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대칭적 존재

아빠와 함께 2025. 12. 21. 19:42

대칭적 존재 

2025년 12월 2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2:28-34

52:28 느부갓네살의 사로잡아 옮긴 백성이 이러하니라 제칠년에 유다인이 삼천이십삼이요

52:29 느부갓네살의 십팔년에 예루살렘에서 사로잡아 옮긴 자가 팔백삼십이 인이요

52:30 느부갓네살의 이십삼년에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사로잡아 옮긴 유다인이 칠백사십오 인이니 그 총수가 사천육백 인이었더라

52:31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간지 삼십칠년 곧 바렙론 왕 에윌므로닥의 즉위 원년 십이월 이십오일에 그가 유다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52:32 그에게 선히 말하고 그의 위를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위보다 높이고

52:33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으며

52:34 그의 쓸 것은 날마다 바벨론 왕에게서 받는 정수가 있어서 죽는 날까지 곧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옮겼다’는 말을 통해 하나님의 개입과 의도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자아를 고체가 아니라 액체로 바꾸십니다. 반면에 일반 인간들은 오로지 자기를 버티고 자신이 영원히 살 자리를 자기가 굳게 정하겠다고 고집부립니다. 이렇게 되면 그 인간이 끝까지 잘난 척해야 합니다.

실제로 타인보다 못났어도 스스로에게 자만심을 유지하고자 갖은 용을 씁니다. “지금은 남들보다 못하지만 언제가는 내가 선두에 설 날이 올거야”라고 야심을 키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야긴 왕은 별로 내세울 업적이 없는 왕입니다. 있으나마나 하는 왕입니다. 간단히 말해 무능력한 왕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레미야에 예언서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인물로 나옵니다. 똑똑한 삼촌 시드기야는 비참하게 죽습니다. 하지만 조차 여호야긴은 비록 잡혀 갈 때는 죄수로 잡혀갔지만 말년에는 다른 부속왕들 못지 않고 더 대우받은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강에서 다슬기를 잡아 된장국 속에 넣으면 풍미를 더하겠지요.

하지만 다슬기를 잡고 도로 다슬기를 살던 맑은 물 속으로 돌려주면 어떨까요? 성도의 팔자는 이미 이 땅에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확정났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뛰워주신 흐름이 있습니다. 그 흐름을 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자아가 고체가 아니라 액체가 되게 하십니다. 즉 담근 그릇에 따라 항상 형태가 수동적으로 조성되는 액체 말입니다. 더구나 앞으로의 흐름에 대해서 전혀 예측못하면서 그 상황을 담아야 하는 액체가 되어서 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천국 백성 만들기 프로젝트는 인간의 의견을 참조하지 않고 일방적입니다.

인간들은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서 진리나 정답을 쟁취하려고 합니다. 마치 사람과 사람 끼리 스무 고개하면서 정답에 접근해가는 방식으로 하나님에게도 실시하려고 합니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여타의 많은 성경에 나오는 개념에 대해서 보다 분명히 습득하는데 수월하도록 집요하게 파고들어 갑니다.

예를 들면, “글자는 두자, 다리는 길고 색깔은 붉그스럼해 뭘까?”라는 제시로부터 시작하는 스무 고개 게임이 ‘대게’라는 정답에서 멈추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이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질문자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선행한다는 선입감을 갖고 질문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니요!”라고 답변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를 위해’ 질문을 할 그 어떤 자격도 없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인간이란 선행하는 말씀을 위해 한시적으로 출몰된 존재에 불과합니다. 사태 전체를 파악할 능력이 없기에 당연히 질문도 전체도 포함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요? 마땅히 원래 인간이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모든 것이 허망하고 소용없고 아무 것도 아님만 남무하게 그곳으로 말입니다.

동시에 그 누구도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세계입니다. 사람이 등산을 하면서 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되면 점점 더 자신은 영웅이 됩니다. 아무도 자신이 오른 경지에 이르지 못할 때, 자신의 능력에 한껏 자부심을 느끼게 됩니다. 반면에 계곡으로 내려가 보세요. 거기에는 자신을 독보적으로 빛낼 수 있는 여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모인 동식물 전부가 곧 쓰레기나 퇴비가 될 지경이기 때문입니다. ‘나 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 자리에서 같이 썩어가는 공동운명체가 됩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려웠을 때 도와주었던 은혜를 잊거나 벗어나면 아니됩니다. 사업이 어려울 때, 도와준 것을 생각  안하고 그 돈을 회수할 때의 섭섭함에 상대를 원망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본래의 자리를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자체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을 안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과거에 써먹을 방법을 다시금 효과없는 것으로 드러내는 상황을 허락하십니다. 한때 하나님에 대해서 고맙고 감사하게 여기다가도 새로운 상황 앞에서 얼마든지 하나님께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거나 믿으면 안됩니다. 늘 새로운 상황 앞에서 보다 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계기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에서 ‘은혜로 남은 자’에 해당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5-6)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구원, 곧 오로지 말씀 공로만으로 구원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의 모든 행함을 부정하십니다. 여기에 관한 말씀이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6-18) 반면에 불신자들은 항상 ‘홀로’로 따로 염두에 두고 실익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불신자는 누구 은혜에 길게 연계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서 단절되었음을 그 행위를 통해서 나타나 보이게 됩니다. “나 여기 있으니 신이여 도와주소서”가 바로 전형적인 종교입니다. 이것은 신과 흥정하고 거래하는 겁니다. 종교는 갖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 대신 주님의 그림자로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항상 우리의 원래 자리를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5강-예레미야 52장 28~34절(대칭적 존재)25122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2장 28~34절입니다. 구약성경 1143페이지입니다.

“느부갓네살의 사로잡아 옮긴 백성이 이러하니라 제 칠년에 유다인이 삼천 이십 삼이요, 느부갓네살의 십 팔년에 예루살렘에서 사로잡아 옮긴 자가 팔백 삼십 이인이요, 느부갓네살의 이십 삼년에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사로잡아 옮긴 유다인이 칠백 사십 오인이니 그 총수가 사천 육백인이었더라,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간지 삼십 칠년 곧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즉위 원년 십이월 이십 오일에 그가 유다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그에게 선히 말하고 그의 위를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으며, 그의 쓸 것은 날마다 바벨론 왕에게서 받는 정수가 있어서 죽는 날까지 곧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아멘.

옮겨진다는 것은 흐름입니다. 고정된 것이 아니고 흐름. 그러니까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내가 노력한 것에 터 잡고 사는 것이 아니고, 자꾸 이동하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 겁니다. 흘러가는데, 그 흐르는 물 역할을 누가 하느냐. 이방인, 불신자들의 세계가 그 강물 역할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강에서, 추운 날 다슬기를 잡았다. 그 다슬기를 잡아서 된장국에 몇 개 넣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깨끗한 물에 사는 다슬기를 다시 강물에다가 돌려줘야 하겠습니까?

강물에다가 돌려줘야 하죠. 된장 국물은 그것이 사는 동네가 아니잖아요. 원래 살던 것은 강물이잖아요. 타이타닉(Titanic)이라는 영화 마지막에 보게 되면, 어떤 할머니가 있는데, 남편은 먼저 죽고 자기는 살아남아서 보니까 자기 옷 주머니에 보석 하나 건졌는데, 우리 같으면 이 보석을 팔아서, ‘죽은 남편이 나에게 선물 줬구나’라고 생각하고, 연금이라 생각하고 팔아서 혼자 호의호식할 텐데, 그 할머니는 보석을, 이미 다 구출됐는데, 그걸 바닷가에 다시 던져버려요.

‘이거 당신 거잖아. 당신이 없는데 이 보석이 나에게 무슨 위로가 될까’라고 던져버리죠. 만약에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보석이라면, 실제로 성경에도 진주나 보석으로 표현이 되고, 눈동자처럼 지킨다고 되어 있어요, 우리가 보석이라면, 우리는 어디를 가야 하느냐 하면, 천국 간다고 껄떡대지 말고, 다시 우리가 살던 곳으로 되돌려져야 해요.

이 코스가, 이 절차가, 하나님이지만 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주님께서 경유했던 그 코스입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보석은, 하늘에 수많은 천사가 보석이 아니에요. 주님 제3의 효과, 주님의 공로가 도달한 사람, 주님의 희생이 담겨있는 그릇, 바로 그 대상자가 하늘나라의 보석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이 더러운 세상, 이 세상 속에 그냥 있으면, 주께서 와서 우리를 데려가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구원받겠다고 나댄다고 해서 구원해 주는 게 아니에요. 데려가는 식이예요. 그럴 때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과 생각이 똑같은가를 주님의 십자가 빛 앞에서 제대로 자기 자신을 아는 자만이 영원토록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 고모들도 많고 삼촌들도 많은데, 막내 삼촌이 사업한다고 돈 좀 있는 고모들에게 돈을 빌려서 다 날렸어요. 다 날렸는데, 이 똑똑한 고모가 가만히 있을 고모가 아니죠. 담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고모는 뭘 봤느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땅을 남긴 것이 있는데, 땅 지분을 자식 수 대로 N 분에 1로 나누잖아요.

나누는데 그때 이제 고모가 치고 들어갑니다. “너 나한테 돈 빌린 거 있잖아. 너에게 돌아갈 지분을 내게 돌리라”라고 해서 그 땅값을 다 고모가 가져갔어요. 제 3자가 보기에는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산 한 푼도 못 받고, 사업 망했다는 죄 때문에 돈 한 푼도 못 받고 누나한테 다 빼앗긴 그 삼촌과 막내 숙모가 동성이 중간 숙모 찾아와서, 엉엉 울면서 자기 누나가 너무 심하다고,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한 거죠.

중간에 다리 좀 놔서, 얼마라도 달라고 해달라고 왔을 때, 그 숙모도 참 똑똑한 사람들인데,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네가 빌려 갈 때의 고마움을 왜 잊어버렸느냐?’ 빌려 갈 때의 고마움은 잊어버리고, ‘이건 내 몫이다’라고 자기 몫을 찾으려고 하니까 여기 와서 이제 원망하고, 작은 누나를 그렇게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러고 나서는 돈 문제 때문에 삐져서 그다음부터 둘이 말도 안 해요.

숙모가 중간에서 하는 말이, ‘처음 줄 때, 그 고마움을 잊어버리니까 이런 사달 났잖아. 그러니까 그거 받을 생각하지 마라’라고 한 거죠. 그러니까 삼촌 말은 뭐냐? ‘같은 형제 간인데 동생 어려울 때 좀 도와주면 어떠냐. 그런데 그걸 그래 도와줄 때, 동생이 자기 돈 다 날렸다고 아버지 유산까지 몽땅 다 가져가고, 형제간에 어쩜 이렇게 야박하냐’라는 식으로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숙모님이 참 현명하죠. 사람은 어떤 사건과 계기를 통해서 달라져야 해요. 어떻게 달라지느냐. 고체 인간에서 액체 인간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사람이 물결은 거센데, 어떤 방향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떤 방향으로 쫙 내려가게 하시는데, 거기서 홀로 버티겠다고 하는 것은 이거는 사태 파악을 못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을 모르는 거예요.

저는 등산하는 사람이 잘 이해가 안 되는 게, 얼마나 철이 없는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요.
등산을 이렇게 해보면, 높은 곳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혼자 영웅이 돼요. ‘봐 다 안 따라오잖아. 봐, 나 혼자 남았잖아’라고 이렇게 영웅이 된다고요. 근데 등산 말고, 그 힘든 등산을 그렇게 해서 괜히 자만심을 가질 게 아니라, 계곡으로 내려가야 해요.

계곡 가게 되면 거기에 누가 있느냐. 낙엽도 있지요, 풀벌레도 있지요, 가끔은 모기도 나오지요, 그들의 그 무의미함과 합체가 돼요. 풀벌레 너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계곡 속에 나도 같이 합세해 보니까, 함께 재가 될 무의미에 같이 묻히게 돼요. 너나 나나 이 계곡에서는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이고, 누가 큰소리치고, 누가 빌빌거리고, 누가 자랑하고, 그게 일체 구분이 없이 같이 계곡에서는, 그 낮은 곳에서는 모든 인간은 똑같습니다.

신세가 똑같아요. 주님께서 그 높은 하늘나라에서 낮은 곳에 오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바로 인간들은 자꾸 마귀 들려서 높은 곳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이 방향을 낮은 곳으로 가서 너를 새로운 천국 백성으로 만들어내겠다는 작전, 그 작전에 여기 예레미야를 끝내면서, 오늘이 예레미야 마지막이에요, 52장 끝내면서 오늘 본문이 있는 겁니다.

본문 28절에 “느부갓네살의 사로잡아 옮긴 백성”이라고 이렇게 옮겼다는 것은, 자기가 원해서 이사 갔다는 것이 아니고 대세의 흐름, 하나님 약속의 흐름, 자기 백성들을 거기다가 흐름 따라 실어서, 느부갓네살이 바벨론 나라, 이방 민족과 같이 합세해서 흘러가게 했습니다. 흘러가게 할 때, 이들이 얼마나 답답하고 참 아쉽고 절망적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흐름 자체가 주께서 의도해서 그렇다는 것이, 예레미야가 자기 백성에게 미리 언급한 하나님 말씀의 내용입니다. “흐르는 대로, 그냥 세월 가는 대로, 그냥 거기에서 그 물결을 타고, 그냥 살아. 너 그만한 믿음 없나? 이런 사건을 일으키고, 이런 사단을 일으킨 것도 바로 주께서 이렇게 일으켰다면, 마지막 마무리도 무슨 계획이 있겠지. 그 계획에 순종하라”라는 것이 주께서 이스라엘 자기 백성에게 준 지혜입니다.

그 지혜를 우리가 받아들여야 해요. 그 지혜 중 하나가 뭐냐 하면은 여기에 여호야긴이라는 왕이 등장해요. 31절에 보면,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지 삼십칠 년”이라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기야 뭐 형제 삼촌도 있고, 자기 형도 있고, 이렇게 왕이 되고 했지만, 여호야긴, 이 사람의 특징은 그야말로 무능한 바보입니다.

바보 왕이에요. 이게 재주가 없어요. 재주가 없으니까 자체적으로 중량이 안 나갑니다. 뭔가 좀 똑똑한 척하면서, 밑에 각료들 불러서 생중계하면서, “야! 너, 인천공항 공사 사장!” 이런 거 하고, “너 책갈피에 달러 숨겨 반출하는 수법 알려지면, 이제 어떻게 이거 잡아낼 거야?”라고 하고, 무슨 환단고기(서적), 고기가 무슨 그런 고기가 있는지.

아무튼 잘난 체하는 것과 정반대가 여호야긴이에요. 분명히 있는데, 이 있으나 마나 한, 분명히 뭔가 지도자 자격으로 앉았는데, 있으나 마나예요. 본인이 아무 일도 안 해요. 그리고 못해요. 아니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이게 신자 아닙니까? 신자라는 게 똑똑하면 안 됩니다. 똑똑하면 이게 액체가 아니고 고체가 되고, 자아가 딱딱해지면서 고체가 되고, 내가 한 성과를 맨날 계산한다고요.

실제로 물리학에서 그런 예가 있습니다. 물리학자들이 인간 물질의 근본이 뭔가를 계속 파고들고, 파고들고 하다 보니까 원자가 나오고, 물리학자들이 원자에서 스톱(Stop)할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원자는 뭐로 돼 있는가를 조사해 보니까 원자핵으로 돼 있고, 바깥에는 전자가 돈다고 하다가, 또 전자가 도는 게 아니고 이렇게 그냥 구름처럼 있다고 하다가, 그것도 그냥 구름처럼 있는 게 아니고 확률적으로 있다고, 막 이런 식으로 계속 연구를 해 왔단 말이죠.

폴 디랙( Paul Adrien Maurice Dirac, 1902.8.8.~1984.10.20. 영국 물리학자) 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디랙이라는 사람이 뭘 생각했느냐 하면은, 물론 이전부터 학자들도 그걸 생각했는데, 그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핵은 플러스(+) 전기를 띠고 있고 바깥에는 전자가 있다는 말이죠. 이 말은, 핵은 플러스고 바깥에는 전자가 있다. 그다음에 그들이 생각한 건, ‘전자는 어디서 나왔지?’ 이게 이제 그들의 고민거리가 된 거예요.

전자가 어디서 나왔느냐. 그래서 그들의 아이디어는 뭐냐? 전자는 원래 핵에 있었는데, 핵에 플러스(+)를 견디다 못해 튕겨서 전자가 되었다는 이론을 개시했어요. 개시했는데, 그 개시를 하면서 동원된 게 뭐냐 하면, 없는데, 전자라는 것은 없어야 하는데, 어디서 나왔는지라는 것에서부터 아이디어를 생각해서, 허수(虛數, imaginary number)라는 것을 이용했어요.

뭔가 물질이 있으면 숫자로 카운트가 되는데, 허수라 하는 것은 대상이 없는데도 기호로, ‘i’라는 기호로 허수를 이렇게 매긴 겁니다. 없는 데서 새로 생겼다는 이론을 끄집어낸 거예요. 없는 데서. 그럼 없는 데서 새로 생겼다면, 있는 것은 어디서 생겼는가? 없는 데서 나왔다는 거예요. 현재, 현대 이론의 정설이 ‘없는 데서 나왔다’라는 거죠. 그러면 없는 게 뭐냐? 그건 물질이 아닌 반물질(反物質, antimatter)이다.

그 반물질이 바로 디랙이라는 사람이 창안한 거예요. 반물질에서. 이거는 뭐 과학인지 종교인지 분간도 안 돼요. 없는 데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동안 하나님, 하나님 해놓고는 맨날 이방 나라 우상 섬겼던 이유가, 하나님은 없는 데서 이스라엘을 만든 반면에, 다른 신들은 현재 있게 된 나와 하나님과 흥정하고 거래를 하는 식으로, 종교를 그렇게 구성해 온 거예요.

나 여기 있다. 나의 하나님 저기 있지. ‘하나님, 여기 있는 나, 어떻게 도와주실 거죠? 이렇게 도와주시면, 이렇게 뇌물을 바치고 예물을 바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도와주시면, 제가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이렇게 해서 종교를 만드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내가 먼저 있고, 하나님은 그 있는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거래한 거죠.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내가 있기 전에 말씀이 먼저 있고, 말씀 좋으라고 후차적으로 나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 1장 이야기입니다. 사고방식이 얼마나 정반대인지 몰라요. 정반대예요. 있고 없고는, 주님이 있을 때 있었고 이 땅에 없을 때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잠시나마 우리로 하여금,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죽이고, 죽은 데서 다시 살리는 그런 식으로 주의 나라에 합류시킨다.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너무 명쾌하고 간단하죠. 이렇게 명쾌하고 간단한데, 사람들이 이걸 거부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은, 내가 여기 있는데, 그것도 능력자로 있는데, 내가 내 인생 꾸려갈 수 있는데, 가만히 있는 나를 왜 개무시하느냐는 말이죠. ‘하나님이면 다야? 왜 나를 무시하느냐. 내가 살고 죽고는 내 문제지, 이건 하나님이 도와주면 되지, 어디까지나 살고 죽는 이건 내 문제입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거기에 맞춰서 등장한 게 종교라는 겁니다. 그 종교 생활하지 마세요. 굉장히 수상해요.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은 바로 내가 잘되기 위해서 하는 게 종교 생활이에요. 나를 좀 없애주면 좋겠다는 이건 종교 생활이 아니고 복음생활이고. 쉬운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할머니하고 손자 손녀하고 차 타고 오면서 스무고개를 하는데, 할머니가 먼저 문제를 내요.

“두 글자다. 두 글자고 다리가 많다”라고 그러니까 손녀가 “색깔은?” “색깔은 붉뚝거리하다” 새로운 단어가 나왔어요. ‘붉뚝거리하다’ 도저히 이게 뭔지, 독일어로 또는 다른 영어로 번역이 뭔지, AI도 손들 판이에요. 붉뚝거리하다. 이래저래 해서, 결국은 20 고개가 아니라 50 고개 만에 드디어, 오징어도 나오고 뭐 다른 것들도 나왔는데, 답은 대게였습니다.

대게 하니까 붉뚝거리하다는 게 맞지요. 자, 사람들의 종교가 뭐냐. ‘천국이 무엇입니까? 지옥은 있기는 있습니까? 과연 천국이 있으면 우리는 어떻게 생활하고, 어떤 사람이 갑니까?’라는 질문을 인간 쪽에서 먼저 해요. 왜냐하면 중요한 것이 내가 중요하니까. 내가 중요하고 말씀은 수단에 불과하니까. 내가 여기 있고 수단으로 제시하는 그 말씀을 내가 파악하고 이해하게 되면, 제일 중요한 내가 그 말씀과 결합해서 천국 간다.

이게 바로 종교잖아요. 종교 인간 쪽에서는 스무고개를 하는 거예요. 자꾸 묻는 겁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여호야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능하기 짝이 없어. 그거 뭐 내세울 것도, 할 것도 없어. 그런데 오늘 예레미야에 보니까 이 사람은 분명히 이거는 사형당하는데, 자기 삼촌, 시드기야는 죽었거든요. 너무 까불었어요. 너무 아는 체를 많이 했어요. 아는 체.

꼭 누구를 보고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만 너무 아는 척을 많이 해서, 자기 전공 분야도 아닌데 아는 척을 했어. 그런데 이 여호야긴은 바보같이 그냥 잡혀 왔어요. 그냥 잡혀 왔는데 나중에, 여기 32절에 “그에게 선히 말하고 그의 위를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으며, 그의 쓸 것은 날마다 바벨론 왕에게서 받는 정수가 있어서 죽는 날까지 곧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예레미야의 예언 끝! 이래요. 이렇게 예레미야 예언이 끝나요. 쪼다고 바보 같은데, 진짜 어리숙하고 바보인데, 무능하기 짝이 없어요. 이게 뭐냐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은 자의 전형적인 모델이에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똑똑하지도 않아요. 이걸 사람들이 사전에 알더라도, ‘그래, 나 바보 될래’라고 이렇게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도 똑똑한 만큼은 더 대우받겠지’라는 이러한 논리가 있거든요. 인간들이 스무고개를 자꾸 해내는데, 주님께서의 스무고개는 이렇습니다. ‘천국은 아름답습니까?’라고 인간들이 먼저 시작했어요. 그러면 주님은, “아니” ‘천국은 살기 좋습니까?’ “아니” ‘그러면 천국은 살기 나쁩니까?’ “아니” ‘그러면 천국은 나쁜 곳입니까?’ “아니”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먼저 하나님께 궁금해서 내뱉은 모든 질문에 대해서 준비된 하나님의 답변은 하나밖에 없어요.

너에게서 나왔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나는 거기에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거다. ‘그러면 주님, 왜 우리가 하는 말은 거부하고 아니라 합니까?’라고 하면, 그게 로마서에 나옵니다. 로마서에 하나님의 남은 자는 오직 은혜로만 남아있기 때문에. 은혜로만. 네가 달음박질하는 것도 아니고, 열심 낸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네가 노력한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고, 오직 불쌍히 여김으로써만 구원받는다는 이거, 로마서 9장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로마서 9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9장 16절뿐만 아니고, 여기에 로마서 11장 5~6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은혜도 받고, 고맙다고 행위도 하면 되지 않습니까?’라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은 대인 관계에서,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잘해주면 잘해 드리겠습니다’라는 이거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인간들의 스무고개에서 나왔던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받은 만큼 행위로 갚아주면 되잖아요’라는 이게 하늘나라에서는 안 통한다고요. 끝으로, 성도는 그러면 어떤 식으로 살아가게 됩니까? 어떤 식으로 액체가 되어 살아가게 됩니까? 액체라고 하는 것은 그릇에 따라서 모양새가 다 다르죠.

그릇에 따라 다 다릅니다. 그러면 그릇이 바뀌면, 새로운 환경으로 바뀌면, 새로운 사건이 찾아오게 되면, 성도는 반복적으로 뭘 느끼느냐 하면은, ‘내가 참으로 무능하구나’라는 새로운 사태와 사건 앞에서, 내가 할 게 없고 무능하기 짝이 없고 내가 지금껏 살아온 경험이 지금 새로운 상황에서는 전혀 먹히지 않는 사건들을 주께서 미리 계속 준비하면서, 우리들을 이 세상 끝내게 하시는 겁니다.

‘이거는 내가 할 수 있겠다’라는 이런 사건을 성도한테는 주지 않습니다. 한 번 쪼다는 영원한 쪼다, 한 번 바보는 영원한 바보, 갈수록 나로 하여금 무능자로 만들어서 은혜로만 가득 채우게 만드는 거, 이것이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겁니다. 결국은 아브라함에게도 똑같은 이야기예요. 4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이 유능하냐 무능하냐를 묻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을 대체할 인물을 아브라함 후손의 이름으로, 아브라함과 먼, 이천 년 후에 이 땅에 보내겠다는 것을, 그걸 근거로 해서 아브라함에게 선물로 찾아온 거예요. 이 선물의 출처가 너의 행함이 아니고, 이천 년 후에 오실 예수님에게 일어날 그 사건의 여파가 너에게 임하게 되면, 너희는 그분의 공로로, 그분의 은혜로 네가 믿음의 조상이 된다는 거야.

그게 바로 연결성이에요. 그래서 끝으로 어려운 말 하고 마치겠습니다. 성도는 절대로 비대칭성이 아니에요. 성도는 못난 나와 더불어 대칭된 너무나 완벽하고 절대적인 분, 예수님과 늘 하나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붙어 있는 대칭성을 유지합니다. 불신자는 자기밖에 없어요.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릅니다. 비대칭성이에요. 뭐 삼촌, 고모, 지밖에 몰라요. 결국 홀로 살아요.

솔로(Solo)입니다. 이 차이. 여러분도 우리 자신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늘 누구의 그림자로 졸졸 따라다니는 못난이냐. 그러면 이미 그 사람은 천국 사람으로서 주께서 그 액체 인간으로서 어디에 가더라도 모양이 늘 바뀔 준비를 하세요. 어차피 못 난 거, 모양 바뀌어도 뭐 잘난 거 안 되니까, 어떤 상황이든 무능한 자로 유지해 주신다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대칭적인 존재가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난 척하는 게 문제였습니다. 결국은 혼자 영웅 되고자 하는 이 마귀의 신보가 우리 인생을 장악했습니다. 주께서 은혜가 찾아옴으로써, 애초부터 우리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이제는 우리의 마음속에 젖어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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