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성도를 알아볼 수 있을까?
성도의 삶이란 무엇인가?
성령의 열매는 성도에게 반드시 맺힐까?
이런 질문들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성도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의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이중성이란 계시된 성도라는 부르심(A)과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예수 안으로 끌려 들어온 어떤 죄인(B), 이 두 가지 측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A만 성도입니까? 아니면 B가 성도입니까? 아니면, A, B 모두가 성도입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 안]의 세계(A)가 그 안으로 밀려들어온 대상들(B)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를 알면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으로 들어온 B의 실체를 인정하고 그 실체에게 가능성을 부여한다면 B도 성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안]의 세계가 그 안으로 들어온 B를 죽은 자로 여기고 오직 A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의 세계라면 B에게 굳이 성도라는 이름을 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없는 존재에게 이름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없는 존재라는 표현을 야고보서의 기록에서 찾는다면 ‘안개’라는 단어가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많죠? 흙, 마른 뼈,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존재 등등
그렇다면, 오직 A만을 성도라고 해야 할 것이고, B에게는 다른 이름이 필요할 것입니다. B의 다른 이름이 바로 ‘죄인’입니다. B를 죄인이라고 부를 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마도 사도바울의 서신에서 수도 없이 B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불렸다는 기억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복음 전파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칭찬하고 싶거나 같은 이유로 꼭 안부를 전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성도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곁가지를 칩니다.
예수 안의 세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죠. 인간은 누구든지 행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행위는 율법을 만나 예외없이 모두 죄로 밝혀지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행위를 만들어내는 주체(자기)를 부인하는 죽음의 힘이 작용합니다. 죽은 주체는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없고 그러므로 법도 소용없고 결국 죄도 지을 수 없게 됩니다. 주체와 행위와 법과 죄를 모두 피로 덮어버립니다. 오직 십자가의 사랑만이 주체가 되고 행위가 되고 법이 되어 죄까지 용서하는 의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하나님이 되고 의인이 되셔서 그 다 이루심을 온 천지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적용시키는 곳이 바로 [예수 안]이라는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이름까지 기록했던 그 사람들의 용도는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사도바울이 성도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면서 제시한 수많은 실생활의 모범 규준들을 그들은 모두 기억하고 생활에서 적용하는 성령의 열매의 소유자들이었을까요?
그들의 용도는 앞서 말씀드린 예수 안의 세계가 예수의 십자가 피만으로 충만하다는, 즉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새 언약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죄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도바울이 이름까지 적었던 그들은 죄인입니다. 성도 아닙니다. 성도라는 공간에서 그들의 주체는 박살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별도로 소유하고 있어 별도로 칭찬받고 챙길 만한 행위란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피가 무조건 그들을 성도라고 부른 것입니다.
단 한가지 조건,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성도라고 부르셨기에 [깜짝 성도]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되었다면 이미 그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다 이루어진 성령의 열매를 맛보게 됩니다. 어떻게요? 성령의 열매는 과연 무슨 맛일까요? 성령의 [나무]가 어떤 나무일지를 알면 쉽겠죠. 사과나무의 열매는 사과고, 배나무의 열매는 배이니까요.
성령의 나무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그 성령의 열매에서는 피맛이 납니다. 내 죄 용서하신 피 맛이 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니까 B가 맛보기에는 성령의 열매는 마치 죄처럼 피하고 싶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절제, 온유, 양선이라는 성령의 열매들이 모두 용서받은 피 맛이 납니다.
여기서 갈라짐이 생깁니다. 성도라는 부르심(A)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니라, 불려들어온 어떤 이(B)도 성도여서 그에게도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고 한다면, 그 주체성을 인정해 주어야 하고, 그 주체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십자가와는 단절된 성령의 열매에 대한 [별도의 의미]분석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절제가 무엇이지? 아, 이런 저런 행동이구나 의미 확인!
온유가 무엇이지? 아,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온유구나 하면서 개념 확립!
왜 그럴까요? 성령의 열매는 십자가에서 열려야 하는데 십자가 지신 분은 예수님 뿐이시고, 그 예수님은 철저히 나만 나다라고 주장하시고 다른 인간들은 모두 아예 없는 존재로 취급하시므로, 절제니 온유니 성령의 열매를 [내가] 소유하려면 십자가 말고, 또 다른 개념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도 예수다 혹은 나도 성령 받았다를 주장하면서 나에게 매몰된 예수, 내가 진 십자가, 나에게 사로잡힌 성령이 반드시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납니다.
마태복음 7장 16절~19절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 우느니라
B의 역할이 바로 찍혀 불에 던져질 나만의 성령의 열매를 죽을 때까지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농부되시는 분이 오셔서 진짜 열매를 보여주십니다. 십자가를 밝히 보여 주십니다.
“나는 성령의 열매인 온유가 복음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게 댓글 다는 것도 포함되는 줄 알았는데,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바로 온유 그 자체되심을 이제 알았네. 내가 생각했던 온유는 죄네. 이 죄도 용서하셨네. 십자가가 밝히 보이면, 샛별이 뜨면 속일 수가 없네......”
성도가 성도를 알아볼까요? 성도는 한 몸입니다. 알아보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갑돌이 성도가 주체가 되어 을순이 성도를 객체삼아 성경놓고 분석하면 성도라는 합격 통지서가 인쇄되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을 유도하고 그것의 실체를 체험하면서 경험을 통해 기억에 누적시킬 수 있을까요? 다음의 말씀이 그것을 거부합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배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중략)
[악인들의 대답]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게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44절)
의인이나 악인이나 주님의 처분 결과에 수긍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동일합니다. 둘 다 자기의 기억을 더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위목록을 꼼꼼히 들여다 볼 때 의인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는데 칭찬받고 있고, 악인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지 않았는데 영벌받고 있습니다.
이제 이들의 행위여부가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행위 누적분을 누가 잘 기억하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만일 위 본문이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서 섬기거나 구제하는 것이라는 임무를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라고 상상하고 내 주위를 살펴보고 그 중 하나를 지극히 작은 자로 삼고 행위에 나서는 순간, 그 사람은 십자가와는 이별하고 십자가와는 상관없는 나름대로의 행위 열매를 규정해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란 이런 의미이고, 영접한다는 것은 이런 행위 목록을 말하고 옥에 갇혀다는 것은 이러 저러한 상태이다 등등.
과연 누가 지극히 작은 자입니까? 과연 누가 예수님이 자신과 동일화한 사람입니까? 정답은 예수님만이 아신다 입니다. 예수님과 동일화된 그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인지 누가 결정합니까? 누구에게 물어봐야 합니까? 예수님 아닌가요? 그 예수님만 결정하시지요. 아주 주관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지극히 작은 자 찾기 놀이의 게임방법을 객관화하여 누가 누가 잘하나 경쟁을 붙이시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를 마음대로 결정해서, 마치 인간이 “이 사람이 바로 주님과 동일시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라고 하면 바로 그 지목한 봉사와 구제를 요리조리 피하시면서 부정에 부정을 쏟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던 의인에 포함된 자도, 악인에 포함된 자도 머리만 긁적거릴 수밖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을 확인하는 셈입니다.
여기 어디에 [박윤진]이라는 이름표가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창세전에 예비한 나라를 상속 받도록 내가 귀한 존재라구요? 창세 전이란 [나]라는 존재가 있지도 않은 때입니다. 아무 육체도 없었던 때입니다. 결국 창세전에 예비한 나라란 아무 육체도 그 나라를 상속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통하시면, 죄를 덮고 계신 진리가 거리마다에서 소리치는 것을 듣게끔 하십니다. 내 기억이 내 행위의 퇴적층이 거리마다 활개치는 그 소리사이에서 은밀하게 들려오는 십자가의 신음소리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그 소리 말입니다.
내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싶어 온유라는 단어를 제시하자마자 십자가는 그 단어를 품으면서 달콤한 나의 행위 누적분을 점검하던 나를 송두리째 폭파해 버립니다. 물론 온유라는 단어 또한 함께 날아가 버립니다. 내 기억 속에 내장되었던 온유의 그림, 그 이미지 전체가 죄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나의 전 존재가 죄인의 괴수로 들통하는 순간압니다. 그 순간 예수 안에서 통용되는 유일한 언어인 십자가라는 새로운 언어와 조우하게 됩니다.
내가 나의 노동력의 산물을 맛보는 것 보다 달콤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도 구원의 성패여부를 판단케 한다는 성령의 열매와 비교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십자가 안에서는 사도 바울처럼 나는 항상 주님을 핍박하는 자로서만 주님 앞에 서게 되고, 주님은 자신을 핍박한 그 죄인 중의 괴수를 자신의 살과 피로 먹이시면서 창세 전에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도록 조치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가 예수 안이며 예수 안에서는 모든 벽이 허물어지면서 피만, 그 사랑만 남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철학을 이야기 하고 누구는 설거지를 하면서 신세타령하더라도 성령이 “어때, 십자가만 밝히 보이지?”라고 알려주시면 그 누구의 철학도 그 누구의 신세타령도 남아나질 않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 지심만 더욱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