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포기
2025년 12월 2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1:1-3
1:1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1:2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1:3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저가 열방에 거하여 평강을 얻지 못함이여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인간에게 있어 과연 ‘슬프다’로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을까요? 창세기 1:1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조된 그대로 있으면 슬퍼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예레미야애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무엇을 때문에 울 일이 생긴 겁니까?
인간에게 자율성이 생겨버린 겁니다. 내가 원하는 나를 내가 제조하고 꾸며나가려고 한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에덴에서 추방되고 난 뒤 거주하게 된 땅은 그냥 빈 땅이 아니라 저주로 가득 찬 땅이었습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8-19)
왜 땅 온 천지가 저주가 가득할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미 자율성이 장착되었음을 감안하신 조치입니다. 일체의 자율성을 인정해주시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슬픕니다. 인간이 슬픈 이유는, 악마로부터 물러 받은 자아 내부로 인해 자아 구성에 있어 자연세계가 협조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 내부는 늘 비워있습니다.
문제는 자아입니다. 자아 자체가 이질적입니다. 악마로부터 왔습니다. 따라서 자아를 부인하게 되면 자아도 슬퍼할 리도 없습니다. 문제는 무슨 수로 자아를 부정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미 모든 인간은 종이 되었습니다. ‘죄의 종’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즉 인간은 악마와 붙어살면서 단 한 번도 종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출애굽의 취지가 히브리인들의 종된 처지와 관련 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해도 종의 입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히브리인들은 종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슬퍼하는 이유는 예루살렘 성의 황폐함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종에서 벗어나는 방식은 ‘두 번의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기존 세계에서 통용되는 의미체계로 자아의 허함을 메우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어릴 때부터 신체적인 유쾌와 불쾌함에 좌우되면서 자아를 조절해 왔습니다. 어린시절에는 가정이나 식구들이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채워주었습니다.
하지만 자아가 커가고 삶의 범위가 사회적으로 커져가면서 자기가 속해 있는 요구사항으로서 자기 내부의 허함을 다 메워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일상 생활 자체의 바닥이 늘 슬픔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음은 슬픔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꾸역구역 간뎌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울고 싶을 때, 차라리 울면 되는데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가 울보보다 대장부를 원하기에 안 슬픈 체하면서 억지로 슬픔을 참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에게 애도하는 기회를 자꾸만 놓치게 되면서 우울 증상을 정신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뇌신경적인 결함의 경우는 제외하고)
자신이 허약함과 못남은 본인이 인정하면 될텐데 남들이 자신을 깔보게 될까봐 허세를 부리는데 이렇게 되면 주변 사람들의 관계 유지에 정신적으로 보다 많은 정성와 에너지가 소비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악마의 종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세상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율법 앞에서 자신의 결핍을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아가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는 성전의 부재로 인하여 결핍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전체 유대 민족으로 대변해서 슬퍼합니다. 신약에서는 율법으로 장착된 자아는 또 하나의 포기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과 더불어 있는 자신을 십자가 앞에서 율법과 더불어 포기하는 겁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더욱 더 죄인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 존재임을 충분히 인정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0,23)
즉 슬픔의 원인이 되는 자아를 십자가에 넘기게 되면 자신이 원인이 되어 죄의 종에서 벗어날 길은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그 대신 갈라디아서 4:19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성도는 성령에 의해서 안에 그리스도가 잉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본인의 시도에 의해서 새로운 자아가 되는 경우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자아는 성경 말씀대로 실행에 옮긴다고 해서 자아나 자율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얽히고 설킨 관계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자존심은 혼자서 만들어내고 형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들은 자식을 갖게 되면 자신의 자아를 자식의 자아로 넘기게 됩니다. 즉 본인이 잘 되는 것보다 자식이 잘되는 것을 더 보람 있게 여깁니다. 반대로 자신의 불행보다 자식의 불행을 더 가슴 아프게 여깁니다. 그래서 자식에게 기대를 걸고 희망을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시도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간파당했습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치는 것이 아니라 맏이를 칩니다. 이것은 부모보다 자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 달성이 보다 구체화되는 과정을 형성됨을 알려주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하여 그 앞선 언약에 동원인 인물들이 이 자손의 혜택을 입고 다시는 울 일이 없는 세계에 진입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최고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우리의 자율성으로 놔 버릴 수 있는 분이 계심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강-예레미야애가 1장 1~3절(두 가지 포기)25122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1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1143페이지입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저가 열방에 거하여 평강을 얻지 못함이여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아멘.
포로 잡혀갔다는 것은 그냥 아무 할 일도 없이 포로 잡혀있는 게 아닙니다. 포로 잡아간 사람들은 포로를 그냥 놀리지 않아요. 음식도 적게 주고 모든 주거 환경도 나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마냥 놀리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노동을 탈취할 대로 다 뽑아내고 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을 히브리인들이 어디서 이미 경험했느냐 하면, 출애굽 되기 직전에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히브리인들은 종이 되었어요.
종이 되었던 곳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레미야애가 본문에 보면, 도로 종이 되었고, 노예가 되었습니다. 종이나 노예는 특징이 있어요. 어떤 특징이냐 하면, 본인에게 어떠한 자율성이 없다는 겁니다. 본인에게. 내 인생을 내가 결정하고, 힘들든지 어렵든지 간에 그만한 모든 대가가 나에게 돌아오면 괜찮아요.
어렵지만 그래도 열심히 사는 보람은 있겠는데, 그게 아니고, 고생과 일은 내가 했는데, 남이 나를 이용해서, 일도 하지 않은 그들이 윤택해지고 그들이 배를 불리는데,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이럴 때, 그 서러움이 극에 달합니다. 그래서 ‘나도 직장 때리치고 자영업 할란다’라는 이유가 바로 거기서 비롯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율적으로, 자기 인생을 개척할 권리가 있다고, 이것이 인간으로서는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도 그렇고, 오늘날 우리도 출발점이 잘못되어있는 거예요. 인간의 자율성은 마귀가 심어준 것이지, 자율성은 인간에게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이 만들어진 장소가 에덴동산이에요.
에덴동산에서의 주도권은 “선악을 아는 나무 실과를 따먹지 말라. 생명나무는 따 먹어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범죄 하기 전에도 후에도, 주도권을 가질 자격도 없고 가질만한 존재가 된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주도권이 어디에 있느냐. 주도권은 마귀에게 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신약에 와서 사도바울은 한결같이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악마의 종, 죄의 노예, 죄의 종이 되었다고 로마서 6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죄의 종에서 벗어나면, 그다음에는 자유인이 되지 않겠는가. 로마서 6장에서, 사도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죄의 종에서 벗어나는 자는 의의 종이 되었다”라고 이야기해요. 종은 한결같이 자율권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한결같이 자율권을 가질 필요가 없는 존재로 하나님께서는 계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없어야 할 자율권을 왜 마귀는 줘서, 인간으로 하여금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세상에 자연환경, 사는 환경이 참으로 힘들다. 아, 애통하다’라고 하게 하죠. 오늘 본문 1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슬프다”라고 되어 있죠?
창세기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라고 되어 있죠. 오늘 예레미야애가 처음에는 “슬프다”라고 이렇게 나와요. 슬퍼야 합니까, 아니면 태초에 창조한 그대로 있어야 합니까? 둘 중에 어느 것이 맞는지를 생각해야 해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으면, 그 창조한 대로 있으면 슬퍼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슬프냐?
여기에 창조 조건에 안 맞는, 창조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이질적이고 질 나쁜 어떤 요소가 인간에게 스며들었기 때문에, 예레미야애가에서는 슬프다고 나왔습니다. 왜 슬프냐. 자아 때문에 슬퍼요. 인간에게는 자아, ‘나’라는 의식이 있어서, 이게 슬픕니다. ‘나’라는 의식이 뭐냐. 이 몸은 하나님 건데, 여기에 자아를 악마가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면 이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물체가 있는데, 거기에 돌을 매달면, 이 물체가 물 위로 가겠습니까, 아래로 가겠습니까? 무거운 돌 때문에, 아래로 가라앉겠지요. 위로 올라가지 않겠지요? 이게 바로 추락이고, 이게 바로 타락입니다. 몸에다가 악마가 자신의 자아를 돌처럼 넣어놓고 꽁꽁 묶어서, 악마의 자아성을 인간 육체에 매달아버리니까, 인간은 마귀 운명과 팔자와 같이 일치되어서 점점 가라앉는 거예요.
이미 들어온 자아, ‘나’라는 의식과 하나님이 저주를 내렸던 이 땅, 낙원에서 추방된 바깥에 토지의 저주스러움과 맞닥뜨리면서 살려고 애를 쓰다 보니, 이 자아 때문에 사는 것이 수월하지 않잖아요. 그러면 그냥 흙으로 돌아가면 될 텐데, 이 자아가 뭐라고 고집부리느냐 하면, 망해도 나의 가치, 체면은 지켜야 하겠다는 이 마귀가 준 고집 같은 것이 있어서, ‘아이고, 흙으로 돌아가면 돌아가지 뭐’라고 할 거 같으면 자아가 방해를 못 하는데, 인간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뭐, ‘못 먹어도 고(Go!)’라는 유명한 말이 있듯이, 꼴에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뭔가 일이 꼬이면 전부 남 탓이에요. 남 탓.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라는 남 탓. 잘 되면 누구 탓인가. 다 자기 탓이에요. 그래서 어떤 식당에서는 아마도 그런 것을 예방하려는 차원에서인지, 이런 광고문구를 봤습니다. ‘자주 오시면 물려요.(싫증나요) 가끔 드문 오세요’라는 이런 문구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팔공산 닭갈비 집에 붙은 문구예요. 맛있다고 자주 오게 되면, 이건 자기 자아 탓인데, 자기 입맛 탓인데, ‘여기 식당 맛없다. 가지 말자’라고 발길을 끊을까 봐서, 염려가 되어서, 맛있다고 자주 오지는 말고 드문 오면 그 맛이 유지된다는 이런 이상한 광고를 제가 봤습니다. 이게 인간의 자아 문제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럼 인간은 왜 우는가. 이 점에 대해서, 현대인들의 우울증 같은 거, 이 우울증이 왜 생기느냐 하면, 울지 않아서 생겨요. 자아가 버티거든요. 우울증에 정신분석 원인을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 애도하지 않기 때문에 우울증이 생긴다는 거예요. 참는다는 거예요. 울고 싶어도 참고, 자꾸 인내하고 견디다 보니까, 내부에서 폭발 직전에 이르는 거예요.
그냥 울면 되는데. 그냥 울어버리면 남들이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자아라 하는 것은 타인을 의식하면서 형성되거든요. 나를 주시하는 남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졸장부라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다 큰 어른이 울긴 뭘 우냐는 거죠.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울어야 할 경우에도 안 울고, 남들 앞에 괜찮고 단단한 어른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자기 안에서 자아를 자꾸 조작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미 악마로 인해서 하나님이 내린 조치는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음, 가장 낮은 음이 뭐냐. 그건 애곡 소리입니다. 울음이 밑바닥에 깔려있어요. 일상생활 가운데서, 우리가 일상을 밟고 지낸다면, 모든 일상에 일어난 일이 울음 위에서, 울음을 디디면서 진행되고 있어요. ‘나는 뭐 울기 싫어서 안 우는 줄 아나?’라는 이런 거죠.
그래서 남자들은 울고 싶으면, 갑자기 술한잔 마시고 울고, 주사 부리고, 또 여자 앞에서는 뭐 괜찮은 남자인 척하다가, 여자가 떠나고 난 뒤에는 그동안 남자라고 울지 않고 참았던 그 세월이 너~~~~~~무 길어요. 남자라는 이유로 참고 있던 기간이 너무 길어요. 인간이 자기를 위선, 또는 위장한다는 것이 늘 성공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실패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우울증 걸리는 이유가 울지 않아서인 이유가 뭐냐? 자기를 애도하지 않아서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내부가 텅텅 비어 있어요. 왜 비어 있는가. 어릴 때 있던 그 즐거움과 기쁨이 점점 커가면서, 즐거움과 기쁨을 내가 원하는 대로 채워주지 않으니까, 즐겁고 행복했던 빈칸이 점점 더 허해지고 내용이 없어지는 거예요.
내용이 없어질 때, 뭐로 채우는가. 사회에서 요구하는 그 지시와 명령을 따라서 그걸 땜질하는 거예요. 위선적으로. 그 허함을 사회에서 통용되는, 그걸 어렵게 말하면 상징이라고 하는데, 그 언어와 단어, 문자로 자기가 테두리를 만들어요. 테두리를 만들어서, 타인과 계속해서 사회성을 유지하면서, 그들이 알고 있는 의미를 내 의미와 부지런히 교환하면서 자기의 허함을 그때그때 마다 스쳐 지나가듯 잊어버리고 살면 되는데,
친구도 떨어지고 아는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사회에서 하하 호호 주고받고 하면서, 기쁜 척 명랑한 척하면서, 이걸 때워야 하는데,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냥 허함이 남아 있으니까 괴로운 거예요. 교회 나오다가 안 나오는 이유가, 복음이 안 맞는다는 이건 핑계고요, 뭐냐 하면, 나의 허함을 같이 장단 맞춰서 놀 친구가 없어서가 교회 안 나오는 이유 백프로(100%)입니다.
청년이 교회 나오는데, 어떤 아가씨가 맘에 드는데, 그 아가씨가 어느 날 서울로 이사 가서 안 나왔다. 그 청년이 교회를 떠날 확률 100프로입니다. 교회는 어떻게 진리를 아느냐가 아니라, 나의 허함을 네가 대신 메워주면 계속 교회 다닐 용의가 되어 있다는 거죠. 같이 수다도 떨면서. 그것 때문에 나오는 거예요.
그에 대한 성경의 해답은 이렇습니다. 포기해라. 두 번을 포기해야 해요. 어떻게 포기해야 하느냐 하면, 사회에서 나오는 그 지시와 명령으로 내 우울증을 그런 식으로 극복하면서, ‘나는 친구 많다. 나는 아는 사람 많아. 내가 지금 말하면 도와줄 사람 많아’라는 그런 식으로 나이가 40, 50, 60, 70, 80,...이렇게 가는데, 결국 나이가 70, 80, 이렇게 넘어가면요, 이용 가치가 없는 친구는 친구가 아닙니다.
나 대신 술값 낼 돈이 없으면, 드디어 술친구가 끝나는 거예요. 회비 낼 돈 없으면 안 넣어줍니다. ‘어디서 이 거지같은 것이 여기 모임에 끼냐? 네가 여기 낄 쨉이냐?’라고 왕따시킵니다. 인간은 결국 외로워요. 성경은 2가지 포기를 하게 합니다. 첫째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친구 되기 위해서 서로 의견이 잘 맞는 거, 그 친구 자리에 율법을 집어넣는 거예요.
이제는 말씀으로 갈아타라. 왜냐 하면,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과 관련된 말씀이거든요. 하나의 언어란 말이죠. 그러나 기존 인간세계는 불바다, 불 심판 될 그 세계인 거예요. 오늘 예레미야 본문에 보면, “슬프다, 이 성이여”라고 나오잖아요. 슬픈 이유가 이 성, 이 예루살렘 성이에요. 예루살렘이라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 규정된 성이에요.
이 예루살렘의 질서, 존재함, 예루살렘에서 있던 그 사건은 하나님과 관련되어있는 겁니다. 연결되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루살렘이 불탐으로써, 이건 사람과 안 놀아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슬프다는 것이 오늘 예레미야애가에서 우는 이유입니다. 우는 이유인데, 일단은
㉮예레미야애가는 율법으로 갈아탔다는 점에서, 세상과 포기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죠.
그런데, 포기가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그건 예레미야애가 구약 말고, 신약에서 포기를 하나 더 해야 해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을 가지고 갈아 타기를 했잖아요. 그 율법을 로마서 3장에 보면, 십자가 앞에서 율법과 더불어서, 율법 안에 들어있는 자아를 십자가에서 율법도 폐기됨과 동시에 율법과 더불어 나도 같이 폐기되어야 해요. 나의 자율성이 폐기되어야 해요.
로마서 3장에 보면, 20절에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오늘 낮에 집사님이 기도하신 내용이에요. 이걸 뭐로 안다고요? 율법으로! 율법으로 안다는 거예요. 말씀으로 안다는 거예요.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철학이고 과학이고 뭐라고 말하는 ‘세포가 어떻고, 인간의 이성이 어떻고’라는 그런 거 치우고, 하나님이 규정하는 것은 뭐냐.
[인간이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 이렇게 확정되는 겁니다. 인간이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못 받아주는 대상. 그게 인간입니다. 울어도 소용없고 웃어도 소용없어요. 율법으로 갈아타야 하고,
㉯두 번째는 십자가로 갈아타야죠. 두 번 포기가 되어야 해요. 나의 영광, 나의 허함을 세상 즐거움으로 채우려는 그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고, 두 번째로는 나 자체를 십자가에서 포기해야 해요.
그래서 예레미야애가는 아직 신약이 아닙니다. 십자가 지기 전이에요. 그래서 이게 슬픈 거예요. 그러면 오늘 설교에서 해결할 점이 이제 뚜렷하게 드러났죠. 그러면 우리는 이 육신이 갖고 있던 우리 자율성을 그냥 포기하면 되잖아. 그러면 문제가 간단하게 끝났네. 이렇게 여러분이 생각하실 거예요. 그러나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제가 예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2007년도에 전라도 보성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보성 어부 살인 사건인데, 나이 60세 넘은 사공인데, 그 사공이 배를 태워주는데, 젊은 처녀 2명, 총각 2명, 그렇게 4명을 배를 태워줬는데, 배를 태워주면서 그 60 넘은 사공이 젊은 여자를 겁탈하고 싶었던 모양이죠. 그렇게 하려다가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자기가 겁탈하려는 거 들킬까 싶어서, 여자 2명, 남자 2명을 죽였어요.
그 사람이 얼마 전만 해도 우리나라 최고령 사형수였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 전에 사형당해서 죽은 게 아니고 늙어 죽었어요. 나이 80 넘어서 죽었으니까, 사건 이후에 거의 18년 지나서 늙어 죽었어요. 이게 보성 어부 연쇄살인 사건인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어부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아버지의 범죄로 상처를 받고 자살했어요.
자살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 가문에 먹칠을 했고, 가문의 치욕이다. 저런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아들로서 수치스럽다. 우리 아버지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도저히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라는 이유로 아들이 자살했어요. 이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생각해 보세요. ‘이 자아를 버리면 되지. 나는 죄인이니까’라는 말은 쉬운데, 너무나 이 세상에서 육적으로 얽히고설킨 관계가 너무 복잡해요.
‘뭐, 친구도 안 만나고, 다 끊어내면 끊어내지’라고 하는데, 만약에 끊어낼 수 없는 관계라면요? 끊어낼 수 없는 대표적인 관계가 자식입니다. 자식이 뭐냐는 것은 이겁니다. 자식이 생기기 전에는 아버지가 자아가 있어요. 그런데 자식이 생겨버리면, 아버지의 자아가 어디로 이동하느냐 하면, 자식에게 이동해요. 그 사실을 자식은 몰라요.
아버지는 다른 사람 있을 때는 체면과 위신과 자아가 그렇게 강하더니만, 내 앞에서는 아버지라고 그렇게 말로는 위세 떠는데, 뒤에 가서는 ‘여보, 제가 지금 뭐 달라고 하는가? 뭐? 자가 집을 하나 사달라고 하나? 줘라~아파트 하나 사줘라~’라고 하고, 자식 앞에서는 ‘자식이 다 커서, 독립을 해야지. 이게 무슨 짓이고!’라고 이러다가, 자식 허약하게 안 키운다고 큰소리치다가, 나름 아버지의 배포 있고 멋있음을 보여주다가, 뒤에 가서는, ‘자식이 좀 어렵다면서? 당신이 좀 해 줘라~좀 도와줘라’라고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어요. 왜? 자식이 잘되는 것이, 아버지의 자아가 잘 되는 것의 확장이기 때문에. 자식을 사랑하지는 않아요. 늘어진 자아가 자식이기 때문에. 그럼, 그런 마음이 있으면 집도 사주고 다 할 건데, 왜 안 해주느냐. 문제는 돈이 없어요. 아버지도 지금 자기 노후 계산해야 하고, 요즘은 백 세까지 사는데, 돈을 계산해 보니 자식에게 줄 돈이 없어요.
돈은 없고, 자식 앞에서 자기 돈 없다는 소리는 못 하고, 소극적으로 이야기해요. ‘나는 몸 아파도 너에게 신세 안 진다’라고 하죠. 솔직하게 ‘나 돈 없다’라고 이러면 될 텐데, 끝까지 큰소리치는 이유가 자식 앞에서, 자식이 물려받은 내 자아가 좀 더 멋있는 자아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자식 앞에서 큰소리치는 거예요. 실제로는 자식에게 다 기대면서.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 것이 아니고, 자식이 아버지를 낳는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마지막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자식을 낳으면서 아버지는 자기 자신의 자아를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자기는 자식을 바라보면서 어떤 해방감을 얻는 거예요. 자식 잘되면 나는 늙어 죽어도, 몸 아파도 괜찮아. 자식 잘되면 나는 아무렇게 되어도 괜찮아.
그런데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바로의 맏이, 그 동네의 맏이 다 죽여버립니다. 이게 인간이 육으로써 구원될 그 모든 수법을 주께서는 사전에 간파하시고, 차라리 나를 죽이면 좋겠는데, 나를 죽이시는 것이 아니고 맏이를 죽이잖아요. 보성 어부 살인 사건에서도 아버지를 대신해서 맏이가 우리 집안 먹칠했다고, 못난 아버지 뒀다고 자식이 죽잖아요. 이게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아를 버린다? 그게 성경에 나왔다고 해서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첫째 포기도 안 되고, 둘째 포기도 안 되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해답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했잖아요. 오늘날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마리아 같은 그러한 대상으로서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잉태하고 우리의 자율성과 관계없이 일방적인 주님의 자율성으로 우리 육체를 늙어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커가고,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네가 악마로부터 온 그 자아 말고, 내(주님)가 아버지로부터 온 그 자아로 말미암아 너의 자아를 기꺼이 물리치고, 내 자율성, 내 뜻에 의해서 네가 구원되기로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을 하셨다는 겁니다. 네 결심, 네 믿음, 네 소망, 네 사랑, 하나님께서 그거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재 네 속에서 네가 설명하지 않는 그 무엇이 너에게 락을 걸었어요. 락(자물쇠).
내가 아무리 세상이 좋고 아무리 돈이 좋지만, 뭔가 주님의 십자가로부터 발을 못 빼게 하는 능력은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앉아서 성령께서 하나의 잉태한 아이처럼 자라나고 있는 그 결과로써 우리가 하나의 원인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의 결과가 되는 거죠. 주님이 원인이 되시고 우리는 하나의 결과로, 순서가 바뀌는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그 말씀의 실현성이 우리를 사용해서 키워내고 있는 겁니다.
슬픈 거 맞습니다. 맞아요. 바닥은 슬픈데, 슬픈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로 인하여 평안과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세상을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큰소리친다고 신앙이 아니고 내 뜻대로 신앙생활 한다고 신앙이 아니라, 모든 주도권과 모든 이끄시는 것은 우리 속에 계시는 주님의 일방적인 활동인 것을 이제는 잊지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