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은 자
2026년 1월 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1:8-10
1:8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불결한 자 같이 되니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 그 적신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저가 탄식하며 물러가도다
1:9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결국을 생각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게 낮아져도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1:10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을 금하여 주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사오나 저희가 성소에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렸다고 낙담하는 것은 곧 성전이라는 사건과 자신의 마음 내부와 관련 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만 해당됩니다. 보통 인간들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 마음이 움추려듭니다. “그래 일은 터졌지만 내 마음은 내가 단속 잘하면 마음의 평온은 유지할 수 있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즉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여전히 내 마음은 내 관리하에 있음을 더욱 강화합니다. 이것은 독자적으로 살겠다고 다짐을 한 바가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전이 불 타고 그리고 그 성전 안으로 이방인들이 쳐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심적으로 괴로워합니다.
이렇게 성전이 없어지는 이유가 오늘 본문에서 불결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불결함이 발생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잠언 2:17에 보면, “그는 소시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짝’을 버리는 것이 ‘언약’을 버리는 바가 되도록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조치하셨습니다.
혼인이라는 것은 인간 바깥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을 가지고 인간의 내부 마음의 변화를 주시하고 살피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통해서 인간이 안고 있는 근원적인 부정성을 파악해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맞이한 것이 성전이 불탄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인간 내부에 여호와 하나님의 일방적 대쉬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요소가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 인간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얼마나 인간들이 독자적인 결정과 선택에 목말라했음을 드러내는 현상입니다. 인간들은 무조건 홀로 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이든 천사든 좋은 사람이든 그것을 고르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권한에서 자신이 누락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뭐든지 본인이 최종 결정권자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가 되었든 누가 되었든 자기에게 간섭하고 명령하면 거침없는 반발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더러움이 치마에 있다’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실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의 행운은 바로 거룩한 성전과 관련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망가지면서 가지게 된 겁니다.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가 성립되는 겁니다. 인간이 손댈 수 없는 부정성을 주님이 손대어주시는 겁니다.
인간이 거부하는 깊은 내부의 부정성은 인간의 예언과 말씀이 직접 침투하십니다. 지질학적인 탐구를 통해서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화산이 터지는 사건을 통해서 두 종류의 암석이 새롭게 생겨납니다. 하나는 화산암이요 다른 하나는 심성암입니다. 화산암은 마그마가 화산 밖으로 흘러 나와서 신속히 식은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심성암은 마그마가 화산 안에서 천천히 식은 암석을 말합니다. 구분하는 방법은 화산암은 결정이 촘촘하고 작고, 심성암은 결정이 큼직하다는 데 있습니다. 이 안과 밖이 서로 다른 것처럼, 인간은 인간의 신체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태와 내부 사태가 서로 다르면서 연관성을 가집니다.
이러한 화산의 폭발같은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홀로 두지 않고 찾아오십니다. 언약으로 찾아오십니다. 다시는 언약을 버리고 홀로 살 수 있게 하지 않을 막상한 화산 폭발같은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은 인간 내부를 냉정하게 가르킵니다.
로마서 7:13-17에 보면,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도 바울은 속시원하게 자신 내부를 공개합니다.
즉 ‘나’와 ‘죄’를 분리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더 이상 자신이 자기의 죄를 억누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방어를 통해서 통합된 자아로 타인들 앞과 하나님 앞에 그럴 사 해보이는 짓을 하지 못하게 된 형편이 되었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신약 시대의 상황입니다.
최종 화산인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린 겁니다. 오늘 예레미야애가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성전이 불타고 이방인들의 함부로 침입한 것에 대해서 ‘업신 여김’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인간의 평가를 의식한 겁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 나온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자신의 내부 실체를 해부해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마 10:6) 이것은 인간들이 먼저 하나님을 찾아서 얻은 결과가 아닙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 65:24) 홀로 살지 않기 위해 주님이 먼저 찾아오십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무화과 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8,14) )
더 이상 자기만의 삶이 아니라 사랑해주는 자와 함께 하는 것,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주의 백성입니다. 보고 싶은 자만을 바라보면 늘, 항상 빨리 합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아 8:14)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홀로 살지 않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강-예레미야애가 1장 8~10절(사랑받은 자)26010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1장 8~10절입니다. 구약성경 1144페이지입니다.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불결한 자 같이 되니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 그 적신을 보고 업신 여김이여 저가 탄식하며 물러가도다,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결국을 생각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게 낮아져도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을 금하여 주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사오나 저희가 성소에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아멘.
오늘 본문에 여러 가지의 단어가 연결, 연결됩니다. 하나는 “불결하다”라는 거, 이 불결하다는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에게만 나올 수 있는 고백이죠.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이 없는 자에게는 불결함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자기가 좀 잘못해도, 자기가 반성해서 다시는 나쁜 짓을 안 하면 되지요. ‘불결’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속, 자기 본질을 예루살렘이 불타는 것과 동반해서, 그 예루살렘 성전을 의지했던 나도 같이 불타야 한다는 지적 사항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 아이고, 훌륭하신 분이 죽다니, 안타깝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말했어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이건 너의 일이야. 네 일. 지금 네가 저주받는 거야. 내가 대신 저주받는다는 말은, 네가 저주받는다는 건데, 지금 엉뚱하게 남의 사정이나 걱정하고 있나. 네 사정이나 걱정하세요. 네 딸들이나 걱정하세요” 이건 남의 일 아니고, 나의 일 아니고, 너의 일도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
첫 번째가 “불결하다”라는 거고, 두 번째는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다”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건 예루살렘 성, 유다를 여성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오늘 본문 8절에, “업신여긴다” 그리고 9절에는 그걸 “낮아졌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게 8절에 치마와 관련되어 있고요, 그래서 마지막 세 번째가 “그들의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인이 들어왔다”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서로 이렇게 연결돼 있어요. 따라서 이 이야기 구조가 연결이 잘 안됩니다. 여기 얼른 보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지금 예언이, 물론 예언이니까 어렵겠지만, 하나님의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이 무슨 말을 하는지가 상당히 난감하게 돼요. 그 난감한 것을 한꺼번에 푸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바깥에 역사적으로 일어난 바깥 상황과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연루된 인간의, 그 성도의 내부 마음 상태를 서로 연결 짓는 거예요.
바깥에 일어난 상황에 대해서 바깥에 난리가 나도, ‘내 마음만 평안하면 되지’라는 이런 관계가 되도록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냥 두지를 않는 거예요. 성전이 불타고,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할 때,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묻는 거예요. “그래 이렇게 타고 나니, 네 마음이 어때?”라고 묻는 거예요. 주님께서 일을 벌이고, 그 벌어진 일에 대해서 우리에게 질문을 통해서 우리의 내부로 다가선다는 말은, 이제는 이 내부가 바뀔 차례라는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십자가 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네 안속까지 들어올 때, 너는 이제 내 백성이라는 이 말입니다. 이 말은 인간들이 바깥 상황에 대해서, 인간들의 마음 상태는 자꾸 이렇게 방어 체제를 갖고 있어요. 바깥 상황이 우리 내부를 건드리는 것은 생각 못 하고, ‘뭐 버티지. 버티면 되지’라는 식으로요.
얼마 전에도, 대기업에 다니는 한 직원이 무슨 속상한 게 있어서, 두 딸 죽이고 아내 죽이고 자기도 죽고 했는데, 뭐 나라가 망했습니까? 대통령이 미국에 붙잡혀 갔습니까? 그런 거 아니잖아요. 도대체 생각해 봐요. 우리가 아는 바깥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자기가 온 집안을, 그것도 아무런 상관없는 자기 두 딸까지 다 죽여버리고, 온 식구가 그렇게 죽어야 할 무슨 일이, 그만한 의미 있는 일이 있었는가? 제3자 입장에서는 도대체 알 수가 없어요.
알 수 없는 정도가 아니고, 그렇게 심각한 일이, 목숨을 잃어버려야 속이 시원할 정도로 그렇게 대단한 일이 뭐였을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여러분이 이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복권을 샀는데, 동전을 긁어서 결과가 나오는 복권을 샀다 합시다. 복권을 샀는데 꽝이 되었어요. 복권 얻었는데, 그것도 뭐 식당에서 홍보용으로 주는 복권이 꽝이 됐다고 해서, 그게 온 식구가 집단 자살할 만한 일입니까?
아니죠. 지금 하나님의 일이 어떤 일이냐 하면, 바깥에 있는 역사적 상황을 인간이 자꾸 방어하고 도망을 치고 숨으니까, 그 도망치는 인간의 마음을 따라잡아서, “기다려! 기다려! 바깥 상황과 연계해서 내가 너까지 볼 거야. 바깥 상황이 꽝이지? 네 마음이 꽝이야”라는 이런 뜻이에요. 네 마음이 꽝이다. 이 말은 모든 인간은 꽝으로 덮여 있는 긁어보는 복권 입장이, 그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이기도 하고.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나 예레미야애가를 보면서 ‘이거는 사건이네. 바깥 사건이네. 옛날에 이스라엘 유대인에게 이러한 힘든 일이 있었네. 그래서? 오늘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21세기를 사는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라고 하면서 치워버리는 거예요.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우리를 대표해서 어떤 사건을 만난 거죠.
여러분들이 돌, 암석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 특히 지질학을 하는 학자들이 유념하는 것은 화산이 터지고 난 뒤에 생긴 암석의 종류를 나누는 데 좀 더 집중해요. 그게 뭐냐 하면, 화산암(火山岩)과 심성암(深成岩)으로 일단은 나눠봅시다. 화산암이라 하는 것은 화산이 마그마가 터지고 난 뒤에, 화산 사건이죠, 사건 터지고 난 뒤에, 바깥에서 빨리 식어서 결정체가 작아지는 것을 화산암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화산 내부에서 마그마가 오랫동안 굳어져서 결정체가 큰 것을, 심성, 깊은 심성, 이건 마음 심성은 아니지만, 안에 큰 결정체로 있는 것을 심성암이라고 이야기해요. 현무암(玄武岩)이라 하는 것도 바깥에 있는 화산암의 종류인데, 이렇게 해서 지질학자들은 바깥에 있는 암석과 안에서 결정체 큰 심성암과 이렇게 구분을 짓는 겁니다.
구분을 짓는데, 그 구분을 짓는 것을 연결하는 방법은 뭐냐. 화산이 터졌다는 사건으로 안과 밖을 이렇게 연계를 시킵니다. 오늘 설교의 결론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난로 피워놓고, 잠도 막 오고 하니까 혹시 또 놓칠까 싶어서, 내가 성질 급해서 결론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혼자 살지 마세요” 이거예요. 혼자 살지 마세요. 지금 사달 난 게 뭐냐 하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자 살고 싶어서 우상을 섬긴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이 왜? 내 인생인데 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관여해? 싫어!! 그런데 다른 민족 보니까 신을 누가 고르느냐. 본인들이 신을 고르는 거예요. 저게 내 마음, 내 심성의 본성에 맞다는 거예요. 인간의 심성은 신이 되든 누가 되든 내 마음을 누가 간섭하게 되면 울컥하고 분노가 일어나게 돼 있습니다. 미워하게 돼 있어요. 인간의 심성 자체가. 이거는 ‘나쁘다, 좋다’라는 문제가 아니고 타고난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여보, 좀 교회 갑시다’라고 하면, ‘내가 알아서 한다’라는 뭐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잖아요. ‘교회 가든 뭐든,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네가 좋다고 나한테 권하지 마. 짜증 나. 점점 그러면 내가 더 안 가는 수가 있어. 내 인생이야. 내가 알아서 해’라는 이걸 이방인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되는데, 사실은 유대인과 이스라엘이 근본적으로 이것이 마그마처럼, 용암처럼 이게 들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걸 확 ‘디비버린다’ 경상도 말로 확 디비버려야 하는데, 이게 화산 분출이 없으면, 화산 분출되지 아니하면, 이걸 꼭꼭 숨겨서, 이 마음을 ‘나는 사람이고 뭐고 나는 내 마음대로 한다’라는 이게 안 들키기 위해서 꼬깃꼬깃 이걸 자기가 압력을 눌러서, 이걸 계속 누르게 돼 있어요. 그 누르는 것을, 누른다는 그 압력을 발견한 사람이 정신 분석가들이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정신병은 억압에서 나온다. 억압에서 나온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 내가 사태 추이를 파악해서, 내가 내 마음을 보고 ‘가만히 있어. 조용히 해. 그때는 말을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이렇게 자꾸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내가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서, 자기 내부를 무리하게 자꾸 압축을 가하는 거예요.
이게 힘든 거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너희들이 참 힘들게 살고 있다. 힘들게 살고 있다. 공천받으면서 돈 2천만 원 받았다고 왜 말을 못 해? 그냥 터뜨려. 너는 안 되지? 내가 터뜨려 줄게’ 주께서 확 뒤집어버리는 겁니다. 화산을 터뜨려 버려요. 화산을 터뜨리면서, 그게 뭐냐 하면, 내 속에 있는 부정성을, 우리가 건드리기 싫어하는 부정성, 나를 부정하게 생각하는 부정성을 차라리 주님께서 고름을 탁 터뜨리듯이 터뜨려 주는 이것을,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주께서 새로운 사랑의 방식으로 찾아오는 것이 신약 성경입니다.
새로운 사랑의 방식. 사랑은 뭐냐? 사랑이 없는 것은 짝이 없는 거고, 사랑이 있다는 것은 짝이 생긴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잠언서 2장 17절에 이런 의미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소시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소시의 짝을 버린다. 누구하고 결혼했다는 사건이죠.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둘이 사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외부 사건, 내가 누구와 혼인했다는 외부 사건이 나의 내부를 건드리기 위한 하나님 작업의 출발이에요. 계시예요.
네가 아내를 맞이하든지, 네가 남편을 맞이하든지, 네 마음의 본심으로 연결됐냐, 언약으로 연결됐냐를 묻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말려들었어요. 하나님께 말려든 거예요. 말려드는 동시에 인간이 본인은 몰랐던 자기의 부정성을, 이제는 친이 친절하게도 언약에 와서 이걸, 이 고름막을 째 주시는 거예요. 얼마나 그 고름막을 째는 게 시원한지, 사도바울이 감탄하면서 그 찢어주시는 시원함을, 수술실에서 하나님이 째 주시는 기쁨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로마서 7장 14~17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여러분 표정 보면 뭐 시원한 느낌이 안 들죠. “이거는 내가 한 게 아니야. 내 속에 죄가 한 거야” 죄가 하는 거를 들통나도록 하는 거는 누구야? “율법이 한 거야. 하나님의 말씀이 와서 쨌어” 그동안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내가 지금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최선을 다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만 알아주세요. 나도 그다지 나쁜 인간은 아닙니다. 내가 인생 실패할 만큼 막 되먹은 존재 아니에요. 나 쓰레기 아닙니다’라는 이런 식으로 그렇게 자기를 방어하려고 애쓰다가, 성령을 통해서 율법이 너한테 이러한 일을 한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려줬어요.
성령 받은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성령 받은 자에게 나오는, 터져 나오는 그 시원한 거, 칠성사이다처럼 팍 터지는 것이, 이거는 나와 죄를 구분하는 거예요. 구분해요. 차이 두는 거예요. 내가 한 게 아니고 죄가 했잖아. 여러분 속을 들여다보면서 ‘네가 했지? 그렇지? 내가 한 게 아니고 네가 했잖아’라고 하면, 주변에서 ‘너 지금 누구 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너는 몰라도 돼’
모든 인간이 진지하게 그런 고백을 해야 하는데, 이게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안 믿는 사람들은, 성령 없는 사람들은, ‘이거 핑계 대는 거 봐라. 핑계 대는 거 봐. 이거는 슬슬 발 빼려고 이게 또 고단위 기술을 발휘하고 있네’라고 이런 식으로 욕하든 말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스스로 내 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공작을 하는 게 아니고, 말씀이 살아서 나를 수술대에 눕혀서, 현실 속에 있는 말씀이 사건화되어서, 그 사건으로 인하여 이거는 내가 한 게 아니라고 이야기해 주세요.
너 거짓말했지? ‘아니,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고, 거짓말하는 죄가 나를 통해서 거짓말이 나왔어’라고 이야기해 주세요. 듣는 육의 사람, 못 알아듣습니다. 이게 왜 이리 복잡해? 그 주어를, 왜 행동의 주어가 네가 안 되고, 주어를 왜 딴 데로 미루는 거야? 있지도 않은 죄에게 왜 미루는 거야? 주어하고 너하고 딱 붙여! ‘아니, 아니야. 붙이는 거 아니야!’라고 분리를 시킨 거예요. 주께서 분리를 시킨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내 죄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애초부터, NEVER! 전혀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이게 시원합니까? 내 죄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어요. 뭐, 회개하라, 반성하라 교회에서 난리도 아니죠. 사건은 우리보다 셉니다. 터져버린 사건에 의해서, 바깥에 있던 사건의 흔적이 화산암, 속에 생기는 변화가 심성암. 바깥에 있는 남에 대한 피해, 내 안에는 죄의 결정체, 그 가운데서 ‘나’라는 것은 사건에 의해서 날아가 버렸어요.
사건으로 ‘나’가 두 조각 나버렸어요. 나는 이미 율법 안에 나로 포획돼 있어요. 율법이 다루는, 말씀이 다루는 나로. 단독적으로 내가 따로 독립하면 안 됩니다. 말씀이 나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로 결정 나는 거. 너의 죄, 너의 부정성마저 나는 그것을 사용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분출을 증명해 보겠다는 이게 주님의 긍정함입니다. 성전은 누가 만드느냐?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성전을 누가 파괴했습니까? 하나님이 파괴했습니다. 그러면 그 중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냐? 들러리죠. 아무것도 아니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이 성전이 있으므로 우리가 살고’라는 괜한 환상을 심어놓은 거예요. 그래서 그 환상의 여파가 뭐냐. 우리가 이제는 업신여김을 당했다는 거예요. 참 하나님 보시기에 “이거였네! 이거였어”
결국 네가 행동을 자꾸 너의 내부에 죄를 안 들키려고 감추는 식으로 한 이유는, 남과 비교해서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을 죽는 것보다도 싫어해서, 온 식구가 집단 자살을 하는 이유가 업신여김을 받지 않기 위해서, 수치를 당하기 싫어서 하는 그게, 악마의 자기 의 때문에 이런 사달을 냈다 이 말이죠. 네가 왜 이게 잘리지 않느냐, 분리되지 않느냐는 이 말이죠.
육과 영으로, 인간의 자아는 육과 영으로 분리돼야 하는데, 분리되지 않고 계속 마귀가 시킨 대로 그걸 통합해서 ‘내가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내가 남들 앞에서 누가 봐도 업신여김을 받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로 되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죠. 어떤 그 트로트 가수는 방송에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이제부터 부모를 위해서 한 달에 천만 원씩 용돈 드리겠습니다’
내가 속으로, 저 인간은 네가 천만 원 번다면, 너 천만 원 벌기 위해서 피해 보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해요. 그게 마귀의 화신 아닙니까? ‘나는 업신여김을 받아도 마땅하오’라는 그런 고백을 해야 할 텐데, 그게 아니고 ‘나는 무시당하고는 못 삽니다’라는 그걸 공개적으로 해요. 마지막으로 방법이 있어요. 이 방법이 치마와 관련돼 있는데, 이미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의 아내로 삼았는데, 이스라엘이 우상 섬김으로써 독자적으로 자기 애인을 따로 골랐던 게 문제가 돼요.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네가 짝을 버렸다” 다른 말로 하면 “나와 맺은 언약을 버렸다” 사랑의 언약을 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대한 대책은 간단하죠. 다시 주님이 스스로 사랑이 되어서, 신랑이 되어서 우리를 불러주시면 되는 겁니다. 이사야 65장의 예언은 바로 그 내용입니다. 1절에 보면 “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라고 되어있어요.
이것은 인간이 주님을 먼저 부르는 것처럼 되지만, 24절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고,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우리가 주님을 부르기 전에 주님이 먼저 왔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너는 완전히 잘렸어’라는 것이 전제될 때, ‘십자가로 말미암아 잘렸는데 나를 잘라낸 십자가가 왜 그렇게 좋아’라고 이렇게 되면, 이거는 주님 쪽에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를 다시 찾아와서 잃어버린 양으로 되찾는 작업이라고 보시면 되는 거예요.
아가 2장 8절에 보면, 아가라는 예언은 대상이 있어야 돼요. 말씀은 대상이 있단 말이죠. 그 대상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성립되는데, 그냥 불러주지 않고 이렇게 해요.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구나” 이거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 먹고 난 뒤에, 그때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없어요.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어디 숨었니?”라고 이렇게 하지 않고 그냥 “아담아”라고 불렀어요.
여기에 언약이 추가됨으로써, 여기에 사랑이 더 추가돼서 우리를 불러주는 겁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구나” 그다음에 뭐냐, “빨리 오라(빨리 넘어 오는구나)” “노루와도 같이 어린 사슴과도 같이, 빨리 오라” 산 넘고 물 건너서. “내가 너를 부른다” 불러서 어디 가자는 말입니까? 13절에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함께!!
아가 8장 14절에는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천천히 오지 말고, 온갖 구경 하지 말고, 나만 보고 빨리 달려오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이걸 카톡에 이름 대신에 자기를 박아놓은 사람이 있어요. 이게 누구인지 찾아보려고 하면, 자연적으로 성경 아가 8장 14절을 경유해서 그 사람과 만나야 해요.
누구라고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분의 생각은 이래요. 내가 그분의 생각을 너무 오버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추접한 이름은 내가 싫고, 말씀으로 내 이름을 대체하고 싶다. 말씀으로’ 그러면 여러분의 그 이름 자리에다가, 여러분의 성경 구절을 뭐로 넣으면 좋겠습니까? 간단하게 해서, “주님께 사랑받은 자” 다시 말해서, 짝이 생겼는데, 그 짝은 내 쪽에서 찾은 짝이 아니고, 맨날 내 부정성을 감춰주고 위로하는 그런 짝 말고, 나를 뒤집어버리는 짝.
내가 얼마나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내가 업신여김을 받는 것은 집안 자살하는 것보다 더 힘들고, 나는 남한테 수치스럽고 지는 건 싫어한다는 이 부정성을 완전히 들춰내어서, 그다음에 이거는 내가 아니고, 주께서 지정한 내가 아니고, 내 속에 죄가 한 것이라고 성령 받은 자만이 신나게 고백합니다. “오라 내가 곤고한 사람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게 평안을, 이김을 주셨다”라는 로마서 7장 내용입니다.
24~25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는 감사를 실어 나르는, 영원히 함께 할 때까지 실어 나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하나님을 속이고 또 우리 자신을 속여야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다 아시는데,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근사하게 보려는 이 시도가 우상이고 짝을 잃는 독자적인 그런 발상에서 나온 마귀 짓인 것을, 이제는 들통 당한 것을 도리어 주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