마다에서 소리치는 것을 듣게끔 하십니다. 내 기억이 내 행위의 퇴적층이 거리마다 활개치는 그 소리사이에서 은밀하게 들려오는 십자가의 신음소리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그 소리 말입니다.

 

내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싶어 온유라는 단어를 제시하자마자 십자가는 그 단어를 품으면서 달콤한 나의 행위 누적분을 점검하던 나를 송두리째 폭파해 버립니다. 물론 온유라는 단어 또한 함께 날아가 버립니다. 내 기억 속에 내장되었던 온유의 그림, 그 이미지 전체가 죄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나의 전 존재가 죄인의 괴수로 들통하는 순간압니다. 그 순간 예수 안에서 통용되는 유일한 언어인 십자가라는 새로운 언어와 조우하게 됩니다.

 

내가 나의 노동력의 산물을 맛보는 것 보다 달콤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도 구원의 성패여부를 판단케 한다는 성령의 열매와 비교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십자가 안에서는 사도 바울처럼 나는 항상 주님을 핍박하는 자로서만 주님 앞에 서게 되고, 주님은 자신을 핍박한 그 죄인 중의 괴수를 자신의 살과 피로 먹이시면서 창세 전에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도록 조치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가 예수 안이며 예수 안에서는 모든 벽이 허물어지면서 피만, 그 사랑만 남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철학을 이야기 하고 누구는 설거지를 하면서 신세타령하더라도 성령이 “어때, 십자가만 밝히 보이지?”라고 알려주시면 그 누구의 철학도 그 누구의 신세타령도 남아나질 않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 지심만 더욱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박윤진 (IP:115.♡.249.117) 11-07-25 10:36 
제가 사용한 단어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A성도는 성도라는 부르심 자체를 말합니다.그리스도의 몸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상태를 말합니다. B는 죄인을 의미합니다.
깜짝성도란 B라는 죄인이 자신은 성도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십자가지신 예수님 때문에 성도되었음을 말합니다. 성도라는 그리스도 몸으로 들어오게 된 자들은 모두 자신을 성도삼으신 그 분의 사랑과 자신의 악마성으로 깜짝 놀라게 되어 있다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박윤진 (IP:210.♡.130.40) 11-07-25 15:41 
1. 하남석님께서 헷갈리셨다고 하니 저로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결국 십자가지신 예수님만 남고 다른 모든 것은 그 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입니다. 머리는 예수님, 몸은 성도로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귀하의 머리와 몸이 모두 한 몸인 것 처럼, 결국 모두 머리되신 예수님의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와 성도의 구별이라는 글에서 마지막에 그렸던 그림이 바로 그런 취지입니다.

2. 성령께서는 인간를 이용하시면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인간을 공격하시면서 성도됨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책망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역할은 "주님을 핍박하는 자"입니다.


주님을 핍박하는 자 ---> 성령 --->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심이 아니라
주님을 핍박하는 자 ---> 성령 ---> 십자가 --->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진 성령의 열매와 비교하게 하심  입니다.

성령께서 하남석 이라는 몸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남석 이라는 몸을 공격해서 성령의 열매를 이미 맺고 계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몸과 비교토록 인도하십니다.
 박윤진 (IP:210.♡.130.40) 11-07-25 16:56 
1.그럼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9가지열매는 어떻게 해석해야하나요?
---> 죄인으로서 나름 만들어낸 성령의 9가지 열매의 개념이 그리스도의 몸에 의해 완성된 성령의 열매의 의해서 소멸당합니다. 위 글에서는 이 부분을 아래와 같이 적었습니다.

[내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싶어 온유라는 단어를 제시하자마자 십자가는 그 단어를 품으면서 달콤한 나의 행위 누적분을 점검하던 나를 송두리째 폭파해 버립니다. 물론 온유라는 단어 또한 함께 날아가 버립니다. 내 기억 속에 내장되었던 온유의 그림, 그 이미지 전체가 죄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나의 전 존재가 죄인의 괴수로 들통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예수 안에서 통용되는 유일한 언어인 십자가라는 새로운 언어와 조우하게 됩니다.]
결국,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성령의 열매인 온유 그 자체 였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2. 고린도후서 4장 7절이 답변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보배를 담기 위한 질그릇이며, 보배를 드러내기 위한 달란트입니다. 이 보배를 질그릇에 담기게 하신 그 능력이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만 있습니다를 증거하기 위한 달란트입니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허리를 쑤셨던 날카로운 그 창 끝이 바로 저와 귀하의 달란트입니다.
 구득영 (IP:118.♡.160.197) 11-07-25 16:58 
이근호 목사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느낌입니다.
혹시 이 목사님의 박사교회 설교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ㅎㅎㅎ
 구득영 (IP:118.♡.160.197) 11-07-25 17:01 
참, 이번에 작성하신 표들은 하시는 일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요?
주님께서 다양하게 쓰시는 것 같군요.
덕분에 올 여름이 더 뜨겁습니다.
별로 멀리 떨어져있는 것 같지 않은데,
언제 오프라인으로 한번 만났으면 합니다.
성투 !!  ㅎㅎㅎ
 박윤진 (IP:210.♡.130.40) 11-07-25 17:21 
구득영 목사님, 저도 한번 뵙고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윤진 (IP:210.♡.130.40) 11-07-25 17:22 
십자가 피로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을 통해서만 영광 받으십니다.
 박윤진 (IP:210.♡.130.40) 11-07-25 17:42 
새로운 피조물이 주안에 있는 성도 맞습니다. 이 지구상의 성도님들이 아니구요....제 글 전체가 새로운 피조물과 지금 이 지구상의 성도님들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존재들과의 차이점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 지구상의 성도님들이라는 용어 속에도 성도가 등장하니 그 이름을 [죄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을 세상의 찌끼라고 하고 죄인중에 괴수라고 한 것 같이요. 그리고 그가 사용한 사도 혹은 성도라는 부르심이 어떤 분의 목소리인지 확인하는 과정 중에서 그러한 갈라짐이 드러납니다. 위의 글이 이런 취지입니다.
 박윤진 (IP:122.♡.53.57) 11-07-25 21:45 
죄인을 성도만드신 분이 따로 계십니다. 그 따로 계신 분이 창세 전에 예정된 것입니다. 성도는 창세전에 예정된 분과 한 영과 한 몸이 된 탓에 죄인의 괴수이지만 성도라는 이름을 덧입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저주받기로 확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세전 예정되신 그 분의 몸 덕분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미 구원받기로 예정된 것이 아니라, 구원하실 분이 예수님으로 창세전에 확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창조 전에 과연 어떤 피조물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창조주가 있지도 않은 피조물의 구원에 종속되어야 합니까? 이미 거룩한 성도를 왜 예수의 피로 다시 거룩하게 해 놓고 [새롭다]라고 해야 하나요?

창세전, 예정, 거룩, 성령, 성령의 열매 등 모든 언어들은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의 속성을 색칠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십자가 사건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들은 그 나무가 십자가 나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나면 그 뿐입니다.
성령의 열매에서 피 맛이 난다는 의미는 십자가 나무에서 절제 온유 양선 이라는 열매가 모두 피 속으로 매몰된다는 의미입니다.
 박윤진 (IP:122.♡.53.57) 11-07-25 21:52 
만일 성령의 9가지 열매의 개념을 다시 정립하고자 하면 반드시 십자가와는 결별하게 됩니다. 반드시 성도라는 주체가 고개를 들게 되고 그 주체가 행위를 뿜어내면서 일련의 법이 만들어 집니다. 그 후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기준이 아니라 그 일련의 법이 기준행세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건, 성령이건 새롭게 정립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종으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득영 (IP:203.♡.97.159) 11-07-25 23:23 
창세 전에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지 죄인을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죄인이 무슨 선택되고 말고 할 자격이나 있습니까?
다만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거, 십자가마을에서 줄기차게 하던 이야기입니다.
왜 처음 듣는지, 조금은 의아합니니다.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있는지,
그렇게 예수그리스도라고 했는데,
그게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해석을 함에서도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겁니다.
아니, 성경말씀이 그렇게 하시고 있다는 겁니다.
 구득영 (IP:203.♡.97.159) 11-07-25 23:51 
선악과 사건은 예수님의 선택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안타까워도 말입니다.
 박윤진 (IP:210.♡.130.40) 11-07-26 10:37 
제가 답변을 드리는 것보다 하남석님께 질문을 드리는 것이 이해에 훨씬 도움이 되실 듯...

창세 전 예정된 성도는 피조물입니까? 창조주입니까?
피조물이라면 [창세 전]이라는 영역을 어떻게 감당합니까?
창조주라면 죄까지 다스려야 하므로 십자가가 필요없지 않습니까?
 박윤진 (IP:210.♡.130.40) 11-07-26 11:00 
죄송합니다. 질문하신 것이 두 가지 정도 있으셨는데, 이것들은 일단 답변을 올립니다.
제가 드린 답변이 또한 제가 드린 질문의 대답도 되지만, 우선 제가 드린 질문에 답변을 스스로 해 보시면서 충돌하는 것들을 확인하시면 되겠네요.

1. 우리가 아담의 후손이기에 죄인으로 이세상에 온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늘 죄지고 삽니다. 그래도 창세전에 자기백성은 구분해두셨습니다.
---> 창세전 자기 백성을 두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안에서만 알죠! 즉 자기 백성이라는 것은 십자가 피의 백성이므로,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에는 이 세상에 없던 피조물입니다.
자기 백성 구원할 수단으로 십자가 피를 이해하는 것은 구원욕구의 배설에 불과합니다. 십자가 피가 목적이 되고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신이 죄인의 괴수요, 세상의 쓰레기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똥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 나마저 나로 만드신 그 은혜에 모든 공로로 돌리는 것이죠. 그러면 사도 바울은 창세전 자신이 예정되어 있음으로 여유만만했을까요? 절대 아니죠! 오히려 복음을 전한 뒤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 했죠. 왜 버려져요? 창세 전에 예정되어 있다는 확신이 누구보다 못해서였을까요? 아니죠. 그 십자가가 나를 구원할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우주의 중심이고 만물이 그를 위해서 창조되었고, 모든 만물이 그로 말이암았고, 그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 자체이며,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나같은 놈을 버려져도 할 말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고, 복음이 사도 바울을 겨냥하면서 예수 안의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래서 다른 복음은 어떤 내용을 품게 되는지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2.박윤진님이 주장하는 "한 영과 한 몸이 된" 시점이 창세후 도대체 언제냐 말입니다~
----> 십자가 사건 안에 창조와 종말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효력을 미치게 됩니다. 처음 창조와 마지막 종말이 십자가로 다시 해석당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창조주가 되시고 심판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창세전 자기백성이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것입니다. 직선적 시간관을 유지하시면서 성경을 읽으시면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의 때를 보면서 기뻤했다고 하니까 돌을 들어 죽이려고 했던 바리새인의 반응이 그대로 재현됩니다.
 박윤진 (IP:210.♡.130.40) 11-07-26 14:03 
엡 1: 4-7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 이 구절의 해석은 이미 제가 충분히 답변드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랑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즉 십자가 사건이 아주 여러번 잘 강조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박윤진 (IP:210.♡.130.40) 11-07-26 14:12 
십자가가 지신 예수님께서 왜 창조주와 동시에 심판주 되시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계신 말씀입니다. 태초에 택함받은 자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그렇게 조치하셨는지 아주 잘 보여주고 계시네요
 이근호 (IP:117.♡.132.36) 11-07-26 14:25 
엡 1:4-7의 말씀은 자기에게서 자기가 떨어져나가야 이해되는 말씀입니다. 역사가 만든 자기가 묵시로 만든 자기(=그리스도 몸)에 의해서 떨어져나가는 그 균열 지점에서 삽입되는 말씀입니다.
 박윤진 (IP:210.♡.130.40) 11-07-26 17:08 
1. 하남석 님의 주장
여기서 피의 목적이 뭡니까 =>하나님 영광받으심
하나님은 누그를 통해 영광받으시나요 => 주의 백성
주의 백성은 누구인가요 => 창세전 택한자
창세전 택한자는 어떻게 영광돌리나요 => 주안(십자가)에 있을때만
주안에는 누가 들여보내주나요 =>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보혈로..
십자가가 뭔가요 => 하나님이요 영광받으시기에 합당한 창조주 하니님입니다.
결국 돌고 돌아 하나님 예수님만 남는것입니다.
----> 님의 주장에 의하면 주님은 피만 흘리고 주의 백성 없으시면 일을 못하시는 구조입니다.
영광돌릴 피조물이 없으면 창조주가 영광받지 못한다는 구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물에게 종속되어 있고, 하나님 스스로 영광을 취할 수 없는 구조란 말입니다.

2. 하남석 님의 주장
그런데 그 묵시적 세계를 펼쳐보시기바랍니다. 그럼 역사의 세계가 보입니다.
역사의 세계를 둘둘말아 세우면 그게 묵시의세계 십자가가 되는것입니다.
또한 묵시의 세계를 펼치면 역사의 세계가 되는것입니다.
---> 계 3: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귀하는 묵시를 폈다, 접었다 하실 수 있군요.....
 구득영 (IP:118.♡.160.197) 11-07-26 17:18 
그렇게 선생이 하고 싶은가?
우리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찌른 것의 증인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너무 너무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가?
 박정우 (IP:121.♡.143.121) 11-07-26 20:44 
하남석....아....한글을 정말 잘 모르는가 보네...여긴 칼럼란 아래 댓글창이다....
니가 하고픈것 하려면 질문/답변 있잖아....그거 하라고 만들어 줘잖아....

오늘은 그래도 하나는 잘 뺏겻네...

"하나님께서 그 의의옷을보시고 의인이라하는겁니다"....몇일전엔 옷안에 있는 지를 보고 의인이라 칭해주신다고 하더니만
너의 짜깁기가 좀 좋아지긴 하네....

질문과 설명 부탁하다가...지가 가리키네...얼마나 하고 싶었을까...ㅋㅋ
얼마전 이목사님이 댓글로 너의 모습 달아줬잖아...가면 벗으니 가면 또 벗으니 가면...얼굴이 없는
뭐 할라고 이짓하냐?

생활인 하고프면 많잖아...니 똑똑함 찬양해줄곳도 꽤 있을텐데...니집에서 놀아야지

개는 짖는다...예수님 말고 다른게 들어오면....그래서 오늘도 짖는다...

우리교회는 저런거 들어오면 패서 쫓아내는데....어디 써 먹을때가 없으니....

PS 반말이 기분 나쁘면 니도 해라...
 박윤진 (IP:122.♡.53.57) 11-07-26 22:27 
1.그럼 영광받을 대상이 없는데 어떻게 영광받으시나요
  그의 백성 외에 영광받으실수있는 경우를 대보시기바랍니다.
--->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아버지 하나님과 연결된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창조주되심을 통해서 아버지의 실체가 분명해 집니다. 즉 영광의 하나님의 실체가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2. 인간외에 또 하나님께서 우리가 모르는 피조물을 외계에 만들어 놓으셨는지는...
---> 외계보다도 더 멀고도 비밀스러운곳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안] 입니다.

3. 묵시의 세계를 폈다접었다하는것은 제가 설명하기위한 표현이며
어디까지나 성경적인지는 아닌지는 저는 신학을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겟습니다.
---> 성경적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기준은 신학이 아니라, 십자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 그런데 이말씀은 묵시의 세계와 관련이 없는듯하는데요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 분이 바로 묵시 자체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만이 [가라사대] 즉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입니다.
 

5. 그리고 지금 촛점이 다른데로 흐릅니다. 저의 초점은 십자가인데
십자가안의 성도가 과연
1.창세전에 주께서 택한백성이냐
2.예정에 없었던 즉 계시되지 않았던자 죄인들이냐 입니다
----> 지금껏 이 이야기 하다가 제 말이 이해되며 성경적이며 묵시적 해석이라고 일방적으로 말씀하신 분이 바로 당신입니다. 그려면서 자신의 의견을 옹호하기 위해 묵시를 펴면 역사요 역사를 접으면 묵시라고 하신 분도 당신입니다. 그래서 제가 묵시는 그렇게 당신 마음대로 펼 수도 접을 수도 없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제시한 것이 계시록 다윗의 열쇠를 가지 분입니다. 그 분 자체가 묵시요, 그 분외 아무도 묵시의 세계를 펴거나 접을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초점이 다른 점으로 흐르고 있다고 하시니 말씀하신대로 전 한계가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저 보다 위대하신 스승을 모시기에 전 힘에 부칩니다. 질문이니 상담이니 하시면서 결국 저를 계속 가르치려 하시니 제가 송구합니다. 이제 가실 길을 가시면 되겠습니다. 박윤진에게 승리하셨다고 하셔도 좋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박윤진 (IP:122.♡.53.57) 11-07-26 22:31 
참, 제 해석은 묵시적 해석 아닙니다. 그냥 죄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다 그렇게 제 글을 읽고 계십니다.
 박윤진 (IP:122.♡.53.57) 11-07-26 22:35 
그것이 너무 고맙고 기뻐서 마음놓고 글을 올리는 것이구요......
 이미아 (IP:115.♡.194.214) 11-07-27 08:12 
하남석님 글이 지웠졌는데 박윤진 성도님께서 질문과 답변을 함께 올려 전해 주시는 수고로움으로 인해 뜬금없는 답변만 달랑 남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그 안에서 원문에 대한 취지를 한껏 밝혀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이한례 (IP:203.♡.39.20) 11-07-27 09:28 
하남석님의 질문내용과 그에 대한 박윤진 성도님의 답변은 [예수안 교회] '믿음의 글'에도 정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답변에 하나, 하나 정성껏 답변해 주신 글을 보고,주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는 글이 무엇인지 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