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날 때 부터 죽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마치 인간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은 인간을 가지고 놀고 있는 죄의 움직임 때문입니다. 여기 손수건이 있습니다. 손수건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손수건이 놓여져 있는 바닥 자체가 흔들린다면 이에 따라 손수건도 움직이게 됩니다. 그렇다고 손수건을 살아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놓여져 있는 죄의 바닥은 욕망의 움직임에 따라 꿈틀꿈들 움직이게 되는데 그 움직임의 최종 도착지는 죽음입니다. 결국 인간은 욕망에 따라 죄 위에서 출렁거리다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죽은 존재였음을 확인하게 되는 하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죄는 본질이 죽음인 인간을 평생 속입니다. 살아있기에 계속 살아남으라고 말입니다. 이왕 존재하는 것 영생하라고 부추깁니다. 이 때 등장하는 것이 신, 즉 우상입니다. 오직 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 절대자! 이 때부터 인간은 자신이 만든 신과 황홀한 연극에 빠져듭니다. 신과 경쟁하다가 부탁하고, 원망하다가 찬양하고 충성을 맹셍하다가 배신하면서 자신의 욕망과 권태로움을 유감없이 분출합니다.
결국 인간에게 어떤 희망을 걸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쪽에서 어떤 조치를 해 주시지 않으면 인간 쪽에서는 그저 죄를 드러내기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성경을 보고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쪽에서 먼저 어떤 조치를 해 주셨다. 그러니까 이제 인간이 그 하나님의 배려에 반응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빛(진리, 말씀)이 하나일지라도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권리, 자격)이 오직 죄인에게만 있다고 하면 그 해석의 결과물은 각 죄인의 욕망에 의해 소화된 배설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세계에 말씀(빛)이 존재하는 방법은 육신의 세계를 해체시키는 방법뿐입니다. 육신의 세계에 그 본질인 죽음을 통보하는 방식으로만 말씀의 세계는 임재합니다. 이미 죽음의 세계에 갇혀 있음이 바로 요한복음 1장의 어두움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두움은 줄곧 깨닫지 못하고 세상은 참빛을 알지 못하고 빛의 자기 백성들은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때, 빛이 자신을 증거하는 방식, 영접하는 방식, 믿는 방식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의해 증거되는 빛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어둠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뿐이며, 이러한 관계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태어나게 됩니까?
빛이 어둠에게 자신의 빛됨을 스스로 증거하기 위해서는 자신 속에 있는 생명과 어둠의 실체인 죽음을 모두 지배하고 있음을 한꺼번에 보여줘야 하는데 이것을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될 때, 빛이 어둠이 될 때, 창조주가 피조물이 될 때, 사실상 하나님의 죽음 안에서만 비로소 육신, 어두움, 피조물이 말씀, 빛, 창조주를 한번이나마 취급할 수 있게 되고 , 그 취급하는 태도를 보면 육신의 세계의 실체를 공개할 수 있게 됩니다.
육신의 실체가 공개되면 비로소 이 세상에 자생적인 하나님의 자녀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가 태어났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인 것입니다.
자, 이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어떻게 취급했는지만 보면 되겠지요? 어떻게 취급했습니까? 그 때 등장하는 증거물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 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을 우리는 살인자 처럼 취급하였습니다. 세상에 살려두어서는 안될 위험한 인물로 취급함으로써 어두움의 실체인 죽음을 아주 잘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말씀세계의 생명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치로써 원수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녀를 출산하는 긍휼의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는 결코 태어날 수 없다고 하신 요한복음의 말씀이 십자가 위에서 그대로 성취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십자가 위에서만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죽음을 통하여서만 태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